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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적인 그리스도인도 예술가로 성공할 수 있을까?
by Andrew Voigt
2023-08-25
정통 교리와 전통 기독교 윤리를 옹호하는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그리스인이 과연 기독교 신앙을 점점 더 적대시하는 예술 분야에 발을 들일 수 있을까? 지난 이천 년 동안 그리스도인은 후원자 또는 예술인으로서 예술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이런 상황은 지난 세기 정도에 들어서 바뀌기 시작했다. 음악, 문학, 미술, 미디어 분야에서 가장 높은 수준을 구현하는 성공한 그리스도인을 만나는 건 이제 당연한 게 아니라 큰 놀라움이 되었다. 그리스도인이 과감하게 예술 분야에 투자하기에는 예술이 너무나도 세속적이고 정통 신앙에 적대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자. 인간의 마음과 생각을 형성하는 잠재력을 지닌 가장 강력한 영역이 바로 예술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이 분야를 마냥 무시하는 게 맞을까? 놀랍게도 예술 분야에 관한 한 교회의 입장은 무관심 내지 완전한 포기이다. 세상 속에 그리스도의 영광을 불어넣는 예술을 창조하는 대신에, 그리스도인들은 그 영역에서 멀어졌고, 그럴수록 예술은 점점 더 세속화되었다. 우리 주변에 널린 예술의 풍경에서 그리스도를 거의 볼 수 없는 건 이제 놀랍지 않다. 예술과 아름다움처럼 강력한 대상은 초월적인 진리와 분리될 때 도덕적으로 잘못된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 이에 대응하여, 그리스도인은 예술계에 만연한 도덕적 타락을 비난하고 항의하면서 더 멀리 후퇴할 수 있다. 아니면 아예 다시 그 무대에 뛰어들어 변명이 필요하지 않은 진리 선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예술의 아름다움을 다시 회복하겠다고 다짐할 수도 있다.그러나 이건 말처럼 쉽지 않다. 왜 많은 그리스도인 예술가가 신앙 해체를 겪는가지난 수십 년 동안 CCM 장르를 접해본 사람이라면 케빈 맥스(DC 토크), 데릭 웹(캐드먼스 콜), 조너선 스타인가드(호크 넬슨)의 신앙 해체 이야기를 알고 있을 것이다. 굳이 언급하자면, 내게 맥스의 해체는 특히 고통스럽다. 왜냐하면 그는 한때 인터뷰를 즐겼던 내가 지금도 가장 좋아하는 보컬리스트의 한 명이기 때문이다. 그는 창의성과 상상력, 흔히 기독교 예술에 결핍되었다는 이 두 가지를 구현한 그리스도인 예술가의 좋은 모범이었다. 그리스도인 예술가들 사이에서 해체주의가 그토록 흔한 이유는 무엇일까? 예술적으로 뛰어난 많은 그리스도인일수록 경력 초기에 아무리 신앙이 신실해 보일지라도 현대 예술과 엔터테인먼트라는 고도로 세속적인 영역에 오래 머물수록 점차 믿음을 잃을 수밖에 없다는 현실은 거의 불가피한 게 아닐까 싶다. 특히 음악 산업에서는 여행과 투어가 중요하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다니면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그들이 주변 사람 대부분에 반하는 신앙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다.또 다른 도전은 CCM이 고도로 수익을 창출하는 산업이 되었다는 점이다. 정통 신앙을 제대로 표현하는 진짜 기독교 노래보다는 신학적으로 모호하고, 공격적이지 않으며, 영감을 주는 노래일수록 많은 돈이 들어올 가능성이 더 크다. 따라서 CCM에는 정말로 잘 봐줘서 “기독교적 음악”이지 문화나 시장의 압력이 조금만 가해지면 당장이라도 무너질 취약한 신앙을 가진 예술가로 넘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왜 기독교 예술가는 각종 논쟁에 침묵으로 일관할까? 기독교 예술가라고 공언하는 인기 있는 예술가들의 또 다른 경향은 낙태나 LGBT+ 문제와 같은 논란이 되는 문제에 관해서 회피한다는 것이다. 비록 신앙 해체까지 가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이들은 일부 청중이 외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철저하게 안전한 신앙만을 추구한다. 그들의 두려움 중에는 근거를 가진 것도 있다. 기독교 신앙의 점점 더 많은 부분이 오늘날 세속 문화에서 옹호될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신앙과 공공연하게 연관되는 것은 온라인 분노, 팬들의 반발, 취소 가능성까지 불러일으킨다. (비신자까지 포함해서) 대중의 지지를 받는 그리스도인 예술가가 도덕성과 윤리에 대한 모든 견해를 공유해야만 할까? 아니다. 하지만 공인이라는 위치를 단지 부담(“내가 행여라도 틀린 소리를 하면 어쩌지?”)으로만 여기는 대신에 은혜롭게 진실을 말함으로 어두운 세상에 빛이 될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여야 한다. 예술 분야의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동기가 청중을 잃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 어떤 적대적인 환경에서도 그들의 신실함을 높이실 거라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동기가 되어야 한다. 신앙을 포기하지 않은 건 말할 것도 없고, 기독교의 정통 견해를 타협하거나 숨기라는 압력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신앙을 지킨 그리스도인 예술가의 좋은 사례가 바로 존 쿠퍼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스킬렛(Skillet)은 몇몇 멤버들의 굴복하지 않는 입장으로 인해 의심할 여지 없이 양극화 밴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규모 군중 앞에서 연주하고 주류 공연과 함께 투어를 진행 중이다. 그들은 침묵하지 않았다. 신실하게 기독교 신앙을 지키기에 미움받을 거라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필요한 것: 변명하지 않는 더 많은 그리스도인 예술가 모든 가수가 스킬렛만큼 큰 관객층을 확보하는 건 아니다. 쿠퍼는 수십 년 동안 이 일을 해왔다. 쿠퍼와 같이 충실한 제자를 키우는 건 결코 쉽지 않고, 그리스도인이라면 결코 명성이나 인기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 쿠퍼처럼 한다는 건 결코 쉽지 않다. 그러함에도 그리스도인 예술가가 두려움과 흔들림 없이 자신의 신앙을 좀 더 담대하게 말한다면, 그들이 추구하는 창작 활동에 대한 지지가 더 늘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사회의 다른 영역에는 명백한 보수 기업 그리고 미디어 기업을 위한 큰 시장이 존재한다.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그리스도들은 같은 생각을 가진 조직과 사역, 예술가들의 지원을 갈망한다. 그들은 또한 “C” 레이블(Christian)을 부끄러워하거나 그로부터 거리를 두려는 그리스도인 예술가보다는, 신앙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이 세상에도 좋은 것이라며 당당하게 믿음을 드러내는 그리스도인 예술가를 지원하고 싶어 한다. 단순히 낙태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데 그치지 않고 창의적인 노력으로 생명의 기적과 기쁨, 생명의 신성함을 아름답게 찬양하는 그리스도인 예술가들을 상상해보자. 이혼과 불신앙으로 인해 분열되지 않은, 온전하고 건강한 가족의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그리스도인 예술가를 상상해보자. LGBT+의 자존심에 맞서 단순히 전통적인 기독교 성 윤리를 옹호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 중심의 결혼이라는 유대 안에서 거룩한 성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기독교 예술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멀리 보기그리스도인은 멀리 보아야 한다. 예술의 포기는 하루아침에 되돌릴 수 없다. 기독교가 다시 한번 예술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려면 수 세기가 걸릴 수도 있다. 그러함에도 기독교가 예술 분야에서 한 번 더 영향력 있는 위치를 되찾기 위해서 신앙 예술가가 취할 몇 가지 조치가 있다. 1. 좋은 예술을 더 가치 있게 만들자.현대 기독교 예술은 대부분이 기껏해야 평균 수준이다. 그중에서도 대부분이 수준 이하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세속적인 상대를 복음화하겠다는 욕심으로 세속 예술을 모방하려 애를 쓴다. 그 결과 우리가 전달하려는 “메시지”와는 별개로 아름다운 예술이 가진 힘의 가치, 그 자체를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술이라는 언어 자체에 더 능숙해야 한다. 우리는 세속적인 예술가들의 작품을 복제하기보다는 관객이 잠시 멈춰서 생각하고 영원을 엿볼 수 있도록 하는,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 2. 인기와 성공이 아니라 신실함을 목표로 하자. 뛰어나기 위해서 시간을 투자하라. 하룻밤 사이에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부지런히 인내하라. 좋은 예술을 창조하는 데 충실하고, 교회에 뿌리를 내리는 데 충실하며, 모든 부분에서 그리스도께 충실하라. 플랫폼의 크고 작고와 관계없이 성공은 그 자체로 이뤄질 것이다. 세상의 성공이 아니라 신실함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의 핵심이다. 3. 도구를 맘껏 활용하라. 기독교 예술가들에게 좋은 소식은 그들이 상상하는 작품을 관객의 손에 전달하기 위해 더 이상 음반사, 에이전트, 미술 큐레이터 및 기타 문지기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소셜 미디어, 스트리밍 플랫폼 및 기타 다양한 도구로 인해 진입 장벽이 낮아졌다.당신은 화가인가? 아니면 스케치 아티스트인가? 업무용 인스타그램을 만들어보라. 혹시 작곡가인가? 집에서 노래를 녹음하고 스트리밍 플랫폼에 바로 출시하라. 당장 일을 시작하라. 그리고 당연히 받아야 한다고 여기는 세상의 관심이 오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마라. 사람의 박수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라. 최고가 될 때까지 당신 자신을 채찍질하라.원제: Can Theologically Conservative Christians Flourish in the Art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시편 1편: 분주한 일상을 극복하는 묵상의 즐거움
by Brian Tabb
2023-08-24
시편의 하나님· 시편 1편: 분주한 일상을 극복하는 묵상의 즐거움· 시편 2편과 복음전도 · 시편 135편: 기쁨으로 모든 일을 하시는 하나님 시편 1:1-2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오로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 시편 1편은 두 가지 (단 두 가지) 삶의 길을 제시한다: 세상의 길과 말씀의 길. “악인들의 꾀를 따르고, 죄인들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는” 사람은 세상의 가치들을 쫓아다닐 뿐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패망에 이르는 넓고 편한 문이 열려 있다(마 7:13).겨가 아니라, 나무가 되어라.시편 1편의 “악인”은 하나님에게서 벗어나 독립을 추구하는 자들이다. 오로지 인간의 관점, 세상의 관점으로 삶을 바라보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라 세상의 기준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다. 때로는 이러한 삶의 방식이 성공과 인기와 번영의 길처럼 보이기도 한다(시편 73편을 보라). 그렇지만 시편 1편은 우리가 궁극적 관점에서 사물을 볼 수 있게 한다: 악인의 번영은 덧없으며, 이는 그들이 바람에 나는 겨와 같기 때문이다.달리 선택해야 할 삶이 있다. 하나님의 교훈에 의지하며 즐거워하는 삶이 그것이다. “의인”은 세상의 지혜와 가치의 빈곤을 알아보며 그래서 하나님이 계시하신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을 추구한다. 이러한 삶은 곧 신앙의 삶이다(예레미야 17:7-8을 보라). 이러한 삶은 지금 그리고 영원히 복되고 열매 맺으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으로 이끈다. 아름답고, 튼튼하고, 물이 풍족하고, 열매 맺는 나무를 그려보라(3절). 바람에 나는 겨가 아니라, 이런 나무가 되어야 한다. 꾸준한 생각과 따뜻한 응답2절이 핵심 구절이다. “오로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 과정에 주목하라: 즐거워함, 그다음에 묵상. 즐거워함은 무언가의 또는 누군가의 아름다움과 가치에 대한 마음의 반응이다. 이 경우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런 반응이다. 하지만 묵상은 신중하고 꾸준한 사고를 요한다. 묵상은 실행과 의지가 모두 필요하다.잘 이루어진 묵상은 즐거움을 제공하고 강화하며 지속시킨다. 묵상은 말씀이 우리의 머리와 가슴과 의지에 더욱 깊이 파고들게 한다. 묵상을 통해서 우리는 “마음이 새로워지고 변화가 일어난다”(롬 12:2). 묵상은 우리의 뿌리가 더욱 깊이 내려가도록 하여, 말씀의 생명수를 더욱더 많이 흡수하게 한다. 묵상 향상하기우리의 삶은 너무나도 분산되어 있다. 우리는 멀티태스킹, 서핑, 스키밍에 능하다. 그러나 묵상은 너무나 힘들어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묵상을 의식적으로 향상해 나가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되도록 일관된 시간과 장소와 계획을 찾자. 그다음에는 천천히 그리고 집중해서 읽자. 다시 읽고 또 읽자. 소리 내어 읽자(시편 1:2에서 묵상을 의미하는 히브리어에는 큰 소리로 읽는다는 뜻이 들어 있다). 기도하는 자세로 읽자. 손에 펜을 들고 읽자. 읽은 본문을 암송하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읽고 내가 본 것을 함께 나누자. 좋은 주석서를 활용하여 성경을 연구하자. 성경 묵상 계획을 세워 기도하고, 나의 계획을 그리스도인 친구에게 들려주자. 하나님이 주신 계시의 말씀의 아름다움과 가치 안에서 즐거워하고 의지적인 묵상을 통해 그 즐거움을 지속해 나가고 강화해 나가는 과정에서 당신에게 시편 1편의 복이 함께하기를. 원제: Psalm 1: When Delight Overcomes Distraction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김은홍
