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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죽음 이상을 행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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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Gavin Ortlund  /  작성일 2019-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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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토트(John Stott)는 그의 대작인 ‘그리스도의 십자가’(The Cross of Christ)에서 에밀 브루너(Emil Brunner)가 했던 다음의 말을 인용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신앙, 그들의 교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를 나타내는 표징이다. [중략] 십자가를 올바로 이해하는 사람은—이는 개혁자들의 견해이기도 한데—성경을 알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이와 같은 십자가 중심성은 성경적인 근거가 탄탄한 진리이다. 우선 십자가는 대속의 직접적인 원인이자, 하나님과 회개한 죄인 사이의 화목을 보여 주는 사건이다. 그러나 어느 중심적인 사건에만 배타적으로 집중할 경우, 거기에는 언제나 다른 주변적인 사건들이 시야에서 사라질 수 있는 위험이 자리하고 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죽음 외에도 더 많은 일들을 행하셨다는 것이다. 만일 그 죽음만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일이었다면, 그분은 자기 제자들의 발을 닦으셨던 그 목요일(혹은 금요일 이른 아침)에 인간의 몸을 입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곧바로 다시 살아나서 해가 지기 전에 승천하셨을지도 모른다. 하루 만에 죽음으로 모든 일을 이루실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죽음 이전에 30년을 허비하는 일이나 그 후에 40일을 낭비하는 일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예수님의 생애에서 (죽음 이외에 성육신이라든가 부활 이후의 영광스러운 상태와 같은) 나머지 측면들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긴 하지만, 우리의 구원과 관련해서도 그 측면들이 중요하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의 생애에서 일어난 많은 사건들과 그에 함축된 의미가 그분의 죽음과 함께 어딘가로 사라진다고 생각한다면, 이러한 관점은 신약성경의 각 본문들이 가진 미묘한 의미를 흐릿하게 만들 수 있다. 예를 들어, 부활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한다. 즉 바울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부활하셨다고 말한다(롬 4:25). 또한 베드로는 구원의 효력을 다름 아닌 부활에서 찾고 있다(벧전 1:3; 3:21).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다윗 언약의 성취이자(행 2:30-32; 13:30-37), 성령 강림의 이유이며(행 2:33), 최후에 있을 심판의 현재적인 증거(행 17:31)라고 선포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빈 무덤이라든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 또는 마지막 날의 나팔 소리 같은 요소들을 배제하지 않고도 십자가의 중심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또 어느 정도로 성(聖) 금요일만이 아니라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에도 복음을 설명해야 할까?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그분이 시험을 받으신 일이나 형체가 변화되신 사건에 대해 가볍게 여겨서도 안 될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너무 단순히 취급하여 그 중심적이며 역동적인 의미를 상실해서도 안 될 것이다.


결국 우리는 성경 이야기의 전환점이 되는 십자가뿐 아니라 (심지어는 십자가와 부활만이 아니라) 더욱 넓게 자리한 다른 이야기도 함께 바라보는 균형 잡힌 관점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예수님의 구원 사역과 관계된 다른 요소들을 언제나 십자가와의 관계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소설을 읽을 때 그 이야기에서 절정에 이르는 터닝포인트뿐 아니라 그 포인트가 자리하고 있는 넓은 문맥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보여 주는 더 넓은 문맥에 대한 사고를 열기 위해 예수님의 죽음 외에도 우리의 구원을 위해 간과되어서는 안 되는 여섯 가지 포인트를 설명하고자 한다.


1. 성육신 및 동정녀 탄생(Incarnation and Virgin Birth)


중세 교회의 라틴어를 공부하며 예배문을 살펴보던 중, 나는 초대 및 중세 교회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동정녀 탄생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결코 분리시키지 않으면서) 얼마나 강조했는지에 대해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다. 이는 브룬너와 같이 동정녀 탄생에 의문을 가지는 현대 신학자들의 무모함을 드러내 준다. 그들의 주장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탄생 기사만이 아니라 수세기에 걸친 기독교 예배의 무게 있는 전통과도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레니우스(Irenaeus)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또는 안셈(Anselm)과 같은 신학자들은 성육신 자체가 인성(human nature)을 회복하고 영화롭게 하는 사건이라고 이해했다. 나는 이런 관점이 매우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한 인격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연합을 이루는 일이 인류를 구원하는 일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공관복음서들에서 쉽게 지나치는 이야기인 변화산 사건(the transfiguration)의 의미 때문이기도 하다. 이 사건은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몸이 심지어는 부활 전부터 독특했다는 사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부활은 어떤 외부적인 영광을 그분에게 부과한 사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함축된 의미가 처음부터 성육신과 완전히 분리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2. 무죄한 삶(Sinless life)


