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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예배와 전도의 관계
by Michael Keller
2020-05-31
주일 예배에서 전도(evangelism)가 어느 정도의 위치를 차지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한창이다. 주일 예배에 참석한 회중이 모두 신자들이라고, 혹은 불신자들이라고 넘겨짚어도 되는 걸까? 고린도전서 14장 23–25절은 초대교회 예배에 신자와 불신자가 함께 참석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배를 위해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자였다. 하지만 불신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미쳤다”며(23절) 거부감을 보이지 않도록, 그리고 그들이 복음을 듣고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25절)는 것을 깨달을 수 있도록, 신자들이 자신의 행실을 돌아봐야 한다고 바울은 말한다. 물론 이것은 예배 구성 요소 모두를 불신자들이 완벽하게 이해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 하려면 예배가 아니라 콘서트나 토크쇼를 열어야 할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와 찬송은 불신자들에게 어렵다. 성찬식도 그들에게는 이상하게만 보일 것이다.죄의 끔찍한 본질, 예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를 회중이 이미 다 알고 있다는 가정에서 하는 설교야말로 불신자들에게는 가장 어렵게 다가올 것이다. “육에 속한 사람”(고전 2:14)에게는 복음이 언제나 불편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 드려지는 예배이건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예배의 많은 부분이 생경하게 보이기 마련이다. 바울은 복음에서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수치스럽게 보일 수 밖에 없는 부분을 감추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적절히 상황화(contextualize)하여 불필요한 혼란과 불쾌함을 없애라고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사람의 전통을 하나님의 계명 수준으로 여기지 말라 하신 것처럼(막 7:8–9), 우리 역시 우리가 가장 선호하는 예배 방식을 지나치게 추구한 나머지 복음을 꼭 들어야 하는 이들을 배제시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다만 시편 105편 말씀처럼, “여호와께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하는 일을 만민 중에 알게”할 뿐이다. 어떤 식으로 이 일을 해야 할까? 시편 105편은 계속하여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 그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말할지어다”라고 선언한다. 이 말은 믿지 않는 이들이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보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게 된다는 뜻이다. 에드먼드 클라우니(Edmund Clowney)는 이를 일컬어 ‘송영(頌榮)으로 하는 전도’(doxological evangelism)라 했다. 엄격한 의식이 아닌, 일반적인 방식성경은 예배에 대해 엄격한 모델을 제시하지 않지만 찬송, 애통, 죄의 고백, 확신, 그리고 파송에 대한 일반적인 방식들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요소들이 다 포함되어 신자와 불신자를 모두 가르칠 수 있는 예배의 공간을 만들어가야 한다. 이를 위해 우선 우리는 믿지 않는 이들이 예배에 올 것이라는 가정 하에 예배를 준비해야 한다. 자신의 친구나 동료를 교회로 초청한 교인들은 그들이 예배 중에 불편해 하는지 아닌지 쉽게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적어도 다섯 가지 기준이 필요하다. 각 항목에는 실천 사항들이 있다. 기준 1: 우리가 쓰는 말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기독교가 주변부로 밀려난 요즘 상황에서는 이 점이 교회에게 가장 어려운 걸림돌이다. 사실 이 세상에서 기독교 문화는 너무도 오랫동안 아무런 설명도 없이 “자기들만의 언어”와 방언을 쓰며 존재해왔다. 필자가 대학 시절 그리스도인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불신자 친구 한 명을 교회에 데려온 적이 있다. 예배 중에 설교자가 “어린 양의 보혈이 여러분의 죄의 구속을 위해 흘려졌습니다. 이제 그리스도를 위해 결단할 시간입니다”라고 했는데, 우리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게 무슨 뜻인지에 대한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 실천 사항: 알기 쉽게 설명하라. 나는 설교문을 작성할 때 종종 교회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사람들을 상상해보곤 한다. 그들이 설교 본문이나 설교에서 설명하는 개념에 대해 가질 만한 반론이나 질문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불필요한 기독교 용어를 피하라. 사람들이 모르는 말을 써야만 한다면, 그 의미를 설명해 주라. 기준 2: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어떤 것에 대해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예배라면, 예배를 드리지 않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무언가에 대해 끊임 없이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예배(worship service)라는 개념을 낯설어 한다. 기독교가 주류 문화가 아닌 요즘 시대에 이를 설명해 주는 것은 우리의 의무다. 사실 이는 신자와 불신자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다. 실천 사항: 필자가 섬기는 리디머링컨스퀘어교회(Redeemer Lincoln Square)는 각 예배 순서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주보 여백에 설명을 달아 놓는다. 예를 들어, 죄를 고백하는 순서의 경우 이렇게 적혀 있다. “죄의 고백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 솔직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허상들을 좇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우리 삶을 재정비하라 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은혜의 복음은 우리가 우리의 허물들을 솔직히 인정함으로써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기준 3: 적합한 투명성을 확보해야 한다SNS가 계속 광범위하게 퍼지고, 사람들이 잘 포장된 자기 모습만을 온라인에 올리면서 불신(distrust)이 생겨나고 있다. 사람들은 진실성을 갈망한다. 우리 삶이 항상 행복한 일들로만 가득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교회에만 가면 모두들 행복한 모습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전적으로 진실된 모습, 죄인이지만 소망이 있는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우리 예배 중에 보여 주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실천 사항: 예배에는 소망에 관한 것뿐 아니라 항상 애통과 죄의 고백에 관한 요소도 있어야 한다. 필자는 개인사를 지나치게 언급하지는 않지만, 정기적으로 내가 겪는 어려움을 교인들과 나눔으로써 이 기준을 실천하려 노력하는 중이다. 기준 4: 믿지 않는 이들도 예배에 온다는 것을 기억하라설교 중에, 불신자들이 기독교 신앙에 대해 가진 반론들을 그들 자신보다 더 잘 진술하는 것이 도움이 되는데, 이에는 두 가지 유익이 있다. 그러한 반론들을 이미 들어봤고 기독교가 어떤 답을 줄 수 있는지 궁금해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또한 불신자들이 기독교에 대해 어떤 우려를 가졌는지 당신이 잘 이해한 내용을 진술하면, 예배에 나온 불신자들은 목사가 자신들의 마음을 알아준다고 생각하게 된다. 실천 사항: 네 가지 정도를 실천해 볼 수 있겠다. 첫째, 교인들이 성찬식에 참여하는 동안 믿지 않는 이들이 어색해하지 않도록 기도문을 인쇄하여 나눠주라. 둘째, 예배 시작 전에 불신자들을 소개하고 환영하는 시간이 있으면 좋다. 셋째, 설교를 할 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라는 말을 넣으면 목회자가 그리스도인 된 교인들을 향해서도 설교하고 있다는 확신을 줄 수 있다. 넷째, 설교 후 Q&A(질의응답) 시간을 도입해 보라. 우리 교회에서는 이 시간을 Q&R (Question and Response, 질문과 반응)이라 부른다. 질문에는 반드시 반응을 보이겠다는 뜻이다. 주보에는 목사들의 휴대전화 번호가 적혀 있어서 질문이 있는 이들은 누구든지 예배 후 15분에서 20분 내에 문자 메시지로 질문을 보낼 수 있도록 한다. 기준 5: 말씀과 삶을 분명하게 제시하라불신자든 신자든 모두 구체적으로 실천되고 분명하게 선포되는 은혜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과거의 죄를 해결하는 것만이 은혜가 아니다. 은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미래의 삶에 대한 확신으로 이끈다. 기독교 교리는 중요하고, 배워야 마땅하지만, 교리는 우리가 먼저 은혜를 경험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그를 따르는 삶을 살고자 노력하게 된다. 의무감이 아닌 사랑 때문이다. 죄책감에 근거한 의무가 아닌 감사가 우리에게 끊임없는 동기를 부여한다. 선한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 그리고 선한 삶을 위한 능력은 그제서야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 실천되는 모습을 불신자들이 보지 못하면 그들을 설득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예배 중에는 사역 보고 및 헌신자 모집 광고를 통해 다양한 긍휼 사역 및 실천 사역을 부각시켜 보여 주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예배 참석자들은 이를 통해 은혜가 어떻게 세상으로 나아가는지 보게 된다. 실천 사항: 이 항목에 대한 실천 사항 역시 네 가지다. 첫째, 분기마다 이 세상의 고통에 대해 애통해 하며 우리가 이 세상의 필요에 어떻게 응답할 수 있는지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기도를 시도해 보라. 둘째, 교인들이 자신의 신앙을 실천하고 다른 이들을 섬길 수 있는 사역 기회들에 대해 예배 중에 광고하라. 셋째, 교회가 있는 지역에서 우리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는지 주시하면서 기도하며 걷기(prayer walk)를 해보라. 넷째, 신자든 불신자든 우리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는 예수님을 통해 주시는 참된 은혜를 믿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을 매 설교마다 강조하라. 물론 이 글의 내용이 다는 아니다. 하지만 당신이 섬기는 교회와 주일 예배가 교회에 오는 모든 이들을 섬길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도록 고민하는 당신에게 자그마한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Where Does Evangelism Fit on Sunday Morning?번역: 이정훈
영성
예배
의식
형식
전도
불신자
투명성
우리는 자주 합리화에 빠진다
