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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성경 사이 간격 제대로 이해하기
by Trevin Wax
2020-12-04
지난 첫 번째, 두 번째의 글에서 나는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데에 조심해야 할 두 가지 위험에 관해서 지적했다.- 첫 번째는 포스트모던 관점 이론의 영향을 받아 성경을 읽는 경우이다. 이럴 때 우리는 사회적, 문화적 위치 또는 특정 공동체의 “살아있는 경험”의 영향을 강조하는 해석학을 채택함으로, 애초에 철저한 본문 해석 자체를 불필요하게 만드는 상대주의적 해석 방식에 빠지게 된다.- 두 번째는 텍스트를 대할 때 가지는 “선이해”의 영향을 최소화하고 또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해 필요한 다양한 대화 상대 자체를 불필요하게 만드는 모더니스트 또는 계몽주의 시대의 철학으로 돌아감으로 포스트모던 식의 해석학에 반응하는 위험이다. 이전 글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원칙을 제시했다. 우리는 성경을 이해하는 능력에 영향을 미치는 거리(시간, 문화, 지리, 언어) 영역을 최소화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과장해서도 안된다. 이번 글에서 나는 거리를 최소화해서는 안되는 이유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거리를 과장하는 위험을 잊어서는 안 된다. 거리를 과장하게 될 때 우리는 아예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는 자괴감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 성경 읽기에 있어서 “선이해”의 영향을 어디까지 인정하고 또 본문 속 바른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노력해야 할까?1. 진짜 지식과 전지적 지식 사이의 차이를 인식하라참된 겸손과 거짓된 겸손을 구별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진짜(genuine)” 지식과 “전지적(omniscient)” 지식을 구별해야 한다. 계몽주의 시대의 확실성(현실에 대한 “객관적인” 또는 “하나님의 눈”이 존재한다는 관점)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비판에 설득된 일부 성경 독자들은 진정 겸손한 자세는 우리가 진짜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며 두 손을 들고 항복 선언을 하는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나 이건 진정한 겸손이 아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알 수 없다고 해서 우리가 아무 것도 알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진짜 지식을 얻기 위해 전지적인 지식을 추구할 필요는 없다. 어떤 진실을 완전히(전지적)는 모르더라도 우리는 얼마든지 부분적으로나마 진실(진짜)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D. A. 카슨(D. A. Carson)은 이렇게 썼다. “성경은 우리의 창조자이자 구속주이신 하나님을 향한 생각과 적극적인 믿음, 그리고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에 적절한 확신으로 응답함으로 인간이 얼마든지 지식에서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종종 암묵적으로 그러나 때로는 명시적으로까지 보여준다.”지식에서 자라나는 성장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거나 또는 우리가 알 수 없다는 사실만을 강조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를 아예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게 된다. 그분의 말씀에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에 귀를 막기 위해 종종 편리하게 사용되는 변명인 “겸손함”에 호소함으로써, 우리는 진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 2. 모든 성경 해석을 문화적 산물로 축소하지 말고 성경 해석에 문화가 미친 영향을 정확하게 인식하라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본문을 대할 때 가지는 “선이해”의 측면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사회 및 문화적 상황(location)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성경 공부에서 중립적이지 않다. 문화는 우리의 해석에 정보를 제공한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이 해석학에 미치는 영향은 모든 것을 문화로 축소시킨다는 사실이다. 케빈 벤후져(Kevin Vanhoozer)가 경고했듯이 모든 것이 “위치, 위치, 위치”가 된다. 그 결과 해석학적 과제는 진짜 지식이 가지는 보편성에서 각각의 성경 독자가 가진 위치와 상대성으로 옮겨진다. 이전 글에서 언급한 케냐의 로잔 문서는 이러한 접근 방식이 가진 문제점은 다름 아닌 성경의 권위에 대한 기능적 거부라고 설명하고 있다. “보편성에 대한 모든 주장이 그 주장을 발생시키는 사회적 맥락에 따라 상대적일 뿐이고 또 관점의 차이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근거 자체가 없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그 어떤 관점으로도 누리지 못하는 특권 지위라는 우월성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듯 다양한 관점에 혈안이 된 세상이다. 관점의 다양성이 칭송받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의견에 대한 권리가 있고, 그 의견이 원칙적인 측면에서 도전받지 않는 경우라면, 이 세상에 잘못된 의견이란 존재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성경이 다른 종교 서적보다 더 권위가 있을 이유가 없다. 모든 경전은 다 각각 서로 다른 종교적 맥락에서 관련이 있으며, 이제 그 누구도 진리에 대한 배타적인 경로를 주장할 수 없다.”물론 사회적 상황(social location)이 성경 이해에 미치는 영향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또 다른 문화권의 신실한 기독교인들과 대화함으로써 우리 모두가 성경 본문에 대한 더 넓고 깊은 이해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진리가 개인의 관점에 달려 있다는 생각에는 강하게 저항해야 한다. 로잔 문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러한 평등주의는 진리의 기준이 다양한 진리 주장자들(truth-claimants)이 살고 있는 삶의 형태나 사회적 맥락 속에 엄격히 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합의된 표준을 따르도록 압력을 가하는 대신, 여러 관점과 차이를 포용하도록 하는 관용의 문이 열린다.”3. 흔하디 흔한 문화적 분열을 가로질러 광범위한 합의를 이룬 영역에 기뻐하라다시 말하지만, 성경을 이해하는 능력에 대한 사회적 위치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거나 과대평가해서는 안된다. 거리가 주는 차이를 최대화하는 것을 막는 방법 중 하나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에 복종하는 사람들과 우리가 함께 찾아낸 광범위한 합의점을 인식하고 기뻐하는 것이다. D. A. 카슨은 이렇게 말했다. “성경이 최종적인 권위이며 누구라도 성경 말씀에 따라서 수정될 수 있다는 사실에 있어서만 서로 동의한다면, 성경이 말하는 가르침과 관련해서 얼마나 많은 합의를 얻을 수 있는지 실로 놀라울 정도이다. 나는 지금 행복했던 나의 십 년이라고 부르는, 당시 세계 복음주의 펠로우십(World Evangelical Fellowship)이라고 불렸던 곳에서 사역하던 때를 기억한다. 실로 다양한 배경의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본문에 대한 각자의 생각이 옳다고 하기 보다는 열심히 노력하고 인내하며 토론과 상호 비평을 하며 겸손하게 본문의 바른 의미를 찾으려는 목마름 등으로 우리 모두가 하나 되었던 그때를 기억하면 나는 지금도 감동으로 가슴이 벅차다.”물론 핵심은 모든 해석자가 다 성경이 최종적 권위라는 데 동의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자세는 성경에 복종하는 자세이며, 같은 본문에 대해 같은 마음과 열정을 공유하는 형제자매들의 통찰력에 마음을 여는 것이다. 이런 경우, 결과는 일반적으로 불일치보다 합의일 때가 훨씬 더 많다. 여기 의미있는 사례를 가지고 카슨이 다시 이야기한다. “몇 년 전 아프리카 성경 주석이 출판되었을 때, 출판사와 마케터들은 마침내 우리가 다른 대륙에 사는 기독교인들의 목소리를 통해서 성경의 의미에 대해 그들의 해석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고, 그럼으로 기독교인에게 더 풍성한 성경 해석의 기회를 주게 되었다면서 흥분했었다. 물론 어떤 면에서 이것은 놀라운 진실이다. 아프리카 성경 주석은 서양에서 나온, 퇴마에 관한 책 한 권 전체 분량의 주석보다 더 많이 그 주제를 다뤘다. 그 뿐 아니라 마법, 조상 숭배를 둘러싼 질문 뿐 아니라, ‘건강과 부요함을 약속하는 번영 복음’을 향해서도 중대한 도전을 던졌다. 그러나 그 주석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이 사실이다. 주석의 90% 또는 95%의 내용은 전 세계 어느 곳에서 복음을 믿는 그 어떤 기독교인이라도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라는 사실이다. 그 어떤 신학자가 썼다고 해도 90% 또는 95%의 내용은 일치했을 것이다. 우리는 결국 똑같은 책을 소유하고 있기에, 이런 사실에 놀라서는 안 된다. 좁은 시야에 갇혀 독자의 반응(reader-response)에 연연하는 해석학에 너무 매혹되기 전에 우리는 아프리카 성경 주석이 어떤 면에서 혁신적이지 않고 또 결코 혁신적이어서는 안 되는지를 자문해야 한다.”그러면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다음 글에서는 인식론적 겸손(epistemic humility)을 유지하면서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방법을 제시하려고 한다. 인식론적 겸손이란 다른 문화와 배경이 던지는 목소리의 장점을 인정하는 동시에 또한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얼마든지 참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겸손한 자신감을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원제: Understanding (Not Exaggerating) the Distance Between Us and the Bibl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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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적 교회, 은혜와 사명의 선순환
by 김선일
2020-12-03
