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Edition
한국어
UNITED STATES
AFRICA
عربي
AUSTRALIA
BRASIL
CANADA
正體中文
简体中文
ESPAÑOL
فارسی
FRANÇAIS
ITALIA
NEDERLANDS
SHQIP
SLOVENSKÝ
후원
하기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시리즈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리뷰
서평
새로 나온 책
뉴시티교리문답
뉴스
국내
국제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검색
사이트 내 전체검색
검색어 필수
검색
추천 검색어
마음
여성
배움
성경
신앙과일
크리스찬
전체메뉴
01
ARTICLES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02
VIDEOS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03
SERIES
시리즈
04
CONTACT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05
QT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06
REVIEWS
도서
서평
새로 나온 책
07
The New City Catechism
뉴시티교리문답
08
NEWS
뉴스
국내
국제
09
ABOUT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10
GIVE
후원
ARTICLES
ARTICELS
연도별
SELECT CONCAT(YEAR(wr_4)) ym FROM g5_write_articles where wr_4 <= '2025' GROUP BY ym order by wr_4 desc
2024
2023
2022
2021
2020
2019
2018
날짜순
조회순
이름순
성경적 창조의 관점‘들’ (2)
OPC 창조연구위원회 보고서의 교훈
by 이윤석
2023-07-01
기독교 세계관 운동 2.0 위하여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SIEW)과 함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섭니다. 근래에 팀 켈러가 유신진화론자라고 비판하는 이들은 대체로 젊은지구론에 경도되어 있다. 물론 젊은지구론 자체도 주요한 관점이므로, 이 입장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다만 젊은지구론 역시 기원의 문제를 완벽하게 설명하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겸손한 자세가 요청된다. 하지만 그들은 젊은지구론이 아니면 유신진화론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창조론을 공격하는 듯하다. 그들에게, 미국장로교회(PCA) 교단의 창조연구위원회 보고서에 이어, 여러 기독교 교단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정통장로교회(OPC)의 관점을 알려주고 싶다. OPC 교단은 1936년 메이첸(John Gresham Machen, 1881-1937)이 주도하여 미국장로교(PCUSA) 교단에서 독립하여 나온 교단이다.OPC 교단은 2001년에 창조의 여러 관점을 연구하는 교단 차원의 특별 연구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 위원회는 3년간 연구 활동을 수행하고 2004년 OPC 교단 총회에 ‘창조의 관점들 연구위원회 보고서’(Report of the Committee to Study the Views of Creation)를 보고하였다.이 위원회가 창조에 대한 여러 관점을 고찰할 때 준거로 삼은 기본적인 신학적 입장은 다음과 같았다.1. 참되고 살아계신 한 분 하나님이 영원 속에 홀로 계셨으며 그 옆에는 아무런 물질도 에너지도 공간도 시간도 없었다. 2. 참되고 살아계신 한 분 하나님이 그의 주권적 작정에 따라서 무로부터 세계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보이든 안 보이든)을 창조하기로 결정하셨다. 3. 우주의 어떤 부분도 또는 어떤 생물도 우연히 또는 주권적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지 않고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다. 4. 하나님이 사람, 남자와 여자를 하나님 자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의 담지자로 불멸의 영혼을 소유한다. 따라서 인간은 비록 그의 몸이 그 주변 환경의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긴 하지만 다른 모든 지상의 생물들과는 다르다. 5.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이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사람이 살아있는 생명이 된 것이지, 이미 선재하는 어떤 생물에 하나님의 형상을 새긴 것이 아니다. 6. 전체 인류 가족은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첫 번째 인간 부부로부터 내려왔으며, 이 계승은 일반적인 세대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 7.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을 때 거룩했다. 그때 하나님은 아담 한 사람과 행위언약에 들어갔다. 언약에서 아담은 그의 후손들을 대표하며, 그가 그 요구사항을 어겼을 때 일반적 세대에 의해 계승되는 모든 인류는 그 안에서 죄를 범하였고 그와 함께 죄의 상태로 떨어졌다. 8. 하나님은 창조의 일을 6일 동안에 하셨다. (우리는 ‘날’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을 인식하였으며, 한 해석이 여타 해석을 모두 배제하고 주장되어야 한다고 느끼지 않는다.)위의 신학적 입장은 이 위원회가 건전한 신학적 기반에 서서 연구 작업을 했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위원회 위원들은 위 여덟 가지 확언에 모두 동의하였다. 다만 마지막 여덟 번째에 대해서는 창조의 일을 6일 동안에 하나님이 하셨다는 진술 자체에는 동의하나 ‘날’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해가 있었고 그런 서로 다른 이해들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가졌다. 필자가 다년간 팀 켈러의 저작들을 연구한 경험에 의하면 팀 켈러 역시 이 위원회 위원들이 동의한 위 신학적 진술들과 같은 신학적 입장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필자의 관찰로는 팀 켈러는 특정한 창조의 관점을 선택하여 그것만을 주장하려고 하지 않았다. 몇 가지 의견을 살짝 언급한 적은 있어도 어떤 특정한 관점의 지지자라고 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그런 면에서 필자는 팀 켈러가 성경의 절대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과학자들의 연구 활동을 격려하고 장려할 수 있도록 과학적 성과가 성경과 조화되도록 유연하게 접근한 것으로 생각한다. 문제는 일부 편협한 젊은지구론자들이다. 창세기 1장의 창조 주간의 ‘날’을 24시간 하루로 못 박고 이 해석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타협이론이라며 비성경적이라고 공격하는 그들은 건전한 기독교 교단이 어떤 식으로 접근하는지 깊이 공부할 필요가 있다. OPC 교단의 특별 연구위원회는 교단이 수용할 수 있는 창조에 대한 관점을 다섯 가지로 크게 구분하여 정리하였다. 위원회는 이 다섯 가지 관점이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가 가진 교리 체계의 정합성을 부정하는지 아닌지 잘 검토하였고, 주석적으로나 신학적으로 타당하다고 판단하였다. 이 다섯 가지 관점은 다음과 같다.첫 번째 관점은 ‘일반적인 길이의 날 관점’(the days of ordinary length view)이다. 이 관점은 24시간 길이를 갖는 일반적인 날들에 걸쳐서 창조가 이루어졌다고 이해하며, 교회사에서 주된 입장을 차지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스트민스터 총회 참석자들이 24시간 하루 관점을 특정하여 창조를 설명하지 않았다고 하며, OPC 교단 내에서도 이 관점만을 유일한 창조의 해석이라 하지는 않는다고 밝힌다.두 번째 관점은 ‘특정되지 않은 길이의 날 관점’(the days of unspecified length view)이다. 이 관점은 창조 주간의 일곱 날이 인접해 있는 것은 맞지만 각 날의 길이는 특정되지 않는다고 본다. 그린(W. H. Green), 바빙크(Herman Bavinck), 워필드(B. B. Warfield), 영(E. J. Young) 등이 이런 관점을 주장한다. 세 번째 관점은 ‘날-시대 관점’(the day-age view)이다. 이 관점은 창조의 날들 하나하나가 긴 기간을 갖는 각 시대를 가리킨다는 입장이다. 핫지 부자(C. Hodge와 A. A. Hodge), 메이첸 등이 이런 관점을 주장한다. 네 번째 관점은 ‘틀 관점’(the framework view)이다. 이 관점은 창조의 여섯 날을 일반적인 24시간 하루의 날로 생각하지만, 그 날들이 비유적인 기능을 하는 것으로 여긴다. 창조 주간의 전반부 3일과 후반부 3일을 대응시켜, 전반부 3일에는 각 공간을 만들고 후반부 3일에는 각 공간을 채울 것들을 만들었다는 것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클라인(Meredith G. Kline), 페스코(John V. Fesko), 아이언스(Lee Irons) 등이 주장하는 관점이다. 다섯 번째 관점은 ‘유비적 관점’(the analogical view)이다. 이 관점은 창조 주간의 하루는 분명 역사적인 개념이지만 인간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활동이 이루어진 기간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유비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입장이다. 콜린스(C. John Collins), 갓프리(W. Robert Godfrey) 등이 이 관점을 주장한다.이 다섯 가지 관점은 모두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의 교리 체계 정합성을 위배하지 않는다. OPC 교단은 이처럼 유신진화론은 배제하되 젊은지구론의 관점인 ‘일반적인 길이의 날 관점’ 외에도 네 가지 다른 관점들, 즉 ‘특정되지 않은 길이의 날 관점’, ‘날-시대 관점’, ‘틀 관점’, ‘유비적 관점’도 수용 가능한 창조에 대한 타당한 관점이라고 판단하였다.팀 켈러가 속한 PCA 교단뿐만 아니라 OPC 교단도 이처럼 다양한 관점들을 인정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나는 팀 켈러가 지향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젊은지구론
유신진화론
조던 피터슨과 그의 실용적 하나님
by Dani Treweek
2023-06-30
최근에 나는 어쩌다가 조던 피터슨의 2022년 호주 투어 마지막 밤에 참석했다. 지난 몇 년간 나는 그가 진행하는 좀 이상한 팟캐스트 인터뷰를 한두 번 들었다. 그리고 그의 생각을 반영하는 기사도 몇 편 읽었다. 친척이 내게 투어 표가 한 장 남는다고 말했을 때, 나는 피터슨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게 없고, 따라서 별 관심도 없다고 말했다. 어떤 의미에서 피터슨의 폭넓은 사상에 대한 지식의 부족은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는 게 그리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암시할 수도 있다. 물론, 그날 투어에서 나는 깨알같이 메모하며 열심히 들었다. 하지만 그건 단지 강의 한 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다른 측면에서 볼 때, 내가 그의 사상에 정통하지 않다는 게 이 글을 쓰는 데에 매우 이상적인 위치를 부여한다고도 볼 수 있다. 알다시피 나는 피터슨의 열성 팬도 아니고 또 그의 ‘안티’도 아니다. 그의 강의를 듣고 그 내용에 대해서 깊이 숙고한 한 여성 그리스도인일 뿐이다. 내 생각 중 일부를 공유하려고 한다. 먼저 피터슨의 놀라운 퍼포먼스에 그날 나는 경외감을 느꼈다고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메모 하나 없이 무려 한 시간이 넘는 시간 내내 그는 달변을 쏟아냈고, 말 그대로 9천 명을 쥐락펴락했다. 기승전결이 명확한 굴곡진 강의 속으로 그는 우리 모두를 능수능란하게 이끌었다. 정말 지금 생각해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해냈고, 그 현장에 참여한 것은 나름 특별한 경험이었다. 피터슨은 심각한 주제를 매우 진지하게 다뤘다. 나는 그 점에 크게 감동했다. 그는 개인에게 인간관계와 공동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광범위하게 풀어냈다. 인간의 삶에서 사랑이 가진 중심 위치와 생명력을 강조했다. 인간성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이 성장하는 존재라는 사실 앞에서 그는 매료된 게 분명해 보였다. 피터슨 사상에 중심을 차지한 핵심은 인간의 열심(human endeavor)이다. 인간 이야기그러나 거기에는 문제가 있다. 보시다시피 피터슨에게 인간의 이야기는 실제로 인간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다는 게 분명하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각자의 삶에서 각 개인이 만들어가는 “최적화”(optimization)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는 근본적인 인간의 임무가 우리의 삶, 즉 우리 자신을 지속해서 위로 끌어올리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을 향해 올라가라는 게 아니다. 자기 개선과 향상을 향해 올라가라는 것이다. 인생이란 오르막을 오르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시각적으로 강조하기 위해서 그는 두 팔을 좌우 대각선으로 아래에서 위로 뻗기까지 했다. 우리 각자는 다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책임져야 한다. 인간의 책임은 자신의 삶을 최적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매우 어려운 이야기이다. 세상은 얼마든지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곳이 될 수 있다. 세상은 우리를 최적화에 전념하도록 놔두지 않는다. 오히려 쇠퇴에 굴복하도록 유혹한다. 그래서 피터슨은 궁금했다. “적응하고 변화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에 다다른 도전의 시기를 우리는 과연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그의 대답은? 이야기에 있다고 했다. 그러나 아무 이야기에 다 있다는 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복잡성과 고통 속에서 최적화를 촉진하게 하는 이야기(또는 패턴 내지 원형)이다. 그래서 우리가 물어야 할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올바른 이야기 또는 최고의 이야기는 과연 무엇인가?” 바로 이 지점에서 피터슨의 강의가 조만간 나올, 인류의 “영적 및 신학적 노력”에 초점을 맞춘 그의 책 내용과 교차한다. 어떤 이야기가 가장 좋은지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야말로 항상 종교가 추구하는 탐구였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 최적화의 이면에 있는 패턴은 종교 산업의 근본적인 임무이다.” 자기 개선의 오르막 여정은 모든 종교, 모든 종교 경전, 모든 종교 선생, 그리고 이 세상 모든 종교 실천이 항상 몰두한 것이다. 그러나 종교적 목표는 인류에게 최적화의 패턴을 담은 이야기를 제공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야기 속에 담긴 잠재력을 잘 활용하는 데 필요한 자원까지 제공한다. 이런 주장은 피터슨으로 하여금 성경을 최적화된 이야기 전달을 위해 매우 구체적이고 특정한 방식으로 배열된 메타 스토리로 바라보게끔 만든다. 그러나 피터슨이 제시하는 성경적 내러티브는 대체로 내가 알던 것과 크게 달랐다. 그가 강의에서 소개한 예를 하나 들어보자. 아브라함 이야기이다. 아브라함의 모험그리스도인에게 아브라함 이야기는 타락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 이야기이다(창 12:1-3; 15:1-6). 