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에게 권리는 무엇인가
by 이춘성2024-04-17

지난 3월 4일, 프랑스 의회는 여성의 낙태권을 헌법에 담는 헌법 수정안을 의결하였다. 프랑스 국민의 85퍼센트가 이를 찬성하였고, 우파의 지도자조차도 반대하지 않았다. 낙태권을 명시한 수정 헌법의 전문은 간단하다. “여성이 자발적으로 임신을 중단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는 조건을 법률로 정한다”(프랑스 헌법 34조). 이는 낙태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것이다. 비록 그 조건을 하위 법률로 정한다고 하지만, 이는 낙태의 자유를 제한할 수 없는 범위에서만 가능한, 명실상부한 낙태권을 의미하는 것이다. 


프랑스가 낙태를 권리로 정하게 된 것은 현대인의 권리에 대한 강박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그 이유는 현대인이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보장받고자 하는 극도의 개인주의의 지배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전체주의의 지배 아래에서 개인의 철저한 파멸이라는 양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서양 사람들에게는 개인의 권리는 일종의 국가와 사회의 폭력에서 자신을 지키는 것에서 더 나아가 사회를 보호하는 윤리적 가치로 승화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주의의 시작이 아무리 정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현재 개인주의는 일종의 개인과 개인, 권리와 권리의 투쟁이 되어 버렸다. 그 중간 지대로, 대화와 타협, 보류 등과 같은 어색한 영역과 지루한 시간을 남겨두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자신이 손해 볼 것이고, 현대인에게 손해란 자신이 부정당하는 살인(인격 살인)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렇듯 권리 충돌의 시대를 살고 있다. 대화보다는 권리로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는 영역 표시의 동물적인 세상이 되어 가는 것이다. 권리는 확대되고 있지만, 권리의 의미와 명예는 그 어느 때보다 가볍다. 프랑스 의회의 낙태권 수정 헌법 통과를 반대한 프랑스 상원 의장인 제라르 라르셰는 프랑스의 헌법이 “사회권의 카탈로그”가 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헌법은 개인의 권리를 전시하고 항목을 선전하는 카탈로그라는 것이다. 이렇듯 권리의 전시장이 되어 버린 현대 사회 속에서 기독교는 어떤 권리를 주장해야 할까? 그리고 우리가 주장하는 권리는 과연 세상에 복음을 변증할 수 있을까?


나는 이십 대 후반에, 바다가 인접한 산골짜기의 기독교 공동체에 들어가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이런 인생을 살 것이라곤 이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기도와 독서로 시작하는 하루와 노동이 어우러진 삶은 이상적으로 보였다. 찾아오는 손님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고 그들의 고통을 들어주는 것은 내가 무엇인가 되는 듯한 착각을 만들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태풍이 찾아왔고, 우리의 터전은 하룻밤 사이에 폐허가 되었다. 공동체 사람들은 재난을 피해 도망쳤고, 전기는 끊겼으며, 차길 위에는 어느 산에서 굴러왔는지 알 수 없는 커다란 바위가 피난 길을 막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매일 새벽 6시부터 해가 지는 저녁까지 삽과 곡괭이를 들고 온몸이 부서지는 듯한 노동을 시작했다. 이렇게 3개월이 지나서야 마당의 흙과 바위를 치우고, 집을 수리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술에 취한 오토바이를 탄 한 사람이 찾아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돈을 달라고 했다. 그는 마당에서 일을 도와준 고용된 일꾼이었다. 어이가 없었던 것은, 그가 고작 하루치 돈을 받지 못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40만 원도 되지 않는 사례금을 몇 달 동안 받지 못하고 밥만 먹으면서 일하고 있었다.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그 사람을 향해 소리치며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데 당신은 이렇게 권리만 주장하느냐고 화를 냈다. 나는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문득 그때의 일이 20년이 지난 지금 떠올랐다. 그때의 공기와 온도, 분위기가 모두 생각났다. 아마도 그 이유는 지난 주일, 내가 어느 교회에서 설교한 내용이 아직도 내 안에 메아리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토요일 오후 갑자기 어떤 목사님이 문자를 보내서, 자신이 코로나에 걸려 주일 설교가 어려우니 주일 1, 2부 설교를 부탁한다고 했다. 얼마나 어려운 상황이었으면 나에게까지 연락했을까 하여, 거절하지 않고 수락하고 주일 설교를 준비했다. 그러면서 ‘이 설교는 그 교회 성도들이 아닌 나에게 하는 설교입니다’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리고 설교가 끝난 후에 설교의 내용이 아직도 내 안에 메아리가 되어 돌아다니고 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누가복음 14:11).


20년 전 그날 밤의 일이 후회된다. 나는 낮아지려고 그 산속으로 온 것인데, 그곳에서 나는 권리를 주장하면서 내가 당신의 고용자라고 소리 높여 나의 높음을 자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는 모두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돌아보니 그는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불렀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내 이름을 포길 할 때만 스스로 부를 수 있는 이름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자기의 권리를 포기한 이름 없는 자의 정체성을 받은 자들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나는 내 이름이 없는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빌려 쓰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내 이름으로 권리를 주장하고 있었다.


여전히 나는 나의 권리를 중요하게 생각할 때가 많다. 권리의 전쟁터에 참전해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땅을 얻고 싶다. 그러나 이렇게 얻은 권리가 그리스도의 나라를 조금이라도 더 넓힐 수 있다고 확신하는지 누군가 묻는다면, 난 할 말이 없다. 권리를 주장하는 것으로는 사람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성육신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권리를 포기하고, 누군가의 권리 아래 폭력에 희생당할 때, 그래서 권리를 주장하는 것으로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만드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보여주신 복음의 역설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 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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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춘성

이춘성 목사는 20-30대 대부분을 한국 라브리(L'Abri) 간사와 국제 라브리 회원으로 공동체를 찾은 손님들을 대접하는 환대 사역과 기독교 세계관을 가르쳤다. 현재 분당우리교회 협동목사, 한국기독교윤리연구원(KICE) 사무국장으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