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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권층의 아들, 약속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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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Eric B. Watkins  /  작성일 2019-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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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Jane Carmona on Unsplash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4-26).


좋은 의미에서 주는 상이라면 누구나 받고 싶어 한다. 사업상 중요한 오퍼에는 거의 대부분 보상 시스템이 포함되어 있다. 식당에서부터 옷가게, 영화관 그리고 여행 산업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다 보상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런 보상은 순식간에 소진되고 사라진다. 어떤 항공사는 만료되지 않는 마일리지 서비스를 홍보하지만, 마일리지는 쓰는 순간 사라지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1장에 따르면, 모세는 상 주심을 바라보았다. 금방 사라지고 마는 물질적인 보상과는 달리 모세가 바라본 상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상은 하나님 그분 자신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1장 24-26절은 모세가 장성한 한 남자로 성장해가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히브리서 11장에서 이 내용은 특히 더 빨리 전개된다. 그 앞 장면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혜로 아기였던 모세가 바로의 사형 명령에서 어떻게 생명을 구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이후 모세는 아이러니하게도 바로의 궁에서 성장했다. 그는 말 그대로 특권층의 아기였다. 그의 앞에는 모든 영광과 화려함 그리고 이집트가 주는 쾌락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Pharaoh) 가문의 아들로서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번성하는 제국의 왕자였다. 모세의 머리 위에 드리워진 바로의 그늘은 이집트의 타는 듯한 태양으로부터 그를 안전하게 지켜주었다. 게다가 그의 앞에서 안락하고 쾌락을 누릴 수 있는 삶이 놓여 있었다. 모세는 한 마디로 꿈같은 삶을 살고 있었다.


누구나 그런 환경에 있다면 자신의 정체성을 쉽게 잊기 마련이다. 특권과 쾌락은 우리의 감각을 마비시키고 다른 사람들이 받는 고통은 그냥 쉽게 무시해도 관계없는, 먼 세상의 일로 여기도록 만든다. 그러나 모세는 그렇지 않았다. 히브리서 11장 26절에 의하면,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은혜로 인해 장성한 후에도 모세는 자신이 누구인지 잊지 않았다. 아니, 그는 나이를 먹어갈수록 자신이 누구인지를 더 깊이 자각했다. 바로의 집에서 자라난 특권층의 아들이 아니라 히브리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모세는 자신이 이스라엘의 아들,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의 자손, 그리고 지금 고통받고 있는 민족의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다음 장면은 참으로 상상하기 힘들 정도이다. 온 세상을 자기 발아래 둘 수 있는 모세가 바로의 집에서 누릴 수 있는 온갖 부귀를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인식했다는 사실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 누구도 모세에게 이런 선택을 강요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모세의 결정은 어떤 죄책감이나 어떤 기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모세 스스로 ‘믿음으로’ 행한 진실하고 의지적인 결정이었다(히 11:24).


믿음은 신기한 것이다. 믿음은 사람으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게 하고 또 그것이 현실이 될 것임을 확신하게 만든다. 우리의 감각이 이끌지 않는 곳으로 가도록 만드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으로 단지 바로의 집이 주는 안락함을 포기했을 뿐만이 아니라, 모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고통받는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에 동참했다. 단지 이스라엘 백성의 옷을 입고 그들의 노래를 부른 게 아니라 그들과 함께 고통을 받았다.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히 11:25).


이스라엘은 고통받는 민족이었다. 그들이 새벽부터 밤까지 노동할 때 이집트는 이스라엘 민족을 지배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노동이 주는 열매를 누리고 있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노예였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누려야 하는 최소한의 인간적인 권리마저 박탈당한 상태였다. 게다가 그들은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상태를 볼 때, 그들은 차마 하나님의 축복과 예비하심을 받는 민족이라고 볼 수 없었다. 하나님의 백성이 가장 낮은 곳에서 고통하는 바로 그때에 바로의 집에 있던 모세가 왕자로서의 모든 영광을 버리고 내려와 고통받는 이스라엘 민족과 자신을 동일시했다. 이것은 놀라운 믿음이다. 그러나 이런 질문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모세는 왜 그랬을까?


