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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선물, ‘예술’이 우상이 될 때
by 서나영
2023-04-20
기독교 세계관 운동 2.0 위하여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SIEW)과 함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섭니다.한 사람의 여가는 그의 가치체계와 마음 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소재다. 현대인 대부분이 맡겨진 여러 종류의 일과 삶의 무게에서 오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저마다의 “가상현실” 또는 “기분전환 장치”를 찾는다. 그리고 음악, 소설, 영화, 드라마, 게임 같은 갖가지 예술 장르들이 현실도피의 세계로 그들을 유혹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하면서 여가를 보내야 할까? 쉬어야 할까? 어색한 질문이다. 여가의 내용에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구분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이 여가와 ‘쉼’을 민감하게 생각해야 한다. 쉼은 하나님께서 창조 때부터 정해 놓으신 “우주적 리듬”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백성도, 여종과 남종도, 머무는 손님도, 심지어 가축도 일곱째 날마다 쉬라고 명하셨다(출 20:10). 십계명에 포함된 이 명령은 수많은 율법 조항 중에서도 최고의, 헌법과도 같은 강령이다. 주님께서 제정하신 이 안식일에는 모든 처소에 불도 피우지 말아야 했고(출 35:3), 심지어 땅도 안식했다. 땅은 7년이 되는 해에 안식하고, 그렇게 7번의 안식년을 지난 다음 해, 곧 50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희년으로 지켜야 했다. 이 희년에는 땅이 파종 없이 완전한 휴식을 취해야 했고, 더 나아가 담보 잡힌 땅도 “해방”되어 돌아올 수 있었다(레 25:8-13). 하나님이 제정하신 안식일 법의 목적은 쉼이요, ‘노예살이로부터 해방’에 대한 기념이었다. 그리고 이 ‘쉼’은 ‘아름다움’을 동반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름다운 피조물을 보시며 “심히 좋아”하셨다(창 1:31). 심미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그 아름다움에 대한 감상과 즐거움 속에서 ‘쉼’을 누리셨다는 뜻이다. 출애굽 이후의 안식일에는 ‘죄로부터의 해방’을 기념하는 감격과 기쁨의 아름다움이 더해졌다. 즉, ‘쉼’과 함께 그림자처럼 ‘아름다움’이 존재했다. 그래서인지, 예술의 ‘아름다움’은 이 세상의 고난과 압제에서 벗어나는, “쉼의 유사 기능”을 한다. 저명한 독일 철학가 쇼펜하우어는 미학적 경험을 묘사할 때, 익시온(Ixion)이라는 그리스 신화의 등장인물을 예로 들었다. 익시온은 존속살인을 하고 헤라를 강간하려고 했다가 제우스로부터 지옥에서 끊임없이 돌아가는 회전 바퀴에 매달리는 노역 형벌을 받았다. 쇼펜하우어는 익시온의 이 고된 노역 형벌을 인용하며 “예술은 ‘익시온의 멈추지 않는 바퀴’에 달려 돌아가는 세상의 고통 속 안식일”이라고 결론을 내린다.[1] 이 말의 정확한 의미는 “예술이란 고통의 세계에서 잠시나마 안식을 경험하게 해주는 신으로부터의 선물”이라는 것이다.죄로 타락한 세상은 하나님을 떠나, 남겨진 아름다움의 흔적의 조각을 맞추며 거짓된 쉼을 누린다. 그 영광의 자리에 대신 앉는 단골 주인공은 단연코 “예술”이다. 때로는 추앙할 만큼 고귀하고 탁월하며, 찬양할 만큼 아름답고, ‘의미’라는 것도 전달해 준다. 때로는 심각할 정도로 마음의 파장을 일으키고, 마음 깊은 중심에 담을 만큼 심장을 뛰게 한다. 존 파이퍼는 “하나님의 가장 큰 적은 그분의 선물”이라고 말했다.[2]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의 씨앗과 마음의 밭’ 비유를 들려주시면서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막 4:19)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기타 욕심”은 악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특히 예술의 아름다움이 그렇다. 안식 대신 안식의 유사 기능인 “마취제”로 쓰이는 예술의 놀라운 기능을 보라. 우리는 일상에서 (1) 심미적이고 감정적인 아름다움을 누리며 (2) 고된 노역과 같은 삶으로부터 해방감을 느낀다. 실제로 현대에는 절망에 빠진 그리스도인이 도피할 수 있는 예술적 장치들이 많이 있다. 영화나 드라마, 소설, 음악 같은, 스토리를 가진 장르 속으로 도피한다. 마음이 내려앉아 절망 가운데 거할 때 베토벤과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곡을 밤새워 들었던 기억이 있다. 깊은 감정을 건드리는 선율에서 위로를 얻고, 그 화성의 진행에 상상력을 펼쳤다.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고, 세상 그 어떤 행복감과도 비교할 수 없을 감정적 만족감을 느꼈다. 가사가 없는 아름다운 악기 소리는 더없이 맑았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었다. 주님 앞에 거리낌 없는 ‘쉼’이며 ‘마음의 여행’이라고 믿었다. 며칠 동안 그 아름다움에 빠져 멈출 수도 없었고, 잠도 오지 않을 만큼 몰입했다. 그리고 현실로 돌아왔을 때, 그 행복은 그 어떤 선한 열매도 맺지 못했음을 봤다. 하나님과 깊이 대화하며 그분께 모든 염려를 맡긴 후와 음악으로 마취시킨 나의 감정의 결과를 비교해보았다. 그 후로 다시는 밤새 음악에 심취하지 않았다. 아름다움에 늘 민감하고 누구보다 깊이 누렸던 습관이 “하나님의 적”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던 기억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주신 예술의 아름다움을 주 안에서 누리는 법, 그리고 우선순위에 주님과의 관계를 먼저 놓는 법, 예술로 참된 안식을 얻는 법을 꾸준히 연습해야 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자리에 우상을 올려놓는 것이 인간 마음의 속성이다. 칼뱅은 “마음은 우상의 아비요, 손은 우상의 어미다”라고 했다.[3] 마음에 품은 것이 선하더라도, 그것이 인간 마음속 어느 한구석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우상이 되어버리고, 반드시 말과 행동으로 우상이라는 쓴 열매를 맺게 된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그리스도인이 어떤 영화를 감상하고, 그 영화에서 하나님의 대서사시를 찬양할 수 있다. 그 영화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 영화가 영원한 소망을 품게 하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은혜의 경험을 취하여, 어느 순간 그 영화에 몰입하게 되고, 결국 하나님 자리에 그 영화를 대신 앉힐 수도 있다. 영적 분별력과 예민함이 없다면 인간의 마음은 거짓된 아름다움에 내어주기가 너무 쉽다. 이유가 무엇일까? 참 아름다움과 거짓 아름다움이 너무나 비슷하기 때문이다. 처절한 노력과 깊은 말씀 묵상, 쉬지 않는 기도 없이는 분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둘은 비슷하다.그리스도인은 복음의 은혜 아래 있지만, “이미 그러나 아직” 이 땅에서 푯대를 향하여 달음질해야 한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온갖 아름다운 예술 활동이 잘못된 우선순위를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우상”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우리는 매일의 문화예술 감상에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나는 그 작품을 통해 “창조주 삼위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찬양하고 누리고 있는가? 나는 그 음악에서 “복음”을 누리고 있는가? 나는 그 드라마 시청보다 하나님과의 대화를 더 기뻐하고 있는가? 기도보다 그림 감상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지는 않은가? 시의 아름다움보다 말씀의 진리를 사랑하고 있는가? 나는 쉬는 시간에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으며, 무엇을 손에 쥐고 있는가?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우리를 승리로 이끄시고자 우리에게 꾸준히 안식을 경험하게 하신다. 안식일은 ‘이미 그러나 아직’의 하나님 나라의 징표로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안식일’과 ‘아름다움의 경험’은 완전하고 영원한 안식을 바라보는 종말론적 소망을 낳게 한다. 그 소망은 천국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잠시 맛보며 고통을 견딜 힘을 가져다주는 즐거움과 기쁨으로 나타난다. 즉, 그리스도인에게 아름다움의 경험은 이 땅에서 누리는 평화와 앞으로 임할 천국을 통해 오는 것으로, 단순하게 고통을 줄여줄 마취제로서의 예술이 아니라, 평화와 안식이 있는 미적 경험을 소망하는 것이다.푯대를 향해 걷지 않고 늘 달음박질했던 사도 바울도 예외 없이 이 땅에서 규칙적인 안식을 누렸다. 그리고 그 쉼은 죄로부터의 해방감에 감사와 최후 영광의 아름다움을 잠시 맛보는 것이었고, 그 안식의 경험을 통해 그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롬 8:18)고 선포했다. 예레미야 또한 “말과 함께 달리는” 주의 전사였다(렘 12:5). 하지만 그도 영원한 영광의 안식을 맛보는 “이 땅의 안식”이 있었기에 멈추지 않고 달렸다. 마음에 새긴 “만개한 살구꽃의 환상”(렘 1:11)이 마음의 영원한 안식을 향한 그의 표지가 되었다. 스가랴는 성령의 기름으로 꺼지지 않는 아름다움 순금 등잔대의 환상(스가랴 4장)을, 제사장이 왕의 면류관을 받는(스가랴 6장) 영원한 나라에서 누리는 진정한 화목의 안식을 마음에 새겼다. 아름다움의 ‘안식’의 목적을 아는 것은, 어쩌면 삶을 예배로 드려야 하는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인식들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안식일의 신학이 기독교의 핵심 교리의 중심에 있듯이, 매일의 삶에서 아름다운 예술을 즐기는 그리스도인은 (1)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이 하나님 나라에서 더 빛나게 펼쳐질 것과 (2) 죄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이라는 진리를 기억해야 한다. 주1. Arthur Schopenhauer, World as Will and Representation I, trans. E. F. J. Payne (New York: Dover Publications, 2000), 220. 2. John Piper, A Hunger For God, 23.3. “The mind begets an idol: the hand gives it birth.” John Calvin, Institute of the Christian Religion, ed. John T. McNeil, trans. Ford Lewis Battles (Philadelphia: Westminster, 1960), 1.11.112.
예술
안식
미학
아름다움
우상
‘좋은 기름’과 ‘좋은 이름’
by 정현구
2023-04-19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전도서 7:1). ‘이름’과 ‘기름’라는 두 단어는 히브리어로 각각 ‘쌈’과 ‘쉐멘’입니다. ‘좋은 이름’이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아름다운 평가를 얻는 삶을 의미한다면, ‘좋은 기름’은 이 땅에서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소유를 말합니다. 이 둘 중에 어느 쪽이 더 나을까요? 성경은 ‘좋은 이름’이 더 낫다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예수님께서 달란트 비유(마 25:14-30)와 열 므나 비유(눅 19:11-27)를 말씀하셨습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은 세 사람의 종에게 각각 다섯 달란트, 세 달란트, 한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이 비유는 사람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다양한 은사와 조건을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열 므나 비유는 주인이 열 명의 종에게 각각 한 므나씩 주셨다는 내용입니다. 이 비유는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인생을 선물로 받았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들을 잘 사용하여 이웃에게 유익을 많이 끼치고 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인생은 사람들로부터 아름다운 평가를 얻고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받았습니다. 즉 이 사람은 ‘좋은 이름’을 얻은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것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사용하지 않고 받은 소유와 달란트를 자기를 위해서 쌓아두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좋은 이름’은 만들지 못하고 ‘좋은 기름’만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떤 것이 더 좋은 것일까요?정현구, 영원을 품고 오늘을 걷다(SFC)에서 간추린 글입니다.