최근 여러 한국교회의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은 앞으로 교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모델로 선교적 교회론을 주목해왔다. 선교적 교회 운동은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 재고를 요청했다. 일부에서는 선교적 교회론을 기존의 해외 및 타문화 선교를 더욱 강화해서 교회의 최고 중점 사역으로 받아들이는가 하면, 교회의 모든 사역에서 전도를 목표로 삼는 사역 모델로 삼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선교적 교회는 그보다 더욱 깊은 차원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존재 이유를 건드리는 것이었다. 선교학자 데이비드 보쉬는 그의 기념비적 저서 ‘변화하고 있는 선교’(CLC, 2006)에서 하나님의 존재와 사명으로서 ‘선교’(mission 단수명사)와 그러한 선교의 구체적인 실천들인 해외선교, 봉사, 교육 등의 ‘선교들’(missions 복수명사)을 구분해야 하다고 말한 바 있다. 교회의 사역 중 하나인 선교(missions)를 더욱 부각하거나 심지어 중점 과제로 드라이브를 거는 것도 아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존재하는 이유, 구원받고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하는 지향점에 바로 근본적인 보냄 받음이 기초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선교적 교회는 특정 행위의 사역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보냄 받은 존재와 소명을 새롭게 일깨우는 것이다. 더욱 근원적으로 이러한 선교적 정체성은 삼위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존재 방식으로부터 비롯된다. 따라서 세상 속에 보냄 받은 증인으로서의 존재론은 야훼로 자신을 드러내시고, 아들로 화육하시고, 성령으로 내주하시는 삼위 하나님의 스스로, 그리고 서로를 보내시는 삶에 근거한다. 성부께서 성자를 보내시고, 성부와 성자께서 성령을 보내시는 그 역사 속에 우리가 개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서 함께 보내심을 받은 것이다. 선교적 교회론은 삼위 하나님 앞에서 구원 받은 우리의 존재에 대한 중요한 재발견이며, 이 존재론은 개인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인 교회로 모임을 의미한다. 삼위 하나님께서 친히 주도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보내셨기 때문에 선교적 교회론은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전적 은혜에 기반을 둔다. 따라서 선교적 교회론은 어떤 교회를 할 것이냐의 문제에 앞서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한 성찰이며, 그리스도인의 선교적 삶(missional life)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삼위 하나님이 보내심을 받으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그 보냄 받음이 정점을 이루었다. 따라서 신론은 기독론으로 집중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보내셨기에(요 20:21) 기독론은 선교론을 낳는다. 우리는 홀로 보냄 받은 것이 아니라 성령의 보냄 받으심에 동참하기에 선교론은 교회론을 낳게 된다. 기독론 → 선교론 → 교회론의 구조(마이클 프로스트와 앨런 허쉬가 공저한 ‘세상을 바꾸는 작은 예수들’_포이에마 참조)는 교회의 사역 가운데 한 가지인 선교 사역으로 교회의 본질을 채색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세상과의 교통으로서의 선교에 교회가 존재함을 의미하다. 나는 지금 선교적 교회론을 현대 문화에서 적합하고 창의적인 사역 모델이나 교회 형태가 아니라, 우리 신앙의 근본적 층위에서 봐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단지 선교적 교회론을 웅변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선교적 교회론이 굳건하게 자리 잡아야 할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상기하기 위함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부터 이루어진 우리의 새로운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근래에는 선교적 교회론을 정의롭고 적절한 공적 사역으로 환원시키려는 움직임이 있다. 교회의 선교적 사명이 교회가 속한 더 큰 사회를 개선하고 섬기는 것에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래서 선교적 교회론과 더불어 지역 공동체 운동, 마을목회, 사회적 목회, 공공신학 등이 거론된다. 교회의 주된 목적이 세상을 선하게 바꾸고 이웃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께 동참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이러한 흐름은 그간 교회의 대 사회적 이미지와 신뢰도를 반복적으로 상기해온 습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이러한 시도들이 분명히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선교적 정체성 회복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그리고 바람직하게 도출될 수 있다. 교회의 사회적 공신력은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는데 있어서 그 설득력을 좌우할 만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선교적 본질을 가능하게 한 근원을 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어떻게 선교적 존재로서, 선교적 삶을 살 수 있는지 그 뿌리로부터 멀어지면 안 된다. “생수의 근원되는”(렘 2:13)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시며, 그를 통해서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끊임없이 새롭게 기억하고 그 진리를 붙들지 않으면 선교적 교회 운동은 근본적 추진력을 잃게 될 것이다. 선교적 교회는 ‘행함’(doing)이 아니라 ‘존재’(being)로부터 다져지고 힘을 얻어야 한다. 교회는 선교적 공동체일 뿐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는 은혜의 공동체이다. 우리는 보냄 받았을 뿐 아니라 부름 받았다. 먼저 부름을 받고 은혜로 채워지지 않는 한 보냄 받을 수 없다. 은혜 안에서 성령에 이끌리어 보냄 받은 공동체와 그리스도인은 그 은혜를 더욱 깊이 누리며 감사함으로 사명에 참여하게 된다. ‘선교’라는 단어가 사명이나 목적을 의미하다 보니, 자칫 선교적 교회는 온갖 ‘해야 할 선한 일들’로 가득찰 수 있다. 선교적 교회의 실험을 하는 목회자들에게 자주 듣는 피드백 중에 하나는 그들의 교회 성도들로부터 힘들다는 하소연이 올라온다는 것이다. 그렇잖아도, 교인들은 세상에서, 직장에서, 사회 속에서 힘겹게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지키며 근근이 버티다 겨우 교회에 와서 안식과 교제를 맛보고 싶은데, 교회에 와서도 다시 또 주변을 섬기는 프로젝트에 참여해야 하니 너무 부담이 된다는 것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신약의 서신서들에서 공통적이자 지배적으로 교회 안에서의 새로운 관계를 반복해서 강조하는 이유를 숙고해야 할 것이다. 물론 신약성경은 외인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한 가르침도 전한다. 그러나 그 경우도 교회 안에서 창조되고 형성된 새로운 존재와 관계의 경험이 흘러넘치는 것이어야 한다. 예배와 선교, 은혜와 사명, 부름 받음과 보냄 받음의 선순환은 우리에게 부여된 축복된 리듬이다. 선교적 교회론에서 유의해야 할 주장이 있다. 그것은 선교는 “교회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 것”이라는 논리다(‘교회 너머의 교회’ IVP, 76-79쪽 참조). 특히 선교적 삶은 세상 속에서, 우리의 이웃 속에서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며, 그가 무슨 일을 하는 지를 발견하고 거기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슨 의미인지는 알겠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에 깊이 거하지 않고 어찌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시는지를 분별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고 사역하신 일을 우리에게 일깨우시고 생생하게 살리시는 성령에 의존하지 않고서 어찌 우리의 선교가 가능하겠는가? 좀 더 도전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선교가 교회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할 때, 그들이 가정하는 ‘교회’는 어떤 곳인가? 나는 이러한 주장을 접할 때마다, 교회가 종교조직이나 제도, 또는 건물로 전제되는 것이 아닌지 의문을 갖게 된다. 이러한 주장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이자, 그리스도를 주로 섬기는 대안적 공동체라는 근본적 신학적 취지를 고려하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남기신 과제는 세상을 개선하는 전략이 아니라 그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것이었다. 확신하건데, 교회가 세상 속에서 대조적, 대안적, 대항적 공동체로 존재하는 일에 천착하지 않는 한,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선교적 삶은 근원적 양분을 얻지 못할 것이다. 선교적 교회는 또 하나의 수고와 노력이 될 것이고, 교회는 사회의 여러 복지 구호기관의 반열에만 설 뿐, 구원의 능력을 증언하는 유일한 은혜의 공동체가 되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은 사명에 앞서 은혜가 필요하다. 은혜가 사명을 이끈다. 은혜 아니면, 선교적 교회도 서지 못한다!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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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이해와 포스트모더니즘: 성경적 해석의 3원칙
by Trevin Wax
2020-12-02
