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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시대를 이기는 기독교 변증
by Gavin Ortlund
2023-06-20
THE KELLER CENTER C. S. 루이스가 쓴 그 가공할 힘에 나오는 마크는 자신의 삶을 “먼지와 부서진 병, 오래된 깡통 더미와 건조하고 숨 막히는 곳”으로 묘사한다. 아내와 함께 마크는 근대성이 의인화된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의 신념은 오늘날 많은 세속인을 대표한다. 하지만 플롯 속 사건을 통해 점차 초월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 마크는 투옥되어 심리적 고문을 받는 동안 심오한 도덕적 경험을 한다. 신맛과 비뚤어짐을 배경으로 달콤함과 옳바름에 대한 어떤 비전이 일어났다. 그가 막연하게 “정상”이라고 부른, 뭔가 다른 것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는 이전에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게 거기에 있었다. 단단하고 육중하며 고유한 모양까지 갖고 있어서 만지거나 먹을 수 있거나 심지어 사랑에 빠질 수도 있을 거 같았다. 그것은 제인과 달걀부침, 비누, 햇빛, Cure Hardy에게 꽥꽥대는 당까마귀, 그리고 그 순간 바깥 어딘가에서 햇빛이 비치고 있다는 생각과 뒤섞였다.내가 쓴 글에서 종종 나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도덕적 논증을 만드는 맥락에서 이 구절을 사용했다. 그러나 보다 더 일반적으로 볼 때, 이것은 현대의 절망이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교리(또는 객관적 선 개념과 같은 하나님에 대한 교리의 한 가지 함축)로 극복될 수 있는지에 대한 놀랍도록 창의적인 문학적 표현이다. 많은 후기 현대인에게 복음을 접하는 것은 “건조하고 숨 막히는 곳”에서 “달걀부침과 비누와 햇빛”으로 전환하는 경험이 될 것이다. 평탄함에서 충만함으로, 환멸에서 새로운 매혹으로, 회색빛 칙칙한 세상에서 생명과 색깔로 가득한 세상으로의 전환처럼 느껴질 것이다. 현대의 절망을 이해하라찬사를 받은 저서 A Secular Age(세속 시대)에서 찰스 테일러는 현대 시대의 환멸과 의미 상실의 문제에 주목했다. 이 현상은 역사적으로 최근에 발생했다. 대부분의 현대인은 이 문제를 직관적으로 이해하지만, 오백 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전근대인도 분명히 절망을 느꼈겠지만, 일반화된 절망감은 후기 근대 서구를 특징짓는 독특한 역사적 발전이다. 테일러에게 그러한 절망은 특히 초월의 쇠퇴와 자아 개념의 변화라는 또 다른 형태의 발전이 가져다준 결과이다. “우리의 행동, 목표, 성취 등등에는 아무래도 무게와 중력 그리고 두께와 실체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주는 절망이다. 현대 절망의 본질을 탐구함으로 우리는 복음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복음의 희망을 가시화할 수 있는 신선하고 흥미로운 방법을 제시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전통적인 초월의 근원에서부터 점차 스스로를 단절시킨 세계에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결과 우리의 경험은 종종 우리가 인식하는 것보다 훨씬 큰 황량함과 환멸감을 특징으로 한다. 자각하지도 못한 채 절망을 경험할 수 있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는 주변 문화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제대로 분별하지 못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항상 접하는 문화를 평범하게 느끼는 건 당연하다. 문화는 멀리서 바라보는 풍경이 아니라 통해서 보는 안경이다. 예를 들어, 대학에 가기 전까지는 자기 가족이 역기능 가족이었음을 조금도 깨닫지 못하던 어떤 십대처럼, 실제로 대안을 경험하기 전까지 우리는 “건조하고 숨 막히는 곳”에서 살고 또 그 안에서 움직였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답이 되는 기독교에서 팀 켈러는 대부분의 현대인이 너무 불행하기에 불행의 본질을 완전히 깨닫는 데에는 몇 년이 걸린다고 지적했다. 대체로 우리는 깊이와 크기 또는 불만을 부정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 가장 신랄하게 이야기하는 예술가와 사상가는 병적인 예외로 간주되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내는 건 예언적 목소리이다. 인생에 대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불만의 크기와 차원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그 사실을 부정하는 심리부터 버려야 하는데, 거기에는 보통 몇 년이 걸린다.절망의 문제는 실존주의 철학이 중점적으로 집착한 것들 가운데 하나이다. 많은 “새로운 무신론자”(예를 들어 샘 해리스)는 보다 활기차고 낙관적인 무신론의 소유자이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면서도 인간은 얼마든지 연민과 인권 같은 객관적인 도덕성과 가치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전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눈에 무신론은 일반적으로 도덕적이고 심리적 절망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었다. 예를 들어, 실존주의에 관한 유명한 에세이에서 장 폴 사르트르는 신과 별개로 객관적인 도덕성을 유지하려는 초기 프랑스 무신론자들의 노력을 거부하며 이렇게 말했다. “실존주의자는 …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극도로 부끄럽게 생각했다. 지성이 작동하는 천국에서 가치를 찾을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그 순간 모두 함께 사라지기 때문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알베르 카뮈에게 초월적 의미의 상실은 삶의 부조리를 수반했다. 카뮈는 인간의 존재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시지프스에 비유했다. 영원히 언덕 위로 돌을 굴리지만, 매번 다시 떨어지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운명에 처한 시지프스. 무신론에 의해 도입된 혼돈과 분열의 감각은 프리드리히 니체의 유명한 “미치광이” 우화에서 강력하게 전달된다. 이 인물(일반적으로 니체를 상징한다고 간주된다)은 시장으로 달려가 외친다.“신은 어디에 있는가?” … “난 당신에게 말하겠다. 우리는 신을 죽였다. 당신과 내가 죽였다. 우리는 모두 신의 살인자이다. 하지만 이게 어떻게 가능했나? 어떻게 바닷물을 마실 수 있는가? 저 지평선 전체를 쓸어버리는 스펀지를 누가 우리에게 주었는가? 태양으로부터 이 지구를 풀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지구는 지금 어디로 움직이는가? 우리는 어디로 이동하는가? 모든 태양에서 멀리? 우리는 계속해서 추락하고 있지 않은가? 뒤로, 옆으로, 앞으로, 모든 방향으로? 여전히 위 또는 아래가 있는가? 우리는 무한한 무를 통과해서 방황하지 않는가? 허공의 숨결이 느껴지지 않는가? 더 추워지지 않았나? 밤이 점점 더 다가오지 않는가?”현대 절망의 아우라가 이러한 은유 속에 잘 포착되어 있다. 지평선을 없애고, 지구를 풀고, 허공으로 뛰어드는 등. 많은 현대인이 이유는 몰라도 니체가 그린 이런 식의 심상이 드러내는 감정에 공감한다. 실제로 21세기 세속적 사고가 19세기와 20세기 실존주의적 사고에 반영된 기본적인 갈등을 능가하지 못했다고 믿는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비록 깊이 생각하지 않더라도, 절망이 여전히 현대 문화의 뿌리 깊은 요소임은 분명하다. 이해를 위해 다음과 같은 생각 실험을 살펴보자. 21세기 맨해튼 은행가가 타임머신을 타고 천 년 전 서유럽의 한 수도원으로 여행했고, 그 수도원의 수도사 중 한 명이 타임머신을 타고 21세기 맨해튼으로 여행했다고 상상해 보자. 한 계절 동안 두 사람이 서로 자리를 바꿨다. 누가 문화적 충격을 더 크게 받을까? 누가 혐오감과 불쾌감을 더 강하게 느낄까?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남고 잘 지낼 가능성이 높은 쪽은 과연 누구일까? 의심할 여지 없이 시간여행은 두 사람 모두에게 든든한 경험이 될 것이다. 그리워할 게 많은 21세기 세계인답게 은행가는 새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할 게 많다. 나는 과거를 마냥 낭만적으로만 만들고 싶지 않다. 그러나 몇 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특히 인간의 마음에 관한 문제에서, 나는 수도승이 발견할 21세기 세상이 그가 살았던 세계보다 더 빈곤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더 연결되어 있지만 더 외롭다. 수명이 길어졌지만 그만큼 자살률도 높아졌다. 더 많은 기회가 있지만, 불안과 우울증도 급증한다. 우리의 세계는 분명히 더 화려하다. 그러나 수도사의 세계에는 우리가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도 모른 채 살아가는 의미와 풍요로움이 있었다. 요약하면, 근대성의 특징은 초월적 의미의 상실이다. 이 사실은 종종 무의식적으로 또는 반의식적으로까지, 우리 삶에 심오한 영향을 미친다. 막연한 황량함의 구름 아래 살고 있지만, 우리는 그 원인이 무엇인지도 모를뿐더러 거기에 대한 대안이 있는지조차도 모른다. 단지 “절망”이라는 단어로 현대인의 갈등을 표현하는 건 부족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외로움, 중독, 안절부절못함, 우울증, 지나치게 바쁘고 산만한 삶의 이면에는 깊고 요동치는 공허함이 자리 잡고 있다. 마크처럼 우리도 “먼지와 부서진 병, 오래된 깡통 더미와 건조하고 숨 막히는 곳”에서 살고 있다.그런 이런 현실이 복음을 경험하고 전달하는 방법에 대해서 무슨 의미를 갖는가? 절망의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변증해야 할까? 복음이 절망을 대하는 방식러시아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1983년 템플턴상 수상 연설은 유명하다. 그는 먼저 20세기 폭력이 가져다준 끔찍한 공포를 이야기하고, 모든 공포의 원인으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상실을 지적했다. “오늘 내가 우리 인민 육천만여 명을 삼켜버린 파멸의 혁명이 가능하게 만든 근본 원인을 가능한 한 간결하게 서술하라는 요구를 받는다면, 다음 말을 되풀이하는 것보다 더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20세기의 폭력과 관련해서 솔제니친의 진단이 사실인 것처럼, 21세기의 절망도 마찬가지이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었기 때문이다.그렇다고 절망을 다루는 데 교회의 존재만으로 충분하다는 말은 아니다. 반대로, 현대인에게 의미 있고 진정성 있게 복음을 전하려면 지혜와 더불어 성령님의 도움이 필요하다. 특히 절망의 시대에 복음을 설득력 있게 만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1. 복음의 충만함을 선포하라바울의 말처럼, 복음 메시지의 핵심은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고전 15:3)이다. 그러나 바울 자신조차도 복음을 맥락에 따라서 다르게 전달했다. 사도행전 13장에서 그는 유대인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다. 그는 핵심 전략은 다양한 성경 말씀을 인용하고 구약의 예언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선언한 다음에 모든 사람에게 회개를 촉구했다. 그러나 사도행전 17장, 아테네의 아레오바고에서는 전혀 다른 접근 방식을 취했다. 이교도 환경에서 바울은 하나님과 창조의 교리로 더 거슬러 올라갔다. 그 과정에서 그는 이교도들의 시인을 인용함으로써 그들의 세계와 연결할 다리를 놓을 창의적인 방법을 찾았다.오늘날 우리는 점점 더 사도행전 17장의 문화 속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창조라는 더 큰 맥락에서 복음을 설명하는 바울에게서 배워야 한다. 상대가 기독교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할 경우,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는 많은 현대인에게 이해하기 어렵거나 설득력이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사도행전 17장의 맥락에서 사도행전 13장의 메시지를 설교하는 것과 같다. 존 스토트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울의 설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오늘날 많은 사람이 복음을 거부하는 이유가 복음이 거짓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복음이 사소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모든 경험을 이해하도록 만드는 통합된 세계관을 찾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교리 없이는 예수님의 복음을 전할 수 없고, 창조 없이는 십자가를 전할 수 없으며, 심판 없이는 구원을 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바울에게서 배운다.환멸과 절망의 시대를 사는 변증가로서 우리는 복음이 함축하는 모든 의미가 현대인의 마음속 가장 깊은 갈망 및 고민을 반영하도록 전달해야 한다. 가장 기본적으로, 우리는 하나님 자신을 현대의 절망에 대한 해답으로 인식해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에서 가르쳤듯이, 하나님만이 인간의 마음을 채우는 안식과 성취의 유일하고도 궁극적인 원천이다. 현대인의 절망에 있어서 하나님은 배고픈 자에게 주어지는 음식과 같다. 오직 그분과 연결될 때만 우리는 건조하고 숨 막히는 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죄를 용서받는다는 게 복음인 이유이다. 복음은 우리를 하나님 자신과의 교제 안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사도행전 17장에서와 마찬가지로, 현대 사회에서도 불신자가 이러한 다양한 포인트를 제대로 연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할 수 없다.그러므로 절망의 시대에 복음을 전파하려면 인내와 장기적인 안목이 필요하다. 전도는 점점 더 길고도 복잡한 과정이 될 것이다. C. S. 루이스의 마크를 다시 생각하자. 감옥에서 “정상”을 만난 후에야, 그는 그리스도께 응답할 수 있는 위치에 놓였다. 루이스의 회심도 비슷하다. 그는 유신론으로의 여정을 길고 느린 체스 시합에서 진 것에 비유했다. 1929년에 유신론자가 되고도 이 년이 더 지난 1931년에 가서야, 그는 마침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리스도가 당신의 죄 때문에 죽었다”는1925년 또는 1927년 당시만 해도, 루이스 생각에 자신에게 그다지 필요한 메시지가 아니었다. 우리가 친구, 직장 동료, 가족, 그리고 이웃과 함께 복음의 여정을 시작하는 지점에서도 그 메시지는 아직 시기상조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에 놓인 과제의 막중함을 인식해야 한다. 절망의 시대에 변증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감각, 영원과 영광에 대한 감각을 일깨우도록 돕는 것을 포함한다. 우리는 메마르고 숨 막히는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오라고 손짓하고 있다. 바울처럼 우리도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이 알지 못하고 예배하는 그 대상을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겠습니다”(행 17:23). 우리는 그 과정에서 매 순간 성령님에게 의지해야 한다. 2. 복음의 아름다움을 선포하라그리스 철학자들은 선과 진리와 아름다움이라는 세 가지 초월성을 놓고 논쟁했다. 현대 변증학은 주로 기독교가 진리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의 선함과 아름다움도 함께 강조했다. 이런 변증은 인간과 관련해서 훨씬 더 포괄적이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이 자주 인용하는 유명한 팡세의 구절을 보자. 파스칼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기 위해서 필요한 세 단계 전략을 제안했다.인간은 종교를 경멸한다. 종교를 싫어하고 종교가 진리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두려워한다. 이에 대한 치료법은 먼저 종교가 이성에 반하지 않고 경외와 존경을 받을 가치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음으로 종교를 매력적으로 만들라. 그래서 선량한 사람들이 종교가 진리이길 바라게 만들다. 그런 다음에 종교가 진리임을 보여주라. 요약하면, 기독교가 진리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전에 기독교가 존경할 만하고 바람직하다는 것을 먼저 보여주라는 게 파스칼의 주장이다. 이런 접근 방식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복음에 대한 선천적이고 자연스러운 저항 때문에 필요하다. (“종교를 싫어하고 종교가 진리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두려워한다.”)파스칼식 접근은 절망의 시대에 필요한 변증과 깊은 관련이 있다. 우리가 맞는 가장 큰 도전은 날카로운 반론보다는 훨씬 더 자주 만나는 무관심과 산만함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울리는 스마트폰 알람과 소음의 시대에 살고 있으며 영혼의 문제에는 둔감하다. 그래서 많은 현대인이 복음이 진리이냐 아니냐에는 관심조차 없다. 따라서 우리는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왜 복음이 고려할 가치가 있는지를 이해하도록 기초부터 도와야 한다. 이를 위해 복음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것은 매우 유용하다. 복음의 아름다움은 청중의 무관심을 제거함으로 그들의 관심을 끌 수 있다. 예를 들어, 절망의 시대에도 사람들은 별을 보고, 음악을 듣고, 또 문학을 읽으며 깊은 종교적 갈망을 경험한다. 찰스 테일러는 믿음을 포기하게 만드는 현대의 경향을 설명한 후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더 많은 무엇인가가 나를 압박한다는 느낌이 있다. 많은 사람이 그것을 느낀다. 삶이 무엇인지 고찰하는 순간에, 자연에서 휴식을 취하는 순간에, 사별과 상실의 순간에, 그 느낌은 매우 격렬하고 예측할 수 없다. 편안한 불신앙에 안주하기에 우리 시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 불안은 끊임없이 표면으로 떠오른다. 테일러의 주장은 이것이다. 변증이 현대인의 마음에서 때때로 표면화되는 “불안”을 건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 마음속 깊은 갈망과 관련해서 복음을 위치시켜야 한다. 우리의 목표는 논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세속의 주문을 깨는 것과 비슷하다. 