아브라함의 후손을 큰 민족 곧 자기 백성으로 만드시고 그들을 통하여 온 땅에 복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능동적인 헌신 이야기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아브라함 이야기의 중심인물이 아브라함이 아님을 안다. 그것은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신성한 계획과 목적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그리고 이 세상을 위해,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 안에서 시작하시기로 결심한 일에 관한 것이다(로마서 4장).그러나 피터슨에게 아브라함 이야기는 “모험”을 시작함으로써 자신을 최적화하려는 한 사람의 열심에 관한 이야기이다. 편안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진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에게는 가장 필요한 것이 없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기존의 위치에 머무르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필요한 건 오르막길을 오르는 것이었다. 따라서 피터슨의 눈에 아브라함 이야기는 모험을 통한 인간 최적화의 이야기이다. 지금 편안하게 안주하고 있는 그곳을 당장 떠나서 모험하라고 당신에게 명령하는 이야기의 원형이다. 그래서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그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자리는 무엇인가? 아브라함이 모험이라는 부름을 받는 데 꼭 필요했던 수단에 불과하다. 하나 더 살펴보자면 땅이 아니라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이야기에 대한 피터슨의 언급이다(마 6:19-21). 그리스도인은 이 구절을 천국 시민으로 이 땅을 사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예수님의 긴 가르침인 산상 수훈의 맥락에서 읽는다. 따라서 앞으로 다가올 하나님 나라에 투자하는 일에 우리 자신을 던지라는 예수님의 권고로 그 구절을 이해한다. 우리의 보물과 마음은 지금도 천국을 다스리시는 예수님께 속해 있다. 그러나 피터슨에게 예수님은 지금 단지 “생계에 대한 추상적 개념, … 인생의 고통과 불행이 닥칠 때 무엇 또는 누구와 함께하게 될까”에 관해서 고민하라는 권고일 뿐이다. 따라서 피터슨의 해석에 하나님 나라는 들어설 자리가 없다.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이 제공하는 것은 이생에서 최적화하는 삶을 사는 데에 꼭 필요한 일종의 “보물”에 투자하는 데 필요한 청사진에 불과하다. 피터슨에게 성경은 인간을 최적화하는 데 필요한 프레임워크이다. “인간에게 구현된 가장 초월적인 패턴” 중 하나에 불과하다. 사랑은 인간 최적화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그건 하나님이 사랑이시고 또 우리를 그의 형상대로 만드셨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 없이 우리는 자신을 성공적으로 최적화할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피터슨에게 사랑은 궁극적으로 이기적이다. 우리는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는 이유는 나 자신을 더 사랑하기 위해서이다. 마찬가지로 피터슨은 다른 사람의 최적화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그들의 최적화를 나의 최적화만큼 중요하게 생각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그들의 최적화에 투자하지 않으면 그들이 금방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그 경우에 그들도 내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고, 그건 궁극적으로 나의 최적화를 위협한다. 이처럼 피터슨에게 사랑은 이기적인 수단에 불과하다.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지 않는다. 나를 위해서 이웃을 사랑한다. 하나님에 대한 피터슨의 태도도 사랑과 마찬가지로 실용적이다. 하나님이 주인공 같아도 실상은 인간 최적화라는 목표에 구조와 자극을 제공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주인공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미지의 세계로 모험을 떠나거나 최적화에 가장 유익한 “보물”에 투자하도록 부름받을 때 꼭 필요한 매개체이다. 아담을 초조하게 만들어 인간의 조상이 되도록 자극하기 위해서 하와를 하나의 “유익한 적수”로서 창조했다고 이야기하는 데 꼭 필요한 구조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존재다. 인생 오르막 끝에 있는 목표를 은유하는 용어, ‘약속의 땅’을 살짝 엿보는 데 필요한 장치도 하나님이다. 피터슨의 하나님은 성경이 말하는 거룩하고 의롭고 사랑스럽고 인격적인 존재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성경에 따르면 인간 역사 속에서 일어난 모든 이야기의 근본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존재 그 자체이다. 피터슨의 방대한 작업이 가지는 여러 측면을 중요하고 통찰력 있게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많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그게 꼭 잘못되었다는 건 아니다. 거기에도 나름에 이유가 있을 것이고, 나는 피터슨의 모든 작업을 다 평가할 위치에 있지도 않다. 지금 내가 평가하는 건 그날 밤 내 두 귀로 똑똑하게 들은 그의 강의 한 편이다. 그날 그가 가르친 내용은 내가 도무지 인식할 수 없는 성경 이야기였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에 관해서도 나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 무엇보다 내가 생전 들어보지 못한 하나님에 대한 묘사였다. 피터슨과 대조적으로, 성경 이야기는 철학적으로 추상화된 은유로 쓰인 것이 아니다. 실제 역사라는 시공간을 배경으로 기록되었다고 성경은 증언한다. 궁극적으로 성경은 창조된 인간의 지상적 “최적화”에 관한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원한 영화로움에 관한 것이다. 이야기가 중요하다는 피터슨의 말은 옳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나의 형성이 아닌 하나님에 관한 중요한 이야기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원제: Jordan Peterson and His Useful Go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조던피터선
하나님의 본질에 충실한 제자훈련과 자연법
by 최창국
2023-06-29
우리가 하나님의 본질을 어떻게 믿느냐에 따라 우리의 신체적, 심리적, 관계적, 영적 상태가 달라진다. 사랑의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는 사람은 사랑이 더 많아지고, 독재자와 권위주의적인 신을 숭배하는 사람은 학대가 더 심해진다(티머시 제닝스, 마음, 하나님 설계의 비밀, 164. 이하 제닝스의 같은 책에서 인용). 따라서 ‘어떤 하나님 개념을 품는가’는 중요한 문제다. 앤드류 뉴버거가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실시한 뇌 연구에 따르면, 모든 형태의 명상이 뇌의 긍정적 변화와 관계된 것으로 밝혀졌지만 최대의 뇌 기능의 향상은 참여자들이 구체적으로 사랑의 하나님을 묵상할 때 이루어졌다. 사람들이 사랑의 하나님을 묵상할 때, 추론하고 판단하고 하나님 같은 사랑을 경험하는 이마 바로 뒤쪽의 뇌 부위 전전두피질을 발달시키고, 그에 따라 공감과 동정과 긍휼과 이타심의 역량을 높여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부분은 그다음이다. 사랑의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면 타인 중심의 사랑이 커질 뿐 아니라 예리한 사고력과 기억력까지 더 좋아진다. 즉, 사랑의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면 실제로 뇌의 치유와 성장이 촉진된다(Andrew Newberg·Mark Robert Waldman, How God Changes Your Brain, 27-32, 53).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이 아닌 권위주의적이거나 엄한 존재와 같은 신으로 믿고 예배하면 두려움의 회로가 활성화된다. 이런 신을 계속 믿고 예배하게 되면, 결국 만성적으로 신경이 예민해지고 뇌와 몸이 손상된다. 수많은 뇌 연구에 따르면, 우리가 어떤 하나님으로 믿고 예배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뇌가 달라진다. 권력으로 다스리는 신, 인간이 달래야만 용서를 베푸는 신을 믿게 되면 사랑이 파괴되고, 반항심이 싹트고, 개성이 말살된다. 전전두피질이 손상된다. 하지만 사랑의 하나님으로 믿고 예배하면 치유가 찾아온다. 전전두피질이 활성화된다. 전전두피질은 사랑과 공감과 이타심을 경험하는 뇌 부위다(제닝스, 99-100). 바울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딤후 3:5)이라고 한 대상은 불가지론자와 무신론자가 아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의 진리를 부인하는 자들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을 놓치고 하나님에 관한 교리와 율법적 신학, 종교 제도와 같은 실정법에 얽매인 채 쌓는 제자훈련이라면 오히려 삶을 파편화하거나 파괴하기 쉽다. 특히 하나님의 사랑의 법을 놓치고 권위주의적인 하나님 관을 견지하면 파멸이 뒤따르게 된다는 것을 기독교 역사가 증명해 준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94년 르완다에서 발생했다. 4개월 만에 무려 백만 명 이상이 살상되었는데, 그 장소는 주로 교회였다. 당시 르완다는 인구의 56퍼센트가 천주교, 26퍼센트가 각종 개신교단으로 기독교 국가였다. 무려 백만 명이 죽임을 당한 그 절망적인 시기에 사람들은 교회로 피신했다. 이때 교회 지도자들은 도피 중인 사람들을 교회 건물 안에 들인 뒤 민병대에 알렸고, 민병대가 교회에 들어와 숨어있는 사람들을 살육했다. 성직자가 자기 교인을 죽였고, 교인이 자기가 다니던 교회 성직자를 죽였다. 대학살의 광란이 끝난 뒤 교회와 교단을 불문하고 많은 개신교와 천주교 성직자뿐 아니라 교회의 장로와 집사와 교인이 재판에서 전범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제닝스, 111). 티머시 롱맨은 이 전쟁의 참상을 고증한 책에 이렇게 보고했다. “자기 행동이 소속 교회의 가르침에 부합한다고 믿었기에 일부 종파의 암살단은 죽이러 나가기 전에 미사를 드렸다. … 사람들은 날마다 미사에 와서 기도한 뒤 출동해 살해했다. 민병대원이 광란의 살육을 잠시 멈추고 보란 듯이 재단에 무릎 꿇어 기도하는 경우도 있었다”(Timothy Longman, Christianity and Genocide in Rwanda, 6-7). 연구진이 어떤 유형의 사람들이 살상에 가담했고, 어떤 유형의 사람들이 교회에 피신한 사람들을 보호했는지를 조사해 본 결과, 그 요인은 하나로 귀결되었다. 교단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독재자나 권위주의적인 존재로 생각한 사람들은 살상에 가담했고, 사랑의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믿는 사람들은 피난민을 보호했다. 구체적으로 서술하면, 세례를 어떤 방법으로 베푸는지, 예배를 무슨 요일과 어떤 방식으로 드리는지, 죄를 사제에게 고해하는지 아니면 하나님께 직접 자백하는지, 성찬식을 어떻게 하는지, 기도를 어떤 방식으로 하는지 등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믿느냐였다. 기독교의 바른 교리와 바른 신념에만 몰두하고,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을 놓친 그리스도인은 다르게 믿는 사람들을 용납하지 않고 그들을 살상하는 데 가담했다(Longman, 같은 책, 7-8).넓은 의미에서 제자훈련은 영혼 돌봄과 치유와 관계된다. 물론 영적 성장과도 관계된다. 제자훈련이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의 병이나 죄를 보지 못하고 실정법인 교리와 율법적 신학의 지적 습득에만 몰두하게 될 때, 사람들의 병이나 죄를 볼 때도 처벌 대상으로만 여기게 된다. 사람들에게 실정법 개념만을 가르치면 하나님의 사랑이 막힌다. 실정법의 핵심 요소 중 하나인 율법적 신학은 마음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완고하게 만든다(제닝스, 114). 이러한 특성은 많은 연구를 통해 밝혀지고 있다. 실정법에만 치중한 공동체는 사람들을 더 이기적이고 비판적인 사람들로 이끌 수 있다. 미국, 캐나다, 중국, 요르단, 남아공, 투르키예 등지의 어린이 1,170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 종교적인 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종교가 없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보다 더 나눠 가질 줄 모르며 남을 더 벌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 연구의 저자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번 연구를 보면 무신론과 무종교 가정의 아이일수록 오히려 더 너그러웠습니다. … 이런 결과를 종합해 보면 어느 나라든 다 비슷하게 종교는 아이의 이타심에 부정적 영향을 미칩니다. 이는 종교심이 친사회적 행동을 촉진한다는 견해에 반할 뿐 아니라 종교가 도덕적 발달에 꼭 필요한지 의문을 품게 합니다. 도덕적 담론의 세속화가 인간의 친절성을 떨어뜨리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사실 그 반대입니다”(제닝스, 156-57).티머시 제닝스는 하나님의 설계의 비밀, 즉 인간의 마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질서와 비밀을 무시하고, 교리와 같은 실정법에만 몰두하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초래되었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인류가 하나님의 사랑의 법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창조하셨는데, 종교적인 사람일수록 이 하나님의 법을 놓치고 율법적으로만 사람을 대하기 때문에 더 이기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제자훈련은 조직의 교리나 이해관계를 보호하려던 내용을 버리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공급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제자훈련이 인간이 만든 실정법 위에 서 있는 한,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아래 연합할 수 없다. 실정법의 전염병은 항상 기독교에 비참한 분열을 초래했다. 성경의 교리나 해석이 어느 쪽에 옳으냐를 두고 경쟁하며 싸우게 된다. 하나님의 법이 실정법에 불과하다는 거짓말을 받아들임에 따라 사람들은 그분의 법을 서로 다르게 해석하는 것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착각에 빠진다(제닝스, 182). 기독교가 수만 갈래의 분파로 갈라지고 분열한 현상과 교회 공동체 사람들이 더 이기적인 현실은 하나님의 자연법을 인간의 실정법으로 대체한 데 따른 결과이기도 하다. 따라서 교회는 이제라도 실정법에만 충실한 제자훈련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연법, 하나님의 창조적 설계에도 충실한 제자훈련을 실천할 필요가 있다. 자연법은 하나님이 설계한 인간의 뇌, 마음, 몸, 자연 질서 등과 관계되고, 실정법은 인간이 만든 교리, 제도 등과 관계된다. 물론 교리와 같은 실정법과 하나님의 창조적 설계인 마음과 몸 등과 같은 자연법은 나선형 관계 안에서 소통할 때 보다 더 효과적인 제자훈련을 할 수 있음은 자명하다. 하지만 폴 트립의 말처럼, 교리는 삶을 위한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이 있어야 한다(폴 트립, 교리와 삶은 하나입니다 참조).
