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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을 때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
by David Mathis
2019-09-30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성령은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신다. 성령은 우리가 읽는 말씀 위에 머물며,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우리를 감화시키고, 마음을 조명하며, 삶의 방향을 바꾸실 준비를 하고 계신다(요 16:14). 성령은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보고 생각하며 느끼는 평범한 행위를 초월적인 일로 만드신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이 우리의 눈과 마음과 가슴을 사용해 주시기를 기도하지 않고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기도는 대화이지만, 우리가 시작하는 대화는 아니다. 하나님이 먼저 말씀하시는 대화이다. 하나님은 성경 안에서, 개인 안에서, 그리고 아들의 사역 안에서 말씀하신다. 그 다음, 경이롭게도, 그분은 말씀을 멈추고, 우리의 간구를 경청하기 위하여 귀를 기울이신다. 기도는 매우 훌륭한 영적 교제의 도구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주목하고 있으면, 그분도 우리에게 귀 기울이신다. 그러면 우리는 성경을 읽기 위하여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기도하도록 돕는 네 개의 성경 구절을 살펴보자. 1. 눈을 열어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 하나님께 우리의 영적 눈을 열어 달라고 기도하라. 그분의 도움 없이는, 우리는 단지 보이는 것만 볼 수 있는 ‘자연적인’ 사람일 뿐이다. 그러므로 놀라운 것을 볼 수 있도록 영적 눈을 열어 달라고 간구하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보아도 보지 못하며”라는 말씀은 성령의 조명 없이 그분과 그분의 가르침을 자연적 눈으로만 보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마 13:13). 이것이 바울이 크리스천들을 위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엡 1:17-18)라고 기도한 이유이다.시편 기자와 함께 영적 안목을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경이로운 것을 보는 은사를 위하여 기도하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높이기 원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을 따듯하고 부드럽게 하여, 마음이 냉담해지지 않고 유혹에 넘어지지 않도록 저항할 수 있는 힘을 주시기를 기도하라. 2.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눅 18:38)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맹인처럼,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눅 18:38)라고 기도하라. 우리가 이생에서 사는 한, 죄는 우리가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모든 일을 방해한다. 우리는 친구들과 가족을 매일 실망시킨다. 그리고 하나님도 실망시킨다.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마 18:13)라고 외치며, 하나님의 말씀을 여는 일에 겸손하며 상하고 가난한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 성경 읽기는 우리의 실패를 회개하게 하고 그분의 은혜를 새로이 경험하도록 돕는다.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에 사로잡혀 겸손의 마음을 키우도록 돕는다. 3.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약 1:22) 하나님께서 당신의 눈을 열어 놀라운 것을 보게 해 주시기를, 그분의 충만한 은혜를 기억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라. 이러한 기도는 당신의 삶에 진정한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이다. 말씀의 씨가 마음의 밭에 심겨 다른 사람을 희생적으로 사랑하는 구체적인 행위로 나타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 그래서 실제로 눈에 보이는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말이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2). 성경 본문에서 인위적으로 어떤 의미를 찾아내서 적용하려 하지 말고, 이 말씀이 당신의 실제 삶을 형성하고 영향을 미치며 방향을 설정하도록 기도하라. 말씀을 홀로 읽고 연구하는 데 시간을 투자한다는 이유로 실제의 삶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 말고, 더 확실히 사랑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라. 4. 내 눈이 예수님께 열리게 하소서(눅 24:45)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놀라운 것을 더 구체적으로 보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은 성경 속에 놀라운 산맥처럼 우뚝 서 있지만, 그 놀라움의 정점이며 가장 장엄한 풍경은 그분의 아들의 인격과 사역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직접 가르쳐 주셨듯이, 그분은 모든 성경 본문의 의미를 풀 수 있는 핵심 열쇠이다. 첫째,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고]”(눅 24:27), 그다음 제자들에게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눅 24:44)라고 가르치셨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셨다]”(눅 24:45).성경 읽기와 공부의 목표는 예수님을 알고 기뻐하는 데 있다. 다가올 천국을 지금 맛보는 기쁨을 얻기 위함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예수님을 아는 것이 곧 성경 공부의 방향과 목적이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 6:3). 이것은 우리 영혼의 큰 갈망을 형성한다.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빌 3:8). 마음의 눈을 열어 예수님을 계속 찾으라. 본문이 예수님의 인격 및 사역과 어떻게 관련있는지 알아내는 것이 성경 읽기의 핵심이다. 그 다음 그것이 나와 내 삶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다. 이 목적을 이룰 수 있을 때까지 계속 찾고 묵상하라.이 모든 일에 하나님의 지속적인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한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Four Prayers for Bible Reading번역: 정은심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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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기자
진정한변화
말씀의씨
마음밭
예수님의 아름다운 눈물
by Makoto Fujimura
2019-09-28
요한복음 11장의 예수님이 우시는 장면은 매우 인상 깊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과 이를 슬퍼하는 마리아와 막달라로 인해 깊은 슬픔을 느낀다. 예수님의 눈물은 진실과 선과 아름다움의 구체화된 표현이다. 예수님은 왜 우셨을까?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요 11:4)고 예수님은 베다니에 가기를 연기하셨고, 도착해서는 마르다에게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25절)이라고 알려주셨다. 만일 그분이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하여 베다니에 왔다면, 그가 정말로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는 능력이 있는 메시아가 사실이라면, 죽음과 나사로의 질병의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으셨을 것인데 왜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까? 그랬으면 모두가 바로 기뻐했을 거고 모든 눈물은 필요없었을텐데 말이다. 기적을 행할 능력이 있다면, 굳이 눈물은 헛되고 필요없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능력을 사용하시는 대신, 스스로 취약해지는 것을 택하시고, 죽음의 아픔을 느끼셨다. 소망을 갖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몸소 행하셨다. 눈물을 흘리신 후에, 예수님은 “나사로야 나오라”(43절)고 선언하셨다. 나사로는 무덤에서 비틀거리며 나왔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일 모의를 했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한 자신의 행로를 계속 가시게 되었다. 예수님의 눈물은 주님에 대한 마리아의 관점을 변화시켰다. 예수님의 눈물은 굳어진 베다니의 땅을 흠뻑 적시면서 마리아의 눈물과 함께 했다. 이 사건으로 예수님은 자신이 구세주일뿐만 아니라 친밀한 친구도 되신다는 사실을 증명하셨다. 사람의 아들과의 깊은 우정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다. 요한은 이 부분을 주목했다. 고대 일본인들에게 아름다움은 순간적인 것을 성스러운 것과 함께 연결시키는 개념이었다. 벚꽃은 꽃잎이 떨어지기 때문에 더 아름답고, 그 감격은 일본인들에게 도덕성을 생각하게 한다. 하카나이 비(순간적 아름다움)는 슬픔을 의미하지만, 생명에 대한 연민에서, 일본인들은 심오한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야스나리 카와바타(Yasunari Kawabata)는 전후 작가인 류노스케 아쿠타가(Ryunosuke Akutagawa)가 자살 전에 쓴 유서의 한 부분을 인용하여, “하지만 자연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의 맨 마지막 상황이 내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Japan, the Beautiful, and Myself)라고 말했다. 카와바타도 몇 년 뒤에 자살을 했다. 일본인들에게 아름다움을 감지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죽음과 연결된, 매우 비극적인 것이다. 예수님의 눈물도 순간적이며 아름다웠다. 그분의 눈물은 우리에게 우시는 구세주로 계속 기억하게 한다. 하지만 예수님의 눈물은 절망이 아니라 부활의 위대한 소망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자살이 아닌 풍성한 생명으로 인도한다. 마리아는 나중에 자기의 가장 중요한 보물을 가지고 예수님께 달려감으로 그분의 눈물에 보답했다. 그녀는 제자들이 모여 있는 방 안으로 파고 들어가서, 자신의 결혼식에 사용하기 위하여 보관하고 있었던, 일 년 임금에 해당하는 지극히 비싼 순전한 나드 향유를 깨뜨렸다. 그녀는 예수님의 눈물에서 직감적으로 그분이 기적을 행할 때마다 자신의 희생적 죽음에 한 걸음 다가가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직접적이고 직감적이지만 의도적이며 헌신적인 행위로 응답해야 했다. 유다를 비롯한 제자들은 그녀의 행위를 책망했지만, 예수님은 그녀를 칭찬했다.