루이스는 이 세상 너머에 있는 무언가에 대한 인간의 깊은 열망을 언급한 후에 이렇게 말했다. “당신과 나는 거의 백 년 동안 전해 내려온 세속적인 악한 마법에서 우리를 깨우기 위해 찾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주문이 필요하다. 오늘날 거의 모든 교육은 진리를 찾으려는 이 수줍고 끈질긴 내면의 목소리를 침묵시키는 데에 집중되어 있다.”절망의 시대에 변증이란 인간의 욕망에 대한 세속적 설명이 얼마나 형편없는지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세속적 사람들은 사랑과 정의 속에 담긴 초월적 가치를 느끼는 인간의 선천적 인식과 결별하려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세속적 세계관에서는 그들이 그 가치를 도대체 어디에서 얻는지 찾기란 매우 어렵다. 보통 환원적 방법을 통해 진화심리학의 산물로 설명하곤 한다. 이런 식이다. “우리는 사랑과 정의와 같은 가치가 우리의 조상인 동물이 생존하는 데 도움이 되었기에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비생물학적 세계에서 찾을 수 있는 객관적인 관련성이란 있을 수 없으며 최종적 해결 또는 궁극의 의미도 없다. 찰스 테일러는 이와 같은 긴장을 “현대성이 잠재우지 못한 경계”라고 부른다. 간단히 말해서, 세속적인 사람들이 세속주의 내에서는 더 이상 의미가 없어야 하는 종교적 자질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최근 들어서 왜 그토록 다양한 형태의 “종교적 비신론(nontheism)”이 등장하는지를 잘 설명한다. 변증의 과제 중 일부가 바로 이런 모순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불신자가 세속적 세계관의 결과인 메마름과 갇힘을 제대로 인식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대안으로 복음이 가져다주는 황홀한 행복과 경이로움을 경험하도록 도와야 한다. 복음에는 사랑과 정의, 그리고 그 밖의 다른 많은 것을 갈망하는 인간의 마음을 채우는 영광스러운 의미와 성취가 담겨있다. 복음에는 현대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메시지가 있다. 우리는 굶주려 죽어가는 세상이 갈망하는 식량을 갖고 있다. 우리가 제공하는 것은 참여해야 할 고대 전통, 노력해야 할 초월적 대의, 그리고 영원히 누릴 영원한 영광이다. 다시 한번 강조한다. 불신자로 하여금 지금 그들이 얼마나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는지, 심각성을 제대로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 우리는 매 순간 성령님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 원제: Apologetics in an Age of Despai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기독교변증
루이스
찰스테일러
절망의시대
팀 켈러의 질문에 답함
by 김선일
2023-06-19
심플리 미셔널Simply Missional탈교회화, 비종교화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선교 과제로서 복음을 새롭게 제시합니다. 기독교의 변증 유산으로부터 오늘을 위한 복음 변증의 지혜를 발굴하고, 현대 한국의 문화적 표현들과 복음의 대면이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교인들은 이제 아직 “집” 안으로 들어올 준비가 되지 않은 외부인에게 레모네이드를 대접할 수 있는 포치를 그들의 교회에 만들어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 외부인을 준비시켜야 한다. 어떻게 하면 될까? 교회의 포치는 어떤 모습일까? 위의 글은 지난 5월 19일 별세한 팀 켈러 목사의 (지금까지 나온) 마지막 글에 실린 한 대목이다. “포치에서 나누는 레모네이드 한 잔: 탈 기독교 사회에서 복음전하기”라는 이 글에서 그는 미국 교회가 처한 전도의 위기 상황과 아울러 그 해결방안을 논한다. 비슷한 문제의식 내용이 팀 켈러의 탈 기독교시대 전도라는 책에서도 나왔다. 이 책의 원제는 “어떻게 다시 서구 사회에 전도할 것인가”(How To Reach the West Again)이다. 사실 이 질문은 은퇴한 선교사 레슬리 뉴비긴이 1984년 프린스턴신학교 워필드 강연에서 최초로 제기한 것이다. 그의 강연 제목 “선교학적 문제로서 후기 계몽주의 문화: 서구 사회는 회심할 수 있는가?”(‘Post-Enlightenment Culture as a Missiological Problem: Can the West be Converted?)였고, 팀 켈러는 2017년 프린스턴신학교 카이퍼 강연에 초대받아 33년 전에 제기된 질문을 염두에 두고 “뉴비긴에게 답함”(Answering Newbigin)이라는 제목으로 미국의 상황에서 답을 제시하고자 한 것이다. 팀 켈러의 탈기독교시대 전도가 그 강연의 내용을 확장하여 전도의 방향을 위한 담론을 제시했다면, “포치에서 나누는 레모네이드 한 잔”은 전도에 대한 고민과 해법을 포치와 레모네이드라는 일상의 은유로 표현하며 실제적인 사례들을 소개하고자 한 것이다. 아쉽게도 그는 이후에도 계속 구체적인 전도의 사례들을 다루겠다고 밝힌 상태에서 운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유작이 나오지 않는다면 말이다. 대신, 팀 켈러 역시 뉴비긴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질문을 남겼다. 필자가 처음 인용한 “교회의 포치는 어떤 모습일까?”는 미국과 서구 교회만의 질문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서 한국 교회의 질문으로 마주해야 한다. 한국 교회 역시 20세기의 폭발적인 기독교 성장을 경험한 뒤 현재 교세의 감소뿐 아니라 기독교의 사회적 신뢰도 저하로 인해 복음을 증언하는 과업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레슬리 뉴비긴이 서구 기독교 문명의 침식을 목도하면서 던진 질문에 대해 미국의 상황에서 팀 켈러가 대답하고자 했다면, 이제 그 질문은 한국의 상황에서 우리가 고민하고 답을 찾아야 할 과제이다. 포치와 레모네이드팀 켈러와 이 글에서 말하는 포치와 레모네이드의 의미를 잠시 살펴보자. 1) 포치(porch)라는 곳: 포치는 집 입구에 마련된 테라스와 같은 공간으로 길과 접하고 있다. 포치는 집 안과 밖을 잇는 중간 지대이다. 안전하고 이웃끼리의 왕래가 빈번한 동네는 포치에서 사람들끼리 만나고 인사하는 풍경을 쉽게 볼 수 있다. 팀 켈러는 포치를 오늘날 활기찬 동네의 핵심이라고 했는데 집을 교회로, 거리를 세상으로 본다면 포치는 세상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교회와 접촉하는 공간이다. 포치는 지리적 의미에서의 장소에 국한되지 않는다. 비록불신자라 하더라도 기독교 신앙에 우호적인 의식을 갖고, 교회와도 어느 정도의 관계를 맺고 있다면 그에게는 관념적, 정서적 포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한 중립적 공간에서 사람들은 교회나 그리스도인들과 접촉하고 기독교에 대해서 듣고, 신앙에 관해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포치란 “사람들이 일반적인 교회 예배와 교육 이에 유익하고 긍정적인 방식으로 기독교에 노출되는 장소를 말한다”고 한다. 장소는 물리적인 것만이 아니라 일련의 관계라고 한다. 불신자들이 환영받고 자연스럽게 참여할 수 있는 공간도 될 수 있고, 그들과 맺는 좋은 관계도 될 수 있다. 2) 포치의 상실: 팀 켈러는 아브라함 카이퍼를 인용하며 유럽의 문화는 그 자체가 교회를 위한 (포치가 자리한) 앞마당이었으나, 세속주의가 유럽인의 의식을 지배하면서 포치가 사라졌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이는 복음전도에 제기되는 근본적 도전이다. 미국에서도 문화적 앞마당이 급속하게 소멸하고 있다. 2001년 전까지는 무신론적 공산주의였으나, 이후에는 문명충돌의 시대에 기독교가 과격한 또 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는 경계심이 있다. 또한 동성혼이 합법화된 이후로 기독교의 성윤리는 혐오를 조장하는 위험한 편견으로 간주된다. 코로나 기간은 사회적 거리는 사람들의 모임과 만남을 더욱 동질화시켰다. 이러한 양극화 속에서 복음주의 기독교가 자유와 공감의 적이 되었고, 이는 미국에서 교회 개척과 교회성장을 더욱 어렵게 한다는 것이다. 3) 전통적 포치에서의 전도: 한때 서구의 사람들은 일생에 교회를 최소한 몇 번은 다녔다. 교회를 안 다녀도 신 존재, 사후세계, 천국과 지옥과 같은 기독교의 대략적 신념 체계를 암묵적으로 따랐다. 그러한 공유된 가정 위에서 사영리, 전도폭발 같은 전도사역들은 희미한 신념들을 성경적으로 더욱 명확히 해주었다. 전통적 포치에서의 전도들이 잘못되거나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러한 메시지가 소통되어야 할 맥락이 바뀐 것이다. 과거에는 함께 공유했던 공동의 신념 체계가 와해됐기 때문이다. 교회의 포치가 사라진 것이다. 오히려 도로 위의 사람들은 교회 앞의 텅 빈 포치에 무관심할 뿐 아니라 적대적이기까지 하다. 4) 새로운 포치에서의 전도: 팀 켈러는 미국의 교회들이 더 이상 과거의 기독교 문화라는 포치에 대한 환상에 머무르지 말고 새로운 포치를 만들어야 한다고 한다. “교인들은 이제 아직 ‘집’ 안으로 들어올 준비가 되지 않은 외부인에게 레모네이드를 대접할 수 있는 포치를 그들의 교회에 만들어내야 한다.” 그는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한다. 프란시스 쉐퍼가 세운 라브리 공동체는 신앙은 없지만 진리를 탐구하는 이들을 맞이해서 삶을 공유하며 신앙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곳이었다. 양질의 교육으로 지역사회에서 좋은 평판을 얻는 기독교 학교도 믿지 않는 부모를 위한 포치가 될 수 있다. 교회의 봉사 및 구제 프로젝트도 비신자들에게 교회와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사람들의 필요와 관심을 위한 독서나 취미 소모임, 또는 비신자들도 참여할 수 있는 성경공부나 기독교 신앙학습 모임도, 특히 교회 밖에서 이루어질 경우에는 포치 역할을 할 수 있다. 라브리 공동체가 사역하는 간사들의 집으로 찾아온 이들을 초대했듯이, 사실 기독교 가정은 원래부터 이웃을 환대하며 기독교 신앙이 스며들게 하는 모범이었다. 단순히 초대와 환대만이 포치의 전부는 아니다. 포치에서는 안전하고 중립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탐구와 토론만 하지 않는다. 불신자들의 가치와 신념이 기독교 세계관과의 대면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전복되는 성취가 일어나야 한다. 그들의 세계관과 라이프스타일을 넘어서는 더 큰 세계의 일관된 진리를 만나야 한다. 한국 교회를 위한 전도의 포치는 무엇인가?팀 켈러는 마지막 글에서 새로운 포치에서의 전도 사례들을 더 많이 나누겠노라고 예고했다. 하지만, 그의 유작이 나오지 않는 한, 이것이 그의 생전 마지막 글로 보인다. 이제 그가 남긴 미완의 과제는 우리 몫이 되었다. 우선 그는 유럽과 미국 교회의 상황에서 복음으로 이웃과 만나는 포치에 대해 논했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에도 이러한 포치의 존재와 부재가 적용될 수 있을까? 한국 교회는 비서구권 국가들에서는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20세기에 가장 눈부신 성장을 이뤘다. 필자는 한국 사회의 근대화 과정 그 자체가 교회를 위한 앞마당이었다고 본다. 근대 한국 사회는 안보의 문제, 산업화 열망, 문화적 욕구에서 서구사회, 특히 기독교 국가로 대표되는 미국을 선망했다. 근대 한국인들에게 기독교는 제국주의 식민통치자들의 종교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도와준 우방의 종교였다. 따라서 근대화가 이루어지는 이 시기에 한국 사회는 전반적으로 기독교에 호의적이었다. 이와 같은 안보, 산업화, 문화적 선망의 내러티브는 한국 사회에서 교회에 다니는 것을 꽤 괜찮은 선택으로 보이게 했다. (이에 관해서는 필자의 저서, 한국 기독교의 성장 내러티브(CLC, 2019)에서 상세하게 분석한 바 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서면서 한국 교회가 우리 사회에 열어놓았던 앞마당, 즉 포치가 점점 위축되기 시작했다. 안보, 경제, 문화의 영역에서 한국 사회는 독자적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더 이상 교회는 선진문화의 유일한 통로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교회가 사회에 대하여 윤리적 모범을 보이지 못함으로 인해 일반 사람들 사이에서 실망과 부정적 인식은 더욱 고조됐다. 따라서 교회 앞에는 이웃과 편하게 만날 수 있는 포치가 아닌 서로를 가르는 높은 담장이 쳐졌다. 오늘날 미국과 한국의 교회 모두에서 포치를 갖추려면 의도적인(intentional) 관계와 공동체 형성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익히 들어온 ‘관계 전도’로 너무 쉽게 비약하진 말자. 왜냐하면 복음이 관계를 통해서 가장 자연스럽게 스며들어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자칫 관계를 전도의 도구로 사용하는 태도는 인간에 대한 예의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인간은 관계로 존재하며, 인간 간의 관계는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진심이어야 한다. 관계 전도의 기술을 개발하기 전에, 먼저 관계적인, 혹은 관계에 진실하고 성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이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이 되는 모험을 격려하고 지원해야 한다. 첫째로, 일상 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관계들을 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날마다 많은 관계들을 반복적으로 경험한다. 한번 자기 삶의 주변 반경을 살펴보라. 나는 누구와 자주 접하는가? 나의 경우, 산책하는 동네 주민, 아파트 경비 아저씨, 얼마 전 하수구가 터져서 협상을 했던 윗집의 부부, 자주 가는 동네 이발소 주인 등이 떠오른다. 집 근처 이웃뿐 아니라 나의 일터나 자주 가는 매장에서도 같은 사람들과 종종 마주할 수 있다. 그런 일상의 스치는 만남들에서 한발자국 더 다가가는 것이다. 먼저 인사하라. 아는 사람을 늘리고 관계의 거리를 좁히라. 이웃을 위해서 기도하라. 사회적 거리두기의 여파가 잔존하는 사회에서 낯선 자에게 다가가는 것은 일상의 선교적 실천을 위한 첫걸음이다. 둘째로, 그 동안 다소 소원했던 관계들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가족, 친척, 친구, 동료 중에서 무심하게 대했던 이들, 특히 나에게 먼저 연락을 했거나 친분을 표시했는데도 내 쪽에서 반응을 안 했거나 소극적으로 응대한 경우가 있다면 다시 성의 있는 대화를 시도하라. 꼭 전도를 위한 포섭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먼저 관계에 진실하고 예의 있는 자들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이웃 사랑의 한 가지 실천일 뿐이다. 교회 차원에서 공적인 봉사만이 이웃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개인의 삶에서 이러한 관계적 성실함을 실천할 필요가 있다. 셋째로, 새로운 관계들을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이를 위해서는 교회 차원의 사역도 필요하다. 교회가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나 구제 사역을 할 경우, 참여하는 교인들은 자신들이 돕는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 전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단순히 의로운 시혜적 봉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인격적인 교제가 자연스럽게 일어나야 한다. 구제와 봉사의 참여는 새로운 만남을 여는 중요한 기회가 된다. 또는 주변의 믿지 않는 이들을 이러한 교회의 봉사활동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기독교 신앙을 몸으로 경험하게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먼저 신앙 공동체의 삶의 규칙을 경험하고 나서, 신앙의 내용을 이해하고 수용하기도 한다. 교회가 교회 밖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는 공동의 실천이 있다면 그것도 효과적인 포치가 될 것이다. 교회들이 이웃과 공유하는 삶 속에서 포치를 만드는 데 힘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최근에 자주 거론되는 마을 목회도 좋다. 지역사회의 취약계층을 돕는 디아코니아 사역이나, 이웃과 함께하는 문화 활동을 시도하는 것도 필요하다.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고 확장하는 것은 인간에게 줄 수 있는 더 큰 선물이다. 복음은 그러한 진실한 관계를 타고 흘러 들어간다. 함께 기도하고 상상한다면 팀 켈러가 남긴 포치 테이블에 우리의 이웃을 위한 새로운 레모네이드를 올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팀켈러
전도
그들이 목회를 포기하지 않은 이유
by Sarah Eekhoff Zylstra
2023-06-17