좋은기름
좋은이름
달란트비유
열므나비유
죽는날
태어나는날
명예
교회를 분열시키는 네 가지 방법
열왕기상 12장 묵상
by Wyatt Graham
2023-04-18
세상에는 훌륭한 기업가와 비즈니스 리더가 많다. 그중에서도 스티브 잡스와 일론 머스크는 성공의 절정을 보여준다. 그들은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어떤 면에서 솔로몬 왕과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다. 솔로몬에게는 “자신만의 지혜”가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다른 많은 사람처럼 지혜를 제대로 유지하지 못했다는 문제가 있다. 지혜로운 솔로몬은 마음을 끝까지 지키지 않았다. 어겨서는 안 되는 많은 명령을 어겼다(신 17:14-20). 말(horses)을 늘이기 위해서 이집트까지 갔다. 수백 명의 이방인과 결혼했고, 아스다롯과 밀곰을 숭배함으로써 그릇된 길에 들어서는 마음을 방치했다. 그는 감람산에 그모스와 몰렉을 섬기는 산당까지 지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에 관한 이야기는 금과 은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한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준다. 모세의 율법은 이 모든 것을 분명하게 금지한다. 하나님이 솔로몬의 왕국을 찢으신 이유이다. 그러나 그 비극은 그의 시대가 아닌 다음 세대에 일어났다(왕상 11:11-13).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원칙을 배운다. 1세대 리더들이 뿌린 씨앗이 맺는 비극의 썩은 열매는 해당 세대가 아니라 다음 세대로 전달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 왕국을 다스릴 만한 솔로몬의 지혜가 부족할 때, 왕국은 산산조각이 난다는 사실이다. 열왕기상 12:1-24의 이야기는 왕국이 어떻게 무너지는가에 대한 것이다. 열왕기상 12:25부터 열왕기상 14장 끝까지 이야기는 이 무너짐이 어떻게 재앙으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준다. 분열은 파괴로 이어진다. 적용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열왕기상 이야기는 교회를 분열시키고 파괴하는 네 가지 방법을 보여준다. 첫 번째, 전 세대의 지혜로운 장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새로운 교회로 오라. 가장 젊지만 나름 많은 경험도 가진 교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라. 그러나 교회 창립 멤버 또는 최소한 수년간 다닌 사람들의 말은 무시하라. 이게 바로 교회를 제대로 쪼개는 방법이다. 그러다 보면 실수가 너무 많아서 아예 회중 전체를 파괴할 수도 있다. 열왕기상 12장에서 왕이 된 르호보암은 부족한 지혜로 인해서 첫 번째 위기를 맞았다. 이집트를 떠난 여로보암은 한 무리의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와서는 왕이 된 르호보암에게 도전한다(왕상 12:2-3). “임금님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우셨습니다. 이제 임금님께서는, 임금님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지워 주신 중노동과 그가 우리에게 메워 주신 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임금님을 섬기겠습니다”(왕상 12:4).르호보암은 결정하는 데 사흘이 걸렸다(왕상 12:5). 겉으로만 봐서는 현명한 것 같다. 그는 먼저 지혜로운 솔로몬과 함께 일했던 장로들과 상의한다(왕상 12:6). 그들은 현명한 조언을 한다. 여로보암의 요청에 “예”라고 말하라고 한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그 충고를 거절하고 젊은이들에게 간다(왕상 12:8-11). 그들은 한층 더 과격한 조언을 하는데, 백성들을 더 열심히 일하도록 몰아붙이라고 한다. 백성을 과하게 부리는 것은 왕국의 경제적 번영에 유리할 것 같다. 추상적으로 볼 때 최선의 통치 결정일 수도 있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13절 말씀대로 가혹하기만 했다. 연로한 현자는 아무리 옳은 일이더라도 때로는 미루는 게 현명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젊은이는 인내심이 부족하다. 그들은 르호보암에게 강하게 나가라고, 일을 완수하고, 가혹하게 통치하라고 부추겼다.르호보암은 아버지 솔로몬이 말을 들었어야 했다. “부드러운 대답은 분노를 가라앉히지만, 거친 말은 화를 돋운다”(잠 15:1).가끔 이런 말을 듣는다. 진실을 말하는 것이 사랑이다! 그러나 성경은 도리어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한다(엡 4:15). 진실이 없는 사랑은 감상주의에 불과하다. 사랑이 없는 진리는 가혹할 뿐이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을 때만 참으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았다고 말할 수 있다.르호보암은 가혹할 뿐만 아니라, 무례하기까지 했다. 그는 “내 새끼손가락이 내 아버지의 허벅지보다 굵다”(왕상 12:10)고 말했다. 자, “새끼손가락”과 허벅지 또는 문자 그대로 “허리 부분”은 르호보암의 생식기를 가리키는 조잡한 남성형 완곡어법이다. 우리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다. 왕국을 살리겠다고 젊은이들이 열정에 불타고 있다. 그들은 솔로몬 치하 때보다 백성이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조언한다(왕상 12:10-11). 그들은 또한 거칠고 무례한 언어를 사용한다. 바보처럼 행동하고 있다. 사실 르호보암은 그렇게 젊지도 않았다. 그는 마흔한 살이었다(왕상 14:21).예상했던 일이 일어났다. 왕국이 분열되었다. 교회가 갈라졌다. 아무리 기술적으로야 르호보암이 옳았다 하더라도, 여로보암이 이집트에서부터 올라온 이유는 이스라엘에 문제를 일으키기 위해였음이 분명하고, 르호보암의 대처는 왕국의 분열이라는 결과로 이끌었다. 이 모든 것은 다 주님께서 예언하신 그대로이다(왕상 11:11-12, 14-40).두 번째, 잘못으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말라.르호보암은 자신의 어리석은 결정으로 인해 분열된 왕국을 목격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해결책을 향해 달려가지만, 우리가 아는 한, 그는 장로들에게 조언을 구하지 않았다. 대신에 아도람을 이스라엘 장막으로 보낸다. 아도람은 이스라엘의 강제 노역장이었고, 이스라엘 백성이 싫어하는 대표적인 인물이었다!자, 그럼 무슨 일이 일어날까? 르호보암은 이제 말뿐 아니라 아예 행동으로 애초의 정책을 고수했다. 그는 핵심 인물을 보냈고, 백성은 보란 듯이 그를 돌로 쳐 죽였다(왕상 12:18). 목숨이 위험해진 르호보암은 온 이스라엘이 모여 있던 세겜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도망간다(왕상 12:1).자, 당신이 지금 교회에서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고 치자. 사람들이 화를 내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지금이야말로 화해를 위한 최고의 시간일 수 있다. 양 당사자가 의견을 경청하고 서로를 인정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타협이라는 용어를 쓴다. 그러나 젊음의 패기로 가득하고 언젠가 왕이 될 거라 믿는 사람일수록 어떤 타협도 믿지 않는다. 세상에는 오로지 자신만 옳을 뿐 다른 누군도 결코 옳을 수 없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을 진리의 전사로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성령의 은사를 주신 예수님의 의도를 무시하고 성령님을 의지하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일 뿐이다. 누군가를 보면서 그리스도의 손이나 발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어쩌면 그리스도의 몸에 달린 귀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교회에는 내가 가장 똑똑하고 최고이며 모든 것을 다 안다는 식으로 스스로를 미묘하게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솔로몬의 이야기에서 배우는 교훈은 재주 많은 죄인에게도 여전히 구주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르호보암은 애초에 현명한 조언자를 의지했어야 했다.상대방의 말을 들을 때까지 누구나 자신의 견해에 확신을 갖기 마련이다. 솔로몬은 그런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송사에서는 먼저 말하는 사람이 옳은 것 같으나, 상대방이 와 보아야 사실이 밝혀진다”(잠 18:17). 똑같은 일은 교회에서도 일어난다. 그리고 신학에서도 발생한다. 목회자가 신학교에 다니고, 주석서를 읽고, 다양한 책을 읽고, 또 친구와 성경과 신학을 주제로 토론하는 이유는 나 자신의 명철에만 의지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이다. 우리는 서로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목회자에게만 해당하지는 않는다.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물론 당신이 이 세상 최고의 아버지 또는 어머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장담할 수 있다. 당신과 나는 모두 다 도움이 필요하다. 우리가 속속들이 다 알기에 인생은 너무나 크고 다양하다. 르호보암은 아도람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냄으로 상처에 소금을 뿌렸다. 그는 듣고 배웠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만 왕국을 쪼개고 말았다. 세 번째,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하는 대신 주변 문화의 영향을 받는다.르호보암이 예루살렘으로 도망하자, 그곳 백성이 그를 왕으로 삼았다(왕상 12:20). 여기서는 두 가지가 문제가 된다. 첫째, 오직 유다만이 그의 왕권을 확증한다. 다른 부족은 그렇지 않다. 둘째, 그는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지 않았다. 사울, 다윗, 솔로몬이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르호보암은 그렇지 않았다.기름부음이 없다는 사실은 르호보암이 옛길에는 전혀 관심이 없음을 보여주는 여러 사례 중 하나이다(렘 6:16-17). 르호보암은 심지어 이집트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 같다.열왕기상 9장을 보면, 가나안 사람을 노예로 삼은 솔로몬은 마치 이집트인처럼, 그리고 게셀에서 가나안족을 멸망시킨 파라오는 마치 이스라엘인처럼 행동했다(왕상 9:16, 20-21; 신 7:1-2; 삿 1:29). 르호보암도 이와 비슷한 반전을 행동으로 반복한다.열왕기상 12:4에서 여로보암이 묻는다. “임금님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우셨습니다. 이제 임금님께서는, 임금님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지워 주신 중노동과 그가 우리에게 메워 주신 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임금님을 섬기겠습니다.” 이건 마치 출애굽기 5장에서 파라오에게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사흘 휴가를 요청하는 모세의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파라오는 이스라엘 민족이 노동에서 쉬어서는 안 된다며, 모세의 요청을 거절한다(출 5:5). 바로는 심지어 그들의 짐을 더 무겁게 만들기까지 했다. “그들에게는 더 힘겨운 일을 시키고, 그 일만 하게 하여서, 허튼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게 하여라”(출 5:9).모세가 안식과 예배를 요청한 것처럼, 여로보암도 솔로몬이 이스라엘에게 부과한 가혹한 짐에서 벗어나 안식을 구한다(왕상 12:4). 그러나 르호보암은 파라오처럼 대답한다. “내 아버지가 당신들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웠소. 그러나 나는 이제 그것보다 더 무거운 멍에를 당신들에게 메우겠소. 내 아버지는 당신들을 가죽 채찍으로 매질하였지만, 나는 당신들을 쇠 채찍으로 치겠소”(왕상 12:14).르호보암이 이집트 사람처럼 병거를 타고 있는 사이에 그는 핵심 간부 아도람을 이스라엘에게 보낸다. 솔로몬은 이방 나라 중에서도 특히 이집트의 방식에 거의 전적으로 굴종했다.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이방 나라 사람처럼 살게 된 건 따라서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피터 라이하트(Peter Leithart)는 다음과 같이 통찰력 있게 논평한다. “솔로몬은 말과 병거를 얻기 위해서 이집트를 의지하고 이방 열국의 신들을 숭배하며, 그의 왕국을 이집트의 폭정으로 변모시킴으로 백성이 해방을 갈구하도록 했다. 결국 여로보암은 백성이 속박에서 벗어나도록 광야로 인도한다”(1 & 2 Kings, 2006:91). 그리고 열왕기상 12장에 기록되어 있듯이 여로보암은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행한 것처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경배하기 위해 금송아지 두 개를 만든다(왕상 12:28).르호보암은 파라오처럼 행동한다. 금송아지를 만든 여로보함은 모세 또는 아론의 역할을 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모든 게 다 엉망진창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그만 이집트처럼 되어버렸다. 나는 사실 르호보암이 왕이 되기 위해서 예루살렘이 아닌 세겜에 모인 이유도 궁금하다(왕상 12:1). 내가 아는 한, 그때까지 거기서 왕이 된 유일한 인물은 아비멜렉이다(삿 9:6). 아비멜렉은 난폭하고 사악하며, 여자가 그의 머리에 떨어뜨린 돌에 맞아서 죽는다. 아마 우리는 이 장소에서 무언가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다 떠나서, 이런저런 문제 때문에라도 이곳은 가야 할 장소가 아닌 것 같다.르호보암은 그곳을 떠나 그를 따르는 유다 족속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서둘러서 왕이 되어야 했다. 나머지 부족은 그를 따르지 않는다. 네 번째,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아무리 자신감에 넘치는 리더라도 끊임없는 실패로부터 배울 수 있다. 르호보암은 이 이야기에서 딱 한 번 옳은 일을 한다. 열왕기상 12장에 한 선지자가 나타나 여로보암과 전쟁을 하지 말라고 경고한다.이제 그는 예루살렘으로 도피한 후 이스라엘을 되찾기 위해 18만 명의 군인을 소집한다(왕상 12:21). 다시 말하지만, 그는 빠른 결정을 내린다. 그러나 곧 멈춘다. “하나님의 사람”인 스마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르호보암에게 말한다. “나 주가 말한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내가 시킨 것이다. 너희는 올라가지 말아라. 너희의 동족인 이스라엘 자손과 싸우지 말고, 저마다 자기 집으로 돌아가거라”(왕상 12:24).이 시점에서 르호보암과 18만 명이 순종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아마도 18만 명의 유다 족속이 모두 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건 르호보암이 싸움을 강요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본문은 24절에서 “그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들었고”라고 말한다. 결코 르호보암이 여호와의 말씀을 들었다고 쓰여있지 않다. 