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크리스마스처럼
by 서나영2023-12-06

크리스마스는 복음의 시작을 알린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인류에게 가장 좋은 소식이 선포되는 현장에서 그 장엄한 첫 문장을 시작하는 ‘감탄사’와도 같다. 대서사시 서막의 커튼이 올라가며, 그리스도인들은 이 시작을 가장 아름답게 장식하고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비록 그들이 고통 가운데 있을지라도, 복음의 소망을 다시 한번 기억하며 서로를 위로하고 기뻐하며 이 축제에 집중한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크리스마스에 관한 추억과 이미지를 쉽게 떠올린다. 타오르는 양초, 포인세티아의 싱그러운 붉은 잎사귀, 청아한 핸드벨 소리, 수많은 색색의 리본과 배너, 성가대의 칸타타, 어린이들의 캐럴, 성탄절 연극, 쏟아지는 음악들, 화려한 불빛과 전구 장식, 트리와 갖가지 장식, 주일학교마다 열리는 파티와 쏟아지는 선물, 교회마다 가장 큰 파티를 연다. 그 행복한 파티에 소외되는 사람이 없도록 구제 헌금과 선물 나눔도 빠지지 않는다.


그뿐이 아니다. 크리스마스는 교회 담을 넘은 축하 문화가 되었다. 거리마다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치장한 축제로 한창이며, 카페나 상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들은 세상 한가운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노래한다. 사람들은 따뜻한 마음으로 선물과 카드를 주고받으며, 자선모금과 기부를 통해 크리스마스에는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다고 말하는 있는 듯하다. 


그러나 나에게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던 이 크리스마스의 화려함과 기쁨을 되짚어 본 계기가 있다. 십여 년 전 미국의 기독교 철학자이자 문화신학자 마크 카펜저(Mart Coppenger)의 주도 아래 기독교 윤리, 변증학, 철학, 미학을 공부하는 박사과정 학생들이 함께 모여 길고 긴 크리스마스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여기저기 교회에서 겪은 무분별한 크리스마스 문화에 대한 우려와 비판에 관한 증언들이 쏟아졌다. 재정이 파산하기 직전인 상태지만 천문학적인 예산을 들여 거대한 크리스마스 공연과 파티를 한 교회 이야기, 조용한 크리스마스 예배와 행사를 원하던 목사님이 그 교회에서 쫓겨난 이야기, 복음의 진수는 참회와 회개인데 그런 언급은 절대로 하지 않게 된 크리스마스의 분위기, 크리스마스 시즌 상권의 이치를 설명하며 자본주의와 결탁한 타락한 교회 행사들 이야기, 부활절의 깊은 복음의 진리에 비해 크리스마스는 복음을 너무 가볍게 취급하고 있다는 이야기, 복음 전파를 위해 믿지 않는 마을주민에게 성대한 음식과 공연과 파티를 준비하지만 크리스마스로 인한 실제 결신자는 희박한 통계 등의 이야기들이었다. 


기독교 예술학 전공인 나에게는 크리스마스의 본질을 헤치는 화려함과 장식성의 자본주의 예술에 대한 비판처럼 들렸다. 그 누구보다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학생으로 나는 한국의 크리스마스 문화를 떠올렸다. 오래전 한국의 어느 대형 교회가 미국의 한 크리스마스 공연을 카피해서 실제 낙타를 성탄 예배 무대에 세운 적이 있었다. 아기 예수의 해산을 앞둔 동정녀 마리아를 태운 낙타의 등장으로 주목을 받았다. 결국 신성한 예수 그리스도 탄생극에서 낙타나 배설물을 분출하는 바람에 모두 코를 막고 애를 먹었다는 뒷이야기와 함께 말이다. 신학교 토론에서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사례들도 생각이 났다. 서울 근교 지방의 한 교회는 크리스마스 정기 음악회에 초청된 한 기독교 대학 여성합창단이 마지막에 단체로 치마를 걷어 올려 다리 노출 서비스를 보였고 회중을 소리 지르게 하는 깜짝쇼를 펼쳤다. 서울의 한 교회 크리스마스 연말 음악회에서는 한 여성 솔리스트가 가슴의 반이 보이는 노출 심한 드레스를 입고 노래를 했지만, 목사들을 비롯해 그 누구도 복장을 문제 삼지 않는 기독교 문화를 만들었다고 말이다.


마냥 기쁘지만은 않은 토론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진귀하고 값진 결론을 얻었다. 크리스마스의 본질을 아름답게 표현할 유일한 매개체이자 타락의 원흉이기도 한 예술에 대해 말이다. 후에 한국에 돌아와 기독교학자들, 교회 리더들, 신앙을 가지고 있는 예술가들에게서 많은 질문을 받아왔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술을 즐길 때, 교회에서 예술에 대해 예산편성을 할 때, 예배 예술의 올바른 모습에 대해 그리스도인이자 예술가로의 삶을 살 때, 그 예술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냐?”고 말이다. 나의 답은 이렇다. “예술은 크리스마스처럼 하라.” 