팀 쿠퍼러스는 초짜 목사가 아니다. 무려 이십오 년 전임 목회를 한 베테랑이다. 그런 만큼 그는 교회에서 일어나는 각종 논쟁과 도전에 익숙하다. 긴 시간, 힘든 대화, 그리고 어려운 상황에 관한 한, 그는 누구보다 할 말이 많은 사람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목회를 계속하는 게 맞는가. 이런 질문이 든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의 말이다.적어도 삼 년 전까지는 말이다. “끔찍한 정치적 상황에서 팬데믹이라는 절대적인 도전까지 맞으면서, 응축되어 있던 모든 게 한순간에 터져버렸습니다. 마스크를 쓰냐 마냐를 놓고 교회가 논쟁을 벌이면서 찢어질 때, 그리스도 안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이 한 백성이 되어 교회의 정체성을 만들어간다고 생각하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교회의 본질을 놓고 의문을 품게 됩니다.” 몬태나의 맨해튼 기독교개혁교회를 담임하는 쿠퍼러스의 말이다. 쿠퍼러스만이 아니었다. 2021년 1월 바나 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목회자의 29퍼센트가 지난 일 년 사이에 목회 포기를 진지하게 고려했다. 그로부터 십 개월이 지나고 그 수치는 38퍼센트까지 올라갔다. 2022년 3월에는 42퍼센트였다. 주된 이유는? 사역이 주는 엄청난 스트레스, 외롭고 고립된 느낌, 그리고 현재의 정치적 분열 상황.기독교개혁교회(CRC) 교단 내 자유주의로 인해서 “마흔 명의 목사가 나갔다.” 그리고 얼마 후 쿠퍼러스는 “사역의 기쁨을 잃었다”고 고백했다.그러나 그는 떠나지 않았다. 실제로 대규모 이동설에도 불구하고, 목회자 대부분이 그대로 머물렀다. 2021년 가을, 복음주의 목회자의 은퇴 이전 그만두는 비율은 1.5퍼센트로 2015년 1.3퍼센트에 비해 약간 증가했다.“오늘날 정보가 너무 빨리 퍼지기 때문에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는 누구누구 목사가 그만뒀다는 이야기를 두고 마치 교회를 휩쓰는 새로운 경향이나 유행병이 생겼다고 가정하기가 쉽다. 그러나 실제 백 명의 목회자가 그만둔다고 해도, 그건 한 달 평균 진로를 바꾸는 목회자 수의 일반적인 범위 내의 일부에 불과하다.” 라이프웨이 리서치(Lifeway Research) 전무이사 스콧 맥코넬의 논평이다.복음연합(The Gospel Coalition)은 바나의 조사에 응했던 목회자 세 명을 만났다. 그들은 어쩌면 전염병 기간에 “전임 사역을 그만두는 것에 대해 진지하고 진지한 고려”했다고 조사에서 말했을 수도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 왜 그만두지 않았는지, 그리고 왜 사역을 지속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는지 물었다. 목회 포기를 진지하게 고민하다오하이오 애슐랜드에 있는 Substance Church의 로니 마틴 목사의 말이다. “정직한 목회자라면 스스로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자주 그만둘지를 놓고 고민할 것입니다. 각종 선택으로 가득한 세상, 기술과 원격 작업으로 모든 게 훨씬 더 쉽게 가능해진 세상에서, 가능성 측면에서 볼 때 다른 길을 상상하는 건 더 쉬워졌습니다.”그가 담임한 교회는 마스크 정책 불일치로 약 예순 명의 교인을 잃었다. “목회 말고 다른 일을 했더라면, 내 인생이 훨씬 더 쉬웠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교회를 떠난 한 사람 한 사람과 나누는 대화도 결코 쉽지 않았지만, 진짜 힘든 건 대화 속에서 느끼는 과도한 불안과 편집증이었습니다. 나는 그들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지 계속 궁금했습니다.”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의 죽음 이후, 제레미 라이트볼이 사역하는 메트로 디트로이트의 Woodside Bible Church에서는 그가 인종차별 폭력에 대해서 기도한 이후로 350명의 교인 중 무려 절반이 교회를 떠났다.라이트볼의 말이다. “교인들은 내가 인종 문제에 관해서 좌파 성향이라고, 비판적인 인종 이론을 옹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마음을 바꿀 수 없었고, 마치 교회 전체를 날려 버린 것만 같았다. “나는 자신에게 묻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이 일을 하도록 부름받은 게 맞나? 내가 뭘 잘못한 거지?” 마틴도 같은 게 궁금했다. “내가 목회를 위해서 창조된 사람이 맞나? 아니면 해야 할 다른 일이 있는 게 아닐까?”왜 사역을 포기하지 않았는가마틴은 오래 씨름하지 않았다. “어둠과 절망의 순간이 있었지만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그가 가족, 장로들, 그리고 네트워크에 있는 다른 목회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은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또한 병적인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다.“정말 궁금했습니다. 이걸 견뎌내면 어떤 일이 생길까? 주님, 내 안에서 지금 무엇을 드러내고 계십니까? 버틸 수만 있다면 이 고난을 통해서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서 다시 태어나는지 꼭 보고 싶었습니다.” 그는 이 말이 어떻게 들릴지 안다. “물론 당시에 느꼈던 것보다 지금은 훨씬 더 낭만적으로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낭만이 아니었다. 그가 매달린 것은 성경이었다. “기다림의 시간이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기다리며 소망해야 한다고 성경에서 무려 227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다렸다. 쿠퍼러스도 기다렸다. 육 개월이 지나고 또 일 년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사역에서 이전의 기쁨을 느끼지 못했다. 어쩌면 그 기쁨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계속 사역했다. “가정에서 평화와 휴식을 찾을 수 있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나는 놀라운 배우자를 만난 축복을 받았습니다. 모든 외부 환경이 어려워도 집은 항상 평화와 휴식의 장소였습니다. 이 사실은 나를 지키는 근본이 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소명을 붙잡았다. “내가 목사가 된 건 어느 날 자고 일어나서 ‘목사 되어야지’ 하고 결심한 게 아닙니다. 나게는 깊은 내적, 외적 소명 의식이 있습니다.” 그가 내적 부르심과 씨름하는 동안 교인과 교단 사람들은 외적으로 그의 소명을 함께 확인시켜주었다. 교인들은 그들이 미처 알 수 없을 정도로 격려가 된 쪽지나 이메일을 그에게 보냈다. 매주 두 명의 장로가 그를 만나 격려하고 또 중보기도를 했다. 그는 결코 목회자와 장로들의 지역 모임인 노회에 가서 그만두겠다는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사랑하는 교역자와 교인들 앞에 서서 ‘나는 끝났습니다’라고 말하는 건 차마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건 생각만으로도 끔찍했습니다.”미시간으로 돌아가서, 라이트볼도 장로들을 의지하고 있다. 그는 그들에게 물었다. “장로님들, 내가 이 교회를 담임하면 안 될 정도로 지금 교회에 해를 끼치고 있습니까?”그들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들은 끝까지 나를 지켜주었고, 그 사실은 내게 매우 긍정적이고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결코 ‘그래요. 이제 떠날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우리는 당신을 믿습니다. 우리는 당신과 함께합니다’라고 했습니다. 때때로 내 말이 도움이 되지 않거나 잘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나를 바로잡아 주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그들은 결코 나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았습니다.” 마틴과 쿠퍼러스처럼 라이트볼도 소명에서 해방되었다고 느끼지 않았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다른 문을 열어주지 않으셨습니다. 다른 어떤 것에도 부름받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나는 바로 이곳에 부름받았다고 느낍니다. … 주님이 내게 맡긴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아무도 나에게 나가라고 하지 않습니다.”그가 그 사실을 아는 한 가지 이유는 사례금이다. 교회는 지금도 여전히 정당한 사례금과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내게는 미국 회사로 옮길 수 있는 기술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곳에서 내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그 어떤 비전도 없습니다. 나는 이십 년 넘게 사역했습니다. 사역은 나의 소명이자 경력입니다. 나는 다른 일을 어떻게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거기에 필요한 재정이 충분한지도 모릅니다. 나는 이 사역을 해야 합니다. 사역은 주님께서 내게 주신 일이고, 우리 가족을 재정적으로 공급하시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사역에 머물렀는가머물기 위해 때때로 목회자들은 한 걸음 물러나야 했다. 마틴은 주로 제인 오스틴과 브론테 자매가 쓴 고전 소설에 빠졌다. 쿠퍼러스는 목공이나 스포츠 사진 촬영으로 시간을 보냈다.그들은 또한 성경 속으로 도피했다. 마틴의 말이다. “나는 3-4개월 동안 시편으로 기도하고 묵상했습니다. 그것은 엄청난 도움을 주었고 내게 향유가 되었습니다.” 쿠퍼러스도 시편에서 시간을 보냈는데, 주로 시편 46편 속에 잠겨 살았다. 라이트볼은 요한계시록 속 일곱 교회에 관한 구절을 바탕으로 목회자를 위한 책을 쓰고 있다. 그는 계시록 2, 3장과 사랑에 빠졌다.“심지어 요한계시록 1장 5절, 이 구절은 내 정체성의 근거가 됩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나는 그에게 속합니다. 나중에 우리는 일곱 별을 손에 들고 있는 예수님의 이미지를 읽는데, 그것은 모든 혼란에도 불구하고 나를 손에 붙잡고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은유입니다.” 요한이 쓴 편지의 수신자인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제국 시대 심한 박해를 받고 있었다. 그 사실은 라이트볼이 모든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내 마음을 닻을 내리고 예수님의 충만함, 나를 향한 그분의 사랑, 그분의 주권, 지혜, 선하심을 상기시켜 준 중요한 구절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기억하라고 계속해서 나를 부르십니다. 그렇기에 나는 이제 예수님 때문에 내가 누구인지를 똑바로 압니다.” 또 한 편에서는 마스크를 쓰는 교인들은 이게 거의 없지만, 팬데믹이 가져다준 문제를 여전히 처리하고 있는 목회자가 적지 않다고 마틴은 지적한다. “트라우마는 아주 천천히 드러납니다. 따라서 우리 중 일부는 이제야 비로소 그 당시가 초래한 문제를 다루기 시작한 건 아닌지 궁금해합니다.” 그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내게는 어둠과 절망의 순간은 짧았고, 곧바로 그리움과 탐색으로 이어졌습니다.” 그의 말이다. 그의 기도는 언제나 “주님, 우리는 안도감을 찾고 있습니다. 오로지 당신 안에서만 찾아야 합니다”이다. 그의 교회에 일어난 분열은 고통스러웠지만, 더 하나된 회중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그는 고백한다. “시간이 지나 주변을 둘러보니 결국 남은 이들은 항상 교회를 섬겨왔고, 함께 선교 사업을 하고, 힘을 다해 우리를 격려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는 이 사람들이 이 교회에 있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일체감을 느꼈고, 그 하나됨이 나타났을 때 우리는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마틴은 또한 자신 속에서 일어난 변화도 실감했다. “내가 교인들의 지지를 얼마나 갈구하는 사람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그들이 모든 게 다 괜찮다고 말해 주기만을 바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문제가 생기고, 과거에 하지 않던 이야기를 해야 하고, 나아가서 각기 다 의견이 다를 때, 나는 내가 지지나 격려를 받지 못한다고 느꼈습니다.” 그 결과, 오로지 주님만을 의지하는 마음이 강해졌기에, 모든 게 힘든 은혜였다고 마틴은 말했다. 어려움을 은혜라는 프레임으로 바라보게 되었을 때, 그는 감사할 수 있었다.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고, 이 일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게 된 것 같습니다.”쿠퍼러스도 내적 변화를 목격한다. 딱딱하고 화난 태도가 누그러졌다. 잃었던 기쁨이 돌아오기 시작한다. 그는 생명의 싹을 볼 수 있다.“2021년 5월에 나는 쉰 살이 되었습니다. 주일이었는데 예배 후 교회에서 깜짝 파티를 열어주었습니다. 거의 9 야드나 되는 풍선과 도넛을 준비했군요. 끔찍하고 힘든 한 해를 보낸 후, 그 축하 행사는 내게 무언가를 전해 주었다. 소중함을 깊이 느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사랑하는 회중에 대한 나의 부름을 재확인했습니다.”그건 마치 생존을 축하하는 느낌이었다. 비록 그의 교회는 더 작아졌지만, 쿠퍼러스는 이제 예전 교회가 아닌 지금 교회를 섬기기로 결정했다.그가 섬기는 교회는 좋은 곳이다. “우리는 주일에 약 250명과 함께 예배를 드립니다. 현재 임산부가 일곱 명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육체적인 새 생명을 통해 우리 회중에도 새 생명과 기쁨이 있음을 보여주시는 것 같습니다.”앞날을 내다보다미국 문화가 세속화됨에 따라, 교회에 더 힘든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마틴의 말이다. “어쩌면 팬데믹은 다른 것에 대한 준비였을지도 모릅니다. 주님께서 앞으로 미국 교회에 어떤 시련을 주실지 몰라도, 그것이 인내와 그분을 향한 사랑이 식지 않기 위한 것임을 깨닫도록 도와줍니다.”라이트볼의 말이다. “참되고 옳은 문화를 옹호하고 사랑으로 진실을 말하며 또 하나님의 백성을 목양하는 경우에 대가를 치르게 될 날이 아마도 다가올 것입니다. 나는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의지한 채 이 세상을 항해해야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붙드신다고 믿습니다. 정말로 믿습니다. 나는 계속 그분만을 바라볼 것입니다. 그분만을 믿을 것입니다.”목회 사역은 높고 고귀한 소명이라는 게 라이트볼의 말이다. 그렇기에 그는 다른 일은 하고 싶지도 않다. 그는 고백한다. “목사로서 나를 부르신 것은 십자가의 신학을 전하는 사람, 이것이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 하신 일임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에게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그는 우리를 본향으로 데려다 주실 것입니다.” 원제: Why Pastors Aren’t Quitting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목회위기
목회포기
역사와 지리의 단절을 견뎌내다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철원제일교회
by 이종전 · 장명근
2023-06-16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대한 강토에 선 첫 세대 교회들을 찾아 떠납니다. 그 이야기들에서 우리 신앙의 근원과 원형을 찾아보려 합니다.강원도 지역에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을 보면, 그 루트가 매우 다양하다. 이 지역은 또한 지리적인 요인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서 늦게 복음이 전해졌다. 태백산맥이 북에서 남으로 길게 자리하고 있어서 산맥의 동과 서는 전혀 다른 환경이다. 그뿐 아니라 산악지형이라는 지리적 환경은 같은 지역에 있는 도시와 도시도 단절시켰다. 따라서 복음이 전해지는 루트도 다양하고, 지역 분할 정책을 시행할 때도 지역에 따라서 다른 선교부가 맡기도 했다.강원도에서 가장 먼저 교회가 세워지는 곳은 철원지방이다. 철원에서 기록상 가장 먼저 설립된 교회는 지경터교회이다. 이 교회는 원산에 자리를 잡고 개인적으로 진료와 선교를 동시에 하던 하디(Robert A. Hardie)가 서울과 원산을 오고 가는 길에 만나게 되는 철원지방에 처음으로 맺은 열매다. 하디는 캐나다장로교회 소속으로 활동하다가 1898년 5월 남감리교회선교부로 적을 옮기면서 원산에 자리를 잡게 되었고, 철원지방에 1901년 3월 김화 지경터에 공동체를 형성시켰다. 이것이 강원도 최초의 교회이다. 이 교회는 하디의 영향으로 시작된 1903년 원산부흥운동, 그리고 이어지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영향으로 함께 성장했다. 하지만 현재 지경터교회의 역사를 잇고 있는 교회는 없다. 정확하게 언제 소멸되었는지, 아니면 언제 다른 교회로 흡수되었는지 찾을 수 없다. 다만 지경터교회가 있었던 인근에 1956년에 설립된 지경장로교회가 있다.그러한 의미에서 철원제일교회도 본래 철원읍교회의 역사를 잇는 것을 전제로 재건된 교회이기 때문에 실제 역사는 단절되었다. 철원읍교회 역사의 무대가 되는 철원은 일제의 박해와 해방 이후 북한 공산당의 탄압이 이어진 곳이었으며, 6.25사변 당시에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현장이었다. 또한 휴전과 함께 민통선 안에 위치하게 됨으로써 본래 철원의 중심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었고, 현재 철원은 동성읍과 신철원 지역으로 옮겨진 셈이다. 따라서 철원읍교회는 역사를 잇지 못한 채 그 흔적만 가지고 있었다.즉 해방과 함께 38도선 이북의 철원은 북한지역에 속하게 되었고, 북한에 정부를 수립하고자 하는 공산주의 세력은 기독교를 적대시했으며,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실제로 철원읍교회(현, 철원제일교회)에서 직선으로 불과 300미터쯤 떨어진 곳에 노동당사가 있을 만큼 광복 이후 철원지역은 공산당이 활동하는 최전선의 중심지였다. 또한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그리스도인과 교회에 가해진 박해는 이곳에서 교회 공동체의 모임을 이어가는 걸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더 이상 민간인이 거주할 수 있는 곳도 못되었다. 이 때문에, 무너진 예배당만 폐허 그대로 방치될 수밖에 없었다. 전후에는 누구도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곳이었음에도 그러한 틈새를 이용해서 철원읍교회터를 사유화하는 일까지도 있었을 만큼 혼란스러웠고, 교회의 재산을 다시 찾는 일도 쉽지 않았다. 그러니 교회가 그 역사를 잇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한 역경과 시련을 겪은 철원읍교회의 모습은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당시의 교회가 어느 정도 규모였는지 알 수 있을 만큼 튼튼히 세워졌던 벽체의 일부가 증언하고 있다. 아직도 당시 신자들이 드나들던 문지방에는 그들의 발자국이 느껴질 만큼 닳은 흔적이 그대로다. 철원 읍내가 완전히 없어진 상태에서 언덕에 자리하고 있는 철원읍교회 앞에서 지금은 확인할 수 없는 옛 읍내를 내려다보면, 이곳에 살면서 이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수많은 이들의 발걸음 소리가 교회로 몰려오는 듯하다.그러면 철원읍교회는 언제 설립되었는가? 이 교회는 1905년 북장로교회의 웰번(Arthur G. Welborn, 1867-1928) 선교사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철원읍교회와 그 교회의 재건을 통해서 역사를 잇고 있는 현재의 철원제일교회의 시작은 장로교회였다는 의미이다. 장로교회 선교사인 웰번에 의해서 설립된 이 교회는 1907년 장로교회와 감리교회의 선교지가 분할정책과 그 조정 과정을 거치면서 철원이 남감리교회 지역으로 편입되어서 감리교회로 이관되면서 감리교회 역사로 계승하게 되었다. 따라서 1907년 이후에는 감리교회의 콜리어(Charles T. Collyer) 선교사에 의해서 관리되었으며, 1920년에는 예배당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때부터는 의료선교사였던 앤더슨(Albin Gerfield Anderson) 박사와 여선교사였던 어윈(Cordelia Erwin)이 이곳에 상주하면서 철원지방의 선교를 확대해나갔다. 1920년 철원지방은 남감리교회 선교부에 의해서 선교거점이 만들어지고 강원도 지역의 선교에 큰 역할을 하면서 교회뿐 아니라 병원과 복지시설을 운영하면서 지역사회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따라서 이 교회는 단지 양적인 성장만 한 것이 아니고, 사실상 이 지역에 정신적 문화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변화와 발전을 이끄는 데도 크게 역할을 했다. 즉 이 지역의 신교육을 위한 여러 사립학교(배영학교, 정의학교, 영동야학)를 설립하고 운영하면서 지역민들을 깨웠고, 교육을 통해서 국가의 미래를 꿈꾸게 했다. 