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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피아프처럼’ 절규한다
by 필립 정
2023-05-19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 1876-1973)의 연주곡 ‘새들의 노래’는 온갖 새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캐럴 곡이다. 그런데 마치 장송곡같이 어둡고 슬픈 느낌이 난다. 조국 카탈루냐를 독재자 프랑코에게 빼앗긴 카잘스의 마음엔 즐거운 새들의 노래조차 슬픈 마이너 코드처럼 들렸나 보다. 얼마나 조국의 독립을 바랐으면, 그는 이 곡을 연주하기 전 “하늘의 새들이 평화, 평화라고 노래한다”고 하였을까! 그러나 한 천재 음악가의 감정 이입이 아니라 실제 우리 주위의 수많은 동식물이 죽어가며 슬픈 목소리로 절규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사라지기 전에 인간에게 전해 줄 메시지를 전하고 간다. 마치 죽어가면서도 하고 싶은 이야기를 노래로 던지고 간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 1915-1963)처럼 말이다. 혐오와 폭력, 그리고 복수때로는 인간의 편견이나 고정 관념들이 섬뜩한 광기를 동반한다. ‘유대인은 나쁜 인간들’이라는 편견이 나중에는 유대인과 같이 살 수 없다며 폭력으로 이어졌듯이 ‘야생 동물은 무섭고 더럽다’는 고정 관념도 그런 식으로 폭력으로 이어져 왔다. 지렁이 한 마리를 보고 화들짝 놀라 밟아 버리고, 스쳐 지나가는 쥐 한 마리에도 비명을 지른다. 이런 태도는 어렸을 때부터 학습되고 주입이 되는데, 우리 그리스도인이 뱀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뱀을 악하고 무서운 존재로 교회에서 배워왔기 때문에 성인이 되어서도 뱀에 대한 두려움이 신앙처럼 고정된다. 다른 벌레들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다. 많은 벌레가 율법에 의해 부정한 것으로 불린다. 베드로조차도 벌레를 먹으라(이방인에게 선교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여러 번 거절할 정도로 그 잘못된 신앙과 같은 고정 관념을 쉽게 떨쳐 버리지 못했다. “어린양과 사자들이 뛰어놀고 독사 굴에 어린이가 손 넣고…”(이사야 35장)는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종말론적 관점에서 하는 말씀이다. 그러나 매일 자연을 대하는 게 내 직업이다 보니, 이 말씀이 전혀 비현실적이란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한 대학에서 아이들에게 뱀에 대한 편견을 실험한 적이 있었다. 이미 뱀에 대해 학습된 3세 이상의 아이들은 뱀을 무섭다고 피하였으나, 겨우 젖을 뗀 3세 미만의 아이들은 전혀 뱀을 무서워하지 않고 접근하였다고 한다. 잘못된 학습에서 비롯된 우리의 편견이나 고정 관념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사뭇 심각하게 봐야 한다. 즉 내가 마주하는 대상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가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의 반영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신 피조물에 대한 편견이나 고정 관념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결코 아니고 인간의 죄성에서 나온 것이라 가인의 후손의 통치 방식(폭력)이 반드시 수반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주신 자연이 이렇게 편견에서 혐오와 폭력으로 파괴되어 왔다.인간은 자연에 감당치 못할 폭력을 행사해 왔다. 대표적인 예가 모기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혹하게 되돌아왔다. 모기는 치명적인 지카 바이러스, 말라리아, 일본 뇌염, 뎅기열, 웨스트 나일 바이러스 같은 바이러스를 옮겨 연간 70만 명의 생명을 앗아간다. 그래서 엄연한 해충으로 분류되어 왔다. 그래서 사용된 최고의 살충제가 DDT이다. 우연히 개발되었지만, 후에 모기 살충제로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였다. 1930년대 이후 DDT를 사용한 국가(베네수엘라, 인도, 아프리카 국가 등)에서 말라리아 환자가 사용 이전에 비해 수천수만 배로 줄어들었다. 모기만이 아니라 개미, 거미, 진드기, 벼룩, 빈대, 심지어 농작물에 피해를 주는 해충까지 완벽하게 제어하여 유럽과 미국 등 선진국에서도 널리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 후 30여 년이 지나지 않아 그 폐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미국 전역에서 DDT와 그 이상의 독성이 있는 살충제의 무분별한 살포로 각종 벌레가 사라지고 이를 먹이로 하는 새들이 오염되어 멸종되고 있었다. 새봄이 되어도 새들의 지저귐이 들리지 않게 되었다. 1962년 미국의 생물학자 레이첼 카슨(R. Carson, 1907-1964)이 쓴 침묵의 봄(Silent Spring)에 이런 폐해의 경고가 잘 드러나 있다. 1991년의 한 조사에 따르면, 세계 각국 사람의 체내에 DDT를 비롯한 각종 농약 성분이 발견되었고 남극 지방의 펭귄이나 크릴 새우에게서도 발견된다고 한다. 우리가 매일 먹는 달걀에도 농약이 남아 있으니 더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지난 50년 동안 전 세계 동물의 68퍼센트가 사라졌다. 아마존 열대우림 지대의 광산 개발, 대규모 경작지 개발로 라틴아메리카에서 94퍼센트의 동물이 사라졌다. 식물들의 수분 매개 역할을 하는 동물들이 급격히 사라지자 식물도 40퍼센트 넘게 멸종 위기에 처했다. 식물은 동물의 먹이다. 식물이 없으면 동물도 살 수 없다. 연쇄로 자연이 무너지고 있다. 말을 못 하는 자연은 그렇게 죽음으로 인간에게 되갚아 주고 있다. 여전히 돈을 섬기는 시장 숭배자들에게 자연은 막대한 재산과 생명의 피해로 돌려주고 있다. 뛰는 농산물값, 물과 불로 휩쓸려 가는 산림, 온대 지역 열대화에 따른 열대 박쥐들의 온대 지역 출현, 그리고 코로나바이러스 창궐로 완전히 바뀌어 버린 세상…. 수백만의 생명이 사라졌고 도저히 온전한 정신으로는 살 수 없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자연이 인간의 폭력을 제대로 되갚아 주고 있다. 세상은 사랑을 노래하며 그렇게 죽어간다뜬금없이 한 가수의 이야기를 해야만 될 것 같다.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를 듣자면 고통이 함께 따른다. 그녀의 삶을 알고 나면 더 그렇다. ‘팬텀싱어 시즌 4’에서 에디트 피아프의 ‘아니오. 후회하지 않아요(Non, Je Ne Regrette Rien)’를 한 테너 가수가 너무 멋지게 불러 그녀의 ‘사랑의 찬가(Hymne a l'amour)’까지 찾아 듣게 되었다. “그대가 원한다면 달이라도 따오고, 큰돈이라도 훔치고, 조국도 친구도 버릴 수 있어요. 그대가 원한다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어요.” 이 노래는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를 비행기 추락 사고로 잃고 도저히 더는 노래할 수 없었지만, 다시 노래하기로 결심하고 작사한 곡이다. 그녀의 다른 노래, ‘장밋빛 인생(Ra Vie en Rose)’도 그렇고, 가사는 연인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1차 세계대전 중 원하지 않는 아이로 태어나 영양실조와 치명적인 병을 견디고 살아온 그녀, 사랑하는 사람의 배반, 그리고 사별과 이별, 여러 번의 교통사고로 인한 고통, 그 고통을 잊기 위해 시작한 모르핀 치료, 그리고 모로핀 중독으로 죽음까지…. 그래서 분명히 희망차게 사랑을 노래해도 슬픈 탄식의 노래로 들릴 뿐이다. 슬프지만 그래도 사랑을 노래하니 사랑의 노래다. 카잘스의 새들의 노래가 아무리 우울하게 들려도 새들의 노래인 것처럼….사람들은 그녀를 ‘노래하는 피아프(참새)’라고 불렀다. 이 별명이 그녀의 이름이 되었다. 에디트 피아프처럼 새들도 분주하게 하늘을 날며 짝을 찾아 사랑의 노래를 부른다. 풀벌레도 허공을 향해 구애를 하고 공작도 사랑의 날갯짓으로 사랑을 갈구한다. 새들이 울면 천적에게 자기 위치를 노출해 위험에 빠진다. 그래서 들키지 않으려고 아직 어두운 새벽에 그리 울어 댄다. 하루라도 더 살기 위해 연장된 삶에 필요한 언어들을 허공에 지저귄다. 죽음을 무릅쓰고 하는 얘기라 고되고 힘들지만, 새끼들과 연인들을 향해 염려하며 부르는 사랑의 노래일 수밖에 없다. 죽음의 위협 속에 다른 할 얘기가 없다.피아프는 남자에게 배반당하고 피해를 보고 죽어가면서 또 다른 남자를 향한 사랑의 노래를 부르며 죽어갔다. 인간은 자연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가해자이지만 동시에 살려 내야 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죄성을 가진 타락한 존재라도 하나님의 형상과 지혜롭고 자비로운 하나님의 속성을 지녔으니 자연이 사람을 두려워하면서도 결국은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믿고 싶다. 사실 인간이 다 사라져도 지구는 멸망하지 않는다. 그래도 어리석은 자연은 끝까지 인간에게 희망을 걸어본다. 에디트 피아프처럼…. 그래서 동물들은 생명의 위협에 처하면 사람에게 도움을 구한다. 상어에게 쫓기는 물개가 어선에 뛰어들어 살려 달라고 갈구하고, 낚싯바늘에 걸린 상어가 잠수부에게 다가와 입을 벌려 도움을 찾는다. 혹한에 처한 다람쥐는 사람이 사는 집의 문을 두드리며 쉬어 가며 먹을 것을 달라고 한다. 갈증에 지쳐가던 커다란 코브라가 입을 벌려 사람이 주는 물을 받아먹고 얌전히 몸을 돌려 가던 길을 간다. 길 잃은 새끼사슴이 마음씨 착한 아저씨가 주는 음식을 받아먹고 그의 얼굴에 자기 얼굴을 비비며 애정을 표시하고 자연으로 돌아가서 틈틈이 찾아와 고맙다고 표현한다. 어린 까마귀를 돌보아 주자 이 까마귀는 빛나는 돌, 유리를 물어와 사람에게 은혜를 갚는다. 병에 머리가 낀 붉은 여우가 제 발로 사람을 찾아와 도와 달라고 청한다.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인간은 자기 체험적인 선지식에서 다른 모든 것을 알게 된다. 선악과를 먹고 나서야 ‘이 나무의 열매를 먹어 이제 죽게 되었구나’ 하는 식이다. 플라스틱을 개발하고 200년이나 지나서야 ‘이것을 써보니 해양과 토양을 오염시키고 우리 몸은 병들어 죽게 되는구나’ 하는, 아담의 후예다운 탄식이다. 온갖 벌레와 새들이 그 지구의 위기를 노래로 말해주고 도와 달라고 해도 전혀 모르다가 인류가 멸망하게 되어서야 그 비참함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만물의 탄식은 구원을 향한 몸부림인 게다. 자연은 인간을 찾아와 애타게 자기들의 언어로 무엇인가 호소하고 탄식하다가 어디로 자취를 감춰 버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피아프가 사랑을 노래하며 사라져 갔듯이 자연도 죽어가며 사랑과 구원의 노래를 부른다. 어찌 이 노래를 들으며 기도하지 않고 잠들 수 있을까….
