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Edition
한국어
UNITED STATES
AFRICA
عربي
AUSTRALIA
BRASIL
CANADA
正體中文
简体中文
ESPAÑOL
فارسی
FRANÇAIS
ITALIA
NEDERLANDS
SHQIP
SLOVENSKÝ
후원
하기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시리즈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리뷰
서평
새로 나온 책
뉴시티교리문답
뉴스
국내
국제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검색
사이트 내 전체검색
검색어 필수
검색
추천 검색어
마음
여성
배움
성경
신앙과일
크리스찬
전체메뉴
01
ARTICLES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02
VIDEOS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03
SERIES
시리즈
04
CONTACT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05
QT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06
REVIEWS
도서
서평
새로 나온 책
07
The New City Catechism
뉴시티교리문답
08
NEWS
뉴스
국내
국제
09
ABOUT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10
GIVE
후원
ARTICLES
ARTICELS
연도별
SELECT CONCAT(YEAR(wr_4)) ym FROM g5_write_articles where wr_4 <= '2025' GROUP BY ym order by wr_4 desc
2024
2023
2022
2021
2020
2019
2018
날짜순
조회순
이름순
‘하나님의 사람, 팀 켈러’에서
by Matt Smethurst·Collin Hansen
2023-06-05
기리며: 팀 켈러(1950-2023)콜린 핸슨은 그의 새 책 하나님의 사람, 팀 켈러(Timothy Keller: His Spiritual and Intellectual Formation)에서 복음연합(The Gospel Coalition)의 이 공동 설립자를 형성한 가족 구성원, 친구, 교수, 목회자, 저자를 조사한다. 켈러의 삶과 영향에 대한 이 매혹적인 심층 탐구서의 일독을 추천한다. 이 책을 더 읽고 싶어질 스무 대목을 간추렸다. [아래 인용의 페이지는 원문/역간본 순서] 브루스 헨더슨은 자신의 스무 번째 생일이던 1970년 4월 21일, 그날의 극적인 순간을 기억한다. 브루스가 잠에서 깨어 일어나니 팀이 침대 발치 바닥에 말없이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브루스는 뭔가 달라졌음을, 팀에게 의미심장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직감했다. 마침내 팀의 씨름이 끝난 것이다. 팀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다. 마음으로 오직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여 구원을 받았다. 어찌 된 일일까? 팀은 왜 달라졌을까? 악과 고난과 심판에 대한 그의 지적 관심은 돌연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타 종교에서 답을 모색하고 그리스도인들과 열띠게 토론한 끝에 팀은 결국 자신에게 하나님이 필요함을 절감했다. 새로운 방식의 영적 깨달음이 아니라 마침내 자신의 한계에 도달한 것이다. 자신의 죄에 압도되고 실패와 결함을 직시한 팀은 성경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스스로를 계시하신 사랑의 하나님을 만났다." 그는 주제넘게 하나님을 판단하던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이제 의로우신 동시에 죄인들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을 따르기로 했다. 정의로우신 그분이 그의 죄를 용서하셨다. 이로써 종교학도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팀 켈러의 왕의 십자가(Jesus the King)에서 그는 이렇게 술회했다. “대학 시절 설명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성경이 생생히 살아났다. 이렇게 표현하면 가장 좋을 것이다. 변화되기 전에는 내가 성경을 뜯어보고 캐묻고 분석했는데, 변화된 후에는 마치 성경이 또는 성경을 통해 그분이 나를 뜯어보고 캐묻고 분석하시는 것 같았다.” (18/53-54) 클라우니와 메릿 중 누구를 본받았든 간에 켈러는 버크넬 시절에 들은 전도 설교 방식을 이후 수십 년간 그대로 구현했다. 그는 곁가지 없이 늘 복음의 기본 메시지를 제시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주관하신다는 것과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그분만이 하나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27-28/65)크리스티에서 켈러로 성이 바뀌기 전부터 이미 캐시는 팀 켈러의 지성과 영성이 형성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팀 켈러에 대한 글쓰기는 곧 팀과 캐시에 대해 쓰는 것이나 같다. 이 대등한 지성의 부부는 신학교에서 만날 때부터 똑같이 사역에 헌신하고 문학을 사랑하고 신학에 잔뜩 심취해 있었다. (42/86) 머잖아 켈러는 자신의 설교를 조정하여 더 구체적이고 실제적이고 명확하게 전달해야 함을 깨달았다. 호프웰에서 상황화에 입문한 셈이다. 먼저 듣고서 실상을 파악한 후에야 설득력 있게 말할 수 있음을 그는 절감했다. (109-110/173-174)웨스트호프웰에서 재직하던 중에 켈러는 리처드 백스터의 참목자상(The Reformed Pastor)을 청교도 문고본으로 읽었다. 그 책에서 백스터는 매년 적어도 한 번은 모든 교인의 가정을 심방할 것을 권한다. … 책에서 읽고 호프웰 지역의 다른 목사들에게서 본 역할 모델을 통해 그는 설교자만이 아닌 목회자의 본분을 익혔다. … 켈러는 호프웰 시절을 일생 최고도의 사역 형성기로 회고했다. (114-115, 118/180, 184)많은 사람의 결론에 따르면 켈러는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하는” 법을 호프웰에서 배웠다. 호프웰의 블루칼라 회중 덕분에 그가 어렵고 복잡한 개념을 그리스도인과 비신자가 똑같이 이해할 수 있게 다듬어야만 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만일 신학교에서 곧바로 고학력자 위주의 회중에게로 건너뛰었다면, 그는 결코 널리 대중적인 작가나 설교자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의욕적으로 배우려는 이들에게 도전하면서도 나머지 모두의 덕을 세우는 글이나 설교를 내놓지 못했을 것이다. (121/188)켈러에 따르면 교회가 영적으로 침체되는 원인도 거기[독선]에 있다. 예수님은 아웃사이더를 끌어들이고 인사이더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셨는데, 오늘날의 교회는 반대로 하는 경향이 있다.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반듯한 사람들은 자신이 교회 안에 있어야 함을 알지만, 망가진 소외층은 환영받는다고 느끼지 못하고 있다. (143/217-218)20세기 초의 보수 복음주의와 진보주의는 뉴욕을 온갖 득실거리는 유혹으로 신앙인을 노리는 현대판 바벨론으로 보았다. 켈러가 세우려 한 교회는 도시 안에서 도시와 구별되면서 도시를 사랑하는 회중이었다. 도시의 영적 곤경에 늘 초점을 맞추면서도 물리적 필요 또한 채워 줄 수 있는 교회 말이다. (156-157/235)그리스도인들은 다른 교회의 어떤 결정이 자신들과 다르면 이를 신앙고백에서 벗어난 것으로 판단한다. 하지만 그들이 지적하는 교리의 타협은 때로 신학적 비전의 차이에 불과하다. (173/257)켈러가 처음에 이 사명에 적합한 다른 사람을 찾다가 점차 자신이 가야 함을 깨닫는 동안, 필라델피아의 친구들은 몇 달째 그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그 모임에 가서 “제가 가야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캐시가 보기에 그 결정은 남편의 평생에 “진짜 가장 ‘남자다운’ 일 중 하나”였다. 그는 이주하기가 두려웠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이 느껴졌다. 그 결단의 열매가 역동적으로 성장하는 대형 교회가 될 줄을 그가 알았을 리는 만무하다. 교회가 실패로 끝난다 하더라도 그냥 믿음으로 다음 걸음을 내딛었을 뿐이다. (192/279-280) 리디머가 이 장로교 여성회에서 받은 후원금은 거의 9만 달러로, 개척을 위해 모금된 총액의 약 3분의 1에 달했다. 그들의 지원은 단번의 헌금으로 그치지 않았다. 본인도 시인하듯이 캐시가 그 여성들에게 쓴 “기도 편지들은 그때까지 누군가에게 쓰거나 받은 것 중에서 가장 자기연민에 젖어 징징거리는 내용이었다. 캐시가 보기에 그 여성들은 자기네가 살벌한 대도시에서 세 아들을 길러야 하는 캐시의 입장이 아닌 것만으로도 감사해했다! 그녀가 받은 헌금 중에는 어떤 가정에서 푼돈을 모아 켈러 가정의 맥도널드 외식용이라고 따로 표시한 12달러도 있었다. 지금도 그녀는 이 여성들을 놓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캐시 켈러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기도의 사투를 벌였어요. 그래서 처음 몇 년 동안 우리가 잘못된 결정을 내리지 않았던 것 같아요. 교회개척을 위해 이렇게 많은 사람과 특히 여성들이 기도한 적은 사도 바울과 초대 교회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결코 없었다고 확신합니다.” (193/281)기독교 공동체 자체가 [리디머] 교회의 전도 프로그램이었다. … “세상에서 효과적으로 열매 맺는 선교의 진정한 비결은 우리 공동체의 질에 있다.” (197, 215/287, 310)켈러는 … 책을 동시에 넓고 깊게 읽지 않으면 자신의 설교가 진부한 반복으로 변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206/299)켈러는 이렇게 설명했다. “장기적으로 유능한 기독교 사역자가 되는 관건은 자신의 은사와 재능의 한계를 어떻게 온전히 은혜에 힘입어 성품으로 보완하느냐에 달려 있다. 리더십 책들이 대체로 조언하는 내용은 자신의 약점과 부족한 은사를 파악하라는 것과 이를 보완해 줄 은사가 있는 사람들과 팀으로 사역하라는 것이다. 물론 그럴 수 있다면 현명한 처사지만, 그게 가능하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본인의 경건으로 보완하지 않는 한 은사의 부족함이 당신을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 으레 관찰하는 바지만 사역은 어느 쪽으로든 사람의 영적 성품을 증폭시킨다. 이전의 모습 그대로 두지 않는다. 이전보다 훨씬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거나 반대로 훨씬 못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한다!” (214/309) 캐시가 매일 밤 예외 없이 함께 기도할 것을 제안했다. 그때 그녀가 한 말이 팀의 기억에 남아 있다. “당신이 죽을병 말기라서 매일 밤 취침 전에 특정한 약을 한 알씩 복용하지 않으면 의사 말대로 몇 시간 내로 죽는다고 가정해 봐요. 한 번이라도 빼먹으면 죽는 거예요. 그래도 당신은 잊어버릴까요? 건너뛰는 날이 있을까요? 아니죠, 너무 중요해서 잊지 않을 거예요. 한 번도 빼먹지 않을 거예요. 마찬가지로 이 모든 일이 우리 앞에 닥쳐왔는데도 함께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겨 낼 수 없을 거예요. 나는 절대로 못 해요. 그러니 우리는 기도해야 해요. 기도를 잊어버리면 안 돼요.” (228/328)2010년 이전까지는 예배 후에 앞으로 나와서 켈러에게 말을 건 사람 대부분이 뉴요커와 그 교회 교인이었다. 각 예배가 끝난 뒤 그는 한 시간씩 전도나 목양 성격의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2000년대 말에 두 가지 변화가 눈에 띄었다. 첫째로, 질문이 과학과 역사에서 도덕과 가치관으로 바뀌었다. 회의와 불신이 분노와 비난으로 바뀌었다. (232/333)켈러는 옥스퍼드 학생들에게 AD 800년 영국의 앵글로색슨족 전사를 상상해 보게 했다. 이 전사의 내면에는 누구든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을 죽이고 싶은 충동이 있다. 그게 수치와 명예 문화에서 요구하는 반응인지라 그가 그렇게 느낀 것은 당연했다. 그는 또한 성적으로 남성에게끌리는데, 이 감정만은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문화가 요구하는 대로 억누른다. 이번에는 우리 시대의 맨해튼 거리를 걷는 같은 나이의 남자를 생각해 보라. 그의 감정 역시 앵글로색슨족 전사와 똑같다. 누구든 자기를 째려보는 사람을 죽이고 싶고, 남성과의 성관계를 갈망한다. 우리 문화는 그에게 분노 조절 치료를 받게 한다. 그리고 그는 성적 성향을 공개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을 것이다. 이 예화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바는 무엇인가? 켈러는 이렇게 설명했다. “우선 이것은 우리의 정체성이 단순히 내면에서 비롯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보다 우리는 모종의 도덕적 해석이라는 잣대를 받아서 자신이 느낀 다양한 감정과 충동을 그 잣대에 비추어 걸러 낸다. 이 잣대에 힘입어 우리는 어떤 감정이 '나'이므로 표현되어야 하고 어떤 감정은 내가 아니기에 표현되어서는 안 되는지를 결정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은 타고난 순수한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신념을 해석하는 이 잣대다. 많은 반론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내면의 심연이 우리의 길잡이가 되기에는 역부족임을 본능적으로 안다. 외부의 기준 내지 규정이 필요하다. 그게 있어야 우리 내면생활에서 서로 싸우는 충동을 처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앵글로색슨족 전사와 현대의 맨해튼 청년은 그런 잣대를 어디서 얻었을까? 각자의 문화, 각자의 공동체, 각자의 영웅담에서 얻었다. 사실 그들은 단순히 '나다워지기를 선택한' 게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걸러 내 취사선택한 것이다. 문화가 허용하는 자아를 선택한 것이다. 결국 독자적으로 자기 내면의 감정에만 기초한 정체성이란 불가능하다.” (241/344-346)[켈러는 그의 설교에서] 의심을 인정함으로써 믿음이라는 문을 열어젖[혔다]. (244/349)켈러의 세대 중에서 복음주의를 미래의 세계화와 다문화와 도시를 위해 준비시키고자 켈러보다 더 많이 힘쓴 사람도 없다. 이 중심 주제 때문이 아니라면 그가 행여 뉴욕 타임스 부고란에 실릴 이유도 없다. 가장 가까운 유례는 이전 세대의 존 스토트다. 그런데 생애의 절반에 이르는 시간 동안 켈러는 세계화 사역이나 다문화 사역이나 도시 사역을 거의 전혀 몰랐다. 비교적 사역 후반부인 50대 때에야 그는 널리 인정받았다. 지금의 젊은 세대도 주님을 사모하며 인내하는 가운데 나이테를 키워 나가는 게 최선이다. (265/378)켈러의 독창성은 종합에서 나타난다. 그는 여러 출처를 한데 모아 뜻밖의 통찰을 이끌어 낸다. 당신의 영웅이 한 명뿐이라면 그들 모방하는 것에 불과할 테지만, 영웅이 100명이라면 그만큼 당신이 온 세상을 다니며 가장 맑은 우물들을 찾아내 깊이 마셨다는 뜻이다. 서로 다른 원전을 통합해서 사람들에게 통찰을 나누어 주는 켈러의 재능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대학 시절부터 그를 아는 거의 모든 사람 눈에 띄었다. 그는 거장들에게로 안내하는 길잡이다. 그들이 내린 최고의 결론에 자신의 독특한 변주를 더해 우리에게 전달한다. (265-266/378-379) 원제: 20 Quotes from the New Book About Tim Kelle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윤종석, 하나님의 사람, 팀 켈러(두란노)
나는 내 것이 아니다
나를 치유한 하이델베르크 문답
by Kathryn Butler
