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Edition
한국어
UNITED STATES
AFRICA
عربي
AUSTRALIA
BRASIL
CANADA
正體中文
简体中文
ESPAÑOL
فارسی
FRANÇAIS
ITALIA
NEDERLANDS
SHQIP
SLOVENSKÝ
후원
하기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시리즈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리뷰
서평
새로 나온 책
뉴시티교리문답
뉴스
국내
국제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검색
사이트 내 전체검색
검색어 필수
검색
추천 검색어
마음
여성
배움
성경
신앙과일
크리스찬
전체메뉴
01
ARTICLES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02
VIDEOS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03
SERIES
시리즈
04
CONTACT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05
QT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06
REVIEWS
도서
서평
새로 나온 책
07
The New City Catechism
뉴시티교리문답
08
NEWS
뉴스
국내
국제
09
ABOUT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10
GIVE
후원
ARTICLES
ARTICELS
연도별
SELECT CONCAT(YEAR(wr_4)) ym FROM g5_write_articles where wr_4 <= '2025' GROUP BY ym order by wr_4 desc
2024
2023
2022
2021
2020
2019
2018
날짜순
조회순
이름순
디모데전서 2:12은 정확히 무엇을 가르치는가?
by Robert W. Yarbrough
2023-08-03
편집자 주: 교회 안에서 자주 오해되는 성 역할이라는 주제를 기사 하나로 제대로 다루는 건 불가능합니다. 유익한 “성경 전체”의 설명이 궁금하다면, “아름다운 차이: (성경 전체에 걸친) 남성과 여성의 상보성”을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여자가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을 나는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조용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2:12을 지역 교회에 적용하기란 정말 까다롭다. 바울이 허락하지 않는 것은 정확히 무엇일까?물론 바울이 디모데전서를 쓰지 않았다고 보는 사람들은 이 말에 사도의 권위를 부여하지 않는다. 또 이 말이 갈라디아서 3:28(“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과 모순된다는 점을 지적하며, 교회 봉사와 성별은 무관하다고 단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남성과 여성의 상보성을 견지하는 교회(complementarian church), 즉 자격을 갖춘 남자에게만 목사 안수를 주는 교회에 출석하는 경건한 여성이 디모데전서 2:12을 보고서 이런 궁금증을 갖는다고 가정해 보자.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이 나에게 허락되지 않았다는 건 도대체 무슨 뜻이지?” 그녀는 과연 어떤 결론을 무엇을 근거로 내려야 할까? 이 것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여자”(10절)가 배워야 하는 것들(11절)의 맥락에서 좋은 질문이다. 이 질문에는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실천에 옮긴다는 뜻이 들어 있다. 내가 제안하고 싶은 건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바울이 오랜 동료인 디모데에게 목사의 중요한 책임들을 요약하는 것으로 보자는 것이다: (1) 예수님이 제자들을 양육한 것처럼, 충실한 성경 해석을 통한 가르침, (2) 예수님이 추종자들을 돌보고 또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이 모방한 것처럼, 자비로운 감독과 목양(예: 벧전 5:1-5).디모데전서 2:12의 적용을 간략하게 다루는 정도로는 전체 문맥에 비춰서 바라봐야 하는 이 구절에 대한 완전한 설명에 이를 수 없다. 나도 이 주제를 다루었고(‘The Letters to Timothy and Titus’ 137-89), 이 사이트에서도 평등주의에 기반하여 비판하는 사람들의 글을 포함해서 여러 관련 내용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설명조차도 위에서 제기된 질문에 대한 만족스러운 대답이 되지 못할 수 있다. 성경의 난해 구절을 그 구절만으로 완전하게 설명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한 구절이 주장하는 바는 그 구절에 빛을 비추는 구절들로 이루어진 더 큰 집합의 일부이다. 성경 전체라는 맥락에서 우리가 디모데전서 2:12에서 만나는 것은 경건한 여인에게 주는 교훈이다. 경건한 여인, 곧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복음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데 헌신하는 여인이다. 그녀에게 추구하라고, 그리고 피하라고 권하는 몇 가지가 있다.경건한 여인이 추구해야 하는 것“추구”라는 측면에서 다음 것들이 있다. 1. 여성은 남성과 나란히 완전한 존엄성을 확보해야 한다(창 1:27).2. 여성은 남자의 특징을 보완하고(창 2:18) 출산을 통해 인류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창 1:28) 성적 특징을 확증해야 한다. 3. 여성은 여자와 남자 모두에게 징벌적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구속적) 영향을 미치는 죄가 세상에 들어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창 3:14-19).4. 여성은 개인적 죄와 공동의 죄를 의식하면서 엘리사벳과 마리아, 여선지자 안나와 같은 믿음의 선조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오심에 담긴 기쁜 소식을 보아야 한다(눅 1-2장).5. 죄를 회개하고 복음을 믿은 후(막 1:15), 여성은 예수님과 열두 제자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고(눅 8:3),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목격하고(막 15:40-41), 제자들이 믿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부활에 대해 처음으로 간증하고(눅 24:10-11), 그 이후로도 초대교회를 헌신적으로 섬긴 많은 다른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열정적으로 추종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했다. (예를 들어, 로마서 16장은 뵈베, 브리스가, 마리아, 루포의 어머니, 드루배나, 드루보사, 유니아 같은 이름으로 채워져 있다.)신약 전체에서 성도에게 확신을 주고 그들을 인도하는 데에 대한 통찰은 결코 여자로부터 고립된 남자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님과 바울과 같은 지도자들은 여성들과 함께 땀을 흘렸다. 여성의 은사를 확인했으며, 그 은사를 활용해서 교회와 세상에서 복음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구조를 세워나갔다. 6. 마지막으로, 여성의 위치는 열두 제자를 오로지 남자로만 뽑은 예수님의 선택, 그리고 오로지 경건한 남자만 목회 교사와 감독의 위치에 임명하는 사도적 정책(신약 전체에 걸쳐서 통일되게 진술되는 사실) 속에 반영된 회중 질서 속에서 확인해야 한다. 이 점은 우리를 다시 디모데전서 2:12로 돌아가게 한다. 경건한 여인(2:10)은 예배 현장에서 배움에 헌신하라는 권면을 받았다(2:11). 그녀에게는 목회 교육(“가르치다”)과 감독(“권위를 행사하다”)의 역할이 부여되지 않는다. 그러나 경건한 여인과 아내라면 자연스럽게 목양에 참여하는 자연스러운 방법이 생기기 마련이다. 아니, 최소한 그래야 한다. 안수받은 남자들은 교인들을 향한 특정한 책임을 맡으며 교인 가운데 있는 여인들의 지혜로부터 유익을 얻는다. 목회자와 여성 사이에 건전한 관계가 있다면, 목회자가 자매들의 관심과 의견을 그들의 기도와 봉사와 지도력 측정에 반영할 거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들은 분명히 그 모든 내용을 마음에 간직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운영되지 않는다면, 교회에는 기능 장애가 발생하고 그에 따른 조정이 필요하다. 더 나은 목회 관행과 영적 갱신, 남편과 아내가 결혼 생활에서 경건한 역동성을 추구하도록 준비시키는 것, 교회 전체에서 남성과 여성 사이의 앙금을 해소하고 유대를 강화하는 등의 변화가 이뤄져야 한다. 경건한 여인이 피해야 하는 것 디모데전서 2:12은 경건한 여자에게 무엇을 피하라고 권고하는가? 노골적으로 말해서, 오늘날 서구 환경에서 남자에게만 주어진 특정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분개심을 피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외 없이 수행해야 하는 제자 양육의 명령에는 여성도 최선을 다해서 충성해야 하지만(마 28:19-20), 성경을 가르치고 또 권면하는 목회 교육에 해당하는 의무는 교회에서 맡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여자는 설교해서는 안 된다. 더불어서 교회의 구조와 관계없이 남자를 목회 감독해서도 안 된다. 제자 사역에 은사를 받고 부르심을 받은 여자는 (믿는 모든 여자가 다 그렇겠지만) 얼마든지 그들의 보살핌과 영향력이 필요한 다른 여자들을 찾을 수 있다. 그렇다고 이런 원칙이 교인 전체의 행정에서 여성의 지도력을 배제하는 건 아니다. 종종 전체 목회자가 전체 교인 구조라는 틀 안에서 천재성을 가진 여성 행정가의 영향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교회 행정가는 목회자가 아니다. 역할이 서로 얽혀 있을 수 있지만 병합되거나 역전되어서는 안 된다. 겹칠 수는 있으나 같지 않은 사역의 영역짧은 글에서 너무 구체적이고 포괄적인 내용을 다루기란 어렵고 또 현명하지도 않다. 교단 관행과 회중 역학은 매우 다양하며 다양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적용 범위에 따라서 주의 깊게 보완해야 할 점이 적지 않다.그러나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 사도를 거쳐 초대교회들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여성이 아닌 남성(비록 과분한 역할이기는 하나)이 목회자로 임명받은 사실을 확인한다. 여성들은 사생활에서부터 회중의 모든 활동과 이웃사랑,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협력에 이르기까지 경건한 봉사라는 측면에서 남자와 여러 영역에서 중복된다. 그러나 여자의 사명은 남성과 동일하지 않다. 개인 생활과 교회 공동체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분을 누리는 것은 무엇보다도 여성과 남성이 함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달콤한 시너지 효과에 달려있다. 여자와 남자의 상생 효과를 일으키는 목회 지도력은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모범을 따라서 상호 증진과 상호 헌신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희생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축복이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세우려는 교회에 임하시길 기도한다. 디모데전서 2:12이 교회가 나아가는 길에 선한 빛을 비추시기를 기도한다. 원제: What Exactly Does 1 Timothy 2:12 Teac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 (9) : 통합적 사역
by 고상섭
2023-08-02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팀 켈러가 그토록 사랑했던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이제 눈물이 없는 곳에서 기뻐할 팀 켈러를 생각하면 위로가 되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에겐 그가 떠난 빈자리가 너무나 크게 느껴진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인 존재로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발자취를 남겼다. 그와 그의 삶이 우리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 몇 가지를 되돌아보며 그를 기억하고자 한다. ‘균형’ 또한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의 하나이다. 그의 삶을 통해서 학자로서 삶과 목회자로서 삶의 균형을 이루었고, 또 목회 이론과 사역의 균형을 이룬 점도 빼놓을 수 없는 유산일 것이다.팀 켈러는 복음이 단순히 그리스도인들을 회심시키는 일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을 능력있게 한다고 말하면서, 복음은 말씀을 통해서 세상에 선포되는 것만이 아니라 실천과 공동체를 통해서도 선포되기 때문에 복음을 통해 교회 공동체를 세워가야 한다고 강조한다.[1] 교회 안의 각 사역은 독립적이거나 선택사항이 아니라 복음 안에서 상호의존적이어야 한다. 어떤 교회는 전도, 교회 성장에 초점을 두고, 어떤 교회는 교제와 공동체에 역점을 둔다. 또 빈곤층을 돕는 정의 사역에만 집중하는 교회도 있고, 문화와 예술을 강조하는 교회도 있다. 빈곤층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직업과 신앙을 통합하는 것”을 엘리트주의라고 여기고, 공동체, 제자훈련, 경건을 강조하는 것은 영적 천박함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복음의 본질상 이 모든 접점에 참여하는 것이 요구된다.“깊이 있는 기독교 공동체를 경험하면서 복음에 의해 변화되는 그리스도인의 수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으로 알려지는 그리스도인의 수가 모두 증가해야 한다.”