이러한 일들은 이 지역 그리스도인들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는 것은 철원의 역사가 말해 주고 있다. 이렇게 성장하는 철원읍교회는 예배당이 필요하게 되었다. 1920년 남감리교회가 철원에 선교거점을 만들면서 지은 붉은 벽돌 예배당은 성장과 함께 비좁아졌고, 선교부의 사업도 다양해지면서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해서 1937년에 새 예배당을 마련하게 되는데, 그것이 지금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벽체만 남겨진 석조예배당이다. 이 예배당은 1,200평 대지 위에 건평은 198평이며,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지어진 고딕식 석조건물이다. 지금은 터와 함께 무너진 벽체 일부와 자재로 쓰인 돌멩이들 일부가 남아있지만, 1937년 이 예배당이 지어졌을 때 예배당의 모습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 예배당의 설계는 일본과 한국의 근대건축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보리스(W. M. Voris)가 맡아서 했다. 보리스는 일반적으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국 근대건축사를 공부하거나 건축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하는 인물이다. 그는 평신도 선교사로 일본에서 활동하면서 조선의 근대건축에도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일본 교토 인근의 오미하치만이라는 곳을 중심으로 오미미션이라는 선교거점을 만들어서 평신도 전문인 선교사로 활동했다. 특별히 비교적 자유로운 건축사로서 일본과 조선의 근대건축사에 영향을 크게 미쳤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그의 활동은 많은 건축물로 남겨졌다. 현재는 무너진 채로의 모습이지만 철원읍교회의 예배당도 그의 작품이다. 이 예배당을 비롯하여 당시 조선에 짓거나 그가 관여한 건물이 190채 정도라는 기록을 보아 우리나라 근대건축사에서 지나칠 수 없는 인물임은 분명하다. 현재도 국내에 남아있는 대표적인 건물로는 이화여자대학교 본관, 경북 안동장로교회 예배당, 중앙대학교 등을 들 수 있으며, 이제는 기억에만 남아있는 태화관 건물도 유명하다.1920년 남감리교회 선교부가 이곳에 선교거점을 만들기 시작한 시점은 1919년 독립만세운동 직후였다. 철원읍교회가 크게 성장한 것은 이때부터였지만, 독립만세운동 당시 이 교회의 박연서 목사를 중심으로 이 지역 만세운동이 전개되었고, 만세운동이 진압되는 시점에 박 목사를 중심으로 철원애국단이라는 비밀청년단체를 결정하여 활동하다가 1920년 발각되어 많은 사람이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 교회와 장흥교회 등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행한 철원지역 독립운동은 이 지역사회에서 기독교를 바라보는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바꿈으로써 교회가 크게 성장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1936년에 이르렀을 때, 이 교회는 500여 명의 신자들이 모이는 상황이 되었고, 그 결과 새로운 예배당이 필요했다. 예배당을 새롭게 지은 뒤, 이 교회 담임 강종근 목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일제의 ‘사상범 예비검속’에 걸려 1940년에 구속되었고, 서대문형무소에 복역하던 중인 1942년에 희생당했다. 이렇게 해방 이전에 이 교회는 국가의 현실과 함께 많은 고통을 당해야 했다.해방 이후 공산당이 장악한 이 지역에서 철원읍교회 예배당은 기독청년들이 비밀리에 신앙을 지키면서 반공 투쟁을 하는 거점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따라서 해방 정국에 이 교회를 중심으로 좌우의 마찰은 불가피한 것이었고, 이 시기에 목회자와 신자 다수가 희생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희생이 구체적인 기록은 물론이고 사람들의 기억에서조차 지워진 상태라 더 많은 생각과 아픔으로 다가온다.철원읍교회 예배당은 한국전쟁 당시에는 인민군 야전병원으로 사용되고, 그 지하실에서 양민 학살이 자행되기도 했다. 유엔군이 수복하는 과정에서는 예배당에 숨어든 인민군을 소탕하려는 목적으로 연합군이 예배당을 폭격하기도 했다. 그렇게 폭격으로 무너진 채로 세월이 흘러서 이제는 그 터와 흔적만 일부 남아있을 뿐이다. 그나마 2002년에 이 터는 근대문화유산 국가지정문화재 23호로 지정되었다. 건물의 뼈대조차도 남지 않은 건물임에도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비록 온전한 형태의 건물은 아니지만, 그만큼 이 건물이 우리나라 건축사에서 담아내는 의미가 크다는 것이 아닐지. 철원읍교회 예배당은 한국전쟁 때 폭격을 받아 무너졌는데, 사실 처음에는 이렇게 무너진 상태는 아니었다. 지붕과 일부 벽체가 무너진 정도였는데, 수복된 후에 주민들이 이 석조건물에서 돌을 모두 빼내어 팔거나 집을 지으려고 가져갔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 전쟁 후 아무것도 없는 상황을 이해하지만,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그렇게 방치된 채로 민통선 안에 아무도 돌보는 이 없던 이곳을 이 교회 출신의 동송읍 장흥교회 이금성 장로의 수고로 되찾게 되었다. 수복 이후에 교회의 등기부를 확인하던 이금성 장로는 이곳이 이미 다른 사람의 명의로 되어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장로는 이곳을 다시 찾는 데 3년의 시간과 사재를 들였고, 결국 감리교유지재단에 귀속시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그렇게 2013년 현재의 예배당이 건립되면서, 철원제일교회라는 이름으로 과거 철원읍교회의 역사를 잇고 있다. ▶ 휴전 이후 이곳은 비무장지대와 민통선이 그어지면서 민간인이 출입할 수 없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본래 철원 읍내는 없어졌다. 바로 옆에 있는 노동당사 앞에 가면 한국전쟁 전의 철원 읍내를 그려놓은 지도가 있다. 관심을 가지고 살펴본다면 이곳을 이해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지금은 출입이 자유로워져서 재건된 철원제일교회에 모일 수 있게 되었지만, 이전에는 여기도 허가를 받고서야 들어올 수 있었던 곳이다.
철원제일교회
이땅첫교회들을찾아
철원읍교회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
기독교 고전으로의 초대
by Bruce Hindmarsh
2023-06-15
기독교 고전으로의 초대1733년, 옥스퍼드 대학에는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 발버둥질한 열여덟 살 먹은 신실한 학부생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뭔가가 빠진 것만 같았다. 그에게는 영적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The Life of God in the Soul of Man)이라는 제목의 책을 건넸고, 그 책은 그에게 돌파구가 되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하나님께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내 소중한 친구의 손을 통해서 그 훌륭한 논문을 보내주시기 전까지, 나는 참된 종교가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George Whitefield’s Journals, 46-47) 그 학부생은 조지 휫필드였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양쪽 대륙에 걸쳐서 일어난 영적 각성을 주도하는 설교자가 될 인물이었다. 그에게 그 책을 건넨 친구는 찰스 웨슬리였으며, 그는 휫필드와 함께 부흥의 시대를 지나며 위대한 찬송 작가가 되었다. 실제로 시기는 각각 달라도 초기 복음주의 운동을 주도한 거의 모든 지도자가 이 책을 읽었고, 그 중요성을 앞다투어 간증했다.중요한 건 이 작은 책이 복음주의 부흥의 뿌리, 바로 그 자리에 놓여있다는 사실이다. 이 책은 마치 위를 덮은 토양에 생명이 피어나도록 만드는 지하수와 같았다. 조지 휫필드를 비롯해서 수많은 사람에게 그토록 큰 영향을 미친 이 책의 내용은 과연 무엇이었을까?헨리 스쿠걸, 개신교 신비주의자이 책을 쓴 사람은 스물여덟 살 나이에 세상을 떠난 헨리 스쿠걸이라는 스코틀랜드의 젊은 목사이다. 1677년에 익명으로 발행된 이 글은 원래 여자 친구인 레이디 길모어에게 주는 영적 지침을 담은 부드러운 편지였다. 따라서 이 글은 개인적인 서신에서 찾을 수 있는 따뜻함과 솔직함이 넘친다. 본문을 읽을 때 마치 누군가가 바로 옆에서 영적 조언을 들려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이유이다. 젊었지만 스쿠걸은 기독교 고전이 품은 영성을 스펀지처럼 흡수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여러 교부, 토마스 아 켐피스 같은 중세 영적 저술가들, 그리고 아빌라의 테레사와 잔느 귀용처럼 비교적 최근 영성 저술가에 이르기까지, 그는 빠짐없이 읽고 또 읽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그가 막상 책을 쓰기 시작했을 때, 그가 읽은 수많은 고전을 하나로 통합하여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진리만을 뽑아냈다는 사실이다. 그는 굳이 참고한 저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그의 손에서 신비주의자의 가르침은 수도원과 가톨릭에 제한되지 않았다. 복잡성이 제거되고 본질만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 그건 바로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한 사도 바울의 기본 가르침이었다. 바울의 메시지는 간단했다. 우리 모두 예외 없이 “하나님과 영혼의 연합, 신성한 본성에 대한 진정한 참여”를 경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쿠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를 인용하여 설명한다. “사도 바울이 말씀하셨듯, ‘우리 안에서 만들어진 그것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이시다’”(44).참된 종교가 무엇인가? 이 책의 중요성에 대한 실마리는 이 책을 통해서 “참된 종교”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고 말한 휫필드로부터 찾을 수 있다. 모든 진지함과 규율, 모든 종교적 준수와 성실함에도 불구하고 휫필드는 여전히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에 관한 핵심적 실재를 발견하지 못했다. 종교적 의무를 종교의 본질로 간주하지 않는 스쿠걸로 인해서 휫필드는 놀랐다. 의무는 본질이 아니었다. 그건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서 휫필드는 당시를 회상했다. ‘세상에! 이것이 참된 종교가 아니라면, 무엇이 참된 종교이겠는가?’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로 내게 보여 주셨다. 몇 줄을 더 읽었다. “참된 종교는 하나님과 영혼이 결합하는 것이고,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가 형성되는 것이다.” 신성한 빛의 광선이 내 영혼에 순간적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때까지 나는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다(George Whitefield’s Journals, 47)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휫필드에게 돌파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영적 삶의 중심이라는 사실의 발견이었다. 다른 모든 것은 여기서 흘러나올 뿐이다. 장 칼뱅은 기독교강요 3권 서두에서 비슷한 말을 했다. 성령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전까지는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사역은 우리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다.올바른 교리, 올바른 실천, 올바른 도덕, 이 모든 것이 다 훌륭하고 좋지만, 본질 그 자체는 아니다. 기독교 또는 “참된 종교”의 본질은 영혼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새로운 생명 원리를 갖는 것이다. 기독교는 단순한 사상이 아니다. 스쿠걸은 이렇게 말한다. “종교의 본질을 신성한 삶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더 완전하게 표현하는 다른 길이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44). 하나님 그분이 내 안에 거하시고 사시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생각이 책의 제목,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에 담겨있다. 이것은 스쿠걸이 다룬 위대한 주제였다. 종교에 대한 모든 잘못된 생각을 정리한 후, 그는 이 한 가지 명령에 모든 주의를 집중했다. 그는 독자가 경험하기를 원했다. “나의 사랑하는 친구여, 우리는 가장 진지하고 엄숙한 생각이 오로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도록 하는 데에만’ 고정되도록 만들어야 한다”(126).내 안에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면서도 종교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건, “꼭두각시도 사람이라 불릴 수 있다는 말”(48)과 같다. 그러나 그리스도 자신이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면, 비로소 그분의 생명 자체가 영혼에서 촛불처럼 빛난다. 스쿠걸은 말한다. “아니, 그건 그분의 본성에 대한 참된 참여이며, 영원한 빛의 광선이며, 무한한 선하심의 대양에서 떨어지는 한 방울의 물이다. 그리고 그것을 덧입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 안에 거하신다’고, 또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가 형성되었다’라고 말한다”(49).감각으로 육신의 삶을 특징짓듯, 영적 삶은 “영적인 것에 대한 일종의 감각 또는 감정적 설득”인 믿음으로 특징짓는다. 그리고 그것은 일반적인 믿음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55)이다. 활동적인 생명 원리로서 이 신성한 생명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 마음의 순결, 그리고 마음의 겸손에 있어서 우리를 더욱 그리스도처럼 만들기 위해 작용한다. 참된 종교의 뛰어남훌륭한 영적 고전은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알려줄 뿐 아니라, 그것을 향한 열망까지 불타게 한다. 스쿠걸의 책이 가진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 두 번째 부분에서, 그는 신성한(divine) 삶이 주는 아름다움을 설득력 있는 그림으로 묘사한다. 제대로 알기만 한다면, 신성한 삶이야말로 우리가 평생 진정으로 갈망하던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그렇게 되기 위해서 애초에 창조되었다. 인간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은, 세상이 결코 채울 수 없는 욕망을 그는 심리학자 못지않게 이해하고 있다. 영혼에는 “사납고 꺼지지 않는 갈증, 즉 비물질적인 종류의 불 … 성가신 갈망이 있다”(112-13). 그리고 그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가 근본적으로 창조주를 향한 피조물의 갈망임을 제대로 이해하도록 우리 시선의 방향을 돌린다. 그는 묻는다. “하나님을 위해 만들어진 열정에 감히 맞서거나 그 열정을 만족시킬 수 있는 인간의 아름다움 또는 선함이 뭐가 있는가? 그건 한 꺼풀 벗겨내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존재 전체를 다 잃어버릴 정도가 되려면 … 그분의 선하심에 나 자신이 온통 다 빠져서 삼켜질 정도가 되려면, 도대체 어느 정도나 무한한 기쁨이어야 가능할까?”(74, 78).아, 무한한 즐거움! 하나님을 따르는 건 내가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포기하는 건 아닐까 고민하던 내 젊은 시절을 기억한다. 그러나 시편 16편을 읽으면서 나는 전환점을 맞았다. “주님께서 몸소 생명의 길을 나에게 보여 주시니,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삶에 기쁨이 넘칩니다”(시 16:11). 스쿠걸에 따르면, 이 구절은 이렇게 바꿀 수 있다. “자신을 존재의 창조자에게 온전히 바치고 거룩하고 헌신된 존재가 되었음을 자각하기 전까지 … 영혼은 결코 견고하고 본질적인 기쁨을 알 수 없다”(78).하나님을 믿어서 놓치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것처럼 잘못된 생각도 없다. 하나님과 연합하는 삶은 차마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도 더 큰 기쁨을 약속한다. 모든 욕망의 물줄기가 하나님과의 연합이라는 바다로 흘러 들어가며 깨끗하게 비워진다. 실질적 인도스쿠걸은 하나님과 연합한 생명의 유지에 관해서 실용적인 조언을 제시한다. 온 하늘이 우리를 위해서 관여하고 있으며 언제라도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 “우리는 왜 진정한 선과 보편적 사랑이 우리 영혼을 지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할까?”(96). 우리에게는 취할 수 있는 조치가 있다. “도랑에서 배회하며 전능하신 분께서 우리를 거기서 끌어내 주실 때까지 단지 기다리기만 해선 안 된다”(98).첫 번째로, 영혼에 신성한 생명이 거하길 진정 원한다면, 죄를 피하고 유혹을 경계하라고 스쿠걸은 조언한다. 독을 마시면서 몸이 나을 거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는 우리가 영혼을 더 깊이 살피는 데 도움이 되는 몇 가지 자기 성찰 방법을 설명한다. 또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는 기도와 묵상에 대한 조언을 제공하며, 더불어서 “숙고”하는 습관을 실천하라고 촉구한다. 배우자가 사랑하는 사람의 특성을 숙고하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완전성을 숙고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모여서 사랑을 키우는 역할을 한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선물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숙고해야 한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친구에게서도 사랑스러운 점을 발견한다. 한번 상상해보라. 친구 속 아름다움은 고작해야 한 방울의 물에 지나지 않는다. 한 방울에도 이토록 달콤함이 넘친다면, 무한한 샘에는 도대체 얼마나 엄청난 달콤함이 들어있을까?” (122). 이런 사고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애정을 키울 수 있다.이 땅의 계속되는 순례길에서 우리가 종종 절망에 빠지는 유혹을 받는다는 사실을 스쿠걸은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처럼 약하고 미천한 피조물을 돕기 위해 성령을 보내셨다. 성령이 붙잡고 있는 곳이라면, 영혼 속 하나님 사랑의 가장 희미한 불꽃이라도 남은 곳이라면, 성령께서는 반드시 그 영혼을 지키신다고 그는 격려한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작은 불꽃도 결국에는 홍수도 끌 수 없는 커다란 화염으로 만들 것이다”(95). 따라서 영적 고갈을 느낄 때면, 단순하게 기도할 수 있다. “주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당신에게 지금 모습 그대로 바칩니다.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소유입니다.” 또는 스쿠걸의 조언처럼 할 수도 있다. “나를 내려놓자, 그리고 우리 자신을 그 분께 천 번을 드리자”(117).책을 들고 읽으라조나단 에드워즈는 인류에게 ‘참된 종교의 본질은 무엇인가’보다 중요한 질문은 없다며 신앙감정론이라는 위대한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스쿠걸을 읽었다. 신앙감정론을 쓸 때 과연 그 책을 생각했는지가 새삼 궁금하다. 이 중요한 질문에 대해서 스쿠걸은 가장 훌륭하고 또 간단한 답변 중 하나를 제시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참된 종교가 무엇인지 궁금한 사람이라면, 또 “사람의 영혼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는지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스쿠걸의 이 작은 책은 충분히 다시 읽을 가치가 있다.원제: The Life of God in the Soul of Man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기독교고전
