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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사라지는 시대
by 박혜영
2023-08-14
지난 3월 말로 제가 지금까지 30년 동안 단골로 다니던 신학 전문 서점이 폐업 절차에 들어갔습니다. ‘라비블’이라는 곳인데, 주로 영국이나 미국에서 출판된 신학 및 경건 서적을 판매했으며, 주문 대행도 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작은 사무실 정도였지만, 전성기 시절에는 강남 사거리 그럴듯한 건물에서 판매 공간도 널찍했습니다. 그러다가 주인이 여러 번 바뀌고 이사도 다니고 했지만, 판매 공간만큼은 그럭저럭 유지했는데, 2-3년 전부터 다시 작은 사무실로 규모를 축소했고, 그러다 이제는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지난 30년, 한 달에 평균 일십만 원만 잡아도 삼천육백만 원, 그중 지난 10년간은 한 달에 이십만 원 넘게 구매한 적도 부지기수니 그동안 그곳에서 책을 산 액수를 다 합하면 아마 오천만 원 정도는 될 겁니다. 그렇게 애정을 쏟은 곳이라, 문을 닫는다는 공지를 보았을 때 아쉬움은 정말 컸습니다. 이제 기분 전환하러 어디로 가야 할지….저는 계속 이런 일을 겪고 있습니다. 교보문고나 영풍문고는 서점인지 잡화점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변하더니, 이제는 서점 안에 유명 브랜드의 커피 전문점까지 들어와 있습니다. 매장에서 책을 찾아 검색하면, 직원에게 문의하라는 안내가 뜨며, 그렇게 문의하면 직원은 한참 지나 창고에서 책을 찾아오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오래전에 자주 찾던 ‘아이브이피’ 서점도 그랬습니다. 선배를 통해 그곳을 알게 된 후로, 한때는 미국인 문서선교사가 직수입해 놓은 영어 경건 서적을 살펴보는 데만 오후를 다 보낼 수 있을 정도로 책이 많았습니다. 그곳에서 영국이나 미국 복음주의자의 책을 직접 대면했으며, 신학교 입학 후부터는 신학 서적도 금방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다 영어 원서가 점점 줄어들더니, 어느 날엔 서가에서 사라지고, 모퉁이에 몇 권 있다가, 또 얼마 후에는 그마저 사라졌습니다. 그러면서 국내 기독교 서적도 대폭 줄이더니, 이제는 책꽂이를 장식용처럼 세워 둔 카페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갈 곳을 한 군데 잃은 저는 라비블에 집중했는데, 이젠 그곳마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직원보다 잘 알던 공간이 사라진다는 건, 자신의 영역이 축소되는 것 같아 서글프며, 앞으로 외출하면 어디로 가야 할지 멍할 뿐입니다. 잔가지를 열심히 입에 물고 만들던 둥지를 한전 직원들에게 갑자기 빼앗긴 까치들 심정이 이럴까요?이렇게 계속 서점이 축소되거나 사라지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책의 시대는 이제 끝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비블이 문을 닫는 건 기독교 쇠퇴와도 연관되지만요.) 물론 책은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 이미지 홍수의 시대에 라디오가 사라지지 않은 것을 그 증거로 들겠지요. 무엇이든 과거의 것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니, 책도 그렇기야 하겠지요. 그러나 풍경이 달라졌습니다. 이젠 책이 위태롭게 된 정도가 아니라, 지식의 가치 자체가 위태롭지 않습니까? 거짓말이 지식을 대체하고 있으며, 지식을 조롱하는 분위기도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젠 생각조차 필요 없는 그런 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생성 인공지능’이 출현했기 때문입니다. 지식을 생성해 내고, 대화도 생성해 낸다니…. 이제 인간이란 존재는 무엇을 통해 생각이란 걸 하게 될까요?어떤 분들은 이제야말로 질문의 중요성이 더 커졌고, 문해력이 더 필요해졌다고도 합니다. 그렇지만 생각을 인공지능에 맡겨 버리고, 그 대답에 의존하는 형편이라면, 과연 문해력을 키울 수나 있을까요? 생각의 도구인 책이 하찮아지고 있는데, 과연 문해력은 어디서 키워야 할까요? 새로운 기술이 나타날 때, 낙관하는 사람들은 그 기술을 잘 쓰는 인간의 능력을 계속 신뢰하곤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이라는 것도 생각할 줄 알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지, 생각 자체를 인공지능에게 외주로 주는데, 과연 인간의 능력에 대해 낙관만 할 수 있을까요? 인공지능이 어떤 통제도 없이 너무 빨리 개발되다 보니, 태슬라 사장과 몇몇 사람은 인공지능 연구를 6개월 동안만이라도 중지시키자고 제안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새로운 기술을 선도하는 자들도 이런 변화의 속도는 두려운가 봅니다. 이런 시대가 한 사람의 취미만 끝장내는 거라면 별문제 아니지만, 생각이 사라지는 시대의 징표라면 인간 전체의 문제가 됩니다. 생각이 필요 없는 인간은 과연 인간일 수 있을까요? 이제 신학 책을 검색하고 사러 다니던 저의 시간은 강제 종료를 당했으니, 그 시간에 자리에 앉아 루이스의 인간 폐지나 읽고, 열심히 사둔 책이나 읽으라는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여야겠습니다.
‘진보’ 기독교는 내가 떠났던 복음주의보다 더 얄팍하다
by Ian Harber
2023-08-12
요한복음 6장을 보면 어려운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떠난다. 그리고 예수님은 남은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라고 묻는다(요 6:67). 그러자 내가 추측하기로 많은 사람이 자기가 주님이라고 부르는 예수님을 떠나는 데에 마음이 상하고 민망했던 베드로가 대답한다.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선생님께는 영생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알았습니다”(요 6:68-69).이게 바로 내 이야기이다. 나는 두 가지 신발을 신고 걸었다. 예수님을 버린 사람들의 신발과 아무리 힘들어도 예수님을 떠날 수 없었던 베드로의 신발. 나는 ‘진보 기독교’를 위해 젊은 시절의 신앙을 버린 경험이 있는, 소위 말하는 전직 복음주의자(#exvangelical)였다. 그런 다음에 다시 돌아왔다. 다음은 다시 재복음주의자(#revangelical)가 된 나의 이야기이다. 내 신앙이 어떻게 무너졌는가내가 자라고 배운 기독교 전통은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초고속 인터넷에 접속하는 우리 세대에 대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온라인에서 발견한 성경 비평이 새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세상이 달라졌고 복음주의 거품 속에서 자란 호기심 많은 사람들의 손끝에 모든 정보가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구글 검색이나 유튜브 영상에서 만나는 진지한 비판에 비해서 교회가 주는 답은 얄팍하게만 보였다. • 특정 성경 이야기에서 발견하는 모순과 비과학적 내용은 어떻게 된 것인가? • 이스라엘에게 그들의 원수와 자녀까지 다 죽이라고 명령하는 하나님을 보면서 어떻게 우리는 단지 어깨만 으쓱하면서 넘어갈 수 있었는가? •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사랑하는 피조물을 영원한 고통으로 정죄할 수 있는가? 다른 종교는 어떤가? 그들도 따지고 보면 모두 다 기본적으로 같은 소리가 아닌가? 이런 질문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듣고 자랐던 성경의 권위를 조금씩 갉아먹기 시작했다. 문제는 단지 성경에 대한 질문으로 끝나지 않았다. 내 신앙이 추구하는 정치 문화와 성경을 어떻게 일치시켜야 하는가에 관한 과제도 있었다.• 우리나라의 정책이 가난하고 소외된 지역사회에 특히 더 불이익을 주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 내가 자란 텍사스 마을에서 더 잘 살겠다고 노력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면서 동시에 이민자들의 삶을 더 악화시키는 사례가 그토록 많은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 출산 후에 고통받는 사람들에게도 낙태에 신경 쓰는 것만큼 마음을 쏟는 게 당연하겠지?나는 성경이 알려주는 이야기보다 이 세상의 현실이 훨씬 더 복잡하다는 사실을 도무지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믿음을 완전히 버렸다. 예수님 또는 교회와 아무 상관 없이 살고 싶었다. 흥미롭게도 하나님이 다시 내 삶에 들어오기 시작한 때는 나와 소원했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고 슬퍼하던 즈음이었다. 그러나 내가 익숙한 복음주의 환경에서는 고난에 대한 실질적인 신학이 빠져 있었다. 고통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이 아니라 피하거나 억제해야 할 대상이었다. 이처럼 성경, 정치, 그리고 고통에 관한 삼각형 질문은 내가 진보 기독교를 탐구하도록 만드는 토대가 되었다. 재건 없는 해체나는 랍 벨이 쓴 Velvet Elvis와 사랑이 이긴다를 읽었다. 도널드 밀러의 재즈처럼 하나님은도 읽었다. 아직도 나는 전에 경험하지 못한 은혜의 세계만이 아니라 정통 교리에서 자유로운 세계로 나를 인도한 재즈처럼 하나님은의 한 단락을 기억한다. 마이클 겅거의 팬으로서 나는 그가 새로 시작한 팟캐스트 The Liturgists를 듣기 시작했다.내가 새롭게 만난 광경은 감동적이었다. 성경 때문에 굳이 과학을 버리지 않아도 되었다! 기도가 동전 던지기처럼 느껴졌을 때, 신비주의는 하나님을 만나는 새로운 방법을 제공했다! 믿음은 소외된 집단까지 돌보도록 정치에까지 영감을 줄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겅거와 “Science Mike” 맥하그(McHargue)의 해체 이야기에 나의 스토리가 담겨 있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마침내 믿음을 해체하고 다시 처음부터 재건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사람들을 찾아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들으면 들을수록, 내게는 재건에 필요한 도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가진 모든 신념이 정밀한 조사를 위해 깔끔하게 분해되어 바닥에 노출되었다. 그런데 그것을 다시 어떻게 조립하면 된다는 지침은 전무했다. 재건이 결여된 신앙 해체는 게으르고 무책임하며 위험하고 고립시키는 일이었다. 해체의 목표가 단순한 자기 발견이나 미덕 과시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언제나 예수님을 향한 더 큰 신실함이 되어야만 한다. The Liturgists의 여정이 진행됨에 따라, 그들은 정치적 좌파가 추구하는 진보 플랫폼에 점점 더 가까워졌다. 내 눈에 공화당이 말하는 것은 무조건 믿으라고 소리치던 보수 그리스도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2016년 대선이 끝났을 때 나는 이상한 경험을 했다. 나는 국가에 대한 진보주의자들의 우려를 공유했지만, 그들이 손에 들고 흔드는 것은 어린 시절 보수 복음주의자들이 사용했던 것과 동일한 리트머스 종이였다. 단지 반대편 통로에 서 있다는 게 다를 뿐이었다. 당신이 역사적인 기독교 성 윤리를 고수한다면, 이제 당신은 시대에 역행하는 편협한 사람이다. 낙태가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이제 당신은 반여성적인 사람이다. 진보주의자들은 그들이 경멸하는 근본주의자들만큼이나 근본주의자가 되었다. 단지 리트머스 종이의 색깔을 결정하는 것이 전통적인 가치에서 깨어남(wokeness)의 여부로 바뀌었을 뿐이다. 진보 정통주의의 정당 노선을 정확하게 밟지 않는다면, 이제 당신은 버림받은 사람이다. 바로 이단자 말이다.‘진보라는’ 브랜드, 똑같이 얄팍한 외침이제는 미국인에게 일종의 기본 신앙이 되어버린 도덕적 치료 이신론(moralistic therapeutic deism, MTD)의 위험성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다. 여기에 따르면 하나님이 당신에게 바라는 것은 슬픔 없는 품위 있는 삶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절대로 당신의 삶에 간섭하지 않는다. 애초에 내가 진보 기독교를 향해서 달려간 이유가 다름 아니라 그런 식의 천박한 믿음에 맞서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내가 찾은 것은 몇몇 용어만 다를 뿐 MTD와 하나 다를 바 없었다. 깨어남은 새로운 도덕이 되었다. 치료는 행복으로 가는 새로운 길이고, 취소 문화(Cancel culture)는 새로운 교회 규율이 되었다. MTD와 마찬가지로, 의미 있는 방식으로 당신의 삶에 어떤 것을 요구하는 개인적인 하나님은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얼마나 편리한가? 이런 식의 “진보적” MTD에서 남은 것은 이제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비유뿐이다. “하나님도 이제 당신과 마찬가지로 당신 안에 거한다.” 나 자신과 하나님을 구별할 방법이 사라졌다. 이 패러다임에서 우리는 이제 신이 되었다. 그렇다고 내가 반-깨어남(anti-woke) 또는 반-치료주의자(anti-therapy)라는 건 아니다. 구조적 불의는 현실이며 깨어남이 가져다주는 대화는 필요하다. 나는 대학에서 거의 2년 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았고, 치료가 거의 모든 사람에게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사랑을 깨어남과 치료로 대체할 수는 없다. 마크 세이어즈는 세계의 진보적 비전을 “왕 없는 왕국”으로 묘사한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사랑의 다스림과 통치에 굴복하지 않으면서 받는 하나님의 모든 축복을 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진보를 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칭의가 실종된 정의를 원한다. 우리는 죄인과 하나님 사이의 수직적 화해 없는, 사회를 위한 복음의 수평적 혜택을 원한다. 우리는 개인의 거룩함에 대한 하나님의 표준 없이 이 사회가 도덕적 순결에 대한 우리의 표준에 순응하기를 원한다. 정통 기독교로의 복귀2016년 선거 이후 나는 신앙을 재건해야 할 때임을 확신했다. 몇 달 후, 두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났다. 나는 정식으로 신학 교육을 시작했고, 나를 키워주신 할아버지를 비극적인 사고로 잃었다. 그 죽음은 다시 한번 나를 극심한 고통에 빠뜨렸지만, 이번에는 또 다른 의미가 추가되었다. 신학적으로 그 고통을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았다. 내 스승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우리는 빛 속에서 신학을 한다. 