[2]네 개의 사역 접점 어떤 교회도 은사와 강점의 완벽한 균형을 갖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충분한 리더십과 재정 능력을 다 갖춘 교회도 없다.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성경의 비유들에 충실한 교회란 실제적으로 어떤 것인가? 교회는 지속적으로 자신들의 강점을 인정하면서도 단점을 강화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교회 지도자들이 이루어야 하는 힘든 균형이다. 모든 것을 균형 있게 다 잘할 수 있는 교회는 없지만, 어떤 역할이라도 성경이 요구하는 전체 그림에서 지워서는 안 된다.[3]팀 켈러가 말하는 네 가지 사역 접점을 제안한다. 1) 사람들을 하나님께 연결하는 것 (전도와 예배를 통해)2) 사람들을 서로에게 연결하는 것 (공동체와 제자도를 통해)3) 사람들을 도시에 연결하는 것 (자비와 정의를 통해)4) 사람들을 문화에 연결하는 것 (신앙과 직업을 통해) 팀 켈러가 제시하는 네 가지 사역 접접의 특징은 ‘연결’이다. 또 여기서 말하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교회 공동체를 말한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기에, 결국 팀 켈러는 교회의 존재 이유를 세 가지 방향으로 설명하고 있다.[4]교회는 먼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 공동체이다. 또 교회는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 세상을 향해 사역하며 전도하는 전도 공동체이다. 또 교회는 교회 자신을 위해서 존재한다. 교회 자신을 위해서 서로 교제하고 양육과 훈련을 통해 예수님을 닮아가는 양육 공동체로 존재한다. 릭 워렌은 목적이 이끄는 교회에서 교회의 존재 목적을 다섯 가지로 설명한다. 예배, 교제, 훈련, 사역, 전도이다. 이 다섯 가지 목적도 하나님을 위한 예배, 교회를 위한 교제와 훈련, 세상을 위한 사역과 전도로 분류할 수 있다. (물론 사역은 교회 자신을 위해서도 존재한다.) 이런 교회의 존재 목적의 분류와 팀 켈러의 분류를 비교해보면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 있다. 팀 켈러의 리디머 교회는 하나님과 연결에서 예배뿐 아니라 전도를 포함시킨다. 이것은 예배를 통해 전도하는 것을 말한다. 또 세상을 향해서도 ‘도시에 연결하기’와 ‘문화에 연결하기’로 나눈다. 도시에 연결하는 것은 사역에 해당하지만, 문화에 연결하는 것은 기존 교회의 목적에는 볼 수 없었던 상황화라고 할 수 있다. 직업과 신앙을 연결해 주지 못하면, 진정한 교회로서 이 땅을 바르게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1) 사람들을 하나님께 연결 : 예배, 전도사람들을 하나님께 연결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는 바로 예배이다. 팀 켈러는 성경에 예배에 대한 규정적인 방식이 나와 있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성경, 전통, 문화를 모두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예배의 형식을 바꾸어야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오로지 시편 찬양만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는 역사적 예배의 수호자들도 있다. 이런 의견들 속에서 팀 켈러는 “사랑을 우리의 지침으로 삼는다면 안전하다”는 칼뱅의 가르침을 수용한다.[5]또 팀 켈러는 예배를 통해 비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과 동시에 신자들의 영적 성숙이 함께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원래 첫째, ‘비신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예배를 만들라’가 먼저와야 하지만 팀 켈러는 의도적으로 둘째부터 시작한다. 이것은 실수가 아니다. 이 직무는 사실 두 번째로 일어난다. 그러나 거의 모든 사람이 이것이 첫째라고 생각한다. 전도적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비신자들을 예배에 오게 하는 것이 먼저라고 믿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 순서가 맞다. 예배가 이미 전도적이지 않다면 비신자들은 예배에 오지 않는다. 비신자들이 예배에 참여하려면 평소의 설교를 듣는 성소들이 “아, 이 설교 예수님 믿지 않는 내 친구 ○○가 들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야 한다. 비신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예배는 비신자들이 ‘편안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다. 결국 비신자들이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으며 복음 앞에 나오도록 하는 것이다. 비신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예배의 목적은 그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6] ① 친숙한 어휘를 사용하라오랫동안 로마가톨릭은 모든 예배를 라틴어로 진행했다. 매우 영적인 분위기를 자아냈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지는 못했다. 오늘날도 비슷하다. 사람들의 마음을 이끌려면 그들이 친숙한 어휘를 사용해야 한다. ‘칭의’ ‘언약’ 등의 개념이 나온다면 풀어서 설명해주어야 한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람들은 진정성을 원한다. 가식으로 보이는 것을 피해야 한다. 너무 영적인 표현들을 삼가고, 대신 친숙하고 평범한 표현들을 의도적으로 선별해 사용해야 한다.[7] 문화에서 공인된 권위자를 인용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배우나 강연자나 베스트셀러 작가 등의 일반 대중이 아는 사람들 가운데서 성경과 연결되는 가르침이 있다면 사용하는 것이 좋다. 바울도 사도행전 17장에서 아레오바고의 철학자들을 전도할 때 에피메니데스의 시를 인용하여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행 17:228)라고 말한다. 또 아라토스의 말을 인용하며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고도 말한다. 철학자들이 잘 아는 사람의 인용구를 통해 바울은 진리를 더욱 밝게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했다. 청중이 그 인물을 존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교할 때 비그리스도인이 존경하는 어떤 권위자를 인용하여 대화를 펼치면 우리가 말하는 내용의 정당성을 확보하기에 좋다. 오로지 성경만으로 대화를 주도하게 되면, 상대가 완전히 설득되지 않아 이야기를 끌고 가기 어렵게 된다. ② 예배 흐름에 따라 설명을 제공하라 예배에 의미를 짧게 설명하는 말을 하면 새로운 사람들을 예배 가운데 교육을 지속할 수 있게 된다.③ 비신자들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며 환영하라정기적으로 이렇게 말하라. “여러분들 중에 이것을 믿지 않는 분들 또는 무엇을 믿는지 잘 모르겠다는 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몇 가지 반대 질문을 다루어라. 그들이 느끼는 어려움을 진지한 공감을 갖고 표현하라. ④ 수준 있는 예술을 예배에 사용하라 음악의 수준, 당신의 설교, 그리고 예배의 시각적인 미적 요소들이 특히 문화 중심지에서는 전도적 역량에 분명한 영향을 미친다. 음악적 수준이 탁월하면 사람들은 초월을 경험하기가 쉬워진다. 심미적으로 뛰어난 예술은 외부인을 안으로 끌어들인다. ⑤ 자비와 정의의 실천을 고취하라교회에 대한 대중적 인식이 추락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말뿐인 교회가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자비와 정의 사역에 참여함으로써 외부인들에게 좋은 인식을 심어주어야 한다. 전도적 예배는 실천 사역을 위한 헌금을 강조하며 그 사역들을 보고하고 증언하고 기도해야 한다. ⑥ 복음을 분명하게 볼 수 있게 성례를 시행하라세례 받을 때 개인 간증을 하는 기회를 주라. 그리고 질문에 답하도록 하라. 성찬은 보이는 복음으로 청중의 삶을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 안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⑦ 은혜의 복음을 설교하라종교적인 사람이 되는 것과 복음적인 사람이 되는 것의 차이를 분명히 하라, 복음은 단순히 구원 얻는 도구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을 성장시키는 도구이다. 결국 복음을 바르게 선포하고 적용할 때 비신자는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고 신자들은 예수님을 닮도록 성장하게 된다. 사람들을 결신으로 이끄는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고 또한 예배 후 지속적인 후속 모임으로 도움을 주기 위해서이다. 다양한 방법들을 통해 결신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이런 과정을 통해 사람들을 하나님께 연결함으로 전도와 예배를 할 수 있도록 한다. 2) 사람들을 서로에게 연결하는 것: 공동체, 제자도“사람들을 제자화하는 주된 방법은 공동체 훈련을 통해서이다. 은혜, 지혜, 그리고 성품에서 성장하는 것은 수업과 강의, 그리고 대형 예배 모임, 또는 고독을 통해서 일어나지 않는다. 성장은 깊은 관계와 공동체에서 일어난다.”[8]팀 켈러는 사람이 변화되는 제자도의 중요한 요소는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공동체의 어떤 요소들이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일까? ① 공동체와 전도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단순한 지원 그룹이 아니라 오히려 대안 사회이다.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를 통해 다른 종교들과 무신론자들이 만들어 낼 수 없는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 목표이다. 공동체는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인간은 모두 관계적 존재로 창조되었다. 그래서 “공동체는 반드시 교제의 수준을 뛰어넘어 반문화를 구현해야 한다. 복음이 아니라면 결코 함께하지 않았을 사람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연합하여 사랑하는 것을 세상이 볼 수 있어야 하며 자기를 주는 방식으로 성, 돈, 힘을 사용하는 것을 세상이 보아야 한다.”[9]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대안 사회가 되어서 ‘언덕 위의 도시’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비추어야 한다.[10] ② 공동체와 성품공동체는 성품을 만든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강의실에서 강의로 가르치시지 않으셨다. 교실이 아닌 삶을 이끄셨다. 예수님은 많은 시간을 함께하면서 진리를 토론하고 대화하고 적용하면서 배우고 실천하는 공동체를 세우셨다. 우리가 학문적인 상황에서가 아니라 소그룹과 우정 관계 속에서 가장 잘 배우고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의 강점과 재능을 긍정하고, 동등하게 중요성을 인정하고, 가시적인 애정을 통해 서로를 인정하고, 공간과 물건과 시간을 공유하고, 서로의 필요와 문제를 공유하며, 서로 신앙과 생각과 영성을 공유하고, 상호책임 관계 안에서 서로를 섬기고, 용서와 화해를 통해 섬기며,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서로의 이익을 위해 섬기는 과정을 통해 공동체 안에서 성품이 자라게 된다.[11]③ 공동체와 윤리적 행동 공동체는 우리의 윤리를 형성하며 우리의 행동을 지도하는 명시적이며 암묵적인 규칙들을 형성한다. 성경이 가르치는 윤리 명령은 개인보다 공동체에 훨씬 많이 주어지고 있다. 모세오경은 한 개인에게 준 성경이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가 하나님을 더 잘 믿는 거룩한 공동체가 되기 위해 주신 것이며 신약성경에 나오는 빌립보서, 에베소서 같은 서신서는 교회 회람용 서신이었다. 성경을 묵상할 때 개인적으로 구체적으로 적용해야 하지만 또한 공동체적 적용이 필요하다. 로마서 12:1-2의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는 말씀을 흔히 개인적인 헌신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너희 몸들을 거룩한 산 제물들로 드리라”는 공동체를 향한 말씀이다. 성경은 단순히 개인 신자들을 위한 윤리적 지침이 아니다. 사랑과 거룩의 영적 열매를 맺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설명이다. “우리는 모두 경험상 개인으로서 경건한 삶을 사는 것은 훨씬 힘든 일이다. 만일 우리가 누군가에게 책임 있는 관계에 있지 않다면 우리는 반복적으로 미끄러지고 쓰러질 것이다. … 공동체는그 자체로 믿음을 따라 일관성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붙들어 줄 수 있다.”[12]④ 공동체와 함께 하나님을 더 잘 알아감 혼자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함께 공동체 안에서 나눌 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더욱 풍성해진다. C. S. 루이스는 찰스 윌리엄스, 톨킨과 친구였지만 윌리엄스가 죽고 톨킨과 두 사람만 있었을 때는 우정을 혼자만 더 독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윌리엄스와 톨킨이 있을 때 누렸던 풍성함이 줄어들었다고 고백했다. “내 친구들 각각 안에 오직 어떤 친구만이 끄집어낼 수 있는 그런 것이 있다. 나는 나 혼자서 한 사람의 전체를 끄집어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크지 않다. … 찰스가 죽은 다음 나는 더 이상 캐롤라인의 농담에 로날드가 하는 반응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찰스가 가면서 로날드가 “내게만” 남게 되었는데, 로날드는 더 작게 남았다. 진정한 우정은 사랑을 질투하지 않는다. 두 친구는 세 번째 친구가 오길 기뻐한다. 셋은 네 번째가 오길 기뻐한다. 우리가 함께 나누는 친구의 수가 늘어날수록 우리는 각각의 친구를 덜 갖는 것이 아니라 더 갖게 된다. … 우리는 천국의 떡 되신 분을 더 많이 나눌수록 우리들은 더 많이 서로를 갖게 된다.”