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에 복음의 씨가 뿌려진 맨 처음 터”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목포양동교회

by 이종전 · 장명근2023-11-18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대한 강토에 선 첫 세대 교회들을 찾아 떠납니다. 그 이야기들에서 우리 신앙의 근원과 원형을 찾아보려 합니다.


호남에 선교사들이 찾아든 것은 군산과 전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곳을 선교구역으로 정한 미국남장로교회 선교부는 1893년 입국과 동시에 군산으로 가서 선교 가능성을 타진하면서 선교를 위한 전초기지를 찾았다. 그러나 이듬해 일어난 동학혁명이 정읍, 김제, 전주를 점령하는 상황으로 전개되자 선교사들은 서울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동학혁명이 수습되면서 다시 호남선교를 위해서 남장로교회 선교부는 선발대라고 하는 7명의 선교사를 전주로 파송함으로써 비로소 호남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렇게 전주에 거점을 마련한 선교부는 호남의 각 지역에 선교거점을 만들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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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부가 목포에 정착하기 전인 1894년 4월 18일 남장로교회 선교사 레이놀즈(William Davis Reynolds)와 드루(A. Damer Drew)가 처음으로 목포 선창가에 첫발을 디뎠다. 처음 방문과 함께 전도를 하고 있을 때, 서울 남대문교회에서 언더우드 선교사의 설교를 듣고 개종을 했다는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이것은 선교사들이 목포를 찾기 전에 서울에 전해진 복음을 듣고 개종한 한국인들에 의해서 이곳까지 전해지고 있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에 선교사들은 목포가 또 하나의 선교거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만복동에 2,500평의 토지를 매입한 후 1897년 3월 5일, 벨(Eugene Bell) 선교사의 어학 선생이면서 조사인 변창인이 전도를 시작했는데, 이것이 사실상 양동교회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해 10월 목포항이 공식적으로 개항을 함으로써 외국인들이 거주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이듬해인 1898년 11월에 벨과 오웬(Clement C. Owen) 선교사가 목포에 내려와 자리를 잡음으로써 본격적으로 목포 선교가 시작되었다. 이것은 남장로교회가 호남지역에 전주, 군산 다음에 세운 거점이다. 이후 남장로교회 선교부는 광주와 순천에 거점을 확보함으로써 호남선교를 위한 교두보를 만들었다. 


변창인의 전도로 공동체가 형성되었을 때 벨과 오웬이 내려왔고, 여자 선교사 미스 스트래퍼(F. E. Straeffer)도 동참했다. 벨은 변창인이 전도한 사람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목포에 선교거점과 함께 양동교회의 시작을 이끌었다. 그들 중에는 이미 세례를 받은 사람들도 있었다고 하니, 목포라고 하는 항구가 갖고 있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내륙 교통이 없었던 시대인 만큼 뱃길로 연결되는 다른 도시에서 이미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작된 목포 선교는 오웬은 의사로서 프렌치병원을 개원하여 진료를 시작했고, 스트래퍼는 정명학교와 영흥남학교를 열어서 목포의 아이들에게 신교육을 시작했으니, 이것은 목포에 있어서 서양병원과 근대교육이 효시가 되었다. 1897년 전도를 시작한 후 1년 만에 50여 명의 신자들이 형성되었고, 그들 중에 노학구를 비롯한 7명이 1899년에 세례를 받음으로 양동교회가 설립되었다. 이듬해인 1900년에는 30명의 세례 지원자가 나왔지만 문답한 결과 6명만이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세례 지망자는 많았지만 실제로 문답에서 탈락하게 된 것은 관습과 환경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세례를 받는 조건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주초나 축첩 같은, 당시 우리 사회에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가운데 세례를 받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신앙고백이나 성경 지식에는 합격했어도 그러한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세례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동교회의 경우 “김 씨”라는 사람이 세례를 받기 원했지만 세례를 받지 못했는데, 그의 직업이 술빚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오랜 고민을 했고, 결국 자신의 직업을 버리고 나서야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벨 선교사의 부인이 갑자기 별세함으로 벨은 두 딸을 데리고 미국으로 돌아갔고, 오웬도 안식년을 맞아 귀국하면서 목포와 양동교회의 지도자가 없어지게 됨으로 일시적이지만 위기를 맞았다. 또한 남장로교회 선교부가 정책적으로 광주선교부를 중심으로 일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스트래퍼와 프레스턴(J. F. Preston)도 광주선교부로 옮기고 폐쇄하려고 했지만 생각을 바꾸어 목포선교부를 유지하는 결정을 했다. 


벨과 오웬이 다시 돌아왔고, 군산에서 활동하던 해리슨(H. B. Harrison) 선교사가 새로 합류함으로써 목포선교부와 양동교회는 활력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날로 성장하게 됨으로 예배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1898년 8칸짜리 마련한 한옥 예배당으로는 수용에 한계가 있어서 1903년 18칸 규모로 증축했지만, 그마저도 수용 한계를 극복할 수 없을 만큼 성장함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예배당을 지어야 했다.