모든 목회자가 강해 설교를 말하기 시작했다
by Sarah Eekhoff Zylstra
2023-08-23
월터 카터가 설교자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확신하기까지는 이 년이 걸렸다. “우리 흑인 교회에서는 말이죠, 부르심을 받으면 바로 즉시 설교 기회가 생깁니다.” 카터도 다르지 않았다. 젊고 카리스마 넘치는 그는 청년부 지도자로 바로 사역을 시작했고, 오래 지나지 않아 일반 성도에게까지 설교할 기회를 얻었다.신학교를 간 적이 없는 카터의 말이다. “제가 틀리지 않았어요.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했어요. 그리고 가르치는 방법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맡은 건 주로 주일학교 공부 수준의 주제였어요. 세 가지 포인트만 잘하면 되는 거죠. 시작을 잘하고, 기발한 예화를 들고, 그리고 결론을 열정적으로 맺는 겁니다.” 약 15년 후, 그는 시카고에 있는 Union Tabernacle Missionary Baptist Church의 담임 목사로 부임했다. 위원회 주도에서 장로 주도의 교회로 변화시키는 데 관심이 있었던 카터는 Nine Marks of a Healthy Church(건강한 교회의 아홉 가지 지표)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나는 교회가 앞으로 가야 할 방향을 보여주기 위해서 교인들이게 이 책을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첫 번째 지표인 강해 설교는 나의 몫이었습니다.”자세한 내용을 알아보기 위해 그는 H. B. 찰스의 교회에서 열리는 설교 콘퍼런스에 참석했다. 여러 선생에게서 배우고 싶었던 그는 데이브 헬름의 클래스에 가장 먼저 앉는 실수(?)를 저질렀다.“한마디로 나는 완전히 매료됐어요. 사흘 내내 하루 종일 그의 수업을 들었어요. 다른 사람 클래스는 아예 참석도 안 했지요. 완전히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카터의 그날 경험은 사실상 헬름 자신이 25년 전 영국인 목사 딕 루카스로부터 강해 설교를 처음 배웠을 때 느꼈던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헬름의 말이다. “내 속에서 전구가 켜진 것 같았지요. 하나님이 실제로 말씀하시려는 명령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진 것 같았습니다.”단지 배우는 데에 만족할 수 없었던 헬름은 2001년에 그와 몇몇과 힘을 합쳐서 루카스의 원리를 전파하기 위한 Charles Simeon Trust(CST)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전구는 점점 더 많이 켜졌다. “2007년 다시 시작했을 때는 워크숍은 고작해야 10개 남짓이었어요. 그러나 지금은 오로지 여성을 위한 주제만 25개를 포함하여 전체 150개 넘게 보유하고 있습니다.” 현재 CST의 여성 워크숍 책임자인 콜린 맥패든의 말이다.워크숍 책임자 케빈 워커에 따르면 지난 일 년 동안 전 세계에서 6,300명 이상이 워크숍에 참석했다. 거기에 더해서, 온라인 참석자도 6,300명에 이른다. 몇 달 전 나이로비에서 모임을 연 개혁파 케냐인 크리스 키아기리의 말이다. “여기 와서 이런 경험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카터가 말을 이었다. “나는 우리가 대각성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팬데믹은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에 신경 쓰지 않는 세상에서 하나님 말씀의 필요성을 분별하도록 우리를 떠밀었습니다. … 그 결과 지금 복음이 역사하고 있습니다.”무의식적 무능CST를 시작한 것은 헬름과 College Church의 켄트 휴즈 목사를 중심으로 한 일단의 목회자들이었다. 그런데 처음에만 해도 그들이 모르던 게 있었다. 설교에 있어서 정작 많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바로 자신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요즘 CST 팀은 그것을 “무의식적 무능”이라고 부르는데, 4단계 교육의 첫 번째 과정이다. 물론 당시에는 휴즈나 헬름도 그런 용어를 쓰지 않았다. 헬름이 말하는 휴즈는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믿는 성경에 푹 빠진 사람”이다. 헬름은 일리노이 휘튼에 있는 College Church에서 휴즈의 직원으로 일했다. 휴즈와 헬름은 모두 성경 속 하나님의 계시가 설명되고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건 모세가 십계명을 설명하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계시하셨으며, 바울이 청중에게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무엇을 이루셨는지를 가르쳤던 시절부터 이어진 사실이었다.그리고 두 사람 모두 설교가 여러 세기에 걸쳐 다양한 수준의 역량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대부분 설교자가 성경을 사용하는 형태를 보면 일종의 주제-교리적 설교라고나 할까요?” 미국 장로교 서기이자 Christ-Centered Preaching: Redeeming the Expository Sermon의 저자인 브라이언 채펠의 말이다. 설교자는 용서, 섭리, 결혼 같은 주제를 일단 먼저 선택하고 거기에 맞는 성경 구절과 철학을 조사함으로 일종의 교리 설교를 발전시킨다. “시사적 메시지가 항상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거기에도 종종 깊고 아름다운 진리로 가득 차 있으니까요.”그러나 채플도 The Gospel Coalition의 공동 설립자인 돈 카슨의 눈에 보이는 것과 똑같은 잠재하는 위험을 본다. 카슨의 말이다. “주제 설교에서 당신의 의제를 결정하는 건 다루는 주제입니다. 그 주제는 설교자의 상상을 자극하는데, 현재의 필요 또는 이 주제가 필요하다라는 인식 때문이죠. 지난 몇 년 동안 팬데믹을 거치면서 ‘정체성’에 관한 설교가 얼마나 많이 선포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사실 20년 전만 해도 그 주제로 설교하는 사람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물론 현재 논의되는 내용에 주의를 기울이는 건 유익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택하는 주제의 우선순위가 성경 말씀의 인도함이 아니라 문화에 의해 더 많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은 슬픕니다. 이게 반해서 좋은 강해 설교는 교인 중에서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주제를 놓고도 충분한 성경 자료를 바탕으로 다루는 일입니다. 그게 바로 설교자의 사명입니다. 인기 있는 주제로 구성된 설교 시리즈는 거의 항상 성경이 매우 중요하게 취급하는 일부 주제를 무시합니다. 그런 함정에 빠지는 순간, 설교자는 하나님의 백성을 아사 상태에 빠뜨립니다.” 지난 세기 동안 많은 교회가 주일 아침 예배는 복음 전도를, 주일 저녁 예배는 성숙한 신자들과 함께하는 더 깊은 성경 연구 시간이었다는 게 카슨의 말이다. 그러나 이런 모델이 하나 간과하는 게 있는데, 죄를 자각하고 용서를 확신하는 기본적인 복음 메시지는 가장 성숙한 신자에게조차도 정기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복음이 단지 기독교 신앙의 기초에 해당하는 ABC가 아닙니다. 복음은 기독교 신앙의 전부, A부터 Z까지입니다.” 카슨은 친구 팀 켈러를 인용하며 이렇게 덧붙인다. “어떤 면에서 복음은 모든 것을 포용합니다. 그 포용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을 가리지 않습니다.” 또 다른 문제가 있는데, 다름 아니라 최근 수십 년 동안 “구도자에 민감한” 교회가 채택한 모델이다. 그런 교회는 신자와 불신자 사이의 격차를 해소하는 쉬운 방법으로 주제 설교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다. “설교자가 성경을 있는 그대로 설교하지 않는다면, 비록 4, 50년 동안 교회를 다니며 수천 편의 설교를 들었다고 해도, 교회가 이사야나 요한복음 또는 로마서가 말하는 진짜 메시지가 무엇인지 영영 모르는 신자들로 넘칠 수도 있습니다. 최고의 설교는 교인들에게 성경을 읽는 바른 방법을 가르칩니다!” 카슨의 주장이다. 주제 설교에서 강해 설교로딕 루카스가 1991년 시카고 지역 목사들의 초대를 받고 방문했을 때, 설교의 발전을 갈구하던 휴즈와 헬름은 그를 만나러 갔다. 그때까지 루카스는 이미 삼십 년 동안 런던의 St. Helen’s Bishopsgate에서 강해 설교를 하고 있었다. 그의 교회는 부흥했고, 사업가들을 위한 성경 강의도 성공적이었다. 오 년 전에 그는 목회자를 위한 설교 세미나 Proclamation Trust를 시작했다.“딕은 고린도전서 13장의 몇 가지를 살펴보았고, 켄트와 데이브, 그리고 그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에게 강해 설교라는 게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하다는 사실을 확신시켰습니다.” CST의 사역 책임자인 로버트 키니의 말이다. 고린도전서 13장은 단지 사랑에 대한 감상적인 송가가 아니라는 게 루카스의 주장이었다.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을 보면 사실상 그건 고린도 교회에 대한 책망임을 알 수 있다.“딕은 제대로 본문을 관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말씀의 특정 부분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성경 전체가 풀어내는 논증 전체에 어떻게 이바지하는지 알려주었습니다. 이전에는 우리는 그런 식으로 성경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 우리가 하는 설교는 종종 마치 특정 구절을 독립된 내용으로 다루면서 설교했으니까요.”루카스가 보여주는 성경 관찰 방식은 짜릿하고 생명을 주는 경험이었다고 헬름은 고백했다. 더 배우고 싶었던 그는 시카고에서 세인트루이스까지 가는 다섯 시간 동안 루카스의 운전기사를 자청했다. 단지 그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서였다. 강해 설교는 정의하기 어렵지만 동시에 또 쉽다. 가장 기본적으로 말해서, 내가 정한 주제를 뒷받침하거나 설명하기 위해 성경 구절을 찾는 대신에 성경 구절로부터 내용을 뽑아서 설교하는 것이다. 헬름은 강해 설교를 이렇게 설명하곤 한다. “텍스트의 모양과 강조점이 설교의 모양과 강조점을 알려줄 때입니다.”해당 구절이 원래의 맥락에서 원래의 청중에게 무엇을 말하는지 먼저 파악한 다음에, 그 메시지를 지금 청중에게 적용함으로써 강해 설교를 할 수 있다는 게 헬름의 설명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레위기의 율법이든 요한계시록 속 말 탄 사람이든, 일단 그 구절이 어떻게 성경의 요점을 가리키고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의 요점을 먼저 알아야 한다. 성경의 요점이라는 측면에서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는지를 알고 싶은 목회자에게 콜린 스미스가 제안하는 방법이 있다. “이슬람 모스크나 유대교 회당에서 당신이 설교하면 과연 쫓겨날까요?” “나는 …. 내가 전에 했던 설교 중 일부는 기독교의 내용이 아니라(sub-Christian)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몇 년 전 Simeon Trust 모임에서 콜린 스미스가 말했다. “특히 구약성경을 본문으로 한 경우에, 하나님과 삶, 성경, 경건 등에 관해 많은 좋은 것을 말했지만, 그중에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명확하게 인도하지 못한 설교가 꽤 있었습니다.”따라서 훌륭한 강해 설교는 항상 성경의 요점인 예수님을 가리켜야 한다. 