파블로카잘스
에디트피아프
참새
새들의노래
피조물의탄식
목회자 후보생들에게
기독교 고전으로의 초대
by Geoff Chang
2023-05-18
기독교 고전으로의 초대때는 1875년, 당신은 패스터 대학(Pastors’ College)의 2학년 학생이다. 신학, 수학, 문학, 수사학, 성경 언어 등등, 힘든 강의와 연구로 보낸 긴 한 주였다. 게다가 당신은 최근 이스트 런던 가난한 지역에서 복음전도 사역을 시작했기에 저녁에는 거기서 주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더불어서 메트로폴리탄 태버내클 회원으로서 꼭 가야 할 모임뿐 아니라 제자훈련을 시켜야 할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일주일 중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금요일 오후이다. 왜냐고? 아주 가까이에서 찰스 스펄전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책을 잔뜩 든 스펄전이 따뜻한 인사와 함께 교실에 들어올 때, 당신은 급우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스펄전, 우리 세기의 가장 유명한 설교자이다. 그에 비해 당신은 단지 평범한 목사일 뿐이다. 간단한 기도와 서론이 끝난 후, 스펄전은 작업에 돌입한다. 자신이 읽은 책 중에서 미래의 목회자가 꼭 알아야 한다고 그가 꼽은 책은 다음과 같다. 새로운 출판물, 고전 작품, 성경 주석, 신학, 철학, 찬송가, 과학 및 기타 모든 장르의 작품이다. 투자할 가치가 있는 책은 스펄전의 칭찬이 따르지만, 의심스러운 책에는 적절한 경고 딱지가 붙는다. 당신은 항상 이 시간을 즐겼고 주의 깊게 메모했다. 스펄전의 추천을 통해 당신은 자신만의 작은 신학 도서관을 만들었고, 스펄전 덕분에 가장 사랑하는 작가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하이라이트 시간이 되었다. 선배 목사로서 스펄전은 설교, 설교 준비, 개인 경건, 비판에 대처하기, 공적 기도 등등, 기독교 사역의 일부 측면에 대해 한 시간 동안 강의했다. 그렇다고 건조하고 학문적인 강의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하나같이 자기 경험에서 길어 올린 따뜻하고 개인적이며 종종 배꼽을 잡게 하는 이야기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목회자의 사역에 적용할 성경 지혜와 진리에 기반을 둔 교훈으로 가득하다. 머지않아 당신은 힘든 목회 사역을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금요일 오후 강의의 기억은 앞으로 오랫동안 당신의 뇌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바로 이 ‘목회자 대학’의 스펄전의 강의에서 기독교 고전, 목회자 후보생들에게(Lectures to My Students)가 탄생했다. 귀한 카운셀링이 책은 네 개의 시리즈로 (또는 네 권으로) 구성되었다. 첫 번째는 가장 유명한 목회자의 삶 전반에 관한 강의를 포함한 열네 개의 강의이다. “목사의 자기 감시” “목사의 개인기도” “목사의 탈진”이 포함되었다. 이 중 몇 개는 스펄전이 가장 좋아하는 주제인 설교를 다룬다. 본문 선택에서부터 설교 음성의 중요성, 그리고 잘못된 본문의 영성화라는 위험에 이르기까지, 이 설교의 왕이 전하는 모든 실천적 지혜가 담겨 있다.두 번째 시리즈에는 목회의 성장, 회심 설교, 성령에 대한 의존과 같은 다양한 사역 관련 주제에 대한 열 개의 강의가 담겨 있다. 원래 ‘예화의 기술’로 알려진 세 번째 시리즈에 담긴 내용은 주로 설교와 가르침에 초점을 맞춘 일곱 개의 강의이다. 여기에서 스펄전은 예화와 예증의 중요성에 대해 가르친다. 단지 예화의 사용 방법뿐 아니라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에 대한 지혜까지 제공한다. 주해 및 주석으로도 알려진 네 번째, 마지막 시리즈에는 두 개의 강의가 담겨 있는데, 하나는 “본문 해설(공동 성경 읽기)”의 중요성에 대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주석 사용에 관해서이다. 나머지 내용은 주석 카탈로그이다. 놀랍게도 스펄전은 무려 1,429개 항목에 대해서 간략하고 통찰력 있는 주석을 제공하는데, 그건 무려 거의 4세기에 걸친 기독교 학문을 아우르고 있을 뿐 아니라 성경 66권 모든 책을 다 포함한다. 이것은 스펄전 시대에 놀라운 성취였으며 오늘날 설교자들에게 연구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네 권 모두 다 읽을 가치가 있다. (최근에는 주석 카달로그가 별도의 책으로 나온다는 점을 명심하라.) 나는 스펄전의 글쓰기 스타일이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잘 소통된다는 걸 발견했다. 따라서 현대 영어로 수정되지 않은 (수정되었다고 해도 최소한으로 된) 원본 읽기를 추천한다. 돈이 모자라거나 전자책을 선호하는 사람을 위해 전자책과 PDF 스캔본도 온라인에서 찾을 수 있다. 내년에 Midwe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의 Spurgeon Library가 Spurgeon.org를 통해 스펄전 사본을 스캔하여 공개하길 바란다. 왜 목사나 교회 지도자가 이 책을 읽어야 할까? 세 가지 이유가 있다. 힘들게 얻은 지혜첫째, 이 강의는 사역의 어려움을 포함한 스펄전의 목회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당신이 목회자이고, 목회 중 언제라도 닥칠 수 있는 “기절 발작” 또는 영적 침체를 아직 경험하지 않았다면 이 책을 읽고 미리 준비하는 게 좋을 것이다. 현재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는 중이라면, 스펄전은 당신이 그 길을 헤쳐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목회적 멘토가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목회자라면 누구나 “눈을 감고 귀를 닫으라” 부분을 주의 깊게 읽어야 한다. 무려 오천 명이 넘는 교회의 목사로서 스펄전은 각종 험담, 비판, 갈등 및 기타 목회의 어려움을 현명하게 걸러내고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서 조언했다. 이 책에 담긴 지혜는 목회 생존에 결정적 역할을 할 것이다. 스펄전의 성공을 찬양하는 건 쉽다. 그러나 그의 목회가 승리의 연속이라고만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스펄전은 목회자라면 모두가 직면하는 재정 문제, 건강 문제, 영적 피로, 비판 및 기타 모든 종류의 시련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책에는 모든 시련 속에서도 신실함을 잃지 않은 한 사람의 현명한 조언이 담겨 있다.목회자를 위한 도움둘째, 이 책은 설교에 대한 스펄전의 최고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 설교의 역할에 대한 신학적 이해와 설교 자체에 대한 실제적인 가르침을 제시한다. 스펄전 목회 철학의 핵심은 말씀 전파였다.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죄인의 구원과 교회의 연합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종종 제자들에게 말하곤 했다. “교회 강단은 기독교 왕국의 뜨거운 전투장이다. 거기서 벌어지는 싸움은 지거나 이기거나, 둘 중 하나이다.” 당신이 설교에 지치고 사역에 낙담하기 시작한 목회자라면, 이 책은 설교 사역의 중요성을 새롭게 보고 각성하는 데에 꼭 필요한 격려를 줄 것이다. 어떻게 해야 설교에서 성장할까? 한 가지 방법은 다른 설교자로부터 배우는 것이다. 이 책에서 스펄전은 설교의 역학을 파고들어 모든 종류의 실용적인 지혜를 제공한다. 당신 경우에 설교자의 자세와 몸짓의 역할에 대해 마지막으로 생각한 게 언제인가? 예화를 활용해 설교를 더 흥미롭게 만드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설교문 작성 과정을 개선하는 방법은 없을까? 스펄전은 이 모든 주제, 아니 그 이상을 다룬다. 오늘날 많은 목회자에게는 설교 성장을 도울 멘토가 부족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설교의 왕자 앞에서 가르침을 받는 제자가 되는 특권을 누린다. 영광의 소명마지막으로, 스펄전은 목회 사역의 영광스러운 부름을 상기시킨다. 이 책은 매력적이고 유머러스한 많은 사례를 담고 있을 뿐 아니라, 기독교 목사로서 우리에게 내려진 막중한 소명을 진지하게 상기시킨다. 제1권의 첫 세 강의(목회자를 거룩함으로 부르심, 부르심에 대한 합당한 견해, 개인적 기도로 부르심)는 목회자라면 매년 반복해서 자기 성찰을 위한 거울로 삼을 내용이다. 많은 설교자가 허영심, 세속성, 유명세로 특징지어지는 시대에 스펄전은 냉정과 절제, 그리고 그리스도 중심의 목회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다. 단지 목회자의 사생활을 넘어 스펄전은 장기적 신실함에 대한 비전도 제시한다. 목회적 진보, 간절함, 성령 의존에 대한 강의는 평생 신실한 목회를 위한 로드맵을 제공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교회 성장 지표와 소셜 미디어의 영향에 쉽게 빠진다. 스펄전은 당신에게 당부한다. 말씀을 전파하고, 열심히 사역하고, 언제나 기도하는 마음을 유지하고, 무엇보다 모든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라고 말이다.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스펄전은 모든 강의를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백성을 사랑하는 목회 사역의 비전을 제시한다. 목회자에게도 멘토는 필요하다. 무려 삼십팔 년 동안 신실하게 교회를 섬긴 목사, 그리고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하심을 두 눈으로 똑똑하게 확인한 스펄전보다 더 좋은 멘토가 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는가? 당장 이 책을 손에 들라. 혼자 읽기보다는 다른 목회자 또는 교회 지도자와 함께 읽고 토론하라. 따뜻한 금요일 오후, 스펄전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우리 함께 귀를 기울이자. 원제: Lectures to My Students: A Reader’s Guide to a Christian Classic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스펄전
목회자후보생들에게
목회소명
기독교고전
작고 외진 교회, 복음과 계몽의 첨병 되다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무지내교회
by 이종전 · 장명근
