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주님께 즐거이 예배하고 싶다

시편 95편 묵상: 진정한 예배

by 고명환2023-09-25

1 

미국 보스턴 지역에는 이름난 두 교회가 있다. 시내 중심가에 자리 잡은 파크스트릿 교회와 외곽에 자리한 그레이스 채플이다. 


파크스트릿 교회는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 유서 깊은 보스턴 다운타운에 있다. 그래서 그런지 주일이면 예배를 드리려는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다. 지역적 특성과 함께 교회가 지닌 역사적 유산 역시 만만치 않아서 보스턴을 방문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한 번쯤 들러 예배하고 싶어 하는 교회이다. 


젊은이들이 많은 교회라는 인상을 그 교회의 예배에 참석할 때마다 받는다. 미국의 교회들이 점점 젊은이들을 잃어가고 노령화되는 추세에,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오래된 긴 나무 의자의 곳곳을 차지하고 진지하게 예배하는 모습을 볼 때면 속으로 그 이유를 묻게 된다. 


물론 보스턴은 젊은이들이 많이 사는 곳이다. 명문대학들이 즐비해선지 인구의 상당 부분은 학생들이 차지하는 젊은 도시이다. 그렇다 치더라도 전통적인 파크스트릿 교회에 젊은이들이 많은 것은 궁금증을 자아낸다. 보스턴 시내에는 그들이 찾을 만한 교회가 즐비하기 때문이다. 마음만 먹으면 주변에서 쉽게 다닐 교회를 찾아낼 수 있다. 


예배의 형식이 젊은이들을 불러들이는 것 같지도 않다. 그 교회는 오랫동안 변하지 않았을 듯한 전통 예배를 드린다. 사회자 한 사람이 인도하는 긴 예배 순서는 말할 것도 없고, 고풍스러운 오르간 반주가 젊은이들에게 어필할 것 같지도 않다. 전통 성가를 부르는 찬양대나, 가운을 입고 성경을 한 줄 한 줄 풀이해 나가는 설교 방식도 요즘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이 찾는 이유는 그들이 기대하는 바를 채워 주기 때문일 것이다. 


또 다른 교회인 그레이스 채플은 보스턴 시내를 한참 벗어나 한적한 타운에 있다. 담임 목사가 주장하듯 현시대의 사람들이 교회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바꿀 수 있는 모든 것을 바꾼 교회이다. 교회가 변화하는 세상에서 전통만을 고수하면 문을 닫게 된다는 철학을 가진 목사 아래 여전히 그 교회는 끊임없이 참신한 시도를 한다. 


다른 많은 뉴잉글랜드의 교회들처럼 이 교회 또한 설립된 지 오래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전통 교회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 종탑이 뾰족하게 올라간 전형적인 외관은 해체되었고, 내부는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전면에 무대가 배치된 극장식 예배실을 비롯한, 카페, 체육관, 기도실 등 여러 부대 시설을 갖춘 현대적인 건물로 탈바꿈하였다. 주일 예배를 드리러 나오는 성도는, 정장을 차려입은 이도 간혹 보이긴 하지만, 대부분은 캐주얼 복장이다. 앞에서 찬양을 인도하는 사람들이나 찬양단, 설교자까지 티셔츠나 스포츠 셔츠를 입고 각자의 역할을 담당한다. 웅장한 오르간 대신 일렉트릭 밴드의 리드미컬한 연주에 맞춰 최근의 찬양 메들리를 부르는 것으로 예배는 시작된다. 예배를 위해 주보가 제작되지도 않는다. 찬양, 광고, 기도, 설교가 전부인 단순한 순서의 예배를 드리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시대의 조류에 맞게 새로운 형태로 전환한 이 교회에서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년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오히려 젊은이들을 찾기 어렵다. 일어선 채 컨템포러리 찬양을 행복한 얼굴로 부르는 지긋한 나이의 성도들에게 드럼 소리는 전혀 거슬리지 않는 것 같다. 