따라서 ‘그들’이라는 복수형이 의미하는 것은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고, 르호보암이 단순히 그들 가운데 있었기에 자신이 원하는 바를 밀어붙일 수 없었다는 점을 강하게 암시한다.우리는 이 모든 점을 자세히 살펴야 한다. 스마야는 이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점을 분명하게 했다(왕상 12:24). 우리는 이미 열왕기상 11장과 열왕기상 12:15에서 요약한 내용을 통해 이 점을 알고 있다. “왕이 이렇게 백성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은 것은 주님께서 일을 그렇게 뒤틀리게 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주님께서 실로 사람 아히야를 시켜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게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다. 여호와께서 실로 사람 아히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게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려 하심이니라.”피터 라이하트는 여기에서 사용된 “사건의 전환”이라는 문구에 주목하는데, 이것은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여호와(YHWH)의 변형(twist)”으로 번역될 수 있다(Leithart, 1 & 2 Kings 2006:94). 그리고 그게 바로 모든 일의 실체이다. 앞선 열왕기상 11장에서 하나님께서 여기서 일어날 일을 어떻게 예언하셨는지 생각해 보길 바란다. 그러나 본문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람 스마야를 보내신 바로 그 시점에만 개입하셨음을 분명히 한다.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주체가 항상 우리 자신인 상황에서, 이 본문의 경우에는 자신의 몰락뿐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분열과 멸망까지 초래한 르호보암의 어리석음을 놓고 볼 때, 하나님께서 미래를 아시고 심판을 예언하신다는 사실을 너무 논리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이리저리 꼬이기 마련이다.열왕기상 12장과 13장은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르호보암과 이어지는 여로보암의 악행 속에서 고스란히 드러나는 파괴적인 요소를 보여주지만, 동시에 하나님이 그 배후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솔로몬은 잠언 21:1에서 이렇게 말한다. “왕의 마음은 흐르는 물줄기 같아서 주님의 손 안에 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왕을 이끄신다.” 고작 몇 분에 불과한 짧은 설명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제대로 이해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가장 쉽게 얘기하자면,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완벽하게 아신다. 처음부터 끝을 다 아신다. 우리는 그분의 뜻대로 행하는 동시에 우리 스스로 모든 것을 선택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는 모든 과정을 주관하신다. 우리가 가진 죄성을 그토록 끔찍하게 만드는 것과 관련해서, 비난할 대상은 우리 자신 외에는 있을 수 없다. 비난할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문제는 언제나 우리 자신이다. 르호보암은 모든 일을 자기 마음대로 했다. 그는 왕국을 나누었다. 솔로몬은 거기에 못난 아버지로서 기여했다. 성경은 죄가 삼사 대까지 내려온다고 말한다(출 34:7). 죄는 가족을, 심지어 왕족까지도 병들게 한다. 죄의 여파는 세대에 따라 다르다. 당신은 악을 배운다. 그리고 악을 행한다. 악은 감염되고 부패하고 또 강력하다. 악은 삶을 나쁜 방향으로 바꾼다. 르호보암과 18만 명이 스마야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왕국은 분열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쟁으로 멸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파멸을 막으셨다.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가능한 역사였다. 그 결과 다윗의 씨, 예수 그리스도가 돌아올 때 하나님의 왕국에 또다시 새 생명이 불어넣어지도록 예비하셨다. 할렐루야!교회를 하나로 만들고 강화하는 방법열왕기상 12장은 교회를 분열시키고 파괴할 수 있는 법을 보여준다. 누구라도 12장이 보여주는 단계를 쉽게 따를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이야기의 흐름이 자연스럽기만 하다. 그러나 잠시만 시간을 내어 질문해 보자. 어떻게 해야 우리는 반대로 교회를 더 하나로 만들고 강화할 수 있을까?첫째, 이전 세대 현명한 장로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물론 나는 이런 조언이 모든 상황에 다 적합하지 않다는 건 안다. 아예 이전 세대의 현명한 장로가 없을 수도 있다.그렇더라도 젊은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이전 세대의 신학과 사상을 알아야 한다. 교회 역사와 신학을 아는 것은 우리가 이전 세대의 현명한 장로들을 존경하는 방법일 수 있다. 예수님이 직접 교회를 세우실 것이고,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고 말씀하셨을 때, 그건 교회가 1517년이나 1956년에 시작된다는 뜻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성장시키신 2천 년 역사의 성령님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둘째, 실수로부터 배우자. 아무 생각 없이 어깨를 쟁기에 대고 미는 것은 쉽다. 하지만 잘못된 방향으로 밀면 어떻게 될까? 바위에 걸리면 돌아서야 한다!셋째, 주변 문화 대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를 받자. 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하자. 그러면 당신은 성장하고 또 성장할 것이다. 넷째,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그분에게로 묶는다. 히브리서 4:12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동력이 있으며 어떤 쌍날의 칼보다 더 예리한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말한다. 말씀이 살아 있다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 말씀이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신다는 의미이다. 이천 년 전에 쓰인 책, 열왕기상의 경우 무려 삼천 년 전에 쓰인 책이 당신의 마음을 형성하고 변화시킬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육신이 된 하나님의 말씀을 모른다면, 그 누구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가 누구인가? 전 세계에 걸쳐서 흩어져서 포로가 된 우리를 그의 몸으로 모으기 위해 오신 나사렛 예수님이다. 자신의 몸을 통해서, 그는 열두 사도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재결합하신다. 자신의 몸을 통해서, 그는 열국에 의해 파괴된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세우신다. 모든 부족이 연합한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 할렐루야!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한다. 그분의 영은 우리를 하나로 묶으신다. 우리는 모두 다 아버지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되었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교회 분열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이다. 성도의 하나됨이 무엇인지 그 실체를 명명하고 정의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으로 연합하는 것이다. 옛날에는 모든 교회가 다 함께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하나됨을 고백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은 복음이 가져다준 축복이자 능력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용서받고, 거룩해지고, 영화롭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모두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머리이고 우리는 그의 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와 떨어지는 순간 교회의 연합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연합보다 더 큰 연합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연합은 복음의 문제이다. 믿음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한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함께 거하신다. 연합은 결코 목표가 아니다. 당연한 것이다. 종교 개혁가는 분열을 이단만큼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였다. 우리는 분열을 피해야 한다. 오직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써만 우리는 진리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것만이 “나는 진리다”라고 말씀하신 분과 직접 관계를 맺는 길이다. 거기에는 연합이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머리이시고, 우리는 몸이다. 원제: Four ways to Divide the Churc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솔로몬
지혜
열왕기상
여로보함
르호보암
교회분열
교회의하나됨
마음에서 기억나도록
‘거룩에 다가가는 습관’ 기르기 연습
by 박혜영
2023-04-17
‘거룩에 다가가는 습관’ 기르기 연습· 나의 아름다운 습관 만들기· 마음에서 기억나도록먼저, 자신에게 던질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또는, 성경 말씀)으로 거듭났습니까? 아니면, 생활의 일부가 되어, 교회 생활이란 게 나름 안정감을 주는 인간관계이기 때문에, 예배에 참석하고 있습니까? 두 번째 질문에 해당한다면, 하루 일에 지쳐서 성경을 읽을 수 없는 상태는 자연스럽고 당연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감각이 아직 없기 때문에, 피곤한 몸과 지친 정신을 일으켜 성경을 읽는다는 건 불가능입니다. 하루 일에 지쳐서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쉬고 싶은 분에게 책을 읽으라, 그것도 성경책을 보라고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권면을 따르지 못한다고 미안해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주일 예배에 꾸준히 참석하는 습관을 기르시길 당부합니다.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좋으니, 첫째 주는 꼭 참석하겠다, 셋째 주는 반드시 참석하겠다, 이렇게 결심하고, 그날에는 친구나 친척들과 약속하지 않고, 돈 벌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있다고 해도 외면하고, 교회로 발걸음을 돌리는 훈련을 하시면 됩니다. 모든 훈련은 어떤 외부의 시간표에 자신을 맞추는 데서 시작하지 않습니까? 건강을 위해 운동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이 시간과 요일을 정하지 않고, 시간 날 때만 한다면, 과연 효과를 볼 수 있을까요? 신앙의 훈련도 그렇습니다. 그저 시간 날 때 참석해 보는 식으로는 신앙의 유익을 얻기 어렵지 않을까요? 하나라도 마음먹은 게 있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혹시 직분자라면 교회 순서에서는 빼 달라고 조용히 요청하면 됩니다. 그러면 저는 기억하고 그분의 회심을 위해 분명히 기도할 겁니다.이제, 하나님 말씀으로 거듭났지만, 그래서 분명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행 2:36)로 모셨지만, 하루 일에 지친 나머지 성경책을 펼쳐 읽을 힘이 남지 않은 분에게 권면합니다. 그럼, 주중에는 그렇게 지내다가 주말에는 반드시 시간과 장소를 정해놓고 성경을 읽고 생각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물론 다른 가족들에게 양해를 구해야겠지요. 자신의 영혼을 위해 시간을 좀 써야 한다고…. 이런 분들은 ‘성경 읽기 달력’의 분량을 다 따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네 줄 중에서 한 줄만 읽고 본문에 대한 생각을 조금씩 하는 훈련을 하시면 됩니다. 그러면서 생각한 내용을 기록해 둔다면, 자신의 영적인 감각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지 않고, 주말이 왔다고 그냥 쇼핑에다 약속에다 여행에다 자신을 써버린다면….하루 일에 지쳐서 성경을 본다는 게 어렵지만, 그래도 남은 힘이 소립자만큼은 있어 성경을 펼치고 읽고자 하는 분들은 성경 한 절이라도 매일 생각해야 합니다. 아니면 한 장을 빠르게 훑으면서 뭔가 의미심장한 표현을 찾아 그 표현만 좀 더 생각하시면 됩니다. 보기를 들면, 저는 지난번에 이런 표현에 주목했습니다. “쫓겨 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신 30:1). 자신들의 고향과 재물과 체면조차 다 잃고 쫓겨난 곳에서, 무엇이 잘못되어 이렇게 된 것인지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날 때만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으며, 하나님은 그런 그들을 다시 예전 땅으로 회복시키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기록하고,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 여기에 밑줄을 그었습니다.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 기억은 단지 인지 작용이 아니라, 마음의 작용이라는 겁니다. 어떤 경우가 있을지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눅 15:14, 17). 서로 통하는 본문이었습니다. 자신의 모습에 대해 가끔 후회하고, 가끔 아쉬워하는 걸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이라고 하진 않을 겁니다.물론 성경 읽을 때, 뭐가 중요한 표현인지 그걸 모른다는 게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역시 성경은 어려워’ 하면서 성경을 덮지는 말아야 합니다. 분명, 하나님 말씀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마음 저 깊은 곳에는 하나님 말씀을 그리워하는 본능이 있기 마련이며, 그 본능은 성경 말씀이라는 영혼의 양식을 향해 뿌리를 뻗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연습을 해야 하고, 훈련을 해야 합니다. 성경 읽는 시간을 정하고, 장소를 정하는 훈련부터 해야 합니다. 모든 교인은 주일 저녁에는 반드시 그날 설교에 대해 복습하는 시간을 작정해야 합니다. 주보를 교회에 두고 가지 말고, 갖고 가서 본문과 제목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기억을 되살려 중요 표현은 무엇이었으며, 무슨 말을 들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해 보겠다고 마음을 먹는 것, 그게 중요합니다.