이전 글(성경을 이해하려면 다양한 목소리가 필요할까?)에서 나는 다양한 민족과 문화적 배경을 가진 신학자와 성경 주석가를 찾는 데에서 열정을 느끼는 복음주의자들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다. 번역자가 가진 사회적 위치와 문화적 배경이 작업 자체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할 때,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성경을 읽으며 또 우리가 가진 문화적 시각 장애(cultural blinders)를 제거해 주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다. 이런 흐름과 동시에, 해석학에 적용되는 관점 이론(standpoint theory)의 변형이 생겨났는데, 이 이론에 따르면 성경 본문을 대할 때에는 배타적 통찰력(exclusive insight)을 제공하는 “살아있는 경험”이 담긴 억압받는 집단이나 소수 집단의 목소리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식의 논리적 결론을 유도하는 관점 이론은 자연스럽게 수수께끼 하나를 던진다. 특권이나 억압이라는 측면에서 너무도 깊게 얽혀 있는 사회적 위치로 인해 특권 집단의 해석은 결국 피할 수 없는 편향성(다른 말로 하면, 오류)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또한 모든 지식은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구성되었기에, 텍스트가 가진 “객관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것은 결국 무의미한 노력(exercise)으로 그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단지 문화라는 새장에 갇힌 포로에 불과하다. 단지 어떤 새장이 그나마 좀 더 나은 새장인가 아닌가의 여부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세계 다양한 지역 기독교 신학자들의 의견을 듣고 싶어하는 진지한 소망을 가진 일부 복음주의자들은 스스로를 과거 신학적 권위자들의 지혜에서 단절시킬 수도 있는 일종의 관점 이론에 빠질 위험을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 관점 이론에 대한 적절한 반대를 표명하는 다른 복음주의자들은 “현대적” 도구로 포스트모던 문제에 맞서 싸울 수 있으며, 우리가 텍스트에 주입하는 “선이해”의 영향을 최소화하면서도 다양한 목소리라는 지혜를 차단할 수 있다.이번 글과 다음 두 글에서는 이런 두 가지 오류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원칙을 제시할 생각이다. 이 글의 목표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대한 우리의 믿음(commitment)을 약화시키는 철학(현대이든 포스트모던이든)에 결코 속지 않는 더 나은 기독교인을 만드는 것이다.1. 성경 이해에 영향을 미치는 거리가 주는 차이(areas of distance)를 최소화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필요 이상으로 과장해서도 안 된다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에 대한 복음주의 표준 교과서라고 볼 수 있는 그랜트 오스본(Grant Osborne)의 ‘해석학적 나선형'(The Hermeneutical Spiral)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우리의 능력에 도전하는 네 가지 거리 영역을 언급하고 있다. ① 시간② 문화③ 지리④ 언어성경의 “명료성” 또는 “명확성”에 대한 우리의 확신은 현대 세계와 성경이 기록되던 시대 사이의 거리를 줄이려는 그 어떤 진지한 연구를 배제하지 않는다. 성경의 명확성을 믿는다고 말할 때, 다른 건 몰라도 성경 속에 담긴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내용만”은 교육을 받았든 교육을 받지 않았든 대상에 관계없이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모든 사람에게 명확하게 전달되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동시에 성경의 명확성에 관한 교리는 모든 성경 구절이 똑같이 명확하다거나 또는 문화적, 지리적, 언어적 차이에 대한 주의 깊은 연구가 불필요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관점 이론, 즉 성경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다른 문화나 배경을 가진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생각에 저항하는 일부 복음주의자들은 스코틀랜드의 상식적 현실주의(Scottish Common Sense Realism)로 회귀할 수도 있다. 오스본에 따르면 스코틀랜드 상식적 현실주의는 이렇게 주장한다. “텍스트는 그 자체로 의미를 드러내는 데에 충분하다. 따라서 문화적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해석학적 원리의 필요성은 무시되어도 되고 개인주의적 해석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누가 봐도 적지 않은 문제점을 가진 현대 계몽주의 시대의 해석 이론을 옹호함으로써 포스트모던 해석 이론을 반대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한다. 어떤 기독교인은 거리가 주는 차이 자체를 무시한다. 그러나 또 어떤 기독교인은 지금 시대에 하는 그 어떤 해석도 정확할 수 없다는 식으로 그 차이를 과장하기도 한다.(다음 글에서 이 차이를 과장할 때 생기는 문제에 관해서 다룰 것이다)2. 우리는 누구나 다 성경 구절에 “선이해”를 가지고 있다 오스본은 “문화유산과 세계관이 해석에 미치는 영향을 적절하게 고려할 것을” 촉구한다. 또한 그는 “지식에 관한 사회학은 현실을 자각하는 모든 인식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가치를 놓치지 않는다. 이것은 해석 과정에서 선이해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라고 지적한다. 성경을 읽을 때 백지 상태로 시작하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다 특정한 질문과 어떤 가정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아지스 페르난도(Ajith Fernando)는 죄책감/용서 패러다임과 명예/수치 관점 사이의 몇 가지 차이점을 설명한다. 또 다른 예는 에스더 아콜아떼(Esther Acolatse)이다. 자신의 저서 ‘권력, 공국, 그리고 성령(Powers, Principalities, and the Spirit)’에서 그녀는 북미에 살든 아니면 지구 남부에 살든 간에, 힘과 권력에 관한 성경적 언어와 관련해서만은 우리가 어떤 특정한 틀이나 또는 성경과는 전혀 다른 세계관 속으로 통합하려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준다. 계몽주의 이데올로기는 북미에 영향을 미치는 반면, 이원론은 지구 남쪽 지역에 더 영향을 미친다. 우리의 세계관을 조사하기 위해 아콜아떼는 서구의 성경 독자들 뿐 아니라 지구 남쪽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도전거리를 던진다. 비슷한 맥락이기는 한데, 랜돌프 리차드(E. Randolph Richards)와 리차드 제임스(Richard James)의 저서 ‘개인적 눈으로 성경을 잘못 읽기’(Misreading Scripture with Individualist Eyes)는 개인주의적 직관에 의해 형성된 개념적 범주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고대 문화에서 발생하는 성경 이야기의 중요한 측면을 놓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탕자의 비유를 예로 들면, 미국인보다 러시아인이 비유 속 기근을 기억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을 뿐만 아니라 독립하겠다는 어린 아들의 요구(이로 인해 가족 관계가 무너짐)도 미국인에 비해 훨씬 더 심각한 잘못으로 받아들인다. 이제 반해 미국인들은 이 비유 속 그 어떤 측면보다 아들이 느낀 절망감의 주된 원인으로 자원 낭비와 자급자족의 실패를 강조할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이다. 이처럼 전혀 다른 문화는 우리가 본문을 읽을 때 가지는 “선이해”로 인해 같은 이야기가 전혀 다르게 조명되도록 한다. 성경에 문화가 없다는 게 아니다. 성경 독자도 그건 마찬가지이다. 데이비드 클락(David Clark)은 탁월한 신학 방법을 서술한 그의 책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기(To Know and Love God)’에서 복음주의자들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우리의 생각은 우리의 문화를 반영한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내가 추구하는 신학에는 문화적 요소가 주는 선입견이 없는 것처럼 간주한다. 물론 최대한 그런 신학을 추구해야 하겠지만, 그건 그 누구에게도 가능하지 않다.”그럼 모든 성경 해석이 결국은 다 문화라는 감옥 또는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인가? “선이해”를 인정한다는 게 텍스트가 가진 진실하고 진정한 이해에 도달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의미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이제 세 번째 요점을 살펴보자. 3. 우리는 지식에 대한 모든 주장이 다 권력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에 반박해야 한다2007년 케냐의 리무루(Limuru)에서 세계 복음주의 로잔 회의와 관련된 실무 그룹은 “완전한 지식(exhaustive knowledge)과 인간 진보에 대한 현대인이 가진 신화(myths)”를 폭로하는 한도 내에서 어떻게 포스트모더니즘도 복음주의자들에게 동맹이 될 수 있는지를 지적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계몽주의의 오만에 구멍을 뚫었고, 이건 복음주의자들이 기뻐할 일이다. 그러나 로잔 문서는 계속해서 이렇게 서술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지식을 이해하는 인간의 능력에 대해 근본적으로 회의적이며 지식을 소유했다는 주장을 권력을 얻기 위한 하나의 시도로 간주한다.” 이런 이유로 복음주의자들은 관점 이론에 반대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절대적으로 확실성을 주장하는 계몽주의 요새로 후퇴하기를 원해서가 아니라, “비록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부분적으로 알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성경이 확증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클락(David Clark)은 이렇게 말했다. “최상의 상태에 있는 복음주의 신학이라면 관점(perspective)이 모든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그리고 지나치게 단호한 모더니스트 주장을 적절하게 해체하는 것은 모두에게 좋은 것이다. 그러나 적절한 복음주의 신학은 문화적, 역사적 장소로 인해 신학이 특정 시대의 생각에 갇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계획적인 전략이 필요함을 잘 알고 있다.”리차드 린츠(Richard Lints)는 그의 저서 ‘성경의 지속적 권위'(The Enduring Authority of the Christian Scriptures)에서 선이해가 실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모든 통역은 통역사의 독특한 경험에 영향을 받는다. 이 독특한 경험의 일부는 통역사의 사회적 위치와 문화적 맥락이다. 어떤 사람이 무엇을 보는가는 그 사람이 무엇을 보고 싶어하는가에 영향을 받는다. 이처럼 무엇을 보고 싶어하는가 등등의 기대는 개인 및 사회적 지향의 복잡한 상호 작용으로 인해 만들어진다.”그러나 린츠는 이런 선이해가 텍스트의 진짜 의미를 이해하도록 하는 게 불가능하도록 만드는 건 아니라고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또한 선이해를 인정하는 게 반드시 모든 해석을 다 상대적으로 만드는 것도 아니다. “문화적 서사의 한 부분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해석이 똑같이 타당할 수 있다고 믿도록 만들거나 또는 누군가의 해석이 다른 문화적 배경에서 나오는 비판에서 자유롭다고 착각하도록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의 얇팍한 지식이 담긴 서사를 조금 보탠 이 더 큰 이야기는 오히려 반대 방향을 가리킨다. 모든 해석이 다 동등하지 않다는 것이다. 문화적으로 선한 영향을 받은 해석이 있고 나쁜 영향을 받은 해석도 있기 마련이다.”후자의 요점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한다. 해석의 다양성이 결코 해석학적 상대주의를 의미하지 않는다. 다음 칼럼에서는 우리가 관점 이론으로 미끄러지거나 계몽주의의 확실성으로 후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진실에 눈을 뜨고 있는 게 왜 중요한지를 살펴볼 예정이다.원제: Preunderstanding and Postmodernism: 3 Principles for Bible Interpretatio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문화
세계관
포스트모더니즘
성경해석의원칙
로잔회의
문화차이
성경의명확성
로잔문서
해석학적나선형
선이해
목회자여, 복음을 머금고 성도를 대하자!
