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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다움(masculine)의 미래
by Greg Morse
2020-12-14
“당신은 남성다움(masculine), 그 자체에 불쾌감을 느끼는 거야. 황금 사자, 수염 난 황소와 같이 크고, 방해가 되지 않는 소유물은 난장이들이 조심스럽게 만든 침대를 마구 흩어놓을 때 울타리를 뚫고 나가서 당신의 원시 왕국을 흩어지게 만드는 거지.” 감독은 제인에게 이렇게 말한다.남성다움 그 자체에 불쾌감을 느낀다니.바로 이 지점에서 C. S. 루이스(C. S. Lewis)의 우주 이야기 3부작의 피날레 ‘그 가공할 힘’(That Hideous Strength)에서 불행하게 결혼한 주인공 제인은 오늘날 우리가 현대 여성으로 간주할 수 있는, 그런 인물이 된다. 소설 속에서 제인은 강하지만 복종하는 기독교인 아내인 미세스 딤블이 드러내는 여성성과 정반대 위치에 자리잡은, 직업을 추구하는 평등주의 비기독교인이다. 지금까지 존경심과 경외감을 갖고 바라보던, 사실상 황금 사자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감독을 제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살던 세상이 기울어지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평소에 갖고 있던, “인간이 아닌 물물 교환의 대상이자 욕망 및 소유의 목표물로 취급되는, 도무지 잊을 수 없는 여성으로서의 공포”가 다시금 떠올랐다. 그녀는 이제야 남성다움을 어느 정도 멀찍이 둘 수 있을 정도로 힘든 한숨과 비웃음의 세월을 보냈었다. 그녀는 자신의 원칙에 따라서 남편 마크를 선택했다. 마크는 그녀를 “정말로 이해했다”. 이해한다는 말의 의미는 마크가 제인의 자주적인 행동에 그 어떤 위협을 가하지 않았고, 그녀가 원치 않는 것은 그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인은 갑자기 현실이 그녀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턱수염에 당황해서우리는 지금 제인으로 붐비는 사회에 살고 있다(비록 운전면허증 속 이름은 제이슨이라고 해도).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모든 페미니스트들은 턱수염 난 황소에게 반항하며, 그에게 거칠고 억압적이며 위험한 존재라는 딱지를 붙인다. 많은 사람들이 우주의 포효, 인류의 머리, 창조의 왕, 남자, 등등의 단어에 불쾌감을 느낀다.오늘날의 “덕이 있는(virtuous) 남자”는 그냥 남자보다 훨씬 더 큰 미덕으로 묘사된다. 그는 순응하고, 존중하며 또 부드럽다. 무엇보다 그는 나이스한 사람이다. 번듯한 직장이 있고 세금을 내며, 항상 겸손하게 머리를 숙이고, 스캔들과 “학대”라고 부를 수 있는 모든 것을 피하는 사람이다. 그는 안전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이 죄악으로 물든 세대를 향해서 그 어떤 위험도 감수할 뜨거움도, 열정도, 힘도, 그리고 그 어떤 목적도 그에게서는 찾을 수 없다. 전통적인 남성다움-근육질이고, 대담하며, 무게감이 있는 것-은 이제 인기를 잃어가고 있다. 오히려 불쾌감을 유발한다. 그렇기에 현대를 사는 남자라면 결코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기독교인이라고 고백하는 많은 사람이 제인의 관점에 빠져 있다. 오래된 진리로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 머리와 돕는 자(역자 주: 아담과 이브에게 붙여진 호칭, 즉 남자와 여자를 의미함) 둘 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다. 또한 두 사람 다 그 가치라는 면에서 서로 동등하고, 서로가 서로를 의존하며 또 무엇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은혜를 공동으로 상속한다(창 1:27; 고전 11:11-12; 벧전 3:7). 그러나 이런 진실도 서로에 대한 구분이 남아있는 한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그런 사람들은 다음 구절을 좋아하지 않는다.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고전 11:7). 여자가 남자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말에 불쾌감을 느낄 뿐이다(고전 11:9). 그들은 공동체 모임에 대한 바울의 말을 읽을 때면 몸서리를 치며 고개를 흔든다.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딤전 2:12–13).그들은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신 것처럼 모든 남편이 아내의 머리이며 합법적인 한 모든 일에서 주님께 복종하듯이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말하는 결혼 서약서에서 실질적인 중요성을 보지 못하겠다고 주장한다(엡 5:22-24).남성다움이 과거에는 지배라는 형태로 타락해서 왜곡되었다면, 이제는 무관함(irrelevance)이라는 형태로 타락해서 왜곡되고 있다. 바로 이런 사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남자의 시대는 지났다고 결론 내리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그렇기에 이제 남자는 여자에게 권한을 부여해야 하고 대신 남자는 여자가 힘을 써도 된다고 허락할 때에만 움직이는 존재로 인식하라는 것이다. 제인의 많은 아들과 딸이 생각하듯이, 이제 미래는 여성다움이 다스리는 시대라고 한다. 우리가 도망칠 수 없는 그 남자감독의 다음 말은 은유의 힘을 통해서 제인에게 충격을 줬다. 그리고 우리도 조금만 깊이 생각한다면 똑같은 충격을 받을 것이다. “당신이 탈출할 수 있었던 수컷은 생물학적 수준에서만 존재해. 그러나 남성다움, 그 자체에서 탈출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 모든 것 위에 또 그 너머에 있는 그것은 너무도 남성다워. 그래서 그와 관련해서는 우리 모두가 다 여성적일 수밖에 없지. 더 늦기 전에 당신의 적과 동의하는 게 좋을 거야.”(313)저 위에 왕관을 쓰고 앉은 그는 도무지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남성적이다.우리 세대가 남성다움을 조롱하고, 비하하고, 또 왜곡하는 정도에 상관없이 감독은 제인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이것이 일시적인 일이 아니라고 상기시킨다. 이 땅에서야 남편, 아버지, 그리고 왕을 피하고 부끄러워하고 누르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영원하신 그가 오신다. 그는 남편이자 아버지이고 또 심판자이자 왕이시다. “영혼은 이 땅의 남성을 우회하여 훨씬 더 남성다우며 또 훨씬 더 높은 분을 만나러 나아갈 수 있으며, 그 분 앞에서 더 깊이 굴복해야 한다.”오늘날 고대 바리톤 안에서 아름다움을 만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매혹적인 반주, 바리톤의 목소리에 맞는 또 다른 목소리,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여성스러운 음색에 감동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많은 사람들은 이제 같은 음표가 피아노에서 연주되고 남자와 여자 목소리가 동등하게 울려 퍼지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영원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따라다닐 차이를 결코 보지 못하게 된다. 저기 머무는 이의 소리가 천둥과도 같고 그의 낮은 울림이 참나무를 떨게 하고 숲 전체를 벌거벗게 하신다 (시 29:9). 당신이 만나는 거룩한 성도들 중에서, 비록 불완전하지만 진실된 남성다움을 사랑할 수 없다면, 지금 당신이 눈으로 볼 수 없는 거룩한 그 분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아빠라는 이름의 여자?그런데 하나님이 남자(he)라고? 그가 생물학적으로 남성이나 여성이 아닌데 왜 우리는 피조물 영역에서나 존재하는 그런 사소한 성적 구별을 하나님에게까지 해야 하는가? 제인도 처음에는 같은 질문을 했다. 그녀 또한 영적 영역에서는 성별과 같은 구분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영적 세계로 가는 상승의 모든 단계에서 서로 간의 대비가 주는 차이가 더 풍부하고 더 날카롭고 오히려 더 치열할 수도 있겠다는 의혹이 생겼다”(312).다시 말해, 그녀는 이제 평등한 결혼은 중성적인 영원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라는 애초의 가정을 재고해야 했다. 그녀는 이제 그녀가 지상에 있는 자신을 침범하는 남성적 머리라는 직분의 흔적이 사실상 “가장 높은 영적 세계에서는 훨씬 더 크고 혼란스러운 수준(modes)에서 반복되는 현실과의 충격적인 접촉의 첫 번째이자 사실상 가장 쉬운 형태”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312).하나님의 남성성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이야기되어 왔다. 여성적인 은유(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향해 여성적인 칭호나 대명사를 쓰는 것은 절대로 아님)로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본문의 경우에는 반드시 제대로 된 설명이 따라온다(예: 사 66:13; 호 13:8; 마 23:37).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영화 ‘오두막’(The Shack)이 악명 높게 묘사한 것처럼 결코 “아빠”(Papa)라는 이름을 가진 흑인 여성이 아니다. 남성을 여성으로 대체해버린 기독교의 성경을 잠깐 상상해보라. “하늘에 계신 그녀가 웃으심이여 그녀가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그 때에 그녀가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그들을 놀라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여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시 2:4-6)“그 숙녀(Lady)는 전쟁의 여왕이시니 그 숙녀(Lady)가 그녀의 이름이시로다”(출 15:3)“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딸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녀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녀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어머니라, 평강의 공주라 할 것임이라”(사 9:6)“그녀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녀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녀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녀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녀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녀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4-5)영원토록 하나님은 생물학적으로 남성이 아니라 영이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약에서 거의 독점적으로 남성이라고 밝히셨지만, 신약에서 여자가 아닌 남자라는 성을 가진 인간의 영혼과 몸을 취함으로써 논쟁을 단번에 해결하셨다. 아들은 남자이다.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인간. 성경적인 남성다움에서 많은 사람들이 탈출했다. 그러나 모든 성경이 가리키는 남성다움에서 달아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안전하지는 않지만 좋은남성다움 자체에 대한 반란은 깨어질 것이다. 그런 메시지를 담은 표지판은 거리에 흩어져 나뒹굴 것이다. 아담의 아들들을 다스리려는 현대의 욕망은 침묵할 것이다. 그는 돌아올 것이다. 전쟁의 레이디가 아니라 전쟁의 왕자로서 그가 구출하러 올 것이다. 결코 여왕이 아니라 왕으로서. 암사자가 아니라 유다의 사자로서 말이다.자, 중요한 건 이거다. 내가 지금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하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그런 식의 공격을 나는 받아들일 수 없다. 내가 말하는 것은 현재 우리가 맞고 있는 현실이다. 비록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권위와 머리됨이라는 직분 자체의 구분을 무시할 정도로 무섭게 공격하고 있지만, 그런 세상은 단번에 끝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게 남자들에게 자랑거리가 되는 건 아니다. 이런 반역의 큰 죄를 지은 사람들 중 일부가 남성이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최고의 남자들조차도 다음 이 말을 깊이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 위에 또 그 너머에 있는 그것은 너무도 남성다워. 그래서 그와 관련해서는 우리 모두가 다 여성적일 수밖에 없지.”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할 때 우리는 인간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아버지와 아들, 가장 그리스도를 닮은 목사들과 신적 힘을 가진 통치자들 조차도 여성스럽게 바라보게 된다. 이런 모든 관계는 창조 세계 속에서는 자연스럽고 또 확실히 남성적이지만, 영원한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해서는 모두가 다 신부인 것이다. 언젠가 이 사실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백성과 모든 피조물에게 좋은 소식이 될 것이다. 이 세상이 결코 피할 수 없는 남성다움은 바로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가 도망치고 싶지 않았던 바로 그 남성다움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를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향해 그 어떤 잠재적인 두려움 없이 완벽하게 순종할 수 있다. 지금도 또 앞으로도 그는 결코 안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선하시다. 원제: The Future of Masculinity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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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 크리스마스 어떻게 준비할까?