by 정요석
2020-05-30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고 확신했던 예언이 실패로 끝날 때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할까? 사회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는 자신의 책 ‘예언이 실패할 때’에서 이를 다룬다. 1954년 미국에서 말세론에 빠진 사람들이 가정과 직장을 버리고 한 곳에 모여 곧 닥칠 대홍수로부터 자신들을 구해줄 비행접시를 기다린 적이 있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끝나 버렸다. 예언이 실패로 끝나자 일부 추종자들은 자신들이 틀렸음을 알고 말세론을 버렸지만, 일부는 자신들의 믿음이 약하였기 때문이라고 회개하며 더욱 광신적 행태로 변해 갔고 일부는 날짜 산정에 오류가 있었다며 새로운 종말 날짜를 산정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한번 갖게 된 믿음과 생각을 버리는 대신, 현실과 사실을 자신의 바람과 생각에 맞추어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페스팅거는 이것을 보며 “인간은 합리적 존재가 아니라 합리화하는 존재”라고 말하였다. 인간은 그 뛰어난 지정의로 자신의 신념과 욕구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정보들을 얼마든 이용하고 가공하는 존재다. 자신의 신념에 맞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어긋나면 옳은 정보일지라도 무시하며 합리화하는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 발생한다.내 기억에는 매 선거 때마다 부정 선거 시비가 있어 왔다. 이번 제21대 국회의원 선거도 예외 없이 일부 낙선자들이 부정 선거를 주장하고 있다. 여러 증거들이 있다 하지만 소속 정당의 당원들마저 무시하며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부정 선거가 이루어지려면 수천, 수만 명이 합작하여야 하는데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부정 선거를 주장하는 한 사람은 상대당이 승리를 예측한 출구조사 발표를 보면서 크게 기뻐하지 않은 장면을 부정 선거의 한 증거로 제시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당이 기쁨을 절제하며 겸손한 모습을 보인 것이라고 합리적으로 해석함에도, 부정 선거라고 확신하는 이는 부정 선거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그 장면을 합리화하고 있다.그간 부정 선거 관련 주장은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제기되어 왔다. 주장하는 내용과 형태도 거의 비슷하다. 이번에도 평균 득표 비율이 일정한 상수로 나오도록 개표기가 조작되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박근혜 전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도 이와 비슷한 주장이 있었다. 그때 비슷한 주장을 했던 이들은 이번 총선이 부정 선거라고 주장하는 이들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 비판하기에 앞서 그때 자신들이 주장한 것에 대해 옳았는지 살펴야 하고, 자신들도 확증편향에 빠져 합리화하는 존재가 아닌지 냉철히 살펴야 한다. 성경에도 확증편향에 빠진 확신범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아합의 400명의 선지자들이다.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아람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며 전쟁을 부추겼다. 시드기야 선지자는 철로 뿔들을 만들어 여호와의 말씀이 왕이 이것들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하리라 하셨다며 승리를 확신했다. 그런데 사실 그들은 모두 거짓말하는 영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아합을 죽이시려고 거짓말하는 영을 선지자들의 입에 넣으신 것이다. 선지자 미가야가 이 잘못된 사실을 지적하지만 시드기야는 미가야의 뺨을 치며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가서 네게 말씀하시더냐?”라고(왕상 22:24) 다그친다. 이들 400명의 선지자들은 아합의 상에서 함께 밥을 먹는 어용 선지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참된 선지자들이 아니라, 음식과 돈에 팔려 왕이 듣기 원하는 내용을 전하는 거짓 선지자들이다. 신앙과 양심을 잃으니 당장 무엇이 옳고 그른지 합리성을 잃어버린다. 게다가 오직 왕이 듣기 원하는 내용에 맞추어 합리화할 뿐이다. 시드기야는 그 수준을 뛰어넘어 환상까지 들먹인다. 아합에게 승리의 수단이라며 철뿔을 만드는 퍼포먼스까지 선보인다.그런데 이런 현상은 성경에나 나오는 일이 아니라 이 시대의 평범한 목사들에게도 흔히 발생하는 일이다. 좀 무리가 되는 평가일지도 모르지만 어찌 보면 이번 총선에서 개신교를 심판한 측면도 있다고 본다. 기독교인의 정치 참여에 대한 여러 시각들이 있지만 유일한 기독당으로 총선에 참여한 기독자유통일당은 1.83%, 513,159표를 얻는데 그쳤다. 20대 총선에서는 두 개의 기독당이 각각 2.64%와 0.54%를 기록하였는데, 4년 만에 지지율이 거의 반으로 떨어진 것이다. 이것은 그 정당의 관계자들이 자신들이 엄청난 지지를 받고 있다고 착각하여 스스로 합리화 하며 선거에 임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나도 자주 합리화에 빠진다. 특히 목사는 교회에서 합리화하기 쉬운 존재다. 목사들은 아무래도 성도들 중 자신을 지지하고 좋아하는 성도들을 더 많이 만나고 대화할 것이다. 그러다보면 목사는 성도들 대다수가 자신을 좋아하고 자신의 설교와 리더십에 만족해하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목사는 나르시시즘에서 빠져나와 냉철히 자신을 살펴야 한다. 정당이 자기 당을 지지하고 후원하는 국민의 소리만 듣고 총선과 대선에서 승리하리라는 예감을 확증하며 합리화 하다가, 결국 엄청난 패배를 경험한 것처럼 마찬가지 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에게 듣기 좋은 소리만 들으려고 하지 말고, 다양한 목소리를 귀담아 듣고, 다양한 계층과 지역의 마음의 흐름을 냉철히 살펴야 한다. 이번 총선에서 승리한 정당은 빅데이터를 활용하여 여러 예측결과들을 분석하는 등 여론을 읽으려고 나름 노력했다고 하는데, 목사와 기독교가 어떠한 방법을 활용하든 국민이 목사와 기독교에 대하여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파악해야 한다.한국의 목사들과 기독교는 국민의 마음을 얻고 있을까? 이번 코로나19 감염 사태 동안에 기독교는 천주교와 불교보다 잘 대처하여 국민의 마음을 얻고 있는가? 지난 4년 동안 정치와 사회의 현안들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겸손하게 잘 대처하여 지지율이 천주교와 불교보다 올라갔을까? 정치인과 정당은 정기적으로 선거를 통하여 평가받는다. 패배 원인을 분석하고 다시 집권하기 위한 능력을 기르면 다음 선거에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스스로를 살피고 평가할 수 있는 수단마저 없는 것은 아닐까? 자신을 살피려는 의식적 노력이 없으면 목사와 교회는 자신이 잘하고 있다는 환상에 빠지기 쉽다. 아합과 400명의 거짓선지자들처럼 말이다. 요즘 일이십 년 후 기독교를 많이 걱정하게 된다. 과연 어떤 모습을 갖게 될까? 지금 분위기 그대로라면 그때는 기독교인 숫자도, 신학교 지원율도, 기독당의 지지율도 더욱 내려갈 것이고, 교회당은 소수의 노인들로만 채워질 수 있다. 목사와 기독교는 외부의 전문가를 동원해서라도 자신의 실제 모습을 파악해야 한다. 그래야 처방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환상에 빠져 확증편향을 가진 확신범 시드기야의 예언을 받아들인 아합은 전쟁에 나갔다 우연히 날아온 화살을 맞고 죽고 말았다. 이 시대 자기 합리화를 정당화하는 목회자와 교회에게도 그런 우연한 일이 발생하여 쇠퇴와 비참함에 떨어지지 않을까 두렵다. 한국 기독교가 자기 사랑을 버림으로 하나님의 소리를 정확히 들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영성
영적성장
레온페스팅거
확증편향
합리화
아합
시드기야
미가야
선지자
그라운드 안의 사람, 그라운드 밖의 사람
by 김형익
2020-05-29
빛난다고 다 금이 아니듯이, 예배당 안에 앉아 있다고 해서 다 그리스도인은 아니다. 주님께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신 것이 세리나 창기가 아닌 바리새인으로서 유대인의 관원이고 선생이었던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이었다는 점은 매우 충격적이다. 사실 나는 이것에 충격을 받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교회의 지도자들, 특히 목사가 자신의 회중의 영적 상태를 진단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인지, 거듭나야 할 사람인지, 거듭났고 확신을 가진 사람인지, 거듭났으나 확신을 가지지 못한 사람인지, 거듭나지도 않았지만 거듭났다고 확신에 흡사한 착각을 하는 사람인지, 거듭나지 않았고 그 사실을 알기에 참으로 거듭나기를 열망하는 사람인지, 또 거듭났고 성숙에 이른 사람인지, 거듭났지만 미숙한 신앙에 머무르는 사람인지를 진단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이지만 가장 중요한 일이다. 물론 목사가 한 영혼의 중생 여부를 어떻게 하나님께서 아시듯이 확정적으로 진단할 수 있겠는가마는. 이런 진단은, 요즘 사람들이 그렇게도 꺼려하는(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다 하는) 남을 판단하는 것도 아니고, 비판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바울 사도가 교회를 향해서 쓴 서신들을 읽어보면, 바울 사도가 서신의 대상인 교회 공동체의 신앙을 진단하고 있고 그 진단 위에서 서신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바울 서신들은 불특정 다수를 위한 신앙의 교과서로 집필된 책들이 아니다. 이점에서 목회라는 현장에서 설교와 목양이라는 책임을 맡은 목사가 회중의 영적 상태를 진단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직무유기고 그 사역에서 영적 열매를 기대하기 어렵다. 나에게 맡겨진 회중들을 경건한 어른들로 세우는 것은 나의 목회에서 포기할 수 없는 목표 중 하나다. 6년 전에 집필한 책에서 나는 경건한 어른을 이렇게 정의했다. “제가 말하는 경건한 어른은 목사나 장로 같은 직분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나이가 지긋한 분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경건한 어른은 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그가 가진 재능이나 업적이 아니라 그의 경건한 영향력을 인정하기 때문에 웃어른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정말 아는 사람,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줄 아는 사람, 자기 자신보다 그리스도께 푹 빠지는 법을 아는 사람, 자아를 찾는 것보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더 관심을 두는 사람, 거룩함에서 자라 가는 사람, 사람들에게 열심과 뜨거움의 인상을 주려고 애쓰지 않는 사람, 자신의 내면과 사람들 앞에서의 모습의 차이를 깨뜨리고 정직하게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사람, 얄팍한 프로그램이나 어떤 행사로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 행동으로만이 아니라 존재감으로 주님을 향한 마음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 인생에서 그리고 심지어 교회에서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한 번도 그리스도의 모습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경건한 영향력으로 다가오는 사람, 이런 사람이 제가 말하는 경건한 어른입니다.”