제자훈련
자연법
실정법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 (6) : 우상숭배와 복음
by 고상섭
2023-06-28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팀 켈러가 그토록 사랑했던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이제 눈물이 없는 곳에서 기뻐할 팀 켈러를 생각하면 위로가 되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에겐 그가 떠난 빈자리가 너무나 크게 느껴진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인 존재로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발자취를 남겼다. 그와 그의 삶이 우리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 몇 가지를 되돌아보며 그를 기억하고자 한다.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을 정리하면서 ‘복음을 가장 먼저 거론했다. 팀 켈러를 통해 복음을 재발견했다는 사람이 많은 이유는 복음 자체를 몰랐다기보다 복음에 대한 잘못된 오해를 바로잡았기 때문이다. 팀 켈러가 전한 복음의 내용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지만, 그가 복음을 전달하는 방식이 남달랐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팀 켈러를 통해 복음을 재발견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복음은 좋은 소식이지만, 그 이전에 나쁜 소식이어야 한다. 내가 죄인이며 나의 힘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나쁜 소식이 선포될 때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사실이 기쁜 소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쁜 소식 이전에 나쁜 소식으로 인도하는 팀 켈러의 복음 전달 방식은 우상숭배를 깨닫게 한다. 무엇이 우상인가? 내가 처음 맨해튼에서 사역을 시작했을 때, 그곳에서 기독교의 죄 개념에 대한 문화적 알레르기 반응을 접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우상숭배에 관한 성경의 광범위한 가르침을 전했을 때 사람들을 가장 많이 이끌어낼 수 있었다. 나는 죄를 “여러분의 삶의 의미를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 위에, 비록 그것이 아주 좋을 것일지라도 세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1]팀 켈러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사는 뉴욕의 청중에게 기독교의 죄 개념을 가르친다는 건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죄에 대한 문화적 기준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팀 켈러는 시대에 맞는, 그러나 더 깊고 넓은 관점으로 죄를 설명하는 방법을 찾았다.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의 개념으로 죄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기존의 죄의 설명은 인간의 행위적 죄에 대한 설명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팀 켈러는 죄를 짓는 마음의 동기를 살피고, 비록 죄로 인식하지 못하는 영역이지만 그것이 죄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사람아, 이들은 여러 우상을 마음으로 떠받드는 사람들이며, 걸려 넘어져서 죄를 짓게 하는 올가미를 자기들 앞에 둔 사람들인데, 내가 과연 이런 사람들에게 질문을 받을 수가 있겠느냐? (에스겔 14:3)대체로 사람들은 우상이라고 하면 눈에 보이는 신상을 떠올린다. 유명 “아이돌” 가수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우상숭배를 이야기한다. 머리에 뿔이 달린 악마가 아니라 내 마음속에서 하나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우상이다. 팀 켈러는 내가 만든 신에서 우상을 이렇게 정의했다. 우상이란 무엇인가? 무엇이든 당신에게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무엇이든 하나님보다 더 크게 당신 마음과 생각을 차지하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다른 데서 얻으려 한다면 그게 바로 우상이다.[2]그럼 내 안에 우상이 존재하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팀 켈러는 슬픔과 절망의 차이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슬픔은 위로받을 수 있는 고통이다. 슬픔은 여러 좋은 것들 가운데서 하나를 잃었을 때 찾아온다. 예컨대 직장에서 낭패를 겪었다면 가정에서 위안을 얻어 헤쳐 나갈 수 있다. 반면에 절망은 위로받을 길이 없다. 궁극적인 것을 잃었을 때 찾아오기 때문이다.[3]이렇게 내 삶을 절망으로 이끌어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내 안의 우상일 가능성이 크다. 가장 의지했던 것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선한 일이다. 그러나 자녀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게 되면 자녀를 우상숭배의 위치에 올리게 된다. 자녀를 하나님 자리에 두는 것이다. 자녀가 부모의 기대에 어긋나게 행동하거나 부모를 실망시킬 때, 단순한 슬픔을 넘어 절망의 단계까지 나간다면 자녀가 우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배우자의 배신에 인생이 무너지는 것처럼 고통스럽고, 성경을 읽고 싶지도 교회 나가고 싶지도 않을 만큼 절망에 빠져있다면, 그것은 배우자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 삶의 결과이다. 거기에서 회복될 때는 “내가 하나님보다 배우자를 더 사랑했습니다”라는 회개를 통해 회복된다.사랑의 순서결국 우상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대상이며, 이것은 사랑의 순서의 문제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죄를 ‘순서가 바뀐 사랑’이라고 정의했다. 가장 사랑해야 할 하나님이 계셔야 하는 자리에 다른 사랑이 대체된 것이 죄이며 곧 우상숭배이다. 사랑에는 순서가 있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할 때 삶의 순서가 세워지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을 두 가지로 나누어 ‘향유하는’ 사랑(Frui)과 ‘사용하는’ 사랑(Uti)로 설명했다. 어떤 대상을 향유 곧 즐기는 것은 그 자체를 위하여 사랑한다는 말이다. 반면에 어떤 대상을 사용한다는 말은 더 높은 차원의 목적을 위하여 잠시 수단으로 쓴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향유하는 사랑의 대상이시고, 나머지는 사용하는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4] 사용의 대상이 되는 사랑을 향유의 자리에 올릴 때, 우상숭배가 되고 우리는 가짜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것이다. 결국 죄는 순서가 바뀐 사랑이고, 죄에서의 회복은 사랑의 순서를 바꾸는 것이다. 하나님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모든 것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우상숭배가 된다. 반지의 제왕에서 중요한 소재는 악의 군주 사우론이 소유한 ‘절대반지’이다. 아무리 선한 의도에서라도 이 반지를 끼려는 사람은 누구나 탐욕에 물들게 된다. 톨킨에 해박한 톰 피쉬 교수는 이 반지를 ‘심리적 증폭기’라고 불렀다. 마음의 가장 절실한 갈망을 우상으로 확대한다는 뜻이다. ‘반지의 제왕’에서 선한 의도를 가진 등장인물들도 반지를 끼고 나면 그 선한 의도를 이루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목표를 이루려고 한다. 반지가 좋은 것을 절대화해서 다른 모든 도의나 가치관을 전복시킨다.[5]톨킨이 말하는 ‘절대반지’는 좋은 의도와 좋은 목표를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이 절대화될 때 악한 일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상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우상은 대부분 좋고 선한 가치들이다. 인간의 마음은 우상 공장이다. 성공, 사랑, 가족, 재물 등 모든 좋은 것을 궁극적인 것으로 탈바꿈시켜 버린다. 미국 캘리포니아 코너스톤 교회를 개척했던 프랜시스 첸은 부부 제자도에서 “결혼은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결혼은 중요하고 선한 것이다. 그러나 그 선한 결혼도 가장 중요한 것이 되어버릴 때 그것은 가짜 하나님, 우상이 된다. 우상숭배의 위험성 우상숭배의 위험성은 그것이 우리를 노예로 삼기 때문이다. 하나님 자리에 다른 것을 숭배하게 되면 우리는 그것에 속박된다. 사사기는 그 패턴을 가장 잘 보여주는 성경 중 하나인데, 여기서 이스라엘은 죄와 회개와 우상숭배를 반복한다.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주님께서 보시는 앞에서 악을 저질렀다. 그들은 바알 신들과 아스다롯과 시리아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사람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의 신들을 섬기고, 주님을 저버려, 더 이상 주님을 섬기지 않았다. (사사기 10:6) 바알과 아스다롯은 가나안의 신이었다. 아람과 시돈의 신들은 북쪽의 신, 암몬과 모압의 신들은 동쪽의 신, 블레셋은 남쪽의 신이다. 이스라엘이 섬겼던 신들은 모두 그들을 억압했던 민족들의 신들이었다. 첫 번째 사사인 옷니엘이 아람에, 에훗이 모압과 암몬에, 삼갈이 블레셋에, 드보라가 가나안에 대항해서 이스라엘을 구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이 어느 나라의 우상을 숭배할 때마다 그 나라가 결국 이스라엘을 압제하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가 우상을 숭배할 때 그 우상의 예속상태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려준다. 우상숭배는 종살이로 이어지고, 그 종살이는 다시 우상숭배로 이어진다. 이런 패턴은 사사기뿐 아니라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만일 어떤 사람이 가치와 목적을 사람과의 관계에서 찾는다고 하자. 예를 들어, 결혼 생활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다가, 결혼 생활이 실패한다고 하자. 그러면 자연히 생각하기를 ‘다른 사람을 찾아야 해, 더 좋은 배우자가 필요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우상숭배가 아니라 우상을 충분히 숭배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6]또 팀 켈러는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비전 또한 우상숭배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한 목회자가 건강한 교회를 꿈꾸고 교회를 개척했는데 교회가 건강해지지 않는다면 먼저 자기 자신을 향한 질책과 비난이 이어진다. “나는 잘 못해” “나는 개척이 맞지 않아” 같은 내면의 소리를 듣게 되고 나아가 다른 사람을 향한 비판이 이어진다. “이런 설교를 듣고도 변하지 않는 성도들이 문제야.” 또 교회를 건강하게 만들지 못하는 외부 환경의 문제에 두려움을 느낀다. 교회 월세가 오르거나 교회를 이전해야 하는 문제들에 불안해진다. 건강한 교회를 위해서 꿈꾸고 날마다 기도하지만 목회자의 마음속에 자신을 향한 비난, 상대방을 향한 비판, 그리고 외부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건강한 교회라는 꿈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우상숭배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것을 목표로 두면, 교회가 좀 건강해지지 않아도 더 예수님을 닮아가는 과정으로 알고, 또 교회가 건강해지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이렇듯 우상숭배가 위험한 이유는 죄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선한 것으로 보이기도 하므로 죄가 아닌 선한 것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탕부 하나님에서 돌아온 동생에게 분노하는 첫째 아들은 “나는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고 있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는데, 나에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습니다”(눅 15:29)라고 토로한다. ‘여러 해’는 많은 시간을 의미하고, 그는 아버지의 명에 순종하는 도덕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선한 삶을 산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결국 도덕적 삶을 통해 아버지를 통제하고 싶어 하는 우상숭배를 한 것이다.그가 아버지에게 그토록 노한 까닭은 무엇인가? 그는 집안의 옷이며 반지며 가축을 어떻게 써야 할지 자신의 의견을 낼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사람들도 대게 아주 도덕적으로 살지만 그들의 목표는 하나님을 수단으로 이용하고, 그분을 통제하고, 자기네 생각대로 그분께 의무를 지우는 것이다. … 당신도 순종을 통해 하나님을 통제하려 든다면 당신의 모든 도덕은 하나님을 이용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7]이렇듯 우상숭배는 우리의 삶은 가짜 신을 섬기지만, 입술의 고백만으로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걱정과 스트레스 상황에서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많다. 이것이 우상숭배의 가장 큰 위험성이다.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우상의 노예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표면적 우상과 근원적 우상팀 켈러는 우리 안에서 우상을 발견하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에 대해 우상이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부분과 내면 깊은 곳에 숨겨진 부분이 다르기 때문이라 말한다. 그래서 겉으로 드러난 부분만이 아닌 내면의 뿌리까지 깊숙이 들어가야 한다. 자기 내면에 있는 우상을 발견할 때, 돈, 성공, 사랑 같은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상숭배의 심리는 이보다 더 복잡하다. ‘표면적 우상’은 더 구체적이고 눈에 잘 띄지만, 숨겨진 마음속에는 잘 보이지 않는 ‘근원적 우상’이 도사리고 있다.돈을 사랑하는 표면적 우상도 근원적으로는 돈을 통해 인정을 원하는 우월감이 내면에 작용할 수도 있고, 돈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통제하고 싶은 욕구가 있을 수도 있다. 또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 느끼는 안정감이 우상이 되기도 한다. 같은 돈이라는 표면으로 드러나지만, 통제, 안정, 우월감 등의 다양한 근원적 우상이 존재할 수 있다.[8]근원적 우상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늘 피상적인 우상만을 다룰 위험이 있다. 팀 켈러는 제임스라는 한 목회자의 이야기를 통해 근원적 우상의 위험성을 설명한다. 제임스는 예수님을 믿기 전 여색을 밝히기로 유명했고 매번 여자를 유혹해 잠자리를 갖고 나면 이내 흥미를 잃어버리는 사람이었다. 그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성적 일탈을 끊고 기독교 사역에 매진했지만 근원적 우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수업이나 토론 때마다 그는 논쟁을 일삼으며 이기려 했고 자신이 회장이 아닌 모임에서도 늘 회장 행세를 하려고 했다. 자신의 새로운 신앙 주제로 대화할 때도 회의론자들을 거칠게 해서 마찰을 일으켰다. 결국 그의 의미와 가치는 그리스도께 옮겨진 게 아니라 여전히 타인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것에 기초해 있음이 분명해졌다. 그런 권력을 통해 그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꼈다. 제임스가 여러 여자와 잠자리를 한 것은 그들에게 매력을 느껴서가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동참할 수 있다는 권력을 얻기 위해서였다. 권력만 얻으면 여자는 더 이상 흥밋거리가 못 되었다. 기독교 사역도 사람을 섬기고 싶어서가 아니라 권력을 얻기 위해서였다. 권력의 우상이 성적인 형태에서 종교적인 형태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우상은 꼭꼭 숨어있다.[9]문화 내러티브 속의 우상 팀 켈러는 우상이 단지 개인의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영향을 주는 문화에서부터 출발한다고 말한다. 우상은 한 개인의 삶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한 세대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는 것이다. 영국의 문화 비평가인 테리 이글턴은 18세기 합리주의를 거치면서 신이 사라지고, 비록 그 역할을 잘 감당하지는 않았지만, 이 시대에 신의 대리 역할로 등장한 것이 바로 예술, 이성, 문화라고 말한다.[10]데이비드 폴리슨은 ‘마음의 우상과 허영의 시장’(Idols of the Heart and Vanity Fair)이라는 논문에서 우상숭배로 인간을 몰아가는 세 가지 대상이 있다고 말한다. 육신과 세상과 마귀이다. 육신은 인간 안에 있는 욕망을 다루기 때문에 개인적 차원의 문제라고 할 수 있지만, 세상의 영향을 받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죄의 문제가 아닌 문화가 주는 영향력이다. ‘허영의 시장’은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나오는 장소를 비유한 것이다. 주인공 ‘크리스천’이 사망의 골짜기를 빠져나와 ‘믿음’을 만나 서로의 간증을 나누면서 도착한 곳이 ‘허영의 시장’이었다. 그곳에서는 온갖 욕망을 팔고 있었고, 진리를 찾다가 믿음은 순교하고 크리스천은 감옥에 갇히는 일을 겪게 된다. 데이비드 폴리슨은 우상이 한 개인의 욕망만이 아니라, 허영의 시장이라는 문화가 주는 영향력이 있음을 이야기한다. 팀 켈러도 데이비드 폴리슨의 죽음을 추모하는 글에서 기독교 상담이 가지는 약점 중 하나가 개인의 죄에만 집중한다는 것이었는데, ‘마음의 우상과 허영의 시장’에 대한 폴리슨의 가르침 덕분에 문화에 내재하는 죄의 영향력을 해결하는 방법을 알 수 있었고, 내가 만든 신이라는 책도 데이비드 폴리슨의 영향력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고백했다.[11]팀 켈러가 설교와 변증에서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설교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바로 문화 속에 있는 우상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상은 목상 앞에 절하는 원시인을 떠올리지만 … 현대도 동일한 우상을 섬기고 있다. 문화마다 그 문화를 지배하는 우상이 있다. 제사장과 토템과 의식도 있다. 사무실이나 헬스장이나 스튜디오와 경기장 같은 신전에서, 행복한 삶이라는 복을 얻고 액운을 물리치려고 거기서 제사를 드린다. 미모와 권력, 돈과 성취의 신이 바로 우리 개개인의 삶과 사회 전반에서 신적 위치를 점한다.[12]복음으로 우상을 깨뜨려라 팀 켈러는 답이 되는 기독교에서 문화 속에 있는 신념을 드러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요즘 시대 사람들의 생각 밑에 당연한 듯 깔려 있는 배후 가정도 많다. 문화가 기독교에 관해 우리에게 주입하는 이런 신념들 때문에 기독교는 점점 더 개연성이 떨어져 보인다. 이런 신념은 보통 논증 과정을 거쳐 명확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연예와 소셜 미디어의 이야기와 주제 속에 녹아들어서는 우리 사상을 파고든다. 그러면서 어느새 “원래 그런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런 작업은 상당히 끈질겨서, 많은 기독교 신자의 마음과 생각에서조차 신앙은 점점 현실성이 없게 느껴진다. 아마 처음에는 본인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13]결국 우리의 마음의 우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높이는 복음뿐이다. 그 예로 바울은 고린도후서 8장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재정적인 후원을 하라고 권면한다. 여기서 그는 교인들이 재정 사용에 있어 서로 베푸는 관대한 마음을 갖기를 바란다. 그렇다고 억지로 후원하도록 하지 않는다. 그는 사도로서 명령하여 헌금하도록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명령하기를 원치 않는다고 하며 오히려 그들에게 복음에 관해 생각해 보라고 요구한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부요하나, 여러분을 위해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가난으로 여러분을 부요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9)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이 먼저 자신을 내어 주신 예수님의 관대한 은혜에 감동하도록 이끌었다. 즉 그리스도의 관대하심을 통해 어떻게 그들이 구원받았는지 생각하도록 일깨우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그들 역시 관대한 마음을 갖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사람이 타인에게 관대한 마음을 갖기 어렵게 만드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바로 교만과 염려이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번 돈으로 자신이 쓴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열심히 일해서 모은 나의 재산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주신 선물이라는 생각이 아니라 스스로 얻은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태도가 바로 교만이다. 또 다른 요인은 염려이다. 자기 재물을 타인을 위해서 사용하면 자기 스스로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지 못할 수 있다는 태도이다. 바울은 사람들이 관대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그들의 마음에 있는 문제, 즉 교만이나 염려와 같은 내면의 동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따라서 그는 이런 내면의 정서에 반응하며 그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라고 말한다. 그리스도가 자신을 전부 내어 주심으로써 그들이 구원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복음을 묵상할 때 우리 마음속에 있는 교만이 깨어지고 우리가 구원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또 복음을 묵상하면 염려가 사라지게 된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은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사랑이시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주의 가장 강력한 존재가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우리가 무엇을 염려하겠는가?[14]바울은 헌금을 이야기하면서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의 상태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불쌍한 사람들의 영상을 보고 헌금을 했다면, 그것은 감정(emotion)의 변화에 불과하다. 몇 달이 지나면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게 될 가능성이 크고, 자신이 힘들어지면 헌금을 하지 않을 가능성도 높다. 참된 변화인 정감(affection)이 변화되려면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물질주의’가 깨져야 한다. 그 물질주의라는 우상이 깨지고 그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심어질 때 자신의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다른 사람을 위해 기쁘게 희생할 수 있는 복음의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의지적으로 행동을 바꾸려고 하거나, 아니면 돈이라는 피상적인 우상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있는 교만과 염려의 문제를 해결할 때 비로소 참된 변화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 팀 켈러는 죄와 복음의 관계를 우상숭배를 통한 회개와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는 삶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복음은 좋은 소식이기 전에 나쁜 소식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죄인 되었다는 나쁜 소식을 깨닫게 하는 좋은 방식이 바로 우상숭배의 관점으로 죄를 다루는 것이다. 이것은 행위보다 더 깊은 마음의 동기를 다루어주며, 또한 죄로 생각하지 않았던 도덕의 탈을 벗게 해준다. 팀 켈러는 탕부 하나님에서 이렇게 말했다.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죄뿐 아니라 우리의 의도 회개하는 사람들이다.주1. 팀 켈러, 센터처치, 271.2. 팀 켈러, 내가 만든 신, 22.3. 같은 책, 14.4.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을 향유의 대상으로 말하지만, 사람도 향유와 사용의 대상이라고 말한다. 사람을 향유한다고 할 때도 하나님보다 더 향유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5. 같은 책, 19. 6. 팀 켈러, 당신을 위한 사사기, 179-180.7. 팀 켈러, 탕부 하나님, 71.8. 팀 켈러, 같은 책, 116. 9. 같은 책, 175.10. 테리 이글턴, 신의 죽음 그리고 문화, 6.11. Tim Keller, “Tim Keller Reflects on David Powlison(1949-2019)”12. 같은 책, 15.13. 팀 켈러, 답이 되는 기독교, 16. 14. 스티브 엄 엮음, 복음만이 모든 것을 바꾼다, 38.
