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Edition
한국어
UNITED STATES
AFRICA
عربي
AUSTRALIA
BRASIL
CANADA
正體中文
简体中文
ESPAÑOL
فارسی
FRANÇAIS
ITALIA
NEDERLANDS
SHQIP
SLOVENSKÝ
후원
하기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시리즈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리뷰
서평
새로 나온 책
뉴시티교리문답
뉴스
국내
국제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검색
사이트 내 전체검색
검색어 필수
검색
추천 검색어
마음
여성
배움
성경
신앙과일
크리스찬
전체메뉴
01
ARTICLES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02
VIDEOS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03
SERIES
시리즈
04
CONTACT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05
QT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06
REVIEWS
도서
서평
새로 나온 책
07
The New City Catechism
뉴시티교리문답
08
NEWS
뉴스
국내
국제
09
ABOUT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10
GIVE
후원
QT
아침 8시 매일 큐티
연도별
SELECT CONCAT(YEAR(wr_4)) ym FROM g5_write_qt1 where wr_4 <= '2025' GROUP BY ym order by wr_4 desc
2024
2023
2022
2021
2020
2019
2018
날짜순
조회순
이름순
양처럼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라
2019-01-11
시편 95편 6-7절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하나님은 성경의 말씀으로 우리의 영혼을 위로하신다. 우리를 결코 떠나거나 버리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히 13:5)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깨끗하게 정화하기 위해 불같은 시련을 뚫고 나가게 하신다는 확신을 심어준다(사 43:1-2). 또한 의롭다 하신 자들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라는 약속(롬 8:29-30)은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는 자들은 영원히 보존되며 구원을 잃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해준다.오늘의 본문은 하나님이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 곧 만물을 그 손으로 붙들고 계시는 분이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그런 위대한 능력 때문에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영원히 안전하게 보호하실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물론 이 세상에서 위험한 일을 절대 겪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결국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히 온전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알고 있는 그분의 양들은 그분 앞에 절하며 경배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시 95:6-7). 한편, 성경은 스스로 하나님의 양을 자처하는 사람들 모두가 그분에게 속한 것은 아니라고 가르친다(마 25:31-46; 요일 2:19). 언약의 공동체 안에는 양의 탈을 쓴 늑대(또는 염소)가 존재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기 전까지는 보이는 교회 안에서 알곡과 가라지를 완전하게 구분하는 일이 불가능하지만, 구원자이신 주님은 우리가 재림을 기다리는 동안 현세에서도 이따금 늑대나 염소를 골라 내신다.그렇다면, 주님은 오늘날 양과 염소를 어떻게 골라 내실까? 그것은 염소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시는 사역을 통해 이루어진다. 오늘의 본문은 출애굽 세대가 므리바에서 했던 것처럼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물이 없다고 불평하며 원망했다(출 17:1-7; 민 20:2-13). 그 태도는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심으로써 자신의 신실하심을 드러내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결국 광야 세대는 마음을 강퍅하게 한 탓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시 95:10-11). 이 사건이 주는 교훈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대대로 적용된다. 강퍅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면, 마지막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다.물론 이것은 진정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은 모두 영화롭게 된다(롬 8:29-30). 오늘의 본문은 성도의 견인에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역할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주의를 기울이고, 그분을 신뢰하며, 죄를 멀리해야 할 책임이 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들은 모두 그렇게 한다. 따라서 우리가 인내하며 창조주를 섬기는지를 확인하면, 우리 자신이 선택 받았는지의 여부를 알 수 있다.