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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

손편지의 온기
by 양혜원2023-12-11

예쁜 카드나 엽서를 보면 사는 것도 좋아하지만, 거기에 몇 자를 적어 누군가에게 보내는 것도 좋아한다. 간단한 안부든, 감사의 표현이든, 생일 축하든, 크리스마스나 신년 축하든, 비록 글씨는 잘 못 쓰지만, 그래도 직접 손으로 써서 봉투에 담아 어울리는 스티커 하나 장식으로 붙이고, 주소를 적어 우체국의 손을 거쳐 상대에게 보내는 것으로 나의 마음을 전달하고 나면 제법 마음이 훈훈해진다. 지난가을에는 처음으로 일본어로 그런 감사 엽서를 교토 어느 카페의 여사장에게 적어 보냈다. 


교토의 가을을 노래하는 친구의 꼬임에 짬을 내어 조금 긴 주말의 형식으로 짧게 여행을 다녀온 후였다. 그때 교토의 어느 절 근처에서 다리를 쉬기 위해 들어간 카페의 사장은 마실 것도 몇 개 없는 메뉴가 전혀 허전하지 않게, 카페라테의 거품을 직접 내와 풍성하게 얹어 주고 교토의 다과라며 서비스도 주고, 지도를 펼쳐 보이며 근처에 가볼 만한 곳들을 소개해 주었다. 볼펜으로 경로를 표시해 주면서, 다리는 튼튼하냐, 튼튼하다면 여기까지 한 50분 걷는데 가 볼 만하다는 둥, 상대의 연령대를 감안하는 듯한 세심한 안내였다. 그러고는 더 이상 별다른 간섭없이 편하게 커피를 마시고 경치를 감상하다 가게 해 주었다. 적절하게 다가가고 적절하게 물러나는 그 주인의 손님 접대에 마음이 따뜻해졌고, 그 여운 또한 길었다. 받아온 지도에 마침 그 카페의 이름과 주소가 도장으로 찍혀 있기에, 나중에 기억할 요량으로 보통은 현지 여행이 끝나면 버리고 오는 지도를 한국까지 챙겨서 왔는데, 아, 주소가 있으니, 카드도 보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마침 교토에서 산 가을에 어울리는 엽서가 있었고, 새로 산 잉크 펜도 있었다. 


일본에서 알게 된 지인들과 말은 짧은 일어로 해도, 편지나 카드를 보낼 때는 영어 아니면 한국어로 썼었기에, 일본어 편지는 처음이었는데, 볼펜과는 다르게 새로 산 잉크 펜으로 일본어를 쓰니 글씨가 제법 그럴듯하게 써졌다. 그때 참 고마웠다, 당신이 안내해 준 곳도 가 보았는데 좋았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거품 폭신한 카페라테 마시러 가겠다는 내용의 글을 쓰고는, 봉투를 봉하고, 스티커를 붙이고, 우체국에서 떠나보냈다. 그 여사장이 이 엽서를 제대로 받았을지 어땠을지, 받고는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모르지만, 그의 환대에 이렇게 반응함으로써 내 나름으로는 한편의 마음이 아니라 주고받는 마음이 되고 싶었다.

 

카드를 쓰는 즐거움은 일찍이 십대 시절에 터득했다. 크리스마스를 유난히 좋아해 11월 말부터 크리스마스 캐럴을 틀어놓고 누구에게 카드를 보낼 것인지 리스트를 만들고 선물은 누구에게 무엇을 할지 고민했다. 십대 초반을 영국에서 보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크리스마스 장식부터 선물 아이템까지 일찍이 가게와 거리를 장식하는 통에 그 분위기에 휩쓸리기도 쉬웠지만, 우편물이 몰리기 때문에 크리스마스 전에 카드가 한국에 도착하게 하기 위해서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마찬가지의 이유로 나의 크리스마스는 일찍 시작되었다. 크리스마스 안에 우편물이 도착하려면 언제까지 발송해야 하는지 날짜를 확인하고 거기에 맞추어서 카드를 부치기 위해서 일찍부터 리스트를 만들고 카드를 준비하고 카드 메시지를 썼다. 


나의 카드 쓰기는 크리스마스에만 국한되지 않았고 누군가의 생일에는 생일 카드를 썼고, 그 외에 편지도 수시로 썼다. 사실 핸드폰도 없고, 전화기도 한 가정이 하나를 쓰던 시절을 살았던 우리 세대에게 편지로 그간의 일을 전하고 상대에게 하고픈 말을 하는 것이 그리 낯선 일은 아니다. 처음 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자기가 다니는 학교의 학보를 보내는 것으로 안부를 전하는 풍습도 있었다. 중학교 이후 소식이 끊긴 친구로부터 어느 날 대학교 과사무실로 그가 보내온 학보를 받았을 때 얼마나 반가웠던지. 학보를 감싼 하얀 띠지는 편지지와 봉투의 역할을 다하여 겉에는 주소가 적히고 뜯어서 펼치면 안에 편지글이 있었다. 대개는 간단한 인사말 정도였지만, 그래도 이런 우편물을 받으면 누군가가 나를 기억해 주었다는 기분이 들어 하루 종일 마음이 따뜻할 수 있었다. 