성경읽기
성경묵상
습관
마틴 로이드 존스의 ‘진정한 부흥의 필수 요소들’
by Ben Bailie
2023-04-16
1925년 2월 6일, 왕립 내과의 협회(Royal College of Physicians)에서 스물다섯 살의 젊은 회원이 “현대 웨일스의 비극”(The Tragedy of Modern Wales)이라는 제목으로 논란을 일으킬 만한 강연을 했다. 그는 은행가, 교육자, 그리고 설교자-정치인(preacher-politicians)이라는 “가증스러운 것”을 싸잡아 비난했다. 이들은 실크 스타킹, 무선 라디오, 매일 목욕하는 사람들만큼이나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현대 웨일스의 근본적인 “비극”은 나날이 증가하는 교회의 무능과 하루가 다르게 감소하는 교회의 생명력이었다. 의사 마틴 로이드 존스는 영적으로 무의미한 교회와 영적으로 아무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설교를 한탄했다. 웨일스 교회에 대한 그의 진단은 냉혹했다. 생명 보조 장치에 의지해서 간신히 숨만 쉬는 그 교회에 부흥이 필요하다고 그는 외쳤다.그의 진단은 그 뒤로도 바뀌지 않았다. 그 뒤로 55년 동안 로이드 존스는 당시의 진단을 전 세계 영어권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의 몸으로 확장했다. 의사였을 때도 또 목사였을 때도, 그의 목회 전부를 지배한 주제가 바로 부흥의 필요성이었다. 매주 정기 기도회와 설교에서 그는 회중과 교회 전체를 앞에 놓고 주님을 찾으며 부흥을 갈구했다. “내가 이 시대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있다면, 교회의 본질과 성령의 역사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있다면, 지금 우리 교회의 희망은 오로지 부흥에 달려있음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단언해야 합니다.”이처럼 부흥은 20세기 교회에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부흥 정의하기로이드 존스는 부흥에 관해서 조직신학에 근거한 주석을 쓴 적이 없다. 부흥에 관한 그의 신학은 1859년 대서양 횡단 대부흥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959년에 한 스물네 편의 설교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연속 설교에서 그는 그간 수도 없이 언급했던 부흥이라는 주제를 완전히 풀어헤치고 탐구했다. 그중에서도 그가 지향한 부흥 신학을 시작하기에 가장 좋은 출발점은 1957년 6월 9일에 에베소서 4:4-6을 본문으로 한 설교이다.이 설교에서 로이드 존스는 바로 전주에 설교한 성령의 일상적 역사와 특별한 역사를 구분했다. 그가 정의하는 부흥은 비범한 방법으로 행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이다. 그리고 부흥은 어느 정도까지는 많은 성도에게 동시에 강력하게 임하셨던 오순절 성령 역사의 반복이기도 하다. 로이드 존스에 따르면 부흥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교회를 다니는 신자는 새로운 수준의 경험과 이해를 통해서 각성한다. … 그리고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은 회개하고 교회로 들어온다.” 이 두 가지 요소가 다 중요하다. 기성 교인은 교리적 진리를 새로운 차원에서 이해하고 주님의 임재를 분명하게 느끼는 강력한 체험을 한다. 믿지 않던 사람은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는 강력한 복음을 경험한다. 로이드 존스에게 부흥이란 성령의 특별한 역사이다. 부흥은 우리가 만들어내거나 사고팔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부흥은 성령의 불이 내려오는 특별하고 주권적인 역사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불을 내려달라고 간구하는 것뿐이다. 갈멜산의 엘리야처럼 누구나 제단을 쌓을 수는 있지만, 불을 내리는 건 오로지 하나님 한 분이시다. 부흥 갈망하기그러면 어떻게 제단을 쌓아야 할까? 어떻게 특별하고도 분명한 하나님의 임재를 간구할까? 비록 로이드 존스는 오순절을 부흥에 관한 핵심 패러다임으로 이해했지만, 그는 출애굽기 33장을 핵심 본문으로 해서 부흥이 무엇이며 어떻게 추구해야 하는지를 설교했다. 이 본문을 가지고 총 8회 설교했으며, 부흥을 갈망하는 이를 위한 필수 4단계를 제시했다. 단계 1: 필요를 깨닫고 죄를 직시하라(출 32:30-33:3)모세는 가장 먼저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상태를 제대로 직시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들의 영적 상태와 집단적 죄에 대한 책임을 지고, 백성들의 적대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죄의 한 가운데에 서서 진리를 설교했다. 이것이 바로 로이드 존스가 부흥 시리즈의 첫 일곱 번의 설교에서 하고자 한 것이다. 그는 마가복음 9:28-29에 대한 설교로 시작했는데, 제자들이 귀신 들린 소년을 고치지 못한 사실이야말로 당시 능력 없는 교회의 실패를 여실히 보여준다고 믿었다. 제자들은 오직 기도와 금식으로만 귀신을 쫓는 능력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악마의 세력은 너무도 깊이 뿌리박혀 있다. 무력한 제자들처럼 이전 세대에서 목회에 성공을 가져다준 방법과 전략으로는 결코 오늘날의 영적 필요를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할 것이다. 단계 2: 죄에 슬피 울라(출 33:4)두 번째 단계는 하나님의 부재를 깨닫고 슬퍼할 때 시작한다. 자신의 상황을 깨닫게 되면, 그러니까 죄를 직시하고 그로 인한 하나님의 부재가 주는 위협을 인식한 사람은 애통해한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는 한 약속의 땅에는 들어갈 수 없다. 이스라엘 백성은 죄의 심각성을 깨닫고 하나님의 임재가 없이는 어떤 축복이 쓸모없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이 없는데 외적인 번영과 풍요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당신이 우리와 함께 가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여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외침이 된다. 이 단계에서 물어야 할 핵심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가? 과연 우리와 함께 약속의 땅으로 가실까?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함께하시지 않는다면, 아무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해도 우리는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하나님의 선물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이 연속 설교 전반에 걸쳐 로이드 존스는 “결함을 가진 정통”으로, 그리고 더 나쁘게는 “아예 죽은 정통”으로 표현할 수 있는 교회의 현실을 놓고 슬피 울라고 강권한다. 단계 3: 긴급한 기도와 중보(출 33:7-17)이제 특별 기도와 중보 기도의 계절인 부흥의 세 번째 단계로 이어진다. 로이드 존스는 이 단계를 다시 세부적인 세 단계로 나눈다. 첫 단계(7절)는 기존 진영 밖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특별 장소인 “회막”을 세우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이곳을 일반적으로 한두 사람이 모여서 기도하는 장소로 보았다. 현재에 적용하면 기존 진영 밖, 그러니까 정기적인 교회 생활 외에 따로 모여서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는 곳이다. 로이드 존스는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의 노력을 특히 귀하게 보시고 아주 빠른 시간에 은총을 내린다고 믿었다. 거기에는 일반 은총의 수단으로 특징되는 새로워진 영적 따뜻함, 자유, 기대, 부드러움이 있다. 그리고 설교에는 긴박함이, 기도에는 고뇌가 새겨진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여전히 1단계에 불과하다. 두 번째 단계는 점점 더 많은 사람이 회막으로 들어와 더 큰 은혜와 하나님의 임재를 간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은혜를 맛보았지만, 더 큰 은혜를 갈구한다. 더 원하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모세가 알려준다(13절).첫째, 모세는 개인적으로 더 확신하고 싶었다. 단지 자신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그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다는 지식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더 많은 것을 원했다.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두 눈으로 확실하게 보기를 원했다. 로이드 존스는 이것을 모든 부흥의 공통된 측면으로 보았다. 그러니까 부흥을 바라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주시는 개인적인 사랑에 대해서 더 깊은 지식을 갖고자 하는 갈망이 있다.둘째, 더 큰 능력에 대한 욕구가 있다.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는 모든 중보기도자는 원수 앞에서 느끼는 연약함과 무력함을 깊이 인식한다. 진정한 부흥에는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통렬한 자각이 수반된다. 그와 더불어 예수님과 떨어지지 않겠다는 강렬한 소망이 있다.셋째, 모세는 교회의 사명에 특별한 인증을 해달라고 기도한다(16절). 부흥을 추구하는 깊은 동기는 빛나는 교회를 통해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리고 교회가 애초에 하나님이 의도했던 모습을 회복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세상과 분리되고, 독특하고, 거룩하고, 영광스럽고, 능력이 넘치고, 아름다운 교회가 되도록 해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파함으로 열방이 경탄하도록 만들어진 것이 교회이다. 따라서 약하고, 얻어맞고, 망가지고, 무능한 건 결코 교회의 모습일 수 없다. 그렇기에 부흥을 간구하는 사람은 교회를 살려달라고 외친다.마지막 단계에 해당하는 “제단을 쌓는 것”은 긴급한 중보기도이다. 모세의 기도가 모델이 된다. 그의 기도는 담대하고 구체적이다. 감히 하나님과 “논쟁”하고 하나님께 애초의 약속을 지켜달라고 간구하다. 단계 4: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하늘에서 불이 내려올 때(출 33:18-23)단계 3이 부흥의 마지막 단계가 아니다. 불이 떨어지기 전까지 부흥은 없다.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는 모세의 외침은 부흥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의 외침이다. 그리고 여기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선물이 모든 참된 부흥의 선물이다. 모세는 일부분만 보았을 뿐이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주 잠시 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것이 부흥이다.로이드 존스는 모든 진정한 부흥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성령을 부어주시는 오순절의 반복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여러 면에서 오순절은 시내산의 반복이다. 부흥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가 한 사람이 아닌 많은 이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럴 때 교회와 세상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불이 내린 첫 번째 징조는 교회가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분명하게 의식하는 것이다. 때때로 독특한 물리적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항상 그런 건 아니다. 그러나 모든 부흥에 항상 존재하는 것이 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자각,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에 대해서 새롭게 깨어난 감각이다. 부흥에는 하나님의 다양한 임재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느낌뿐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새로운 확신도 따라온다. 복음 속에 담긴 위대한 성경의 교리가 폭발적인 수준으로 생생하게 다가온다. 십자가 사건 후에 비록 제자들이 흔들리고 산산이 부서지고 낙담하고 절망했지만, 오순절 후에 그들은 확신과 자신감으로 가득 차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담대하게 선포했다. 이처럼 교회도 큰 기쁨과 축하와 감사로 충만해진다. 이런 경험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로이드 존스는 이천 명이 넘는 교인에게 이렇게 설명했다.성도 여러분, 이게 무슨 의미인가요?