by Sarah Eekhoff Zylstra
2020-12-13
평소라면 지금쯤 주일학교며 성가대 그리고 포인세티아로 본당을 장식하는 등등 교회 스태프들이 크리스마스 준비로 정신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올해 전국적으로 코로나19 사례가 급증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크리스마스 콘서트, 온 가족이 붐비는 어린이 축하 행사와 같은 전통적인 행사를 취소하는 건 물론이고, 시시각각으로 온 나라의 건강 상태가 급변하고 있다. 따라서 이번 크리스마스에 교회 교역자들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첫째도 창의성, 둘째도 창의성이다. TGC는 전국에 걸쳐서 다섯 명의 목사들과 그들이 이번 크리스마스 이브를 어떻게 보낼지와 관련해서 대화를 나눴는데, 양초를 나눠줄 지 그리고 그들이 대림절(Advent)에는 어떤 설교를 준비하고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목사: 후안 산체스(Juan Sanchez)교회: 하이포인트 침례교회도시: 오스틴, 텍사스규모: 등록교인은 약 500명, 코로나 사태 전까지 주일 출석 약 600명 그리고 현재 대면 예배 참석은 약 350명평상시 크리스마스라면 천 명 정도가 앉는 이 교회 본당이 꽉 차기 마련이다. “평소 교회에 안 다니는 사람들도 크리스마스면 교회에 와요. 우리는 아주 단순한 예배를 드리죠.” TGC 이사회 멤버이자 이 교회 담임목사인 후안 산체스의 말이다. 한 시간 정도 하는 예배에서는 크리스마스 찬양이 울려 퍼지고 크리스마스에 알맞은 복음 설교가 선포된다. 이 교회는 올해도 사회적 거리를 지키고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한 상태로 작년과 똑같이 하려고 계획하고 있는데 문제는 공간이다. 6월에 대면 예배를 재개한 이후 참석하는 교인 수는 점차 증가하여 현재 350명을 돌파했다는 게 산체스 목사의 말이다. 문제는 본당이 사회적 거리를 지키는 한 그 인원 이상을 감당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처음에는 예배에 온 사람들에게 기록을 하고 본당에 들어가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몇 주가 지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록을 하지 않았는데, 그건 예배 참석하는 사람들의 숫자에 비해 본당 공간이 워낙 충분해서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이브는 상황이 다를 것이다. “이번 주 당회 모임이 있는데요. 본당 입장시 신원 기록에 대한 얘기가 나올 겁니다.” 산체스 목사가 말했다. 교회는 25명이 들어갈 수 있는 추가 예배실을 하나 준비했고 또 하나를 준비할 계획이다. 그 방들까지 다 차면 늦게 온 사람들은 온라인으로 참석할 수밖에 없게 된다. “예배를 한 번 더 하는 건 꺼려집니다. 우리 교회는 대 예배는 단 한 번만 드린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거든요.”대림절에 산체스 목사는 여름부터 시작한 설교 시리즈를 이어갈 것이다. “다시 대면 예배로 모이기 시작했을 때 무엇을 설교해야 할 지 고민했어요. 인종 문제에 관한 시리즈가 필요할까? 아니면, 정치? 도대체 이 문제를 어떻게 전달하지? 다행히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나는 예전에 에베소서를 설교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요, 이번에 준비하면서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설교가 바로 에베소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사도 바울의 편지는 백인, 히스패닉, 아프리카계 미국인 뿐 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온 이민자들이 참석하는, 인종 면에서 매우 다양한 이 교회에 일치와 평화의 중요성이라는 강력한 성령의 메시지를 불어넣었다. “우리는 인종차별과 관련해서 전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으며 이곳 보수적인 도시 오스틴에서 강력한 반 인종차별 시위를 했습니다. 나는 성경이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 문제에 관한 본문을 내가 임의적으로 한두 개 고르는 것보다 지속적인 본문 강해 설교를 통해 그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에베소서는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문제를 다 다루고 있습니다.”산체스 목사는 12월 27일에 에베소서 마지막 강해설교를 할 것이다. 설교 제목은 “선교를 위한 담대한 복음 선포”이다. 산체스 목사는 말한다. “오늘날도 희망은 있습니다. 우리 자신 때문이 아니라 복음 때문에 말입니다.” 목사: 데릭 퍽키트(Derrick Puckett)교회: 리뉴얼 교회 도시: 시카고, 일리노이규모: 코로나 사태 전까지 주일 출석 약 300명 리뉴얼 교회는 크리스마스 이브 예배를 보통 찬양으로 보낸다. 중간에 누가복음 2장을 본문으로 하는 5분 정도의 설교가 있지만 설교가 끝나면 일곱 곡을 다시 부른다. 그리고 예배 끝날 때에 교인들은 촛불을 켠다. 그러나 리뉴얼 교회는 그들이 공간을 빌려쓰고 있는 학교가 3월 이후 온라인으로 전환하면서 내내 온라인 예배를 드리고 있다.“온라인으로 크리스마스 이브 예배 드리기로 결정했어요. 게다가 코로나 상황이 더 안 좋아지고 있고요.” 퍽키트 목사의 말이다. 찬양에 누가복음 2장 등등, 다 비슷할 것이다. 단지 이번에는 교인이 아닌 교회 스태프가 성경 본문을 읽게 된다. 크리스마스 전 화요일에 각종 크리스마스 장식이 된 사무실에서 예배를 녹음할 것이라고 했다. “정상적인 예배인 것처럼 옷을 입을 겁니다.” 퍽키트 목사가 말을 이었다.“보통 때에는 크리스마스 예배를 하지 않는 다른 교회도 초청을 하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올해는 온라인이다. 사람들에게 온라인으로 예배에 참석하라고, 온 가족이 모여서 함께 노래하자고 그리고 소셜미디어를 통해서 예배 방송을 전파하자고 격려하고 있다.퍽키트 목사는 이번 크리스마스가 적지 않은 교인들에게 힘들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상당수의 교인이 시카고 시의 ‘자가 격리 권고’에 따라서 추수감사절에도 가족에게 돌아갈 수 없었던 젊은 독신자 또는 부부이다. “시카고가 원래 집인 사람이 거의 없어요. 그 점을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쉽지 않아요.”여름에는 교인들이 가끔 만나서 공원에서 시간을 보냈다. 교회 지도자들도 격주로 심방 전화를 돌렸다. 그런 사역 중 일부는 전에는 없던 것이었다. 대면 예배가 없었던 지난 8개월 동안 리뉴얼 교회에는 15명이 새로 등록했다. “우리 교회는 방법을 찾아낼 겁니다. 교인들은 교회가 더 필요합니다. 최대한 있는 상황을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교인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평상시 크리스마스 때보다 더 함께 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교회는 그런 곳이니까요.”목사: 매트 프록터(Matt Proctor)교회: 코너스톤 교회도시: 마리온, 아이오와규모: 코로나 사태 전까지 주일 출석 약 130명 그리고 현재 대면 예배 참석은 약 50명코로나 전에도 프록토 목사는 크리스마스 이브 예배에 몇 명이나 올 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어떤 해에는 많이 왔고 또 어떤 해에는 거의 없고요.” 프록토 목사의 말이다. 출석 수는 그 해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타지로 가지 않고 집에 남아있는가에 달려있다. 코너스톤 교회는 그래도 나름 유대 관계가 탄탄한 교회이다. 올해 여름 다시 대면 예배를 재개한 이후 교인의 약 95%가 적어도 한 번은 예배에 참석했다. “그 중 일부는 주일 예배에 고작 한두 번만 참석했어요. 교인 일부는 암 치료를 받고 있고요. 또 일부는 설교만 듣고 나갑니다.”지난 몇 주 동안 아이오와 주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급증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온라인 예배를 선택했다. 교인 숫자가 떨어지기 전에 프록터 목사는 예배를 다시 2부로 늘이려고 했지만 불발로 그치고 말았다. “모여서 예배드리는 건 아름답습니다.” 프록터 목사는 웃으며 말했다. “예배를 두 번 드리지 못하기 때문에 처리해야 하는 몇 가지 복잡한 문제가 있어요. 더 많은 사람들이 ‘아, 잘 됐네요.’라고 말할 것 같지만, 사실은 누구나 다 본당 안에 앉아 자신만의 공간을 차지하고 그 순간을 공유하고 싶어합니다.”크리스마스 이브 예배에는 일반적으로 아름다운 이야기, 성경 말씀과 찬양으로 구성된다. 코너스톤 교회는 크리스마스 예배에서도 매주 예배 때처럼 끝날 때가 되어서야 찬양을 부른다. 그래서 말씀만 듣고 싶어하고 노래 부르는 게 불편한 사람은 조용히 빠져나갈 수 있도록 배려한다. 프록터 목사는 개개인이 촛불을 켜고 들게 할 계획인데 문제는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어떻게 옆에 사람에게 불을 붙이도록 할 것인가이다. “아무래도 가운데 촛불 자리를 따로 만들어야 할 거 같고요.”코너스톤 교회는 또한 크리스마스 전에 비디오를 만들어서 교인들이 크리스마스를 축하할 때 그때 그때 사용하도록 도울 계획이다. 프록터 목사는 매년 번갈아가면서 한 해는 대림절 설교, 그리고 다른 해에는 특별히 마음에 와 닿은 말씀으로 설교를 한다. “올해는 한참 전부터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대림절에 맞춘 본문에 도달할 수 있도록 계획을 세워서 마가복음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심판에 관한 내용을 담은 13장을 읽고 있다. 그리고 12월 20일 십자가에 관해서 설교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왜 성육신이 꼭 있어야만 했는지에 대해서 마가복음을 통해서 알아가고 있는 중입니다.”목사: 존 마하피(John Mahaffey)교회: 웨스트 하이랜드 침례교회도시: 해밀톤, 온타리오, 캐나다규모: 코로나 사태 전까지 주일 출석 약 1000명 그리고 현재 대면 예배 참석은 약 500명웨스트 하이랜드 침례 교회 목사이자 TGC 캐나다 의장인 존 마하피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1,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본당에 모여서 놀라운 크리스마스 이브 예배를 드립니다. 크리스마스 예배는 하나의 공동체 행사입니다. 모두가 촛불을 들고 조명을 낮춘 상태에서 찬양을 드립니다. 실로 아름다운 가족 시간이에요.”올해 웨스트 하이랜드 교회는 기존 크리스마스 예배를 2부로 나눠서 두 번 할 예정이고, 예배에는 30% (또는 약 250개의 의자)만 참석할 수 있습니다. “참석자는 미리 등록을 해야 하며 우리는 가족 별로 별도의 공간을 만들어서 가족 간에 6피트 씩 떨어지도록 할 것입니다.” 마하피 목사의 말이다. 올해 교회는 예배를 3부 그러니까 한 번 더 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하지만 상황이 쉽지가 않네요. 새로운 방식으로 사역을 하는 게 너무 힘듭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자고 결심했습니다.” 찬양을 할 때에도 교인들은 마스크를 써야 한다. 이제 크리스마스 캐롤도 마스크를 쓰고 부를 것이다. 문제는 성가대이다. “예배 담당 목사가 꽤나 창의적이에요. 그래서 40, 50명 되는 성가대원 각자가 찬양을 하는 비디오를 만들게 했어요. 그리고 그 비디오를 다 모아서 하나로 통합한 거지요. 그래서 스크린으로 보면 전체가 다 모여서 마스크를 쓰지 않고 찬양한 것처럼 보입니다.”스태프는 촛불을 들고 다니면서 불을 붙이는 봉사 인원을 모집해서 최대한 교인들간의 거리를 띄우도록 할 것이다. 또 하나 가능한 선택지는 커다란 초를 앞에 놓고 사람들이 차례로 앞으로 와서 불을 붙이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평소에 하던 모든 것을 못 하게 된 건 좋은 일일수도 있습니다.” 마하피 목사는 말을 이었다. “똑같은 성탄절을 지난 20년간 보냈어요. 