코람 데오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누구도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약속은 사실이고 그분의 경고는 거짓이다'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약속이 사실이기 때문에, 그분의 경고도 사실이다"라고 주석했다.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경고를 발견했거든,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선택 받은 자는 결코 구원을 잃지 않는다. 그러나 성령께서 마음속에 역사하시는 자들은 모두 경고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인다. 하나님은 경고의 말씀을 선택 받은 자들의 믿음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신다. 성경은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모두들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을 끝까지 믿을 수 있기를 기도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Listening Like Sheep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자기 백성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2019-01-10
잠언 15장 29절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 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페이스북이나 트위터와 같은 소셜미디어가 개발된 오늘날에는 그런 수단을 통해 기도를 부탁하거나 제안하기도 하고, "나는 기도의 능력을 믿습니다. 동의하시면 클릭하세요"와 같은 말을 전하면서 친구나 지인들을 찾는 일이 매우 흔하게 이루어진다. 그런 목적을 위해 소셜미디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의도는 선하다. 하나님이 그런 수단을 사용해 자기 백성을 하나로 결집시켜 자신의 보좌 앞에 나오게 하신다는 사실을 부인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러나 그런 일이 온라인상에서 흔히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은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과 기도 자체의 의미를 오해하게 만들 소지가 매우 높다. 예를 들어, 비신자들이나 종교적 신념이 없는 사람들이 우리를 대신해 기도해 주겠다고 약속하는 말을 들을 때면, 그들이 창조주 하나님과 그분이 기도를 들어주시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오늘의 본문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드리는 기도가 효력을 지닌다는 생각은 잘못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준다. 이 잠언은 하나님이 오직 “의인의 기도”만을 들어주신다고 가르친다. 물론 하나님은 의롭지 않을 사람들이 드리는 기도나 간구도 모두 알고 계신다. 여기에서 ‘들으신다’라는 말은 ‘관심을 기울인다’, ‘응답한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은 의로운 사람들, 곧 잠언에 따르면 하나님과 올바른 언약 관계를 맺은 사람들의 기도에만 응답하신다. 잠언 저자는 창조주 하나님이 완전한 사람들의 기도에만 응답하신다고 말하지 않았다. 물론 우리의 경우는 신약성경의 가르침 덕분에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중보의 기도를 드리실 때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를 완전하게 해 주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롬 8:26-27; 히 7:25; 요일 2:1). 그는 단지 하나님을 위해 거룩하게 구별되어 그분의 형상을 닮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그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은 “악인을 멀리”하신다. 여기서 ‘악인’은 하나님과 올바른 언약 관계를 맺지 못한 사람을 가리킨다. 악인은 비록 모범적인 시민으로 사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공간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축복과 교제의 의미에서 그런 사람을 멀리하신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즉 응답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그분의 자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얻을 수 있는 양자됨을 거부했다(요 1:12-13). 매튜 헨리는 악인들에 관해 이렇게 주석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지도 않고, 그들과 교통하지도 않고,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지도 않고, 그들이 어려울 때 그들을 돕지도 않으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의 기도나 예배를 미워하신다(잠 15:8).코람 데오하나님은 아직 자신의 가족에 속하지 않은 죄인들이 그리스도를 믿기 위해 구원을 비는 기도에 응답하신다.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이유는 그들이 죄의 값을 치를 수 있는 공로를 세웠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구원자를 찾기 전에 먼저 그들을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셔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친히 그런 기도를 드리도록 감동하시고, 응답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의를 근거로 하여 기도에 응답하신다. 그 이유는 아담의 타락 이후로 악한 본성을 지니게 된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God Who Hears His People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