믿음은 언제나 목적을 가진다. 믿음은 맹목적이지도 않으며 근거가 없지도 않다. 확실한 근거에 뿌리를 박고 있는 것이 믿음이다. 모세가 가진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의 백성만이 가진 오래된 이야기였다. 그리고 아마도 히브리 생모로부터 배웠을 이야기, 하나님의 백성이 항상 노예로 사는 것은 아니고 언젠가는 하나님이 약속한 모든 축복을 받을 뿐더러 하나님의 언약 약속(covenant promise)을 상속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믿음의 근거를 두고 있었다. 단지 하나님의 언약 약속 뿐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아브라함에게 목소리를 들려주며 맺었던 그의 백성을 향한 언약에 대해서도 모세는 자세히 알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특히 ‘상’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은 매우 놀랍다. ‘상’이라는 말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창세기 15장 1절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한 내용을 근거로 한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하나님은 당신이 아브라함을 지키는 방패만 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궁극적으로 받을 상급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 자신이 상급이라는 것이다. 이것보다 더 나은 상급이 어디 있을까?


종종 기독교인은 천국을 장소로 생각한다. 물론 이것도 맞다. 그러나 천국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하나의 공간,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를 영원히 누리는 공간으로 보아야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나오는 것처럼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에 맞게 우리는 그분에게 영광을 드리는 동시에 그분을 즐겨야 한다. 하나님이 없는 천국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분이 거기 계심으로 천국은 이 세상에서 창조된 가장 축복받은 장소가 된다.


자, 그럼 모세가 바라본 상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하나님 자체였다. 하나님은 우리가 종말에 누릴 상급이다. 하나님은 우리 믿음의 목적이자, 우리의 방패 그리고 가장 두려운 적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자신감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런 놀라운 이야기를 한 단계 더 발전시켰다. 그는 모세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6).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나는 놀라움을 느낀다.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자발적으로 고통을 겪었던 모세가 어떻게 그것이 그리스도의 고통에 동참하는 것이라는, 그 놀라운 진리를 이해할 수 있었던 걸까? 이 질문에 답을 하는 건 쉽지 않다. 어쨌든지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히브리서 저자는 모세가 자신의 존재적 한계를 뛰어넘어 그리스도의 날과 그의 고난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확신했다. 모세는 구세주가 올 것을 믿었다. 그는 하나님이 구원과 상속의 약속을 지킬 것을 믿었다. 그는 천국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짐 엘리어트와 또 다른 수많은 선교사들처럼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신했다.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하여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자는 절대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 모세는 믿음으로 천국의 상급을 바라보았다. 바로 하나님 그분을 바라본 것이다.


인생은 상으로 가득하다. 이 세상은 많은 상을 나눠준다. 신용카드를 많이 쓰면 받는 상도 있고, 또 어떤 상은 ‘순간적인 쾌락의 죄’라는 얼굴을 가지고 오기도 한다. 그러나 세상이 주는 상에는 모두 쓴 대가가 있고 그 어떤 것도 무료가 아니다. 오로지 복음 속에서만 우리는 진짜 거저 주는 상을 만난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있어야 할 바로 그 십자가에서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견디며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졌다. 그렇게 해서 그가 이룬 것이 바로 언약의 약속 그대로 완전하고 거저 주는 구원이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상을 받은 모세는 노력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노력해서 은혜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이 주시는 은혜와 상속의 약속을 받아들일 때, 그것은 내 십자가를 내가 지겠다는, 달리 말해서 다른 이들의 고통에 동참하고 그리스도를 위한 수모를 기꺼이 감당하겠다는 기쁨에 넘치는 특권이다. 세상이 주는 것이 무엇인가? 세상이 주는 것을 감히 하나님 자신과 비교나 할 수 있을까? 세상이 주는 것은 하나같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항공사의 마일리지 같은 것이 아닌가? 그러나 만약에 하나님이 상급이라면, 우리 앞에는 이제 결코 사라지지 않을 뿐더러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 놀라운 상이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전부이다. 그렇기에 그분을 가지는 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다 주어졌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오로지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출처: www.ligonier.org

원제: Son of Privilege, Son of Promise

번역: 무제


작가 Eric B. Watkins

에릭 와킨스 박사는 플로리다주 성어거스틴에 위치한 Covenant Presbyterian Church의 담임목사이며, 'The Drama of Preaching'의 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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