2023-05-17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대한 강토에 선 첫 세대 교회들을 찾아 떠납니다. 그 이야기들에서 우리 신앙의 근원과 원형을 찾아보려 합니다. 경기도 시흥시 무지내동 257. 무지내교회의 현주소다. 하지만 이 교회를 아는 사람은 특별한 관심이나 관련된 이들 외에는 거의 없다. 크지도, 특별히 소문이 난 교회도 아니다.지금도 시골에 있고 작은 공동체이지만, 무지내교회는 한강 이남 지역과 충남(공주)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교회를 세우고 민족을 계몽하는 일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선구자들이 있었던 뜻깊은 역사를 간직한 교회이다. 가깝게는 안양, 수원, 안산, 화성, 멀리는 충남 공주에까지, 경기 남부와 충남에 이르는 지역 일대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와 학교를 세운 복음의 선구자들이 이 교회 출신이다. 무지내교회는 이 일대에서 최초의 교회이자 모교회로서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이 선교의 거점으로 삼았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함에도 지금은 그 존재감을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이 교회는 1899년 김동현(金東賢, 1869-1928)의 집에서 처음 예배를 드린 것을 그 공식적인 시작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1900년에 보고된 기록에 “이미 입교인 1인에 학습인이 14인이었는데, 올해는 입교인 5명과 학습인 41명”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미 1895년경에 복음이 전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가능하다. 이 교회의 초기 성장세는 놀랍다. 1901년 스웨어러(Wilbur C. Swearer/서원보) 선교사의 보고를 보면, 입교인 16명에 학습 92명의 큰 교회가 되었고, 1901년에 이미 예배당을 지었으며, 120여 명의 신자와 방청인 40여 명이 모여 봉헌 예배를 드렸을 정도였다.또 1902년 6월 예배당이 작아 증축해야만 했는데, 이 봉헌식에 참석하려고 무지내를 방문하는 과정에서 아펜젤러와 무어 감독 일행이 경부선 철도 부설 공사 현장의 일본인 노무자들에게서 봉변당하는 유명한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인들은 아펜젤러 일행을 러시아 장군 일행인 줄 알고 행패를 부렸다. 이 사건에서 상처를 치료받아야 했던 아펜젤러는 목포에서 열리게 되어 있는 성경번역위원회 회의에 참석하는 여정이 늦어졌고, 그 목포행 여정에서 그는 순직하게 된다. 역사에 만일은 없다지만, 그러한 사건이 없었다면 사고가 난 그 배를 타지 않았을 터이다….수도권이기는 하지만, 무지내교회가 있는 마을은 지금도 많이 외진 곳이다. 농사를 주로 하는 농가들에다가 작은 공장들까지 무질서하게 늘어서 있다. 이러한 곳에 인천을 제외한 한강 이남 감리교 선교지역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교회가 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 당시에도 선교사들이 이런 외진 곳을 찾아오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지나는 주요 길목도 아니고, 특별히 관심을 끌 만한 지역도 아닌데도, 어떻게 이곳에 일찍 복음이 들어왔고, 또 교회가 설립될 수 있었을까?얼마 전에 무지내교회는 경내에 기념비를 세워 이 교회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감당했던 김동현과, 그즈음 태어나 이 교회에서 자라고 훗날 이 교회는 물론이고 한국 교회사에서 큰 발자취를 남긴 장명덕 전도사를 기리고 있다. 특별히 이들은 무지내교회를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뜻과 영광의 주인공들이다. 생전에 발품을 아끼지 않고 수원과 멀리는 충남의 공주지방까지 마다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데 힘을 쏟은 김동현의 행적은 그가 초기 한국감리교회사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를 알 수 있는 한 대목이다. 당연히 무지내교회도 그를 통해서, 그를 기점으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그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그런데도 실제로 그에 관해서 아는 이들은 많지 않은 것도 현실이다. 따라서 김동현과 그의 사촌 동생인 김동일, 그리고 같은 마을에서 태어나 이 교회가 설립된 이후에 주일학교를 통해서 성장한 장명덕은 이 교회는 물론이고 이 땅의 모든 교회가 기억해야 할 믿음의 선구자들이며, 그들이 남긴 섬김의 여정은 한국 교회가 이어가야 할 사명이다. 김동현은 배재학당에서 공부했다. 이 학교를 졸업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배재학당을 다니면서 복음을 받아들였고, 학당장이었던 아펜젤러와 여러 선교사에게서 감화를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는 자신이 깨닫게 된 복음을 들고 고향인 이곳 무지내로 돌아와 자기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무지내교회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처럼 사실상 한국감리교회가 서울 이남 지역의 선교를 위한 교두보 역할을 했던 무지내교회가 설립되는 중심에는 김동현이 있었다.앞에서 언급했듯이 지금도 외진 곳인데 어떻게 다른 어떤 곳보다 일찍 이곳에 복음이 들어가고 교회가 설립될 수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풀릴 수 있는 것은 김동현이라는 인물을 알게 됨으로써 가능해진다. 이곳 무지내에 복음이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선교사의 결정이나 주도가 아니라, 이 마을의 김동현이 서울 배재학당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었고, 그 학교에서 만난 복음을 믿음으로 고백했고, 그 복음을 이 마을에 가지고 왔고, 그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함으로써 가능했다.무지내교회가 1898년 12월 1일에 설립된 이래로 김동현은 자연스럽게 이 교회는 물론이고 감리교회 선교부에서도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선교부로서는 초기 선교 현장에서 교두보 역할을 할 수 있는 중요한 전진기지를 얻은 셈이었고, 그래서 스웨어러 선교사가 수원과 공주를 선교지로 확정하고 개척하는 사역에 김동현을 그 첨병으로 세웠다. 우선 선교부는 1901년 수원성 화령전(華寧殿) 옆에 있는 땅을 김동현의 이름으로 매입하여 선교거점으로 삼고자 했다. 계획대로 스웨어러 선교사의 지원으로 땅을 사들였지만, 수원 유수(留守)가 김동현을 옥에 가두고 토지를 원주민에서 돌려주라고 강요했다. 정조(正祖)의 영정이 있는 화령전 옆에서 외래 종교가 떠들면 안 된다는 이유였다. 그 과정에서 김동현은 옥고를 치러야 했다. 외래 종교의 앞잡이 노릇을 한 죄였다. 따라서 감리교회 선교부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백방으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결국 석방되었지만, 옥에서 당한 고통은 사역을 이어가는 데 장애가 될 만큼 후유증이 컸다. 실제로, 출옥한 뒤에 김동현은 전도사로서 사역을 계속하는 과정에서 다시 공주에 파송되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새로운 거점을 마련하고 새로운 신자들을 살피면서 사실상 공주제일교회(현재)의 초대 목회자로 활동했지만, 그 성과는 크지 못했다. 결국 그는 다시 무지내교회로 돌아왔다. 그렇지만 1928년 고양군 용강면 아현리(현 서울 아현동)에서 59세의 생애를 마감하기까지 그는 복음을 전하기에 발이 닳도록 이 고을 저 고을을 찾아 다녔다. 그의 만년의 행적은 잘 알 수 없지만, 수원, 공주, 안산 일대 교회들의 역사에서 그의 이름이 거명되지 않는 경우는 없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김동일(金東一, 1884-1954)은 김동현의 사촌 동생이다. 그리고 민선 인천시장과 국회의원을 지낸바 있는 이 마을 김정열의 아버지이다. 그는 무지내교회가 설립된 이후인 1902년에 신앙에 입문했고, 버딕(M. Burdick)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감리교 협성신학교에 입학해 공부했다(졸업 여부는 모름). 그러나 1912년 안산구역에서 목회를 시작하여 1919년에 목회를 그만두었다. 그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목회를 그만둔 그는 1920년부터는 농사에 전념하면서 이 마을에서 살았다.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919년 삼일운동과 관련해서 교회 지도자들이 수감당하거나 목회를 그만두어야만 할 정도로 정신적인 고초를 받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 사실을 전제했을 때, 그가 갑자기 목회를 그만두고 고향에서 농사하는 일로 생애를 마감했다는 것은 그 개연성은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뒤를 이어서 사촌 형 김동현의 아들 김영렬이 안산구역을 맡아 목회를 하게 되었다. 이로써 안산지역의 교회는 두 형제와 대를 이은 김영렬에 의해서 계속되었다. 어떤 면에서 안산지역의 교회들은 대부분 그들에 의해서 세워졌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비록 그가 고향에서 농사일을 하면서 지낼 수밖에 없었지만, 그의 마음에 솟아오르는 열정은 그로 하여금 또 다른 일을 하게 했다. 1920년 이후로 보아야 하겠지만, 바로 그즈음에 흥업강습소라는 교육기관을 만들어 초등과정(1-3학년)을 가르쳤다. 그것도 여의찮아서, 일제 말기(?)에는 문을 닫아야 했고, 해방 후 다시 문을 열어 소성고등공민학교(邵城高等公民學校)로 개명하여 미취학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계속했다.한편 무지내교회가 설립된 후, 이화학당을 설립하여 한국의 여성 교육의 대모가 된 스크랜턴 선교사는 이화학당만이 아니라 그의 영향이 미치는 한 여성 교육을 위한 장을 만들어가는 일에 열정을 다했다. 무지내교회가 세워지자 이곳에도 관심을 가지고 직접 찾아와서 여성 교육을 위한 학교를 설립했다. 메리 스크랜턴의 후원으로 무지내교회는 1901년에 특별히 여자아이들을 교육하기 위한 ‘무지리여학교’를 지어서 교육을 시작했다. 무지리여학교는 지역의 아이들에게 한글과 산수를 비롯한 일상에 필요한 교육을 하고 있었는데, 교회에 다니던 장명덕은 자연스럽게 이 무지리여학교에 다녔고, 그곳에서 신교육을 접하게 되었다.무지리여학교는 지역의 어린이들에게는 미래에 대한 꿈을 키울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곳이었다. 외진 시골에, 그것도 여자아이들을 위한 학교가 세워졌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일이다. 1905년에는 남자아이들을 위한 학교도 시작했다. 남학생 10명으로 시작되었지만, 지역 주민들에게 주는 영향은 매우 컸다. 이렇게 무지내교회에서 남녀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운영하는 것은 지역은 물론 몰락하는 국가의 미래를 위한 귀한 일이었다. 게다가 가끔 찾아오는 선교사들은 무지리 지역민들에게는 특별한 것이었고, 선교사들에게서 자극을 받아 배움의 꿈과 소망을 가지게 했다. 따라서 지역사회에서도 이 교회와 학교에 대한 기대가 컸다고 할 수 있고, 비례해서 지역의 아이들은 배움을 위해서 모여들었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이곳에 제대로 된 학교가 세워져야 한다는 요청을 선교본부에 한 것을 볼 수 있다.이곳에서 초등학문을 익힌 장명덕은 이후 인천의 영화학교를 거쳐서 이화학당에 진학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공부할 기회를 잃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의지는 꺾을 수 없었다. 정상적인 공부는 할 수 없었지만, 감리교회 협성여자신학교에 은혜로 입학하여 전도사로서 복음전도와 계몽 사업에 일생을 바친 한국감리교회의 역사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의 생애와 사역을 여기서 열거할 수 없지만 한 가지만 적자면, 심훈 작가의 상록수라는 소설의 현장이 된 안산의 샘골(泉谷)교회에서 운영했던 상록학원을 설립한 인물이 바로 장명덕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상록학원과 주인공인 채영신(본명 최용신)만을 기억하고 있다. 아마도 소설 덕일 것이다. 하지만 샘골의 상록학원은 장명덕이 세워서 운영하다가 최용신이 파송되면서 그가 이 학교를 운영하게 되었다. 그리고 훗날 최용신이 병으로 사경을 헤매는 과정에서 그의 마지막 별세의 길까지 동거하면서 뒷바라지를 한 이도 장명덕 전도사였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일반인은 잘 모른다는 것이 현실이다.[1]이렇게 무지내교회는 지금도 수도권에서 개발되지 않은 외진 지역에 있지만, 지나온 과정에서 지역민을 깨우는 것은 물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넓은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교두보 역할과 귀한 인물들을 통해서 첨병 역할을 감당한 교회이다.주1. 장명덕 전도사에 관해서는 이 책을 참고: 기억하고 싶은 목회자들 1, 이종전 편(인천: 아벨서원, 2021).