2019-01-09
시편 106편 7절 “우리의 조상들이 애굽에 있을 때 주의 기이한 일들을 깨닫지 못하며 주의 크신 인자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바다 곧 홍해에서 거역하였나이다”하나님의 위대한 행위와 축복을 망각하는 것은 흔히 저질러지는 심각한 죄 가운데 하나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과거를 잊지 말라고 거듭 당부하셨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분이 무슨 일을 행하셨고, 또 자신들이 그분에게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기억해야 한다. 예를 들어, 신명기 9장은 고대 이스라엘 백성에게 또 다시 죄를 지어 이전 세대처럼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는 일이 없으려면 광야에서 저질렀던 죄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바울은 디모데에게 어떤 상황에서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함으로써” 인내하라고 권고했다(딤후 2:8-13).시편 106편의 저자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과거를 기억하라고 당부했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분의 율법을 지키지 못했던 일을 기억하지 않으면, 자기들을 축복하겠다는 언약의 약속을 이루어달라고 하나님께 올바로 간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시 106:4-5).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못한 우리의 죄를 잊지 않아야만 회개할 수 있고, 또 언약을 충실히 지키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다.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갈아]”(시 7:12) 심판을 베푸신다.오늘의 본문은 시편의 기도를 드리는 백성들이 과거를 기억함으로써 민족의 악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역사를 열거했다. 시편 저자가 언급한 “죄들” 가운데는 시내 산 아래의 호렙에서 금송아지를 숭배한 것이 포함된다(시 106:19-23; 출 32장). 이 우상 숭배가 특별히 가증스러웠던 이유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거룩한 민족으로 세우기 위해 언약의 계명을 계시하신 장소로부터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 죄를 심판하신 결과로 약 3,000명이 목숨을 잃었고, 많은 사람이 재앙으로 고통을 당했다(출 32:25-29, 35). 그러나 시편 저자는 민족 전체가 멸망하지 않고, 언약의 중보자인 모세의 기도를 통해 구원받은 사실을 언급했다(시 106:23; 출 32:1-14).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큰 죄를 지었더라도 죄를 뉘우치기만 하면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용서받을 수 있다는 진리를 상기시켜 준다(딤전 2:5).이 밖에도 시편 저자는 가나안 족속을 모두 쫓아내지 못한 것, 자녀들을 이방의 우상들에게 제물로 바친 것과 같은 고대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나열했다(시 106:24-43). 그러나 이 시편은 절망이 아닌 희망의 어조로 끝을 맺는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구원을 부르짖을 때 그들을 축복하겠다는 약속을 기억하신다(시 106:44-48).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하고 믿음으로 돌이킬 때도 그 약속을 기억하신다.코람 데오우리는 잊기를 잘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 충실했던 일을 실제보다 크게 부풀려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의 율법을 어겼을 때는 그 일을 잊지 않고 기억해야만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우리가 그래야 하는 이유는 절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큰 은혜를 기억하고 그 놀라운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분을 더욱 열심히 섬기기 위해서다. 오늘은 각자 최근에 지은 죄를 돌이켜 생각해 보고, 아직 회개하지 않은 죄가 있거든 서둘러 고백하며 하나님의 긍휼에 감사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자.출처: www.ligonier.org원제: A Call for Us to Remember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아름다움의 역할
2019-01-08
