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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 (8) : 신앙과 직업
by 고상섭
2023-07-12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팀 켈러가 그토록 사랑했던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이제 눈물이 없는 곳에서 기뻐할 팀 켈러를 생각하면 위로가 되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에겐 그가 떠난 빈자리가 너무나 크게 느껴진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인 존재로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발자취를 남겼다. 그와 그의 삶이 우리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 몇 가지를 되돌아보며 그를 기억하고자 한다. ‘사람들을 문화에 연결하는 사역’ 또한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빼놓을 수 없는 유산이다. 영국 교회가 부흥할 때 인도 선교사로 파송되었던 레슬리 뉴비긴이 사역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의 영국 사회는 마치 이교도의 국가처럼 보였다. 쇠퇴하고 있는 영국 교회를 보면서, 뉴비긴은 교회가 신자들의 개인적 삶을 위한 내적 활동(성경공부와 기도 등)에 초점을 맞추어 훈련하고 있을 뿐, 공공 영역(정치, 예술, 사업 등)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을 갖고 살도록 훈련하지 못했다고 분석한다.[1] 팀 켈러도 직업이라는 영역이 신앙과 분리되는 시대정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전 시대에는 신자의 제자도와 훈련을 기도, 성경공부, 전도로 국한해도 괜찮았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직장과 이웃과 학교에서 비기독교적 가치를 대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그런데 오늘날 선교적 교회는 신자들이 현저하게 비기독교적인 문화에 둘러싸여 있다. … 오늘날 문화는 신자들의 종교적 신념은 직장에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신자들에게 자신의 신앙적 신념을 그들이 직업을 수행하는 방식과 단절시키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2]신앙과 직업의 통합이런 시대 속에서 직업과 신앙을 통합시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교회의 사명으로 대두된다. 팀 켈러는 리디머 교회의 다섯 가지 중요한 영역 중 하나를 ‘세상 문화와 사람들을 연결하기“라고 명명하며 신앙과 직업의 통합을 강조한다.팀 켈러가 직업과 신앙을 통합해야 한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된 계기가 있다. 리디머 교회를 개척하고 얼마 안 됐을 때 한 유명한 탤런트가 예수님을 믿게 된 후 그에게 와서 이렇게 질문했다. “제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 이제 방송에서 연기할 때 제가 해야 하는 역할과 하지 말아야 할 역할이 있습니까? 화내야 하는 연기를 할 때 정말 화를 내야 합니까? 아니면 화내는 연기를 해야 합니까? 또 누군가와 연애하는 연기를 할 때는 그 사람을 정말 사랑해야 합니까? 아니면 사랑하는 연기를 해야 합니까?” 이 질문을 들었을 때, 팀 켈러는 목회자로서 성도들의 현실의 문제에 어떤 해답을 줄 만큼 준비되지 못한 자신을 발견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직업과 신앙의 통합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바로 여성 CEO 캐서린 알스도프와 함께 쓴 팀 켈러의 일과 영성, 그리고 다양한 직업에 관한 리디머 교회의 프로그램들이다.[3] 캐서린 알스도프도 팀 켈러의 설교에 매력을 느낀 이유의 하나가 “성경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뿐 아니라 일과 직장처럼 내게 대단히 중요해 보이는 영역에 적용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고백했다.[4]오늘날 직업과 그 직업을 통해 이루고 싶은 욕망은 하나의 큰 우상으로 자리 잡았다. 피로사회의 저자인 한병철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시대마다 고유한 질병이 있는데 오늘날 시대는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의 시대이고 … 성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강제하는 자유,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과도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 착취로까지 치닫는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5]이전 시대에는 공장장이 노동자를 착취했지만, 성과주의와 능력주의 시대인 오늘날에는 스스로 착취자가 되어서 더 많은 성과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음을 한병철 교수는 지적하고 있다. 이전 시대보다 더 심각한 이유는 착취자가 동시에 피착취자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시대 문화 속에서 신앙과 직업을 연결하지 못하면 신앙과 직업이 분리되는 이원론적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그래서 팀 켈러는 문화 속에 있는 우상들의 모순을 드러내어 성경 메시지와 비교하고 대조함으로써 더욱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목회자가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기독교 설교자는 성경 메시지와 그 문화의 근본 신념들(그 안에 속한 사람들 눈에는 잘 안 보인다)을 비교하고 대조함으로써, 그들이 자신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면, 자연스레 사람들이 ‘아, 그래서 내가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느낀 거였구나!’ 깨닫게 된다. … 사람들에게 문화 이야기가 복음과 충돌하는 지점에서 도전하고, 궁극적으로 문화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다시 들려줌으로써 선을 향한 그들의 가장 깊은 열망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채워질 수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6]성경적 믿음이 일에 미치는 영향 1. 일에 대한 새로운 정체성을 준다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직업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경향이 있다. 특히 전문직일 경우에는 그 현상이 더욱 두드러진다. 의사나 목사 등 다른 이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더욱 빠지기 쉬운 유혹이다. 사람들을 섬기는 노동을 한다고 생각해서 상대적 우월감을 느끼기 쉽다. 결국 자신의 직업이 자신의 정체성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의 모습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기술로 최고의 도시를 만들고 싶어 했고 단순히 살 곳을 마련하는 정도의 마음이 아니라 더 은밀하고 깊은 두 번째 의도가 숨어 있었는데, 그것은 자신들의 이름을 온 지면에 내는 것이었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최고의 기술을 통해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자신들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 이것이 인간 나라의 특징이다. 팀 켈러는 이 노동의 동기가 현대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고 우리 삶 속에서 있는 문화 내러티브라고 규정한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노동의 동기는 바뀌지 않았다. 권력과 영예, 만사를 제 뜻대로 통제할 권한을 극대화하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 스스로 중요한 존재가 되려는 교만한 갈망은 필연적으로 경쟁과 분열,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자신을 드러내는 데 집중하는 삶이 동료 인간들 사이에서 일치와 사랑을 빚어내기란 불가능한 노릇이다. 그런 마음가짐은 스스로 숭배의 대상이 되든지 집단을 우상으로 삼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비참한 지경으로 몰아간다. 인류가 그토록 애타게 구하는 영광과 관계는 오로지 하나님 안에서만 공존할 수 있다.[7]자신의 일에 정체성을 둔 바벨탑이 무너졌듯이, 오늘날도 자신의 일에 정체성을 두는 모든 사람은 반드시 무너지게 된다. 자신이 생각한 것처럼 성공에 이르렀다고 가정한다면, 그는 교만해지게 된다. 자신의 성취와 노력으로 스스로 그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노력하지 못하는 사람을 무시하게 된다. 어떤 이들은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을 더 따뜻하게 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친절한 행위까지도 그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해서라기보다 자신보다 못하기 때문에 더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베푸는 자선처럼 생각할 수 있다. 결국 자신의 성취로 경쟁에서 이긴 승리자라는 교만을 버리지 못하게 된다. 오직 은혜를 이해할 때만 그 교만을 버릴 수 있다. 내가 행한 모든 것이 나의 노력이 아니라 그 노력까지도 다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할 때 우리는 성공이라는 덫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또 은혜의 복음은 실패했을 때도 좌절하지 않도록 우리를 붙들어 준다. 복음은 일에서 정체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정체성을 찾도록 우리를 도와준다. 2. 모든 일이 가치 있는 존엄한 일임을 알려준다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다. 다시 말해, 태초에 ‘일’이 있었다. 일과 노동은 타락한 세상의 고통이 아니라 태초에 있었던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이다. 또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드시면서 창조 세계를 관리하는 청지기의 역할을 주셨다. 결국 일과 노동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며, 세상에 있는 모든 일은 하나님이 맡기신 일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다. 직업에 가치의 높낮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는 성경이 아니라 세상의 사고를 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성경은 세상에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일이며 창조 세계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라 말한다. 오늘의 시대는 물질주의의 영향으로 지위가 낮거나 수입이 적은 일을 할 때 그 사람의 존엄까지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경비원, 가사도우미, 정원사 같은 서비스 업종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을 업신여기는 사례들이 많이 일어나기도 한다. 2017년 6월, 그리스의 환경미화원들이 재계약을 하지 못하면서 파업을 한 사건이 있었다. 열흘째 쓰레기를 수거하지 않자 도시 곳곳에 악취가 심했고 관광 사업도 차질을 빚었다. 만약에 청소를 하는 전 세계 노동자들이 전부 파업하거나 일을 하지 못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전 세계가 악취와 병균으로 들끓고 수많은 사람이 병원 신세를 져야 하며 심지어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이 청소하는 노동자들을 존경하지 않고, 또 그들이 많은 보수를 받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 직업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아름답게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하고 존엄한 일이다. 루터는 “하나님은 소젖 짜는 여자아이의 일을 통해 친히 우유를 내고 계신다”고 말했다.[8] 세상에 있는 모든 일은 존엄한 하나님의 일이며 이웃 사랑을 위한 실천의 장이다.[9]3. 우리의 일을 탁월하게 행하는 동기를 부여한다모든 일이 존엄한 하나님의 일이라면, 우리는 자신이 속한 영역에서 어떤 일이든지 주님에게 하듯 해야 하며 탁월하게 일해야 한다. 탁월함은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나 자신을 증명하려는 경쟁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감사에서 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누군가가 팀 켈러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일하는 곳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아마도 그는 성경공부와 기도와 전도를 하라는 말을 기대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팀 켈러는 “일을 잘하십시오”라고 대답했다. 우리가 일을 통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방식 중 하나는 바로 일을 잘하는 것이다. 도로시 세이어즈는 이렇게 말했다.교회가 총명한 목수를 대하는 걸 보면 보통 취하도록 술을 들이키지 말고, 여유 시간에 망나니짓을 하지 않으며 주일마다 꼬박꼬박 예배에 출석하라고 타이르는 게 고작이다. 하지만 교회가 해주어야 할 얘기는 따로 있다. 신앙을 좇아 살려면 무엇보다 훌륭한 테이블을 만드는 게 우선이라고 가르쳐야 한다.[10]4. 믿는 자에게 도덕적 나침반을 제공한다포스트모던 시대의 비즈니스는 주로 ‘목적이 없는 수단’으로 표현된다. 현대인들은 브랜드를 통해 페르소나를 창출하고, 행복한 삶의 기준을 잘 되어 가는 것으로 정의하기도 한다. 반면 고대 문화는 성품과 용기, 겸손, 사랑, 정의라는 요소를 골고루 갖추고 사는 것이 바로 행복이라 규정했다. 그래서 오늘날의 마케팅과 홍보는 단순히 상품을 사는 것 이상의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다고 선전하고 있다.[11]회사에서 도덕적으로 너무 힘든 스트레스를 준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팀 켈러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 직장에서 있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 있으십시오, 당신이 활용할 수 있는 기술과 관계를 사용하여 높이 올라갈 수 있을 때까지 정직하게 올라가십시오, 그러나 정말 양심에 부딪히는 문제가 있으면 그때는 사직서를 쓰고 새롭게 창업하십시오.” 오늘날 사회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윤의 극대화를 목적으로 둔다. 하지만 복음은 직장의 문화 속에서 도덕적 나침반을 제공한다. 겉보기에는 다른 회사와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복음이 기반이 된 회사는 고객들을 섬기고, 적대적인 관계와 착취가 없으며, 생산물의 탁월함과 품질을 강조하고, 설령 수익이 줄어들지라도 조직의 현장에서 일상적인 기업활동에 이르기까지 전 영역에 골고루 미치는 윤리적인 환경을 갖추기 마련이다. 복음이 아닌 다른 직업관은 자신의 이윤과 이익에 따라 선택하게 하지만, 복음은 우리에게 도덕적 나침반을 제공해 주기 때문에 더욱 윤리적으로 일할 수 있게 하며, 더 건강한 직업 환경을 만드는 데 도움을 준다.[12]5. 직업에 소망을 불어넣는다직업에 대한 오해 중 하나는 직업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낙관주의이며, 또 다른 오해는 내가 열심히 일해봤자 세상은 아무런 변화도 없다고 생각하는 비관주의이다. 양극단을 오가는 그리스도인이 많다. 이상주의는 속삭인다. “일을 통해 변화를 일으키고 영향을 끼치며 새로운 것들을 내놓으며 세상에 정의를 실현해야지!” 반면에 냉소주의는 비아냥거린다. “일한들 뭐가 변하겠어? 쓸데없는 희망을 품어선 안 돼, 그저 먹고 살 수 있으면 그만이지, 너무 공들이지 말라고 여건 되면 당장이라도 집어치워!” 이런 양극단을 배제하면서도 믿음으로 일하고 직장생활을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팀 켈러는 타락한 상황을 이해하면서도 미래에 소망을 가지고 일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땅은 너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 너는 들에서 자라는 푸성귀를 먹을 것이다. (창세기 3:18)팀 켈러는 먼저,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타락한 세상에서 일은 가서덤불과 엉겅퀴를 낸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고 실망하는 사람들은 타락한 세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때가 많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자신이 생각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것이 정상적인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많은 이들이 자신이 원하는 직업을 갖지 못해서 힘든 것이지 원하는 직업을 가지면 행복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참된 행복은 직업이라는 정체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자기를 만족시키는 자기만족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불안한 현대사회에서 현대사회의 불안 요인은 개인주의라고 꼽는다. 