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사람들이 하나님, 성령의 임재를 의식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여기 있는 우리 대부분은 그게 뭔지 모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바로 성령의 찾아오심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정상적인 삶과 교회 사역에서 가장 차원 높은 경험입니다. 생각해보세요. 교회 모임에 참석한 교인들이 갑자기 그들 사이에 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영광을 느낍니다. 어떤 존재를 느낍니다. 물론 그게 무엇인지 정의하지 못합니다. 설명할 수도 없고, 말로 표현할 수도 없습니다. 이전에 단 한 번도 느낀 적 없다는 새로운 체험이라는 사실을 알 뿐입니다. 그런 체험을 한 사람들은 때때로 “지상에서 누린 천국의 날”이라고 묘사합니다. 정말로 천국에 있다고 느낍니다. … 시간의 흐름을 아예 잊습니다. 아니, 그들은 시간 너머에 존재합니다. 시간은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 그들이 있는 곳은 영적인 영역입니다. 하나님이 그 가운데 강림하셔서 영광스러운 임재의 느낌으로 그 장소와 백성을 충만케 하셨습니다.이것이 부흥이다. 아주 잠깐 이 땅에서 누리는 하늘의 영광이다. 그럼 세상은 어떻게 반응할까? 오순절 사건을 보면 세상은 다양하게 반응한다. 일부는 조롱하고 또 궁금해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회개를 외친다. 그러나 중요하고 또 오래 지속되는 변화가 분명히 있다. 교회가 세워지고 사람들이 교회로 몰린다. “술집”이 텅텅 비고 세상이 뒤집힌다. 원제: Martyn Lloyd-Jones on the Ingredients of True Revival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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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백령도 중화동교회
by 이종전 · 장명근
2023-04-15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대한 강토에 선 첫 세대 교회들을 찾아 떠납니다. 그 이야기들에서 우리 신앙의 근원과 원형을 찾아보려 합니다.백령도는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래한 첫 번째의 섬이고, 1884년 알렌이 의료선교사로서 들어오기도 전에 중국 주재 선교사들이 조선에 관심을 가지고 제일 처음으로 발을 디뎠던 곳이다. 즉 백령도는 우리나라 프로테스탄트 기독교 역사 최초의 순교자인 토마스(Robert J. Thomas), 그보다 앞서서는 카를 귀츨라프(Karl F. A. Gutzlaff)가 조선을 찾았을 때 첫 발걸음을 디딘 곳이다. 그들이 이곳에서 한문 성경을 전함으로써 사실상 이 땅에 복음을 처음으로 전하여준 곳이다. 그들이 이곳에 와서 복음을 전한 것은 사실이며, 그 열매가 맺힌 것은 많은 시간이 흐른 다음이었다. 이 땅은 이미 그들이 남겨준 말씀이 발아하지 못한 채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훗날 선교사들이 입국해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을 때, 그때를 기다려 복음의 씨앗은 발아하였다. 그 결과로 현재 섬 주민들 가운데 적게는 65퍼센트, 많게는 80퍼센트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야기다. 이뿐 아니라 이곳에는 제사를 지내는 집이 없고, 다른 섬의 경우에서처럼 없어서는 안 될 풍어제 같은 굿이나 대동제 같은 마을의 제례 의식도 없다. 이곳도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제 말기에 강제로 교회를 통폐합하는 과정에서 집회를 허락하지 않아서 잠시 몇몇 교회의 집회가 불가능했었다. 그러했음에도 1937년부터 시작한 백령성경학교는 백령도를 비롯하여 대청도, 소청도의 사람들에게 복음으로 살게 하는 능력을 가지게 했다. 이 성경학교는 겨울철에 2개월씩이나 계속되는 계절학기제 성경학교였다. 3개 섬의 젊은이들이 300여 명씩이나 모여서 함께 먹고 자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했다고 한다. 그 결과 이 섬에서 많은 목회자와 장로가 배출되는 것은 자연스러웠다.백령도에 복음의 씨가 자라게 된 것은 1896년 이전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마을 사람인 허득(許得)이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그를 중심으로 교회가 시작되었다. 그는 문서로 확인할 수 있는 백령도 최초의 신자이고 중화동교회를 처음으로 세운 이다. 그는 당시 개화파 정치인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관계(官階)를 받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 정3품 당상관-현 차관보급)라는 관직에 있었던 백령도의 실세였다. 그는 일찍이 진보된 서구문화를 받아들여야 함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가 육지에 있는 동안 넓은 세상을 알고 성경과 문서를 통해서 기독교를 알게 되었다. 상당한 관심과 지식을 습득했지만, 국가가 금하고 있는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기독교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표현할 수 없었던 것 같다. 허득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교회를 세우게 된 것은 1894년 갑신정변 때 정부와 정치를 바로 잡으려고 상서(上書)와 충언(忠言)을 올리다가 역적으로 몰려 이 섬으로 유배를 오게 된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김성진(金成振)이다. 4-5명의 유배자들 가운데서 그가 허득의 사랑방에서 기거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곳에 머물면서 마을의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그러던 중 허득과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이 이곳으로 유배를 오면서 성경이라는 책을 가지고 왔고, 그것을 읽어보니까 사서삼경(四書三經)이 모두 성경에 근거를 둔 것 같다는 의견을 토로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허득은 자신이 이미 마음에 가지고 있었던 생각을 그가 말하는 것을 듣고 기꺼이 동의했고, 함께 교회를 세우고 신앙을 갖도록 하자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이에 두 사람은 1896년 6월경 동네 사람들을 모아서 예수를 믿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함께 믿자고 다짐했다고 한다. 그리고 기독교의 가르침을 위해서 성경과 신앙 서적들을 구해야 할 필요했기에 김달삼이라는 사람을 선정하여 서울로 보내기로 했다. 그러던 차에 바다 건너 황해도 장연에 서양 사람들이 와서 예수의 복음을 전한다는 소문이 들려왔기에 일단 김달삼을 장연의 소래(松川)에 보내서 사람을 청하여 오도록 했다. 1896년 8월 20일경에 서경조(당시 소래교회 장로)와 홍종옥(집사), 오씨로 알려진 교인 등 3명이 이곳을 방문했다. 그리고 8월 25일 마을의 서당에서 처음으로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 중화동교회의 효시이다. 서경조 장로 일행은 4주간이나 이곳에 머물면서 낮에는 전도하고 밤에는 성경을 가르치면서 기독교 구원의 도리를 깨우쳐 주는 일을 했다.그들은 장연으로 돌아갔고, 다시 허득과 김성진을 중심으로 하는 이곳 사람들만 남겨졌다. 이때부터는 그들이 예배를 직접 인도하면서 자생하는 공동체로 성장하였다. 물론 김성진이 유배 생활을 마치고 돌아간(1897년[1]) 다음에는 허득이 예배를 인도했다. 그러다가 1899년에 현재의 터에 처음으로 예배당을 지었다. 6칸 초가 예배당을 장연의 소래교회를 짓고 남은 자재를 가져다가 지었다. 그 후 4차에 걸친 예배당의 신·개축이 있었다. 1900년 9월에는 언더우드 선교사가 이곳을 찾아와서 처음으로 세례를 거행했다. 이때 세례를 받은 사람은 허득, 허근, 최영우, 허윤, 허간, 허권, 김홍보 등이었다. 그러나 교역자가 없는 현실에서 1908년까지는 전도부인들이 교회를 지켰고, 그 후에도 영수와 조사들이 지켰다. 담임목사가 처음 오게 된 것은 1918년이다. 그 이후로 중화동교회는 다행히 목회자가 계속 사역해 왔다. 1918년 이전에는 간혹 찾아오는 선교사들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장연교회의 서경조 목사가 중화동교회를 관리하는 형편이었다. 물론 일제 말기에는 교역자가 없거나 조사가 시무 하면서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또한 중화동교회의 설립과 그 존재는 백령도를 비롯한 인근의 다른 섬들, 즉 대청도와 소청도 등지에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들이 세워지게 되는 출발점이 되었다. 만일 이곳에 복음의 씨앗이 심기지 않았다면, 이곳 섬 지역에 복음화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은 물론이거니와 신앙으로 살아가는 독특한 섬의 문화를 상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중화동교회를 찾았을 때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은 예배당으로 오르는 계단이다.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언덕을 오르내렸을 수많은 이들의 모습을 그리게 된다. 언덕에 오르면 세월을 짐작하게 하는 향나무가 힘든 듯 기우뚱 서 있다. 언제 심은 나무인지는 모르지만, 교회의 역사만큼은 충분히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예배당은 깨끗하게 단장해서 먼 섬에 있는 예배당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다. 마당에는 중화동교회 100주년 기념비가 있고, 또 하나의 비석은 백령도에 기독교가 전래하고 교회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공을 세운 이들에 대한 일종의 공덕비가 있다. 이 비석에는 최초에 기독교가 전해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이들과 그 과정에 대해서 간략하게 음각되어있다. 이 비석은 백령도 안에 있는 8개 교회의 장로 35명이 뜻을 모아 세운 것이다. 자신들이 사는 섬에 복음을 전해주고, 모교회의 역할을 한 신앙의 선배들을 기리는 마음에서 세운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종이 있다. 이 교회의 역사와 함께하였고, 일제 강점기에도 지켜낸 유서 깊은 종이다. 예배당을 살피고 옆 마당으로 나가면 ‘백령기독교역사관’이라는 대리석 명패를 달고 있는 건물을 만난다. 이 낙도에 기독교 역사관이 있다는 사실이 매우 놀랍다. 중화동교회만을 생각하고 찾았던 이들은 역사관을 둘러보면서 놀라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일은 어쩌면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서 얻을 수 있었던 것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지방 정부가 활성화되면서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발굴하고, 그것을 각 지방의 문화유산으로 홍보하면서 중화동에 양인(洋人)들이 찾았던 역사와 함께 기독교가 전래한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것을 지방의 문화유산으로 역사화하는 과정에서 이곳에 기독교 역사관이 세워질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중화동교회가 속해있는 교단과 노회, 전국여전도회연합회가 협력해서 이러한 건물을 마련할 수 있었다는 것도 기쁜 일이다. 낙도에 역사관을 세운다는 것에 대한 이해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접근성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곳이고 그래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가 힘든 곳이기 때문에 이런 곳에 돈을 쓴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더 기쁘고 감사한 일이다. 한편 여기에 역사관이 세워질 수 있었던 데는 백령도의 높은 기독교인 인구 밀도가 한몫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비록 전시물이란 것이 유물은 거의 없지만, 백령도의 일반 역사와 기독교의 전래 역사를 알아볼 수 있도록 자료를 만들어 관람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백령도에 기독교가 전해지는 과정과 기독교가 형성되는 과정을 연대기로 알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2001년 11월에 세워진 이 역사관은 백령도 주민들에게도 백령도에 대해서 알 수 있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주 1.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전적으로 허간 목사의 기록에 의존한 것인데, 조선왕조실록의 고종순종실록(高宗純宗實錄) 편에는 1897년에 김성진 유배를 보냈다는 기록이고, 유배를 해제하는 것이 1906년으로 되어있으니 그 시간적인 차이를 극복하는 것이 과제이다.