출애굽기 26장 1절 “너는 성막을 만들되 가늘게 꼰 베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을 정교하게 수 놓은 열 폭의 휘장을 만들지니”16세기 종교개혁 당시, 종교개혁자들은 칭의의 교리와 성경의 권위만이 아니라 예배의 개혁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칼빈은 예배에 성경이 명령하는 것만을 포함시키기 위해 예전을 개혁하는 데 많은 노력을 쏟아 부었다. 그는 마리아와 성인들의 형상을 우상처럼 숭배하는 관습을 제거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그로 인해 그는 강력한 성상파괴자로서 이름을 날렸다. 그는 사람들이 우상 숭배의 유혹을 받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 교회 건물에서 보이는 형상들을 제거했다. 그 후로 개혁주의 전통의 일각에서 장식을 가급적 간소화한 예배당을 지으려는 강한 경향이 나타났다. 성경의 주제와 일화를 묘사한 그림이나 채색 유리와 같은 매개체를 사용하는 다른 신학적 전통과는 달리, 개혁주의 신자들은 예배 장소를 장식물로 꾸미기를 주저하는 경향이 많다.사람들이 우상 숭배의 유혹을 받을 것을 우려해 장식물로 예배 환경을 조성하는 일을 자제하려는 의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급진적 성상파괴주의, 곧 교회 건물에 사람이나 주제나 사건을 묘사한 그 어떤 장식물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너무 지나친 면이 없지 않다.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에서 형상을 만들어 그 앞에 절하는 것을 금지하신(출 20:4-6) 하나님이 또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막을 아름다운 색채와 그룹을 비롯해 다른 피조물의 형상으로 꾸미라고 명령하셨다(출 26장). 하나님은 항상 일관되시기 때문에, 형상을 금지하는 두 번째 계명이 성삼위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모이는 장소에 예술 작품과 보이는 형상을 무조건 다 금지하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단지 형상을 숭배하는 것과 피조물을 우상처럼 다루는 행위가 금지되었을 뿐이다. 예배당에 보이는 장식물을 일체 금지한다는 의미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하나님이 성소를 아름답게 꾸미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은 그분의 본성, 곧 아름다움의 기준이 되시는 아름다운 하나님으로서의 본성을 여실히 보여준다(시 27:4). 아름다운 예배당은 창조주에 관한 이런 진리를 전하는 데 도움을 준다. 예배당의 외관이 항상 무엇인가를 전달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심지어 가장 단순한 예배당도 하나님의 본성과 그분이 원하시는 예배에 관한 신자들의 관점을 드러낸다.코람 데오장식물로 예배당을 꾸미는 것이 적절한지 여부를 둘러싸고 개혁주의 전통 내에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극히 아름다우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기꺼이 동의할 수 있다(시 27:4).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나 말씀을 가르칠 때나 하나님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무엇보다 훨씬 더 사랑스러운 존재이시고, 장차 우리가 그분의 아름다우심을 영원히 즐거워할 것이며, 오직 그것만이 우리의 가장 깊은 필요와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Role of Beauty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할 때가 온다
2019-01-07
전도서 3장 10-11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도서의 요점 가운데 하나는 세상에 있는 많은 것의 일시적인 속성과 그런 현실에 비춰 인생을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해,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좋은 것을 너무 지나치게 즐거워해서도 안 되고, 또 우리가 종종 경험하는 삶의 허무함에 너무 지나치게 절망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격언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인간의 마음속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전 3:11). 우리는 죽음으로 인간의 존재가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모든 인간의 앞길에는 하나님 앞에서 복을 누리며 영원히 살거나 불못에서 영원히 고통을 당하거나 둘 중에 한 가지의 종말이 기다리고 있다(계 20:11-21:27). 세상에서의 즐거움이 덧없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오늘 여기에 있는 것이 내일이면 사라질 수 있다. 오늘은 건강에 아무런 이상을 못 느끼지만 내일은 말기 암 판정을 받을 수도 있다. 오늘은 잔칫날이지만 내일은 직업을 잃고 궁핍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오직 하나님 외에는 그 무엇도 너무 강하게 붙잡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전도서 3장 1-8절은 서로 반대되는 것을 둘씩 짝지어 삶의 현실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전 3:2). 오늘은 웃지만 뜻하지 않은 불행이 찾아오면 곧 웃음이 슬픔으로 변할 수 있다(전 3:4). 심지어는 사랑할 때도 있고 미워할 때도 있다(전 3:8).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으신다면, 그런 현실은 삶을 무의미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왜냐하면 그런 순환의 고리를 깨뜨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다 지키는"(전 12:13) 사람들은 오히려 그런 현실을 통해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분이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우리가 좋은 일이 있을 때 기뻐할 수 있고 나쁜 일이 있을 때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이유는 어떤 비인격적인 운명이 아니라 인격적인 하나님이 만사를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의 삶을 유지시켜 주시고, 모든 은밀한 일을 심판하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에게 상을 주시고, 구주를 거부하는 자들을 정죄하신다(전 3:14; 살전 1:9-10).