by 김형익
2020-12-01
성경은 목회자가 성도들을 대하는 방식에 대해서 가르치는가? 일단 이 대답은 뒤로 하자. 내 기억이 틀린 것이 아니라면, 나는 신학교에서 이 주제에 대한 성경적 원리를 배운 적이 없다. 교육전도사로 2년을 사역하는 동안에도 나는 담임목사님이나 선배 목회자들을 통해서 이 주제에 대해서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 주제는 목회자가 되려는 사람들이 스스로 알아서 터득해야만 하는 것일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문제를 목회의 현장에서 잘못 배우게 될 때, 경험적으로 잘못 배운 지식은 그 목회자의 목회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특히 목회자의 설교 방식에서도 숨길 수 없이 드러나게 된다. 그렇게 나타나는 나쁜 양상은 이런 것들이다. “나는 목자이고 너희는 양이니 내 말을 들어라” 하는 식의 태도, 또는 연장자 교인들을 향하여 정확하게 경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 설교에서 교인들을 무시하는 태도와 같은 것들이다. 목회자가 성도를 대하는 방식에 대한 성경적 이해는 목회자와 교인의 성경적 관계를 아는데서 시작한다. 그 관계의 원형은 주님께서 당신의 양들과 가지시는 목자와 양의 관계일 것이고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0장에서 이 주제를 깊이 다루신 바 있다. 주님은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시다(요 10:11,15). 같은 복음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님은 사도 베드로에게 당신의 양을 먹이고 치라고 말씀하심으로써(요 21:15-17), 목자와 양의 관계가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로 확장 될 수 있음을 암시하셨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그의 첫 번째 서신에서 목회자인 장로들을 향하여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2–3).”고 말할 수 있었다.그러나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는 목자와 양의 관계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 대하여 자신을 아버지에 비유했고(고전 4:15; 살전 2:11)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대하여는 어머니(자기 자녀를 기르는 유모)에 비유했는데(살전 2:7) 이것은 많은 목회자들이 스스로의 정체성과 일을 이해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곤 한다. 바울 사도의 말씀대로, 목회자는 단순히 스승(로마 귀족의 자제가 성장하기까지 훈육을 담당하는 선생, 갈 3:25에서는 ‘초등교사’)에 머무르지 않는다(고전 4:15). 사도 요한도 요한일서를 쓰면서 내내 ‘자녀들아’라는 호칭으로 성도들을 불렀다는 사실은 사도 요한이 자신을 목양의 정황에서 회중의 영적 아버지로 이해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도들의 이런 표현들을 우리의 목양에 적용해본다면, 목회자는 단순히 지식이나 도덕을 가르치는 선생이 아니라, 애정을 가지고 자녀를 기르는 부모의 역할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목회자와 교인의 관계는 선생과 학생의 관계가 아니라 부모와 자녀의 관계로 더 잘 설명될 수 있다. 목회자에게 성도란 자기 생명도 아끼지 않고 내어줄 수 있는 영적 자녀들이다. 그렇다면, 사도들은 목양의 관계에서 성도들을 어느 정도 수준의 자녀들로 보았을까? 사도 바울이 자신을 아버지에 비유했을 때, 그는 자신이 복음으로 고린도 교인을 낳았다고 말했으니 필시 이들을 막 낳은 자녀들도 이해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고(고전 4:15), 자기 자녀에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에 비유했을 때에도 그는 사실상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아직 젖을 먹여야 하는 어린아이들로 보았던 것 같다(살전 2:7). 또 사도 요한이 성도들을 ‘자녀들(τεκνίον)’이라고 불렀을 때, 그 단어는 부모가 자신의 어린 자녀들을 사랑스럽게 부르는 말이므로, 그도 성도들을 어린 자녀들로 여겼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히브리서 기자는 성도들이 시간이 많이 흘러 벌써 선생이 되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단단한 음식을 못 먹고 젖먹이 유아에 머물고 있다고 탄식하는데, 이 탄식도 성도들이 영적 어린아이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음을 암시한다(히 5:12). 그렇다면 사도들은 성도를 젖먹이 유아로만 보았던 것일까? 요한일서에서 우리는 사도 요한이 성도들을 아비와 청년과 아이로 구분해서 부른 것을 볼 수 있다.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요일 2:13-14).”내용을 보면, 사도는 연령에 따라 아비와 청년과 아이를 구분했다기 보다 회중의 영적 성숙도에 따라 구분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교회 안에는 영적 성숙의 정도에 따라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사도들은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를 부모와 자녀의 관계로 이해했을지라도, 반드시 젖먹이나 걸음마 수준의 아이들로만 여기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제 바울 사도가 영적 아들이요 젊은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주는 실제적 권면을 들어보자.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버지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에게는 형제에게 하듯 하고 늙은 여자에게는 어머니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에게는 온전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 참 과부인 과부를 존대하라(디모데전서 5:1–3).”바울 사도는 목회자가 성도를 대하는 방식을 이렇게까지 친절하게 그리고 실제적으로 말했었다! 연로한 남성은 아버지처럼, 젊은 남성은 형제처럼, 연로한 여성은 어머니처럼, 젊은 여성은 사심없이 참 자매처럼 대하라는 것이다. 심지어 참 과부인 과부는 존대하라고 말씀했는데, ‘존대한다(τιμάω)’는 말은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할 때(마 15:8; 막 7:6; 요 5:23)와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명령에서(마 15:4; 19:19; 막 7:10; 10:19; 눅 18:20; 엡 6:2) 사용된 단어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의 이 권면은, 영적으로는 어린 신자일지라도 그가 나이가 든 성인이라면 목회자인 디모데는 부모나 연장자처럼 그를 대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심지어 공경하는 마음과 태도를 가지고서 말이다. 목회자만 성도의 부모가 되는 게 아니라, 성도들도 목회자의 부모일 수 있다! 여기에 한 가지 원리를 덧붙이고 싶다. 성경은 성도를 가리켜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말씀한다(벧전 2:9).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을 보시는 관점을 보여주는 말이다. 목회자가 설교와 모든 권면을 통해서 이 관점을 성도들에게 가르치고 확신하게 하는 일은 복음 사역의 핵심에 속하는 일이다. 그렇게 하려면, 성도를 보는 목회자 자신의 관점이 정확하게 이 복음을 반영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목회자가 성도를 대하는 관점은 그가 전하는 설교의 내용과 언제나 일치하는 것이어야 한다. 목회자가 성도를 대하는 관점이 복음을 반영하지 않는다면, 복음의 내용을 아무리 정확하게 전달하는 설교일지라도 힘을 잃을 것이다.복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도를 바라보시는 관점을 강력하고 명확하게 제공한다. 그래서 복음에 견고히 서있는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자존감을 영광스럽게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주일마다 공예배에서 선포되는 복음의 말씀과 함께, 성도를 실제로 왕같은 제사장으로 대하는 목회자의 태도이다. 목회자가 성도를 대하는 방식이 복음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성도들을 존경하는가?” 나 자신을 포함하여 나의 동료 목회자들이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이다.
목회자
리더십
담임목사
선한목사
초등교사
성숙도
존대
왕같은제사장
복음
공예배
예배 회중은 관객이 아니다
by J. T. English
2020-11-30
예수님은 지금 뭘 하고 계신 걸까? 에베소서 4장에 따르면 그는 하늘로 승천했으며 더 큰 선교와 연합을 위해 교회에 은사를 부어주고 계신다. 그리고 그는 모든 성도가 영적으로 성숙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지도자를 주신다. 그런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우리 모두는 몸된 교회 전체가 아닌 직업적 목사(professional ministers)를 우선시하는 사역 시스템을 너무도 자주 만든다. 그러나 에베소서 4장은 바른 선교를 위해서는 직업적 목사 뿐 아니라 교회 전체가 필요함을 상기시킨다. 이것이 바로 내가 “깊은 제자도”라고 부르고 싶은 것이다. 다름 아니라 모든 교인들이 그리스도와 동일한 성숙함으로 성장하는 통일된 교회를 세우도록 초대하는 사역이다. 그게 바로 예수님의 사명이었다. 그게 정말 예수님의 사명이라면, 그건 또한 지역 교회의 사명이 되어야 한다. 사역은 단지 전문가만을 위한 게 아니다오늘날 교회에 흔히 만나는 이분법은 사역에 있어서 전문가와 아마추어로 나누는 것이다. “전문가”와 “아마추어” 사이의 구분은 전문가(교회에 고용된 사람들)가 성도들과 함께가 아니라 성도들을 위해서 사역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들은 커리큘럼을 작성하고 무대에서 마이크를 잡고 사역을 이끌어나간다. 또 성경을 읽고 가르친다. 이것은 교인들이 바라는 방식의 목회자 모습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는 결코 그런 식으로 성경을 읽을 수 없다. 내가 보기에 예배 인도자는 회중을 더 많이 예배 속으로 참여시키는 것보다는 청중을 위한 공연에 더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영적 엘리트 전문가들은 앞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교인들과 차별화되는 어떤 종류의 재능, 은사 또는 기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실제 사역을 감당하는 사람으로 인식된다. 에베소서 4장은 교회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를 말하고 있지 않다. 대신 예수님이 교회를 위해서 또 교회를 통해서 무엇을 하고 계신가를 보여주고 있다.한편, 자신을 아마추어라고 인식하는 그룹도 있다. 그들은 사역할 기회를 거의 얻지 못한다. 그들은 단지 전문가들이 하는 사역에 수동적으로 반응할 뿐이다. 사역 전문가들은 너무도 자주 자신과 아마추어 교인들 사이의 거리를 즐긴다. 그들은 전문가로 인식되는 것을 좋아한다. 또 그들에게는 교인들과의 격차를 해소하도록 만드는 동기부여가 없기에 도리어 그 격차를 더 크게 만든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바울이 목자와 교사의 목적, 즉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엡 4:11-12)라고 설명한 내용이 아니다. 목사와 교사 그리고 지도자는 회중을 위해 모든 사역을 하는 게 아니라, “아마추어”가 사역을 수행할 수 있도록 회중을 섬기고 준비시키도록 부름받았다. ‘아마추어’를 사역을 위해 준비시키기훌륭한 교사는 자신과 학생 사이에 거리를 두지 않는다. 그들은 학생들이 더 많이 배우도록 도와줌으로 그 거리를 없애려고 한다. 마찬가지로 학생들은 단순히 훌륭한 선생님을 관찰만 하려고 하지 않는다. 더 많이 참여해서 더 배우고 싶어한다.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과 자신이 이끄는 사람들 사이에 거리를 두도록 부름 받은 게 아니라, 그들을 사역을 위해 준비시키도록 하기 위해서 부름받았다. 에베소서 4장은 교사, 사역자, 그리고 목사를 부르신 목적은 교회 사역을 교인들과 함께 하도록 부르신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관객 만드는 데에 관심이 없으시다. 그는 사역에 참여하는 교인을 원하신다. 바울은 교회의 주요 목적 중 하나가 모든 사람을 사역에 초대하는 것이지, 단지 일부만을 위한 게 사역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한다. 교회에는 사역을 하는 특별한 그룹이, 또 사역 소명을 받는 특별한 그룹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교인이 사역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았고, 모든 교인이 다른 지체의 사역의 수혜자가 되도록 부름받았다. 우리는 많은 지체를 가진 하나의 몸이고(고전 12:12), 리더는 그 지체 간의 격차를 해소하는 역할을 맡았다. 깊은 제자도를 가진 문화를 만들고자 하는 교회는 교인 모두가 사역에 참여하도록 촉구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사명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을 원한다. 성숙을 향해서에베소서 4장은 또한 모든 교인이 성숙, 즉 그리스도를 닮아 성장하도록 부름받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사역 철학에서 발견하는 가장 큰 차이 중 하나일 지도 모르겠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대부분의 성숙이 지역 교회 밖에서, 그러니까 온라인 사역, 대규모 회의 또는 사적인 헌신을 통해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바울은 ‘지역 교회야말로 성숙함을 키워내는 중요한 장이다’ 라고 주장한다. 지역 교회의 주된 목적 중 하나는 성도들이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도록” 하는 것이다(엡 4:13). 그리스도의 몸과 각 지체에 대한 하나님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향해서 지속적으로 성숙하는 것이다. 교회가 추구하는 깊은 제자도는 당신과 당신이 이끄는 사람들이 예수님처럼 되는 것이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이다. 바쁘게 사역하자제자도의 목표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라면, 우리의 모든 사역 노력은 그 목표를 향해야 한다. F. F. 브루스(F. F. Bruce)가 말한 바와 같이, “그의 백성이 목표로 삼아야 할 표준은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이다.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에 미치지 못하면 한 몸이 된(corporate) 그리스도도 그 분량에 도달할 수 없다.”성숙은 길고도 힘든 과정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께서 전적으로 헌신하셨던 과정이기도 하다. 그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엡 4:13)에 도달할 정도로 “자랄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놀랍게도 그는 우리가 서로 서로 도와 그 일을 이루길 원하신다. 그러니 우리 이제 서로를 위한 사역에 바쁘게 힘을 쏟자. 원제: A Congregation Is Not an Audienc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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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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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교회
성숙
성경을 이해하려면 다양한 목소리가 필요할까?
