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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다시 부흥을
팀 켈러의 ‘부흥’
by Tim Keller
2023-04-01
버크넬 대학을 다니던 1970년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처음 2년간 내가 속했던 작은 IVF 모임에 참석하는 인원은 고작해야 다섯 명에서 열다섯 명이었다. 그런데 3학년이 되었을 때 숫자가 갑자기 열 배로 증가했고,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휴대폰과 소셜 미디어는 말할 것도 없고 전화기에 자동 응답 기능도 없을 때였다. 특별한 전도 캠페인도, 또 어떤 미디어 매체도 없었다. 사실상 우리는 ‘운동’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적도 없었다. 그 어떤 지침도, 위원회도,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부흥을 공부하다대학을 졸업한 나는 목회를 결심하고 고든 콘웰 신학교에 들어갔다. 1972년 가을, 교회 역사가 리처드 러브레이스(Richard Lovelace)는 그의 경력에서 처음으로 “영적 삶의 역학(The Dynamics of Spiritual Life)”이라는 과정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것은 부흥에 관한 역사적 연구의 결과물이었다. 그는 부흥에 관한 역사가였으며 또한 대각성 운동을 연구한 인물이었다. 그의 과목을 들으면서 나는 정말 놀랐는데, 다름 아니라 버크넬 대학교 캠퍼스에서 목격한 사건을 상당 부분 설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스물네 살에 목회를 시작했다. 그리고 버지니아 작은 마을에 있는 장로교회(PCA)에서 9년간 목회했다. 그 후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로 가서 5년 동안 가르쳤다.뉴욕시에 부흥이 일어나다1989년 우리는 리디머 장로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뉴욕으로 갔다. 그곳에 도착하고 5-6개월 사이에(1990년 초부터 1991년 말까지), 다시 ‘그 일’이 일어났다. 대학에서 목격했던 것과 거의 비슷한 역동성(dynamics)이었다. 같은 느낌이었고, 같은 냄새가 났다.우리 교회가 성장을 거듭한 곳은 범죄로 인해 사람들이 빠져나가던 맨해튼 한가운데였다. 우리 교회에는 쇼핑족이 없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처음부터 시작했다. 사실상 뭔가를 제대로 시작하기 어려운 장소였지만, 교회는 2년 만에 약 천 명이 예배에 참석할 정도로 성장했다.당시에 비하면 지금 나는 훨씬 나은 설교자이다. 그러니까 그때 사람들이 우리 교회로 몰린 건 내가 설교를 잘해서가 아니었다. 게다가 교회 조직도 특별한 게 없었다. 직원도 많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나는 그런 사건이 역사적으로 “부흥”이라는 말로 불렸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최전선과 오순절부흥을 정의하는 다양한 표현이 있다. 그중 하나를 나는 최전선(frontier) 정의라고 부르겠다. 이 정의에 따르면 부흥이란 극도로 왕성한 전도가 이뤄지는 계절이다.나는 1970년대에 남부로 이주한 양키였다. 고작 스물네 살 먹은 청년이었고, 회심한 지 불과 4년밖에 되지 않았기에 초신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는 복음주의 배경이 전혀 없었고 주류 루터교에서 자랐다. 그래서 그런지 남부 지역에서 만난 “부흥: 4월 21-27일”이라는 교회 광고를 보고 크게 놀랐다. “아니, 어떻게 저게 가능하지? 부흥이 4월 21일부터 27일까지 일어날 걸 저 사람들이 어떻게 알지? 그런데 4월 28일에 일어나면 안 되는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걸까?”부흥에 대한 두 번째 접근 방식은 오순절(Pentecostal)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오순절-은사주의 접근 방식은 아마도 전 세계를 통틀어서 교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형태일 것이다. 이 방식은 일반적으로 교회 성장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놀라운 성령의 은사를 강조한다. 부흥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세 가지 요소나는 역사와 성경, 나의 경험을 통해서 부흥을 어떻게 정의할지 결론에 도달했다. 부흥은 인간이 하는 일이나 성령의 특별한 나타남이 아니다. 진정한 부흥은 성령의 일상적 일하심이 강화되는 것이다. 성령의 일상적 일하심은 죄의 자각, 회심, 확신, 그리고 성화이다. 