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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플터치 & 큐티

와플 QT_비처럼 내리는 것
2021-06-19


주말칼럼_비처럼 내리는 것

 

어린 시절, 우리 집 지붕에는 검은 기름종이를 덮었습니다. 그 당시, 기와를 올리지 못하는 가난한 집들은 대부분 ‘루핑’이라고 부르는 검은 기름종이를 지붕에 덮었습니다. 그리고 루핑이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못을 박거나 시멘트 벽돌 같은 것으로 군데군데 눌러놓았습니다. 루핑은 잘 찢어지기 때문에, 비가 조금 많이 오기만 하면 찢어진 루핑 사이로 비가 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지붕에 올라가 기름종이 남은 쪼가리를 군데군데 덧붙이셨습니다.


빗물이 새는 방안에서는 대야, 요강, 양동이를 동원했습니다. 천정에서 빗물 새는 곳이 늘어나면, 깡통, 양재기, 주전자, 바가지, 심지어 밥그릇까지 갖다 놓아야 했습니다. 용기마다 재질과 크기가 다르기 때문에 그 떨어지는 리듬과 가락도 제각각이었습니다.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에 맞춰 젓가락으로 깡통들과 용기들을 함께 두들기는 재미도 또한 쏠쏠했습니다. 어릴 때 비 오는 날엔, 이런 ‘음악’이 있었습니다.


비가 내리면, 저는 마루에 앉아서 비를 구경했습니다. 처마 밑 마루에 앉아,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줄기를 한참 올려다보고 있으면, 비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라, 집이 하늘로 올라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수 없는 빗방울이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있으면, 빗방울을 계속 맞은 땅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패여 갔습니다. 패인 모양이 연결되면서 조그만 골이 생기고, 그 골을 따라 물의 흐름이 생기고, 그 흐름이 서로 만나기도 하고 다시 헤어지기도 했습니다. 그걸 한참 동안 들여다보면서, 그게 세상의 축소판이라고 상상하기도 했습니다.


파란 종이우산을 쓰고 마당에 나가 꽃밭에 쪼그려 앉으면, 달팽이들이 기어 나와 풀잎을 따라 산책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작은 홍수를 맞은 개미들이 집을 찾아가느라고 우왕좌왕하는 꼴도 보고, 비 맞은 꽃잎 사이사이에 맑은 물방울들이 맺혀 반짝이는 것도 보았습니다. 우산을 타고 흘러내린 굵은 물방울들이 어떤 꽃잎을 ‘꽝’ 때리는 것도 보고, 그 바람에 땅에 떨어진 달팽이가 놀라서 온몸을 껍질 속에 숨기고 죽은 듯 가만히 있는 것도 보았습니다. 어릴 때 비 오는 날엔, 이렇게 자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황홀함이 있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우리 집이 아파트로 이사하고, 결혼을 하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비는 제 삶에서 점점 멀어져 갔습니다. 더 이상 대야와 깡통에 떨어지는 빗소리의 음악도 들을 수 없었고, 비 내리는 마당에 쪼그려 앉아 바라보는 황홀함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비가 온다는 것이 오히려 제 생활에 불편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비가 오면 자동차가 금방 더러워지고, 교통 체증이 심해지고, 비를 맞아 옷이나 몸이 젖는 게 불편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비는 제게서 멀어져갔을 뿐 아니라 불편하고 싫은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몇 해 전 여름, 유난히 비가 자주 내렸습니다. 그 여름날, 창문을 열고 빗소리를 들으며 창 안으로 살짝 튀어 오르는 빗방울도 느껴보았습니다. 오랜만에 제 마음속에 되돌아온 빗소리의 음악을 듣고, 빗소리의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릴 때 친근했던 비가 제게로 되돌아와 준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빗소리가 더 잘 들리도록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법률이나 신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책을 몇 권 골라 읽었습니다.


얼마나 평안한 시간인지요. 제게는 중요한 안식이었고, 질식하고 있던 제 영혼이 숨 쉬는 것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간에, 누구에게나 차별없이 떨어지는 비처럼 제게도 차별 없이 내려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떠올렸습니다.


저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실감하기 시작했을 때로 돌아간 느낌이었습니다. 순진한 믿음을 가졌을 때가 생각났습니다. 하지만 많은 시간 동안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섞여 살아가는 이 세상을 거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동이 제 마음속에서 점점 식어가기도 했습니다. 어느덧 하나님의 은혜나 하나님과의 교제가 삶의 걸림돌이 되어, 그것이 불편하고 싫은 것으로 느껴질 때가 있었던 겁니다.


그날 하루,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은혜의 비를 흠뻑 맞았던 때로 되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비처럼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동을 되살리고, 그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영혼 속에서 들려주시는 음악을 들으면서, 그 은혜 속에서 느끼는 오묘한 평안 속에 살아가는 그런 하루가 매일 계속되기를 기도했습니다.




작성자 : 최형구 목사(보리떡교회)
출처 :
맛있는 QT 문화예술 매거진 <와플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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