by Trevin Wax
2020-11-29
성경 해석에 인종적 다양성이 중요할까? 주석책을 하나 산다고 할 때, 그 주석을 집필한 저자의 배경과 경험을 고려해야 할까?문화적 맥락과 사회적 위치가 성경 해석에 과연 어떤 영향을 미칠까?복음주의자 지도자들은 최근 들어 이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고 있다. 혹자는 문화적 눈가림(cultural blinders)이 성경 해석을 왜곡하거나 우리에게 도전을 줄 수 있는 영감 받은 말씀의 여러 다양한 요소마저 제거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하기도 한다. 또 동시에 번역자의 인종이나 개인적 경험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하나님 말씀의 권위와 충분성을 최소화하는 상대주의를 낳을 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이들도 있다. 이런 문제는 다방향(multi) 리더십을 요구하는 영역이다. 즉, 다양한 각도에서 위협을 인식하고 거기에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 영역이라는 의미이다. 이 글과 이후 나올 세 개의 글을 통해서 나는 성경을 공부할 때 고려해야 할 몇 가지 원칙을 설명하려고 한다. 지역 교회에 의지하기첫 번째로 세계의 여러 지역으로부터 다양한 목소리를 듣고자 하는 열망은 지역 교회를 다니는 교인이라면 누구나 다 옳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원칙을 다시금 확인시켜준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말씀을 올바르게 이해할 것, 그리고 오류가 없으며 영감으로 기록된 명확한 말씀이라는 귀중한 교리는 결코 성경 해석학이 다른 사람들의 지혜와는 별개로 나 혼자 수행하는 “단독” 작업(discipline)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지역 교회에 함께 모여서 성경을 읽고 연구함으로 서로가 서로를 성장시켜야 한다. 제대로 된 성경 공부를 하면서 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은 본문이 당신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가 아니라(마치 특정 본문의 중요성이나 적용이 그 구절을 읽는 개인의 선호도에 따라 끝없이 변할 수 있는 것처럼), 본문 자체가 의미하는 게 무엇인가이다. 성경을 읽고 토론하기 위해 모인 우리는 다 배경이 다르고 그렇기에 던지는 질문도 다를 수 있으며, 사람마다 특정한 신학적 틀 속에서 본문을 읽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의 소망은 언제나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사랑을 키우고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드러내는 진리에 겸손하게 복종하는 것이다. 본문에 비추어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가정(assumptions)을 검토하고, 또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말씀만이 우리의 궁극적인 권위라는 사실에 복종할 때 우리는 비로소 공동체 안에서 말씀에 관한 우리의 이해도를 더 증진시킬 수 있게 된다. 세계 곳곳의 교회에 의지하기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 지역 교회가 필요하다면, 다른 교회와 문화권의 신자들의 의견을 들음으로 우리는 성경 읽기 능력을 향상시키는 유익을 얻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먼저 공동체 안에서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 지혜로운 방법이라는 원칙을 채택했다. 그리고 그 적용 범위를 넓히는 것이다. 같은 교회를 다니는 기독교인들끼리 서로 배우는 것처럼 다른 문화의 기독교인들과도 똑같이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필요하다. 마크 앨랜 파웰(Mark Allan Powell)의 설명은 이 원리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례 중 하나이다. 그는 탕자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가 미국과 러시아에서 어떻게 각각 전혀 다르게 “들리는지에” 대해서 썼다. 지금 내 기억이 맞다면, 미국인들에 비해서 러시아인은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탕자 아들의 절망을 촉발시킨 기근에 훨씬 더 큰 관심을 보인다고 한다. 레닌그라드의 포위 공격 당시 기아로 사망한 러시아인은 2차 세계대전 때 사망한 미국과 영국 군인을 합친 숫자보다 많았다고 파웰은 설명한다. 그리고 이런 역사적 비극은 아직까지 살아있는 수많은 조부모와 증조부모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을 것이라고 파웰은 추정한다. 바로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탕자의 비유를 듣는 러시아 학생에게 가장 먼저 꽂히는 단어는 기근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랜돌프 리차드(E. Randolph Richards)와 리차드 제임스(Richard James)가 쓴 ‘개인적 눈으로 성경을 잘못 읽기(Misreading Scripture with Individualist Eyes)’는 고대의 친족 관계, 후견인, 명예와 수치심에 관해서 자세히 설명한다. 구약과 신약에서 종종 드러나는 특정 공동체 기반 요소는 개인주의 문화에서 자란 우리에게 이상하고 또 이해하기 어렵게 보일 수도 있다. 수년 동안 중동에서 선교사로 사역하면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케네스 베일리(Kenneth Bailey)가 훌륭하게 풀어놓은 비유에 대한 훌륭한 업적은 해석적 통찰력을 제공한다. 물론 후기 전통이나 현대 중동의 경험에 지나치게 의존해서 해석한 경우도 종종 있지만 말이다.복음주의자들은 이러한 노력을 기뻐하고 다양한 배경을 가진 신학자와 학자들의 부상을 응원해 왔으며, 그들이 발표하는 타 문화권 신학적 대화와 주석은 성경을 더 잘 듣고 순종하려는 우리의 열망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생각한다. 물론 가장 중요한 목표는 더 나은 성경 해석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성경 연구 작업에 최대한 많은 글로벌 목소리를 통합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 주류 세계(majority world) 또는 주류 문화 속 복음주의자들은 그들의 독서 목록을 “다양화” 할 수 있게 되고, 결과적으로 다양한 사회적 위치와 경험을 가진 성경 독자들로 인해 우리가 성경 본문을 대할 때 의례히 가지게 되는 가정과 선입견에 도전할 수 있게 된다. 관점 이론은 그럼 어떤가?그러나 성경 해석의 지평을 넓히려는 최근의 이러한 경향은 텍스트의 진짜 의미를 이해하는 게 애초에 가능한지에 관해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학계 및 더 넓은 문화의 경향과도 일치한다. 지식과 의미 그리고 의도성(significance)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견해는 “관점 이론”을 불러 일으켰는데, 그 이론에 관해서 제임스 린지(James Lindsay)와 헬렌 플럭크로스(Helen Pluckrose)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관점 이론은 두 가지 가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첫 번째는 인종, 성, 성 인식, 능력, 지위 등으로 드러나는 정체성에 따른 사회적 지위가 같은 사람들은, 그들이 경험을 올바르게 이해한다고 가정할 때, 동일하게 지배와 억압 경험을 받아들이며, 그에 따라 동일하게 그 경험을 해석한다는 것이다. 이런 가정은 다음 가정이 이어지는데, 이러한 경험이 그들에게 더 권위 있고 완전한 그림을 제공 한다는 것이다. 관점 이론이 바탕을 두고 있는 두 번째 가정은 사회적 권력의 역동성 내에서 가지고 있는 각각 다른 상대적 위치가 해당 사람으로 하여금 아는 것과 알 수 없는 것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특권층은 특권에 눈이 멀어 있는 반면에 억압받는 사람들은 지배적 위치와 억압 받는 경험을 모두 이해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이중적 시야를 소유한다.”간단히 말해서 더 많은 특권을 가진 사람일수록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란 더 어렵다는 것이다. 특권이 눈을 가리기 때문이다. 성경 해석에 이 이론을 적용시키는 경우, 기독교 역사 속 너무도 많은 주석가와 신학자, 그러니까 너무도 많은 특권을 가졌던 수많은 백인 남성들이 연루되게 된다. 그 결과 가장 주의깊은 연구를 바탕으로 한 주석 내용에조차도 우리는 의심의 그림자를 드리우게 된다. 그리고 반대로 억압과 가난이라는 “살아있는 경험”을 한 주석가의 주석을 더 큰 점수를 주는 결과를 빚게 된다. 전통적인 복음 해석학과 달리 관점 이론이 성경 해석에 적용될 때, 그 결과는 본문의 의미를 발견하는데 필요한 도움이 아니라 오히려 해당 본문에 정말로 제대로 된 의미가 있기는 한 것인가 하는 불안감만을 더 증폭시킨다. 그 누구도 성경 해석에서 완벽하게 “객관적”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왜냐하면 객관성이라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참된 지식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그렇게 될 때 우리에게 남은 것은 나의 진실 또는 당신의 진실이며, 우리의 진실은 문화적 관점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해석자의 진실로 남을 뿐이다. 관점 이론의 부상에 대응하는 방법에는 옳은 방법도 있지만 그른 방법도 있다. 앞으로 소개할 세 개의 글에서 우리는 포스트모던 철학의 함정을 피하는데 도움이 되는 동시에 우리를 최고의 전통적인 복음 해석학과 일치시켜주는 원칙을 찾아볼 것이다. 원제: Do We Need Diverse Voices to Understand the Bible Rightl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문화
세계관
관점이론
포스트모던
성경해석
전통해석학
돌아온탕자비유
성경해석의다양성
문화적눈가림
어떻게 바울처럼 고난을 당할 수 있을까?