백령도
중화동교회
소래교회
부흥이 일어났을 때 해야 할 일
by Don Carson
2023-04-14
최근에 나는 복음을 적대시한다고 알려진 한 지역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교회 개척은 힘든 일이다. 거기에서도 열정적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소수의 교회가 조금씩 성장하고 있지만, 그 속도는 매우 느리다. 나는 그런 곳에서 사역하는 목회자와 전도자, 교회 개척자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존경한다.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기쁨이자 특권이다. 그들 중 몇 명과 함께 식사하던 중, 한 목사가 말했다.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더 나빠질 가능성이 큰 곳에서, 복음을 향한 격렬한 반대 속에서 사역하면서 평생을 보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교회에서든 더 큰 지역에서든 진정한 부흥이 일어난다고 가정하면 말입니다. 그런 일이 생길 때 내 우선순위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의미심장한 질문이다.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 형제가 염세주의에 빠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고작해야 작은 역사가 일어나는 날에 충성을 다하면서도, 주님의 팔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님을 확신하고 있다. 적지 않은 목회자가 복음을 향한 반대가 심할 때 경건하게 사역하는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는 잘 알고 있다. 문제는 반대의 경우이다. 주님의 자비하심이 개혁과 부흥의 축복으로 쏟아질 때 우선순위를 어떻게 정해야 할지 모르는 이들이 꽤 많다. 나는 부흥이 도래한 곳의 가장자리에 몇 번 있었던 적이 있다. 1970-71년, 이른바 캐나다 부흥이 캐나다 서부 지역을 휩쓸었을 때 (수테라 쌍둥이가 이끄는 사역에서 촉발), 나는 브리티시 컬럼비아에 있는 한 교회의 목사로 섬기고 있었다. 나는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교회가 서른다섯 개에서 고작 8년 만(1972-80)에 오백 개 가까이 증가하는(퀘벡의 경우) 전례 없는 부흥의 역사를 목격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진짜 부흥과 가짜를 구분하기 위해서 내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부흥의 역사를 공부했다는 사실이다. 나의 경험과 독서, 성경 이해를 바탕으로 부흥이 올 때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할 목록은 다음과 같다.1. 진짜 부흥과 가짜 부흥을 진지하게 다루는 문헌을 읽자.조나단 에드워즈가 쓴 ‘A Faithful Narrative of the Surprising Work of God’[놀라운 부흥과 회심 이야기]과 ‘A Treatise Concerning the Religious Affections’[신앙감정론]로 시작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은 없다. 에드워즈는 부흥이 드러내는 다양한 현상에 매우 개방적이지만, 진정한 분별은 결코 단지 눈에 보이는 드러남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의와 복음으로 가득한 진실함(integrity)에 달려있음을 강조한다. 에드워즈 이후 약 백 년 후에 켄터키와 다른 곳에서 일어난 일부 “부흥”은 9개월 후에 눈에 띄게 많은 숫자의 사생아를 만들어냈다. 그 이유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감정적 강렬함은 종종 친밀감과 결합한다. 따라서 그 감정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게 아닌 경우, 부흥의 결과로 의로움을 낳기보다는 아기를 낳을 가능성이 더 크다. 남용에 대한 지식은 거만한 냉소주의를 낳기 쉽고, 반대로 부흥에 대한 지나친 열광은 어리석은 순진함을 낳는다. 냉소하지 말라. 그렇다고 속아서도 안 된다.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2. 자신의 마음을 점검하라.자신의 마음을 계속 주시하고 그리스도를 향한 헌신의 불꽃을 부채질하라. 일상적인 은혜의 방편(ordinary means of grace)을 많이 사용하라. 부흥이 가져다주는 강렬함에만 의지하지 말고 성경 읽기, 기도, 자기 성찰과 고백, 자기 이익에 대한 죽음, 십자가를 향한 기쁨의 집중, 신실한 전도와 섬김,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영광을 바라보는 간절한 기대감을 쉬지 말고 의지하라. 일성적인 은혜의 방편을 무시하고 대대적인 부흥 운동에만 영적 생계를 의존한다면, 아주 잠깐은 만족을 느낄지 모르나, 한때는 미친 듯 열광하더라도 지속적인 영양을 공급받지 못하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지쳐 쓰러질 것이다. 3. 모든 에너지를 예수님께 향하라.부흥이 오면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데에 무한한 힘을 발휘한다. 복음의 사역자로서 넘치는 에너지를 성경 공부와 기도, 그리고 말씀으로 충만한 회중 예배로 향하도록 하라. 부흥의 체험이 아니라 예수님 한 분을 향해 모든 초점을 맞추라. 부흥의 시대는 경건을 가장한 진부하기 이를 데 없는 표현으로 넘치는 대화가 아니라 기름 부음 받은 강해 설교에 대한 강화된 헌신을 요구한다. 퀘벡 운동과 관련하여 일어난 위대한 일 중 하나는 선견지명으로 넘치는 SEMBEQ(Séminaire Baptiste Évangélique du Québec)의 설립이다. SEMBEQ는 그 세대와 다음 세대의 신학 및 목회 훈련을 위한 통로가 되었다. 부흥이 가져다준 에너지가 훈련으로 올바로 전환되지 않을 때 하나님이 주신 진정한 운동을 단지 어리석음과 아련한 향수 속에 시들어버린 추억으로 착각하기 쉽다.4. 언론을 멀리하라.투명하게 하라. 이게 일반적으로 불가능하고 사실상 엄격하게 권장되지도 않지만, 투명함이라는 목적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정말로 하나님의 자비 안에서 큰 축복의 시기에 봉사하고 있다면, 굳이 알리려고 애쓰지 말라. 부풀리거나 홍보하려고도 하지 말라. 최선을 다해서 사역을 확장해야 한다. 그러나 술수가 아닌 오로지 봉사와 가르침, 설교로 역사를 이루라. 그러다 보면 결국에는 언론이 찾아올 것이다. 당신이 강조해야 할 것은 비길 데 없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자신을 낮추며 질문에 답해야 한다. 그리고 “스타”와 “유명 인사”를 홍보하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하라. 부흥을 분석하고 그것을 다른 데로 퍼트리기 위해 부흥을 “포착해 내려고” 떼를 지어 도착하는 “전문가”를 온 힘을 다해 피하라.1972년에서 1980년 사이에 퀘벡에서 일어난 부흥 사역에 참여한 사람들이 누린 큰 이점 중 하나가 다름 아닌 언어 장벽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낼 만큼 프랑스어를 제대로 아는 미국 언론이 거의 없었다. 물론 오늘날 가장 빠른 형태로 배포되는 (악의적인 공격을 포함해서) 형태는 전통적으로 “언론”이라고 표시된 기관이 아니라 소셜 미디어와 연결되었기에 피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그러나 당신의 영향력이 통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올바른 초점을 가지도록 장려하라. 자제력을 키우고 분노로 얼룩진 블로그에 휘말리지 않아야 한다. 평소의 사역에 조용한 인내로 충성하는 동시에 당신의 명성을 높이는 소문이 들릴 때는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 5. 조작을 피하라.캐나다 부흥 기간에 나는 즉석에서 있었던 간증 하나를 기억한다. 부흥 전까지 직업에 몰두하던 행복한 세속주의자가 갑자기 부흥이 시작된 서스캐처원(Saskatchewan)에 있는 교회 건물에 들어가야 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그곳에서 복음을 듣고 죄를 깨닫게 하는 성령의 역사에 압도된 그는 극적으로 구원받고 변화되었다. 그의 간증은 설득력 있고 강력했다. 사람들을 회개와 믿음으로 인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인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다.슬프게도 어떤 목사가(그 지역 목사가 아니었다) 그를 설득해서 캐나다 전역의 주요 장소에서 간증 집회를 하도록 했던 것이다. 나는 그의 간증을 밴쿠버에서 다시 들었다. 전에 들었던 것과 내용은 똑같았지만, 능력 있던 간증은 어느새 뻔한 이야기로 전락한 상태였다. 자발적이고 성령의 기름 부음 받은 간증이 부흥을 다른 곳으로 퍼뜨리기 위한 인간의 노력으로 인해 한낱 조작물로 전락한 것이다. 기독교 지도자라면 최소한 그런 조작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설교하는 대신에 감동적인 간증에 더 의존한다. 자발적이고 억누를 수 없을 정도로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 이상 의지하지 않는다. 열정과 조작 사이의 경계가 위반된 사례를 찾는 것은 오늘날 조금도 어렵지 않다. 6.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오는 부흥 운동이 당신에게 달려있다고 착각하지 말라.20세기 동안 한국은 회심자의 숫자와 신학적 성숙도가 눈부시게 성장했지만, 반면에 일본은 반대로 지지부진하며 어려움을 겪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한국 지도자가 일본보다 훨씬 더 유능하거나 재능이 있었다고 결론을 내려야 할까? 왜 요시야는 민족의 부흥을 주관했는데, 예레미야는 평생을 오로지 눈물로 지새고, 용기를 떨어뜨리는 예언을 선포하고, 심판을 외치면서 보내야 했을까?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위대한 갱신의 시간에 참여하는 특권을 주신다면, 기회를 주신 그분께 감사하라.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을 신실하게 전달하는 자가 되기 위해 자신을 바치라. 무엇보다 겸손을 길러야 한다. 7. 운동의 인기에 따라다니는 위험을 조심하라.많은 전문가가 오늘날 북미의 많은 지역에서 명목상 그리스도인의 수가 급감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이런 변화는 기독교와 그리스도인을 소외시키고 반대하는 사회적, 문화적 세력이 확산하면서 촉진되고 있다. 반대가 많은 곳에서는 명목상 그리스도인의 수가 감소한다. 그러나 동시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분별하기가 더 쉬워진다. 그러나 반대로 어떤 운동이 대중화되면 새로운 위험에 직면한다. 비록 처음에는 많은 반대에 부딪히는 개혁과 부흥 운동이라고 해도, 일단 대중화에 성공하면 많은 사람이 거기에 승선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런 현상은 지도자들이 하나님께 분별력을 간구해야 함을 의미한다. 8. 그저 자연주의적 설명으로 그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라.진정한 부흥 운동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그리고 그 운동의 여파가 남아있는 이후에라도, 적지 않은 사람이 그것을 촉발한 상황이 무엇인지 물을 것이다. 일반적인 이유를 작성하는 것은 쉽다. 기도하는 형제자매 모임, 갱신을 열망하게 만든 영적 타락의 시간, 문화적 불안과 격변(퀘벡에서는 “조용한 혁명”으로 불렸다) 등등이다. 그러한 현상을 보고 그 안에서 하나님 섭리의 손길을 찾는 것은 전적으로 합리적이다.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현상을 보고하는 건전하지 못한 설명 방식이 있다. 이러한 현상이 그 자체로 부흥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는 인상을 주는 설명, 그리고 이런 현상을 다른 곳에서 복제할 수 있다면 그곳에서도 얼마든지 부흥을 가져올 수 있음을 암시하는 식이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문화 현상에 수반되는 모든 것이 부흥 없이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무도 이러한 현상을 근거로 부흥의 시작을 예측하지 못했다. 하나님은 결코 인간에 의해서 길들지 않으신다. 지나치게 자세한 분석은 나 자신의 홍보 외에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지나치게 자세한 분석은 인간이 운동을 통제한다는 인상마저 줄 수 있다. 물론 그리스도인 중에서 그렇다고 드러내서 말할 정도로 멍청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역사와 문화가 얼마나 복잡하게 얽혀있는지를 깊이 숙고하라. 그리고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섭리의 손길을 분별하라. 그러나 “이 일은 주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로서는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말할 수가 없습니다”[창 24:50]라고 고백할 수 있는 여지를 충분히 남겨두도록 하라. 이 글은 “When Revival Comes”(Themelios 43, no. 2, August 2018)을 간추린 것이다.원제: What to Do When Revival Come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부흥