개인주의를 근대 문명의 최고 업적이라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테일러는 말한다. “개인주의는 자기 자신의 삶에만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보다 광범위한 시야를 상실해 버렸다. … 개인주의의 어두운 면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로의 초점 이동에 있다. 이를 통해 삶은 덤덤하게 되고 협소해진다. 우리의 삶은 갈수록 의미를 상실하게 되고 우리는 타인의 삶이나 사회에 대해 점점 무관심해진다.”[13]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삶은 협소해지고 의미가 사라진다. 인생의 의미란 나 자신의 만족만을 추구할 때 오는 열매가 아니기 때문이다. 팀 켈러는 자신이 원하는 직업을 가졌다고 말한다. 목사가 되고 싶었고 주위에서도 권유했다. 또한 열심히 목회해서 어느 정도 성공한 목회자가 되었지만, 돌아보면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많았다고 고백한다. 결국 자신이 원하는 직업을 가진다고 해서 행복한 것은 아니다. 원하는 직업을 가졌다고 고백하는 사람조차도 그 속에서 자신이 원하던 이상적인 삶을 직업에서 찾았다고 고백하지는 않을 것이다. 팀 켈러는 일과 영성 서문에서 톨킨의 니글의 이파리를 소개하고 있다. 화가인 니글은 하나의 이파리로 시작해서 큰 나무를 그린 후 그 나무 뒤로 마을이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자신이 생각했던 나무를 그리지 못하고 고작 이파리 하나를 그렸다. 죽음이 다가왔을 때 그는 아직 못다 한 일들에 대해 아쉬워했다. 큰 꿈을 가졌지만, 그가 인생에서 이룬 것은 고작 이파리 하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천국으로 가는 길에서 니글은 아주 익숙한 곳을 만나게 된다. 그는 얼른 그리로 달려갔고 거기에는 늘 꿈꾸었던 것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다. 커다란 나무, 그의 나무가 완성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잎이 벌어지고 있었다. 가지는 길게 자라서 바람에 나부꼈다. 자주 느끼거나 어림짐작으로 추측해 보았지만 좀처럼 포착할 수 없었던 바로 그 상태였다. 니글은 나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곤 천천히 팔을 들어 활짝 벌였다. 그리고 말했다. “이건 선물이야!”자신은 이파리 하나를 그렸지만, 자신이 상상하던 그 나무가 천국에 있었던 것이다. 팀 켈러는 이곳의 소제목을 “There Really is a Tree”(정말로 그곳에 나무가 있다)라고 붙였다. 그리고 일과 영성의 원 제목은 “Every Good Endeavor”(모든 선한 수고)이다. 결국 모든 선한 수고에는 선물이 있다고 말한다. 팀 켈러는 니글의 이파리를 통해 우리에게 이 땅에서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비록 완전한 모습을 구현하지 못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이루지 못하지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세상이지만, 우리의 수고와 땀은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팀 켈러는 이것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 "완벽한 모범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나침반이 되라는 뜻이다."우리의 일을 통해 이 세상이 완전히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변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땅이 변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완벽한 모델, 완벽한 결과를 가져올 수 없을지라도 우리 순종의 방향이 하나님 나라를 가리키고 있다면 그 순종은 결국 천국에서 아름답게 완성될 것이다. 모든 선한 수고에는 하나님의 선물이 있다. 이것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세상에서 우리가 땀 흘리며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의미이다. 이 땅에서 완성되지 않고 누구도 인정하지 않아도 우리의 방향이 옳다면 그 이파리는 결국 천국에서 나무로 완성될 것이다. 실제로 그곳에 나무가 존재하게 될 것이다. 결국 성경적 믿음은 우리의 일터에 새로운 소망을 불어넣어 준다. 열매가 없어도 낙심하지 않는 천국의 소망을 주는 것이다. 우리의 작은 인생의 순종은 천국에서 하나의 퍼즐 조각이 될 것이다. 하나의 퍼즐로만 보면 별로 이루지 못한 인생일지 모르지만, 아브라함부터 예수님의 재림에 이르기까지 완성되는 하나님의 큰 그림 속 하나의 퍼즐 조각으로 동참하게 되면 내 작은 인생이 하나님의 큰 역사의 작품 안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우리의 작은 인생이 없으면 하나님 나라의 완성된 작품이 탄생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하나님 나라라는 큰 그림을 이루도록 동참시켜 주신다. 우리가 힘든 직장생활 속에서도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천국에 가면 정말로 그곳에 나무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오늘도 힘겹게 직장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한다.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이 아는 대로, 여러분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5:57-58)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완벽한 모델은 아니지만 하나님 나라가 저기 있다고 가리키는 나침반으로 이 땅을 살고 있다.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세상이지만 이 땅에서 우리가 먹을 밭의 소산을 통해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위로하신다.주1. 팀 켈러, 센터처치, 525.2. 센터처치, 690. 3. 전재훈, 고상섭, 박두진, 팀 켈러를 읽는 중입니다, 277.4. 팀 켈러, 일과 영성, 12. 5. 한병철, 피로사회. 27. 6. 팀 켈러, 설교, 35. 7. 일과 영성, 144.8. 일과 영성, 88. 9. 팀 켈러를 읽는 중입니다, 293. 10. 일과 영성, 94. 11. 일과 영성, 184. 12. 팀 켈러을 읽는 중입니다. 299. 13. 찰스 테일러, 불안한 현대사회, 13.14. 일과 영성,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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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vin J. Vanhoozer
2023-07-11
칼 마르크스는 한 때 “철학이 하는 일이라고는 다양한 방식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게 고작이다. 관건은 세상을 바꾸는 일이다”라면서 철학을 향해 불평을 쏟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신학은 어떤가? 세상을 바꾸는 일에서 철학보다 더 제대로 하고 있는가? 오늘날 신학은 이미 유통기한이 지난 과거의 유물이라며 경솔하게 일축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나 그 견해는 근시안적이다. 사실 목회자-신학자야말로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선물이다(엡 4:8). 말씀으로 정보를 받고 성령으로 권능을 얻으신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을 해석하고 바꾸기 위해서 목회자-신학자를 쓰신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탈 기독교 세계라는 위기 가운데로 들어가 그 시대에 가장 절실히 필요한 제자를 훈련한다. 진행 중인 재난우리는 더 이상 기독교 세계에서 살고 있지 않다. 탈 기독교 세계의 숨길 수 없는 징후로는 기독교의 영향력 감소, 줄어드는 교인 수, 교회에 대한 존경심 저하, 우리 문화의 주요 요소인 신앙, 가치 및 관행에 대한 기독교의 영향력 감소 등이다. 탈 기독교 세계에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을 따로 구분해서 이해하고 반응하는 방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존 업다이크의 소설 In the Beauty of the Lilies에 나오는 목사처럼, 20세기 어느 시점에선가 서구 세계는 신앙을 잃었음을 깨달았다. “탈”(post)이라는 단어가 기독교를 재정의하는 속도는 말 그대로 정신을 못 차릴 정도이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어떤 하나의 주장 또는 과학적 발견 때문에 기독교 시대가 종말을 맞은 건 아니다. 찰스 테일러의 A Secular Age는 사회가 세상을 이미지화하고 그 속에 인류를 자리매김하는 방식에서 볼 때, 탈 기독교라는 혁명은 내부적이었다고 말한다. 이유는 복잡하지만, 결과는 명백하다.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존재를 명백하게 느끼거나 직관적으로 인식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지 않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존재는 이제 거의 그럴듯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물질과 현재가 전부이다. 탈 기독교 문화가 빚은 많은 결과 중 하나가 눈에 띈다. 문해력의 상실(post-literacy)이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그리고 종교 개혁과 인쇄술 이후로도 언제나 활자(word) 중심이었다. 그러나 탈 활자 문화에서 사람들은 다양한 멀티미디어 플랫폼을 통해 의사소통한다. 글자는 더 이상 자랑할 만한 매체가 아니다. 틱톡, 인스타그램, 유튜브로 넘치는 문화에서 (장황한 설교를 하는 사람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집중하는 시간은 단 몇 분을 넘기지 못한다. 탈 기독교와 탈 활자를 합친 결과는 성경 문맹이다. 더 이상 성경 기독교의 문법, 이야기 또는 논리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성경에 대한 높은 관점을 갖는 것과 성경 속 66권의 다양한 책과 장르를 통일된 정경의 일부로 읽어내는 방법을 아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탈 기독교 문화에서 그리스도인조차도 성경을 잘 읽는 방법 및 해석상 불일치의 해결을 놓고 고군분투한다. 사람들은 여전히 뉴스를 소비하지만, 복음(좋은 소식)은 탈 기독교 세계에서 거의 들리지 않는다. 넘쳐나는 정보와 끊임없는 속보는 우리가 진정으로 알아야 할 소식, 곧 하나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 우리 세상에 침입하고 있다는 진짜 속보에 대해서 둔감하게 만든다.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은 생각할 수도 없는데 말이다. 최초 대응자로서 목회자-신학자세속주의자에게 세상은 움직이는 물질이며, 그 물질은 인간이 무언가를 만들지 않는 한 무의미하다. 어느 정도 환멸을 느낄 정도로 디스토피아 이야기는 차고 넘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문제의식을 느끼기보다는 차라리 즐기다가 죽기를 원한다. 지금은 목회자-신학자가 최초 대응자 역할을 감당해야 할 재난 상황이다. 이들이 긴급 상황과 위기에 모습을 드러내고 도와야 한다. “최초 대응자”라고 하면 보통 소방관, 응급구조사, 또는 수색 및 구조 요원을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목회자-신학자도 부서진 삶, 분열된 가족, 죽음, 절망의 전투가 벌어지는 치열한 참호 속에 있다. 그들은 윤리, 영성, 그리고 정치에 관한 논쟁의 최전선에 서 있다. 교회의 성경 문맹은 목회자-신학자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위기이다. 교회는 예수님이 만든 사회이며, 목회자는 회중의 상상을 지배하는 이야기가 아버지가 성령을 통해 만물을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키려(엡 1:10) 아들 안에서 이루시는 이야기가 되도록 만들 책임을 진다. 그렇게 함으로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고 화목하게 되도록 해야 한다(고후 5:17-19).목회자-신학자는 그리스도를 전파함으로 삶의 긴박함과 성경 읽기의 주석적 도전에 응답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그리스도가 이루신 새로운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는 실재를 선포하고, 가르치고, 또 기뻐하는 것이다. 지역 교회: 성경적 해독력과 거듭난 기독교를 위한 장소지금은 절망할 때가 아니다. 교회를 재발명할 필요가 없지만 재발견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신학을 포기할 때가 아니라 모든 생각과 모든 사회적 상상이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히도록 만들기 위해서 더 깊이 파고들 때이다. 지역 교회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 그의 왕국을 드러내기 위해서 갖춰야 할 성경 읽기 능력을 배양하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을 때만 지역 교회는 세상의 희망으로 남을 수 있다. 더불어서 교회를 통해서 독서 습관을 기르고, 또 읽은 말씀이 선포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실천되는 현장이 되어야 한다. 목회자-신학자는 일정 부분에서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깨닫도록 돕는 사역을 감당한다. 즉, 그들이 기독교 문서를 읽고 해석하는 능력을 키우도록 촉매제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우리의 이름이 비롯된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배우는 곳은 지역 교회이다. 기독교가 사회적으로 매력적으로 느껴지도록 만드는 것도 우리가 함께하는 교회의 삶을 통해서이다. 그게 바로 탈 기독교 세계에서도 지역 교회가 존재해야 하는 의미이다. 탈 기독교 세계가 기독교를 재정의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교회가 일어나야 한다.그리스도의 통치는 새로운 인류의 선두에 선 사람들을 부르시고, 모으고, 또 화해시키실 때 가시화된다. 당신은 바람처럼 움직이는 성령의 능력을 볼 수 있는가? 기독교 시대는 반드시 끝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마르크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탈 기독교 세계가 되었다고 해서 결코 기독교 이전 세상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이 세상은 이미 그리고 앞으로도 항상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이 모두 다 주님의 것, 온 누리와 그 안에 살고 있는 모든 것도 주님의 것이다”(시 24:1).원제:https://www.thegospelcoalition.org/article/post-christian-pastor-theologian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탈기독교세계
목회자신학자
성경문맹
지역교회
일의 즐거움,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by 김선일·이금주
2023-07-10