간략하지만 마음을 담아 참여할 수 있는 예배 순서, 삶과 밀착된 설교, 종교적인 엄숙함이 줄 수 없는 인도자와 참여자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에서 오는 에너지가 연령을 막론하고 성도들의 기대를 충족해 주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2

시편 95편


1오너라,

우리가 주님께

즐거이 노래하자.

우리를 구원하시는 반석을 보고,

소리 높여 외치자.

2찬송을 부르며

그의 앞으로 나아가서,

노래 가락에 맞추어,

그분께 즐겁게 소리 높여 외치자.

3주님은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나신 왕이시다.

4땅의 깊은 곳도 그 손 안에 있고,

산의 높은 꼭대기도 그의 것이다.

5바다도 그의 것이며,

그가 지으신 것이다.

마른 땅도

그가 손으로 빚으신 것이다.

6오너라,

우리가 엎드려 경배하자.

우리를 지으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자.

7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가 손수 이끄시는 양 떼다.

오늘,

너희는 그의 음성을 들어 보아라.

8므리바에서처럼,

맛사 광야에 있을 때처럼,

너희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아라.

9너희의 조상들은 그 때에,

내가 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시험하고 또 시험하였다.

10사십 년을 지나면서,

나는 그 세대를 보고 싫증이 나서

‘그들은 마음이 빗나간 백성이요,

나의 길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구나’ 하였고,

11내가 화가 나서

‘그들은 나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하고 맹세까지 하였다.”

시편 95편은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 가르쳐 준다. 예배는 오직 만물의 창조주이며 소유주이신 하나님만을 높이는 최상의 표현이어야 한다. 그분은 땅과 바다를 지으셨고 해 아래 하나님의 소유가 아닌 것은 없다(4, 5절). 세상에서 권력을 가진 왕들 혹은 신이라 불리는 존재들과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하나님이다(3절). 이 위대한 분은 우리의 하나님이다. 우리를 그분의 양 떼로 삼으셨고 손수 기르시고 이끌어 주신다(7절). 더욱이 죽음의 위험에서 건져 주시는 구원의 반석이다(1절). 그러므로, 주님의 백성인 우리는 마땅히 최고의 경배를 올려야 한다. 


여기에는 합당한 마음가짐이 우선되어야 한다. 경외와 감사의 마음이 준비되어야 한다. 능력과 권세를 가진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두려운 마음과 함께, 구원하시고 인도하시는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분께 나아가야 한다. 복종과 헌신의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하며 엎드려 경배함이 마땅하다(6절). 


믿음이 없이 나아가는 참된 예배란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임을 조금도 의심 없이 믿어야 한다. 현재의 삶을 주관하실 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여정도 부족함 없이 인도하실 것이라는 단순한 믿음이 필요하다. 시는 므리바에서 믿음에 실패했던 선조들의 완고한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을 분노케 하였는지 들려준다(8-11절). 양인 우리가 목자를 신뢰하지 않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 즉 믿음 없는 예배는 그분을 크게 실망시키는 일이다. 무의미한 요식행위 이상이 되지 못한다. 하나님께 예배로 나아가는 사람은 반드시 크신 하나님의 실존과 찾는 사람에게 보응하시는 인격임을 믿어야 한다(히브리서 11:6).


예배에 합당한 마음가짐이 먼저 준비되고, 이 바탕 위에 그분을 높여 드리는 예배 행위가 얹어져야 한다. 음악은 예배자의 마음을 잘 담아내어 주님을 기쁘게 하는 오래된 매체이다. 목소리로 찬양하며 악기로 연주하여 주님을 높여 드릴 수 있다(1, 2절). 춤 역시 주님의 백성으로 왕께 기쁨을 표현하고 영광 돌리는 예배 행위이다(사무엘하 6:13-14; 시편 149:3). 이외에도, 오늘날에는 미술, 연극, 영화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주님을 찬양할 수 있다. 


예배는 즐거운 일이다(1, 2절). 들뜨고 떠들썩한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그렇다 하더라도 문제될 건 없다). 자유와 절제와 완급이 있어 모자라거나 넘치지 않는 즐거운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할 것이다. 즐거운 마음 그 자체만으로도 주님께서 받으시며 기뻐하시는 믿음의 모습이다. 사랑하는 대상에게 경의를 표하는 일이 우울하거나 무덤덤한 일이 될 수 없다. 자신을 잊은 채 밝고 적극적인 마음으로 기뻐하며 경배해야 한다. 