가짜부흥
부흥의분별
부흥의특징
캐나다부흥
조용한혁명
농촌목회, 절망에서 희망으로
농어촌 목회가 블루오션이다_시작하며
by 조성돈
2023-04-13
농어촌교회가 어렵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 어려움은 무엇보다 인구의 문제이다. 벌써 10년 전쯤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한 농촌교회 목사가 수업 시간에 자기 교회를 소개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이야기는 “우리 교회는 20년이면 없어집니다”였다. 현재 어르신들이 주로 나오고 있는데, 이분들의 수명을 생각해 보았을 때 20년이면 모두 자연스럽게 사라지실 분들이라는 얘기다. 문제는 그 마을에 주민들이 모두 이 연령대에 있으니 마을도 없어지고, 당연히 교회도 없어질 거라는 전망이었다. 정말 암담한 이야기였다. 얼마 전 감리교 본부의 의뢰를 받아서 감리교 농산어촌교회 실태조사를 진행했다. 여기서도 상황은 비슷하게 나왔다. ‘지난 주일 출석 교인 수’를 물었는데 30명 미만이 70퍼센트가량 나왔다. 그중 60대 이상 고령인구가 65퍼센트를 넘어서고 있다. 교회가 이런 상황이니 미래를 생각할 수가 없다. 현재도 어렵고, 미래는 더 어렵다는 것이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조사 가운데 농촌목회자들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중 전라북도 있는 한 목사님의 이야기가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농촌목회자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겠냐는 질문에 그는 정신건강 돌봄이 필요하다고 했다. 자신이 공황장애를 몇 년간 앓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사연을 내놓는다. 그가 목회하고 있는 교회는 전형적인 농촌교회였다. 15년 전 부임을 했는데, 그때만 해도 교인이 80명 정도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이후로 교인이 점점 줄어들고, 특히 코로나 여파로 이제는 20명 정도 모인다고 했다. 이렇게 교인이 줄어든 것은 농촌 마을에 사람이 줄어든 것도 있지만, 교인들이 돌아가셔서 그렇다. 최근 이 교회의 교인감소 원인은 ‘사망’이다. 한때 부흥했던 시기에 지어놓은 커다란 예배당에 빈자리가 하나씩 늘어난다. 한 자리, 한 자리 다 이야기가 있고, 평생 그 자리를 지켰던 그분들의 삶이 있는데, 이렇게 빈자리가 된 것이다. 그걸 보다가 어느 날 강대상에서 마음이 무너졌다. 제가 한 5년 전에 공황장애가 왔었거든요. 그게 무슨 말이냐면은 성도님들… 갑자기 권사님 혈액암으로 돌아가시고, 어떤 권사님 갑자기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또 우리 장로님 한 분은 또 가정적인 문제로 교회를 쉬고, 또 잘 나오신 권사님 내외가 갑자기 그분도 병으로 돌아가시고. 이삼 년 사이에 어 딱 강대상 올라가면 자리가 다 비잖아요. 그럼 목회자들은 그렇죠. 신학적으로는 천국 갔잖아요. 다들 기뻐하고 감사하지만. 강단에 설 때마다, 볼 때마다 뭐가 보여요. 빈자리가 보이고 이게 몸에 충격을 받더라고요. 나는 괜찮겠다 했는데, 어느 날 강단에 섰는데 너무 이게 가운이 무거운 거예요. 숨을 못 쉬겠는 거예요. 이게 뭐지? 도대체… 한번은 그래서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다가 예배를 중단했어요. “잠깐 쉬었다 합시다.” 앉아 가만히 있었어요. 숨을 못 쉬겠는 거야 막 뛰쳐나가고 싶은 거예요. 막….” 농어촌교회가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다. 들어오는 교인은 없고, 교인들은 점점 돌아가시고, 마을도 없어질 위기에 교회가 새롭게 부흥할 길도 없다. 어르신 몇 명, 많아야 이십 명인데 이분들을 통해서 교회를 유지한다는 것도, 목사의 사례를 기대한다는 것도 어렵다. 정말 사방이 막힌 것 같다. 인터뷰를 진행한 이 목사가 겪고 있다는 공황장애는 농촌목회의 현실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단어인 것 같다. 하지만 농어촌교회가 이렇게 절망적인 것만은 아니다. 사회의 분위기가 바뀌고 있고, 사람들의 생각도 바뀌고 있다. 앞으로 몇 번에 걸쳐서 농어촌교회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다. 아마 농어촌교회에 대해서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될 것이다. 몇 차례 이어질 이 이야기의 큰 주제를 그래서 ‘농어촌 목회가 블루오션이다’라고 불러도 좋을 듯싶다. 그 길을 한 번 살펴보고자 한다.
농촌목회
농어촌교회
팀 켈러에 대한 ‘허수아비 공격’을 우려한다
by 이윤석
2023-04-12
기독교 세계관 운동 2.0 위하여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SIEW)과 함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섭니다. 팀 켈러 목사는 교회 안에서의 삶뿐만 아니라 교회가 속해 있는 세상 안에서의 삶을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 많은 통찰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다양한 영역의 세상 사조를 심도 있게 분석하여 그에 대해 기독교는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인지를, 팀 켈러는 탁월한 방식으로 설명해 준다.팀 켈러 목사의 사역과 저작들을 좋아하는 여러 동료 목회자들과 ‘팀 켈러 천천히 읽기 모임’을 수년간 해 오면서 필자는 팀 켈러의 주요 저작 대부분을 깊이 있게 읽고 연구할 기회를 가졌다. 팀 켈러는 통상적인 복음의 내용, 교리, 목양, 목회 등에 대한 것뿐 아니라 도시 연구, 교회 개척, 세상 속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삶, 선교적 교회,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변증, 일과 영성, 정의의 문제, 결혼, 고통 등 여러 가지 주제에 대해 다루며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서의 삶에만 머물지 않고 세상 속에서 세상을 변혁하는 삶을 살도록 인도한다.그런데 최근 몇몇 비판가들이 팀 켈러를 유신진화론자로 몰아가고 있다. 일단 젊은지구론자들 가운데 일부 몇몇 편협한 논자들이 딱지를 붙이고 나니 많은 사람이 각종 SNS를 통해 “팀 켈러=유신진화론자”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다. 그들이 팀 켈러를 유신진화론자라고 몰아붙이는 비판의 근거 자료로 삼는 것은 다음 두 가지 글이다.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의 “제6장 과학과 기독교-과학이 기독교 신앙이 틀렸음을 증명해 낸 것 아닌가”와 바이오로고스 웹사이트에 올려져 있는 “Creation, Evolution, and Christian Laypeople”(창조, 진화, 그리고 평신도 그리스도인)이란 글 하나 정도가 이에 해당한다. 팀 켈러의 수많은 글 중에 이처럼 창조론에 대한 내용을 다룬 것은 매우 제한적이다. 팀 켈러는 창조론 전문 연구자가 아니다. 팀 켈러는 무엇보다 평생을 교회를 개척하여 목회에 전념해 온 목회자다. 위 두 가지 짧은 글 외에 세상의 기원 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룬 글도 찾아보기 어렵다. 창조에 대한 무슨 특정한 관점을 주장한 글 자체를 찾기도 쉽지 않다. 그러므로 팀 켈러가 세상의 기원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졌는지 분석하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 따라서 정직한 학자라면 팀 켈러가 유신진화론을 주장하는지 아닌지를 위 두 가지 글을 가지고서는 판단할 수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위 두 가지 중 첫 번째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의 글은 개혁주의 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별로 흠잡을 부분이 없다. 두 번째 글 “Creation, Evolution, and Christian Laypeople” 역시 개혁주의 신학의 관점에서 세상의 기원 문제에 대해 과학적 접근을 하려는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창조’와 ‘진화’ 주제에 대해 넘지 말아야 할 경계선을 제시해주는 역할에 충실하다. 이 글에서 팀 켈러는 창조과학 진영이 주장하는 ‘젊은지구론’이나 바이오로고스 진영이 주장하는 ‘유신진화론’ 중 어느 하나를 주장하거나 지지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팀 켈러의 위 두 가지 글을 자료로 하여 그를 유신진화론 지지자로 규정하는 것은 전형적인 ‘허수아비 공격하기’ 오류다. 팀 켈러를 유신진화론 지지자라 비판하는 몇몇 사람은 대개 창조과학 골수 추종자들이다. 창조과학 진영이 펼치는 반진화론 운동은 나름대로 좋은 면이 있다. 그러나 어떤 지점에 이르면 합리적 사고방식을 버리고 독단적 사고에 빠지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팀 켈러의 글을 왜곡해서 이해하고 정당하지 않은 비판을 제기한다. 예를 들어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의 제6장의 부제(번역본 상)는 “과학이 기독교 신앙이 틀렸음을 증명해 낸 것 아닌가”(Science Has Disproved Christianity)인데 어떤 비판자는 이것을 마치 팀 켈러의 주장인 것처럼 말한다. 그렇지 않다. 팀 켈러는 이 부제를 세상 사조의 특징으로 적어놓은 것이고 제6장에서 이 부제에 대한 반론을 펼친다.또 팀 켈러가 “Creation, Evolution, and Christian Laypeople”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은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는, 창세기 1-2장 본문의 해석은 젊은지구론자들이 강조하듯이 문자적으로만 해야 한다고 볼 수는 없으나 본문 기록의 역사성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젊은지구론자들이 강조하는 ‘문자적’ 해석은 성경 해석의 주요한 원리인 문예적, 문법적 해석의 원리 중에서 특수한 한 형태로 그것만 고집하는 것은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두 번째는, 진화론을 지지하는 학자들까지도 포함해서, 과학자들의 과학적 작업 노력은 존중해야 하나 과학적 이론이나 설명 체계를 세상 모든 것을 설명하는 철학적 체계로 확장해서는 안 되며, 특히 진화론을 그런 방식으로 확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팀 켈러는 과학자들의 과학 활동을 격려하면서도 선을 넘지 말라고 충고하고 있다. 세 번째는, 진화를 받아들이면서 아담의 역사적 타락을 설명하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한 면도 있지만 그런 설명을 절대화해서는 안 되며, ‘탐색적 제안’, ‘잠정적 의견’ 정도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불변의 교리가 아니라 잠정적 작업가설 정도의 권위만 부여하라는 것이다. 이런 설명의 사례로 데렉 키드너(Derek Kidner)의 모형을 소개하는데, 이 내용은 키드너의 의견에 대한 소개일 뿐 팀 켈러가 이 내용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걸 보고 팀 켈러가 유신진화론을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팀 켈러는 이런 식으로 바이오로고스 진영의 활동에 어느 정도 유용한 경계를 설정해 주고 있다. 물론 창조과학 골수 추종자들이 보기에는 팀 켈러가 창세기 1-2장의 문자적 해석‘만’을 지지하지도 않고, 창조 주간 6일의 하루하루가 ‘24시간 하루’였다고 주장하지 않는 것에 대해 큰 불만을 가질 것이다. 팀 켈러는 창세기 1-2장의 역사성을 결코 부인하지 않지만, 이들은 계속해서 팀 켈러가 창세기 1-2장의 역사성을 부인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그들이 팀 켈러를 유신진화론자로 몰고 간 것은 그들이 비판의 근거로 삼은 자료를 오독한 결과로, 자료가 말하지 않는 것들을 자신들이 가진 선입견을 투사하여 공격한 전형적인 ‘허수아비 공격하기’ 행태다. 팀 켈러는 세상의 여러 사조를 진단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할 때 세상 사조 자체를 자세히 분석하여 언급하는 경향이 있는데, 종종 그것 자체를 팀 켈러의 입장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의 기원 문제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아주 겸손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팀 켈러를, 충분한 근거 없이 유신진화론자로 몰아가는 몇몇 편협한 젊은지구론자들의 행태가 심히 우려된다.편집자가 제안하는 ‘함께 읽으면’ 좋은 기사 · 팀 켈러는 ‘유신진화론자’인가· 젊은 지구: 지구의 나이가 수천 년인 이유· 오래된 지구: 지구가 수십억 년 되었다는 증거· 젊은 지구 주장에 대한 응답· 오래된 지구 주장에 대한 응답