소셜 미디어가 아이들에게 나쁜 친구가 되고 있다
by Joe Carter
2023-06-27
이야기: 미국 공중보건국장 비벡 머시는 어린이 정신 건강에 미치는 소셜 미디어의 잠재적 위험을 경고했다. 그리스도인 부모라면 지금 상황을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자녀를 보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다음과 같다.배경: 부적절한 콘텐츠가 소셜 미디어에 미치는 해로운 영향과 과도한 사용에 대한 조사가 증가함에 따라 보건당국의 경고가 나왔다. SNS가 젊은이에게 미치는 해로운 영향은 수면 방해에서 자살 충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머시는 정책 입안자, SNS 플랫폼, 부모에게 안전한 한계를 설정하도록 요청했다. 그리고 13살이 안 된 어린이는 절대 소셜 미디어에 가입하면 안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바이든 행정부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부서 간 태스크포스팀 구성, 디지털 숙지 능력 및 습관 증진, 온라인 괴롭힘 및 아동 학대 방지 노력 등을 포함한 어린이 안전을 위한 온라인 개선 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십대의 약 95퍼센트와 8-12세 어린이의 40퍼센트가 소셜 미디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그들은 종종 극단적이고 해로운 콘텐츠에 노출된다. SNS 플랫폼에서 하루에 3시간 이상을 보내는 사람은 우울증과 불안을 경험할 가능성이 두 배 더 높다. 또한 11-15세 소녀의 1/3 이상이 특정 플랫폼에 “중독”되어 있다고 보고되었다. 가정 연구원 제닛 에릭슨과 브래드포드 윌콕스의 지적이다. 최신 연구에 따르면, 소셜 미디어가 바로 그 요인이다. 특히 일부 청소년과 청년은 TikTok이나 Instagram 같은 플랫폼의 영향을 받고 있다. 현재까지 가장 광범위하게 조사된 연구 결과에 따르면, 11-13세 소녀들이 특히 취약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지난해 내부고발자에 의해 유출된 페이스북 자체 연구에서는 십대 소녀들의 인스타그램 사용과 자살 충동 증가(13.5%), 섭식 장애(17%), 자기 신체 비화(32%) 사이에 깊은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의미: 인간의 발명품은 인류에게 주신 하나님의 일반 은총의 일부이며 대부분이 우리의 번영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기술이 가져다주는 잠재적 이점에만 초점을 맞출 때, 기술이 초래할 수 있는 명백한 피해와 고통을 경시하거나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소셜 미디어와 같은 통신 기술이 거기에 해당한다. 사실상 소셜 미디어의 위협에 대한 기독교의 대응은 느렸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어린이와 십대에 미치는 악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인간의 생각과 상호 작용에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제대로 알아야 한다. 20세기 커뮤니케이션 이론가 해롤드 이니스는 미디어 기술이 인간에게 세 가지 측면에서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다. 미디어 기술은 (1) 관심 구조, (2) 상징의 특성, 그리고 (3) 공동체의 본질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이 모델을 소셜 미디어에 적용하면 중요한 관심 영역이 분명하게 드러난다.관심 구조는 우리의 관심을 끄는 주제를 가리킨다. 알고리즘 시대에 소셜 미디어는 어린이와 십대의 생각에 큰 영향을 미친다. 양성애, 섭식 장애, 트랜스젠더리즘에 깊은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십대의 수가 급증하는 현실은 이런 주제를 홍보하는 소셜 미디어가 넘치는 상황을 고려할 때 조금도 놀랍지 않다. 선한 관심을 가지고 시작한 십대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고통의 길로 빠지는 건 어렵지 않다. 피트니스에 건전한 관심으로 가졌던 십대가 비현실적인 신체를 이상적이라고 홍보하는 게시물의 맹공격을 받아 신체에 대한 불만과 더불어 건강에 해로운 행동을 취할 수도 있다. 다음 단계는 어디일까? 소셜 미디어 알고리즘은 거식증(“pro-ana”) 또는 폭식(probulimia) 사이트로, 그리고 나아가서는 극도로 마른 신체에 대한 열광(“thinspiration”)을 조장하는 온라인 커뮤니티로 유도할 수도 있다. 상징의 특성, 즉 정보를 해석하고 전달하는 방식도 소셜 미디어에 의해 혁신되었다. 간결함과 즉각적인 만족을 선호하는 플랫폼은 복잡한 아이디어를 이모지(emojis), 해시태그, [역주: 위험한 행동을 찍어서 온라인에 올리는] 바이럴 챌린지로 바꾼다. 이러한 변화는 비판적 사고 능력을 떨어뜨리고 성경 및 신앙과 같은 주제까지도 피상적인 이해에 그치도록 만든다. 질문과 의심을 헤쳐 나가도록 돕는 부모와 목회자 또는 성숙한 어른 대신, 플랫폼은 십대로 하여금 점점 더 경솔하고 정보가 부족한 친구를 의지하도록 자극한다. 공동체의 본질까지도 소셜 미디어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SNS 플랫폼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방법을 제공하는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의미 있고 깊은 관계 대신에 얕고 덧없는 상호 작용을 촉진할 뿐이다. 따라서 SNS가 조장하는 공동체는 공감 및 갈등 해결과 같은 중요한 사회적 기술의 발달을 훼손할 위험이 있다. 십대는 소셜 미디어를 “실생활”과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Instagram, Facebook, TikTok 같은 플랫폼에서 우리는 종종 이상적이고 종종 비현실적인 묘사로 넘치는 타인의 삶에 정기적으로 노출된다. “완벽한”(물론 포토샵으로 수정된) 몸매, 호화로운 라이프스타일, 흠잡을 데 없는 외모를 과시하는 친구와 유명인을 자신과 비교하며 왜곡된 자아상을 만들 수도 있다. 십대와 십대 초반의 아이들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기 쉬운 나이이다. 결국에는 신체 불만족, 낮은 자존감 및 섭식 장애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사이버 괴롭힘은 또 다른 중요한 문제이다. 인터넷 이전까지 괴롭힘은 대부분 학교 운동장에 국한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스크린을 통해 가정에까지 침투했다. 온라인 플랫폼은 괴롭힘, 트롤링[역주: 상대를 주제에 벗어난 댓글 등으로 괴롭히는 행위] 및 학대의 온상이 되었으며, 익명성은 가해자를 더 대담하게 만든다(이 사실은 트위터를 사용해 본 모든 성인이 증명한다). 사이버 괴롭힘의 영향은 파괴적이며 불안, 우울증, 그리고 극단적으로는 자살 충동까지 이어진다. 2022년, 퓨 리서치(Pew Research)에서 실시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13-17세 미국 십대의 거의 절반(46%)이 여섯 가지 사이버 괴롭힘 행위 가운데 적어도 한 가지를 경험한 적이 있다고 보고했다.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성경이 소셜 미디어에 대해 직접적으로 주는 말씀은 없지만, 옆에 있는 사람을 고려하고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가르친다. 지혜로운 사람과 함께 다니면 지혜를 얻지만, 미련한 사람과 사귀면 해를 입는다. (잠언 13:20)아이들아, 악인들이 너를 꾀더라도, 따라가지 말아라. (잠언 1:10)속지 마십시오. 나쁜 동무가 좋은 습성을 망칩니다. (고린도전서 15:33)온라인에 노출되는 어린이와 십대를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자녀의 영혼을 돌보시며 그의 왕국으로 그들을 영접하시려는 분께 간절히 기도할 수는 있다. 우리는 그분에게 자녀의 마음과 그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역사해달라고, 그들의 발이 악한 길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달라고, 무엇보다 오로지 그분만을 기뻐하며 살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다.부모는 자녀를 보호하기 위해 더 과감한 예방 조치를 취할 수 있다. 아니, 그렇게 해야 한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스마트폰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거나 아예 스마트폰을 없애는 것이다. 레오나르도 색스의 말이다. 가정의학과 의사로서 나는 기본적인 사항에 주의를 기울인다. 소셜 미디어 사용을 제한하기 위해서 모든 부모가 인터넷 액세스가 가능한 모든 장치에 부모 모니터링 앱을 설치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Common Sense Media는 Net Nanny와 Qustodio, Bark 또는 Circle 등의 부모 모니터링 앱을 권장한다. 자녀에게 스마트폰 사용은 권리가 아니라 특권이라고 설명하라. 부적절한 스마트폰 사용은 특권의 박탈로 이어진다고 말하라. 부적절한 사용은 어떤 것인가? 외설 사진을 다운로드하거나 공유하는 것이다. 사이버 괴롭힘이다. 불쾌한 댓글을 익명으로 게시하는 것이다. 부모 모니터링 앱은 이런 일의 발생 여부를 알려줄 것이다. 부모라면 자녀의 스마트폰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아야 한다. 색스는 덧붙인다. “부모에게 드리는 조언: 국가가 법률로 조치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라. 그건 언제가 되어야 가능할지 모른다. 부모라면 지금 바로 행동해야 한다.”원제: Social Media Is Causing Our Children to Suffe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SNS
소셜미디어
중독
십대
청소년
벌레 함부로 부르지 마라. 듣는 벌레 기분 나쁘다.