by John Piper
2020-11-28
투덜거리지 않고 고난을 겪는 사람을 보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끌린다. 특히 하나님을 신뢰하면서도 그분에게 화를 내거나 불평하지 않는 사람을 볼 때 더욱 그러하다. 내가 보기에 투덜거리지 않는 자세란, 세상에서 가장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 아닌가 싶다. 그 자세가 현재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습으로 나타날 때, 그러한 모습은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아름다운 신앙이 무엇인지를 드러내기에 내 마음을 더욱 사로잡게 된다. 바울이 꼭 그런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죽음의 언저리까지 끌려가다바울은 자신을 죽음 직전까지 밀어붙이며 절망에 빠뜨렸던 신앙의 위기를 회고한다.“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고후 1:8-10).여기서 세 가지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첫 번째는 바울이 당한 고난이 극심했다는 사실이다(“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두 번째는 그 고난에 어떤 목적이 있었다는 사실이다(“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세 번째는 하나님 자신이 그 목적을 의도하셨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되는 일은 사탄은 결코 의도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결국 바울이 고난을 당하며 확신하게 된 진리는 이렇다. 즉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얼마나 극심하든 거기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목적이란 인생의 모든 순간에서 자신을 덜 신뢰하고 하나님을 더 신뢰하는 사람이 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죽음이 코앞에 닥칠지라도 말이다.고난 가운데 투덜거리지 않을 수 있는 이유바울은 그러한 진리를 붙들었기에 고난 중에도 투덜거리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이 그 고난을 다스리고 계시며 그분의 목적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유익이 된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그래서 다른 성경 본문을 통해서도 그러한 깨달음을 곧잘 드러냈다.“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3-5).결국 바울이 고난을 당하면서도 불평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꿔 말해서 고난 중에도 그렇게 기뻐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자신을 변화시키는 중대한 일을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인내하며 그분께만 소망을 두는 사람으로 변화되고 있음을 확신했던 것이다.인생의 끝자락에서 경험하는 고난하지만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품도 다져지며 마음속으로 깊은 소망을 품게 되는 인생을 경험해 보지 못하고 오히려 죽음에만 다가서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겠는가? 바울은 이와 같은 문제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답변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6-18).여기서 바울은 어떤 고통이나 질병 또는 노화로 인해 우리의 겉사람이 서서히 낡아지는 문제를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런데 그와 같은 고난에 이어지는 과정을 언급할 때, 그는 이 땅에서 더 훌륭한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을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천국의 영광을 들어 그 과정을 그려 낸다.그러므로 고난이 가중되어 죽음에까지 이른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혹 묻는다면, 다시 말해 아픔이나 괴로움 또는 죽음과 같은 고통 속에서도 불평하지 않고 그 시간을 감수하지만 결국에는 얼마 살지 못하게 될 경우에는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혹 묻는다면, 바울은 이렇게 답변할 것이다. 곧 우리가 그리스도를 신뢰함으로 그 고난을 견뎌 낸다면, 인생의 모든 고난은 결국 천국에서의 더 큰 영광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자족의 비결이처럼 바울의 인생에는 여러 가지 고난이 수그러들 기세를 보이지 않았지만(고후 11:23-33), 그는 조금이라도 투덜거리거나 하나님께 불평하는 모습을 갖지 않았다. 물론 교회를 파괴시키는 교리나 그런 가르침을 전달하는 거짓 교사들에게는 화를 내기도 했고(갈 1:8-9; 5:12), 또 자신이 느끼는 압박감이나 부담감을 고백하기도 했지만(고후 11:28), 그 모든 상황에서 그는 놀랍게도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다.“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1-13).바울은 어떻게 그런 ‘비결’을 배우게 되었을까? 그것은 자신에게 진정한 만족을 주시는 분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분을 아는 지식만이 가장 고귀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빌 3:8). 또한 더 나아가 모든 일로 선이 되도록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주권을 신뢰했기 때문이다(롬 8:28; 빌 1:12). 이처럼 온갖 고난 속에서도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리스도의 존귀함으로 자족했던 바울의 모습을 바라볼 때, 나는 그저 경이로운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다.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How to Suffer Without Grumbling: Why I Love the Apostle Paul번역: 장성우
영성
영적성장
고난
목적
의도
바울
자족
비결
욕설, 분노, 살인: 결코 작은 죄는 없다
by 이춘성
2020-11-27
산상설교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윤리(마 5:21-22)인류학자 르네 지라르(Rene Girard)는 인류는 폭력을 다양한 형태로 확장해 왔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 안에 있는 잔인한 폭력의 실체를 십자가를 통해 고발하였고, 이러한 신의 죽음은 인간 폭력의 부당함을 세상에 폭로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르네 지라르의 십자가에 대한 해석은 전통 교리와는 결이 다르지만, 윤리적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 나라에서 제거해야할 악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교묘하게 포장된 자기중심성의 폭력이다. 이제부터 제6계명에 대한 예수님의 산상설교를 통해 은폐된 자기중심성의 폭력에 대해서 파헤쳐 보고자 한다.1. 제6계명의 원 뜻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라고 말씀하셨다(마 5:21). 이는 십계명의 제6계명이다. 제6계명은 단순한 사고나, 뜻하지 않은 실수로 일어난 살인보다는 의도적인 살인에 적용되는 계명이다. 악의를 품고 죽이는 행위가 ‘살인하지 말라’는 6계명에 해당하는 죄이다.구약성경은 살인이, 첫째는 분노, 둘째는 시기와 미움, 셋째는 정의, 공정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고 가르친다. 이 세 요소는 인간의 첫 번째 살인 사건이었던,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사건에서 찾을 수 있다(창 5). 가인은 자신의 제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황 때문에 분노하였다. 그리고 그 탓을 동생 아벨에게 돌리며, 아벨을 시기하고 미워하여 결국 동생 아벨을 죽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정의롭지 않고 불공정하게 대했다는 자기 합리화가 있었다. 이러한 분노의 성격에 대해서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분노는 단지 감정적인 행위가 아니라 고도의 이성적인 합리화의 과정이라고 하였다. 만약에 가인이 하나님이 그의 제사를 받지 않는 이유를 수용하거나, 분노하지 않았다면, 아벨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이다. 살인과 분노에는 그 행위에 앞서는 더 복잡한 근원 이유가 있다. 이 때문에, 6계명을 단순히 살인이라는 행위와 그 결과에 대한 것으로만 보는 것은 충분하지 못하다. 6계명은 단지 단죄가 목적이 아니라는 뜻이다. 법이란 처벌 보다는 죄와 고통을 막기 위한 경고의 차원이 선행한다. 하나님도 6계명을 사람들에게 주셨을 때, 살인자를 처벌하기 위한 단순한 의도보다는 살인을 막고, 더 나아가서 적극적으로 상대의 생명과 존재를 보존하고 귀하게 여기길 원하셨다. 6계명은 살인을 일으키는 악한 의도인 분노, 미움, 불공정과 같은 사람 속에 은폐된 살인의 씨앗, 그 악한 의도를 제거하는 것을 의도한다는 것이다.2. 악한 의도예수님은 산상설교(21-22절)에서 살인의 세 가지 악한 의도를 단순하지만 분명하게 가르치시고 있다. 먼저 본문의 내용을 헬라어 원문의 순서에 따라 번역해 보았다. 이를 보면 시의 운율처럼 맞아떨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여러분들은 어떤 사람이 선조들에게 한 말을 들었다. “살인하지 마라” 그리고 누구든지 만약 살인한 사람은 법정에서 유죄다. 그리고 나는 너희들에게 말한다. 그의 형제에게 분노하는 모든 사람은 법정에서 유죄다.그리고 누구든지 만약 그의 형제에게 말하면, ‘라카’산헤드린에서 유죄다. 그리고 누구든지 만약 말하면, ‘모레’불의 지옥에서 유죄다.본문의 배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은 “유죄”라는 공식적인 판결을 각각의 조건문 뒤에 반복해서 말씀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은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바로 알아차렸다. 예수님은 ‘살인’, ‘분노’, ‘라카’, ‘모레’, 모두 십계명의 제6계명을 어기는 중대한 죄로 가르치셨다. 3. 탐정 예수님위의 각각의 죄목과 판결을 하나의 사건에 대한 것으로 간주한다면, 예수님의 이러한 배열과 접근은 마치 형사나 탐정이 살인 사건의 원인을 찾아가는 추리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살인의 직접적인 원인은 분노다. 그리고 그 분노의 원인은 누군가 어떤 사람을 향해 ‘라카’라 부른 것에서 시작했다. 또 다른 원인은 어떤 사람을 향해 ‘모레’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그러면 ‘바보’, ‘미련한 놈’ 등의 뜻의 ‘라카’, ‘모레’라는 욕을 들은 사람이 화가 나서 살인을 했다는 뜻일까?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답이다.그런데 만약 이들이 모두 동일 인물이라면, 답은 달라진다. 예수님의 말씀을 잘 살펴보면, ‘살인자’, ‘분노자’, ‘라카라고 말한 자’, ‘모레라고 말한 자’가 모두 재판정에서 유죄로 판결을 받았다. 이들이 동일 인물이라면 살인자는 욕을 들은 사람이 아니라 욕을 한 사람이 된다. 이제 예수님이 말씀해 주신 살인 동기들의 순서를 거꾸로 배열해서 살인을 재구성해 보자. 먼저 살인자가 살해당한 피해자에게 한 말들을 보면, 살인자는 평소에 피해자에게 ‘라카’, ‘모레’라는 말을 자주 하였다. ‘라카’(רֵיקָא)는 ‘속이 빈’, ‘머리에든 것이 없는’, ‘무가치한’, ‘바보’ 등의 뜻이다. 특별히 이 단어의 시리아어 기원을 보면, 라카는 노예를 부르거나 지칭할 때 사용하였다. 예를 들어 라카는 주인이 종을 인간 이하의 무가치한 존재로 여기면서 “거기, 너 바보 같은 놈” 혹은 “이 쓸모없는 놈”의 뜻으로 사용하였다.또한 ‘모레’는 우리말로 하면 ‘천치’에 가깝다. 신체보다는 정신적 장애를 지닌 장애인들을 빚대어 사용하는 모욕적인 욕설이 ‘모레’였다. 당시에 그리스에서는 장애를 지닌 자녀가 태어나면 들에 버리도록 법으로 정하였고, 고대 시대에 장애인은 사탄의 하수인 등으로 취급받았다. 