크리스마스와 같은 예술은 ‘예수 그리스도로 중심을 잡는 예술’을 말한다. 크리스마스는 예수 그리스도에 그 모든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이 간단한 명제는 실제로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한 그리스도인이 그 길고 긴 순례의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계속해서 집중력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매력적인 상징들과 주제들이 많기 때문에 숙련된 영성으로 집중을 다해도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가 그 작품의 주인공이 되어 감상하거나 만들어질 수 있다고 장담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기독교 예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술을 크리스마스처럼 하라”는 문장은 두 가지 상충하는 흐름이 만나는 지점이다. 첫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끊임없는 집중력이 필요하다는 의미의 표현이다. 예술의 세계는 인간의 내면과 세상의 세계만큼 복잡하고 넓기에 예수 그리스도에게 끊임없이 집중하기란 불가능해 보일지도 모른다. 때로 나는 성경을 읽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견지하는 일이 쉽지 않다고 느낀다.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예술작품은 성경이다.) 어제 읽은 욥기와 욥이 친구들 사이에 오간 길고 긴 대화를 읽으며, 나는 상담자의 자세와 타인의 고통의 문제를 묵상했다. 욥의 고통을 통해 그리스도의 희생과 구원을 묵상하는 것에는 상당한 집중력과 시간이 소모됐다. 


죄성으로 인한 개인의 약함뿐 아니라 문화적 영향력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것을 강력하게 방해한다. 오늘날 기독교 문화는 개인의 안위와 자율적 선택에 젖어 있는 문화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는 삶의 많은 주제와 생각의 틀을 들여다보면, 월요일부터 토요일 사이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완전히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는 가정이 이상한 것이 아니다. 모던하고 편리하게 디자인된 교회 건물 안에서 정숙해 보이는 회중이 부르는 웅장한 찬양 속에 세련된 신앙생활을 하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나 그리스도에 대한 초점을 잃지 않는다고 우리는 말할 수 없다. 충분한 예산을 들여 수준 높은 각종 크리스마스 기념행사에 온 교회가 전력투구해도 그리스도께 온전히 집중하고 있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이런 위험들을 인지하고 날마다 순간마다 그리스도를 인식할 수 있는 초인간적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는 성령의 조명하심과 도우심이며, 우리는 그것을 영성이라고 부른다.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지식이 하나님과 대화하는 기도가 되게 하고 찬양이 되게 하는 관계적 영성 말이다. 이 영성 없이 기독교 예술을 누리고 영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술을 크리스마스처럼 하라”는 두 번째 숨은 의미는 예술이 하나님 나라에 얼마나 중차대한 일인가를 기억하며 진정성을 가지고 임하라는 말이다. 때로 진리를 말하는 것은 어렵고도 두려운 일이다. 오늘날은 너무 많은 기독교학자와 리더들이 진리를 그저 냉정한 객관적 진리이기를 추구한다. 마치 과학적 진리를 보존하듯,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을 토론한다. 그러나 그것을 전하는 참된 증인은 다르다. 증인은 먼저 자기가 말하는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을 넘어 경험하고 체험하여 온몸에 체화된 상태에서 나올 수 있다.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서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설명하고 전달하라는 지시를 받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두루마리를 먹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유진 피터슨은 이 명령의 목적이 우리 몸에 흡수를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마치 우리가 음식을 먹으면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신경 조직과 근육에 흡수되는 것처럼 그가 입을 벌려 말할 때 그것이 문장 속에 자연스럽게 표현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예술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을 예수 그리스도가 제시하시는 길이자 진리이자 영원한 생명이란 것을 경험하도록 돕는다. 때로는 그 진리를 나르는 도구를 넘어 완전한 하나가 되기도 한다. 크리스마스를 생각해 보자. 크리스마스에는 그 어떤 교회도 그저 언어적 설명으로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지 않는다. 교회는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며 촛불과 색색의 전구로 꾸민 빛의 예술의 장으로 변한다. 천사들이 노래했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외침은 헨델의 메시아로 울려 퍼지고 갖가지 악기들이 그날의 찬송을 재현한다. 


온 교회는 크리스마스의 영광이 말로 다 표현될 수 없는 것임을 이미 알고 있다. 인간의 지성으로는 그 영광의 광대함을 도무지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안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기도 하다. 누가복음에서 천사가 찬송하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고, 계시록에서 회중이 찬송을 부리는 동안 일곱 천사의 심판이 준비되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닦는다(계시록 8-12). 성막과 성전의 수많은 상징으로 인해 그리스도가 예표되고, 음악과 이미지의 환상 속에 선지자들은 메시아의 구원을 예언했다. 


예술은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필수불가결한 중심 행위다. 크리스마스처럼, 예배와 일상의 장소에서 노래를 부르고, 시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건물과 장소를 깨끗이 청소하여 정돈하고, 아름다운 언어로 다듬으며 전하고 치유하는 사명을 감당한다. 이 모든 활동의 중심은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 중심을 올려드리는 예술적 예배가 되어야 한다. 


많은 예술가가 자기 작품에서 그리스도에 관한 자신의 신앙을 나타내야 하는지 고민한다. 또한 많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이 매일 대하는 문화예술에 대해 고민한다. 이 아름다운 12월, 이들에게 ‘크리스마스 예술’처럼 “용기 있게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예술을 추구하자”고 제안하고 싶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을 적극적으로 찾아 경청하고 응시하자고, 세상 한복판에서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예술을 갈망하자고 외치고 싶다. 매일이 크리스마스처럼 기뻐야 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 예술은 크리스마스처럼 하자. Soli Deo gl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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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서나영

서나영 박사는 미국 남침례신학교(SBTS)에서 교회음악(MM)과 신학(M.Div.equi.)을 공부하고, 기독교예술학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총신대학교 객원교수, 미국 스펄전 대학교 초빙교수로 있으며, 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에서 문화예술파트 전임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