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능자에 대한 좌절과 감격
by 전재훈2023-10-02

출애굽기 6:3에 ‘전능의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단어에는 관주가 붙어있어요. 히브리어로 ‘엘샤다이’라는 설명입니다. 즉 전능의 하나님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엘로힘’이 아니라는 거예요. 


‘엘로힘’의 뜻은 전능자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지칭하는 용어이지요. 하지만 이 용어는 하나님이 자기 계시로 주시기보다 하나님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은 엘로힘이시다’라고 부른 것이지요. ‘엘’은 강한 자, 능력 있는 자를 뜻하는 말이고, ‘엘로힘’은 ‘엘’의 장엄복수형으로 ‘가장 강한 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의 뜻을 가진 말입니다. 


하나님을 ‘엘로힘’으로 부른 것은 당시는 신들이 각자의 고유영역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다신론이 지배적이던 때였습니다. 신들은 자신의 지역이 있고 자신이 가장 잘하는 특정 영역이 있습니다. 풍요를 다스리는 ‘바알’과 다산을 상징하는 ‘아세라’가 대표적이지요. 우리 개념으로 하면 바다에는 ‘용왕’이 다스리고, 산에는 ‘산신령’이 임신과 출산에는 ‘삼신할매’가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역을 넘어서서 어디에나 계시고 전쟁에도 능하시고 양식도 주시며 자녀의 복도 주시는 그야말로 멀티플레이어 신이었기에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신’의 개념으로 ‘엘로힘’이라 불렀던 것입니다. 


‘엘샤다이’도 전능의 하나님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지만, 이 말은 ‘엘로힘’과 뜻이 조금 다릅니다. ‘엘샤다이’는 ‘뜻을 정하면 그 뜻을 100퍼센트 이룰 능력과 의지가 있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즉 무엇인가를 하고자 마음을 정하시면 그 어떤 경우에도 반드시 그 일을 이루신다는 신의 주권적 의지가 강조된 표현입니다. 


출애굽기 6장에서 ‘전능의 하나님’이라고 번역하고 관주에 ‘엘샤다이’라고 토를 달아 둔 것은 ‘전능의 하나님’을 ‘엘로힘’으로 알까 봐 더 정확하게 해 주느라고 관주를 단 것입니다. 


‘엘샤다이’ 하나님은 속성상 3무(無)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실수, 실패, 포기’가 없으신 하나님이라는 말이지요. 이 말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속성에 가장 잘 부합합니다. 왜냐하면 ‘실수, 실패, 포기’는 일을 할 때 생길 수 있는 변수를 알지 못했을 때 일어나는 일인데 반해, ‘전지’하신 하나님은 모든 변수까지도 알고 계시며 심지어 그 변수마저 통제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엘샤다이’는 ‘엘로힘’과 달리 계시적 이름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자신을 ‘엘샤다이’로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모세에게 ‘여호와’로 계시하신 것과 같습니다. ‘엘로힘’은 대부분 하나님을 지칭하기는 하나 부분적으로 다른 신을 의미할 때도 있습니다. 즉 고유명사가 아닌 일반명사로도 쓰인다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했던 말 중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왕상 18:21)라고 했었는데, 이때 사용된 단어가 엘로힘입니다. 하지만 ‘엘샤다이’는 고유명사로서 오직 ‘여호와’를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다른 어떤 신이든 능력만 있으면 되는 신일 때는 ‘엘로힘’이지만 우리가 믿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의미할 때는 ‘엘샤다이’라는 것입니다. 


‘엘샤다이’의 전능자는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참 불편한 하나님입니다. 제가 전능자에게 느끼는 좌절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엘샤다이 하나님은 자신이 뜻을 정하시면 그 어떤 경우에도 변치 않으시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기도한다 해도 하나님의 뜻이 바뀌지 않습니다. 제가 저를 포함 우리 가족 모두를 번제로 드린다 해도 엘샤다이 하나님의 뜻은 바뀌지 않습니다. 엘샤다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기도는 ‘주여 뜻대로 하시옵소서’입니다. 혹은 그분의 뜻을 이루는데 저를 사용하실 수 있도록 내어 드리는 형태의 기도로 ‘제가 여기 있사오니 저를 써 주옵소서’ ‘주여 당신의 뜻을 내게 알리소서. 저를 통해 이 땅에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정도입니다. 