이제 기존의 관행에서 탈피해서 새로운 변화를 주는 게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겠죠.”마하피 목사는 대림절 시리즈 설교 제목을 “미리 예언된 크리스마스- 구약을 통해서 살펴본 대림절”로 정했다.“구약 속 메시아에 관한 예언을 좀 살펴볼 겁니다. 특히 이스라엘 민족에게 암울했던 시기에 그 예언들이 나왔거든요. 나는 그들이 처했던 그 암흑기에 중점을 두려고 합니다. 어쩌면 크리스마스 메시지로는 너무 어두울 수도 있지만, 그게 지금 우리 교인들이 처한 상황과 일맥상통한다고 느낍니다.”목사: 가레트 켈(Garrett Kell)교회: 델 레이 침례교회도시: 알렉산드리아, 버지니아규모: 코로나 사태 전까지 주일 출석 약 550명 그리고 현재 대면 예배 참석은 약 350명겉으로만 봐서는 델 레이 침례교회가 맞는 대림절은 다른 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 교회는 전형적인 개혁주의 침례교회입니다.” TGC 이사이자 담임목사인 가레트 켈 목사의 말이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이브 예배는 이 교회에서도 아주 큰 행사이다. 참석자의 반 이상이 평상시에는 예배에 참석하지도 않는 사람들이다. “상당수가 일 년 내내 한 번도 교회에 오지 않던 사람들입니다. 어떤 경우는 타지에 있다가 잠깐 들린 경우고요. 따라서 그 날 예배는 복음을 전하기에 정말로 좋은 기회지요.”올해 그는 250명 참석으로 제한된 본당에서 설교할 것이다. 그리고 그 예배는 동시에 온라인으로 생중계될 예정이다. 또 일부 교인은 주차장에서 설교를 들을 것이다. 델 레이 교회는 그렇게 해서 약 400명 정도를 현장 예배에 참석시킬 것이다. 그 정도면 평소 크리스마스 이브 예배에 참석하는 인원을 거의 다 채우는 셈이다.이 교회는 크리스마스 전후로 해서는 평소에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하는 전도 프로젝트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올해는 코로나로 인해 실직의 위기를 맞은 사람들을 돕는데 교회가 앞장서기로 했다. 크리스마스 선물과 생필품을 이웃에게 나눠줄 예정이다.교인들끼리도 서로 돕는 건 말할 것도 없다. “우리 교회는 하나의 가족입니다.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에는 서로 서로 안부를 묻습니다. 누가 혼자 된 상태이고 그래서 누구를 초대해서 함께 식사를 해야하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물론 내 생각에 올해는 상황이 조금 바뀔 거 같네요. 그러나 실외 히터를 갖춘 가족들은 사람들을 초대해서 올해에도 좋은 시간을 보낼 겁니다.” 켈 목사는 지금 요한계시록을 강해설교 중이다. “이 성경에는 어두움과 희망을 주는 빛이 함께 섞여 있습니다. 올해 특히 요한계시록이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적인 준비에 따라서 우리는 지금 21장에서 22장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것을 다 새롭게 만드신다는 내용이죠. 감사하게도 그게 바로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정말 그 어느 때 보다도 말이죠.” 원제: Go Tell It on the Facebook Live: Preparing for a COVID Christmas Eve Servic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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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소사대(字小事大)와 주체적인 언약 관계
by 노승수
2020-12-12
유학의 고전인 사서오경 중에 가장 오래된 역사책이며 공자가 직접 집필한 것으로 알려진 춘추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워낙 간략해서 주석 없이 볼 수가 없는데 잘 알려진 주석으로는 춘추곡량전, 춘추공양전, 그리고 춘추좌씨전이 있다. 이 책은 춘추 시대 노나라의 역사를 주로 다루고 있다. 그중에서 춘추 좌씨전이 가장 유명하며 거기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예(禮)라는 것은 작은 자가 큰 자를 섬기고, 큰 자가 작은 자를 아끼는 것을 말한다(禮也者, 小事大, 大字小之謂).”여기서 온 말이 “사대주의”다. 사대주의는 사대를 매우 부정적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일제 식민사관(植民史觀)의 산물이기도 하다. 주체성을 결여한 노예근성이라고 일본이 우리에게 붙인 꼬리표다. 사무라이들의 복종으로 특징지어지는 질서를 일본인들이 한국을 지배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 우리 민족의 사대 전통을 왜곡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춘추에 나오는 자소사대(字小事大)는 국제 질서이기 전에 인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예절이라 할 수 있다. 큰 자는 어린 자를 아끼고 어린 자는 큰 자를 섬기는 질서는 정치 질서 이전에 우리 사회의 근간이었다. 국제관계에서 조선이 명나라와 사대외교의 구체적인 예시라 할 수 있는 조공무역에 관한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고 사대의 구체적 의미를 들여다보자. 의정부에서 무역하여 바꿀 말 값을 정하였다. 큰 말 상등 값은 상오승포(常五升布) 500필, 중등 값은 450필, 하등 값은 400필이고, 중말 상등 값은 300필, 중등 값은 250필, 하등 값은 200필로 정했다(태종실록 1년 10월 3일) 호조에서 상계하였다. '말을 올린 야인(野人: 여진족)에게 답례로 내려주는 물품은 큰 말의 상등은 면포 45필, 중등은 40필, 하등은 35필로 하며, 중질 말의 상등은 30필, 중등은 25필, 하등은 20필로 하며, 작은 말의 상등은 15필, 중등은 10필, 하등은 6필로 하는 규례를 정하게 하소서' 이에 그대로 따랐다(세종실록 8년 1월 7일). 조공무역의 주요 품목은 말과 포였다. 명에 보내는 말 값이 상등품은 500필이고 여진에 보내는 말의 상등품은 45필이다. 당시 평균적이 말 가격은 30필 정도였으니 거의 17배 정도의 시세차익이 발생한다. 그에 비해 작은 나라인 여진에 대해서는 말의 시세가 면포 30필 정도였음에도 45필로 정해 더 많은 금액을 사여(賜與. 하사품)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한번은 명나라가 나중에 사여를 할 테니 말을 먼저 달라고 했지만 태종은 거절했다. 이처럼 사대(事大)는 자소(字小)를 배경으로 한다. 오히려 섬기는 쪽이 큰 이득을 보는 구조를 하고 있으며 태종의 거절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굴종이나 복종을 의미하지 않으며 주체적인 외교질서를 의미한다. 사대란 기본적으로 윗사람을 잘 섬기는 원리며 자소란 아랫사람을 아낄 줄 아는 원리이자 힘이다. 사실 한국인에게는 이게 몸에 베여 있다. 예일대 출신의 한국계 미국인 홍유니가 "눈치의 힘(The Power of Nunchi)"이라는 책을 썼는데 눈치는 번역할 적당한 영어 단어가 없는 단어다. 한국인의 이 눈치가 바로 자소사대의 원리다. 공동체 의식의 발로이자 이웃과 더불어 사귀면서 윗사람을 잘 섬기고 아랫사람을 아끼는 사대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뉴욕의 할렘가 극빈층 거주 지역에 극빈층 아이들을 완전 한국의 교육방식을 그대로 이식해서 가르치는 데모크라시 프렙 공립학교(Democracy Prep Public School)는 80프로 정도의 학생이 미국 명문대에 진학하는데 이 학교가 가르치는 것이 한국의 정신이 바로 사대 곧 윗사람에 대한 존경이다. 한국인의 위기를 극복하는 국난 극복의 DNA에는 모두 이웃을 배려하는 사귐의 정신과 윗사람을 잘 섬기고 아랫사람을 아끼는 자소사대의 전통에서 온 것이다. 예를 들어, IMF 때의 금모으기, 태안 기름 유출 사건에 보인 전 국민의 자원봉사, 세월호에서 보인 이웃에 대한 배려가 사대의 힘이다. 조선의 선비가 언제 왕의 말만 듣고 그 말에 동의만 했던 적이 있는가? 예문관은 임금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기록했다. 생전에 임금은 자신의 사초를 볼 수 없었다. 그렇게 사후에 작성된 실록은 전국 4개의 서고에 보내져 그 기록을 후손에 보존했다. 여기 임금을 섬기는 조선의 선비의 사대에 어디 사대주의가 있는가? 오히려 왕권에도 굴하지 않는 선비의 기개와 질서가 있다. 사대주의적 굴종은 일본의 사무라이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몰라도 조선의 선비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것들이다. 군신 간에 의가 있고 부부 간에 구별됨이 있고 부모자식 간에 친밀함이 있는 이 원리가 사대의 힘이다. 고려가 상인으로 유명했던 것 역시 사대하면서 주체적인 한국인의 특성 때문이다. 서희가 강동 6주를 외교로 얻은 것도 이런 주체적인 힘이다. 그런데 이런 정신은 성경의 언약에서도 찾을 수 있다. 언약 공식이라고 알려진 출애굽기 19장 5절,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에서 “소유(segullah סְגוּלָּה)”라는 단어는 원래 고대 근동의 외교문서에 나오는 정치 외교적 단어다. 신명기 26장 18절에서는 “보배로운 백성(segullah סְגוּלָּה)”이라 번역했고 말라기 3장 17절에서는 “나의 특별한 소유”라고 번역했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언약 관계와 언약 백성이 보석으로 비유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예컨대, 계시록 21장에서 어린양의 신부를 보이리라고 하면서 새 예루살렘이 나타나는데 이는 모두 보석으로 치장되어 있으며 이 보석은 어린양의 신부인 교회를 보여준다. 이 단어는 고대 근동의 종주, 곧 큰 자가 봉신 곧 작은 자들을 부르던 말이다. 종주가 봉신을 내 보석이라고 부른 것이다. 여기에 바로 자소의 원리가 들어 있으며 그렇게 사랑을 받는 봉신은 종주를 향해서 사대의 예를 다 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 고대 근동의 정치 질서에 세례를 베풀어 성경의 언약관계를 대표적으로 설명하는 신학적 개념으로 삼았다. 동아시아의 정치질서인 군신간의 의(義)는 다말이 그 남편에 대한 의리를 다하고자 자신의 시부 유다와 동침하여 후손을 얻고 그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계보에 든 사건에서의 다말의 의와 거의 같은 개념이다. 자소사대의 원리가 제대로 작동할 때 그것을 성경은 의라고 표현한다.춘추에서 사대는 큰 나라를 잘 예우하면서 그것으로부터 제대로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동아시아가 유럽과 같은 많은 전쟁이 없이 근대의 시기를 보낸 것도 바로 이 자소사대의 정치 원리에 기대어 있기도 하다. 한국인은 항상 외국과 자신을 비교한다. 선진국의 모습을 보며 배우려 한다. 그런데 이제 더 배울 데가 없는 자리에 왔다. 한국의 이런 비약적인 발전은 패스트 팔로워를 넘어서 선진국 반열에 오르게 된 이 힘에는 주체적인 사대의 힘이 자리하고 있다. 이제 사대는 미국의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처럼 세계에 봉사하는 정신으로 거듭나는 지점에 와 있기도 하다. 이 미국의 예외주의의 기원은 청교도들이다. ‘언덕위의 도시(A city upon a hill)’를 건설하고자 했던 이들이 바로 이 예외주의 탄생의 주인공들이다. 최근 미국의 한 언론은 이 미국적 예외주의를 한국의 방역모범에 적용해서 기사를 냈다["한국의 코로나19 예외주의 이면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What's Behind South Korea's COVID-19 Exceptionalism”, The Atlantic, May. 6. 2020,)]. 한국 사회와 국가가 이런 평가를 받는다면, 하나님을 사대하며 주님으로부터의 자소를 입은 언약 백성인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얼마나 더 성숙하고 거룩한 삶과 공동체로서 이 세상 속에서 소금이며 빛이어야 하겠는가? 우리는 얼마나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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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낙태했다고 고백해야 할까요?