헨리스쿠걸
인간의영혼안에있는하나님의생명
신비주의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 (4) : 복음 생태계
by 고상섭
2023-06-14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팀 켈러가 그토록 사랑했던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이제 눈물이 없는 곳에서 기뻐할 팀 켈러를 생각하면 위로가 되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에겐 그가 떠난 빈자리가 너무나 크게 느껴진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인 존재로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발자취를 남겼다. 그와 그의 삶이 우리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 몇 가지를 되돌아보며 그를 기억하고자 한다. 팀 켈러가 남긴 유산이 많지만, 여전히 팀 켈러가 이루지 못한 비전이 있다면 아마도 연합을 통한 복음 생태계를 만드는 일일 것이다. 팀 켈러는 뉴욕에 교회를 개척하면서 복음으로 변화된 사람들의 수가 전체 인구의 10퍼센트가 되기를 꿈꾸었다. 하지만 그 비전은 아직 진행 중이며, 팀 켈러의 정신을 이어받은 사람들의 몫으로 남아있다. 그가 꿈꾸었던 복음 생태계는 어떤 것인가? 팀 켈러를 대표하는 책, 센터처치는 세 가지 중요한 신학적 비전을 담고 있는데, 복음-도시-운동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신학적 비전은 각각의 정의와 내용이 있지만, 전체가 하나의 비전이 되기도 한다. 복음을 통해 도시의 문화를 변화시키는 운동성을 가지자는 명제를 묶어서 복음도시운동(Gospel City Movement)으로 표현하기도 한다.[1]복음적 겸손 팀 켈러가 말하는 복음 생태계는 단순한 교회 연합운동이 아니다. 복음도시운동은 말 그대로 복음을 통해 연합하여 도시와 문화를 변화시키는 운동이다. 복음을 통하지 않으면 단순한 인간의 연합일 수밖에 없고 인간적 연합은 상호 이익에 기반할 수밖에 없다. 참된 연합은 복음적 겸손이 뿌리에 있어야 한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설명할 때도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21) 권유한다. 남편과 아내가 연합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기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죄인임을 인정하고 성령님의 역사에 기대어 자기를 부인할 수 있어야 한다. 부부의 연합은 단순히 인간적 노력으로 연합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복종이며, ‘그리스도를 경외할 때’ 가능해진다.[2]지역교회의 연합도 마찬가지이다. 한 교회가 지역 전체를 전부 품을 수 없다는 복음적 겸손이 서로를 연합을 시작하게 한다. 팀 켈러는 도시 전체가 복음으로 변화되려면, 도시 안에 효과적인 몇몇 교회가 있는 것 이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3]또 연합을 위해서는 복음적 겸손이 전제되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어떤 교회의 모델이나 신학 전통이 되었든 한 종류의 교회가 도시 전체를 전도할 수 없다. 도시를 전도하려면 다른 교회들과 기꺼이 협력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비록 다른 신념과 관심을 가진 교회들이라 할지라도 이런 관점을 ‘범 교회성’(Catholicity)이라고 부른다.”[4]리더머 교회를 개척했을 때 팀 켈러는 이 교회가 뉴욕이라는 도시를 불쌍하게 내려다보는 잘못된 경향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교회가 스스로를 도시의 구원자인양 여기는 것은 해로운 생각이었다. 복음적 겸손은 도시와 사람들을 존경하며 배운다. 그리고 기꺼이 그들의 삶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일반은총을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복음을 가진 교회가 세상에 줄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은 어쩌면 복음 전도를 막는 장애물이 될 수 있다.[5] 빌립보서 2:3에서 바울은 복음적 겸손을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설명한다. 교만은 남보다 나를 낫게 여기는 것이고, 겸손은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이다. 복음적 겸손은 연합의 핵심 뿌리이자 그 전제조건이 된다. 기독교는 구원받은 순간부터 겸손할 수밖에 없는 종교이다. 왜냐하면 행위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구원을 얻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은 다른 신앙을 가진 이들도 선량함과 슬기로움을 갖추고 있음을 믿게 할 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 상당수는 윤리적으로 자신들보다 더 뛰어난 삶을 산다는 인식을 구성원들에게 심어준다. … 하나님의 은혜는 남들보다 윤리적으로 더 나은 삶을 사는 이들이 아니라 제대로 살지 못하는 현실을 인정하고 구주가 절실하게 필요함을 깨닫는 이들에게 임한다. 기독교는 스스로의 윤리적인 공로나 지혜, 덕성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이루신 역사 덕분에 하나님의 용납을 받은 까닭이다.[6]또 복음적 겸손이 연합을 이룰 수 있는 이유는 겸손은 다른 사람에 대한 비판을 멈추기 때문이다. 연합을 방해하는 요소는 ‘다툼과 허영’이다. 팀 켈러의 전기를 쓴 콜린 핸슨은 팀 켈러를 추모하는 글, “나의 영웅, 팀 켈러”에서 자신은 팀 켈러가 한 번도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없다고 고백한다. 나는 팀 켈러가 다른 사람에 관해서 이런저런 말을 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다. 십자가에 대해 많은 말을 한 사람에게서 우리가 기대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내 목회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 그렇지 않은 게 일반이다. 나 역시 고백하기보다는 비판하는 데 더 많은 말을 낭비했다. 안타깝게도, 불평을 들어줄 귀는 어디서든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런데 팀 켈러는 달랐다. 그는 단 한 번도 내게 전화해서 자기가 중상모략을 당했다며 화를 내지 않았다.[7]팀 켈러는 “논쟁에 관하여”라는 존 뉴턴의 다음 글을 자주 인용했다. 친구들에게서 오는 비판에는 보통 핵심이 있고, 실제로 당신을 아는 사람들이 당신에게 동의하지 않을 때 거기에 진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책망이 일부 또는 심지어 크게 잘못되었더라도, 당신이 정말로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십시오. 아마도 당신이 신중하지 못하게 행동했거나 발언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비평가가 제시하는 비판이 근거가 틀렸더라도 그의 지적은 일부나마 옳을 것입니다. 그 비판의 근거가 잘못되었더라도, 자신의 부족함을 확인하고 주님 앞에서 마음을 다해 회개하고 겸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비판으로부터 배울 수 있을 것이며, 비판하는 이의 말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비판하는 그 사람을 정중하게 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8]복음적 겸손은 비판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에 연합을 가능하게 한다. 지역교회의 연합 복음적 겸손은 범 교회성을 강화하고 또한 분파주의를 타파한다. 노회와 총회로 연합하는 교단별 연합이 아니라, 지역에 있는 다른 교단과 함께 연합할 때 지역 전체를 더 효과적으로 섬길 수 있기 때문이다. 리디머 교회는 수년 동안 다른 교단이 교회를 개척할 때 그곳에 재정과 자원을 보냈다. 장로교회뿐 아니라 오순절, 침례교, 성공회 교회가 개척하는 것을 도왔다. 이런 노력에 날카롭게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팀 켈러는 이것이 범 교회성을 실현하는 한 가지 분명한 방법이라 믿었다. 분열된 그리스도인 교회들과 교단들을 도시 운동으로 바꾸는 방법이었다.우리가 다른 종류의 교회들을 깎아내리거나 비판한다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관용이 없다는 보편적인 비판에 빠지게 된다. 만일 우리가 연합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우리를 실패한 이들로 볼 것이다. … 신학적 특징을 공유하는 교단들과 지속적으로 함께 하려고 애써야 하지만, 지역 수준에서 다른 교회들과도 협력하는 방향으로 일해야 한다.[9]한 지역을 효과적으로 섬기려면 지역의 모든 교단의 교회들이 연합해야 한다. 에드먼드 클라우니는 그리스도가 환영하는 사람들을 교회가 배제할 수 없다고 못 박으며 분파주의는 이것을 부인한다고 소리를 높였다. “다른 지체들을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요구하시는 교제를 거부하는 것이다.”[10]교회 성장학을 중심으로 도날드 맥가브란이 주장한 ‘동질성의 원리’라는 것이 한때 유행한 적이 있었다. 교회에는 비슷한 문화와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이 모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도할 때도 명확한 대상을 선정해서 문화적으로 동질성을 가진 사람들을 교회로 모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지역사회와 교회 지도자가 잘 맞지 않을 때는 ‘당신의 교인을 재구성하라’는 과감한 말을 하기도 한다.[11]그러나 복음은 나와 잘 맞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인간이 되셔서 죄인들과 함께 거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팀 켈러는 복음은 소외되고 힘든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내려가는 성육신의 원리를 실천하는 것이라 말한다. C. S. 루이스의 대표작 순전한 기독교의 원제는 Mere Christianity이다. ‘순전한 기독교’보다는 ‘그냥 기독교’에 가깝다. 감리교, 장로교, 침례교, 오순절 교회는 각각 다른 교파이며 교리의 차이점이 있다. 각 교단의 차이점이 아니라, 그 모든 교단을 공통으로 묶고 있는 기독교, 곧 ‘공통 기독교’를 말한다. 개혁주의 교회와 감리교의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가지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장로교, 침례교, 오순절이 모두 천국에서 만난다면 우리를 함께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는 공통적 요소에 집중해야 하고, 그 공통된 요소인 복음만이 지역교회를 연합시킬 수 있다. 그래서 팀 켈러는 지역교회를 복음으로 연합하기 위해 범 교회성과 비 분파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복음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다른 사람들과 연합하게 한다. 복음 생태계한 지역에서 한 교회가 빠르게 성장할 때, 하나님의 일하심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믿지 않는 사람의 숫자가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재배치’ 즉 기존 교인들이 다른 교회로 이동하는 수치상의 부흥인 경우가 많다. 보통 활력이 떨어진 교회들로부터 신자들이 이동함으로써 한 교회가 성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평 이동으로 몇몇 교회가 성장하는 것이 부흥이라면 전반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은 도시 안에서 전혀 성장하지 못하고 단지 재배치되는 것뿐이다. 도시 전체의 부흥이 일어나는 복음도시운동이 되려면 복음으로 도시를 변화시키는 운동성이 필요하다. 팀 켈러는 지역교회의 운동성을 위해 복음 생태계(Gospel Ecosystem)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을 ‘생태계’라고 말하는 이유는 자연 생태계가 유기체들과 시스템, 자연의 힘이 상호작용하며 균형을 이룰 때 자라는 것처럼 복음 생태계도 교회 조직과 사상, 개인과 성령님의 힘이 함께 상호작용하는 균형을 이룰 때 전체 지역교회가 건강성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복음’ 생태계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러한 유기적 균형은 오직 ‘복음’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팀 켈러는 진정한 부흥은 인간의 노력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가 있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원예의 비유’를 자주 든다. 인간이 최선의 노력으로 씨를 뿌리고 물을 주어야 하지만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내리지 않으면 농작물을 풍성하게 수확할 수 없게 된다. 인간의 노력이 없어도 수확하지 못하지만, 아무리 인간적인 노력을 기울여도 비가 내리지 않고 햇빛이 적절히 비치지 않는다면 열매를 기대할 수 없다. 정원이 무성해지려면 원예사의 기술과 근면, 그리고 땅의 생태와 기후가 모두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그래서 두 요소는 함께 강조되어야 한다. 첫째, 인간적으로 운동에 이바지할 수 있다. 둘째. 그러나 철저하게 하나님께 속한 영역임을 기억해야 한다. “성령님의 섭리 없이는 복음 운동을 만들 수 없다. 운동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힘을 받고 복을 받는 생태계와 같다.”[12]팀 켈러는 성령께서 사용하셔서 복음도시운동을 일으키는 생태계를 세 개의 동심원으로 설명한다. 1) 첫 번째 원: 상황화된 비전 ‘상황화된 비전’이란 복음을 소통하고 구체화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복음을 도시 문화에 상황화할 때 비로소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로 오고, 믿는 사람들이 다시 복음 안에서 회심하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 도시에서 복음 운동을 촉진하는 교회들이 모두 동일한 예배 스타일을 공유하는 것은 아니지만, 동일한 ‘복음 DNA’를 공유할 때 복음 중심적이며 문화에 기울이며 균형이 있고 선교적인 교회가 될 수 있다. 지역 연합의 핵심에는 상황화된 신학적 비전의 공유가 있다. 2) 두 번째 원: 교회 개척과 교회 갱신 운동들복음이 바르게 선포되면 두 가지 일이 일어난다. 하나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고, 또한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복음을 재발견하며 참된 신앙으로 돌아오는 회개 운동이 일어난다. 이 일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교회개척 운동이다. 오래된 교회가 갱신되기 위해서 다양한 방법들을 사용하지만 역부족인 경우가 많다. 팀 켈러는 오래된 교회가 갱싱하려면 교회 분립, 즉 교회 개척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흔히 생각하기에 교회가 부흥해야 분립 및 개척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팀 켈러는 패러다임을 전환하며 교회를 개척하고 분립해야 교회가 건강해진다고 주장한다. 도시의 그리스도인을 증가시키는 주된 방법은 교회 부흥이 아니라 교회 개척을 통해서다. 정체된 교회들이 부흥의 국면에 들어가서 성장할 때, 대개는 다른 교회들로부터의 수평이동에 의존한다. … 미국 교회에 대한 여러 연구 결과에 의하면, 새로 시작한 교회들의 교인은 삼분의 일 내지 이가 전에는 교회에 다니지 않던 사람들이다. 이에 비해 10-15년 이상 된 교회들에 등록하는 새 교인들은 80-90퍼센트가 이미 다른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이다.”[13]100명의 교인이 있지만 계속 성장하지 않고 정체된 교회가 있다면, 50명을 떼어서 교회를 개척하게 되면 개척된 50명은 새로운 교회의 역동성을 가지기 때문에 지역 안에서 다양한 새 신자를 품을 수 있게 된다. 또한 남아있는 50명의 모교회도 새로운 교회들로부터 도전을 받아 새로워진다. 1년 뒤에 두 교회는 성장하지 않았던 100명의 한 교회가 아니라 역동성이 있고 계속 성장해 가는 두 교회가 되고 성도들의 숫자도 100명이 훨씬 넘는 숫자가 될 것이다. 도시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하나의 예배 스타일이 아닌 다양한 스타일의 예배가 있을 때 더 많은 사람이 자신들에게 맞는 교회로 찾아가게 될 것이다. 새로운 세대, 새로운 거주민들, 새로운 집단을 전도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언제나 새로운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기존의 큰 규모의 교회보다 개척교회들은 변화가 쉽고, 다양한 사람들의 감수성을 반영하기 쉬운 이점이 있다. 예를 들어 백인들만 살던 지역에 33퍼센트의 중남미계 사람들이 들어온다면 의도적으로 이중 인종을 추구하는 교회가 새로운 거주민들에게 문화적 공간을 훨씬 잘 만들어 낼 것이다. 