3

다니던 신학교에선 일주일에 세 번, 열한 시에 공식적인 예배가 열렸다. 주중의 가운데 날인 수요일에는 화려한 오르간 반주가 울려 퍼지고 전통적인 예배 순서에 따라 드리는 격식을 갖춘 채플이었고, 다른 두 번은 일렉트릭 밴드를 따라 찬양하는 시간과 말씀을 듣는 시간으로 간결하게 짜인 자유로운 형식의 예배였다. 보통 총장과 교직원들이 참석하는 수요일 전통 예배에는 학생들이 채플실의 좌석을 채워서 성황을 이루었지만, 월요일과 금요일의 약식 예배에는 빈자리가 눈에 띄게 많아 다소 썰렁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시험 기간이 다가오면 자주 참석하던 학생들마저 그 시간에 도서관에 머물렀다. 


좋은 학점을 받는 데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나는 예배의 형태가 어떠하든 또 시험 기간이건 아니건 상관하지 않고, 오전 열한 시 채플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늘 앉는 자리를 찾았다. 그 시간만큼은 가정사나 힘겨운 공부, 낯선 나라에서 받는 압박감을 뒤로하고 주님께 마음을 집중하며 힘을 얻는 소중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귀에 익숙지 않았던 전자 기타 소리에 따라하던 컨템포러리 찬양이나 오르간 반주에 섞여 힘차게 부르던 전통 찬양은 언제나 마음에 감동으로 다가왔다. 성황을 이룬 자리에서 듣던 설교는 물론, 듬성듬성 학생들이 앉아 있는 한적한 공간에서 경청한 교수님들의 설교는 한 번도 지루하게 느껴진 적이 없다.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도 그때 4년간 참석했던 채플 시간은 고스란히 좋은 기억으로만 남아 있다. 나와 나를 둘러싼 문제를 모두 잊고 갈망하는 마음으로 진실하게 주님께 다가갔던 그 시간들은 몇몇 단편적인 기억밖에 떠오르지 않는 여러 과목의 강의보다도 오래 남을 가르침의 시간들이었다. 


귀국 후, 주일이면 고민이 생겼다. 예배를 드리러 오늘은 어느 교회를 방문할지 고민이다. 목사로 섬기는 교회가 없으니 어디든 찾아가 회중 속에 섞여 예배해야 하는데, 마땅히 갈 만한 교회가 없다. 주변에 교회가 없어서가 아니다. 군중 속에 앉아 있다가 떠날 때 붙잡히지 않을 커다란 교회들이 즐비하건만 마음 편하게 다음에 또 찾을 만한 교회가 없는 것이다. 기대를 안고 찾는 교회마다 실망하게 되고 주일이면 다른 교회를 찾는 일을 반복해야 한다. 예배를 드리고 난 뒤 찾아오는 영혼의 뿌듯함이나 감격보다는 고민과 회의를 떨쳐낼 수 없기 때문이다. 


주일에 찾은 굵직한 교단의 큰 교회들은 형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내용은 크게 차이가 없는 예배를 드린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찬양하는 시간을 많이 할애하는 순서가 단출한 예배를 하건, 교독문과 사도신경을 넣은 긴 순서의 예배를 하건 상관없이 생동감을 느끼지 못한다. 


예배의 순서를 이끄는 사회자나 찬양을 인도하기 위해 앞에 도열한 찬양팀, 또 말씀을 전하는 담임목사는 심각한 얼굴로 주어진 순서를 능숙하게 수행한다. 여기에, 대표기도를 맡은 분은 한참 시간을 들여 작성한 듯한 기도문을 들고 올라와 또박또박 읽어 내려간다. 회중석의 성도들은 이런 의식의 진행에 익숙해서 어느 부분에서 앉고 일어서야 하는지를 잘 분별하여 움직이면서 동요 없이 예배의 흐름에 자신들을 맡기는 것 같다. 그러다가, 목사가 두 손을 올리고 엄숙하게 기도하는 의식이 끝나기 무섭게 주섬주섬 물건을 챙긴 후 흘러나오는 음악과 함께 자리를 뜬다. 좋게 말하면 물 흐르듯 진행되는 의식이고, 반대로 말하면 기계적으로 치르는 제사인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제단을 쌓는다’는 표현을 쓴다.) 