by Kendra Dahl
2020-12-11
두 번의 아픈 낙태까지 포함하고 있는 내 과거 섹스 경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나는 종종 여간해서 사라지지 않는, 낙태의 여파를 처리하고 싶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럴 때면 나는 커피 한 잔을 따라주고 그들이 편한 마음으로 이야기 하도록 들어준다. 그러면서 나도 내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은혜와 지혜로 치유를 향해 나아가는 모습에 대해 서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한다. 짧은 글 하나에 낙태라는 큰 사건을 겪은 한 사람이 느끼는 모든 뉘앙스를 다 전달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만약에 당신도 과거에 낙태를 한 적이 있다면, 그리고 그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과 나눌 계획을 가지고 있다면, 그 전에 생각해야 할 몇 가지를 제시하려고 한다. 1. 낙태에 대해서 몰라도 얼마든지 당신에 대해서 잘 알 수 있다나는 열여섯 살 때 낙태를 했는데, 그 순간 나의 정체성이 영구적으로 바뀌는 것 같았다. 이런 내 부끄러운 과거를 모르면 누구도 나를 제대로 알 수 없다는 확신에 나는 무모할 정도로 지나치게 내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이 되었다. 새로운 친구, 첫 데이트, 청소년 목회자, 대학 시절 사역처 직원은 모두가 다 나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최선의 상황을 놓고 생각하면, 그들이 나를 제대로 사랑한다고 확신하도록 돕기 위해서라도 나는 그들에게 나 자신을 정직하게 다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면, 그들과의 관계가 더 깊어지기 전에 그들로 하여금 나를 거부할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런데 이런 식의 과잉된 공유(oversharing)는 상처를 치유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 스스로 진실이라고 생각한 사실, ‘나는 오염된 여자야’라는 얘기를 나는 반복해서 하고 있을 뿐이었다. 스물다섯이 되어서 교회에 다시 출석함으로,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나의 정체성에 대해서 새롭게 알게 되어서야 나는 과거 섹스 경험과 낙태가 규정한 과거의 인생을 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전 6:11).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에게 입양된 자녀로서 새로운 출생 증명서를 받았다. 새로운 출생 증명서에 굳이 과거에 대한 주석을 추가할 필요가 없다.현명하고 건전한 방식으로 과거를 공유하려면 그 과거가 여전히 내 이야기의 일부이지만 더 이상 나를 이루는 정체성의 하나는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히 알고 있는 상태에서 해야 한다. 어둡고 슬픈 내 개인사를 굳이 시시콜콜 알리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은 얼마든지 나를 바로 알고 사랑할 수 있다. 2. 당신 힘으로는 죄값을 치를 수 없다 무모한 과잉 공유도 모자라서, 내게는 아예 더 큰 환경에서 과거를 공유할 기회가 생겼다. 사람들은 좋은 간증을 듣기 좋아한다. 나는 자연스럽게 내 이야기를 널리 공유할 수 있는 간증 기회에 뛰어 들었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고통스러운 선택을 하지 않도록 도움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최대한 건강한 방식으로 낙태를 처리하려고 노력하는 과정 중에서도 나는 주님이 이런 내 이야기를 어떻게 사용하실지를 놓고 씨름했다. 낙태라는 과거를 가진 사람들은 어쩌면 그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반 낙태(pro-life) 운동에 동참할 준비가 되어 있을 수도 있다. 낙태라는 악과 고통스러운 결과에 대해 확실하고 또 직접적으로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 자신을 포함해서 낙태를 겪은 많은 여성들이 가진 착각 중 하나는 낙태 이야기를 나눔으로서 과거의 죄를 보상받을 있다는 잘못된 믿음이다. 내 간증이 낙태로 사라질 생명을 살릴 수 있다면, 그렇게 구원받은 생명 때문에 내가 죽인 생명에 대한 죄값을 치를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것이다. 나는 결코 낙태의 죄값을 지불할 수 없으며,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많은 행동주의도, 아무리 많은 생명을 구한 아기의 숫자도, 내가 들려주는 낙태 이야기에 인생이 바뀐 최고의 ‘청교도’조차도 내가 지은 죄를 보상할 수는 없다.오로지 완전하고 죄없는 대속자만이 그 대가를 지불할 수 있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볼 때만 구원받을 수 있다. 어떻게 간증할까를 고민하는 중에도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를 의롭다고 하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3. 당신의 이야기는 치유를 위한 도구가 될 수 있다낙태가 우리를 정의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커다란 수치와 갈등의 원천이 될 수는 있다. 나를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을 그 갈등 속으로 초대했을 때, 그들은 나 자신보다 훨씬 더 잘 나를 도와줄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기독교인 상담사와 나누는 것으로 시작했다. 낙태는 심각한 죄이자 트라우마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리라도 어둡고 고통스러운 곳까지 꿰뚫는 데는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숙련된 상담가라면 동정심과 인내로 그런 과정을 용이하게 하도록 도울 수 있다. 나는 또한 신앙 초기부터 나의 멘토이자 친구였던 몇 명의 경건한 여성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상담사와 함께 나를 지원했고, 지금은 남편이 된 남자와 데이트를 할 때 언제 어떻게 그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분별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결혼하기 전에 배우자와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두려워했고, 또 지금은 지금대로 과거에 대해 소통하는 방법을 알기 위해 애쓰는 여성들과 나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아픈 과거에 관한 대화는 어렵다. 그렇기에 비밀은 최대한 숨기라고, 그러지 않으면 버림받을 거라고 사탄은 우리 귀에 속삭인다.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은 더 이상 정죄받지 않음을(롬 8:1, 33–34).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자주 배우자들은 은혜로 응답할 것이며, 그들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우리 마음 속에서 그리스도의 치유 사역을 더욱 발전시킬 것이다. 어려운 순간에도 남편에게서 사랑과 지원 그리고 진리의 확인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지금 빛 가운데에서 걸을 수 있다(요일 1:7).목사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경우, 목사님은 당신을 훨씬 더 효과적으로 목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양심이 무거워질 때 마다 방해받지 않고 목사님에게 달려가서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았다는 진리를 다시금 상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목사님은 목사님 대로 당신의 과거를 알게 됨으로 좀 더 민감함을 가지고 설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믿을 수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눔으로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더 큰 치유와 자유를 경험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 이야기 속 어두운 부분을 언제, 어떻게 공유해야 하는지를 식별하는 것도 훨씬 더 쉬워졌다. 누군가에게는 과거 낙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벅차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정체성은 안전하다. 그는 당신의 죄값을 모두 지불했다. 게다가 그는 또한 당신을 가족으로 만들었다. 이제 당신은 더 이상 혼자서 그 짐을 짊어질 필요가 없다.원제: Should I Tell People I Had an Abortio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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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를 통해 배우는 성탄절 교리설교
by 고상섭
2020-12-10
목회자에게 설교가 늘 무거운 짐처럼 느껴지지만, 특히 절기설교는 더 어려운 것 같다. 매년 돌아오는 절기마다 어떤 본문을 어떻게 설교할지에 대해 고민하는 설교자들이 많이 있다. 절기설교는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2017년 12월 리디머 교회에서 설교한 ‘성육신의 영광’(The Glory of the Incarnation)이라는 팀 켈러의 설교를 통해 성탄절 교리설교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팀 켈러는 성탄의 의미를 가장 짧은 한 줄로 설명하는 교리가 있다면 아마도 요한복음 1장 14절일 것이라 말한다. 성탄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팀 켈러는 본문을 벗어나지 않지만, 지나치게 본문에 매이지 않으며 성탄절의 의미를 교리적 진술로 설명한다. 설교의 골격은 ‘말씀이 육신이 된’ 사건이 주는 세 가지 의미이다. 첫째, 성육신의 사건은 고통 가운데서 우리에게 위로를 준다첫 번째 대지는 팀 켈러의 본문에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요 1:14-18). 그러나 구원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면 그것은 죄와 고통으로부터 해방을 의미하기 때문에 교리적 대지로 적절하다. 그러나 첫 번째 대지를 들으면 청중들은 이렇게 질문할 것이다. “예수님이 오신다고 고통에서 위로가 된다면 왜 나는 지금도 계속 고통 중에 있는가?” “예수님이 고통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는데 왜 세상은 여전히 어려운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지만 여전히 고통은 계속되고, 내 삶에서도 완전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팀 켈러는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지 않는 이유와 지금도 여전히 고통이 있는 이유에 대해 명확히 인간이 알 수 없지만, 말씀이 육신이 된 이 사건을 통해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이 아님을 증명한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사람으로 이 땅에 오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 2:18) 또 히브리서에서는 예수님이 시험당하는 우리를 도우실 수 있는 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인간이 겪는 고통의 강도가 5라면 3정도의 고통을 당한 사람들과 대화할 때 그들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고통을 당한 사람을 만나면 위로를 받을 때가 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으셨고, 십자가에서 진노를 감당하신 분이시다. 세상의 어떤 고통도 그분의 고통보다 더 크지 못할 것이다. 우리를 위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벌거벗겨진 아기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바라보면, 고난 속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사랑 때문에 고난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지만, 위로를 경험하게 된다. 필립 얀시(Philip Yancey)의 책 ‘내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를 보면 조니 에릭슨 타다(Joni Eareckson Tada)의 이야기가 나온다. 조니는 어린 시절 다이빙 사고를 통해 사지마비 장애인이 되었다. 그가 고통 속에서 부르짖을 때 가장 힘든 것은 아무도 자신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예수님은 너의 고통을 이해하고 계셔!” 라는 말을 듣고 처음엔 분노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몸을 움직이지 못해서 얼굴에 묻은 것을 닦을 수도 없는 자신과 십자가에서 두 팔이 못 박혀 움직일 수 없는 예수님의 상황이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예수님께로 다시 헌신하게 된 계기는 바로 자신의 아픔을 이해하시는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팀 켈러는 ‘태어남에 관하여’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고통스러웠지만 또한 기쁨이었다고 말한다. 엄마가 아이를 낳을 때 고통스럽지만 해산한 뒤에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리듯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도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기쁨에 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경험하는 출산의 기쁨도 너희를 바라보는 내 기쁨에 비하면 희미한 그림자에 불과하다. 내가 모든 고난과 고문과 죽음을 기꺼이 당한 것은 너희를 구원하고 사랑하는 기쁨이 더 크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고난당하셨다는 사실을 통해 지금 여전히 고난은 없어지지 않지만 그분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고, 그 사랑은 오늘의 고난 속에서 우리에게 위로를 제공해 준다. 둘째, 성육신의 사건은 고통가운데 있는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도록 내적인 힘을 공급한다출애굽기 3장에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고통가운데 있을 때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하나님이 내려오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출 3:7-8)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이 땅 가운데 오신 이유는 고통 가운데 있는 우리를 위해 내려오신 것이다. 강도를 만난 사람들이 있을 때, 누군가 건장한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폭행을 당하고 있을 때 우리는 선뜻 그 고통에 동참할 수 있는가? 참 사랑은 자신의 안락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며, 자신의 안정을 포기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고통가운데 있는 인간들을 위해 내려오셨다. 말로만 사랑을 이야기 하신 분이 아니라 직접 자신의 몸으로 행동하신 것이다. 빌립보서 2장에서도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시지만 자기를 비워서 인간이 되셨다고 말하고 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5-8) 바울은 빌립보서 2장 3-4절에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라”고 권면한다. 어떻게 자기중심적인 인간이 자기보다 다른 사람을 낫게 여길 수 있는가? 그 비결이 바로 5-8절에 있는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자기를 비워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이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힘을 공급받는다. 많은 사람들이 공동체 안에서 위로 받기를 원하지만 자신이 잘 헌신하지는 않는다. 존 스토트(John Stott)는 ‘기독교 기본진리’에서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영성에 대해 소파의 쿠션처럼 신앙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지적한다. 헌신이 없는 위로와 안락만 추구하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중심성을 깨뜨릴 수 있는 유일한 힘은 바로 성육신의 의미를 다시 기억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 성육신의 마음을 품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그 은혜가 내적인 동기가 되어 은혜받은 우리가 또 다른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기를 원하신다. 셋째, 성육신 사건은 고통 속에서도 소망가운데 이 땅을 살아가게 한다“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에서 ‘거한다’라는 헬라어 단어는 ‘장막을 치다’ (tabernacle) 라는 의미이다. 이 말은 성막을 의미하며, 지성소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것을 연상시킨다. 성막의 가장 거룩한 지성소에서 쉐키나 영광 가운데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육신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함께 거하시는 것이다. 구약의 성막은 언제나 휘장으로 가려져있었다.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절대 거룩의 영역이었다. 일 년에 한 번 대제사장에게만 허락된 곳이었다.그 휘장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찢어졌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열렸다. 이제 우리는 정죄없이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결국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서이다. 그 마지막 날의 완전한 소망이 있으므로 우리는 이 땅을 소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다. 조엘 비키(Joel Beeke) 목사는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8)을 해설하면서 마지막 날에 주님이 주시는 상이 예비되어 있는데, 그 확실하고 흔들리지 않는 상을 생각하면 이 땅의 어려움 속에서 지속적으로 견딜 수 있는 힘을 제공해 준다고 말했다. 결국 오늘의 어려움을 이기는 힘은 장래의 소망이며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우리에게 참된 소망가운데 이 땅을 살아갈 수 있게 해준다. 팀 켈러의 설교는 단순히 은혜로운 한 편의 설교일 뿐 아니라 설교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교본과도 같다. ‘그리스도 중심의 교리적 절기설교’라고 이름 붙이고 싶다. 앞으로 절기 설교를 준비할 때, 위의 팀 켈러의 예처럼 절기에 해당하는 본문에서 중요한 교리를 선언하고 몇 가지 교리적 진술을 대지로 삼아 설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 편의 좋은 설교는 내용 뿐 아니라, 설교의 방식까지 가르쳐주는 친절한 선생님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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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교회에 다니는 청년들은 뭐가 다를까?