(김형익, ‘우리가 하나님을 오해했다’ 생명의말씀사 212-213쪽). 사람은 어떻게 각자의 신앙 여정을 통과하면서 경건한 어른에 이르게 되는 걸까? 내가 늘 질문하고 고민하고 탐구하는 주제다. 최소한 한 가지 분명한 결론은, 이건 그라운드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교회가 그라운드 밖으로 나간 사람들을 참되고 성숙한 신자로 규정하는 현실을 보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경건한 어른이 되는 길은 그라운드 밖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성품이나 성숙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불신자 중에도 성숙한 사람과 미숙한 사람이 있듯이, 신자들 중에도 성숙한 사람과 미숙한 사람이 있다. 성숙한 불신자(A)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어 신자가 되었을 때, 이들의 영적 성숙은 미성숙한 불신자들(B)보다는 비교적 빠르게 일어나는 편이다. 주님께서도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 19:30).”고 하시지 않았는가. 이때 이들보다 먼저 교인(그들이 참된 신자인지 확신할 수 없으니, ‘교인’이라고 부르겠다)이 된 사람들 중에서 미성숙한 상태(D)에 장기간 머물던 사람들의 마음에 불편한 감정이 일어날 수 있다. 나보다 한참 늦게 교회에 들어온 사람이 성숙한 신자(C)로 빠르게 성장하여 교회의 영향력 있는 리더가 되고, 경건한 어른이 되지 않는가? 이 시기심이 긍정적으로 작동하면, 그들도 은혜 안에서 성숙해져서 C의 영역(성숙한 신자)으로 가는 길을 택하겠지만, 시기심이 부정적으로 작동하게 되고 그 유혹에 넘어가게 되면 미성숙한 신자들은 엉뚱한 방향으로 향하게 된다. 그것이 E의 영역이다. 시간과 물질의 비상한 헌신, 열심, 봉사 등으로 교회의 인정을 받게 되는 일종의 불법 속성 과정(?)이다. 이때 목회자가 이들을 성숙한 신자 혹은 경건한 어른으로 인정하게 되면(인정하는 방법은 직분이나 리더십이다), 교회 전체는 방향을 잃고 표류하기 시작한다. 그런 교회에서 경건한 어른, 성숙한 신자들을 보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사실, E의 영역으로 가서 교회의 인정을 받은 사람들은 ‘그라운드 밖으로 나간 사람들’이다. 믿음 안에서의 성장과 성숙을 포기하고 봉사와 열심으로 교회의 인정을 얻으려는 E의 영역으로 나간 사람들은 돈과 거짓으로 교회의 인정을 사려고 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목사나 장로, 그리고 집사나 권사 중에서 이런 자들이 왜 없겠는가? 주님이 하신 말씀을 들어 보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E의 영역에 있는 자들을 향한 말씀이 아닌가! 만일 자신이 E의 영역에 머물고 있다고 판단된다면, 돌이켜 그라운드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목회자는 그런 사람들이 D의 영역(미성숙한 신자)으로 돌이켜 C의 영역(성숙한 신자, 경건한 어른)을 향한 은혜의 항해를 시작하도록 인도해야 한다. 목회자가 E의 영역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교회의 성장을 이루어 보려고 한다면, 그 교회에는 더 이상 소망이 없다. 그것은 목사의 영적 매춘이고, 우상 숭배다.그라운드 밖에는 소망이 없다. 그라운드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미성숙하다고 해도, 성장의 속도가 더디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라운드 안에 있어야 한다. 구원받은 성도가 갈 방향은 하나 밖에 없다. 성숙한 신자, 경건한 어른이 있는 C의 영역으로 가는 방향, 그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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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일의 한국 선교 동기와 선교 방법
by 옥성득
2020-05-28
1888년 내한한 초기 선교사 게일(James S. Gale)이 왜 선교사가 되었고, 어떤 선교 동기로 내한했는지, 또 어떤 선교 방법을 가지고 있었는지 살펴보자. 현재 한국 교회가 당면한 교회와 선교의 정체성 위기에 대해서 숙고할 때 도움이 되는 통찰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James S. Gale, “Missionary Motive (part),” Gale Papers, Fisher Library Univ. of Toronto. 게일의 선교 동기게일은 1891년 9월 19일에 쓴 글 ‘선교사의 동기’(Missionary Motive)에서 세 가지 선교 동기를 말한다. 첫째는 야망(ambition)이다. 선교사로서 성공해서 자기 성취, 출세, 권세, 부, 명예를 차지하려는 동기다. 이런 저급하고 이기적 동기로 전진하다가 많은 이들이 암초를 만나 파선했다. 선교사들은 이 성공 야망을 늘 경계해야 한다. 둘째는 고상한 동기인데 곧 인도주의(humanitarianism)다. 수많은 이방인들이 매일 복음 없이 죽어가고, 가난과 무지와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있으므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려는 동기다. 선교사는 아시아인, 아프리카인들이 “불타는 집에서 구원해 달라고 발버둥치는 모습”을 그리며 현지에 도착한다. 이교도들에게 서구 교육과 의료 등 ‘문명’을 전달한다. 그러나 이는 상당 부분 선교사들의 착각이다. 동아시아만 해도 서구 문화보다 더나은 점들이 많고, 그들의 문화가 그들 상황에 더 적합하다. 자족하는 한국인들은 “이 세상에서 한국만큼 좋은 데는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불타는 집에서 아우성을 치는 자들이 아니라, 평안한 가운데 인생을 즐기고 있다. 그들의 문명적 필요가 정부나 부를 통해 해소되면 선교사는 떠나야 한다. 사람들이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곳에서는 인도주의가 설 자리가 없다. 선교사는 휴머니스트로만 머물 수 없다. 셋째는 진정한 동기로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기 때문이다.”(For the love of Christ constraineth us, 고후 5:14). 선교지에 가지 않으면 안되는 의무와 순종과 사랑이다. 그리스도께서 나와 너를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셨기에, 그리고 “세상 끝 날까지 늘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시며 “가라”(마태 28:19-20)고 명령하시기 때문에 간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동기요, 세상을 위한 그리스도가 동기다.게일의 중생 경험과 선교 동기게일은 캐나다 온타리오에서 스코틀랜드 계열 장로교회에서 자랐는데, 심판하는 하나님과 지옥의 공포에 떨며 불안하고 불행한 소년 시절을 보냈다. 음침한 사망의 골짜기를 가듯이 매일 기쁨 없이 지냈다. 집에서 교회까지 5마일 정도 떨어져 있어서 주일 오전 예배만 참석했는데, 14세가 다 되어 갈 때 형과 함께 주일 저녁 예배에 참석했다. 그런데 설교자가 우울한 종교 때문에 고통받는 소년의 슬픔과 고뇌를 상세히 묘사하며 설교했다. 게일은 자신을 모르는 목사가 전 교인 앞에서 자기 이야기를 한다고 느끼며 깜짝 놀랐다. 자신의 내면을 속속들이 전 회중 앞에 드러내는 설교를 듣는 순간, 갑자기 크고 놀라운 빛이 게일에게 임했다. 그는 아름다운 세계를 보았다. 게일은 영혼의 평화를 맛보며 고뇌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 빛은 예수님이었다. 그가 내게 오셨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오, 내 영혼아!”라고 그는 속으로 외쳤다. 게일은 이 경험을 평생 생생하게 간직했다. 자신을 사랑하여 찾아오신 예수님 때문에, 그는 토론토대학교를 졸업하고 녹스신학교에 입학한 후, 2년 간 전도자로 살았다. 그리고 한국 선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주변에서 신학교 학업을 계속하라는 충고에도 불구하고, 평신도 선교사로 한국에 왔다. 그는 왜 선교사가 되었는가? 바로 14세 때 사랑의 주님을 만났기 때문이다.게일의 선교관과 선교 방법그가 전할 메시지는 신학도, 교리도, 교파도 아니었다. 오직 한 가지 예수의 사랑이었다. 따라서 문명화나 사회사업은 필요한 것이지만, 게일에게 그런 것은 진정한 선교가 아니었다. 기독교인이 정치를 할 수 있지만, 교회가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선교가 아니었다. 그는 한국의 유교, 불교, 도교를 깊이 이해하고 동학에도 관심이 많았지만, 동학 혁명이나 의병 전쟁은 비판했다. 종교의 정치화는 파멸로 보았다. 그는 과격한 개혁 청년 이승만이 한성감옥에 있을 때 도와주면서 개종하도록 했으나 1900년 전후 교회가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반대했다. 1897년 첫 안식년 휴가 때 미국 알바니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아내 헤론 부인의 친척들이 유력 인사로 있는 워싱턴 D.C.를 방문하고, 한국 경험을 담은 "Korean Sketches"를 출판했다. 1904년 이승만이 출옥하자 조지워싱턴대학에 유학을 갈 수 있도록 총장에게 추천서를 써 주어 그가 좋은 교육자가 되도록 주선했다. 그가 이승만을 신뢰한 이유는 이승만이 감옥에서 사랑의 주님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경험에서 한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려는 비전까지 품게 되었다. 게일의 친구였던 이상재도 감옥에서 요한복음을 읽다가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중생 체험을 했다. 그 경험이 YMCA 운동, 문화 민족 운동을 하는 동력이 되었다. 게일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 선교라고 확신했다. 또한 하나님은 한국 역사 속에 일해 오셨다는 한국인 조사들(이창직, 이교승, 이원모)의 말을 수용했다. 하나님은 한글이나 하나님의 여러 이름들(천, 하느님, 상제, 조화옹 등)과 같은 ‘복음의 준비’들을 기적적으로 마련해 놓으셨다. 한국 문화와 전통 종교 안에는 기독교와 만나는 접촉점이 많으며, 고대부터 한국인은 하느님을 믿어 왔다. 따라서 역사와 전통과 기존 종교는 기독교에 이용할 수 있는 요소가 많다. 서구화가 늘 좋은 것은 아니다. 20세기의 물신숭배, 무신론, 무도덕으로 한국의 좋은 전통, 영성, 예의, 도덕을 뿌리째 뽑아 버렸다. 식민 통치와 서구의 할리우드 문화가 판을 치는 1920년대는 1880년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하고 무례한 세상이 되었다. 그럴수록 게일은 한글, 한국어, 한국 문학의 수준 높았던 전통을 보존하고 계승하기 위해서 매일 몇 시간씩 한문 문집을 번역하거나, 한국 문인들의 하늘(하나님) 숭배의 역사를 정리하고, 성경을 좋은 한국어로 번역했다. 그는 ‘천로역정’과 같은 한글 번역 소설로 평민에게 복음을 전했고, 고려와 조선 시대 문인들의 글로 유학자들과 대화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했다. 기독교 사역은 언제나 ‘왜’와 ‘어떻게’를 질문한다. ‘왜’와 ‘어떻게’는 늘 새롭게 물어야 하고 상황에 따라 변해야 한다. 110년 전의 선교 방법이 지금 다 유효한 것은 아니다. 과거에 유효했던 방법을 연구하고 그 유산을 계승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한국화(상황화) 작업이 없으면, 또 팬데믹과 같은 돌발 사태에 교회의 일상이 중단되면, 교회는 표류하고 암초를 만나 신앙이 파선될 수도 있다. 성장과 팽창의 야망으로 달리다가 파선하거나, 인도주의적 사업만 하다가 표류할 수도 있다. 교회가 7일 전체를 그리스도의 사랑에 강권함을 받아 지극히 작은 자를 찾아가서 친구가 되려는 동기를 가질 때, ‘어떻게’는 그 친구가 되는 과정에서 찾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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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장이 확증하는 그리스도의 신성