무지내교회
김동현
서원보
아펜젤러
장명덕
김동일
감리교교회사
이땅첫교회들을찾아
끝을 마음에 두고 사는 삶
by 정현구
2023-05-16
현대의 특징 중 하나는 죽음을 일상의 삶에서 격리하는 것입니다. 현대사회의 장례문화는 죽음을 눈앞에서 치워버렸습니다. 사람들은 가족들의 눈물 어린 눈길 가운데서 숨을 거두기보다, 병원 중환자실이나 특수병동의 낯선 공간에서 죽음을 맞습니다. 도회지는 무덤을 외곽으로 옮겨 놓고, 병원은 영안실을 잘 안 보이는 뒷부분에다 둡니다. 모든 공간을 가능한 한 살아있는 사람들의 공간만으로 채색하려 합니다. 그래야 생명으로 충일한 생동하는 삶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삶은 죽음과 결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죽음이라는 현실을 잊으려 하면 할수록 삶의 의미도 함께 잃어가는 것입니다.성경은 오히려 죽음을 기억하면서 살라고 가르칩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전도서 7:2). 이렇게 권고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잔칫집은 현재의 즐거움으로 인생의 마지막을 망각하게 하지만, 초상집은 인생의 마지막을 깊이 생각하게 하여 현재를 더욱 의미 있게 살도록 하기 때문입니다.호스티스와 호스피스‘호스티스’와 ‘호스피스’란 두 직종이 있습니다. 호스티스는 밤의 화려하고 달콤한 쾌락 속에 사람들을 취하게 해서 인생의 밤, 인생의 마지막을 잊어버리도록 유혹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호스피스는 투병하는 사람의 병상 곁에서 죽음이라는 엄연한 현실에 분명히 눈뜨게 함으로써, 인생의 마지막이 지닌 참된 의미를 깊이 깨닫도록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잔칫집과 초상집, 호스티스와 호스피스, 죽음의 망각과 죽음의 기억, 어떤 것이 우리의 삶을 보다 나은 삶으로 만들까요?호스피스 봉사자 교육을 받을 때 먼저 두 가지 질문을 합니다. 하나는 ‘당신은 당신의 묘비에 어떤 말이 쓰이기를 원하십니까?’이고, 또 하나는 ‘당신은 유언장을 미리 작성해두고 사십니까?’라는 질문입니다. 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이지만, 이 질문은 인생의 마지막을 미리 생각하며 살게 하고, 현재 살아가는 삶을 다르게 만듭니다. 그래서 이 질문을 하고, 유언장을 미리 쓰게 합니다.샘물 호스피스의 원주희 목사님의 책 ‘죽음, 알면 이긴다’(샘물)에는 그의 유언장이 실려 있습니다. 이 유언장에는 자신이 살면서 맺고 있는 모든 관계에 대한 유언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들과의 관계, 소유물과의 관계, 일과의 관계, 신체와의 관계에 대한 유언들입니다. 그 유언장의 일부입니다. 저의 천국환송예배 때 이 글을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제가 이 땅에 태어난 것은 하나님의 품에 들어가 안식하기 위함이니 너무 안타까워하거나 슬퍼하지 마십시오. 가족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 세상 고생을 다 끝내고 평안히 쉬고 있는 저를 생각하면서 기뻐해 주십시오.첫째, 하나님에 대하여. 죄와 사망의 그늘에서 방황하던 죄인을 친히 찾아와 만나주시고 생명의 은혜를 풍성히 맛보며 살다가 저의 영원한 고향인 천국으로 당당히 들어갈 수 있게 하신 주님, 그 주님의 얼굴을 직접 뵐 것을 생각하니 기쁨으로 벅찹니다. 주님을 영원히 사랑합니다. 제 삶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 것 용서해주십시오.…둘째, 사랑하는 이들에게. 여보, 먼저 좋은 곳으로 가는 나를 용서해주오. ‘내 남편에게 휴식이 필요했는데 이제 모든 짐 내려놓고 편히 쉬겠구나’ 생각하고 위로받기 바라오. …셋째, 소유물에 대하여. 제 명의로 된 모든 재산은 샘물호스피스복지재단을 만들어 귀속시켜 주십시오. …마지막으로 저는 ‘죽음 앞에 있는 이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행복하게 해주려고 애쓰다가 떠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합니다. 유서와 유언장이 얼마나 아름다운가요! 이렇게 유언장을 미리 쓰고 살면, 주어진 삶을 더 잘 살게 됩니다. 무엇보다 겸손한 삶을 삽니다. 인생의 마지막에는 그 어떤 것도 도움이 되지 못함을 알기에 하나님을 더 의지합니다. 죽음을 코앞에 두고서야 때늦게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 순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현재의 삶을 더 아름답게 만들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인생을 전체로 보게 됩니다. 살다 보면 현재에 파묻혀 인생을 길게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살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삶의 방향을 잃어버리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마지막을 미리 생각하고 살아가면, 삶의 목적을 잃지 않으면서도 하루하루를 잘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늘 생각하셨기에 하나님의 뜻을 향해 하루하루를 살아가셨던 것처럼 말입니다.무엇보다 준비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출생을 준비하고, 입학을 준비하고, 결혼을 준비하고, 취직을 준비하고, 노년을 준비합니다. 산다는 것은 이처럼 내일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만큼은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고 사는 경우가 많은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죽음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은 유서를 쓰지만, 죽음을 준비한 사람은 유언장을 씁니다. 아름다운 끝을 마음에 담고서 매일을 보다 더 아름답게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끝은 인생의 종말이 아니라 영생을 향한 새 출발임을 알기에 더욱 충실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다줍니다.정현구, 영원을 품고 오늘을 걷다(SFC)에서 간추린 글입니다.
유언장
유서
호스피스
죽음
‘말씀을 내 삶에 적용하기’에 숨은 위험
by Ty Kieser
2023-05-15
몇 년 전 교회에서 나는 누가복음 14:26에 대한 소그룹 성경 공부를 준비하고 있었다. 성경 공부 시간은 “적용” (그러니까 “오늘 배운 말씀을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습니까?”) 부분에 와서 절정에 이르는데, 이건 모두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이 본문에서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내 삶에 적용”해야 할지 난감했다. 이 본문과 씨름하는 중에 나는 비로소 “적용”이라는 측면의 한계를 보게 되었다.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삶을 향해서 성경 전반에 걸쳐서 주님이 요구하시는 수준은 단지 사소한 변화나 약간의 조정 정도가 아니다. 누가복음 14장에 (그리고 성경 전체에) 나오는 예수님의 부르심은 단지 “적용”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어림없다고 할 정도로 깊고 넓으며 또 실제적이다. 세 가지 흔하고 틀린 가정다시 말하지만, 나의 관심사는, 베스 펠커 존스가 말한 것과 같이, “기독교 교리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한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성령의 능력을 통해 우리 삶의 모든 면을 변화시킨다. 또한 성경은 우리가 복음이 가져다주는 많은 열매를 볼 수 있도록 돕는다. “적용”이라는 단어에 대한 나의 주요 관심사는 바로 이것이다. 적용이라는 도구로 인해 우리가 단지 틀릴 뿐 아니라 해롭기까지 한 가정을 가지고 성경에 접근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바로 다음 세 가지 가정이다.잘못된 가정 1: 나와 내 질문으로 시작해야 한다. 적용이라는 말 속에는 주체가 되는 사람과 그의 목적을 지원하기 위해 외부 물체를 사용한다는 가정이 담겨있다(가령, 자외선 차단제를 얼굴에 바르기 또는 생산성 기법 적용하기 등). 그러므로 “성경 적용”은 얼마든지 나와 내 삶이라는 우선순위를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다. 그렇게 되는 순간, 성경 진리는 단지 하나의 외부 대상으로 전락한다. 우리는 종종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인식을 바탕으로 성경을 읽는다. 그리고 “성경이 나에게 의미하는 바”를 발견해서 내 삶을, 내 질문을, 내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한다. 이런 가정 속에 숨은 위험은 성경 해석이라는 태양계의 중심이 내가 된다는 것이다. 성경 말씀은 오로지 나와 내 삶을 중심으로 돌아갈 뿐이다. 진리를 더 많이 삶에 “적용”할수록, 중심에 있는 내 삶은 더 큰 중력을 갖는다. 그리고 겉으로 보기에 적용되지 않는 말씀은 모두 기각되어 우주 쓰레기로 강등된다. 대안: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라. 내 질문과 가정을 우선순위에 둠으로 “성경의 서사를 가려버리는” 대신에, 하나님 이야기와 하나님이 세우신 이 세상이라는 현실로 시작해야 한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창 1:1)로 모든 이야기를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근본적 실재이신 하나님과 함께 성경 읽기를 시작해야 한다. 그렇다고 성경을 읽으면서 내 질문 또는 문제를 하나님 앞에 가져가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가령 고통이나 두려움, 슬픔의 계절을 이기기 위해서 특정 시편을 읽거나 지혜의 습관을 기르기 위해 가족 예배 시간에 잠언을 읽는 것 등). 그렇지만 우리는 “그의 나라를 먼저 구하고” 그 테두리 안에서 내 질문과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디트리히 본회퍼가 말한, 인류의 “관점”에서 해결책을 찾는 “비성경적” 탐색을 피해야 한다. 하나님의 이야기, 즉 실제 일어난 사건 속에서 내 위치를 찾을 때 사실상 많은 질문이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주님이 내게 주시는 응답은 욥과 베드로에게 하신 응답처럼(욥 38-41장; 요 21:22) 직접적인 대답 또는 내 문제에 대한 즉각적인 해결책이 아닐 수도 있다. 오히려 주님의 응답은 훨씬 더 위대한 해결책, 바로 주님의 임재이다. 잘못된 가정 2: 성경은 원리원칙 모음집이다. 적용이라는 얕은 접근 방식은 사실상 검색 대상에 대한 가정을 깔고 있다. 성경을 단지 문제 해결 열쇠 꾸러미, 원칙 모음집, 또는 “발견되고 적용되길” 기다리는 “영원한 진리”로 전락시킨다. 성경 이야기, 시편, 예언서, 서신서, 묵시 문학을 읽고 우리는 “여기서 빼낼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묻는다. 차라리 엑셀 스프레드시트 형태의 성경이 우리에게 더 적합할 것이다. 일련의 진술, 규칙, 삶의 원칙, 그리고 CTRL+F 키만 누르면 세상 흐름과 주어진 상황에 따라 빠른 적용거리를 순식간에 나열해주는 스프레드시트 말이다. 품위 있는 삶에 적용할 현명한 통찰력을 찾기 위해 예수님을 찾은 부자 청년처럼(막 10:17-22), 우리도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원칙을 찾기 위해 성경을 펼친다. 때로는 직장에서 필요한 말씀 또는 자동차 범퍼에 스티커로 붙일 말씀을 찾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우리도 부자 청년처럼 성경 속에 담긴, 삶 전체를 휘어잡는 하나님의 놀라운 초대를 놓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대안: 성경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그의 일하심의 이야기이다. 원칙 모음집으로 성경을 사용하면 살아서 역사하는 말씀의 능력을 무디게 할 수 있다(히 4:12). 성경에 원칙이 있는가? 당연하다. 그러나 그 원칙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누구시며 죄가 초래하는 해로운 영향으로부터 피조물을 구속하기 위한 그분의 사역에 관한 설명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성경은 흔히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이야기” 또는 “드라마”이다. 이야기에서 단지 원칙만 도출하는 것은 (원칙만 도출하고 이야기 자체는 신경도 쓰지 않는 것, 마치 원칙이 이야기라는 껍질 속에 담긴 핵심이라는 듯이) 핵심을 놓치는 결과를 초래한다. 