by Jon Nielson
2020-12-09
“이제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하나요?” 내 사무실에 와서 앉은 일단의 부모들은 눈물부터 닦았다. 중고등부 목사인 내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부모들은 열여섯 살 아이가 술을 마시고 파티를 해서가 아니었다. 우리는 지금 가정과 교회에서 올바르게 자란 “선한 기독교인” 자녀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다. 그랬던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가더니 신앙에서 멀어졌다. 그 아이들은 교회의 청소년 프로그램을 다 마쳤고 또 단기 선교 여행까지 갔으며 십대 시절 내내 다양한 사역에서 봉사하던 신실한 아이들이다. 그랬던 그들이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신앙 활동과 관계를 맺고 싶어 하지 않는다. 물론 교회가 손을 놓고 있었던 건 아니고 내게 찾아온 부모들은 대학생이 된 아이들에게 교회가 “신앙교육 패키지”를 보내서 그들이 여전히 교회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도록 하는 게 어떻겠냐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그러나 그건 내가 보기에 결코 제대로 된 해결책이 아니었다. 교회에 다니는 청년들이 줄어들고 있다고 계속 발표되는 감당하기 힘든 통계를 볼 때마다 공황과 같은 공포를 느낄 지경이다. 교회가 도대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 걸까? 청소년 사역이 잘못하는 것이 무엇일까? 다양한 보고서를 분류하고 그 속에서 진짜 이야기를 찾아내는 건 결코 쉽지 않다. 그리고 신앙을 “잃은” 아이들을 교회로 다시 데려올 수 있는 쉬운 해결책도 없다. 그들을 위해 계속 기도하고 그들의 삶에 복음을 전하는 것 외에는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교회를 떠나지 않고 열정적으로 사역에 참여하는 이십 대 청년들을 교회에서 만난다. 그런 청년들은 뭐가 다른 걸까? 다음 내용은 내가 그런 신실한 청년들을 관찰한 결과이다. 나의 관찰이 청소년 사역을 하는 목회자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1. 그들은 회심했다흥미롭게도 사도 바울은 “명목상의 기독교인”이나 “아주 착한 아이”와 같은 표현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성경은 결코 “그래, 그가 그렇게 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래도 그는 심성이 아주 착해”라는 식의 호의적인 표현으로 신앙 고백을 엉망으로 만들지 않는다. 특히 성경 속 회심과 관련한 증거를 보면 거기에는 흔들림의 여지가 거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우리 중고등부 목회자들은 구원이 진짜 무엇인지를 다시 이해해야 한다. 구원은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능력에서 오는 기적이다. 우리는 이제 “착한 아이들”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그만해야 한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충실한 예배 출석과 재미있는 수련회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님의 강권하심으로 인해 아이들의 마음에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도록 기도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다른 모든 것을 제쳐놓고 오로지 회심이라는 한 가지 주제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회심하지 않은 복음주의자들”에게 설교하고 있을까? 중고등부 목사님들이여, 우리는 설교하고, 가르치고, 증거해야 한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아이들의 마음과 영혼에 기적적인 거듭남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열렬히 기도해야 한다! 회심의 역사가 일어날 때 – 그래서 “옛 것이 가고”, “새 것이 오면”, 불확실함은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명목상 기독교인” 그룹을 다루고 있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증거하는 데에 굶주린, 미래의 교회 지도자인 “새로운 창조물”을 가르치고, 제자화하고, 준비시키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누구인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섬기는, 회심한 청소년들이다. 2. 그들은 온전히 되기 위해서 교회에 오지, 재미있게 놀려고 오지 않는다최근 우리는 청소년 그룹의 몇몇 학생들과 “남자들의 날”을 보냈다. 우리는 지역 공원에서 한 시간 동안 농구를 했고, “시카고 스타일”의 16인치 격렬한 소프트볼 경기도 했다. 그리고는 바비큐와 피자, 그리고 2리터 탄산음료를 먹으며 오후를 보냈다. 나는 청소년 사역을 재미있게 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특히 청소년 목회자라면 에베소서 4장 11-12절의 말씀을 계속해서 상기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또는 교회에게 교사를 주신 이유는 결코 오락, 격려, 모범, 또는 우정을 위한 게 아니다. 그 이유는 오로지 성도를 “온전하게 만들어(equip)” 복음 사역을 하게 함으로 그리스도의 교회가 온전하게 세워지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내가 사역하는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젊은 신자를 제자화하고, 또 성경 공부를 하도록 준비시키지 않는다면, 설교가 아무리 훌륭해도 나는 사역자로서 소명을 완수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회심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심을 한 이후로는 복음의 열정에 사로잡혀 봉사하고, 인도하고, 가르치고, 성장함으로 신앙을 불태우도록 돕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주신 의무이다. 아이들이 성경 읽기 습관, 성경 공부 기술, 제자 훈련과 기도의 강력한 본보기 없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면 우리는 결국 그들을 잃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한 것이라고는 양육이 아니라 아이들이 재미있도록 해줬을 뿐이니까. 이제 그런 현실을 앞에 놓고 우리는 정말로 공포를 느껴야 한다. 잠시 청소년 프로그램을 마음에서 지워버리자. 우리가 하는 사역이 대학에 들어가 전혀 다른 지역에 있는 다른 교회에서도 여전히 복음 사역에 열중하는 신실한 학생을 양육하고 파송하는 것인가? 우리는 지금 정말로 그들을 제대로 준비시키고 있는가? 아니면 단지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는 동안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도록 돕고 있을 뿐인가? 우리에게 필요한 건 교회 중고등부 모임에 중독된 학생이 아니다. 우리는 가르치고, 인도하고, 섬길 준비를 갖춘 성장하는 당당한 남자 성도와 여자 성도를 양육해야 한다. 지금까지 추구하던 모든 청소년 사역 전략을 다 내려놓고 열여섯 살 학생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렇게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이 아이와 앞으로 어떻게 사 년을 보내야 이 애가 십 년 후에 최고의 교회 집사, 그리고 훌륭한 6학년 주일 학교 교사가 될 수 있을까?”3. 다른 사람이 아닌 부모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중고등부 목사로서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을 할 수는 없다. 지금 내가 말하는 모든 양육 과제는 나 개인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물론 목회자의 능력으로 회심을 시킬 수도 없지만 마찬가지로 학생들의 가정에서 내 사역을 열 배로 돕지 않는다면 사역자 혼자의 힘으로는 결코 힘 있는 기독교인 성인으로 아이들을 키울 수 없다. 내가 아는 한, 사역 지향적 사고를 가진 이십 대를 하나로 묶는 공통점은 분명하다. 그들의 가정에서 복음이 결코 변두리가 아니라 절대적 가치를 가진 핵심이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교회 사역을 섬기고 이끌고 있는 이십 대의 경우 하나 같이 그들로 하여금 교회에 가도록 하는 주체는 부모이다. 그들이 반항할 때 부모는 그 아이들을 징계했고 또 분명하게 책임을 물었다. 또한 그들의 부모는 매일 저녁 식탁에서 성경을 읽는다. 그들의 부모는 엄격하지만 동시에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하나님과의 평화와 서로에 대한 용서의 기초로 삼는 깊은 은혜의 틀 안에서 아이들을 양육한다. 물론 이게 공식은 아니다! 복음 중심의 멋진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도 교회를 떠난다. 엉망진창이 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 중에도 예수님 안에서 영생을 찾고 아름다운 결혼 생활과 가정을 꾸리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그렇다고 가정이 의미가 없다는 것도 아니다. 일반적으로 성장기에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적극적으로 교회를 섬기며 가정을 복음으로 온전히 이끄는 부모들로부터 신앙으로 인도받은 아이들은 예수님과 교회를 사랑하며 성장한다. 잠언 22장 6절 말씀이 항상 옳기만 한 공식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은혜로운 계획에서 나오는 좋은 원리를 제공한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중고등부 사역자여, 진정한 회심을 위해 마음을 다해서 기도하라.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이다. 학생들을 온전히 양육하라. 그것은 당신의 책임이다. 부모들이여, 복음을 선포하고 삶 속에서 복음을 드러내도록 하라. 우리 사역자의 성공 여부가 당신들에게 달려있다.원제: Why Youth Stay in Church When They Grow Up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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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학교교육
가정교육
진정한회심
회심사역
탈신앙
부모
불변의 하나님 말씀을 겸손하게 해석하기
by Trevin Wax
2020-12-08
이 시리즈의 첫 번째 글에서 나는 다른 문화와 배경을 가진 신학자와 성경 주석가들로부터 통찰력을 얻고 싶어 하는, 점점 더 그 숫자가 늘어나는 복음주의자들이 가진 열정에 관해서 설명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나는 이러한 변화(development)가 우리와 성경 본문 사이의 문화적 거리를 과장함으로 우리를 특정한 사회적 위치(social location)에 가두게 되고, 그 결과 성경의 권위를 약화시킬 수도 있다는 우려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한편으로, 우리는 텍스트를 접할 때 갖는 “선이해”를 최소화해서는 안된다. 해석을 좀 더 정교하게 다듬기 위해서라도 다양한 목소리가 필요하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사회적, 문화적 위치가 주는 영향을 과장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성경의 권위에 복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머리를 맞대고 마음을 모아 본문을 주의깊게 연구할 때 발견하는 광범위한 합의를 기뻐해야 한다.우리가 지향하는 목표가 그렇다고 모든 해석을 다 상대화하거나 텍스트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준 포스트모던적인(quasi-postmodern) 관점 이론을 채택하자는 게 아니다. 거기에 더해서 문화와 배경이 전혀 다른 번역자와의 교류를 최소화하는 상식적 현실주의로 돌아가자는 것도 아니다.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식론적 겸손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한 마음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신학적 덕목으로서 바라볼 때, 우리는 가빈 오틀런드(Gavin Ortlund)처럼 다음과 같이 겸손을 정의할 수 있다.“겸손 … 자신이나 또는 자신이 가진 신학에 대해서 낮은 의견을 가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모든 수단을 통해 열렬하게 진리를 추구하는 자세를 가지는 동시에 아직까지 우리가 모르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하는 자세이다.”이번 마지막 글에서 포스트모던이나 현대적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도움을 주는 몇 가지 제안을 하려고 한다. 1. 성경 독자(Bible readers)로서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 한계점에 관해서 고민하라 우리는 유한하다. 인간인 이상 우리는 성경 독자로서의 한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한계 중 일부를 얼마든지 인식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문화적, 사회적 위치가 성경 읽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다 더 잘 알 수 있다.성경 읽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문화적 힘(좋은 방식이든 나쁜 방식이든 관계없이)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 그런 힘이 아예 없다고 가정하면서 무시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문화와 개인적인 경험이 성경 해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이해하게 되면, 당신은 비로소 당신이 쓰고 있는 렌즈를 “보게 되며”, 그것은 당신으로 하여금 성경을 공부하면서 나름의 관점을 구축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사례: 개인주의적 직관의 영향을 많이 받는 미국인들은 신약성경 속에 나오는 명령들을 주로 개인에게 주어진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성경의 오리지널 언어의 표현뿐만 아니라(교회로 지칭되는) 성경의 수신자가 복수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성경이 ‘당신’이라고 할 때 그 단어가 복수를 가리키고 또 그렇기에 복수형 동사 형태가 쓰인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읽어야 한다. 이처럼 성경이 복수로 지칭되는 공동체를 향해서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은 오늘날 영어권 독자들에게 쉽게 간과된다. 성경의 명령은 개인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 명령의 주된 초점은 교회라는 집단적 순종을 위한 것이다. D. A. 