by Justin Dillehay
2020-05-27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성경 본문으로는 보통 요한복음 1장(“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1:1), 베드로후서 1장(“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 1:1) 정도가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이들보다 더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신성을 설명하는 본문은 히브리서 1장이라고 볼 수도 있다. 히브리서 1장은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천사와 비교하여 표현한 한 편의 장엄한 묵상이다. 천사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는 오늘날의 현대 복음주의 지성들에게 예수님과 천사가 어떻게 다른지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1세기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이 천사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가장 효과적인 방도였을 것이다. 히브리서 1장이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방식을 살펴보기 전에 이 놀라운 본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유용한 도구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예수님의 손(H.A.N.D.S.)로버트 바우만(Robert Bowman)과 에드 커머쇼우스키(Ed Komoszewski)의 탁월한 공저인 ‘Putting Jesus in His Place: The Case for the Deity of Christ’에서 저자들은 H.A.N.D.S.라는 머리글자를 사용하여 성경이 예수님의 신성을 증거하는 다섯 가지 방법을 기발한 방식으로 설명한다. H –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한 ‘영광’(Honors)을 공유하신다. A –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한 ‘속성’(Attributes)을 공유하신다. N –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한 ‘이름’(Names)을 공유하신다. D –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한 ‘사역’(Deeds)을 공유하신다. S – 예수님은 하나님과 영원한 ‘보좌’(Seat)에 함께 앉으신다.놀랍게도 히브리서 1장에는 이 다섯 가지에 해당하는 예들이 모두 등장한다. 위의 순서대로 하나씩 살펴보자. 1. 영광(Honors): 천사들이 경배하는 예수히브리서 1장 6절 “또 그가[하나님이]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은 그에게 경배할지어다 말씀하시며”는 이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다.성경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 한 분만이 홀로 경배를 받으신다는 것이다. 사탄이 예수님께 자신을 경배하라고 꾀었을 때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 4:10)고 응수하셨다. 경배는 하나님만 취하실 수 있는 영광이다. 성경은 결코 이를 양보하지 않는다. 예수님 역시, 사람들(마 14:33)과 타락한 천사들(빌 2:10) 그리고 거룩한 천사들(계 5:8–14)에 이르는 모든 이성(理性)적인 피조물들로부터 경배를 받으심으로 영광을 취하신다. 히브리서 1장 6절에 의하면 자신을 경배하라 명하시는 그 하나님이 천사들에게 예수님을 경배할 것을 명하신다. 천사들은 사람들이 자신을 경배하는 것을 경계했다. 요한계시록에서 사도 요한이 천사를 경배하려 하자 꾸짖는 장면이 두 번이나 나온다(계 19:10; 22:8–9). 이를 보면 천사들은 정말로 영광스럽고 강한 존재들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천사를 실제로 보게 된다면 우린 아마 사도 요한처럼 땅에 엎드려 그를 경배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천사는 우리 역시 꾸짖을 것이다. 천사들은 우리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촉구하나(계 19:10; 22:9), 하나님은 천사들에게 그의 아들을 경배하라 명하신다. 이를 보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다. 천사들이 예수님을 경배할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경배를 그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라 말씀하시지 않는다. 2. 속성(Attributes): 하나님의 변치 않는 영원한 형상 예수하나님의 속성이라 함은 성경이 말하는 바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그 완전성들(perfections)을 가리킨다. 어떤 속성들은 우리 인간과 공유하시나, 오로지 하나님께만 속한 속성들도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 한 분만이 영원하시고, 변치 않으시고, 전지하시며, 전능하시다. 하지만 히브리서 1장 10–12절에 의하면 성자 역시 변치 않으시고 영원하시다. “그것들은[땅과 하늘]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중략] 그것들은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주 여호와 외에 누가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말 3:6)라 하실 수 있을까? 예수님만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다. 더욱이 3절은 성자께서 진실로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공유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성자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고 묘사된다. 이러한 진술은 성부가 성자를 영원히 낳으신 바 되었다는 교리(the doctrine of the Son’s eternal generation)의 기반이다. 성자가 하나님이신 이유는 그가 ‘성부로부터 영원히’ 낳으신 바 되었기 때문이다. 성부는 누구로부터도 낳으신 바 되지 않았다. 하지만 성자는 성부의 정확한 형상으로 성부를 완벽하게 보여주신다. 성부와 성자는 모든 신적 속성을 공유하신다. 3. 이름(Names): 이스라엘의 주(Lord)요 하나님이신 예수구약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하나님의 이름 두 개가 히브리서 1장에서 예수님에 대하여 사용된다. 모두 시편 인용에서 나온다. 우선 “하나님”이 있다. 히브리어 구약에서 천사들을 일컬어 “하나님(들)”(gods, elohim)이라 표현하는 곳이 있긴 하지만(시 8:5; 히 2:7), 히브리서 1장 7–8절을 보면,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쓰인 표현이 전혀 아님을 알 수 있다.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으되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영하며 [후략]”(히 1:7–8)하나님에 대한 구약 말씀을 성자에게 적용하여 성자를 분명히 “하나님”이라 칭함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인용 구절에서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과 구별된다. 9절을 참조하라. 두 번째 이름은 “주”(Lord)다. 시편 45편을 인용하여 성자를 “하나님”이라 칭한 후 히브리서 저자는 즉시 시편 102편 25–27절을 인용한다.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히 1:10). 그리스어 텍스트에서는 큐리오스(kurios)로 되어 있는데, 이 단어는 칠십인역(the Septuagint)에서 하나님의 언약명인 히브리어 YHWH(야훼)를 번역할 때 주로 쓰였다. 수가 많지는 않지만 예수님을 “하나님”이라 칭하는 구절들만 봐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예수님을 “주”라 일컫는 숱한 본문들을 볼 때 우리는 더욱 놀라게 되는데, “주” (YHWH, 큐리오스)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가장 많이 쓰였기 때문이다. 혹시 “주”라 칭하는 예수님께서 여전히 성부 하나님보다 조금 덜 완전한 존재인 것처럼 느껴지는가? 그렇다면 아래에서 논할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생각해 보라. 4. 사역(Deeds): 창조주 예수성경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홀로 천지를 지으셨다고 말한다. 이사야 44장 24절에서 하나님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천사들은 하나님께서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욥 38:4) 그 자리에 있었으나, 창조자들이 아닌 그저 지켜보는 이들로서 또는 노래하는 자들로서(욥 38:7) 있었을 뿐이다.하지만 히브리서 1장은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2)고 함으로 성부께서 성자를 통해 창조 역사를 행하셨음을 분명히 한다. “태초에 [중략]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중략] 지으신 바라”(히 1:10)는 바로 성자 하나님의 역사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창세기 1장 1절은 예수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창조주가 되신다는 진술은 그분의 이름이 주(Lord)요 하나님이시라는(히 1:8, 10) 것과도 연결되고 그가 전능하시고 영원하시다는(히 1:11–12) 그의 속성과도 연결된다. 5. 보좌(Seats):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예수예수님이 천사들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밝히는 히브리서 저자의 마지막 논증은 13절에 나오는데, 저자는 시편 110편 1절을 인용한다.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느냐”이 질문에 대한 답은 “천사 중 아무에게도” 그리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들을 자기 우편에 앉으라 명하셨으나 천사 중 누구에게도 동일한 영예를 허락하지 않으셨다(비교: 계 3:21). 보좌로의 이 초청은 성자께서 이 땅에서의 삶을 통해 순종하신 것의 결과로 ‘역사 속에서’ 주어진 것이지만(히 1:4; 비교: 빌 2:9), 창조 이전부터 그분은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과 전혀 충돌하지 않는다(히 1:2–3). 우리가 보여야 할 반응필자가 말하고자 한 바는 모두 말했다. 예수님의 신성을 성경이 증거하는 다섯 가지 방식을 위에서 외우기 쉬운 머리글자로 정리해 보여주었는데, 그 내용이 히브리서 1장에 모두 나와 있다. 이 장을 마음 속에 담으라. 몰몬교도나 여호와의증인과 대화할 때 히브리서 1장을 사용하라. 당신을 위해 일하는 영(ministering angel, 히 1:14)인 천사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며 그 본체의 형상이신 분을 경배하고 있다. 그 경배에 동참하라.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How Hebrews 1 Hammers Home the Deity of Christ번역: 이정훈
복음
예수그리스도
성부
성자
베드로후서
영광
히브리서
섬기는영
그리스도인 남편이 꼭 해야 하는 기도
by Bobby Scott
2020-05-26