내 또래의 사람들도 더는 편지도 카드도 쓰지 않은 시절이 오고 나서도 나는 제법 꾸준히 카드도 쓰고 편지도 썼다. 물론 그 대상의 수는 급격히 줄었다. 문자와 이메일이 주된 소통 수단이 되고 나서는 손으로 쓴 카드나 편지는 아무래도 좀 특별한 계기나 대상에 국한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 또한 40대로 들어서면서는 그나마도 거의 하지 않게 되었고, 크리스마스카드를 미리 챙겨 해외로 대량 발송하는 일도 없어졌다.


그러다가 카드를 보낼 사람의 리스트를 다시 짜게 된 것은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일본에서 방문연구원으로 지낼 때였다. 카드라기보다는 사실 연하장이었는데, 일본의 큰 명절은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신년이었고, 그때 일본 사람들은 카드가 아닌 엽서 형태의 연하장을 인사로 주고받았다. 일본에서 산 지 1년 정도 지나면서 나에게도 친구와 지인들이 생겼기에 그곳에서 생긴 인연들을 챙기면서 나는 연하장을 준비해 보냈고, 그들도 내게 연하장을 보내주었다. 


비단 연하장만이 아니었다. 일본에서 내가 다니는 길목에 우체국이 있어서도 그랬지만, 일본 문화 전반에 아직도 편지 쓰는 관습이 남아 어딜 가나 쉽게 이쁜 편지지와 엽서 등을 접할 수 있어서 일본 사는 동안 한동안 잊었던 편지 보내는 습관을 다시 붙여 부지런히 이 나라 저 나라의 지인에게 우편물을 보냈다. 이제 긴 편지는 쓰기 어렵게 되었어도, 이쁜 카드나 엽서에 제법 빽빽이 적어 보냈다. 이 재미가 쏠쏠했는데, 귀국하자마자 맞닥뜨린 코로나 기간 아주 비싼 특급 우편 외에 일반 우편물을 해외로 보낼 수 없다는 게 내게는 매우 답답하고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한국에서는 해외로 비싼 특급 아니면 일반 우편은 아예 부쳐주지를 않았는데, 일본에서는 우편물이 왔다. 연하장을 보내준 은퇴하신 여교수님도 있었고, 엽서와 기념품을 정기적으로 챙겨서 보내주는 친구도 있었다. 나는 받기만 하고 보내지를 못해, 문자로, 이메일로 고맙다, 아직 한국에서는 우편물을 부칠 수가 없어 안타깝다 메시지를 보내며 정말로 안타까워했다. 문자도 보낼 수 있고, 이메일도 할 수 있고, 심지어 줌으로 얼굴도 볼 수 있었지만, 인간 대 인간의 접촉을 최대한 자제해야 했던 시절에 손으로 쓴 편지를 받는 일은 좋은 기분이 며칠간 이어질 만큼 훈훈한 일이었다. 


편지 쓰기를 자제해야 했던 그 시절에 딱 한 번 특급 우편을 보낸 일이 있다. 그리고 그 편지는 내가 유일하게 반송을 받은 편지가 되었다. 수신인은 작고한 유진 피터슨의 아내 잰 피터슨이었다. 