그래야 어둠을 만났을 때 신학이라는 발판 위에 설 수 있다.” 나는 처음으로 삼위일체 교리와 통일된 이야기로서의 성경, 그리고 성경을 성령님의 영감을 받은 책으로 읽는 방법을 배웠다. 형벌 대속과 승리자 그리스도와 같이 상호 모순된다고 생각했던 교리들이 온전하고 아름다운 성경적 그림을 형성하기 위해 실제로 어떻게 서로를 필요로 하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모든 축복에 관해서 배웠다. 영적 훈련과 훈련된 방법으로 하나님을 추구할 때 흘러나오는 생명을 주는 자유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부터 내 눈 앞에는 역사적인 기독교 정통이 가져다주는 넓고도 풍부한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내 이야기는 특별한 게 아니다. 사실 이런 간증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목회자를 향한 나의 간청은 다음과 같다. 1. 유다는 “의심을 하는 사람들을 동정하십시오”(1:22)라고 말한다. 거친 대답이나 무시 또는 얕은 수준의 답변으로 의심이나 질문 또는 고민을 처리하려고 하지 말라. 어려운 질문일수록 인내심을 갖고 다른 형제들과 협력하여 포괄적이고 분명한 답을 주기 위해서 노력하라. 2. 기독교 전통의 풍요로움을 가르쳐라. 더 나은 삶을 위한 지침으로 기분 좋게하는 MTD 수준의 진부함에 안주하지 말라. 복잡한 질문에는 복잡한 답변을 제공하라. 역사상 가장 뛰어난 분인 예수님이 연민과 사랑과 은혜로 삶과 사회의 모든 측면에 어떻게 대응하셨는지를 제대로 보여주라. 우리 교회에는 시간이 갈수록 더 많은 신학, 뉘앙스, 은혜, 연민, 이해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제 이 모든 것이 정통 교리 때문에 어려워진 게 아니라 도리어 더 가능해졌다. 의심과 질문이 반드시 믿음에서 불신앙으로 진행하는 추진력에 의해서 움직여야 할 이유가 없다. 건강하고 사려 깊은 기독교 공동체에서 발생하는 의심과 질문이 참 포도나무(요한복음 15장)이신 그리스도와 끊임없이 연결되어 제대로만 다뤄진다면, 도리어 믿음을 더 깊게 하고 신앙의 뿌리를 더 튼튼하게 만들어 열매 맺는 삶을 생산할 뿐 아니라 세속적인 세상의 맹렬한 바람까지도 견딜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모든 사람의 신앙 여정은 굴곡지고 복잡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며 그의 길은 우리가 한동안 그 길에서 벗어났을 때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세상에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길이 있다. 이 세상은 다양한 영적 “깨달음” 또는 스스로의 믿음을 큐레이팅하도록 돕는 다양한 옵션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오직 예수”라는 길 외에는 참된 행복과 영생으로 인도하는 길이 없다(요 14:6). 그 길은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좁지만(마 7:13)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만족을 가져다준다(시 16:11).믿음의 여행 중에 내가 베드로와 함께 발견한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를 앎으로 말미암아 생명과 경건에 이르게 하는 모든 것을, 그의 권능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그의 영광과 덕을 누리게 해 주신 분이십니다”(벧후 1:3).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생명을 찾기 위해 왜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유 1:3) 믿음의 경계를 떠나야 하는가? 예수님에게는 생명의 말씀이 있다. 그는 생명이시다. 진리이시다. 그리고 길이시다. 그분 외에 갈 곳이 어디 있겠는가? 원제: ‘Progressive’ Christianity: Even Shallower Than the Evangelical Faith I Lef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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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기독교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
by 고상섭
2023-08-11
팀 켈러가 그토록 사랑했던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이제 눈물이 없는 곳에서 기뻐할 팀 켈러를 생각하면 위로가 되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에겐 그가 떠난 빈자리가 너무나 크게 느껴진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인 존재로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발자취를 남겼다. 그와 그의 삶이 우리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 몇 가지를 되돌아보며 그를 기억하고자 한다. 01 복음의 재발견02 문화의 상황화03 기독교 변증04 복음 생태계05 그리스도 중심 설교06 우상숭배와 복음07 정의와 자비 사역08 신앙과 직업09 통합적 사역10 팀 켈러의 저서들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 (10) : 팀 켈러의 저서...
by 고상섭
2023-08-11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팀 켈러가 그토록 사랑했던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이제 눈물이 없는 곳에서 기뻐할 팀 켈러를 생각하면 위로가 되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에겐 그가 떠난 빈자리가 너무나 크게 느껴진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인 존재로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발자취를 남겼다. 그와 그의 삶이 우리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 몇 가지를 되돌아보며 그를 기억하고자 한다. 팀 켈러가 우리 곁을 떠난 이후에 팀 켈러에 대한 다양한 관심들이 일어나는 것 같다. 마지막 죽음 앞에서 아내와 대화하면서 “하나님이 이제 더 이상 내 책은 필요하지 않으신 것 같다” 라는 농담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팀 켈러의 책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은 크지만, 지금까지 공저를 포함해서 40권이 넘는 책을 남겨주신 것은 귀한 유산이라 생각한다. 지금은 팀 켈러가 직접 쓴 책뿐 아니라 팀 켈러와 관련된 책들도 속속 연구되어 나오고 있다. 팀 켈러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팀 켈러를 공부하고 싶지만 어떤 책을 먼저 읽어야 할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 궁금해하는 이들이 많다. 저마다 처한 상황과 이해가 다르니 어느 하나의 로드맵을 그리기란 사실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팀 켈러의 저서 전체의 숲을 그리는 과정일 것이다. 팀 켈러의 유산을 정리하면서 팀 켈러의 저서들을 중심으로 전체 책의 목록을 정리해보았다. 분류 기준 팀 켈러의 다양한 책들은 어떤 기준으로 정리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분류될 것이다. 필자는 팀 켈러의 센터처치에 나오는 통합적 사역을 중심으로 전체 내용을 분류했다. 독서를 위한 분류 체계이기 때문에 팀 켈러가 말한 “∼에게 연결하는 것”이라는 큰 틀을 따랐지만 세부 주제들은 임의로 정했다.팀 켈러는 센터처치에서 교회 사역의 통합성을 강조하면서 다섯 가지의 사역 접점을 소개한다.1. 사람들을 하나님께 연결하는 것 (전도와 예배를 통해서)2. 사람들을 서로에게 연결하는 것 (공동체와 제자도를 통해서)3. 사람들을 도시에 연결하는 것 (자비와 정의사역을 통해서)4. 사람들을 문화에 연결하는 것 (신앙과 직업의 통합을 통해서)5. 교회 개척을 통해 복음생태계를 만드는 것 이 다섯 가지의 틀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출간된 팀 켈러의 저서들을 분류해보았다.1. 사람들을 하나님께 연결하는 것 1) 복음 ① 탕부 하나님 /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 두 책은 동일한 The Prodigal God을 각기 다른 출판사에서 역간한 것이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중심으로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를 경계하며 복음 안에서 사랑을 회복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 책은 팀 켈러의 복음에 대한 기초 이해를 가지게 하고, 그리스도 중심 설교에 대해서도 많은 부분을 알려준다. 탕부 하나님의 기초가 된 설교는 스승인 에드먼드 클라우니의 성경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의 3장 ‘아버지의 환영을 함께 나누는 것’이라는 누가복음 15장의 설교이다. 탕부 하나님을 클라우니의 책과 비교해서 보면 팀 켈러가 복음의 이해를 어떻게 발전시켰는지를, 또한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어떻게 발전시켰는지를 엿볼 수 있는 책이다. 평신도와 목회자 모두에게 첫 번째 책으로 추천하고 싶다. ② 방탕한 선지자 원서 The Prodigal Prophet의 제목이 탕부 하나님과 비슷하다. 선지자 요나를 통해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가 인간에 내재된 본성임을 알려주고 복음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기술한 책이다. 탕부 하나님과 함께 읽으면 복음에 대해 더욱 선명하게 이해되는 책이다. 탕부 하나님에서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를 둘째 아들과 첫째 아들로 비유했다면, 방탕한 선지자에서는 요나서 1-2장을 통해서 둘째 아들의 모습을, 3-4장을 통해서 첫째 아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인간 안에는 늘 복음을 거부하는 두 성향이 있고,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오해할 때 생기는 영적 질병이다.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 모두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만 치유될 수 있다는 복음의 감격을 제시한다. ③ 복음으로 세우는 센터처치 센터처치라는 한 권으로 된 책을 복음, 도시, 운동이라는 세 권으로 나누면서 팀 켈러 인터뷰를 부록처럼 포함했다. 센터처치의 제1권 ‘복음’을 묶은 책이다. 팀 켈러는 센터처치와 설교에서도 시작을 ‘복음’으로 시작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복음을 믿는다고 하지만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팀 켈러가 말하는 은혜의 복음에 대해 좀 더 이해하고 싶은 이들은 싱클레어 퍼거슨의 온전한 그리스도와 에드워드 피셔의 개혁 신앙의 정수를 추천한다. ④ 복음 안에서 발견한 참된 자유짧은 소책자이지만 내용의 힘은 엄청난 책이다. 복음을 단순히 신학적 이론으로 설명하지 않고 칭의의 복음이 인간의 자존감과 정체성의 문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원서는 The Freedom of Self Forgetfulness로 ‘자기 망각의 자유’이다. 세속 심리학에서는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자기를 사랑하라’ 말하지만, 성경은 ‘자기 부인’을 말한다. 성경이 말하는 자기 부인이 결국 자기를 망각하는 자유를 경험하는 것임을 설득력 있게 선포하고 있다. 복음을 통해 정서의 회복이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⑤ 내가 만든 신 / 거짓 신들의 세상 팀 켈러는 죄를 설명할 때 ‘우상숭배’라는 개념을 도입해서 설명한다. 단순히 행위로 짓는 죄를 넘어 마음속에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대상이 모두 우상숭배임을 알려주고, 우상을 숭배할 때 노예 상태로 예속될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해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죄를 ‘순서가 바뀐 사랑’이라 불렀다. 결국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랑의 순서를 회복할 때 참된 질서 아래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우상의 문제를 깊이 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⑥ 복음과 삶 성경공부 ‘복음이 어떻게 삶을 변화시키는가’라는 주제로 만든 성경공부 교재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와 복음이 적용되는 대상인 마음, 공동체, 세상, 그리고 영원까지 변화시킨다는 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 시작해서 마지막 날 임할 새 예루살렘이라는 도시까지 도시에서 도시로 이어지는 인생 전체를 조망한다. ⑦ 복음만이 모든 것을 바꾼다 / 복음이 핵심이다 / 복음, 자유를 선포하다복음만이 모든 것을 바꾼다는 2018년 한국에서 개최된 ‘센터처치 콘퍼런스’에서 강의한 내용을 묶은 책이다. 팀 켈러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람에게 설교하기’와 ‘복음의 상황화’라는 주제로 강의한 내용이 실렸다. 비신자에게 설교하는 구체적인 원리들이 자세히 정리되어 있다. 복음이 핵심이다는 The Gospel Coalition에 속한 저자들이 열네 편의 글을 묶은 책이다. 팀 켈러는 D. A. 카슨과 ‘복음중심의 사역’이라는 주제로 TGC 정신에 대해 썼고, 브라이언 채플, 케빈 드영 등의 저자들이 한 편씩 기고했다. 복음, 자유를 선포하다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면 2017년 TGC에서 갈라디아서를 강해한 책이다. 팀 켈러는 그중에서 갈라디아서 6장을 설교했다. 2) 전도와 변증 ① 하나님을 말하다 / 살아있는 신 팀 켈러를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올려놓은 The Reason for God을 번역한 책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게 기독교를 변증한다. 팀 켈러의 변증은 복음을 향해 나가기 위한 장애물을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 사람들의 생각 속에는 어떤 믿음이 존재하는데, 가장 기초적인 믿음의 모순을 드러내 주고 복음의 원리를 따라 세상을 바라볼 때 가장 세상을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음을 논증해준다. ② 답이 되는 기독교 하나님을 말하다 출간 후 제기된 다양한 의견과 반대의견에 대해 다시 반론하면서 기독교의 합리성과 요즘 시대 사람들이 가지는 잘못된 신념들을 밝히고 복음이 가장 삶을 행복하게 한다고 증명한다. 