[13]인간은 혼자서는 하나님을 정말로 알 수 없다. 에덴동산에서 죄가 들어오기 전이지만 하나님은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을 좋지 않게 생각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며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은 인간을 통해 섬김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만끽하고 계시므로) 삼위일체의 행복을 나누시기 위해서이다.3) 사람들을 도시에 연결하는 것: 정의와 자비 사역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말씀을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 치유하고 먹이셨다. 그리스도인들은 말씀과 자비와 정의의 행동이라는 두 가지를 통해 복음을 신실하게 선포할 수 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며 동시에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물질적 필요를 채워 주어야 한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이 봉사하는 사역을 ‘디아코니아’라고 불렀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소개할 때도 자신을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7) 말씀하셨다. 팀 켈러는 “교회의 제자훈련은 반드시 멤버들이 지역을 사랑하고 신앙과 직업을 통합하며 더 정의롭고 건강한 사회와 문화를 만들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공공 영역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많이 가르치고 설교하고 강조해야 한다”고 말했다.[14]① 구제직접적인 도움을 제공하여 신체적, 물리적, 사회적 필요를 채우는 것이다.② 개발사람이나 공동체가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다. 자급할 수 있는 경제생활을 돕는 과정이다. ③ 개혁 사회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을 말한다.[15]이 세 가지는 정의와 자비 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과정이지만 제도 교회가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다. 구제와 개발에 어느 정도 도움을 줄 수 있겠지만, 개혁은 한 교회의 일이 아니라 지역이 연합해야 하는 일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각종 단체에 들어가서 지역을 위해 협회와 조직을 통해 개발에 동참하는 것이 더 지혜로운 일일 것이다. 또한 얼마나 도와야 하는가? 누구를 도와야 하는가? 언제, 어떤 조건에서 도와야 하는가? 어떤 방법으로 도와야 하는가? 쉽지 않은 문제들이다. 이런 일들에 대해 고민을 통해 각 지역교회에서 적절한 과정들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4) 사람들을 문화에 연결하는 것: 신앙과 직업의 통합 오늘날의 문화는 기독교에 호의적이지 않다. 특히 직장이라는 영역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속 문화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런 문화를 바꾸려면 문화 내러티브를 거부하며 문화에 참여하는 적극성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인들이 문화에 참여하여 탁월성, 구별성, 책임성을 갖고 직장에서 일해야 하며 그 정신과 발판을 교회가 마련해 주어야 한다. 복음은 우리 직업에 영향을 미친다. 특히 일에 대한 동기에 변화를 준다. 많은 사람이 일을 통해 자신의 중요함과 정체성을 찾는다. 그러나 복음만이 “마음을 다해 주를 섬기듯이 일할” (골 3:23) 동기를 부여한다. 또 복음은 일에 대한 개념을 변화시킨다. 일은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 사랑의 수단이다. 또한 복음은 일터에서 높은 윤리 수준을 제공하며 또 일을 하는 방식을 새롭게 하는 기초를 제공한다. 이런 복음을 수단으로 해서 교회는 사람들에게 복음과 직장을 연결해 주어서 도시 안의 문화를 변화시킬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해야 한다. ① 책임감 있게 일하기: 직업에 관련된 영적 성장 기본적으로 은혜의 수단들을 공급할 필요가 있다. 창조적인 방법으로 월간으로 직접 모이고 주중에는 온라인으로 모이는 등 다양한 방식의 영적 공급이 필요하다. 또한 도덕적 쟁점, 윤리적 난제, 유혹, 실망 등 그리스도인들이 직업에서 겪는 온갖 어려움을 다루어주어야 한다. 같은 직군별로 서로 보살피고 지지하는 그룹을 만들어 주는 것도 도움이 된다. ② 구별성을 갖고 일하기: 세계관 개발과 훈련 예수님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의 주님이시라면 직업의 영역에서 어떻게 주님의 주재권을 실현하도록 가르칠 것인가? 팀 켈러는 의도적인 학습 공동체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고 말한다. 첫째, 나이 있고 경험이 있는 그리스도인, 둘째, 젊고 이제 막 시작하는 그리스도인. 셋째, 성경, 신학에 정통한 교사들, 이 세 부류가 한 공동체를 만나서 직업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 속에 어떤 것을 수용하고 반대해야 하는지 또한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함께 고민하고 토론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③ 탁월성 있게 일하기: 멘토링 및 문화 갱신 “일반적으로 문화 창출에 협력한다는 것은 신자들끼리 모여 악한 세상을 등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심지어 비신자들과 함께 일하여서 세상을 섬기는 것이어야 한다.” 이 일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업무에서의 탁월성이다. 업무의 탁월성은 우리 신앙에 대한 신뢰성을 획득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임을 가르쳐야 한다. 우리의 일이 형편없다면 말로 하는 전도는 듣는 사람들이 우리의 신앙을 단지 경멸하게 할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주요 문화 중심 지역 속에 살면서 그들의 일을 탁월하게, 그러면서도 구별된 방식으로 한다면, 궁극적으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문화와는 다른 문화를 이루어낼 낼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위해 일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한다. 이런 종류의 공동체가 성장할 때 세상 속에서 복음의 문화를 심을 수 있게 된다. 이전의 사람들은 종교적인 행위로 구원을 추구했지만, 오늘날의 사람들은 직업적인 성공을 통해 구원에 이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복음은 이런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고 이런 문화적 내러티브를 변화시키는 원천이 된다. “남들이 애쓰고 수고해서 얻으려는 것들(구원, 자부심, 선한 양심, 평안 등)을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소유하고 있으므로 이제는 그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일하면 그만이다. 즐거이 감당하는 희생이자 자유가 보장된 제한이다. …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고 섬김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16]팀 켈러는 존 아니주와 함께 편집한 차이를 뛰어넘는 그리스도인에서 그리스도인들과 다른 문화를 가진 세상 사람들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면서 연합하여 살 수 있을까를 질문한다. 차이를 뛰어넘는 그리스도인의 원제는 ‘Uncommon Ground’이다. 신앙인과 다른 그라운드를 가진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를 묻고 있다. 팀 켈러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하면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존중하면서도 복음적 확신을 유지하며 그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질문하며,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복음이 주는 겸손과 인내, 관용과 용기를 통해 살아가라고 권면한다. 겸손은 다른 의견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무시하지 않고 존중할 수 있게 한다. 세상 사람들의 의견보다 더 뛰어난 의견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구원이 행위가 아닌 은혜로 받은 구원임을 인식할 때 더욱 겸손히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고 배울 수 있게 된다. 이런 행위가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여는 계기가 될 수 있다.인내는 경청하고 이해하고 질문하도록 권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인내심을 발휘한다고 해서 이념적 거리를 늘 넘어서지는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주의 깊은 경청과 공감적 이해, 사려 깊은 질문으로 그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한다. 관용은 우리가 공유하지 않는 믿음과 실천을 실제로 참아내는 일이다. 관용하라는 말이 동의하지 않는 믿음을 수용하거나 그런 실천에 찬성하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사람과 생각을 분리하는 어려운 일, 즉 상대의 믿음이나 행동에 전적으로 찬성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그와의 관계를 추구하는 어려운 일을 감당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이들에게 관용을 보여줄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이웃 사랑이 하나님 사랑에서 흘러나오고, 우리의 하나님 사랑은 복음의 진리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용기는 두려움을 제거한다. 우리는 불필요하게 다른 사람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과 용납하심을 온전히 확신한다면, 비판과 불안정을 직면할 용기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 네 가지 자질을 통해 직장생활을 한다면 변화가 보장되는가? 그렇지 않다. 이 길은 어려운 길이며 성공이 보장된 길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사명의 길이다.[17]팀 켈러는 이렇게 결론 내린다. “설교와 가르침, 기도, 예배, 성찬, 교제와 우정을 사용하여 교인들의 마음에 복음 신앙의 불길이 타오르도록 부채질하면, 사람들을 향한 사랑과 주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 자라나 두려움을 극복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이들에게 다가갈 방법을 알아낼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태어난 사랑은 반드시 길을 찾기 마련이다.”[18]복음은 우리 영혼을 구원하기도 하지만, 또한 우리 인생을 구원하기도 한다. 인생의 구원이란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여 사역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팀 켈러는 복음이 사람을 하나님과 사람들과 세상과 연결해 주는 과정임을 알려준다. 죄로 인해 분리된 관계가 회복되면서 복음은 공동체를 이루고 그 공동체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게 된다. 팀 켈러는 이런 사역들이 세계 곳곳에 일어나는 변화를 꿈꾸며 기도했다. “그러나 상상해보라 만일 맨해튼과 같은 곳에 많은 신자들이 있어서, 대부분의 뉴요커들이 자기가 존경하는 한 명의 그리스도인을 실제로 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많은 도시 거주민들을 기독교의 메시지로부터 방해하는 강력한 장벽이 제거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수만 명의 영혼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된다. … 도시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술, 과학, 학문, 기업 등에서 핵심 역할들을 수행할 때, 그리고 동시에 그들이 가진 권력, 재물, 영향력을 사회의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의 선을 위해 사용할 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19]복음은 개인의 삶을 균형 있게 하고 또한 교회의 사역을 균형 있게 한다. 복음을 통해 통합적 사역으로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것이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겨준 또 다른 유산이다. 주1. 팀 켈러, 센터처치, 610.2. 같은 책, 612.3. 같은 책, 616.4. 팀 켈러는 네 가지 사역 접점에 ‘도시 교회 개척’을 추가하여 다섯 가지 접점으로 소개한다. 5. 팀 켈러 외, 말씀 아래서 드리는 예배, 284.6. 센터처치, 637.7. 팀 켈러 외, 복음만이 모든 것을 바꾼다, 26.8. 센터처치, 651. 9. 센터처치, 653. 10. 팀 켈러, 복음과 삶, 100.11. 복음과 삶, 101-122.12, 센터처치, 656. 13. 센터처치, 658.14. 센터처치, 681. 15. 센터처치, 685. 16. 팀 켈러, 일과 영성, 91. 17. 팀 켈러, 존 이나주, 차이를 뛰어넘는 그리스도인, 16-17.18. 같은 책, 6-67.19. 센터처치, 789.