이러한 일하심이 교회와 교단, 나아가서 도시와 국가 전반에 걸쳐서 강화될 때, 우리는 부흥을 만났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부흥이 일어났을 때는 다음 세 가지 현상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1. 잠자던 그리스도인이 깨어난다성령께서 일을 시작하시면 따라오는 것은 회개와 확신이다. 평범한 그리스도인은 일반적으로 충분히 슬프거나 또 충분히 행복하지 않다. 나의 죄에 대해서 충분할 정도로 자각하지 못한다. 깊은 회개를 경험하지 않았기에 결코 수준 높은 확신도 맛보지 못한다. 그러나 성령이 나의 영과 더불어 증언하시면, 성령이 내 속에 오셔서 “이것이 진리이다”라고 말씀하시면, 우리는 확신을 얻게 된다. 죄에 대한 깊은 자각과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확신,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주는 감동은 잠든 그리스도인을 깨운다. 2. 명목상 그리스도인이 회심한다부흥은 또한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을 회심시킨다. 교회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착각하는 이들로 가득하다. 그들은 세례를 받았고, 등록 교인이며, 그중에는 임직받은 사람도 있다. 부흥이 일어나면 이렇게 고백하는 많은 사람을 만날 것이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인인 줄 알았어. 그런데 알고 보니까 전혀 아니었어. 나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조금도 모르고 있었어.”목사라면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혀 풍기지 못하는 교인을 모를 수가 없다. 물론 그렇다고 그 사람이 구원받았는지 아닌지 확실히 말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따라서 부흥의 시대가 도래하면 성령께서는 목사가 결코 할 수 없는 역사를 이루신다. 3. 확고한 불신자가 믿음의 길에 들어선다부흥의 시대에 교회는 성장한다. 지역 사회의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잠자던 그리스도인이 깨어나고 명목상 그리스도인이 회심함으로 교회가 아름다워지기 때문이다. 갑자기 교회가 매력 있는 곳으로 탈바꿈한다. 능력을 발휘하는 장소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여러 가지 이유로 발생한다. 한편으로는 잠에 빠졌거나 명목상 그리스도인이 과거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웃에게 손을 내밀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부흥의 소문이 퍼져서인데, 다른 교회와 기존에 연결되지 않았던 사람들이 호기심 때문에 몰려온다. 또 다른 경우로는, 초대받고 오는 사람들도 있다. 부흥은 교회를 어떻게 바꾸는가: 부흥의 표시지금까지 부흥과 함께 발생하는 일을 살펴보았다. 그럼 부흥에도 분명한 표시(marks)가 있을까? 1. 복음이 회복된다부흥의 시대에는 거의 항상 어떤 의미에서든 복음이 회복된다. 복음이 새롭고 생명력 있는 생생한 방식으로 믿고 전달된다. 또한 복음이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를 탈피한다. 이 두 가지는 복음의 양면에 있는 오류이다. 행위로 구원받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또한 일단 구원만 받았다면 어떻게 살아도 괜찮다는 것도 복음이 아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그 믿음은 믿음뿐인 그런 믿음이 아니다. 거룩한 삶을 동반하는 믿음이다. 거의 항상 부흥은 교회가 복음에 집중할 때 일어난다. 첫 번째 방향은 교회가 경직되고 기쁨이 없고 모든 것에 반대하는 보수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긍정적인 복음 중심의 은혜로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옮겨가야만 한다. 두 번째는, 교회가 진정으로 속죄를 믿지 않고, 지옥을 믿지 않으며,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이나 예수님이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받으셨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자유주의를 벗어나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해야 한다. 복음의 회복은 이 두 방향 중 한 가지의 형태로 일어난다. 2. 회개가 일상이 된다부흥은 회개가 일상이 되는 특징을 가진다. 한국 교회의 엄청난 성장을 이끈 부흥의 초기 단계는 20세기 초인 1905-1910년경 평양에서 시작되었다. 거기에는 회개가 큰 부분을 차지했다.