시대마다 사람들의 생각을 이끌어가는 ‘문화 내러티브’가 존재하는데, 그 문화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내 주고 복음으로 답을 해준다. 문화를 향해 설교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알게 해준다. ③ 인생 질문 / 예수를 만나다 하버드와 옥스퍼드 대학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을 상대로, 요한복음을 통해 복음을 전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서, 전도와 전도설교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책이다. 팀 켈러가 비신자들을 대상으로 어떻게 복음을 전달하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좋다. ④ 탈기독교시대 전도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전도의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 이전 시대는 교회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사회에서도 권위 있는 목소리로 통용되었지만, 지금 교회의 메시지는 사회에서 통용되는 문화 내러티브와 동떨어져 있다. 이런 시대에 어떻게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내면서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을까를 소개한다. 3) 개인 경건 ① 묵상: 예수의 노래들 시편을 365일 묵상하고 기도할 수 있도록 구성된 책이다. 아내인 케시 켈러와 공저했다.② 오늘을 사는 잠언 잠언을 365일 묵상하고 기도할 수 있도록 구성된 책이다. 아내인 케시 켈러와 공저했다.③ 고통에 답하다고난과 고통의 문제를 심층 분석하고, 고난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고난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임을 알게 해주고 고난 속에서도 주와 동행할 수 있는 은혜를 나누어 준다. ④ 기도기도 안내서이다. 기도는 하나님과 친밀함을 구하는 대화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것이라는 두 가지 주제를 하나로 묶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며 또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임을 아우구스티누트, 루터, 칼뱅 등 교회사의 기도의 거장들로부터 기도를 배우고, 더 깊은 기도를 위한 지침들이 기록되어 있다. 기도의 교본으로 균형 잡힌 책이다. 4) 예배 ① 말씀 아래서 드리는 예배예배라는 주제를 다양한 교파의 목회자가 공저한 내용이다. 팀 켈러는 ‘대도시에서 드리는 개혁주의 예배’라는 주제로 기고했다. 오늘날 예배에 대해 다양한 논쟁들이 있지만 무엇이 성경적이고 무엇이 역사적인지를 구분하며 사랑 안에서 질서를 세워가는 과정들을 설명한다. 또 리디머 교회의 예배 형식을 예로 소개하고 있다. ② 21세기 복음전도 예배예배에 대한 내용을 묶은 책이다. 팀 켈러는 ‘21세기 복음전도 예배’라는 주제로 글을 썼다. 센터처치 제7부 통합적 사역의 제2장 ‘사역할 때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다’의 내용과 복음만이 모든 것을 바꾼다의 ‘포스트모던 시대의 설교’의 요약본이라 할 수 있다. 2. 사람들을 서로에게 연결하는 것 1) 교회와 공동체 ① 복음과 삶: Part 3 복음이 ‘공동체’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복음과 삶’ 성경공부 교재의 ‘복음이 공동체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는 공동체와 전도, 두 가지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② 운동에 참여하는 센터처치 교회에 대해 다루지만, 특히 Part 2 ‘통합적 사역을 추구하라’의 제6장 ‘공동체를 만나도록 연결하라’는 공동체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③ 개혁주의 실천신학팀 켈러가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실천신학을 강의할 때 사용한 교재이다. 목회 사역의 근거와 특별직무, 소명, 목회사역을 위한 계획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④ 용서를 배우다팀 켈러가 직접 쓴 마지막 작품이다. 용서를 거부하는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내고 어떻게 복음이 용서로 이끌어가는지를 보여준다. 팀 켈러의 인격과 삶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책이다. 용서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하나님의 성품으로 바로잡고, 진정한 용서의 출발이 오직 은혜임을 알려준다. 복음이 대인관계의 영역까지 확대되어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2) 가정 ① 결혼을 말하다 결혼에 관한 여덟 편의 설교를 모은 책이다. 독신에 관한 내용도 한 장이 포함되어 있다. 제6장 ‘다름의 복을 누리라’에서 서로 다른 부부를 포용하는 것에 대해 또 남편의 머리됨에 대해서는 케시 켈러의 입장에서 기록되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② 결혼의 의미결혼과 가정에 관해 365일 묵상하고 기도할 수 있도록 구성된 책이다. 캐시 켈러와 공저. ③ 인생 베이직 시리즈 : 태어남, 결혼, 죽음에 관하여 태어남, 결혼, 죽음에 관하여 기록한 짧은 소책자이다. 전도와 변증의 책으로 유용하다. 팀 켈러 소천 이후에 ‘죽음에 관하여’의 내용은 마치 생생한 그의 신앙고백처럼 들린다.3. 사람들을 세상과 연결하는 것 1) 사람들을 도시에 연결하는 것 ① 여리고 가는 길정의와 자비 사역을 다룬 책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구체적으로 도시를 섬기는 과정을 설명한 책이다. 복음주의 교회는 주로 개인 구원에 편향되어 있고, 사회 구원에 대해 소리를 높이는 교회는 복음이 약한 편인데, 팀 켈러는 그런 공식을 깨고 복음을 바로 이해하면 이웃과 세상을 섬기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웃을 섬기는 구체적인 적용들도 많이 제시한다.② 정의란 무엇인가‘여리고 가는 길’에 기초한 확장된 설교라고 할 수 있다. 왜 지역을 섬기는 정의 사역이 필요한지 설명한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을 단순한 구제가 아니라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을 돌려주는 정의의 문제로 바라본다.③ 도시를 품는 센터처치센터처치의 ‘도시’ 부분을 따로 분권한 책이다. 복음의 상황화, 도시비전, 문화참여로 구성되어 있고, 팀 켈러와 앤디클라우치의 인터뷰가 있다. 교회와 도시의 관계와 도시목회에 대해 잘 설명해준다. 2) 사람들을 문화에 연결하는 것 ① 일과 영성신앙과 직업의 통합을 추구하는 책이다. 일과 직업의 관계를 창조, 타락, 구속의 관점으로 구성했고 서문에 나오는 돌킨의 ‘니글의 이파리’라는 예를 통해 회복의 관점까지 소개하고 있다. ② 운동에 참여하는 센터처치 ‘도시를 품는 센터처치’와 ‘운동에 참여하는 센터처치’는 도시와 문화라는 구분 없이 두 주제 모두 포함하고 있다. 특히 복음 생태계를 이루는 과정은 교회와 세상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③ 차이를 뛰어넘는 그리스도인그리스도인이 공적 영역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성경적 가이드라인과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을 예로 들어 소개한 책이다. 팀 켈러는 프롤로그에서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과 2장 세속 도시 속에서 소금이 소금되게’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또 목회자로서 어떻게 살고 행동해야 하는지를 소개하고 있다. 4. 교회 개척을 통해 복음 생태계를 만드는 것 ① 센터처치 / 운동에 참여하는 센터처치② Church planting (교회 내부 자료) 5. 그 밖의 자료들 마인드맵(이 글 끝에 있음)에서는 설교와 설교집, 주석 및 성경공부 교재를 ‘하나님과 연결’이라는 부분으로 구성했다. 1) 설교와 설교집 ① 팀 켈러의 설교 ② 왕의 십자가 마가복음 설교집 ③ 예수, 예수: 이 시대가 읽어버린 이름 성탄 설교집 ④ 천국 묵상 천국에 대한 설교 2015년 TGC 콘퍼런스 설교(1장 생명을 선택하라, 패널토의)⑤ 그분의 사역 누가복음 설교 2014년 TGC 콘퍼런스 설교(누가복음 24장 무죄를 입증하다, 패널토의)2) 주석 및 성경공부 ① 당신을 위한 로마서, 1, 2② 당신을 위한 사사기③ 당신을 위한 갈라디아서④ 당신을 위한 팀 켈러의 90일 성경공부: 갈라디아서, 사사기, 로마서⑤ 로마서 성경공부 ⑥ 복음과 삶 성경공부3) 하나님의 사람, 팀 켈러 팀 켈러가 직접 쓴 책은 아니지만 팀 켈러와 함께 사역한 TGC 편집장 콜린 핸슨이 3년 동안 팀 켈러와 주위 사람들을 인터뷰하여 쓴 팀 켈러 전기이다. 팀 켈러의 업적을 기리는 전기가 아니라 팀 켈러를 오늘날 팀 켈러로 만든 팀 켈러에게 영향을 미친 사람들을 추적하여 조사하고 어떻게 한 사람의 인생을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지를 잘 보여준다. 팀 켈러의 저서를 읽기 전에 팀 켈러의 전기를 먼저 읽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대배교에 관해서 알아야 할 열 가지
by Paul Carter
2023-08-10
예수님과 사도들은 재림과 그의 나라가 완전히 완성되기 직전에 일어날 대배교를 예상한 것 같다. 다음은 대배교에 대해 알아야 할 열 가지이다.대배교와 배역은 거의 같은 것이다흔히 감람산 담화로 알려진 마태복음 24장의 중간 부분에서 예수님은 말세에 대규모로 발생할 일종의 배교를 언급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 많은 사람이 걸려서 넘어질 것이요, 서로 넘겨주고, 서로 미워할 것이다. 또 거짓 예언자들이 많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을 홀릴 것이다. 그리고 불법이 성하여,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이 하늘 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서, 모든 민족에게 증언될 것이다. 그 때에야 끝이 올 것이다.” (마태복음 24:10-14)바로 이 예수님의 이 말씀이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서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일어나야 할 “배신”(the rebellion)을 가르친 배경이 된 것 같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일과 우리가 그분 앞에 모이는 일을 두고 여러분에게 간청합니다. 여러분은, 영이나 말이나 우리에게서 받았다고 하는 편지에 속아서, 주님의 날이 벌써 왔다고 생각하게 되어, 마음이 쉽게 흔들리거나 당황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은 아무에게도 어떤 방식으로도 속아넘어가지 마십시오. 그 날이 오기 전에 먼저 믿음을 배신하는 일이 생기고, 불법자 곧 멸망의 자식이 나타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1-3)데살로니가후서 2:3에서 바울은 “배교” “걸려 넘어짐” “반역” “배신”으로 번역될 수 있는 헬라어 아포스타시아(apostasia)를 사용한다. 따라서 지금 같은 사건을 놓고 예수님과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대배교는 가시 교회 또는 제도 교회 안에서 일어난다대배교란 기독교 신앙에서 심각하게 떨어져 나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불신자들이 일으키는 정부에 대한 반란이 아니라, 이전에 믿고 한 형제였던 사람들에 의해서 발생하는 기독교 신앙과 실천에 대한 반란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개혁파와 복음주의 학자들 대부분이 거의 일치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안토니 A. 후크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배교는 눈에 보이는 교회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일어날 것이다.”[1]그레고리 빌(G. K. Beale)도 비슷한 말을 했다.“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참된 성도들이 존재하는 가시 교회 공동체가 너무 배교하여 말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큰소리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교회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다고 공언하겠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실제로는 참 신자가 아닐 것이다.”[2]대배교는 종말의 방아쇠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마태복음 24장과 데살로니가후서 2장 모두에서 대배교는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의 사건들과 연관되어 있다. 예수님의 말씀이다. “또 많은 사람이 걸려서 넘어질 것이요, 서로 넘겨주고, 서로 미워할 것이다. 또 거짓 예언자들이 많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을 홀릴 것이다. … 이 하늘 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서, 모든 민족에게 증언될 것이다. 그 때에야 끝이 올 것이다.” (마태복음 24:10-14)위에 인용된 데살로니가후서 부분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일어날 수 없는 이유를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 날이 오기 전에 먼저 믿음을 배신하는 일이 생기고.” (데살로니가후서 2:3).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배신이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를 설명한다. “그 때에 불법자가 나타날 터인데, 주[예수]께서 그 입김으로 그를 죽이실 것이고, 그 오시는 광경의 광채로 그를 멸하실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8)따라서 두 기록 모두에서 대배교로 대표되는 불법자의 행동이 주님의 재림 직전에 발생할 것임을 분명히 한다. 