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중략]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막 14:6-9).예수님의 눈물은 마리아의 희생의 행위, 즉 베다니의 방 안에서 퍼진 나드 향으로 이어졌다. 거기에서 한 여인의 헌신은 그리스도의 향기, 즉 복음의 실재가 단절된 세계 속으로 불어 넣어져, 고통으로 깨진 곳을 채워넣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능하게 했다.예수님의 눈물과 마리아의 나드와 같이, 예술은 삶의 깊이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일 수 있지만, 그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단순한 그들의 삶을 장식하는 여가와 같은 ‘부수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쇼팽의 소나타를 연주할 수 있게 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할까? 큰 무대에 서야 하는 무용수가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연습을 해야 할까? 많은 사람들이 부수적이고 낭비가 심하다고 여기는 삶이 어쩌면 우리 인간성을 정의하게 될 수도 있다. 그날 저녁 베다니에서 마리아가 엎지른 나드향 속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이 있었고, 공기 중에 요한 세바스찬 바하의 칸타타가 흘렀다. 감사하게도 큐레이터이며 화가인 제임스 일레인의 이러한 표현과 관찰은 실로 대단하다. 모든 창조적 행위는 직간접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에 대해 즉각적으로 드리는 보답이다. 우리는 이러한 직감을 왜곡시켜서 죄악되고 해로운 것을 만들 수도 있지만, 이러한 창조적 충동은 창조주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눈물을 흘리셨다. 유다는 마리아의 행위에 화를 내고 이 향유를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도 있었겠다고 주장하며 그녀를 책망했다(막 14:5). 실용주의와 율법주의, 그리고 탐욕은 순간적 아름다움의 힘을 이해할 수 없다. 아름다움의 반대는 추함이 아니라, 율법주의이다. 율법주의는 천천히 영혼을 옥죄이는 경직된 결정론이다. 율법주의는 우리의 고통에 대해 실용적 대답을 하려 함으로 상처를 입힌다. 그것은 나드를 주님의 발에 흘리지 못하도록 금함으로 생명력을 빼앗아가 버린다. 마리아처럼, 예술가들은 직감적으로 생산해 내고, 억압된 것을 깨뜨려 열 수 있다. 교회 안팎에서,실용주의와 율법주의는 순간적이지만 성스럽고 영원한 아름다움을 우리가 알고 누리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예술가들은 창조를 위하여 예수님의 눈물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눈물을 이해해야만 한다. 마리아와 예수님처럼, 예술가들은 가난한 자들의 고통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율법주의자의 책망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나누어 주는 행위는 우리에게 넘치게 베푸시는 하나님께 우리가 단지 기쁨으로 보답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넘친다거나 낭비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가장 필요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넘치도록 베푸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넘치게 베푸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믿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다. 내가 보기에 모든 예술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향기를 퍼뜨린다. 예술은 마리아의 나드처럼 ‘깨끗하다’라고 여겨지는 곳에 스며든다. 그러한 예술은 진정으로 마리아의 헌신처럼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동시에 유다의 책망처럼 진정으로 해로운 것이 무엇인지 드러낸다. 카와바타처럼, 예술가들은 또한 절망하기 쉽다. 율법주의와 절망은 둘 다 악마가 사용하는 도구이다. 자살은 이 두 행로의 종착점이다.나는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기 위해 미네랄 재료를 섞으면서 시간을 보낸다. 나는 페인팅이라는 행위로 은혜를 추구한다. 내가 사용하는 미네랄 물감은 엄청나게 비싸다. 금, 플래티넘, 은, 희귀한 종이와 실크, 그리고 백년이나 된 수미 잉크 등 모두 내 작품을 만드는 재료가 된다. 나는 스스로 마리아와 같이 되기를 생각해 본다. 그리고 예수님의 눈물을 떠올려 본다. 그리스도는 위대한 예술가이다. 아마도 그분이 마리아 안에서 본 것은 작은 예술가였을 것이다. 그분의 위대한 희생을 모방하고 따라하는 작은 예술가의 모습 말이다.마리아는 감사로 전율하며, 왕이 기름부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이러한 사랑의 헌신으로 문화적 규범을 깨뜨렸다. 이 행동으로 그녀는 신비의 순간을 열었다. 그녀의 나드는 흘러넘쳤고, 그 향기는 그 방을 가득 채웠다. 그것은 그녀가 미처 ‘예술’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매우 순간적인 행동이었다. 나는 그녀도 자신의 순간적인 행동이 영원한 유산으로 남아 기억될 것이라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놀랐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될 때마다” 마리아가 한 이 행동이 기억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아마도 우리는 이 확실한 선언의 결과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마리아의 나드 향기를 담은 그 복음이 영원히 기억되도록 우리가 사역을 하고 있는가? 마침내 도래할 우주적 결혼식을 준비하기 위하여 우리가 아름답고 넘치게 나눠줄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Beautiful Tears번역: 정은심
복음
예수그리스도
아름다운눈물
요한복음11장
부활
생명
십자가
마리아
기독교 신학은 가정을 구할 수 있는가?
by Ryan Hoselton
2019-09-27
최근에 나는 아내와 함께 결혼식 전 마지막 토요일 저녁을 함께 보낸 식당에 찾아갔다. 자리를 잡은 우리는, 16개월 전 여행을 계획하면서 서투른 발음으로 프랑스 음식을 주문하고, 또 앞으로 만들어 갈 가정을 꿈꾸며 앉아 있었던 건너편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그날 저녁 바에 앉아서 우리의 대화를 듣던 한 중년 부부가 자신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건넸던 충고가 기억났다. “정말 멋지군, 당신 두 사람 그렇게 사랑에 빠져 있는 걸 보니,” 약간 취한 남자가 말했다. 그러자, “결혼식만은 꼭 성대하게 하세요”라며 부인이 끼어들었다. “결혼식 이후 모든 건 다 바닥을 향해서 내려갈 테니까요.” 부인의 냉소적인 말투와 환상에서 완전히 깨어난 눈빛은 그 남편의 말을 의미 없게 만들었다. 악마는 집 바로 옆에 있다가정을 망쳐 버릴 수 있는 기회가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을,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바로 깨달았다. 네덜란드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1854-1921)는 “악마의 무리 전체가 가정을 망치기 위해 애워싸고 있다”라고, 시간을 초월한 고전, ‘기독교인 가정’(The Christian Family)에서 말했다. 바빙크는 또한 가정의 행복을 파괴하는 몇 가지 악마의 계략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남편의 외도, 아내의 고집, 자녀의 불순종, 여성 숭배와 여성 경멸, 폭정과 노예로 부리는 것, 남성 유혹과 남성 증오, 자녀를 우상으로 숭배하는 것과 자녀를 살해하는 것. 성적 부도덕, 인신매매, 첩질, 중혼, 일부다처, 일처다부, 간음, 이혼, 근친상간. 남자가 남자와, 여자가 여자와 성관계를 맺는 부자연스러운 죄 [중략] 불순한 생각, 말, 이미지에 의한 욕망의 자극 [중략]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 나체를 갈망하고 육체를 향한 열정을 고취하는 것."바빙크는 이렇게 말했다. “결혼의 기쁨이 사라졌을 때, 결혼 생활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단조로움으로 전락한다.” 가정은 실패한 프로젝트인가“지금의 시대처럼 가족이 심각한 위기에 처했을 때는 단 한 번도 없었다”라고 바빙크는 선언했다. 그가 살던 시대의 과학자들은 가족의 기원과 본질을 자연주의적 설명에 근거해서 축소하려고 시도했다. 그들은 일부일처제와 정절 그리고 자녀 양육에는 도덕적으로 정당한 또는 신성한 기초가 없다고 주장했다. 가정의 유용성을 결정하는 주체는 과학이었고, 과학은 가정을 현대인에게는 너무도 큰 결함을 가진 제도로 판단했다. 지식인들은 제안하기를, 결혼은 자유로운 사랑으로, 가족의 유대는 사회적 사교로, 또 자녀 양육은 과학적 양육 방법으로 대체하자고 했다. 그뿐 아니라, 바빙크는 예술적 표현의 변화가 보이지 않게 가족을 전복시키고 있음을 발견하고는 이렇게 말했다."오늘날 사실주의(realism)는 예술의 주류가 되었다. [중략] 예술가는 결혼식과 결혼 후의 인생을 묘사하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데, 결혼을 거대한 실망으로, 한마디로 참을 수 없는 동거로 또 비극과 고통으로 점철된 처참한 상황으로 그려 낸다. 죄악된 열정, 금지된 애정, 부자연스러운 정욕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시가 사용된다. 결혼 속 사랑과 정절이 사라진 자리에서, 이런 표현들은 영광스럽게 취급되고 또 번쩍거림으로 넘쳐난다." 가정에게 이상적인 세대는 여태 없었고 오늘날도 당연히 그런 시대는 아니다. 음악상 시상식에서부터 우디 알렌(Woody Allen)의 영화에 이르기까지, 대중문화는 가정을 향해 결코 친절한 미소를 보내지 않는다. 더욱이 재정적 성공에 대한 굶주림은 기존의 많은 가족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혔고, 또 새로운 가족을 만들고 싶은 동기 부여마저 현저하게 감소시켰다. 타임지가 실은 ‘2013년 결혼에 대해 배운 톱 10’ 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사돈에게는 우리를 증오할 진화론적 이유가 있다”, “낮은 비율의 이혼은 드라마 속에서나 가능하다”, “동성 결혼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 이 리스트의 1위는 바로 이것이다. “가족의 정의를 정확히 내리려고 애쓰다 보면 현기증을 느낄 수 있다.” 정말로 어지럽다. 정말로 가족이라는 제도 자체에 문제가 있는 걸까? 가족이라는 제도를 완전히 포기한다면 과연 세상이 더 나아질까?가정 신학에 대한 요구바빙크는 기독교 신학만이 그가 살던 시대와 또 지금의 시대를 사는 가족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기독교인은 시대정신에 떠밀려 행동하는 대신 하나님의 명령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리고 말과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이 가정이라는 선물을 통하여 인류에게 어떤 축복을 허락하셨는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바빙크의 통찰을 바탕으로 뽑아낸 다음 몇 가지 포인트는 가정 신학에 꼭 필요한 기초를 제공한다. 1. 하나님은 가정을 선하고 아름답게 창조하셨다하나님이야말로 가장 헌신적인 가정 옹호론자이다. “인류의 역사는 결혼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결혼식의 주례자는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은 아담을 위한 선물로 함께 할 파트너를 만들었고, 그 부부에게 축복을 주었으며, 자신의 형상을 지니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족을 번성시키라고, 또 땅을 정복하라고 명령하셨다(창 1:28). 