by 필립 정
2023-06-26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의 소설은 대하기 어렵다. 마치 교회에 처음 간 사람이 마음에 와닿지 않는, 비난조의 설교를 들어야 하는 것처럼…. 그의 소설 변신(The Metamorphosis)의 줄거리는 이렇다. 어느 날 주인공 그레고르는 잠에서 깨어나자 자신이 벌레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는 변한 자기 모습을 가족에게 보일 수 없어 출근을 미루다 어쩔 수 없는 책임감 (그는 생계 부양자이다) 때문에 방문을 열고 나선다. 그러나 자기의 외침은 제대로 들리지 않고 가족들이 비명을 지르고 그를 죽이려 든다. 결국 아버지가 던진 사과의 한 조각이 몸에 꽂혀 벌레의 모습으로 시름시름 앓다 죽는다. 이 이야기는 당연히 픽션이다. 그러나 작가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19세기 후반 그는 어느 사회에도 소속감을 느끼기 힘든 유대인 태생으로 비교적 세속적으로 성공한 아버지 밑에서 성공을 강요받으며 불안한 소년기를 보낸다. 심약하고 예민한 한 소년이 그 밑에서 느꼈을 불안감, 소외감, 죄책감까지 그 글에 잘 녹아 있다. 그런데 그의 글 ‘변신’이 요즘 한국에선 전혀 낯설지 않다. 자기들이 혐오하고 불쾌한 대상을 일컬어 각종 ‘충’이라 버젓이 부르고들 있다. 예전의 식충이, 좀 벌레, 돈벌레 따위보다 훨씬 모욕적인 표현이라 지면에 담기에도 불편한 정도다. 교회 안에서는 어떨까?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나도 엄격한 장로교회에서 그런 설교를 들으며 자랐다.고등학교 시절 들었던 결코 유쾌하지 못한 설교가 있다. 이 설교는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을 인용하여 세 가지 부류의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요지였다. ‘꼭 있어야 할 사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 그리고 없어야 할 사람’이다. 난 이후에도 같은 설교를 브라질에서 선교사로 있는 분에게 들었고, 계속해서 몇몇 목회자들에게 여러 번 들었다. 얼마 전에도 잘 알려진 목회자 한 분이 설교 첫머리에 이 말을 인용하여 설교하는 것을 듣고 과연 사람을 이런 식으로 분류해도 될까 싶었다. 이런 설교에 대해 오래 고민해 오다 이제 아니다 싶어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가 이 설교를 듣는 심정으로 글로 반박하려 한다.우선 프랜시스 베이컨의 비유, 세 부류의 사람 자체에 오류가 있다는 것이다. 베이컨은 첫째, 없어야 할 사람은 “거미같이 줄만 쳐 놓고 덫을 놓아 남에게 피해만 주는 사람”이라고 했다. 둘째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은 “개미같이 자기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쌓아 놓는 사람”이라고 했다. 셋째 꼭 있어야 할 사람은 “꿀벌같이 자기를 위해서도 일하지만 남을 위해서도 좋은 일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였다.벌레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우선 베이컨이 어떤 오류에 빠졌는지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생태계 속에서 필요 없는 무익한 벌레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살면서도 다른 동물의 먹이가 되어 서로에게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거미는 덫을 쳐 인간에게 해로운 모기 파리 같은 온갖 벌레를 잡아먹고 자기도 참새의 먹이가 된다. 거미가 있어야 새가 살기 때문에 없어야 할 동물이 아니라 꼭 있어야 한다. 개미는 생태계 최고의 공헌자다. 땅을 갈아 영양 성분을 증진하고 씨앗을 옮겨놓는 과정에서 식물 종자를 널리 퍼뜨린다. 그들이 일군 땅이 얼마나 미네랄이 풍부한 비옥한 땅인지 알면,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란 생각이 달라진다. 꿀벌도 겨우살이를 위해 꿀을 모으지만 곰과 사람이 와서 빼앗아 먹어 다른 동물을 이롭게 한다. 그런데 사람 눈에 당장은 꿀이 가장 큰 소득이라 꼭 있어야 할 동물이라고 정의해 버린다. 아무리 해석자가 인간이라고 해도 너무 찰나적이고 근시안적이지 않은가!베이컨은 자연의 개체가 서로 연관되고 영향을 미치며 하나가 되어가는 하나님이 주신 생태계 전체의 큰 그림 안에서 한 벌레의 존재의 당위성을 설명해 내지는 못한 것 같다. 그래서 그의 비유를 인용해 설교하면 꿀이 탐나는 어린아이가 하나님의 위치에서 설교하는 느낌을 주게 된다. 이런 베이컨의 비유는 자승자박에 빠질 수밖에 없다. 자기가 말한 ‘종족의 우상’(인간이라는 종족이 믿고 싶어 하는 것만 믿음), 동굴의 우상(개인의 좁은 소견에 갇혀 비롯된 착각들) 에서 자신조차도 못 벗어났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런 비유를 인간 사회나 교회에 적용할 때 더 큰 피해가 그 공동체에 돌아올 수밖에 없다. 자연 생태계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는 기식(寄食)의 삶을 살아가며 도움이 되는 것처럼 인간 공동체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상호작용하며 도움을 주고받는 인간 사회는 서로에 대한 존중을 기반으로 안전한 망을 구축해 나간다. 이 기식의 삶이 프랜시스 베이컨 이후 삶과 문화를 얼마나 기름지고 풍성하게 했는가! 평생 그림 몇 장 못 팔며 동생의 생계비에 기대어 살던 광인 화가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 결혼해 가족 부양을 하지 못하고 근근이 살면서 작곡만 하다가 결국 아내와 딸을 잃고 비참하게 살다 죽은 스테판 포스터(Stephen C. Foster, 1826-1864), 그들 역시도 사랑하는 부모와 형제들의 집을 전전하며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나라 잃고 방황하며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지 못해 평생을 자기 시가 부끄럽다고 자기반성만 하다가 세상을 떠난 윤동주(1917-1945), 19세기의 그 많은 낭만주의 음악가, 소설가, 인상주의 화가들도 거의 당대에는 사회에 생산적이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들은 주위 가족이나 친척들에게 빚을 져가며 겨우 살아야 했다. 이런 기준이라면 철학자, 사상가, 목회자도 결코 있어야 할 사람의 범주에 들어갈 자리가 없다. 현대 영국의 작가 조앤 롤링(J. K. Rowling, 1965-)도 자신도 한때 어디에서도 부르지 않는 최고의 실패자였다고 하버드 졸업생들 앞에서 얘기하지 않았던가.물론 설교자들이 자본주의 관점에서 사람들을 보려고 프랜시스 베이컨을 인용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의 신앙적 관점에서 있어야 할 사람과 없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주려는 시도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런 설교가 결코 성경적이라는 근거를 어디서도 찾을 수 없어 문제가 발생한다.성경의 인간 분류를 보자. 의인과 악인이 가장 일반적이다. 이 분류는 “의인이 한 사람도 없고 오직 믿음으로만 의인이라 칭함을 받는다”는 칭의론에서 출발해야 한다. 설교자는 이때 매우 신중해야 한다. 설교자의 현재 시점에서 용서받은 의인과 아직 용서받지 못한 죄인이 있다는 그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의인은 교회에 있어야 할 사람이고 악인은 없어야 할 사람이라고 설교할 목회자가 어디 있겠는가. 다음의 분류도 마찬가지다. 영에 속한 사람, 육에 속한 사람이 있다. 영에 속한 사람은 성령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고 육에 속한 사람은 자기 죄의 성향을 따르는 사람이다. 여기서도 현재 사람들의 영적 성향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분류를 교회 안에 있어야 할 사람과 없어야 할 사람으로 등치시켜버리는 잔인한 설교를 하고 싶은 목회자가 있을까 싶다.설교자들은 성경이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오히려 이런 죄인이나 육에 속한 사람은 사실 없어야 할 사람이 아니라 잃어버리면 안 되는 사람으로 성경에 나오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비유(눅 15:1-17)에 나오는 그 양은 줄곧 목자의 관심의 대상이 된다. 목자는 자기의 뜻을 잘 따르는 이미 구원받은 아흔아홉 마리를 놔두고 제 갈 길로 간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선다. 찾은 후에는 이웃을 불러 잔치를 베풀어 그 기쁨을 같이 나눈다. 이 하나님 나라의 비유에서 죄인은 없어야 할 존재가 아니라 꼭 찾아야만 하는 있어야 할 양인 것이다. 이런 목자의 심정에서 설교가 출발해야 한다는 원리를 모르는 목회자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용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사회에 존재하는 교회에서 설교자의 말로 ‘있어야 할 사람, 없어야 할 사람’이 선포되는 순간 엄청난 역효과를 불러온다.설교를 듣는 교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면서 동시에 세상 속에 있다. 교회도 그렇다. 형식은 비영리 단체지만 영리 단체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헌금을 걷어 목회자들의 생활비를 보조해야 하고 토지를 마련하고 더 큰 교회로 이전을 하기 위해 헌금과 토지를 동산, 부동산 자본으로 이용하여 이익을 남길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렇게 못하면 어느 날 교회는 문을 닫아야 한다. 이런 사회와 교회에 속한 교인들이라 세상에 속한 교인들도 설교를 자신들의 언어로 재해석해서 듣는다. 그래서 설교자들의 언어는 쉽게 오해된다. ‘꼭 있어야 할 사람, 없어야 하는 사람이 있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 언어들은 교회라는 조직에 필요한 사람, 필요 없는 사람으로 들려 버린다. 그 설교를 하는 순간 소통의 불능 상태가 와 버린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말한 시장의 우상(단어의 정의와 대상의 불일치의 오류)을 교인들은 경험하고 만다. “여기 누군가 교회 필요 없는 사람이네. 성경에 그런 얘기 없는데….” 당연히 설교자와 듣는 자의 관계가 깨져 버리고 반박이 따를 수밖에 없다. 어떤 흉악한 죄인을 향해서도 “참 불쌍하고 측은한 사람입니다. 주의 은혜의 손길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라는 설교가 아니면 끊어진 인간의 소통은 다시 회복될 수 없다.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의 소유냐 존재냐(To Have and To Be), 사랑의 기술(Art of Loving)은 내 젊은 시절의 베스트셀러였고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들이었다. 그는 이 책에서 사람의 생존 양식에 있어서 ‘소유 양식과 존재 양식’이 있다고 하였다. 사랑은 그 인격과 삶, 존재에 대한 사랑이지 소유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고 그는 말한다. 흔한 말로 “난 네 존재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지 다른 필요가 있어서 사랑하는 게 아니야”란 뜻이다. 반대급부가 없는 무조건의 사랑이 교회가 들려줘야 할 메시지다. 조건을 붙이면 반대급부가 없을 때 사람을 벌레라 부르게 되어 있다. 벌레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모르고 혐오의 표현으로 사람에게 없어져야 할 벌레라 부르는 열등감의 군상들…. 혹시 설교자들도 그런 자괴감에서 프랜시스 베이컨의 벌레의 비유를 가져다 쓰지 않았으면 한다. 벌레! 이 세상에 꼭 있어야 할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모른다. 하나님이 지으셨기 때문에 의미 없는 삶은 없다. 창조의 면류관인 사람이야 오죽하랴. 소설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가 그런 설교를 듣고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사람을 함부로 벌레라고 부르지 말자. 듣는 벌레 기분 나쁘다.”
복음과도시 목회자 콘퍼런스 참가 후기
by 서명수·이지훈
2023-06-24
복음의 정서에 스며들다서명수 목사 복음 중심의 교회 개척 운동인 CTC 코리아와 복음 중심의 연합사역 운동인 TGC 코리아는 둘 다 얼마 전 소천한 팀 켈러 목사를 중심으로 세워진 열매이다. 이 두 단체가 ‘복음과도시’라는 한 우산 아래 전국 목회자 콘퍼런스를 강릉에서 가졌다. 마치 어느 누구도 중심일 수 없다는 듯, 전국 각지의 목회자와 사모 500여 명이 대한민국 동쪽 최북단에 자리한 강릉에 모였다. 물론 그런 의도로 콘퍼런스 장소를 강릉으로 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누군가는 잔치를 연 주인이 되고 누군가는 손님이 되는 광경이 아니라 각자가 광야 여정을 걷다가 모압 평지에 모여든 열두 지파처럼 서로를 환대하는 그런 모습으로 콘퍼런스는 시작되었다. 이박삼일 일정의 복음과도시 목회자 콘퍼런스에 참여하며 느낀 몇 가지 단상을 나누고자 한다.복음이 중심이 된 모임 풍광 좋은 강릉 바다를 감상할 틈도 없이, 콘퍼런스 이박삼일 내내 강의와 나눔이 숨 가쁘게 이어졌다. 강의의 주제는 다양했지만, ‘복음’이라는 하나의 깃발을 중심으로 전해졌다. 강의를 맡은 목회자마다 자신의 교회와 목회 사역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복음이 자신과 교회 가운데 어떻게 일하였는지를 고백적으로 나누어 주었다. 사실 이 말은 같은 내용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실제로 강사들은 강의를 통해 자신의 교회와 목회를 소개하였다. 하지만 강의를 듣고 있노라면 그들이 행한 사역에 초점 맞추어지는 게 아니라 그와 같은 사역을 빚어낸 복음에 방점이 찍혀 있음을 나를 포함하여 강의를 듣는 많은 이가 느꼈다. 때문에, 각각의 목회적 상황이 다른 다양한 이들이 모였음에도 그 가운데 흐르는 복음의 중심성으로 인해 모두가 강의를 공감하면서 들을 수 있었다. 언급한 바와 같이 강의는 복음을 중심으로 하여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방식으로 전해졌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복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정의하는가?’에 대한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복음은 너무나 당연하고 익숙한 것이어서 그저 선언적이거나 피상적인 개념에 그치기 쉽다. 그러한 점을 인식해서인지 콘퍼런스의 문을 여는 첫날의 두 강의는 우리가 믿고 이해하는 복음이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추어졌다. 개회 예배에서는 이인호 목사를 통해 “은혜의 복음에 관하여”, 이어진 정갑신 목사의 강의는 팀 켈러를 통해 선명하게 드러난 “복음 그 자체”를 나누었다. 두 강연자 모두 복음과 복음이 만들어내는 선한 열매를 혼동하지 않아야 함을 신학적인 이론과 경험적인 고백을 통해 나누어주었다. 둘째 날은 전날 전해진 ‘선명한 복음’이 ‘복음과도시’ 운동을 통해 어떻게 각 교회와 목회자 자신에게 적용되었는지, 교회 개척-교회 갱신-교회 연합의 관점에서 전해졌다. 강의가 진행될수록, 참여한 목회자들에게서 감동과 위로, 새로운 동기를 새기게 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소그룹 나눔에서는 강의를 통해 복음이 만들어내는 다양성 속에서 오히려 선명한 복음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재발견하였다는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이는 이 콘퍼런스와 관련하여 가능성을 본 두 번째 인상으로 이어진다. 복음으로 이루어진 연합과 사귐 실제로 콘퍼런스에 모인 목회자들의 면면은 너무나도 다양했다. 다양한 규모의 교회를 목회하는 목회자, 개척 교회 목회자, 군목, 은퇴한 목회자, 부교역자, 그리고 다양한 교단 배경, 그리고 다양한 연령층, 도무지 구성원을 특정하여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목회자들이 모였다. 강의 또한 특정한 대상들을 고려하지 않았다. 주제들은 오히려 산발적이었다고 하는 것이 맞다. 그러함에도 콘퍼런스 일정이 진행되어감에 따라 설명되지 않는 일체감이 점점 커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이 콘퍼런스가 복음의 가치와 내용을 새롭게 발견하고 고백하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을 두지 않으려는 의지를 견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때문인지 어떠한 연결점도 없이 갑작스레 모인 소그룹에서 목회자들은 마음을 열고 각자의 사역과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기꺼이 나누었다. 한 소그룹을 인도해야 했던 나는 이렇게 다양한 배경과 관점의 사람들이 모여 짧은 시간 동안 무슨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지만,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복음의 열매’가 아닌 ‘복음’ 자체에 대한 집중은 서로의 차이와 다름을 금세 무뎌지게 했다. 그리고 각자의 삶을 빚어온 복음의 공감대로 인해 마치 오랜 교제가 있었던 관계마냥 풍성한 사귐을 맛보게 하였다. 복음적인 사람들의 매력과 정서 개인적으로 가장 큰 인상을 받은 것은 강연자들, 콘퍼런스를 섬기는 스태프들, 소그룹을 섬기는 테이블 리더들의 모습이었다. 무엇보다 강의를 맡은 강연자들에게서 자신들이 이룬 사역의 열 매를 나누어주겠다는 권위적인 모습이나 가르치려는 태도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무엇을 하였다’는 이야기보다 ‘복음이 내게 무엇을 하였는가’를 드러내려는 강연 내용은 역설적으로 강연자를 새롭게 바라보게 했다. 그뿐만 아니라 강연자들이 사이에서 복음적인 케미스트리가 콘퍼런스 내내 유쾌하게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서로에 대한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칭찬이나 공치사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간의 사귐을 통해 경험한 서로의 장점과 연약함 모두를 통과한 우정어린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소그룹에서 부부가 함께 나눌 때면 자신을 꾸미거나 외식하면서 이야기하기가 어려워진다. 그와 같이 강연자들은 깊은 신뢰와 친밀함 속에서 유쾌한 방식으로 서로를 견제하며 꾸밈없는 나눔을 하였고, 참석한 많은 이들로부터 이런 점에서 색다른 정서를 경험했다는 이야기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었다. 헌신적으로 콘퍼런스를 섬기는 스태프들과 함께 배우고 먼저 들으려는 태도를 가지고 테이블 리더로 섬긴 CTC코리아 이사들의 모습 또한 인상적이었다. 겸손하고 유쾌한 사람들과 그들의 사귐에서 흘러나오는 정서. 어쩌면 이것이 무엇으로 특정할 수 없었던 이 콘퍼런스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니었나 싶다. 나가며 둘째 날 저녁, 모범적인 목회와 여러 사역으로 의미 있는 발자취를 남긴 원로 박은조 목사의 메시지가 있었다. 그 가운데 인상적이었던 그의 고백으로 초여름 강릉에서의 경험을 매듭지으려 한다. 그는 “목회적으로도 열매를 보았고 많은 기독교 학교를 세우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와 같은 열매는 자신의 영혼에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더 알고, 그분을 더 닮아가는 것만이 진정한 위로와 기쁨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고백을 나누어 주었다. 복음의 열매가 아닌 복음 그 자체가 참된 의미요 기쁨이요 위로라는 그의 고백이 위로와 힘이 되었다. 팀 켈러는 “부흥이 일어나는 때는 한 집단의 사람들이 이미 복음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가 실은 복음을 온전히 알지 못했음을 발견하면서 복음을 자기의 것으로 수용하고 살아있는 믿음으로 넘어갈 때다”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바울 사도가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라고 고백한 것과 같이 목회자들이 언젠가 사로잡힌 바 되었던 그 복음에 다시 사로잡히기 위해 마음을 드릴 수 있다면 강릉에서 우리가 맛보았던 복음이 만들어낸 사귐과 복음적인 존재됨을 더욱 풍성히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소망을 품게 된다.복음으로 ‘새로고침’ 된 시간이지훈 목사 인터넷을 하다 보면 여러 가지 이유로 열려는 페이지의 로딩이 멈춰서 뜨지 않고 그대로 멈춰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흔히 그 페이지를 새로 고칩니다. 그러면 로딩되지 않던 페이지가 빠르게 재로딩됩니다. 우리의 믿음도 여러 가지 이유로 마치 멈춰버린 페이지처럼 그 영향력과 그 능력의 작동이 멈춰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인터넷 페이지를 ‘새로고침’하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을 새로 고쳐야 합니다. 다시금 새로워져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새로고침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 믿음의 페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새로워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저 이전의 은혜만을 그리워하며 그때의 추억만을 곱씹으며 사는 이가 아닙니다. 우리의 입에서 그저 하나님께서 이전에 내게 행하신 구원의 옛 노래만이 흘러나오고 있다면 우리의 신앙은 멈춰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께서 내게 부어주시는 은혜를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는 은혜를 추억하는 자들이 아니라 오늘도 부어주시는 은혜를 경험하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입에서는 날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구원의 새 노래가 흘러나와야 합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은혜는 필요하지 않습 니다. 날마다 ‘새로운’ 은혜가 필요합니다. 2023년 복음과도시 목회자 콘퍼런스가 저에게는 개인적으로 마치 복음으로 새로 고쳐지는 것과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모든 강의가 다시금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해주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복음을 붙들고 각자 사명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고 계시는 목사님들과 교제하는 시간은 교회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저 열심히만 하고 있던 저에게 다시금 복음적 목회의 방향성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런 귀한 콘퍼런스를 제게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하나님의 손과 발로 준비하시고 실행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콘퍼런스를 끝내고 대구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아내와 다음 모임이 벌써부터 기대된다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 기대대로 조금 덜 어색하고 익숙하게 다시 만나 기쁨으로 인사드리는 날을 소망해 봅니다.