사실, 예수님은 감람산 말씀에서 하신, “그제야 끝이 오리라”라는 진술을 포함하여 다음 구절을 통해서도 그 기간에 일어날 일을 설명했다. “그러므로 너희는 예언자 다니엘이 말한 바, 황폐하게 하는 가증스러운 물건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것을 보거든, (읽는 사람은 깨달아라.)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사람들은 산으로 도망하여라.” (마태복음 24:15-16)종말의 사건은 분명히 일종의 정해진 패턴을 따라서 진행될 것이다. 따라서 성경을 열심히 읽는 성도와 표적 관찰자라면 종말이 가까웠음을 분별하고 적절한 예방 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감람산 말씀을 직접적인 맥락에서 보자면야 예루살렘의 포위와 멸망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지만, 말씀 자체라는 큰 측면에서 볼 때 이 사건은 종말을 예고하는 크고 마지막 산고를 예견하도록 돕는 성경 해석에 꼭 필요한 렌즈 역할을 한다. 따라서 대배교 자체와 주인공인 불법자의 행동은 궁극적인 종말 직전에 발생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종말을 촉발하는 역할을 하는 셈이다. 대배교는 “불법자”와 연관되어 있다데살로니가후서 2장을 보면 반역은 불법자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여러분은 아무에게도 어떤 방식으로도 속아넘어가지 마십시오. 그 날이 오기 전에 먼저 믿음을 배신하는 일이 생기고, 불법자 곧 멸망의 자식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이나 예배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에 대항하고, 그들 위로 자기를 높이는 자인데,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서,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3-4)3절에 나오는 “그리고”라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 학자들과 주석가들 사이에 약간의 논쟁이 있다. 바울은 반역이 불법자에 의해 야기되었다고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반역이 발생한 와중에 불법자가 자연스럽게 등장한다는 의미일까? 불법자와 반역이라는 사건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 걸까? 문법상 의미가 결정적이지 않기에 둘이 별개이지만 동시에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마도 가장 단순하고 안전한 해석일 것이다. 반역의 계절은 단지 한 사람의 행동이 일으키는 것보다는 훨씬 더 넓고 광범위하다. 그러나 그 계절에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 들어서는 순간 불법자라는 중요한 인물이 하는 행동의 지배를 받을 것이다. 불법자는 적그리스도의 또 다른 이름인 것 같다대다수의 저자와 주석가는 “불법자”와 “적그리스도”라는 용어를 같은 의미로 취급한다. 예를 들어 샘 스톰스(Sam Storm)는 그가 쓴 ‘Kingdom Come’의 17장에 “성경적 종말론의 적그리스도: 데살로니가후서 2장 연구”(The Antichrist in Biblical Eschatology: A Study of 2 Thessalonians 2)라는 제목을 붙였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 “적그리스도”라는 용어가 전혀 나오지 않는데도 그렇게 한 것이다. 그 구절에서 바울은 단지 “불법자”만을 언급한다. 그러나 신약학자들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스톰스에게도 이 용어는 상호 교환이 가능하다. “적그리스도”라는 용어를 사용한 사람은 사도 요한이 유일하다. 예를 들어 요한일서 2:18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어린이 여러분, 지금은 마지막 때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적대자가 올 것이라는 말을 들은 것과 같이, 지금 그리스도의 적대자가 많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이 마지막 때임을 압니다.” 요한이 말하는 의미는 확실하다. 적그리스도의 영은 항상 우리 가운데에 거할 뿐 아니라 크고 마지막에 등장할 적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불법의 신비가 항상 우리 곁에 있는 동시에 또한 위대하고 전형적인 불법자가 미래에 올 것을 말하는 바울과 다르지 않다.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바울은 특정한 시대의 끝에만 나타날 사람에 대해 쓰고 있다. 불법자는 종말론적 인물이다.”[3]이 두 용어가 다니엘서가 처음으로 소개하는 이야기, 마지막 때에 예언 단계를 성취하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항해서 싸우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를 묘사한 인물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다니엘 7-10장에서 우리는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라는 인물을 만난다. 그는 요한이 적그리스도라고 지칭하고 바울이 불법자라고 지칭하는 사람이 가진 일종의 패턴 또는 “예증된 사례”라는 역할을 한다. 트렘퍼 롱맨 3세(Tremper Longman III)는 그의 다니엘서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안티오쿠스는 그리스도인들이 적그리스도로 이해하던 한 사람의 적절한 상징이 되었다.”[4]다니엘서 7:25은 그에 관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가 가장 높으신 분께 대항하여 말하며, 가장 높으신 분의 성도들을 괴롭히며, 정해진 때와 법을 바꾸려고 할 것이다. 성도들은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까지 그의 권세 아래에 놓일 것이다.”삼 년 반 동안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는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혀도 된다는 광범위한 허가를 받았고 그 기회를 끝까지 다 썼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극한으로까지 몰아붙였다. 그는 유대 땅에 헬라식 휴일, 관습 및 법률을 부과함으로 유대 민족의 독특한 종교적 표현을 지우려고 했다. 실로 잔인하고 절박한 계절이었지만 결과는 26-28절에 예언된 그대로였다.“그러나 심판이 내려서, 그는 권세를 빼앗기고, 멸망하여 없어질 것이다.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열국의 위력이 가장 높으신 분의 거룩한 백성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다. 권세를 가진 모든 통치자가 그를 섬기며 복종할 것이다. 이것이 그 환상의 끝이다. 나 다니엘은 이 생각 때문에 고민하여, 얼굴색이 변하였지만, 이 일을 마음에 간직하였다.” (다니엘 7:26-27)그의 권력이 절정에 달했을 때, 언약 백성의 믿음을 말살시키려고 시도하던 중에 하늘에서 결정이 내려졌다. 그의 왕국은 갑자기 붕괴했고, 그의 영토는 하나님과 함께 영원토록 통치할 성도들에게 넘어간다. 이것이 환상의 끝이다. 마태복음 24:14에 주어진 결말과 도무지 부정하지 못할 정도로 비슷하다. “그 때에야 끝이 올 것이다.” 따라서 적그리스도로도 알려진 불법자는 다니엘서가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를 통해서 확립한 패턴 그대로 삶과 망상과 타락이라는 단계를 그대로 이행한다. 적그리스도 또는 불법자는 현재 억제되고 있다데살로니가후서 2:7에서 사도 바울은 말한다. “불법의 비밀이 벌써 작동하고 있습니다. 다만, 억제하시는 분이 물러나실 때까지는, 그것을 억제하실 것입니다.”신약성경에서 “신비”라는 단어는 나중에 일어나고 나서야 명백해지는 사건, 현재에는 분명하게 보이지 않고 숨겨진 어떤 사건을 가리키는 데 자주 사용된다. 따라서 바울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어떤 일이 결국에 가서는 훨씬 더 두드러지게 될 것이며 억제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훤히 드러날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다른 말로 하면, 악마는 항상 성육신을 자신의 조잡한 해석으로 훼손하려고 하지만, 여전히 그 수준이 형편없다는 것이다. 사탄의 모든 노력은 실패한다. 그는 자신이 준비한 주인공을 아직은 역사의 무대 중앙에 두지 못했지만,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사탄의 노력으로 인한 영향력과 활동은 영적 눈을 뜬 사람의 눈에는 보일 수밖에 없다. 그레고리 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울은 비록 이 마귀가 아직 역사의 마지막 때에 그렇게 눈에 띄게 오지는 않았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속이는 자들, 거짓 선생들을 통해 언약 공동체에서 ‘이미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5]억제자가 하나님이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지금 그것을 억제하는 자”의 정체는 상당한 논쟁거리이다. 데살로니가후서 2:6-7에서 바울은 말한다.“여러분이 아는 대로, 그자가 지금은 억제를 당하고 있지만, 그의 때가 오면 나타날 것입니다. 불법의 비밀이 벌써 작동하고 있습니다. 다만, 억제하시는 분이 물러나실 때까지는, 그것을 억제하실 것입니다.” 혼란이 발생하는 가장 큰 이유는 중성 및 남성 명사의 비정상적인 사용 때문이다. 6절에서 중성 단어를 사용한 바울이 7절에서는 남성 단어를 썼다. 당신은 “무엇”이 억제하는지 알고 있다. 현재 억제하고 있는 오로지 “그”만이 “그”가 사라질 때까지 앞으로도 계속 억제할 것이다. 후자에 나오는 “그”가 진짜 “그”인가 아니면 “그것”인가? 그게 질문의 핵심이다. 역사적으로 많은 주석가가 구속자와 로마 제국을 동일시했다. 테르툴리아누스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인데, 그는 제국 자체에 초점을 두는 경우에는 “그것”으로, 또는 통치하는 황제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에는 “그”로 언급할 수 있다고 이해했다. 현대의 주석가들도 보다 일반적인 의미이지만 동일한 견해를 채택한다. 로마 제국이 사라진 현재, 많은 사람이 일반적으로 “그것”을 정부로, “그”를 실제 지도자를 대표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것이 천사의 힘을 의미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주장은 다니엘서에서 감지된 유사점에 근거하는 경향이 있다. 다니엘 10장에서 우리는 영적 존재(일부는 천사라고 하고 다른 사람들은 성육신한 그리스도라고 말한다)를 만난다. 그는 또 다른 영적 존재에 의해 대적되고 세 번째 영적 존재인 대천사 미카엘의 도움을 받는데, 그 결과 어떤 목적을 달성하고 지상과 천상의 영역에 걸쳐서 영향을 미친다. 다니엘 10:13-14은 이 신성한 존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기록했다. “그러나 페르시아 왕국의 천사장이 스무하루 동안 내 앞을 막았다. 내가 페르시아에 홀로 남아 있었으므로, 천사장 가운데 하나인 미가엘이 나를 도와주었다. 이제 내가 마지막 때에 네 백성에게 일어날 일을 깨닫게 해주려고 왔다. 이 환상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보여 주는 것이다.”다니엘서는 땅에서 발생하는 지정학적 현실이 어떤 면에서 영적 영역에까지 작동한다는 점을 반영하고 있다. 이 역학을 활용해서 우리는 데살로니가후서의 “그/그것”의 언어를 설명할 수 있다. 천사가 “그”일 수도 있고, 그가 활용하는 어떤 종류의 지상 계획, 공급 또는 능력이 “그것”일 수도 있다.이건 가능한 해석이다. 그러나 가장 간단한 방법은 “지금 그것을 막는 자”를 하나님으로 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다. 그는 가죽끈을 잡고 있다. 열고 닫는다. 그리고 그는 죽이기도 하고 살아나게도 한다. 그분은 다양한 대리인과 수단을 통해 일하시지만 완전하고도 전적인 주권자이다. 이사야서 마지막 장에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문제가 논의될 때, 하나님은 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바로 내가 아이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거늘, 어찌 내가 아이를 낳게 할 수 없겠느냐?”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아이를 낳게 하는 이가 나이거늘, 어찌 내가 아이를 못 나오게 막겠느냐?” 너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이사야 66:9)흥미롭게도 9절에 사용된 히브리어 단어는 ESV에서 “닫다”로 번역되었으며, 문자적으로는 “제지하다”를 의미한다. 히브리어 atzar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문자 그대로 이사야 66:9에서 “내가 항상 자제해야 하는가?”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 담긴 암묵적인 대답은 당연히 “아니요”이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태를 완전히 여실 것이며 영원 전부터 계획되고 정하신 모든 것이 나올 것이다. 이 구절과 가장 가까운 신약 평행선인 디모데전서 6:14-15에서 사도 바울은 그의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그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그 계명을 지켜서,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는 사람이 되십시오. 정한 때가 오면, 하나님께서 주님의 나타나심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찬양 받으실 분이시요, 오직 한 분이신 통치자이시요,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십니다.”이 구절에서 “그”는 분명히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주님의 날이 언제가 될 것인지를 결정할 것이다. 그분은 언제 예수님을 이 땅에 다시 보내실 것인지를 결정한다. 그는 타임라인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다. 따라서 바울이 그의 백성들에게 굳이 더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그를 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다들 알고 있지?”라고 말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건 전혀 어렵지 않다. 결과가 그게 아니었다면, 바울은 좀 더 자세하게 설명했을 것이다. 