매튜 헨리는 이렇게 주석했다. "우리의 눈에는 가장 우발적이고 우연하게 보이는 일들도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알고 계시는 바에 따라 어김없이 이루어진다. 그것들의 때는 확실하게 정해져 있어 그보다 조금도 앞서거나 조금도 늦는 법이 없다." 하나님은 만사의 때와 기한을 정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일 가운데서 우리를 인도해 궁극적인 영광을 얻게 하실 것이라고 굳게 확신할 수 있다.코람 데오트럭들이 영구차를 뒤따르는 광경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다. 무덤에 가는 사람들을 뒤따르는 트럭들의 행렬은 없다. 왜냐하면 죽을 때는 이 세상에서 소유했던 것을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소유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할 때가 온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않고, 그분의 영원한 관점으로 삶을 바라보지 않으면, 버려야 할 때 버릴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갖추기 어렵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Here Today, Gone Tomorrow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2019-01-04
시편 102편 25-27절 “주께서 옛적에 땅의 기초를 놓으셨사오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늘 변하는 세상 속에서 모든 사람이 안전한 삶을 갈구한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품 안에서 안식처를 찾는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모든 희망을 건다. 또한 국가의 지도자들이 모든 재앙으로부터 자신들을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라고 믿고 정부를 신뢰하는 사람들도 많고, 돈을 충분히 모으면 무사할 것이라고 믿고 은행에 저축한 돈을 의지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그러나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없는 대상에 희망을 두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다. 정부는 흥망성쇠를 거듭하고, 저축한 돈은 경제적 위기가 닥치면 단번에 휴지조각이 될 수도 있다. 피조 세계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우리가 갈구하는 안전한 삶을 보장하지 못한다. 오직 변하지 않는 존재만이 우리가 필요로 하는 안전한 삶을 제공할 수 있다.시편 102편의 저자는 그런 사실을 옳게 인식했다. 그가 불안전하고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성품을 옳게 이해했기 때문에 시련과 환난을 잘 견뎌낼 수 있었다. 그가 하나님이 시온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고 확신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시 102:13)? 그는 어떻게 창조주께서 시온을 건설하시고, 빈궁한 자들의 기도를 들어 주실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을까(시 102:16-17)? 모든 민족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배할 날이 올 것이라는 그의 확신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시 102:18-22)?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변은 다 똑같다. 그 이유는 그가 전능하신 하나님이 결코 변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옳게 이해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변하지 않으신다면, 자기 백성을 구원하겠다는 그분의 약속도 반드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딤후 2:12).시편 저자는 피조물 가운데 가장 영구적인 것으로 보이는 하늘과 땅의 기초와 하나님을 비교함으로써 그분의 변하지 않는 본성을 묘사했다. 모든 것은 사라지지만, 하나님은 영원히 한결같으시다(시 102:25-28). 이런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그 교훈은 오직 창조주만이 우리를 끝까지 안전하게 지켜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존 칼빈은 이렇게 주석했다. "온 세상이 겪는 변화가 멸망의 전조, 곧 그 전주곡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온 세상이 종말을 향해 나간다면, 인류는 결국 어떻게 되겠는가? 모든 민족이 멸망할 운명이라면, 사람들에게서 어떤 안전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오직 하나님 외에는 다른 어떤 것에서도 안전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코람 데오성경은 하나님을 종종 바위에 비유한다. 그럴 만한 이유가 충분하다. 바위는 굳건하고, 안정되어 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비유는 단지 비유일 뿐이다. 심지어 바위도 침식과 같은 자연 현상을 통해 변하지만, 창조주는 스스로 변하지도 않으시고, 또 다른 요인에 의해 변화되지도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저하지 않고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이다.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하나님이 절대 변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아는 우리는 참으로 복되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God Unchanging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수고 중에 누리는 즐거움