바빙크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예술 작품은 가정과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졌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안에서 이뤄지는 관계적인 사랑을 반영하도록 인간을 창조하셨고, 바로 그 목적을 위한 최고의 도구로 가정을 만드셨다. 2. 죄는 가정을 황폐화시킨다아담과 하와가 처음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했을 때, 그들은 단지 “개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남편과 아내로 또 아버지와 어머니로서” 죄를 지었다. 죄는 가정에 치명적인 타격을 준다. 죄는 “아담과 하와 사이의 불일치”를 불러 일으켰고, “가인의 마음을 아벨에 대한 증오로 채우고 형제를 죽이도록” 만들었으며, “라멕을 일부다처제로” 이끌었다. 죄는 건강한 관계를 독으로 채운다. 가장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이어서 배우자, 부모, 자녀들, 형제자매 및 이웃과의 관계를 망치도록 한다. 3. 그리스도는 가정에 희망과 큰 계획을 제공한다인간의 타락 이후, 하나님은 하와에게 그녀의 후손이 사탄을 정복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창 3:15). 바빙크는 이렇게 썼다. “그녀에게서 태어난 아들로 인해서, 여자와 남자는 다시금 그들을 향한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천국의 아버지와 지상에 있는 그분의 가족에게 죄를 짓지 않는 유일한 인간이다. 인간의 죄를 위한 그분의 죽음은 우리의 지상 가족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의 용서 및 화해를 가능하게 했다. 바빙크는 다음과 같은 희망의 말로 그의 책을 결론맺었다. “인류의 역사”는 “결혼식, 즉 그리스도와 교회의 결혼식 그리고 천국의 주님과 그분이 택하신 땅의 신부의 결혼식”으로 끝난다.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정은 의미, 목적, 그리고 희망을 찾을 수 있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Can Christian Theology Save the Family?번역: 무제
가정
악마
기독교신학
바빙크
창조
죄
그리스도
단기 선교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by Ramon Lull
2019-09-26
단기 ‘선교’ 여행이 선교의 대의를 실제로 돕고 있는가?‘선교’라는 말은 전도된 크리스천들이 미전도된 사람들(Unreached People Group)과 복음을 나누는 과정을 의미한다. 물론 언어를 배워야 하고 문화를 이해해야 하는 것을 포함한다. 언어를 습득하고 문화를 이해하려면 여러 해, 혹은 수십 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며칠이나 몇 주로 가능하지 않다. 이는 선교가 효과적이려면 처음부터 장기 선교로 수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러면, ‘단기 선교 여행’(Short-Term Mission Trip)이 유행처럼 이루어지고 있는 요즘, 단기 선교 여행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우선 이를 정의해 보면, 단기 선교 여행은 선교를 위하여 보통 두세 주 미만으로 외국에 있는 선교지를 다녀오는 것이다. 내가 이 정의를 사용하는 이유는 그것이 합리적이어서가 아니라, 20세기 후반 이래로 교계에서 가장 폭넓게 공유하고 있는 묘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선 정의에 따르자면, ‘단기’ 선교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3주간의 방문으로 언어를 배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문화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러한 단기 여행이 선교라는 대의를 전혀 지지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문제는 교회가 선교지를 위하여 실행하고 있는 장기 선교 목표와 관련하여 단기 여행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우리는 지금 가볍게 가는 휴가 여행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수천 번의 여행, 수억 원의 돈, 그리고 그 수가 알려지지 않은 미전도된 영혼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선교 모델을 찾기 위해서, 특히 높은 위험이 있는 경우, 성경에 나온 예를 통해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선교사를 격려할 사역자 보내기“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중략]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빌 2:25, 29-30).이 글은 바울이 빌립보 사람들에게 보낸 서신으로, 빌립보 교회가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선교사(바울)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여 준 것에 대해 감사하는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서 단기 사역의 훌륭한 모델인 에바브로디도의 사역을 엿볼 수 있다.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에 대한 교회의 사랑을 전달하는 사자가 되고, 정서적이고 신체적인 필요를 돌봐 주는 목회자가 됨으로써 교회와 선교라는 대의를 섬겼다(빌 2:25). 그의 ‘단기’적 노력은 가장 효과적인 선교 도구인 장기 선교사들을 지원함으로써 선교의 대의를 진전시켰다. 에바브로디도를 바라보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여러 가지 있다. 1) 그의 팀은 아주 작았다. 홀로 여행하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한 팀이 10명 내지 20명 이상인 경우 정말 도움이 될까? 일반적으로 생각해 보자. 당신이라면 한두 주 동안 당신의 집에 10-20명 가량의 사람들을 머물게 할 수 있겠는가? 모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서 모든 생활 물품의 결핍을 느끼고 있는 선교사에게 그런 일이 어떻게 다가오겠는가?2) 에바브로디도는 사업을 하거나 그 밖의 다른 일을 하려고 가지 않았다(예를 들어, 그가 지붕을 이는 일에 전문가이든 아니든, 그는 고아원의 지붕을 올리는 일을 하러 간 것이 아니다). 3) 그는 큰 경험의 기회를 주려고 학교에 다니는 어린 자녀를 데리고 가지 않았다. 너무 어린 아이는 사역에 공헌을 할 수 있기보다는 많은 자원을 낭비하게 할 뿐이다. 4) 그는 바울에게 ‘교회’를 가져다 주었다. 모국의 교회에서 크리스천들은 항상 친교를 나눌 수 있고, 매주 예배와 소그룹 모임을 통해 새롭게 된다. 하지만, 장기 선교사들은 다른 신자들을 만날 수 있는 이와 같은 종류의 모임을 가지지 못한다. 따라서 에바브로디도 같은 단기 방문자들은 선교사들에게 큰 격려가 될 수 있다. 실제로 거의 짐을 싸려고 할 만큼 용기를 잃은 장기 선교사들은 단기 방문자들을 통해 신선함과 격려를 받고 있다고 증언을 하고 있다. 지속적인 직업 교육 공급하기선교의 목적은 1세기 이래로 바뀌지 않았지만, 전략은 바뀌었다. 한편, 휴가와 산업 환경 및 서비스 분야는 해를 거듭하며 발달하고 있다. 당신 자신의 휴가나 사업 환경을 한번 생각해 보라. 10-20명 가량의 사람들이 휴가를 내고 한 팀이 되어 한 주 동안 당신의 일을 도울 목적으로 당신의 직장에 온다고 말이다. 아마도 당신은 그들의 손길이 당신의 일에 도움이 될 거라고 거의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 팀은 당신의 동료나 소비자들의 언어로 소통하지도 못하고, 다른 문화권에서 왔기 때문에 당신의 직장 문화도 전혀 모른다. 그런데 그 팀이 당신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겠는가? 사역자 팀의 방문 목적이 전형적인 휴가나 사업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선교사들에게 도움이 되겠는가?사실, 단기 선교 팀이 몇 주 동안 방문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사역은 선교사들에게 지속적인 직업 교육(Continuing Vocational Education)을 제공하는 것일 수 있다. 보통 많은 전문직 종사자들은 특정한 영역의 사람들이 같은 영역에서 일하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세미나나 컨퍼런스와 같은 모임에 참여하여 전문성을 함양하고 있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지역적으로나 재정적으로 이런 전문적인 가르침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다. 많은 선교사들이 전문 지식과 자원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기 때문에, CVE 여행은 강사가 산업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혜택이 될 수 있다. 그들은 단지 다른 사람들을 훈련시킬 수 있는 훈련을 스스로 충분히 받기만 하면 된다. 이런 부류의 직업 교육은 급여를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 예를 들어, 자녀를 집에서 교육시키는 부모를 지원하는 컨퍼런스도 있다. 교육이나 학력 평가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가진 에바브로디도 같은 자원봉사자 두 명이 방문을 했다고 가정하면,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서 자녀를 홈스쿨링하고 있는 엄마에게 얼마나 격려가 되겠는가? 그와 같은 집중적이며 사려 깊은 방문이 선교 현장에서 한 해만 더 이어진다면, 한 주간의 단기 선교를 52번 나가는 것보다 선교의 대의를 위해서 훨씬 가치있을 수 있다(그리고 자원을 훨씬 더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일 수 있다). 결론선교는 복음을 가지고 미전도된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과정이다. 그것은 집중적인 언어 학습, 문화 연구, 관계 형성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단기 선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모든 선교는 그 나라에 얼마나 오래 실제로 머무느냐와 상관없이 장기 선교이다. 따라서 단기 선교 여행을 위한 교회의 자원들은 장기 선교 전략과 동떨어진 방식이 아닌 선교사들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투자되어야 한다. 선교사들을 지원하는 한 가지 방식은 그들에게 사랑으로 격려를 제공할 수 있는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사역자를 보내는 것이다. 또 다른 한 가지는 가정과 그 공동체를 돌보기 위한 특정한 직업 교육을 지속적으로 공급하는 것이다. 분명히 단기 선교 방문자들이 선교사들을 지원할 수 있는 다른 방식이 있지만, 어떤 새로운 계획을 발달시키려고 하기보다는, 일반적으로 생각해 보고, 우리 자신의 가정, 마을, 그리고 직장에 무엇이 잘 맞을까를 고려해 보자. 아마도 가장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방문이 여행자들을 위해 계획된 휴가와 같은 것이 아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방문은 방문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귀한 선교사들을 위해서 기획되어야 한다. 단기 선교는 ‘단기’라는 단어를 빼고, 장기적인 선교 목적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계획되고 수행되어야 한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There’s Nothing Short about Short-Term Missions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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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치 못한 고통에 대비하라