디지털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바른 온라인 식단
by Trevin Wax
2023-08-01
우리가 하루에 보고 듣는 정보의 양은 우리가 소화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끊임없이 밀려드는 정보 과부하로 우리의 감각, 특히 영적 감각은 점점 더 무디어진다. 무감각이 미치는 영향은 단지 사소한 사건까지도 쉬지 않고 스크롤하는 엄지손가락에서 끝나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은 점점 차가워진다. 단지 기사 하나를 통해서 자연재해나 끔찍한 비극을 접한 우리는 즉시 다음 기사로 넘어간다. 그리고 정치에 대한 논평, 아이들이나 동물이 나오는 재미있는 비디오, 그리고 건강과 웰빙을 개선하라는 각종 기사를 스크롤하기에 정신없다. 그 결과가 뭘까? 모든 게 흐릿해진다. 너무 많은 정보, 지혜라고는 찾을 수 없는 시끄럽기만 한 배경이다. 나는 매일 소셜 미디어에 시간을 할애한다. 때로는 꽤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더불어서 신학, 정치, 문화 분석 등 다양한 경향이나 주제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다양한 팟캐스트를 듣는다. 나는 다양한 미디어와 각종 정보 채널에 반대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거기서 얻은 유익에 감사한다. 그러나 아무리 소셜 미디어에서 좋은 것을 찾아도, 오로지 유익하고 교육적인 팟캐스트만 들음으로 영적 성장에 도움을 주는 자료만 섭렵한다고 해도 문제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예를 들어, 우리는 얼마든지 팟캐스트 피드의 메뉴에 있는 “지금 듣기”(listen now)에 중독되어 그때그때 올라오는 최신 정보를 받지 않으면 조바심을 느낄 수도 있다. 온라인에서 일어나는 모든 최신 소식을 듣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인간은 알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 갈망은 우리의 영혼에 깊고 미묘한 결과를 초래한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의 상실온라인 세상에서 일어나는 최신 정보와 발맞추려는 욕구는 과거 아니, 최악에는 영원까지 희생하면서도 오로지 현재에만 지나친 관심을 기울이게 만든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지금 우리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시대에서 벌어지는 토론과 논쟁에 대한 명확한 관점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신앙의 기초를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신실한 신앙을 유지하려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단지 뉴스 속보나 이번 주 핵심 토론 주제 등을 대충 훑어보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바른 신앙인은 믿음의 기반에까지 더 깊이 파고 내려가서 우리에게는 여전히 든든히 설 곳이 있음을 점검한다. 아무리 거센 문화의 바람이 불어도 흔들림 없는 나무처럼 우뚝 서기 위해서 우리는 더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한다. 우리에게 뿌리가 없다면, 우리는 바람에 흩날리는 파편에 불과하다. 그리고 매일 소용돌이치는 뉴스와 정보에 현기증을 느낄 것이다. 내가 The Thrill of Orthodoxy를 쓴 목표는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역사적인 기독교 신앙이 주는 짜릿한 아름다움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지금 교회가 만난 가장 큰 도전은 새로운 오류가 승리해서가 아니라, 오래된 진리가 더 이상 놀라움을 주지 않아서이다. 온라인에 종속될수록 성경의 깊고 풍부한 진리는 더 이상 우리를 놀라게 하지 않는다. 우리의 정신은 마비되고 가슴은 쪼그라든다. 오늘 하루도 쓸모없는 정보로 머리를 가득 채운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일에 대한 식욕을 느끼지 않는다. 얕은 곳으로 향하는 낡은 길세상 모든 일을 다 알아야 할 이유가 없다. 현재 일어나는 사건은 표면 아래 정도를 살짝 파헤치는 정도로 충분하다. 우리가 뿌리를 내려야 할 곳은 성경이 펼쳐놓는 이 세상의 위대한 이야기여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우리는 왜 여기에 존재하나?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세상의 궁극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기독교의 진리와 궁극적인 하나님의 영광을 확실하게, 또 끊임없이 상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한없이 천박해질 것이다. 두 마음을 품고 모든 길에서 헤매며(약 1:8), 오늘을 살아가는 데 가장 신실한 길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지혜조차 갖추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주의가 분산된 건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파스칼은 “혼자 방에 조용히 앉아 있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인류에게 생기는 문제에 관해서 말한 적이 있다. 우리는 쉬지 않고 산만함과 자극을 찾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고독과 성찰의 시간을 피한다. 그러나 고독과 성찰이 사라진 기독교는 시들기 마련이다. 우리에게는 정기적으로 성경의 진리를 음미할 충분한 공간과 집중이 필요하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가장 상상하지 않았던 곳에서 기쁨과 안정을 찾을 것이다. 바로 기독교가 뿌리를 내린 역사적 신경(creed)과 교회의 신앙고백이다. 팟캐스트보다 신앙 신조? 수많은 신경에서도 특히 사도 신경, 니케아 신경, 그리고 아타나시우스 신경, 이 셋이 두드러진다. 이 속에는 성경에 따라 하나님이 누구이며 그분이 하신 일에 관한 설명이 담겨있다. 더불어서 기독교의 핵심인 삼위일체를 적시한다. 종교개혁 기간과 그 이후에 등장한 수많은 역사적 신앙고백서는 마치 잘 짠 직조물처럼 신앙의 충만함을 자세하고 아름답게 묘사한다. 신경이 하나의 상부 구조, 그러니까 청사진을 제공한다면, 고백은 세부 사항을 채우고 그리스도인의 삶에 더 큰 명료성을 보여준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은 수천 페이지의 산문을 통해 세상에 대한 진실과 인간의 위치를 연구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 물으셨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기독교 신학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그분이 누구인가에 관해서 확신을 품고 고백하려는 우리의 시도이다. 신학은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만나고 그의 의로운 성품과 구원 행위의 탁월함을 누리는 것이다. 고대의 신경은 끝없는 수다와 논쟁이 펼쳐지는 소셜 미디어 같은 온라인 세상과는 동떨어진 세계처럼 보일 수도 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신경이 중요하다. 신경이 시대에 뒤떨어지고 먼지투성이처럼 보인다는 사실은 그것이 단지 문서로 끝나지 않고 오늘날 우리와 우리의 사고방식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신경은 신앙의 기초를 설명한다. 정통을 지키는 난간이다. 그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목소리이자 진리의 기둥, 그루터기인 교회의 증언이다(딤전 3:15). 신경은 모든 시대에 불어닥치는 폭풍우 속에서도 언제나 우리를 안정되게 유지한다. 소음에 대항하는 전략소음이 진동하는 디지털 시대에 지혜를 기르는 방법은 무엇일까? “지금”이라는 천박함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야 한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진실을 담은 우물에 우리 자신을 깊이 잠기도록 하는 관행을 구현해야 한다. 첫째, 매일 아침 “휴대폰보다 성경”이라는 규칙을 따를 것을 촉구한다. 휴대폰은 다른 방에 두고 구식 알람 시계를 쓰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바로 옆에 성경과 기도 가이드를 준비하라. 세상의 소음이 끼어들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 시간을 보내자. 매일 아침 하나님을 가장 먼저 만나는 삶이 얼마나 풍성하겠는가? (나는 종종 Psalms in 30 Days(30일 시편 묵상)이라는 기도 여행 가이드를 따라서 아침 시간을 보낸다.) 둘째, 온라인 기술을 유익한 방향으로 전환하자. 영적 성장을 돕는 (성경에 깊이 잠긴 목소리, 신경 정통에 기반을 둔 조직 등) 소셜 미디어 계정을 팔로우하라. 팟캐스트 구독 리스트에 교회 역사에 관심이 있거나 기독교의 위대한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들을 추가하라. 셋째, 스크롤을 공부에 활용하자. 온라인 섭취에 대한 제한을 설정하라. 그리고 거기서 얻는 정보의 일부를 실질적인 신학 내용으로 대체하라. 하루에 15분 또는 20분 이상 앱을 사용하면 알림이 울리도록 휴대폰을 설정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생각 없는 습관에서 마음을 스트레칭하는 습관으로 바꾸고 싶다면 최소한 소셜 미디어에 보내는 시간만큼은 책 읽는 데에 보내야 한다. 기독교 신학의 기초를 꿰뚫는 두꺼운 신학책을 하나 집으라. 가장 두꺼운 조직신학 교과서나 교회사 책이라도 하루에 두세 페이지씩 꾸준히 읽으면 일 년 안에 완독할 수 있다. 넷째, 혼자 하지 말라. 최신 뉴스보다 변치 않는 진리를 우선시하려는 믿음의 친구를 찾아라. 신경은 나 혼자 믿는 게 아닐 우리가 믿는 것에 대한 진술이다. 애초에 개인이 고백하는 믿음의 진술로 시작한 사도 신경은 세례 의식으로 발전했고, 세례식은 개종자의 선한 고백을 축하하기 위해 온 교회가 참석하는 축제가 되었다. 폭풍 속에서도 꾸준히 열매를 맺자마음 없는 스크롤에 대한 해결책은 오로지 집중뿐이다. 성경을 공부하고 고대 신경과 신앙고백을 숙고하는 것은 우리가 지식과 지혜를 키움으로 예수님을 더 잘 따르는 제자가 된다는 의미이다. 모두가 다 최신 소식에 요동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에 뿌리를 내리는 일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오로지 주님께 뿌리를 내림으로 우리를 변화시키고 변하는 뉴스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사람으로 살 수 있다. 주님께서 우리 속에 성경적이고 역사적인 기독교에 대한 인식을 다시 일깨워 주시길 간절히 바란다. 그래서 우리가 앞으로 만날 격동의 시대에도 꾸준히 열매 맺는 주님의 신실한 종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원제: Man Cannot Live on Feeds Alone: The Christian Diet for a Digital Age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여성의 은사 활용 기회를 제한하는 교회, 떠나야 할까요?