카슨(D. A. Carso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프리카 신자들이 교회의 집단적 특징(corporate character)을 놓고 쓴 바울의 은유를 더 빨리 발견하는 것에 비해, 서양의 많은 사람들은 개인주의의 유산 때문에 그런 측면을 알아채는 데에 어려움을 느낀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이것은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해석학적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경우, 당신의 책읽기가 개인주의적 배경(assumptions)에 의해 형성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은 당신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한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그 결과 당신은 더 나은 성경 독자가 될 수 있다. 이 사실은 다음 사항으로 이어진다. 2.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다른 이들이 주는 지혜에 의존하라리처드 린츠(Richard Lints)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각기 다른 지체로부터 유익을 받을 때 누리는 풍요로움에 관해서 깊은 통찰을 준다. “교회의 행복(well-being of the church)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단 하나의 복음을 얼마나 잘 수용하는가에 달린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의 행복을 위해서 하나님은 다양한 은사를 부어주신다. … 다양한 교회 지체는 성경 해석이라는 작업에서도 유익을 얻을 수 있도록 서로를 잘 이해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이견(divides)을 뛰어넘는 이해를 위해 서로의 의견에 경청하는 힘든 노력이 필요한데, 이를 통해서 우리는 얼마든지 이견을 뛰어넘는 이해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말씀의 권위와 충분함에 대한 깊고도 변함없는 확신(commitment)이다. 단순히 “우리는 서로가 필요합니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일부 사람들은 서로가 필요하다는 진리를 지나가는 유행 또는 비정상적인 의제 또는 하나님의 말씀 아래 무릎을 꿇기보다 오히려 성경 위에 서게 만드는 포스트모던 철학을 장려하는 도구로 악용하기 때문이다. D. A. 카슨은 이 과정에서 성령님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성경의 필수불가결함을 지적하는데, 그의 지적은 지극히 옳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관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진리를 행하기 위해 도움이 필요한 만큼 우리는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성령님의 도움이 필요하다. 중재하는 성령님의 도움이 얼마든지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다고는 해도, 사려깊은 기독교인의 목표는 결코 성경의 주인이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백성의 선을 위해 성경에 순종하는 종(be mastered)이 되는 것이다.”우리가 성령님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겸손을 알게 하며 동시에 하나님 말씀의 의미를 밝히고 바른 해석을 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기도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우리는 성경을 해석할 때 겸손하게 기도함으로 나아가야 한다. 좋은 성경 해석의 전제 조건과 최종 목표는 계시의 말씀이 주는 경외심과 놀라움으로 성경말씀의 궁극적인 저자를 예배하는 것이다. 예배와 성경 주석은 결코 서로 떨어질 수 없다. 3. 모든 읽기가 다 똑같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라우리와 동일하게 성경의 권위를 믿는 다른 문화권의 신자들이 텍스트를 이해하는 방법에 있어서 우리와 상충하는 경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포스트모던 시대의 유혹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차피 모두가 다 각자의 문화적 배경에 따라서 성경을 읽기 마련이니까, 성경이 진짜로 의미하는 바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대신 우리는 모든 성경 읽기가 다 똑같지는 않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카슨은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다고 인정한다. “어떤 개인이나 그 어떤 단일 공동체도 특정 성경 구절이나 주제에 대해 모든 것을 알 수 없다고 인식하는 것은 현실적일 뿐 아니라 겸손한 행위이다. 서로의 말을 경청하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더 풍부한 해석을 얻을 수 있으며, 때로는 기존 해석에 직접적인 수정을 하게 될 때도 있다.” 모든 진실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진실을 가지고 있다. 전 세계와 여러 시대에 걸친 기독교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광범위한 동의가 바로 공통적 신앙의 증거이다. 사이몬 챈(Simon Chan)은 ‘Grassroots Asian Theology’라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앙을 받아들이고 표현하는 방식을 형성하는 것은 지역 문화이다. 그러나 지역 신학이 거기서 그치지 않고 진정한 기독교가 되기 위해서는 더 큰 기독교 전통과 실질적인 연속성을 가져야 한다.”카슨은 또 이렇게 말한다.“신약 성경에는 거짓 교리, 거짓 그리스도, 거짓 복음에 관한 많은 경고가 있다. 모든 해석이 다 동등한 건 결코 아니며 또한 이런 저런 해석이 특정 공동체에 의해 지지되고 옹호된다고 해서, 그 해석이 반드시 성경에 충실한 해석이라는 것을 보장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말을 주의깊게 듣고 또 성경을 다시 반복해서 읽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 속에서 다른 이의 해석이 더 본문에 충실하다면 얼마든지 나의 해석을 고치겠다는 열망을 가져야 하며, 무엇보다 마치 우리가 최종 판사인 것처럼 성경 위에 서지 않아야 한다. 오로지 성경 말씀만이 우리의 판사가 되어서 우리 위에 서도록 해야 한다.”4.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문화에 도전할 것을 기대하라다른 문화권에 사는 기독교인의 해석을 포함해야만 성경 해석이 더 좋아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근시안적 착각이다. 기억해야 할 진실은 모든 문화가 어떤 식으로든 다 부패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기독교인들의 책읽기 방식이 우리가 가진 문화적 우상을 어느 정도 드러낼 것으로 기대할 수 있지만, 마찬가지로 다른 지역에 사는 기독교인들 역시 우리의 해석이 그들의 우상들에게 던지는 도전이 될 수 있음을 기대해야 한다. 이것은 다른 모든 해석을 판단해야 하는 기준으로 “살아있는 경험”에 호소할 때 생기는 주요 문제 중 하나이다. 인간의 경험이란 것은 빛을 비추기는 커녕 아예 더 모호하게 만들 수도 있다. 데이비드 클락(David Clark)은 성경 읽기까지 통제할 수 있는 강력한 철학적 원칙에서 멀리 떨어지라고 우리에게 경고한다. 그는 해방 신학을 예로 들고 있다.“가난한 사람들의 해방에 대한 타협할 수 없는 헌신으로 시작하는 신학의 경우, 만약 그런 헌신이 비 성경적 관점의 사고 형태를 통해 표현되는 상황에까지 이른다면, 이제 그런 신학은 신학 자체에 해를 끼치는 신학적 통제를 행사하게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런 절차는 성경적 권위를 약화시킬 수 있다. 나는 가난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성경을 훼손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문제는 가난한 사람들의 해방이라는 생각이 비 성경적 관점까지 형성하는 경우에 그렇다는 것이다.” 클락이 ‘다 방향 리더십’을 구현하는 곳이 바로 이 대목이다. 이전 글에서 살펴본 것처럼 포스트모던 이론 뿐 아니라 순진하고 개인주의적인 해석 모두에게서도 우리는 위험을 발견해야 한다. “전통적인 복음주의 신학은 때때로 문화적 가정(assumptions)을 간과한다. 그러나 성경 해석에 관한 문화적 순진함을, 마치 모든 경험은 다 중립적이기에 경험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식으로 대하는 것은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경험 속에는 언제나 이론적 기본(commitments)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에스더 아콜라체(Esther Acolatse)와 같은 학자들이 성공한 영역이다. 권력과 권세에 관한 작업을 통해서 그녀는 단순히 어느 한 곳의 문화적 해석을 다른 것과 비교해서 수정하는 것으로 그치는 대신, 모든 문화가 예외 없이 타 문화권의 신자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반복해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 성경적 도전이 문화에 관계없이 세계 모든 곳에서 항상 강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5. 한 사람의 민족적·문화적 배경이 신학적으로 모두를 대표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아시아 신학자라면 아마도 아시아 신자들의 경험이나 교리를 반영할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일부 기독교인들에 관해서 사이몬 챈은 우려를 표한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설명한다. 일부 아시아 신학자들이 채택한 것은 “문화에 대한 수용과 문화적 경멸자들에게 기독교를 칭찬하는“자유주의 프로그램”일 뿐이다. 문화가 신학자들이 고민할 의제를 정해줄 때가 있다. 이건 문화가 신학이 마땅히 다뤄야 할 규범(norms)을 정해주는 데 있어서 필요한 단지 작은 단계일 뿐이다.” 그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시아 신학을 구성하는 것에 대한 이런 식의 매우 선택적인 이해는 마땅히 도전받아야 하는데, 그건 계몽주의 인식론의 무비판적 동화와 그에 따른 신학적 분별력의 결여뿐만이 아니라 아시아에서 일어난 광범위한 기독교 운동을 완전히 무시하는 방식, 즉 복음주의와 아시아 대부분의 오순절 운동, 특히 인도, 일본 및 중국의 토착 기독교 운동에 대한 몰이해로 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 풀뿌리, 민중으로부터 시작한 신학을 무시함으로써 이른바 아시아 에큐메니칼 신학자들이 제시하는 것이 단지 오래된 사상을 재창조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챈은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에서도 같은 현상이 관찰된다고 말한다. “엘리트 신학자라면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에 대해서 얼마든지 새로운 신학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신학은 결코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많은 관심을 끌지 못할 것이다. 그런 신학의 실패는 ‘해방 신학은 가난한 사람들을 선택했지만, 정작 가난한 사람들이 선택한 건 오순절주의다’라고 언급한 한 라틴 아메리카 신학자에 의해 정확하게 집약 표현되었다.”마찬가지로, 신학에 “흑인 신학”이라는 라벨이 붙었다고 해서 그것이 흑인 교회에서 제자화된 대다수의 흑인 기독교인을 대표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떤 특정한 민족적 또는 문화적 배경(label)을 가진 어떤 신학이 또는 신학자가 하나님 말씀의 권위와 충분함을 믿고 말씀을 실천하며 사는 모든 기독교인을 제대로 대표한다고 가정하지 말라. 결론이 시리즈를 마무리하면서 겸손한 성경 읽기를 안내하는 몇 가지 원칙을 제시하는 데이비드 클락을 다시 한 번 인용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것 같다. 복음주의자라면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1) 우리는 모든 신학적 해석에 영향을 끼치는 문화라는 현실을 인식해야 한다. (2) 우리는 모든 문화에 대해 의도적으로 자기 비판적 입장을 취해야 한다. (3) 그러나 우리는 문화적 관련성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도 신학의 필요성을 주장해야 한다. (4)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모든 문화적 가정을 뛰어넘는 성경의 우선 순위에 순종해야 한다.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두 가지 실수가 가능하다. 하나는 문화적 또는 철학적 선이해가 아예 존재하지 않거나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척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과거에 너무도 많은 복음주의 신학이 실패를 저질렀다. 다른 실수는 문화적이고 철학적인 가정에 너무 깊게 함몰됨으로 그 가정이 결과적으로 구체적인 신학의 전체 의제를 다 결정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바로 여기가 주류와 자유주의 신학을 망라해서 맥락화의 오류에 빠진 신학이 계속해서 헛발질을 하는 지점이다. 사실상 현대 사회가 던지는 의제에 항복하는 경우 주변 문화와 구분 자체가 불가능한 신앙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리고 신앙이 더 이상 문화와 구분할 수 없게 된다면, 그런 신앙에서는 더 이상 생명(vitality)을 찾을 수 없게 된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함정을 피하면서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돕는 인식론적 겸손을 목표로 하자. 우리의 왕 되시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또 꿇도록 하자. 이 세상 모든 문화에 유익을 끼치는, 우리가 사랑하는 공동체를 통해 그분의 권위가 말씀을 통해 이 세상에 훤히 드러나도록 다 함께 노력하자.원제: Becoming Humble Interpreters of God’s Unchanging Wor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문화
세계관
포스트모더니즘
성경읽기
겸손
성경해석
권위
DA카슨
복음주의
선이해
신앙 성장의 큰 그림을 그려주는 신학
by 김상일
2020-12-07