2023-06-04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친구가 어느 날 내게 만성 질환과 보낸 수년의 힘든 싸움을 털어놓았다. 끝이 없어 보이는 고통스러운 치료의 연속, 치료의 실패, 그리고 기쁨을 갉아먹는 병과의 지난한 투쟁 과정을 듣는 사이에 내 마음 한구석이 무너졌다. 육신의 고통이 영혼에 미치는 생생한 피해를 목격한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 어려운 순간에도 어떻게 하나님의 선하심에 매달릴 수 있었던 거야?” 그녀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감사의 마음이 가득한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나는 알고 있어. 내가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야. 사나 죽으나 내 몸과 영혼이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있다는 것을 나는 확실하게 알아.” 그녀의 또렷한 대답은 나를 놀라게 했다. 그녀는 다름 아니라 수 세기 이어져 내려오며 기독교 신앙의 핵심 요소를 아름답게 포착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1번 질문에 대한 답을 내게 들려준 것이다. 그녀와의 대화 후 시간이 지나면서 죄의 삯이 내 삶을 잠식할 때면 또 인간의 타락이 나를 압도할 때면, 나 역시도 그녀의 대답을 되풀이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우리는 이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자기를 버리신 분에게 속했다는 사실로 항상 기뻐할 수 있다(요 10:11; 요일 3:16).하이델베르크 소망1500년대 중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 폰 데어 팔츠(Friedrich III von der Pfalz)는 여러 개혁파 그룹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이 일어난 곳으로 유명한 독일 남서부 지역인 팔츠(Palatinate)를 관장하고 있었다. 프리드리히는 필리프 멜란히톤의 학생인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Zacharias Ursinus)에게 분쟁 해결에 도움이 되는 기독교 교리의 요점에 대한 체계적인 해설 초안을 작성하도록 지시했다.우르시누스와 여러 기고자가 1563년 봄에 기독교 교리 초판을 완성했다. 비록 그 교리문답이 프리드리히가 희망했던 것처럼 다양한 개신교 운동을 통합하지는 못했지만, 거기에 담긴 복음에 대한 주의 깊고 철저한 설명은 그 이후에 이어진 제자도 사역에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이 교리문답이 끼친 영향력에 대한 증거로 꼽을 수 있는 사건은 1619년 도르트 회의 (Synod of Dort)가 이 문서를 (벨직 신앙고백서 및 도르트 신조와 함께) 네덜란드 개혁 교회의 일치의 세 가지 형식 중 두 번째로 채택했다는 사실이다. 최신 버전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129개의 문답으로 이뤄졌으며, 일 년 동안 매주 공부할 수 있도록 52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었다. 모든 내용은 비참함, 구속, 감사의 세 범주에 속하며, 이것은 암기하기 쉽게 G로 시작하는 세 단어 Guilt(죄책), Grace(은혜), Gratitude(감사)로 요약할 수 있다. 1. 비참함: 인간의 죄 많고 타락한 상태에 대한 노출2. 구속: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죄와 비참함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3. 감사: 구원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하는가에 관한 방법 (즉, 우리가 십자가가 준 새로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몸과 영혼, 삶과 죽음세 가지 주제를 소개하기 위해 교리문답은 전체 내용의 심장에 해당하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앞에서 내 친구가 신중하게 인용한 게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삶의 돌팔매와 사탄이 쏘는 화살의 공격 속에서도 수많은 성도가 두려워하지 않고 위안을 찾도록 만들었다. 문: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답: 나는 나의 것이 아니요,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이 놀라운 진술 다음에 교리문답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구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죗값을 완전히 치르고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해방하셨습니다. 또한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나를 보호하시며, 참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그러하므로 그의 성신으로 그분은 나에게 영생을 확신시켜 주시고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하여 즐거이 그리고 신속히 그를 위해 살도록 하십니다. (Creeds and Confessions of the United Reformed Churches in North America, 73)첫 번째 질문은 신자로서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하고 형성적인 진리를 분명하고 강력한 언어로 상기시킨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다(요 8:34, 롬 6:16, 22). 대신 우리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속했다. 유일한 위로첫 번째 질문을 깊이 숙고할 때,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하는 위로(comfort)라는 단어를 부주의하게 사용하면 길을 잃을 수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위로에 대한 논의는 종종 포근한 양말과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 한 잔, 좋은 책 또는 막 오븐에서 꺼낸 향긋한 쿠키와 같이 물질적인 것을 생각하는 데서 그칠 수 있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면, 진짜 위로는 사랑하는 사람의 포옹, 걱정을 가라앉히며 위안을 주는 소식, 그리고 고통으로부터의 해방 등 물질 너머에 존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 나오는 위로라는 단어에는 이보다 훨씬 더 차원 높은 의미가 담겨있다. 케빈 드영(Kevin DeYoung)이 쓴 것처럼 본문 속 독일어 단어인 트로스트(trost)는 영어 단어 신뢰(trust)와 관련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확실성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The Good News We Almost Forgot, 22). 교리문답이 촉구하는 것은 무엇이 우리를 편안하게 해줄 것인지가 아니다. 오히려 실존하는 삶과 죽음이라는 현실 속에서 진정한 위안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어디에서 확신을 찾을 수 있을까? 스스로를 구속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의 무능력을 실감할 때, 도대체 어디에서 소망을 찾을 수 있을까?인종으로서 인간의 본성은 이 땅에서 답을 찾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한 명도 예외 없이 의미와 안식을 갈망한다. 마음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직업, 관계, 그리고 세상이 주는 정체성에 몰입한다. 소유물과 타인의 찬사가 주는 순간적 희열을 갈망한다. 기분 전환, 산만함, 그리고 심지어 화학적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고통을 무디게 하려 시도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모든 추구는 궁극적인 실패를 가져다줄 뿐이다.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 1:14). 세상이 주는 기분 전환으로도 한 시간 또는 하루 정도는 상처를 진정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종기는 다시 곪아 터지고 통증은 영혼 더 깊은 곳까지 침투한다. 참된 위로는 오로지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빌 4:7), 모든 시험 중에도 우리를 떠나지 않는 평안은 오로지 한 분, 세상을 이기신 자를 통해서만 가능하다(요 16:33).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초대하신다. 나는 나의 것이 아니다우리가 나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은 서구 사회가 중심이 되어 자아실현을 우상화하는 이 시대에는 매우 급진적이다. 소셜 미디어를 조금만 살펴보아도 정체성을 정의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감정이라는 지배적인 견해를 엿볼 수 있다. 세상 가르침에 따르면, 나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고 형성할 뿐 아니라 운명까지 선언하는 임무는 내게 주어졌다. 누구나 다 “최고의 삶을 살아야 한다.” 세상에 따르면 나 자신 외에 나는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다. 겉보기에는 세상 원칙들이 매혹적일지 모르지만, 죄 많은 세상이 주는 긴장 아래서 하나같이 휘어지고 금이 갈 헛된 원칙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열렬히 개인적 진리를 추구하고 자신을 영화롭게 하려고 노력해도 피할 수도 또 통제할 수도 없는 재난을 만나기 마련이다. 질병을 피해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각종 질병이 우리를 압도한다. 가정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자연재해는 또 어떤가? 개인적인 죄가 스며들어 소중한 인간관계를 부수기도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의 마음은 찢어진다. 다시 끼워맞출 수도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된, 산산이 부서져 버린 삶의 조각 앞에서 망연자실한 자신을 발견한다.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기는커녕, 나를 주인으로 삼으라는 세상의 원칙은 내 마음을 흔들고 필연적으로 파멸로 이끌 뿐이다.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아주 썩은 것은 사람의 마음이니, 누가 그 속을 알 수 있습니까?”(예 17:9).세상이 주는 황폐함과 대조적으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생에 이르는 샘물을 주신다(요 4:14). 우리 모두가 갈망하는 평화라는 깊은 의미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를 주는가? 주님이 주시는 위로는 지치고 부러지고 또 비바람에 시달린 손으로 시작하거나 끝내는 인간의 위로와는 차원이 다르다. 비틀거리는 나를 예수님이 안아 주신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눅 15:4-6).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는 나 자신을 구원하려는 인간적 노력이 실패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낌없는 은혜를 부어주신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베푸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의 자녀라 일컬어 주셨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요일 3:1).나는 내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우리는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소유물이다(시 100:3; 요 10:11). 하나님의 은혜로 그 무엇도 우리를 그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요 10:27-28; 롬 8:38-39).오로지 그리스도만을하이델베르크의 첫 말씀은 위로의 샘물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제자로 부른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는 메시지는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는 변치 않는 믿음과 감사를 우리 안에 불러일으킨다.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의 성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성령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모시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사들인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십시오”(고전 6:19-20).칼뱅은 기독교강요에서 이 진리에 관해서 탁월한 통찰을 보여준다.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육신을 따라 우리에게 유익한 것을 구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할 수 있는 한 우리 자신과 우리의 모든 것을 잊도록 하자. 반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오로지 그를 위해 살고 그를 위해 죽자.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따라서 그분의 지혜와 의지가 우리의 모든 행동을 지배하도록 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이 우리의 유일하고도 정당한 목표이신 그분을 향한 노력이 되도록 하자. (3.7.1)우리는 하나님의 양자이다.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고 또 우리 자신에게도 속하지 않는다. 오로지 예수님께 속해 있다. 이 진리는 삶과 죽음에서 우리의 유일한 위안이요,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를 통과하는 유일한 빛이요, 또 어둠이 잠식할 때 잡을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이다. 이 진리는 망가진 세상에서 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정의한다. 그리고 우리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그분의 영광만을 위해 살도록 도전한다(롬 14:7-8).원제: I Am Not My Own: How Heidelberg Healed Me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석양이 더욱 찬란하게 비친 날
by Trevin Wax
2023-06-02
기리며: 팀 켈러(1950-2023)광대한 산맥, 광활한 바다, 넓게 펼쳐진 평야와 농지, 그 어디든 해가 지는 광경을 볼 때 가장 눈에 띄는 요소가 하나 있다. 느림과 속도이다. 불덩이가 지평선 위로 내려오는 속도가 처음에는 느리기 이를 데 없다. 아주 천천히 하늘과 땅에 온갖 색과 그림자를 드리우지만 일단 지구 가장자리에 도달하면 얼마나 빨리 사라지는지 놀랍기만 하다. 천천히, 그러다가 빠르게. 빛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공기에는 냉기가 들기 시작한다.그 전날 저녁, 켈러가 곧 육체적으로는 루스벨트 섬으로, 그러나 영적으로는 그의 영원한 상급을 받으러 본향으로 갈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나는 사무실에서 잠시 기도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태양 빛이 내 책장 팀 켈러 장서를 비췄다. 내 영혼과 마음에 지울 수 없는 각인을 남긴 그가 전한 말씀이다. 오늘 아침 팀 켈러가 삼 년의 췌장암 투병 끝에 돌아갔다. 거대한 빛이 지평선 너머로 미끄러져 나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주 오랫동안 진행된 노을인데도 너무나 갑작스럽게만 느껴진다.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해와 비교하는 나를 향해서, 의심할 여지 없이 켈러는 눈썹을 치켜올리고 어리둥절한 미소를 지을 것이다. (내가 아는 그는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 속에 미소를 담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의 저서와 글에서 당신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역사에는 분명히 주인공이 있지만 우리 중 그 누구도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역사의 중심은 하나님이시오, 예수님이 우리 믿음의 주인공이자 또 온전하게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켈러는 자신을 주인공으로 알고 살아간 사람이 아니다. 그의 삶은 그가 언제나 예배하는 구주에 관한 것이었고 구원이 필요한 잃어버린 세상을 그분에게 인도하는 데에만 관심을 가졌다. 그는 실로 자신이 그토록 사랑한 예수님을 꼭 닮은 사람이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그의 죽음은 마치 빛이 꺼져버린 것과 같은 상실감을 준다. 내게 수년에 걸친 켈러의 심오한 영향은 처음에는 그의 글을 통해서, 나중에는 이따금 주고받는 서신을 통해서, 그리고 만남과 독서 제안을 통해서 이뤄졌다. 지난 칠 년 동안 켈러는 내 독서의 많은 부분을 이끌었다. (내 책더미에는 키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이 있는데, 켈러가 추천한 책 중에서 아직 읽지 않은 몇 안 되는 책 중 하나이다.) 켈러는 조언해 주었고, 특정 방향을 알려주었으며, 막다른 길에 대한 경고를 했다. 그리고 내가 작업하고 있는 일부 프로젝트에 관심을 보였다.켈러의 글과 사역은 내게 닻이 되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평온함을 발산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결코 드라마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는 ‘안달하지 않는 존재’의 전형이었고, 다양한 신념을 가진 사람들과도 얼마든지 존경과 친절로 교류할 수 있는, 신앙에 깊이 뿌리를 박은 깊은 안정감의 소유자였다. 그는 또한 교회의 미래와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올해 초 그와 함께 한 팟캐스트 인터뷰에서 그는 ‘너는 분명히 나보다 더 오래 살면서 교회의 갱신도 목격할 거잖아’라며 나를 짓궂게 놀렸다.)켈러가 암 진단을 받았을 때 나는 몇몇 친구에게 팀 켈러가 없는 복음주의는 상상만 해도 두렵다고 털어놓았다. 모든 세대에는 영웅, 잘 섬기는 사람이 필요하다. 각종 실패와 결점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에게 신실함의 모범이 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켈러가 내게는 그런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오늘 나는 그가 믿음의 선한 경주를 마친 것에 감사한다. 해는 비록 졌지만, 지금 켈러는 궁극의 분, 밝은 새벽 별 앞에 서 있다(계 22:16).“나는 이제 말하지 않겠다. 울지 마라. 비록 모든 눈물이 악한 것은 아니니까.” 회색 항구로 떠날 준비를 하는 프로도에게 간달프가 한 말이다. 오늘 나는 이런 좋은 눈물을 몇 번이나 흘렸다.우리에게 오늘은 마치 샘이 그의 사랑하는 친구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과 같다. “저녁이 깊어지며 어둠이 내렸다. … 샘의 눈에는 곧 사라진 서쪽 바다 위 그림자만 보인다. … 해변에서는 파도의 한숨과 중얼거림만 들렸다.” 그러나 켈러가 지금 목격하는 건 프로도와 비슷할 것이다. “프로도는 공기에서 풍기는 달콤한 향기를 맡으며 물 위로 노래하는 소리를 들었다. … 회색 비 커튼이 모두 다 은색 유리로 바뀌고 뒤로 젖혀지자 하얀 해안을 보았다. 그리고 그 너머로 빠른 일출 아래 멀리 푸른 나라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우리는 켈러에게 안녕이라고 작별을 고하지만, 주님과 천사들은 그에게 지금 환영한다고 인사하고 있을 것이다. 원제: Tim Keller into the Sunset(1950-2023)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팀 켈러와의 만남: 격려, 부끄러움, 안도감