의식적 무능“헬름과 휴즈는 오후 시간 어느 시점에 자기들이 성경을 많이 안다고 생각하다가, ‘이봐, 우리가 지금 문제가 많아, 배울 게 너무 많아’라는 식으로 바뀌었습니다.” 키니의 말이다. “그들은 더 나아지겠다는 데에 열광적으로 헌신했습니다.”그리고 그들은 많이 배웠다. 그 결과 전에는 결코 다루지 않았을 구절을 설교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 그리고 다음 주일에 무엇을 설교할까 하는 걱정을 벗어던졌고, 성경에 대한 더 깊은 이해 속에 성장했다. 무엇보다 자신들이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메시지를 전한다는 확신을 얻었다.그 후 오 년 동안 휴즈와 헬름은 되도록 많은 시간을 루카스와 함께 보냈다. 헬름은 런던에서 반년의 안식년을 보내기도 했다. 그들은 사역을 좋아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교사로서 딕의 사역은 재현 불가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딕은 사실 약간 특이한 사람이었지요.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어요. 거의 유기적으로 나타나는 건데요. 그렇다고 거기에 반드시 무슨 원칙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이게 바로 내가 하는 일이고, 왜, 그리고 어떻게입니다’라는 식의 설명이에요.”좀 이상하긴 해도, 정작 거기에 설명을 하는 건 헬름이다. “나는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하는지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루카스의 작업을 역설계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 과정을 인턴들에게, 또 연례 Wheaton Workshop에서 다른 목사들에게 설명했다. 그리고 수업을 강화하는 작은 과제까지 만들었다.“2000년까지 약 백 명의 사람들이 Wheaton Workshop에 왔습니다.” 키니의 말이다. 그들이 가졌던 유일한 불만은 시카고가 일부 참석자에게 너무 멀다는 것이었다.그렇다 보니 헬름은 지역에 기반을 둔 워크숍과 인턴십, 목회 레지던트 및 자료 제공 등의 사역 잠재력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2001년에 헬름과 공동 목사 존 데니스, 휴즈, 그리고 몇몇 다른 사람들은 ‘얼마든지 학습이 가능한 게 설교다’라고 믿었던 19세기 목사의 이름을 딴 Charles Simeon Trust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시므온은 죽기 전까지 영국 성공회 목사 3분의 1에게 설교를 가르쳤다).그 후 삼 년 동안 거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헬름에게 CST를 운영하는 건 전혀 시간이 들어가지 않는 일이었다는 게 키니의 말이다. 게다가 헬름은 거기에 시간을 쓰기에는 다른 사역이 너무 바빴다. 헬름과 데니스는 1998년 시카고에 Holy Trinity Church를 세웠고, 2002년에 두 번째 교회 캠퍼스를 시작했습니다.마침내 헬름은 모든 사역을 혼자 하기에는 도무지 불가능하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고, 키니를 고용했다. 사역의 인수인계는 길지 않았다. “이게 캘거리에서 워크숍을 주최하는 사람 전화번호고, 이게 Spokane에서 주최하는 담당 전화번호야. 그리고 리치먼드 쪽은 전화번호를 찾아봐야 해. 아, 그리고 필라델피아 제십장로교회의 필 라이큰 목사가 그쪽에서 시작하고 싶어 하던데, 잘 도와줘.” 키니는 헬름의 인수인계를 이렇게 설명했다.의식적 유능처음에 키니가 하려고 한 것은 일주일에 한두 번 진행되는 대면 수업을 중심으로 루카스의 Proclamation Trust를 따라 CST를 패턴화하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 영국은 전국이 두 시간 거리 내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은 아니지요. 둘째, 미국 교회는 영국 교회와는 좀 다른 방식으로 자격증(credentials)을 강조합니다.”대부분의 미국 교회는 공인된 신학교에서 학위를 받은 목회자를 기대한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그러나 학위는 CST가 제공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또한 원래 계획했던 책, 팟캐스트, 그리고 기사 등의 자료를 제공할 시간이나 인력도 없었다.그래서 키니와 헬름은 집중 영역을 더 날카롭게 만들었다. “우리가 사용한 은유는 스프링 트레이닝입니다. 메이저리그에서는 올스타든 신인이든 매년 2월에 애리조나나 플로리다로 가서 기초부터 다시 배웁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하려는 일입니다.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설교할 수 있도록 근본적인 확신과 기술을 되찾도록 돕는 것이지요.” 키니의 말이다. 전임 목회자들이 수업받을 수 있도록, 그들은 지역 사흘간 진행되는 워크숍과 온라인 사전 녹화 수업에 집중했다. 그리고 보다 효과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소크라테스식 방법을 사용했다.남아프리카에서 Simeon Trust 워크숍을 가르치는 머빈 엘로프의 말이다. “많은 달 동안 저는 신학교에서 설교 수업을 진행했는데, 주로 말을 하는 건 나였어요. 결국 학생들이 나에게서 무언가를 끄집어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지요. 그런데 이제는 질문을 통해 그들이 스스로 원리를 보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내게는 큰 기쁨입니다.”CST 도구의 명확성과 의도성이 “학생들이 정확하고 적절하게 설교하는 데 정말로 큰 도움을 줍니다”라는 게 그의 말이다. “놀라운 일입니다. 성경은 더 이상 나에게 친숙한 이야기를 엮어 놓은 게 아닙니다. 이 훈련을 통해 전에는 한 번도 만져 본 적이 없는 성경 구절과 레위기 같은 책까지도 다룰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카터의 말이다. 어려운 성경 중 하나가 까다로운 이미지로 악명 높은 요한계시록이다. 카터가 이어서 말했다. “방금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에서 요한계시록에 관한 CST 워크숍을 인도했습니다. 내가 이 시간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때, 그만 눈물이 날 뻔했습니다.”그게 그가 목격한 유일한 변화가 아니다. “설교가 무엇인지, 그리고 적절하게 설교하는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우리 교회가 이렇게 눈을 뜨게 된 것은 정말로 놀랍습니다.” 카터의 말이다. 지난 몇 년 동안 그의 회중은 성경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게 되었고,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그의 설교에 더욱 뜨겁게 반응했으며, 교회가 장로들을 선임하는 데에 관해서도 더 마음을 열었다.확장설교자가 말하기 시작할 때, CST 워크숍도 크기 시작했다. 2008년이 되자, 여성 사역자들의 요구가 늘어나면서 이 워크숍을 여성에게까지 확대해야 할지를 이사회가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맥패든은 성경 이해와 교육에 대한 여성 워크숍을 진행했다.기본적인 골격은 같았지만, 설교 대신에 성경 공부, 커리큘럼, 자녀 교육 커리큘럼에 더 많은 내용을 할애하도록 내용이 구성되었다. “남녀 워크숍의 가장 큰 차이점은 여성 워크숍은 여성 성경 교사가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성이 여성을 가르치길 원합니다. 남성 워크숍이 신학교 교수가 아닌 설교 목사가 이끄는 것처럼 여성 워크숍은 교회에서 정기적으로 강해를 가르치는 여성이 주도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보완주의를 구현하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여성이 여성을 가르쳐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렇기에 워크숍에는 여성을 교육하는 여성이 있습니다.” 맥패든의 말이다. 첫 번째 워크숍이 매진되었다고 맥패든이 말했다. “믿을 수 없었습니다. 이거, 더 해야 하나라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우리는 워크숍을 두 개로 확장했습니다. 계속해서 확장했고 이제 내년에 제공할 여성 워크숍은 25개입니다.” CST의 모든 워크숍이 미국에서 하는 건 아니다. 2013년이 되자, 쿠바와 인도, 케냐의 목회자들로부터 지역 워크숍에 대한 요청이 들어왔다. 국제 워크숍의 경우에 참석자가 비용을 지불하지 않기에 키니는 이사회의 의견을 물었다.“전 세계에 오픈하자”라는 게 이사회의 결정이었다. “지난 십 년 동안 2개국에서 31개국으로 진출했습니다.” 케니의 말이다. 중국이나 러시아와 같이 운영하기 어려운 곳을 제외하고는 모두 대면으로 이루어지며, 중국과 러시아에서도 조만간 CST 대면 워크숍이 열릴 예정이다. 비슷한 시기에 헬름은 Expositional Preaching: How We Speak God’s Word Today를 출판했다. “이 책의 출간은 확장할 준비가 된 성숙한 모델을 보여주었습니다”라고 키니가 말했다. 출간과 국제 사역을 오가며 “사역의 모든 부분이 빠르게 증가했습니다.”2019년까지 CST는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며 합숙 교육을 다시 한번 살펴볼 준비가 되었다. 가을에 시카고 코스를 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코로나에 직면했다. 축소“당연히 대면 행사는 불가능해졌습니다.” 키니가 말했다. CST 직원은 온라인 워크숍으로 전환했지만 출혈을 멈출 수 없었다. 시카고 과정 등록이 어려움에 빠졌고, CST는 35개의 워크숍을 취소해야 했다. 이것은 그해에 제공되는 과정의 40퍼센트 이상이었다. 2021년에는 71개를 연기하거나 취소했다. 온라인 과정 등록자도 줄었다.프로그램 감독을 위해 시카고로 이사한 제레미 닉스의 말이다. “프로그램을 시작하고 6개월 후에 코로나를 만나는 것보다 더 실망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최악이었어요. 지난 사 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습니다.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회복이 가능할까? 아니면 CST는 단지 찻잔 속 태풍에 불과했던 걸까? 다시 확장믹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등록자를 채우고 교육 과정 준비는 엄청나게 힘들지만, 매일 하는 수업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일입니다. 하루 종일 내 속에서 에너지가 사라지지 않는 게 신기해서 나 자신을 몇 번이나 발로 찹니다. 정말 최고예요.” 천천히 등록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코로나는 실로 많은 방식에서 세상을 바꿨습니다.” 믹스의 말이다. 그 결과 많은 사람이 교회를 재평가하게 되었다. 또 다른 변화는 모든 목사가 자신의 설교를 스트리밍하기 시작했다. “시카고 코스에 온 사람들 가운데 세 명은 자기네 학교 졸업생이 하는 설교를 듣고서 ‘어디서 그런 법을 배웠지?’하고 물어서 온 사례가 있어요.” 믹스가 말했다.2022년, CST 워크숍 등록은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나이로비에서 라스알카이마에 이르기까지 설교를 배우려는 목회자들이 다시 대면으로 모였다. “훈련이 참석자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에 관해서 수천 개의 간증문을 줄 수 있습니다. 나는 일 년에 15-20번 워크숍에 참석합니다. 비행기 타는 것을 좋아하진 않지만, 목회를 해본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신선한 눈으로 접하기 위해서 비행기를 타는 것은 가치가 있습니다.” 키니의 말이다. 탈진 직전의 목회자들이 새로운 동기를 찾고, 외로운 목회자들이 동지를 찾고, 고군분투하는 목회자들이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는 모습을 키니는 목격했다. CST는 또한 그들 주변에서 더 큰 움직임이 전개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강해 설교가 크게 부활했습니다.” 채플이 말했다. 그는 2005년에 출판된 자신의 책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냥 무미건조하게 주석이나 빠는 게 강해 설교라는 개념을 바꾸고 싶었습니다. 본문에 충실할 뿐 아니라 삶에 적용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본문을 보는 것이 강해 설교라는 점을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측면에서 점점 더 많은 방법을 발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The Gospel Coalition 이사로서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텍스트의 설명과 더불어서 복음이 어떻게 동기를 부여하고 또 적용까지 가능하게 하는지를 결정하는, 두 가지 측면에서 나는 설교에서 큰 회복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복음이 없는 설교는 단지 바리새인일 뿐입니다.”시카고에 있는 카터의 교회는 또 다른 일곱 명을 CST 워크숍에 보냈다.카터는 고백한다.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를 적절하게 표현할 단어를 찾지 못하겠습니다. 돌이켜보면, 이 일로 인해 내 인생에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고 생각할 때마다 말문이 막힙니다.”헬름의 말이다. “나에게는 CST와 관련된 모든 것을 압도하는 핵심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모든 것은 다 주님이 하십니다. 우리 같이 미약한 인간에게 어울리지도 어떤 영향력이 있다면, 그것은 다 주님의 손길입니다. 우리는 그가 사용하는 도구의 작은 부분에 불과하고, 모든 찬양은 오로지 주님만이 받으셔야 합니다.”원제: Why Everyone Started Talking About Expositional Preaching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그들의 마지막 설교에서 배우다