“이런 것들은 단순히 의지력만으로는 변화될 수 없다. 성경의 원리들을 배워 실천에 힘쓴다고 되는 게 아니다. 영속적 변화는 복음을 더 깊이 이해하고 마음에 속속들이 배어들게 해야만 가능하다. 말하자면 복음을 늘 섭취하고 소화해 자신의 일부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는 성장할 수 있다.” (탕부 하나님, 164쪽)신앙 성장이란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길로 인도하는 일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길로 인도하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알아야 하며, 하나님의 백성이 걸어가야 할 하나님의 길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백성을 알며, 또 하나님의 백성이 걸어가야 할 하나님의 길을 아는 것은 단지 이론적인 신학적 연구와는 다르며, 아울러 목회적인 상담 테크닉이나 교회 성장론과도 확연히 다르다. 왜냐하면 신앙 성장의 핵심으로서 1) 하나님을 안다는 말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복음이란 어떤 소식인지를 아는 것이며, 2) 하나님의 백성을 안다는 말은 현대인이 가진 온갖 질문과 욕구, 고민 속에서 복음이란 어떤 소식인지를 그들이 깊이 공감할 수 있게 해주며, 마지막으로 3) 하나님의 백성이 나아가야 할 하나님의 길을 안다는 말은 현대인들이 가진 질문과 욕구, 고민이 복음을 믿음으로써 어떻게 해결 가능하며, 더 나아가서 그들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닮는 사랑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는 성경과 신학 전통에 대한 통찰 뿐만 아니라, 현대인과 그들이 속한 문화에 대한 이해 또한 요구한다. 그러므로 신앙 성장은 그 자체로 성경과 신학 전통을 현대인과 그들이 속한 문화 속에서 전달하고자 고민하는 신학함 즉 중간 지대의 신학함을 필요로 한다. 팀 켈러는 신앙 성장의 세 가지 요소에 대한 큰 그림을 다음과 같이 그려낸다.1) 켈러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아는 일은 복음에 대한 집중이다. 2) 켈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을 아는 것은 그들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이해하며 공감하는 것이다. 3) 켈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나아가야 할 하나님의 길은 복음에 집중함으로써 경험하는 정체성의 변화로 대변된다. 1) 켈러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아는 일은 복음에 대한 집중이다“우리는 복음이 결코 세상에 대한 단순한 종교적 재활 프로그램인 것 같은 인상을 주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복음은 완성된 대안 사역이다. 우리는 복음을 어떤 것(예를 들면 천국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으로 그려서는 안된다. 오히려 복음은 무엇(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런 실수를 한다면, 복음은 또 다른 종류의 공로 구원(salvation by works)이 되고 만다. 복음은 믿음에 의한 구원이다.” (센터 처치, 57쪽)켈러에 의하면, 복음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소식이다. 즉,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여기에 인간이 어떤 기여를 할 여지는 전혀 없다. 복음에 대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이런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그 일하심을 믿는다는 말이 삶과 관계에서 어떤 뜻인지를 숙고하고, 또 그대로 살아가는 것뿐이다. 여기에는 공로 구원의 여지가 전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함의 중요성이 무뎌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믿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를 알면 알수록 행함과 믿음이 분리 될 수 없다는 것을 복음 자체가 주장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켈러는 2006년에 고든콘웰에서 했던 ‘마음에 설교하기(Preaching to the Heart)’ 강연을 비롯해서, 자신의 모든 저서들과 설교, 강연에서 계속해서 이런 요지의 주장을 반복한다. “만약 정말 복음을 믿는다면, 우리는 이러이러하게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살지 못한다는 말은 복음을 믿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복음은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할 것을 요구한다. 더 나아가서, 복음은 우리가 복음을 온전히 믿을 때 원수를 사랑하게 될 것임을 약속한다. 그러므로 켈러에 의하면 원수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복음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뿐만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삶, 즉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이웃을 온전히 사랑하는 삶을 살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우리들 중 그 누구도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이웃을 온전히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 이런 견지에서 켈러는 교회를 다니든 다니지 않든, 신앙 경력이 오래 되었든 그렇지 않든, 아무도 복음을 온전히 믿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이것은 복음이 전해지는 사람의 마음의 기본값은 종교(=하나님의 수용과 인정을 스스로의 노력과 성취로 얻어내려는 시도)이며, 복음이 아님을 발견한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주된 통찰이기도 하다.) 즉 신앙 성장이란, 복음을 더 온전히 믿게 되는 과정을 통해서 일어난다. 다음의 설명은 그런 켈러의 확신을 잘 드러낸다. “사람들은 구원이 오직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온다는 것과, 거저 주신 구원의 결과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것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의 성장에서 성도의 노력이 갖는 구체적 역할이나 성질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르다. 마르틴 루터가 말하듯, 모든 죄의 뿌리는 우상숭배이다. 우상숭배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이며 의(righteousness)라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유일한 노력이 있다면 그것은 복음을 믿는 것이다. 복음을 믿는 노력이란 그리스도인의 성화가 칭의와 마찬가지로, 오직 믿음으로 된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성화는 복음을 충분히 열정적으로 믿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센터 처치, 147쪽)이런 식의 화법은 복음을 믿는다는 말의 무게를 신자들이 실감하게 해줄 뿐 아니라, 또 한 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소식인 복음이 우리 삶에 가져오는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계속해서 탐구하고 숙고하게 해준다. 즉 복음을 계속해서 들여다보고, 과연 복음이 우리 삶의 구체적인 문제들과 고민들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는 소식인지를 고민하게 해준다는 말이다. 켈러는 이 점을 두고 신앙이 성장하려면 ‘복음이 우리 삶에 더 자주, 더 많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2) 켈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을 안다는 일은 그들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이해하며 공감하는 것이다현대인은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안전하고 굳건한 정체성을 얻어내려는 시도가 현대인의 삶을 규정짓는 특징 중에 하나가 된 지 오래다. 왜 성공하려고 하는가. 왜 돈을 많이 벌고자 하는가. 모르긴 몰라도, 이런 일들의 배후에는 현대인 스스로가 가치 있는 존재라는 정체성을 얻어내려는 욕구가 숨어 있다. 자신의 저서 일과 영성에서, 켈러는 현대인이 고민하는 안전하고 굳건한 정체성을 얻어내려는 시도는 어떤 이야기를 살아내느냐의 문제라는 점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매킨타이어는 인간의 행동이란 ‘몸으로 구현해내는 내러티브’라고 주장한다. 저마다 삶의 의미를 주는 정신세계의 이야기를 살아내고 있다. 환경을 지키는 따위의 대의를 실현하려는 대의라든지, 불리한 사회적 신분과 기대를 딛고 일어서서 성공하려는 갈망과 씨름하는 이야기일지 모른다. 또는 한 가정을 억압받는 상황에서 끌어내 새로운 나라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는 자유와 평등에 관한 내용일 수도 있다. 아니면, 남들의 편견에 저항해서 저만의 성적, 문화적, 정치적 정체성을 구축해가는 사연일지도 모른다. 어느 경우든, 모두가 한마음으로 동참한다면 세상은 더 나은 곳이 될 거라고 굳게 믿는 커다란 이야기 속으로 자신을 끌고 들어간다.” (일과 영성, 196-197쪽)이렇게 다양한 정체성의 경쟁 구도 속에서, 결국 우리가 원하는 안전하고 굳건한 정체성을 얻어내는 일이란 어떤 이야기를 우리의 이야기로 살아내야 하느냐로 귀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복음이 우리가 살아내야 할 (=온 몸으로 구현해내야 할) 이야기라면, 복음은 우리에게 어떻게 안전하고 굳건한 정체성을 제공해 주는가. 그에 대해서 켈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성령에 의해 복음의 진리가 가슴에 깨달아질 때, 우리는 신중하고도 확실한 성령의 도우심으로 자신을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게 된다. 우리가 얼마나 안전하고 확실한 구원을 받았는지, 얼마나 큰 사랑과 용납을 받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 알게 된다. 복음을 통해 더 이상 우리 정체성의 기반을 성취한 공로들에 두지 않게 되며,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일들을 토대로 정체성을 갖게 된다.”(센터 처치, 145쪽)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일들을 토대로 얻는 정체성은 첫번째로 변함이 없는 과거에 일어난 일들에 기반하고 있으며, 두번째로 내 노력이나 성취와는 상관없는 일들에 기반하고 있다. 이런 정체성은 당연히 안전하고 굳건하다. 변화될 여지가 전혀 없는, 너무나 확실한 일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안전하고 굳건한 정체성은 어떻게 우리의 신앙을 성장하게 하는가. 3) 켈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나아가야 할 하나님의 길은 복음에 집중함으로써 경험하는 정체성의 변화로 대변된다켈러는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근본적인 동기의 변화야말로 바로 우리가 전심으로 복음을 믿을 때 경험하는 바라고 말한다. 즉 우리의 동기가 변화된다는 말은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 된다는 말, 즉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는 의미라는 것이 켈러의 주장이다. 역으로 우리가 복음을 믿지 않을 때 우리의 동기는 우리의 결핍을 원동력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왜일까. “진정으로 복음을 믿을 때 우리는 자연스레 심성에 배여 있던 극도의 결핍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존경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후한 대접을 받고 싶어하는 결핍된 마음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스스로가 인생을 통제하고 싶어한다. 우리 자신의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타인에게 권력을 행사하고 싶기도 하다. 전심으로 우리를 기뻐하시는 영광의 하나님이 단지 개념일 뿐이라면, 우리는 결핍에 압도당할 것이고, 이 결핍이 우리의 모든 행동 동기가 될 것이다. 성령의 능력이 아니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이나 은혜를 조금도 믿지 못할 것이며 마음은 부채 의식 모드인 율법주의로 작동할 것이다.”(센터 처치, 145쪽)좀 더 깊이 생각해 보자. 복음을 믿지 않을 때 우리의 마음은 어떤 상태인가? 우리는 어떤 동기를 가지고 살아가는가? 켈러는 디도서 2:12을 읽어내면서 다음과 같이 예리하게 분석한다. “디도서에서는 독자들에게 불경건한 것과 세상적인 욕심에 대해서 ‘아니다’를 말하라고 가르친다. 또한 절제되고 경건한 삶을 살라고 말한다 (딛 2:12). 당신은 어떤 이유로 불경건한 행동에 대해서 아니라고 말하는지 생각해 보라. 아니다—그러면 사람들이 좋지 않게 볼 것이기 때문이다아니다—그러면 내가 속하고 싶은 그룹에서 배제될 것이기 때문이다아니다—그러면 하나님이 나에게 건강과 부요, 행복을 안 주실 테니까아니다—그러면 하나님이 나를 지옥에 보낼 거니까아니다—그러면 나중에 나 자신이 미워지고 자존감이 상할 것이기 때문이다.” (센터 처치, 143쪽)왜 ‘아닌지’에 대한 다섯 가지 동기 모두 나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악한 것들에서 멀어지고 경건한 삶을 사는데 있어서도, 복음으로 변화된 마음이 아니라면 우리는 항상 자기중심적인 동기로 움직인다. 이런 동기로 경건하게 사는 사람은 복음이 말하는 모든 요구 사항에 순종하면서도 여전히 복음을 믿지 않는,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맏아들과 같은 사람이다. 중요한 점은 우리 중 이런 동기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운 사람은 (즉 맏아들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다. 이런 동기들 위에 경건한 삶을 세우는 일은 아주 흔하게 일어나며, 따라서 복음을 믿지 않고도 충분히 경건하게 살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것이 신앙의 성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믿는데서 나오는 경건한 삶의 동기는 어떤 모습인가? 켈러는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사실상 이 모든 동기부여 방식들은 마음의 자기중심적인 욕구들을 사용해서 외부의 규칙에 순응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 바울은 독자들에게 이 중에 어떤 것을 사용해서라도 자신을 변화시키라고 말하지 않는다. 디도서에서 그는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에게 자기 관리를 하라고 말하는가?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라고 썼다 (딛 2:11-12). 또 바울은 디도서 3장 5절에서 은혜가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것들 때문이 아니라 그의 자비로써 하셨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만일 당신이 진정으로 변화되기를 원한다면, 먼저 복음이 당신을 가르치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가르친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훈련하다’, ‘단련하다’, ‘일정 기간 코치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이 먼저 당신과 씨름하게 해야 한다. 복음이 깊이 자리잡게 해야 한다. 그래서 복음이 당신의 관점과 동기의 구조를 바꾸도록 해야 한다. 당신은 복음에 의해서 훈련받아야 하고, 복음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센터 처치, 144쪽)복음을 믿고 따르는 일은 우리에게 안전하고 굳건한 정체성을 제공해주며,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근본 동기를 바꿈으로써 우리의 정체성을 바꾼다. 그렇게 변화된 정체성을 가진 이들은 복음을 더욱 더 신뢰하고 믿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서 그 분을 따르는 삶, 즉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이웃을 온전히 사랑하는 삶으로 인도함을 받는다. 이것이 바로 켈러가 말하는 신앙 성장의 큰 그림이다.
