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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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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John Blanchard  /  작성일 2019-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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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Christopher Jolly on Unsplash

유명한 영화감독이자 드라마 작가이며 영화배우인 우디 앨런(Woody Allen)은 한 때, “나는 죽는 것이 두렵지 않다. 그런 일이 일어날 때, 나는 단지 거기에 있고 싶지 않을 뿐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별난 인용문은 유명하지만, 치명적인 결함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달력에 모든 사람의 사망 날짜를 기록해 놓으셨으며, 하나님이 이렇게 정해 놓으신 일정을 취소하거나 연기하기 위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바람을 주장하여 바람을 움직이게 할 사람도 없고 죽는 날을 주장할 사람도 없으며”(전 8:8).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죽음의 불가피성은 그들의 삶에 드리우는 그림자와 같이 마주할 수밖에 없다. 국제적으로 유명한 영국의 미술가 데미언 허스트(Damien Hirst)는 3억 달러 이상의 가치가 있는 작품을 만든 사람으로 여겨지는데, 그는 ‘데일리 텔레그래프 리뷰’(The Daily Telegraph Review)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죽음은 확실히 내가 매일 생각하는 것이다. [중략] 우리는 그것을 피하려고 노력하지만,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중대한 것이다.” 성경은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많은 사람들에 대해 말씀한다(히 2:15). 수많은 경우에, 그들을 얽어맨 쇠사슬은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더 단단해진다. 에드가 앤드류(Edgar Andrews) 교수가 말하는 바와 같이, “불확실성은 두려움을 낳는다. 그리고 두려움은 삶에 피할 수 없는 그림자를 드리우고, 사람에게서 영속하는 평화나 기쁨을 앗아가면서 정신적인 속박을 가한다.” 그러나 이 냉혹한 시나리오에 그리스도인을 포함시켜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며(고후 5:17), 그 예수 그리스도는 존 오웬(John Owen)이 “사망의 사망”(the death of death)이라고 부른 사건을 성취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하게 이해할 때, 불가피한 죽음에 그리스도인들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구원받을 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 나는 어렸을 때 한 번, 그리고 십대 때는 두 번이나 죽음에서 구조되었다. 어렸을 때는 나의 출생지인 구에른세이(Guernsey) 섬에서 아버지가 일하시던 포도원에 놓인 거대한 물통 속에 빠진 적이 있는데, 그때 그 자리를 우연히 지나가던 한 일꾼의 도움으로 구조되었다. 수년 후에 나는 그 섬의 남쪽 해안가 절벽 쪽의 바다에서 한밤 중 수영하다가, 결국 물에서 헤어나지 못했고, 죽기 직전에야 수영을 잘하는 다른 사람에 의해 구조되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얼마 되지 않아서 나는 절벽의 가파른 곳에서 일을 하다가 미끄러졌는데, 가까스로 절벽에서 자라고 있던 식물 줄기를 잡았으며 그 식물은 내 체중을 지탱할 만큼 강해서 필사적으로 버틴 끝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만약 내가 이 세 번의 사건에서 생존하지 못했더라면, 당신은 지금 이 글을 볼 수 없을 것이며, 나의 영혼은 지금쯤 “어두운 구덩이에서”(벧후 2:4) 몸의 부활을 통해 영과 몸이 재결합하여 지옥에 던져질 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직접 목격한 놀라운 결과에 대해 기뻐하면서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 현장에서 돌아왔을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라고 말씀하셨다(눅 10:20). 지상에서의 삶이 그 불가피한 끝을 향해 나아갈 때, 우리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에 대해(롬 5:8),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를 위해 이룬 모든 것을 우리가 굳게 붙들 수 있을 때까지 우리 목숨을 보존해 주시는 은혜에 대해 끊임없이 감사해야 한다.

 

둘째,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보존된 은혜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한” 사람들에 대해 찢어지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요일 2:19). 비록 가시적 교회의 일원이긴 하지만, 그들의 이탈은 그들이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24:13)라는 약속의 분깃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우리가 자신의 삶을 숙고해 볼 때, 다시 말해, 존 뉴턴(John Newton)이 말한 수많은 “위험과 고역과 덫”만이 아니라, 의심과 두려움, 시련과 유혹, 약점과 실패, 타협과 비겁함, 그리고 때때로 우리가 “얽매이기 쉬운”(히 12:1) 죄에 빠졌던 때를 돌아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가 얼마나 감사한지 생각해야 한다. 우리 각자가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한다”(롬 7:18)라고 하는 바울의 고백을 할 수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생각할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얼마나 오래 살아왔는지와 상관없이, 우리의 신앙이 보존되어 왔다는 사실을 기적으로 여겨야 한다.

 

내가 노스캐롤라이나 샬롯 근처에 있는 빌리 그래함 도서관(the Billy Graham Library)을 방문했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 복음 전도자의 아내인 루스 벨 그래함(Ruth Bell Graham)의 묘소를 표시한 거칠게 깎은 돌이었다. 그녀는 2007년 6월 14일에 87세의 나이로 죽었고, 그 돌에는 “건축의 끝—당신의 인내에 감사합니다”(End of Construction—Thank you for your patience)라는 유쾌한 문구가 새겨져 있다. 우리가 죽음에 다가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오래 참고 변함없으신 은혜에 대해 끊임없이 감사해야 한다.