by Steve Bateman
2023-08-22
예수님의 마지막 공식 설교는 서기 33년 3월 31일 화요일 또는 그즈음에 있었다. 마태복음 23:1-39에 나오는 설교 내용은 위선, 특히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 교만한 설교자에 대한 경고이다. 4월 3일 금요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설교자가 역사상 가장 비범한 겸손함을 보여주며 예루살렘 도성 밖에서 처형당했다.그의 마지막 설교와 마지막 호흡 사이에는 딱 사흘이라는 간격이 있었다. 모든 목사는 마지막 설교를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과 달리 우리 대부분은 무슨 설교를 할지 알 수 없다. 다음은 역사에서 만나는 몇 번의 사례이다. 장 칼뱅세상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개혁을 이끈 칼뱅은 성경 48권을 주석했다. J. I. 패커는 기독교강요를 “문학계의 불가사의”라고 불렀다. 이 모든 집필 과정에서도 칼뱅은 보통 사람이라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빡빡한 설교 일정을 유지했다. 주일에 두 번, 주중에 여러 번 설교했는데, 평균 “두 주마다 총 열 번의 새로운 설교”를 했다.1564년 2월 6일, 칼뱅이 의자에 앉은 채로 교회로 옮겨졌을 때, 모든 사람은 그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테오도르 베자는 칼뱅이 “천식 때문에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 상태에서 설교했다고 썼다. 육체의 고통과 연약함 속에서 이 위대한 개혁자는 마지막 설교를 선포했다. 나는 그날 칼뱅이 설교한 내용을 찾지 못했다. 단, 그는 임종을 앞두고 여호수아서 주석을 완성했다. 그 서론에서 칼뱅은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위해 재능 있는 지도자들을 일으키셨다가 없애시기도 한다고 썼다. 그리고 “그러나 그분은 그 자리에 꼭 필요한 다른 사람들을 항상 준비하신다. … 그의 강력한 능력은 결코 사람의 능력에 달려있지 않다. 그러나 그는 보기시에 좋은 적절한 후계자를 때에 그때그때 맞춰서 찾아내신다”라고 덧붙였다. 며칠 후 1564년 5월 27일에 칼뱅은 54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리고 아무런 표시도 없는 무덤에 묻혔다.존 플라벨칼뱅의 사역은 대부분의 미국 목회자라면 결코 견디지 못했을 환경에서 무려 41년 동안 설교한 존 플라벨에게 영향을 미쳤다. 옥스퍼드에서 교육받은 그는 성경 강해와 마음을 움직이는 설교로 유명했다. 그러나 찰스 2세 치하에서 국가는 설교 내용과 예배 형식, 그리고 모임 장소까지 일일이 지시했다. 국가의 정책에 반대했던 플라벨은 교회에서 파문당했고, 5마일 이내 교회 접근이 금지되었다. 그는 자기 집에서든, 다른 사람의 집에서든, 밤늦은 숲에서든 자신에게 맡겨진 양 떼를 돌보며 여러 해 동안 불법 설교를 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조나단 에드워즈와 조지 휫필드를 포함한 후세의 설교자들에게까지 깊은 영향을 미친 여섯 권의 두꺼운 책을 출판했다. 1691년 6월 21일, 엑서터를 방문한 플라벨은 고린도전서 10:12을 설교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닷새 후에 그는 64세의 나이에 뇌졸중으로 죽었다. 조나단 에드워즈플라벨은 “모든 미국 신학자 중 가장 뛰어난”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에드워즈가 살아있는 동안 설교집 17권이 출판되었지만, 그 이후로 더 많은 설교집이 나왔다. 그의 모든 작품은 현재 예일대학교출판부(Yale University Press)에서 출판한 26권에 담겨있다. 에드워즈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설교인 “진노한 하나님의 손에 잡힌 죄인들”로도 유명하다. 1758년 1월 15일 매사추세츠 스톡브리지에서 행한 고별 설교는 예일 컬렉션에 포함된 그의 마지막 설교이다. 설교 본문은 누가복음 21:36이었다. 현존하는 내용이 희미하기는 하지만, 율법과 복음을 제시하는 에드워즈 특유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는 회중에게 모든 사람이 심판 때에 그리스도 앞에 나타나게 될 것이며, 그날에는 “두려운 일이 많겠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장차 올 그 두려움을 피할 방법”이 있다고 권고했다. 두 달 후, 천연두 접종에 실패한 그는 1758년 3월 22일 54세의 나이로 프린스턴에서 죽었다. 조지 휫필드역사가 마크 놀은 영국 태생의 조지 휫필드를 “조지 워싱턴 이전까지 가장 잘 알려진 미국인”으로 평가한다. 설교를 들으려고 온 군중을 수용할 건물이 없었던 당시에 그는 종종 옥외에서 설교해야만 했다. 평생 그는 18,000회 이상의 설교를 했고, 두 대륙에 걸쳐서 그의 설교를 들은 사람은 무려 천만 명을 넘었다. 1770년 9월 29일, 뉴햄프셔 엑서터에서 휫필드는 무려 6,000명의 청중을 향해서 두 시간 동안 노천 설교를 했다. 그 설교 마지막에 그는 이렇게 외쳤다. “공로로! 공로로! 사람이 공로로 천국에 간다고? 차라리 모래로 만든 줄을 타고 달에 오르라고 하십시오.” 그날 밤 피로에 절어서 잠자리에 든 55세의 그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찰스 스펄전역사상 설교가 가장 널리 읽힌 설교자인 스펄전은 다른 어떤 목회자보다도 설교가 많이 인용되었다. 2,500만 단어로 이뤄진 그의 설교가 지금 63권의 인쇄본으로 제공된다. 이 런던 목사의 삶은 고통, 반대, 상실, 우울, 육체의 고통으로 점철되었다. 그는 극심한 고통을 주는 통풍을 “바이스에 발을 넣고 최대한 조이는 아픔”으로 묘사했다. 그러함에도 그는 주일마다 강단에 서서 설교했다. 1891년 6월 7일, 병든 스펄젼은 사무엘상 30:21-26을 본문으로 그의 마지막 설교를 선포했다. 그가 평생의 고통을 통해 배운 것으로부터 교인들은 많은 유익을 얻었다.믿음이 적은 자들, 낙담한 자들, 두려움이 많은 자들, 마음이 연약한 자들, 노래하는 것보다 한숨을 더 많이 쉬는 자들,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자들, 거룩함에 대한 열망은 크지만 영적 투쟁에서 항상 패배하는 자들이여, 절망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당신의 이름으로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모든 자녀에게 사랑과 은혜와 호의를 베푸실 것입니다.1892년 1월 31일, 프랑스 남부의 따뜻한 곳에서 회복 중이던 스펄전은 57세의 나이에 통풍과 신부전으로 죽었다. 마틴 로이드 존스대부분의 런던 교회가 쇠퇴할 때도 웨스트민스터 채플(Westminster Chapel)은 로이드 존스의 지도력 아래에서 성장을 구가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이래, 그의 사역은 그곳에서 30년 동안 계속되었다.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설교자의 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그는 강해 설교를 고집했으며, 이를 “타오르는 논리”라고 정의했다.로이드 존스는 영국 전역에서 설교하면서 마지막 나날을 보냈다. 1980년 5월 18일, 그는 웨일스의 애버리스트위스에서 시편 2편을 설교했다. (그는 그 본문을 가지고 여러 차례 설교했는데, 그 하나는 온라인에서 들을 수 있다.) 암으로 약해진 몸을 이끌고서 그는 1980년 6월 8일 영국 바콤에서 여호수아 4:6을 가지고 마지막 설교를 했다. 7월 26일에 그는 이안 머레이에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설교할 수 없게 된 상황이 매우 힘들 거라고 말하곤 하는데요. 아뇨, 설교 못 해서 힘든 거 조금도 없습니다. 나는 설교에 의지해서 살지 않았으니까요.”마틴 로이드 존스는 1981년 3월 1일, 81세의 나이로 죽었다.그들의 마지막 설교에서 배우는 네 가지 교훈1. 모든 목사는 마지막 설교를 한다.어쩌면 그건 최고의 설교도 또 훌륭한 설교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마지막 설교가 좋은 설교가 되도록 해야 한다. 좋은 설교를 만드는 요소가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할 말이 많지만, 디모데후서 2:15에 드러난 두 가지 특징은 기본이다. 바로 성품과 능력이다. 성품과 관련하여 설교자는 자신을 겸손히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그리고 설교하는 내용을 삶에서 실천해야 한다. 설교자라면 디모데전서 3장의 기준에 따라 “책망할 것이 없는”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온전한 자격을 갖춰야 한다. (슬프게도, 위에서 다룬 사례가 공적인 삶에서는 이 기준에 모두 다 부합하는 건 아니다.) 능력에 있어서, 설교자는 말씀을 올바로 다뤄야 한다. 힘들더라도 주석 작업을 성실하게 해야 한다. 그래서 성경 본문을 능숙하게 설명하고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또 듣는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알려줘야 한다. 2. 모든 목사는 불완전한 성화 상태로 마지막 설교를 할 것이다.맹점이 가져다주는 결함에서 자유로운 목회자는 없다. 그리고 그건 여기에서 논의된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마지막 설교와 마지막 숨결 사이 어느 시점에서 칼뱅은 “나는 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는 데 수없이 실패했다”라고 고백했다.이런 고백은 결승선을 앞에 둔 목회자 대부분이 하는 말이기도 하다. 3. 모든 목회자는 마지막 설교를 좋은 설교로 만들 수 있다.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하는 유명 목회자를 보면서 세상은 즐거워하고 조롱한다. 난파선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마지막 설교가 좋은 설교가 되어야 한다. 마지막 설교라는 것을 알고 하는 사람은 없다. 언제가 마지막 설교일지 모르는 우리는 모든 설교를 좋은 설교로 만들어야만 한다. 좋은 설교를 할 수 없다면, 아예 설교하지 말아야 한다. 4. 모든 목회자는 섭리가 가져다주는 역경이 필요하다.많은 교인을 끌어모으는 목회자도 있다. 스펄전의 말을 빌리자면, “그분의 이름으로 위대한 일을 하십시오”에 해당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은밀한 곳에서 충실하게 수고한다. 그리고 채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잊힐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마지막 설교가 정죄하는 교만을 키우는, 숫자가 가져다주는 성공이라는 유혹이 언제라도 당신을 찾아올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역경과 성공을 같이 주신다. 하나님의 사랑인 것이다.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고후 1:9).겸손하게 하시는 그분의 자비로움은 오늘도 우리로 하여금 마지막 설교를 준비시키신다. 원제: You Don’t Know When Your Last Sermon Will B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먹구름 틈새에서 희망의 빛줄기를 찾아
2023 한국 기독교 분석 리포트 리뷰
by 김선일
2023-08-21
