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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당신의 교회, 어떻게 미래를 대비할 것인가?
by Steve McAlpine2024-04-24

어느 일요일 아침, 당신은 교회 밖에 서 있다. 이른 봄의 햇살이 등을 따뜻하게 비추고 있고, 당신은 지금 새 신자와 특히 감동적이었던 찬양 시간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들리는 끼익 하고 거친 타이어 소리와 딱딱거리는 전기음에, 당신은 무슨 일이지 하며 고개를 돌린다. 


새로 만든 현관에서 멀지 않은 관목 숲에서 회색 스포츠카 한 대가 요란하게 연기와 김을 피우며 멈춰 섰다. 당신이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스포츠카의 문이 위로 열리더니 경찰차가 왔는지를 두리번거리며 어떤 한 사람이 내린다. 그러고는 당신에게 달려오더니 소리친다.


“빨리요! 지금 이럴 시간이 없어요!”


맙소사. 그 사람은 당신이 다니는 교회의 담임목사이다. 어, 진짜라고? 그런데 얼굴이 지금보다 훨씬 늙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도통 이해를 할 수 없어 당신은 예배당 쪽을 바라본다. 그런데 거기에 장로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담임목사가 있지 않은가? 뭐야? 지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뭐라고 말도 하기 전에, 팍삭 늙어버린 목사가 당신의 팔을 붙잡는다. “빨리 가자고요! 몸을 묶어요! 괜찮아요. 나 당신이 아는 그 목사 맞아요. 정확하게 말하면 2054년, 미래에서 돌아왔어요. 30년 후에도 그리스도인으로서 남으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이제 곧 알게 될 겁니다. 앞으로 서구에서 만날 목회의 현실을 보게 될 겁니다. 깜짝 놀랄 준비를 하세요.”


당신이 채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당신은 벌써 시속 88마일 속도로 요란한 소리를 내는 스포츠카를 타고 주차장을 빠져나가고 있다. 얼핏 어깨 너머로 주차장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이 보인다. 스포츠카 때문에 엉망이 된 관목을 보고 괴로워하며 하늘을 향해 손을 드는 권사 한 명을 보는 순간 펑 하고 당신은 사라진다. 지금으로부터 30년 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삶이 어떤 모습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당신은 미래로 떠났다. 


무서운 현실, 불확실한 미래


물론, 이건 약간의 상상력을 가미해서 재미있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누구라도 추측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지금 이데올로기 노선에 따라 분열되는 문화의 폭풍 구름이 모이는 현실을 목격하고 있다. 정치적 반대자를 단순히 잘못된 것이 아니라 악마로 간주하는 세상에서 지역 사회 전체에 걸쳐서 증가하는 양극화를 목도하고 있다. 물론 국회의사당에 매달리는 노인들의 도움은 기대할 수도 없다.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속도로 교회 출석률이 감소하고 있다. 우리는 강경함에서 조금도 뒤지지 않는 탈기독교 세계주의에 맞서는 반동적 민족주의의 부상에 대해서 우려한다. 그게 다가 아니다. 성경적 인간학에 적대적인 법안의 지원을 받아 교육 시스템을 감염시키고 어린이에게 전혀 검증되지 않은 약물을 강요하는 급진적인 젠더 이론에 우리는 절망하고 분노한다. 


그리고 외부 힘으로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한 소셜 미디어의 폭발적 증가가 있다. 이건 콘텐츠와 형식 모두가 중요하다는 뿌리 깊은 믿음에 반대되는 현상이다. 젊은이와 노인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다 소셜 미디어에 의해서 불안과 중독 증상을 나타낸다. 


그리고 전쟁이 있다. 어디에나. 이건 뭐 두더지 때려잡기와 비슷하다. 갈등 하나를 누르면 바로 새로운 갈등이 튀어 오른다. 일상생활 속에서 학살, 비난, 유혈이 낭자한 이미지가 우리 주머니 속 스마트폰에서 쉬지 않고 고개를 내민다. 


그리고 직장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시간과 가치를 더욱 침해한다. 인사 부서는 우리의 믿음에 반하는 신념에 대해서 충성과 동맹을 요구한다. 승진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는데, 목사님이 전도하라고 했다고 회사 휴게실에서 예수님에 관한 대화를 나눌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 누가 백 투 더 퓨처의 경험을 원하지 않을까? 2054년으로 달려가서 폭넓게 메모하고 아이폰으로 비디오를 캡처한 다음 돌아와서 앞으로 다가올 일에 대비하고 싶다. 그렇게만 된다면, 다가오는 폭풍에 맞서 모든 공격을 무너뜨릴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혹시 아는가?) 놀랍게도 우리를 기다리는 미래가 장밋빛이기에 얼마든지 긴장을 풀 수도 있다.


초조한 교회


이러한 급격한 변화 속에서 어떻게 해야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사는 삶을 지킬 수 있도록 “미래에 대한 대비”를 할 수 있을까? 모르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대비할 수 있을까? 