아내를 더 사랑하고 싶다면, 아내가 당신을 덜 사랑하도록 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아내가 당신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도록 말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마 10:37). 비록 분명하게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은 다른 모든 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남편과 아내도 이 내용에 포함시키고 있다.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내에게 2등이 되고 싶지는 않다. 나는 결혼 생활 내내 여섯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아내를 보면서, 또 사역에 헌신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면서 왠지 나만 뒷전에 밀리는 것 같은 질투심에 힘들어하곤 했다. 말하기 창피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내가 주님과 보내는 경건의 시간을 보면서도 질투심을 느꼈다. 결혼 기간 보다 목사로서 보낸 시간이 더 긴데도 불구하고(무려 26년이다!), 나의 이런 이기심은 왜 내가 아내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고, 당연히 최고의 우선 순위가 되어야 하는지, 끊임없이 그 이유를 찾아내는 데에 있어서 커다란 능력을 발휘했다. 젊은 남편들이여, 지금부터 말하려는 게 내가 지금까지 배운 것이고 또 지금도 배우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아내를 온전히 더 잘 사랑하기를 바라는 경건한 남편이라면, 아내가 당신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도록 도와야 한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시급하고 가장 중요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가장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 외에 다른 모든 것은 다 부차적일 뿐이다. 그 부차적인 일에는 남편을 향한 아내의 사랑도 포함되어 있다. 당신의 아내는 당신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당신도 그것을 원해야 한다. 왜 그런지 이유를 살펴보자.예수님은 더 나은 언약을 주신다결혼이라는 기적은 희생적 사랑이라는, 평생 지속되는 언약의 수단을 통해서 하나님이 한 남자를 한 여자와 묶어서 한 몸을 만드는 것이다(창 2:24).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이 하나로 만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고 하신다(마 19:5-6). 그런데 중생한 당신의 아내와 맺은 예수님의 언약은 그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이다. 예수님의 새로운 언약은 영원하다. 그 언약은 당신의 아내에게 훨씬 나은 미래를, 결코 나빠지지 않는 미래를 약속한다(계 21:3-5). 남편으로서 당신은 좋은 말씀을 가지고 아내를 위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내가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는 말씀, 바로 그 자체(the Word)다. 그는 새로운 언약에 기반하여 남편인 당신이 결코 할 수 없는, 아내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곤고하게 하신다(히 8:10). 아내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이어주는 고리는 남편이 아닌 예수님이다. 그것은 예수님이 당신의 아내를 위해서 희생하셨기 때문에, 즉 그분의 살이 찢기고 피를 흘리셨기 때문이다(눅 22:19-20).예수님은 아내의 필요를 아신다단순하지만 아름다운 결혼 반지를 아내에게 선물하기 위해서 나는 정말로 열심히 저축했다. 25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내는 그 반지를 소중하게 여긴다. 당신이 선물한 다른 많은 물건들과 더불어 당신의 아내도 결혼 반지를 소중히 여길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엄청난 희생을 하고 또 비싼 돈을 들여서 산 선물이라고 해도, 예수님의 선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선물은 도저히 잴 수도 없을 만큼 엄청난 축복을 아내에게 가져다 준다. 당신의 아내에게 영생의 선물을 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인간이 되셨다(요 10:27-28). 당신의 아내가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댓가를 지불하셨다(골 1:14). 당신 아내의 영생을 보장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다(고전 15:20-21). 예수님은 자신의 완전한 의를 당신의 아내에게 은혜로 부어주심으로, 그녀가 거룩한 아버지와 화해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셨다(고후 5:18,21). 예수님은 당신 아내의 굶주림을 채워주는 진정한 영생의 빵을 주신다(요 6:35). 당신 아내의 목마름을 해결하는 영생의 물을 주신다(요 4:13-15). 예수님은 자신이 상속받으신 모든 것을 당신의 아내와 함께 나누신다(엡 1:11). 남편인 당신이 주는 선물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선물은 더 좋고, 그 선물이야말로 당신의 아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다. 그는 대제사장이시다나는 아내를 위해 기도하기를 즐기고 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가 아내를 위한 나의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알기에 기뻐한다(요 14:13-14).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더 뛰어나다. 모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창조하신, 전지전능하고 영원하신 예수님은(골 1:16) 인간이 겪는 모든 것을 알기 위해서 인간이 되셨다(요 1:1, 14; 히 2:14). 하나님이자 인간으로서(골 2:9), 예수님은 당신의 아내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당신보다 더 정확하게 아신다. 예수님은 당신 아내의 약점을 이해하시고, 또 당신이나 나와는 비교도 안 되는 수준으로 아내의 약한 부분에 대해서 더 깊이 공감하신다(히 4:14-16).예수님은 당신 아내의 곁을 떠난 적이 없으시다. 예수님은 당신의 아내를 위해서 당신이 결코 할 수 없는 방법으로, 죽음까지 맛보는 놀라운 희생을 하셨다. 그리고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그는 당신의 아내를 위한 영원한 중보자가 되셨다. 50년이 지나도 아니, 셀 수 없는 영원의 시간이 지나도 예수님은 언제나 당신의 아내를 위해서 존재할 것이다(히 7:28). 예수님은 당신의 아내에게 당신보다 훨씬 더 나은 대제사장이다. 그렇기에 당신의 아내는 오직 예수님 안에서, 그녀의 참된 대제사장 안에서 기쁨을 누릴 때에만 진정으로 만족을 맛볼 수 있다. 그는 당신의 아내를 더 잘 사랑하고 더 잘 이끄신다하나님이 당신과 아내를 하나로 묶었을 때, 하나님은 당신을 가정의 머리로 만드셨다(엡 5:23; 출 18:25). 그렇기에 좋은 남편은 군림하는 태도가 아니라 희생하는 자세로, 또 아내의 필요를 자신의 필요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자세로 가정을 잘 지도해야 한다(마 20:25-27).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희생하는 리더다(요 13:14). 그는 양들을 위해 생명을 내어놓는 리더다. 그는 푸른 초장과 풍성한 물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아는 선한 목자다(시 23; 요 10:11). 그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존재다(요일 3:16). 예수님은 당신의 아내를 당신보다 먼저 사랑하셨고 또 당신이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하신다(요 15:13). 당신은 예수님이 주시는 넘치는 사랑 안에서 풍족함을 맛볼 때에만 아내를 제대로 사랑할 수 있는 연약한 존재다(요 15:5). 예수님은 더 뛰어난 리더다. 그의 희생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그의 지혜는 끝이 없고, 그의 능력은 무한하다. 그의 리더십은 사탄으로부터, 죽음으로부터 그리고 지옥으로부터 당신의 아내를 구원했다. 그렇기에 당신의 아내가 예수님을 진정 더 뛰어난 신랑으로 예배하도록 도우라.남편의 기도아내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면서 질투를 느낄 때, 당신이 아내로부터 뺏어가는 것이 무엇인지 잠시 생각해 보자. 그리고 아내가 예수님을 지속적으로 점점 더 사랑할 때, 당신보다 예수님을 더 간절히 원할 때 아내가 얻는 것이 무엇인지도 생각해 보자. 당신의 아내에게 필요한 존재는 오직 예수님이다.형제들이여, 여기에 축복이 있다. 당신의 아내로 하여금 예수님을 더 사랑하도록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윈-윈을 이루는 길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아내를 더 나은 부인으로 만드실 것이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아내를 보면서 나쁜 감정을 가지지 않도록 마음을 지키라(골 3:19).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을 질투하지 말라. 아내가 예수님을 더 사랑하도록 격려하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고 또 함께 즐거워하는, 진정한 선물을 아내에게 베풀도록 하라. 우리 모두 다 아내가 예수님을 더 많이 사랑하도록 함께 기도하도록 하자(시73:25–28).[아내가] 천국에서 당신 외에 누구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그녀가 당신 외에는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원하지 않게 하소서. 아내의 육체와 마음은 쇠하여질지라도, 그녀의 영혼은 강하게 하여 주시고주님이 그녀의 영원한 유업이 되게 하소서.하나님과 멀어진 사람들은 멸망할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에게 신실하지 않은 모든 이를 멸하셨습니다.하지만 당신에 대한 그녀의 친밀함이 그녀에게 선이 되게 하소서. 아내가 주 하나님을 자신의 피난처로 삼게 하소서. 그래서 아내가 당신의 모든 역사하심을 증거하게 하소서. 주님, 아내가 당신을 더 사랑하도록 복을 내려 주소서.그렇습니다. 남편인 나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May She Always Love Him More: The Prayer of Every Christian Husband번역: 무제
결혼
가정
부부관계
아내를위한기도
진정한남편
헛된질투
신랑되신예수님
가정에서 자녀와 함께 성경 읽는 법
by 박용기