사도 베드로도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종말론적 사건의 시기를 책임지신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는 약속을 더디 지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여러분을 위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베드로후서 3:9)베드로에 따르면, 계획이 이루어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하나님의 무관심이나 무능력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모든 지연은 복음의 진보와 관련이 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올 것이다. 베드로는 말을 이어간다. “그리고 우리 주님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십시오. 그것은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 바울이, 자기가 받은 지혜를 따라서 여러분에게 편지한 바와 같습니다.” (베드로후서 3:15)베드로는 자신이 말하는 포인트가 바울 서신서 속 내용과 완벽하게 일치한다고 가정한다. 아마도 그가 말하는 바울의 글은 데살로니가후서일 것이다. 억제는 결국 제거될 것이다감람산 말씀의 예수, 데살로니가후서의 바울, 그리고 베드로후서의 베드로까지 예외 없이 동의하는 부분이 있다. 모두 구원의 복음이 모든 민족, 모든 사람들에게까지 전파하는 하나님의 계획의 일환으로 하나님이 이 위대한 마지막 사건을 지연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말세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관리 아래에 있다. 그 과업이 완수되면 억제가 풀리고 말세의 대투쟁이 시작된다. 그리고 마침내 끝이 올 것이다. 신약성경에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깊이 파고들라고 말하는 구절은 없다. 단지 사람들이 물을 때마다, 그들이 기억해야 할 점은 자신들에게 위임된 사명이다. 사도행전 1장에서 승천 직전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주님,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나라를 되찾아 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 (사도행전 1:6)이건 우리가 흔히 오해하는 것처럼 나쁜 질문이 아니다. 구약의 독자로서 그리고 1세기 유대인으로서 제자들은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님이 묘사하신 산고의 궁극적인 지점을 모든 이방인을 포함해서 이스라엘의 재통일을 가져오는 것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왕국에서 절정에 이를 것이라고 생각한 건 전혀 이상하지 않다. 에스겔 37장 마른 뼈들이 소생하는 환상 직후에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너 사람아, 너는 막대기 하나를 가져다가, 그 위에 ‘유다 및 그와 연합한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써라. 막대기를 또 하나 가져다가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 및 그와 연합한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고 써라. 그리고 두 막대기가 하나가 되게, 그 막대기를 서로 연결시켜라. 그것들이 네 손에서 하나가 될 것이다.” (에스겔 37:16-17)일단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하나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기 위해 오랫동안 기다려온 수단이라는 사실을 이해했다. 그런 그들이었기에 이스라엘 왕국의 회복에 관해서 묻는 것은 큰 비약이 아니다. 오순절 날에 각지로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복음을 듣기 위해 참석했다. 그들은 구원받았고 성령 충만을 입었다. 예언이 성취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완전한 성취를 위한 시간표가 어느 시점에서도 제자들과 공유된 적이 없다는 점이다. 그들은 시작을 엿볼 수 있다는 약속을 받았지만 살아서 마지막까지 목격할 거라는 약속은 받지 못했다. 따라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불필요한 호기심에 빠지지 않도록 그들의 관심을 당면한 과제로 돌렸다. “때나 시기는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권한으로 정하신 것이니, 너희가 알 바가 아니다.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사도행전 1:7-8)이스라엘 왕국의 재건을 보고 싶은가? 그렇다면 일을 시작하라.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이 천국 복음을 땅 끝까지 가지고 나가라. 지금 논의에 적용해서 볼 때, 우리는 이 거대한 종말론적 사건의 시기에 대해 알 수 없다. 그리고 아예 묻지 않는 게 좋다는 권고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함에도 우리가 유일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탄의 무법하고 반항적이고 유혹적이며 선동적인 활동을 억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지상 명령을 완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 동안 복음을 들을 기회의 창을 열어 두신다는 사실이다. 그 일이 완성됨에 따라, 마귀의 사슬은 더 길어질 것이며 사탄의 목적 달성에 필요한 반역이라는 문이 열릴 것이다. 큰 환난과 박해, 체질의 계절이 시작되고, 그 후에야 비로소 끝이 올 것이다. 불법자가 성도들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대적하여 자기를 높일 것이다우리는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라는 역사적 사례에 비추어 불법자가 그에게 주어진 확장된 허가 기간에 어떤 활동을 할지를 예상할 수 있다. 롱맨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안티오쿠스는 그리스도인들이 적그리스도라고 아는 한 사람의 적절한 상징이 되었다.”[6]다니엘서 7:25은 그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그가 가장 높으신 분께 대항하여 말하며, 가장 높으신 분의 성도들을 괴롭히며, 정해진 때와 법을 바꾸려고 할 것이다. 성도들은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까지 그의 권세 아래에 놓일 것이다.”삼 년 반 동안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는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광범위한 허가를 받았고 그 기회를 끝까지 다 썼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극한으로까지 몰아붙였다. 그는 유대 땅에 헬라식 휴일, 관습 및 법률을 부과하려고 했다. 아예 그들이 지켜온 삶의 방식을 지우려고 했다.그는 또한 자기 자신을 충성과 종교적 신앙의 궁극적인 대상으로 자리매김하려고 시도했다. 다니엘 8:9-11은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를 “작은 뿔”이라고 언급한다. “그 가운데의 하나에서 또 다른 뿔 하나가 작게 돋기 시작하였으나 남쪽과 동쪽과 영광스러운 땅 쪽으로 크게 뻗어 나갔다. 그것이 하늘 군대에 미칠 만큼 강해지더니, 그 군대와 별 가운데서 몇을 땅에 떨어뜨리고 짓밟았다. 그것이 마치 하늘 군대를 주관하시는 분만큼이나 강해진 듯하더니, 그분에게 매일 드리는 제사마저 없애 버리고, 그분의 성전도 파괴하였다.”성경 본문은 안티오쿠스가 “지상 수준의 승리”에 만족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는 하늘 그 자체, 심지어 하늘의 군대와도 전쟁을 벌일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일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 그리고 안티오쿠스가 마치 우주적 분쟁에서 라이벌이 되어서 겨루는 것처럼 보이는 하늘 군대를 주관하는 분은 누구인가? 이것은 주석가들 사이에서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이다. 어떤 이들은 대천사 미가엘을, 또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영웅인 가브리엘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우리는 단지 아는 건, 영적 전쟁이 분명히 매우 치열하다는 사실이다. 노아의 때와 같이 지상과 천상의 영역 사이의 경계선이 흐려지고 잠시나마 그 결과는 불확실한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데살로니가후서 2:4에 나오는 구절과 아주 잘 일치한다. 사도 바울은 불법자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는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이나 예배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에 대항하고, 그들 위로 자기를 높이는 자인데,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서,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성령의 영감을 받은 바울이 다니엘서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마지막 때의 무법자에 대한 그의 묘사는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라는 역사적 현실에 크게 의존하는 것처럼 보인다. 감람산 말씀에서 예수님은 이 위대한 마지막 사건의 시기에 대한 한 가지 단서를 심어놓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예언자 다니엘이 말한 바, 황폐하게 하는 가증스러운 물건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것을 보거든, (읽는 사람은 깨달아라)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사람들은 산으로 도망하여라.” (마태복음 24:15-16)예수님은 마치 다니엘 이야기가 반복되는 현실을 만난 우리에게 이렇게 외치는 거 같다. 산으로 도망가라! 주님의 날이 다가왔다!예수님 자신이 다니엘서 패턴의 반복을 하나의 방아쇠 사건, 특히 그가 “멸망의 가증한 것”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감안할 때, 그게 과연 무엇인지 호기심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다니엘은 이런 식의 표현을 8:13, 9:27, 11:31 그리고 12:11에 걸쳐서 총 네 번 사용한다. 이 표현은 그 자체만으로 해석이 어렵기에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몇 가지 추가 설명을 제공한다. 누가복음 21:20-22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예루살렘이 군대에게 포위 당하는 것을 보거든, 그 도성의 파멸이 가까이 온 줄 알아라.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사람들은 산으로 도망하고, 그 도성 안에 있는 사람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고, 산골에 있는 사람들은 그 성 안으로 들어가지 말아라. 그 때가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질 징벌의 날들이기 때문이다.”누가의 버전에서 예수님은 로마인들이 예루살렘으로 진군하기 시작할 때는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도망가라! 위대한 복수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예루살렘의 멸망을 첫 번째 “큰 환난”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면, 마지막 “큰 환난”에도 동일한 접근 방식을 적용해야 한다. 따라서 마태복음 24:15-16에서 방아쇠 사건을 주시하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적들에게 온통 둘러싸인 교회를 볼 때, 모두에게 미움받는 교회를 볼 때, 그리고 불법자가 교회의 목을 발로 누르며 마치 교회가 완전히 그의 손에 잡힌 것처럼 보일 때, 도망가라! 주님의 날이 다가왔다!이 모두는 데살로니가후서 2:4에서 바울이 불법자가 자신을 높이는 것에 대해 말할 때 필요한 모든 맥락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이나 예배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에 대항하고, 그들 위로 자기를 높이는 자인데,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서,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불법자가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선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일어난다면 도대체 어디에서? 물론 물리적 의미에서 더 이상 하나님의 성전은 없다. 성전은 주후 70년에 이미 파괴되었는데, 지금 그런 예언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는가?그 부분에 있어서 헤르만 리델보스(Herman Ridderbos)가 도움이 된다. 그의 말이다. “성전에 앉는 것은 신성한 속성이며, 따라서 자신에게 신성한 영예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7]대부분의 주석가들도 그렇게 이해한다. 프레드릭 F. 브루스(F. F. Bruce)는 이 표현을 다음과 같이 받아들인다.“하나님의 권위를 찬탈할 계획을 가진 그를 생생하게 표현한 것이다.”[8]이 예언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에 실제로 물리적인 성전을 재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표현은 신약성경에서 데살로니가후서 외에 열 번 사용되었으며, 그중 무려 아홉 번은 기독교의 교회를 의미한다. 스톰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신약의 다른 곳, 특히 바울의 글에서 성전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방식을 보면 이 단어는 교회, 그리스도의 몸, 그리고 하나님이 거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유일한 성전 이외의 것을 가리킬 수 없도록 만든다.”[9]따라서 우리는 일단 적그리스도가 겉보기에는 교회를 완전히 자신의 권세 안에 두게 될 상황이 올 것이라고 예상하는 게 맞을 거 같다. 그는 우리의 목을 발로 누르기 시작하면서, 어떤 식으로든 교회가 자신의 신성을 인정하도록 강요할 것이다. 그게 바로 방아쇠 사건이다. 그럴 때는 산으로 도망가야 한다. 