새 집단이 미국 문화에 충분히 동화되어 교회로 오기를 바란다면, 그들을 전도하지 못한 채 수년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14]결국 한 도시 전체에서 그리스도인의 숫자를 확실하게 늘리는 유일한 방법은 새로운 교회의 숫자를 확실하게 늘리는 것이다. 팀 켈러가 은퇴 후에 리디머 교회를 세 개의 교회로 나눈 이유도 교인 수 4,000명의 대형 교회 하나보다 교인 수 400명 되는 10개의 교회가 훨씬 더 역동적이고 전도에 효과적이며 지역사회의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인 4,000명인 한 교회와 400명의 10개의 교회가 각각 1년이 지난 후 교인 수를 비교하면 어떻게 될까? 작은 10개의 교회에서 교인 수가 훨씬 더 증가했을 가능성이 크다. 교회를 분립하거나 개척하는 것이 교회를 먼저 부흥시켜서 나누는 것보다 더 좋은 대안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3) 세 번째 원: 특화된 사역들세 번째 원은 교회를 자극하고 함께 도움을 주는 다른 기관들과 연합하는 것이다. 도시의 중보를 위해 함께 기도하는 운동이 필요하다. 부흥의 역사는 언제나 중보기도의 역사였다. 기도는 신학적 관점이나 교리보다 교회를 더 하나로 연합시킨다. 기도는 교단과 조직적 경계를 뛰어넘어 친목과 관계 형성을 돕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또한 자신과 비슷하면서도 차이가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협력할 때 더욱 성장과 혁신을 일으킬 수 있다. 특정 그룹들은 다양한 단체들을 말한다. 캠퍼서 사역과 청소년 사역 등 특화된 복음 사역의 사람들과 미래의 지도자들을 세우는 연합을 말한다. ‘정의와 자비’ 사역은 지역의 사회적 문제와 경제적 필요들을 채우는 데 연합하여 일하는 것을 말한다. 구체적인 연대를 통해 한 교회가 돕는 것보다 더 효과적으로 또 체계적으로 지역을 섬길 수 있게 된다. 복음과 직업을 연결하는 사역은 도시 안에 직장의 영역을 변화시키는 연합운동이다. 이런 연합운동을 통해 지역 내에 교회 및 다양한 선교단체 심지어 NGO 단체와 연합하여 전체 지역을 섬기고 발전시키는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티핑 포인트티핑 포인트는 작은 변화들이 일정 기간 축적되어 작은 변화가 하나만 더 일어나도 갑자기 큰 영향을 초래하는 시점을 말하는 단어이다. 물이 100도에 끓는다면 99도에서 더해지는 마지막 1도의 상황이다. 팀 켈러는 복음 생태계를 통해 지역을 변화시키는 티핑 포인트를 뉴욕이라는 도시에 복음으로 변화된 사람들의 숫자가 10퍼센트가 되는 지점으로 예상했다. 지역사회에서 새로운 종류의 거주민들이 인구의 5퍼센트를 차지하기 전에는 전반적으로 큰 변화가 없다. 그러나 5-22퍼센트에 도달하게 되면 전체 지역은 이들로 인해 움직이기 시작하며, 빠르게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뉴욕시의 경우 소수 집단들이 삶의 방식에서 감지할 만한 영향력을 가지는 것은 그들의 숫자가 최소 5-10퍼센트이면서 동시에 구성원들이 공공 생활에 적극적으로 나설 때이다. 내가 들은 바로는 감옥 안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수감자들의 수가 10퍼센트에 도달하면, 감옥의 집단생활과 문화 자체가 변화된다고 한다. 도시의 티핑 포인트를 정확하게 알아내는 과학적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지점은 복음이 도시 생활고 문화에 가시적인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는 때이다. 우리는 뉴욕시에서 도심 인구의 10퍼센트가 복음 중심적인 교회에 참여하는 때가 오기를 위해 기도하며 사역하고 있다.[15]팀 켈러는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이 처음 뉴욕에 와서 사역을 시작했을 때, 복음을 통해 뉴욕에 헌신하는 전문직 종사자들은 1퍼센트에 불과했다고 한다. 25년이 지난 지금 5퍼센트 정도로 성장했다고 고백했고 이런 연합운동을 통해 궁극적인 목표는 10퍼센트가 넘는 것이라 말했다. 인터뷰를 하고 25년이 지난 시점이었고, 지금은 30년이 지난 시점이지만 팀 켈러가 꿈꾸었던 10퍼센트는 아직 도달되지 않았다. 그러나 팀 켈러는 소망에 가득 찬 목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상상해보라, 만일 맨해튼과 같은 곳에 많은 신자들이 있어서, 대부분의 뉴요커들이 자기가 존경하는 한 명의 그리스도인을 실제로 안다면 어떤 일어나겠는가? 많은 도시 거주민들을 기독교의 메시지로부터 방해하는 강력한 장벽들이 제거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수만 명의 영혼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된다. … 도시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술, 과학, 학문, 기업 등에서 핵심 역할들을 수행할 때 그리고 동시에 그들이 가진 권력, 재물, 영향력을 사회의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의 선을 위해 사용할 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16]팀 켈러는 이제 우리 곁에 없지만 그가 남긴 복음 생태계의 비전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CTC코리아 이사들이 함께 쓴 팀 켈러를 읽는 중입니다에는, 팀 켈러의 소천 이전이지만,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복음으로 변화된 그리스도인들의 숫자가 도시 가운데 충분히 많아져서 그리스도인의 영향력이 도시의 공공 및 사회생활 가운데 눈에 띄게 드러나고 인정할 만한 수준이 되면 도시가 변화된다. 팀 켈러는 이런 비전을 가지고 계속 기도하고 있고, 자신이 죽어도 이 비전은 계속 되어서 뉴욕의 10퍼센트의 복음의 증인들이 뉴욕을 변화시킬 날을 기대하고 있다.[17]팀 켈러는 자신이 죽어도 이 비전은 계속되기를 기도하고 있다는 말이 새삼 더 크게 마음에 와닿는다. 팀 켈러의 가까운 친구이자 동료였던 D. A. 카슨 교수는 팀 켈러를 추모하는 글에서 아벨은 죽었으나 여전히 말하는 것(히 11:4)처럼 팀 켈러의 비전도 그가 죽었지만 여전히 이 땅에서 회자되고 이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팀 켈러의 복음 생태계의 비전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리고 천국에서 복음으로 변화된 뉴욕의 10퍼센트의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기뻐할 것이다. 동시에 한국에서도 각 지역의 도시에서 복음 생태계를 통해 변화의 티핑 포인트가 달성되기를 소원하고 기도한다. 복음은 우리를 연합시킨다. 그 연합은 복음의 생태계를 구축하여 이 땅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다시 돌아오게 할 것이다! 주1. 팀 켈러, 센터처치, 778.2. 팀 켈러, 결혼을 말하다, 84-85.3. 같은 책, 779. 4. 같은 책, 772.5. 같은 책, 357.6.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 55.7. Collin Hansen, “나의 영웅, 팀 켈러”8. Collin Hansen, “나의 영웅, 팀 켈러”에서 재인용9. 센터처치, 774.10. 같은 책, 776.11. 릭 워렌, 새들백 교회 이야기, 204.12. 같은 책, 783.13. 같은 책, 755.14. 같은 책, 759. 15. 같은 책, 788. 16. 센터치치, 788-78917. 전재훈, 고상섭, 박두진, 팀 켈러를 읽는 중입니다, 209.
복음생태계
팀켈러
상황화
교회개척
겸손
사실, 감정, 그리고 하나님의 신실하심
by Adam Mabry
2023-06-13
“하나님, 도대체 어디에 계세요?”절망에 빠져 눈물 흘리며 이런 기도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가족의 질병이든, 교회 문제이든, 죄가 초래한 마음의 상심이든, 내 인생을 되돌아보면 하나님이 없는 거 같이 느낀 순간이 적지 않다. 이건 비단 나 혼자만 느끼는 감정이 아닐 것이다. 살다 보면 어느 시점에서는 (어쩌면 아주 많은 시점에서) 사실과 전혀 부합하지 않은 상태인데도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강하게 느끼기도 한다. 고통과 트라우마와 슬픔을 겪으면, 머리는 하나님이 항상 곁에 계신다고 상기시켜 주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다며 멀리 계신 하나님을 비난한다. 사실과 감정, 함께하심과 부재 사이의 불협화음을 해결하지 않고 방치하면, 그나마 다행스럽게 낙담 정도로 끝날 수도 있지만, 최악으로는 믿음 자체가 파괴될 수도 있다.하나님이 떠나고 없다고 느낄 때,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에만 집착하면 마음이 굳어질 뿐이다인생이 무너질 때, 내가 의지한 것은 견고한 진리의 발판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facts)은 그 자체가 담고 있는 의미만으로도 측량할 수 없는 위로를 줄 수 있다. 그러나 인기 있는 어느 팟캐스터의 단골 메뉴 문장을 인용하자면, “사실은 당신의 감정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세상에는 감정을 무시하거나 억누르며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수도 없이 빠진 시궁창이었다.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면서 내 인생을 향한 몇 구절의 성경 말씀을 고백하며 앞으로 더 열심히 살자고 다짐하곤 했다. 이게 내가 늘 하던 방식이었다. 이런 식의 접근 방식은 단순하다. “하나님이 멀게 느껴지니? 아니야. 전혀 그렇지 않아. 하나님은 지금도 네 곁에 계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걸 진짜 느낄 때까지 느끼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살아. 그러다 보면 결국에는 진짜 느끼게 될 테니까. 진리는 네가 느끼는 감정과 아무런 관계도 없어. 그러니까 그냥 믿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얼핏 보면 이런 식의 접근 방식에도 지혜가 담긴 것 같다. 감정이 하나님을 비난할 때, 성경 말씀을 고백하고 담대하게 선포하는 것은 우울증의 수렁에서 벗어나는 여정의 시작으로 아주 좋은 방법이니까. 그러나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무엇이 거짓인지를 제대로 분별하지 않은 상태에서 고백하는 진리는 종종 진리의 그릇된 적용이라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비록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그분이 결코 나를 떠나지 않으신다는 성경의 약속을 고백한다면, 나는 진실한 말을 한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내가 감정의 목소리에 제대로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나는 어쩌면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거짓을 대면할지도 모른다. 조금만 깊이 생각해도, 하나님의 부재가 주는 느낌이야말로 나를 몹시 두렵게 만든다는 점을 깨달을 것이다. 따라서 누구나 감정을 깊이 관찰하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고 곧바로 하나님의 부재라는 거짓말과 대결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곤 한다. 그 결과 우리는 나를 성장시키는 데 도움을 주는 중요한 성경의 진리를 고백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 성급한 마음에 감정을 무시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좋은 감정이라는 선물을 마치 무용지물인 양 취급하는 완고하고 굳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될 것이다. 감정만 중시하면 불안정한 존재가 된다감정을 무시하는 접근 방식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실패하기 마련이고, 결국 나는 모든 통제력을 잃고 감정이 내 존재 전체를 장악하는 상황을 맞게 된다. 그 결과가 무엇일까? 내가 느끼는 모든 감정, 고통, 슬픔, 연민, 두려움이 나를 장악하도록 허용한다. 심지어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향해 비난을 퍼붓는 감정까지도 오롯이 나를 잡아먹도록 방치한다. 결국 분노에 빠진 나는 울부짖을 것이다. 그리고 내게 가장 소중한 관계를 해치는 감정의 폭발까지도 서슴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당신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아담, 당신 지금 꽤나 불안정하게 보이는데.” 그렇다. 그게 바로 요점이다. 불안정이야말로 과잉 감정이 초래하는 결과이다. 세상에는 감정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수준을 넘어서 아예 감정이 존재 전체를 지배하도록 허용하는 사람이 있다. 자기 연민의 진창 속에서 뒹굴면서도,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향한 타인의 공감까지도 무기로 만들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진짜 느끼는 게 어떤 건지 알고 싶어? 그러면 내가 뒹굴고 있는 진창 속에 당신도 들어와. 안 그러면 나는 당신이 나를 정말로 공감하고 있다고 도저히 느낄 수 없으니까.” 서양인 대부분이 감정 표현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방법이라고 강조하는 이야기와 노래, 시트콤 따위에 물들어있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의 길이지 결코 교회의 길이 아니다. 하나님이 떠난 것 같아서 분노할 때, 우리는 결국 처음보다 훨씬 더 나쁜 상황에 놓일 뿐이다. 신실하신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감정과 믿음 시간과 시련은 세상의 방법이 지혜의 길이 아님을 가르쳐주었다.성경은 하나님의 부재라는 극심한 상황을 직면한 위대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박국의 시작은 하나님의 오랜 침묵 이후이다. 하박국 선지자는 “얼마나 더 살려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까?”(합 1:2)라는 기도로 시작한다. 다윗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시 22:1)라고 탄식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부재가 주는 감정, 심지어 하나님이 자신을 버렸다는 극심한 감정을 경험하고서도 여전히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하나님이 떠난 것 같아서 내 감정이 불타오를 때도, 그는 여전히 일하시며 내가 다가오기를 원하신다. 감정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깨달은 것은 내게 혁명과도 같은 전환이었다. 하나님은 내가 내 감정을 온전히 느끼길 원하신다.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 감정까지도 들고 당신께 나아오길 원하신다. 하나님이 선하지 않다고 느낄 때도, 하나님이 귀를 막고 있다고 느낄 때도, 심지어 지금 나와 함께 계시지 않는다고 느낄 때도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당신에게서 원하시는 길이다. 정체성에 집착하는 거짓된 복음에 빠진 오늘의 문화는 내가 가장 진실하다고 느끼는 것만을 표현하면서 살라고 요구한다. 오로지 그런 표현만이 진실하고 진정성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부재라는,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최악의 경험조차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현실로 바꾸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게 가능하다고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 괜찮다. 감정은 당신이 어떻게 느끼는지를 알려주는 데에만 유용할 뿐이다. 그러나 당신이 감정을 직시하고, 그 감정까지도 하나님께 가져오면 어떻게 될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이 당신 영혼의 바늘을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가까워진 하나님을 느끼면서 당신은 이제 이전보다 그를 더 잘 알게 된 것이다. 이런 값진 선물은 하나님이 떠나고 안 계시는 것 같을 때만 주어진다. 이 글은 The Good Book Company와 협약하에 Adam Mabry의 When God Seems Gone에서 간추렸다. 원제: Facts, Feelings, and the Faithfulness of Go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하나님의함께하심
하나님의임재
하나님의부재
감정
사실
하나님의신실하심
다음세대 전도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by 김선일
2023-06-12