기계적이고 의례적인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주님이 예배의 주제와 중심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주님보다 교회가 때로는 더 강조되고 마음을 빼앗아 가고 있다. 예배 중 교회의 다채로운 행사가 대형 스크린에 뜨고 화려한 미디어로 제작된 각 부서의 활동이나 앞으로 이루어질 프로그램에 대한 선전이 예배자의 마음에 적잖은 잔상을 남긴다. 한술 더 떠서 설교자가 앞서 광고한 내용을 부연하기도 한다. 


최악의 경우는 말씀을 전해야 할 시간에 설교자가 교회의 사업을 위해 재단한 선동적인 내용의 설교를 하는 것이다. 두말할 필요 없이 청중의 마음을 빼앗아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다. 물론 설교자는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명분도 잊지 않고 주입한다. 주님과 주님의 말씀이 성령을 통해 회중의 영혼에 역사해야 할 귀중한 시간에 주님의 이름을 빌린 사업 설명회가 회중의 마음을 번민케 하는 것이다. 


늘 찾던 교회가 코로나 시기에 한시적으로 문을 닫은 탓에 가족과 함께 한국의 이름난 교회의 온라인 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다. 아직 믿음이 성숙하지 않은 아들과 함께 화면 앞에 앉아 들은 유명한 목사님의 말씀은 중간에 끄고 싶은 내용이었다. 그분은 미래의 어린이, 청소년을 위해 교육관을 지을 자금이 필요하다며 설교의 처음과 끝을 일관되게 헌금을 유도하는 내용으로 시간을 채웠다. 내용 중에는 어려운 형편에서도 헌금을 많이 했다는 어떤 성도의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교회를 크게 만들고 말씀을 잘한다고 소문난 그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청년인 아들이 도전을 받았으면 하는 바램으로 같이 예배를 드리는 자리였는데, 기대와 달리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평소 교회에 대해 비판적인 마음을 가진 아들이 그분의 설교로 인해 불신의 마음을 더 갖는 데 일조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미래의 어린이 청소년이 좋은 환경에서 기독교 교육을 받고 양질의 콘텐츠를 통해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첨단 건물이 필요하고 마음을 써서 헌금을 해야 한다. 하지만, 그 시간에 하면 틀린 말이 된다. 좋은 꼴인 주님의 말씀 대신 양들에게 영혼의 양식이 될 수 없는 것들을 공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일이면 교회를 뒤로하고 돌아가는 예배자들에게 자주 묻고 싶어진다. 당신은 진정 예수님을 예배하고 왔는지, 예배를 통해 예수님으로 마음이 채워졌는지, 좋으신 그분에 대해 들을 수 있었는지. 당신이 드린 찬양은 나를 잊고 주님만을 높여 드린 찬양이었는지. 아니면 나에게 몰입했던 찬양이었는지. 


4

참으로 예배하고 싶다.’ 예배학을 공부한 어떤 목사님이 쓴 책의 제목이다. 이 제목처럼,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분을 참으로 예배하고 싶어 한다. 예배의 자리에 가기를 기뻐하고, 예배하는 사람들 속에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한다. 


예배는 그분의 백성과 하나님이 만나 상호 교류하는 더없이 소중한 의식이다. 주님은 그들을 지으신 창조주이고 사망에서 건져 주신 구원자이다. 그분은 예배를 통해 자기를 찾는 영혼들을 기뻐하시며 사랑과 은혜를 부어 주기 원하시는 분이다. 그분의 사람들에게 주님은 삶의 목적이고 의미이며 일관된 추구의 대상이다. 당연히, 마음을 다해 감사와 찬양으로 높여 드리고 싶어 한다. 예배는 이런 주님을 향한 헌신의 마음과 주님이 주시는 자비와 은총이 교류하는 복되고 아름다운 시간인 것이다. 