2019-01-03
전도서 5장 18절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에서 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보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그것이 그의 몫이로다”재물을 사랑하는 사람, 곧 부를 쌓는 것을 삶의 주된 목적으로 삼는 사람은 재물로 인해 만족할 수 없다. 그런 사람은 항상 더 많은 재물을 원한다. 더욱이 그들은 형편이 좋을 때만 얻어먹으려고 몰려드는 친구들은 물론, 합법적이거나 불법적인 수단을 사용해 돈을 뜯어내려는 사람들도 참아내야 한다(전 5:10-11).전도자는 부유한 사람이 자신이 수고한 일의 열매를 누리지 못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약간의 과장법을 사용해 부를 삶의 주된 목적으로 삼으면 결코 지속적인 만족을 얻을 수 없다고 가르친다. 물론 전도서는 크게 형통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재물이 주는 행복을 느낄 수 없다고 단정하지 않는다. 오늘의 본문에서 알 수 있는 대로 창조주께서는 부유한 사람들에게 더러 그것을 누릴 수 있는 은혜를 베푸신다(전 5:19). 전도자는 경제적인 성공에서만 기쁨을 찾으려고 하지 말고, 그런 성공을 이루는 과정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일 때도 즐거움을 누리라고 권고했다. 수고 중에 즐거움을 누리는 것은 좋은 일이다(전 5:18).이런 지혜의 가르침은 오늘날의 문화 속에 만연되어 있는 노동에 대한 태도를 교정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모두 주말을 위해 일하네"라는 노랫말에서부터 "매주 닷새는 낚시를 가고 이틀만 일하자"라는 범퍼 스티커에 이르기까지 대중문화는 노동은 고된 일일 뿐이고, 여가 시간을 늘려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 타락한 세상에서 노동할 때 마주치게 되는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무시해서는 안 되겠지만, 노동과 여가에 관한 요즘 사람들의 생각은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하지 않는다. 죄를 지어 타락하기 전에도 인간에게는 노동의 명령이 주어졌다(창 1-2장). 청소부, 의사, 가정주부, 교사, 기술자, 식당 점원 등, 어떤 노동에 종사하더라도 우리는 노동을 통해 인생의 많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노동은 피해야 할 악이 아니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하나님의 선물이다.노동을 고된 일이 아닌 즐거움으로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대답의 일부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라는 바울의 가르침에서 찾을 수 있다(골 3:23). 그리스도의 멍에는 쉽고 그분의 짐은 가볍다(마 11:29-30). 따라서 주님을 위해 일하면, 그분이 우리의 짐을 가볍게 해 주실 것이다. 그러면 가장 어려운 환경에서 일할 때조차도 마음속에서 항상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코람 데오매튜 헨리는 이렇게 주석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즐겁게 사용하면, 주신 분을 영화롭게 하고, 합리적이고 관대하게 처신하고, 선물의 취지를 잘 살릴 수 있고, 세상에서 선을 행하고, 소유한 것을 통해 최상의 유익을 얻어 냄으로써 인정과 위로를 받을 수 있다." 범사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면 노동을 통해 즐거움을 얻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추구하면 성령을 통해 평화와 만족을 허락하실 것이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Enjoyment in Our Toil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마지막 심판의 희망
2018-12-31
전도서 3장 16-17절 “또 내가 해 아래에서 보건대 재판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고 정의를 행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도다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소망하는 일과 모든 행사에 때가 있음이라 하였으며”이 세상이 전부이고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면, 인생은 근본적으로 무의미하다. 이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초월적인 목적도 없고, 옳고 그른 것도 없으며, 어떤 일에 대한 도덕적인 절대 기준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제는 그릇된 것이 내일은 옳은 것이 될 수 있고(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참된 판단도 불가능하다. 그런 경우에는 모든 것이 상대적일 뿐이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면, 의미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리는 온전히 선하신 창조주가 존재하신다면, 삶은 의미가 있다. 