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를 깨운 종(鐘)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전주서문교회

by 이종전 · 장명근2023-09-16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대한 강토에 선 첫 세대 교회들을 찾아 떠납니다. 그 이야기들에서 우리 신앙의 근원과 원형을 찾아보려 합니다.

남장로교회 선교부가 1892년에 조선 선교를 위해서 입국한 후 사실상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장로교회 선교사들의 모임을 재건한 것이 장로교공의회(Presbyterian Council)인데, 이 공의회에서 지역 분할 선교 정책을 결정했고, 이 정책을 감리교회 선교부와 협약을 맺고 시행하기로 했다. 다른 교파 선교부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는 소수였기에 굳이 이 정책에 동참하지 않았다. 이 결정에 따라서 제주도를 포함한 호남지역의 선교는 남장로교회에 할당되었다.


따라서 남장로교회 선교사들은 호남지역 선교 거점을 확보하기 위한 시도를 하게 되는데, 1893년 늦은 봄 레이놀즈(William Davis Reynolds)가 조선어 선생인 정해원을 전주에 파송해 은송리에 주택을 마련하여 예배 처소와 거처를 겸하는 공간을 만들었다. 이것이 전주서문교회의 출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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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9월에는 전킨(William McCleery Junkin)과 테이트(Lewis B. Tate)가 전북 도청소재지인 전주를 조랑말을 타고 방문하였다. 그들은 전주가 선교 거점 도시로서의 요건을 갖추었다고 판단하고, 그해 11월에 다시 전주를 방문해서 두 주를 보냈다. 


이듬해인 1894년에는 루이스 테이트의 여동생 매티 테이트(Mattie S. Tate)가 가마를 타고 전주를 방문했다. 전주에 도착한 그녀는 한옥을 한 채 매입해 거주하면서 선교의 길을 모색하였다. 그녀의 이러한 행동은 당시로서는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외국 사람들을 보지도 못했던 조선 사람들이 이 여인의 생김새는 물론 모든 면에서 이인(異人)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1894년은 동학혁명이 있었던 해로 매티 테이트는 집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자택으로 사람들을 초청하거나, 조선어 선생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고 전도용 소책자를 나누어주는 일을 했다. 하지만 전주는 동학의 영향이 컸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그곳에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어 일단 서울로 귀경하였다. 그러는 와중에도 틈을 이용해서 선교사들은 호남지역의 선교를 위한 선교지 여행을 계속했다.

 

동학혁명이 끝난 후 전주는 폐허가 되었다. 1895년 매티 테이트와 레이놀즈가 동학혁명이 끝난 후 전주를 다시 찾았을 때 예수님을 믿기로 했던 사람들은 종적을 감추었다. 결국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1895년 말에 테이트 남매는 전주로 거처를 완전히 옮겼고, 1896년에는 해리슨(William B. Harrison)이, 1897년에는 레이놀즈가 전주에 합류하여 선교를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호남선교의 거점인 전주에 남장로교회 선교사들이 하나씩 자리를 잡으면서 기반을 다져갔다.


그들의 시작은 미약했다. 하지만 복음의 씨앗은 성령님의 역사와 함께 열매를 얻게 되었다. 당시 전주는 조선왕조 시조 이성계의 본가가 있는 곳으로 조선의 왕손들에 의해서 형성된 씨족 도시였다. 따라서 선교사들이 전주성 내에 들어가는 것조차 불가능했고 거점으로 사용할 수 있는 땅이나 집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결국 선교사들은 성안에서는 어떤 것도 할 수 없었기에 성 밖에 터전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선교사들이 전주를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제물포에서 배를 이용해서 군산까지 갔고, 군산에서 다시 만경강을 거슬러 목천포까지 역시 배로 가야 했다. 전주 성문 밖 은송리까지 가는 데 보름이 걸렸다고 하니, 전주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쉽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외국인에 대한 배척이 심했던 지역이요 시대인지라 환영받지 못한 그들의 전주 방문은 위험하고 힘든 여정이었다. 


1895년에 전주에 다시 찾아온 선교사들은 이듬해인 1896년 완산동 야산에 선교사들이 거처할 수 있는 주택을 지었다. 하지만 은송리의 집터가 전라감사 이완용의 출생지라는 이유로 계속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은송리교회를 맡고 있었던 전킨 선교사는 예배당을 화산으로 옮기게 되었다. 현재의 예배당이 있는 곳으로 옮긴 것은 1905년이며, 이때 57평 규모의 벽돌 예배당을 마련했고 전주서문밖교회로 개명했다. 그 후 1940년에 다시 교회명을 서문교회로 개명함으로써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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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교회의 시작을 언제로 볼 것인가 하는 데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다만 1893년에 레이놀즈와 테이트가 전주를 찾았고 거처를 마련하는 등, 복음을 전하기 위한 초기의 사역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개종자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동학혁명의 여파로 선교사들이 전주에 머물 수 없어서 서울로 철수하게 됨으로써 사실상 전주에서의 사역은 지속되지 못했다. 이 공백기에 최초의 개종자들이 다시 흩어지는 상황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따라서 최초의 개종자들은 완전한 신앙을 형성하지 못하게 되는 안타까운 현실도 맞닥뜨리게 된다. 


