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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형과 아우, 아버지와 아들이 지켜낸 교회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여수 장천교회

by 이종전 · 장명근2024-02-19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대한 강토에 선 첫 세대 교회들을 찾아 떠납니다. 그 이야기들에서 우리 신앙의 근원과 원형을 찾아보려 합니다.

19세기 말 호남의 중심지는 전주와 나주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전남으로 좁히면 나주와 순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만큼 상대적으로 이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어려웠다는 의미이다. 결국 나주는 선교사들을 배척함으로 광주에 선교부가 만들어졌고, 순천은 지리상의 여건도 있었지만, 주변 지역에 비해서 늦게 복음이 들어가는 곳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순천은 복음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공동체가 시작되었음에도 성 안으로 들어가기까지는 시간이 더 걸려야 했다. 


순천에 남장로교회 선교부가 공식적으로 설치되는 것이 1913년이고, 순천에 공동체(현 순천중앙교회)가 1906년에 설립이 되는 것은 선교부 설치보다 빠른 것이지만, 순천 주변 지역에 설립된 교회들에 비하면 오히려 늦은 경우이다. 이 말은 호남 남동부지역 선교거점이 순천에 설치되었지만, 순천 읍내보다 변두리 지역에 먼저 교회가 세워졌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서 광양 신항리교회, 벌교 무만동교회, 여수 장천교회 등이 순천중앙교회보다 일찍 설립되었다. 


그 이유는 순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불교(514년 송광사, 529년 선암사)와 유교(1407년, 순천향교, 1568년 옥천서원) 등이 이 지역의 문화와 생활, 세계관까지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교와 유교의 풍습과 전통이 이 지역 사람들의 정서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이 외래종교인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사회적으로 쉽지 않은 환경이었다. 현재도 송광사와 선암사는 전국에서 찾는 불교도들이 많고, 일반 관광객들이 많은 사찰로 유명하다.


호남 남동부지역에 복음이 전해지는 것은 대부분 남장로교회 선교부의 영향력이 직접 미쳤다. 그러나 예외도 있었는데, 그것은 이 지역의 경우만은 아니다. 오히려 서울이나 선교가 설치된 도시에서 선교사들과 접촉하는 과정을 통해서 복음을 접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신앙을 이어가게 될 때, 그곳에 교회를 세우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경우는 바다 건너 제주도에 교회가 세워지는 과정에서도 나타나는 것을 보아 놀랍고 귀하다고밖에는 달리 표현할 방도가 없다.


여수시 율촌면에 있는 장천교회도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장천교회가 설립되고 성장하는 과정에는 조일환과 조의환 형제의 역할이 컸다. 그중에 형인 조일환이 어떤 목적으로 만주로 가려다가 일본 경찰에 쫓겨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 숨어들어 그곳에서 복음을 접하고 개종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고향으로 내려와서 1905년 10월 자기 집에서 아우인 조의환과 이기홍, 박중호 등과 함께 오웬(Clement C. Owen) 선교사의 조사인 지원근이 중심이 되어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장천교회의 시작이었다. 이 공동체가 모임을 가지는 과정에서 조일환은 목포에 있는 프레스턴(John F. Preston) 선교사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이렇게 시작된 장천교회는 광양의 신항리교회와 함께 순천 이남에서 가장 먼저 설립되었다. 선교사들의 손이 부족한 상황이라 새롭게 설립되는 교회들을 모두 돌아볼 수 없는 현실이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조사의 역할이 컸고, 조사라도 있으면 감사한 일이었다. 실제로 순천에 공식적인 선교부가 설치되는 것이 1913년이니까, 장천교회를 목회하거나 직접 목회할 수 있는 지도자는 없었다. 그러한 상황임에도 조일환을 중심으로 하는 초기 개종자들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열심이었다.


그러한 열심은 공동체가 시작되어 얼마 지나지 않은 1908년 첫 예배당을 지을 수 있었다. 비록 작은 평수이지만 12평 목조 예배당을 마련하여 예배를 드리며 교회를 외적으로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작은 규모의 예배당이지만, 이러한 공적인 공간이 없었던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건물이었다. 따라서 선각자로서 조일환 등은 이 공간을 활용하는 방안이면서 동시에 교회가 해야 할 일을 찾았다. 그것은 학교를 운영하는 것이었다. 1910년 장천교회는 근대교육을 위한 여흥학교를 설립했다. 여흥학교는 교명은 ‘여수를 흥하게 하자’는 의미를 담은 여수의 여(麗)와 흥할 흥(興)을 더하여 지었다. 이렇게 시작된 학교는 이 여수지역에서 근대교육에 있어서 효시이다.