한국 기독교 분석 리포트: 2023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의식조사가 발간됐다. 이 조사는 1998년부터 한국인의 종교 실태와 신앙 의식을 파악하기 위해서 시작되었고, 2012년부터 5년 단위로 이번과 같은 체계를 갖추었다. 이 조사는 현재 한국 기독교에 대한 가장 광범위하고 다양한 영역에 대한 종단연구의 성격을 지닌 가장 유용한 자료를 제공한다. 그동안 한국 기독교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조사 결과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번 조사 역시 예외가 아니다.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한국 사회 전체적으로 종교인구는 지속해서 감소하고 있다. 20대와 30대의 비종교화는 더 심해지고 있다. 종교 이탈률에서 개신교가 가장 높다. 교회 다니다가 떠난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그 추세 또한 꾸준하다. 기독교의 핵심 교리에 대한 개신교인들의 믿음과 윤리적 신념도 약화하고 있다. 교회 다니지 않는 그리스도인, 이른바 ‘가나안성도’는 조사 때마다 올라서 이제 거의 30퍼센트에 다다른다. 2012년 조사에서 10.5퍼센트였는데, 2017년 조사에서는 23.3퍼센트, 이번 2023년 조사에서는 29.3퍼센트까지 치솟았다. 개신교인 10명 가운데 3명이 정기적으로 출석하는 교회가 없는 셈이다. 비종교인들의 종교별 호감도에서 개신교는 불교(32.9%)와 천주교(29.9%)는 물론이고 유교(11.3%)보다도 낮은 6.8퍼센트가 나왔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지만, 개신교에 대한 일반인들의 평가가 이제는 종교로서의 영향력을 거의 상실한 유교나 토속 신앙이나 미신 취급받는 샤머니즘(3.9%) 사이에 위치했다는 결과는 쓰라리다. 그런데 이번 조사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한국 교회가 가능성과 방향성의 좌표를 찍을 수 있는 몇 가지 결과들이 있다. 이를 긍정적인 혹은 희망적인 결과라고 말하면 자기 위로의 정신 승리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희망을 찾아서 교회의 사역을 보완하고 갱신하기 위한 지표로 본다면 유용하리라 본다. 이러한 차원에서 다음의 열 가지 결과에 주목한다. 1. 젊은 기독교: 29세 이하에서 개신교 인구는 불교와 천주교에 비해서 훨씬 높다. 20대의 개신교 인구는 11퍼센트로 불교(3.5%)보다는 3배, 천주교(4.5%)보다는 2배 이상이 높다. 30대에서도 개신교 인구는 14.6퍼센트인데, 이는 불교(4.7%), 천주교(4.8%)보다 3배 이상 높은 수치다. 물론 젊은 세대에서 종교인구와 개신교가 줄어들고 있다. 하지만 개신교는 젊은 층에서 가장 활동적이고 친밀한 종교이다.2. 개종 의향 종교: 종교가 없는 이들에게서 향후 개종하거나 믿고 싶은 종교로 개신교가 1순위로 나타났다(32.1%). 응답 표본이 91명에 불과하고, 천주교(30.2%)나 불교(29.7%)와 별 차이가 안 나지만, 조사 이래 처음으로 개종 의향 1순위 종교가 된 것은 그나마 위안이 된다. 3. 가족 종교: 개신교는 가족 구성원들의 종교 일치도가 가장 높다. 개신교가 가족 종교화되고 있다는 것은 한편으로 외연 확장 없이 기존 개신교인들만의 재생산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지표는 아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가 여전히 가족 내 유대감이 매우 높다는 점에서 이는 잠재성도 지닌다. 가족 사이에 종교가 다를 경우 신앙이 더욱 절실한 가족에게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다만, 개신교 부모들의 자녀 신앙교육 여부가 지난 조사에 비해서 하락한 것은 경각심을 가져야 할 사안이다. 4. 종교적 귀속성: 현재의 종교를 바꾸거나 포기할 의향을 묻는 질문에 개신교인은 15.4퍼센트가 그러한 의향을 나타냈다. 불교인은 20.8퍼센트, 천주교는 16.2퍼센트로 그럴 의향이 있다고 했다. 개신교인이 가장 강한 종교 귀속성을 보인다. 이는 전반적인 신앙 활동에서 개신교인이 가장 높은 것과도 상응한다. 5. 신앙적 정체성: 신앙생활의 이유를 묻는 질문에서도 개신교는 개인적인 요소보다는 종교적인 요소를 더 많이 선택한다. ‘구원과 영생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응답은 개신교의 경우 35.9퍼센트인데, 불교는 2.7퍼센트, 천주교는 7.2퍼센트에 불과하다. 불교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개신교와 뿌리가 같은 천주교와도 큰 차이가 난다. 구원의 확신에서도 개신교인은 66.9퍼센트가 ‘있다’고 대답했지만, 천주교는 47.7퍼센트가 그렇다고 답했다.6. 가나안성도의 귀환: 가나안성도가 많이 늘어난 상황에서 그들에게 교회 재출석 의향을 물었을 때, 그들의 42.9퍼센트가 다시 교회로 돌아올 마음이 있다고 답했다. 신앙단계가 높고, 소그룹에 참여했던 경험이 있는 경우에 더욱 재출석 의향이 높게 나타났다. 가나안성도를 교회와 무관하거나, 분리된 자들로 단정 짓지 말자. 그들 중 상당수는 교회가 갱신된다면 돌아올 마음이 있다!7. 성경 공부와 봉사에 대한 관심 증가: 교회에서 어떤 활동을 하는지를 묻는 질문에 봉사활동이 22.9퍼센트, 성경공부 모임 참여가 22퍼센트로 가장 높게 나왔다. 성경공부 모임은 2017년보다 9.2퍼센트의 가파른 상승률을 보였다.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이들도 2017년의 55.2퍼센트보다 대폭 감소한 27.7퍼센트로 나타났다. 향후 교회 활동에 대한 참여 의지도 이전 조사보다 크게 높아졌다. 8. 가족 외의 전도: 가족 종교화가 심화하는 가운데도, 전도를 한 개신교인들의 경우에는 전도 대상에서 가족보다 친구/선배, 이웃/친척의 비율이 높아졌다. 특히 20대와 30대에서 친구/선후배를 전도했다는 응답(20대=50.8%, 30대=54.4%)이 높게 나왔으며, 60세 이상은 이웃(45.6%)이 가장 높게 나왔다. 이는 연령별로 어떤 대상에게 전도하는 것이 효과적인지 전략적 포인트가 된다.9. 신앙의 촉매로서 소그룹: 여러 조사에서 소그룹 참여자들이 신앙생활에서 성장하고 있으며, 신앙 정체성과 소속감이 높다는 결과가 일관되게 나온다. 교회 재출석 의향이 있는 가나안성도에서도 과거 소그룹 경험자들이 많다. 개신교는 소그룹 소속 비율에서 다른 종교보다 높다. 소그룹이 전부는 아니지만 가장 유력한 신앙 공동체의 유형인 것은 분명하다. 10. 기독교 이미지 형성의 주체: 비개신교인들이 기독교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주변 교인들의 언행’(30.1%)이 가장 높게 나왔다. ‘목회자/교회 지도자의 언행’(25.2%), ‘매스컴 보도’(17.9%)가 그다음이다. 한국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가 낮아진 책임을 목회자나 언론에만 돌릴 것이 아니다. 목회자와 교인 모두를 포함한 하나님 백성의 변화된 삶이 중요하다. 교회는 새로운 성품과 습관을 형성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열거한 희망을 찾기 위한 열 가지 조사 결과는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부정적 인식을 상쇄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여전히 한국 교회에는 위기의 경종이 훨씬 선명하게 울린다. 그러나 반복되는 부정적 진단에 익숙해지고 관성이 생긴다면 더욱 위험하다. 전략 차원에서는, 우리의 약점과 잘못을 반성하고 개선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우리 앞에 놓인 가능성에 더욱 주목해야 한다. 그것이 희망을 찾아 나서는 걸음을 더욱 힘있게 할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것은 악인이 많아서가 아니다. 그 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은 악인이 아닌 ‘의인 열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창 18:16-33). 한국 교회에 많은 문제가 있지만, 희망을 찾기 위해서는 문제를 지적하고 한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복음의 효능을 삶으로, 공동체로 증언하는 겸손하고 신실한 하나님 백성들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
기독교 고전으로의 초대
by Mark Jones
2023-08-19
기독교 고전으로의 초대 스티븐 차녹(1628-1680)이 쓴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은 청교도 시대가 낳은 뛰어난 작품 중 하나이다. 신학적 거물들의 펜에서 수백 권의 방대한 저작들이 쏟아져 나오던 시대였음을 고려하더라도 이 책은 대단한 성취이다. 차녹이 죽고 2년 후에 출판되었는데, 안타깝게도 미완성 상태였다. 총 14개의 담화 또는 14장이 완성되었지만, 그에게는 하나님에 관해서 더 쓰고 싶은 내용이 남아있었다. 책이 출간되고 차녹과 책을 향한 칭찬이 줄을 이었다. 역사가 에드먼드 칼라미(1671-1732)는 신학자로서 차녹의 명성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차녹은 대단한 학자였다. 그가 손을 댄 학문에서는 통달하지 않은 분야가 거의 없었다. 그에게는 구약과 신약을 원어로 이해하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애초에 그는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태어났다. 좀처럼 만나기 힘든, 확고한 판단력과 생생한 상상력의 소유자인 차녹은 거의 신적 수준에 근접한 탁월한 학자였다. 에라스무스 미들턴(1739-1805)은 그를 “진정한 신성에 대해서 깊이와 명확성과 정확성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교회가 배출한 가장 위대한 사람 중 한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는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과 섭리에 대해서 가히 비할 데 없는 담론을 남긴 저자였다.” 영국 성공회 찬송 작가 아우구스투스 토플라디(1740-1778)도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의 위대함에 대해서 비슷한 언급을 했다. “명확함과 깊이, 형이상학적 숭고함과 복음주의적 단순성, 엄청난 배움과 평범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추론, 더불어 인간의 신성한 판단력과 천재성에 경의를 표하도록 만드는, 차마 그 가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인간이 성취한 가장 뛰어난 작품의 하나이다.” 조엘 비키는 언젠가 내게 청교도 시대가 이해한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라도 차녹의 이 걸작은 “반드시 읽어야 하는” 작품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그는 덧붙였다. “특히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담론 하나만으로도 순금에 비할 가치가 있으며 모든 영문학 작품을 통틀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책이다.” 제리 브리지스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담론을 여섯 페이지 정도 읽다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서 압도당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잠시 후 다시 일어나서 읽기 시작했는데, 몇 페이지 지나지 않아서 그는 또다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혼자 남겨진 내게 딱 두 권의 책만 허락된다면, 나는 기꺼이 성경과 차녹의 걸작을 선택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 안에서 나는 매일 매일 행복하게 또 바쁘게 지낼 것이다!평신도를 위한 신학오늘날 독자들에게는 이 책의 각 장이 설교 목적으로 작성되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수도 있다. 실제 설교에서는 약간의 편집이 필요했겠지만, 오늘날 독자들이 읽는 내용은 다름 아니라 애초에 차녹이 토마스 왓슨과 함께 사역했던 교회의 성도들이 듣도록 준비되었던 내용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덧붙여서, 당시 영국에 살았던 가장 재능 있는 두 신학자의 설교를 들었던 교인들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다.)이 작품의 내용이 정교하다고 해서 일반 독자가 접근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작품이 고전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의 하나는 다름 아니라 가장 중요한 교리(하나님에 관한 교리)를 학자와 목회자뿐 아니라 평신도까지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글을 쓴 차녹의 능력이다. 물론 오늘날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가벼운 기독교 서적보다 훨씬 더 집중해서 읽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14개의 담화에는 예외 없이 잘 알려진 성경 본문에 대한 주석이 포함되어 있다. 차녹은 각각의 주제와 관련해서 주로 가장 유명한, 일종의 표준 구절(locus classicus)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동일한 주제를 다룬 개혁주의와의 연관성을 고려했다(예: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시편 14:1). 이것은 신학 교리에 대한 설교적 담론의 전형적인 접근 방식이었다. 