2020-05-25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울의 2차 선교여행(행 15:40-18:22)의 특징은 한 가정을 통한 복음 전파다. 바울의 선교팀이 한 도시에 가면 먼저 회당으로 가서 복음을 전했고, 그 결과로 한 가정, 한 가정이 복음을 받아들였다. 데살로니가에서는 야손의 집(행 17:5, 롬 16:21), 고린도에서는 디도 유스도의 집(행 18:7)이 회당에서 전한 복음을 듣고 믿게 된 가정들이다.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전한 복음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는데(행 17:11), 이는 주중에 가정에서 구약성경을 통해서 확인했다는 의미다. 바울이 어떻게 구약 성경을 읽고 복음을 전했는지 데살로니가 회당(행 17:2-4)에서 사용한 네 단어, ‘강론하며’, ‘뜻을 풀어’, ‘증언하고’, ‘권함’을 통해서 알아보자. ‘강론’(reason, converse, discuss)은 대화식 성경 읽기다. 바울이 회당에서 말씀을 강론했다는 것은 성경을 읽고 함께 대화했다는 의미다. 이런 대화가 발전하면서 토론과 전문적 논쟁으로 이어진다. 신명기 6장에서 부모는 자녀에게 가정에서 “말씀을 강론”(신 6:7)해야 하는데 여기서 ‘강론’ 역시 성경 말씀을 주제로 부모와 자녀가 함께 대화한다는 의미다. 자녀와 성경을 읽고 본문을 주제로 질문을 하고 대답하는 대화 자체가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제자훈련이다. 성경을 읽고 강론할 때 브라이언 채플 목사가 소개한 창조, 타락, 구속, 회복(Creation, Fall, Redemption, and Restoration)이라는 큰 주제를 염두에 두고 대화하면 도움이 된다. 창조주 하나님과 그분의 통치하심에 대해서 자녀와 대화할 수 있다. 인간의 연약함과 부족함이 인간의 타락에서 왔으며 이러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자녀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성경은 자기 계발을 통해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부족하고 실패한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용서, 은혜를 보여 주는 책이다. 부모는 가정에서 자녀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 용서, 은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뜻을 풀어’(explain, open, interpret)와 ‘증언하고’(prove, demonstrate, point out)는 그리스도 중심적 성경 읽기다.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행 17:3). 바울은 구약 성경을 사용해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증거를 제시하고, 그 증거 말씀의 뜻을 풀어 주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눅 24:27)하셨는데, 이는 예수님도 그리스도 중심적 성경 읽기를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이다. 팀 켈러 목사도 구약의 이야기들이 진정으로 말하는 것은 구원자 예수님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교했다. “나는(예수님) 진정한 요셉이다. 감옥에 갇혔고 돈 받고 팔렸지만, 다시 일어나서 배반한 사람들을 구원한 진짜 요셉이다. 나는 진정한 다윗이다. 위기의 순간에서만 구원한 자가 아니라 인생의 값을 치르고 인생 전체를 구원한 자다. 나는 진정한 모세다. 나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완벽한 중재자다. 나는 진정한 요나다. 나는 신적 진노의 바다, 죄의 바다에 던져져서 구원자가 되었기 때문이다”(팀 켈러의 변증설교, 174쪽). 테드 트립(Tedd Tripp)도 자녀와 성경 읽기를 할 때 나누어야 하는 핵심은 “하나님은 누구신가?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한 일이 무엇인가? 성경책 페이지마다 나타나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말해주어야 한다.”라고 말했다(Instructing a Child’s Heart, 26쪽). 자녀에게 성경의 모든 본문이 예수님을 가리키고(point out), 보여주고(demonstrate) 있음을 알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 중심적 성경 읽기는,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서 한 일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게 된다는 복음적 성경 읽기를 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적 성경 읽기를 통해서 자녀에게 복음을 반복적으로 이야기 해주어야 한다.‘권함’(persuade)은 삶에 적용하는 성경 읽기다. 바울이 회당에서 성경을 ‘강론’하고 ‘뜻을 풀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한 목적은 성경 지식을 자랑하거나 지적 토론에서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다. 예수님을 믿고 새로운 삶을 살라는 ‘권함’을 위해서다. 성경은 교리적으로 완벽한 구원의 길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오늘 나의 삶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문제에 대해서 해답을 줄 수 있는 충분한 책이다. 노년의 바울은 젊은 디모데에게 성경 읽기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한다(딤후 3:17)고 했다. 어떻게 예수님이 오늘 우리 가정에서, 나의 삶에서 주인 되시고 왕이 되시는지를 자녀와 함께 나누고 적용하면서 성경을 읽어야 한다. 모던 시대에 교육을 받은 세대는 “내가 어릴 때는 말이야 … 나 때는 말이야 ….”라고 하면서 자신의 경험을 중요시했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교육을 받은 세대는 “너의 느낌이 중요해! 네가 하고 싶은 것이 중요해”라고 하면서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을 강조한다. 그러나 필자는 가정에서 부모와 함께 성경을 읽으며 자란 자녀는 시대를 초월해서 “성경에 따르면”, “오늘 본 성경에 의하면”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고 믿는다.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가장 먼저 가르쳐 주어야 하는 진리는 “열심히 노력해서 성공해라”, “고액 연봉을 받는 직업을 가져야 한다”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게 되는 은혜의 구원이다. 성경 읽기를 통해서 자녀가 자신의 노력이 아닌 예수님의 전적인 공로로 받게 되는 은혜의 구원을 깨닫게 된다면 평생 행복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가정
양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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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언채플
테드트립
팀켈러
가정예배
성경읽기
설교
카이퍼 통신 4: 미국형 칼빈주의를 극복하라
by 김은득
2020-05-24
한국 교회 성도 여러분, 제가 1898년 가을 뉴저지의 아름다운 한 신학교(Princeton Seminary)에서 세계관으로서의 칼빈주의를 주창할 때, 나름 예상할 만한 칼빈주의의 장밋빛 미래로 인해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프린스턴 신학교는 미국에서 가장 큰 신학교로서 훌륭한 교수진과 아름다운 건물들을 보유했고, 특히 수많은 장서와 새로운 신간들이 가득찬 도서관이 있었습니다. 제가 설립한 자유대학교보다도 더 많은 (외국) 학생들을 유입하고, 미국 내 정통 칼빈주의의 최후 보루의 역할을 넉넉히 해내는 곳이었습니다. 그런 프린스턴에서 칼빈주의를 강연할 때, 저는 그저 미국의 한 신학교가 아니라, 미국 전체를 대상으로 강연한다고 느꼈습니다. 아니, 저는 비저너리(Visionary)답게, 유럽에서 시작한 칼빈주의가 미국 전체를 너머 아시아로, 궁극적으로 전세계로 확장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더 잘 아시겠지만, 제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습니다. 오히려 “미국 칼빈주의에 장밋빛 미래는 없다(There is clearly no rosy future awaiting Calvinism in America)”고 단언한 제 후배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의 예상이 더 맞아 떨어졌습니다. 저와 달리, 왜 바빙크는 미국 칼빈주의에 대해 비관적이었을까요? 더욱이 미국의 경우는 청교도로 상징되는 칼빈주의가 자체 건국에 이념적 영향을 제공하지 않았습니까? 우선 제가 간과한 것은 1890년대 프린스턴신학교의 상황이었습니다. 1893년에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가 그랜드래피즈의 작은 신학교(Theological School in Grand Rapids,현재의 Calvin Theological Seminary)를 떠나 프린스턴의 새로운 성경신학 분과의 학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인간적으로 보스가 그 조그만 시골 신학교에서 온갖 격무에 시달리며,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것을 안타까워하던 차에 더 좋은 환경의 신학교로 옮기는 것을 매우 격려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프린스턴신학교 입장에서 보스의 임명은 찰스 브릭스(Charles A Briggs) 박사가 뉴욕의 유니온신학교(Union Seminary)에서 성경 신학을 조직 신학과 완전히 분리하면서 정통주의(특히, 프린스턴을 향해)를 공격하고 자유주의의 영향력을 극대화시키는 것에 대한 방어적 성격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반세기의 장로교 역사, 아니 더 나아가 미국 기독교 역사는 유니온의 공적 영향력을 보여줍니다. 미국의 공론장에서 유니온은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을 뿐만 아니라, 장로교단 내에서조차 프린스턴보다 더 광범위한 지지를 얻어냅니다. 20세기 초반 유니온의 공공성에 대해 물으신다면, 저는 폴 틸리히(Paul Tillich),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디트리히트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깁니다. 이런 프린스턴에서 유니온으로의 공적 권위의 이동은 이미 바빙크에게 보낸 보스의 개인적 서신에도 잘 드러납니다: “프린스턴에서 우린 투쟁 중이야. 그런데 어떤 승리를 이뤄낼지 확실치 않아. 가장 최악은 독일 신학과 역사비평주의가 미국의 모든 교단, 모든 신학 분과에서 강력하게 나타난다는 점이야. 심지어 브릭스의 극단적 경우에서조차 우리가 사람들을 설득하는데 애를 먹고 있으니 말이야.” 이런 면에서, 프린스턴에서 저를 스톤 강연(Stone Lectures)의 스피커로 초대한 것은 미국에서 점점 영향력을 잃어가는 프린스턴식 정통주의에 대한 변호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신학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영향력을 확대해 가고 있는 자유주의의 도전 앞에서 프린스턴을 변호하러 미국에 갔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미국 칼빈주의자들에게 자유주의자들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공공성을 회복하라고 도전하러 갔던 것입니다. 바로 세계관으로서의 칼빈주의를 통해 종교, 정치, 학문, 예술 등의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라고 말입니다. 무엇보다 프린스턴과 웨스트민스터로 대표되는 미국 개혁주의 신학교는 교리적 색채를 매우 강하게 띄는 소위 신앙고백적(confessional) 신학교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는 신앙고백적이라는 것은 단순히 신학과 교단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을 아우르는 것입니다. 