by 김선일·이금주
2023-07-31
엉겅퀴와 가시덤불그리스도인들이 일터에서 겪는 문제와 질문을 두고 김선일 교수와 이금주 교수, 두 신학자가 대화하며 그 답을 찾아 나선다. 우리 교회 목사님은 여성들에게 교회에서 가르치는 일을 맡기지 않습니다. 여성에게 교회 봉사는 시키지만, 리더의 역할은 주지 않습니다. 저는 은사를 활용해서 가르치고 싶은데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교회를 옮겨야 할까요? 김선일: 이 질문은 교회를 옮기느냐의 문제도 있지만, 일, 여성, 은사 등의 문제들도 결부된 것 같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이 향상되듯 교회에서도 여성들이 리더의 역할을 맡는 일도 요즘은 일반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이렇게 남성 중심적인 교회들이 있군요. 이금주: 우선 ‘교회를 옮겨야 하는가?’라는 질문부터 보자면, 저는 ‘쉽게 옮기지 말라’고 조언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옮기는 것이 교회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나의 문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교회를 옮긴다고 문제가 해결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비슷한 경험을 해도 교회를 옮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안 옮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따라서 먼저 주의해야 할 점은 문제가 불거졌을 때마다 교회를 옮기는 습관이 붙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김: 먼저 교회를 옮기는 문제로 고민하는 자신을 성찰해야 한다는 말씀일까요? 교인들이 자기가 다니는 교회의 목회자에 대해서 영적인 신뢰를 갖지 못할 때는 교회를 옮길 수도 있지 않을까요?이: 물론 교회를 옮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먼저 자신의 은사를 점검하고 그것을 교회에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우선입니다. 나중에 교회를 옮겨야 할 상황이 올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옮겨야 할 때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김: 예. 주관적 경험이나 느낌으로 쉽게 교회를 옮기는 결정을 내리는 것은 섣부르다는 데 저도 동의합니다.이: 저도 질문자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사를 교회에서 사용하지 못하게 했을 때,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교회를 떠났습니다. 물론 쉽게 떠난 것은 아니고 고민과 기도 끝에 결단했습니다. 김: 오랫동안 고민하고 기도하시면서 어떠한 과정이나 절차를 겪으셨나요? 그래도 혼자 끙끙 앓을 것이 아니라 목사님과도 상의하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요.이: 제 경험에 비추어 질문자에게 이렇게 권면하겠습니다. 첫째, 목사님과 진지하게 대화하십시오. ‘나의 은사가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목사님께서 조언해주시고 지도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물어보십시오. 혼자서 이 문제를 놓고 고민하거나 궁리하지 말고 먼저 목사님과 상의하라는 것입니다. 목사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내 은사를 활용할 기회가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모임을 하게 되더라도 교회의 목회 방침에 따르겠다는 것을 보여 주십시오. 이런 대화를 통해서 목사님이 설득되는지, 목사님이 자기 교인의 은사를 발견하고 계발하는 데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김: 지혜로운 방법인 것 같습니다.이: 둘째,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어떠한 마음을 주실 것입니다.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흘러갈 것입니다. 그때 마음도 평안해집니다. 현재의 교회에 계속 머무는 것이 마음에 불편하다면 다른 교회를 찾아서 옮길 수 있습니다. 현재의 교회가 나의 상황을 잘 헤아리고 동역할 수 있는 교회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또 목회자를 찾아가서 요구하고 논쟁하면 안 됩니다. 저의 경우에는 결국에 교회를 옮겼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섬김의 은사를 활용할 수 없음을 발견해서 옮긴 것입니다. 김: 교회를 옮기는 문제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사와 소명을 깊이 돌아보는 계기가 되겠군요. 이것도 일의 신학과 관련한 문제이고, ‘하나님 앞에서’라는 클 틀에서 봐야겠네요. 사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교회뿐 아니라 자기가 몸을 담고 있는 조직에서 계속 있어야 할지 떠나야 할지 고민합니다.이: 목사님에게 초점을 맞추지 마십시오. ‘이 교회가 내가 하나님이 나에게 거저 주신 은사를 사용할 수 있는 곳인가? 교회가 당신에게 그 문을 닫고 열어주지 않는다면, 목사님의 문제나 여성 차별의 문제로만 보지 마십시오. 이건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올바르게 활용하느냐의 문제입니다.김: 우리가 은사와 소명에 관해서 중요하게 보는 구절이 에베소서 4장 12절인데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과제는 성도를 온전하게 준비시켜서 봉사의 일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서 에베소서 4장 7절에서는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선물의 분량을 따라서 은혜를 주셨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이들이 성령께서 주신 은사를 발견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해 그 은사를 활용하고 계발하도록 돕는 것은 교회 지도자의 주된 책임이라고 봅니다.이: 그래서 초점을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목사님에게 초점을 맞추지 말고 (목사님도 죄인인 인간입니다) 이 교회가 성도의 은사를 발견하고 활용하는 곳인지에 초점을 맞추십시오. 물론 남녀 차별의 문제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복잡한 사안들이 얽혀 있습니다. 먼저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십시오.김: 교회를 옮기는 문제로 고민하고 기도하다 결론에 이르는 과정까지는 얼마나 시간이 필요할까요? 이: 죄송하지만, 다시 저의 경험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시 제가 다니던 교회는 목사님은 부모님과 일찍 이민 오셔서 미국에서 공부 마치고 안수받은 한인이었고 장로님드르 교인들 대부분이 미국인이었지만 회중에는 미국인과 한인 2세들이 함께 있는 곳이었습니다. 제가 박사논문으로 연구한 여성 사역에 관한 특별 주제를 금요일에 대학부 성경공부 시간 전에 가르칠 수 있겠냐고 했더니 당회에서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주일에 예배 끝나고 30분 정도 세미나를 인도할 기회나, 혹은 수양회에서 강의할 수 있도록 한 세션을 주면 어떻겠냐고 했더니 그것도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과정이 1년은 걸렸습니다. 장로님인 제 남편은 이미 교회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제가 마음의 결정을 할 때까지 기다렸노라고 나중에 말해주었습니다. 이 교회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사를 사용할 수 없음을 깨닫는 데 1년 반이 걸린 겁니다. 그래서 다른 교회로 옮겼습니다. 원래부터 알던 교회였는데, 그곳에서 제 은사를 활용할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됐습니다.김: 교회를 옮기기 전까지 공동체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의 뜻을 묻는 과정을 거쳐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성찰해야 할 주제는 교회나 목사님이 아니라 자신의 은사와 소명에 관한 것이어야 하고요. 그러고 보니, 일의 신학이 교회 내의 문제와도 긴밀하게 연결되는군요. 요즘 한국 교회의 젊은 목사님들은 교회 내 여성의 동등성을 중요하게 보는 것 같습니다. 이: 교회 내 여성의 동등성이 중요합니다만,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동등성을 추구하는 이유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협력하여 주의 몸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자칫 여성운동의 차원으로 접근하면 그것은 성경의 바른 가르침에서 벗어납니다. 제가 다녔던 미국 교회는 오랫동안 여자 장로를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교회의 장로들이 성경을 더 깊이 연구한 뒤에 여성 장로가 가능하도록 교회 규정을 개정했습니다. 그런데 여자 장로들이 많이 뽑히니까 남자들이 장로로 추천돼도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여성이 더 많아지니까 남자들이 소수가 돼서 불편해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협력해서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여자도 남자들과 함께 일하기를 배워야 하고, 남자들도 여자들과 함께 일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다른 이들에게 은사를 충분히 활용할 수 있도록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은 몇 명이었을까?
by Philip Ryken
2023-07-29
성경은 이집트 탈출을 상세하게 기술한다. 그런데도 출애굽 사건의 역사적 근거는 자주 도전 받는다. 출애굽기 12장 내용을 놓고 가장 흔히 맞닥뜨리는 반론은 출애굽의 규모이다. 이건 대답할 가치가 있는 문제이다. 본문은 이렇게 말한다. “마침내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을 떠나서 숙곳으로 갔는데, 딸린 아이들 외에, 장정만 해도 육십만 가량이 되었다. 그 밖에도 다른 여러 민족들이 많이 그들을 따라 나섰고, 양과 소 등 수많은 집짐승 떼가 그들을 따랐다”(출 12:37-38). 이 기록에는 훌륭한 역사가라면 누구라도 빠트리지 않을 육하원칙에 입각하는 정보가 제대로 들어 있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건 ‘몇 명인가?’이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셨다는 것을 정말로 믿을 수 있는가?좋은 질문이다. 선택할 수 있는 세 가지 일반적인 답변이 있다.답 1: 부풀려진 숫자다남자가 600,000명이라면 이스라엘 사람은 모두 200만 정도였을 거다. 이 숫자는 쉽지 않은 문제이다. 그렇게 많은 이스라엘 사람이 빠져나갔는데, 왜 이집트 역사에는 전혀 거기에 관한 언급이 없을까? 게다가 이만하면, 이스라엘은 당대의 세계에서 가장 큰 인구를 자랑하는 민족 중 하나였을 것이다. 고센 땅이 과연 이 정도 인구를 먹어 살릴 수 있었을까? 게다가 왜 우리는 시나이반도에서 그들의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는 걸까?출애굽은 세계 역사에서 발생한 최대 인구이동 중 하나였다. 이동하고 있을 그들은 15킬로미터가 넘는 긴 줄을 형성했을 것이다. 적지 않은 학자들이 이런 문제점들을 제기하면서, 성경 저자가 숫자를 부풀렸다고 결론을 내린다. 드라이버(S. R. Driver)는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의 규모가 크게 과장되는 전통이 세월이 흐르면서 형성되었다”라고 썼다. 스나이드(N. H. Snaith)는 전체 숫자를 놓고 “환상적이고 또 믿을 수 없다”라고 말한다. 답 2: 글자 그대로부풀려진 숫자라는 이의 제기를 처리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성경이 참으로 600,000명이라는 숫자의 이스라엘 사람(여성과 어린이 포함)이 이집트를 빠져나왔다고 말한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 어려움을 느끼는 학자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세상에 불가능은 없다.이집트 역사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거의 언급되지 않는 건, 그들이 단지 노예였고 또 그들의 탈출 방식이 이집트인들에게 워낙 당혹스러웠기 때문이다. 시나이반도에 증거가 별로 없다고 해도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유목민이었고, 그 유해는 3,000년 동안 모래로 덮여 있었다. 또한 600,000을 숫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한 가지 타당한 이유는, 이것이 출애굽기 다른 내용(출 38:26) 및 민수기의 내용(민 1:46; 2:32; 26:51)과도 일치하기 때문이다. 답 3: 천이라는 숫자는 ‘씨족’을 의미성경 본문에 충실한 또 다른 가능성이 있다. 히브리어 엘레프(eleph)는 “천”을 의미한다. 그러나 구약 초기에는 상당한 규모의 무리를 가리키는 부정확한 용어로도 사용되었다. 어떤 학자들은 이 단어가 ‘씨족’(clan)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또는 소대와 같은 전투 부대를 가리키는 군사 용어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출애굽기 12:37은 이렇게 읽어도 된다. “600개의 씨족이 있었다.” 또는 “600개 정도의 군사 단위가 있었다.” 이렇게 본다면 이스라엘 백성의 전체 인구는 수백만이 아니라 수만 정도였을 것이다. 제임스 호프마이어도 이런 해석을 받아들이는데, 그는 이렇게 말한다. 출애굽기 12:37의 쟁점은 해석의 문제이다. 엘레프라는 단어는 “천”으로 번역될 수 있지만 성경에서는 “씨족” 또는 “군대 단위”로도 번역된다. 이집트 학자로서 이 질문을 볼 때, 이집트 제국의 전성기에 이집트 군대의 총인원은 20,000명 정도였다. 그리고 여호수아 7장을 보면 아이성 전투에서 전사한 36명은 이스라엘로서는 심각한 군사적 실패였다. 정말로 600,000명의 군대가 있었다면, 그 정도 숫자가 죽는 건 별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이건 성경이 사실인지 아닌지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핵심은 성경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그 의미를 찾는 것이다.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다는 사실이다. 참으로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말이다. “주님의 모든 군대가 이집트 땅에서 나왔다”(출 12:41).원제: How Many Israelites Exited Egyp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출애굽
영적 게토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by 최창국
2023-07-28