엉겅퀴와 가시덤불그리스도인들이 일터에서 겪는 문제와 질문을 두고 김선일 교수와 이금주 교수, 두 신학자가 대화하며 그 답을 찾아 나선다.대담을 위한 질문 선정 및 내용 정리는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에서 실천신학을 가르치는 김선일 교수가 맡았다. 이금주(Jewel Hyun) 교수는 연세대학교에서 핵물리학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도미하여 세계적 금융투자사인 피델리티 매니지먼트에서 28년 근무했다. 그후 고든콘웰신학교에 진학하여 신학석사와 목회학박사를 취득하고, 아프리카의 여성과 교육을 위한 선교단체인 Matthew 28 Ministries를 설립하였다. 일의 신학과 변혁적 리더십을 전문으로 하는 바키대학원대학교(Bakke Graduate University의 한국어 과정 위원장이며, 미국과 한국, 아프리카 등지에서 일의 신학을 가르쳐왔다. 그리스도인을 위한 일의 즐거움과 소명’ 강연에 참여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일터를 소명으로 삼는 것은 알겠는데, 일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은 현실적으로 좀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일은 알아서 하겠는데 일에서 즐거움을 못 느끼겠어요. 많은 일들을 하는 가운데서 즐거움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일의 즐거움을 어떻게 찾고 누려야 할까요? 김선일: 이 질문은 일터의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되겠네요. ‘일의 즐거움’이라는 사상은 마태복음에서 충성된 종들에게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1, 23)라고 한 말씀에 근거하는데요.이금주: 일의 즐거움을 찾는다는 것은 이론이지 실제로는 매우 어렵습니다. 다른 문제들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얼마나 실천하기 어렵습니까?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는 것도 실제로는 얼마나 힘듭니까? 일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본적으로 이 문제는 “나는 여기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는 왜 이곳에 있는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이는 일의 신학에서 근본적인 질문이자 일터에서 우리가 겪는 모든 문제를 조망하는 큰 그림입니다. 김: 그렇군요. 유독 일터에서만 겪는 문제는 아니겠어요. 엄밀히 말해서 그리스도인만이 처한 고민도 아닐 수 있고요.이: 우선은 왜 내가 일에서 즐거움을 못 찾고 스트레스를 받는지, 그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하는 일에 문제가 있는지, 일의 요구가 너무 많은지, 일터에서 동료와 불화를 겪기 때문인지, 상관의 부당한 대우나 지시 때문인지, 아니면 일 외의 요인들 때문에 즐거움을 못 누릴 수도 있습니다. 부모님이 아프시거나 아이가 말썽을 부리거나 배우자와 사이가 안 좋다거나 하는 문제들이 우리의 일 뒤에서 영향을 줄 수도 있습니다. 또는 일 자체가 내 적성과 안 맞을 수도 있죠. 사무직 일을 해야 할 사람이 장사하는 일을 하면 적성이 안 맞아서 괴로울 수 있습니다. 먼저 나에게 왜 일이 즐겁지 않은지 실제적인 이유를 찾아서 열거해 보세요. 그리고 가장 먼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부터 다뤄야 합니다. 김: 일로 인한 괴로움인지 일 외의 문제로 인한 괴로움인지를 분별하는 게 중요하겠군요. 이: 이렇게 문제의 원인을 좁혀 가야 합니다. 그다음에는 초점을 바꿔야 합니다. 즐거움에 초점을 맞추지 마십시오. 즐거움은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지 내가 찾아서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일의 즐거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목적은 ‘하나님께서 무슨 뜻을 갖고 나를 이 자리로 보내셨는가?’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하는 이 일을 통해서 무언가를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분의 목적을 위해서 내가 쓰임 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김: 그래서 일의 소명을 모르고서는 일의 즐거움을 발견할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이: 제가 직접 겪은 경험을 예로 들겠습니다. 저는 미국 회사에서 일할 때 즐겁지 않았습니다. 동료들이 저를 시기하고 뒤에서 제 흉을 보며, 심지어는 제 상관에게 저에 대해서 안 좋은 말을 한 적도 있습니다. 그 때문에 저는 업무 성과에도 불구하고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김: 혹시 그때는 인종차별도 겪으신 것 아닌가요?이: 예, 인종차별뿐 아니라 저는 삼진아웃 당할 수 있는 여건이었습니다. 아시아인에다, 여성에다, IT 전공자도 아니었으니까요(웃음). 일은 많았지만 제 시간과 역량을 잘 조절해서 인정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관계가 문제였습니다. 만일 그때 제가 일의 신학을 알았다면 아마 즐거움을 찾았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직장을 옮기기도 힘들어서 하는 수 없이 참고 일했습니다. 제가 하는 일에서는 즐거움을 못 찾았고, 대신 나중에라도 ‘하나님의 일’을 하면 즐거울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김: 그래서 은퇴 무렵에 신학 공부를 하러 가신 것이고 선교단체도 설립하신 거군요. 이: 나중에 신학 공부를 하면서 일의 신학을 배우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아, 내가 좀 더 일찍 일의 신학을 알았다면 그때 힘든 일 속에서도 초점을 바꿔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러니까 먼저 즐거움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 일을 통해서 어떤 소명을 주셨는가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다양한 일을 합니다. 어떤 제품을 만들거나 고객 관리하는 나를 통해서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제공하십니다. 또는 하나님을 내가 일터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소명을 주실 수도 있습니다. 힘들어하는 동료를 위해서 기도하는 소명도 있습니다. 저는 그런 일을 잘 못했습니다(웃음). 김: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일터에서 그러한 위로자와 격려자의 역할을 하면 좋겠습니다. 이: 자신이 하는 일의 궁극적인 결과를 생각하십시오. 예를 들어, 하루 종일 일하는 택시 기사가 어떻게 기쁨을 찾겠습니까? 피곤하기만 할 겁니다. 하지만 그 기사가 목적지를 향해 가야 하는 손님을 인도하고, 그 결과로 그의 일에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면 기쁘지 않겠습니까? 식당에서 일하시는 분이, 오전 내내 바쁘게 일하다가 오신 분들의 허기를 채워주고 그들이 힘을 얻고 일로 복귀하도록 돕는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보람이 있습니까? 먹고 살기 위해서만 일한다고 즐거움을 찾을 수 없습니다. 아침에 일어나기 싫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억지로 일터로 가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김: 하나님께서 바로 이곳에서 나를 통해 일하신다는 것이 초점이 돼야 하겠군요. 즐거움 그 자체가 초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큰 그림 안에서 내 일을 통한 소명을 발견하면 일의 즐거움을 찾는 길에 들어설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목회자들이 일터에서 힘들어하는 교인들에게 단순히 믿음으로 견뎌라, 기도하라고만 할 것이 아니네요. 이: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은 일을 통한 하나님의 소명을 찾는 과정은 미래의 다른 일을 위한 훈련이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저는 회사에 다닐 때 미래에 아프리카에서 사역을 하리라곤 상상도 못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저는 회사에서 프로젝트 기획과 매니지먼트, 그리고 실행 결정과 평가 과정에도 참여했습니다. 당시에는 힘들었고 억지로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제가 케냐에 가서 대학 안에 신학부를 설립하기 위해 총장, 부총장과 같은 리더들과 함께 계획을 세우고 펀드레이징을 하고 의사결정을 하는 일에 참여할 때 과거 피델리티 매니지먼트에서 일한 경험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이금주 박사는 케냐 세인트폴 대학교(Saint Paul University) 신학부를 재건하는 일을 주도했다.] 이: 우리의 일터 경험으로부터 이러한 열매가 나올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이제는 평생 고용이 없어지고 계속해서 새로운 일을 찾아야 합니다. 지금의 일터에서 하나님이 나를 훈련하시다는 인식은 내 미래를 향한 하나님의 큰 그림을 바라볼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일을 대할 때 즐거움이 옵니다. 저는 과거에는 성-속 이원론에 빠져서 이러한 원리를 몰랐습니다. 견디고 견디다 신학교에 가서 나중에 선교 일을 하다가 일의 신학을 배우고는 무릎을 치면서 깨달았습니다. 생각의 초점을 바꾸어야 합니다. 일에서 즐거움을 찾기보다, 일에서 하나님을 찾는 데 초점을 맞추십시오.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빌 4:4)라고 했습니다. 견디기 힘든 일터의 상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초점을 둘 때 즐거움을 찾을 수 있습니다. 김: 하나님의 큰 그림 안에서 쓰임 받는 나의 위치와 내가 하는 일을 조명해야겠네요. 이 어마어마한 우주에서 티끌만도 못한 나를, 그리고 극히 작은 내가 하는 아주 작은 일을 통해서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그의 일을 이루신다는 것이 놀라운 기쁨입니다. 이: 그래서 우리 일터의 그리스도인들은 아침에 출근할 때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나에게 건강을 주셔서 오늘도 일하러 갑니다. 비록 힘든 일들 속에서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자 기도하고 이제 출발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종이고 청지기일 뿐입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아시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이니, 저는 그저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겸손히 따르기를 원합니다. 오직 저의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원합니다.”김: 아멘!☞여기에 일터에서 지금 겪고 있거나 겪었던 여러분의 고민과 질문을 적어 보내주세요. 익명으로 하셔도 좋습니다. 함께 답을 찾아 나가겠습니다.
산을 오르듯 한 걸음 한 걸음
by 박혜영
2023-07-08
제천 쪽에 있는 충주호에 가면 구담봉이라는 봉우리가 있습니다. 남한강 뱃길을 따라 단양으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이는 경승지로 알려진 곳입니다. 산이라기보다는 절벽 형태로 서 있는 봉우리이기 때문에 아주 가파른 계단으로 힘겹게 올라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보통 계단이라 하면 한글 니은[ㄴ]이나 기역[ㄱ]자 모양 아닙니까? 그런데 여긴 계단 경사가 얼마나 심한지 알파벳 제트[Z]자 모양이었습니다. 위를 쳐다보지도 않고, 아래를 내려다보지도 않고, 오직 발 딛는 계단만 하나하나 보면서 올라갔습니다. 열 개 올라가면 쉬고, 열 개 올라가면 쉬고, 그런 식이었습니다. 그렇게 올라갔습니다.지난 20년을 돌아보면서, 그 계단이 떠올랐습니다. 매번 한 주씩, 한 주씩 오르다 보니 20년이 지났습니다. 20년이란 세월은 올려다보면 먼 미래처럼 보이고, 내려다보면 아득하기만 하여 잘 생각이 나지 않는 그런 세월입니다. 그런데 20년이 지났다는 겁니다. 저 자신을 포함해 여러 교인의 나이를 계산해 보면 20년이 지났다는 건 분명한데, 그 긴 시간이 이렇게 빨리 지났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얼마나 빨리 지났는지, 책상에 꽂아둔 참된 목회라는 책이 손 타지 않은 채 그대로 있는 걸 보고 알았습니다. 산 지 얼마 안 되어 보였는데, 펼쳐보니 ‘설립 10주년을 맞이하여 참된 목회를 다짐하다’라는 말이 쓰여 있었습니다. ‘이게 벌써 10년이 됐다고?’ 어려운 내용도 아니고, 꼼꼼히 읽어야 할 책도 아니고, 다짐까지 담아 놓은 책이었는데도 읽지 않고 있다가 그냥 10년이 지난 것입니다. 느낌은 마치 어제 꽂아둔 것과 같았는데 말입니다.세월은 그렇게 빨리 흘렀지만, 돌아보는 마음에는 감사함이 넘쳤습니다. 설립 20주년 기념행사 중에 지난 시절의 사진을 보면서 더욱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첫 사진 속 인물들 가운데 많은 분이 이 자리에 함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런저런 이유로 대부분 떠나버렸다면, 그래서 교인 구성에 변화가 있었다면, 20주년을 기념하는 마음이 어땠을까요? 그 세월을 함께 지낸 교인들이 지금 여기 있기에 20년이란 시간이 온전해진 거 아니겠습니까? 20년을 함께했다니!그리고 기념행사를 위해 예배당을 꽉 채운 지금의 교인들 모습을 보면서 또 한 번 감사했습니다. 계속 이렇게 조금씩이라도 늘 수 있었다니! 새로 오신 분들이 자리를 잡아가고, 이미 와 있던 분들과 잘 지내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특히, 이번 산오름교회 설립 20주년을 맞이하여 여러 분이 써낸 글들을 읽어 보면서, 저 또한 산오름교회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교인들이 모이지 않았다면, 들어주지 않았다면, 들은 내용으로 살기 위해 애쓰지 않았다면, 산오름교회에 감사하고 고마워하는 교인들이 과연 가능이나 했겠습니까? 그 여러 글을 읽으면서 이번에는 참된 목회를 기필코 읽으리라는 다짐을 다시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그러면서 앞으로 10년을 생각했습니다. 20년 세월이 이토록 빨리 흘렀다면, 앞으로 10년도 그렇게 빨리 흐를 텐데, 과연 산오름교회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지만, 과제는 분명합니다. 정체성을 계속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저는 최근에 ‘지속가능한 교회’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성도가 성도를 돌보는 지도력, 그런 지도력에 의한 운영 체계, 정체성을 이어갈 수 있는 후임자, 이 세 가지가 필요하다는 의견이었습니다. 우리 같은 전통적인 제도권 교회는 이런 세 가지 요소와 기존 교회 제도라 할 수 있는 장로-권사-집사 체계와 어떻게 조화시켜 나가야 할 것인지 또 다른 과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든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교회에는 양육과 돌봄을 자기 일처럼 감당하는 훈련된 교인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 말입니다. 그러자면 교회를 위해 자신을 드리고자 하는 마음이 필요하고, 그런 마음을 계발하고 훈련할 수 있는 어떤 과정도 필요할 것입니다. 훈련과 체계와 정체성은 지속가능한 교회를 위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동력이 필요합니다. 에베소 교회의 지도력 전환기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능히 너희를 든든히 세우사…”(행 20:32). 교회를 계속 든든히 세워나가려면 “은혜의 말씀”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by 정현구
2023-07-07
내일이 더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오늘 현재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분별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마지막을 생각하고 살 때의 유익은 현재를 더욱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현재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지 않을 수 없습니다.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함이라”(전도서 7:3). 이 구절이 말하는 슬픔은 삶에 대한 비관에서 나오는 그런 슬픔과 근심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깊은 반성에서 나온 회개와 참회를 의미합니다. 또 이 구절이 말하는 웃음은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웃음이 아닙니다. 삼류 코미디가 주는 억지웃음을 의미합니다.세상은 억지웃음을 통해서라도 행복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만큼 삶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허무한 인생의 참된 해결책이 아닐뿐더러, 인생에 대한 깊은 고민도 고뇌도 갖지 못하게 만듭니다. 인생을 깊고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기도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린도후서 7:10). 우리를 회개에 이르게 하는 그런 근심과 슬픔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참회의 눈물이 값싼 웃음보다 더 고귀한 것입니다.그러면 무엇이 우리를 회개에 이르는 근심으로 이끌까요? 그중의 하나가 고난입니다.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전도서 7:14). 고난은 자신과 인생을 다시 바라보게 하고, 생각하게 하고 회개하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종종 고난을 주십니다. 또 하나는 타인의 죽음입니다. 타인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게 되고, 자신도 결국 관에 누울 것을 생각할 때 회개하게 되고 인생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은 위로와 기쁨도 주지만 또한 책망하고 고민하게 하여 회개에 이르게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전도서 7:5). 지혜자의 책망 즉 말씀의 책망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난과 타인의 죽음을 통한 진실한 고민이 없고, 말씀을 통한 책망을 듣지 못한다면, 그는 어리석은 자들의 값싼 웃음만 찾아다니거나 탐욕에 빠져 영혼이 어둡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매한 자들의 웃음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가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니라 탐욕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뇌물이 사람의 명철을 망하게 하느니라”(전도서 7:6).고난을 만날 때 그것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기회로 삼고, 가까운 친구나 가족의 죽음을 볼 때마다 자신의 마지막을 생각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매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이것들이 나의 허물과 죄를 생각하게 해주거든 애통하는 마음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이런 애통이 진정 내일이 좋은 삶을 만들어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4).정현구, 영원을 품고 오늘을 걷다(SFC)에서 간추린 글입니다.