모든 것의 끝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대배교와 불법자는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 종말을 맞을 것이다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는 잠시 동안 하늘의 군대와 경쟁하는 사건 속 인물로 나타났다. 그는 합리적으로 볼 때 매우 짧은 시간 내에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고 또 놀라운 힘을 축적했다. 그러나 예고도 없이 모든 것이 갑작스럽고 참혹한 종말을 맞았다. 다니엘 7:26-28은 이렇게 말한다.“그러나 심판이 내려서, 그는 권세를 빼앗기고, 멸망하여 없어질 것이다.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열국의 위력이 가장 높으신 분의 거룩한 백성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다. 권세를 가진 모든 통치자가 그를 섬기며 복종할 것이다. 이것이 그 환상의 끝이다. 나 다니엘은 이 생각 때문에 고민하여, 얼굴색이 변하였지만, 이 일을 마음에 간직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그의 권력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오만하고 불경스러운 원정을 벌이던 기원전 164년에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는 갑작스럽게 질병으로 사망했다.그가 왔다. 그리고 그는 허락받은 일을 했다. 그리고 죽었다.“이것이 그 환상의 끝이다.” (다니엘 7:28)이러한 패턴은 우리로 하여금 갑자기 나타난 말세의 불법자가 급속히 세력을 키우고 마귀의 방식으로 세상을 다스리다가 파국적으로 멸망할 것을 예상하게 한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예언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 같다.“그 때에 불법자가 나타날 터인데, 주 [예수]께서 그 입김으로 그를 죽이실 것이고, 그 오시는 광경의 광채로 그를 멸하실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8)그의 통치는 짧고 잔인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끝은 갑작스럽고, 아무도 그의 패망을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열국의 위력이 가장 높으신 분의 거룩한 백성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다. 권세를 가진 모든 통치자가 그를 섬기며 복종할 것이다.” (다니엘 7:27)불법자의 출현이 비록 단기적으로는 끔찍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전조이다. 그가 휘두르는 잔인함과 공포의 통치는 최종적인 체질의 메커니즘으로 기능하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의 재림을 위해 하나님의 백성을 정금처럼 단련하고 준비시키는 역할을 한다. 대망하는 아이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끔찍한 산고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근심에 싸여도, 그 근심이 기쁨으로 변할 것이다. 여자가 해산할 때에는 근심에 잠긴다. 진통할 때가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 때문에, 그 고통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지금 너희가 근심에 싸여 있지만, 내가 다시 너희를 볼 때에는, 너희의 마음이 기쁠 것이며, 그 기쁨을 너희에게서 빼앗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요한복음 16:20-22)하나님께 감사하자!1. Anthony A. Hoekema, The Bible And The Future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4), 153. 2. G. K. Beale, The Temple and the Church’s Mission in New Studies In Biblical Theology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2004), 280.3. Leon Morris, The First And Second Epistles To Thessalonians in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1), 221.4. Tremper Longman III, Daniel in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Zondervan, 1999), 209.5. G. K. Beale, The Temple and the Church’s Mission in New Studies In Biblical Theology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2004), 287.6. Tremper Longman III, Daniel in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Zondervan, 1999), 209.7. Herman Ridderbos as cited in Anthony A. Hoekema, The Bible And The Future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4), 160.8. F.F. Bruce, 1&2 Thessalonians in Word Biblical Commentary (Waco: Word Books, 1982), 169.9. Sam Storms, Kingdom Come (Geanies House: Mentor, 2013), 530.원제: 10 Things You Should Know about the Great Apostas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회개하지 않는 개구리
by 필립 정
2023-08-09
내가 사는 이곳 텍사스 댈러스는 최고 기온이 요즘 42도까지 치솟는다. 밤 7시가 넘은 현재 기온이 40도다. 이 기온이 앞으로 열흘은 더 지속된다는 예보다. 밖에서 잠깐 일하다가 손바닥에 화상을 입고 그대로 돌아왔다.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면 거인국으로 끌려와 위험과 공포에 시달리며 사는 걸리버 같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 이런 환경을 개선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며칠째 시달리고 있다. 이 무력감이 어디서 왔는지 찾아보려고 지금까지의 나를 있게 한 교회와 신학을 따라가 보아야 했다. 그리고 내 무력감이 역설적으로 내가 의지해 왔던 교회의 자기 생존 본능에서 왔다는 근거들을 찾게 되었다. 결국 그 공동체에 속한 나 자신도 내 문제를 벗어나 세상을 바꿀 힘이 없이 무력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내가 사는 이곳에는 Southern Baptist Seminary, Dallas Baptist University, Dallas Theological Seminary 같은 유명한 복음주의 신학교들이 있다. 또 이곳은 ‘바이블 벨트’라고 불릴 정도로 교회가 많은데, 매우 보수적인 남침례교 교회들이 대다수다. 내가 다니는 교회는 다양한 달란트와 은사로 사역하는 초교파 교회라 그 개방성이 마음이 들어 줄곧 다녀왔다. 복음적이면서도 매우 활발하게 선교, 봉사, 구제 사역을 펼치는 교회다.그러나 팬데믹 당시부터 전형적인 미국 복음주의 교회가 갖는 한계를 이 교회뿐 아니라 주변의 복음주의 교회들이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거의 모든 설교와 기도 제목이 ‘교회가 어떻게 이 위기를 견뎌낼 것인가’ 하는 생존의 문제였다. ‘복음 전파’도 교회 생존의 연장선에 있어 보였고 지역 사회와 인류의 안녕은 주요 기도 제목에 들어가지 않았다. 옆집 구경하듯 한다는 말이 어울릴 듯하다. 당시 중국 탓을 하거나 코로나바이러스 발생을 음모론으로 가볍게 취급하였고 백신 주사 거부는 물론 마스크 쓰는 것조차도 격렬히 저항하는 교인이 너무 많았다. 교회 청소하는 한인이 마스크 쓰며 청소한다는 이유로 쫓겨날 뻔한 적도 있다. 온실가스에 의한 기후 변화와 지구 열대화가 사람들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파리기후협약을 탈퇴한 열렬한 트럼프 지지자들다운 모습 더도 덜도 아니었다. 내가 한국에서 다녔던 신학교나 다른 보수 교단 신학교 역시 별다르지 않다. 내가 속했던 교단도 여러 번의 위기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위기를 피하는 방법은 일관되게 동일하다. 일제의 핍박과 폐교 위기를 1938년 예수교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 참배 가결로 피해 버렸고, 3.15 부정 선거를 저지른 이승만 정권을 교회 지도자들이 지지했고, 보수주의 교회 지도자 242명은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을 지지하여 정부로부터 안정된 지원을 받았다. 이런 식으로 사회 혼란기를 회피하며 교회는 안정을 얻어냈다. 그리고 1980년 전두환을 위한 국가조찬기도회 주요 참석자들 역시 박정희 3선 개헌 지지자들이었다. 이에 대한 주요 보수 교단들의 변명은 일관되게 “교회 생존을 위협하는 자유주의 신학과 공산 세력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였다. 이 대답이 얼마나 신앙적으로 모순이 있는지는 얘기하지 않겠다. 왜냐면 이 대답 자체가 교회가 스스로 무력하다는 것을 방증하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가 쇠락한 원인은 자유주의 신학, 교회 세속화, 성직자들의 타락, 교회 성장주의라고 박용규 총신대학원 교회사 교수는 말한다. 적극적으로 동감한다. 여기에 비판 없이 교회 안으로 스며 들어온 좌우/젠더 이데올로기, 경제 발전으로 인한 사회 변화 같은 여러 요인이 있다. 그러나 팬데믹 이후 예측할 수 없는 경제와 기후 문제를 겪는 뉴노멀 시대 위기에도 여전히 교회는 예전과 같이 ‘보신주의’ 외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자기의 앞가림만 하는 교회는 세상을 향한 빛을 비출 수 없기 때문이다. 잠시 희망을 찾았던 교회1980년대 한국 교회의 역동성은 청년들에게서 나타났다. 이 시대에 청년들에게 가장 많이 읽힌 신앙 서적의 핵심 주제는 헤르만 리델보스, 조지 래드, 게할더스 보스 같은 학자들의 ‘하나님 나라’였다. 교회 청년들을 중심으로 이런 책들이 읽히면서 하나님 나라 신학은 그 세대를 지배하던 마르크스 자본론이나 주체사상에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신학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전에 우리가 알던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영적 천국이었는데, 새로운 하나님 나라 신학은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영역이며 인간의 역사 가운데 실현하시는 이미 임한 그러나 앞으로 임할 완전한 통치”라고 하여 사회 정치 현안에 참여하는 길을 열어 숨통을 틔워 주었다.그 이후 민주화 운동이 정점을 찍어가던 1986년 한국복음주의협의회를 비롯한 보수 교단들이 호헌 철폐, 직선 개헌 문제에 조금씩 직간접으로 발언하기 시작했다. 교회 지도자들이 스스로 시국 문제에 침묵을 지켜왔다고 말하며 앞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사회, 정치, 경제, 문화 전 영역에 하나님의 통치가 나타나게 해야 한다고 나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뒤에서 따라가는 형국이었다. 이미 민주화 운동은 천주교회나 사회단체, 대학이 끌고 가고 복음주의 교회는 어쩔 수 없이 따라가는 모양새였다.2010년 복음주의자들의 제3차 로잔 대회에서 인류의 자원 낭비와 지구 오염을 죄악이라고 명시하는 의미 있는 선언이 있었다. 케이프타운 선언 제8항이 그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사랑한다. 이러한 사랑은 우리가 지구상의 자원을 허비하고 오염시키는 데 일조하며 소비주의에 대한 해악적 숭배에 공조하는 것을 회개하는 것이다.” 그러나 로잔 언약과 그 운동의 영향력은 한국 보수 교회에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었다. 이전부터 경제 안정을 바탕으로 소비문화가 정착되어 가는 시대에 들어섰고 경제 주체인 교인들에게 “과한 소비는 죄”라고 말하는 목회자가 설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디 이것뿐일까. 빈부 양극화를 초래하는 부동산 문제를 복음주의 교회는 언급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다. “부동산 투기는 이웃의 땅을 빼앗는 죄악”이라고 할 목회자 또한 버텨 낼 수 없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다 그렇게 돈 버는 시대에 교회는 위험한 발언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그리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얼마나 교회가 무력한지 알 수 있게 할 근거가 될 뿐이었다.이곳은 연일 타들어 간다. 텍사스 보건국(Texas State Health Department) 조사에 따르면 “더위나 더위와 관련된 질환으로 306명이 2022년에 생명을 잃었다.” 미국 전역에서는 700여 명이 같은 원인으로 해마다 생명을 잃는다. 민승기 포항공대 환경학과 교수에 의하면 “지금처럼 온실가스를 배출하면 2030년대에 북극의 빙하가 모두 녹게 되고 저 배출 정책을 쓰더라도 2050년대에는 북극의 빙하가 다 사라져 홍수 화재, 폭염, 폭풍, 같은 기후 변화가 급증할 것이다.” 이 이상 더 끔찍한 인류의 종말의 증거를 찾을 수 있을까 싶다. ‘삶은 개구리 증후군’이란 말이 있다. 처음부터 뜨거운 물에 넣은 개구리는 뛰어나오지만, 서서히 온도를 올린 물에 들어간 개구리는 결국 죽었다는 미국 코넬 대학의 실험에서 나온 말이다. 지금 인류는 삶겨지는 위기에 처한 개구리와 다를 것 없다. 그렇게 죽어 가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오늘도 어제처럼 산다. 교회도 지금까지 생존 본능을 발하며 버텨 왔지만, 이 위기는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다. 최근에 안토니오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지구 온난화 시대는 끝났고 지구 열대화 시대가 도래했다”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거의 모든 과학자가 지구 열대화를 돌이킬 수 없다고 말한다. 인류가 처한 재앙을 돌이키기에는 늦었다는 것이다. 영화 ‘투모로우’가 생각난다.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누구나 자연재해로 죽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게 된다. 이제는 재앙을 막을 수는 없지만 늦추기 위해서라도 교회는 경고하고 움직여야 한다. 이 무력함이 교회의 나약함으로 그리스도의 능력을 나타내는 마지막 희망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신자는 신자와 결혼해야 한다. 왜?