성경 이야기의 본질은 나의 존재 전체를 통해서 이야기 속에 빠지고, 그 결과 이야기의 “저자”를 만나도록 하는 데에 있다. 잘못된 가정 3: 성경 읽기 목표는 내 삶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런 가정하에서 하는 성경 말씀 적용은 결국 나의 이익이라는 목표 추구에 하나님의 승인이라는 도장을 찍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다. 이런 경향이 만연하면서 생긴 반사작용은 X(돈 벌기, 투표하기, 옷 입기, 육아, 사업, 심지어 다이어트 방법까지 다 X에 포함된다)를 하는 “성경적 방법”을 알려주는 (좋은 것과 나쁜 것 모두 다) 책과 설교의 범람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적용 습관”을 훈련한 나는 성경을 펴면 당장 내가 끄집어낼 수 있는 유익부터 찾는다. 예를 들어 본문에서 뽑아낼 수 있는 세 가지 요점 또는 당장 적용할 수 있는 사소한 행동 변화 등등이다. 따라서 즉각적 적용이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성경 측면, 즉 구약의 독특한 서사, 이스라엘의 의식 관습, 초대 교회의 묵시적 기대 등의 내용 앞에서 힘들어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이런 내용이 적용 가능성의 제한이라는 겉모습 때문에, 교회에서 외면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피조물을 구속하기 위한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하나님이 이루신 일의 일부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친구의 하루가 어땠는지 물은 후에, “잠깐만, 네 하루 이야기를 내가 내 삶에 어떻게 적용하는 게 좋을지 좀 알려줄래?”라고 묻는 당신의 모습을 한번 상상해보라.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을 향해서 우리가 지금 그러고 있다. 행여라도 우리가 지금 하나님과의 관계가 주는 친밀함과 온전한 성장이라는 축제의 향연을 사소한 행동 변화와 내가 바라는 최적화된 삶을 위한 실용성이라는 팥죽 한 그릇으로 바꾸고 있는 건 아닐까? 대안: 성경 읽기의 목표는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내 문제와 관점에서 시작하여 삶의 개선에 필요한 원칙 찾기에 골몰할 때, 우리가 놓치는 것은 하나님을 더 많이 알고 더 깊이 교제하라는 성경의 초대이다. 하나님이 성경 속에 자신을 계시하신 건 내가 바라는 방식에 따라 내 삶의 특정 측면을 개선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즉 우리를 향한 그의 사랑과 우리와 함께하시려는 그의 열망을 나타내시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정말로 삶을 “개선”하고 싶다면 바로 여기, 예수님 안에 있는 풍성한 삶(요 10:10)에서 시작해야 한다. 풍성한 삶은 내 구미에 맞게, 내 목표에 따라서, 적당하게 향상된 삶에서 나오지 않는다. 나 자신은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진짜 삶을 찾아야 한다(갈 2:20). 그건 다름 아니라, 내 삶의 모든 측면을 하나님을 향하도록, 그리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향하도록 하는 것이다. 성경 읽기의 방향 전환세 가지 잘못된 가정을 뒤집음으로써 나는 성경을 (그리고 성경의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 성경 읽기의 방향을 바꾸면 더 이상 성경을 지침서로 보지 않는다. 저자를 더 알고 더 사랑하고 싶은, 일종의 좋은 자서전을 읽는 것과 비슷해진다. 성경 읽기가 단지 내 성품의 한 측면을 바꾸는 도구 또는 약간의 시간 투자 정도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성경 읽기를 통해 모든 것을(빌 2:8-10), 심지어 생명까지도(눅 14:26) 포기하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예수님은 나의 모든 것을 다 변화시키실 것이다(살전 5:23). 도로시 세이어즈의 말을 기억하자. “교회의 사명은 그리스도를 사람에게 맞추는 게 아니라 각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맞추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내 삶에 적용하는 것”과 “내 삶을 하나님의 말씀에 적용하는 것”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세이어즈는 분명히 후자를 선택하라고 강권할 것이다. 후자가 무엇인가? 나의 방향을 하나님께 맞추는 것, 이 세상에 대해서 들려주는 하나님의 진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 그리고 하나님과 나누는 깊은 교제이다. 원제: Potential Dangers of ‘Applying Scripture to My Lif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말씀적용
성경공부
마음의 명령에 뇌와 몸이 순종하기를
기독교 세계관의 마음-뇌-몸 관계
by 김경호
2023-05-14
기독교 세계관 운동 2.0 위하여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SIEW)과 함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섭니다. 인간은 마음 안에 영혼을 지닌 지-정-의로 이루어진 존재다. 또한 인간은 뇌와 몸을 지닌 존재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의 궁금증은 마음, 뇌, 몸이 각각 어떤 역할을 하느냐이다. 기독교 세계관의 관점에서 말한다면 이런 것이다. 이 세 가지는 마음 안의 영혼을 전제로, 뇌와 몸이 작동한다는 것이다.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는 이 관계를 잘 설명한다. 영혼은 인간 삶의 원리이자 주체이고, 마음은 그 생명의 근원이다. 하지만 우리의 궁금증은 더 많은 설명을 요청한다. 마음은 사실 뇌의 기능이 아닌가? 마음이 뇌의 기능이라면 몸도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 분야에 노련한 작은 거인들이 있다. 이제 이 작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서 보자. 원리: 마음속 영혼의 명령을 따르는 머리(지), 가슴(정), 손(의) 파편화된 신앙, 파편화된 사람들. 데니스 홀링거Dennis P. Hollinger는 마음을 머리, 가슴, 손 ‘신앙’이라고 표현한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머리와 가슴과 손이 흥겹게 합주하는 악기처럼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파편화된 신앙, 파편화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생각이 깊은 그리스도인(머리 신앙)은 개인 경건을 얄팍한 감정이라고 비난한다. 감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그리스도인(가슴 신앙)은 역동적인 내면의 경험을 중시하며, 지식이나 이해 추구를 비난한다. 행동을 중요하게 여기는 그리스도인(손 신앙)은 경건을 믿음 있는 척하는 위선이라고 비난한다. 이 세 가지 신앙은 분리되고 한 가지 차원만 강조할 뿐, 나머지는 철저하게 무시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파편화된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는다. 성경에는 머리, 가슴, 손 신앙을 균형 있게 제시한다.머리 신앙. 머리 신앙은 회심, 성장, 세상과의 관계에서 필수적이다. 머리는 회심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성의 변화 없이는 진정한 회심은 불가능하다. 머리는 그리스도인의 성장에도 중요하다. 성장의 핵심에 바로 사고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사고란 “하나님에 대해” 아는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어야 한다. 그러나 왜곡된 머리 신앙도 있다. 사고를 소홀히할 때 감정이 지배하는 신앙에 머물게 되고 이단을 낳기 쉽다. 또한 지성을 깎아내리게 될 때 세상에 개입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되고,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흑백논리로 세상을 보게 된다. 사고가 모든 것에 우선할 때도 머리 신앙은 냉랭한 죽은 정통이 일어나게 된다. 이때 하나님과의 관계의 생동감이나 자발성, 그분과의 임재 의식을 잃어버리기 쉽고, 자기기만에 빠지며, 결국에는 신앙을 포기하게 된다.가슴 신앙. 가슴 신앙은 의지, 애정, 느낌, 이해, 이렇게 네 가지 차원의 형태를 띤다. 먼저 ‘의지’는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려는 내면의 결단이다. ‘애정’affection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내면의 성향이나 방향성이다. ‘느낌’feeling은 우리가 특정한 사건이나 사물, 사람이나 사상에 반응하며 경험하는 즐겁거나 고통스러운 감각이다. ‘이해’는 지식과 지혜의 개념과 연결된 지식을 적용하는 분별력이다. 그러나 왜곡된 가슴 신앙도 있다. 가슴을 소홀히 할 때, 성령의 임재와 능력의 부재가 나타난다. 또한 도덕적 성품이 결여하고, 결국 율법주의로 빠져들고 만다. 가슴이 모든 것에 우선할 때, 다시 말해 지나치게 내면 상태에만 집중하면 내면의 상태가 신앙을 지배하게 된다. 그러면, 가슴은 변덕이 죽 끓듯 하고, 왔다 갔다 한다. 또한 과도한 가슴 신앙은 이단에 빠질 소지가 있다. 손 신앙. 손 신앙이란 몸을 통해 드러나는 구체화된 신앙이다. 기독교 영성은 몸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몸 안에서의 자유다. 이처럼 기독교에서는 몸이 중요하다. 창조는 물리 세계를 강력하게 지지한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몸의 부활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그러나 왜곡된 손 신앙도 있다. 하나님이 주신 이 좋은 선물인 몸 자체도 잘못된 고유한 충동과 경향을 지닐 수 있다. 타락한 인간은 몸을 오용할 수 있다. 행동을 소홀히 여길 때, 기독교가 위선적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력 또한 상실된다. 또한 행동이 최고가 될 때, 손 신앙은 자기만족에 빠지거나 자기 의가 되고 만다. 그 이후 행위에 치우친 신앙은 피상성과 맹목적 헌신으로 끝장난다. 결론은 “마음heart을 다하고 뜻soul을 다하고 힘strength을 다하여”(신 6:5) 머리와 가슴과 손이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원리를 따라 뇌와 몸에도 적용해 보자. 적용 1: 마음의 명령을 따르는 뇌 캐롤라인 리프Caroline Leaf는 다음과 같이 마음-뇌의 관계를 잘 설명한다. 우리의 마음이 어떤 생각을 품느냐에 따라 우리의 뇌가 변화된다. 그렇다. 당신의 마음이 바로 그 변화의 스위치다. 이는 기독교 세계관의 관점에서 인간의 영혼의 좌소인 마음을 전제로 뇌가 작동하고 실천한다고 볼 수 있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일상 용어가 사실로 밝혀진 셈이다. 마음은 뇌의 전제이고, 뇌는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즉 마음이 뇌에 물리 변화를 일으켜 마음의 명령을 따르게 한다. 과거에는 “마음(생각)은 두뇌 활동의 산물이다”라는 입장이었다면, 최근의 입장은 “두뇌는 마음의 명령을 따른다”는 입장이다. 리프는 이에 대한 근거를 설명한다. “우리의 말과 행동은 이미 마음속에 담긴 무언가가 밖으로 표현되는 현상이다.” 구체적으로, 우리는 (1)무의식 상태에서 어떤 정보를 분석하고 평가한다. 그리고 분석한 결과를 기반으로 결정을 내린다. (2)이후에 그렇게 결정한 내용(생각)을 마음에 저장한다. (3)이렇게 저장된 생각은 말과 행동으로 표현된다. 두뇌 활동은 뇌의 기계적인 작용이 아니라 무의식에 저장된 정보를 처리하여 생각으로 인식하는 과정이다. 즉 두뇌 활동은 무의식 상태에서의 지적 정보처리 과정이다.좀 더 전문적으로 도식화해 보자. 그 매커니즘은 무의식적 메타인지 단계, 의식적 인지 단계, 상징적 결과물 단계로 나누어진다. (1)첫째, 무의식적 메타인지 단계는 무의식적으로 생각이 떠오르고 조직되는 현상이다. 이 단계에서 뇌는 하루 24시간 내내 쉬지 않고 활동한다. (2)둘째, 의식적 인지 단계에서는 초당 2천 가지 활동이 이루어진다. 여기서 의식적 인지 단계는 무의식적 메타인지 단계에 의해 통제받는다. (3)마지막 상징적 결과물 단계는 오감을 통해 자기 의사를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고, 외부 세계와 내면 세계(마음)를 연결한다. 