심플리 미셔널Simply Missional탈교회화, 비종교화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선교 과제로서 복음을 새롭게 제시합니다. 기독교의 변증 유산으로부터 오늘을 위한 복음 변증의 지혜를 발굴하고, 현대 한국의 문화적 표현들과 복음의 대면이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그리스도인 가정의 아이들은 중요한 전도의 대상이다. 전도는 교회 밖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전도는 교회 안에서도 이루어진다. 교회 안에 있으나 믿음이 불분명한 명목상 신자들도 전도의 대상이다. 현재 부모를 따라 교회에 나오는 믿음의 자녀들도 앞으로 성인이 되면 신앙에 관한 주체적 선택을 해야 한다. 많은 교회에서 경험하듯, 초등학생에서 중고등학생으로, 그리고 중고등학생에서 대학생으로 성장할 때마다 아이들이 신앙을 떠난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다음세대가 신앙을 지속할 것인지는 개 교회를 넘어서 한국 교회 전체가 떠안아야 할 과제다. 다음세대를 위한 문화적 맞춤 사역에 주력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 있다. 교회가 지루하고 고리타분해서 아이들이 오지 않으니 교회를 재미있는 공간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 안에 디즈니 만화를 연상시키는 캐릭터들이 기독교 이름으로 채워지는가 하면, 예능프로나 드라마 콘텐츠를 기발하게 모방한 교회 프로그램 포스터와 문구들이 경쟁하듯 선보인다. 세상에서 즐길 만한 게임이나 운동을 교회 안에서 할 수 있도록 시설을 갖춰주면 미래를 대비하는 과감한 혁신으로 주목받는다. 또는 다음세대 사역을 독립 부서로 만들어주기도 한다. 간섭 없이 안전하게 그들만의 예배와 프로그램을 실행하도록 보장해주는 것이 교회가 다음세대를 소중히 여기며 “꼰대력”을 포기하는 결단이라고 여기는 목회자들도 본 적 있다. 아예 어린이교회, 청소년교회, 청년교회 등과 같은 ‘교회 안의 교회’를 지향하기도 한다. 다음세대의 문화적 요구를 파악하며 영적 부흥을 이루려는 이러한 노력은 귀한 헌신이다. 또한 젊은이들에게 교회에 대한 편견이나 종교적 엄숙주의를 해소해 주며 기독교를 더욱 가깝게 하는 시도 또한 현대 사회를 향한 선교적 관점에서 상당한 필요성을 갖는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이러한 시도들이 다음세대에게 신앙을 전하고, 그들의 신앙이 자라 영적으로 성숙하고 제자의 삶으로 살게 하는 필수적 해법이겠냐는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신앙의 성숙이고 뭐고 간에 교회가 재미없어 오지 않으려는 아이들을 어떻게든 끌어모아야 하지 않느냐?’ 나 또한 다음세대에게 교회가 딱딱하고 지루한 곳으로 비치기를 원치 않는다. 아울러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며, 성경 읽고 기도하는 생활이 그들에게 무의미한 형식이나 강요 사항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교회의 다음세대 사역이 현대 문화와 엔터테인먼트 코드를 창의적으로 활용한다고 해서 신앙의 전수와 성장에 정말로 도움이 되는지 의문이 든다.다음세대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우리보다 먼저 대중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서구 기독교도 이와 관련해서 의미 있는 자기반성을 하고 있다. 수년 전 미국의 권위 있는 기독교 잡지인 Christian Century에 기고한 한 청소년 사역자는 처음에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는 창의적이고 유익한 프로그램을 어떻게 제공할 것인가에 초점을 두었다고 한다. 그래서 청소년 맞춤 예배에 현대적 음악과 (성, 이성 교제, 음주 등의) 흥미로운 주제 토론 및 교육적 게임 등을 도입했으며, 정기적으로 사회봉사나 행사도 기획했다. 이 사역자는 교회의 청소년들이 대부분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는 잘 안다고 생각해서 주로 기독교 문화에 주력했다. 그 결과 자신이 그때 사역했던 청소년들 가운데 여전히 신앙생활을 하는 이는 소수에 불과했으며, 자신의 다채로운 문화 사역은 아이들에게 영적으로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고 결론 내린다. 이 사역자는 자신이 아이들의 관심과 기호에는 민감했지만, 아이들이 평생에 걸쳐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를 형성하는 데 역점을 두지 못했다고 술회했다.꽤 오래전부터 교회학교 사역에서 중요한 과제는 교회 전체와 어떻게 유기적으로 통합될 수 있느냐가 되었다. 성인 회중과 분리된 독립적인 다음세대 사역은 한동안 활성화될 수는 있지만, 아이들 자신이 성인으로 자라면서 원 교회에 소속감을 갖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실제로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니다가 성인이 되어서도 신앙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이들은 성인 회중과 자주 접촉하고, 성인 예배 또는 세대통합 예배에서 봉사했던 경험이 있었다는 조사가 있다(김선일, 모든 사람을 위한 가족전도, 161-162). 30년간 청소년 전문 사역자로 일한 바 있는 역사신학자 토마스 버글러는 The Juvenilization of American Christianity(미국 기독교의 청소년화)라는 제목의 책에서 그의 연구를 통해서 미국 기독교가 시대의 청소년, 청년 문화를 수용하고 모방함으로 신앙의 전승과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가 지목하는 오늘날 청소년문화가 교회에 스며든 현상은 낭만주의나 정서주의, 즉 내 기분을 좋게 해주는 데서 교회 분위기나 프로그램의 의의를 찾는 현상이다. 이는 복음 메시지의 연성화를 초래하는데, 예를 들어 “예수, 나의 연인” “나는 예수와 사랑에 빠졌다” 같은 표현들이나, 신앙생활에서 성화나 제자도보다는 선택이나 ‘여정’(journey)이 더 중요한 개념이 된 것이라 한다. 교회가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에서 영적인 삶의 습관을 형성하는 곳이라기보다는 종교적 소비심리를 만족시키는 곳이 되어버린 것이다. 문화적 적응력은 항상 매력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성공의 대가는 재고할 필요가 있다. 청소년문화를 교회에 접목한 대표적 사례인 윌로우크릭교회가 자기들의 사역을 총체적으로 점검하면서 사람들을 모으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들을 제자로 성장시키는 데에는 실패했다고 고백한 사실은 의미심장하다(Reveal). 현대 대중문화의 가벼움과 신속함은 강한 휘발성을 지니고 있어서 기독교의 메시지를 스쳐 지나가게 만들 수 있다. 디지털미디어에 둘러싸인 아이들은 초월적인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적으로 유일무이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고민하고 성찰하게 하기보다, 통속적인 마블 영화 세계관의 유사품으로 취급할 수도 있다. 아이들에게 기프티콘을 제공하며 교회 출석이나 성경 읽기를 유도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을 소비주의 문화의 이해관계로 인식시킬 위험이 있다.그렇다면 다음세대에게 복음을 전하고 신앙을 계승하는 데 중요한 점은 무엇일까? 그들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앞선 세대에게 익숙한 전통적인 신앙훈련을 익히게 하며 순종과 성숙을 요구하는 것일까? 그러한 퇴행적인 방법은 더더욱 아니다. 여전히 문화는 중요하다. 문화는 내용의 핵심을 덮고 있는 외피이자, 내용을 이해시키는 소통 창구다. 따라서 문화를 통한 신앙의 표현과 대화는 사역자들이 늘 염두에 두어야 할 과제다. 그러나 대중문화가 문화의 전부가 아니며, 사역에서 문화를 적절히 활용하는 데 필수 통로도 아니다. 물론 현재 대중문화의 흐름과 언어를 잘 알면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접촉점을 갖고 대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두 가지를 명심해야 한다. 그것은 아이들도 영적인 탐구자라는 것, 그리고 기성세대는 그들을 환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다음세대의 아이들도 영적 관심과 열망을 지닌 존재임을 기억해야 한다. 영적 관심이란 종교활동에 대해서라기보다 삶의 의미에 대한 관심이다. ‘내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 ‘나는 사랑받을 만한 존재인지’와 같은 존재의 의미에 대한 질문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통해서만 진정한 답을 얻을 수 있다. 왜 다음세대의 아이들은 가벼운 재미만을 추구한다고 생각하는가? 미국의 한 조사에 의하면, 기독교 가정의 청소년들 대부분은 부모의 종교와 신앙에 대해서 관심이 있으며 알고 싶어 하지만, 기독교 신앙을 도덕적 치료주의 이신론으로 잘못 알고 있다고 한다(Christian Smith, Melina Lundquist Denton, Soul Searching). 신앙은 착한 사람이 되는 것, 혹은 문제 해결하는 것으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더 긴급한 과제는 다음세대 아이들의 신앙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필자가 교육목회를 할 당시에 동역자들과 함께 개신교 영성수련원을 다녀온 적이 있다. 얼마 뒤에 여름 성경학교가 열렸는데, 그때 담당 전도사가 아이들을 위한 묵상기도 훈련을 시도했다. 영성수련원에서 경험했던 미로기도를 아이들에게 적용한 것이다. 아동부실에 기도코스를 만들어 놓고 천천히 걷다가 한 번씩 멈춰서 기도하는 방식이었는데, 아이들이 진심으로 진지하게 기도하는 모습에 필자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거기에 무슨 예능적 요소는 가미되지 않았다. 다만 곁에서 같이 기도해주고 격려해주는 교사들이 있었을 뿐이다.둘째, 아이들을 재미있게 해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이들을 존중하고 환대하는 것이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고 그들의 입장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다음세대를 신앙의 성숙과 헌신에 이르게 한다고 일방적인 지시나 강요의 신앙 교육을 하면 오히려 그들을 교회로부터 더 멀어지게 만든다. 교회와 신앙에 관해서 아이들이 제기하는 의문과 비판에 개방적이고 포용적으로 대한다면, 이는 아이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주며 결국에는 신앙에 더욱 긍정적이 될 수 있다(Vern Bengston, Families and Faith). 다음세대는 전도의 대상일 뿐 아니라 환대의 대상이기도 하다. 환대라는 단어가 상대방으로 하여금 동등한 구성원으로서의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라면, 다음세대의 아이들을 환대한다는 것은 그들의 자율성과 주체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다음세대로 신앙 전수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에 관한 연구들을 보면, 믿는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 사이에 상호존중의 분위기가 형성된 곳에서 신앙이 잘 계승된다고 한다. 무조건 믿으라고 하거나 의심에 대해서 질타하고 정죄한다면 오히려 신앙에 대한 반발과 이탈을 불러일으킨다. 가정에서 아이들이 부모의 이해와 관용 속에서 신앙에 관한 대화를 자유롭게 나누는 것도 무척 중요하다. 가정예배나 부모와 자녀가 함께하는 성경읽기와 기도생활도 유익하다. 하지만 그 조차도 신앙에 관한 안전하고 자유로운 대화가 보장되는 가정에서 그러한 경건의 훈련도 더욱 효과적이다. 최근 한국 기독교에 관한 조사에 의하면, 현재 교인들의 최초 신앙 시기는 모태신앙(26.4%)과 초등학교 때(34%)까지 합하면 60.4퍼센트에 이른다. 여기에 중고등학교 시절에 처음 신앙을 가진 이들까지 더하면 그리스도인의 무려 78퍼센트가 미성년 때 신앙을 갖는 것으로 나온다(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한국기독교분석리포트 2023, URD, 근간). 이 통계는 신앙을 갖는 데 있어서 다음세대의 영적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다음세대 신앙 전수의 문제는 사실 나중 과제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의 과제이다. 그들은 다음세대가 아니라 지금세대이다. 그들을 위한 사역은 더욱 면밀하고, 더욱 반성적이고, 더욱 깊은 헌신을 요구한다.
다음세대
전도
세대통합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 (3) : 기독교 변증
by 고상섭
2023-06-10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팀 켈러가 그토록 사랑했던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이제 눈물이 없는 곳에서 기뻐할 팀 켈러를 생각하면 위로가 되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에겐 그가 떠난 빈자리가 너무나 크게 느껴진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인 존재로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발자취를 남겼다. 그와 그의 삶이 우리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 몇 가지를 되돌아보며 그를 기억하고자 한다. 존경하는 목회자의 죽음은 많은 이들에게 아쉬움을 남기지만 팀 켈러의 부재가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은 그가 가진 독보적인 영역 때문일 것이다. 마치 기독교 안의 한 영역이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이다. 특히 팀 켈러의 변증적 설교와 가르침은 그의 탁월한 능력이 더욱 돋보인 영역이었다. 포스트모던 시대레슬리 뉴비긴은 영국 교회의 부흥기에 인도 선교사로 갔다가 사역을 마치고 돌아왔더니 영국이 마치 자신이 처음 인도에서 마주했던 그 사회처럼 이교도의 사회로 변해 버렸다고 그의 다윈주의 사회에서의 복음에 술회한다. 뉴비긴은 영국 교회가 그렇게 쇠퇴한 것은 복음을 전하는 방식이 문화를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라 분석하면서 “서구 교회의 과제는 계몽주의 이성의 허망함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지적하며, 다원주의 사회에서 일방적인 기독교의 선포는 자칫 교만으로 비칠 수 있다고 경고한다.[1]팀 켈러도 오늘날 복음을 전하는 일이 어려운 이유의 하나는 이전 시대에는 없었던, 기독교 신앙에 점점 더 적대감을 드러내는 문화라고 말한다. 이제는 비기독교 문화가 아니라 탈 기독교 문화 시대에 직면했다. 이전 시대에는 교회의 가르침과 일반 사람들의 생각 사이에 큰 차이가 없었지만, 오늘날은 초월과 초자연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은 문화적 분위기 때문에 신성한 질서 체계(sacred Order)를 무시하는 경향을 띤다.[2] 한국 교회에서 유행했던 사영리, 브릿지 전도법은 낯선 사람에게 다가가서 일대일로 전도하는 방식이었다. 가가호호 방문해서 전도하기도 했지만, 오늘날은 낯선 사람이 초인종을 누르는 것에 대해서 이전보다 더 큰 저항이 있는 시대이다. 복음은 변하지 않지만, 복음을 전하는 방식은 시대마다 달라져야 한다. 팀 켈러는 복음의 접점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복음의 접점(missionary encounter)을 마련하는 일은 (세상 문화를 배척하는 전략과 달리) 주변 문화와 연결점을 만들고(connects), (세상 문화에 동화되는 전략과 달리) 그 문화 속에 자리한 문제를 드러내며(confronts), (정치권력을 획득하는 전략과 달리) 사람들이 진정으로 돌이킬 수 있도록 다가가야 한다(converts). … 세상과 같은 모습으로 그들과 연결되어야 하지만 또한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함을 유지해야 하고, 주변 사람들을 돌아볼 뿐 아니라 그들을 섬겨야 하며 리드하되 진정으로 회개하고 변화되도록 이끌어야 한다.[3]전제주의 변증 이런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람들에게 팀 켈러는 변증의 방식으로 복음의 접점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변증학 교수였던 코넬리우스 반틸의 전제주의 변증을 뼈대로 자신의 변증 신학을 전개해 나갔다. 코넬리우스 반틸은 수업 시간마다 위의 그림을 그리고 수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의 생각은 큰 원인 창조자이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성에 의해 스스로 판단하게 된다. 반틸은 “하나님 안에는 절대적 진리의 체계가 있어서 하나님은 비논리적이시지 않으시다”라고 말하며, 하나님을 전제로 하지 않는 모든 인간의 생각은 모순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4] 전제주의 변증(Presuppositional Apologetics)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모든 사람의 생각과 세계관 속에는 기초가 되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반틸은 이것을 생각의 ‘궁극적 준거’라고 표현했고, 팀 켈러는 ‘믿음의 도약’이라고 표현했다. 사실이란 누구나 다 알기에 따로 증명할 필요가 없거나(예를 들어, 길에 돌이 떨어져 있다) 감각적으로 자명하지 않지만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걸 가리킨다.”[5] 그러나 사람의 세계관이나 주장들은 증명할 수 없는 믿음이 전제로 깔려 있다. 즉 “수많은 세속적인 사람들이 취하는 첫째 신념은 배타적 합리성이다.”[6]유신론은 믿음을 근거로 하고 무신론은 이성을 근거로 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유신론이든 무신론이든 가장 기초가 되는 첫째 신념은 믿음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무신론을 신념으로 가지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신론을 증명하기 어렵듯이, 무신론 또한 증명으로 확정할 수 없는 신념일 뿐이다. 결국 유신론보다 무신론은 더 큰 믿음을 가져야 하고, 그래서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신념이며 ‘믿음의 도약’을 통해 어떤 세계관을 가지게 된다. 팀 켈러는 “무(無)에서 불쑥 쏟은 관점은 없다”라고 말하면서 “모든 논리의 기초는 논리로 도달하지 않는 선행적인 신앙적 헌신”이라 설명한다. 결국 “‘이 세상 너머에 초자연적 실재가 없다’라는 진술이나 ‘이 세상 너머 초월적 존재가 실재한다’라는 진술 중 어느 쪽도 합리적 인간이 회의할 수 없게끔 경험으로 증명이 불가능한 것이다. 요컨대 신이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하는 말에는 반드시 믿음이 담겨있다. 따라서 과학만이 진리의 기준이라는 선언은 그 자체가 과학적 연구 결과가 아니라 또 하나의 신념일 뿐이다.”[7]하나님은 인간에게 두 가지 계시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는데, 자연을 통한 일반계시와 성경을 통한 특별계시가 그 둘이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자연을 통해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계시를 그리스도와 성경의 렌즈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올바르게 분별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은 세속적인 생각은 모순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팀 켈러는 전제주의 변증의 방식으로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잘못된 전제를 드러내는 것을 통해 복음의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이 포스트모던 시대의 복음 전도의 방식이라 말한다. 팀 켈러는 반틸의 전제주의를 변증의 틀로 사용하지만, 반틸과 다른 면도 많다. 팀 켈러 전기의 작가 콜린 핸슨은 “켈러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코넬리우스 반틸로 대표되는 신칼빈주의 쪽으로 기울었다. 그러면서도 켈러는 일반 은혜 교리를 강조함으로써 반틸과 노선을 달리했다”고 평가한다.[8]가장 다른 점은 반틸이 거부했던 고전주의 변증을 받아들여서 활용하는 것이다. 반틸은 전제주의를 통해서만 바르게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팀 켈러는 변증을 통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믿지 않는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결국 성경적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만 세상과 인간에 대해 더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둘 다 자신의 선입견을 내려놓고 비교해보면 성경적 관점이 더 말이 되고 합리적이며 비성경적 관점은 스스로 안에서 모순을 드러낸다. 문화 내러티브 왜 팀 켈러는 이렇게 모순을 드러내는 방식을 통한 변증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일까? 