그리스도의 무죄한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사명에 실패했던 아담이나 이스라엘을 새롭게 재현하고, (최소한 개혁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능동적이며 수동적인 차원 모두에서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여 신자들이 회심할 때 그 의가 전가되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혹자는 재현(recapitulation)이라든가 전가(imputation)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일에 불편해하거나 주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순종적인 삶의 연장에서 대속적인 죽음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분의 삶은 반드시 구원 사건의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십자가에서 일어난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분이 보여 주신 무죄한 순종의 일부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시간적으로 어느 한순간에 ‘무죄한 삶’이 끝나고 ‘대속적인 죽음’이 시작되는 일이 가능했겠는가?


나는 팀 겔러(Tim Keller)가 “그리스도는 우리가 살아야 했던 삶을 사셨고, 우리가 죽어야 했던 죽음을 죽으셨다”라고 수없이 반복하여 설교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켈러가 진술한 그 명제의 두 부분은 서로 분리되어서는 안 되는 내용으로 여겨졌다.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은 궁극적으로 능동적인 성취(positive fulfillment), 즉 우리가 살아야 했던 삶과 수동적인 수용(negative absorption), 곧 우리가 죽어야 했던 죽음을 나타낸다. 더 나아가 그 두 가지 측면은 성경에서 “그 안에서”(in him)라고 표현되는 대표(representation)와 “우리를 위해”라고 표현되는 대체(replacement)의 원리를 모두 포함하는 하나의 유기적인 실재(one organic reality)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분의 삶에서 이미 시작된 과정의 절정에 해당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루터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커다란 ‘교환’(exchange)의 ‘한 순간’(one moment)이라고 언급했고, 칼빈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제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다.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죄를 제거하시고, 우리와 하나님 간의 분리를 철폐하셨으며, 더 나아가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 호의를 가지시도록 의를 획득하셨는가? 이에 대해 우리가 대답할 수 있는 바는, 그분이 바로 우리를 위하여 그 모든 순종의 과정을 통해서 그 일들을 성취하셨다는 것이다. [중략] 그분은 종의 형체를 취하신 때부터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 자유의 값을 지불하기 시작하셨다”(기독교강요 2권 16장 3절).


3. 장사(Burial)


만일 우리가 예수님의 활동에서 발생된 사건 또는 사실이 그 목적이나 의미와 관련되어 있다고 전제한다면, 이와 같은 질문을 해 볼 수 있다. “왜 예수님이 단지 몇 시간 동안 하나님의 진노를 십자가 위에서 받으신 일만이 아니라 실제로 거기서 죽으신 일이 중요한가?” 또는 “왜 그분이 죽으신 후에 곧바로 살아나지 않고 죽음과 부활 사이에 시간(즉 금요일 오후에서 일요일 새벽에 걸친 시간)을 두신 일이 중요한가?”


이 질문에 대하여 다시 한번 중세 신학자들의 글을 읽어 보는 일은 매우 흥미롭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구원이란 죄의 범위만큼 넓어야 하며, 죄 자체만이 아니라 죄책이나 죽음과 같은 죄의 결과까지도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이 주장이 옳다고 생각한다. 즉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가 언급한 고전적인 격언인 “떠맡으심 없이는 치유됨도 없다”(that which is not assumed is not healed)라는 말을 조금 변형한다면, 이런 주장도 가능할 것이다. “경험하지 않고는 대속할 수 없다.” 병을 고치기 위한 해독제는 모든 아픈 부위에 닿아야 하듯이, 예수님은 우리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들에 자신을 내어 주어야 한다. 즉 죄악, 진노, 죄책,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짐만이 아니라 결국 영육의 사망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문제들에 자신을 내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C. S. 루이스가 ‘사자와 마녀와 옷장’(The Lion, the Witch, and the Wardrobe)에서 말했듯이 ‘생명’(요 14:6)이신 이가 죽음의 상태에 들어갈 때에만 죽음 자체가 ‘후퇴’하는 것이다. 곧 해독제는 전 영역에 퍼져야 한다.