여기서, 이 땅에서 예배라는 이름으로 다양하게 행해지고 있는 집회들은 그 의미에 부합하고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 본다. 주님께서 기대하시는 참 마음으로 예배자가 나아가고 있으며 주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인지…. 


그렇지 않다면, 속히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정형화된 형식을 되찾고, 모범적인 예배를 만들어 내자는 뜻은 아니다. 이미, 예배의 틀은 세대의 흐름과 함께 중요성을 상실했고 지금 와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도, 그럴 필요도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예배의 정신이 있다. 혹 우리가 그것을 잃어버렸거나 경시했다면 원래의 모습을 찾아 위치를 회복시켜야 한다.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예배자)는 절대자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마음을 가지고 예배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 형식은 갖추었으나 온전한 마음이 없는 예배는 예배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경배를 받아야 할 대상인 하나님께서 그것을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기를 원하시고(로마서 12:1),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 그분을 추구하기 기대하신다(마가복음 12:30). 


그렇기에 예배자는 최상의 심령을 가지고 와야 한다. 주님을 향한 간절한 사랑과 열망을 준비해야 한다. 세상의 어떤 권력자보다 권세가 많으신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늘 만나는 사람을 대면하러 가듯 성의 없이 예배의 자리로 향할 수는 없다. 예배를 돕기 위해 일하는 사회자, 찬양팀, 기도자, 설교자 역시 예배자들이며, 그들도 예외 없이, 준비된 최상의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 창조주이시며 인생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깊이 인식하고 겸손하고 기쁜 마음으로 참여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최상의 심령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은 모든 예배자가 흠 없는 완전한 상태여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 모습 그대로 나아가되, 오로지 주님을 향하는 열망과 그분의 은총을 기대하는 가난한 마음을 준비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예배는 완벽한 사람들만이 모여 하나님을 높이는 배타적인 의식이 아니다. 그런 예배는 변화된 몸을 입은 성도들이 드릴 천상의 예배에서나 실현될 것이다. 지상의 예배는 여전히 불완전하고 흠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은총을 기대하며 자신을 드리는 헌신의 시간이다. 예배에 모인 성도 중에는 큰 죄를 범해 가책을 느끼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복잡한 생활의 문제로 고민하는 성도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육체나 정신의 연약함으로 지친 성도도 있을 것이다. 


어떤 짐이나 복잡한 심령을 가졌든지 최상의 심령으로 예배하고자 하는 동기로 참여해야 한다. 그럴 때 예배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은총을 경험하는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예배를 드리는 동안 용서와 사랑을 확신하게 되고, 소원해졌던 주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며, 영혼이 힘을 얻고 살아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육체와 정신의 치유를 얻는 놀라운 일도 일어날 수 있다. “주님은, 마음 상한 사람에게 가까이 계시고, 낙심한 사람을 구원해 주신다”(시편 34:18). 사랑의 주님은 상하고 찢긴 마음이나 애통하는 마음으로 다가오는 자녀들을 가엽게 여기시어 일으켜 주시고 회복시켜 주신다. 


다음으로, 진정한 예배가 드려지기 위해 예배를 기획하고 담당하는 일꾼들의 인식과 역할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그들에게는 참여자들의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께 모아지도록 최선으로 섬기는 한편, 각자의 역할을 통해 하나님께서 예배 중에 일하시도록 자신들을 드려야 할 책임이 있다. 이 중요한 임무를 차질 없이 수행할 수 있기 위해 가져야 할 인식과 마음의 자세를 늘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예배를 꾸미고 준비하는 일꾼들이 예배의 본질을 간과하지 않기를 바란다. 예배가 예배되기 위해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 던질 필요가 있다. 예배의 대상이 누구이며, 누구를 기쁘게 해드려야 하는가? 초보 신자라도 답할 수 있는 쉬운 물음이지만, 예배의 현장에서 종종 놓치는 것이기도 하다. 예배의 대상에 사람이 혹은 교회가 자리를 차지하기도 하고, 참석한 사람들의 만족이 목표인 듯한 예배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하나님께 서비스하기보다 무언가를 얻으려 예배의 자리를 찾는 사람들에게 서비스하려는 듯한 예배도 있는 것이 현실이다. 