유신진화론
젊은지구론
창조과학
생명을 주는 암
by Rachel Ho
2023-04-11
2022년 7월, 뇌 왼쪽 전두엽에 종양 진단을 받았다. 논리적 사고와 집중력을 관장하는, 흔히 말을 잘하게 하고 중요한 두뇌라고 의사들이 부르는 바로 그곳이다. 진단 이후 내가 만난 모든 의료 전문가가 물었다. “어떻게 처음 알게 되었습니까?” 뇌종양이 발생할 확률은 평균 1퍼센트이며 종양의 위치에 따라 다양한 증상이 나타난다. 내 경우는 언니와 함께 발리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에 발작을 일으켰고,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때 나는 서른 살이었고 많은 보람을 느끼던 직장에서 갓 사직하고 8월에 석사 학위 취득을 위해서 독일로 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생을 맞으며 나는 응급실에서 눈을 떴다. 그리고 6개월이 흘렀고, 나는 선제적인 치료를 마쳤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두 번째 인생을 기대하고 있다. 사실 나는 지금보다 더 행복하거나 더 큰 축복을 받았다고 느낀 적이 없다. 그 이유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죽음이라는 두려움아마도 내가 아는 한 나는 가장 조바심 내는 사람일 것이다. 일이 잘 풀려도 더 완벽하고 싶어서 안달한다. 상황이 나빠질 때는 그보다 더 나빠질 가능성이 적어도 세 가지 이상 항상 머리에 떠오르는 게 나라는 사람이다. 그러나 지금 내 마음은 암 때문에 조금도 두렵거나 불안하지 않다. 말 그대로 풍성함을 누리고 있다. 왜 암에 걸리고도 나는 믿음의 위기를 겪지 않았을까? 성경을 바로 가르치는 교회를 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곁을 떠나지 않은 형제자매와 교제를 이어간 덕이라고 말하고 싶다. 수년간의 훌륭한 설교, 성경 연구, 기도 모임, 그리고 빛과 소금이 되는 여러 그리스도인의 행실을 관찰한 것이 모두 다 내 마음을 준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들은 또한 내가 뻔한 질문을 놓고 고민하지 않도록 했다. 나는 이미 다음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고통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 나도 언젠가는 죽는다.• 미래에 관해서 100퍼센트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또한 다음 사실도 알고 있었다. • 내가 고통받는다고 그게 꼭 하나님이 나를 벌주신다는 의미는 아니다.• 설혹 죽는다고 해도 모든 것을 다 잃는 건 아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완성될 것이다(롬 8:37-39).그러나 지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개두술(뇌 수술) 전날 밤, 나는 수술 후 내가 아예 말을 할 수 없게 될지, 또는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서 깨어날지, 행여라도 수술대 위에서 숨을 거둘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날 밤, 나는 욥기를 읽었다. 하나님이 욥을 기뻐하신 이유와 고난을 겪는 욥의 반응을 더 잘 알고 싶었다. 나도 어떻게든 잘 견디고 싶었다. 그날 나는 두 가지를 배웠고 또 결심했다.첫째, 나는 고통을 견뎌낼 것이다. 그러나 왜 이런 일이 생긴 건지, 수술이 끝나면 다음 단계는 어떻게 될 건지 등등의 질문을 놓고 안달복달하면서 고통을 배가시키지 않을 것이다. 더불어서 증상과 통증, 괴로움을 필요 이상으로 많이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그 모두를 견뎌내야 하니까 말이다. 둘째, 내가 죽더라도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 않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든 공개적으로든 하나님께 공정하지 않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욥처럼 눈물로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려고 노력했다. 진짜로 큰 슬픔과 충격에 휩싸여서 내가 울었던 유일한 시간은 종양이 3등급 핍지교종, 그러니까 암으로 밝혀졌을 때뿐이었다.실망해서 울었다.무서워서 울었다.그리고 무엇보다 죽기 싫어서 울었다.그때도 물론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매일 그분은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고 내 기도에 응답하셨다. 내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셨고, 나를 통해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셨고, 또 복잡한 의학적 결정을 통해 나를 인도하셨다. 나를 안심시키고 매일 매일 기쁨을 새롭게 하셨다. 그분을 온전히 더 신뢰하도록 가르쳐 주셨고, 내 삶을 놀라움으로 채우셨다. 그러나 내 믿음은 여전히 너무도 부족했다. 하나님은 부족한 나로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역사를 베풀고 계셨다. 하나님의 섭리우리가 암을 그토록 두려워한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하나님 없이도 죄인인 인간이 영생에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방법은 암을 통해서이다. 불멸한다고 알려진 유일한 인간 세포가 암세포(HeLa)이다. 암은 영원히 살기를 원한다. 다른 세포를 먹을수록 더 배가 고파지고, 아예 세포로 기능하는 것까지 포기한다. 죽음을 피하려고 필사적으로 숙주를 죽이는 게 암 세포이다. 그러다가 결국은 자신도 죽는다. 죄성에 찬 인간의 몸이 만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마지막 모습이다.중추신경계에서 가장 흔하고 또 가장 빠르게 진행될 뿐 아니라 가장 치명적인 것은 4등급 뇌암이다. 그런데도 이 암은 일반적으로 너무 늦게 발견된다. 암 덩어리가 너무 커지면 뇌가 두개골 공간 속에서 압축된다. 방사선과 화학 요법이 할 수 있는 건 최소한의 효과에 불과하며, 수술은 너무 위험하다. 뇌암을 처음 발견한 7월부터 그것을 절제한 10월 사이에, 나의 뇌 질량은 25퍼센트 증가했다. 뇌가 더 이상 확장할 공간이 없는 상황에서, 암은 자연스럽게 변이된 4등급이 되었을 것이다. 언어는 물론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나는 수시로 발작을 일으키고 분노에 몸부림쳤을 것이다. 자는 중에 고통 없는 발작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언니가 나를 급히 병원으로 데려가지 않았더라면, 신속하게 행동하는 대신에 한 외과 의사의 조언, “일단 지켜보면서 기다립시다”를 받아들였다면, 생검을 먼저 하고도 암 덩어리를 놓쳤다면, 부분 절제를 선택했다면, 조직 검사에서 악성이 아닌 양성으로 판단되었다면, 나는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죽음을 맞았을 것이다.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 매일매일 죽음을 향해 나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나의 마지막 성탄절과 새해를 맞았을 것이다. 그림자가 물러가다그러나 하나님은 완벽하게 개입하셨고, 사형집행인의 수렁에서 나를 구하셨다. 할렐루야!다시 살아났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그림자가 열 걸음 물러나는 것을 지켜보는 히스기야와 같은 느낌이다(왕하 20:10). 무덤에서 걸어 나오던 나사로와 같은 느낌이다(요 11:38-44).나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내가 과연 그동안 제대로 살았는지를 자문하곤 한다. 암은 내가 그 질문에 “그렇다”라고 대답하도록 했다. 나는 제대로 살아왔다.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는 것, 그리고 겸손히 주님과 함께 행하는 것(미 6:8) 말이다. 그러나 선을 행하면서도 과연 내가 최선을 다해서 헌신하고 있는지를 확신하지 못하고 궁금해하던 옛 삶과 오로지 풍요함이 주는 기쁨을 맛보는 지금의 새로운 삶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다. 이제 나는 그리스도의 사역은 완전하고 나의 노력으로 더할 수 없음을 안다. 그리고 그 선한 일에 나의 전부를 바치고 있다. 물론 히스기야와 나사로도 결국에는 다 죽었고 나도 죽을 것이다. 암이 재발할지 여부도 모르고, 결국에 나를 죽이는 것은 암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하나 확실하게 아는 게 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분의 축복을 배가시키는 데 남은 인생을 보낼 것이다. 내 돈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고, 내 시간은 외로운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내 손이 닿는 데까지 정의가 이뤄지도록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 앞에서 한 나의 서약을 이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임을 확실히 안다(시 116:18).우리 날을 계수하도록 가르쳐주소서당신이 다음 질문에 대답할 수 있기를 바란다.첫째, 당신이 누구이든 간에 고통이 다가오고 있다. 젊었든, 늙었든, 그리스도인이든 그렇지 않든 관계없다. 당신 품에 안긴 아기, 갓 결혼한 당신의 아내에게도 고통이 오고 있다. 인생을 살면서 이미 너무도 많은 일을 겪었다고 해도 다르지 않다. 고통에는 아무도 예외가 없다. 시간문제일 뿐이다.고통을 만났을 때 당신에게는, 또 당신의 내면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당신을 결코 놓아주지 않는 진짜 사랑을 알고 있는가? 당신이 만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 속에서도 하나님이 엄청난 선을 행하실 수 있다고 누군가 말할 때, 당신은 거기에 아멘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둘째, 하나님의 축복이 당신에게는 어떤 의미인가? “당신이 내게 축복하기 전에는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 32:26)라고 말한 야곱에게 축복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는 도대체 어떤 축복을 위해서 씨름한 것일까? 땅도, 소유물도, 건강도, 또 장수도 아니었다. 그가 간구한 축복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시는 축복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하나님은 참으로 그에게 응답하셨고, 이스라엘을 떠나지 아니하셨다. 야곱의 사랑하는 아내가 죽었을 때도, 사랑하는 두 자녀를 빼앗겼을 때도, 약속의 땅에서 이방 땅으로 끌려갔을 때도, 죽어서야 그토록 뼛속까지 그리워하던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음에도, 하나님은 한시도 그를 떠난 적이 없었다.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다. 매년 성탄절에 듣는, 임마누엘의 축복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당신과 내가 어떤 고통을 겪든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 마음이 바라는 그 어떤 것보다 뛰어나다. 내 몸이 아무리 쇠약해지더라도, 나의 믿음과 삶은 불시험을 이겨낼 수 있다. 전쟁, 역병, 파멸의 소문이 돌고 또 우리 같은 어린 양의 눈에는 바로 앞에 닥친 위험도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언제나 바로 곁에서 들려주시는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 그리고 그분을 믿고 안심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항상 여러분을 축복하시기를 간구한다. 원제: A Life-Giving Brain Cance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암
죽음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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