하나님의 뜻 분별하기
세 가지 전통적 유형과 현대적 적용
by 김경호
2023-06-23
기독교 세계관 운동 2.0 위하여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SIEW)과 함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섭니다. 분별의 원리 제임스 패커(James I. Packer)는 하나님의 인도와 음성 듣기에 대한 분별을 이렇게 말한다. “영적 건강 상태와 하나님의 인도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즉, 영적 건강은 인도의 전제조건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마음의 영적 건강(health), 습관(habits), 그리고 욕구(heart)가 전제될 경우, 분별(holiness)이 가능하다. 또한 달라스 윌라드(Dallas A. Willard)도 동일한 의미를 강조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아간다는 틀 안에서만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게리 프리슨(Garry Friesen)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설명한다. “하나님은 삶의 기본적인 원칙(하나님의 윤리적인 뜻)을 알려주셔서, 더 많은 자유와 책임을 허락하시는 방식으로 인도하신다.” 그렇다면, 이들 세 영성 학자들은 이런 공통점과 함께 어떤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가? 분별의 요소제임스 패커의 세 가지 분별의 요소. 학자마다 분별의 요소들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패커는 하나님의 인도를 세 가지로 본다. 그것은 성경, 지혜, 조언이다. (1) 먼저,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 책(성경), 율법, 마음으로 인도함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은 ‘명령’을 통해 당신의 ‘약속’을 믿는 모든 사람을 인도하신다. 또한 하나님은 원리상, ‘책(성경)’이라는 규범을 통해 인도하신다. 이 규범적 형식은 구체적으로 ‘율법’을 통해 표현된다. 율법의 근본은 십계명이고, 율법의 내적 원리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다. 율법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다. 복잡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마음(생각)은 악을 최소화하고 선을 최대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다. (2) ‘지혜’는 “참된 원리를 삶에 적용함으로써 올바른 삶을 추구하는 능력을 가리킨다.” 우리는 이러한 지혜를 구하고, 상황을 분석하고,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3) 마지막으로, 우리는 ‘조언’을 구하고, 심사숙고하여, 그것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달라스 윌라드의 세 가지 분별의 요소. 윌라드는 말씀, 성령의 감화(내부), 환경을 강조한다. “세 가지란 환경, 성령의 감화, 성경 말씀을 말한다. 이 세 가지가 동일한 방향을 가리킨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이라고 믿어도 좋다.” 이 세 가지 요소는 분리되어서는 안 되고, 상호 의존 관계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세 가지 요소가 합치되는지 합치되지 않는지에 대한 ‘추측’이 아니라, 그 음성에 경험적으로 ‘친숙’해서 알아듣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경험해야 할 음성은 음질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특정한 생각’이나 ‘지각의 형태’이며, 그 음성에는 특정한 ‘정신’(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 배어 있고, 그 음성을 특징짓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 그 내용이란 성경에 부합한 것이며, 원리적인 것이다. 그러나 더 큰 맥락에서 그 음성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아간다는 틀 안에서만 의미를 지닐 수 있다. 하나님의 음성 듣기는 ‘순종’이라기보다 ‘사랑’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음성 듣기의 역설이 존재한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 달라고 간청한다 해도, 그 말씀이 어떻게 들려올지 잘 모르고 거기에 반응하는 능력이 부족해서 정작 말씀이 들려와도 오히려 혼란만 가중될 수 있다.” 이 역설은 두 가지의 비참한 결과로 나타난다. 첫째, 자신의 기분이나 우연한 기회, 또는 절박한 필요를 하나님의 뜻으로 둔갑시켜 엄청난 실패를 경험한 후, 종교적 일상은 유지하지만, 실생활에서 철저히 내 힘으로 살아가는 경우다. 둘째,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는 종교적 독재자에게 끌려다니며 광기로 치닫는 경우다. 따라서 윌라드는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체험’의 방식이 아니라 인격적 차원의 ‘대화’의 방식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강조한다.게리 프리슨의 세 가지 분별의 요소. 프리슨은 하나님의 인도를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 하나님의 윤리적인 뜻, 하나님의 개별적인 뜻으로 보는 ‘전통적 견해’에 반대하고, 하나님의 개별적인 뜻을 제외한 두 가지 요소를 주장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신자에게 당신의 뜻을 세세하게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삶의 기본적인 원칙(하나님의 윤리적인 뜻)을 알려주셔서, 더 많은 자유와 책임을 허락하시는 방식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윤리적인 뜻에는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전제로 한다. 즉 성경의 원리를 어기지 않는 한, 결정은 ‘자유의 영역’에 속한다. 따라서, 윤리적인 뜻을 ‘원’으로, 개별적인 뜻을 ‘원의 중심’으로 보는 견해는 잘못된 것이며, 하나님의 윤리적인 뜻인 ‘원’ 안에 모든 결정을 ‘자유의 영역’으로 보아야 한다. 실제로 이는, 성경에서 사도들의 의사 결정의 원리와도 일치한다. 사도들과 바울의 의사 결정은 “좋게 여겨”(선교지, 살전 3:4-5), “필요한 줄로 생각”(에바브로디도를 보내는 일, 빌 2:25-26), “합당하면”(헌금 모금, 고전 16:3-4), “마땅치 아니하니”(과부 돌보는 문제, 행 6:2-4), “가한 줄 알았노니”(할례 문제, 행 15:28-29)와 같이 표현된다. 프리슨은 이러한 윤리 안의 자유의 영역을 ‘지혜’로 표현한다. 즉 보다 더 좋은 것을 택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프리슨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성경적 모델을 사실상 “개별적이 뜻”을 제외한 세 가지로 제안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 하나님의 도덕적인 뜻, 그리고 자유의 영역(지혜)이다. 종합세 학자가 제시한 이러한 세 가지 요소는 기본적으로 비슷하지만 구체적으로는 차이가 있다. 학자들은 각각 세 가지 요소로 성경-지혜-조언(패커), 말씀-성령의 감화-환경(윌라드),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윤리적인 뜻-자유의 영역(프리슨)을 제시했다. 여기서 나는 이 세 가지 요소를 ‘초자연적인 요소’와 ‘자연적인 요소’로 구분하고, 자연적인 요소는 다시 객관적 원리와 주관적 원리로 구분하고자 한다. 구체적으로 초자연적인 요소에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자연적인 요소에서 객관적인 원리에는 “성경(원리), 윤리(규범), 지혜(자유), 환경(섭리)”을, 주관적인 원리에는 “내적 감화”를 제안하고자 한다. 주요 원리가 아닌 “나머지 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패커의 경우, 점술 행위로 분류하는 ‘징조와 표적’과 감정적 충동으로 분류하는 갑작스럽고 지속적인 ‘감정’ ‘최선과 차선’ ‘조언’ ‘소르테스 비블리카’(우연히 발견한 구절), ‘직접적인 음성, 환상, 또는 성령의 감동’이다. 윌라드의 경우, 다른 사람들, 기이한 현상과 음성, 초자연적인 사자(천사), 꿈과 환상 등이다. 프리슨의 경우, 상담, 상식, 초자연적인 인도(음성, 천사, 환상, 입신, 꿈, 예언, 이적 등), 여기서, 최선과 차선, 조언, 다른 사람들, 상담, 상식은 ‘지혜’로 분류할 수 있다. 지속적인 감정은 ‘내적 감화’로 분류할 수 있고, 징조와 표적, 직접적인 음성, 환상, 성령의 감동, 기이한 현상과 음성, 초자연적인 사자(천사), 꿈과 환상, 초자연적인 인도(음성, 천사, 환상, 입신, 꿈, 예언, 이적 등)은 ‘초자연적인 요소’로 분류할 수 있다.적용빌 하이벨스(Bill Hybels)는 고전적 영성 훈련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바꾸어 적용한다. 그의 책 너무 바빠서 기도합니다의 제목이 암시한 바와 같이, 현대의 리듬은 기도할 시간도 없이 너무 바쁘다 보니 경건의 시간을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가 더 이상 삶의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없다. 따라서 하이벨스는 처방책을 제시한다. 첫째, 하이벨스는 삶의 속도를 줄이기 위해 일기쓰기를 제안한다. 기도를 글로 쓰는 것이다. 글로 쓰는 기도의 효과는 확실히 삶의 속도를 줄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만큼, 고요해진다. 둘째, 이제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 듣기가 가능한 조건이 이루어진다. 능력은 침묵의 시간을 통해서 온다. 이제 나는 잠잠해지고,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이제 들을 준비가 되었다면, 먼저, ‘오늘’ 하루를 살펴본다. 하루 동안 나에게 일어난 일들, 갑작스러운 사건들, 누군가의 말이 계속 떠오르는 경험을 생각해 본다. 나만의 공간에서 조용히 앉아 주님께 말한다. “주님, 이제 당신의 성령님을 통해 제게 말씀해 주소서. 제가 당신을 초대합니다.” 그리고 오늘 하루를 되돌아보며 하나님이 말씀하실 것이 있으면 지금 이 시간에, 제게 말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이벨스는 오늘 하루 그가 경험한 ‘듣기’를 소개한다. 피곤한 하루를 보내고 빨리 집으로 가서 쉬기를 기대하며 걸어갔다. 그러나 주차장 쪽으로 걸어가는 누군가를 보게 되었다. 1초도 안 되는 순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감’을 받았다. 그러나 하이벨스의 반응은 “왜요?” “왜 하필 접니까?” 하고, 그냥 집에 가고 싶은 생각이 더 컸다. 하이벨스는 그 인도하심에 순종할 수 없는 이유를 계속 합리화하면서 차를 몰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님이 계속 강권하셨다. 결국 차를 돌려 그 여성 옆에 차를 세우고 물었다. “혹시 제가 도와 드릴 일이 있나요?” 그 여성은 교회 사역 게시판을 보고 행정 업무를 지원하고자 찾아온 것이다. 결국 사역진에 합류했고, 거의 10년 동안, 하이벨스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신실한 사역자로 섬겼다. 오늘(Today)! 그리고 듣기(Listen!)는 주관적인 인도하심의 경험으로 표현하는 좋은 도구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인도하심의 경험에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첫째, 하나님에게서 오는 인도하심은 모두 그분의 말씀인 성경과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둘째,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대체로 하나님이 만드신 그 사람의 됨됨이와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셋째,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대체로 종 됨과 관련이 있다. 인도하심이 돈과 명예와 관련된 것이라면 아주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겸손, 섬김, 격려의 손길이라면 그 인도는 성령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대체로 감지할 수 있다. 이러한 주관적, 객관적 인도하심에 대한 표준적인 예는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의 경우일 것이다. 월버포스는 회심 이후 정치에 소명을 두고 노예제도를 폐지하고자 평생을 두고 노력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유혹은 있었다. Today! 자신이 내각의 각료로 지명될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에 흔들린 것이다. 그의 야망은 솟구쳤다. Listen! 그러나 그가 주일 예배를 드리는 그 순간 다시 내면의 질서를 찾기 시작했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오늘처럼 휴식하면서 종교 생활에 전념할 수 있는 날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나이다. 이날에 이 땅에 것들은 그 본래의 크기로 되돌아가고, 나의 야망은 수그러들었나이다.” 기억하자. Today! 오늘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을 살피고, Listen!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자.