부흥이 일어나더니 여러 마을로 퍼져나갔다. 내가 읽은 기사에 따르면, 부흥이 퍼지기 시작했을 때 많은 지주가 놀랐다고 한다. 잠에서 깨어나 죄를 깨달은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지주에게 와서는 그동안 훔치거나 속인 사실을 고백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회개이다. 3. 예배가 거룩해진다부흥의 또 다른 신학적 표시는 회중 예배의 성별이다. 몇 주 동안 24시간 내내 계속된 1970년 애즈베리 대각성에 대해서 들어보았을 것이다. 예배 시간에 자리에서 일어난 학생들이 고백하기 시작했다. “남자 친구랑 자는데 이제는 정말 그만두고 싶어요. 하나님께 내 죄를 고백합니다.” 휘튼 대학에서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이런 식의 공개적인 고백은 캠퍼스에 놀라운 영적 진지함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나는 이런 회개가 예배의 성화와 완전히 일치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거룩하게 구별된 예배라고 할 때, 내가 의미하는 바는 불신자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이 그곳에 계심을 아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4장을 보자. 마음에 감추고 있던 비밀이 드러난 불신자가 화를 내기는커녕 뭐라고 한다고 바울이 말하는가? 그 사람은 결코 “아, 정말로 열 받는데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에 “하나님이 참으로 여기 계십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라고 고백한다. 불신자마저도 하나님의 임재에 압도된다. 이것이야말로 부흥의 신학적 표시이다.4. 제자들이 늘어난다부흥이 있는 곳에는 항상 교회 성장이 따라온다. 부흥 없이도 얼마든지 교회는 성장할 수 있지만,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 부흥이란 있을 수 없다. 왜?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 친구들을 향해서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부흥을 일으키는 방법?지금까지 제시한 건 방법론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하길 바란다. 지금까지는 신학적 표시이다. 그리고 앞에서 소개한 일화는 당신이 부흥 여부를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구체적인 이야기이다. 그러나 여전히 당신은 이런 궁금함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어떻게 부흥을 불러올 수 있을까요?”존 웨슬리와 조지 윗필드가 주도한 18세기 대각성 운동을 보면 충격적인 방법이 있음을 단숨에 알 수 있다. 바로 야외 설교이다. 설교 스타일이 하나의 방법이었다.그러나 1857년부터 1859년까지 뉴욕 시내에서 일어난 부흥은 야외 설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부흥은 매일 도시 전역에서 있었던 평신도가 주도하는 정오 기도회를 통해 일어났다. 사람들이 기도회에 들어왔고, 복음을 들었다.누군가가 말했다. “같은 방법으로 나니아에 두 번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옷장을 통해서 한 번 들어갔다면, 다시는 옷장을 통해 나니아로 갈 수는 없습니다.” 부흥도 마찬가지이다. 로이드 존스는 웨일스의 부흥에 대해서 비슷한 지적을 했다. 수십 년 전에 부흥을 경험한 교회들을 관찰한 그는 많은 교회가 과거의 방법에 갇혀버린 비극에 빠졌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그러나 확실한 효과를 증명했던 방법에서 벗어나는 건 어렵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하셔야 한다. “물론 하나님은 주권자이십니다”라고 당신은 기꺼이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종종 문화에 일종의 격변 또는 혼란을 일으키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섭리 안에서 성령의 일상적인 역사하심을 강화하신다. 나는 우리가 있는 곳에서 그런 식으로 상황이 전개되기를 원하지는 않지만, 때때로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바로 그게 그분이 역사하시는 방식이다. 혼란이나 격변을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부흥을 달라고 기도한다. 당신은 부흥을 위해 기도하며, “필요한 일은 무엇이든 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원제: ‘Lord, Do It Again’: Tim Keller on Revival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부흥