슬픔
애통
죽음
근심
성경 전체를 어떻게 통합적으로 이해할 것인가
by Phil Thompson·Andreas Koestenberger
2023-07-06
최근 남자 성경 공부에서 한 대학생이 “성경의 메타 내러티브”가 우리가 검토하고 있는 구절을 이해하는 데 어떻게 도움을 주는지 설명했다. 불과 이십 년 전, 내가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교수를 제외하고 이런 식의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평신도도 성경 속 각각의 책을 연구하고 그게 성경이라는 전체 이야기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계시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조사하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게 되었다. 무엇이 바뀐 걸까? 차세대 지도자들이 성경의 상호 연결성이라고 가정하는 지점에까지 우리는 어떻게 도달할 수 있었던 걸까? 수십 명의 저자가 수천 년에 걸쳐 여러 언어로 기록한 방대한 책 성경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가정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오늘날 젊은 지도자들은 수십 년간 축적된 성경신학 연구로부터 많은 유익을 얻고 있다. 성경신학이라는 학문은 복음주의 교회와 특히 복음연합(The Gospel Coalition)의 사역으로 드러나는 개혁신학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성경신학이 널리 보급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분야는 여전히 새로운 연구를 절실히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모두가 간절히 바라던 새로운 작품이 약 1,000쪽 분량의 방대한 책으로 탄생했다. 안드레아스 J. 쾨스텐버거와 그레고리 고스웰이 쓴 BibIical Theology: A Canonical, Thematic, and Ethical Approach이다 쾨스텐버거는 성경 연구자에게 낯선 이름이 아니다. 그는 성경 입문서, 주석, 해석학 안내서, 사역 자료 등 수십 권을 썼다. 의심할 여지 없이, Biblical Theology는 수십 년에 걸친 쾨스텐버거의 목회와 저술 속 많은 내용이 함축된 초석에 해당한다. 거기에 더해서 공동 저자인 시드니 크라이스트 칼리지 출신의 그레고리 고스웰은 구약에 대한 더 깊은 수준의 통찰력을 제공한다. 두 명의 구약과 신약 학자는 우리가 성경의 음성을 더 잘 들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나는 이 새 책과 관련해서 쾨스텐버거와 서신을 주고받았고 그는 새로운 접근 방식이 어떻게 성경 속 66권의 모든 책에 다 나름의 역할을 부여하는지 설명했다. 성경신학이란 무엇이며 조직신학과 같은 다른 학문이나 신학적 성경 해석(Theological Interpretation of Scripture/TIS) 같은 운동과는 어떻게 다른가? 성경신학은 다양한 성경 본문을 지속적으로 경청함으로써 성경 저자의 신학이 무엇인지를 추구한다. 우리가 보는 방식으로 설명하자면, 성경신학이 연결에 관한 학문이라면 조직신학은 구성에 관한 학문이다. 성경신학에서 우리는 정경 속 다른 목소리를 서로 연결한다. 같은 구약이지만 오래된 책과 상대적으로 후기에 기록된 책들 사이의 연결, 그리고 구약과 신약의 연결 등등이다. 그러다 보면 더 오래된 구약 본문을 인용하는 구약 본문을 인용하는 신약의 저자를 만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6:35; 8:12; 10:7, 11; 11:25; 14:6; 15:1) 속 예수님의 “나는 ∼이다”라는 말씀은 이사야서 40-66장 속 여호와에 대한 이사야의 언어를 반영하는 것 같다. 이사야서의 내용은 또한 출애굽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출 3:14)라고 스스로 밝히신 내용을 상기시킨다. 성경신학은 역사적, 귀납적, 서술적 학문이기에, 우리는 본문 자체의 용어로 본문을 이해하고 본문 사이의 연결 또는 “텍스트 간 연결”을 섬세하고 주의 깊게 그리려고 노력한다. 더불어서 성경 용어, 원래의 역사적 배경, 그리고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다루신 역사에서 그들의 위치와 시간이 갖는 의미 등을 존중하면서 본문을 파악하려고 한다. 이상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조직신학은 성경신학에 바탕을 두고 하나님, 그리스도, 구원, 성령, 교회 같은 중요 주제별 분류에 기초해서 신학적 구성에 관여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조직신학은 성경 자료를 주제별로, 논리적으로, 그리고 현대적 맥락에서 배열함으로 오늘날에도 인간에게 성경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TIS에 관해서 물어야 할 핵심은 사람들이 “신학적”이라는 말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이다. 신학적이라는 말이 하나님을 성경의 저자로 인정하는 것이라면, 즉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이며 하나님, 그리고 그분의 성품과 길을 계시하기 위해 쓰였다고 받아들이는 의미라면, 성경신학과 TIS 사이에는 많은 공통점이 있다.그러나 TIS가 성경의 신학적 해석을 발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건 매우 중요하다. 전혀 그렇지 않다. 최고의 주석가들은 항상 본문에 대한 신학적 질문을 던진다. TIS의 경우에 성경 접근과 관련해서 하나님으로 시작하는 것 자체가 광범위하고 연역적 전제이지만, 성경 신학에서는 본문을 귀납적으로 해석하고 성경 저자들이 지닌 신념과 확신에 따라서 관련된 성경 구절 사이의 연결을 그린다. 우리는 성경 언어와 석의에 대한 능력을 갖춘 성경학자들이 크게 이바지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따라서 최고의 모델은 실무자들이 관련한 전문 지식을 테이블에 가져와 함께 작업하는, 다양한 분야 간의 진정한 파트너십 구축이라고 믿는다. Kaiser, Schreiner, Thielman, Guthrie 또는 Marshall의 작품을 보면서 바득바득 이를 가는 신학교 사람들에게 당신의 접근 방식은 그들과 어떻게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성경 66권 각각의 책에 담긴 ‘정경’ 및 ‘윤리’ 섹션이 당신의 고유한 접근 방식에 어떤 역할을 하는가?당신이 언급한 학자들은 신약신학 또는 구약신학만을 저술한 반면에 우리는 성경 전체를 아우르는 성경신학이다. 사실 현재 시장에 나와 있는 복음주의 영어권에서 성경신학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나는 여기서 특히 Beale, Schreiner, Thielman, Witherington을 말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그중에서도 딱 한 사람(이 사람의 전문 분야는 신약인데)만이 전체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우리 두 사람의 경우, 우리는 각자의 전문 분야를 꺼내놓고 논의함으로 진정한 협업 프로젝트를 이뤄냈다. 나와 그레고리는 성경신학을 중요한 윤리적 의미를 지닌 귀납적, 역사적, 그리고 서술적 학문으로 이해하는 공통된 방법으로 이 작업을 완성했다. 66권으로 이뤄진 하나의 도서관을 구성하는 다양한 저술들 사이의 연관성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정경이 매우 중요하다는 믿음에서도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 우리는 66권 각각의 책이 나름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으며, 우리가 한 권 한 권 책 별로 접근해서 이번 책을 완성한 이유이다. 각각의 책에 대해서 우리는 주요 주제, 윤리적 가르침, 그리고 정경적 공헌을 다뤘다. 정경적 공헌은 다른 말로 하면 성경 전체의 줄거리에서 그 책이 차지하는 위치에 관한 것이다. 그런 다음 우리는 발견한 내용을 종합하고 모세 오경의 윤리나 복음서의 주요 주제에 대한 토론을 포함시켰다. 마지막 장에서는 왕국, 언약, 십자가, 사명,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같이 12가지의 중심이 되는 구약과 신약 주제를 논의함으로 이 책 전체를 아우르는 통합된 시각을 제공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가 그 사랑에 보답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바람이야말로 성경적 메타 내러티브의 핵심 중 하나임을 확인했다. 이런 방식으로 성경 속 메타 내러티브의 핵심을 확인하는 것이야말로 성경신학 분야가 이루어내는 독특한 공헌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아는 한, 주류 성경신학 학계에서 지금까지 우리가 다룬 식으로 이 주제를 연구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돈 카슨과 함께 당신은 성경신학의 총체화(totalizing) 경향을 일축했다. 거기에 무슨 문제가 있다고 보는가? 성경신학의 단일 센터 추구에 관해서는, 단일 센터라는 “성배”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돈 카슨의 회의론은 충분히 근거가 있으며 또한 그런 식의 노력이 필연적으로 환원주의적이라는 데에도 동의한다. 우리는 또한 성경신학의 척도는 성경의 다양성을 얼마나 잘 다루는가에 달려있다는 카슨의 현명한 조언에도 동의한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통일성과 다양성 사이에 적절한 균형을 맞추는 성경신학을 추구하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가족 구성원 모두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자기 목소리를 내는, 절제된 가족 대화라는 은유를 사용한다. 이 은유를 성경신학에 적용할 때, 우리가 추구하는 바는 명확하다. 성경적 자료를 연결하고 종합함으로 우리는 모든 성경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정경 간 대화를 조정하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정경에 크게 기여하는 약 12개의 구약과 신약 주제를 찾아냈다. 동시에 우리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성경적 메타 내러티브의 핵심이라고 믿는다. 예수님은 우리가 마음과 영혼과 생각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구약 전체의 요약이라고 가르쳤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미덕은 사랑이라고 했으며 요한의 사랑 윤리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따라서 약 750쪽에 걸쳐서 우리는 여러 주제와 윤리적 가르침을 논의함으로 성경신학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도록 한 것이다. 책 전체에서 당신은 정경 속 책 순서의 중요성과 또한 순서가 텍스트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형성하는 방식을 강조했다. 정경 순서가 성경 이해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예는 무엇이 있을까? 정경 순서에 대한 다양한 방식(schemas)이 성경에 접근하는 데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책의 위치가 그 책을 이해하는 데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가, 그리고 다른 책과 관련해서까지 어떤 역할을 하는가에 관해서 구약과 신약에서 각각 하나씩 예를 들겠다.헬라어 성경에서 예레미야 애가가 예레미야서 다음에 배치된 것은 예레미야서를 제대로 읽는 데 필요한 기본적 연결고리를 만든다. 애통하는 목소리 중 하나가 예레미야라면, 이것은 심판의 선지자와 고통받는 백성 사이의 화해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백성을 정죄한 선지자가 그들의 고통을 인정하고 고통에 동참했기 때문이다. 히브리 정경 속 위치로 볼 때, 애가는 전례(liturgical)에 필요한 다섯 개의 축제 두루마리(메길로트) 중 하나였다. 이런 식의 배치는 그 책이 역사적 위기라는 맥락 속에 포함되지 않으며 도리어 미래에 만날 위기에 필요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이 책은 그 어떤 고대 사본이나 정경 목록에서도 누가복음 다음에 나오지 않는다. 저자가 같고 둘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려주는 사도행전 1:1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신약 정경이라는 삶 속에서 사실상 별개로 살았고, 그들의 근접성 부족은 각 권이 전혀 다른 맥락에서 읽어졌음에 관한 진술이다. 정경적 관계에 있어서 사도행전은 특히 누가복음보다는 정경적 블록으로서 다른 복음서와 고리를 맺고 사복음서와 서신서를 연결함으로 신약의 증언에 통일성을 주는 데에 도움을 준다. 왜냐하면 사도행전은 이후에 많은 편지를 쓰고 또 많은 교회를 설립한 바울의 사명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바쁜 목회자가 성경신학을 설교 준비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건전한 성경신학에 의해 만들어진 설교는 그렇지 않은 설교와 어떻게 다른가?목사는 강해설교뿐 아니라 성경신학적 설교도 해야 한다. 따라서 어떤 본문을 설교하건 간에, 전체 정경의 틀에서 보아야 한다. 이 말은 설교 본문을 성경 속 관련된 다른 내용과 연결하려고 시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의 이야기를 설교할 때, 목사는 그 이야기를 창세기 앞부분에 나오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시켜야 한다. 동시에 뒤에 나오는 성경 내용과도 연결해야 한다. 특히 요셉의 이야기가 예수님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탐구해야 한다. 수많은 연결 지점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설교자가 이런 식으로 연구하고 설교 준비를 한다면, 그는 영적 풍요를 경험하고 더불어 시야가 넓어질 것이다. 더불어서 그는 교인들을 성경적 메타 내러티브로 끌어들이고, 그들 스스로 성경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능력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도록 총체적이고 정경적인 접근 방식을 모델로 제시하게 된다. 어떻게 이런 설교가 가능할까? 목사가 역사적 맥락에 근거해서 본문을 면밀히 읽고, 그 이해에 기초하여 본문의 신학적 메시지와 교인들 사이의 진정한 연결점을 분별함으로 가능하다. 우리의 경험에 따르면 사람들은 하나님과 연결되기를 원한다. 또한 삶의 도전과 실존적 상황 속에서 그들은 성경의 음성을 갈망하고 있다. 당신이 가장 기대하는 성경신학의 새로운 경향은 무엇인가? 향후 20년 동안 미래의 학자들이 탐구할 새롭고 유익한 방향은 무엇인가? 혹시 몇 년 안에 우려해야 하는 성경신학의 어떤 경향이 있는가? 급성장하는 분야 중 하나인 성경신학은 교회와 학계에 엄청난 양을 제공하는 활기찬 학문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성경 각 권 또는 성경 전체를 다루는 다양한 책과 여러 시리즈가 출간되어 있다. 그중에는 내가 편집하는 Biblical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Series도 있는데, 조만간 마태복음, 히브리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완결을 기다리고 있다. 40권으로 예정된 Evangelical Biblical Theology Commentary 시리즈는 현재까지 몇 권만 인쇄되었다. 다른 유용한 시리즈로는 New Studies in Biblical Theology, Essential Studies in Biblical Theology, 그리고 Short Studies in Biblical Theology 등이 있다. 