by Adrian Warnock
2019-09-25
일 년 전, 46세가 되던 해에, 탄탄대로를 걷던 내 삶의 행로는 경고도 없이 방해를 받았다. 나는 지금까지 매일 셀 수 없이 많은 날을 기차로 출퇴근을 해 오고 있었다. 그날도 사무실에서 집으로 퇴근하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기차역 앞에서 걸음을 걸을 수가 없고 숨도 쉬기 어려움을 느꼈다. 구급차가 나를 병원으로 데리고 갔고, 거기에서 나는 폐렴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피 검사의 결과가 비정상으로 나왔고, 더 좋지 않은 진단 결과가 나왔다. 천천히 진행되는 백혈병이라는 것이었다. 갑자기 신체적이고 영적인 면에서 내 삶이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삶의 불확실성과 연약성이 갑자기 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병원에서 받은 충격나는 의사이며, 견실한 성경적 교육도 받았다. 그러므로 당신은 내가 예고 없이 찾아오는 고통에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백혈병이라는 진단을 받은 것이 내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에 나 스스로 놀랐다. 되돌아보자, 내가 왜 그리 놀랐는지 조금 더 명확해졌다. 첫째, 사회적으로 받은 축복으로 고통을 면제받고 있다는 기대가 내게 형성되어 있어서 충격이 더 컸었다.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나는 고통에 관한 한 역사적으로 이례적인 시대에 살고 있다. 맑은 물, 위생적인 음식, 놀라운 의료 기술, 빠른 응급 처방 시스템, 그리고 일을 못하게 되면 사회 보장 제도를 사용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결과적으로, 선대의 사람들을 괴롭게 했던 여러 위험한 것들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심신을 위협하는 모든 상황이 제어되고 있는 것처럼 느끼며 살고 있다. 얼마나 많은 추측 속에서 내가 고통을 면제받고 있다고 여기면서 살고 있었는지 이제는 알 수 있다.둘째, 오늘날 교회에서 많은 이들이 나누고 있는 잘못된 기능적 신학을 내가 어느 정도는 흡수하고 있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아마도 그래서 이러한 고통에 내가 준비가 되지 않았고, 그래서 그 충격이 더 컸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러한 신학을 배웠거나 믿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떻게든 내가 하나님을 신실하게 경배하고 섬기면 그분이 심각한 고통을 면하게 해 줄 것이라는 가정을 충분히 논의해 보지 않고 단순하게 받아들인 것은 사실이었다. 이러한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혈병 진단을 받았을 때 매우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나는 이제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 백혈병을 통해 내 믿음이 생각보다 미천하다는 사실을 드러내 주시고, 여러 차례 그분께 복종하고 또 더 깊이 그분을 신뢰하도록 도와주심을 말이다. 예상치 못함에 대비하라만성 림프성 백혈병의 여파가 내 가족을 덮치기 몇 달 전에, 한 친구가 내게 성경 구절 하나를 보내 주었다. 그 구절은 내가 그 병을 진단받고 힘들어하던 초기에 그 어떤 것보다도 나를 지탱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벧전 5:10).진단을 받고 그 질병과 투쟁하기 시작한 지 지금 일 년이 지나가고 있지만, 고통을 당하고 있는 순간에는 그 기간이 잠깐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 고통이 남은 생애 동안 계속되더라도, 다가올 영원한 영광에 비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에서는 잠깐에 불과하다. 내가 진단받기 전에 배운, 고통에 대한 굳건한 성경적 가르침은 내게 많은 위로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상황에 대해 더 준비가 된 상태였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나의 경험을 토대로 이 글에서 예상치 못한 고통에 준비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나누고자 한다. 여기에서 나열하는 목록들이 모든 것을 다 다루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목록들이 갑작스런 변화로 인한 충격을 완충시켜서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청지기로서의 사명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를 바로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영적으로 대비하라하나님을 더 잘 알수록 고난의 시험을 더 잘 맞이할 수 있다. 바쁜 직장 일을 내려놓고 강제로 누워 있게 됨으로써, 나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내 삶의 속도를 줄여야 한다는 사실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혼자만의 장소에서 정기적으로 진실하게 하나님을 추구하고 개인적으로 그분을 경배하라. 그리고 건강하고 성경적으로 신실한 지역 교회의 능동적인 구성원으로서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그분께 예배를 드려라. 삶이 무너져 내릴 때, 하나님을 경배한 욥처럼 되려는가 아니면 그에게 하나님을 저주하라고 다그친 욥의 아내처럼 되려는가? 신학적으로 대비하라내가 백혈병 진단을 받기 전에 고난에 대한 자료들을 찾아 읽는 일에 얼마나 소홀했었는지를 이제야 깨닫는다. 추천하고 싶은 자료들을 여기에 적어 본다. ‘하나님을 기뻐하라’(Desiring God)는 그 어떤 자료보다도 고난에 대해 훨씬 도움이 되는 책이다.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라는 존 파이퍼(John Piper)의 핵심 가르침은 내가 고통을 겪고 있을 때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는 삶의 단맛을 새롭게 느끼게 했다. 팀 켈러(Tim Keller)의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Walking with God Through Pain and Suffering)는 아파하는 이들에 공감하는 진리와 지혜로 가득하다. C.S. 루이스(C.S. Lewis)의 ‘헤아려 본 슬픔’(A Grief Observed)은 상실을 맞이하고 있는 크리스천의 깊은 슬픔을 뛰어난 화술로 고통스럽게 탐구하고 있다.책임감 있게 대비하라선한 청지기는 그의 청지기직을 내려놓기 위해 생각해 보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한다. 당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면, 다른 사람들이 집이나 교회나 직장에서 당신의 역할을 바로 이어서 할 수 있는가? 당신이 갑자기 일을 할 수 없을 때를 대비하여 가족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 놓고 있는가? 재정 전문가로부터 투자나 당신의 재산과 수입에 보험을 드는 것과 관련하여 상담을 받았는가?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 앞에서 당신의 양심 때문에 의도적으로 이러한 위험을 무릅쓰고 있는가 아니면 그냥 태만한 것인가? 그리고 재정적으로 위험을 무릅쓰는 일과 그러한 전략적 방법에 대해 당신과 당신의 배우자는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동일한 크리스천이더라도, 투자와 보험에 대해 그리고 얼마만큼 투자하고 보험을 드는 것이 좋은지에 대해 생각이 다 같지는 않다. 로마서는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롬 14:5)라고 말하고 있다.간단하게 살펴본 모든 영역에서 우리가 대비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공급하시겠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대비하지 않는 것은 교만한 것이다.신체적 건강과 영적 건강나는 크리스천 의사로서 신체적 건강이 영적 건강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다고 강조하고 싶다. 지속적인 영적 문제들은 단지 영적 투쟁의 문제에만 근거하지 않을 수 있다. 예를 들면, 나는 점차로 몸이 안 좋아지고 있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단지 직장 일 외의 다른 일상에서 지난 몇 년간 점차로 무관심이 증가하고 에너지가 떨어지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을 뿐이다. 영적인 면을 포함하여, 나의 열정이 점점 흐릿해지고 있었다. 나는 번번이 내 가족에게 실망을 주고 있었지만, 영적 에너지를 다시 회복할 수는 없었다. 내가 진단을 받으면서, 피로감은 악화되었고 백혈병이라는 소식에 대한 나의 정서적 반응이 이에 복합되었다. 한동안, 하나님이 멀게 느껴졌을 뿐만 아니라 내 믿음은 위안을 주지 못했다. 나는 영적으로, 신체적으로, 정서적으로 아팠다. 내가 장기 병가를 냈을 때 겨우, 한정된 에너지를 사용하여 시간을 내서 이제 하나님과 다시 연결될 수 있었고, 내 믿음을 조금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고난을 대비할 때, 영적 건강이 신체적 건강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하지 않도록 하라. 정서적으로 흔들릴 수 있음을 예상하라. 고난을 겪는 시편 기자의 생생한 기도가 내게도 필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마음으로 준비하라. 그리고 실제로 고난이 오면 “슬퍼할 때”(전 3:4)임을 예상하라. 가장 신실한 신자들도 심각한 병을 진단 받은 후에는 바로 혼란스러운 기간을 지날 것이다. 오직 시간의 흐름과 깊은 영적 작업을 통해서만 그들도 만성 질환과 고통을 맞이하는 많은 크리스천들에게 모범이 될 수 있다. 영광의 날을 고대하라예상치 못한 고통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가? 베드로 사도는 바람직한 관점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하나님이 기적으로 나를 치유해 주시지 않는 한, 나는 남은 생애 동안 이 심각한 질병과 싸우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벌써 여러 차례 병원에 입원했고, 감염이 재발되었으며,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다. 영원의 관점을 소유하는 것은 특히 고통을 겪어 나가는 방식을 크게 다르게 한다. 나는 이 점을 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진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한 관점이 고통은 물론이고 예상치 못함으로 인한 초기의 충격을 없애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영원의 빛에 비추어 보면, 우리를 가장 괴롭히는 것들은 “경한 것”과 “잠시 받는” 환난이다(고후 4:17). 그리고 스펄전은 이를 아주 아름답게 말했다. “아마도 한 주가 더 지나기 전에, 우리는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젊을지라도, 또 한 해가 시작되기 전에 그늘지고 우울한 일들을 넘어 우리는 안식처에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날이 얼마나 밝을 것인지! 오, 하늘에서의 하루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날은 해가 시기를 함으로 희미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날은 얼마나 행복한 날일까요! 다시는 밤이 없[을 것입니다]. 두려운 밤도, 슬픔의 밤도, 죽음의 밤도 없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곡괭이도 없고, 수의도 없고, 관도 영구차도 없을 것입니다. 밤이 짧아지고 그날이 가까워짐을 기뻐합시다. 인생의 새 아침을 고대하며 승리합시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습니다]”(C.H. Spurgeon’s Forgotten Early Sermons, 20–21).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Surprised by Trials: Preparing for Unexpected Suffering번역: 정은심