4. 부활(Resurrection)


그리스도의 부활은 많은 주목을 받지만, 흔히 그 사건의 역사적 신뢰성 또는 변증적 목적과 관련해서만 주목을 받는다. 우리는 자주 고린도전서 15장 17절을 인용하며 부활이 없으면 아무런 소망이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왜 이 내용이 사실인지에 대해서는 그만큼 자주 살펴보지 않는다. 부활의 신학적 의미는 무엇인가? 그 사건이 우리의 일상 생활에 대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 주제와 관련하여 리차드 개핀(Richard Gaffin)의 ‘부활과 구속’(Resurrection and Redemption)은 특히 통찰력이 있는 책으로서 더욱 널리 읽히고 연구되어야 한다. 그는 바울의 사상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분의 죽음과 같이 전적으로 메시아만이 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건이며, 그 부활이 없이는 심지어 대속도 완전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5. 승천 및 천상 사역(Ascension and Heavenly Session)


존 오웬(John Owen)은 ‘그리스도의 영광’(The Glory of Christ)에서 승천하신 이후 예수님의 삶은 여전히 인간으로서 육체를 가진 삶이라는 점을 매우 강조한다. “그분이 지상에서 지니셨던 인성을 지금도 지니고 계시며 또한 동일한 영혼과 육체를 지금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 조항이다.” 왜 그리스도가 승천하신 이후로도 육체를 지닌 삶을 영위하신다는 사실이 그토록 중요한가? 그 이유는 육체를 지니고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지금도 신자들을 위해 중보하시고(롬 8:34; 히 7:25; 요일 2:1-2), 열방을 통치하며 다윗 왕에게 약속된 그의 나라를 확장하고 계실 뿐 아니라(행 2:30-31), 성령을 보내셔서 비신자들로 하여금 복음의 진리를 확신케 하심으로써 교회를 이루시기 때문이다(행 2:33; 요 16:7-11; 엡 4:7-8). 이처럼 지금 이 순간과 모든 교회 역사 가운데 예수님은 구원 활동(곧 중보와 통치와 성령을 보내 주시는 활동)을 지속적으로 행하신다.


6. 재림(Second Coming)


그리스도의 재림도 신약성경에서 구원 사건의 일부로 묘사된다(히 9:28). 그 이유를 생각하는 일은 어렵지 않지만, 여기서 흥미를 가지고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사실은 바빙크(Bavinck)와 같은 개혁신학자들이 주장하듯이 그리스도가 재림 이후에도 하나님과 이미 영화롭게 된 백성들 사이에서 중보 사역을 지속하실 것이라는 내용이다. 곧 (성육신이 하나님의 영원한 행동이었음을 고려할 때) 삼위일체의 제2위(the second member of the Trinity)는 언제나 신인(the God-man)이시기 때문에, 무한하신 하나님과 유한한 인간 사이에서 그리스도가 행하시는 중보의 역할도 영원토록 지속된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바빙크는 그리스도가 맡으신 ‘화목의 중보직’(mediatorship of reconciliation)은 마지막 날의 새 땅에서는 중단되겠지만, ‘연합의 중보직’(mediatorship of union)은 영원히 지속된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이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성자가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는 자신의 인성을 벗어버린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이는 성경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발상이다”(개혁교의학 3권).


이제 우리가 어떻게 ‘십자가 중심성’(cross-centeredness)을 그 자체로 존중하면서도 전체 이야기 속에 자리하고 있는 특징으로 해석할 수 있는지와 관련하여 반드시 유념해야 할 두 가지 사항을 설명하고자 한다. 첫 번째는 십자가 사건의 주변부에 자리한 모든 ‘순간들’이 동등하게 주변적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부활 사건은 그리스도가 40일 동안 받으신 시험이라든가 그분이 대제사장으로서 드리는 기도보다도 우리의 구원에서 훨씬 더 지배적인 역할을 행사한다. 물론 의미의 차이는 있겠지만, 십자가와 부활이 예수님의 구원 사역에서 함께 중심을 차지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는 예수님의 구원 사역에 자리한 여러 가지 요소들을 논의할 때, 우리는 마치 중심부와 주변부가 관심을 끌기 위해 서로 다투는 것처럼, 즉 그 요소들이 서로 경쟁 상태에 있는 것처럼 다루어서는 안 된다. 실제로는 예수님의 구원 사역에 자리한 다양한 ‘순간들’을 깊이 이해하는 일이 십자가에 대해 제한된 시야가 아니라 확장된 시야를 가져다 줄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순간들은 십자가 사건이라는 위대한 한 순간과 관련을 맺게 될 때 가장 심오한 의미를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메타포를 다시 사용한다면, 소설의 넓은 문맥에 자리한 주변 이야기가 클라이맥스에 대한 이해를 더욱 강화하듯이, 주변부가 주변부로서 보여질 때 우리의 시야에서 이 중심적인 사건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게 된다. 결국 예수님의 위대한 구원 사역은 (그분의 인격이 이루는 하나의 연합처럼) 각 요소가 구별될 수는 있으나 분리될 수 없는 한 연합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Jesus Did More to Save Us than Die

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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