단언컨대 성경신학은 많을수록 더 즐거운, 실로 광할한 분야이다!한 가지 우려는 “성경신학”이라는 용어가 가지는 다양한 정의와 방법이다. 그렇기에 성경신학을 연구할 때 우리는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정의해야 하고 또한 연구 방법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레고리와 나는 처음부터 정의와 방법의 문제를 명확히 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의 구분을 무너뜨리는, 우리가 볼 때 일종의 혼합적 접근을 실천한다. 그들은 특정 신학적 체계를 전제로 하고, 거기에다가 성경적-신학적 내용을 쏟아붓는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할 때, 그러한 접근 방식에서 성경신학은 더 이상 순수 귀납적일 수 없다. 물론 순수한 귀납법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우리는 신학 체계의 전제를 막는 노력과 더불어 여전히 귀납법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주의하길 바란다. 성경신학의 기치 아래 판매되는 모든 것이 반드시 동일한 정의와 방법에 기초한 것은 아니다.Biblical Theology 마지막 부분에서 그레고리와 나는 성경신학의 미래를 다뤘다. 우리가 미래를 안다고 주장한 게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미래를 논했다. 우리는 성경신학이 밝은 미래를 가지고 있다고 믿으며 노력해야 할 것과 피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새로운 세대의 학자들이 이론적으로 책임 있고, 방법론적으로는 미묘한 차이를 일으키며 동시에 신학적으로 정제된 성경신학을 만들길 바란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 영역에서 더 많은 작업이 수행되어야 한다. · 성경신학의 명확한 정의와 조직신학과의 적절한 구분.· 다른 학자의 발견에 대한 더 큰 협력 정신과 개방성, 반대로 해당 분야의 학자들 사이에서 덜 경쟁적 관계.· 마스터(만능) 열쇠 탐색을 포기하고 대신 다중 접근 방식 채택.· 이번 책에서 모델링하려고 시도한 것처럼 성경 신학과 윤리 간의 더 큰 통합.· 주요 주제, 성경의 줄거리, 정경 구조와 관련해서 성경 속 각 책이 추구하는 신학에 대한 적절한 관심.· 예수와 관련해서 구약 성경을 이해하는 방식의 폭이 더 커지는 것. 구원이 아닌 창조로 성경신학을 시작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선교가 마땅히 받아야 할 관심을 받는, 진정한 글로벌 접근을 이루는 것.· 성경신학을 사용하여 성경을 읽는 신선하고 흥미진진한 방법으로 새로운 세대의 설교자를 양성하고 또 전체 회중을 양육함으로써 학계뿐 아니라 교회를 섬기는 것.원제: How to Make Sense of the Whole Bibl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성경신학
조직신학
신학적성경해석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 (7) : 정의와 자비 사역
by 고상섭
2023-07-05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팀 켈러가 그토록 사랑했던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이제 눈물이 없는 곳에서 기뻐할 팀 켈러를 생각하면 위로가 되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에겐 그가 떠난 빈자리가 너무나 크게 느껴진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인 존재로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발자취를 남겼다. 그와 그의 삶이 우리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 몇 가지를 되돌아보며 그를 기억하고자 한다. 팀 켈러의 소천에 많은 이들이 애도를 표했다. 참 다양한 교파의 사람들이 다양한 찬사를 그에게 보냈다. 팀 켈러가 자신이 속한 교단을 넘어 범교회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데는 그의 사역이 큰 몫을 했다. 복음주의권 교회들은 구원에 집중하면서 사회참여에 소홀한 경향이 있는데, 팀 켈러는 복음은 반드시 사회참여와 선교로 이어져야 한다고 말했고, 또 그 말대로 스스로 실천했기에, 다양한 교단의 사람들에게 그는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요즘 그리스도인들도 어렵고 아픈 사람들을 돕는 일에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회구호 활동은 흔히 부차적인 의무로 여긴다. 교육과 전도사역 등을 충분히 한 후에, 게다가 시간과 예산과 여유가 있을 때 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 그러나 이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다.[1]복음과 정의 사역 팀 켈러는 복음주의 교회의 약점인 사회참여에 대해 강조했지만, 이것은 균형을 이루기 위한 보완이 아니라 복음을 분명히 알면 자연스럽게 정의와 자비 사역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교회 리더십과 사역자들은 복음을 단지 신앙인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교리적 내용쯤으로 여길 위험이 있다. 그 결과 많은 설교자와 지도자들이 더 심오한 교리, 더 깊은 영성, 더 깊은 공동체나, 더 심오한 제자도, 심리적 치유, 또는 사회 정의나 문화 사역에 열정을 쏟기 쉽다. … 그러나 이런 경향 속에서 전체 그림을 놓칠 수가 있다. 비록 우리가 집중하는 사역이 있을 수는 있지만 복음은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다. 모든 형태의 사역은 복음에 의해 동기부여가 되고, 복음에 기초해야 하며, 또한 복음의 결과이어야 한다.[2]팀 켈러는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이 분리되는 이유는 복음의 본질을 바르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단순히 두 개의 사역을 합쳐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복음에서 출발하지 않은 문제라는 것이다.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면 자연스럽게 복음으로 파생된 사역들을 하게 된다. 리디머 교회 홈페이지 처음에 등장하는 화면이 ‘리디머 교회의 비전과 가치’를 설명한 그림인데, 복음과 사역의 관계들을 잘 설명해준다. 그림을 보면 예배와 전도, 공동체 형성, 교회개척 운동, 신앙과 직업, 자비와 정의 사역의 한가운데 복음이 있다.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면 다섯 가지 영역의 일들로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된다. 특히 정의와 자비 사역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사역이 아니라 복음을 알면 반드시 해야 하는 사역이라 말한다. 참된 복음이 선포되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고, 은혜를 경험한 개인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는 모든 세상일에 대해 아픔을 느끼고, 세상이 하나님을 알아가도록 힘쓰게 된다. 이것은 복음에서 흘러나오는 정서이고 복음은 사회의 정의와 자비 사역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된다. 정의와 자비 사역의 기초가 바로 복음이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까닭에 삶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모든 관계를 바로잡는 일에 자연스럽게 헌신한다.[3]왜 정의 사역인가팀 켈러는 가난한 이웃을 돕는 일을 ‘구제 사역’이라고 하지 않고 ‘정의 사역’이라고 부른다. 왜 ‘정의’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일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 6:8)미가서는 ‘겸손하게 하나님과 행한다’는 말의 구체적인 의미를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인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세드’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 무차별적인 은혜와 동정을 의미하는 말이고, ‘공의’와 ‘정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쉬파트’는 구약성경에 200번 이상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는 말이다.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인간을 공평하게 대한다’이다. 거류민에게든지 본토인에게든지 그 법을 동일하게 할 것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 (레위기 24:22)여기서 ‘그 법’에 해당하는 단어가 ‘미쉬파트’이다. 인종이나 사회적인 지위와 상관없이 옳고 그름에 따라 유무죄를 가려 벌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든 똑같은 잘못을 저질렀으면 똑같은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다. 결국 미쉬파트는 징벌이든 보호든 보살핌이든 마땅히 돌아가야 할 몫을 주라는 뜻이다.[4]구약에서 이 단어가 등장할 때는 주로 ‘4대 취약계층’인 과부와 고아, 나그네,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고 보호하라는 의미로 거듭 사용된다. 즉 성경 말씀에 따르면 이런 집단을 어떻게 대우하느냐가 한 사회의 미쉬파트 곧 정의와 공의를 평가하는 척도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취약계층을 돌보지 않는다면 자비와 자선의 부족의 차원을 넘어 정의 곧 하나님의 미쉬파트를 짓밟는 행위이며, 하나님은 사회경제적인 약자들을 사랑하고 돌보시는 분이시기에 그리스도인도 역시 그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공의’ 곧 ‘정의를 행하는 일’이다.[5]팀 켈러는 오늘을 사는 잠언에서도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며”(잠 3:27-28)를 해설하면서 이렇게 강한 어조로 말한다. “이웃에게 베풀어야 할 선은 경제적 물리적 필요를 채워주는 실제 원조여야 한다. 이것은 자선의 문제가 아니라 이웃이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을 받는 것이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지 않으면 단지 사랑이 없는 게 아니라 불의한 것이다.”[6]팀 켈러가 이 사역의 이름을 ‘정의와 자비 사역’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단순히 ‘구제’라고 하면 내가 안 해도 되는 일이지만 하면 더 좋은 일이라는 인상을 주지만, 정의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난하고 연약한 이들을 위해 사회 정의를 실현할 책임이 있었다. 그것은 선택된 민족으로서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한 성품을 열방에 드러낼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과 외침을 외면한다면, 세상이 그분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도록 눈을 가린 셈이 되므로 입으로 그 어떤 신앙고백을 한다 할지라도 주께 영광을 돌릴 수 없다.”[7]또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이라고 명명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연약한 자들을 돌보시는 분이시다. 이것을 하나님의 백성이 외면한다면 팀 켈러의 표현대로 사랑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불의한 것이다. 정의 사역의 동기 정의 사역은 복음에서 흘러나온다. 단순히 가난한 사람이 불쌍해서 도와주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팀 켈러의 스승이었던 에드먼드 클라우니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요구할 수 없는 사랑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자비를 명령하시지만, 그 명령에 대한 반응으로 자비를 베풀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반응으로 우리에게서 너그러움이 흘러나와야 한다.”[8]“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마 18:33). 예수님께서 용서를 말씀하실 때 언급한 내용이지만, 정의 사역의 동기와 근거도 동일하다. 단순히 그 사람이 불쌍해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반응으로 정의가 흘러나와야 한다. 복음과 종교의 차이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순종하느냐 아니면 순종을 통해 원하는 복을 추구하느냐의 차이이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을 통해 어떤 보상이나 공로 또는 내가 더 나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가진다면, 그것은 우상숭배의 문제로 이어진다. 교회의 정의 사역은 교회가 더 나은 사람이기 때문에 부족한 사람을 돕는 구제의 의미가 아니라 마땅히 이웃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돌려주는 의미이다. 나에게 있는 모든 것이 은혜이며 그것을 나눠주어야 할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확인해야 한다. 은혜의 결과가 아닌 인간의 공로로 사람을 돕게 되면 정의 사역의 본질에 대해 오해하게 된다. 어떤 이들은 “(도와주어야 할 사람들이) 가난하기는 하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다”라고 주장하면서 돈이 없어서 도와달라고 하지만 그 사람들의 집에 가보면 다 살만한 사람들이라고 말하면서 적극적으로 돕지 않으려고 할 때가 있다. 그런 태도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에 부합하지 않는 태도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했다. “자기 문제라면 벼랑 끝에 이르기 훨씬 전부터 어떻게든 손을 쓰려고 하면서, 왜 이웃에게는 굶어 죽을 지경이 되야 도움을 주려고 하는가?”[9]내가 도와준 사람이 나보다 더 좋은 옷을 입고 핸드폰을 가지고 있으면 도움을 준 것을 후회하기도 한다. 내가 도움을 준 사람은 나보다 못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고, 그것이 그들에게는 한 가닥 남은 자존심이라는 것에 대한 배려가 없는 생각일 수도 있다. 팀 켈러의 리디머 교회에서도 싱글맘을 도왔는데, 그녀가 교회가 제공한 돈으로 번듯한 식당에 다니고 새로운 자전거를 아이들에게 사주는 데 돈을 사용한 것이 드러났다. 그러자 지원을 중단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팀 켈러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예를 통해 사람들을 설득했다. 