교회생활
신앙성장
팀켈러
탕부하나님
센터처치
우상숭배
정체성
일과영성
복음
교회는 가족이다
by Megan Hill
2020-12-06
나는 성경적 용어들을 사용하기 훨씬 전부터 ‘형제’와 ‘자매’라는 말의 중요성을 배웠다. 어린 시절 나는 부모님이 전화 통화를 하실 때 부모님이 말씀하시는 반쪽 대화만을 듣고 책을 읽는 데 빠져들곤 했지만, 상대편에 있는 사람이 누구일지 약간 궁금했었다.대화가 시작될 때 하는 이런저런 수다는 내 관심을 끌지 못했다. 대화가 조용히 멈추거나 단호한 어조로 바뀌는 시점도 내 관심을 완전히 끌지는 못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전화한 사람에게 “형제”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찾아보곤 했었다.부모님이 전화로 대화를 나누고 있던 상대방은 분명히 교회 가족 중의 일원이었으며, 그가 병원에서 진단받은 결과에 대해 염려하여 전화를 하든지 혹은 의자를 빌리러 집에 들르던지, 그것은 아마도 내 삶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보라 네 형제요 자매라성경적 용어로 예배에 참석하러 와서 내 주변에 앉는 사람들은 내 가족이다. 생물학적인 가족의 일원과 같이, 우리가 그들을 선택한 건 아니지만, 그들은 우리를 위해 선택되었으므로, 우리는 그들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께 속해 있으므로, 우리 모두는 그분의 가족이 되는 것이다.요한이 십자가 사건을 언급할 때 보면,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요 19:26-27)고 나온다. 그리스도가 그 선언을 하셨을 때, 마리아와 요한은 서로 한 가족이 되었고, 생물학적 어머니와 아들이 보여주는 모든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중에 바울이 로마 교회에게 뵈뵈를 환영하고 도와주기를 바랐을 때, 그는 그녀를 “우리 자매”라고 칭했다(롬 16:1). 베드로가 실루아노를 칭찬하고자 할 때 그는 실루아노를 “신실한 형제”(벧전 5:12)라고 불렀다. 바울과 베드로가 온 회중을 칭할 때도 그들은 “형제들”(혹은 “형제자매들”)이라고 불렀다. 우리 주변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이들은 사실 우리의 가족이다.가정생활형제자매 관계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은 지적인 활동이 아니다. 우리의 깊은 감정이 불러 일으켜지고 구체적인 표현으로 넘쳐나야 하는 심오한 진실이다.이들이 가족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알고(요삼 1:15), 그들의 관심을 알고자 한다. 우리는 그들 모두에게 형제의 사랑을 표현하며(롬 12:10), 차별하지 않는다(약 2:1). 우리는 ‘당신이 내 형제자매이며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하려고 여러 방식으로 애를 쓴다.신약 성경 이곳 저곳에서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서로를 돌보라고 명하고 계신다. 서신서는 특히 형제자매됨의 의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 가르쳐주고 있다(딤전 3:15). “서로가 서로에게”라는 여러 명령을 하면서, 서신서들은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사는 삶은 주일만 아니라 매일 매시간 우리가 서로가 서로에게 충성해야 함을 상기시켜 준다. 교회는 우리 편리에 따라 참여해도 되고 거부해도 되는 인간이 만든 조직이 아니다. 학부모회나 주민회나 혹은 도서관 후원 클럽 등은 어려움이 있을 때 우리의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족은 그렇다.하나님의 백성은 우리의 가족이기 때문에 우리는 가진 것을 서로 나누며, 다투거나 허영으로 대하지 않는다(행 4:32; 빌 2:3-4). 우리 마음과 문을 열고 식사를 함께 하며 서로를 위해 기도한다. 그들에게 먹을 것과 가구와 미소를 전달한다. 슬픔과 시련과 절망을 함께 나눈다. 사랑을 보여줄 방법을 찾는다. 그 결과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는 돈과 자유시간이 줄어들 수 있음을 알고 있다. 슬픔이 배가될 것을 알고 있다. 또한 큰 기쁨이 있다는 것도 안다.예수, 우리의 형제교회에 속한 평범한 사람들과 영적 가족으로서 누리는 일상의 기쁨은 궁극적으로 더 큰 것에서 연유된다.우리의 기쁨은 영적 가족에 속한 모든 사람을 자신처럼 여기시는 그리스도 우리의 형제로부터 온다. 로마서 8장은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29절)고 말한다. 구속 사역은 광대한 가족 구성원이 점점 하나님의 맏아들과 같은 형제로 보이게 되는 데 의미가 있다.이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형제자매로 주신 특정한 이들로 기뻐할 수 있다. 그들이 아무리 특이하게 보일지라도, 우리는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적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성장하고 성숙해 가면서 성품과 행동이 점점 더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는 그분과 닮아가게 된다. 그분의 영의 사역으로 인해 그들이 그분의 말을 하고 그분의 방식으로 사랑하며 그분의 대적을 미워하며 그분의 거룩을 반영하고 그분을 섬기기 때문이다. 그들과 우리가 더 그리스도와 같이 될수록 우리는 그들을 더 사랑하게 될 것이다.성경 말씀 중에서 가장 충격적인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교회에 모이는 사람들을 보며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히 2:11)라고 하는 부분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까? 어떻게 그리스도가 평범하고 연약하며 때로 까칠한 사람들을 그분의 가족이라고 하고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분이 그들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그분이 그들을 점차 형성시키시고 언젠가는 그들이 완전히 변화될 것임을 확신하시기 때문이다(히 2:10-18; 참조, 갈4:19). 우리 정체성이 그분 안에서 발견되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를 기꺼이 형제로 여기시는 것이다.우리가 교인들과 확실한 관계 가운데 애정이 넘치게 되면, 그들을 우리의 형제라고 부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세계를 향해 고백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우리의 형제자매처럼 형성되어 가기 때문이다.크리스천 형제자매 안에서 우리는 세계가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 말이다.원제: Your Church Is Your Famil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정은심
교회
교회생활
가족
형제자매
영적가족
맏아들
구속사역
교회공동체
찾아가는 진리 vs 찾아오는 진리
by 정요석
2020-12-05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교회를 떠나 10년간 방황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삼국지, 수호지와 같은 역사 소설을 읽으며 다양한 리더십에 관해서 배웠지만, 정작 깨달은 것은 등장인물이 모두 죽는다는 것이었다. 죽음 앞에 모든 의미를 잃어버리는 허무감은 점점 심해졌다. 그 답을 성경에서 찾아야 했는데 찾지 못하고, 중학교 졸업 무렵에 교회를 떠나고 말았다. 고등학교 때 진리를 찾아 불교에 입문하였고, 대학교에 가서도 허무감을 극복하기 위해 청년회 회장을 맡을 정도로 열심을 내었다. 그때 현각(玄覺)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요사이 ‘현각’과 ‘혜민’이라는 두 명의 스님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나와 동년배이자 같은 법명의 현각 스님은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나 장차 신부가 되길 꿈꾸며 성장했다. 하지만 신정론(神正論)의 의문을 갖던 중 16살의 동갑내기 사촌이 사고로 죽는 것을 보면서, 신앙에 회의를 갖기 시작했다. 그때 키에르케고르를 통해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믿음에서 출구를 찾는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었다.“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키에르케고르의 철학 중 석연치 않은 부분이 생겼다. 그의 철학을 곰곰이 따져보면 결론은 결국 ‘하느님’과 ‘믿음’으로 돌아간다는 점이었다. 신 앞에 홀로 던져진 나약한 인간이 스스로 진리를 찾아야 한다는 대목에서는 수긍이 갔지만 결국 그 진리란 신을 확실하게 믿음으로써 발견할 수 있다는 대목에서는 멈칫했다.”그 후 현각은 “진리란 우리 안에 있다. 우리는 오직 참선과 수행을 통해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라고 말한 쇼펜하우어에게 큰 감명을 받았고, 보스턴의 유명한 교회 목사였다가 철학자가 된 에머슨의 “진리란 우리 안에 있다”라는 말에 심취하였다. 1989년 9월, 그는 하버드 신학대학원에서 비교종교학을 전공하던 중 숭산 스님의 설법을 듣고 출가를 결심했다. 3년 후인 1992년 9월에 “나는 나 자신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이 세상 고통의 본질에 대한 이 심오한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그 수많은 철학책, 어렸을 때부터 배우고 가르침을 받았던 종교는 나에게 해답을 주지 못했으므로 나 혼자서 그것을 찾아야만 한다.”라고 말하며 출가했다.현각은 기독교의 믿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노력으로 진리와 구원을 얻고자 했다. 그는 아직도 믿음을 통한 구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득도하기 위해 여전히 하안거와 동안거라는 3개월간의 고행과 참선을 한다. 스스로 진리를 찾기 위해서이고, 자기 안에 진리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자력 구원의 모습이다. 베스트셀러 작가로 유명한 혜민 스님은 무소유를 말하였지만 실제로는 ‘풀(Full)소유’임이 드러나며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현각은 혜민에 대하여 “그는 단지 사업자/배우뿐입니다. 진정한 참선하는 경험이 완전 없다고 합니다. …… 부처님의 가르침을 팔아먹는 지옥으로 가고 있는 기생충일 뿐”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2008년에 조계종 승려가 된 혜민의 비판 중 눈에 띄는 것은 그가 지난 12년 동안 하안거와 동안거를 했다는 기록이 승적에 없다는 것이다. 스님들은 스스로 진리를 찾기 때문에 여름과 겨울에 90일 동안 한 곳에 머물며 수행에 몰두한다. 하안거와 동안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진리를 향한 치열한 정진이 적었다는 뜻이다. 현각이 혜민을 비판하는 것은 혜민의 풀소유 문제도 있지만, 하안거와 동안거로 대변되는 치열한 구도의 길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형제에게 노하거나,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셨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다고 하셨다. 사람 중 마음에 떠오르는 순간적인 생각까지도 통제할 자가 어디에 있는가? 시인 윤동주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도록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고 말하였다. 실로 절대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의의 관점에서는 잎새에 이는 바람조차도 살인과 간음에 해당한다.바울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기에 율법의 행위를 통해 의로움에 이르려는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다고(갈 3:10) 말한다. 외형적으로는 모든 율법을 늘 지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마음속으로까지 모든 것을 늘 지킬 자는 아무도 없다. 바리새인들은 외형적으로 율법을 지키면서 자신들이 율법적으로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이들을 ‘외식하는 자’라고 저주하셨다.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도 없도다. 사람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고,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르다(롬 3:10-15). 사람들의 악독함이 얼마나 심하면 긍휼함이 풍성하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께서 노아의 가족 8명을 빼고 모두 홍수로 죽게 하셨겠는가? 사람의 마음에서는 선한 것이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 나온다. 이 모든 악한 것이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지, 절대로 선한 것이 나와 사람을 깨끗하게 하지 않는다(막 7:20-23).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사람들이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한다(고전 2:9). 타락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생명과 구원에 대하여 마음으로 개념조차도 갖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로 그 생명과 구원에 대한 생각을 갖게 하시므로 우리가 깨닫는 것이지 절대로 우리의 힘으로 깨닫지 못한다. 우리는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을 받음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생명과 구원을 알게 된다(고전 2:12).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마저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것이다.중학교 이후 10년 동안 허무함에 빠진 삶을 생각하면 지금도 몸서리쳐진다. 허무가 밀려오면 공부도, 운동도, 어떤 것도 즐겁지 않고 의미가 없었다. 허무감은 피부를 벗기고 뼈를 깎는 고통만큼 심하였고, 잡히지 않는 진리를 탐구하는 마음은 미혹과 좌절의 연속이었다. 이런 나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셨다. 27살 늦은 가을에 찾아오신 예수님을 내가 찾은 줄 알았는데, 신앙생활을 할수록 그리고 성경을 알수록 내가 찾아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음을 알게 되었다. 예수님은 성령님을 통하여 두꺼운 미혹의 벽을 깨부수셨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심어주셨다. 나는 한계가 분명한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전능하신 창조주이심을 알게 되며 전적으로 그분에게 기댈 수 있었다. 그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함이 내 마음에 가득 했던 허무함을 내쫓았다.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고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것이다(롬 8:20). 인생의 관찰력이 있는 자라면 인생이 허무함을 느낄 수밖에 없고, 이를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칠 수밖에 없다. 인생에서 가장 슬픈 것은 인생의 허무함을 깨달은 자가 스스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것이고, 가장 복된 것은 믿음으로 예수님을 통해 해방되는 것이다.기독교에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생명과 진리가 있다. 그것을 받은 신자들은 진리와 구원을 누리기 위해 그리고 귀한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기 위해 진지한 성화의 길을 걷는다. 그 길마저도 우리의 의지와 행위로 걷는 것이 아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내주하시며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도우심으로 이룬다. 그렇기에 우리는 얼마나 복된 자들인지 모른다. 신자들은 성화의 길에서 종종 좌절하고 죄를 짓지만, 그때에도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일으켜 세우시며 끝내 걷게 하신다(롬 8:28-30). 우리는 먼지와 같은 존재이고,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롬 11:36). 그분을 영원토록 찬송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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