부흥운동
대각성
규범, 그 실천이 답이다
기독교 세계관의 적용을 위한 세 가지 제안 2: 규범
by 김경호
2023-03-31
기독교 세계관 운동 2.0 위하여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SIEW)과 함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섭니다. 오늘은 기독교 세계관의 적용을 위한 두 번째 제안인 규범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변혁을 위한 수단의 한 축으로서의 규범norms은 일차적으로 윤리적 관점에서 인간 행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이 규범은 기독교 윤리의 토대이자 불변의 근거로서 성경에 근거하며, 또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마음의 법과 창조 질서에 근거합니다. 따라서 규범은 특별계시로서의 성경과 일반계시로서의 인간과 창조세계에 근거하여 세계관에 대한 판단 기준이 됩니다. 규범의 일반적 원리: 성경 규범의 일반적 원리는 성경에서 시작합니다.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는 계시와 성경의 관계에서, 결론적으로 계시는 인류에게 완전한 소유가 될 수 있도록, 성경의 형태를 취하였고, 성경의 형태로만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또한 바빙크는 성경이 형태적인 관점에서 축자적, 유기적 영감설로 기록되었다고 말합니다. 성경이 기록될 때 기록자의 인간적이고 자연적 삶이 배제되지 않고, 하나님의 생각을 표현하는 데 쓰임을 받습니다. 성경은 그 내용에 있어서 그리스도에 관해 증거하고 있고,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재료와 내용으로 삼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은 구원에 대한 것일 뿐만 아니라 가정과 사회, 학문과 예술을 위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알버트 월터스Albert Wolters는 성경이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있어서, 기독교 세계관이 성경에 비추어 점검되고 수정되어야 하며, 또한 성경의 권위는 거룩한 종교적 영역(신학, 개인 도덕성)에 국한되지 않고, 정치, 예술, 학문과 같은 일에도 관여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결국, 성경은 기독교 세계관 형성의 일차적 규범입니다. 규범의 구체적 원리: 인간의 마음과 창조질서 인간의 마음의 규범. 로마서 2:14-15에 따르면 규범의 내용은 본성과 양심이라는 마음의 도덕법을 통해 나타납니다. 이상원은 인간의 마음의 도덕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도덕법이 계시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규범을 도출해내는 것이 가능하고, 이방인들도 어느 정도의 도덕적 삶을 영위하는 것이 가능하며, 일반윤리학 곧 철학적 윤리학이 성립될 수 있다.” 그러나 타락 이후에 인간의 마음의 도덕법은 완전하지 않고, 단지 시민적 의를 도모할 만큼만 남아 있습니다. 마음의 도덕법이 죄로 인하여 손상됨에 따라 새롭고 완전한 도덕법 체계인 특별계시가 주어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 기록된 도덕법이다. 성경의 도덕법과 마음의 도덕법은 서로를 대체하거나 부정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도덕법은 일반적 도덕 원리moral principles로서 작용하고, 마음의 도덕법은 구체적인 도덕 기술moral skills로 기능합니다. 이상원은 성경의 도덕법과 마음의 도덕법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잘 설명합니다. “따라서 기독교 윤리학이란 성경에 기록된 도덕법을 일차적이고 주된 규범으로 삼고, 이 주된 규범의 빛 안에서 마음의 도덕법과 지성의 활동을 통하여 얻은 구체적인 도덕적 지침들을 이차적이고 부차적인 규범들로 비판적으로 채용하는 가운데 인간의 행동의 옳고 그름에 대하여 반성하는 작업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때 일차적 규범과 부차적 규범이 서로 충돌과 갈등을 일으킨다면 일차적 규범이 적용의 우선권을 갖게 된다.” 창조질서의 규범. 또한 규범의 내용은 월터스가 말하는 창조의 법 또는 창조질서에도 나타납니다. 그러나 창조 질서는 타락으로 인해 손상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의 빛 안에서 비로소 규범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신칼빈주의 전통은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를 법이라고 규정합니다. 