by Matt Boga
2023-08-08
지난 수년간 대학생과 이십 대를 제자훈련하면서 끊임없이 받은 질문이 있다. “불신자와 연애해도 되나요?” 그리스도인의 데이트 목적은 배우자를 찾기 위한 것이기에 이 질문은 결국 “불신자와 결혼해도 됩니까”로 바꿔도 무방하다. “안 된다”라고 성경은 여기에 아주 간단하게 답한다. 그러나 나는 이 짧은 대답에 많은 사람이 불편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 당신이 이 질문과 씨름하고 있든, 아니면 그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을 제자훈련시키고 있든, 성경이 왜 불신자와 결혼하지 말라고 명령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말씀을 검토해야 한다.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결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에 관해서, 그리고 결혼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비전이 얼마나 놀라운지에 관해서 발견할 것이다. 결혼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성경의 명령 앞에서 불평하기 보다는 그 속에 숨은 보화를 기대하며 갈망하는 게 마땅하다. 한 몸이 됨으로써 이루는 연합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 다 그렇듯, 그리스도인이 불신자와 결혼해서 안 되는 이유에 대한 답도 그 동산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마가복음 10:2에서 결혼에 대한 구체적인 질문(“남편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습니까?”)을 받은 예수님은 과거를 회상하며 말씀을 시작하셨다. 결혼이 태초에 어떻게 설계되었는가를 살펴봄으로 현재에도 그 문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예수님의 대답도 그 접근법을 취하고 있는데, 우리는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 태초에 일어난 창조의 정점은 하나님이 그의 형상대로 만드신 유일한 피조물인 인류(남성과 여성)였다(창 1:27). 비록 하와가 나중에 아담의 몸에서 나와서 만들어진 것으로 묘사되지만, 성경이 말하는 결론은 오히려 더 단단하게 하나가 된 두 사람의 모습이다. 성경은 그들을 “한 몸”이라는 결합된 형태로 표현한다(창 2:22-24).아담과 하와라는 한 몸의 결합은 풀로 붙인 것이 아니라 아예 용접한 상태였다. 나무 조각 두 개를 강하게 붙이기 위해서 우리는 주로 접착제를 쓴다. 접착제는 두 개를 강력하게 하나로 묶지만 궁극적으로 서로 붙어있는 두 개는 여전히 두 개이다. 그러나 용접은 전혀 다르다. 용접이 하는 것은 접착이 아니라 융합이다. 융합에 의해 두 조각은 아예 하나가 된다. 접착제로 붙인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각각의 금속이 녹아서 아예 새로운 것으로 다시 태어난다. 금속이 녹는다는 것은 기존의 모든 특징을 포기한다는 의미이다. 결혼이 이와 비슷하다. 단지 남자가 주도한 계약에 따라서 결합한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결혼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언약에 따라서 새로운 창조물이 되기 위해서 융합된다. 물론 창세기 3장의 타락은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결혼 생활까지도 영원히 바꿔버렸다. 원칙의 목적타락의 여파로 성경의 구속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죄 많은 인간의 손에서 결혼은 이제 추악한 일탈을 겪는다. 족장들의 실패를 지나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광야로 나간 하나님은 그들에게 결혼에 관한 법을 주셨다. 이방 여자들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도망쳐 다른 신들을 섬길 것을 우려한(출 34:11-16) 하나님은 앞으로 정복할 땅의 딸들과 결혼하지 말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단단히 명령하셨다. 이 명령은 신명기에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다시 반복된다(신 7:3-4). 그리고 느헤미야는 바벨론에서 돌아오는 포로들에게 선포된 10장의 언약 갱신 의식 과정에서 이 주제를 다시 강조한다. 이 명령이 21세기 서양인의 귀에는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이방인과의 결혼을 금지한 하나님은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문제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순결한 혈통이 아니라 순결한 예배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순결하게 예배드리는 것을 중시한다. 그리고 이 명령의 중요성은 솔로몬 왕의 생애에서 생생하게 드러났다. 솔로몬: 케이스 스터디솔로몬이 하나님께 구한 것은 오로지 하나, 백성을 인도할 지혜였고 그 사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왕상 3:10). 하나님은 상으로 그에게 세상이 알지 못하는 부와 지혜를 주셨다(왕상 4:29-34). 온 세상 사람들이 그의 지혜와 다스림을 기이히 여기고 그로 인하여 여호와를 송축하였다(왕상 10:1-10). 그러나 비극적으로 솔로몬은 그를 여호와에게서 돌아서게 한 많은 이방 여인과 결혼했다. “솔로몬은, 자기의 주 하나님께 그의 아버지 다윗만큼은 완전하지 못하였다”(왕상 11:4).하나님의 풍성한 지혜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었던 솔로몬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과 결혼함으로써 하나님을 향한 참된 예배에서 여전히 돌아섰다. 나는 솔로몬과 다를 거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내 주변의 이야기지만, 나는 여태껏 믿지 않는 배우자를 만나서 믿음이 더 깊어지고 주님과 더 가까워진 그리스도인을 만난 적이 없다. 불신자와 결혼한 그리스도인은 사실상 세상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길을 거부하는 불신자와 결혼하는 것은 단지 불경건한 길에 들어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거부하는 세상과 융합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이스라엘 이야기가 아닌가? 교회는 다르지 않을까?’구속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옛 언약으로 정의되는 이스라엘이라는 지정학적 실체를 초월한다. 따라서 새 언약으로 정의되는 교회 시대에도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동일하게 적용된다. 결혼은 변하지 않았고 하나님도 변하지 않았다. 비록 그리스도의 왕국은 물리적 경계로 정의되지 않고 대신 땅 끝까지 확장되었다고는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여전히 “거룩한 나라”이며 그분이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하도록 부르심 받았다(벧전 2:9, 15).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로 이 결혼 윤리를 되풀이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불신자와 결혼한 상태에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경우라면 이혼하지 말라고 말한다(고전 7:12-17).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결혼인 경우에 그 자체로 인정하신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미혼자를 향한 그의 명령은 전혀 다르다. 반드시 “주 안에서만” 결혼해야 한다는 것이다(고전 7:39). 교회에 대해서 보다 더 광범위하게 설명하는 다른 서신서에서 바울은 우리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매지 말아야”(고후 6:14) 한다고 말한다. 결혼의 최고 목적우리가 결혼을 갈망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교제일 수도 있고, 함께 정착하고 가정을 꾸릴 수 있는 “좋은 사람”을 찾고 싶어서일 수도 있다. 이것이 나쁜 욕망은 아니지만, 우리는 모든 욕망을 계시된 하나님의 뜻 아래 두고 그분의 목적에 따라 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결혼의 목적은 무엇인지 우리는 쉬지 않고 물어야 한다. 돛이 올라간 배는 의도하든 아니든 바람을 타고 떠내려가기 마련이다. 배는 그렇게 움직이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결혼도 다르지 않다. 불신자와 평생을 약속하고 서로에게 충실하며 가정을 꾸리게 되면 누구라도 세상 바람에 휩쓸릴 것이다. 하나님은 결혼제도를 사랑하신다. 불신자도 얼마든지 좋은 결혼생활을 할 수 있고, 불신자 간의 결혼을 통해서도 많은 선을 행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단지 결혼이라는 바람을 타고 항해하는 데에 만족하면 안 된다. 결혼이라는 배를 만드신 분을 기쁘시게 하는 데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일반적인 그리스도인의 삶과 마찬가지로 결혼도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위해서 존재한다. 그리고 오로지 이 목적을 위해 살 때 우리는 기쁨을 발견할 것이다. 남편이 자기 자신을 죽이고 또 아내가 십자가와 같은 남편의 리더십에 사랑으로 복종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에 드러날 것이라고 말한 바울의 말씀을 기억하자(엡 5:21-33). 결혼 생활에서 남편과 아내는 예수님의 사랑의 산 증거로서 함께 성장해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지 않는 불신자와 어떻게 예수님을 중심에 둔 결혼의 성약을 맺을 수 있겠는가? 그런 결혼 생활이 어떻게 하나님이 예비하신 심오한 결혼의 신비를 온전히 반영할 수 있겠는가? 연합이라는 목적을 삶의 정면과 중앙에 위치시키자. 결혼에 어떻게 접근하는 것이 바른 방법일까? 하나님의 영광과 명성, 그리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더 멀리까지 복음을 전하겠다는 열망을 중심으로 결혼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배우자는 오늘도 믿음의 경주를 인내하면서 달리도록(히 12:2) 돕는 사람, 하나님을 더 경배하도록 돕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복음을 세상에 선포하도록 도와줄 사람이다. 믿는 자는 믿는 자와 결혼함으로 하나로 연합한다. 원제: Christians Should Marry Christians?but Wh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과거에 얽매인 삶을 넘어서
by 정현구
2023-08-07
내일이 더 좋은 삶을 위해서는 과거에 묶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고난과 타인의 죽음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 말씀 앞에서 교훈을 얻고 살아간다면,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요? 지금 해야 할 것에 더욱 매진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이 말합니다. “옛날이 지금보다 더 좋은 까닭이 무엇이냐고 묻지 말아라. 이런 질문은 지혜롭지 못하다”(전도서 7:10). 과거의 영광에 젖어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늘 과거만 되돌아보는 사람은 지금 해야 할 일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현재 여기서 해야 할 일을 찾고 그것에 집중해야 합니다.전도서 7장 1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생각해 보아라. 하나님이 구부려 놓으신 것을 누가 펼 수 있겠는가?” 사람에게는 지울 수만 있다면 지우고 싶은 그런 과거가 있습니다. 바꿀 수만 있다면 바꾸고 싶은 후회되는 결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과거에 사로잡혀 늘 후회하고 살면 안 됩니다. 어떤 이유로 그런 사건이 일어났건 과거는 이미 끝난 일이고, 또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허락된 일입니다. 하나님이 굽게 하셨다면 그것을 내가 곧게 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꿀 수 없는 것을 붙잡고 후회하면서 고민하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과거에 대한 반성은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미 지난 과거를 큰 섭리 안에서 받아들이고 주어진 현재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사도 바울이 그랬습니다. 그는 과거에 대해서 자랑거리가 많았던 사람이었지만 과거의 영광과 추억에 매여서 살지 않았습니다. 그도 할 수만 있다면 지워버리고 싶은 그런 과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에 매이지 않고 회심 이후 훌훌 털고 일어나서 목표를 향하여 열심히 뛰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빌립보서 3:13-14).바꿀 수 없는 것, 이미 지난 것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다고 체념적이고 운명적 자세로 살면 안 됩니다. 바꾸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추구해야 할 목적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그런데 이와 함께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어떤 것인지, 또 바꾸어야 할 것은 어떤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라인홀드 니버의 잘 알려진 기도문이 그런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하나님, 내가 바꿀 수 없는 일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평정을,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꿀 수 있도록 용기를, 그리고 이 둘의 차이를 분별할 줄 아는 지혜를 나에게 허락해 주소서.”전도서 7장 14절이 그런 자세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좋은 때에는 기뻐하고, 어려운 때에는 생각하여라. 하나님은 좋은 때도 있게 하시고, 나쁜 때도 있게 하신다. 그러기에 사람은 제 앞일을 알지 못한다.” 살다 보면 형통한 날도 오고, 또 곤고한 날도 옵니다. 언제 어떤 일이 찾아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형통함과 곤고함은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모든 사건 속에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과거에 매이지도 말고 다만 푯대를 향하여 나아갈 일입니다.‘해 아래의 관점’으로 볼 때 결코 죽는 날이 태어난 날보다 더 좋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해 위의 관점’에서 볼 때는 죽는 날이 태어난 날보다 더 좋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 경기를 시작하던 그 첫 출생의 날, 가족들로부터의 박수갈채를 받았던 그날만이 좋은 날은 아닙니다. 인생의 경주 속에서 사람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는 날이 있지만 그런 날이라고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이 모든 좋은 날들은 추억의 뒤안길로 물러갑니다.우리에게는 더 좋은 내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골인 지점에 들어섰을 때 주님에게서 받을 박수갈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소망이 있을 때, 죽는 날이 태어난 날보다 더 좋을 수 있고, 내일이 오늘보다 더 좋은 것입니다. 내일이 두렵고 불안한 것이 아니라 내일이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되는 것입니다. 내일이 더 좋은 삶, 이 삶이야말로 우리가 열정을 품고서 추구해야 할 참으로 멋있는 인생이 아닐까요! 내일이 더 좋은 삶, 이 삶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풍성한 삶이요 영생입니다.정현구, 영원을 품고 오늘을 걷다(SFC)에서 간추린 글입니다.