이러니 이 같은 무지막지한 욕설을 들은 사람이 얼마나 격분하고 원통했을지 상상이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에서 유죄로 판결받은 사람이 모두 동일 인물이라면, 분노하고 살인한 사람이 욕설을 들은 사람이 아니라 욕설을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4. 자기중심성의 폭력일제 강점기 동안 일어난 항일 투쟁과 독립운동가의 모습을 다루었던 “암살”이란 영화가 있다. 이 영화의 중반부에는 어린 여자아이가 급하게 길을 건너다 일본군 장교와 부딪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자 장교는 사과하는 여자아이를 향해 감히 너같이 하찮은 존재가 고귀한 자신에게 손을 댈 수 있느냐는 표정과 분노를 발산하면서 아이에게 총을 쏘아 죽이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적 상상력과 극적 효과를 위한 의도였겠지만, 이 장면은 한편으로는 타락한 인간의 자기중심성의 잔인한 폭력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예수님이 산상설교에서 예로든 살인자는 어린아이를 죽인 장교처럼 자신보다 열등해 보이는 사람이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에 모멸감과 수치심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부조리하고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이 때문에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욕하며, 살인하고자 하는 충동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살인의 실행이 없었을 지라도, 살인에 필요한 조건은 모두 충족된 상태였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 속에도 동일하게 자리하고 있다. 5. 생명의 주관자더하여, 죽여도 된다는 최종 판단은 단지 감정에 따른 우발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분노한 살인자의 말하는 태도를 통해 알 수 있다. 살인자, 분노자는 상대에게 자신이 신적 권위가 있는 존재인 것처럼 말하였다. 그 이유는 앞의 21절에서 “옛 사람에게 말한 바”의 ‘말하다εἶπον’와 이후에 살인자와 분노자가 형제에게 라가와 모레라고 말하는 것(εἶπον)이 같은 단어이기 때문이다. eipon(εἶπον)이란 이름을 지어주거나 권위자가 선언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특별히 예수님은 이 단어를 하나님이 십계명을 모세를 통해 제정해 주실 때의 모습을 묘사하는 단어로 21절에서 사용하셨다. 그런데 분노자이자 살인자가 형제에게 ‘라카’, ‘모레’라고 욕하면서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이것은 이들이 자신을 창조자 하나님처럼 여기거나, 자신들의 행동이 하나님의 권위를 위임받아 하는 정당한 행위로 간주하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이 창세기 1장 26절에서 “하나님이 이르시되(말씀하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라는 선언과 정반대이다. 이들은 사람을 향해 마치 자신이 하나님인 것처럼 제각기 규정하고 판단한다. 이들은 사람을 이렇게 저렇게 규정하면서 인간 이하의 표현과 욕설을 사용하고, 분노를 서슴없이 표현하며, 이런 분노와 욕을 얻어먹는 것은 저들의 행실로 볼 때, 정당하다고 판단한다. 이러한 자기중심성의 폭력은 스스로 자신을 거짓 하나님의 자리에 위치시킨다. 하지만 진정한 창조주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향해, 하물며 자신을 거역하고 죄를 지은 인간에게도 ‘너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만들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런 우리를 위해 자기 독생자 아들을 죽게 하셨다.6. 무엇이 더 큰 죄일까?마지막으로 살인이라는 행위와 분노하는 것 중에 무엇이 더 큰 죄일까? 분노하는 것과 남을 나보다 더 열등하게 생각하고 멸시하는 말을 하는 것 중에 무엇이 더 큰 죄일까? 많은 사람은 그래도 살인이 더 큰 죄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와 생각이 다른 것 같다. 예수님은 살인과 그 직접적인 원인에 대해서는 “심판을 받게 되리라”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지방의 심판관에게 심판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라카’라고 말하는 자는 대법원이라 할 수 있는 최고 판결 기관인 산헤드린 법정에서 유죄로 심판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더 나아가 ‘모레’라 말하는 자는 불의 지옥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형벌이 더 강해지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이는 직접적인 살인은 아니지만, 우리 주변에서 은밀하게 일어나는 사람을 차별하고 미워하는 태도와 말들, 그리고 사람을 무가치란 존재로 규정하는 하나님처럼 행세하는 말들이 살인 죄 만큼이나 큰 죄라는 것을 의미한다.얼마 전, 네이버에서는 스포츠 기사에 댓글을 잠정적으로 달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전에는 연예인들의 기사에 댓글을 달지 못하게 했다. 그 이유는 한 여자 배구 선수가 악성 댓글에 시달리다가 자살 한 사건 때문이었다. 또한, 이전에 걸 그룹의 한 여자 멤버가 악성 댓글에 시달리다가 자살한 일이 있었다. 사람들의 분노와 막말이 이들을 죽음으로 이끌었다. 특정한 살인자는 없을지라도, 이는 분명히 살인이다. 또한 우리도 이런 종류의 은밀한 살인에 참여하고 있다. 창조주 하나님이 된 것처럼 사람들을 규정하고, 뒤에서 수군거리는 악한 습관이 이들의 행동과 다르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은 이런 죄를 살인보다 결코 작다 하시지 않았다. 하나님 나라 윤리는 작은 것을 작게 여기지 않는 것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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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엔 삼위일체 설명이 없다?
by Greg Lanier
2020-11-26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건 쉽지 않다.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그 어떤 비유도 다 문제가 있기 마련이고, 어정쩡한 비유를 썼다가는 오히려 의도치 않게 오래 전 이단들이 저질렀던 오류에 빠지기 딱 좋다. 주변에 곧 안수를 받을 후보자가 있다면 한번 물어보라. 행여 우연이라도 당신이 “하나님은 세 분으로 구성되었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주변 분위기가 어떻게 바뀌는지를. 또는 다섯 살짜리 자녀가 던지는 “하나님하고 예수님하고 똑같아요?”라는 질문에 어떤 식으로 정통 교리를 반영한 대답을 할 것인지, 주변에 아는 부모에게도 한번 물어보라. 이런 개념적 어려움에 더해서 더 큰 문제는 삼위일체에 관해서 제대로 설명하는 신약 성경 구절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신이 난 회의론자들은 “삼위일체”라는 단어 자체가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심지어 믿음 좋은 신자들까지도 왜 하나님이 삼위일체에 관해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셨는지 곤혹스러워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왜 사도들은 어거스틴이 쓴 ‘삼위일체론’(De Trinitat)과 같이 성경에 삼위일체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을까? 게다가 삼위일체가 그토록 신앙고백에 핵심이 된다면서 말이다.성경은 하나님이 삼위라는 사실을 가르친다신약 성경 저자들이 삼위일체에 대해서 왜 더 많은 기록을 하지 않았는지 조사하기 이전에 삼위일체에 관해 이미 밝혀낸 내용을 조사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약 성경 안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 그의 백성을 위해 적극적으로 구속사역을 행하시는, 온전하게 드러난 사랑의 하늘 아버지의 모습- 여러 중요한 방식으로 드러난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 선재(pre-existence), 고유한 신성한 아들됨의 확정, 구약의 구절과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자신에게 적용함, 그를 향한 초기 숭배, 그리고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자신에게 적용함- 기꺼이 행동하고 기도하고 또 생명을 창조하고 계시하는 개인의 대리인으로서 완전한 인격체인 성령님(예: 요 6:63; 행 20:28; 롬 8:26-27; 고전 12:7-11), 비인격적인 에너지장(energy field)이나 생명력이 전혀 아님 - 신성한 삼위 간의 상호 관계(예 : 마 28:19; 눅 10:21-22; 24:49; 요 20:22, 행 2:32-33; 롬 8:9-11).신약 성경 저자들은 우리에게 조직신학 교과서를 남기진 않았지만, 성경을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는 그 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더 많이 볼 수 있다. 단지 “볼 수 있는 눈”만 있으면 말이다.삼위일체의 숨겨짐이 설명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성경에는 삼위일체에 관한 자세한 설명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게 문제가 될까? 불신자가 정통 기독교를 향해 슬램덩크를 때리는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전혀 아니다.신약성경이 우리가 원하는 만큼 삼위일체에 관해서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는 데에는 여러 중요한 이유가 있다.1. 카테고리 조절하기신약성경은 구약성경적 개념으로 가득한 “백과사전”을 바탕으로 유대인 저자들이 대부분이 유대인인 청중을 위해서 쓴 글이다. 고대 이스라엘로부터 물려받은 주요 신앙고백은 참되신 한 분 하나님, 즉 유일신 고백이다(신 6:4). 물론 그럼에도 구약은 정기적으로 성령님을 드러내고 있고 또 가끔은 신성한 아들의 모습도 보여준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의 온전한 신비, 즉 삼위일체적 일신론은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시고 오순절 날 성령이 부어질 때까지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따라서 초대교회 당시 수십 년 동안 유대인 청중에게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것은 1980년대 초 십대에게 오늘날 스마트 폰을 설명하는 것과 같았을 것이다. 삼위일체라는 카테고리는 분명하게 존재했지만, 거기에는 어떤 적절한 조절(stretching)이 필요했다. 너무 빨리 진도를 나가는 경우 생기는 건 혼란이었다(사실 그런 일이 실제로 발생했다 — 요 5:18 참조). 따라서 신약의 저자들은 주로 청중에게 알려진 범주 내에서 삼위일체를 점차적으로 그리고 종종 암묵적으로 공개했던 것으로 보인다.2. 기본 지원새 언약을 기록한 주된 목적은 믿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하여금 주님의 왕국을 전 세계적으로 확장하고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마 28:19-20; 눅 24:47; 롬 1:16-17; 계 5:9–10). 이런 상황은 어떤 주제를 더 광범위하게 설명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저자들로 하여금 선택과 집중을 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삼위일체에 대한 설명에도 영향을 미쳤다. 저자들에게 당장 시급했던 네 가지 주제가 떠오른다.- 예수를 메시아로 변호함(복음서의 주요 초점, 예: 요 20:31)- 믿음으로 의롭게 됨(롬 2-5; 갈 2-4; 엡 2-3; 빌 3)- 새 언약 시대에 맞는 윤리(롬 12-14; 고전 3-14; 빌레몬서; 야고보서)- 종말론적 성취(막 13; 살전 5; 살후2-3; 고전 15; 요한계시록)이런 주제는 교회의 주요 과제에서 가장 중요했고 따라서 가장 많은 설명이 필요했다. 이런 각각의 주제에 관한 주의 깊은 연구는 신약 저자가 삼위일체적 사고로 자신의 주장을 어떻게 뒷받침하는지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로마서에서 의로움에 대한 바울의 강력한 가르침은 아버지의 진노(롬 1:18)를 소멸시키기 위해서 성령께서 행하시는 마음의 할례를 통해(2:29; 5:5) 아들의 의가 죄인에게 전가됨으로(롬 3:25) 가능함을 보여준다. 