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적’ 기독교: 우려와 희망
by 김선일2023-11-20

선교한국의 희망을 찾아서 


올해 초에 인기 연예인 이승기씨가 결혼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우리에게 좀 더 충격적인 소식은 원래 교회에 다녔던 그가 결혼을 하면서 처가의 종교인 불교로 개종한다는 것이었다. 모범적인 이미지의 그는 군대에서 세례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교회 오빠” 이승기가 “절 오빠”가 되었다는 아쉬움이 번졌다. 결혼과 함께 종교를 바꾸는 일은 한국에서는 흔하다. 종교 배경이 다른 남녀가 결혼한 뒤에 가족의 화목을 위해 상대방의 종교로 바꾸는 현상을 종종 본다. 이번에는 기독교에서 불교로 개종한 사례이지만, 그 반대의 경우를 더 많이 본 것 같다. 


이처럼 가족의 화목과 일치를 위한 개종이 빈번하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 한국인들에게는 종교보다 가족이 더 높은 가치를 지닌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종교를 바꾼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선택이다. 그런데 한국인에게서 결혼과 함께 개종을 하거나, 혹은 부모의 영향으로 인해 종교를 갖게 된다는 것은 가족이 더 큰 종교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는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한국인의 가족주의는 기독교 신앙을 세우고 전하는 데 있어서 우려와 가능성을 모두 안고 있다. 


한국 기독교의 특징 중 하나가 가족 종교다. 그리고 가족 종교 현상은 계속 심화하고 있다. 가족 종교란 신앙이 가족 외의 다른 이들에게 전파되지 못하고 자기 가족 안에서만 재생산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가운데 처음 신앙을 가진 시기가 모태신앙인 경우는 10년 전보다 두 배나 높아졌다. 최근 조사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75퍼센트가 성인이 되기 전에 신앙을 가진 것으로 나온다(한국 기독교 분석 리포트, 113-114). 즉, 성인 이후에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비율이 낮아진다는 것인데, 이는 가족 밖에서 신앙의 전파가 활성화되지 못하다는 것이다. 또한 인격적이고 진지한 결단을 통해서 신앙생활을 하기보다는 문화적 관습에 의한 명목상 신앙의 비율이 늘어날 수 있음을 보여 주기도 한다. 


한국인의 가족주의는 유별나다. 불확실하고 혼란스러운 지난 세기에 믿고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가족이었다. 가족 간 애정을 중시하는 문화는 어느 곳에나 있다. 그러나 한국인의 가족주의는 때로 혈연 가족의 범위를 뛰어넘는다. 가족이 아니어도 나이 드신 분을 어머니,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따뜻하고 예의 바른 관행으로 여겨진다. 식당에서 일하시는 분에게 이모라는 호칭이 자연스럽게 사용된다. 한국인의 가족주의 문화는 사회를 향해 더욱 확장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것 같다. 건강한 가족 경험이 다른 이들을 향한 가족적 연대로 이어진다면 이는 성경적으로도 매우 바람직하다. 다만 불안과 불신 속에서 더 큰 사회를 외면하고 내 가족만 챙기는 가족 이기주의가 장애물이었다. 요즘에는 전통적 가족의 해체가 더 큰 문제로 떠오른다. 화목한 가족은 줄어들고 병든 가족은 늘어난다. 최근 유행하는 비혼 비출산의 풍조도 좋은 가족의 모델을 경험하지 못해서라는 뼈아픈 진단이 있다. 


혈연 가족이 가족의 전부는 아니지만 사회의 가족적 연대를 위한 기초가 된다. 끈끈한 관계가 약해지고 느슨한 관계가 대세라고 하지만 인간에게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관계의 경험은 기본적인 생명력이다. 혈연 가족의 해체와 위기는 사회 전체의 정서적 안전을 위협할 수 있다. 이 점에서 가족적 연대가 상실되는 시대에서 종교의 역할이 더욱 커질 것이라는 비기독교인 심리학자의 진단은 의미심장하다(한국인의 마음속엔 우리가 있다, 235). 가족주의적인 한국 사회가 가족의 위기를 겪고 있으며, 그로 인해 취약한 소속감과 연대의 문제가 대두되는 것은 교회의 선교적 역할을 다시 일깨워 준다.