by 고성제
2023-06-02
기리며: 팀 켈러(1950-2023)늦게 신학을 한 관계로 부교역자 생활도 못해 본 채, 1990년대 초 교회를 개척한 나는 평생 다음과 같은 설교를 하려고 목표를 세우고 있었다. 균형의 문제를 고민하는 설교, 변증적 설교, 십자가 복음을 풍성하게 선포하는 설교, 구속사적이며 그리스도 중심적인 설교, 개인이 아닌 공동체를 강조하는 설교, 시사적이고 상담적인 설교 등등. 그저 듣기 좋은 말 다 끌어다 쓴 것 같은 느낌도 있지만, 사실 그 하나하나는 당시 오랫동안 혼자 고민하던 것들의 진실한 표현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제는, ‘지향한다!’고 표방할 수는 있지만 쉽게 거기에 이르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나의 처지가 그랬다. 끊임없이 고민은 했지만, 속 시원한 진전은 없었다. 다소 진전이 있었다 하더라도 전체적으로 통합 정리된 데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언제 굴착이 끝나 터널 저편 빛을 볼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터널 한가운데 주저앉아 있는 굴착공과 같은 심정으로 널브러져 있었다.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했다. 팀 켈러와의 만남, City To City, 그리고 그 운동을 함께하는 동역자들과의 만남은 바로 그런 때에 이루어졌다. 나는 늘 그 만남을 ‘마치 터널 작업장 저편에서 들어오는 한 줄기 빛과 같았다’고 표현한다. 그것은 한 마스터(대가)와의 만남이었고, 탁월한 멘토를 만난 것과 같았다. 그 만남은 내게 격려(위안)와 부끄러움과 안도감이 뒤엉킨 묘한 감정을 가져다주었다. 먼저는 격려였다. 그것은 그동안 고민해온 방향이 틀리지 않았다는 위안 같은 것이었다. 팀 켈러가 세밀하게 관심을 두고 고민한 부분들이 내가 고민해온 부분들과 상당히 중첩되고 있음을 보는 것만으로도 ‘틀리지 않았었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약간의 희열과 위안이 느껴졌다. 회중 가운데 있을 ‘사실상의 불신자들’을 의식한 변증적 설교에 대한 강조, 타 종교나 세속적 신념을 비난이 아닌 존중의 태도로 극복하려는 것, 시대의 문제를 잘 분석하고 극복하려 애쓴다는 점,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에 대한 강조, 복음 안에 답이 있음에 대한 확신 등이 그러했다. “하지만 그와의 만남은 내게 부끄러움 또한 느끼게 했다. 그의 가르침은 그동안 나의 고민이 얼마나 폭이 좁고 미숙하며 피상적이었는지를 알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름 고민하며 해 온 설교가 얼마나 허술하며, 전체적으로 통합된 탄탄함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파편처럼 따로 노는, 조직되지 못한 지식들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갑자기 이런 목사를 의지해서 신앙의 여정을 걸어온 성도들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이 느껴졌다. 그동안 내가 더 잘 정립된 목회자였더라면 성도들은 얼마나 더 잘 세워지고 복음 안에서 기쁨과 확신에 찬 생활을 하였겠는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세 번째 느낌은 안도감이었다. 그것은 복음을 깊고 넓게 그리고 분명하고 확실하게 이해하고, 그 토대 위에서 신앙의 여러 주제를 이렇게 치열하게 고민하여 뚫어내고, 통합하여 균형 있는 복음적 입장을 정리해 낸 탁월한 마스터를 만났다는 안도감이었다. 지금까지 고민해 오면서도 마땅히 시원한 답을 얻지 못한 부분들에 대해, 확고한 복음적 논리 위에서 명쾌하게 답을 찾아가도록 도와줄 길잡이를 만난 느낌! 이분이라면 나뿐 아니라 지금 한국 교회 전체가 처한 현실을 타개해 나가는 데에 본질적 도움을 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 그는 한국 교회에 엄청난 도움을 주었다. 당시 한국 사회는 이미 급격한 ‘역-엑소더스’(탈교회) 현상을 겪고 있었다. 혹자는 그 현상을 몇몇 대형 교회의 탈선 탓으로 돌리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 모든 책임을 그들에게 돌릴 수만은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더 근본적 이유가 그들이 교회 안에서 진정한 복음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데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교회 안에서 경험한 것은 ‘우상과 죄의 속박과 두려움에서 해방시켜주는 복음’이 아니라 그저 ‘의무나 관습으로 옭아매는 종교’뿐이었던 것이다. 진리를 만나기를 기대하며 교회에 왔지만, 그들이 발견한 것은 스스로 진리를 부정하는 모순된 삶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진리를 찾아 오히려 교회를 떠나는’ 기막힌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교회의 윤리적 노력으로 극복될 일이 아니며, 교회가 복음을 통해 본질적으로 새롭게 될 때 극복될 수 있는 문제였던 것이다. 팀 켈러는 바로 그 점에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었다.그는 복음을, 그것과 혼동하기 쉬운 것들과 탁월하게 대비해 줌으로써 복음과 복음 아닌 것의 차이를 선명하게 이해하도록 도와주었다. 우선 그는 복음을 각종 의무와 종교적 관습으로 가득한 ‘종교’와 대비시킴으로써 우리가 얼마나 복음 아닌 종교에 빠져 있는지를 깨닫게 했다. 또 그는 복음과 복음의 결과(선행 섬김 헌신 등의 윤리적 삶)를 구별함으로써 우리 목회자들이 일반적으로 자주 빠지는 오류로부터 건져주었다. 복음 자체에 대한 올바른 강조가 선행과 헌신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인데, 그래서 우리 목회자는 복음을 더욱 풍성하게 선포하는 데 더욱 힘을 써야 하는데, 종종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복음이 가져오는 결과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춰 강조하고 선포해 왔음을 보게 하였던 것이다. 강단의 설교가 그러하다 보니 교인들은 풍성한 동기는 알지 못한 채 의무를 강조하는 말만 듣게 되어, 괜히 교회를 다녀서 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가 되는”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복음 안에서 누리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풍성한 설명 없이 의무만 강조한 것이 한국 교회를 끝없는 죄책감 아래로 몰아가고 성도들을 바리새인과 같은 위선자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팀 켈러는 이 점에서 깊은 임팩트를 남겼다.또 그는 복음을 선포하되, 마음의 우상을 분석하여, 거기에다 대고 복음을 선포하게 함으로써 복음이 효과적으로 선포되도록 도와주었다. 당시까지 우리는 우상을 대개 피상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은연중에 우리 자신은 우상과 무관한 줄 착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우상을 예리하고 실제적으로 파헤침으로써 우리 안에 깔려 있는 불안과 두려움, 인정과 통제의 욕구 등 우상의 역동들을 잘 드러내 주었다. 그리하여 우리로, 복음을 선포하되, 허공을 치듯 하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복음이 우리 안의 무엇을 겨냥해서 어떻게 선포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 결과 무엇에서 자유롭게 될 것을 기대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이해하며 설교하게 한 것이다. 이렇게 팀 켈러는 설교자의 선포가 분명하게 초점 잡히게 도와주어서 복음 선포가 공허한 외침이 아니라 청중의 내면을 깊이 흔드는 울림이 되게 도와주었다. 또 그는 상황화에 대한 강조를 통해 복음이 ‘오늘 여기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와닿는 말씀’이 되도록 도와주었다. 물론 설교자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 상황화를 하고 있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 켈러는 설교자가 왜 그것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과도한 상황화와 과소한 상황화 사이에서 균형은 어떻게 취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세밀하게 생각하도록 도와주었다. 그리하여 설교가 주변 문화와 적절하게 관계하게 함으로써 설교가 더욱 들리는 설교, 와닿는 설교가 되게 했다. 이 모든 도움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결코 빠뜨릴 수 없는 것은 성경 말씀에 대한 그의 확신과 열정, 즉 복음 안에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 들어있다는 그의 확신과 그 확신에서 비롯된 끝없는 열정이다. 바로 그런 뜨거운 확신 때문에 그는 설교 때마다 그 속에서 무언가에 대해 답을 하려고 시도했다. 따라서 회중은 그의 설교를 통해 무언가 적어도 한 가지 질문에 대해서는 답을 듣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되고, 그런 이유로 그의 설교는 모든 회중에게 매력적이고 심지어 불신자에게까지 매력적 전도가 되었다. 설교할 때 그가 그저 전해야 할 내용을 전하는 데에만 치중하지 않고, 설교를 듣는 회중 가운데 분명히 존재하고 있을 불신자와 회의자의 반론과 질문을 의식하고 그것들에 대해 대답하려고 애쓰는 모습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대단히 중요한 태도라 여겨진다. 그런 설교는 ‘기독교는 맹목적 신앙을 강요한다’는 일반의 오해를 불식시킴으로써, ‘이유 있는 신앙’을 추구하는 젊은 세대들에게 와닿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도 그를 본받아 “질문에 대답하는 설교”에 힘쓴다면 우리의 설교 또한 적실성(relevance)을 더욱 갖게 되어 회의적인 세대들에게 더욱 와닿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복음 안에 가장 아름답고 완전한 답이 있음을 확신하는 사역자는 복음 안에서 그 보물을 찾기까지 쉬지 않을 것이다. 좀처럼 답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는 복음 안에 그 보물이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로 흥분과 기대를 품고서 열정적으로 탐구를 계속해 나갈 것이다. 결국 교회는 그런 목회자들에 의해 새로워질 것이며, 이 회의론자의 시대는 그런 목회자들에 의해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가 팀 켈러가 발굴해 낸 보화(대답들)을 배우는 데에 만족하지 말고, 그보다 더, 복음 안에 모든 답이 있다는 분명한 확신 속에서 탐구를 계속해 온 그의 치열한 자세를 더욱더 배우면 더욱 좋을 것이라 믿는다.보수신학 계열에 서 있는 나로서 그에게 특별히 감사하는 것은 그가 ‘보수신학이 가지기 쉬운 편협함을 보수신학에 의해 극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논지를 위해 성경 말씀을 일부러 비틀지 않고도 교회가 이 모든 책임 가운데서 균형을 갖추도록 깨워준 것은 무엇보다 감사한 일이다.이렇듯 신선한 도전이 되었던 팀 켈러! 그러나 아쉽게도 그는 이제 더 이상 우리와 같은 별 위에 있지 않다. 그가 자신이 평소 그처럼 사랑하고 또 위하여 살던 주님과 함께하기 위해, 위대한 말들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났다. 하지만 나는 그가 자신이 남긴 수많은 책과 글, 설교와 족적을 통해 여전히 우리 곁에서 그가 하던 일들을 계속하게 될 것이라 믿는다. 짧은 시간이지만 살아서 그를 만나 함께할 수 있었던 귀한 특권을 누렸던 우리는 그가 죽어서도 한 알의 밀알처럼 백배, 천배의 열매를 맺는 것을 보게 되리라 믿는다.살아 있는 동안, ‘세상에서 가장 세속적인 도시에서도 복음은 여전히 뉴요커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했던 팀 켈러, 그가 천국에서도 그의 소원이 한국을 포함해 지구촌 곳곳의 도시와 시골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되기를 바란다. 목사님, 정말 수고 많았어요. 주안에서 다시 뵐 때까지 편히 쉬세요.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 (2) : 문화의 상황화
by 고상섭
2023-06-01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팀 켈러가 그토록 사랑했던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이제 눈물이 없는 곳에서 기뻐할 팀 켈러를 생각하면 위로가 되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에겐 그가 떠난 빈자리가 너무나 크게 느껴진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인 존재로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발자취를 남겼다. 그와 그의 삶이 우리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 몇 가지를 되돌아보며 그를 기억하고자 한다. 팀 켈러가 남긴 빈자리가 가장 크게 보이는 곳이 있다면 아마 문화의 영역일 것이다. 그의 설교와 강의가 다른 여타 목회자들과 차별성을 보인 지점 또한 문화의 상황화이다. 팀 켈러 전까지 많은 목회자가 복음 자체에 집중했다면, 그는 복음이 전달되는 상황에 대한 이해가 중요함을 일깨워주었다. 1. 신학적 비전 센터처치에서 팀 켈러는, 많은 사람이 리디머 교회가 많은 열매를 맺은 비결을 찾으면서 문학작품과 미디어를 잘 활용하는 스타일에 주목하거나 또 어떤 목회 프로그램을 사용하는지에 관심을 보이지만 더 중요한 점은 리디머 교회가 그 방법들에 도달하기 위해 어떻게 했는지에 있다면서, ‘신학적 비전’이라는 말을 소개한다. 그가 말하는 신학적 비전이란 교리적 기초와 사역의 현장 사이에 있는 중간 영역으로 “교리적 신조들이 어떻게 현장과 연결되는지에 대한 질문이며, 당신의 교리를 가지고 특정 시간과 장소에서 무엇을 행할 것인지에 대한 비전이다.”[1]신학적 비전은 조직신학이나 신앙고백서에서 해결되지 않는 이슈들이며 현장에 접목되는 실용적인 서적들에서 제기하는 것보다는 더 깊은 주제들이다. 그래서 신학적 비전을 품으려면 먼저 교리적 기초가 있어야 하고, 그것을 사역의 현장에 어떻게 접목할 수 있는지 기도하고 고민해야 한다. 2. 문화의 상황화 신학적 비전이 교리와 현장을 연결하는 것이라면, 교리와 사역의 현장 즉 문화를 알아야 한다. 레슬리 뉴비긴은 영국 교회가 부흥하던 시기에 인도로 파송된 선교사였다. 그가 사역을 마치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영국 교회는 쇠퇴했고 사람들은 교회에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뉴비긴은 비기독교 문화에 젖어 있는 이들에게는 새롭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소리를 높였다. 팀 켈러도 문화에 맞추어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말한다. “문화 속에 있는 사람들의 소망과 두려움, 열망을 이해하고 긍정해야 한다.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은 그 시대의 문화가 아무리 낯설다 하더라도 깊이 이해하고자 했고, 그 문화에 말을 걸 때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용어로 하지 않았다. 문화의 질문을 재구성하고, 관심을 재형성하고, 소망을 재조정했다. 이러한 이해가 바로 선교학자들이 말하는 상황화(contextualization)이다.”[2]3. 