에드워즈는 교회에서 재정지원을 받았는데 돈을 술먹는 데 쓰거나 규모 있게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도, 그들에게 지원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이유가 이웃을 돕는 의무를 포기하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도 똑같은 상태에 빠진 인간을 찾아오셨다고 말한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재정지원을 끊어버리면) 그럼 나머지 식구들은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다. 부모가 무책임하게 행동한다 할지라도 자녀들을 생각해서 그 가정을 꾸준히 뒷받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10]리미더 교회가 지원했던 싱글맘도 아이들이 아빠 없이 자라면서 동네에서 친구들이 다 가지고 있는 자전거 하나 없는 것이 마음이 아파서 사주고 싶은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그렇게 해주면 정상적인 가정에서 살고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리더미 교회는 재정지원 이상의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더 실재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프로그램까지 나아가게 되었다. 또 “나누고 자시고 할 여력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자기네 식구 먹고살기도 빠듯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팀 켈러는 이렇게 대답한다. “누굴 도울 힘이 없다는 말은 내 삶의 한 귀퉁이를 잘라내는 부담을 지면서까지 누군가를 도와줄 자신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정의는 상대방의 행위와 상관없이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하신 것처럼 은혜로 사람을 대하는 것이다. 내 것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에서 그 이웃의 몫을 나누는 것이다.”[11]정의 사역의 실천 팀 켈러는 정의 사역을 시작하려면 먼저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하라 권면한다. 교회가 정의 사역을 시작하려면 먼저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해서 가정과 교회와 지역 공동체로 관심의 원을 넓혀가야 한다. 직계 가족을 포함한 근친 중에서 장애인, 노인, 만성질환 환자가 있다면 그들을 돌보는 사역으로부터 시작하면 된다. 지역사회를 섬기면서도 혈연에게조차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율배반적인 행위가 될 것이다. 그다음은 교회이다. 먼저 교회 안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조사해서 다각도로 섬겨야 한다. 때로 교회에서 기금을 조성해서 전달하거나 비공식적인 통로로 다른 이들의 필요를 채워주어야 한다. 또 이웃이나 공동체를 섬겨야 한다. 슬픔, 상실, 이혼, 질병, 장애, 개인 문제 등으로 힘들어하는 이웃을 찾고, 이주민 가정이 눈에 보이거나 노숙을 하는 사람들을 섬길 수도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도록 노력하면 된다.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관심의 원을 확대해 나가야 한다. 정의 사역의 첫 번째 실천은 바로 ‘지금 있는 곳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팀 켈러는 정의 사역이 단순히 긴급한 필요를 채우는 데만 급급하지 말고 장기적인 사역 계획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한 지역의 가난한 사람을 도우려면 단순 후원금 이상이 필요하다.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고, 위협적인 사회 체제를 바꿀 수 있는 정치인을 비롯한 다양한 사람들로부터도 도움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팀 켈러는 이런 장기적 계획에 대해 세 단계로 나누어서 소개한다. 1) 원조 원조(Relief)란 신체적, 물질적, 경제적으로 시급한 필요를 직접 채워주는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도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응급처치부터 해주고 회복하는 데 소요되는 경비를 부담하는 원조행위를 한다. 노숙자에게 임시로 숙소를 마련해 준다거나, 궁핍한 이들에게 음식과 의복을 나눠 준다거나, 최소 비용을 받거나 무료로 병을 고쳐주고 상담해 주는 식의 서비스들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원조 사역이다. 좀 더 적극적인 형태로는 법률, 주거, 다양한 형태의 가정 폭력 따위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는 활동을 할 수 있다. 2) 개발개발(Development)은 개인이나 가족 또는 공동체 전체에 적절한 자원을 제공하여 원조에 의존하는 데서 벗어나 경제적 자립을 할 수 있도록 후원하는 일을 가리킨다. 구약성경을 보면 종의 부채를 면제하고 해방해 줄 때는 새로운 삶을 꾸려 갈 수 있도록 경제적 자원들을 넉넉히 제공하라고 주인들에게 명령했다. 여기에는 식량과 생업에 드는 각종 도구가 모두 포함된다. 구약학자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법은 공동체에서 가장 연약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자립할 기회를 보장해준다는 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기회라면 재정적인 자원이 먼저 떠오를지 모르지만, 교육이나 법률 지원, 일자리 창출 따위도 여기에 속한다. 이런 요소들은 쓰고 남은 걸 넘겨주거나 선심 쓰듯 베푸는 차원을 넘어 권리의 문제이다.” 개발은 단순히 지원을 받는 데서 벗어날 수 있는 자립할 수 있는 교육과 일자리 창출 등이 포함된다. 물론 개발은 원조보다 시간이 훨씬 더 많이 소모되고 복잡하며 비용 부담이 크다. 교회는 단순히 구제의 차원을 넘어서 사람들의 자립을 위한 개발 단계를 고민해야 한다.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이 주셨던 율법은 단순히 개인의 구제가 아니라 그들의 삶의 회복이었다.[12] 개인의 위한 개발에는 교육, 직장 창출, 훈련 등이 포함된다. 이웃이나 지역에 대한 개발은 사회적, 재정적 자본을 사회 시스템에 투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택 개발, 주택 소유 그리고 여러 자본 투자를 의미한다.[13]3) 개혁개혁(Reform)은 즉각적인 필요를 채우는 구제와 의존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개발의 차원을 넘어 의존성의 문제를 만들거나 약화하는 사회적 조건과 구조를 변화시키는 노력이다. 여리고 가는 길에서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왔던 사마리아인이 여리고를 갈 때 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보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단순히 강도 만난 사람을 돕는 일만으로는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여리고 가는 길에 강도가 출현하지 않도록 방법을 강화하고 가로등을 설치하는 등 다양한 구조적 조치를 강구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런 사고를 막을 수 있을까?” 이와 같은 질문은 결국 사회 개혁의 문제까지 나아가게 한다. 욥은 “불의한 자의 턱뼈를 부수고 노획한 물건을 그 잇새에서 빼내었느니라”(욥 29:17)고 말했고, 모세는 부자와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특혜를 주는 법률 체계에 대해서 반대한다고 말했다(레 19:15). 또한 사람들의 근소한 수입을 쥐어짜는 대금업 시스템에 대해서도 반대를 표명했다(출 22:25-27).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참여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사회 시스템을 직접 바꾸는 일에 헌신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사회를 변화한다는 개념 자체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도 적지 않다. 그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이 변하다 보면 언젠가는 사회 전체가 변화될 것이라는 생각을 편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고 개인적으로 사회 활동을 하는 데 집중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구조적인 죄를 교회가 외면한 채 구제 활동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그러나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참여하는 중요한 목표임에 동의하더라도 여전히 어떻게 제도적 교회가 참여할 것인지는 고민이 필요한 영역이다.[14]그렇다면 한 교회의 영향력이 크지 않는 현실에서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먼저 교회가 해야 하는 일은 구제하는 일이다. 또 개발의 단계에도 어느 정도 참여하고 헌신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개발의 단계는 한 교회가 전부 맡아서 하기에는 힘든 일이기에 지역 교회의 연합이 필요하다. 한 교회가 세 단계를 모두 감당해야 한다면 가장 중요한 복음과 말씀 사역이 흔들릴 수도 있다. 개발과 개혁의 단계는 교회가 지역사회 단체들과 연관해서 함께 일하는 것이 좋다. 교인들에게도 비영리 조직과 연합하여 개발과 개혁에 동참하여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쉽게 말해 영화 제작에 관여하는 교인들을 훈련하여 복음의 영향력이 담긴 작품을 만들게 할 수는 있지만 교회가 스스로 영화를 찍는 회사를 설립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일이라고 해서 세상에 있는 모든 일을 다 잘할 수 있는 기관이나 조직은 존재하지 않으며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구체적인 적용 아브라함 카이퍼는 영역 주권이란 개념을 제시했다. 지역교회는 복음을 전하고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이들을 양육하는 책임이 있다. 그럴 때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제자로서 세상과 구별된 방식으로 예술, 과학, 교육, 언론, 영화, 비즈니스를 이끌어 가는 그리스도인을 낳게 된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교회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개인을 길러내지만, 지역교회가 자체적으로 특정한 사업에 뛰어드는 것은 아니다. 카이퍼는 그래서 제도적 교회와 유기적 교회를 구분했다. 제도적 교회는 교회의 기관으로 공동체 안팎의 식구들을 구제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바탕으로 복음을 살아갈 수 있도록 성도들을 양육하는 기능을 감당한다면, 유기적 교회는 개발과 사회 개혁 활동을 위해 다양한 기관, 단체와 연합하여 활동할 수 있다. 이렇게 정의 사역은 극도의 정밀한 균형감각이 필요하다. 지역교회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일꾼들을 통해 말씀과 행동 양면에 걸쳐 움직여야 한다. 빈곤의 문제는 복잡하게 얽혀있다. 단순히 총과 칼로 세상과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그 종류가 다르다. 복음으로 무장해야 하고 교회가 함께 교회와 지역사회를 도와야 하지만 또한 개혁의 차원에 눈을 뜨고 동참하여 활동해야 한다. 단지 구제에만 집중하는 교회가 있고 또 복음을 제쳐두고 사회 개혁만을 부르짖는 교회도 있다. 그러나 이 둘은 언제나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이고, 하나님의 복음은 개인과 사회 구조 모두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이제 교회는 단순한 구제를 넘어 개발과 개혁을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의무나 무거운 짐이 아니라 복음의 은혜의 자연스러운 확장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참된 미덕의 본질에서 하나님을 가장 아름다운 분으로 여길 때 비로소 인간은 자신에게서 벗어나 다른 이들을 섬기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주님의 아름다움을 깨달은 그리스도인은 좋은 평판을 얻으려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좀 더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 가난한 이를 섬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기쁨을 드리는 일이기에 기꺼이 나설 뿐이며,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흡족하게 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이다.[15]이러한 자세는 구제를 하면서 사람들의 반응이나 결과에 좌절하지 않게 우리를 도와준다. 결국 교회가 자기중심의 사고방식을 떨쳐 버리고 정의로워지라면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것에 먼저이다. 복음은 하나님이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그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나라의 샬롬이라는 이 땅의 번영으로까지 이어지게 한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을 많이 한다. 정말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일이 있으려면 반드시 정의 사역이 동반되어야 한다. 사도행전은 초대교회의 모습을 이렇게 요약한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사도행전 4:32-35)복음이 충만했던 초대교회의 모습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문장은 “그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행 4:34)라는 말이다. 그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는 이유는 모두 개인의 만족이 아닌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위해 살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이웃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주는 관대함과 복음이 주는 아름다움이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정의 사역은 복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열매이다. 복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건강한 공동체의 자연스러운 삶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땅에 여전히 남아 있는 빈곤의 문제는 가난의 문제가 아니라 정의의 문제이다. 주1. 팀 켈러, 여리고 가는 길, 45.2. 팀 켈러, 센터처치, 72.3. 팀 켈러, 정의란 무엇인가, 42.4. 같은 책, 34.5. 같은 책, 36.6. 팀 켈러, 오늘을 사는 잠언, 42.7. 정의란 무엇인가, 41.8. 여리고 가는 길, 84.9. 정의란 무엇인가, 116. 10. 정의란 무엇인가, 12011. 정의란 무엇인가, 117. 12. 정의란 무엇인가, 171-173. 13. 센터처치, 683. 14. 같은 책, 68. 15. 정의란 무엇인가, 170.