스펄전은 어떻게 그의 성도들을 얻었는가
메트로폴리탄 태버너클 교회의 다섯 가지 전도 방법
by Geoff Chang
2023-06-22
스펄전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는 열아홉 살에 런던에서도 역사를 자랑하는 손꼽히는 교회의 담임목사로 청빙 받았다. 그리고 사역 기간 내내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부흥을 체험했다. 38년에 걸친 사역 동안 스펄전은 정기적으로 수많은 회중에게 설교했다. 그가 사망할 당시 메트로폴리탄 태버내클 교회의 교인은 5,300명이 넘었다.그러나 아무리 스펄전의 은사가 뛰어났다고 해도, 수천 명 교인이 다 오로지 그의 복음 설교 때문에 회심했다고 생각하는 건 오산이다. 스펄전은 회심의 영예를 교인들에게 돌렸다. 스펄전은 어느 스코틀랜드 목사들 모임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교인들을 이렇게 많이 모았냐고 누가 내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내가 한 거 아닙니다. 교인 모으는 건 내 할 일이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이에요. 나는 오로지 복음을 선포할 뿐입니다. 글쎄요. 교인이 늘어난 건 교인들이 스스로 데리고 왔기 때문입니다. 태버내클 간증집은 스펄전의 말을 확증한다. 이 교회 장로들은 평신도들이 주변의 불신자를 믿음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어떻게 활동했는지를 보여주는 수천 건의 회심 간증을 기록했다. 이 간증집을 통해서 우리는 이 교회가 교인들을 모은 최소한 다섯 가지 방법을 확인할 수 있다. 1. 개인 전도스펄전은 전도가 목사만의 사명이 아님을 꾸준히 일깨워주었다. 남자, 여자, 어린이를 가리지 않고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님께서 주신 삶의 현장에서 복음을 선포하도록 부름 받았다고 강조했다. 메트로폴리탄 태버내클의 간증은 복음을 나눈 평신도의 신실함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예를 들어, 엘렌 메이의 간증에는 다음과 같이 장로의 기록이 있다. 엘렌은 삼 년 전까지 하녀로 일을 할 때, 성공회 소속 교회의 주일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교회를 다녔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 본성은 어둠 속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9개월 후 우리 교회의 자매인 엘리자베스 패로우가 그 집에 하녀로 들어갔고,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영광과 친구 영혼의 유익을 위해 무언가를 시도하는 데에 엘리자베스는 그리 오랜 시간을 지체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도구가 된 엘리자베스는 어린 엘렌으로 하여금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감각을 일깨우는 도구가 되었다. 벤저민 프로드와 관련한 기록이다. 젊은 벤자민은 버먼드지에서 모자를 만드는 크리스티 부인과 그 동료들과 함께 살았다. 우리 교회 교인인 옥스포드와 테일러는 같은 직장 동료였다. 벤저민을 향한 이 두 사람의 가르침과 경고에 성령님이 기름 부으셨고, 벤저민은 깊은 감명을 받았다. 벤저민은 결국 길을 잃은 죄인이라는 자신의 상태를 깨달았다. 패로우, 옥스포드 및 테일러가 신학생 또는 장로가 아니었다는 사실 때문에라도 이 기록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그들은 단지 신실한 교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복음으로 양육 받았고 “그리스도의 영광과 영혼의 유익”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주위 사람들에게 언제라도 그리스도를 전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또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꼈다. 2. 교회의 초대스펄전의 교회에서 일어난 많은 교인의 회심 이야기는 교회의 초청에서 비롯한다. 예를 들어, 알렉산더 존 해밀턴의 간증은 그의 형이 그를 태버내클에 데려오면서 시작한다. “그의 형(이후로도 등록 교인이었다가 지금은 뉴질랜드에 있다)이 약 삼 년 전 어느 일요일 저녁에 그를 뉴파크 스트리트로 데려왔고, 그곳에서 그는 설교를 통해서 영혼의 평화를 찾았다.” 누군가를 데리고 온다는 게 항상 쉬울 수는 없다. 교회에 데리고 오기 위해서는 여러 번의 초청이 필요했다는 이야기가 많다. 제임스 보이스의 경우, 스펄전의 설교를 듣게 하려는 누이의 초청을 여러 번 거절했다고 말했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밤, 술집에 가는 길에 마침 교회를 지나게 되었다. 들어갈까 잠깐 생각했지만, 얼마든지 자신의 힘으로 인생을 개선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는 그냥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다음 수요일까지 내내 그는 술에 취한 채 또 술집을 찾았고, 마침내 자신의 힘으로 개과천선하는 데에 완전히 실패했다고 인정하게 되었다. 그런 자각을 통해서 그는 교회 출석을 시작했고, 마침내 복음을 들으며 구원의 과정에 들어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찰스 샌델 이야기이다. 직장 동료 중 한 명이 스펄전의 설교에 그를 초대했다. 샌델은 놀랍게도 그 설교에서 즐거움을 찾았다. 그 후 약 12개월 동안 꾸준히 예배에 참석했지만, 그는 여전히 그 어떤 지속적인 변화를 경험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로의 기록이다. 그는 설교를 듣고 자주 눈물까지 흘렸지만, 삶에서는 그 어떤 유익을 누리지 못한 채 계속해서 예배에만 참석했다. 그러던 중 스펄전이 집회를 인도하러 미국으로 갔고, 초청 설교자 래드클리프의 설교를 들었다. … 래드클리프는 샌델이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는 데에 쓰임을 받았다. … 예배 후에 그는 장로 한 사람과 대화를 나눴다. … 그리고 마침내 샌델은 영혼을 예수님께 맡길 수 있게 되었다.샌델은 무려 일 년 동안 스펄전의 설교를 들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외부 설교자와 장로를 통해서 그로 하여금 죄인임을 깨닫게 하셨다. 설혹 스펄전이 이 이야기를 들었다 하더라도 그는 하나님을 찬양했을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3. 주일 대화매 주일 메트로폴리탄 태버내클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은 방문객을 비롯해서 각양각색이었다. 처음 온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며 접근하는 것은 결코 목사와 장로의 몫으로 한정되지 않았다. 모든 교인이 방문객을 환영하고 의미 있는 대화를 시작하는 법을 배웠다. 스펄전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항상 교인들에게 앉은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고 요청합니다. 예배에 참석한 사람을 붙잡아 그리스도를 전해야만 합니다. 나는 종종 이 문제 때문에 짜증을 내는 교인이 있다는 것도 압니다. 직장 동료들 사이에서야 약간의 딱딱함도 있겠지만, 교회에서는 서로를 향한 따뜻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오늘 설교, 어땠어요?” 정도의 대화는 시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새로 온 사람을 잠시나마 곁에 둘 수 있으니까요. 교회에 등록한 사람들이 남긴 많은 간증이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했다. 예를 들어, 윌리암 카트라이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카트라이트는 지난 4월부터 예배에 참석했고, 그 후로 예닐곱 번 설교를 들었지만, 그는 별다른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스팬스윅 형제가 다가와서 영혼의 구원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냐고 물었다. 그는 없다고 대답했고, 스팬스윅 형제에게서 주님을 찾으라는 강력한 권고를 받았다. 그는 그렇게 했고 곧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를 정죄하시는 것은 공의에 의해서 당연하지만, 그에게는 유일한 탄원인 예수님의 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카트라이트는 많은 설교를 들었다. 그러나 누군가 그에게 다가와 개인 구원의 문제를 정확하게 지적하기 전까지는 그에게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4. 등록 인터뷰스펄전의 사역 기간 내내 복음에 응답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가장 분명한 방법은 세례와 교회 등록이었다. 복음에 반응하는 모든 방문자는 등록 과정을 거쳤다. 그리고 교인 면접은 장로들의 전도사역이 되었다.스펄전 시대의 상황과 문화를 고려할 때, 교회 등록에는 온갖 동기가 다 존재했다. 장로들은 각각의 신앙고백을 면밀히 검토할 책임을 졌다. 믿을 만한 고백을 하는 사람들은 기꺼이 등록 교인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고백이 부족한 사람들을 위해서 장로들은 복음을 가르칠 시간을 냈다.이것이 바로 제임스 멜번의 등록 인터뷰에 관해서 장로가 쓴 내용이다.이 착한 남자는 아내가 교인 등록을 신청했기에 같이 등록하기를 원했다. 그는 스펄전의 설교를 자주 들었고, 그가 여태 들었던 그 어떤 설교보다 좋아했다. 그러나 나는 그가 복음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술에 취하지 않고, 정직하고, 근면한 사람이다. 또한 기꺼이 교회에 등록하려는 마음은 진심일 뿐 아니라, 평판 좋고 존경할 만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의향이 있는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때때로 성경도 읽지만, 그냥 막연하게 성경은 좋은 책 정도로만 생각하지, 특별히 선호하는 것은 없다. 그는 삶에서 특별히 하나님께 어떤 문제를 놓고 기도했던 기억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어떻게 주일마다 교회에 앉아 멀쩡한 얼굴로 우리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도 여전히 복음에 무지한 자신에 관해서 철저하게 무지한,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는지 나는 놀라울 뿐이다. 나는 그에게 거듭남에 대해 이야기했고, 행크 형제가 인도하는 성경공부에 들어가도록 조치했다. 여러 면에서 멜번은 이상적인 등록 교인 후보로 보인다. 그는 교회에 왔다. 아내가 함께하고 있고, 또 설교를 좋아했다. 술에 취하지도 않고 모든 일에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는 복음을 이해하지 못했고 영적인 삶의 증거를 전혀 제시하지도 못했다. 그런 그를 등록 교인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로 하여금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착각하게 한다면 그에게 심각한 영적 해를 끼칠 수 있다. 그래서 장로는 멜번이 성경을 더 공부하고 복음을 배울 수 있도록, 그를 “행크 형제의 반”으로 보냈다. 매우 현명한 결정이었다. 등록 거절에 관한 간증도 있다. 거절의 경험을 사용하여 주님께서 교만과 죄를 깨닫게 하셨다는 이야기가 많다. 한번은 해리어트 올니가 등록을 신청했다. 그러나 그녀를 접견한 장로는 “간증이 만족스럽지 않아 등록을 추천할 수 없었다.” 이 년 후, 그녀는 다시 등록을 신청했고 거기에 관해서 장로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등록을 거절당하고 (처음에는) 크게 실망했지만, 그 이후로 그녀는 자신의 죄를 더 완전히 확신하게 되었다. 그녀는 첫 등록 거절이 자신에게 최선의 길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녀를 두 번 만났다. 비록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지식이 광범위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안다. 예수님이 죄인을 위해서, 즉 자신을 위해 죽으셨다고 믿는다.한 가지 확실히 말하자면, 장로들이 인터뷰에서 높은 수준의 신학 지식이나 유창함을 요구한 게 아니었다. 우리는 올니의 간증에서 그 사실을 본다. 오히려 그들이 찾는 것은 복음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회개와 믿음의 증거를 통한 신앙고백이었다. 등록 과정에서 많은 초신자가 처음으로 복음을 이해하고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5. 새신자 반교회의 공동 예배 외에도 태버내클에는 다양한 클래스가 있었고, 그중 상당수가 구도자를 대상으로 했다. 젊은이들을 위한 교리반, 남성을 위한 성경반, 여성을 위한 성경반, 어린이 주일 학교 등이 있었다. 학급마다 배정된 명단을 가진 교사가 있었다. 교사는 수업에 대한 책임감을 느꼈고, 반원들은 서로에 대한 책임감을 느꼈다. 회심의 시작을 다양한 클래스에서 찾는 간증이 적지 않다. 엘리자베스 폴리는 교회에서 자랐다. 그녀의 간증에 따르면 그녀가 회심한 곳은 주일학교였다. 그녀를 접견한 장로는 “안식일 학교 교사들을 격려하기 위해서라도, 그레이브스 자매의 가르침이 이 어린 자매에게 얼마나 큰 축복이 되었는지 언급하고 싶다”라고 썼다.교회에서 자란 해리어트 피트가 등록 신청을 했을 때, 장로는 “그녀가 죄인을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해서 명확한 견해를 갖고 있지 않다”고 보았다. 장로는 그녀를 청소년 교리반에 보냈다. 얼마간의 공부를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접견했고, 장로의 칭찬을 받았다. 에밀리 빙글리는 성경공부 시간 중에 “에밀리, 당신은 언제가 되어야 마음을 온전히 주님께 드릴 것입니까?”라는 선생의 질문을 받았다. 그 질문은 빙글리로 하여금 자신의 상태를 자각하게 했고, 그녀를 구원의 길로 인도했다.스펄전은 모든 설교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전도 성경공부도 개인적으로 구도자가 복음을 깨닫도록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평신도의 전도 능력스펄전은 어떻게 그의 교회를 얻을 수 있었을까? 그는 결코 단지 설교 하나만 믿고 세상을 향해 소리친 고독한 레인저가 아니었다. 메트로폴리탄 태버내클의 성장과 부흥은 오히려 평신도의 전도 노력으로 가능했다. 이것이 바로 목회자들이 “성도들을 준비시켜서 봉사의 일을 하게”(엡 4:12) 하라는 에베소서 4장의 비전이다. 스펄전에게 그 많은 교인을 가져다준 장본인은 다름 아닌 평신도들이었다. 이 사실은 목회자에게 큰 격려가 된다. 전도의 과업이 전적으로 우리의 노력에 달린 게 아니다. 대신 평신도가 개인 전도에 참여할 수 있도록 준비시킬 때, 복음은 모든 종류의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세상으로 퍼진다. 평범함 속에서 신실함을 지키는 교인들을 보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서 비범한 일을 행하시도록 간절히 기도하자. 원제: How Spurgeon Got His Congregatio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스펄전
전도
평신도전도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 (5): 그리스도 중심 설교
by 고상섭
2023-06-21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팀 켈러가 그토록 사랑했던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이제 눈물이 없는 곳에서 기뻐할 팀 켈러를 생각하면 위로가 되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에겐 그가 떠난 빈자리가 너무나 크게 느껴진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인 존재로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발자취를 남겼다. 그와 그의 삶이 우리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 몇 가지를 되돌아보며 그를 기억하고자 한다. 팀 켈러가 남긴 많은 유산이 있지만, 설교자로서의 팀 켈러 역시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특히 그는 에드먼드 클라우니에게서 배운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종합하고 체계화했다. 팀 켈러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다양한 설교 방식 중의 하나가 아니라 성경을 설교하는 유일한 방식이라 말한다. 모든 선지자, 제사장, 왕은 궁극적인 선지자, 제사장, 왕을 향해 빛을 비추고 있는데 성경을 남김없이 온전히 전한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성경 메시지의 중심 주제와 본질로 설교하는 것이다.[1]엠마오 마을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도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마음이 그렇게도 무디니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마땅히 이런 고난을 겪고서,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예수께서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에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서 자기에 관하여 써 놓은 일을 그들에게 설명하여 주셨다. (누가복음 24:25-27)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서와 선지서로 통칭되는 구약성경을 통해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며, 모든 구약 성경은 ‘자기에 관한 것’ 즉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이라고 설명하신다.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모든 성경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말씀하신다. 너희가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 그 안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나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다. (요한복음 5:39)거듭남에 대해 질문하는 구약에 능통했던 니고데모에게도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이런 것도 알지 못하느냐?”(요 3:10)라고 하시면서 구약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구원에 대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민수기 21장에 나오는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들었던 사건을 통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구원에 관해 설명하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복음 3:14-16)유명한 요한복음 3:16도 구약에 나오는 놋뱀 사건을 선명하게 재진술하신 것이다. 이렇듯 성경은 단순한 아브라함, 다윗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리스도로 귀결되는 이야기이다.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것은 성경이 기록된 의도대로,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님의 의도대로 설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학자 트램프 롱맨은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영화 ‘식스센스’를 보는 것 같다고 말한다. 브루스 윌리스가 주연한 1999년 나이트 사먈란 감독의 이 영화는 결말이 특이한데, 영화를 보는 내내 결말을 보기 전까지 주인공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다가 주인공이 죽은 귀신이었다는 것으로 반전이 일어나면서 영화 전체가 다시 이해되기 시작한다. 어렸을 때 ‘비밀의 커튼’이라는 TV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주인공이 커튼 뒤에 숨어 있고 그림자만 보면서 질문을 통해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맞추는 퀴즈 프로그램이었다. 마치 구약은 커튼 속에 비친 예수님의 그림자이고, 신약은 그 그림자가 예수님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같다. ‘식스 센스’를 보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라는 주제를 대입해서 구약성경을 읽으면 모두 그림자 뒤에 감추어진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게 된다. 