그러나 이미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시작된 상태에서 교회가 원하는 교육이나 민족교육 등과 같은 것은 점점 시행할 수 없게 되어갔다. 일본은 한일병탄을 완성한 다음 즉시 식민지에서의 국민교육과 관련한 칙령을 내려서 식민지교육을 강화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교를 세웠다고 하더라도 온전한 교육을 실시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결국 1935년에 이르러서 일제의 박해가 더욱 가혹해졌다. 특별히 학교에서 한글을 가르치지 못하게 하고,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등 점차 교회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면서 교회로서는 학교를 지속시키는 것이 어려웠다. 결국 자진 폐교를 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조일환의 동생 조의환은 직접적으로 교회를 세워가는 중심에서 일을 감당했다. 1908년 예배당을 건축하고, 여흥학교도 운영하면서 지역사회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형제의 열심은 신자들과 학생들이 늘어나면서 이내 예배당이 비좁아지게 되니, 1913년 기와지붕을 이은 15평 규모의 예배당을 다시 지었다. 하지만 목회자가 없는 상황인지라 공동체의 영적인 성장에는 갈급함이 컸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의환은 1909년 영수(令首)로 임명을 받아 사실상 이 교회를 이끌어가는 영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영수로 임명을 받아서 공동체를 섬기면서 1912년에는 이 교회의 장로로 임직했다. 영수와 장로의 직분을 가지고 이 교회를 섬기던 조의환은 결국 목회자의 소명을 받아 평양신학교에 입학했고, 1921년에 신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그는 신학교를 졸업한 다음에는 광양교회, 여수교회, 제주도 모슬포교회 등지에서 목회했다. 그러다가 제주도에서 일제에 의해서 검거되어 두 번이 투옥되었다. 그만큼 그의 항일정신과 복음을 통한 변화된 생활에 충실하고자 했던 그였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그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지로 나가는 그해에야 이 교회에는 처음으로 곽우영 목사가 부임하게 되었다.


1920년대, 어찌 보면 일제에 의한 식민지가 폭력을 동반하게 되는 어려움 가운데서도 1922년 승주군 도룡교회, 1923년 율촌면 평촌교회, 1925년 율촌면 광암교회 등을 개척 설립함으로써 복음전파와 새로운 교회를 설립하는 일에 열심을 다했다. 이렇게 새로운 교회를 설립하면서도 좁아진 예배당은 더 큰 규모의 예배당을 필요로 했다. 따라서 1923년에는 학교 23평 건물을 지었고, 이듬해인 1924년에는 석조 예배당(80평)을 새롭게 건축했다. 이때 지은 건물이 현재 유치원으로 사용하고 있는 문화재 예배당이다. 그리고 1928년에 목사가 된 조의환은 자신의 고향이며, 자신의 모교회이며, 형인 조일환과 함께 시작한 이 교회의 2대 목사로 부임을 했다. 그는 해방 이후에도 이 교회 5대 목사로 다시 부임하여 원로목사가 되는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1973년 다시 석조 예배당(86평)을 지어서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옛 건물은 부속시설로 사용하면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1981년 예배당이 비좁아지면서 20여 평을 증축하여 사용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현재 중앙에 있는 건물이다. 현재는 교제실 겸 식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2003년 현재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을 건축하여 시대의 변화에 따른 필요를 충족시키면서 지역 복음화와 교회로서 섬김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장천교회를 찾았을 때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여기 소개한 대로 1924년, 1971년, 2003년에 각각 건축한 예배당들이 현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예배당이 한 장소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어서 한국기독교회의 예배당 건축사에 있어서 특별한 장면을 한 장소에서 볼 수 있는 것이 매우 특별하고, 이것은 대한민국에서 여기 장천교회에서만 볼 수 있다. 이 가운데 1924년에 건축한 예배당만 문화재(115호)로 보호되고 있지만, 건축사적인 의미에서 더 중요한 것은 건축 시대가 다른 세 개의 예배당이 한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장천교회 예배당은 각각 다른 양식과 소재로 지어진 예배당 건축의 변화를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국내 유일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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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1924년에 건축된 예배당과 1971년에 지어진 예배당은 출입구가 남녀가 각기 다른 출입구를 사용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 눈에 띈다. 특별히 문화재 예배당은 지상 2층으로 지어진 것으로 계단을 통해서 예배당에 올라가게 했고, 남녀출입문을 따로 만들되 그 위에는 캐노피를 만들어 놓은 것이 특징이다. 아마 현존하는 예배당들 가운데 이런 양식으로 지은 것은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또한 이 예배당은 호남 남동부지역 최초의 석조 건물로 건축사적인 측면에서도 의미와 가치가 있다. 1971년에 지어진 예배당도 다르지 않다는 것은 그 시대까지만 해도 여전히 남자 성도와 여자 성도가 출입문을 각각 사용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사회적으로 1970년까지도 남녀가 유별한 사회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한 이 교회에 문화재 예배당 앞에는 특별한 비석이 하나가 서 있다. ‘지한영 강도사, 지준철 성도 순교비, 2015 건립.’ 여기 새겨진 두 사람은 부자지간이다. 이곳 율촌에서 나고 자랐으며, 이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지한영이 소명을 받고 목사가 되기 위해서 조선신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당시 교회 수에 비해서 지도자가 절대 부족한 시대이다 보니, 신학생들도 목회 현장에서 필요로 했다. 지한영은 전도사 신분으로 덕충교회와 승주교회에서 목회를 했다. 그러다가 강도사 신분으로 모교회인 장천교회에 부임하여 목회를 하던 중인 1950년 공산군에 점령되었고, 목회자인 지한영은 체포되었다. 그해 9월 28일 아들 준철 군과 함께 공산군에 의해서 처형되고 말았다. 부자지간 순교를 당한 것이다.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아픔과 슬픔이다.