앞서 말한 것처럼, 한국인의 가족주의는 종교를 선택할 때 영향을 준다. 가족 간 종교가 다를 경우에는 더욱 신앙이 절실한 가족에게로 끌릴 수 있다. 과거에 비해서 신앙의 헌신이 약해졌다고는 하지만, 기독교는 불교나 천주교에 비해서 신앙의 정체성이나 활동성이 훨씬 강하다. 신앙의 목적도 마음의 평안과 같은 개인적 유익보다 구원과 영생이라는 종교적 이유가 현저히 높게 나온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확고한 복음적 신앙과 선교적 헌신이 필요하다. 믿지 않는 이에게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을 토대로 하나님 나라의 세계관을 믿고 살아가는 가족이 있다면 이는 비록 낯설지라도 신선한 도전을 줄 것이다. 그러나 그 믿는 가족이 혼자만의 신앙에 그치지 않고, 다른 가족 구성원들에 대하여 섬김과 관심의 삶을 보여 주고 그들의 질문에 대답을 준다면 그것은 그들의 영혼에 심오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가족을 섬기는 교회


가족의 해체와 위기가 현실이 되는 이 시대에 교회는 인간 공동체의 기본인 가족을 섬겨야 한다. 성경은 혈연 가족주의나 가족 이기주의를 넘어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가족을 지향하지만, 그렇다고 육신의 가정을 소홀히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바울은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라고 경고한다. 디모데전서가 교회의 직분과 목회적 소명을 언급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가족을 섬기는 의무는 교회의 중대한 사역이다. 인간은 가족 안에서 가장 원초적인 자기 정체성과 정서적 신뢰를 얻게 된다. 따라서 가족의 불안정은 인간됨의 근간을 무너뜨릴 수 있다. 따라서 교회가 성경의 가르침을 기초로 한 올바른 부부 관계와 자녀 양육을 지원하는 것은 설령 교회 성장을 위한 동기가 가미되었다 하더라도 오늘날의 시대 상황에서 화급한 과제를 맡는 것이다. 


한 가지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점은 교회의 가정사역이 소위 통념적인 ‘정상 가족’의 범주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비혼, 저출산, 이혼 등으로 인해서 다양한 가족 형태들이 등장하고 있다. 가족을 섬기는 교회의 사역은 생물학적 가족의 범주에 들지 못하는 이들을 사회적 가족까지 포괄하는 형태로 나아가야 한다. 사실은 교회 자체가 새로운 가족의 친교를 경험하는 곳이어야 한다. 이러한 가족적 유대관계의 맥락 안에서 신앙의 전수와 나눔이 이루어질 때 교회의 선교적 역량은 가족이라는 관계망을 타고 넘쳐흐를 것이다. 


교회를 섬기는 가족  


로드니 클랩은 “기독교 가정은 그리스도인들이 의도적으로 공동체적인 삶을 살아갈 때 선교 기지(mission base)가 된다”고 말한다(Families at the Croissroads, 61)고 말한다. 기독교 가정이 선교기지라는 말은 섬세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가족이 함께 단기선교에 가거나, 주변의 이웃에 열심히 전도하라는 말이 아니다. 물론 그러한 실천도 포함될 수 있지만, 이는 기독교 가정이 혈연 가족 이기주의를 넘어서 하나님 나라의 가족을 확장하는 데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물학적 가족은 아무리 중요해도 그 자체가 하나님 백성 가족인 교회보다 우위에 있지 않다. 그것은 유한한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리고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가족을 사모하며 그 나라를 알리고 넓히는 소명을 안고 있다. 기독교 가정의 건강성은 자기 혈육의 안정적이고 윤택한 삶 그 자체가 아니라 다른 이들을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가족으로 품기 위한 사명과 능력을 양성하는 데 있다. 기독교 가정은 가족 구성원 각자가 자신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부여하신 선교적 사명에 응답하도록 지원하고 협력하는 곳이다. 화목한 가족만으로는 가족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부응하지 못한다. 기독교 가정은 상호 섬김과 환대를 가족 내에서부터 가족 외의 이들에게로 확대하도록 부름 받았다. 

   

몇몇 조사들에 의하면 새로이 신앙을 갖게 된 이들의 상당수는 가족의 권유를 통해서 교회에 나온다(가족전도, 35-39). 미국이나 영국에 비해 우리나라는 기독교 신앙을 갖는 데 있어서 가족적 요인이 상대적으로 훨씬 높다. 기독교가 가족 종교화되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가족을 섬기는 사역뿐 아니라, 가족에게 선교적 삶의 가치를 알리고 경험하게 한다면 한국의 가족 문화는 기독교 신앙을 지속시키는 토양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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