칼 바르트(Karl Barth) 이후 현대신학에서 신앙고백적이라는 의미가 신학이나 교단 자체의 헌법조항에만 적용되는 것으로 축소되었지만, 사실 종교개혁가들, 특히 칼빈(Calvin)이 염두하고 17세기의 개혁신학자들이 생각한 신앙고백적(confessionalization)이라는 의미는 종교의 영역을 너머 개혁파 대학교(제네바대학교, 하이델베르크대학교, 레이든대학교 등)를 세우고, 개혁파 (도시) 국가(제네바, 취리히, 네덜란드 등)를 설립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정교가 분리된 사회고, 더이상 크리스텐덤은 불가능한데, 어떻게 그런 앙시앵레짐(ancien regime, 구체제)을 세우는 것이 가능하냐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제가 삶의 모든 영역을 아우르는 세계관으로서 칼빈주의를 강연할 때, 바로 포스트크리스텐덤(post-Christendom) 사회에서 기독교는 어떻게 공공성을 획득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을 담은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트뢸취(Ernst Troeltsch)를 인용하자면, 국가의 종교가 된 교회 모델(the church type)과 그 국가 종교에 속하지 못한 섹트 모델(the sect type)로 기독교 교회의 사회적 모델을 구분합니다. 교회 모델은 국가 내 공공성을 획득하는 강점과 달리, 교리적 순수함이 훼손될 수 있다면, 섹트 모델은 정반대로 교리적 순수함을 지키는 강점에 비해 공공성을 훼손시킬 수 있습니다. 사실 칼빈주의는 역사적으로 교회 모델을 취하였지만, 개혁파 국가에서 교리의 순수성을 지키면서도 공적인 역할을 충분히 감당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정통주의 교리 훼손을 근거로 국가 교회(Nederlandse Hervormde Kerk, NHK)와 분리하여 새로운 개혁파 교단을 세웠을 때, 대두된 비판이 섹터리안(Sectarian)으로서 공공성을 어떻게 획득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바로 이것이 세계관으로서의 칼빈주의를 주창한 이유인데, 충분히 교리적 순수함을 지키면서도 공공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종 미국에서는 용어나 개념, 혹은 현상들을 한 측면으로 축소 혹은 환원하여 강조하는 경향성을 보입니다. Evangelicals이라는 용어는 유럽에서 기독교인으로 통용되지만, 미국에서는 복음주의자로 축소 혹은 환원되어 사용됩니다. 마찬가지로 미국의 아브라함 카이퍼(American Abraham Kuyper)로 불리는 메이첸(J. Gresham Machen)은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설립식에서 제가 네덜란드에서 이룩한 성취를 웨스트민스터의 이상적 모델로 제시하면서 제 강연(Lectures on Calvinism)의 일부를 인용했습니다. 그러나 메이첸이 인용하면서 강조한 것은 모든 삶의 영역을 아우르는 세계관이 아니라 교리적 순수함을 위한 것입니다. 저와 바빙크의 뒤를 이어 교의학 교수가 된 헤프(V. Hepp)는 메이첸을 가리켜 “칼빈주의 세계관을 위한 전사(Warrior for the Calvinist Worldview)”로 지칭했는데, 실상은 세계관을 정통 교리로 축소 혹은 환원시켰던 셈입니다. 물론 메이첸과 웨스트민스터신학교는 그 비전에 걸맞게 정통 교리를 수호하는 워치독(watchdog)의 역할을 충분히 해냈고, 특히 한국 정통 칼빈주의자들에게 거의 독보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제가 설립한 자유대학교의 명칭이 교단과 정부와 관련해 자유롭다는 것을 강조했듯이,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역시 어떤 교단에도 속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교권의 간섭에서 자유로운 신학교를 지향했습니다. 특히 설립 당시의 교수진들, 대표적으로 반틸(Van Til), 카이퍼(R. B. Kuiper), 스톤하우스(N. B. Stonehouse)에서 보여지듯이, 웨스트민스터의 화란 커넥션과 지향성은 엄청났습니다. 무엇보다 메이첸과 저는 교회와 사회 전반에 만연한 현대주의(modernism)에 대항하여 새로운 교단과 학교를 세웠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와 다르게, 메이첸과 미국식 칼빈주의는 전형적인 섹터리안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공공성 획득은 고사하고, 교리적인 순수함을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계속된 분열과 갈등에 처하게 됐습니다. 메이첸은 먼저 개신교 세계에서 자유주의에 대항했고, 이후 미국장로교단(PCUSA)과 프린스턴신학교가 자유주의에 대해 충분히 전투적이지 않은 것에 실망하여 새로운 교단(Presbyterain Church in America, PCA)과 신학교를 설립합니다. 이런 분열적 사고방식은 메이첸의 후예들에게도 이어져, 이후 PCA교단은 메이첸과 궤를 같이 하는 5,549명의 멤버들로 이뤄진 OPC(Orthodox Presbyterian Church)교단과 분열됩니다. 제가 메이첸에게 인간적으로 아쉬운 면은 그가 너무나 전형적인 미국 남부 명문가(Southern aristocracy) 출신이라는 점입니다. 그는 당시 남부 귀족층에서 보여지는 “공격 아니면 죽음(attack and die)”의 철학을 공유했을 뿐만 아니라, 약간이라도 자신의 비전과 일치하지 않는 대상들과는 연대하지 않는 경향성을 보여줍니다. 반틸 이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이런 순혈주의 경향성은 더욱 강화됩니다. 바르트가 개혁주의자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쟁, 즉 바르트가 우리 편이냐 아니냐가 주된 신학적 관심사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반틸은 가장 탁월한 개혁주의 신학자인 바빙크조차 개혁교의학에 중세철학(대표적으로 로고스 이론)을 활용하기 때문에 충분히 성경적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개혁주의적이지도 않다고 비판합니다. 더 나아가 OPC교단은 자체의 모든 기준을 통과하지 못한 타교단과 신학교와는 어떤 공식적인 왕래, 심지어 서신 교환까지 거부합니다. 이것이 가져다 준 중요한 결과 중 하나가 OPC 50주년에 그 교단의 멤버가 겨우 19,422명이었다는 점입니다. 놀랍게도 메이첸이 웨스트민스터 설립식에서 인용한 제 칼빈주의 강연이 일종의 예언이 되어 버린 셈입니다: "개혁교회가 큰지 작은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직 건강한지 그리고 생명으로 빛나는지가 문제입니다."교리적 순수함만을 내세우며 신앙의 공공성을 멀리하는 것이 과연 건강한 교회의 모습일까요? 한국 교회 여러분, 제가 천국에서 메이첸과 반틸을 만나면 반드시 바빙크가 쓴 아티클인 <교회의 분열에 앞서: 기독교와 교회의 보편성에 대하여>를 선물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마도 메이첸이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설립식에서 기독교와 교회의 보편성(catholicity)에 대한 바빙크의 주장을 인용했다면, 미국 개혁주의의 역사는 확실히 지금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전개되었을 것입니다. 부디 한국 교회가 미국 칼빈주의의 과오를 그대로 밟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교회의 순결과 공공성이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여기는 분들이 있다면, 오해하지 마십시오. 바빙크가 위의 책에서 잘 제시해주었듯이, 기독교와 교회의 보편성, 즉 공공성은 성경이 주장하고 기독교의 역사가 지지하는 것으로 이에 대한 우리의 신앙고백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은 동일하게 천지를 만드신 창조주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에게서 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있고,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합니다(롬 11:36). 사도신경(The Apostles’ Creed)의 거룩한 공교회(the Holy Catholic Church)와 성도의 교제(the communion of saints)가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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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라비 재커라이어스와 그의 유산
by Alister McGrath
2020-05-22
라비 재커라이어스(1946-2020)는 기독교 변증학 분야에서 기념비적 공헌을 했다. 특히, 삶 속에서 복음과 지성을 연결시키는 일에 혼신을 기울여 왔기에 오래 기억될 것이다.재커라이어스는 암으로 2020년 5월 19일 주님 곁으로 떠났다.재커라이어스의 생애예전에 만드라스(Mandras)라고 알려졌던 인도의 도시 첸나이(Chennai)에서 태어난 재커라이어스는 '그리스도를 위한 청년'(Youth for Christ) 사역을 통해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서 전도에 대한 열정을 품게 된다. 1960년대 후반에 캐나다 온타리오로 이주한 재커라이어스는 복음 전도자 훈련을 받기 위해 ‘온타리오성경대학’(Ontario Bible College)에서 수학했다. 온타리오 남부 ‘캐나다기독교선교연맹’(The 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 in Canada)의 지역 전도자로서 활동하며, 트리니티복음주의신학교(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에서 노만 가이슬러(Norman Geisler)와 존 워윅 몽고메리(John Warwick Montgomery) 밑에서 목회학 석사과정을 이수했다. 이런 과정을 경험하면서 그는 미국 복음주의가 회의론자들과 지적 논쟁을 벌여 그들을 믿음으로 나아오게 할 만한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기독교선교연맹에서 안수를 받은 재커라이어스는 1980년부터 뉴욕 냑(Nyack)에 있는 ‘얼라이언스신학교’(Alliance Theological Seminary)에서 복음 전도와 현대사상 분야의 부교수로 섬기게 되었는데, 이 교단 신학교가 그를 임용한 일은 신학교로서는 큰 결정이었고, 재커라이어스 입장에서도 그것은 다음 세대를 책임질 목회자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맡은 직책은 많은 일을 해야 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전도 실습이나 회의적인 청중들에 대항하여 복음을 논증하는 데 필요한 변증 전략을 개발하는데 소홀하게 되어 그것이 늘 그를 무겁게 했다.1983년 암스테르담에서 개최된 전도자 집회에서 재커라이어스는 지적 변증가들, 특히 여론과 정책을 형성할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이 부르심을 향한 구체적이고 분명한 방법이 없어 안타까워하던 그에게 1984년 사업가 데이비드 데일(David Dale)을 통해 기대치 않던 상당한 재정이 지원된다. 그때 재커라이어스는 자신의 사역 비전을 실현할 ‘라비재커라이어스국제사역센터’(Ravi Zacharias International Ministries, RZIM)을 설립하게 된다. 현재 조지아 애틀랜타에 본부를 두고 있는 RZIM은 처음부터 사역의 핵심 목표를 신앙의 지적인 문제들, 곧 신자들을 괴롭히고 회의론자들이 복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문제들을 다루게 된다. RZIM의 표어는 몇 번 수정되었지만, 그 기본 원리는 동일하게 다음과 같다. “생각하는 자가 믿도록, 믿는 자가 생각하도록 돕는 것!”재커라이어스의 유산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생각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1980년대 주류 복음주의 접근법에서의 복음 전도 방법은 때때로 반지성주의로 보여졌으며, 이는 재커라이어스의 생각과는 거리가 있었다. 재커라이어스는 노만 가이슬러(Norman Geisler), C. S. 루이스(C. S. Lewis), 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와 같은 작가들의 책을 읽고, 삶 속에서 복음과 지성을 연결시키는 노력의 중요성 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적 배경의 청중들에 맞는 다양한 변증적 접근법을 개발하는 중요성에 대해서도 확신하게 되었다.이러한 그의 열정이 RZIM 사무소를 인도, 싱가폴, 남아프리카, 영국 등 세계 여러 지역에 세우는 배경이 되었다. 