하나님이 기뻐하시니
by Sam Crabtree
2023-07-04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하나님이 자기 자신 안에서 가장 만족한 이유를 알 때,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가장 만족할 수 있다. 세상이 엉망진창이라면(사실 그렇다), 또 이 난장판의 책임자가 하나님이라면(사실 그렇다), 이성적인 사람이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 정말로 이 모든 일에 궁극적인 책임이 하나님에게 있다면, 어떻게 그를 신뢰하고 또 그로 인해서 기뻐할 수 있을까? 여러 가지 대답이 떠오른다. 하나님으로 인해서 내가 느끼는 만족의 근원은 여러 곳이다. •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의 변함없는 사랑.• 그가 멀리 있는 대신 내게 가까이 다가오신다.• 나의 슬픔과 아픔을 개인적으로 알고 계신다. 모든 면에서 나와 같은 시험을 받으셨으나 죄는 없으시다. • 아침마다 새로운 긍휼로 심판을 이기시고 나와 같은 죄인에게 내려질 진노를 거두신다. • 모든 약속을 이행할 수 있는 그의 능력과 의지, 하등의 약속 받을 자격이 없는 나인데도 불구하고 즐겁게 약속을 주시는 그의 마음. 지금까지 열거한 내용을 바탕으로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누리라고 한다면 실로 형언할 수 없이 달콤한 이유가 되겠지만, 조금 전 살펴본 첫 문장에는 이런 내용이 전혀 들어있지 않다. 한 문장으로 우주를 바라보기수년 전에 이미 나는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 보는 법을 배웠다. 즉 그분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모든 일을 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행복은 나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한 문장을 제대로 읽을 때까지는 말이다. 물론 삼십 년 전에도 나는 그 문장을 읽었고, 그 이후로 성경은 내게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 안에서 가장 만족하는 이유를 알 때,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가장 만족할 수 있다. (존 파이퍼, 하나님의 기쁨)이게 과연 사실일까? 내가 그동안 믿었던 하나님, 그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을까? 그리고 그냥 기쁘신 게 아니라 가장 기쁘다고? 내가 막 읽은 것과 비슷한 문장은 “기쁨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좀 더 진지하게 던지도록 만든다. 정신 못 차릴 정도로 어지러운 게 기쁨이 아니다. 하나님은 술에, 마약에 취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기쁨까지도 포함하는 기쁨은 바람직한 웰빙이고 적절함에서 만족하는 기쁨이다. 그리고 순결함, 더럽지 않음, 흠 없음, 오염되지 않음, 바래지 않음, 제한 없음, 그리고 억누를 수 없는 즐거움을 추구함으로 누리는 기쁨이다. 파이퍼의 주장처럼 하나님에 대한 나의 만족이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만족에 달려 있다면,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가?”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없을 것이다. 이 문장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탐구하게 함으로써 성경 읽는 방식뿐 아니라 우주를 관찰하는 방식까지도 바꿔놓았다. 우주에는 관찰할 것이 많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많이 있고, 하나님의 기쁨은 그분 안에서 내가 누리는 만족의 원동력이 된다.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가?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기쁨을 보여준다. 아래에 열거한 건 단지 몇 가지 보기일 뿐이다. • 공의를 기뻐하신다(잠언 11:1).• 정직한 자의 기도를 기뻐하신다(잠언 15:8).•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기뻐하신다(시편 147:11).• 백성을 택하기를 기뻐하신다(신명기 10:14-15).• 그가 행하시는 모든 일을 기뻐하신다(시편 115:9).• 자기 아들을 기뻐하신다(마태복음 17:5).최고로 가치 있는 것을 가장 가치 있게 평가하는 것은 가장 합리적이다. 하나님은 이 점에서 완벽하게 합리적이다. 그는 또한 최고로 가치 있다. 따라서 자신을 최고로 평가하는 하나님은 완벽하게 합리적이다(그는 항상 합리적이다). 하나님이 나를 만족시키는 이유 중 하나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을 가장 가치 있게 평가함으로써 완벽하게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최고의 가치가 없는 것을 최고로 평가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그게 바로 우상숭배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상 숭배자가 아니다. 또한 미치지도 않았다. 헨리 스쿠걸은 다음과 같이 유명한 말을 남겼다. “한 영혼의 가치와 탁월함은 사랑하는 대상이 무엇인지를 통해서 측정할 수 있다.”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는 대상, 즉 자기 자신은 가장 가치 있다. 이 모든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다음 질문을 던지게 한다. “어떤 것을 다른 것보다 더 가치 있게 만드는 요인은 무엇인가? 가장 가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깊은 곳에서 우리는 이미 좋은 답을 알고 있다. 견고함과 변하지 않는 내구성을 가진 것, 증발하지 않는 것, 통제할 수 없는 요인과 힘에 굴복하지 않고 모두를 이기는 것, 결코 모순되지 않는 것, 실질적이고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 다른 모두를 파생시키는 것, 매우 희귀해서 어디에서도 유사품을 찾을 수 없는 것, 상황과 관계없이 언제나 심오하고 결정적으로 유용한 것, 그리고 끝없이 스스로를 다시 채우는 것이 가치 있다. 하나님은 이처럼 귀하고 영광스럽다. 하나님은 가장 영광스럽기에 가장 기쁘시다. 자신의 영광 안에서 그는 가장 기쁘시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면전능한 하나님이 불평만 한다면? 유명한 기도,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나님은 선하시다”가 “하나님은 위대하시지만 선하시지는 않다. 그러니까 조심하는 게 좋을걸”로 바뀐다면 어떻게 될까? 전능한 힘을 사용하여 그는 언제라도 우리 모두를 가루로 만들어 날려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놀라운 분이기에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 투덜거리거나 화를 내기보다는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그의 가장 높고 깊은 기쁨은 자신이 하나님이시라는 데에 있으며, 따라서 그는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을 기뻐하신다. 잘못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 결코 실수가 없기에, 하나님은 언제나 일을 마치고는 한발 물러서서 이렇게 말하실 수 있다. “정말 좋다. 참 좋다. 이렇게 훌륭한 일을 행하는 나 자신으로 인해 당연한 말 같지만 참으로 행복하다.” 심지어 그의 진노조차도 결국에는 그를 기쁘시게 한다. 그 결과 그분의 모든 일은 궁극적으로 완전한 공의를 이루며 그를 영화롭게 만든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기쁨이 내게 무슨 의미일까? 무한히 지혜로우시고 변함없으시며 항상 기뻐하시는 하나님은 결코 자신이 한 일을 후회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나는 그가 행하신 일을 보면서 아쉬워하지 않아야 한다. 대신 그가 하시는 모든 일이 예외 없이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선을 위한 것임을 믿어야 한다. 믿는 데서 그치지 말고, 그 이상으로 감사하고, 사랑하고, 높이고, 또 즐거워해야 한다. 하나님이 자신으로 인해 기뻐하듯, 나도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로 인해서 또 그가 행하신 일들로 인해서 기뻐한다. 그의 기쁨은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일차적이다. 하나님이 자신 때문에 기뻐신 것처럼, 나도 매일 하나님 때문에 더 기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엉망진창 속 하나님의 기쁨길고 더운 날을 끝낸 농부가 어떻게 쟁기질로 다 파헤친 잔디를 보면서 만족할 수 있을까? 그 밭은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지금 당장은 엉망진창처럼 보이는 밭이지만, 농부는 앞으로 다가올 영광스러운 수확을 기대하며 쟁기질을 즐긴다.우리 부부는 자식 둘을 먼저 떠나보냈다. 당신은 실패했다며 하나님을 향해 주먹을 흔드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아이들, 우리 부부와 완전히 관계를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오산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끝내지 않았다. 결코 그런 일은 없다.나는 중학교 딸과 함께 도예 수업을 들었다. 작업실과 옷을 먼지투성이 진흙탕으로 만들어가면 몇 시간이나 프로젝트에 열중했다. 이 모든 수고에 어떻게 만족할 수 있을까? 아직 가마에서 나오지 않았지만, 우리의 수고가 지금 매력적이고 유용한 작품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된다. 하나님은 아직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기뻐하신다. 경작 중인 들판, 육체의 질병, 완전히 침수된 행성, 그리고 이 부서지고 신음하는 우주는 지금도 영광스러운 결과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통해 헤아릴 수 없는 선을 이루시기에,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만족하신다. 결코 어깨를 으쓱하며, “더 잘할 수도 있었는데”라고 중얼거리는 법이 없으시다. 그의 기쁨과 나의 존재하나님이 하나님이기에, 또 자신이 하는 일로 인해 기뻐하신다는 사실이 내게 가져다준 변화는 무엇일까? 하나님의 기쁨은 인간이 만든 신들과 하나님을 구별시킨다. 그런 신은 인간을 닮아서 하나 같이 괴팍하고 변덕스럽다. 제우스의 변덕스럽고 잔인한 벼락부터 예측할 수 없는 포세이돈의 분노, 트로이 전쟁 때 인신 제물을 요구하는 아르테미스, 오늘날 유행하는 취소 문화 속에서 낙태를 조장하는 자기신격화한 도덕 경찰 닮은 신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만든 신들은 기뻐 만족하시는 하나님과 너무 다르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그는 영원한 즐거움을 확실하게 약속하신다. 하나님의 기쁨은 모든 역사에 목적의식을 불어넣었다. 기쁘신 하나님은 단 한 번의 역사도 허투루 낭비하지 않으신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그를 사랑하는 자들의 선을 이룬다. 이 사실은 나로 하여금 현실 이해의 방식을 바꾸도록 만들었다.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통해서 하나님은 나를 좋은 곳, 아주 좋은 곳으로 데려가신다. 하나님의 기쁨은 나의 성경 읽는 방식도 바꾸었다.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작품에 대한 그의 기쁨은 행과 행간 곳곳에 들어있다. 삶을 바꾸는 하나님의 기쁨은 후회가 없는, 일종의 깊은 기쁨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후회하신다고 말할 때(예를 들어, 창세기 6:6과 사무엘상 15:10), 그것은 축소된 영광이라는 슬픈 현실에 대한 한탄의 의미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할 것이다. 왜일까? 하나님의 모든 행동은 결국 그의 아들에게 최대의 영광을, 그의 백성에게 최대의 즐거움을 가져다주려는 그의 깊은 계획에 따라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으로 인해서 기쁘시다. 물론 그건 나도 마찬가지이다. 원제: What If God Were Happy?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하나님의기쁨
하나님의만족
팀 켈러 이후 기독교 변증의 과제는 무엇인가?
by 김선일 ·신국원
2023-07-03
심플리 미셔널Simply Missional탈교회화, 비종교화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선교 과제로서 복음을 새롭게 제시합니다. 기독교의 변증 유산으로부터 오늘을 위한 복음 변증의 지혜를 발굴하고, 현대 한국의 문화적 표현들과 복음의 대면이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리디머 교회 설립자이자 전 세계에 복음적 도시교회 운동을 일으킨 팀 켈러 목사가 주님의 품으로 떠나고 한 달이 지났다. 그러나 그가 제기한 21세기 문화에서 복음변증의 과제는 한국 교회에도 중요한 사명으로 다가온다. 이에 기독교 세계관과 문화신학의 권위자인 신국원 교수(웨신대 초빙교수)와 복음전도와 회심 연구의 전문가인 김선일 교수(웨신대 교수)가 팀 켈러 이후 한국 기독교 변증의 과제와 방향을 주제로 대담했다. 이 대담은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총장 정인찬) 주최로 6월 26일에 경기도 성남시의 공유공간인 분당살롱에서 진행되었다. 김선일: 오늘 이 귀한 자리에 한국의 대표적인 개혁주의 문화신학자이자 기독교세계관 학자인 신국원 교수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신 교수님은 저와 함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에서 선교와 문화를 강의하고 계십니다. 신국원: 이 자리에 와 주신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의 형제자매님들, 그리고 공부하는 목회자들의 모임인 오르도토매오 소속 목사님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김: 오늘 주제가 팀 켈러 이후 기독교 변증의 과제입니다. 사실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주제인데요. 먼저 팀 켈러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잠깐 살펴볼까요? 그분은 미국의 고든콘웰신학교에서 목회학석사(M. Div.)를 하셨고,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목회학박사(D. Min,)를 마치셨습니다. 그리고 1981년에 뉴욕에서 리디머교회를 설립하였고 2017년에 은퇴하셨습니다. 은퇴 이후에는 복음과 도시 사역 지원 단체인 City to City에 전념하시는 줄 알았는데, 돌연 2019년 췌장암을 앓고 있음을 알리셨고, 지난 5월 19일에 돌아가셨습니다. 신: 팀 켈러가 나온 대학이 버크넬(Bucknell)이라고 펜실베니아 주에 있는 작은 리버럴아츠 컬리지인데, 그 학교가 고전을 섭렵하도록 철저하게 교육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팀 켈러도 이미 광범위한 인문학적 소양을 축적하고 신학교육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김: 켈러에게 영향을 준 인물들도 살펴볼까요? 고전적인 인물들로는 조나단 에드워즈, C. S. 루이스, 프란시스 쉐퍼, 레슬리 뉴비긴 등이 그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의 저술이나 강연에도 반영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동시대에 그와 교류하면서 영향을 준 인물들도 있는데요. 도시선교로 유명한 하비 칸, 복음주의 영성신학의 책을 쓴 리처드 러블리스, 그리스도 중심설교에 관한 책을 쓴 에드먼드 클라우니 등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 그중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은 하비 칸일 것입니다. 하비 칸의 대표작 정의를 행하고 은혜를 설교하라(Evagelism: Doing Justice and Preaching Grace)는 복음전도와 사회정의를 통합시킨 유명한 책이지요. 오늘 주제가 하비 칸이 아니지만 참고로 하비 칸이 한국 선교를 하면서 굉장한 도전을 받은 것은 서구의 정통신학 위주 사상에서 1970년대 한국 용주골에서 기지촌 여성들을 위한 사역을 하면서 큰 도전을 받은 것입니다. 하비 칸은 그들에게 설교하면서 “한 주일 동안 열심히 사세요”라고 말하며 돌아서는 순간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지?’라는 고민을 했다고 합니다. 