하나님의 계획이 좀 더 온전하게 드러나고, 우연의 일치처럼 보였던 사건들의 목적이 밝혀지고, 모든 불의한 것이 옳게 시정될 때가 이르면, 겉으로 부조리하고 허무하게 보였던 삶이 영원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전도서를 이해하는 열쇠는 전도자가 전하고자 하는 매우 간단한 한 가지 요점, 즉 오직 하나님만이 삶의 의미를 부여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있다. 오늘의 본문도 마찬가지다. 전도자는 정의가 시행되어야 할 곳에 악이 종종 활개를 치는 현상을 발견했다. 우리도 그런 현실을 직접 목도하는 경우가 많다. 가장 훌륭한 정의 체계를 갖춘 곳에서도 범죄자들이 불의한 재판관을 뇌물로 매수해 처벌을 받지 않고 풀려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정의를 돈으로 사고파는 일이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범죄자들은 정의의 심판을 모면하고, 무고한 자들이 되레 처벌을 받는다. 예수님에 대한 재판이 가장 대표적인 본보기다. 예수님이 재판을 받을 때 거짓으로 증언했던 사람들의 진술은 서로 일치하지 않았다. 재판관은 그런 증언들을 듣고 예수님에 대한 재판을 철회해야 마땅했지만, 그분은 유죄 판결을 받으셨다(막 14:53-65; 신 17:6). 타락한 세상에서는 정의가 왜곡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정직한 무신론자라면, 이런 현실 앞에서 선이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절망하거나 프리드리히 니체가 말한 ‘권력에의 의지’를 통해 어떻게든 권세를 잡아 자신에게 유리하게 사용하려고 할 것이 틀림없다. 그들은 우리의 존재가 소멸되기 전에 원하는 것을 다 하고 죽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렇게 철저하고 완전한 무신론자는 거의 없다. 그 이유가 오늘의 본문에서 발견된다. 전도자는 세상에서 정의가 항상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의인과 악인을 심판하실 날이 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런 지식은 인간의 마음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데서 비롯된 결과다(창 1:26-28). 가장 노골적인 불신자들조차도 하나님이 만민을 심판하실 것을 알고 있다. 그런 지식이 그들이 절망 속에 매몰되거나 독재자가 되지 않도록 막아준다.코람 데오완전한 심판의 날이 온다는 것을 아는 지식은 신자들에게는 큰 희망을 준다. 그 날이 되면 모든 것이 옳게 제자리를 찾고, 불의한 것이 모두 시정되고, 각 사람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게 될 것이다. 신자들은 천국을 얻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완전한 복종과 그에 대한 보상이 그들의 것으로 간주될 것이기 때문이다(고후 5:21). 그와 달리 불신자들은 죄로 인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보혈과 의가 그들의 죄를 가려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Hope of Final Judgment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다른 사람들의 조언을 구하라
2018-12-28
잠언 20장 18절 “경영은 의논함으로 성취하나니 지략을 베풀고 전쟁할지니라”1944년 6월 6일은 20세기, 아니 세계 역사상 가장 중요한 날 중에 하루다. ‘D-Day’로 잘 알려진 그날에 연합군은 나치에게 점령된 프랑스를 해방하고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를 물리치기 위해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감행했다. 16만 명 이상의 군대가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했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결국 상륙 작전은 성공했고, 연합군은 서유럽에 교두보를 확보했다. 그들은 그곳에서부터 차츰 ‘추축국’(이탈리아-독일-일본 연맹)을 패퇴시키며 2차 세계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연합군이 그 계획을 실행하기 오래전부터 기대해 온 노르망디 상륙 작전은 여러 달에 걸쳐 논의에 논의를 거듭한 결과물이었다. 연합군을 구성한 여러 국가의 최고의 전략가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기밀을 수집하고, 물자를 마련하는 등, 성공적인 상륙 작전을 계획하고 실행하기 위해 많은 논의가 이루어졌다.전쟁의 역사에 정통한 사람들은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 많은 논의를 거쳐 계획을 수립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런 사실은 오늘의 본문으로 선택한 성경의 잠언에 담겨 있는 지혜를 잘 보여 준다. 오늘의 본문은 ‘지략을 베풀어’ 전쟁을 하게 하려면 먼저 많은 의논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 전쟁을 이끄는 사람은 왕이었다(창 14:1-12). 이 잠언의 말씀은 그런 왕들의 전쟁을 비유로 삼아 잠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에게 적용했다. 잠언은 본래 지혜로운 부모가 자기 자녀에게 주는 교훈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잠 1:8), 왕들의 전쟁을 비유로 삼은 내용을 너무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이 잠언은 왕들과 군대의 전쟁에도 직접 적용할 수 있지만, 그렇게 적용이 끝나면 안 된다. 이 잠언은 여러 종류의 어려운 상황에 직면한 다양한 유형의 지도자들에게 적용할 수 있다. 지도자들은 큰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혼자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사업가, 목회자, 공무원, 관리자, 부모 모두에게 이 잠언이 적용된다. 지혜로운 지도자는 항상 다른 사람의 조언을 구해야 한다.