이런 식으로 무의식적 메타인지-의식적 인지-오감(말과 행동)은 끊임없는 사이클로 반복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두뇌 활동은 무의식 상태에서 지적정보를 처리하는 과정이고, 의식 상태에서 그것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패턴은 황농문 박사의 책, 몰입에서 그 예를 잘 보여준다. 황농문 박사에 따르면, 몰입적 사고로 계속해서 문제를 반복해서 생각하면, 뇌가 그 문제가 중요하다고 인식하고 고도로 활성화된 장기기억을 활용하게 된다. 즉 잠을 자면서도 주어진 문제를 푸는 것이다. 어느 순간 갑자기 생각이 떠오를 때, 본인은 그 생각이 우연히 떠올랐다고 보지만, 사실상 무의식의 상태에서 계속해서 뇌가 문제를 풀고 있던 것이다. 이런 떠오르는 경험은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수학자인 아르키메데스의 연구에서도 나타난다. 아르키메데스는 순전한 금관인지를 확인하고자 했으나 확인할 방법이 없었던 상황에서, 몇날을 고민하다가 어느 날 목욕탕에서 목욕하던 중 욕조에 들어가면 물이 차오르는 것을 보고 갑자기 머릿속에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서로 다른 물질은 비록 무게가 같더라도 부피는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므로 은이 섞인 가짜 금관은 같은 무게의 순금으로 만든 금관보다 부피가 클 것이며 따라서 금관을 욕조에 넣어서 차오르는 물의 양을 비교하면 금관에 은이 섞였는지 확인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것을 깨닫게 된 아르키메데스는 너무 기뻐서 옷을 입는 것도 잊은 채 목욕탕에서 뛰어나와 외쳤다. “유레카!” “부력의 원리를 알아냈다!” 이는 무의식(뇌)-의식-표현(말과 행동)으로 나타나는 동일한 결과다.적용 2: 마음의 명령을 따르는 몸 사이먼 로버츠Simon Roberts는 뇌가 아니라 몸이다에서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몸의 지식에 대해 소개한다. 제목처럼, 로버츠에 따르면, 인간의 지적 능력이 뇌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본능, 감, 감각, 직관 등과 같은 체화된 지식embodied knowledge을 지닌 몸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 명제적 지식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고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영혼과 몸을 지닌 개혁주의 인간론에 따라, 마음을 전제로 뇌와 몸이 마음-뇌-몸의 순서로 작용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적용 1 “마음의 명령을 따르는 뇌”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우리의 마음이 어떤 생각을 품느냐에 따라 우리의 뇌와 몸이 변화된다는 성경적 전제 때문이다. 이러한 전제에 따라 몸도 마음의 명령을 따라 순종하는 몸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보다 나은 몸에 대한 사유가 있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Gabriel Marcel은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소유하고 있는가?” 여기서 말하는 소유란 “가진 사람”과 “가짐을 당한 물건” 사이에 일종의 “주종관계”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스마트 폰을 가지고는 있지만 사용하지 못한다면 나는 진정한 의미에서 스마트 폰을 소유했다고 볼 수 없다. 이런 경우를 “소유의 역전 현상” 즉 “나의 소유가 나를 침해한다”고 본다. 핵심은 가진 사람과 가짐을 당한 물건 사이의 주종관계다. 따라서 마음은 주인이고 소유된 몸은 종이어야 한다. 이러한 주종관계라는 전제 안에서, 마음을 따르는 몸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 바로 생각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초보, 능숙, 숙련, 전문가의 네 가지 단계가 있다고 보자. 여기서 ‘초보’는 가장 간단한 단위로 쪼개 학습하는 수준이라면, ‘능숙’은 어떤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진 수준이고, ‘숙련’은 이성적 반응에서 본능적 반응으로 대처할 수 있고, 쪼개지 않고 전체적으로 대처하거나 관여할 수 있는 수준이며, 마지막 ‘전문가’는 즉각적이고 직관적인 반응, 즉 수행해야 하는 일에 덜 생각하고,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느낌보다 하는 일 ‘속’에 있다고 느끼는 수준이다. 나는 이것을 주종관계가 분명한 “몸의 자동성”이라고 본다. 마음의 명령에 따라 뇌와 몸이 순종하는 것! 이것이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 되기를 소망한다!
기독교세계관
마음
영혼
지정의
몸
교회에 목사-신학자가 필요한 이유
by Douglas A. Sweeney
2023-05-13
이십 년 전 신학교에서 가르칠 때 나는 자주 즉석 과제를 냈다. 한번은 학생들에게 교회 역사를 통틀어서 가장 좋아하는 신학자 목록을 적어보라고 했다. 그리고 그중에 교회에서 (목사, 주교, 또는 교사로) 전담 사역한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찾아보라고 했다. 이 경험은 많은 학생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학생들이 적은 그런 신학자 목록에서 이레네우스, 아우구스티누스, 루터, 칼뱅, 웨슬리, 에드워즈, 스펄전, 그리고 킹과 같은 이름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리고 그들이 꼽은 신학자 중에 교회 전담 성직자로 일한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찾아보라고 말했을 때, 강의가 시작하기도 전에 학생들은 이미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다 알아차렸다. 변화오늘날까지 기독교 사상을 꾸준하게 알리는 교회 역사 속 인물 대부분은 주로 교회라는 환경 속에서 목사로 사역했다. 또 신학교와 기독교 대학에서 가르친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이 책도 썼다. 그렇지만 그들은 많은 시간을 교구민과 함께 보내며, 그들이 일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가르치며 설교하고, 예수님이 명하신 모든 것을 실천하도록 돕고,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모든 수고에 복을 빌어주었다.그러나 지난 2세기 동안 상황이 변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목회자를 가장 중요한 지적 안내자로 바라보지 않는다. 전문 학자들과 소셜 미디어 인플루언서들이 이전에 성직자들이 했던 역할을 빼앗았다.상황이 이렇게까지 변한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으며, 이제 다시는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하나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라고 하나님 백성에게 권면하는 일에 힘을 다해야 하는 목회자가 이런 현실을 핑계 대면서 그 책임을 포기할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목회자가 하나님 백성의 지성을 새롭게 하고 가르치는 일을 목회자가 다시 한번 주도할 수 있는 현대적 방법이 있다.원인계몽주의 이후 기독교 세계(Christendom)의 해체와 함께 현대식 연구 대학이 크게 부상하고 또 기술 변화가 전 세계의 민주화 추세를 촉진하면서 예전에는 당연하게 여겼던 성직자의 문화적 권위가 사라지기 시작했다.오래전 루터와 에드워즈는 법적으로 공인받은 지적 지도자의 지위를 누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평신도는 그들의 교육을 받고 또 그들의 교육 사역을 지원하는 일을 마땅히 (때로는 의무로)해야 했다. 사람들의 생계와 미래는 그들의 세계, 곧 국가와 교회의 틀에 얼마나 순응하느냐에 따라 결정되었다. 따라서,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시민의 일상에 해석하고 적용하는 일을, 마치 잘 짜인 식단에 따라 끼니를 채워주듯이,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교회 구조가 사라지자 평신도는 더 이상 싫어하는 것을 억지로 해야 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제 교회 지도자는 대중이 귀를 기울이게 하려면 자기 스스로 수단을 강구해야 했다. 굳이 교회에 있을 필요가 없는 사람들, 싫어하는 일을 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을 주일 아침 예배로 데리고 와서 목회자가 준비한 지적 노력과 신학적 자양분을 섭취하도록 설득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성경의 소재를 마치 건강에는 해롭지만 맛은 있는 패스트푸드처럼 가공하여 군중을 끌어들이고 붙잡아 두는 게 더 쉽다.많은 복음주의 교회가 이처럼 패스트푸드점의 길을 선택했다. 그 결과, 진짜 중요한 삶의 질문을 고민하는 교인들은 이제 목사가 아닌 전문가를 찾게 되었다. 많은 사람이 진정한 자양분을 얻기 위해 교회가 아니라 다른 곳을 찾는다. 미디어로 큰 인기를 끄는 학자나 인기 지식인의 지혜를 구한다. 이러니 일상의 제자도와 증언은 처참해졌다. 설문 조사에 따르면 오늘날 그리스도인 대부분이 신학적으로 문맹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들을 먹여 살리라는 부름을 받은 이들이 정작 그들을 신학적 영양실조에 빠트렸다.책임지금 교회에는 교인을 신학적으로 인도할 목사가 필요하다. “시간으로 보면, 여러분은 이미 교사가 되었어야 할 터인데,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적 원리를 남들에게서 배워야 할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히 5:12).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그걸 원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지난 2세기 동안 현대식 대학이 이룬 학문의 전문화와 인간 지식의 성장은,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지만, 그러함에도 축복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 결과 우리는 이제 성경과 기독교의 역사, 그리고 세상에 대해서도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이 알게 되었다.목회 지도자에게 전문 교육을 제공할 학교는 항상 필요하다. 특히 신학교는 히브리어, 헬라어, 교회사, 철학, 심리학, 해석학, 다문화 연구 등 그리스도인의 삶과 사역에 관련된 주제를 전문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풍부한 커리큘럼을 제공한다. 이런 학문의 도움이 없이 하나님의 백성을 가르치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그러나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이 꼭 필요로 하는 교육을 학계나 기타 비종교적 사상가에게만 맡겨놓기에는 상황이 너무나도 엄중하다.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설혹 기독교에 가치를 부여한다고 하더라도, 기독교의 정통을 가볍게 여긴다. 그들의 연구는 주로 세속적인 이유로 활력을 얻는다.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교내 승진과 정년 보장, 또는 미디어를 통한 명성과 재산 증식이다. 그리스도인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는 그들에게 별다른 동기가 되지 않는다. 신학교 교수가 목회-신학자(pastor-theologians)를 섬기는 종이기를 자처하고, 목회-신학자가 앞장서서 하나님 백성을 신학적으로 일깨우는 날이 오도록 함께 힘쓰자. 목회자는 제너럴리스트에 불과하다. 따라서 사역을 수행하는 과정 내내 항상 전문가들이 찾아낸 것에 의존해야 한다. 그러함에도 그들은 인생의 가장 큰 질문과 씨름하는 교인이 가장 먼저 찾는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사명을 주셨다. 신앙과 관련한 모든 것을 다 교인에게 먹이라고 명령하셨다. 신앙에 편식은 있을 수 없다. 주님이 주신 사명에 충실하도록 서로 격려하자. 교회의 생명력은 바로 여기에 달렸다. 원제: Why the Church Needs Pastor-Theologian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목사-신학자
신학자
교부
신학교육
성경문맹
교사
가르친다고 애썼지만
성경의 교리를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철저히 배워야 하는 이유