그 후 예수님의 삶을 정말 깊이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고민이 중첩되다가 결국 “I Change!” 즉 자신이 변해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되지요. 그 후 미국으로 돌아가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변증학 교수가 된 이후에 도시 선교에 큰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팀 켈러에게 영향을 준 하비 칸에게는 필라델피아(웨스트민스터신학교 소재지)와 뉴욕(리디머교회 소재지) 이전에 서울이 있었고, 서울 이전에는 의정부, 동두천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팀 켈러가 말하는 도시 목회는 세계 최대의 도시인 뉴욕만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모인 그곳에서 어떻게 삶이 녹아있는 목회를 어떻게 할 것인가의 결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김: 최근까지 한국 교계에서도 팀 켈러에 대한 추모 열기가 많았습니다. 전반적으로는 긍정적 평가가 많은 가운데 일부에서는 비판적 시각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가 지성적이고 모범적인 목회자였지만 서구의 보수적 개혁주의 한계를 못 벗어났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신: 저도 그러한 비판을 본 적이 있는데 보기 나름인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현재 있는 곳에서 성실하게 내 눈앞에 있는 분들을 잘 섬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켈러라고 해서 생전 알지도 못하는 아프리카나, 미얀마 산골에서도 통하는 얘기를 해야 할 필요는 없지요. 그러한 비판은 일반적으로 지성인들이 제기할 수 있는 비판이긴 해요. 하지만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반 맨해튼의 중산층 이상 사람들에게 그들의 성향에 맞게 복음을 전한 것이 비판받을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나머지는 독자의 몫이에요. 자기가 뉴욕 사람이 아니면 잊어버리면 되는 거고요. 그의 책들이 범용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일리 있는 비판이긴 하지만 저는 오히려 칭찬같이 들립니다. 김: 팀 켈러의 사상 중에 또 하나 인기 있으면서 논란이 된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그는 포스트모던시대에 다원주의와 상대주의적인 가치관을 지닌 이들에게 죄를 우상숭배로 설명했습니다. 그의 책 내가 만든 신(Counterfeit Gods)에 잘 나오는데요. ‘우상’(idols)이라는 말로 인간의 문제를 설명한 이는 네덜란드 자유대학교의 철학자 하웃즈바르트입니다. 팀 켈러도 하웃즈바르트의 현대 우상 이데올로기(Idols of Our Time)에서 착상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신 교수님은 자유대학에서 공부하셨는데 하웃즈바르트는 어떤 분인가요? 신: 하웃즈바르트는 원래 경제학자이시고 아직도 생존해 계십니다. 심지어 제가 박사 논문 디펜스하러 들어갈 때 저에게 메모를 건네시면서 격려하셔서 제가 감동받았어요. 당시 제 논문이 자유대학교 안에서 좀 논란이 돼서 여러 가지로 힘든 상황이었거든요. 이분의 키워드가 “우상”인데 켈러가 인용한 개인적인 우상이 아니고 민족주의, 이념, 혁명, 자본주의의 번영과 같은 우상을 말합니다. 팀 켈러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민해야 하는 죄의 의미의 폭을 넓히기 위해 이 우상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하는 문화적 가치. 세계관. 거기에 깔린 치명적인 악과 독이 우상이라는 거지요. 이 시대의 시대정신을 좌우하고 결국 인간을 타락과 멸망으로 이끌어간다는 것에 대한 경각심으로 의도적으로 쓴 표현인 것 같습니다. 맨해튼에 와 있는 사람들의 상황과 쉽게 연관 지을 수 있는 말로 접근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 하나님 백성의 선교를 쓴 크리스토퍼 라이트도 구약과 신약의 선교적 내러티브에서 우상숭배의 문제를 일관되게 지적하던데요. 오늘날 우리가 “우상”이라고 하면 다소 미신적인 뉘앙스여서 나와는 무관한 것으로 취급하기 쉬운데, 굉장히 실제적으로 우리 삶에 영향을 주는 개념인 것 같습니다. 팀 켈러의 기독교 변증에서 중요한 선행 작업이 문화 서사(cultural narrative)를 발견하는 것이다. 우상숭배가 현대인의 행복을 위한 집착이나 중독이라고 한다면, 우상숭배가 세련된 형태의 공통적, 객관적 가치관이 된 것이 문화 서사가 아닐까 싶은데,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신: 문화적 서사는 세계관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안경처럼 우리가 쓰고 있는 것을 의식하지 않지만, 그것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보는 겁니다. 어떤 색깔의 안경이냐에 따라 다릅니다. 그것을 팀 켈러는 문화적 서사라고 표현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문화나 유행을 보면 그것의 뿌리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강남스타일’과 같은 노래는 강력한 쾌락주의적 문화 서사를 담고 있습니다. 요즘 K-Culture가 전 세계적으로 맹위를 떨치고 있는데, 한국이 만드는 문화적 서사도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김: 말씀하신 대로 K-Culture, K-Pop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데, 그걸 교회에서 활용하는 것에는 유의해야 할 점이 없을까요?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쾌락주의 서사가 깔려 있다면 은근히 그러한 세속적 가치가 스며들 수 있을 텐데요. 교회에서 아무 필터 없이 대중문화를 가지고 와서 소통의 도구로 사용하는 경우는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신: 제 큰딸이 전에 베트남 오지에 선교하러 갔습니다. 그곳에서 저한테 소녀시대의 영상을 보내달라는 거예요. 거기에 있는 아이들이 소녀시대를 너무 좋아해서 떼창으로 노래를 불렀다고 해요. 문화 서사를 교회 밖 사람들과 하나의 연결고리로 쓰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복음성가나 CCM 역시 세속음악을 차용한 것입니다. 우리가 인위적으로 여기까지가 기독교적이고, 여기서부터는 비기독교적이라고 경계를 짓는 것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하지만 껍데기는 섞을 수 있는데 내용까지 섞어 버리면 더 큰 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굉장히 민감하게 접근해야 합니다.김: 자, 이제 팀 켈러의 기독교 변증서들을 볼까요? 대표적으로,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The Reason for God)와 팀 켈러의 답이 되는 기독교(Making Sense of God)를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말하다를 읽으면서 C. S. 루이스가 생각났고, 답이 되는 기독교를 읽으면서는 레슬리 뉴비긴이 떠올랐습니다. 신: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는 켈러의 최고 걸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나요. 이 책이 정말 변증 서적인 이유가 의도적으로 기독교 출판사에서 출간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상당히 오랜 기간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였어요. 이 책은 회의주의 시대에 종교적 관심은 있으나 삶의 의미를 상실해서 공허해하는, 성공한 젊은 층이 대상이었습니다. 현재 한국도 비슷한 상황에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회의주의에 빠져있어요. 이들보다 더 중요한 독자는 기독교 배경에서 자랐고, 한때 믿었다가 지금은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저도 이런 책을 쓸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소원이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읽힐 수 있는 책이 나오면 좋겠습니다. 김: 저는 개인적으로 답이 되는 기독교를 재밌게 읽었습니다.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가 고전적인 변증의 주제들을 다루고, 기독교 변증의 토대가 되는 내용이라고 한다면 답이 되는 기독교<답이 되는 기독교>는 가장 최근의 인식론과 시대정신을 정면으로 다루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켈러가 이 책에서 “의미는 지어내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라는 말을 하는데, 여기서 ‘의미를 지어낸다’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후기구조주의나 사회구성이론이 현대인의 주요 가치관이 되었음을 말하거든요. 그에 대한 기독교적 답변으로 켈러는 은혜를 제안합니다. 즉, 인생의 의미는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우리가 발견할 때 진정한 의미와 만날 수 있습니다. 팀 켈러의 이러한 사상적 성실성과 순발력이 놀랍습니다. 신: 답이 되는 기독교는 하나님을 말하다에 비해서 좀 더 적극적인 변증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주 공격적인 변론을 한다는 점에서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스타일입니다. 세속의 사상들이 왜 무너질 수밖에 없는가? ‘종교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당신이 종교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들도 종교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칼뱅이 말한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 낸 우상, 결국 하나님을 대신하는 우상입니다. 그런 질문 끝에 기독교는 왜 답이 되는가를 제시합니다. 번역이 참 잘 된 책인 것 같습니다. 김: 답이 되는 기독교에서 현대인들의 가치관을 다룰 때 알레스데어 매킨타이어의 ‘정서주의’(emotivism)나 찰스 테일러의 세속시대(a secular age)와 같은 개념이 아주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습니다. 자유와 선택이라는 현대인의 신화에 대해서 켈러는 유한하고 제한된 조물 됨의 미덕을 해법으로 말하고, 자율적 자아와 자기용납을 최고선으로 여기는 정체성주의에 대해서 십자가의 겸손과 진정한 자신감이라는 해법을 내놓습니다. 근거를 잃은 세속적 낙관주의에 대해서는 기독교 안에 더 깊은 희망이 있다고 말합니다. 신: 아까 말씀하신 사회구성주의, 즉 ‘진리는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고 우리가 만든 것’이라는 사상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 진리이고 선이고 아름다움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결국에 이 사회는 난장판이 될 위험이 있고, 현실은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게 됩니다. 이 세상에 객관적 질서가 없다면, 완전 무질서와 상대주의가 됩니다. 결국 회의주의가 팽배하고, 회의주의는 허무주의를 낳게 되지요. 그래서 답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정서주의(emotivism)도 정서라기보다는 자기가 옳고, 자기 욕구에 충실하게 살자는 것이지요.김: 예, 매킨타이어가 말하는 emotivism이 번역하기 쉽지 않은 것 같아요.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자기 기분이나 마음에 좋은 대로 살면 된다는 풍조로 보입니다. 찰스 테일러가 말한 ‘자기 진실성’(self-authenticity)도 그와 비슷한 말인 것 같습니다.신: 제가 이번 학기에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의 학생들과 레슬리 뉴비긴의 The Other Side of 1984라는 책을 같이 읽었는데요. 뉴비긴이 인도에서 영국으로 돌아온 다음 겪은 가장 큰 어려움은 기독교적으로 볼 때 영국 사회가 절망적이라는 것, 희망의 소멸이었습니다. 켈러가 사역하던 상황은 뉴비긴의 때보다 훨씬 더 나쁜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목회자 입장에서 굉장히 안타깝게 설교하면서 답이 되는 기독교를 얘기한 것입니다. 하지만 희망이 없지 않습니다! 저는 이게 너무너무 중요하다고 본다. 이 <서구 기독교의 위기>를 목회자들께서 꼭 읽었으면 좋겠어요. 이 책은 곧 성경의 메시지인 우리들의 소망은 현실을 보는 눈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성경의 역사에 닿아있는 시선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메시지 속에서 소망을 얘기해야 합니다. 김: 뉴비긴의 깊은 희망이라는 개념을 들으니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이 떠오르네요. 이사야가 앗수르의 위협에 처한 이스라엘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이방 종교 어디에 여호와 하나님처럼 역사를 주관하며 설명하는 신이 있느냐고 계속해서 물어보지요. 처음이자 마지막이신 이는 하나님 외에는 없다는 사상이 이사야가 제시하는 강력한 희망의 증거였던 것 같습니다. 앞서 말한 책들 외에 기독교 변증에 도움이 되는 팀 켈러의 다른 책은 뭐가 있을까요?신: 그 외에도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도 역시 변증적 성격의 책입니다. 고통, 악에 대한 문제를 다루는데, 이는 철학과 종교에서 제일 중요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기독교를 무시하거나 내 삶과 별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뉴욕의 세속적인 지성인들에게 팀 켈러의 이러한 책이나 중요한 현대 사상가들이 인용되는 그의 설교는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기독교가 정말 자기들의 인생에 답이 되는지를 궁금하게 하고 탐구하게 한 것입니다. 김: 지금까지 팀 켈러의 변증적 유산에 대해서 같이 이야기 나눴습니다. 마지막으로 사역자들을 위해서 한 말씀 해주실까요?신: 팀 켈러는 굉장히 학자적인 목회자였습니다. 대단히 광범위한 주제의 독서가 그의 설교와 변증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정말로 본받아야 할 부분입니다. 과거처럼 적당히 목회해도 된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요즘 한국의 젊은 목회자들 가운데 이처럼 깊고 넓은 독서를 기반으로 해서 설교를 준비하고 목회를 하시는 분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목회를 준비하시는 분들은 대충하면 이러한 경쟁자들, 아니 동역자들에게 분명히 밀릴 것 같습니다. 충실한 독서를 통해서 시대정신을 이해하고, 현장에서는 온유와 겸손으로 진실하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무례한 기독교나 소심한 기독교가 아닌 적절한 기독교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기독교 복음에 대한 담대한 확신을 어떻게 적절하게 전할지 고민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팀 켈러에게서 배울 점이기도 합니다.
김선일의 심플리 미셔널
by 김선일
2023-07-03
심플리 미셔널Simply Missional 탈교회화, 비종교화의 길에 들어선 한국 사회에서 선교 과제로서 복음을 새롭게 제시합니다. 기독교의 변증 유산으로부터 오늘을 위한 복음 변증의 지혜를 발굴하고, 현대 한국의 문화 표현들과 복음의 대면이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1. 신에 관한 소문2. C. S. 루이스에게 배우는 정감적 전도3. 프란시스 쉐퍼와 합일적 복음제시4. 뉴비긴에게서 배우는 전도의 자신감 5. 팀 켈러의 깊고 단순한 복음전도Special 왜 이단에 끌리는가?: 일탈적 전도에 관하여6. ‘공동체가’ 전도한다는 것7. 자기 정체성의 시대와 ‘균열적’ 전도8. 소명을 깨우는 전도: 좁은 의미의 ‘영혼구원’을 넘어서9. 우리의 전도가 너무 작다: 창조세계 돌봄으로서의 전도10. 다음세대 전도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Special 팀 켈러의 질문에 답함 Special 팀 켈러 이후 기독교 변증의 과제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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