다양한 문화관상황화를 위해서는 문화에 대한 이해가 우선되어야 한다. 기독교 안에 다양한 문화관이 존재하는데, 팀 켈러는 그것을 센터처치에서 하나의 도표로 정리해서 설명한다. 문화관을 분석할 때 명심해야 할 것은 위의 네 가지 문화관은 모두 성경적이지만, 그중 하나의 문화관을 가지고서는 세상을 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D. A. 카슨은 그리스도와 문화의 모델을 연구하고 나서 “모든 성경의 가르침을 아우르는 통시적이고 동시적인 지배 모델은 없다”[3]고 말했다. 즉 모든 기독교 모델은 성경적이지만 성경 전체와 세상 전부를 다 설명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각 모델은 나름의 장단점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양한 문화관에 대한 이해이지 어느 하나의 문화관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적지 않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자기가 속한 교단이나 신학 배경에 맞는 한 가지 모델을 중심으로 세상과 소통하려 한다. 네 가지 모델의 각각의 장단점을 모두 이해하고 적용할 때 비로소 세상과 올바른 소통을 할 수 있게 된다. 내가 가지고 있는 문화관이 유일한 기독교 세계관이 아니라 네 가지 기독교 세계관 안에서 1/4의 영역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비로소 다른 문화관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1) 변혁주의 모델한국 복음주의권 교회에서 가장 많이 취하는 변혁주의 모델(Transformation Model)은 그리스도의 주재권이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되어야 한다고 믿고 열정적으로 사역하는 모델이다. 그러나 이 세계관 모델은 너무 지적인 개념에 치우친 단점이 있고 교회와 공동체가 배제된 채 개인의 비전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구호에 매몰되어 승리주의, 자기의, 과도한 확신으로 여러 가지 문제를 양산하기도 한다. 2) 적절성 모델 적절성 모델(Relevance Model)은 일반은총을 극대화하는 공공선을 추구함으로써 세상과 연결하는 다리를 놓는다. 그러나 공공선을 복음의 영역까지 확대하지 않기 때문에 정치적 해방과 영혼구원을 동일선상에 놓기도 한다. 복음이 분명하지 않은 교회들이 많은 상황에서 NGO와 교회의 차별성을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운 단점을 가지고 있다.3) 반문화주의 모델반문화주의 모델(Counterculturalist Model)은 세상과 다른 구별된 대조 사회를 목표로 삼기 때문에 교회의 순결을 우선순위에 둔다. 그러나 교회 밖의 문화 운동에 대해 부정적이기 때문에 제국과 권력, 자본주의 시장 등은 모두 사람들을 억압하는 제도로 간주한다. 이런 관점은 정치와 비즈니스 세계에 참여하는 것을 억제하며, 주변 문화의 영향에 대해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4) 두 왕국 모델 두 왕국 모델(Two Kingdom Model)은 하나님이 전 세계를 통치하시는 통치자이시지만 두 개의 왕국을 별개의 방식으로 통치하신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두 왕국 모델은 하나님은 세상을 일반은총을 따라 통치하시고 교회는 특별은총에 따라 통치하신다고 믿으며, 기독교적 방식으로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는 성도로, 교회 밖에서는 건전한 시민으로 사는 삶을 강조한다. 그러나 일반은총의 타락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단점이 있고, 사회의 선은 모두 자연 계시로 생긴 것으로 간주한다. 또 중립적인 기초 위에 신앙을 영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법률, 정부, 예술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이 필요하다는 것을 거부하는 단점이 있다. 4. 계절을 알라 위의 그림에서 가운데 있는 원은 각 모델의 중요한 키워드를 말한다. 변혁주의는 세상과 구별된 (탁월한) 세계관을, 적절성 모델은 공공선을, 반문화주의는 대항문화로서의 교회를, 두 왕국이론은 세상을 향한 겸손과 직업 세계를 향한 탁월성을 추구한다. 각각의 키워드가 있지만 원 안에 있는 네 가지 문화관의 키워드를 모두 섞어서 자신의 영역에 맞는 세상과 소통해야 한다. 우리말 역간 ‘센터처치’에는 그림 안에 따로 표기가 없지만, 원서에는 “blended Insights”라는 표현이 있다. 각 모델의 장점을 섞어서 활용하라는 것이다. 네 가지 모델은 모두 성경적이지만 모든 환경에 다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세상의 ‘계절’을 잘 살펴보고 그 상황에 맞는 세계관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문화적 상황화이며 문화참여(cultural engagement)이다.미로슬라브 볼프는 광장에 선 기독교에서 교회의 문화참여를 두 개의 ‘아니요’와 하나의 ‘예’로 설명하는데, 켈러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전적인 변혁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서는 ‘아니요’이다. 둘째, 문화에 적응하는 것에 대해서도 ‘아니요’이다. 셋째, 문화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서는 ‘예’이다. 볼프가 말하는 변혁과 적응이 아닌 참여라는 말은 문화를 지배하는 것(변혁)과 문화를 버리는 것(적응) 사이의 중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안에 머물면서 다르게 사는 삶’을 말한다. 즉 세상 문화와 분리되지 않으면서도 기독교적 삶을 통해 세상과 구별되는 삶을 통해 세상에 빛이 되어야 하는 삶이다.”[4]만약 세상이 교회를 적대적으로 대할 때는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변혁주의 모델보다는 교회의 순결을 강조하는 반문화주의 모델이 적절할 것이다. 또 핍박받지만 성장하는 시기에는 변혁주의 모델이 더 어울린다. 교회와 세상의 가치가 비슷한 시기에는 두 왕국 모델이 필요할 것이다. 교회가 매력을 잃어가는 시기에는 적절성 모델을 통해 공공선에 이바지함으로 문화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봄_교회가 핍박받지만 성장하는 시기_변혁주의 모델• 여름_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는 시기_두 왕국 모델• 가을_교회가 매력을 잃어가는 시기_적절성 모델• 겨울_교회가 세상에 적대적일 뿐 아니라 영적으로 약해진 시기_반문화주의 모델어떤 모델이 좋은가를 따지는 것보다 더 필요한 것은 지금 우리 교회와 현실은 어느 시대에 와 있는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먼저 세상을 살펴보고 거기에 맞는 문화 모델을 섞어서 활용하면 된다. 단순히 여름은 두 왕국 모델이라고 규정하기보다 다양하게 뒤섞여 있는 문화관 속에서 네 가지 모델의 장점을 모두 섞어서 각 문화에 맞도록 적절히 소통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팀 켈러가 말하는 “blended Insights”이다. 5. 자세와 몸짓 팀 켈러는 문화관을 섞어서 활용하자고 제안하면서 ‘자세와 몸짓’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 용어는 앤디 크라우치의 컬처 메이킹에 나오는 단어로 ‘자세’(posture)는 네 가지 문화관 속에서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모델을 상징하는 단어로, 흔히 말하는 디폴트 값 즉 무의식적 기본위치(unconscious default position)이다. ‘몸짓’(Gesture)은 다른 모델에서부터 나오는 즉흥적인 움직임이다.[5] 각자 자신에게 가장 맞는 문화관의 자세를 가지고서, 상황에 따라 계절에 맞도록 다른 모델의 장점을 취해서 몸짓을 가질 수 있다. 문화에 매우 우호적인 적절성 모델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상황에 따라 반문화주의 모델을 취할 수 있고, 문화에 대해 좀 더 적대적인 모델을 가진 사람들도 상황에 따라 공공선을 추구할 수도 있다. 사도 바울은 신약의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성도들이 세상 속에서 가지는 이중 정체성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나 바울이, 에베소에 사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성도들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에베소서 1:1)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성도의 정체성을 에베소라는 지역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면서도 또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살고 있는 신자들이라고 표현한다. 우리는 세상이라는 곳에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 세상과 교회라는 두 영역과 어떻게 관계를 설정하느냐가 우리의 문화관을 결정하게 된다.이원론적 삶으로 문화의 모든 것을 거부해서도 안 되고, 문화의 모든 것을 긍정해서도 안 된다. 비판적 향유(critical enjoyment)와 적절한 경계(appropriate wariness)가 필요하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문화들의 영감과 창작을 즐겨야 한다. 그리고 각각의 문화 안에 있는 정의와 지혜, 진리, 그리고 아름다움의 표현들을 경축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의식을 갖고 이것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특히 죄와 우상숭배로 인해 왜곡된 것들을 살펴야 한다.[6]6. 대응하지 말고 행동하라다양한 문화관이 있음을 인정하고, 모두 성경의 진리를 반영하는 문화관임을 인정하며 서로 다른 문화관으로 논쟁하는 일은 줄어들 것이다. 다른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문화관과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감정적으로 반응한다면 세상 속에서 더욱 전도의 문은 닫힐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팀 켈러는 몇 가지 대안을 제시한다. 첫째, 오만을 피하라. 자신에게 가장 도움이 많이 된 문화 모델이 모두에게 최고의 모델이 될 수는 없다. 자신이 선호하는 모델의 장점과 다른 모델의 약점을 비교하면서 우월감을 느끼지 말아야 한다. 모든 문화관은 각각 다양한 영역에서 활용할 수 있는 진리의 한 단면임을 기억하라. 둘째, 비난하지 말라. 자신에게 과도하게 영향을 끼친 문화의 단점을 알아가면서 그 문화관의 모든 것을 버리게 될 수도 있다. 또 특정 모델을 맹종하는 열성 지지자들로부터 상처를 입고서는 그 특정 모델을 비난하게 되기도 한다. 문화에 대해 생각할 때 개인의 경험을 지우고 성경, 문화적 시기, 그리고 당신의 은사를 종합해서 판단하고 비난하지 말라. 셋째, 좌절하지 말라. 자신이 선호하는 모델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갈등이 일어날 때, 그 갈등 때문에 자기 입장의 완고한 지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넷째, 순진하게 생각하지 말라. 교회가 모든 모델을 초월해야 한다거나 모든 모델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말라. “나는 어떤 모델도 따르지 않아”라고 말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는 부정적인 어느 하나의 모델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복음은 우리에게 다른 모델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우리가 가진 모델들을 주장할 수 있는 겸손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진 관점의 강점을 누리고 약점을 인정하며, 다른 모델들의 강점을 힘써 배워야 한다. 결국, 문화관에서도 복음의 겸손이 필요하다. 팀 켈러는 리디머 교회를 개척한 초기에 교회가 도시의 구원자라도 된 것처럼 여기는 잘못된 생각을 했다고 회개했다. 이처럼 우리가 도시의 구원자인 양 여기는 것은 해로운 생각이다. 우리는 겸손히 도시와 사람들을 존경하며 배워야 한다. 그들과의 관계는 의도적으로 상호적인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기꺼이 그들의 삶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일반은총을 보려고 해야 한다. 그들이 우리를 필요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를 더 충만히 알기 위해 그들이 우리에게 필요함을 인정해야 한다. … 복음만이 우리에게 겸손함을 주고(나는 도시로부터 배울 것이 많다.), 자신감을 주고(나는 도시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많다.) 용기를 준다(나는 두려워할 것이 하나도 없다). 이것들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타인을 축복하는 효과적인 사역이 가능해진다.[7]우리는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이것을 인식하지 못하면 자칫 리차드 마우가 표현한 것처럼 ‘무례한 기독교’로 전락할 수도 있다. 다양한 문화관을 인식하며 또한 겸손히 배우고 활용하는 신학적 비전이 필요하다. 문화에 대해 분석하고 도전하는 팀 켈러의 설교가 아직도 생생하다. 성경을 이야기하는 설교자는 많지만, 문화를 분석해주는 설교자는 많지 않다. 앞으로 팀 켈러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문화를 분석하는 전문가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그의 발자국을 따라 문화를 향해 평가하고 도전하는 과정을 통해 포스트 모던 시대에도 여전히 복음이 능력이 됨을 확신하고 싶다. 주1. 팀 켈러, 센터처치, 26 2. 팀 켈러, 설교, 1353. 센터처치, 4834. 같은 책, 493. "그 안에 머물면서 다르게 사는 삶"이라는 표현은 볼프의 광장에 선 기독교에서 인용. 5. 같은 책, 502 6. 같은 책, 2327. 같은 책, 358
50가지, 팀 켈러가 남긴 말
by Matt Smethurst
2023-05-31
기리며: 팀 켈러(1950-2023)팀 켈러(1950-2023)는 그토록 신실하게 사랑하던 주님과 영원히 함께하기 위해 본향으로 돌아갔다. 그가 평생 주님에 관해서 쓴 글과 설교가 얼마나 많은가? Gospel Coalition의 공동 창립자이기도 한 켈러는 다작가였다. 더불어 리디머 교회에서 선포된 그의 모든 설교는 무료로 제공된다. 그의 삶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콜린 핸슨이 최근에 쓴 하나님의 사람, 팀 켈러(Timothy Keller: His Intellectual and Spiritual Formation) 일독을 권한다. 켈러가 내 삶과 사역, 그리고 수많은 이들에게 미친 영향을 측정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함에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명언 50가지를 소개한다. 1“죽음이 그리스도인에게 하는 역할은 단 하나, 그들의 삶을 영원히 더 좋게 만드는 것이다.”2“그리스도인이 가진 확신의 중심 기초는 우리의 마음을 얼마나 하나님께 두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그분의 마음이 얼마나 우리 마음에 제대로 자리 잡고 있는가이다.”3“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면, 그분의 말씀 모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부활이 거짓이라면, 그가 무슨 말씀을 했건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신앙의 핵심은 우리가 그의 가르침을 좋아하는가 아닌가가 아니라 그가 진짜 부활했는가 아닌가이다.”4“당신이 거부하는 하나님에 관해서 설명해 보라. 당신이 믿지 않는 하나님에 관해서도 설명해 보라. 당신이 싫어하는 그런 하나님이라면, 어쩌면 나도 믿지 않을 거 같다.”5“현대인에게는 성경을 조사하고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을 찾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방향을 반대로 잡아야 한다. 성경이 나를 조사하게 하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받아들이실 수 없는 이유를 찾아야 한다.” 6“사탄은 육체에 상처를 남기는 송곳니로 우리를 지배하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는 거짓으로 지배한다. … 사탄의 거짓말과 싸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주문을 만드는 게 아니라 진실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7“나라는 존재가 너무나 죄가 많아 예수님이 죽으셔야 했지만, 그러함에도 그분에게 우리는 무척 사랑받고 소중한 존재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셨다. 이 사실 때문에 우리는 깊은 겸손과 더불어 큰 자신감을 얻는다. 