2018년 10월, 일본에서 유진 피터슨이 작고한 소식을 들었다. 나는 그의 책을 열두 권 번역했고, 2012년에 몬태나에 있는 그의 집에도 방문하여 하룻밤을 머문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유진과는 인터뷰를 진행했지만, 사적인 대화는 잰과 더 많이 했던 거 같다. 둘째 아들이 막 이혼의 아픔을 지나고 새로운 출발을 했을 무렵이라 그런지 나에게 이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도 물었고, 나의 스스럼 없음이 편했던지 너라면 언제든 환영이라는 말도 해 주었다. 혹시 잰은 글을 쓰지 않냐고 물었더니, 꾸준히 써온 일기가 있다며 주변에서 출판하라는 말도 한다는 이야기도 해 주었다. 나 또한 꼭 출판해 달라고 부탁했다. 미국을 떠나기 마지막까지 유진과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나는 늘 유진과 잰의 이름으로 편지를 보냈었다. 그리고 일본으로 와서 어느 정도 정착이 된 후에 그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처음으로 답장이 없었고, 그로부터 1년 후 그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나의 마음은 당장 잰에게로 향했다. 그에게 편지를 쓰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무슨 말을 어떻게 써야 할지 잘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런 마음으로 일본 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는데, 코로나 기간을 지나면서, 아, 더는 미룰 수 없다, 그를 기억하는 내 마음을 전해야겠다는 생각에 큰마음 먹고 몇만 원짜리 특급 우편으로 그에게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남편이 작고했으니, 여전히 몬태나의 그 집에 그가 살고 있는지 확신은 없었지만, 그 집의 내력을 생각할 때 어떻게든 편지가 전달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후 편지가 반송되었을 때, 한편으로는, 그래 내가 너무 늦었지, 생각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어쩐지 내 마음을 거절당한 것 같아 조금 슬프기도 했다. 내가 그 편지를 보냈을 때 그는 이미 사망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1년이 지난 후였다. 내가 만났을 때의 잰은 유진과 달리 여전히 힘이 있어 보였기에 나는 그가 이디스 쉐퍼처럼 남편을 먼저 보내고도 그 후로 오래 살면서 책도 쓰고 할 줄 알았다. 그런데 남편이 가고 불과 8개월 만에 그도 갔다는 것이다. 수취인불명이라더니,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분에게 보낸 이 편지는 정말로 수취인불명인 채로 발신인에게로 돌아와 버렸다. 


나의 편지쓰기가 조금 이례적으로 보일지 모르나, 그리스도인에게 편지는 사실 매우 친숙한 매체이다. 알다시피 신약 성경의 태반이 편지이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날의 편지처럼 개인 대 개인 사이의 글은 아니지만, 불특정 다수를 위해 쓰는 소설과 같은 장르의 글과 달리, 편지는 수신인이 있고, 그 수신인을 염두에 두고 쓰는 글이다. 하지만 분명한 수신인이 있다고 해서 의도대로 전달된다는 보장이 없는 것 또한 편지의 특징이다. 편지는 우편 사고로, 혹은 나의 경우처럼 상대가 사망해서, 수신인에게 전달되지 못할 수 있다. 제대로 전달된다고 해도 내가 전하고자 한 마음 그대로 수신인이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보장도 사실은 없는 게 편지이다. 자기 나름으로는 정성스레 쓴 편지가 상대의 손에서 찢겨버릴 가능성도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다. 


자신이 만난 적이 없는 로마의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바울은 자신과 자신의 메시지가 제대로 그들에게 전달되고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얼마나 확신할 수 있었을까. 다른 서신서보다 훨씬 더 개인적인 빌레몬에게 쓴 편지의 경우도, 감정적으로 제법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으로 보이는 오네시모와 빌레몬과 바울의 관계에서 과연 이 편지는 그 필자가 의도한 대로 전달자와 수신자 사이를 화해시킬 것인지, 그것은 제법 권위 있게 비치는 바울조차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자신의 선의처럼 빌레몬의 선의도 기대하는 마음으로 바울은 그 편지를 쓰지 않았을까.


달력이 12월을 넘기니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아, 크리스마스카드, 연하장, 이다. 그와 동시에 몇 명의 얼굴들이 떠오른다. 직장을 옮기면서 7월부터 유례 없이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지만, 그래도 너무 늦기 전에 짬을 내어 새로 산 잉크 펜을 들고 ○○에게, 혹은 ○○께와 함께 시작하는 카드 편지를 몇 장을 써야 할 것 같다. 지금도 서랍에는 수취인불명으로 돌아온 카드 편지가 봉해진 그대로 남아 있다. 제대로 도착할지 받은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내 손을 떠난 보낸 편지의 운명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그 온기를 전하는 한쪽 편의 일은 하고 싶다. 원래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의 선의(good will)가 당신과 함께한다는 좋은 소식(good tidings)을 전하는 시즌으로 오랫동안 교회는 지켜 왔다. 이 소식을 받는 사람의 반응과 상관 없이 전하는 사명을 받은 것도 교회이다.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의 선의가 함께하시기를, 그리고 그 선의의 온기도 계속 전해 나가시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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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양혜원

이화여대 아시아여성학센터 특임교수.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여성학 석사 수료 후 미국 Claremont Graduate University에서 종교학으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오랜 세월 번역가로 일하면서 유진 피터슨, N. T. 라이트, 알리스터 맥스래스, C. S. 루이스, 헨리 나우웬, 미로슬라브 볼프, 일레인 스토키의 저서 등 90여 권의 번역서를 출간하였고, 유진 피터슨 읽기: 삶의 영성에 관하여, 교회 언니,여성을 말하다, 교회 언니의 페미니즘 수업, 종교와 페미니즘, 서로를 알아가다, 박완서 마흔에 시작한 글쓰기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