책을 읽다 보면 바로 눈치챌 수 있듯이, 차녹은 하나님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가진 실제적인 의미에 관심을 가졌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내용 중에는 실천적 무신론에 관한 내용이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다. 17세기 후반에 들어서면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기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나기 시작했지만, 그 시기에 하나님의 존재라는 교리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다음 두 가지였다. 첫째,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고전적 이해에 대한 공격, 둘째, 마치 우리의 삶과 생각에 관심을 가진 하나님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살고 있는 인간의 현실이었다. 차녹의 작업은 이런 실질적인 문제를 아우르는 통찰력 있는 분석이었다. 더불어서 그는 입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고 하지만 실생활에서는 마치 무신론자처럼 행동하는 교인이 귀를 기울여야 할 많은 해결책을 제시한다. 차녹의 작업이 초점을 두는 게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이라고 해서 그가 그리스도를 경시한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각각의 담론 전반에 걸쳐서 흩어져 있는 내용은 말 그대로 황금 덩어리이다. 하나님의 속성 하나하나가 그리스도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설명한다. 차녹은 각 장의 “용도”(uses) 섹션을 통해서 하나님의 속성과 그리스도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준다.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한 그의 관찰을 담고 있다. 하나님에 관한 교리를 적용할 때조차도 차녹이 그 내용을 그리스도의 인격에 고정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명쾌한 세련미“용도” (또는 “가르침”) 섹션은 하나님에 관한 교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에 얼마나 실용적인지를 보여준다. 이런 식의 적용이 없었다면, 그의 작품은 바퀴 없는 아름다운 자동차에 그쳤을 것이다. 오늘날 많은 독자가 힘들어하는 부분은 신학책이 그다지 실용적이지 않다는 사실이다. 또 반대로 실용적인 책은 신학과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그러나 차녹의 책을 만나는 순간 이런 고민은 바로 사라진다.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은 신학적이면서 실용적이며, 실용적이면서도 신학적이다. 차녹보다 훨씬 더 유명한 청교도 신학자인 존 오웬(1616-1683)과 리처드 백스터(1615-1691)는 매우 정교한 논문을 썼다. 그들의 학식은 아마도 17세기 영어권 신학자들 사이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탁월했다. 그렇다 보니 그들의 작품을 읽기 위해서는 종종 일종의 “번역가”가 필요할 정도이다. 외국어도 아닌 영어로 쓴 글인데도 말이다! 그러나 차녹의 책은 “번역가”가 필요하지 않다. 그의 글은 훨씬 더 단순하고 명확하다. 오웬과 백스터보다 훨씬 더 맥락을 따라가는 게 쉽다. 말하자면, 이 세 사람 중에서 트위터 세상에서 성공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단연 차녹(과 왓슨)이다. 칼뱅이 “명쾌한 간결함”으로 알려져 있다면 (애초에 칼뱅에게는 그것이 목표였다), 차녹은 명쾌한 세련미로 유명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차녹의 언어가 아름다운 이유는 그가 자신의 학식을 설교를 듣는 평신도를 고려해서 적절하게 조정했기 때문이다. 그가 사용한 은유와 비유는 자연 세계에 대한 놀라운 이해력이라는 측면에서 그리스도를 닮았다(“들의 백합화를 생각하라.” 눅 12:27). 또한 그는 탁월한 르네상스인이었다. 더불어서 그가 받은 의학적 훈련은 대부분의 페이지에 나타나는 은유, 삽화 및 비유에서 빛을 발한다. 그의 성경 주석이 생생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인간 본성에 대한 그의 탁월한 통찰력 때문이다. 차녹이 소유한 하나님에 대한 학식 있는 이해를 통해 독자는 은혜를 입은 상태에서조차도 인간 영혼의 심연과 우리를 둘러싼 모든 죄악된 특성을 깊이 들여다본다는 강한 인상을 받는다. 큰 책 그리고 크신 하나님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을 왜 읽어야 할까? 차녹이 살았던 시대와는 다르게, 20세기는 하나님에 관한 교리에 있어서 결코 위대한 시간이 아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에 관해서 비정통적인 생각을 품고 있다. 아마도 형편없거나 부적절한 가르침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갖게 되었을 것이다. 치료는 강단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나 강단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개인 또는 그룹 연구를 통해서도 치료가 일어나야 한다. 차녹의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이 다시 출간됨에 따라서, 이제 목회자들은 시간을 뛰어넘는 이 고전에 더욱 쉽게 접근하여 자신의 설교를 다시금 조명하도록 돕는 하나님에 관한 교리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J. I. 패커가 언젠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마틴 로이드 존스에게 했던 최고의 칭찬은 그가 하나님을 강단으로 불러냈다는 것이었다.” 로이드 존스가 설교할 때,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는 실로 분명했다. 목회자라면 누구나 하나님을 강단으로 부르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차녹이 그토록 유창하고 자세하게 설명한 바로 그 하나님에 목회자가 사로잡히지 않는다면,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목회자든 평신도든 관계없이, 차녹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기독교 사상가 한 사람을 읽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크고 넓은 기독교의 전통에 광범위하게 참여했던 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당신은 이 책을 통해서 수 세기와 다양한 전통에 걸친 다른 사상가들을 (심지어 이교도 시인과 철학자들까지) 만날 것이다. 크신 하나님을 배우면서 동시에 더 큰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1,700쪽이 넘는 책을 읽는 것은 대단한 성취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묵상과 기도로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결코 과거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이 책은 진정으로 인생을 바꾼다. 책의 두께가 부담스럽다면, 일단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담론을 먼저 읽으라. 그리고 하나님이 매일 당신에게 보여주시는 다양한 자비에 대해서 겸손한 감사로 무릎 꿇을 준비를 하라. 아마도 당신은 지금도 쏟아지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무시한 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 백성의 지성뿐 아니라 마음까지도 움직이실 하나님에 대한 더욱 견고하고 성경적이며 신학적인 관점이 필요하다는 평소 생각을 실천에 옮긴다는 생각에, 차녹의 이 대작을 두 권으로 편집하면서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에 관한 바른 관점은 오늘날 교회가 가장 긴급하게 필요로 하는 요구이기도 하다. 그 요구가 이 책으로 충족되기를 바란다. 내 생각에 지난 수백 년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차녹의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처럼 교회를 준비시키고 도운 책은 그리 많지 않다. 이 책에 관해서는 그 어떤 칭찬도 결코 충분하지 못할 것이다. 원제: The Existence and Attributes of God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모든 것이 예수님: 팀 켈러 추모 예식
by Sarah Eekhoff Zylstra
2023-08-17
캐시 켈러는 팀 켈러를 추모하기 위해 오늘 모인 2,000여 하객들에게 “오늘 예배가 보통 하는 그런 예배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채셨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추모식에는 고인을 기리는 물건도, 또 켈러의 사진과 비디오도 없었다. 캐시가 말을 이었다. “이건 팀이 원한 방식입니다. 그는 다른 성도들도 이런 식으로 장례식을 하길 좋아했어요. 예, 장례식은 죽은 사람에 관한 것입니다. 예, 맞아요. 그러나 거기서 끝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진짜 이야기해야 하는 주제는 고인이 지금 만나고 있을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 그것이 바로 켈러 추모 예배에서 일어난 일이다. 뉴욕 시에 있는 리디머 장로교회의 설립자이자 The Gospel Coalition의 공동 설립자인 팀 켈러가 췌장암으로 5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일흔두 살의 나이였다. “팀은 예수님과 함께 있습니다”캐시는 도시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교회의 하나인 성 패트릭 대성당에서 열린 90분 예배 중간 정도에 나와서 마이크를 잡았다. 추모 예배 참석은 배우 Max McLean, 여배우 Patricia Heaton,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 David Brooks, 래퍼 Lecrae, 최근에 회심한 역사학자 Molly Worthen, 그리고 The Gospel Coalition 공동 설립자 돈 카슨을 포함한 초대 손님으로 한정되었다. 전 세계에서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Redeemer City to City에서 방송하는 생중계로 동참했다.“팀은 St. Michael 묘지에 묻혔습니다. … 하지만 그곳은 워낙 커서 아무리 찾으려고 돌아다녀도 못 찾을 거예요.” 캐시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러니까 무덤에 가려고 하지 마세요. 제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끝부분을 보면, 누군가가 죽은 사람 기념비 앞에서 고인과 마음속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와요. 그런데 죽은 사람하고 대화한다고? 그 사람이 거기에 없어요. 그래서 그런 장면을 볼 때면 우리 부부는 항상 불편했습니다.”그녀는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대신 팀은 지금 예수님과 함께 있습니다. 치유받고, 사랑받고, 그 어느 때보다 더 생생하고, 더 행복합니다. 비석과 관련해서, 나는 다양한 성경 구절을 고려했다고 여러분에게 말할 수 있어요. … 지금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을 알려드릴게요.”그녀가 이사야 25:6-9을 읽고 말했다. “이건 비석에 새겨놓을 게 아닙니다. 이걸 다 새기면 높이가 20피트는 될 거예요. 이 말씀은 단지 맥락일 뿐입니다.”그녀가 이사야 26장에서도 특히 주목한 건 1, 12, 19절이었다. “그 날이 오면, 노래를 부를 것이다. … 우리가 성취한 모든 일은 모두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여 주신 것입니다. … 주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날 것이며, 그들의 시체가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무덤 속에서 잠자던 사람들이 깨어나서, 즐겁게 소리칠 것입니다.”이사야는 더 이상 죽음이나 눈물이 없는 미래의 현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캐시가 말을 이었다. “팀은 이 말씀이 가리키는 바로 그 현실에서 살고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 모두 그 잔치에 함께 앉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팀이 지금 얼굴을 맞대고 경배하시는 하나님을 우리 모두 믿고 의지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사랑하는 아빠이어서 그녀는 28쪽짜리 프로그램으로 짜인 대본을 벗어나 장남과 막내아들에게 “조나단, 뭐 하고 싶은 말 있어?”라며 마이크를 넘겼다. 조나단은 할 말이 있었다. “아빠는 정말 뛰어난 격려자였습니다. 친구들과 가족 여러분, 슬프지만 그의 삶을 기억하면서 격려를 받읍시다. 