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반대는 노력이 아니다
by 최창국2023-09-27

은혜의 반대는 공로이지 노력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열쇠이자 고요하면서도 능력 있는 삶과 사역의 열쇠는 방향을 잘 맞춘 과단성 있고 지속적인 우리의 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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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에게 ‘은혜’는 매우 중요한 언어이다. 은혜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 언어이다. 기독교 복음의 정수를 알기 위해서는 은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은혜(grace)라는 용어의 원래 의미는 첫째는 형태, 몸가짐, 동작, 행동의 우아함 혹은 아름다움을 의미하고, 둘째는 호의나 선의와 관계되고, 셋째는 호의의 표현과 관계된다. 그리고 넷째는 사람의 마음에 아무 공로 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해롤드 엘런스(Harold Ellens)는 인간의 죄와 하나님 은혜의 관계를 매우 의미 있게 묘사한다. 그는 인간의 상태인 죄를 인간의 용어로는 ‘완전한 절망’이지만, 하나님의 용어로는 ‘완전한 소망’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인 인간을 소망으로 변혁하는 힘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삶에 소망의 시금석으로 작용한다. 성경에서 죄의 문제를 다루는 것도 인간의 죄를 심판하는 데 목적이 있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을 치유하고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성경에서 인간의 죄를 말하는 것은 인간의 정체성과 한계를 말하기 위한 차원도 있지만, 죄는 인간의 한계성만을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희망의 근원을 말하기 위한 역설이 있다. 인간의 희망의 근원과 원동력은 은혜의 복음이다. 은혜는 인간을 절망에서 희망으로 변혁하는 힘이다.


영적으로 건강한 그리스도인에게 나타나는 첫 번째 열매는 하나님께 사랑받는다는 기쁨이다. 영적으로 건강한 그리스도인은 공기를 들이마시듯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느끼며 호흡한다.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와 사랑을 흠뻑 누리면, 그것이 우리 마음에서 두려움과 불안을 몰아낸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한일서 4:18).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는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인류의 공공선을 위한 원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구원의 은혜와 관계된 특별 은혜와 삶의 진선미와 관계된 보통 은혜로 구분할 수 있다. 특별 은혜는 초자연적이지만, 보통 은혜는 자연적이다. 특별 은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통해 주어지지만, 보통 은혜도 구원의 일부와 관련이 있지만 죄를 제거하거나 인간을 죄로부터 해방하지 못한다. 특별 은혜는 우리의 죄와 죄의 부패를 제거하고, 정죄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은혜다. 보통 은혜는 도덕적 삶과 사회 안의 선한 질서, 시민적 공동선, 과학과 예술의 발전 등을 증진한다. 보통 은혜는 죄인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구원의 삶으로 인도할 수 없다.


보통 은혜와 특별 은혜, 둘 중 어느 것도 다른 것에 시간적으로 우선한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보통 은혜가 이 세상 안에서 작용할 때 특별 은혜를 보조하기 때문에 논리적 우선성은 특별 은혜에 두어야 한다.


특별 은혜는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관계가 있지만, 보통 은혜는 인류의 공동선을 위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도 세계 안에서도 역사한다고 할 수 있다. 특별 은혜와 보통 은혜는 모두 이 세계 안에서 역사한다. 하지만 보통 은혜가 보다 일상과 자연계와 관계된다고 하면, 특별 은혜는 새 창조의 일들과 관계된다. 이 두 은혜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다. 특별 은혜뿐 아니라 보통 은혜도 교회를 풍요롭게 한다. 교회는 보통 은혜의 은사들과 열매들을 중생한 삶의 영향 아래 둠으로써 구원의 은혜를 더 풍요롭게 할 수 있다.


은혜는 우리의 공로와 상관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선물이다. 하지만 은혜는 단지 받는 데만 목적이 있지 않고 아래로 흘려보내는 데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과 동시에 은혜에 합당한 행동을 하도록 강권한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공로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값없이 주어진 선물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행동하는 삶과 노력을 강화하는 것이지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반대는 공로이지 노력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열쇠이자 고요하면서도 능력 있는 삶과 사역의 열쇠는 방향을 잘 맞춘 과단성 있고 지속적인 우리의 노력이다”(브루스 데머레스트, 영혼의 계절들, 132). 따라서 행동을 통해 은혜를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건강한 행동을 낳게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일찍이 하나님 없이는 우리가 아무것도 이룰 수 없지만 하나님도 우리 없이는 우리 삶 가운데서 일하지 않으신다고 하였다. 


은혜는 정직하고 책임을 지려는 노력에 능력을 부어 줌으로써 우리 안에 존엄성을 심어 준다. 은혜는 우리의 노력으로만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해줌으로써 우리 안에 겸손을 심어 준다. 은혜는 믿음의 위험을 감수하려는 자발성과 신뢰를 자라나게 함으로써 우리 안에 수용 능력과 민감성을 심어 준다. 이 모든 은혜는 우리 안에서 부드럽게 활동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빛나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에게서 온다.


로드니 스타크(Rodney Stark)의 탁월한 사회 과학적 연구에 따르면, 1세기에 변방의 종교였던 기독교가 로마에서 성장하게 된 주요인은 그리스도인들의 건전한 삶의 방식이었다. 로마에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다르게 살아가는 모습,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단지 좋은 교인이 아니라 좋은 사람과 시민으로 성장하는 데 있어야 한다. 좋은 남편, 좋은 아내, 좋은 부모, 좋은 자녀, 건강한 시민 됨에 두어야 한다. 좋은 부모, 좋은 아내, 좋은 자녀, 좋은 시민 됨 없이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좋은 아버지가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있지만, 나쁜 아버지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이는 성경의 원리이기도 하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분리될 수 없는 유기적 관계에 있듯이, 좋은 사람과 좋은 그리스도인의 관계도 유기적인 관계다. 물론 과거에 나쁜 아버지였다고 해서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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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최창국

최창국 교수는 영국 University of Birmingham에서 학위(MA, PhD)를 받았다. 개신대학원대학교 실천신학 교수, 제자들교회 담임목사로 섬겼다. 현재는 백석대학교 기독교학부 실천신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는 『삶의 기술』, 『실천적 목회학』, 『영혼 돌봄을 위한 멘토링』, 『해결중심 크리스천 카운슬링』, 『영성과 상담』, 『기독교 영성신학』, 『기독교 영성』, 『중보기도 특강』, 『영성과 설교』, 『예배와 영성』, 『해석과 분별』, 『설교와 상담』, 『영적으로 건강한 그리스도인』, 『영혼 돌봄을 위한 영성과 목회』 등이 있다. 역서는 『기독교교육학 사전』(공역), 『공동체 돌봄과 상담』(공역), 『기독교 영성 연구』(공역)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