 

셋째,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약속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 록 밴드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의 매니저였던 말콤 맥라렌(Malcolm McLaren)의 장례식이 열렸던 2010년 4월 10일, 그의 시신을 실은 영구차에는 그의 노래 가사 가운데 한 절인 “살기에는 세월이 너무 빠르고, 죽기에는 너무 젊다”라는 밴드의 노래 구절이 적힌 천이 덮여 있었다. 맥라렌은 현란하고, 혼란스럽고, 시끄럽고, 매혹적이고, 사치스러운 삶을 살았지만, 그 영구차 뒤에는, 관을 나르는 조문객들이 맥라렌의 예상 목적지를 알리는 표지판을 들고 있었는데, 거기에 쓰인 문구는 “Nowhere”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 문구가 의미하는 존재의 멸절은 하나의 바람일 뿐이다. 그런 바람은 불경건한 자들이 “영벌”(마 25:46)에 직면한다는 무서운 진리를 없애 주지 못한다.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의 미래는 놀랍도록 다르다.

 

그렇다. 없어질 것들을 생각해 보라.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거기에는 직면해야 할 유혹도 없고, 견뎌야 할 짐도 없고, 괴로워해야 할 죄책감도 없고, 싸워야 할 질병도 없고, 우리를 당황하게 할 해답 없는 질문도 없고, 우리를 좌절하게 할 불만족스러운 갈망도 없다. 지상에서 우리의 삶에 상처를 남기고, 우리의 삶을 더럽힌 그 어떤 것도 거기서는 우리를 수치스럽게 하지 못할 것이다. 거기에는 후회도, 양심의 가책도, 다시 생각하는 것도, 실망도, 실패도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거기에는 우리를 지독히도 괴롭히는 우리 내면의 죄도 없을 것이다. J. I. 패커(James Packer)가 지적하듯이, “천국에는 죄가 없을 것인데, 이는 천국에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죄를 짓고자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에서 다윗이 하나님에게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 16:11)라고 외친 일은 그가 가진 소망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그리고 항상 있을 사람들을 생각해보라. 천국은 창조된 순간부터 영광스럽고 조화로운 통일성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섬겨 온, 그러면서도 결코 죄를 지은 적이 없는 존재인 그룹들과 천사장들을 포함한 “천만 천사”(히 12:22)의 고향이다.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계 7:9)인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거기에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좋은 일은, 우리 구주가 거기에 계신다는 사실이다. 사랑하는 나의 아내 조이스(Joyce)가 작년에 소천한 이래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빌 1:23)라고 그녀를 기념하는 비석이 증언하는 것처럼, 이제 내 아내는 훨씬 더 좋은 곳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면서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히 12:23)이 누리는 상상할 수 없는 복락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며 지내오고 있다. 생후 18개월 이래로 맹인이 된 한 친구는 “내가 보는 다음 사람은 예수님이 될 것이네”라고 말하곤 한다.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요일 3:2)이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그 경이로움을 상상한다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롬 8:29)이 성취될 때, 성경은 “우리가 그와 같을” 것이라는 훨씬 더 놀라운 약속을 한다(요일 3:2). 이 얼마나 환상적인 전망인가! 요한이 요한일서 3장에서 “간략하게 쓴 말씀”을 마음에 새길 때, 우리는 예수님처럼 거룩해지고, 예수님처럼 의로워지고, 예수님처럼 순결해질 것이다. 심지어 지구상에서 가장 연약한 그리스도인도 D. L. 무디(D. L. Moody)가 “성결의 귀족”(the aristocracy of holiness)이라고 부른 사람들의 영광스러운 일원이 될 것이다. 놀랍게도, 우리는 그분의 면전에서 불편함을 전혀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 우리가 지나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시 23:4)는 쉬운 여행이 아니라 생각보다 길고 고통스러운 여행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인내와 믿음이 아무리 시험을 받을지라도, 하나님의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은혜로 우리가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받았다는 사실, 또 우리가 우리를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을 안다는 사실, 그리고 존 번연(John Bunyan)이 쓴 것처럼, “죽음이란 단지 감옥을 벗어나 궁전으로 들어가는 통로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신하기에, 우리는 감사하면서 그 여행을 할 수 있다. 마틴 로이드존스(Martyn Lloyd-Jones)는 죽기 사흘 전에 떨리는 손으로, 그의 아내 베단(Bethan)과 가족을 위해 종이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나의 치유를 위해 기도하지 말라. 내가 영광으로부터 다시 뒤로 밀려나도록 나를 붙들지 말라.” 만약 우리가 고향에 돌아가는 것을 주저한다면, 신앙적인 모습이 아니다. 존 웨슬리(John Wesley)는 영원한 안전에 관한 자신의 견해대로 초창기 감리교도들에게 “우리 교우들은 잘 죽는다”라는 말을 할 수 있었다. 만약 우리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죽는다면, 우리도 그들과 같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www.ligonier.org

원제: How Now Shall We Die?

번역: 김장복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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