내가 특별히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을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다른 이에게 나라는 존재를 굳이 증명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8“죄의 교리는 기독교 세계관이 말하는 것만큼 그리스도인이 그리 선한 존재는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일반 은총의 교리는 세상의 잘못된 세계관이 말하는 것만큼 불신자가 그리 결함 없는 존재는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9“당신이 믿는 신이 당신을 화나게 하고 도전할 수 있을 때만, 그 신이 상상의 산물이 아닌 진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 행여라도 당신 생각에 결코 반대하지 않는 신을 믿고 있는가? 지금 당신이 예배하는 신은 단지 이상화된 당신 자신에 불과하다.”10“하나님의 영광은 다른 곳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방식으로 교회를 통해서 주어진다. … 교회 생활에 최선을 다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제자도의 수단은 없다.”11“사랑은 풍덩 빠지는 게 아니다. 사랑은 당신 전부를 올인하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당신과 함께 할 거야.’ 사랑은 이렇게 말한다.” 12“‘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신 건 알아. 하지만 내가 용서가 안 돼.’ 이 말의 진짜 의미를 아는가? 하나님의 용서보다 더 중요한, 나라는 우상을 만족시키지 못해서 속상하다는 뜻이다.” 13“당신에게 정체성이 일이고 일에서 성공한다면, 그런 정체성은 단지 머리에 남을 것이다. 그러나 실패한다면 그건 마음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다.” 14“그가 나를 사랑하지만, 그가 나를 모른다면, 그건 피상적인 사랑이다. 그가 나를 알기는 하지만, 나를 사랑하지는 않는다면, 그건 악몽이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밑바닥까지 아시고 또 우리를 하늘까지 사랑하신다.” 15“곤히 잠든 왕을 깨워서 감히 새벽 세 시에 물 달라고 할 수 있는 건 어린아이뿐이다. 우리에게는 그런 권한이 있다.”16“관용에 믿음 유무는 중요하지 않다. 관용에 중요한 것은 당신에게 동의하지 않는 사람에게 당신의 믿음이 취하는 태도이다.”17“전통적 종교는 ‘나는 도덕적으로 선하게 사니까 신은 내게 복을 줘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복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내가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도록 하셨다. 그러니 이제 나는 그리스도께 감사드리기를 원한다’라고 한다. … 종교는 ‘내가 순종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받아주신다’라고 한다. 반면에 복음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받아주시니 순종하기를 원한다’라고 한다.” 18“당신이 감히 상상하는 것보다 당신은 훨씬 더 죄가 많고 결함으로 가득하다. 동시에 당신이 감히 꿈꾸던 것보다 당신은 훨씬 더 사랑받고 인정받는다. 이게 바로 복음의 메시지이다.” 19“절벽에서 떨어진다고 생각해보자. 약한 가지에 대한 강한 믿음은 강한 가지에 대한 약한 믿음보다 치명적이다. 최종 구원의 여부는 당신의 믿음이 얼마나 강한가가 아니다. 믿음의 대상이 누군인가에 근거한다.” 20“고통받는 사람들이 당하는 유혹은 고통을 향한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알 수 없기에 생긴다.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기에 아무런 목적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21“세상에는 좋은 것, 어려운 것,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영광, 거룩함, 아름다움처럼 최고의 것이 있다. 성경의 가르침은 최고의 것으로 가는 길은 좋은 것이 아니라 대개는 어려운 일을 통해서라고 한다. … 이것보다 세상이 삶을 이해하는 방식과 더 반대되는 가르침은 없다. 세상이 바라보는 가치에 비추어 이보다 더 전복적인 메시지는 없다.”22“사도들은 기독교 성 윤리를 기독교의 핵심 신념 중 하나로,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정통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성에 관한 그리스도인의 가르침과 실천은 가난한 사람에 향한 관심과 인종 평등 문제만큼이나 복음과 부활이라는 메시지가 포함하는 필수적인 요소였다. 이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명확하다. 오늘날 가난한 사람을 돌보라는 성경의 가르침은 옳지만 성에 관한 내용은 구식이기에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면 이런 주장은 불가능하다.”23“품질 면에서 매력적이고 가격 면에서 저렴한 혼외 섹스가 얼마든지 소비 상품이 될 수도 있다. 애초에 약속이 담보되지 않았기에 품질이 떨어지거나 비용이 올라가면 언제라도 떠나면 된다. 하지만 급진적인 자기 헌신과 평생을 바치는 결혼 생활 안에서만 이뤄지는 섹스를 생각해보라. 섹스 시장은 사라질 것이다. 감히 섹스에 값을 매기는 행위 자체가 불가능해질 것이다.”24“예수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 계실 때 궁극의 어둠이 내려오고 있었고,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는 당신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당신을 위해 죽었다. 궁극의 어둠 속에서도 당신을 버리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가 왜 지금 당신을 버리시겠는가? 어둠 속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는 당신을 버리실 리가 있겠는가?”25“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 대속 교리를 이해할 때만 영적 왜곡을 막을 수 있다. … 오로지 이 교리만이 하나님에 관한 착각을 막는다. 사랑이 있기는 하지만 거룩이 본질인 하나님 또는 어느 정도 거룩함이 있지만 사랑이 본질인 하나님이라는 오해에서 벗어날 수 있다. 거룩하심과 사랑하심이라는 하나님의 두 속성은 상호 의존적이나 동등하다. 오로지 이 교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바로 볼 때 은혜를 핑계로 버릇없거나, 또는 은혜에도 불구하고 무시당한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건강하고 제대로 사랑을 아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다.” 26“세속적 틀은 … 상처 입은 양심의 치유에 아무런 역할을 못 한다. 사랑과 용서를 받을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 자아에게 할 말이 없다. 나의 죄가 얼마나 깊은지를 본 사람, 그리고 ‘나 자신에게 너그러워도 돼. 나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어’라는 세상의 방식으로는 내 양심을 달래는 데에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본 사람에게 세속적 틀은 무용지물에 불과하다.” 27“진정한 회개는 회칠하기(‘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와 책임 전가(‘사실 내 잘못이 아니었어.’) 그리고 자기 연민(‘당한 걸 생각하면 나 자신이 너무 불쌍해.’)과 자기 학대(‘나를 욕하지 않는다면 나는 너무 기분 나쁠 거야. 제발 누가 나를 좀 괴롭혀줘.’)가 끝날 때 시작한다.”28“느끼기 전에 먼저 용서해야 한다. 용서하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느끼는 경우는 없다. 용서는 당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 더 이상 죗값을 강요하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 당신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글쎄, 용서하기 전에 미리 느껴야 할 거 같은데.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말하기 전부터 화가 누그러지는 느낌이 들어야 할 거 같은데 말이야.’ 용서하기 전에 용서했다는 감정부터 느끼길 원한다면, 당신은 결코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분노의 감옥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29“중보기도하는 대상을 향해 계속 화를 품고 있는 건 쉽지 않다. 또한 우월감을 느끼지 않는 상대한테 화를 품거나, 또는 중보기도를 하면서 우월감을 느끼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왜 그럴까? 기도할 때 당신은 하나님께 용서받은 죄인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30“기도는 진정한 자기 지식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입구이다. 또한 깊은 변화, 곧 사랑의 재배열을 경험하는 주된 방법이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상상할 수 없는 많은 선물을 내리신다. 참으로 기도를 통해 우리는 안전함을 느낀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가장 원하는 많은 것을 주시기 때문이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방법이자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간단히 말해서, 기도야말로 우리가 삶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일의 열쇠이다.”31“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을 주시거나, 또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것을, 우리도 안다면 구했을 것을 주신다.” 32“끔찍한 그날 예수님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셨던 하나님이셨기에, 우리가 기도할 때 응답하실 하나님을 우리는 안다. … 죄인이 마땅히 받아야 할 거절을 대신 받으신 예수님의 기도 때문에 이제 우리의 기도는 예수님의 기도가 당연히 받으셨어야 할 바로 그 응답의 대상이 되었다.” 33“자비는 단순히 그리스도인의 책무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자비는 그리스도인의 표지이다.” 34“좋은 설교는 인간의 의지를 부수는 몽둥이가 아니라 마음을 찌르는 칼과 같다.”35“기독교 공동체를 위한 설교의 주요 식단은 강해 설교가 되어야 한다. … 강해 설교야말로 성경 전체가 참되다는 확신을 나타내고 전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강해 설교를 통해서 설교자는 특정 주제나 몇몇 동의하는 내용만이 아니라 성경의 모든 부분이 조금도 예외 없이 다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36“설교가 단지 본문을 설명하는 데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본문을 사용하여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 설교자가 종종 첫 번째 사명, 본문 설명에 너무 많은 시간을 투자하곤 한다. 그래서 진짜 중요한 두 번째 사명에는 거의 생각을 쏟지도 못하고 독창성을 부여하지도 못한다.” 37“성경 본문을 주해할 때마다 기억하라. 해당 본문에서 내가 나 자신을 구원할 수 없고 오직 예수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끌어냈는가?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아직 본문 설명을 제대로 마치지 못했다.” 38“최소한 기독교를 전파하는 사람이라면 복음을 믿지 않는 상태가 어떤지 내가 아주 잘 기억하고 (또는 최소한 이해는 하고) 있음을 불신자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39“세속주의의 인간 중심 도덕 가치는 과학적 추론의 결과가 아니라 예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다. … 그것도 나름의 신학적 역사가 있다. 그리고 현대인은 신앙으로만 그 가치를 붙잡고 있다.” 40“십자가 믿음을 통해 우리는 정체성에 필요한 새로운 기초를 확립한다. 이기주의에서 빠져나와 겸손하게 되었고 참으로 확고한 사랑 안에서 든든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 결과 이제는 나와 다른 사람들을 배제하기보다는 포용할 수 있게 되었다.” 41“[이것들은] 기독교가 제시하는 비길 데 없는 제안이다: 고통이 제거할 수 없는 의미, 상황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 만족, 상처를 주는 대신에 오히려 사랑을 강화하는 자유, 자신을 압도하거나 다른 사람을 배제하지 않는 정체성, 스스로를 압제자로 만들지 않는 도덕적 나침반, 그리고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소망.” 42“십자가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그런 예수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포기하도록 만드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43“예수님은 위대한 세계 종교를 세우거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수 세기 동안 인간의 생각과 삶의 진로를 정하거나 한 역사상 극소수의 인물 중 한 사람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극소수의 그룹에 속한다. 반면에 역사 속에는 다른 세계에서 온 신성한 존재라고 암시적으로 또는 명시적으로 주장한 사람들이 꽤 많았다. 그들 중 다수가 선동가였고 때로는 참된 기독교 신자들 일부를 끌고 나온 작고 독립적인 분파의 지도자이기도 했다. 예수님의 독특한 점은 그가 극소수에 불과한 첫 번째 집단에 속하면서도 동시에 두 번째 집단의 구성원이기도 하다는 점이다.”44“히브리 세계관은 하나에서 열까지 인간이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모든 생각에 반대했다. 유대인들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발음하거나 철자로 쓰지도 않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삶과 주장, 부활을 통해 가장 가까운 유대인 추종자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을 찾는 방법을 알려주는 선지자일 뿐 아니라 우리를 찾으러 오신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까지 확신시켰다.”45“그리스도께 나올 때, 당신은 모든 조건을 내려놓아야 한다. ‘만약에 당신이 ∼하면, 당신께 복종하겠다’라고 말할 권리를 포기해야 한다. ‘만약에 당신이 ∼하면, 당신께 순종하겠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전혀 순종이 아니다. 실제로 당신의 말은 이런 의미이다. ‘당신은 나의 주님이 아니라 조언자이다. 귀하의 조언을 기꺼이 받겠다. 그리고 그중 몇 개는 받아들일 수도 있다.’ 아니, 그러면 안 된다. 정말로 예수님과 함께하기를 원한다면, 자기 결정권을 포기해야 한다. 자기 부인은 자기 주장으로 정의되는 후기 현대 문화에 역행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라고 부름받았다. 자기 부인 외에는 답이 없다.” 46“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교리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좋은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그 말 자체가 교리이다. 은혜가 아니라 행위로 구원받는 교리이다.” 47“죽음 가운데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너의 안전이 아니라면, 네게 안전이란 없다. 왜냐하면 너에게서 빼앗길 수 없는 유일한 것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내 영원한 팔로 너를 안아주겠다. 다른 모든 무기는 너를 실망에 빠트리지만, 나는 결코 너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냄새나는 소금은 매우 불쾌하지만, 동시에 효과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환상에서 깨어날 때 마음을 평안히 가지라. 믿음으로 우리가 그를 구주로 모신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안을 맛보게 될 것이다.” 48“자기 행동을 이해하고 싶다면 먼저 죄를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모든 죄는 하나님이 우리의 선을 위해 더 열심이시고 선이 무엇인지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데에서 시작한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우리를 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불신한다. 따라서 그런 하나님에게 나의 통제권을 전부 맡긴다면 비참해질 것이라고 두려워한다. 아담과 하와를 생각해보자. 그들은 결코 ‘오늘 악해져야지. 그래서 우리 인생뿐 아니라 인류 모두의 인생을 망쳐버려야지’라고 결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바란 것은 행복이었다. ‘우리는 단지 행복하고 싶을 뿐이야. 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가 행복해지는 데에 별 도움이 안 될 거 같아. 아무래도 우리 스스로 행복을 찾아야겠어. 하나님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49“진정으로 당신을 파괴할 수 있는 유일한 폭풍, 곧 죄와 악에 대한 신성한 공의와 심판의 폭풍은 절대로 오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 기꺼이 그 궁극의 폭풍 속에서 고개를 숙이셨다. 그는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받고 죽으셨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용서받을 수 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본다고 해서 지금 당장 나를 괴롭히는 모든 고통에 대한 답이 주어지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십자가는 당신을 향한 예수님의 변하지 않는 사랑을 증명한다. 당신을 위해 그는 폭풍 속으로 자신을 던졌다. 그렇기에 지금 당신을 둘러싼 폭풍 가운데에서도 그분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다.” 50“당신이 지금보다 백배 더 나쁘다고 해도 그의 자비 앞에서는 차마 죄인이라는 명함도 내밀 수 없다.” 원제: 50 Quotes from Tim Keller(1950-2023)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팀 켈러, 그를 통하여 변화된 나와 우리 교회