주님이 예배의 대상이며 목적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소비자가 된 듯한 참여자들을 만족시키고 교회에 계속 붙들어 놓기 위한 방편으로 예배를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 예배 중에 사람을 칭송하거나 교회 행사를 선전하는 일을 멈추어야 한다. 예배는 주님께만 집중해야 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예배는 주님께 집중하는 것이라고 정의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주님만을 높이고, 기뻐하며, 그분만이 전해지고, 성령님만이 활동하실 수 있도록 모든 순서와 활동이 그 분께 모아져야 한다. 

 

하여, 교회가 참여자에게 감동을 주기 위한 프로그램이나 예배의 형식에 집착하지 않기를 바란다. 더 이상 예배를 위한 콘텐츠 개발에 몰두하는 데 에너지를 쏟아붓지 않았으면 좋겠다. 화려한 콘서트 같은 예배를 통해 참석자들을 감동시키려는 노력을 그만두기를 바란다. 그것들이 주는 감동은 진정 영혼이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힘이 없다. 세상의 잘된 공연에 취할 때 얻는 생명이 짧은 가벼운 감동 정도를 줄 뿐이다. 


진정, 예배자가 주님을 경험하고 영혼의 빛을 얻는 것은 화려한 예배 음악이나 잘 짜인 순서 때문이 아니다. 기도할 때 크게 연주되는 반주나 설교의 말미에 은은하게 곁들이는 음악 효과에 달려있지 않다. 예배 과정 하나하나가 각자에게 의미로 다가오고 거기에 영혼이 실려질 때 성령에 의한 감동은 주어진다. 이는 자리를 떠나면 곧 사라지는 좋은 감정과 달리 잘 박힌 못과 같이 심령에 오래 살아 삶의 변화를 이끌어 줄 것이다.


그러므로, 인위적인 분위기 조성으로 예배자에게 감동을 주입하려 하기보다 오롯이 성령님께서 일하시게 맡겨 드렸으면 좋겠다. 참여자의 눈과 귀를 만족시키기 위한 분위기 조성에 골몰하는 대신, 어떻게 하면 그들의 마음이 주님께 이끌릴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돕는 일을 찾아야 할 것이다. 


5

예배를 강조하지 않는 한국 교회는 없어 보인다. 교회를 소개하는 홈페이지마다 크게 장식된 “살아 있는 예배” 혹은 “감동이 있는 예배” 등의 문구가 말해 준다. 여전히 사람들은 좋은 예배를 찾고 있고, 그런 사람들에게 손짓하는 교회들은 뭔가 그들만의 차별화된 예배 콘텐츠를 가진 것처럼 어필하고 있다. 


바라기는, 예배를 자랑하고 최고의 예배를 추구한다는 교회들이 그곳을 찾는 사람들의 목마름을 충분히 해결해 주었으면 좋겠다. 행여라도, 사람들의 기호에 맞춘, 사람을 위한 서비스는 아닐까 하는 우려가 쓸데없는 기우가 되기를 바란다.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그분이 기르시는 양이다. 우리는 피조물이고 그분은 창조주이시다. 이런 엄연한 관계를 잊은 채, 스스로의 만족과 감동을 얻기 위해 예배가 연출된다면 실로 무례한 불경이 아닐 수 없다. 예배자로서 가져야 할 합당한 마음가짐 위에 다채로운 내용이 실려야 할 것이다. 오직 주님만이 예배의 주인이심을 인식하면서, 소박하더라도 기쁨으로 찬양하고,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 기도하며, 주님이 증거되는 생생한 능력의 말씀이 선포될 때, 진정한 예배는 드려질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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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고명환

고든콘웰 신학교를 졸업(M.Div)하고, 미국에서 한인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유학생, 다문화가정 학생들을 위한 한국어 강사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