오늘의 본문은 아무 조언이나 다 받아들이라고 권고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지혜롭고 경건한 조언만이 우리를 인도할 수 있다(잠 1:7). 따라서 조언자나 정신적 스승을 선택할 때는 극도로 신중해야 한다. 지혜롭고 경건한 조언은 큰 성공을 거두지만, 어리석고 경건하지 못한 조언은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코람 데오인생에서 정신적 스승, 친구, 조언자를 선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별로 없다. 평범한 지도자도 지혜로운 사람들과 어울리면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 비록 지도자가 아니더라도, 우리를 성공적인 부모와 직장인과 평신도가 되도록 도와줄 수 있는 지혜롭고 경건한 친구가 필요하다. 따라서 사귈 사람을 선택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 우리 모두 늘 지혜롭고 경건한 조언에 귀를 기울이려고 노력하자.출처: www.ligonier.org원제: Our Need for Counsel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피조 세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2018-12-27
시편 29편 3절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존 칼빈은 시편 29편을 주석하면서 "온 천지에 드러난 일반적인 자연 현상 가운데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게 만드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피조 세계의 질서를 통해 영광을 나타내신다. 심지어 평생 성경 한 번 읽어 보지 못한 사람들도 창조주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분께 경배와 감사를 드린다. 이런 사실은 인간의 경험을 통해 분명하게 확인된다. 무신론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사실상 그렇게 많지 않다. 최근의 연구 조사에 따르면, 세계 인구 가운데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2퍼센트도 안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로마서 1장 18-32절에 따르면, 심지어는 그런 사람들조차도 현실, 곧 스스로가 사실로 알고 있는 진리를 억지로 부인할 뿐이다. 진정한 무신론자는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무신론자를 자처하는 행동은 곧 스스로의 양심과 지각을 통해 분명한 사실로 인식되는 진리를 고의로 거부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피조 세계는 하나님을 증언한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통해 피조 세계가 창조주에 관해 증언하는 진실을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오늘의 본문은 그런 원리를 보여 준다. 다윗은 "권능 있는 자들에게" 거룩하신 하나님께 경배하고 영광을 돌리라는 말로 이 시편의 서두를 열었다(시 29:1-2). 시편 29편에서 "권능 있는 자들"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싸고 있는 천사들과 하늘의 피조물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시 82:6; 89:6). 따라서 다윗은 그룹과 스랍들을 향해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한 것이다. 물론 그의 말에는 우리도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권능 있는 존재들이 하나님께 경배한다면, 우리는 더욱더 그래야 마땅하지 않겠는가?하나님의 권능은 말씀의 능력을 통해 나타난다. 말씀의 능력은 백향목을 꺾어 쓰러뜨린다. 나무들이 쓰러지는 이유는 제멋대로 구는 자연의 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 때문이다(시 29:5). 하나님의 능력은 또한 부드럽게 나타나기도 한다. 그분의 능력으로 암사슴이 새끼를 낳는다(시 29:9). 그분의 능력은 동물들만이 아니라 삼림도 진동시킨다(시 29:9). 하나님은 육지와 바다와 공중의 짐승들을 다스리신다(욥 39장). 그런데도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큰 죄에 해당한다. 칼빈은 이렇게 주석했다. "하나님의 소리가 들짐승들에게 그런 능력과 영향을 미치는데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면, 그보다 더 무분별하고 터무니없는 일은 없다. 하나님이 자연의 현상을 섭리하고 다스린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감사를 모르는 불경죄에 해당한다. 들짐승들까지 복종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놀랍고도 탁월한 사역을 통해 지혜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진정 혐오스러운 우둔함이 아닐 수 없다."코람 데오세상에는 무신론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창조주가 존재한다는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한다. 그러나 진정한 무신론자는 아무도 없다. 피조 세계의 질서 자체가 사람들에게 옳은 것을 행하라고 가르치며 모든 역사를 정해진 목적(곧 하나님의 영광이 온전하게 드러나는 방향)을 향해 이끄시는 창조주이자 위대한 설계자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분명하게 증언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God’s Glory in Creation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처음
이전
186
페이지
187
페이지
188
페이지
열린
189
페이지
190
페이지
다음
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