by 길성운
2023-05-30
기리며: 팀 켈러(1950-2023)좋은 작품은 화가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 그 가치가 급등하듯이, 귀한 분들의 소천은 그분의 인격과 사역이 널리 알려지며, 그들이 남긴 업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게 되는 계기가 된다. 팀 켈러의 소천은 우리 모두에게 그렇게 다가온다. 나에게도 팀 켈러의 소천 소식은 처음에는 충격이었지만, 이제 그의 죽음을 통해서 그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더욱 깊이 다가온다.성복중앙교회는 70년대 성령 운동으로 유명했던 이천석 목사께서 설립하였다. 그분의 소천 이후 교회는 크고 작은 내홍을 여러 번 앓았다. 그러는 사이 교회는 약해졌고, 이웃들에게 좋지 못한 소문으로 외면당했다. 2009년 12월, 나는 성복중앙교회 5대 담임목사가 되었다. 나의 임무는 상처를 치유하고,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고, 다시 부흥을 꿈꾸는 교회가 되게 하는 것이었다. 7년간 분투하였다. 성경을 가르치며 제자훈련에 진력하였다. 성도들이 돌아오고 새가족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어느 정도 이미지도 회복되기 시작했다. 선배들의 격려가 이어졌다. 그러나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정말 옳은 길인지 확신이 없었다. 2014년, 현 복음과도시 이사장인 이인호 목사의 제안으로 세미나에 참석하게 되면서, 팀 켈러를 만났고, 그의 목회 철학을 배우게 되었다. 그 후 나와 내 삶에 실제적인 변화가 일어났고, 목회자로서 다시 가슴이 뛰게 되었고, 목회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으며, 목회 과정에서 발생하는 아픔에 대한 새로운 시각도 열렸다.내가 받은 가장 큰 축복은 ‘복음의 재발견’에서 출발한다. 미국의 많은 교회는 지금 부흥의 시기가 끝난 이후에 율법화, 종교화된 모습을 보인다. 그런 교회들은 전통을 진리로 믿고 자신들만을 위한 교회가 되어 결국 고사하게 될 위기 앞에 있지만 정작 본인들은 그 위험성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종교화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복음이다. 종교는 순종하면 용서받는다고 한다. 바리새인들은 행동규범을 만들고 그것을 지키는 자를 의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복음은 이미 용납되었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알려준다. 비난당할 때, 종교적인 사람은 격노하거나 무너진다. 좋은 평판 받는 자아상은 나에게 너무 중요하기 때문이다. 복음은 나의 정체성은 사람의 인정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사랑이기에 다르게 반응한다. 종교는 나의 행위와 윤리를 강조하나 복음은 그리스도가 베푸신 은혜와 그 은혜에 기반한 동기를 강조한다. 이런 복음적 시각만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나는 복음의 재발견을 통하여 자주 질문하게 되었다. 나의 목회적 동기는 무엇인가? 나의 정체성은 누구로 인하여 세워지는가? 내가 당하는 고난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우리 교회는 55년이 된 교회이다. 그러다 보니 나름의 전통이 있었다. 과거의 일들을 답습하고 있었다. 우리 교회는 토요일에 본당 청소를 한다. 본당 1층은 여전도회가, 2층은 남전도회가 한다. 그런데 계단에 떨어진 휴지는 아무도 줍지 않는다. 또한 새로운 일을 시도하려고 할 때마다 벽에 부딪히게 된다. 그때마다 나는 성도들에게 질문을 한다. “왜 그렇게 해야만 하는가?” “그렇게 하는 동기는 무엇인가?” 교회는 복음 앞에서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우리 교회는 계단에 떨어진 휴지를 줍는 교회가 되었다. 팀 켈러 덕분이다.둘째로 설교와 예배의 변화이다. 팀 켈러는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의 진수를 몸소 보여주었다. 나의 설교는 언제나 도덕주의적으로 끝을 맺었다. “이렇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등이었다. 그런데 팀켈러는 “이런 성경적 진리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오신 분이 계십니다. 그렇게 사셨고, 우리를 용납해주셨고, 지금도 힘을 주시고 계신 분이 계십니다. 이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성경의 핵심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성품과 그분의 사역의 결과들을 알려주는 것임을 알게 해주었다.어느 해부터인가 우리 교회 성도들이 나의 설교가 달라졌다고 말한다. 항상 복음이 있어서 감사하다고 한다.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과 살지 못하는 사람 사이에서 판단이 난무하던 교회가 서로를 긍휼히 여기는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셋째로 도시문화에 대한 복음적 침투의 중요성을 알려주었다. 현대 사회는 점점 도시화되고 있으며, 도시는 개인화 계층화를 심화시킨다. 이런 도시 문화에 적절히 반응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교회 앞에는 고려대학교가 있다. 수년 전부터 베리타스 포럼에 참여하고 있다. 고대 기독 교수들과 선교단체 간사들이 연합하여 저명한 학자들을 모시고, 신자와 비신자를 초대하여 토론을 통해서 진리를 탐구하는 자리이다. 일종의 신개념 전도집회라고 할 수 있다. 일방적 선포가 아니라 진리에 대하여 함께 고민해보는 시간이므로 신자와 비신자를 막론하고 많은 젊은이에게 호응을 얻고 있다. 첫해 오스 기니스가 주강사로 참석한 것을 시작으로 제임스 스미스, 존 레녹스, 알리스터 맥그라스, 이어령 교수에 이르기까지 소중한 분들을 만날 수 있었고, 지역교회 목회자로서 맛보기 힘든 은혜를 맛보고 있다.넷째로 이웃 교회들과 아름다운 연합을 이루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확신을 심어주었다. 팀 켈러는 우리가 속한 도시가 복음화되려면 하나의 대형교회보다는 100개의 소형교회가 연합할 때 훨씬 효과적이라고 강조하였다. 단순한 연합을 넘어서 거룩한 목적을 위한 운동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하였다.이런 도전은 내가 속한 종암동에 있는 22개 교회를 아름답게 보게 하였고, 성북구에 있는 400여 교회와 어떻게 연합을 이룰 것인지 고민하게 하였다. 그 결과로 연합회와 함께 지역 아파트 단지 경비원과 미화원을 위로하고, 코로나 시기에 고생하는 보건소 공무원들에게 선물과 편지 보내기 운동을 하고, 작은 교회들의 영상 설비 지원하는 일 등을 하게 되었다. 함께 웃고, 함께 웃는 동네가 무엇인지 알아가게 되었다.마지막으로 그는 목사의 모델이 되어 주었다. 앞의 모든 변화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그의 가르침을 뒷받침하는 그의 인격 때문이었다. 그의 삶의 향기를 생각할 때 무엇보다 성육신적 모습이 떠오른다. 2016년 안식월에 리디머 교회 주일 예배를 참석하였다. 리디머 교회는 당시 뉴욕 맨해튼에 3개의 캠퍼스를 가지고 있었고, 그중 웨스트에 있는 예배당은 1층 2층 예배방이었다. 그곳은 빈자리 없이 가득 메워져 있었고, 연령층은 매우 젊었으며, 강대상 없이 메모 한 장만으로 그는 청중과 소통하였다. 예배 후 입구에서 팀 켈러 목사님은 평범한 동양인 목사를 친근하게 반겨주었고, 함께 사진을 찍고, 읽고 있었던 그의 저서에 사인을 해주었다. 그는 평범한 옆집 아저씨처럼 교인들과 인사하였고, 아내와 함께 이동하였다. 그는 매우 자연스러웠고, 평범한 인간이었다.2018년 내한하여 횃불회관에서 목회자 콘퍼런스를 하고 있을 때 한 기자가 그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으냐고 질문하였다. 그는 사랑이 많은 아버지, 남편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하였고, 좋은 이웃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는 한 문장을 말할 때마다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이었다면…”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는 본인이 좋은 아빠 혹은 좋은 이웃이라고 단정하지 않았다.그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수였다. 뉴욕에서 개척하여 6천 명이 이상이 출석하는 초대형교회 담임목사였고, 복음적 분립개척자 양성소인 CTC와 복음연합 TGC의 설립자 겸 대표였다. 그는 미국에서 그리고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목사로 인정받았다. 그런데 그는 언제나 인간이었고, 우리들의 친구였다.내 동료는 팀 켈러 추모 댓글에 “내가 그동안 만나본 분 중에 가장 예수님을 닮은 분이므로, 천국에 가면 가장 먼저 팀 켈러 목사님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물어보고 싶다”고 하였다. 우리 모두에게 보여준 그의 겸손한 모습이 그분을 더욱 그리워하게 만든다.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 (1) : 복음의 재발견
by 고상섭
2023-05-29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팀 켈러가 그토록 사랑했던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이제 눈물이 없는 곳에서 기뻐할 팀 켈러를 생각하면 위로가 되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에겐 그가 떠난 빈자리가 너무나 크게 느껴진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인 존재로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발자취를 남겼다. 그와 그의 삶이 우리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 몇 가지를 되돌아보며 그를 기억하고자 한다. 팀 켈러가 그토록 사랑했던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이제 눈물이 없는 곳에서 기뻐할 팀 켈러를 생각하면 위로가 되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에겐 그가 떠난 빈자리가 너무나 크게 느껴진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인 존재로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발자취를 남겼다. TGC 회장 샌디 웰슨은 추모글에서 지난 100년 동안 팀 켈러처럼 영향을 준 목회자는 없었을 것이라 평가하기도 했다. 그의 삶을 추모하며 그가 우리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을 몇 가지 정리해보는 것으로 팀 켈러를 기억해보고자 한다. 팀 켈러를 좋아하는 많은 이들은 한결같이 팀 켈러의 여러 설교와 저서를 통해 “복음을 새롭게 발견했다”고 고백한다. 팀 켈러의 목회와 삶을 한 문장으로 평가한다면 아마도 “복음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The Gospel Changes Everything)라는 문장으로 대변할 수 있을 것 같다.1. 매로우 논쟁 팀 켈러가 전하는 복음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내려오던 전통적인 복음이다. 그 복음을 오늘의 현실에 맞도록 상황화한 것인데, 팀 켈러는 오늘날 교회의 현실이 17세기 매로우 논쟁 당시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생각했고, 그 당시의 대두되었던 ‘은혜의 복음’이 이 시대에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팀 켈러는 매로우 논쟁의 의미를 다룬 싱클레어 퍼거슨의 온전한 그리스도를 추천하는 글에서 당시 에드워드 피셔의 개혁신앙의 정수(Marrow of Mordern Divinity)를 읽고 동의했던 목회자들이 총회에서 율법폐기주의자로 오해받고 또 그들을 반대하던 사람들이 율법주의자로 오해받은 사건을 언급하면서 양쪽 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동일하게 믿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복음을 전하는 방식에서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로 나뉠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는 단순히 교리를 믿는 것 이상의 문제다. 매로우 논쟁 당시 양측은 모두 행위로 구원받는다거나, 구원받은 뒤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 둘 다 대놓고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목회와 설교에서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의 냄새를 강하게 풍겼다.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는 둘 다 마음의 태도, 행동, 인격, 성경을 읽는 방식이 종합된 결과물이다.[1]팀 켈러는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전통적인 교리를 믿지만 목회의 방식에서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가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 있고, 성도들의 삶 속에서도 복음을 분명히 알지만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의 형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를 오해하면 엉뚱한 해법을 내놓게 된다고 우려한다. 율법주의에 대한 해답으로 율법과 순종을 덜 강조하게 되고, 반율법주의에 대한 해답으로 율법과 순종을 더 강조하게 된다는 지적이다.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를 극복하는 방법은 오로지 복음을 다시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다. 또한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의 뿌리를 발견하여 실체를 드러내어야 한다. 팀 켈러는 오늘 이 시대의 교회가 매로우 논쟁 당시의 상황과 비슷하게 복음을 믿고 있지만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매로우 논쟁에 대한 팀 켈러의 입장을 알려면 싱클레어 퍼거슨의 온전한 그리스도, 에드워드 피셔의 개혁신앙의 정수를 추천한다.) 2. 칭의와 성화의 분리 팀 켈러는 복음이 쉽게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을 간파하고서 단순히 복음만을 전하는 이전의 전통적인 방식을 떠나서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의 형태로 복음이 변질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제3의 방식인 복음을 선포했다. 그는 복음을 다시 재정의하면서 “복음은 좋은 충고가 아니라 좋은 소식이다” “복음과 복음의 결과를 혼동하지 말라”는 말로 복음을 소개한다.[2]“복음은 좋은 충고가 아니라 좋은 소식이다.” 이 말은 복음은 우리가 행하는 무엇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무엇이라는 의미이다. 이 말은 복음 안에는 인간의 행위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위해 대신해 주신 것을 믿는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 복음이 좋은 소식이라는 말을 통해 행위로 하나님의 환심을 사려는 율법주의적 요소를 배제한다. “복음과 복음의 결과를 혼동하지 말라.” 이 말은 은혜와 은혜의 결과인 선행은 구분되면서 동시에 연결된다는 의미이다. 