by 박혜영
2023-05-12
교회의 큰 절기가 되면 내 “영혼의 크기”가 작은 것을 실감하곤 합니다. 절기가 기념하고 선포하는 교리의 크기를 저의 그릇으로 담지 못해 버거운 느낌이랄까요?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으니, 저의 방침은 이랬습니다. 웅장하게 선포하지 못한다면, 그 내용이라도 철저하게 가르치자! 그래서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가르쳤습니다.왜 이렇게 성경의 교리를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철저히 배우는 게 중요할까요? 그래야 조금이나마 교리가 지시하는 세계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름만 들었을 뿐, 그 이름 안에 있는 세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면, 과연 그 교리를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교리가 마음에 와닿은 적이 없는데, 그 교리를 믿고 따를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으니, 저는 그동안 교리와 성경 내용을 가르치려고 많이 노력했으며, 저에게는 큰 유익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늘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컸습니다.지난 수난 주간에 존 스토트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르치면서도 그랬습니다. 사실 이 크고 중요한 책은 한 주에 한 과씩, 뒤에 나오는 복습 문제까지 풀이하면서 철저하게 가르치고 배워야 합니다. 그렇지만 모든 교인을 상대로 그런 기회를 찾기란 무척 어렵지 않습니까? 그런 핑계로 20년을 보내고 나서, 이번에 큰맘 먹고 시도했지만, 또 철저하게 가르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여전히 남습니다. 한 주에 한 과씩 나가야 할 진도를 이틀에 무려 다섯 과나 나가버렸으니,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런 식으로 대해서는 안 될 텐데….이 책을 읽고 가르치면서, 전에 좀 더 체계적으로 철저하게 가르쳤다면 이 책이 더 잘 이해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이번에 다시 생각하게 된 ‘새 언약’이란 말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수난 주간에는 ‘성찬’을 받기 때문에 더 깊게 다가왔습니다. 존 스토트는 예수님의 ‘다락방 최후 만찬’의 목적은 ‘새 언약’을 세우기 위함이라고 하면서 출애굽기를 언급했고, 예레미야를 언급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시내산 언약을 맺는 전 과정에 하나님을 경외함이 어떻게 나타나 있으며, 모세는 언약을 수립하기 위해 희생 짐승의 피를 어떻게 뿌렸으며, 시내산 언약을 세우고 나서 계명을 준 것은 무슨 의미인지 확실히 가르쳤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 언약에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며, 저들이 실패한 자리에서 선지자 예레미야가 예언한 ‘새 언약’의 의의는 무엇이며, 그 내용은 무엇인지도 가르쳤어야 했습니다. 곧 ‘새 언약’이라는 말에 담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전체로 가르쳐, 교회의 신자들이 ‘성찬’을 받을 때 큰 유익이 되게 해야 했습니다.이것만이 아닙니다. ‘새 언약’에는 더 큰 그림이 있습니다. 성경 시대의 언약 형식은 무엇이고, ‘사랑’과 ‘충성’이라는 성경 용어가 언약의 형식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십계명과 신명기 전체를 통해 가르쳤어야 합니다. 그래야 할례, 계명, 안식일이 시내산 언약과 어떤 관계인지, ‘새 언약’에 참여하는 신자들에게 십계명은 어떤 의미이며, 할례는 어떻게 적용되며, 주일을 지킨다는 건 왜 중요한지, 교회의 신자들은 조금이라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서 오늘날 세례[입교]와 성찬식은 어떻게 ‘새 언약’이라는 전체에 통합되어 있는 것인지 배운다면, 예수님이 자기 피로 세우고자 하신 ‘새 언약’이 얼마나 중대한 주제인지 알게 되고, 그 ‘새 언약’을 오늘의 것으로 살리기 위하여 교회의 신자들이 세례를 받아 성찬을 받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됩니다. 나아가 주일 예배를 왜 공(公)예배라고 하는지, 사도신경은 교회를 왜 “거룩한 공회(公會)”라고 부르는지, 우리는 왜 ‘공회 가입’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단어를 쓰는지, 주일에 공예배로 모이는 일이 왜 중요한지, ‘새 언약’의 맥락에서 확실하게 배운다면 알게 됩니다.그런데 오늘날 교회의 신자들이 십자가라는 말만 알 뿐, ‘새 언약’이라는 큰 그림 속에서 알지 못해서 주일을 휴일로 여기거나, 성찬식에 큰 의미를 부여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요. 만약 이게 다 목사가 ‘새 언약’을 전체로, 체계를 세워, 철저히 가르치지 못해서 일어난 일이라면, 저는 이걸 어떻게 만회해야 할까요? 다만 성경의 표현(요 21:25)을 슬쩍 바꿔 변명할 따름입니다. “만일 낱낱이 가르치고자 하면, 전 생애라도 시간이 부족할 줄 아노라.”
성경
교리
성경공부
그리스도의십자가
새언약
예배에서 중요한 건 ‘나’도 ‘우리’도 아니다
by Bob Kauflin
2023-05-11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1997년이었다. 그전까지 12년 동안 목사로 섬긴 나는 워싱턴 D.C. 지역에 있는 큰 교회에서 새로운 직분을 맡고 있었다. 그 교회에서 내 초점은 목양이 아니라 음악과 예배였다. 피아노로 학위를 받았고, 기독교 밴드와 연주 여행을 했고, 무려 20년 넘게 회중 예배를 인도했으며 심지어 예배 앨범 몇 개에도 이름을 올린 나는 찬양 예배와 관련해서 더 이상 준비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그 교회에 도착하고 몇 달이 지났을 때 마하니(C. J. Mahaney) 담임 목사님이 불쑥 내 사무실로 들어와서는 책 세 권을 내밀며 읽으라고 했다. 그중 하나가 생전 처음 들은 데이비드 피터슨이 쓴 Engaging with God: A Biblical Theology of Worship(하나님과 관계 맺음: 성경적 예배 신학)이었다. 내 눈에 그 책은 예배에 관한 책이라기보다는 학술서로만 보였다. 게다가 피터슨은 음악 전문가도 아니었다. 그러나 마하니 목사님이 추천한 책인 만큼 나는 읽기 시작했다. 두 번째 페이지에 다음 구절이 나왔다. 그렇다면 예배는 본질적으로 경험이나 감정인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특별한 감각 또는 일종의 종교적 엑스터시, 그게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의 깊은 낮아짐(humiliation)의 느낌과 동일시되어야 하는가? 기독교 집회에서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특별한 순간이 있는가? 예배 수준이 참가자들의 체험 정도에 따라서 측정되어야 하는가? 예배와 관련해서 이런 식의 주관적인 접근 방식을 종종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감정적 체험은 예배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과는 거의 관련이 없다. (16)책 여백에 나는 “좋은 지적”이라고 적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고 이 구절을 계속 생각하는 중에 점점 더 그가 한 마지막 말에 마음이 불편했다. “감정적 체험은 예배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과는 거의 관련이 없다.”지성소 밖에서 그때까지 나는 예배를 “그리스도인의 집회의 특별한 순간”으로 여겼다. 보통 찬양 두세 곡을 부르고 나면 그런 순간이 도래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들었다. 그러면 우리는 감정적으로 예배에 더 깊이 참여했고, 뭔가 자발적인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했다. 내 생각에 이건 성전이 등장하는 구약의 양식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우리는 바깥뜰에서 시작하여 안뜰을 거쳐 마침내 지성소에 들어가니까 말이다. 예배 인도자로서 나는 교회를 “지성소”를 체험하는 현장으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 교회를 통해서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또 그 순간을 기대한다(사 12:6).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예배를 그런 식으로 정의하지 않는다.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피터슨의 글은 나로 하여금 그때까지 잘 모르던 예배 신학과 대면하게 만들었다. 예배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특별한 감각 또는 일종의 종교적 엑스터시, 그게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의 깊은 낮아짐의 느낌”으로 정의되지 않는다면, 도대체 예배는 무엇이란 말인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다음 다섯 가지 귀중한 교훈을 포함하여 내가 놓치고 있던 진리를 더 분명히 보게 되었다. 1. 예배의 중심은 내가 아니다. 예배의 중심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예배의 중심에 나를 놓으려고 했다. 내가 어떻게 느꼈는지, 내가 얼마나 열정적이었는지, 내가 체험한 것과 놓친 것이 무언인지가 중요했다. 설혹 나를 뺀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예배의 중심에 우리를 두었다. 몇 명이나 모였는지, 규모는 어떠했는지, 손을 들고 찬양한 사람은 얼마나 되었는지에 주목했다. 그러면서 정작 내가 놓친 것은 우리의 욕망과 계획과 행동이 예배의 본질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자기를 영광스럽게 여기시고 기뻐하셨듯이(요 17:5), 예배의 본질은 영원으로부터 존재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미 자신이 하고 계신 일 가운데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우리의 응답은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고, 그리스도의 화해 사역에 근거하며, 또 그분의 영에 의해 가능해진다(요 4:23-24; 엡 2:18; 빌 3:3). 피터슨의 말이다.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실지 안 받으실지는 인간의 직감이나 창의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에 달려 있다”(26). 우리의 역할은 단지 예수님이 이루신 온전한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는 단 한 번의 희생을 통하여 우리가 바치는 모든 제물이 하나님께 향기 나는 제사가 되게 바꾸셨다(벧전 2:5).2. 찬양 체험으로 예배를 정의해서는 안 된다. 몇 년 전에 나는 예배가 단지 찬양할 때만 드리는 게 아니라 삶 전체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내가 쓰는 말은 나의 신학을 드러냄과 동시에 내 신학 수준을 형성했다. “마지막 찬양에 이르러서 우리는 정말로 제대로 된 예배를 드렸어요.” “설교 끝나고 다시 예배에 돌입하겠습니다.” “늦으면 예배를 놓치게 됩니다.”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곤 했다. 이런 식의 말은 결국 예배란 수도꼭지처럼 하나님이 틀었다가 잠그는, 영적으로 주입된 음악적 경험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강화했다. 찬양과 예배를 거의 동일시하는 오늘날의 경향에 비추어 볼 때, 성경에 이 둘이 함께 사용되는 일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매우 놀랍다. 모든 소유물이 사라지고 자녀까지 다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욥은 땅에 엎드려 경배했다(욥 1:20). 요한복음 4장을 보자.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나님이 찾으시는 진정한 예배에 관해서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은 음악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으신다(요 4:21-24). 