생활
건강
고통
영적대비
루이스
존파이퍼
팀켈러
책임감
초대교회의 차별 대우 해결법
by Kent Butterfield
2019-09-24
초대교회 당시에도 사회적으로 부유하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자들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곤 했다. 야고보 사도는 그런 문제가 일어나는 상황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여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약 2:1-4).그리고 이렇게 말씀했다.“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약 2:8-9).차별 대우에 대한 초대교회의 해결책흥미롭게도 예수님이 부르신 열두 사도 중 네 명은 어부였고 한 명은 세리였으며, 나머지는 제자로 부름 받기 전에 무엇을 했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어쨌든 주님은 그처럼 ‘교육 받지 못한’ 제자들을 부르셔서 온 세상에 교회를 세울 촉매제와 같은 일꾼으로 사용하셨다. 제자들의 사역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성령의 역사,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메시지로 이루어졌다. 사도행전은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교회가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 로마 제국 전역으로 확장되는 아름다운 과정을 그리고 있다.그런데 그 시작 과정에서 교회를 거의 분열시킬 뻔했던 한 가지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공동체는 깊은 상처를 받게 된다. 바로 불공평하게 사람들을 섬기는 차별 대우의 문제가 발생했던 것이다. 이 문제로 인해 사도행전 6장에 기록된 내용처럼 헬라파 과부가 교회에서 소외되는 아픔을 겪는다.“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행 6:1).당시 헬라파 성도들을 경시하는 태도가 의도적으로 발생하진 않았겠지만, 히브리파 과부들은 교회에서 많은 관심을 받는 데 비해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헬라파 과부들은 그렇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러한 차별 대우가 교회 안에서 발생하자, 결과적으로 소외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 문제에 대해 당시 교회가 취한 해결책은, 믿음이 충만한 사람 일곱을 선택하여 그 소외된 과부들의 필요를 돌보게 하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그 일곱 사람에게는 오늘날의 집사와 같은 직분이 주어져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을 섬기며 하나님의 권속들을 돌보고 다음으로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그 손길이 미치도록 했다(갈 6:10).모든 사람이 지닌 가치교회는 모든 사람을 받아 주는 주님이 세우신 공동체이다. 거기서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최우선적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을 받는다(막 12:30). 바로 이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형제와 이웃을 향한 사랑이 흘러나오게 된다(요일 4:21).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 대우하지 않으신다. 은혜 언약 안에서 누구도 편애하지 않으신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다른 사람들을 평가할까?우리는 누군가에 대해 성급히 판단하며, 그 사람의 가치를 속으로 가늠한다. 보통 재능이 많은 교사라든가 돈이 많은 교인 또는 아이들이나 지인들을 많이 데리고 나올 수 있는 젊은 가정이 교회에서 높은 가치를 지닌 부류로 평가된다. 그러나 시간을 투자해서 돌봐야 할 뿐 아니라 훈련도 많이 요구되는 사람들은 교회에서 즉각적으로 환영받지 못한다. 하지만 교회 안에 계신 나이든 과부나 홀아비를 한번 생각해 보라. 그들은 교회를 위해 가장 열심히 기도하거나 방문자들을 가장 따뜻하게 맞이하는 역할을 한다. 혹 70세가 넘도록 평생 주님을 따르며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아온 성도가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향해 어떠한 복과 변함없는 사랑을 베푸시는지를 강력하게 보여 주는 산 증인이 된다. 교회에 출석하는 아이들 가운데 신앙이 없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둔 경우에는 그와 같이 연로하지만 성숙한 신자의 모습을 보며 자라게 되는 것이다. 또 결혼하지 않은 지체들은 새로운 방문자의 친구가 되어 주거나 노인들을 섬기거나 혹은 시간을 내어 선교라든가 여러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도 있는데, 이러한 섬김은 그리스도의 몸이 성장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그리스도로 한 몸 이룬 지체로마서 12장은 우리가 저마다 다른 은사를 가지고 있지만, 모두가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니 손이 눈을 경멸하거나 귀가 발을 무시하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이를테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왕관에 박힌 보석들 같이 모두가 다 소중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새로운 사람이 왔을 때 그가 무엇인가 탁월한 일을 하여 교회 성장에 유익을 주리라고 판단하면 편애하는 경향을 드러낸다. 또는 성공한 사업가라든가 학력이나 배경이 좋은 사람을 선호하고 훌륭하게 여기기도 한다.그러나 천국에도 과연 그런 편애가 있을 수 있을까? 그곳에서 혹 21세기에 살던 성도가 고대 사회에서 단조로운 생활을 하다가 온 성도를 만난다면, 그와의 사귐을 꺼리게 될까? 분명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런 행동은 천국에 전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잘못된 행동을 지금 교회 안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빚어진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의 지위나 배경이나 경력과 상관없이 모든 이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는 우리의 소명이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상에서 사역하실 때 이스라엘의 모든 지역을 찾아다니셨다. 그분은 신자와 불신자 모두를 대상으로 일하셨다. 그리고 그 모든 자들에 대해 깊은 긍휼과 자비를 베푸셨다. 한 마디로, 사람들을 결코 차별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시지 않기 때문이다(갈 2:6).그 결과 우리 모두 하나님의 가족이 된 것이다. 이처럼 그분은 자신의 참 백성인 우리 각자를 진정으로 사랑하신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그리스도가 필요해서 교회에 온 사람들을 차별 없이 사랑해야 하지 않겠는가? 또 믿음의 가정에 속한 사람들을 편애하지 않고 사랑해야 하지 않겠는가?출처: www.ligonier.org원제: Favoritism in the Church번역: 장성우
역사
초대교회
차별
대우
가치
지체
은사
가족
헬라파
사랑
시작했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여정
by R. Carlton Wynne
2019-09-23
해마다 여름이면, 부모님은 우리들을 자가용에 태우고 여름 방학 연례행사인 ‘장거리 자동차 여행’을 떠나셨다. 여러 해가 지난 후, 부모님이 방학 여행 중에 느끼셨을 것을 나도 아버지로서 경험하고 있다. 예전에 아버지가 고속도로를 운전하며 내려가실 때 그분의 귀에 울렸을 똑같은 질문을 나도 이제 내 아이들로부터 종종 듣는다. “아직 다 안 왔어요?” 물론, 대답은 물음 속에 있다. 그래도 아내와 나는 앞 좌석에 앉아서 대답해 준다. “아니, 아직 다 오지 않았어. 도착하면 알려 줄게.” 가족의 장거리 자동차 여행 중에 자녀들이 반복해서 묻는 질문과는 달리, 하나님의 모든 자녀는 성경이 그리고 있는 명확한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크리스천의 삶에 관하여 물어야 한다. 예를 들면, 성경은 크리스천의 삶을 반드시 끝까지 달려야 하는 경주로(고전 9:24; 딤후 4:7 참조), 또한 “장차 올” “도성”을 향하여 가야 하는 순례 여행(히 13:14)으로 비유한다. 크리스천들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고]”(마 16:24; 막 8:34), 그리스도와의 교제 가운데 “행[하며],”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도록]”(빌 3:14) 부름받았다. 이 말씀에 따르면, 오늘날 크리스천의 삶이 “목적지에 아직” 도착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답하기가 어려운 것 같지는 않다. 우리는 여전히 그 여정을 계속하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온갖 형태의 시련과 죄악된 성향에 직면한다. 타락한 세상에서 우리는 육체적인 퇴락과 도덕적인 퇴락 모두를 경험한다. 해가 가면서 우리 몸에서 기력이 빠져나간다. 만약 이러한 냉혹한 현실이 말을 할 수 있다면, 그 현실은 우리에게 “아니야, 아직은 더 가야 해. 목적지에 다다르면 알게 될 거야”라고 소리칠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신비하면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성경은 크리스천의 삶을 움직임이 있는 것으로 그리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천국의 초자연적인 힘이 타락한 세상에 들어왔다고 선언한다. 예수님은 가르치시기 시작하면서, “천국이 가까왔다”(마 4:17)고 전한다. 그리고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쫒아냄으로 천국이 도래한다고 명백하게 언급하신다(마 12:28; 눅 9:11).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눅 2:38) 연로한 성도들은, 예수님이 선언하셨듯이, 그분의 오심은 곧 구약의 선지자들이 수천 년 동안 기다려 온 것의 성취라는 사실을 알았다(눅 4:21; 24:25–27). 그리스도가 행하신 치유와 귀신 쫒는 사역은 결정적으로 그분이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죄와 사망을 이기심으로써 최고조에 이른다(요 12:31–33; 히 2:14–15). 지금도, 복음은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가르치며 누구라도 믿음으로 그것을 받을 수 있다(눅 16:16; 18:17 참조)고 가르친다. 