각 지역 활동은 일반적인 변증적 접근법과 목표를 공유하지만, 각 문화와 그것이 생성하는 독특한 도전과 기회에 민감하게 대응하고 있다.복음주의가 점차 복음의 공공성을 재발견하고 증명하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면서, 재커라이어스는 문화적, 정치적 여론 조성가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새로운 관심사의 대표적 주창자로 떠올랐다. 많은 사람들이 1992년 하버드대학교에서 열린 제1회 베리타스 포럼(Veritas Forum)을 변증학적 지형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온 지표로 꼽을 것이다. 재커라이어스를 포함한 기독교 작가들이 공개 토론 현장에서 복음의 합리성과 상관성을 변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RZIM은 지성적인 불신자들이 믿음에 관하여 제기하는 질문을 다루는 일련의 출판물을 내기 시작했는데, 그중 대다수는 재커라이어스 본인이 쓴 것이다. 초기 작업에는 ‘사람이 하나님이 없이 살 수 있는가’(Can Man Live Without God, 1994), ‘우리를 악에서 구하여 주옵소서: 붕괴하는 문화에 있는 영혼을 회복시키기’(Deliver Us From Evil: Restoring the Soul in a Disintegrating Culture, 1996) 등이 있다. 재커라이어스의 접근법이 가지는 의미는, 기독교가 한편으로는 이성적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삶의 중대한 질문에 대해 깊이 만족할 만한 실존적 대답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그 접근법의 성공으로 재커라이어스는 대화 형식을 탐구하게 되었고, 독자들은 그리스도와 고전 인물 또는 현대 문화의 인물과의 상상의 토론에 초대되었다. ‘인생: 예수와 부처의 위대한 대화'(The Lotus and the Cross: Jesus Talks with Buddha, 2001)와 ‘이성과 감성: 예수께서 오스카 와일드와 말씀하시다’(Sense and Sensuality: Jesus Talks with Oscar Wilde, 2002)가 그러한 시도들이다. 또 재커라이어스는 2004년에 ‘옥스포드 기독교변증센터’(The Oxford Centre for Christian Apologetics, OCCA)를 설립하고, 이 사역에 소명을 느낀 사람들을 위한 변증학 1년 과정을 제공했다. 이 기관의 주요 인사들로는 오스 기니스(Os Guinness)와 존 레녹스(John Lennox) 등이 있다. 2017년에는 대서양 기반의 변증학 훈련소인 ‘재커라이어스연구소’(The Zacharias Institute)를 시작했다. 왕성한 연설과 저작 사역에 더하여 라디오, TV, 인터넷 프로그램을 개발했으며, 특히 ‘내 백성이여 생각하라’(Let My People Think)는 라디오 프로그램은 전 세계적으로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재커라이어스는 다양한 변증적 접근법을 사용해 왔다. 앞서 가이슬러, 루이스, 쉐퍼의 중요성을 언급했는데, 여기에 G. K. 체스터턴(G. K. Chesterton)과 표도르 도스토옙스키(Fyodor Dostoyevsky)와 같은 작가들까지도 포함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재커라이어스를 단지 모방하는, 독창성이 없는 사람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그의 ‘3-4-5 격자(Grid)’는 그의 독특한 접근법의 좋은 예인데, 이것은 세계관의 합리적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그 실존적 중요성 또한 간과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단순히 세계관이 합리적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 낼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다.논쟁 가운데의 신실한 유산대부분의 다른 공인들처럼 재커라이어스도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청중들과 공통점을 찾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2004년 11월에는 솔트레이크시티(Salt Lake City)로 날아가 ‘누가 진리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변호하기’(Who Is the Truth? Defending Jesus Christ as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라는 주제로 몰몬교 교회에서 강의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 일로 몇몇 그의 지지자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재커라이어스는 그것이 복음을 위하여 틈을 만드는 일이라고 굳게 믿었다. 결국 그는 2014년 1월 그 몰몬교 교회에서 두 번째 강의를 진행했다.재커라이어스의 유산은 상당한데, 그것은 그의 영향을 전환점으로 지목하는 많은 여론 형성가들과 정책 입안자들, 그리고 RZIM의 광범위한 사역의 현장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Ravi Zacharias(1946–2020) and His Legacy번역: 강경원
목회
리더십
변증
RZIM
CS루이스
프란시스쉐퍼
노먼가이슬러
체스터턴
오스구니스
병상 침대에서 부활을 묵상하며
by Ravi Zacharias
2020-05-21
텍사스에 있는 병원에서 암치료를 받으며 이 글을 쓴다. 두 달 전 척추 수술 후에 나는 내 몸에 희귀암의 일종인 악성 종양이 있다는 놀라운 소식을 듣고, 현재 치료받고 있는 중이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나는 그동안 건강한 삶을 살아왔기에 이 소식은 충격적으로 다가왔다.나는 늘 부활절 메시지가 매우 강력한 힘이 있다고 믿어왔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더 강력하게 마음에 와닿는다. 부활은 모든 소망 중에서도 궁극적인 소망이며, 부활이야말로 소망의 궁극적 근거가 된다.병상에 누워서 육체적 차원이 영적 진리의 차원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해 보고 있는 중이다. 문자적으로 암은 문제가 되는 하나의 세포가 스스로 복제하여 생명을 주는 정상 세포를 하루하루 조금씩 더 점령해가며 죽음으로 몰고 가는 병이다. 이 현상이 창세기에 나오는 원죄의 이야기를 얼마나 잘 반영하고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우리 영혼의 대적이 ‘하나님이 참으로 그리 말씀하시더냐?”라고 아담과 하와를 미혹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의문을 갖게 만든 이야기 말이다. 아담과 하와가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음으로, 불순종과 반역이라는 암과 같은 세포가 온 인류를 점령하여 전이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이제, 우리는 문제가 있는 세포와 싸우기 위해 엄청난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데, 주로 두 가지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 하나는 문제를 일으키는 세포를 겨냥하여 방사선을 쏘는 치료법이며, 다른 하나는 화학요법으로, 캄캄한 곳에서 무차별 사격하듯이 나쁜 세포뿐만 아니라 좋은 세포까지도 죽이는 식의 약물 투여를 포함하는 융합적 치료법이다. 이 치료법들은 아마도 승리자가 패배자보다 더 많은 희생을 한 전투처럼 너무 많은 희생을 치르고 얻는 치료법이 될 수 있다.완전하신 하나님과 구세주우리가 하나님을 거역했을 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인간을 죄에서 구하기 위해서는 완전한 구세주가 필요했다. 흠이 없는 완전한 구세주가 필요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보내 그 완전한 구세주로 삼으셨다. 이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 한 생명 한 생명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 알게 해준다. 구속자가 올 것이며, 그는 영적 암의 운명을 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선지자들이 예언했다. 그리고 그 예언대로 예수님은 죽으셨지만,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승리자가 진정으로 승리를 했다. 하나님의 생명의 숨이 우리를 회복시켰다.바울 사도의 말처럼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라고 우리는 외칠 수 있다. 죄는 우리 안에서 암세포처럼 문제를 일으키지만, 예수님의 생명과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질서를 회복시켰다. 따라서 이번 부활절에도 기쁜 마음으로 축하하고, 죽음 가운데서 생명을 찾으려 하지 말자. 무덤은 승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활은 원죄를 궁극적으로 되돌려 놓는 궁극적 치유다. 예일대학교 교수 니콜라스 울터스토르프(Nicholas Wolterstorff)는 등반 사고로 아들을 잃었을 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전화 통화도 할 수 없고 서로 얼굴을 볼 수도 없다는 상실감과 지속적으로 솟구치는 그리움과 깊은 슬픔을 견뎌내고 나면, 우리가 이 모든 것들과 그 밖에 수많은 것들을 견디고 나면, 그 다음에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두 가지가 남는다. 그것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악함과 죽음이다.” 그것에 대한 해답은 치료의 광선을 발하셔서 불순종이라는 죽음의 세포를 다루시고 살아 있는 세포를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아들에게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진리인가! 얼마나 위대한 소망의 메시지인가! 부활절을 앞두고 있는 지금 십자가를 묵상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기뻐할 때 놀람과 경배로 나아가길 소망한다. 도시는 죽음의 냄새로 가득하다. 우리에겐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향기가 필요하다.세계적 변증가, 라비 재커라이어스 별세인도 출신의 세계적 기독교 변증가인 라비 재커라이어스가 19일(현지시각) 별세했다. 향년 74세. 재커라이어스는 지난 2월 척추 수술을 받은 뒤 엉치뼈에 악성 종양이 발견돼 치료를 받았다. 최근 병이 악화돼 지난 주 미국 애틀란타 자택으로 돌아와 마지막 삶을 준비해왔다.재커라이어스는 비교종교학과 컬트, 철학 분야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기독교계의 석학으로, C. S. 루이스 이후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다. 자신이 설립한 라비재커라이어스국제사역센터(RZIM)를 통해 전세계 70여개 국에서 기독교 변증 강연을 해왔으며 페이스북 등 SNS로 활발하게 정보와 메시지를 공유했다.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인 ‘내 백성이여 생각하라(Let my people think)’는 전세계 1500개 방송국에서 방송됐다. 대표작 ‘진리를 갈망하다’를 비롯해 ‘위대한 장인’ ‘오직 예수’ ‘믿음의 이유’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을 누가 만들었을까’ ‘이성의 끝에서 믿음을 찾다’ 등의 저서가 있다. 그는 2016년과 2019년 두 차례 한국을 방문해 강연회를 가진 바 있다.본 아티클은 그가 병마와 싸우던 지난 부활절에 병상에서 쓴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Ravi Zacharias: Easter Reflections from My Hospital Bed번역: 정은심
기독교변증
건강
재커라이어스
변증가
희귀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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