설교의 허구
by 전재훈2023-09-18

설교에는 세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기록된 성경, 설교하는 목사, 그리고 설교를 듣는 회중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기록한 책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은 하나님이 직접 쓰신 책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면 죽습니다. 성경의 기록자들은 하나님을 죽지 않을 만큼만 경험했습니다. ‘미스터리’는 ‘입을 다물다’라는 말에서 기원한 말입니다.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을 때 ‘미스터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 경험 너머에 계신 분입니다. 성경 기록자들은 하나님을 경험하되 말을 할 수 있을 만큼만 경험한 것입니다. 이런 경험은 하나님에 대한 단편적 경험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경험한 다양한 사람들의 기록을 모아놓은 책입니다. 


‘백문이불여일견’입니다. 본 것을 백 번 들어도 그 사람의 경험을 온전히 알아듣지 못합니다. 말은 뜻과 톤과 의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세 가지를 정확히 들어야 말을 그나마 제대로 이해하게 됩니다. 안 그러면 자칫 야단치는 말을 칭찬하는 말로 오해하게 됩니다. 


성경은 아쉽게도 녹음된 책이 아니라 기록된 책입니다. 우리는 톤과 의도가 사라진 뜻만 있는 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경험을 글을 통해 바르게 전달받기가 매우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마저도 그 성경의 원본이 없습니다. 사본만 있을 뿐입니다. 사본은 원본과 다른 점이 분명 존재합니다. 이는 오해의 소지가 분명 존재한다는 의미입니다. 또 그마저도 설교자는 사본을 보고 설교를 준비하지 않습니다. 이 시대 설교자는 역본을 거치고 개역을 거친 우리말로 기록된 한글 성경을 보면서 준비합니다. 그나마도 개역개정4판을 기본 텍스트로 합니다. 개역하고 개정하기를 4번이나 더 한 텍스트라는 말입니다. 원본에서 멀어져도 한 참 멀어진 글이 되는 셈입니다. 


설교는 목사가 합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를 기준으로 볼 때, 나는 원어의 의미를 모릅니다. 원어가 쓰이던 당시의 문화나 생각, 가치관, 역사관, 세계관, 이 모든 것이 다른 사람입니다. 같은 말도 어느 문화권에서 쓰이느냐에 따라 뜻이 천차만별이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나는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과 다른 인식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습니다. 배경 지식이 다르고 이해하는 방법도 다릅니다. 더군다나 200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고 지구 반대편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기와 건기를 살던 사람들과 사계절을 사는 사람의 생각이 비슷할 수 없습니다. 저녁이 되니 새 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쓴 책을 아침이 되니 새 날이라고 생각하는 내가 성경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설교해도 안 믿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같은 공간과 문화와 언어와 역사를 가지셨으며 회중을 완벽하게 이해하시고 모든 이적과 기사를 행하실 수 있으며 사람의 마음과 생각까지도 읽으셨던 분이 하는 설교에서도 안 믿는 사람들이 기적처럼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사도라 부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에 대한 물리적 기억이 있는 동시대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도들이 설교할 때가 되면 예수님이 하셨을 때 보다 더 많은 사람이 안 믿습니다. 교부들은 사도들의 제자로서 같은 문화권 속에서 배우고 익힌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설교는 안 믿는 사람이 더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그보다 더 훨씬 후대의 사람입니다. 내가 설교할 때 믿는 자가 있다면 그것이 오히려 기적입니다. 


설교는 회중에게 하는 행위입니다. 회중의 듣기 실력에 따라 설교는 얼마든지 오해와 곡해의 소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더욱이 회중의 태도에 따라 설교의 전달 능력은 현저한 차이를 보입니다. 설교 시간에 수면 보충하는 사람들, 빨리 끝나기를 소망하는 사람들, 그저 재밌기를 원하는 사람들, 이들이 회중이라면 설교는 그 능력을 상실하고 맙니다. 


회중의 상태도 문제가 됩니다. 지식수준의 차이, 나이의 차이, 경험의 차이, 생활수준의 차이, 학력의 차이가 매우 큰 집단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엄청난 시간의, 공간의, 역사의, 능력의 갭을 가진 내가 원어 성경도 아니고 한글 성경 개역개정 4판을 가지고 다양한 욕구와 스팩을 가진 회중에게 행하는 이야기가 설교인 것입니다. 


최초 하나님을 경험한 성경 기록자들의 하나님 경험을 100이라고 한다면 나를 통해 회중이 인식하게 될 하나님 경험은 0.000000001쯤도 되지 못할 것입니다. 더욱이 최초 기록자들 역시 하나님을 100퍼센트 경험한 것이 아닐 터이니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설교를 통해 회중이 갖게 될 하나님은 몇 퍼센트일 것 같으십니까?


아주 아주 희미하게나마 갖게 된 하나님 인식이 그마저도 오해나 곡해나 왜곡된 하나님 인식일 가능성은 거의 무한대에 가깝습니다. 


인간인 목사가 인간이 기록하고 베껴 쓰고 번역하고 개정한 성경을 가지고 인간들에게 행한 설교에 그 어떤 은혜나 믿음을 기대한다면 그건 죄악입니다. 


은혜나 믿음은 사람의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에 있지 않습니다. 설교자의 수고나 학력이나 권위는 배설물에 불과합니다. 


설교를 통해 성도의 변화를 기대한다면 교만입니다. 


누가 만약 내 설교에 은혜를 받거나 믿음이 생기거나 하나님을 좀 더 알게 된다면 그건 둘 중 하나입니다. 왜곡된 은혜나 믿음일 가능성이 가장 크고, 참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어진 것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냥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린도전서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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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전재훈

전재훈 목사는 서울장신대와 장로회신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현재 발안예향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오히려 위로팀 켈러를 읽는 중입니다(공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