신약의 저자들은 삼위일체에 대해 명시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철저하게 삼위일체적 사고로 교리를 설명하고 있다. 3. 설명 대신 보여주다마지막으로, 신약성경 저자들은 보다 단순한 구약성경 저자들의 접근 방식을 사용해 교리적 주제가 아닌 개인적인 실체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접근하고 있다. 일상에서 만나는 훌륭한 선생님처럼 구약성경은 종종 설명보다는 실제로 보여주는 방법을 채택한다. 사실 구약성경에는 핵심이 되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자세한 설명이라는 면에서 별 주목을 받지 못한 교리들이 여러 개 들어있다. 하나님의 선택과 명령, 인류의 완전한 타락, 대속 속죄, 성경의 교리, 메시아에 대한 소망 등이 거기에 해당한다. 오히려 이런 근본적인 교리는 이야기와 율법, 그리고 시편 및 예언 속에서 훨씬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모세 같은 사람은 이런 주제 중 하나에 대해 최소한 15 페이지 분량의 체계적인 신학적 내용을 서술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세가 선택한 방법은 이스라엘 민족의 삶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적인 말씀과 행동을 통해 “보여주는” 방식이었다.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감사해야 한다. 예를 들어, 삼위일체라는 근본적인 진리를 명확하게 설명하는 한 장의 성경 또는 몇 개의 구절을 갖는 대신, 우리는 성경 전체에 걸쳐서 삼위일체가 드러나는 사실을 놓고 기뻐해야 한다. 삼위일체와 관련한 이런 접근법은 신약성경에서 너무도 분명하다. 사도들이 머리를 맞대고 조금만 고민하고 성경을 썼다면, 우리는 삼위일체에 관해 아주 쉬운 답 또는 아주 확실한 비유를 하나 건질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경우 우리는 성경 모든 곳에서 스스로를 드러내시며 모든 것을 만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개인적인 실체를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 고맙게도 우리는 이제 삼위일체를 교리가 아닌 인격적인 하나님으로 바라본다. 그럼으로 우리는 단지 몇 페이지가 아닌 성경 전체를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시는 하나님을 보고 누릴 수 있게 되었다.원제: Why Don’t the New Testament Authors Explain the Trinit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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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멀게만 느껴질 때
by Matt Smethurst
2020-11-25
오늘 아침 아이들을 학교에 내려주고 기도를 하려고 했다. 차에 혼자 있었으니까 기도하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도무지 기도에 집중할 수도 없었고 기도하고 싶은 마음도 느낄 수 없었다. 내 영혼은 산만하고 무기력하기만 했다.무기력한 영혼의 구름은 감사하게도 금방 걷혔다. 나는 거리를 달리면서 어느새 나의 왕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항상 찬양받으셔야 하는 분이라는 것을 고백했다. 손에 잡힐 것만 같은 그분의 존재를 느끼면서 말이다. 내가 오늘 아침 그랬던 것처럼 혹시 하나님이 멀리 있다고 느낀 적이 있는가? 만약에 그렇다면 여기 그런 느낌을 단숨에 되돌리는 비결이 있다.아, 정말로 단숨에 마음을 바꾸는 비결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당신도 그걸 알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비결을 그렇게 쉽게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진리는 언제나 더 복잡하다.운전하고 가던 길에서 뭔가 마술과 같은 기적이 일어난 게 전혀 아니다. 커피집으로 가서 앉아있는 내내, 그러니까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자리에 앉을 때까지도 나는 여전히 영적으로 멍한 상태였다. 하나님은 오늘 너무도 멀게만 느껴졌다. 왜 그런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어제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오늘 아침에 아내와 싸운 것도 아니고 집에서나 직장에서, 또 교회에서도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물론 오늘과 같은 이런 느낌이 충격적일 정도로 드물게 일어나면야 좋겠지만, 이런 기분은 화요일이면 으레 겪고 있어서 자연스러운 느낌마저 든다.주님이 너무도 멀게만 느껴질 때, 그게 하루든 몇 달이든 또는 몇 년이든,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마술과 같은 처방은 없다. 단지 하나님이 실존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냥 관념 또는 개념으로만 느껴질 때, 그의 임재를 느끼게 하는 세 가지 방법을 소개하려고 한다.1. 찾으라기도하겠다는 나약한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을 때, 나는 어떻게 했어야만 할까? 나는 계속 기도하려고 노력했어야 했다. 도무지 기도가 나오지 않는 바로 그때야말로 더 간절히 기도하려고 발버둥 칠 때이다. 만약에 아무 능력도 없는 관념의 신을 섬긴다면, 계속 기도하라는 제안이 무익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실망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예레미야애가 3장 31-33절의 약속을 살펴보라.“이는 주께서 영원하도록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며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본심이 아니다”라는 말은 참으로 아름답다. 그건 하나님이 모든 주권을 갖고 있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그건 너무도 끔찍한 일이다. 다른 번역을 살펴보자.“우리를 괴롭히거나 근심하게 하는 것은, 그분의 본심이 아니다.” (새번역)“주는 사람을 고생시키고 근심하게 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현대인의 성경)핵심은 이것이다. 지금 힘든 시간을 겪고 있다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그렇게 만든 게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 무슨 잔혹한 우주적 게임을 벌이고 있지 않다. 하나님은 결코 고통당하는 당신을 보면서 기뻐하는 분이 아니다. 그러니 계속해서 그분께 부르짖으라. 기도가 천정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 같더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기도를 다 듣고 계시며 또 당신을 사랑하신다.2. 점검하라자복하지 않은 죄는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도록 한다고 성경은 반복해서 경고한다. 지금 하나님이 멀게만 느껴진다면 자신을 점검하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놓고 반항하는 어떤 부분이 당신 삶 속에 있는 건 아닌가? 어떤 숨겨진 죄를 계속해서 변명으로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닌가? 죄는 단지 천국에서 주는 주차위반 딱지가 아니다. 죄는 거룩한 하나님을 향한 개인적인 모욕이다. 그렇기에 불순종은 언제나 하나님과 멀어짐으로 이어진다. 그런데도 성경은 좋은 소식을 알려준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거룩하신 주님은 놀랍게도 자비의 주님이다. 하나님은 용서하시기를 기뻐하고 또한 회개함으로 겸손해진 자녀를 품어주시길 좋아한다. 요한일서 1장 5-10절을 마지막으로 묵상한 게 언제인가? 그 구절을 천천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어보라. 빛 가운데로 드러내야 할 어둠이 행여 당신 속에 존재하는 건 아닌가? 이런 질문은 무서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건 사실상 자유를 위한 것이다. 어둠은 죄가 자라나고 믿는 자들이 황폐해지는 곳이다. 그와 반대로 빛은 죄가 그 위력을 잃고 믿는 자들이 성장하는 곳이다. 하지만 자가 검사로 끝나서는 안 된다. 그림자에서 벗어나 성경적 공동체의 빛으로 들어가라. 세상의 빛을 따르기 시작한 사람에게 더 이상 고립된 어둠은 적합하지 않다(요 8:12). 그러므로 다른 빛의 자녀들과 교제하라(요 12:36; 엡 5:8; 빌 2:15). 건강한 교회에 몸을 담그고 목회자들의 감독, 다른 지체들의 보살핌 및 상호 책임에 삶을 복종시키라. 하나님을 가까이 느끼고 싶은가? 그럼 하나님의 자녀들을 가까이하라.3. 주목하라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한 최고의 방법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까이 오기 위해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묵상하는 것이다.자격이 없는 인간을 그분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어느 정도까지 감수하셨는가? 2천 년 전에 예루살렘 외곽의 작은 언덕에서 그의 사랑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그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주셨다. 로마의 십자가에 매달린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무한한 간격을 메웠다.그러므로 사탄이 절망감을 주거나 하나님께서 당신을 잊거나 버리셨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밀려올 때는 갈보리가 메꾼 영원한 틈새를 묵상하라.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 2:13). 신자의 정체성은 하나님과 얼마나 멀리 떨어졌는가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는다. 하나님과 얼마나 가까운가에 달려있다. 종종 하나님이 멀리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당신의 느낌은 진실이 아니다. 당신을 가까이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며 피를 쏟으신 그 절정의 장소를 주목하라. 안아주심나는 이 글을 다소 부끄러운 나의 고백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멀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이 타락한 세상에서 살면서 종종 느낄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물론 더 슬픈 이유로 인해 그런 느낌을 느끼는 많은 기독교인이 있다. 엄청난 고난이 밀려올 때면 그 고난은 삶에 혼란을 일으키고 그 여파로 반갑지 않은 질문과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남기기 마련이다. 조니 에릭슨 타다(Joni Eareckson Tada)가 생각난다. 그녀가 다이빙 사고로 목 아래로 마비된 지 벌써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 흘렀다. 휠체어에 앉아서 그녀는 하나님의 신실한 성품에 대해 이렇게 간증했다. “그는 나를 고치는 대신 안아주기로 하셨습니다. 고통이 심할수록 그의 안아주심은 더 따스합니다.”당신의 상황이 사소하게 느껴지든 또는 압도적으로 느껴지든 간에, 당신에게 안아주심의 따뜻한 사랑을 주시는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란다. 그는 좋으신 하나님이고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그는 가까이 계신다. 믿는 모든 자여, 지금까지 내가 말한 모든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결코 잊으시거나 버리시지 않는다. 원제: What to Do When God Seems Far Awa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영성
묵상과기도
하나님의임재
회개
기도
용서
예레미야애가
공동체
조니에릭슨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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