그리스도인은 영적 깨달음이나 경험을 종교적 차원에만 제한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영적 경험은 일상의 영역에서도 경험될 수 있다. 하나님은 일상의 영역에서도 일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팀 켈러는 일상 속에서의 하나님의 사역의 의미와 중요성을 이렇게 설명한다. “유대인 공동체는 뉴욕시를 풍요롭게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병원과 의료 혜택을 확장하고, 예술과 문화센터들을 만들고, 노인들을 보살피며, 젊은이들을 길러내는 탄탄한 사회로 이끌었다. 성경의 유산과 신앙에 기대어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미 6:8)에 헌신했던 것이다. 비록 그리스도를 좇는 제자들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그 안에 역사하셨다는 데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팀 켈러, 일과 영성, 227). 하나님의 사역은 그리스도인에 의에서만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영적 깨달음이나 경험도 종교적 차원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거룩성은 교회 공동체나 종교 기관에서도 경험할 수 있지만, 일상의 여러 영역에서 경험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일반은총 덕분이다. 하나님의 거룩성은 일반은총 안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일반은총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영적 게토주의나 엘리트주의에 빠지기 쉽다. 영적 게토주의는 기도와 같은 종교적 활동만을 통해서 영적 경험을 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리스도인이 일반은총의 개념이 없으면 “스스로 문화적인 게토에 들어앉아 자급자족하는 데 만족할 가능성이 높다. 크리스천 의사에게만 치료를 받아야 하고, 크리스천 변호사에게만 일을 맡기고, 크리스천 상담가의 말만 듣고, 크리스천 예술가의 작품만 즐겨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에 선물을 쏟아부으시면서 상당 부분을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에게 맡기셨다”(팀 켈러, 일과 영성, 237). 하나님의 사역은 그리스도인에게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며, 영적 경험도 종교적 차원에만 종속되는 것도 아니다. 영적 분야와 세속적 분야 또는 영적 장소와 세속적 장소로 구분하거나 범주화하는 데서 영적 경험의 장을 잘못 이해하거나 왜곡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잘못된 구분이나 왜곡된 범주화는 영적 경험을 교회나 종교기관과 같은 특별한 곳에서만 할 수 있다고 여기게 하였다. 일상의 영역인 정치 사회 교육의 영역에서는 영적 경험을 할 수 없다는 왜곡된 신념을 갖게 하였다. 신학적 관점에서 영적 경험은 분명히 특별은총의 영역 안에서도 경험할 수 있지만 일반은총 안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영적 경험과 생활을 효과적으로 설명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영적 차원, 윤리적 차원, 사회적 차원 등으로 구분하는 것은 바른 것이지만 영적 분야와 세속적 분야로 범주화하는 것은 바른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스스로 영적 분야와 세속적 분야로 범주화하여 일상의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 차원들을 영적 삶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길 때 영적 게토주의를 낳을 수 있다. 영적 게토주의는 영적 경험이나 깨달음의 장을 교회나 종교적 기관으로만 한정하거나 영적 또는 신령한 직분(spiritual estate)을 종교적 일이나 소명으로만 여길 때 심화될 수 있다. 마르틴 루터는 고린도전서의 ‘부르심’(고전 7:24)이란 단어를 ‘직업’을 의미하는 독일어 ‘베루프’(Beruf)로 번역해서 신령한 소명을 종교적 소명으로만 여긴 중세 교회를 비판하였다. 중세 교회는 신부와 수도사 또는 수녀만을 신령한 직분이라고 여겼다. 신령한 직분에 대한 교회의 이러한 관점은 일상의 노동이나 직업은 영적인 일과는 무관하다고 보았을 뿐 아니라 신령한 직분이 아니라 천박하지만 불가피한 것으로 보았다. 루터는 “교황, 주교, 주부, 신부, 수도사들을 ‘신령한 직분’으로 정하면서 왕족, 귀족, 장인, 농부들은 ‘세속의 직분’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두 지어낸 허구이다. 철저한 기만이요 위선이 아닐 수 없다”라고 하였다(Martin Luther, Three Treatises, 12). 루터에게 직업이나 일을 영적 분야와 세속적 분야로 나누는 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루터의 이러한 관점은 영적 경험이나 깨달음도 교회나 종교적 기관이나 종교적 활동에만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에블린 언더힐(Evelyn Underhill)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층 짜리 집에 비유했다. 아래층은 평범하게 지속되는 잘 정돈된 일상적인 삶을 가리키고, 위층은 기도하며 가꾸어 나가는 영적 삶을 가리킨다. 온전한 집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신체적, 정서적 세계와 영적 세계 모두를 가꾸어야 한다고 역설했다.우리는 평범한 일상에서도 영적 거룩함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부모에게 전화하는 일에서 거룩함을 느낄 수 있어야 하고, 일기를 쓰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하고, 설거지하면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차원들을 거룩한 삶 또는 영적인 삶과 일체화시킴이 없으면, 그리스도인 또는 기독교는 인간의 상황으로부터 분리되어 버리기 때문에 그만큼 타당성을 잃게 된다. 일상을 떠난 영적 추구는 거룩한 것을 이상화시키거나 고귀하게 만들려는 의도와는 반대로 오히려 삶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가게 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거룩한 것에 대하여 순전하게 느낄 감수성을 방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영적인 삶은 작은 일상의 활동 속에서 싹이 나고, 햇순이 돋고, 꽃이 피도록 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일상적인 모든 것이 은혜의 통로가 된다. 그것을 세속에 맡기는 것은 이원론에 굴복하고 만물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부정하는 것이다. 일상적인 삶의 실체를 인정하는 사람은 삶의 부차적인 것과 본질을 더 명확히 구분할 수 있고, 또한 두 가지를 모두 유지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은 모든 삶에서 영적인 렌즈를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숨 쉬며 살아가는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가 펼쳐지는 장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 넓게 충만하게 누리는 방법을 놓쳐서는 안 된다. 프란시스 휴댁은 이렇게 말한다. “기도 생활이 건조해진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를 기도나 교회생활 외에도 폭넓은 경험을 통해 역동적인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권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보통 ‘쉼, 자연, 관계’ 같은 것을 통해 발견된다. … 기도가 갑자기 안 되는 상황에서는, 자신의 삶에서 실제적이고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할 때, 새로운 감격과 행복이 되살아나게 될 것이다”(Francis Houdek, Guided by the Spirit, 88-9).하나님의 은혜는 기도를 통해서도 경험할 수 있지만, 산책하고, 음악을 듣고, 친구를 만나고, 가족과 함께 여행하고, 노동하고, 정의를 위한 사회 운동을 하는 가운데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
바른 신학 없이는 온전한 제자 될 수 없다
by Jen Wilkin·J. T. English
2023-07-27
마태복음 28장의 가서 제자 삼으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우리는 보통 전도의 관점에서 받아들인다. 이 본문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복음을 담은 소책자를 들고 세상에 흩어져서 전도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상상한다. 복음을 받아들여 기쁨에 넘치는 회심자들이 희열에 차서 세례를 받는 장면도 떠오른다. 그다음은 뭘까? 제자들의 전도를 받아 전도자가 된 그들이 여러 도시를 이동한다. 말 그대로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유대를 거쳐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대사명에 대한 이해가 단지 전도에 대한 부르심에서 그친다면, 우리는 정작 중요한 부분을 잊고 있다. 바로 신학이다.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은 회심하라는 부르심이 아니라 제자 삼으라는 부르심이다. 이 부분에 대한 대사명의 내용은 분명하다. 개종자들에게 “예수께서 명하신 모든 것을 지키도록"(마 28:20) 가르치라고 요구한다. 제자도라는 측면에서, 믿음의 선배로부터 물려받은 좋은 교리의 유산을 물려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는 새삼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지금 교리를 가지고 무엇을 하고 있는가?회심은 순식간에 벌어지는 사건이다. 반면에 교리를 실천하는 제자도는 평생에 걸친 과정이다. 그것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전통 신앙을 포함한다. 그럼 우리는 지금 이 사명을 제대로 완수하고 있는가? 대부분의 통계 지표에 따르면 전혀 그렇지 않다. 2022년, Lifeway Research와 Ligonier Ministries는 “신학 현황”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모두를 대상으로 기본적인 기독교 교리, 즉 그리스도인을 정의하는 본질적인 믿음에 대한 이해도를 조사했다. 비그리스도인들의 결과는 예상대로 암울했지만, 정작 놀라운 건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내어놓은 답변이었다. • 복음주의자의 48퍼센트가 “하나님은 다양한 상황을 접하면 거기에 맞게 학습하고 적응한다”에 동의했다. • 복음주의자의 65퍼센트가 “모든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게 태어났다”에 동의했다. • 복음주의자의 56퍼센트가 “하나님은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의 예배를 받아들이신다”에 동의했다. • 복음주의자의 43퍼센트가 “예수님이 훌륭한 선생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은 아니었다”에 동의했다. 이 통계를 한번 곰곰이 숙고해보라.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정작 자신의 생명을 걸고 있다고 주장하는 신앙의 핵심 신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 신념에 자신의 생명을 걸지도 않는다. 한마디로 그들은 기본적인 신학적 이해가 부족하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신학 지식의 격차는 좁혀지지 않고 벌어지고 있다는 게 조사 결과이다. 한 세대는 다음 세대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개종자는 만들고 있는지 몰라도 제자는 기르지 못하고 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가?제자가 배우는 사람이라면 제자 삼는 사람은 선생이다. 그러나 배우지 않은 것을 가르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전달받지 않은 것을 다음 세대로 전달할 수는 없다. 나 자신을 먼저 신학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상황에서 결코 다른 누구에게 신앙의 기본 신념을 가르치려는 열망을 가질 수는 없다. 그럼 우리는 왜 그러지 않는 걸까? 교리 학습을 기피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가 뭘까? 다음 거짓말 중 하나를 믿기 때문이다. 거짓말 1. 신학은 학문의 영역이다.때때로 신학은 지나치게 학문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말이 접근 불가라는 의미는 아니다. 학자들 가운데는 평신도라면 결코 하지 않을 수준에서 신학을 연구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그게 우리 모두가 신학을 기피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 중 응용 수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기초 수준 이상으로 수학을 학습하면 일상생활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신학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교리는 모두가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어린이, 부모, 젊은 전문직 종사자,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 또는 검정 고시를 친 사람을 구분하지 않아야 한다. 거짓말 2. 신학은 실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모두가 합당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 누구라도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에 삶을 바치고 싶어 한다. 지지하는 명분, 정치 신념, 심지어 좋아하는 스포츠팀에 사람들이 얼마나 열정적인지 살펴보라. 우리는 모두 나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의 일부가 되기를 원한다. 신학이 하나님을 설명하는 말이고, 하나님은 진정으로 가장 중요한 존재, 즉 궁극의 실재라면, 이 세상에 이보다 더 중요한 주제가 또 있을까? 그리고 이보다 더 실용적인 게 있을 수 있을까?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이해하고 우리의 삶을 그에게 향하게 하는 것이 신학이라면,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있을 수 없다. 이 세상에 제대로 사는 삶보다 더 실용적인 것은 없다. 신학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바로 그 목적을 달성하도록 하나님이 준비시킨 수단이다.거짓말 3. 신학에는 감정이 없다.신학이 감정이 아니라 지성을 강조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마음에서 시작하여 마음으로 움직이는 게 신학이라는 말이 더 정확하다. 신학을 한다는 것은 마음의 변화를 목적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는 일이다(롬 12:2). 기독교는 마음의 종교이다. 결코 차갑게 죽어서 먼지투성이로 남는 지식 유희가 아니다. 그렇다고 감정과 열정만 남아서 이성적인 믿음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마음만의 종교도 아니다.제대로 된 성경적인 신학은 지성을 숭배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성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마음이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지식 활동에만 머무르는 신학은 실패한 신학이다. 활기찬 지성의 활동으로 마음에 뜨거운 연료를 공급하는 신학이 바른 신학이다. 이성의 아름다움을 인식하고 이성에 어휘와 비전을 부여하는 신앙생활을 추구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깊은 생각은 항상 하나님에 대한 깊은 느낌이라는 결과를 낳아야 한다. 송영(예배)으로 이어지지 않는 신학은 헛된 지식 추구에 불과하다. 살아 숨 쉬는 신학: 제자도의 열쇠그렇다면 신학은 학문의 영역인가?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신학은 모든 제자가 접근할 수 있도록 열려 있다. 신학은 실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전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을 잘 알고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실제적인 일이다. 신학은 감정이 부족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참된 신학은 항상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배하도록 인도한다. 신학은 지적 수준뿐 아니라 정서적이고 실제적 수준에서 우리를 형성하기에 중요하다. 신학은 우리 삶에 총체적인 영향을 미친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에서 수준이 높아갈수록 우리는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느끼고, 또 다르게 행동한다. 신학은 무엇인가?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이다. 신학은 누가 해야 하는가? 모든 사람이다. 설교하고, 기도하고, 또 찬양할 때도 우리는 신학을 한다. 직장에 가고, 휴가를 떠나고, 연로한 부모를 돌보고, 죄와 싸우고, 자녀를 키우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애도할 때도, 돈을 쓰고 늙어갈 때도 우리는 신학을 한다. 신학이 왜 중요한가? 잘 사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잘 사는 것이야말로 제자도의 핵심이다. 원제: Theology: The Missing Piece in Discipleship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대사명