모든 이야기의 맥락이 모든 주제의 모든 절정이 그리스도께서 수렴된다는 걸 안다면, 당신은 모든 성경 본문이 궁극적으로 예수님에 관한 것임을 보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당신은 무조건 그리스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지금 보고 있는 본문이 딱히 메시아 예언이나, 그리스도를 전조하는 주요 인물 혹은 통정경적인 주제, 핵심적인 성경 이미지나 비유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이제 당신은 그분을 볼 수밖에 없다.[2]에드먼드 클라우니는 성경을 그리스도의 빛으로 비추어서 설교하지 않는다면 교회 목회자의 설교와 유대 랍비의 설교가 차이점이 없을 것이라 말한다.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를 향해 있고, 그리스도 중심으로 설교한다는 것은 성경이 단순한 인간 저자의 글이 아니라 그들이 쓰는 본문에서 더욱 충만한 의미를 밝히는 참 저자이신 성령님의 의도를 따라서 본문을 해석하는 것이며, 따라서 설교자는 본문의 의미를 단순히 역사적 정황 속에서만 이해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체 구속사의 관점에서 이해해서 전하는 것이다.[3]어떤 본문을 설교하든 그것의 주제가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성취됨을 보여주지 않는 한, 우리는 그 본문을 제대로 설교할 수 없다.문화를 향한 설교팀 켈러는 자신의 설교를 이야기할 때 단순히 ‘그리스도 중심 설교’라고 표현하지 않고 ‘문화를 향한 설교’와 ‘마음을 향한 설교’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왜 그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두 단계로 나누어서 설명하는 것일까? 단순히 성경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만이 그리스도 중심 설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전에 인간의 한계 상황을 직면하게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복음이란 인간이 할 수 없다는 절망의 사건을 선포하는 것이고, 또한 그 일을 그리스도께서 대신 하셨음을 믿는 것이다. 그리스도 중심 설교에서 인간의 타락과 한계를 드러내지 못한다면 죄 사함이 없는 복음이 될 위험성이 존재한다. (그리스도 중심 설교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 마음을 향한 설교와 문화를 향한 설교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문화 내러티브가 각 개인의 정체성과 양심, 실재를 이해하는 것에 깊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설교에서 문화 참여(Cultural engagement: 설교 안에 각 문화의 특성을 드러내고 평가하고 도전하는 것)은 타당하게 보이기 위한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청중의 삶의 근본을 발가벗기기 위함이어야 한다.[4]결국 그리스도를 설교하기 전에 ‘문화를 향한 설교’를 통해서 청중의 삶 속에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우상들을 제거하는 복음의 장애물을 치워주는 과정이 필요하고, 이 과정을 통과할 때 청중은 회개를 통한 믿음으로 성화의 과정에 이를 수 있게 된다. 팀 켈러가 말하는 ‘문화를 향한 설교’는 브라이언 채플이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에서 강조하는 ‘인간의 타락한 상황을 드러내기’(Fallen Condition Focus, FCF)에 해당한다. 브라이언 채플은 성경을 주신 목적이 우리를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디모데후서 3:16을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를 온전하게 하기 위해 성경을 주셨다면 인간의 타락을 전제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우리가 완전하지 못한 것은 타락의 결과이다. 이런 타락의 양상이 자신의 죄악과 세상의 파괴를 통해서 나타나며, 이것 때문에 성경의 교훈과 내용이 필요하다. … 이 세상과 우리가 모두 타락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 이렇게 성경이 우리의 타락한 상황에 초점(FCF)을 맞추고 있다... FCF는 성경이 쓰인 그 시대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상황이 아니다. 모든 인간이 처해 있는 공동의 상황이다. … FCF는 설교의 진정한 주제를 결정해 준다. 왜냐하면 그 구절이 쓰인 진정한 목적이 바로 FCF이기 때문이다.”[5]팀 켈러는 ‘인간의 타락한 상황에 초점’을 맞추는 FCF를 왜 ‘문화를 향한 설교’라고 표현하는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우상숭배의 죄를 짓는 이유가 문화 내러티브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팀 켈러는 오늘날의 문화는 “자아 바깥에 있는 모든 권위를 전복”시키는 문화이며, 이것은 17세기에서 19세기를 거치면서 형성되었다고 말한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진리에 도달하려면 모든 전통과 종교적 신념을 내려놓고 오직 이성만을 사용해야 한다고 배웠다. 이것은 유례없는 개인주의로의 전향이었고, 개인주의는 각 사람은 자기 안에 고대의 지혜나 신적 계시의 도움이 없어도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을 이미 갖추고 있다는 사상이라 설명한다.이런 포스트 모던 시대의 특징은 자율성이며, 이 자율성의 확대 때문에 많은 사람이 종교적인 믿음을 미칠 정도로 지긋지긋하게 생각하는 이유다. 이러한 후기-현대 정신을 향해 우리는 어떻게 설교해야 할까? 문화를 향한 설교의 열쇠는, 앞서 말했듯이 그 문화의 저변에 흐르는 내러티브를 규명하는 것이다. … 문화는 보이지 않지만 지금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6] 마음을 향한 설교 팀 켈러는 문화를 향한 설교를 통해 문화 안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생각들을 드러내서 문화를 평가하고 도전한다. 그렇게 복음의 장애물을 제거한 후에 사람의 마음을 향해 그리스도를 선포함으로 그리스도를 마음의 주인으로 모시도록 초대한다. 그리스도 중심 설교가 사람의 ‘마음’을 향해야 하는 이유는 마음의 변화를 통해서만 사람이 변화되기 때문이다. 팀 켈러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감정론을 통해 인간의 마음 안에는 감정(emotion)과 정감(affection)이 있다고 말한다. 수련회 때 눈물 콧물 다 쏟아도 사람이 변화되지 않는 이유는, 그의 ‘정감’의 변화가 아닌 단순한 감정적 행위만 변했기 때문이다. 참된 변화는 인간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정감’이 변화되어야 하는데, ‘정감’의 변화는 오직 “어떤 대상의 아름다움과 탁월함을 감지할 때 전인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성향이다.” 마음의 중심인 정감이 그 대상을 향해 사랑으로 끌릴 때 그 방향으로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 단순한 감정의 변화는 다양한 물리적, 심리적 자극으로 일어날 수 있지만, 실제 행동에는 아무런 변화를 일으키지 않거나 극히 미미한 변화만을 일으킨 채 덧없이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7]결국 팀 켈러가 말하는 ‘문화를 향한 설교’와 ‘마음을 향한 설교’는 각 문화의 우상이었던 잘못된 문화 내러티브를 드러내어 도전하고 복음으로 초대해서 그리스도가 아닌 주인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마음의 주인으로 삼는 과정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던 ‘사랑의 순서’를 다시 회복시켜 주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복음 설교자들은, 문화 이야기가 복음과 충돌하는 지점에서 도전하고, 궁극적으로 문화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다시 들려줌으로써 선(good)을 향한 그들의 가장 깊은 열망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채워질 수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 그들의 문화적 열망을 매개로 사람들을 초대하고 사로잡음으로써, 마침내 그들이 진정한 지혜와 의로움, 또한 참된 능력과 아름다움이신 그리스도께 오도록 초청해야 한다.[8]성경적 원리를 통해 예수의 아름다움을 가리킬 수 없다면, 다시 말해 그 본문의 특정한 진리가 오직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믿음으로만 실현될 수 있음을 보여주지 않는 한 진정한 의미에서 마음의 정감을 제대로 건드리고 변화시킬 수 없다.”[9]그리스도 중심 적용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에 대해 많은 관심이 일어난 것은 고무적인 일이지만, 정작 실제 설교에서 적용하려고 하면 여러 부분에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 특히, 설교의 적용 부분에서 천편일률적으로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으로 끝나는 경우도 많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에 급급해서 제대로 된 적용을 선포하지 못할 때도 있다. 팀 켈러는 에드먼드 클라우니를 추모하는 책, 모든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에서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배우면서 어려웠던 점과 그것을 극복했던 소감을 나누었다.클라우니 박사님이 가르치신 대부분의 학생들이 직접 경험하는 것처럼,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실천하는 일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 9년 동안 구약 성경을 설교하면서 저는 본문에 충실한 동시에 현실과 관련된 방식으로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하기’라는 어려운 문제와 씨름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특정 본문의 주제를 어떻게 성취하셨는지를 이해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적용하는 것은 또 다시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해석학적 측면에서는 건전하고 고무적으로 하지만 그 본문이 성도들의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방식에 어떤 차이를 만들어 내도록 구상된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상태로 남겨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이런 문제들을 다루는 데 많은 노력을 쏟았고, 그런 문제들에 답하는 저만의 방법을 찾았습니다.[10]팀 켈러의 그리스도 중심 설교는 ‘적용’이라는 부분에서 여타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이야기하는 사람들과 차별성을 가진다. 위 도표는 2006년 4월 고든코넬 신학대학원의 ‘Preaching to the Heart’ 세미나에서 강의한 내용인데, 팀 켈러는 오늘날 시행되고 있는 설교를 일곱 가지 타입으로 나누었다. 1. A-B : 정보 전달식 설교(성경 텍스트–저자의 메시지)2. A-C : 알레고리 설교(성경 텍스트–그리스도의 성취): 성경 주해가 없다.3. A-D : 교훈적 설교(성경 텍스트-적용)4. A-B-D : 조직 신학적 주해 설교(청교도 설교) (성경 텍스트-저자 메시지-적용)5. A-B-C : 구속사적 설교(성경 텍스트-저자 메시지-그리스도의 성취)6. A-B-C-D: 구속사적 적용 설교(성경 텍스트-저자 메시지-그리스도의 성취-적용)7. A-B-D-C : 마음에 닿게 설교하기(Preaching to the Heart)흔히 말하는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는 팀 켈러가 말하는 6번에 해당한다. 그러나 팀 켈러는 A(성경의 텍스트)에서 B(저자의 메시지)를 아는 주해의 과정을 거치고, D(적용)로 나아간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라고 선포하고 나서, 그러나 인간은 그 기준에 따라 살지 못한다는 FCF를 드러낸다. 말씀 앞에서 한없이 나약한 인간의 절망적 상태를 직면하게 해주고 그 대안으로 우리는 할 수 없지만 그 일을 성취하신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그리스도이심을, 즉 C(그리스도의 성취)를 드러낸다. 그리고 팀 켈러의 설교를 분석해보면 A-B-D-C-D의 패턴을 보이기도 한다.성경의 메시지(A)에서 주해의 과정(B)을 거치고,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없는 연약한 인생임(D)을 드러내 주고 단순히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으로 설교를 끝내지 않고, 우리를 위해 성취하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선포함으로써 그 은혜로 우리가 순종할 수 있다고 적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배제한 도덕적 설교와 다르고 그리스도만을 선포하는 구속사적 설교와도 다르다. 인간 마음의 중심에서 자신의 한계를 경험하게 하고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우상을 드러내 줌으로써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고, 사랑의 우선순위를 바꾸어 주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런 방식은 좀 더 풍성하고 자유롭게 적용할 수 있는 통로를 내어 준다. 본문을 그대로 적용하게 되면 윤리적인 적용이 되어 인간의 노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인 것 같은 느낌을 주지만, 인간이 할 수 없다는 FCF를 선언하고 그리스도의 성취와 은혜를 설교한 후에 적용으로 이끌어 가면 본문이 말하는 그대로의 선포를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쿠루빌라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에 대해 비판하는 영역이 바로 적용 부분인데, 팀 켈러는 본인의 방식으로 그것을 해결한 것이다.팀 켈러의 그리스도 중심 설교의 특징은 단순히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가 아니라 칭의를 성화와 연결하는 ‘그리스도 중심 적용 설교’라 할 수 있다. 이 설교가 도덕주의 설교와 다른 이유는 행동을 유발하는 동기에 있다. 인간적인 결단을 통해 “내가 ∼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라는 것은 도덕주의, 율법주의로 흐를 위험이 있지만, 행위의 동기가 칭의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라면, 그것은 은혜의 동기로 순종하는 칭의와 성화가 연결되는 설교가 된다. 칭의와 성화가 분리되면 도덕주의 설교가 되지만, 칭의가 성화와 연결되면 ‘그리스도 중심 적용 설교’가 된다. “복음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복음 즉 칭의를 통해 다양한 삶의 자리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팀 켈러는 센터처치에서 복음이 적용되는 다양한 주제들을 제시한다. 낙망과 우울, 사랑과 인간관계, 성, 가정, 자기관리, 인종과 문화, 전도, 인간의 권위, 죄책감과 자아상, 기쁨과 유머, 다른 계층에 대한 태도 등이다. 이런 주제들이 모두 복음의 동기 즉 칭의와 연결되어 성화해야 하는 구체적인 적용점이다. D. A. 카슨도 바울의 고린도전서를 설교의 적용이라는 관점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고린도전서는 복음이 어떻게 태도나 정신 기강, 인간관계, 그리고 문화적 상호작용들에 광범위한 변혁을 일으키는지를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 바울이 고린도 사람들을 향해 삶의 모든 영역에서 복음이 작동해야 함을 반복해서 강조한 것처럼 오늘날의 우리도 동일하게 그래야 한다. … 복음이 다음의 영역들에서 어떻게 삶을 바꿀 수 있는지 생각하는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다. 복음이 어떻게 사업 관행이나 그리스도인들의 상업상의 우선순위들을 바꿀 수 있는지 등을 생각해야 한다.[11]그리스도 중심의 삶 아마도 가장 탁월한 성경 설교자들의 (성경 모든 부분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탁월성은 본능에서 나온다. 그들의 공식이 무엇인지 물어보면, 멍한 대답을 얻게 될 것이다. 그들이 사용하는 원리들은 무의식 가운데 발전된 것이고, 타고난 능력과 은사, 청중과 설교자로서의 경험을 조합해 터득한 것이다. 성경적 설교는 그들의 모국어가 되었다. 그들은 성경신학의 문법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다. 지금 언어 체계의 어느 부분을 사용하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도 말이다.[12]팀 켈러는 설교에서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잘하는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를 ‘본능’이라고 언급했다. 이 말은 많은 설교자들을 좌절시키는 말이다. 왜냐하면 설교를 잘하는 사람은 타고났다는 뉘앙스를 풍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팀 켈러가 여기서 말하는 ‘본능’은 단순한 타고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의 삶을 말하는 것이다. 복음설교는 복음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들의 삶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리스도 중심 설교는 그리스도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선포되는 것이다. 설교자의 내면이 설교보다 더 중요하다. 또 팀 켈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설교할 때 일어나는 일은 우리가 기도할 때 일어나는 일과 거의 같다. … 우리가 기도할 때 이런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가 설교할 때도 일어나지 않는다.”[13]설교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한다면, 설교 전의 기도시간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절절한 감격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 단순히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해 주세요’라는 기도가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에 목매어 통곡하는 감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설교자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가 경험된다.결국 그리스도 중심 설교란, 단순히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로 가득 차 있는 설교자의 뜨거운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설교다. 그리스도만을 높이고 그리스도만을 사랑하고 싶은 간절한 열망에서 그리스도 중심 설교는 흘러나오게 된다. 팀 켈러는 단순히 그리스도 중심 설교의 이론가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높이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하는 설교자의 마음에는 오직 그리스도를 높이려는 열망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가 얼마나 위대한 분인지, 당신이 생각한 것보다 얼마나 더 경이로운 분인지를 보세요! 당신의 모든 문제가 결국 이 진실을 직시하지 못한 데서 온 것임을 깨닫지 못하겠나요?” 이런 마음을 가지는 것이 설교의 심장이다. 팀 켈러는 이렇게 도전한다. 설교자로서 우리는 마음으로부터 그리스도를 느끼고 있는가? 설교하는 그 순간 우리는 그분을 묵상하고 그분께로 침잠하고 있는가? … 실제 우리 설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란다면, 단지 설교 준비만 하는 게 아니라 매일 기도와 묵상을 통해 정기적으로 그것을 계발하는 수밖에 없다. 요컨대 설교단이 우리를 말씀으로 인도하려는 유혹이 있지만, 정작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말씀이 우리를 설교단으로 인도하게 하는 것이다. 설교를 준비하기보다 설교자로서의 삶을 더욱 힘써 준비하라.[14]주1. 팀 켈러, 팀 켈러의 설교, 29.2. 같은 책, 119.3. 김대혁, 프리칭 텍스트, 텍스트 프리칭, 160. 4. 팀 켈러, 팀 켈러의 설교, 36.5. 브라이언 채플,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 53.6. 같은 책, 165. 7. 같은 책, 216. 8. 같은 책, 35. 9. 같은 책, 37.10. 데시스 존슨 엮음, 모든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 80.11. 팀 켈러, 센터처치, 93.12. 같은 책, 118. 13. 같은 책, 228.14. 같은 책, 273.
그리스도중심설교
팀켈러
처음
이전
열린
26
페이지
27
페이지
28
페이지
29
페이지
30
페이지
다음
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