그것은 사람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우상 즉 다른 신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을 마음의 주인으로 삼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주인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문화 비평가인 테리 이글턴은 문화를 통해 사람의 마음이 형성된다고 말한다. 종교를 완전히 없애버릴 때가 아니라 종교 때문에 특별히 동요하게 되는 일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을 때 사회는 세속화된다. 영국에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중 61퍼센트가 종교를 가지고 있지만 그중 29퍼센트만이 자신이 종교적이라고 답변했다. 자신이 특정 종교 그룹에 속해 있지만 열성적이지 않다는 의미이며. … 블룸즈버리 그룹이 하나님의 왕국을 대체해버린 셈이다.[9]테리 이글턴이 말하는 ‘블룸즈버리 그룹’은 1906년경부터 1930년경까지 런던과 케임브리지를 중심으로 활동한 영국의 지식인, 예술가 모임을 말한다. 즉 오늘날 신의 자리를 대체하는 것이 바로 문화라는 것이다. 그래서 책의 제목을 ‘신의 죽음 그리고 문화’라고 했다. 세속화된 오늘날은 신을 죽인 사회이지만 사람의 마음속에는 ‘종교의 씨앗’이 존재하기 때문에 다른 어떤 무언가를 신의 대체자로 삼아야 하는데, 오늘날은 그 자리를 ‘문화’가 차지한다고 설명한다. 팀 켈러는 이것을 ‘문화 내러티브’라고 부른다. “문화 내러티브는 모두가 아는 것들, 너무나 자명해서 거의 의식조차 하지 않지만, 성경과 다른 세상이 아는 공리를 말한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의 자유가 침해되지 않는 한 개인의 자유는 존중되어야 한다’는 식의 표현이다.”[10]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복음 설교자들은, 문화 이야기가 복음과 충돌하는 지점에서 도전하고, 궁극적으로 문화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다시 들려줌으로써 선(good)을 향한 그들의 가장 깊은 열망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채워질 수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11]설교자가 성도들 생각 속에 숨어 있는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내고 도전해줄 때 비로소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 속에 있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우상들을 깨닫고 회개하게 된다. 복음으로 가는 장애물을 제거하고 그 뒤에 복음을 제시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이렇게 팀 켈러는 변증적 요소를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내는 과정으로 삼으며, 복음으로 가는 장애물을 제거해준 후 복음을 소개한다. 변증의 예 사람들이 교회를 거부하는 많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기독교에만 진리가 있다고 하는 ‘진리의 배타성’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여러 종교가 모두 구원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성경의 진리에 대해 배타적이라 비난한다. 그러나 팀 켈러가 말하는 전제주의 변증의 방식으로 ‘기독교가 배타적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의 전제를 살펴보면 아마도 ‘진리는 하나가 아니다’라는 신념이 있을 것이다. 진리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라는 신념이 있을 때만이 진리가 하나라는 신념을 배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A 진리를 비판하는 근거는 B 진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진리가 하나라는 사람의 전제와 그렇지 않은 사람의 전제를 도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표현기독교는 배타적이라 틀렸다 기독교는 진리이다 신념진리는 하나가 아니다 진리는 하나이다 근거없음 성경기독교가 배타적이라고 믿는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기독교가 배타적이다’라는 명제를 알고 태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그가 생각하는 세계관은 결국 어딘가부터 들어온 것인데 바로 문화 내러티브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의 신념은 ‘진리는 하나가 아니다’라는 생각의 뿌리에서 온 것인데 ‘진리가 하나가 아니다’라는 신념은 증명할 수 없는 생각으로 결국 그의 믿음에서 출발한 것이다. 모든 사람의 첫째 신념은 언제나 믿음이다. 그래서 팀 켈러는 이것을 ‘믿음의 도약’이라고 표현했다.‘도약’이라는 말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연결이 없다는 뜻이다. ‘기독교가 배타적이다’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의 신념은 ‘진리는 하나가 아니다’라는 말이고 그 신념이 어디서부터 왔냐고 묻는다면 합리적인 근거는 제시하지 못한다. 그러나 ‘기독교가 진리이다’라고 믿는 사람들의 신념은 ‘진리는 하나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고 이것은 결국 성경이라는 근거를 통해서 온 것이다. 즉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은 어떤 근거도 없는 문화 내러티브적 생각만 가지고 있지만, 그리스도인은 성경이라는 가장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믿음을 세운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이므로 상충되어 보이지만 모순이 발생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성경이 아닌 세계관은 모두 스스로 모순에 부딪치게 된다. ‘기독교의 배타성’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종교관이 기독교의 종교관보다 더 우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비난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반대로 생각해서 그리스도인도 기독교의 종교관이 다른 종교의 종교관보다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결국 기독교를 비난하는 사람의 논리대로라면 기독교가 자기 종교관이 우월하다고 다른 종교관이 틀렸다고 말하는 방식으로 자기도 동일한 배타적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흔히 자신이 따르는 신앙이 다른 것들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은 자기중심적인 발상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런 단정부터가 자기중심적이지 않을까?[12]자신의 종교관이 진리라는 주장 자체만으로는 그것을 배타성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그것이 잘못된 일이 아니라 정말 진리가 하나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조건적 포용과 연합이 다 좋은 것이 아니다. 사지선다 문제 중에서 정답이 오직 하나라면, 정답을 하나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배타적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배타성이란 어떤 의미인가? 기독교가 진리라는 주장을 하면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폭력 또는 회유와 협박을 통해 기독교로 개종시키려 한다면 그것은 배타적 행위가 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근본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무시할 수 없는 종교이다. 왜냐하면 은혜로 구원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믿지 않는 이들 가운데 자신들보다 훨씬 인격적이고 슬기롭고 훌륭한 사람들이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어째서 그런가? 그리스도인은 스스로의 윤리적인 공로나 지혜, 덕성 때문이 아니라 인류를 위해 그리스도가 이루신 역사 덕분에 하나님의 용납을 받은 까닭이다. … 근본주의는 폭력으로 이어진다고들 하지만, 불가피하게 (진리를 진리라고 믿기 때문에) 배타적일지라도 따르는 이들을 겸손하고 평화를 사랑하게 만드는 신념이 있을 수도 있다.[13]진리가 하나라고 주장하는 배타적 확신 체계를 믿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개방적이며 섬기며 살아갈 수 있다. 왜냐하면 행위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교회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불의를 저질렀던 일들을 눈 질끈 감고 가볍게 넘어갈 순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가장 근본주의적인 신념에서 나오는 힘이 이 어지러운 세상에 평화를 이루는 강력한 동력이 될 수 있음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팀 켈러는 ‘기독교가 배타적이어서 잘못되었다’라고 말하는 사람의 신념을 들추어서 그가 가진 모순을 드러낸 후에 진리를 하나라고 믿는 배타성을 가지고 있어도 세상에 평화를 이룰 수 있는 동력이 되는 것이 기독교임을 드러내는 것으로, 기독교가 배타적이라고 비난했던 사람보다 훨씬 더 합리적이며 모순이 없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팀 켈러는 탈기독교 시대 전도에서도 문화 내러티브의 영향 아래 있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바르게 복음을 전하려면 세속적 내러티브에 대항할 교리문답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전 개신교 교리문답을 보면 로마가톨릭의 잘못을 지적하는 내용이 많다. 그것은 로마가톨릭의 문화 내러티브적 오류를 드러내는 대항적 교리문답이었다.[14]이처럼 기독교 신앙 안에서 변증을 통해 사람들의 생각의 모순을 드러내고 진리를 바르게 전달할 필요가 있다. 팀 켈러는 포스트모던 시대 속에서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할지에 대한 좋은 예를 보여주었다. 레슬리 뉴비긴이 서구 교회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가져야 할 ‘계몽주의 이성의 허망함을 드러내는 것’을 가장 잘 실천한 사람이 바로 팀 켈러일 것이다. 팀 켈러는 복음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복음을 전달하는 방식과 과정의 중요함을 변증을 통해 알려준다. 팀 켈러의 유산인 기독교 변증을 통해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내며 바르게 복음을 전하는 많은 사람이 일어나기를 기도한다. 주1. 레슬리 뉴비긴, 다윈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26.2. 팀 켈러, 탈기독교 시대 전도, 15.3. 같은 책, 26.4. 이승구, 코넬리우스 반틸, 59.5.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 370.6. 팀 켈러, 답이 되는 기독교, 51. 7. 같은 책, p.56.8. 콜린 핸슨, 하나님의 사람, 팀 켈러, 115. 9. 테리 이글턴, 신의 죽음 그리고 문화, 14.10. 팀 켈러, 설교, 154.11. 같은 책, 35.12.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 46.13. 같은 책, 57. 14. 팀 켈러, 탈기독교 시대 전도, 77.
팀켈러
기독교변증
문화내러티브
돌아보니 여호와 이레
by 양혜원
2023-06-08
얼마 전 아주아주 오랜만에 대학 동기 모임에 나갔다. 졸업하고 30여 년 동안 한 해에 한두 번은 모인다는 동기 모임에 내가 나간 횟수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 이번에는 코로나 기간에 한국을 방문하지 못했던 재일교포 동기가 오랜만에 온다 해서 마련된 자리였는데, 일본에서 연구원 생활할 때 자주 교류했던 친구라 이참에 나도 한번 나가볼까 해서 참석했다. 퇴근하고 조금 늦게 도착해보니 이미 식사들을 하고 있었고, 나는 살짝 어색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 동기들을 둘러보았다. 금방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게 달라진 동기도 있었고, 이십 대의 제스처가 반백의 머리와 어색하게 동거하는 동기도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직장생활을 하는 남녀 동기들은 그들대로, 그리고 전업주부로 사는 동기는 그녀대로, 모두 졸업 후 한 가지의 일을 계속하면서 자리를 잡았다는 점이었다. 그와 달리 나는 번역가이자 주부로 살다가 마흔이 넘어 미국에서 박사 과정을 시작했고, 졸업 후에는 한국에서 중년의 신진학자가 되어 비정규직부터 시작하고 있다. 언론인, 법조인, 금융인, 사업가, 공무원, 교수 등 안정된 지위와 일자리로 대변되는 그런 자리에서 예상 가능한 범주의 중년을 살아가는 동기들과 달리, 나의 중년은 청년들의 일자리처럼 불안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뒤늦게 찾은 내 천직 덕분에 청년 시절 새로운 것을 보고 눈을 반짝였던 그 열정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이런 변곡점이 많은 나의 인생을 돌아볼 때, 나는 아브라함이 떠오른다. 단 두 가지 때문이다. 그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난 사람이었다는 것(창 12:1-4), 그리고 아들의 죽음을 둘러싸고 여호와 이레를 경험했다는 것(창 22:1-19).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고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난 아브라함처럼 나도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다. 물론, 나는 한 종교의 시조가 될 족장의 대서사를 시작하는 4천여 년 전의 남성이 아니라 과학과 정보의 21세기를 사는 여성이기에, 목적지도 알았고, 할 일도 머물 곳도 정해져 있었다. 비행기표 발권에서부터 박사 과정 입학 수속에 기숙사 등록까지, 현대인의 생활 양식에 맞게 신비로울 것 하나 없이 정해진 수순대로 계획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마흔이 넘어서 내가 가진 것을 다 털어 넣고, 아브라함이 친척 아비 집을 떠난 것처럼 나 또한 가족을 다 두고 홀로 가서 시작한 공부로 무엇이 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내가 아는 것은 단 한 가지. 그 누구도 설득시킬 수 없었고, 나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이게 맞는다고, 중년을 맞이한 내 몸과 마음이 아우성치고 있었고, 이것은 거역할 수 없는 어떤 신호라는 것. 그게 다였다. 그리고 그때는 내 뱃속에서 죽어 태어난 내 아들을 화장하여 가루로 날려 보낸 지 5년이 되는 해였다.아브라함은 나와 달리 자식을 죽이러 간 그 산에서 준비된 수양을 만나 아들을 살리고 여호와 이레를 경험했지만, 나는 그가 자식을 죽일 뻔했던 그 아찔했던 기억을 평생 간직하지 않았을까 싶다. 만약 그가 통상적인 부모였다면 한 번씩 그 순간이 떠오를 때마다 가슴을 쓸었을 것 같다.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집에 있었는지 멀리서 뒤따랐는지 모르는 사라는 또 어땠을까. 내가 낳은 자식인데도,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서 벌어진 이 거래 아닌 거래에 아무런 발언권 없이 그냥 되어 가는 대로 바라보아야 했던 엄마의 심정이란 얼마나 참담했을까. 아니면, 그도 아브라함 못지않게 믿음이 굳셌는데 족장의 계보에 끼지 못하는 여자이기에 성경은 침묵하는 것일까. 혹, 사라가 그렇게 믿음이 굳셌다 해도 부모인 이상 사라도, 두 부자가 돌아올지 아니면 남편만 돌아올지 모르는 상태로 기다리던 그날의 착잡하고 애끓는 복잡한 심경이 한 번씩 떠오르면서 가슴을 쓸지 않았을까. 그런데 아브라함과 사라의 경우와 달리 내게 준비된 수양은 아들을 구할 수 있는 수양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들의 죽음은 내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나의 이야기는 믿으면 아들도 얻고 수양도 얻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아직 내가 얻은 것이 수양인지 뭣인지도 사실 잘 모르겠다. 다만, 인생의 큰 상실 앞에서 얻은 어떤 추동에 따라 움직였는데, 돌이켜보니 이 또한 여호와 이레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을, 저릿저릿한 마음과 함께 느낄 뿐이다. 마음이 저릿저릿한 것은 지금 나의 삶은 아들을 잃고 나서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번씩 가슴을 쓸어내렸을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나는 한 번씩 가슴이 저릿저릿하다. 지난 10년의 여정을 돌이켜보면, 일이 참 신기하게 풀렸다. 술술 풀렸다는 게 아니라 정말 예측할 수 없게 신기하게 풀렸다.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나는 바로 한국으로 오지 않고 연구를 더 하기 위해서 일본으로 갔다. 일본어는 하나도 몰랐지만, 영어를 공용어로 쓰는 연구소라서 지원해서 가게 되었고, 가서 일어를 배우면서 연구를 이어갔다. 처음에는 6개월 예정으로 갔다가 2년까지 머물게 되었고, 한참 일어가 늘던 차라 기간을 연장하려 했지만 되지 않아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돌아온 지 불과 3개월 만에 코로나 전염병으로 모든 국경이 문을 닫았다. 일본에서 기간 연장이 안 되어 아쉬웠던 여분의 마음까지 싹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그때 돌아왔기 때문에 지금의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없던 자리가 만들어지면서 마침 귀국해 있던 내게 제안이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이 일자리도 이제 더는 계약 연장이 되지 않아 여기저기 연구 지원을 하던 차에 얼마 전에 또 다른 연구소에서 좀 더 안정적인 조건으로 일할 수 있는 자리를 제안해왔다. 나에게 수양은 분명한 형체로 단 한 번에 주어지지 않고, 이렇게 찔끔찔끔 주어지고 있지만, 이 또한 그 산에서 준비된 무엇인가가 있기에 때맞춰서 하나씩 내게 던져지는 게 아닐까. 이처럼 찔끔찔끔 던져지는 수양을 내가 번제로 드리는 방법은 글쓰기이다. 아들을 잃고 나서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아이 대신에 얻은 삶이기에 마치 사명을 안은 듯 글을 쓴다. 연구 논문으로, 책으로, 연재 글로, 그동안 쉼 없이 써왔고 지금도 쓰고 있다. 이 글쓰기의 끝에 또 어떤 수양이 준비되어 있을지 나는 모르지만, 그 산에서 무엇인가는 준비되어 있을 것을 믿고 또 소망하며 오늘도 한편의 글을 완성한다.
아브라함
사라
여호와이레
창세기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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