교회는 긴장하고 있다. 성에 관한 진보적 사상에 굴복한 신학을 보면서 우리는 그 사실을 확인한다. 십자가에 성조기를 두르는, 점점 더 강해지는 민족주의의 포용에서도 그 점을 본다.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아예 공립 학교에 보내지 않는 부모들이 늘어간다. 내가 아는 한 가족은 아예 보수적인 폴란드로 이주하는 쪽을 택했다. 복음주의자 신자인 그 부모는 확고한 로마가톨릭 국가이지만 폴란드가 아이들에게 더 안전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폴란드가 미국처럼 되기 전까지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조만간 폴란드도 미국처럼 될 텐데, 그때는 또 어디로 가야 할까?)


하나님 백성에게 초조함은 새로운 게 아니다. 선지자 이사야 시대, 이스라엘에 폭풍이 닥쳤을 때, 많은 사람이 가장 먼저 본능적으로 당시의 백 투더 퓨쳐를 활용했다. 영매, 강령술사, 그리고 거짓 신을 의지했다. 그들은 이스라엘에게 미래가 어떻게 될지 말해 주었다(사 8:19). 물론 거기에는 대가가 따랐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그런 거짓 희망을 믿지 말고 오로지 자신만을 신뢰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에게 앞으로 멸망할 예루살렘의 운명을 보여주는, 미래로 가는 스포츠카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불확실한 미래로 나아갈 때 함께 하실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이 계신다. 


거짓 신, 거짓 희망, 이방 국가, 역사와 결과를 조작하려는 혼합주의, 이스라엘은 이 모두를 거부해야만 했다. 유일하고 참되며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들의 미래를 보장해 주셨다.


미래가 보장된 교회


블랙스완 사건(팬데믹 2.0, 혹시 아는 사람 있을까?)을 예측할 수는 없지만, 앞으로 더욱 양극화되고, 더욱 고립되고, 더욱 무의미해져서 절망에 빠지게 될 것은 분명하다. 우리를 기다리는 게 행복한 미래는 아닌 것 같다.


그러나 교회에는 큰 무기가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복음을 통해 교회는 환멸에 빠진 많은 이웃에 의해 재평가되고 있는 문화를 더 확장하고, 더 목적성을 부여하고, 더 오래 지속될 수 있도록 바꿀 수 있다. 이미 기독교의 종말이 왔어야 한다고 자신 있게 예측했던 사람들은 지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다. 실제 역사 속에서 존재한 예수라는 인물에 기초를 둔 복음의 초월적 메시지는 뿌리가 없는 우리 시대를 살아가도록 하는 강력한 배경이다.


The Atlantic에 기고한 팀 켈러의 마지막 글에서도 언급되었듯이, 미국 교회는 (그리고 서구 세계 전역의 교화가) 부흥을 맞을 것이다. 지금 상황은 너무나도 심각하게 분열되고 불확실해진 상태이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한때 “물었다가 멈췄거나” 또는 “처음부터 아예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하나님에 관해서 심각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영국 작가 저스틴 브라이어리의 신간 The Surprising Rebirth of Belief in God: Why New Atheists and Secular Thinkers Are Considering Christianity Again(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놀라운 재탄생: 왜 신무신론자와 세속 사상가들이 기독교를 다시 바라보는가)는 이런 켈러의 견해를 확증한다. 그러나 리처드 도킨스의 눈에 나타난 종교의 미래는 그런 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적어도 그의 눈에 그런 주장은 아직 단언할 수준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백 투더 퓨쳐이다. 우리는 어떻게 교회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을까? 생태학적 위협, 기술적 변화, (때때로 모순되는) 의미의 새로운 원천을 찾는 탈기독교 사회의 양극화 효과 등 다양한 압력 지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용감하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과 지금까지 우리에게 유익했던 삶의 방식을 두 배로 강조해야 한다. 이러한 문화 궤적이 계속된다는 가정하에, 우리는 2054년에 필요한 공동체적, 도덕적, 신학적, 관계적, 그리고 지적 신용을 미리미리 은행에 투자해야 한다. 


그러므로 취소 문화가 팽배한 사회에서 유일하게 용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교회, 점점 더 많은 사람이 혼자 살아갈수록 더 깊은 공동체를 실천하려는 교회, 자기 관리를 숭배하는 시대에 값비싼 관대함을 제공할 뿐 아니라 섹스와 몸에서라면 테크닉과 기술에 굴복해 버린 문화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지를 분별하도록 하는 교회를 세우는 데에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겠다고 결심하자. 


바로 그때 믿음에 집중하고, 모든 희망과 관심을 “잘 꾸민 집”(학 1:4)에 두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느낄 것이다. 더 깊고 더 강한 기독교가 답이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다시 미래로


직관에 어긋나기도 하지만, 만약에 당신이 그 차에 뛰어들어 2054년으로 향한다면, 충실하고 번성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고 많이 놀랄 것이다. 현재의 우려와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당신도 그 일에 동참하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아직 대학에 다니면서 여전히 당신의 믿음에 적대적인 젊은 비그리스도인 친구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금은 기독교에 적대적인 그들이 2054년에는 장로가 되고 예배 인도자가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은 그렇게 역사하신다. 



출처: How to Futureproof Your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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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Steve McAlpine

스티브 맥알파인은 호주에서 기독교 작가 및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Futureproof: How to Live for Jesus in a Culture that Keeps on Changing (The Good Book Company, 2024)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