이것이 히브리서 저자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고백하는 이들을 “내세의 능력을 맛[본]”(히 6:5) 사람들로 묘사하고 있는 이유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구원을 살펴보면, 크리스천들은 목적지에 이미 도달했다. 동시에, 성경은 천국이 아직 ‘완전하게 그리고 마침내’ 도래하지는 않았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의 구속 목적이 궁극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은 미래에 남아 있다. 하나님은 교회에게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 즉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기다리라고 하신다(살전 1:10). 이런 이유로, 믿는 자들은 세상에서의 여정 동안 예기치 못한 장애물과 적군을 맞이하더라도, 무엇보다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여야 하며(마 6:33),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계속 기도해야 한다(10절). 요약하면, 약속된 하나님의 왕국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지만,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이 땅에 궁극적으로 계시될 그 왕국을 기다려야 한다. 자동차 안에서 “아직 오지 않았나요?”라고 묻는 아이들의 질문에 우리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단순히 대답한다. 하지만 크리스천의 궁극적 목적지에 “아직 도착하지 않았나요?”라고 묻는 질문에 성경이 말하는 현실은 좀 더 미묘하다. 죄인들이 그리스도를 믿을 때는, 실제로 그 대답은 “예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즉시 연합되며, 그분 안에서 미래를 향한 목적지로의 접근을 즐긴다. 히브리서 저자는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가 기뻐하며 모여 있는 곳에 오게 된다고 말한다(히 12:22). 이와 유사하게, 바울도 크리스천들은 장차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게 된다고 말한다(엡 2:6). 그렇지만 우리가 목적지에 도착했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노!”이다. 우리는 아직 기다리고 있고, 찾고 있으며, 믿음으로 걸어가고 있으나 아직 눈으로 보지는 못하고 있다(고후 5:7 참조). 그러므로 크리스천들이 목적지에 도달했는지에 대한 좀 더 정확한 대답은 “예스 그리고 노!”이다. 즉, 이러한 모순적인 대답은 통합적이고도 영광스러운 진리를 담고 있다. 왜냐하면 크리스천들은 믿음으로 이미 그리스도께 나아왔으며, 그로 인해 그들은 무한한 열정으로 미래를 향해 경주할 수 있고, 또한 그리 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고]”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기]” 때문이다(빌 3:20).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여, 어떤 장애물이 앞에 놓여 있더라도, 예수님을 향하여, 당신 앞에 놓인 길을 인내로 달려가라(히 12:1). 또한 “말세를 만난”(고전 10:11)사람들처럼 그 경주를 하라.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당신에게 “말세”를 가져다 줄 것이며, 그분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곧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히 9:28).출처: www.ligornier.org원제: Are We There Yet?번역: 정은심
영성
신앙과소명
크리스천의삶
목적지
아직
천국
구속
하나님의왕국
그리스도
복음과 율법은 모순되지 않는다
by Tim Keller
2019-09-21
나는 칼럼니스트나 학자 또는 언론인이 다음과 같은 이유를 대며 기독교인이 일관되지 않다고 비난할 때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규범 중 일부만 취사선택하여 따른다.” 가장 흔히 듣는 비난은 이런 말이다. “기독교들은 구약성경의 많은 내용을 무시한다. 가령 날고기나 돼지고기 혹은 생선을 먹지 말라고 한다든가 안식일을 어긴 죄에 대해서는 처형하라고 한다든가 아니면 두 가지 종류의 직물로 짠 옷을 입지 말라고 한다든가 하는 그런 내용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러면서 동성애에 대해서는 정죄한다. 그러니 자신들이 믿고 싶은 부분만 취사선택한다고 볼 수밖에 없지 않은가?”물론 나는 성경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기 백성을 구속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 준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이해하게 되기를 기대하진 않는다. 하지만 나는 성경을 대하는 기독교인의 신앙이 모순을 드러낸다고 비난하기 전에 자신들이 가진 상식을 먼저 확인해 보기를 (또는 신학적으로 훈련된 교사와 최소한 이야기라도 한번 나눠 보기를) 바라고 있다.우선, 구약성경만 동성애를 금지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부터 생각해 보자. 사실 신약성경 역시 그 문제와 관련된 많은 가르침을 전달하고 있다. 심지어 이혼에 관한 지침을 제시하는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하나님이 결혼을 통해 의도하신 본래의 목적이 남자와 여자가 한 육체로 연합하는 데 있음을 분명히 밝히셨는데, 여기서 그 목적이 아닌 경우에는 결혼이나 성관계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셨다(마 19:3-12).그렇다면 원래의 주제로 돌아가서, 신약 시대의 하나님 백성은 구약에 언급된 내용을 일관성없이 따르고 있다는 비난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자.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이런 비난에 직면하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잘 모른다. 그래서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 대한 간단한 설명부터 제시해 보겠다.일단 구약성경은 속죄를 위하여 성막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성전에서) 드려지는 다양한 희생 제사에 관해 수많은 본문을 들어 설명한다. 그리고 그 제사를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원리를 소개한다. 이와 관련하여 의식적인 정결을 위한 복잡한 규례도 함께 밝힌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은 특정 음식만 먹고 다른 음식은 먹지 않으며 또 정해진 의복만 착용하고 다른 여러 가지 대상들은 만지지 않는 가운데 오직 예배를 통해서만 그분께 나아갈 수 있었다. 이런 생생한 규례를 통해 반복적으로 전달되는 메시지는, 인간은 영적으로 부정하기 때문에 정결해지는 절차 없이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그러나 구약성경의 많은 저자들은 희생 제사와 성전 예배의 규례가 그 자체의 내용을 초월해서 무엇인가를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했다(삼상 15:21-22; 시 50:12-15; 51:17; 호 6:6).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는데, 이분은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고 선언하셨을 뿐 아니라(막 7:19), 구약의 정결법을 뛰어넘어 나병환자나 죽은 사람의 몸까지도 만지셨다.그 이유는 명확히 드러난다. 즉 그분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 때 성전의 휘장이 갈라짐으로써 정결법을 포함한 모든 희생 제사가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예수님이 몸소 죄에 대한 궁극적 희생 제사를 드리심으로써 우리 각자를 정결하게 하신 것이다.이런 차원에서 히브리서 전체는 구약의 의식법이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었다고 설명한다. 이를테면 우리가 언제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히 10:19).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의식법을 계속해서 준수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되지 않는 신앙이 되는 것이다.여전히 효력을 지닌 율법이와 같이 구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에 관해 신약성경은 또 다른 가이드를 제시해 준다. 곧 로마서 13장 8절 이하에서 바울은 구약의 도덕법이 여전히 우리에게 효력을 미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는 간단히 말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는 바뀌었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바뀌지 않았다는 말이다. 여기서 도덕법은 하나님의 완전하심, 인자하심, 신실하심과 같이 그분 자신의 성품을 보여 주는 삶의 규범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고, 가난한 자를 돌아보며, 사회적 관계 속에서 우리가 가진 소유를 관대하게 나눌 뿐 아니라, 가정에도 충실하게 헌신해야 한다는 구약성경의 가르침은 여전히 효력을 지니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신약성경도 살인이나 간음을 계속 금하고 있으며, 구약성경이 제시하는 성윤리도 다시 명시하고 있다(마 5:27-30; 고전 6:9-20; 딤전 1:8-11). 이처럼 신약성경이 또 다시 요구하는 계명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효력을 미치는 규범이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신약성경은 구약과 신약 사이에 나타나는 차이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그래서 죄는 변함없이 죄이지만, 그 죄에 대한 형벌은 바뀌었음을 보여 준다. 구약성경에서 간음이나 근친상간과 같은 범행은 이스라엘 국가의 재판을 거쳐 사형에 처해질 수 있는 죄목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에 하나님 백성은 하나의 나라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집행되었다.그러나 신약 시대에 하나님 백성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의 모임이며, 각 교회는 서로 다른 정부의 통치 아래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는 어떤 정부 기관이 아니기에, 누군가가 죄를 지으면 권면이나 충고를 통해 그 문제를 다루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멤버십에서 제외함으로써 그 문제를 처리한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안에서 발생했던 근친상간의 문제를 처리한 방법이 그와 같았다(고전 5장; 고후 2:7-11). 그렇다면 구약과 신약 사이에 왜 이런 변화가 생겼을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은 어느 한 국가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민족과 문화에 전파되기 때문이다.