우리가 성경에서 예배로 번역하는 다양한 히브리어와 헬라어 단어는 경건, 봉사, 복종, 명예와는 관련이 있지만, 음악과는 거의 관련이 없다.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 예배의 한 부분이 될 순 있지만, 결코 예배의 핵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3. 예배는 시작하고 끝나는 게 아니다. 사실상 인간이란 예배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이다. 단 한 순간도 예외 없이 우리는 애정과 관심과 충성을 유일하신 참 하나님에게 향하거나, 그게 아니면 결코 만족과 위로와 구원을 줄 수 없는 우상을 향한다. 결국 나는 이미 무언가를 예배하는 상태에서 매 주일 교회에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예배를 제대로 드리기 위해서 올바른 화음이나 좋은 말씀, 은혜 넘치는 “분위기”를 굳이 기다릴 필요가 없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참된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집회의 특별한 순간”과는 거리가 먼,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고전 10:31) 모든 삶을 추구할 때 형성되는 우리 마음의 자연스러운 상태이다. 주일 아침에 교인에게 인사함으로써 나는 하나님께 예배한다. 찬양하는 목소리를 높임으로써 예배를 계속한다(히 13:15-16). 기꺼이 십일조와 헌금을 드리는 것, 설교를 주의 깊게 듣는 것, 예배 후에 친구를 위해 기도하는 것, 모두가 다 예배 행위이다. 더 중요한 것은 점심 식사를 위해 손님을 초대할 때도, 손님을 보내고 청소할 때도, 그리고 그날 오후 늦게 낮잠을 자면서도, 나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그리고 가정과 직장, 학교와 이웃에서도 복음으로 변화된 감사하는 종의 마음을 보임으로써 그리스도를 높이고자 신실하게 추구하는 나의 예배는 멈추지 않는다.성경이 별개의 예배 행위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사실이다(시 29:2; 행 13:2). 그러나 그 예배는 삶 전체에 걸친 “영적 예배”(롬 12:1)라는 더 큰 맥락에서 일어나야 한다. 4. 예배는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에 관한 것이다. 예배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특별한 감각”과 동일시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우리가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예배는 여전히 하나님의 임재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보좌에 가장 가까이 있는 자들은 경이로움, 감사함, 경외감, 예배의 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다(사 6:3; 계 4:8; 5:13-14). 비록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음을 느끼지 못할 때가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사람들을 언제나 “그와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엡 2:6).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시온 산,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 축하 행사에 모인 수많은 천사들”(히 12:22)에게로 인도하셨다. 사도 바울은 우리뿐 아니라 고린도 성도들에게 묻는다.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의 성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성령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모시고 있습니다”(고전 6:19).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다. 오늘도 코람데오의 삶을 산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그분의 약속을 신뢰할 수 있다(마 28:20; 요 14:16; 히 13:5). 그러나 여럿이 모일 때 하나님은 종종 주권적 방법을 사용하여 우리로 하여금 좀 더 경험적으로 자신의 임재를 느끼게 하신다(행 4:31; 고전 12:7; 고전 2:4; 살전 1:5). 넓든 좁든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드리는 예배에서 감정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건 성경과 모순된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고”(벧전 1:8), 마음의 악함을 통회하고(고전 14:24-25), 거룩함을 더 추구하도록 도전받고(고후 6:16-7:1), 확신이 더 강화되며(히 13:5-6), 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깊어진다(벧전 1:8).하나님의 영은 우리가 함께 모일 때 더 분명하게 역사하시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모이는 시간을 위해서 기도하고 또 그 시간을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 그러나 이때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유일한 시간이 아님을 기억하자!5. 예배는 끝나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우리는 예배한다. “그리고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을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에게서 힘을 얻어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골 3:17). 예배는 생각과 마음과 의지를 통해서 행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영광을 높이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성령의 지속적인 응답이다. 예배는 굳이 음악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리고 결코 감정의 영역으로 제한될 수 없다. (그러나 얼마든지 이 두 가지 모두를 다 포함할 수도 있다!) 예배는 하나님 안에서 가장 큰 기쁨을 찾도록 우리를 거듭거듭 초대하시는 천국 아버지께서 주시는 은혜로운 선물이다. 형제자매여, 언제나, 어디서나 예배드리자! 할렐루야.무엇보다도 가장 큰 소식이 남아있다.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하게 씻긴 사람들에게 예배는 결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놀라운 사실이다. 원제: Worship Isn’t About You: What I Learned After Years of Leading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예배
찬양
경배와찬양
예배음악
찰스 3세 대관식은 ‘성경적’이었는가?
by 이재훈
2023-05-10
지난 5월 6일 영국 성공회 웨스트민스터사원에서 열린 찰스 3세 국왕 대관식을 방송으로 볼 수 있었다. 많은 나라의 지도자들이 축하 사절로 참석한 데서 그 정치적 위상을 엿볼 수 있었고, 대성당의 위엄과 행렬의 위용, 고색창연한 의복에서는 그 문화적 위상을 가늠해 볼 수 있었다. 영국 국교회(성공회) 최고 성직자인 캔터베리 대주교가 대관식을 집례하는 모습에서는 황제의 대관식을 교회가 주관하지 않으면 법적으로 무효가 되었던 중세 기독교 세계의 위상을 다시 보는 듯했다. 대관식의 모든 순서는 성경 말씀들로 짜여 진행되었다. 민수기 6:24-26의 축복, 시편의 여러 찬송, 그리고 산상수훈의 주기도문이 잇달아 등장했다. 이렇게 많은 성경 구절이 인용되는 예식도 흔하지 않을 것이다. 국왕에게 바친 첫 선물도 성경이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총회장은 성경이 곧 국왕의 법이며 하나님의 오라클이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모든 법 위에 둔다고 하였다. 대관식에서 국왕은 개인 기도를 통해 갈라디아서 5장과 잠언 3:17을 인용하였고, 자신은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자가 되겠다고 하였다. 이 정도면 “성경적” 예식이라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그러나 과연 찰스 3세 국왕의 대관식은 성경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선뜻 그렇다고 하기엔 주저하게 되는, 생각해 봐야 할 점이 몇 가지 있다. 첫째, 우리는 군주 제도에 대해서 성경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세심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이방 나라처럼 되고자 왕을 원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워 주시는 일련의 과정과 사울과 다윗 이후 이스라엘(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의 역대 왕들의 행적을 기록한 성경에서 우리는 인간 왕, 곧 왕정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을 분명하게 읽을 수 있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왕이신 당신을 대신하려는 어떤 왕, 어떤 제도도 기뻐하지 않으신다. 물론 현재의 영국 국왕은 절대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법의 제한 아래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상징을 통해 발휘되는 문화적 영향력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과거 절대 군주의 정치적 권력만큼이나 현대 사회의 상징적, 문화적 영향력은 막강하다. 이번 찰스 3세 국왕의 대관식에는 과거 절대 왕정 시대의 유물들이 그대로 차용되었다. 새 지도자가 어떤 시대를 지향하는지는 그가 어떤 물건, 상징과 함께 등장하는지에서 엿볼 수 있다. 고대 왕정 시대와 대영제국 시대의 유물과 관습이 고스란히 재사용된 이번 대관식은 새로운 문화 권력자의 등장을 세계에 주입하려는 행사이기도 했다. 둘째, 영국 교회의 오랜 전통을 그대로 가져온 이번 대관식이 강조한 것은 교회의 문화 자체였지 교회의 사명이 아니었다. 영국 성공회는 종교개혁으로 생겨난 개신교 전통의 교단이지만 오랫동안 전통문화를 지키는 것을 복음 안에서 갱신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왔다. 교회가 그 전통만을 고집하게 될 때는 그 보존된 문화와 함께 수치스러운 죽음을 맞게 된다. 대관식의 거의 모든 순서에 성경 말씀이 인용되었지만, 그것이 메시지, 곧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순서라기보다는 오랜 전통과 문화 예식으로서 주문처럼 낭독하는 것일 뿐이라면, 이는 성경을 이용한 문화 의식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셋째, 이번 영국 국왕 대관식과 영국 사회의 반기독교 문화를 우리는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다. 국왕은 국민을 섬기는 자가 되겠다고 서약했지만, 자신이 섬겨야 하는 국민의 삶을 지배하는 반기독교적 흐름을 간과한다면 그가 약속한 섬김은 말뿐인 섬김이 될 것이다. 오늘의 영국은 어떤 사회인가? 동성혼이 법과 제도로 견고히 자리 잡은 나라이다. 신앙에 따라 동성혼을 반대한 시민이 처벌받는 나라이다. 많은 교회가 문을 닫고, 심지어 다른 종교의 사원이나 술집으로 팔려나가는 나라이다. 성경 말씀으로 가득 차 있는 국왕의 대관식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들이 이 나라와 이 나라 교회들에서 나타나고 있다. 영국 국왕은, 대관식만 영국 성공회의 의식을 쫓아 치를 것이 아니라, 그 교회의 상징적 수장이라는 지위에 걸맞게 교회의 쇠퇴에 대한 책임 또한 짊어져야 마땅하다. 대관식에서 선서만 할 게 아니라, 영국이 반기독교 사회가 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결의와 실천을 보여야 한다. 이제 대관식을 마친 찰스 3세 국왕은 탈-기독교, 반-기독교 국가가 되어버린 영국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회복할 것인지를 최우선 순위에 두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의 대관식은 성경적이었다는 후대의 역사 평가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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