제 아버지의 삶이야말로 이 세상과는 비교도 안 되는 더 크고 영원한 다른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증거입니다.”조나단의 형제 데이비드는 기도하는 동안 눈물을 참기 위해 여러 번 멈춰야만 했다. 추모 예배에 참석한 모두의 감정이 가장 격해진 순간이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상실감이 슬프지만 아버지가 지금은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얻습니다.” 캐시와 조나단이 옆에 선 상태에서 데이비드가 기도를 이어갔다. “하나님, 슬픔에 잠긴 우리를 만나 주시고, 이 시간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희생의 사랑으로 당신께서 이미 죽음을 정복하셨음을 깨닫도록 도와주세요. 그래서 당신이 우리를 본향으로 부르실 때, 우리도 아버지와 똑같은 말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예수님을 볼 준비가 되었습니다. 나를 본향으로 불러주소서.’” 복음에 찍힌 방점추모식 나머지는 순서에 따라서 성경과 C. S. 루이스 낭독, 켈러가 선택한 찬송가 부르기, 가족 친구인 샘 올베리의 강론으로 이어졌다. 올베리가 말했다. “우리가 사랑했던 팀의 모든 자질은 다름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똑같이 발견하는 바로 그 자질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팀이 불완전했던 부분에서 그리스도는 항상 완전하셨습니다. 팀이 했던 말 중에서 기억에 남는 구절을 하나 빌리자면, ‘예수는 참되고 훨씬 더 나은 팀 켈러이다’입니다. 따라서 팀을 기억하고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리스도를 더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구상에서 살았던 가장 강력한 한 사람인 예수가 우리를 섬기고 우리를 위해 죽기 위해 왔다고 올베리가 말했다.“팀은 예수님의 섬김을 받을 만큼 비범한 종이었습니다. 팀이 그토록 아름답게 우리를 섬길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니라 그가 그리스도의 섬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순간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섬기도록 하시겠습니까? 지금까지 그런 적이 없다면, 지금, 바로 이 시간에 예수님이 여러분을 섬기도록 하시겠습니까?”올베리의 복음주의 메시지의 어조는 복음주의 인물 중에서 마지막으로 세간의 이목을 끌었던 한 사람의 장례식을 떠올리게 했다. 2018년에 빌리 그레이엄이 죽었다. 그가 죽기 전 가족과 친구들에게 남긴 메시지도 장례식에서 복음을 나누라는 것이었고, 2,000명 넘게 참석한 추모 예배에서는 그의 유언대로 복음이 선포되었다. 올베리는 TGC 인터뷰에서 말했다. “팀은 추모 예배가 자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복음에 관한 이야기가 되기를 원한다는 점을 매우 분명히 했습니다.”목적이 분명한 예식복음 선포라는 똑같은 목적은 찬송가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켈러는 지난 4월 미국 국립보건원(NIH)에서 열린 예배에서 참석자들에게 “나는 모든 찬송가를 선택했고, 거기에는 순서가 있다”고 말했다. 그가 선택한 이유가 프로그램에 실렸다. “영원히 계시는 주 하나님은”은 하나님과 그의 속성에 관한 것이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에 관한 것이고, “굳도다 그 기초”는 말씀으로 하나님과 연결되는 삶에 관해서, 그리고 “Jesus Lives and So Shall I”는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소망을 주기 위해서이다. “구원받은 천국의 성도들”은 세상의 수고로부터 쉼을 얻은 모든 성도가 언젠가는 다 다시 모일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켈러의 추도식은 말씀으로 넘쳤다. 개회와 축도 시에 낭독한 구절 외에도 요한복음 14장, 고린도전서 15장, 고린도후서 4장, 로마서 8장, 그리고 마가복음 10장을 리디머 교회 캠퍼스 네 곳의 리더들이 낭독했다. 모든 메시지가 다가올 부활을 가리킨다. “우리는 슬픕니다. 그러나 소망 속에서 슬퍼합니다.” 켈러의 차남이자 목사인 마이클 켈러가 예배를 마치면서 말했다. 그는 사실상 안내서에 인쇄된 D. L. 무디의 말을 반복한 것이다. “언젠가 여러분은 신문에서 East Northfield의 D. L. 무디가 죽었다는 기사를 보게 될 것입니다. 절대로 그 말을 믿지 마세요! 신문에 부고가 실리는 그 순간, 나는 더 살아있을 겁니다. 나는 더 높이 올라가 있을 겁니다.” 마이클이 말을 이었다. “다가올 세상은 더 밝고 더 좋고 더 생생한 현실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세계에서 그를 다시 만날 것입니다. 그곳은 기쁨과 은혜, 사랑과 빛이 영원합니다. 이 사실로 나는 여러분이 위로받기를 원합니다. 지금 그리고 항상 이 진리가 당신을 지탱하도록 하십시오.”원제: All About Jesus: Tim Keller’s Memorial Servic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내륙 선교의 길목을 트다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춘천중앙교회
by 이종전 · 장명근
2023-08-17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대한 강토에 선 첫 세대 교회들을 찾아 떠납니다. 그 이야기들에서 우리 신앙의 근원과 원형을 찾아보려 합니다.강원도 지역의 선교는 다른 도(道)에 비해서 많이 늦게 시작되었다. 또한 이후에도 남북으로 이어진 태백산맥과 그 지맥들이 깊은 계곡과 강을 품고 있고 접근할 수 있는 수단이 매우 불편했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물론이고 전도인들의 접근도 쉽지 않았다. 따라서 선교의 시작도 상대적으로 늦었지만 다른 지역으로의 확산도 어려웠던 것이 강원지역이다.그런가 하면 복음이 전파되는 루트도 산맥과 길을 따라서 각각 다르게 접근되었다는 것이 이 지역 선교 역사의 특징이다. 즉 먼저 철원에서 춘천으로 이어지는 루트, 다음은 여주나 충주에서 원주와 강릉으로 이어지는 루트, 그리고 원산에서 고성, 속초, 양양으로 이어지는 루트로 생각할 수 있다. 그렇게 볼 때 현 춘천중앙교회는 강원지역의 내륙선교를 위해서 매우 중요한 위치로 세워진 교회이다. 강원지역의 선교가 다른 지역에 비해서 늦은 것은 지리적 환경이 가장 큰 요인일 것이다. 따라서 먼저 도착한 선교부는 자연스럽게 강원지역을 선교함에 있어서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감리교회와 장로교회 선교부 사이에 선교 협약을 맺으면서 지역을 분할해서 선교구역을 담당하기로 했기 때문에 우선 유리한 지역부터 선교구역으로 맡다가 보니 역시 강원지역은 적극적으로 맡으려는 의지가 없었던 것 아닐까. 그러니 자연스럽게 후발주자인 남감리교회 선교부가 맡을 수 있도록 남겨졌다고 할 수 있다. 1885년 10월 18일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남감리교회 해외선교부 헨드릭스(E. R. Hendrix)감독과 리드(C. F. Reid) 선교사가 입국해서 조선 선교 가능성을 살펴본 다음, 이듬해인 1886년 리드 선교사 부부가 서울에 입경하여 정착하면서 본격적인 선교를 시작했다. 리드 선교사를 중심으로 활동을 시작한 남감리교회는 1897년 강원지역을 자신들의 선교구역으로 확정하면서 전도인을 파송했다. 그것이 춘천 선교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1897년 12월 강원지역에 대한 선교를 결정한 선교부는 1898년 서울 광희문교회의 나봉식과 정동렬, 두 사람을 춘천에 전도인으로 파송했고, 이들이 퇴송골에서 처음으로 예배를 드린 것이 춘천중앙교회의 시작이다. 그들의 활동과 함께 1898년 9월에 퇴송골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고 보고하고 있음을 보면 춘천중앙교회의 시작을 그해 4월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공동체가 온전한 교회로 자라기까지는 쉽지 않았다. 이에 적극적인 공략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선교부는 1902년 경기도 장단 고랑포교회의 이덕수 전도인을 파송해서 전도하게 했으며, 그가 정주할 수 있도록 집을 마련하고 그곳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돌보면서 이 공동체를 교회로 성장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덕수 전도인이 춘천에 와서 거처를 마련하고 자리를 잡으면서 남감리교회 선교부는 춘천에 선교사를 상주시키는 것과 함께 선교부를 설치하기로 했다. 그렇게 결정한 남감리교회는 1908년 무스(Robert J. Moose) 선교사 가족이 직접 춘천에 이주하여 정주하게 했다. 이미 정주하면서 활동하고 있던 이덕수와 함께 대판리(현 조양동)에 양옥을 매입하여 선교 거점으로 활용했다. 이 시점이 남감리교회 선교부가 사실상 춘천선교부를 설치한 것이고, 춘천을 경기, 강원 내륙선교를 위한 교두보로 만든 것이다.이렇게 되기까지 이덕수의 활동이 큰 열매를 맺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1904년 공동체가 성장함으로 춘천구역이 독립되었다. 춘천을 중심으로 한 내륙지방에 선교의 가능성을 확인한 남감리교회 선교부는 1907년에 병원, 학교, 예배당, 선교사 주택 등을 건립했다. 이때까지 춘천에 정주하는 선교사들은 없었고 순회하면서 공동체를 돌보는 역할은 콜리어(Charles T. Collyer) 선교사가 중심이 되어서 감당하다가 1908년 무스 선교사가 이주하여 정착하게 됨으로써 춘천 선교 거점이 완성되었다.춘천 선교 거점의 중심에 세워진 춘천중앙교회는 1925년 마이시(Mamie D. Myers) 선교사가 주선하여 허문리(현 강원일보 건너편 요선동)에 ‘ㄱ’자 모양의 예배당 갖춰진 선교관을 건축했다. 이 건물은 선교관으로 지었기 때문에 1층은 유치원, 2층은 강습소, 성경공부교실, 양재교육실 등을 갖췄다. 또한 이 건물은 춘천 최초의 근대식 건물이며 서양식 예배당이었다. 예배당 내부는 남녀가 동석할 수 없는 구조였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사회적 분위기가 엄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예배당은 아쉽게도 한국전쟁 때 파괴되고 말았기 때문에 사진으로만 확인할 수 있다. 사변이 끝나고 다시 수복된 상태에서 춘천중앙교회는 예배당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당장 예배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이에 옥천동에 있었던 남감리교회 선교부에서 운영하던 병원 건물을 인수해서 예배당으로 수리하여 예배 처소로 사용했다. 이 건물이 춘천중앙교회로서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이 역시 아쉬운 것은 처음부터 예배당으로 지어진 것은 아니지만 같은 선교부가 운영하던 병원 건물을 예배당으로 리모델링해서 사용하다가 그 옆에다 1970년 아폴로 우주선 모양의 새로운 예배당을 지어서 사용하게 되었다.그 후 리모델링하여 사용하던 붉은 벽돌 건물은 교육관으로 사용하다가 춘천시에 매각했다. 이 건물은 비록 처음부터 예배당으로 지은 것은 아니지만 춘천중앙교회 역사에서 유일하게 현존하는 건물이다. 그런데 다행히 이 건물은 춘천시에서 매입하여 건물을 보존하고, 내부를 리모델링하여 춘천시 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건물을 중심으로 언덕 위쪽으로 3만 5천여 평의 부지가 남감리교회 선교부가 각종 시설을 마련하고 운영했던 선교지부가 있었던 곳으로 짐작할 수 있다. 현재 미술관 이외에는 선교부와 관련한 어떤 건물이나 상징성을 가진 것을 찾아볼 수 없다는 아쉬움이 크다. 결코 좁지 않은 넓은 부지에 각종 시설이 있었지만,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역사 앞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춘천중앙교회는 2001년 100주년기념예배당을 완공하고 현재 자리하고 있는 위치로 이전을 했다. 이때 100주년기념예배당에는 특별한 공간을 마련했는데, 예배당 뒤뜰에 작은 공원을 조성하여 춘천중앙교회 설립 초기에 초석 역할을 한 이덕수 전도인의 묘지를 옮겨왔고, 그를 기념하는 기념비, 그리고 창립70주년기념비, 100주년기념비 등을 조성해놓았다. 이것은 신앙의 선배들이 남긴 유산을 계승하는 것과 함께 그들을 통해서 섭리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는 기회를 만들어 주는 공간으로써 의미가 깊은 곳이다. 또한 교육관 1층을 이덕수 전도사의 이름을 따서 덕수홀로 명명하여 그를 기억하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옛 건물을 만날 수는 없지만 새롭게 조성한 이 공원에서, 특별히 이덕수 전도인의 묘지와 기념비를 만날 수 있고, 그를 통해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느낄 수 있다. 이덕수 전도인은 춘천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성경을 팔고 전도했는데, 1910년 4월 급성폐렴으로 별세했다. 이에 춘천중앙교회에서는 그를 ‘조선의 바울’이라고 부르면서 그를 기억하고 있다. 그러함에도, 옥천동에 있었던 춘천 선교부에서 운영하던 학교와 병원, 그리고 선교사들의 주택들 가운데 병원 건물 하나 외에는 찾아볼 수 없어 못내 아쉽다.