이와 같은 성경의 전제를 받아들이면, 즉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이루신 구원 사건의 우선적 의미를 인정하게 되면, 그때부터 성경의 다양한 부분들은 모순 없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의식법은 그리스도로 인해 폐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로 인해 더 이상 교회는 국가적 차원의 형벌을 집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대신 교회가 처한 장소에 따라 문제를 처리하는 방법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원자라고 가르치는 성경의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 경우에 성경은 기껏해야 영감 어린 구절이나 지혜로운 말씀이 일부 수록된 문서일 뿐 그 대부분은 어리석고 잘못된 내용으로 가득한 책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다.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오직 두 가지 결론이 가능하다. 먼저 그리스도가 정말 하나님이라면, 지금까지 설명한 방식으로 성경을 읽는 접근은 전적으로 타당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와 같은 기독교의 기본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즉 예수님을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다면, 성경은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확실한 가이드를 제시해 줄 수 없는 것이 되고만다. 물론 이 경우에 기독교가 구약의 도덕 조항 중 일부만 준수하고 나머지는 따르지 않는 모순된 신앙이라는 비난을 받아서는 안된다. 그건 공정한 접근이 아니기 때문이다.그처럼 모순을 운운하는 비난에 대응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되받아치는 것이다. “당신은 저한테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부인하라고 요구하는 것입니까?” 이에 상대가 “왜 그렇게 묻죠?”라고 말한다면, 이렇게 답변할 수 있을 것이다. “제가 정말 예수님을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면, 저는 음식이나 관습에 대한 어떤 정결법도 따를 수 없고 동물을 바치면서 희생 제사를 드릴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일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이 가져다준 효력을 부정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구약 계명 중 일부는 준수하고 나머지는 따르지 않아야만 합니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Making Sense of Scripture’s Inconsistency번역: 장성우
복음
변증
율법
하나님의계획
희생제사
성전예배
규례
기독교신앙
십자가사역
결손 가정을 세워주는 공동체
by James Coffield
2019-09-20
주일 아침 10시 30분이다. 마기의 집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마기는 교회에 가고는 싶다. 하지만 이런 전쟁이 벌어지는 날에는 ‘정말 그럴 가치가 있는가’라는 의문이 든다. 장애가 있는 아들을 다루는 일은 아침 시간에 더 힘들다. 그녀는 주일 아침 이른 시간에 있는 성인 모임에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시간에 아들을 보낼 곳이 없기 때문이다. 완벽한 가족을 가진 완벽한 외모의 여성이 그녀를 쳐다보는 눈길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녀를 불쌍히 여기는 이들도 있고, 귀찮게 여기는 이들도 있으며, 친절한 사람들도 있어 보인다. 때로 수치심이 밀려 올라올 때는 '예배에 참석하지 않아도 누가 알아차리겠나'라고 생각해 본다. 그녀의 남편은 몇 년 전에 그녀를 떠났다(장애인 가족의 경우 이혼율이 80퍼센트가 넘는다). 그녀는 필요시 빨리 자리를 뜰 수 있도록 보통 예배당 맨 뒷 줄에 앉는다. 우리 공동체에는 마기의 가족과 같이 피곤에 지쳐 있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그들은 생애 과정 중 변화를 경험하고 있거나, 외상이 있거나, 비극적인 일을 겪었거나 혹은 현재 겪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들은 교회가 그들을 원하는 것 같지 않다고 느끼며 소속감도 갖지 못한다. 그들의 자녀들은 돌보는데 너무 힘들고 가족들도 엉망이다. 그들은 교회에서 환영받기에는 실패와 허물이 너무 많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교회 안에서는 잘 어울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살 곳이 없거나, 역기능적이거나, 그 외의 다른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 가족들이 소속감을 느끼고 예배드릴 수 있는 곳을 과연 찾을 수 있을까? 많은 교회가 자원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교회 문을 통해 들어오는 이들의 독특한 상황마다 잘 대처하기는 쉽지 않다. 어떤 이들은 현대 문화를 포스트모던, 포스트크리스천, 포스트패밀리라는 말로 묘사한다. 교회에 오는 사람들은 채워져야 할 필요가 매우 많이 있지만, 교회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는 게 현실이다. 우리는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교회가 취해야 할 첫 단계는 사고 방식의 전환이다. 잘 준비된 프로그램의 비전이나 중요성을 교회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시도하다가 결실을 온전히 맺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새로운 비전이나 사고 방식이란 무엇인가?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 2:17). 교회는 건강한 자들이나 “의로운” 자들이 어울리는 곳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마주치는 역기능 가정들을 위한 곳이다. 우리는 잘못된 질문을 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족들을 우리가 어떻게 도울 수 있는가?”가 아니다. 대신에 우리는 “스스로 신실하게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자부하면서 어떻게 그들을 포함시키지 않을 수 있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교회는 상한 자를 위한 곳이기 때문이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응답자의 88퍼센트가 그들의 정체성과 소속감이 가족 의식에 근거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성경 말씀은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그리스도를 형제로,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들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가족적 직함들로 미루어 볼 때, 교회는 발달 과정 중이거나 문제가 있거나 과도기적 변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돌보고 치유하는 일을 우선적으로 해야한다고 볼 수 있다.과도기적 변화의 종류에는 크게 세 가지 형태가 있다. 예측 가능한 변화, 불행한 변화, 비극적 변화가 그것이다. 어느 교회라도 예측 가능한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의 수를 가늠하고 실제적으로 준비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아동기, 청소년기, 대학 학업기, 결혼 준비기, 자녀 양육기 등에 대해서 말이다. 불행한 변화는 특정한 교회 안에서 나이, 사회경제적 상태, 문화적 규범, 지역적 편견에 따라 좀 더 명확하게 정의될 것이다. 여기에 복합 가족, 홀부모 자녀 양육, 중독, 장애 자녀, 장애 성인, 실직이나 경기 침체, 정신 질환 등과 같은 주제들이 포함될 수 있다. 비극적 변화는 교회 별로 좀 더 특수할 수 있다. 이러한 형태의 과도기적 변화에는 허리케인, 경제적 침체, 자연 재해, 심각한 범죄 혹은 테러 등이 포함될 수 있다. 지역 교회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 교회가 섬기는 회중과 지역 공동체를 조사하여, 과도기적 변화를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교훈과 복음의 능력을 어떻게 전하며, 그들을 구원으로 어떻게 이끌 수 있을지를 생각해야 한다. 교회는 이를 위해 초청하고, 정보를 제공하며, 통합을 이루어야 한다. 초청사람들은 그들이 환영받고 있는지 여부를 스스로 인식한다. 삶이 깨지고 소외 당하는 사람들에게 교회가 안전한 공동체가 되어주는 일은 목회자로부터 시작된다. 교회는 프로그램을 따르기보다는 비전을 가진 지도자를 따를 것이다. 강단에서부터 시작하라. 설교자는 청중의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실제로 투쟁하고 있는 그 영역에 적절한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성도들은 그들의 필요가 채워지기를 기대한다. 자녀들의 학급이나 안전에 관련된 문제 등 어떤 문제든지 상관없이 그들의 질문에 빠르고 유쾌하게 답변해 주어야 한다. 교회 공동체는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위한 사역을 할 때 에너지의 70퍼센트를 그들이 그냥 환영받고 소속감을 느낄수 있도록 하는데 사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이 교회에서 공감대를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점과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라는 것뿐이더라도 말이다. 나는 최근에 특수 교육이 필요한 아동들의 부모를 위한 결혼 생활 컨퍼런스에 참석했다. 그 교회는 아이들이 뛰놀 수 있는 놀이 기구는 물론, 페이스 페인팅, 각종 활동과 음료, 그리고 일대일 돌봄을 제공해 주었다. 많은 부모들이 세미나 중에 눈물을 흘렸다. 가르침이 훌륭해서도 아니고 서로 만난 것이 기뻐서도 아니었다. 교회가 그들을 환영하고 돌보려고 애쓰는 모습에 놀라고 감동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넘어서는 문제나 상황은 없다는 믿음으로 행해지는 일들은 사람들을 복음으로 이끄는 초청장이 된다. 드러나지 않고 알려지지 않은 슬픔의 무게를 지고 사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복음의 진리가 그들에게도 해당된다는 단순한 사실을 잊고 지낸다. 교회 공동체는 어떤 문제로 투쟁하는 것을 영적인 연약함의 표지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에 가서 아무 문제도 없는 척한다. 알코올 중독과 싸우고 있는 한 남성이 언젠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교회에는 가르침을 들으러 가고, 실제적인 도움과 공동체를 얻기 위해서는 알코올 중독자 회생 모임(Alcholics Anonymous)에 갑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아무 문제없는 것처럼 위장하며 살라고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아니다. 교회는 상한 사람들이 가서 환영받는 곳이다. 정보정보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당면하는 도전들 중의 하나는 수많은 자료들이 무분별하게 제공된다는 것이다. 모든 주제마다 그야말로 셀 수 없이 많은 양의 자료가 손 닿는 곳에 있기 때문에, 교회는 필터 역할을 하여 성도들이 이를 분별해 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또한 모든 영역에서 성경적이고 도움이 되며 건전하고 적절한 정보를 지원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과도기적 변화의 어려운 과정 중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정보가 소그룹과 주일 학교, 서포트 그룹과 상담 사역 등 모든 영역에서 제공되어야 한다. 