‘엘로힘’은 기도할 때 참 편한 신입니다.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니까 무엇이든 요구하기만 하면 됩니다.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룰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매달리면 됩니다. 일천번제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든지, 40일 금식기도나 절벽에서 기도하듯이 하나님을 적당히 위협하면 됩니다. ‘엘로힘’은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우리의 정서와도 딱 맞아떨어집니다.


‘엘로힘’에게는 예배도 무당의 굿판과 비슷하게 할 수 있습니다. 정성껏 굿을 준비하여 무당으로 하여금 춤추게 하고 나는 그 앞에서 손을 싹싹 빌기만 하면 귀신의 능력을 빌려와 다른 귀신도 내쫓고 질병도 고치고 액운도 다스릴 수 있게 됩니다. 예배도 정성껏 준비하여 바른 자세로 예물을 힘껏 준비하여 드리고 손을 모아 기도하면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축복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을 수 있게 됩니다. 


‘엘샤다이’ 하나님은 모든 면에서 참 불편한 하나님입니다. 예배를 아무리 잘 드리고 헌금을 아무리 많이 하고 기도를 아무리 세게 해도 꿈쩍도 안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엘샤다이’ 하나님의 뜻이 정해진 이상, 나는 아무리 애써도 질병과 가난과 고통과 시련과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엘샤다이는 ‘대중적 인기’ 혹은 ‘유명세’에서 엘로힘에게 엄첨 밀렸습니다. 교회가 섬기는 하나님은 엘샤다이가 아닌 엘로힘인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한국식 기도원에는 ‘엘샤다이’가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무조건 ‘엘로힘’이어야 합니다. ‘엘샤다이’는 수도원에서만 간간히 만날 수 있습니다. 한국은 수도원보다 기도원이 압도적으로 많은 나라입니다. 


신앙생활을 말할 때 ‘믿음으로 모든 어려움을 물리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하나님은 엘로힘입니다. 걸핏하면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주의 보혈을 뿌리노라’ ‘믿는 대로 될지어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 ‘주여 믿습니다. 주여 주시옵소서’ 등의 말을 자주 하는 사람들은 엘로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 나의 ‘원함’은 내려놓고 하나님의 ‘원하심’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는 사람들은 ‘엘샤다이’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질병 앞에 치유를 구하지 않고 겸손과 지혜와 깨달음을 구합니다. 자신의 고통을 통해 주님의 수난을 묵상합니다. 고난 앞에 해결을 기도하지 않고 견딜 수 있는 믿음을 구하거나 고난이나 환란이 나를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뜻으로 깨닫게 되면 도리어 고난 앞에 즐거워합니다. 이들은 종종 ‘엘로힘’을 섬기시는 분들에게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여지기도 합니다. 


‘엘샤다이’ 하나님 앞에 감격하게 되는 것은 구원의 문제에 대면했을 때입니다. 뜻을 정하기만 하셔도 그 뜻을 이루실 능력이 100퍼센트이신데 뜻을 정하시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아들의 목숨까지 걸었다면 이는 절대로 실수하지 않으시며 실패하지 않으시고 도중에 포기하지도 않으십니다. 이 일이 이루어지지 못할 요소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 어떤 변수도 없고 어떤 훼방도 받지 않으십니다. 이런 엘샤다이께서 나를 구원하시고자 뜻을 정하셨다면 나는 그 앞에서 항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기차에서 뒤돌아 앉아도 천국까지 가고 전봇대를 붙잡고 늘어져도 전봇대 채 뽑아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엘샤다이’ 하나님 때문에 기독교를 계시 종교라 부르고 타력 종교라 부르며 고등 종교라 부릅니다. ‘엘로힘’은 이 세 가지 모두를 흐릿하게 만드는 묘한 능력이 있습니다. 


‘엘샤다이’ 하나님의 뜻은 구원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구원의 선포에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는 수단입니다. 다시 말해, 엘샤다이께서 나를 사랑하시기로 뜻을 정하셨으며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생명까지 거셨으니 나는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될 것이고 그 앞에서 엎드려지게 될 것입니다.


‘엘샤다이’ 하나님은 나로 하여금 예배할 수밖에 없도록 이끄시며 내 입술에서 감사와 찬양이 저절로 흘러넘치게 하십니다. 내가 비록 사는 것이 초라하고 보잘것없어 보여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평안이 있는 것은 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신 ‘엘샤다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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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전재훈

전재훈 목사는 서울장신대와 장로회신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현재 발안예향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오히려 위로팀 켈러를 읽는 중입니다(공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