곧, 이 말은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설명한다. 칭의란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해 얻은 구원을 말하고, 성화란 구원 받은 사람들이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과정을 말한다. 성경적 복음은 칭의의 은혜가 성화의 동기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는 칭의와 성화가 분리되고 오해될 때 생겨난다. 율법주의자는 칭의를 얻었으니 이제 나의 힘으로 성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율법주의로 변질되고, 반율법주의자는 칭의의 구원은 감사하지만 성화의 과정은 너무 힘들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율법을 버리고 마음대로 살아가고 싶어 한다. 이 모두가 칭의와 성화의 관계에 대한 오해이다. 은혜로 얻은 구원에 대한 감사의 반응으로 선행과 순종으로 이어져야 하지만, 칭의와 성화를 분리하면서 하나님에 대해 오해하게 된 것이다. 싱클레어 퍼거슨은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는 한 어머니 자궁 안에서 나온 이란성 쌍둥이다”라고 정의했다.[3] 모두 같은 뿌리에서 나왔고, 그 뿌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오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말씀이 분리될 때 사람들은 율법주의나 반율법주의로 오해하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깊이 신뢰할 때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 안에서 순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제3의 길로 복음을 전하라 팀 켈러는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가 아닌 제3의 길로 복음을 전하라 권유한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팀 켈러의 탕부 하나님과 방탕한 선지자이다. 두 책의 원제는 ‘The Prodigal God’, ‘The Prodigal Prophet’으로 ‘낭비하다’라는 단어 ‘prodigal’을 사용하고 있다. 팀 켈러는 누가복음 15장에서 흔히 말하는 ‘탕자’가 아니라 그 본문에서는 사랑이 헤픈, 충만한 사랑을 가지고 있어서 마치 낭비하는 것처럼 보이는 ‘탕부’ 즉 하나님 아버지를 조명하고, 그 끝없는 사랑은 ‘방탕한 선지자’인 요나를 진정한 선지자로 변화시키는 끝없는 사랑임을 재조명한다. 탕부 하나님에서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가서 허비하는 둘째 아들은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어 하는 반율법주의자를 대변한다. 또 아버지의 집에서 있지만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분노하는 첫째 아들은 율법주의자를 대변한다. 동생이 돌아오자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 앞에서 첫째 아들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눅 15:29) 팀 켈러는 첫째 아들이 전형적인 율법주의자로서 자신의 행위로 아버지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사람이라 말하면서 “아버지와 그의 관계를 가로막은 것은 그들의 죄가 아니라 저주받을 그들의 선행이다”라고 율법주의를 비판한다. 탕부 하나님에서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를 둘째 아들과 첫째 아들로 비교해서 설명한 팀 켈러는 방탕한 선지자를 통해서 그 모습이 한 사람 안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욥바로 내려가서 배를 타도 도망가는 요나는 전형적인 둘째 아들 즉 반율법주의의 모습이다. 또 순종하긴 하지만 자기 뜻대로 안 될 때 분노하는 요나는 첫째 아들 전형적인 율법주의자의 모습이다. 팀 켈러는 오늘날 행복을 추구하는 두 가지 모습을 자아 발견과 도덕적 순응의 길로 설명한다. 첫째 아들은 도덕적 순응의 길로 행복을 추구하고, 둘째 아들은 자아 발견의 길로 행복을 추구한다고 분석하면서, 이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진정한 아버지의 마음 즉 하나님의 성품과 말씀을 연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4. 그리스도 중심적 복음 팀 켈러의 복음의 핵심에는 언제나 그리스도가 있다. 복음이란 우리가 행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해 주신 일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에서 벗어나려면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알아야 한다. 그 사랑에 대한 오해가 양극단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 팀 켈러는 바로 그리스도를 선포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한다. 탕부 하나님에서 팀 켈러는 둘째 아들과 첫째 아들 모두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며, 그 오해를 해결하기 위해 진정한 형이신 그리스도를 소개한다.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형은 동생을 용서하지 못했고 허랑방탕하게 재산을 낭비한 동생에게 자기 재산을 나누어주지 못했지만, 진정한 형이신 그리스도는 잃어버린 아들을 집으로 데려오기 위해 목숨을 버리셨다. 또한 자신이 죽음으로써 잃어버린 아들인 우리에게 진정한 하늘의 유산을 남겨주셨다. 이런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할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분의 사랑이 순종의 동기가 될 때 비로소 복음이 삶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방탕한 선지자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분노하는 방탕한 선지자인 요나를 대신해서 진정한 요나이신 예수님을 소개한다. 요나는 어쩔 수 없이 바다에 빠져서 목숨을 건졌지만, 예수님은 진정한 요나가 되셔서 고통의 폭풍 속으로 친히 목숨을 버리셨다. 방탕한 선지자 요나를 향해 끝없는 사랑의 추격을 멈추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아들의 목숨을 버리시면서 결국 하나님을 오해하는 사람들을 품고 변화시키신다. 팀 켈러는 인생의 폭풍이 올 때 그 폭풍이 우리를 무너뜨리지 못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폭풍 속으로 뛰어드심으로써 자신의 목숨을 버리시는 삶을 통해 우리에게 닥쳐야 할 모든 독과 저주와 심판이 사라졌다고 말한다. 인생의 폭풍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폭풍 속에 있는 모든 저주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해결되었다. 더 이상 폭풍은 심판이 아니라 우리를 성장시키는 도구가 된다. 예수님은 우리가 폭풍 속에서 빠져 죽게 버려두지 않으신다. …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그리스도께서 받으셨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알아도 고난에 대한 의문은 해소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의문 속에서도 그분이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그 폭풍 속으로 던져졌기 때문에, 우리는 이 폭풍 한복판에 우리를 향한 사랑이 있음을 확신할 수 있다.[4]팀 켈러의 스승이었던 에드먼드 클라우니는 성경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에서 “인생의 폭풍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인생에 닥친 폭풍 속에서 당신을 건져주실 것입니다”라고 설교한다면 그 설교가 유대교 랍비의 설교와 무슨 차이가 있냐고 반문한다. 그렇게 되면 내가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신다는 율법주의자가 될 위험이 있고 또한 기도해도 폭풍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불평하며 반율법주의자가 될 수도 있다.팀 켈러는 복음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을 선포함으로써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의 오해를 해결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즐겁게 순종할 수 있는 칭의와 성화를 분리하지 않고 연결한다. 팀 켈러의 유산인 복음의 재발견은 오늘날 복음이라고 생각했지만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던 많은 목회자와 성도에게 참된 복음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선포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등불이 되었다. 그가 남긴 복음의 유산을 이제는 더욱 풍성하게 전달해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남아있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 같다.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의 양극단을 오가던 우리에게 팀 켈러는 복음을 통해 참된 은혜의 길을 제시해 주었다. 그의 고백처럼 정말 복음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힘이다. 주1. 싱클레어 퍼거슨, 온전한 그리스도, 13.2. 팀 켈러, 센터처치, 52.3. 센터처치, 109.4. 팀 켈러, 방탕한 선지자, 190.
팀켈러
팀 켈러, 조용히 다가와 내 삶을 바꾼 사람
by 이규현
2023-05-26
기리며: 팀 켈러(1950-2023)2004년 안산동산교회는 하나의 큰 나무가 되기보다 큰 숲을 이루는 교회가 되기로 하면서 교회 분립개척 운동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 결정의 결과로 내가 개척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 내 어깨에는 두 가지 큰 짐이 지워져 있었다. 하나는 개척된 우리 교회가 아름답게 뿌리를 내려서 또 하나의 나무로 든든히 서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의 짐은 우리 교회가 좋은 모델이 되어서 안산동산교회의 ‘큰숲운동’이 아름답게 이어져 나가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한국 교회의 분립 운동은 모 교회에서 사역하던 부목사에게 재정을 지원하는 정도에 머물고 있었다. 얼마간 개척 헌금을 해주는 대신에 모 교회에서 멀리 떨어져서 개척하게 했다. 물론 그것도 개척하는 목회자에게는 매우 고마운 것이고 모 교회 입장에서도 정말 힘든 결정을 한 것이었다. 안산동산교회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교회개척 운동을 펼쳤는데, 재정 지원과 함께 사람을 파송해 주기로 한 것이었다. 그 결과로 우리 교회가 개척될 때 100여 명의 성도들이 동참했고, 이것이 교회가 빨리 뿌리를 내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 이후 안산동산교회 담임목사였던 김인중 목사님과 함께 10여 명의 담임목사님들이 모여서 매주 셀 모임을 하게 되었는데, 그 모임에서 분립개척에 관한 대화를 많이 나누게 되었다. 거기서 더 많은 교회가 분립개척 운동에 동참하면 좋겠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실제로 몇몇 교회들이 분립개척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우리 안에 자연스럽게 고민이 생겼는데 어떻게 하면 분립한 모든 교회가 건강하게 설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차에 미국의 리디머 교회에서 시티투시티(CITY TO CITY)라는 이름으로 교회분립 개척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그것을 배우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오고 갔다. 그 결과로 팀 켈러 목사님의 제자들이 한국에 와서 CTC의 개척 운동을 소개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때 깨달았던 소중한 교훈이 재정 지원과 개척 멤버 파송보다 더 중요한 것이 개척할 목회자를 평가하고 그들을 집중적으로 훈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고민이 확 뚫리는 것을 경험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CTC코리아가 생기게 되었고, 그때부터 팀 켈러 목사님의 여러 책을 읽게 되면서 그분의 사역 방향을 같이 배우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리디머 교회를 방문해서 팀 켈러의 설교를 한 번 들은 경험과 그분이 한국에 왔을 때 설교를 듣고 가까이에서 같이 식사한 정도의 친분밖에 없지만, 그분의 수많은 저서와 여러 훈련 매뉴얼을 통하여 소중한 가르침을 얻게 되었고, 그것이 내 설교와 목회의 방향에 너무나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미국 CTC에서 오신 목사님들의 강의를 처음 들을 때 교회개척의 노하우를 듣고 싶었는데, 뜻밖에도 이분들은 계속해서 복음에 대해서 강의했다. 솔직히 많은 사람이 실망했다. 우리가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닌데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 이들이 많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복음은 단지 우리가 구원을 얻는 데 필요한 자격증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 전반에서 ‘왜, 무엇을, 어떻게’를 결정짓는 전부임을 알게 되었다. 복음을 설교하지만 목회는 세상의 가치관으로 하고 있고, 복음을 공부하지만 세상에서는 아무 힘도 쓰지 못하는 그런 복음 말고,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유, 우리가 삶을 영위하는 모든 방식,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할지를 결정짓는 것이 바로 복음임을 알게 되었다.특별히 교회가 도시 속에서 어떻게 복음적으로 사역할지 많은 통찰을 얻게 되었다. 우리끼리 교회에 갇혀서 게토화되어가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 가운데서 아름다운 향기를 발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도시를 이해하고 도시를 사랑하고 도시의 필요를 채워가는 교회가 되어야 함을 깨닫고 적용하게 되었다.또 팀 켈러를 통해서 우상의 실체를 깊이 안 것이 너무나 소중한 경험이었다. 나 자신도 분명히 복음적 사역을 한다고 하는데 거기에 다른 사람들이 정말 눈치챌 수 없는 우상이 내 안에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건강한 교회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인정과 박수가 어느새 내 안에 우상으로 들어와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삶을 온전히 다스리기 전까지는 끊임없이 우상들이 생겨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특별히 팀 켈러를 통해서 배운 그리스도 중심 설교는 성경의 본문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큰 흐름을 보게 하는 눈을 열어주었다. 결국 모든 설교는 청중에게 하기 전에 먼저 내가 들어야 하는 설교가 되었고, 그것이 내 삶을 새롭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것이 부교역자들과의 관계, 목회 방침을 잘 따라오지 못하는 성도들을 대하는 태도를 완전히 바꾸게 했다. 특히 더 큰 교회를 목표로 끝없이 달려가는 목회가 아니라, 자신의 살을 찢으면서 우리를 살리신 주님의 마음으로 가장 귀한 동역자들을 새로운 교회로 파송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더 큰 교회를 부러워하면서 쓸데없는 에너지를 쓸 필요도 없고 작은 교회와 비교하면서 거들먹거릴 수도 없는 복음적 교회를 향해 작은 발걸음을 내딛게 했다.처음에 소중한 사람들을 파송하고 나면 그 빈자리가 참으로 크게 다가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빈 자리에는 그동안 소극적으로 신앙생활 하던 사람들이 들어오게 되었고, 그들이 최선을 다해 섬김으로써 공백을 메울 수 있었다. 그리고 파송 받아 간 교회들을 방문해 보면 우리 교회에서 겨우 주일 출석만 하던 분들이 그곳에서는 앞장서서 섬기는 일꾼이 되어 있었다. 결국 교회개척은 파송된 교회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파송한 우리 교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놀라운 힘이 있음을 보게 되었다. 팀 켈러가 말한 대로 가장 확실한 전도 방법은 교회개척이고 가장 확실한 교회 갱신도 교회개척임을 실제로 경험하게 되었다.이제 팀 켈러가 남긴 여러 가르침이 교과서에 들어 있는 좋은 이야기가 아니라 내 목회와 삶에서 살아서 펄떡거리게 되길 간절히 소망해 본다. 그리고 한국 교회를 새롭게 하는 소중한 자양분이 되길 기도한다.