지상명령
제자도
전도
신학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소서
714 기도대성회 소회
by 김창현
2023-07-26
오랜 슬픔슬펐다. 많이. 울었다. 오랜 시간. 누구의 잘못인가?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나은가? 굳이 찾은들 또 다른 분열만 일으키지 않겠는가? 마귀의 특징이 ‘분열’이라 하였던가? 그렇다면 교회의 분열이 그놈의 짓거리인가? 정녕 당신은 이 분열을 알고 계셨던 건가요? 그래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라 하신 것인가요? 교회는 이미 하나인 것. 하나가 되기 위해 힘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됨을 힘써 지켜야 하는 것. 힘써, 노력, 의지, 자기 부인, 내려놓음. 온갖 좋은 말을 다 갖다 붙여 가능하다면 내 수십, 수백 단어를 말하리이다. 714 기도대성회2023년 7월 14일 송도 컨벤시아에서 ‘714 기도대성회’가 열렸다. 7월 14일은 역대하 7장 14절에 근거하여 결정되었다고 한다. 이 모임은 두 가지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2024년 로잔대회 준비와 한국 교회의 영적 대각성이다. 현장에는 전국 450여 교회와 6,000명이 넘는 성도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였다. 모인 분들을 붙잡고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로잔대회보다는 한국 교회의 영적대각성에 관심이 더 많았을 것이다. 나를 낳아준 어머니 같은 한국 교회를 사랑하는 성도는 나뿐만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간절함대학 시절 전국대학생 여름수련회 이후 이런 대형집회는 오랜만이었다. 우뢰와 같은 찬양 소리, 하늘에 닿을 듯한 기도 소리. 가슴이 벅차 첫 찬양에서부터 눈물이 흘렀다. 이 찬양과 기도 소리가 주님께 닿을 수만 있다면 목이 터져라 소리치리라.예수보다 정치이념이 우선 되어버린 한국 교회. 담임목사와 정치이념이 맞지 않다고 떠나는 성도. 정치이념으로 편이 갈려진 목사들. 선교단체 단톡방에서 정치 이슈로 논쟁하다 집단으로 단톡방을 나가버린 젊은 간사들. 교회마다 정치 이슈로 갈기갈기 찢긴 권사회, 안수집사회.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진짜 마귀짓거리라면 “네 이놈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한국 교회에서 떠나갈지어다!” 코로나로 집회와 예배 금지를 경험한 한국 교회 성도들. 그 마음에 이러한 기도의 자리를 얼마나 사모하고 열망하였는지 그 간절함이 현장에서 느껴졌다. 이것이 한국 교회 회복의 시작점이길 간절히 기도하였다. 2024년 로잔대회가 한국에서 열린다니, 이것이 어떤 모양으로든 한국 교회 회복의 마중물이 되길 간절히 소망했다. 염려. 그럼에도…누군들 기도하지 않았겠는가? 한국 교회의 회복을 위해 왜 부르짖지 않았겠는가? 1907년의 평양대부흥이 다시 이 땅에 일어나길 바라는 울부짖음은 이번 기도대성회보다 어찌 작다 하겠는가? 이번 대회도 ‘이벤트’로 끝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날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이렇게 기도하는 징검다리들이 있어야 진짜가 나타나지 않겠는가? 또 다른 누군가가 이 기도 모임을 딛고 한 발을 내디디어 진짜 회복과 부흥의 때를 맛볼 수만 있다면, 기꺼이 징검다리 되어 줄 수 있다. 연합1980년대, 1990년대 부흥의 끝자락을 경험한 것은 목사로서 큰 기쁨이고 행운이라 하겠다. 하지만 그 시절 목사는 유명 연예인처럼 보였다. 나도 그런 부류를 꿈꾸던 사람이었다. 교회는 보이지 않았고 유명 목회자 뒤에 숨겨진 수많은 목회자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제 목회 16년 차가 되어보니 예전이 보이지 않던 것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부흥 1세대 목회자들 가운데 그 끝이 아름답지 않은 분들을 보게 되었다. 반면 소위 복음주의 4인방이라고 불리는 부흥 2세대 목회자들은 조금 다름도 발견하게 되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었을까? 바로 ‘연합’이었다. 그들에게는 단순한 연합이 아니라 친밀한 인격적 관계가 있었다. 복음주의 4인방 중 한 목사님이 고급 승용차를 선물로 받았다고 한다. 다른 사모님이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씀하셨다. “목사님 많이 변하셨어요.” 이 이야기를 들은 목사님이 바로 차를 파셨다고 한다. 친밀한 인격적 관계에는 위로와 격려가 있음과 동시에 도전과 긴장도 존재한다. 이것이 참된 연합의 유익이 아닐까?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과 같음과 동시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해지는 유익 말이다. 연합의 유익을 선배 목회자들이 보여주었다면 이제 다음 세대는 ‘운동’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생명력이 있는 복음적 생태계가 한국 교회에 안에 이루어져야 한다. 그 시작점에 이번 기도대성회가 자리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한국 교회는 오직 복음 안에서 새로운 연합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로잔운동나는 복음주의 연합대회인 로잔운동(Lausanne Movement)이 좋다. 그 역사와 배경을 잘은 모르지만, 그 이름 자체가 정체성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로잔은 ‘조직’이 아니라 ‘운동’이다. 연대와 연합을 강조하지 않은 때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연합은 ‘조직’을 잘 갖추면 된다고 여겼다. 조직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운동성’이다. “온 교회가 온전한 복음을 온 세계에!”714기도대성회는 2024년 9월에 열리는 로잔대회까지의 기도 운동이다. 조직은 간소하지만 운동성은 강할 것이다. 전국에 450여 교회가 한국 교회의 영적 대각성을 위한 영적 회복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이때가 아닐 수도 있다. 더 혹독한 겨울을 지나야 할 수도 있다. 출애굽 1세대들처럼 지금의 한국 교회 성도들이 광야에서 생을 다 마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소망한다. 간절히!주여! 이 땅에 다시 부흥을 허락하소서.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되게 하소서. 모든 분열을 회복시키소서.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사야 61:3)
교회는 AI를 내칠 것인가 끌어안을 것인가?
by Patrick Miller
2023-07-25
지난 5일 사이에 AI는 보통 사람들의 의식에까지 침투했다. 처음으로 ChatGPT의 언어 슬롯 머신이 가동되었고, 어려운 질문에 놀라울 정도로 좋은 답변을 내놓았다. 수십 년 전 생산직 근로자가 겪은 일을 지금 사무직 근로자가 그대로 경험하고 있다. 자, 진짜 적은 비용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그대로 해내는 기계가 등장했다. 패닉에 가까울 정도로 격렬한 경고음이 전 세계 문화에 걸쳐서 울렸다. ChatGPT 이전에 AI에 대해 전혀 몰랐던 직업 사상가들도 너도나도 앞다투어 소셜 미디어와 팟캐스트에서 최신 정보를 공유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나 또 다른 부류의 사상가들은 전혀 다른 방식을 취했다. 그들은 AI가 만들어갈 생성 가능성을 즐기며 세상을 바꾼다고 약속하는 새로운 AI 제품의 가내 산업을 시작했다.고작 몇 달 사이에 AI와 관련해서 그리스도인은 크게 두 진영으로 나뉘었다. (1) 생성 AI가 일자리를 빼앗고 영적 성장을 방해할 것이라고 두려워하는 비판적 입장. (2) AI가 목회자에게 더 많은 도움을 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실용주의 입장이다. 급속한 기술 양극화는 하나도 놀라운 게 아니다. 그러나 그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AI에 관해서 계속해서 글을 썼다. 대부분이 신중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윤리적으로만 사용할 수 있다면, 생성 AI가 하나님 나라의 목적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확신이 점점 더 커졌다. 그렇다고 내 속에 두려움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생소하기만 한 기술 전쟁에서 한 쪽 편을 선택하는 대신에 잠시 멈추고 대화하고 또 생각할 때이다. 잠언 저자의 말이 옳다. “지식이 없는 열심은 좋은 것이라 할 수 없고, 너무 서둘러도 발을 헛디딘다”(잠 19:2). 오로지 비판만 하는 것도, 오로지 실용주의 입장으로만 보는 것도 다 위험하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 입장 다 비윤리적인 AI 사용이라는 측면에서 우리를 훨씬 더 취약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얼마든지 그런 위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AI 비판의 위험두려운 것부터 시작하자. 생성 AI는 (말하자면, 텍스트, 이미지, 코드, 비디오 등을 생성할 수 있는 알고리즘은) 설교 연구, 설교 그래픽 생성, 소그룹 질문 생성에 도움을 줄 수 있다. 더불어서 설교, 블로그 및 팟캐스트 스크립트 작성도 수행할 수 있다. 영적 질문이 있는 평신도가 목사와 멘토를 찾는 대신에 얼마든지 AI에 의존할 수도 있다. AI가 기꺼이 그들에게 “지혜”를 제공할 것이다. 모르는 게 없는 이 컴퓨터는 도대체 어디에서 정보를 얻고 지식을 만들어내는가? 모든 대규모 언어 모델(LLM)은 특정 데이터 세트를 사용하여 학습한다. 예를 들어 ChatGPT는 2021년 이전 버전의 인터넷에서 교육을 받았다. 질문마다 질문의 매개 변수와 만족스러운 답으로 간주되는 자체 교육을 바탕으로 해서 나름의 만족스러운 답변을 예측한다. LLM은 크라우드 소싱된 답변을 제공하며 모두를 만족시키는 답을 제공하도록 조금씩 수정된다. ChatGPT에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조언을 요청하면 지극히 개인주의적이고 자기 표현적이며 뻔한 답을 제공한다. 그러나 ChatGPT의 답이 뻔하다는 게 유일한 문제는 아니다.무한해 보이는 정보에 빠르고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제자도를 얼마든지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봇(bot)을 통해서 쉽게 할 수 있는데, 뭐 하러 시간을 들여서 성경을 배우고 또 열심히 지혜를 키우려고 노력하겠는가? ChatGPT 같은 LLM이 주는 약속이 무엇인가? 노력 없이도 얼마든지 숙달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늘이 무너지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아주 틀린 건 아니다. 광범위한 인터넷 세계마저도 장난처럼 보이게 만들 정도로 AI는 엄청난 기술 변화이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지고 있다고 경고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인정하지 않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하늘이 무너진 건 이미 한참 전이다. 우리는 이미 안개 속에서 살고 있다. ChatGPT가 AI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일깨운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AI를 일상생활로 도입한 게 ChatGPT는 아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맞춤법 검사, Google 검색, 내비게이션 앱, 차량 공유 앱, Siri, Alexa, 음성 텍스트 변환, 소셜 미디어 피드, 비디오 게임, 얼굴 인식, 스팸 필터, AI 코딩 앱, AI 자동화 배송 및 물류, AI 지원 의료 스캔, 나아가서 AI 전쟁에 이르기까지, AI는 이미 우리 주변에서 존재했다. 온라인에서 지금 당신이 보는 내용 대부분은 AI가 당신의 취향을 분석해서 내어놓은 내용이다. AI가 위험하다며 당신이 온라인에 분노를 표출할 때 정작 그 분노를 중재하는 것도 다 AI이다. 누가 무엇을 보는지 결정하는 것도, 어디에 참여하고 또 어떤 식으로 현실을 보도록 할지를 조종하는 것도 이미 AI이다. 더욱이 이러한 예 가운데 그 어느 것도 기술 자체를 다루지 않는다.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우리가 기계 학습, 신경망 또는 알고리즘 계산에 분노할 수 있는가? AI에 대한 신학적 논의를 활발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이 기술 자체에 대한 기본적인 역량을 갖춰야 한다. 고맙게도 목회자, 신학자, 윤리학자에게 다양한 분야에 걸친 AI 적용을 소개할 수 있는 쉬운 글과 팟캐스트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러함에도 이 정도의 학습으로는 보다 세분화된 수준에서 AI를 이해할 수 있는 실무자(AI 엔지니어, 개발자 및 연구원)와의 대화를 대체할 수는 없다.AI에 대한 신학적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기를 원한다면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 기술에 대한 기본적인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 AI가 미칠지도 모르는 기형적 영향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고 싶다면서 새로운 변종 기술이 나타날 때마다 두더지 잡기 게임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AI라는 기술 상자를 열고 내부를 살펴보고 모든 소비자가 만날 수 있는 사용 사례를 숙지하고, 이 문제에 관해서 윤리적으로 대응할 제자를 준비시켜야 한다. AI 실용주의의 위험모두가 “하늘이 무너진다!”라고 외치는 건 아니다. 