사실 이러한 순교는 장천교회만의 일은 아니다. 호남지역에 있는 많은 교회가 6.25사변을 전후해서 희생당한 것은 잊힐 수 없는 일이다. 아쉬운 것은 지한영 강도사에 대한 좀 더 자세한 것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끝으로 이 교회에는 겉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가운데 있는 예배당 종각에는 특별한 종이 있다. 특별한 관심과 함께 찾아보아야만 볼 수 있는 것인데, 이 교회의 역사와 함께 지켜온 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증언해 주는 종이다. 교회 종은 종이지 무엇이 특별한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교회들의 종은 나름 사연이 많다. 모든 교회가 경험했던 것은 일제 말기에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다음 전쟁 물자를 확보하려는 조치로 각 가정은 물론 기관 단체들로부터 온갖 쇠붙이를 징발했다. 이때 교회의 종이나 교회에서 사용하는 도구들 가운데 어떤 형태의 쇠붙이가 되었든 모두 징발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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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한국의 교회들은 교회의 종을 징발당하지 않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동원했지만 대부분 다 빼앗기고 말았다. 그런데 이 교회는 그러한 수탈 과정에서 종을 지켜냈다. 특별히 이 종의 의미가 있는 것은 이 교회 설립에 동참했고, 이 교회를 섬겨온 조일환과 조의환 형제가 아버지 조병하가 별세하자 1929년 아버지를 기념하기 위한 종을 주문 주조하면서 종에다 부모님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이러한 사연을 가진 종을 1924년에 건축한 문화재 예배당 종각에 달아 사용하다가 현재는 1971년에 새롭게 건축한 중앙에 있는 예배당 종각에 달려있다. 이 교회의 입장에서 이 종의 역사와 사연을 아는 것만으로도 장천교회의 역사와 섬김의 신앙을 자랑스럽게 이어갈 수 있는 동기가 되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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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종전 · 장명근

글 이종전 

이종전 목사는 고베개혁파신학교(일본), 애쉬랜드신학대학원(미국)에서 수학하고, 1998년부터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역사신학을 가르쳤고, 현재는 은퇴하여 석좌교수와 대신총회신학연구원 원장으로 있다. 인천 어진내교회를 담임하며 인천기독교역사문화연구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C채널 ‘성지가 좋다’ 국내 편에서 역사 탐방 해설을 진행하고 있다.


그림 장명근 

장명근 장로는 토목공학 학부(B.S.)를 마치고 미시간주립대학교에서 환경공학(M.S & Ph.D)을 공부했다. 이후 20년간 수처리 전문 사업체를 경영하였으며 2013년부터는 삼양이앤알의 대표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 취미로 그림을 그리고 있으며 정동제일교회의 장로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