복음으로 나의 목회 시야를 밝힌 팀 켈러
by 이인호
2023-05-25
기리며: 팀 켈러(1950-2023)하나님은 왜 이 시대에 꼭 있어야 할 분을 일찍 데려가시는 걸까? 팀 켈러가 주님 곁으로 갔다는 소식은 내게 깊은 슬픔과 더불어 또 한 번 이런 질문을 남겼다. 칼빈은 55세에, 루터는 63세에, 하용조 목사님은 65세에, 옥한흠 목사님 72세에 주님 품으로 가셨다. 주님은 왜 그러셨을까? 그렇게 하심으로 그들을 우리 가슴속에 남겨두시려는 것은 아닐까? 그분들이 더 오래 사는 것보다, 가장 아름답고 향기로운 때에 그들을 데려가심으로써 그가 남긴 소중한 유산을 우리가 가슴에 새기고, 그렇게 우리도 그들처럼 이 시대를 살아가라는 뜻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팀 켈러 목사님에게 깊은 빚을 진 나는 그분에게 받은 은혜를 나누지 않을 수 없다.11년 전, 교회 건축을 마친 어느 날이다. 교회는 날로 부흥하는데, 마음속에 자유와 기쁨의 크기는 줄어들었다. 늘 긴장하고 좌우를 경계하며 살얼음판 걷듯 목회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왜 그랬을까? 개척부터 제자훈련과 중보기도, 강해설교에 집중하는 목회를 통해 건강한 교회로 성장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훈련을 통해 그리스도를 닮은 은혜롭고 성숙한 평신도 동역자들이 배출되고, 그들의 헌신을 통해 교회는 날로 성장했다. 하지만 이러한 헌신의 이면에는 공로 의식, 판단, 외식 같은 부정적인 요소들이 조금씩 고개를 들고 있었다. ‘이대로 또 다른 10년이 흐르고 나면 교회가 어떻게 될까?’ 내가 그렇게 싫어하던 율법적, 전통적, 제도적 교회를 답습하게 되는 건 자명했다. 무엇이 문제인지 모른 채 그저 연수가 오래되면 모든 교회가 겪는 자연스러운 노화의 과정이려니 달래도 보고 근심하고 탄식하던 그때, 팀 켈러를 알게 되었다.당시 ‘큰숲 모임’이라는 목회자 주간 모임에서 본격적으로 팀 켈러를 공부하던 중 미국 CTC의 강사들을 초청하여 매년 두세 차례 집중 세미나를 치렀고, 그때 책을 통해서만 알던 그의 목회와 철학을 그의 제자들을 통해 보다 가까이 배우는 축복을 누렸다. 이후 CTC코리아가 설립되었다. 초대 이사장이 되어 팀 켈러를 초청할 기회를 얻었고 가까이서 그를 보고 배울 축복을 누렸다. 그는 참 아름답고 향기로운 분이었다. 그 후 미국에서 팀 켈러, 존 파이퍼 등이 설립한 TGC(복음연합운동)를 한국에 설립하는 일에 참여하며 팀 켈러를 중심으로 한 복음주의 지도자들에게서 시대를 통찰하는 메시지와 복음적 교회의 연합운동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복음은 모든 것을 바꾼다는 그의 확신을 배우는 기회였다. 이후 CTC코리아와 TGC코리아가 연합하여 사단법인 복음과도시를 설립하였다. 이를 통해 한국 교회의 복음적 연합을 꿈꾸며 개척운동과 갱신운동을 통해 특별히 다음세대가 복음 안에서 준비되도록 돕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우리의 걸음들을 얼마나 축복하고 계시는지 모른다. 이렇게 팀 켈러를 만나고 그와 길을 따라가며 사역한 지 11년이 흘렀다. 팀 켈러, 나 자신을 보게 하였다그를 통해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먼저 나 자신을 변화시켰다. 내가 그렇게 고민하던 교회의 모습은 나의 내면의 투영이고, 내 설교와 목회의 반영이었다. 복음의 깨달음과 감동으로 개척에 뛰어들고 복음의 열정으로 달려왔지만, 정작 내 삶과 행동은 복음으로 형성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성도들은 내 말보다 모습을 통해 배우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복음과 종교 사이를 널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설교 속에 복음과 율법이 뒤섞여 있었다. 율법은 우리를 거룩의 길로 인도할 수 없고 단지 죄를 깨닫게 하여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선생, 초등교사라고 가르치면서도, 정작 나는 설교를 통해 그들을 그리스도보다 그들 자신의 각오와 결단의 길로 인도하고 있었다. 감동적인 간증과 예화, 때로는 과감하게 나의 실패를 나누는 솔직함으로 쉼 없이 그들을 변화시키려고 애썼다. 은혜의 힘을 믿기보다 도전과 결단의 힘을 더 믿었다. 압박을 통해 마음과 생각, 행동과 윤리의식을 바꾸려 했다. 은혜의 복음으로 완전히 연소되지 못한 나의 설교, 나의 인격, 나의 목회가 점점 교회의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래도 교회를 건축하고, 대형 교회를 세우면 하나님 나라가 오는 줄 알았다. 한국 교회의 생태계가 무너지고 있는 줄 모르고, 오직 내가 목회하는 우리 교회만 성장하면 다 되는 줄 알았다. 팀 켈러는 이런 나의 생각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편협한 시각인지 알려주었다.감사하게도 팀 켈러는 나의 고민을 마치 그가 먼저 고민한 것처럼, 건강한 신학적 깊이와 체계적인 가르침으로 자상하게 깨달음을 주었다. 무엇보다 ‘어떻게 복음으로 삶과 교회를 형성할 것인가’에 대한 그의 가르침은 나의 뿌옇던 목회 시야를 환하게 열어 주었다.팀 켈러, 나와 교회를 행복하게 바꾸었다 그는 나 자신을 바꾸고 내 설교를 바꾸고, 그래서 우리 교회를 더 행복하게 바꾸어주었다. 먼저, 내 설교가 바뀌었다. 결단에 초점을 두었던 설교가 이제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설교가 되었다. 어느 날 아내가 이런 말을 했다. “전에는 당신 설교를 들으면 각성과 결단을 하게 되었는데, 요즘은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고 은혜를 사모하게 돼요.” 내 설교가 정말 변하고 있었다.어느 성도의 간증은 나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매주 설교를 통해 내가 말씀대로 살아야겠다는 무거움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라면 말씀대로 살 수 있다는 강한 확신이 왔습니다. 그리고 나를 변화시킨 복음을 한 영혼, 한 영혼에게 전해야겠다는 이전에 없던 강한 열망이 마음 가운데 생겼습니다.”매주 설교를 통해서 구원받음과 삶의 변화를 경험한 생생한 간증들이 풍성해졌다. 교회에 첫발을 들이고 예수님을 만난 감격의 간증들, 교회를 오래 다녔어도 복음을 제대로 들어보지 못한 심령에 변화를 경험한 간증들이 많아졌다.목회자의 가정에서 자란 어느 집사님은 자신이 지금까지 알던 예수님과 복음 안에서 만난 예수님이 너무 다르다고 눈물로 고백했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메시지가 선포되고 성령님이 살아 일하시는 교회를 통해 복음의 은혜가 제 삶에 흐르니 예수님을 너무 사랑하게 되고, 이로 인해 자녀와의 관계, 시부모님과의 관계, 남편과의 관계가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최근 몇 년이 제 인생 중 가장 행복한 시간입니다.” 다른 훈련생들도 최근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며 입을 모아 같은 고백을 하는 모습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성도들을 변화시키려고 소리치며 온갖 감동적인 예화로 울리고 웃길 때는 나타나지 않던 변화가, 복음을 설교하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자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설교가 변하면서 교회가 복음 안에서 세워져 가기 시작했다. 복음이, 한번 공부하고 이수하면 끝인 무엇이 아니라, 매일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기초요 삶의 원리로 교회 안에서 자리 잡았다.둘째, 교회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한마디로, 자유와 사랑이다. 교회 안에 이전보다 더 부드럽고 은혜로우며 자유로운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무엇보다 성도들은 목사인 나에게 부드러워졌다고 말한다. 그들을 변화시키려 했던 이전과는 달리, 그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포용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먼저 변하려고 애쓰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를 용납하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니 부드러워질 수밖에 없다. 평신도 지도자들, 특별히 장로들과의 관계가 더 친밀해졌다. 당회도, 교역자 모임도 복음적으로 변해가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이러한 은혜는 우리 안에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섬김을 가져왔다. 봉사의 동기가 바뀐 것이다.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사랑으로 섬기니 기쁨이 넘쳤다. 또한 복음은 우리가 점점 죄에서 떠나 거룩한 삶을 사모할 수 있게 하였다. 팀 켈러는 ‘칭의’의 은혜를 끊임없이 인식할 때 거룩한 삶(성화)이 나타날 수 있다고 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께 다가갈수록 자신의 죄를 보게 되고, 더 나아가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을 주인 삼은 우리 자신의 우상을 보게 된다. 성도들이 죄 이면의 죄인 우상을 분별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도와주자, 죄의 문제를 더 근본적으로 인식하고 극복할 힘과 능력을 얻기 위해 복음을 더 의지하는 모습들이 나타났다. 복음의 은혜와 능력을 알게 되니, 공동체 안에 서로의 죄, 우상을 고백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문화가 되었다.세 번째, 지역 사회와 소통하려고 애쓰는 교회가 되어 가고 있다. 10년 정도 지나면서 우리는 어느덧 악한 세상과 담을 쌓고 우리끼리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수도원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이런 우리에게 팀 켈러는 도시는 우리가 멀리해야 할 죄악의 도성이 아니라 구속받아야 할 곳임을 알게 하였다. 하나님은 도시로 사람들을 모으고 계시며, 이 도시가 영향력의 중심부이고 문화의 중심부임을 알게 되었다. 바울이 도시를 중심으로 선교한 것처럼, 교회가 도시와 문화적으로 소통하며 그들을 사랑하고, 도시 안에 복음적 생태계를 이루어 도시를 구속하여야 함을 깨달았다. 그는 도시 안에서 어떻게 소통하고 어떻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었다. 팀 켈러는 가장 세속적이고 세계에서 변화 속도가 가장 빠르다는 ‘뉴욕’에서 목회를 해왔다. 그들과 교감하고 소통하기 위해서 그는 매주 뉴요커들을 만나고, 그들을 이해하며, 설교에도 생각의 에너지가 많이 들어가는 단어와 문장이 아니라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익숙한 단어를 사용했다. 그의 모습은 나의 설교와 우리 교회의 관심사를 변화시켰다. 아직 부족하지만, 비신자들이 늘 거기에 있는 것처럼 설교하려고 노력한다. 우리 교회가 위치한 도시와 소통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교회의 문턱이 낮아지며 지역사회와 하나가 되는 모습이 많아진다. 보수적이던 성도들이 이 시대의 문화를 이해하고 포용하며 젊은 세대와 소통하려는 자연스러운 문화가 형성되었다.팀 켈러, 내 시야를 넓혀 주었다 우리 교회만 잘 성장하면 지상명령은 이루어지는 줄 알고 달려왔다. 그런 내게 팀 켈러는 교회 개척이 지상명령 성취의 가장 효과적인 전략이며, 목회자 양성은 신학교가 아닌 지역교회의 몫임을 알려주었다. 성도들과 함께 분립개척의 비전을 품게 되었다. 장로들과 함께 우리 교회가 홀로 거목이 되기보다 앞으로 수십, 수백 교회를 분립개척하는 교회가 되기로 했다. 이러한 방향을 정하고 지난 10년 동안 네 교회를 분립개척하였고, 내년에는 다섯 번째 분립을 진행할 예정이다. 내가 은퇴할 때까지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교회를 분립개척하고 싶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교회의 DNA가 되어 계속되길 소망한다.팀 켈러는 우리로 도시 안에 복음적 생태계의 수립을 꿈꾸게 해주었다. 크고 작은 교회들이 복음 안에서 연합하여 함께 성장하고 함께 사역하며, 도시가 우리를 통해서 유익을 얻길 소망한다. 이와 같은 생각을 품은 많은 목사님을 만나게 하시고 함께 복음을 위해서 연합하게 된 것 또한 팀 켈러가 우리에게 전해준 축복이다. 초대형교회의 목회자들과 중소형교회의 목회자들이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되어 교제하며 꿈꾸고 있다. 이런 연합이 어디에 또 있을까! 이것이 복음이 이루어내는 기적이다. 그분들과 연합하여 분립개척의 기회가 없는 목사님들이 개척할 수 있도록 훈련하고 재정을 후원하는 사역을 펼쳐가고 있다. 한국 교회의 갱신과 연합을 위해 한 걸음씩 걸어가고 있다. 주님께서 친히 일하고 계심을 날마다 경험한다. 글을 맺으며나의 삶에 두 가지 큰 만남이 있다면, 첫째는 고 옥한흠 목사님이다. 그분을 통해 건강한 제자훈련 목회를 배웠다. 그 가르침대로 했더니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했다. 그래서 늘 고맙고 감사한 분이다. 둘째는 팀 켈러 목사님이다. 그분은 고 옥한흠 목사님처럼 그 죽음이 내게 깊은 슬픔과 눈물을 남긴 또 한 분이다. 그분은 복음과 종교 사이를 널뛰던 내게 복음적 목회의 확신을 전해주었다. 내 교회만 생각하던 내게 분립개척을 생각하고 하였고, 한국 교회 생태계회복을 꿈꾸게 하였다. 내가 좀 더 자유롭고 행복하게 목회하게 해주었고, 우리 교회가 더 건강하고 행복하게 해주었다. 팀 켈러, 예수님을 닮으신 귀한 분, 한국에 다시 한번 꼭 오고 싶다고 하셨던 그분은 이렇게 그를 사랑하는 우리의 가슴속으로 찾아오셨다. 우리 시대에 이러한 영적 거인을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그분을 만나 귀한 축복을 받을 수 있었음에 감사드린다.
처음
이전
26
페이지
27
페이지
열린
28
페이지
29
페이지
30
페이지
다음
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