주변의 구름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도 적지 않다. AI가 몰고 오는 안개에 대해서는 알지만, 심각한 윤리적 질문 없이 무작정 AI를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도 있다. 유용성이 사용을 정당화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이는 실용주의자이다. 그들은 단지 관리적인 질문만 던진다. 시간 절약이 가능할까? 돈을 아낄 수 있을까? 더 많은 사람에게 다가가는 데 도움이 될까?교회와 같은 기관을 이끄는 누구에게나 실용적인 질문은 중요하기에 무시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그런 질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행동은 효율성의 규범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규범에 부합해야 한다. 생성 AI는 얼마든지 (단조롭고 관습적인) 설교를 작성할 수 있다. 그러나 설교는 목회자의 성경적 의무이다. 이 책임을 소홀히 하는 것은 비윤리적일 뿐만 아니라 현명하지 않다. 아무리 발전된 기계라도 예배에 참석한 교인들의 마음을 알 수는 없다. 따라서 그들은 결코 살아 움직이는 진리로 교인들을 인도하기 위해 그때그때 설교를 조율할 수 없다. AI는 결코 설교 내내 우리가 의지하고 또 우리를 인도하는 성령님에게 맞춰질 수 없다는 것이다. 윤리적 신념 없이 AI를 받아들인다면, 윤리적 실책을 범하게 될 것이다. 왜? 윤리적 원칙이 y라는 목표 달성에 x의 수행이 가장 효율적이라면 x를 수행하는 것이 옳다는 식의 공리주의로 그칠 것이기 때문이다. 더 나은 길사도행전 17:26에서 바울은 아덴 사람들에게 말한다. “그분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셔서, 온 땅 위에 살게 하셨으며, 그들이 살 시기와 거주할 지역의 경계를 정해 놓으셨습니다.” 국가 질서를 주권적으로 정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가 지금 초기 AI 시대에 사는 게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도 함께 믿어야 한다. 다윗이 “사는 동안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섬긴”(행 13:36) 것처럼 우리도 이 세대에서 하나님의 뜻을 섬기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지금 우리가 AI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에 관한 내용은 우리 자녀들이 물려받은 윤리적 규범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세대를 초월하여 AI를 깊이 숙고해야 한다.실용주의자들은 미래의 결과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는다. 지금 당장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만 집중하기에 멀리 바라보지 않는 경향이 있다. 두려워하는 사람도 현재에 갇혀있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AI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AI가 우리의 삶을 어떻게 보이지 않게 통합하고 있는지 더 깊이 알려고 하지 않기에, AI에 관한 속보에 단지 반사적으로 반응할 뿐이다. 진짜 눈을 크게 뜨고 감시해야 할, 보이지는 않지만 진짜로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사악한 AI의 운영 방식에는 둔감하면서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양한 역량(신학, 윤리 및 기술)을 가진 사람들을 모아 일상생활에 미치는 AI의 윤리적 파급 효과를 탐구해야 한다. 윤리적으로 허용되는 용도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연구함으로써 평신도가 자신의 AI 사용을 스스로 평가할 수 있는 간단한 규범을 만들 필요가 있다. 두려움에 빠진 비판주의자와 실용주의자 사이의 논쟁에 에너지를 계속 낭비한다면 우리는 AI의 발전 단계에서 어쩌면 중간 단계에 살고 있는 독특한 우리 세대의 책임을 간과할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음을 연 대화이다. 다양한 전문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를 교육함으로써 우리가 원해서 시작하지 않은 이 새로운 세상에 필요한 윤리적 해결책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이 보시기에 꼭 필요해서 AI 세상 속에 우리를 두셨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원제: Should We Embrace or Evict AI in Churche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주일에 일해야 하는 직장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by 김선일·이금주
2023-07-24
엉겅퀴와 가시덤불그리스도인들이 일터에서 겪는 문제와 질문을 두고 김선일 교수와 이금주 교수, 두 신학자가 대화하며 그 답을 찾아 나선다.현재 직장을 구하고 있는 40대 싱글여성입니다. 주일성수를 할 수 있는 회사를 찾고 있습니다. 부모님 도움 없이 혼자 살고 있고, 생활이 넉넉지 못합니다. 주일에 교회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사명이고 기쁨입니다. 서비스 업종(카페 매니저)에서 일해 왔는데, 제가 원하는 조건의 직장은 주일에 일할 것을 요구합니다. 주중에만 일하고 주일에 쉴 수 있는 곳은 그에 비해 조건이 좋지 않습니다. 계속 주일에 쉬며 교회에 갈 수 있는 직장을 기다리는데 잘 나오지 않네요. 우리 교회에는 주일 오전 예배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저녁 시간에 교회에서 영상으로 예배드릴 수 있게 해줍니다. 계속 기다려야 할까요? 아니면 주일에 일하는 곳에서 소명 의식을 갖고 살아야 할까요? 이금주: 저는 이 질문이 한국적 기독교 신앙의 딜레마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미국에 있는 교회가 많이 느슨해졌지만, 과거에는 주일성수를 율법처럼 엄격하게 지켰죠. 한국에서는 여전히 주일성수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김선일: 한국 교회도 과거보다 주일성수라는 개념이 조금 이완됐고, 사회 전반적으로 주일에는 일하지 않는 매장들도 늘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이런 문제로 고민하는 성도들이 있지요. 이: 먼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첫째, ‘주일성수란 무엇인가?’ 둘째, ‘일을 함에 있어서 나의 우선순위가 무엇인가?’ 김: 주일성수의 의미와 일의 목적이군요.이: 먼저 스스로 주일성수의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까? 교회당에 가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냥 교인으로서의 습관입니까? 주일에 일을 해야 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는 제쳐두고, 근본적으로 ‘내가 왜 주일성수를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다뤄야 합니다. 한 주에 하루를 정해놓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는 일을 희생하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사람들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입니까? 만약 후자라면 주일성수의 의미로서 충분하지 않습니다. 마치 구약성경에서 공허하게 제물을 드리러 가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김: 이사야 1:12을 보면 하나님께서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하고 경고하십니다. 이: 이 또한 큰 그림에서 접근해야 할 문제입니다. 두 번째로, 이 일이 왜 나에게 중요한지를 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수박 겉핥기가 됩니다. 질문자가 주일에 일하는 문제로 고민하는 이유가 ‘원하는 조건’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 조건이 무엇일까요? 그 조건이 월급도 많이 받으면서 주일에도 교회 가도록 보장해주는 직장을 얻는 것이라면 주일성수는 어떤 순위에 있는가요? 중요한 질문은 ‘우선순위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입니다. 돈을 적게 벌더라도 내가 주일에는 교회에 가겠다는 마음의 결단을 해야 합니다.김: 질문자의 고민에 이미 우선순위와 가치의 문제가 반영되어 있군요. 이: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우상에 바친 고기를 알면서 먹지는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불신자가 대접할 경우에는 묻지 말고 먹으라고 했습니다. 김: 예, 고린도전서 10장을 보면 27절에서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할 때에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26절)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다음 구절인 28절에서는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고 합니다. 즉, 상대방을 배려해서 어떤 때는 먹을 수도, 어떤 때는 먹지 말아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그 원리가 이 문제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주일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나의 신앙 가치라고 생각하는데도 불구하고, 좋은 조건 때문에 교회를 빠진다면 그것은 신앙 양심에 배치됩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저녁에 예배를 드리고, 주일에도 일터에서 하나님 앞에서 소명을 갖고 일하는 마음과 자세를 갖는다면 그것은 다른 사안입니다. 하지만 단지 조건 때문에 절충한다면 그것은 잘못됐다고 봅니다. 김: 저는 주일에도 하는 일이 사람들의 생명과 기본 생활을 위해서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면 할 수 있는 대로 본인의 신앙 성장을 위해서 자제하기를 권해요. 병원이나 대중교통, 안전을 위한 경비와 관리에는 상시 인력이 요구되니까요. 그런데 사실 주일에도 교회에서 예배 뒤에도 교인들끼리 주변의 식당이나 카페를 많이 이용합니다. 우리는 주일에 그런 곳들을 거리낌 없이 이용하면서 주일성수를 적용한다는 것이 모순이기도 합니다. 이는 안식일의 본질적 의미와도 연관되네요. 이: 맞습니다. 주일에 일을 하느냐, 안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본인 마음의 자세입니다. 내가 주일에 일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신앙에 방해가 되느냐의 여부도 생각해야 합니다. 로마서 14:2에서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먹느냐, 안 먹느냐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신앙에 시험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입니다. 김: 그 말씀이 이 질문자의 상황에는 어떻게 적용될까요?이: 질문자가 주일학교 아이들을 가르쳤던 교사로서 아이들이 ‘왜 주일에 선생님 교회에 안오시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아이들에게 역할 모델이 될 수 있을까요? 이런 것들을 다 고려하는 큰 그림에서 이 문제를 보아야 합니다. 주일성수에만 매달리면 안 됩니다. 김: 사실 주일성수라는 단어 자체를 재고해야 한다는 신학적 의견들도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날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아야 하고,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좀 전에 말씀하신 로마서 14:5에서 바울도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라고 했습니다.이: 저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주일성수만큼 교회학교 아이들에게 어떤 인상을 주느냐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나로 인해서 그들이 시험 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김: 예수님께서도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는 죄에 대해서 거듭 경고하셨지요. 이: 질문하신 분은 교회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기쁘다고 했습니다. 본인이 기쁨을 느낀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원하시는 일일 것입니다. 참고로, 저는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미국 교회에 다닐 때 목사님이 저에게 장년부 성경공부를 맡으라고 하셨습니다. 동양인인 저에게 미국인들 성경공부를 맡긴 것입니다. 몇 년간 장년부 주일 성경공부를 기쁘게 지도한 후에 좀 쉬어야겠다고 했더니, 목사님이 그럼 주일학교 아이들부터 가르치면 정신이 번쩍 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부터 가르쳤는데 저에겐 잘 맞지 않고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4학년 아이가 저에게 귀한 감사의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그 아이는 자폐증이 있어서 당시 초등학교 선생이신 목사님의 사모님도 그 아이 때문에 너무 에너지를 소모하지 말라 충고도 했었습니다. 저는 어떻게 해서든 그 아이에게 관심을 두고, 아이의 말을 들어주고, 성경을 가르쳤더니 1년 만에 다른 아이가 된 것입니다. 교사를 하면서 많이 배우긴 했지만 그래도 저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은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교회학교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은사입니다. 그래서 기쁨을 느끼는 겁니다. 김: 주일성수로 인한 고민으로부터 시작해서, 다른 이들을 섬기는 문제, 그리고 일의 소명과 은사를 탐구하는 과제로 이어지는군요. 이: 이처럼 여러 가지 관련된 사안들의 목록을 만들어서 성경적, 신학적으로 고민해야 합니다. 김: 우리가 문제를 넓고, 깊이 고민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선택해야 할지 지혜를 주시리라 믿습니다.이: 우리는 날마다 기도할 때, 삶의 작은 경험과 일들을 묵상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주일성수, 예배함의 의미,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 일의 소명 등을 돌아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이웃을 섬기는 선택이 무엇인지를 헤아려야 합니다. 김: 지금까지의 대화를 토대로 질문자에게 제가 목회자로서 질문자에게 권면한다면, 좋은 조건을 포기하더라도 당신의 생애를 주관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하겠습니다. 아울러, 어디에서 일의 의미와 즐거움을 느끼고 있는지 돌아보라고 하겠습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얻은 기쁨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은사이므로 거기에 충실할 때 하나님이 그 은사와 소명을 선하게 사용하시는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주일성수
처음
이전
21
페이지
22
페이지
23
페이지
열린
24
페이지
25
페이지
다음
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