그 후 양동교회는 성장을 거듭하는 놀라운 결과를 얻었다. 500여 명으로 늘어난 신자들이 함께 예배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게 됨으로써 더 이상 한옥 예배당에서 정상적인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었다. 당장 좁은 공간에서 예배하자니 남자들은 예배당 안에서, 여자들은 영흥남학교 교실에서 따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양동교회 신자들은 어려운 생활고 중에서도 예배당을 짓기 위한 연보를 드리기 시작했고, 유달산 주변에서 건축에 필요한 돌들을 주워 모았다. 


그렇게 준비하여 1910년 3월부터 시작한 건축은 1년이라는 기간이 걸려서 완공되었다. 지금의 예배당은 기본적으로 이때 지은 것으로 서쪽에 있는 남자들의 출입문 위의 아치에 태극문양과 함께 새겨진 “大韓隆熙四年”(대한융희4년)이라는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자들의 출입문인 동쪽 출입문 위의 아치에는 “쥬강생일쳔구백십년”이라고 새겨 놓은 예배당 건축 연도는 그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석조 예배당이라는 것으로도 의미가 크다. 또한 예배당을 완성한 다음에 “로티 위더스픈 벨 기념예배당”이라고 명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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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현재의 예배당은 처음 건축 때와는 조금 다르다. 처음에는 정사각형 예배당이었는데, 일제강점기에 강대상 뒤쪽으로 20평 정도를 증축함으로 직사각형으로 바뀌었다. 또한 1982년 남쪽에 중앙출입문을 만들면서 4층 높이의 종탑을 세웠다. 그러나 그 원형을 훼손한 것은 아니기에 2004년에 등록문화재 제114호로 등재되어 관리를 받고 있는 예배당이다.


대개의 지역에서도 그랬지만 양동교회와 선교부가 운영하는 학교들은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당시 지역 만세운동의 중심이었고, 교회나 학교의 지도자들과 학생들은 만세운동을 주도하는 사람들이었다. 목포와 양동교회도 다르지 않았다. 목포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21일 정명학교와 영흥남학교 학생들과 양동교회 신자들 200여 명이 독립선언서를 뿌리면서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양동교회 담임인 이경필 목사와 서기연 장로, 양일석 장로, 그 외 신자들, 그리고 정명학교와 영흥학교 학생들은 예배당 지하실에서 목판에 태극문양을 새겨서 태극기를 급조했다. 또한 독립선언서는 광주에서 만들어 왔다.


이경필 목사가 이끄는 시위대는 만세를 부르면서 시내로 향했고, 그 과정에서 시민들도 합세하여 만세를 외쳤다. 이에 일본군은 칼을 휘둘렀고, 그 칼에 서상봉이 중상을 입고 치료를 받던 중 별세했고, 박상술은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는데, 결국 그 후유증으로 별세했다. 이경필 목사 역시 체포되어 목포형무소에서 모진 고초를 당했다.


1926년에 양동교회 담임으로 부임한 박연세 목사는 이미 군산 지역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죄로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른 민족지도자였다. 그가 양동교회로 부임한 후 설교를 통해서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대해서 제국주의 망상에 빠진 일본이 조선을 포함한 대륙을 지배하기 위한 욕심을 채우기 위한 전쟁이라고 설교하면서 비판했다. 칼과 힘으로 천황을 숭배하도록 강요한다고 할지라도 천황도 주님 앞에서 심판받아야 하는 대상일 뿐이라고 설교했다. 이런 설교를 하는 박연세 목사를 보고만 있을 일본이 아니었다. 결국 1942년 11월 11일 보안법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박 목사는 체포되었고, 상상할 수 없는 고문을 가했으며, 그럼에도 변화가 없자 겨울에 감옥에서 동사하게 만들었다. 1944년 2월 15일 박연세 목사는 믿음 하나로 살면서 신자들과 함께 신앙을 지키는 것과 나라의 독립을 위한 그의 입장을 포기하지 않고, 비록 그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차가운 감옥에서 차라리 얼어 죽기를 원했을지도 모른다.


현재 예배당 앞에 있는 ‘선교기념비’는 1986년 부활절에 한국 선교 100주년을 맞아서 목포의 교회들이 연합예배를 드리고 모은 헌금으로 세웠다. 교파와 교단을 떠나서 목포 지방에 복음이 전해진 것이 감사하고, 특별히 선교 100주년을 맞이해서 목포 선교의 출발지인 양동교회에 이 기념비(“이곳은 목포에 복음의 씨가 뿌려진 맨 처음 터”)를 세움으로써 감사한 마음과 함께 복음의 빚진 것을 잊지 않기를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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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종전 · 장명근

글 이종전 

이종전 목사는 고베개혁파신학교(일본), 애쉬랜드신학대학원(미국)에서 수학하고, 1998년부터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역사신학을 가르쳤고, 현재는 은퇴하여 석좌교수와 대신총회신학연구원 원장으로 있다. 인천 어진내교회를 담임하며 인천기독교역사문화연구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C채널 ‘성지가 좋다’ 국내 편에서 역사 탐방 해설을 진행하고 있다.


그림 장명근 

장명근 장로는 토목공학 학부(B.S.)를 마치고 미시간주립대학교에서 환경공학(M.S & Ph.D)을 공부했다. 이후 20년간 수처리 전문 사업체를 경영하였으며 2013년부터는 삼양이앤알의 대표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 취미로 그림을 그리고 있으며 정동제일교회의 장로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