교회는 모든 주제에 대해 전문가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각별한 투쟁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성경적 치유 자원들을 공급하기 위해 헌신하고 있는 사람과 신앙의 공동체가 분명히 존재한다. 이러한 사역을 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다루는 특정한 과도기적 변화의 분야에 열정을 갖고있다. 그들의 열정은 개인적 경험이나 하나님의 촉구하심에 의해 생겼을 지도 모른다. 그들은 주님의 인도를 신실하게 추구하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돌보기 위해 특별히 선정된 자료들을 사용한다. 어느 개인이나 단체도 이들을 결코 대신하지 못한다. 한편, 통계 자료들은 특정 그룹에 어떤 문제가 있을 것인지를 예측케 해준다. 예를 들면, 싱글맘 가족은 다른 유형의 가족들에 비하여 극도로 가난한 가정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싱글맘을 효과적으로 돌보기 위해서는, 재정적인 압박과 염려가 그 가정 안에서 가장 큰 문제거리라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직접 관여하여 헌신하지 않는다면 어떤 훌륭한 정보를 가지고 있더라도 가치가 없다. 통합공동체와 헌신은 통합을 위해 필수적인 요소들이다. 일차적 공동체는 당면 문제들을 다루는 특정한 소그룹의 일부가 되고자 하는 회원들에 의해 구성될 수 있지만, 그 회원들은 필수적으로 더 큰 교회 공동체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갈라디아서 6장은 우리에게 “짐을 서로 지라”고 하고 몇 구절 뒤에 “각자 자기의 짐을 지라”고 권고한다. 사회적 약자들을 효과적으로 돌보기 위해서, 교회는 유용한 정보와 참여를 제공해야하며, 그들이 마치 어떤 프로젝트의 대상인 것처럼 느끼지 않도록 교회에 접목시켜야 한다.이러한 일은 선교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다. 훌륭한 리더십은 어떤 그룹에 그냥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그 그룹이 선교 사역에 참여하도록 초청하는 것이다. 훌륭한 선교사들은 원주민들이 그들의 동료 원주민들에게 다가가도록 훈련시킴으로써 과도한 일에서 벗어나고 있다. 통합을 이루는 면에서 헌신의 영역은 과소평가될 수 없다. 교회는 단기적 위기 상황에는 최선을 다하는 듯하다. 예를 들면, 죽음, 결혼식, 그리고 단기 입원 등 말이다. 하지만 장기간의 질병, 장기 특수 장애아, 만성적 갈등으로 깨진 가족들, 가난 등과 같은 장기전을 요하는 사항들에 대해서 교회가 항상 잘 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는 궁극적으로 엉망인 장소가 되도록 헌신하는 것이다. 잠언 14장 4절을 기억해 보자.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려니와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라.” 우리가 원하면, 교회를 깨끗하고 정리된 상태로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추수할 곡식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반면, 우리가 실제로 복음적인 사역을 한다면 교회는 엉망이 되고 눈물, 땀 그리고 슬픔으로 얼룩질 것이다. 마기와 그녀의 아들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필요하다. 그리고 복음의 진리를 더 반영하기 위하여, 교회는 마기를 더욱 더 필요로 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A Community for Broken Homes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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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
이웃을 사랑하듯 자녀를 사랑하라
by Jen Wilkin
2019-09-19
내게 가장 중요하게 영향을 준 자녀 양육 지침은 아이들이 사람이라는 점이다.이는 증명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다. 아이들도 팔과 다리, 귀와 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인간성을 가지고있다는 것은 그들이 단지 인간의 몸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 이상의 의미를 포함한다. 이것은 그들의 존재가 중요하며 가치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아이들도 성인들과 똑같이 하나님의 이미지를 소유하고 있다. 물론 어떤 면에서는 성인들과 똑같다고는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체적으로 정서적으로 영적으로 성인과는 다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내적 가치나 존엄성은 발달 속도나 정도에 따라 증가되거나 축소되지 않는다. “사람은 아무리 작아도 사람이다”라는 닥터 수스(Dr. Seuss)의 말은 유명하다.자녀 양육과 관련하여 내가 들어 본 말 중에서 가장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은 성경이 자녀 양육에 대한 주제에 비교적 침묵하고 있다는 진술이다.겉보기에 이 말은 사실처럼 보인다. ‘양육에 관한 본문’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부모와 자녀, 권위와 훈계를 명시적으로 언급하는 구절들을 보통 생각한다. 예를 들면, 신명기 6장이나 출애굽기 20장에 나오는 십계명의 다섯번째 계명을 떠올린다. 매를 아끼면 자식을 망친다, 자녀가 가야할 길을 가르쳐야 한다, 자녀는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해야한다는 가르침들과 그 외의 성경 구절들을 피상적으로 언급한다. 혹은 양육을 평가해 보기 좋은 방법으로, 탕자의 예나 족장의 비애 이야기를 그저 던져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외에, 부모와 자녀 관계를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구절이 거의 없다는 이유로,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이 자녀 양육의 문제를 우리가 알아서 하도록 남겨두셨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해가 되기도 한다. 아이들이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기 전까지는 말이다.아이들이 사람이라면, 그들도 우리의 이웃이다. 이 말은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모든 성경 말씀이 갑자기 우리가 양육하는 방법과 관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큰 희생과 노력으로, 경건한 지혜로, 우선적으로 사랑하라는 모든 명령은, 직장 동료들이나 교회의 사람들, 미용실에 있는 사람들이나 우리 집 근처에 사는 사람들, 혹은 노숙자 쉼터에 있는 사람들만 사랑하라는 명령이 아니다. 이는 내 집 지붕 밑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명령도 된다. 그들이 아무리 작을 지라도 말이다. 아이들이 사람이라면 내 자녀들은 우리의 가장 가까운 이웃이다. 자녀들보다 더 가깝고 우리의 희생적 사랑을 더 필요로하는 이웃은 없다. 자녀들을 이웃으로 인식하게 되면, 갑자기, 상당히 많은 성경 말씀이 양육에 대해 전혀 침묵하지 않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자녀들을 이웃으로 인식하는 것은 내가 그들을 훈육하는 방식과 내가 그들에게 이야기하는 방식,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에 대해이야기하는 방식에 영향을 줬다. 그것은 친구나 동료에게는 결코 그리 대하지 않을 것 같은 방식으로 얼마나 빨리 내가 가장 가까운 이들을 대하는지 알아차리게 했다. 내 자녀를 무시하는 대신 긍휼의 대상으로 보게 했다. 생색내지 않으며 그들의 성공을 더 잘 축하해 줄 수 있으며, 그들의 실패를 내가 형편없는 부모라는 명백한 증거로 보지 않으면서 더 잘 슬퍼할 수 있다. 자녀들을 이웃으로 인식하는 관점은, 내가 그들이 빨래를 만들어내거나, 음식을 먹어버리거나, 집안을 어지럽히거나, 때를 쓴다고 짜증내기 보다는, 그들을 사람으로 여기며 기뻐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렇지 않은 날을 제외하고 말이다. 아이들을 이웃으로 사랑하지 못한 날에는, 나는 성경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다시 기억하며 자녀를 그 방식으로 사랑하지 못했음을 고백하고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리고 성경 말씀은 필요한 도움을 제공해주었다. 여기에 자녀 양육에 관한 구절이 “아닐 것 같은” 몇 개의 성경 구절들이 있다. 이 구절들은 내가 자녀를 이웃으로 사랑하지 못한 날에 다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준 말씀이다. 자녀를 가혹하게 바로잡고 싶은 충동이 들 때“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 15:1).자녀에게 잔소리하고 싶을 때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약 1:19-20).자녀가 나의 자랑이 되게 하고 싶을 때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3-4).자녀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부담으로 느껴질 때“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 25:37–40). 부모로서 그 공로를 인정받고 싶을 때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3-4).자녀의 잘못을 용서하고 싶지 않을 때“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1-32).내가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았을 때“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딤후 2:24-26).마지막 성경 구절은 우리 집 냉장고에 붙어 있다. 하나님은 아이들을 우리에게 맡기셨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녀는 귀하게 여김을 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우리가 기억할 때, 우리는 그들을 잘 돌보고 양육할 수 있을 것이다. 자녀를 이웃으로 소중히 여길 때, 훈육하면서 그들에게 비난이나 수치나 경멸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자녀의 잘못을 바로잡아야 할 때도, 우리의 말은 사랑과 존엄성 전하는 언어로 바꿔진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가 “좌절감을 주는 내 아이를 고쳐주세요”에서 “당신이 나를 사랑하셨듯이, 당신이 우리 집에 보내주신 작은 이웃을 사랑하도록 도와주세요”라고 바뀌게 된다. 프레드 로저스(Fred Rogers)는 아이들의 가치와 존엄성을 잘 이해했다. 장로교 목사인 그는 TV에서 '작은 사람들'에게 이웃 사랑의 아름다움을 설교하며 일생을 보냈다. “아름다운 날이네요. [중략] 내 이웃이 되어 주시겠습니까?”라는 그의 메시지는 부모들에게도 좋은 것이다. 아이들은 사람이다. 자녀는 가장 가깝고 가장 사랑스런 이웃이다. 부모들이여, 당신의 지붕을 공유하는 자녀를 이웃처럼 여기고 먼저 사랑하기 위해, “아름다운 날이네. 내 이웃이 되어 줄래?”라는 말을 사용해 보라. 그리고 용기를 내라. 성경은 당신을 돕는 말씀들로 넘쳐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Your Child Is Your Neighbor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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