“나는 강간범입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by Paul Carter
2023-08-16
몇 주 전 나는 목사와 성경학자가 종종 ‘죄인 안내서’(The Sinner’s Guide)라고 부르는 본문, 시편 51편을 가지고 설교했다. 흔히 다윗의 시편으로 알려진 이 본문은 다윗이 밧세바와 범죄한 이후, 선지자 나단에게서 책망을 들은 후에 쓴 글이다. 그러니까 다윗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도덕적, 영적 재난에서 회복되는 과정에서 쓴 시편이라는 의미이다. 설교에서 나는 다윗이 밧세바를 강간하고 그녀의 남편을 살해했다고 말했다. 살인에 관해서 반론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강간은 그렇지 않았다. 몇 명이 와서는 정말로 다윗이 밧세바를 강간한 게 맞냐고 내게 물었다. 다윗이 정말 밧세바를 강간했는가? 흔히들 그 이야기를 끔찍하고 죄 많은 일종의 “비열한 사건” 정도로는 생각하지만, 강간이라는 엄청난 범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거 같다. 합리적인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강간이야말로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죄에 매우 가깝다. 따라서 우리가 강간이라는 단어를 쓸 때는 매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리처드 데이비슨(Richard M. Davidson)의 설명이다. 성인과 미성년자 사이의 성관계, 심지어 미성년자가 “동의”했다고 하더라도, 오늘날 그건 “법정 강간”으로 불린다. 마찬가지로 다윗과 그의 아랫사람인 밧세바 사이의 성관계는 (설혹 밧세바가 권력자가 주는 심리적 압박 때문에 성교를 묵인했다고 하더라도) 성경적 법 테두리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야기 속 두 사람의 성관계는 강간으로 보는 게 맞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사건을 “위계에 의한 강간”이라고 부르며 책임은 피해자가 아니라 오롯이 가해자에게 있다.[1]다윗 왕은 무장한 군인을 보내어 밧세바라는 신하를 방으로 데리고 왔다. 이런 식의 행동은 모든 문명 국가에서 강간으로 간주된다. 다윗은 강간범이다. 강간죄를 숨기기 위해서 그는 살인까지 저질렀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 본문에서 명확하게 다뤄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윗이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이 시편의 처음 5절에서 다윗은 죄와 관련해서 가능한 모든 히브리어를 사용한다. 죄를 합리화하거나 최소화하려고 하지 않는다. 1절에서 그는 히브리어 “페샤”(pesha)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성경에서 흔히 “허물”(transgressions)”로 번역된다. 말 그대로 인간이나 하나님의 권위에 반항하는 것을 의미한다.[2]다윗은 자신이 반역자임을 인정한다. 악한 일을 하기 위해 하나님이 그어놓으신 여러 개의 한계선을 넘었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다.2절에서 그는 “죄악”(iniquity)으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단어 “아온”(aon)을 사용했다. 죄책감을 의미하는 단어이기도 한데, 그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다윗은 자신이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가 지은 죄에 대한 형벌은 죽음이었다. 다윗은 그 사실을 알았을 뿐 아니라 기꺼이 인정했다. 그리고 그 사실로부터 도망치지 않았다. 2절에서 그는 히브리어 “카타아트”(khatta’ah)라는 또 다른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 단어는 “죄”(sin) 또는 “악”(evil)로 번역된다. 다윗은 자신이 악한 일을 저질렀다고 말한다. 더 중요한 사실은 자신이야말로 악한 사람이라고 그가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흔히 듣는 소위 말하는 고백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지 않은가? 욕먹는 정치인과 스포츠인이 자주 쓰는 말이 있다. “판단에 오류가 있었다.” “실수였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이런 식의 단어를 칭찬하지 않는다. 머핀 반죽에 설탕을 한 컵 대신 두 컵을 넣었다면, 그건 실수이다. 그러나 이웃을 강간하고 그 남편까지 죽이는 것은 악이다.다윗은 그 사실을 인정했다. 그는 나단 선지자 앞에서도 또 하나님 앞에서도 그 사실을 인정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이며,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진실을 말하고 주님께 자비를 구했다. 하나님,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으로 내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의 크신 긍휼을 베푸시어 내 반역죄를 없애 주십시오. (시편 51:1)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의 약속을 근거로 다윗은 하나님께 간구했다. ESV에서 “변치 않는 사랑”으로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 “헤세드”(khesed)이다. 그것은 “언약적 사랑” 또는 “신실한 자비”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창세기 15장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님 자신이 둘로 쪼개진 제물 사이를 통과하며 피의 길을 걸으셨다. 사실상 인간이 저지를 미래의 불순종과 관련된 저주를 스스로 짊어지시겠다는 의미이다. 다윗은 그 사건을 기억했다. 그리고 약속대로 자신에게 긍휼을 베풀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다.그는 자신이 누구이며 이전에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근거로 하나님께 나아갔다.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해주십시오. 내가 깨끗하게 될 것입니다. 나를 씻어 주십시오. 내가 눈보다 더 희게 될 것입니다. (시편 51:4-7)우슬초에 대한 언급은 유월절 이야기에 대한 암시이다. 출애굽기 12장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라고 명하신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장로를 모두 불러서,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족들과 함께 먹을 양이나 염소를 준비하여, 유월절 제물로 잡으십시오. 우슬초 묶음을 구하여다가 그릇에 받아 놓은 피에 적셔서, 그 피를 상인방과 좌우 문설주에 뿌리십시오. 여러분은 아침까지 아무도 자기 집 문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이집트 사람들을 치려고 지나가시다가, 상인방과 좌우 문설주에 바른 피를 보시고, 그 문 앞을 그냥 지나가실 것이며, 파괴자가 여러분의 집을 치러 들어가지 못하게 하실 것입니다. (출애굽기 12:21-23)유월절 이야기에 따르면 어린 양의 피 아래 피난처를 찾은 사람은 누구나 이집트인에게 내려진 심판으로부터 안전했다. 다윗은 지금 자신을 위해 유월절의 은혜를 주장하고 있다.“어린 양의 피 아래 나를 숨기소서!”“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대로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좋은 회개이다. 다윗은 끔찍한 죄인이었다.다윗은 강간범이자 살인자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는 동시에 선한 회개자였다.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했고, 자신의 죄를 미워했으며, 무엇보다 자신의 죄에서 돌이키고 주님께 자비를 구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근거해서 또한 하나님이 행하신 일과 약속을 근거로 다윗은 자비를 구했다.그리고 기적적으로 그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의 은혜를 받았다. 그의 이야기는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추하면서도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추악한 죄와 아름다운 구주의 이야기이다. 너무도 정직한 성경 내용에 마음이 상하는 사람이 종종 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성경은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고 말한다. 누구나 다 추악하고 비열한 일을 할 수 있다고 성경은 말한다. 잘못된 상황에 처하고 또 잘못된 시기를 만나면, 인간은 누구나 사악하고 악한 일을 할 수 있다.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우리는 치유 받을 수 있다. 용서받고 강건해지며 회복될 수 있다. 다윗에게 가능했던 그 은혜의 기적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가능하다.지금, 죄를 회개하라. 어린양 보혈을 붙잡고 용서를 빌라. 그리하면 구원받을 것이다. 이게 바로 복음이다. 이것이 자비하심이다. 옛 언약이요 또 새 언약이다.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주1. Did King David Rape Bathsheba? A Case Study in Narrative Theology in Journal of the Adventist Theological Society, 17/2 (Autumn 2006): 81?95. Article copyright ⓒ 2006 by Richard M. Davidson.2. KM Hebrew Dictionary, Accordance Version, H7322.원제: Did King David Rape Bathsheba?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음욕과 분노를 유발하는 소셜미디어, 당장 끊으라.
죽고 사는 문제가 거기에 달렸다.
by Wyatt Graham
2023-08-15
소셜미디어 때문에 음욕이 치솟는다면, 소셜미디어 때문에 분노가 일어난다면, 당장 소셜미디어 앱의 작동 방식을 바꾸라. 그래도 달라지지 않는다면, 아예 앱을 삭제하라. “네 오른손이 너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거든, 찍어서 내버려라”(마 5:30)예수님은 지금 점잖게 말씀하시는 게 아니다. 예수님은 지금 당신의 주님으로서 좁은 길을 걸으라고 명령하신다. 맥락상 여기서 지금 예수님은 간음을 정죄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은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하였다”(마 5:28). 요즘같이 섹스가 만연한 시대에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충격을 받아야 한다. 섹스 산업이 잘 되는 건 남자고 여자고 가릴 것 없이 다들 음욕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음욕은 결코 게임이 아니다. 그냥 교환 거리가 아니다. 당신의 생명이 달린 문제이다. 예수님은 결코 그런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우리더러 정욕 극복을 위한 5단계 프로그램에 들어가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그는 정욕을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는지를 생생한 언어로 잔인하게 보여주실 뿐이다. “네 오른 눈이 너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거든, 빼서 내버려라”(마 5:29).왜 몸까지 잘라야 하냐고? “신체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더 낫[기 때문이다]”(마 5:29).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또 네 오른손이 너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거든, 찍어서 내버려라. 신체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더 낫다”(마 5:30). 여기에서 그는 마음이 정욕을 일으키기 위해서 사용하는 특정 부위인 눈에서 전반적인 형태로 이동한다. 죄를 짓게 하는 게 손이라면, 그 손을 잘라야 한다. 디지털 시대에 손은 종종 우리를 죄로 이끈다. 살짝 클릭하고 또 스크롤 하는 손가락 때문에 파멸이 올 수 있다. 예수님은 음욕을 심각하게 여기신다. 그렇다고 단지 음욕만을 잔인한 용어로 정죄하시는 건 아니다. 예수님은 분노도 정죄하신다. 분노는 내면화된 살인이다(마 5:21-22).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는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얼간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공의회에 불려갈 것이요, 또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옥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마 5:22).분노와 음욕은 열정(분노)과 의지(욕정)를 왜곡한다. 이런 죄는 우리의 몸과 영혼을 같이 파괴한다. 나 자신으로부터, 또 우리가 저지르는 일탈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은 죄를 명명하고 또 정죄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돌보신다. 그리고 그는 음욕과 분노가 우리를 파괴한다는 것을 아신다. 그런 죄는 실로 무자비한 폭군이다. 음욕을 이기기 위해서 우리는 나 자신을 하나님 나라에 온전히 묶어야 한다(마 6:23). 화를 이기려면 우리는 완전케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 나 자신을 온전히 드려야만 한다(마 5:43-48).예수님은 우리에게서 이 짐을 가져가서 완전히 제거하실 것이다. 복음이 무엇인가? 약하고 지친 우리를 향한 주 예수님의 부르심이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약하게 하고 지치게 하는 모든 것을 제거하신다. 할렐루야!“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 11:28-30). 예수님은 자신이 줄 수 없는 것을 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음욕을 파괴하고 분노를 분쇄하는 데 필요한 모든 은혜를 주신다. 그러나 그는 결코 죄를 가볍게 대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지금 여기서 단지 제안을 하는 게 아니다. 명령하고 계신다. 좁은 길을 걸으라고, 주님으로서 우리를 부르신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우리의 모든 죄와 슬픔과 애통의 짐까지 다 짊어지셨던 그분이 지금 우리의 지치고 연약한 모습도 다 받아주신다는 것이다. 음욕과 분노의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그는 십자가를 지셨다. 또한 죄와 죽음을 정복하기 위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그리고 지금 그는 우리를 향해서 손짓하신다. 어서, 어서 내게 오라고. 소셜미디어가 당신의 영혼을 망치게 놔두지 말라. 음욕 또는 분노를 일으킨다면, 당장 잘라버리라. 당신의 죽고 사는 문제가 거기에 달렸다. 원제: If Social Media Causes you to lust or Incites Anger, cut it off. Your life Depends on it.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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