선교사들이 철수한 후 다시 전주에 돌아오기까지의 공백이 1년 이상의 긴 시간이었기 때문에 새롭게 시작하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초기에 남장로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들이 내려와서 사역을 재개하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완고하기 그지없는 전주에서 개종하겠다는 사람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1897년 7월 15일 개종하여 예수님을 믿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세례를 받기 원했던 것이다. 그것도 남자 3명과 여자 4명이 세례를 받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선교사들은 그들을 대상으로 세례 문답을 했고, 그중에 선교사들이 묻는 말에 정확하게 대답을 한 5명이 최초로 세례를 받았다.


그런데 그들의 정확한 이름은 전해지고 있지 않다. 전 씨로만 알려진 남자와 테이트의 사역을 돕던 사환 김내윤(金乃允), 함성칠의 부인 임씨, 김제원의 부인 진주 강씨, 유성안의 부인 김씨 등 5명이었다. 이들은 레이놀즈 선교사에게 문답을 받고 7월 17일에 세례를 받았다. 이렇게 해서 전주 최초의 세례교인이 탄생했고, 그들에 의해서 전주서문교회는 기도처가 아닌 정식으로 교회가 세워졌다. 


호남선교를 말하게 되면 7인의 선발대라 불리는 사람들(Rev. Lewis Boyd Tate, Miss. Mattie Samuel Tate, Rev. William Davis Reynolds, Mrs. Patsy Bolling Reynolds, Rev. William McCleery Junkin, Mrs. Mary Leyburn Junkin, Miss. Linnie Davis)을 생각하게 된다. 당연히 그들은 모두 호남선교 초기에 많은 수고를 한 이들이다. 또한 각각의 은사를 따라서 역할을 감당함으로써 남장로교회의 호남선교는 그 열매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남장로교회의 호남선교만이 아니라 전체 장로교회는 물론 새롭게 형성되는 한국 교회를 위하여 결정적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 인물이 있다. 그가 윌리엄 레이놀즈(William D. Reynolds)이다. 그는 선교사들 가운데서 경험이나 나이가 비교적 많았다. 또한 성경 원어와 언어에 탁월한 능력이 있었고, 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하는 데서도 지도력을 발휘하는 재원이었다. 따라서 전주서문교회는 물론 남장로교회의 호남선교는 그의 역할이 크게 미칠 수밖에 없었다. 


레이놀즈가 전주를 찾은 것은 1894년 3월 27일 선편으로 제물포항을 출발해서 사흘 걸려 3월 30일 새벽에 군산항에 도착했다. 그리고 육로를 걸어서 다음 날인 31일에 전주에 도착했다. 이때 그와 동행한 사람은 남장로교회 의료선교사로 내한한 드루(Drew A. Damer), 레이놀즈에게 조선말을 가르치는 서씨라고 하는 한국인, 요리를 전담하는 옥선이라고 하는 소녀 등이었다. 


이들은 이미 육로를 이용해서 레이놀즈보다 한 주간 먼저 전주에 도착해 있던 테이트 남매의 환영을 받으면서 전주에 도착해서 전주에서의 사역을 계획하면서 더 넓게는 호남의 전 지역을 선교하기 위한 설계를 했다. 그는 전주에 도착해서 5일간 머물면서 전주를 호남 선교의 거점으로서의 가능성을 살펴보았다. 그 과정에서 개종을 원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당장 세례를 받겠다는 사람들이 레이놀즈 앞에 나타났고, 그들이 놀랄 만큼 분명하게 고백하는 것을 보고 그는 “전주는 선교의 앞날이 유망하다”라고 그의 일기에 남기기도 했다.