하나님 추구하기, 나의 모든 만족
진짜 보물에 관한 토저의 가르침
by Dieudonne Tamfu
2023-08-05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하나님을 보물로 모신 사람, 그분 하나로 온 세상을 다 가진 자로다. 하나님을 통한 영혼의 만족을 아는 사람은 만족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 찾기를 멈추지 않는다. 한때 텅텅 비어서 갈망으로 가득하던 영혼이 참된 기쁨을 맛보면, 결코 다시는 빈 수조 같았던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만족을 동시에 느끼면서 산다. 예수님의 약속대로, 그들은 더 이상 주리고 목마르지 않다(요 6:35). 대신 더 간절히 하나님을 갈망하고 목말라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오로지 하나님 안에서만 만족을 구하며 평생을 보낸다. 하나님으로 충만한 사람은 오로지 하나님 안에서만 충만함을 구한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결코 하나님 찾기를 멈추지 않는다. 신자라면 끊임없이 하나님을 추구하는 존재로 스스로를 정의한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더 많이 찾기 위해 성경을 읽고 또 읽는다. 하나님을 더 알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하나님을 더 알기 위해 성경 구절을 암송한다. 우리의 갈망은 단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가졌던 기쁨을 다시 경험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하나님을 아는 더 큰 지식으로 날마다 새로운 기쁨을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똑같은 복용량으로는 처음에 느꼈던 즐거움을 맛볼 수 없기에 점점 더 양을 늘리는 마약 중독자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산의 아름다움을 더 맛보기 위해 매 순간 더 높이 오르는 등산가이다. 토저와 함께 하나님 추구하기내가 막 신학 공부를 시작한 2002년, 1963년에 죽은 A. W. 토저가 나를 제자 삼기 위해서 다시 살아났다. 어릴 때 나는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공부는 어쩔 수 없을 때만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회심시키셨고, 그때부터 나는 성경을 폭넓게 읽기 시작했다. 나의 첫 성경 NIV 검은색 양장본은 수도 없이 많은 밑줄과 하이라이트 별표로 가득하다. 그 후 나는 다양한 독서를 통해 하나님을 더 잘 알기 위한 여정에 푹 빠졌다. 특히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알아가는 여정은 황홀했다. 아버지 없이 자란 내가 누군가를 아버지라고 부르고, 누군가를 아버지처럼 사랑하고, 또 누군가를 아버지처럼 대할 수 있었던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2002년, 성경 외에 나는 다른 책을 거의 읽지 않았던 나는 우연히 A. W. 토저가 쓴 하나님을 추구함을 만났다. 얼마 읽지 않아서 다음 구절을 만났다. 현대 과학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경이로움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잃고 말았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말씀의 경이로움 속에서 하나님을 잃을 위험에 처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이 인격이시라는 사실을 거의 잊고 있다. … 한 인격을 제대로 아는 게 단지 한 번의 만남으로 가능하지 않다. 상대를 안다는 것은 두 존재의 모든 가능성을 탐구하는, 길고도 사랑스러운 정신의 교제를 거친 후에야 가능하다. (23)나는 인생이란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찾는 과정임을 깨달았다. 하나님을 한 번 만난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나는 하나님을 계속 찾아야만 한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모든 갈망을 온전히 채워 주신다. 신학 과정에서 하나님 추구하기토저 덕분에 신학을 하는 내내 내 목포는 오로지 하나, 하나님을 놓치지 않는 것이었다. 단지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만족하고 싶었다. 하나님을 연구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누리고 싶었다. 하나님을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결과로 하나님을 위해서 불타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성경을 연구하면 할수록, 구약에서 신약에 이르기까지 등장하는 성도들을 통해서 토저의 생각이 옳다는 게 점점 더 분명해졌다. 세상은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을 주는 다양한 출처를 제시하지만, 성도는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만족의 근원이심을 선포한다. 모세처럼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사람은 “저에게 주님을 영광을 보여 주십시오”(출 33:18)라고 끊임없이 부르짖는다. 다윗처럼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오로지 “한 가지”만 구한다. “주님, 나에게 단 하나의 소원이 있습니다. 나는 오직 그 하나만 구하겠습니다. 그것은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면서 주님의 자비로우신 모습을 보는 것과, 성전에서 주님과 의논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시 27:4). 바울처럼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것을 삶의 유일한 과제로 삼는다(빌 3:10). 영생을 정의하는 건 길이가 아니라 내용이다.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 17:3).“그리스도가 그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그는 사실상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의미다”라고 쓴 아우구스티누스도 바울과 같은 심정이었다. 그리스도가 우리 삶에서 가장 추구하는 대상이 아니라면, 우리는 아직 그리스도를 전혀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아직도 그리스도를 만난 적 없다는 의미이다. 주님을 향한 굶주림을 모르는 영혼은 아직 생명의 떡을 맛보지 못한 사람이다. 선교로 하나님을 추구하기하나님께서 나를 카메룬에서 미네소타로 옮겨서 공부하게 하셨을 때, 나는 더 부유한 나라가 가져다주는 유혹을 예리하게 느꼈다. 그래서 일기에 기도를 기록했다.주님, 제가 주님을 더 잘 볼 수 있는 정도까지만 이 도시와 미국의 아름다움을 감사하게 하소서. 성령이시여 저를 도우소서. 미국의 아름다움에 취하여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 영광의 아름다움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제 눈을 세상에서 돌려 온전히 주님께만 향하게 하소서. … 오로지 예수님만이 나의 모든 의미가 되게 하소서! 주님, 제가 미국에 머무는 동안 더 그리스도를 닮게 하소서. 미국인 같이 되는 일이 없도록 보호하소서. 미국은 그냥 미국일 뿐입니다. 주여, 예수님만이 지금도 또 앞으로도 영원히 나의 모든 만족이요 기쁨의 원천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내 기도에 응답하셨다.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유학 전보다 더 하나님을 기뻐하고 만족하게 되었다. 이후에 하나님은 교회 개척과 신학 훈련을 위해 나를 카메룬으로 옮기셨고, 다른 사람들도 오로지 그리스도로만 만족하는 똑같은 경험을 돕는 데에 도구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의 은혜로 미국의 그 어떤 보물도 그리스도만이 주시는 기쁨을 전하는 나를 막지 못했다. 하나님은 나를 오로지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게 하셨다. 나는 하나님만으로 만족했다. 하나님은 내가 미국의 쾌락을 버릴 수 있도록 나를 자유롭게 하셨다.모든 만족, 모든 기쁨, 모든 즐거움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맛본 자유를 토저도 맛보았다. 하나님을 보물로 모신 사람, 그분 하나로 온 세상을 다 가진 자이다. 세상의 수많은 평범한 보물은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설혹 그것들을 손에 쥔다고 해도, 그로 인한 기쁨은 너무도 소소해서 그의 행복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것들이 하나씩 사라진다고 해도, 그는 거의 상실감 자체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 한 분으로 모든 것을 다 가졌기 때문이다. 그는 무엇을 잃더라도, 실제로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 순전히 합법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모든 것을 하나님 한 분으로 다 가진 사람이기에. (28)이런 자유를 원하지 않는가? 당신에게 이런 만족을 바라는 갈망이 있는가? 어떤 어려움도 빼앗을 수 없는, 하나님이라는 보물이 주시는 기쁨을 아직도 모르고 있다면, 계속해서 그분을 추구하라. 당신이 현재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는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도 희망이 있을까? 그렇다. 언제나 희망은 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은 오로지 하나님으로부터만 나온다. 이렇게 기도하자. 아침에는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채워 주시고, 평생토록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해주십시오. (시편 90:14)주님의 백성이 주님을 기뻐하도록 우리를 되살려 주시지 않겠습니까? (시편 85:6)당신은 확신을 품고서 기도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지극히 높으신 분, 영원히 살아 계시며, 거룩한 이름을 가지신 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비록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나, 겸손한 사람과도 함께 있고,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과도 함께 있다. 겸손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우어 주고, 회개하는 사람과 같이 있으면서 그들의 상한 마음을 아물게 하여 준다.” (이사야 57:15)하나님을 가장 큰 보물로 삼자. 그러면 그 어떤 상실도 맛보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을 가장 큰 보물로 삼자.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무엇이든 버리는 능력을 얻을 것이다. 소유물은 더 이상 사슬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궁극의 보물을 즐기게 하는 통로로 바뀐다. 꿈과 사랑하는 이의 상실이라는 고통조차도 소망의 상실로 이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되신다. 이제 모든 즐거움, 모든 만족, 그리고 모든 욕망까지도 오로지 하나님 한 분 안에서 온전하게 소유하게 된다. 원제: My Satisfied Seeking of God: What Tozer Taught Me About Treasure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어떤 열정도 기도보다 앞설 수 없습니다
714 기도대성회를 경험하며
by 김형석
2023-08-04
내년에 있을 로잔대회를 앞두고 한국 교회는 연합하여 함께 기도했습니다. 연합기도에 관한 기사는 신약성경에는 최초로 사도행전에 등장합니다. 120명의 무리가 한 다락방에 모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는 것을 전하면서 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렇게 많은 숫자가 한 장소에 모여 마음을 같이 하여 기도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들은 무엇을 위해 기도했을까요?그것은 사도행전 1장 4-5절을 보면 그 기도는 예수님의 명령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아주 중요한 부탁을 남기시고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습니다.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명령입니다.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은 그다음 절에 있는 것처럼,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의 강림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있기 전에 제자들은 지금 몹시 격앙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그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제자들을 만나 주셨으니 제자들은 이제 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삶을 살기 위해 하루빨리 예루살렘을 떠나 고향으로 내려갈 기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넘겨질 때는 다들 두려워서 예수님을 배반하고 예수님을 떠나고, 심지어 부인했던 그들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찾아가서 그들을 원망하거나 책망하시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내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믿고 맡겨 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또다시 스승이신 예수님께 실망을 안겨 드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을 불사하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소식을 전하기 위해 다짐을 했던 것입니다.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멈추게 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인간의 열정과 열심이 성령과 기도보다 앞서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교훈입니다. 초대교회의 첫 출범이자, 첫 선교사역이 시작되는 이 시점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교훈을 주고 계신 것입니다. 너희들이 아무리 대단한 각오가 되어 있고, 너희들이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바쳐 이 일에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는 절대로 세상을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싸우는 이 싸움은 근본적으로 영적인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전쟁입니다. 표면을 봐서는 사람의 일처럼 보이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공중 권세 잡은 자 마귀의 엄청난 공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지금 마가의 다락방 앞에 딱 진을 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귀는 열정에 가득한 그들, 자신감에 가득 찬 그들을 이미 넘어뜨리고 꺾을 준비가 다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인간의 열심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경계조차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육으로 하는 것은 육의 열매를 거둘 뿐이기 때문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 3:6). 그래서 예수님은 열정만 앞선 제자들을 멈춰 세운 것입니다. 제동을 건 것입니다. 너희들이 지금 이 모습 이대로 나갔다가는 무조건 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무엇을 함에 있어서 기도의 배수진을 단단히 치고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좋은 아이디어가 있고, 좋은 협력자가 있고, 좋은 환경이 열려 있다 하더라도, 덥석 시작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로 승기를 잡고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길을 열어주시고, 모든 방해 세력을 결박시켜 주시도록 기도의 든든한 기초를 단단히 다진 후에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714 기도대성회의 열기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예상보다 더 많은 이들이 모여 같은 비전을 바라보며 기도했습니다. 이 기도회를 통해 로잔대회를 준비하는 우리 모든 한국 교회가 다시금 이 일이 육으로 하여 육의 열매를 거둘 것이 아니라 영으로 하여 영의 열매를 거두는 영적 대회가 될 것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마치 초대교회의 시작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 대회가 인간적인 열정과 자신감이 아니라 성령의 다스림과 인도를 받으며 서서히 시동을 걸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714 대성회를 통해 기도의 배수진을 단단히 치고 이 일을 시작했으니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과정 가운데 마귀가 틈타지 못하게 하실 것입니다. 앞으로도 모든 준비과정에 기도가 앞서게 되어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게 되는 로잔대회가 될 것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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