5일간 전주에 머물면서 살펴본 후 그는 바로 호남지방을 순회하면서 앞으로의 선교계획을 구상할 요량으로 전주를 떠나 김제, 정읍, 흥덕, 고창, 그리고 전라남도 지역인 영광, 함평, 무안을 거쳐 목포까지 갔다. 그는 목포항을 중심으로 한 선교의 가능성을 확인했고, 이어서 4월 23일 다시 목포를 출발하여 우수영을 거쳐 진도, 진도에서 선편으로 완도, 신지도, 녹동항을 통해서 28일 고흥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다시 벌교와 순천을 돌아보고 5월 1일 여수, 2일 남해에 도착했다. 남해에 도착했을 폭풍이 불어서 며칠 머물 수밖에 없었고, 바람이 잠잠해지자 5일 출발해서 이틀 걸려 부산에 도착했다.


이렇게 그는 전주를 떠나 47일 동안 호남 일대를 돌아보고 남해안을 따라서 부산까지 반도의 남쪽을 모두 답사했다. 이 여행은 그에게뿐 아니라 선교사들에게 조선 선교의 가능성에 확신을 얻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 여행을 통해서 선교의 어려움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이 외세에 의해서 개항은 했지만, 국민들의 의식에는 여전히 외세를 배척하려는 강한 의식이 있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특별히 그가 답사한 호남지방은 동학의 출발지로써 동학사상이 외세에 대한 배척의식이 강했기 때문에 어렵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여기서도 발견하게 된다. 그가 조금이라도 늦게 전주에 도착했거나 호남지역을 돌아보는 일을 늦게 했다면, 그는 호남선교를 위한 설계도를 마련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가 답사 여행을 하고 돌아오자 바로 동학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게다가 전주는 사실상 동학혁명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더 이상 전주에도 머물 수 없었다. 따라서 레이놀즈를 포함해서 전주에 있었던 테이트 선교사 남매도 모두 서울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섭리를 몸으로 경험하면서 호남과 조선 선교에 대한 비전을 세운 그는 훗날 한국 교회를 형성시키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하게 되었다.


그는 미국 버지니아주 노포크라고 하는 곳에서 1867년 태어났다. 그는 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한 후 존스 홉킨스대학에서 라틴어 교수로 지냈다. 그런데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와서 순회하면서 조선 선교를 호소하던 언더우드의 강연을 듣고 조선에 가기로 뜻을 세우게 되었고, 남장로교회 소속 선교사로 조선에 들어와 남장로교회의 선교 사업을 이끌면서 한국 교회 전체를 위한 일들을 감당했다.

 

특별히 그가 한 일들 가운데 기억해야 할 것은 한국장로교회를 탄생시키는 산파역을 감당했다는 것이다. 장로회 공의회를 이끌면서 사실상 한국장로교회를 설립하는 역할을 했고, 훗날 한국장로교가 총회를 구성하게 될 때는 독노회의 마지막 노회장으로서 1912년 총회로 개편하는 일을 했으니 그는 한국장로교회의 진정한 산파였다.


또한 그는 한국 교회 전체를 위해서 성경을 번역하는 일에 희생을 아끼지 않았다. 사실상 구약성경은 거의 그의 손에 의해서 번역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성경번역위원회를 이끌면서 성경 번역 전반에 걸친 역할도 감당했다. 게다가 평양신학교에서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의 기초를 놓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는 많은 저서와 논문을 남겼는데, 이것은 모두 한국장로교회를 형성시키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 기억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고, 그가 남긴 발자취를 찾아보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는 현실이 아쉽다.


서문교회 마당에 들어서면서 바로 눈에 띄는 것이 있다. 그중에서도 다른 교회에서는 보기 어려운 종각이 방문자의 눈을 사로잡는다. 지금은 대부분 교회에 종각이 없는 것은 물론 종을 치지 않는다. 아주 특별한 역사를 간직한 교회에서나 어쩌다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서문교회의 종각은 다른 교회의 종각과도 다른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 종각은 초기 호남선교의 기초를 놓은 전킨 목사를 기념하는 것이다. 1908년 1월 2일 당시 담임 목사로 섬기고 있던 전킨 선교사가 갑작스럽게 별세했다. 그는 호남지역의 초기 선교사로서 군산과 전주지방에서 지역선교를 위해서 헌신적으로 일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가 갑작스럽게 별세한 것이다. 서문교회와 유족들이 심각한 충격에 빠졌다. 전킨의 별세 소식을 들은 레이놀즈는 서울에서 급히 내려와서 장례식을 주관했고, 결국 다시 전주에 내려와서 서문교회를 돌보면서 주변의 교회들을 관리하는 일까지 감당하게 되었다.


전킨이 별세한 후 부인(메리 레이번)은 조선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남편을 머나먼 이국땅에 주검으로 남겨놓은 채 미국으로 돌아갔을 때 본교회의 성도들은 전킨이 별세할 때 섬겼던 교회에 그를 기념할 만한 무엇인가를 설치해서 그의 사역을 기억하게 하자는 뜻을 모으게 되었다. 모교회의 신자들이 전킨 부인에게 무엇을 하는 것이 좋을지 물었을 때 전킨 부인은 남편이 생전에 서문교회에 설치하고 싶어 했던 종각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전했다. 


모교회의 신자들은 전킨 부인의 뜻에 따라서 서문교회에 종각을 설치하기로 하고 뜻을 모아서 연보를 했다. 종을 구입하는 경비는 물론 종을 미국에서부터 조선까지 운반하고 설치하기까지 모든 경비를 부담했다. 이렇게 해서 미국에서 준비한 종을 미국의 해외 선교 신문의 편집장인 윌리엄(H. F. William) 목사가 기선에 싣고 태평양을 건너 제물포까지 운반해왔다. 그러나 다시 이것을 전주로 옮겨와야 했는데, 이때 육로로 운반하는 것이 여의치 않아 범선(帆船)을 이용해서 서해를 거쳐 김제의 만경강(萬頃江) 포구를 거슬러 올라와 회포면(回浦面) 쌍강포(전주에서 40리 거리)까지 옮겼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육로로 소달구지를 이용하여 서문교회까지 옮겼다. 이때 쌍강포 가까운 난산과 쇠평리 교회의 믿음의 형제들이 힘을 합하여 운반하는 일에 도움을 주었다. 이렇게 볼 때 서문교회 앞에서 만날 수 있는 종각은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종이 미국에서 도착하자 서문교회에서는 1908년 10월 26일(월) 제직회를 열어서 종을 설치할 수 있는 종각(鐘閣)을 건립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 결의와 함께 종각을 설치할 경비를 마련하기 위한 연보를 하기로 하고 교우들의 뜻을 모았다. 그런데 이 종각을 건립하는 것은 서문교회의 신자들만이 아니라 인근의 교회들도 동참하였던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당시 서문교회에 설치된 종이 주는 의미가 단순하지 않은 것을 알게 한다.

 

종각을 건립하기 위하여 서문교회에서는 장로 장필수, 전도인 전영칠 집사, 신자 가운데 목수인 김학수 등 세 사람을 종각건립위원으로 세워서 맡겼다. 1908년 12월 초 한 달 반의 공사 기간을 거쳐서 종각을 완성하였고, 12월 10일(목) 오후 4시 헌종예식(獻鐘禮式)을 거행했다. 이때 건립위원인 전영칠 집사가 쌍강포에서부터 서문교회까지 종을 운반하는 데 도움을 준 이웃교회 형제들의 도움과 협조에 감사하는 말과 함께 그 과정을 설명했다. 이어서 레이놀즈 선교사가 미국에서부터 이 종이 보내지게 된 동기와 어떤 의미로 사용할 것인지 설명했다. 또한 미국에서부터 이 종을 운반해온 윌리엄 목사가 미국에서 종을 구입하게 된 사연과 함께 그 종이 ‘전킨 목사 기념종’이라는 사실을 설명했다. 그다음에 김필수 장로가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이러한 과정을 마치고 나서 “윌리엄 목사와 레이놀즈 선교사, 그리고 류서백 목사, 전영칠 집사에 이어서 교회에서 종을 관리하면서 종을 책임지고 치게 될 안경오 형제들이 차례로 종을 한 번씩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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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제작, 운반하여 설치한 이 종은 직경이 90cm에 이르는 대형 종이다. 이때부터 전주를 깨우는 새로운 소리가 사람들에게 들려졌고, 종소리 하나만으로도 교회의 존재는 물론 신자들에게는 교회를 향한 마음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역할을 했다. 이제는 교회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들을 수 없는 시대가 되었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서 전킨을 생각하게 하는 서문교회의 종각은 당시 전주시민들의 마음과 귀를 열게 했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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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종전 · 장명근

글 이종전 

이종전 목사는 고베개혁파신학교(일본), 애쉬랜드신학대학원(미국)에서 수학하고, 1998년부터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역사신학을 가르쳤고, 현재는 은퇴하여 석좌교수와 대신총회신학연구원 원장으로 있다. 인천 어진내교회를 담임하며 인천기독교역사문화연구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C채널 ‘성지가 좋다’ 국내 편에서 역사 탐방 해설을 진행하고 있다.


그림 장명근 

장명근 장로는 토목공학 학부(B.S.)를 마치고 미시간주립대학교에서 환경공학(M.S & Ph.D)을 공부했다. 이후 20년간 수처리 전문 사업체를 경영하였으며 2013년부터는 삼양이앤알의 대표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 취미로 그림을 그리고 있으며 정동제일교회의 장로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