법이란 하나님의 우주적 명령 행위 전체를 의미합니다. 이 법은 다시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그것은 ‘자연법칙’과 ‘규범’입니다. 하나님의 법 곧 통치는 비인간적 영역에서는 자연법칙을 통해 직접적으로, 인간적인 문화와 사회의 영역에서는 규범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창조질서에 속한 모든 것은 규범적 의미를 지닙니다. 또한 각각의 영역은 창조질서에 나타나는 규범에 순종해야 합니다. 전통적으로는 이것을 창조의 규범성, 또는 일반계시라고 합니다. 규범의 적용: 경제 영역 네덜란드에서 특별히 경제 영역에 대한 규범에 대해 고민이 많았습니다. 산업혁명이라는 큰 파도 속에서 경제 영역에 대한 규범을 오랜 시간 숙고하며 고민했습니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정의, 청지기, 책임, 연대라는 규범입니다. 정의. 밥 하웃즈바르트Bob Goudzwaard는 성경으로부터 정의justice에 대해 고려해야 할 세 가지 기준을 제시합니다. 첫째, 성경에서는 정의를 결코 이중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정의는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들, 즉 왕, 판사, 재산 소유자들에게 말할 수 있는 하나의 요청입니다. 왕은 하나님으로부터 권세를 받았고, 판사는 정의를 선언해야 하고, 재산의 소유자는 가난한 사람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의무를 받았기 때문에, 이들은 각자 책임을 전제로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정의의 수혜자가 되어야 하는 사람들은, 과부들, 고아들, 땅이 없는 레위인들, 채무자들, 노동자들과 같은, 불의에 처하게 되는 약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국가의 사회와 시민법을 공유하며, 정의는 이러한 사람들을 명확하게 지향합니다. 둘째, 정의는 항상 해방 동인liberation motive을 포함합니다. 정의는 돈이나 권력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억압받고 행복한 삶의 전망을 잃어버린 자들에 대한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삶의 회복을 가져오는 동인이어야 합니다. 정의는 바리새인들의 의(구제)를 초월합니다. 즉, 정의는 억압받는 사람들과 궁핍한 환경에 있는 사람들을 ‘구제’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삶을 건설하는 도움에도 관련되어야 합니다. 포로들은 자유를 누릴 뿐만 아니라, 사회 구성원으로서 다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정의는 인간 또는 국가가 자신의 소명을 다시 시작하고 독립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정당한 위치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셋째, 정의는 소유에 대한 특정한 형태를 반대하거나 찬성하는 선택이 아니라 소유가 다른 사람들에게 열려 있거나 닫혀 있는 이용 가능한 재산인지의 여부와 관련됩니다. 예를 들어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모든 농부에게 자신의 땅의 수확물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남겨 둘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법질서에서 소유는 배타적인 권리가 아니며, 소유는 이웃에 대한 모든 정당한 주장에 종속됩니다. 청지기. 청지기직은 본래 경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6:2, 4에 나오는 오이코노미아oikonomia는 부당한 청지기의 비유에서 잘 알려진 단어입니다. 이것은 현대의 경제/경제학economic/economics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단어가 가정 관리인의 책임이라는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고, 또한 노모스nomos와 어원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즉, 가족이 보존될 수 있도록 지켜야 하는 규범이 오이코노미아입니다. 오이코노미아라는 단어는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서도 그 본래의 의미가 잘 설명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오이코노미아-기술의 취득’과 ‘크레마티스티케chrematistike-돈의 축적’을 구별합니다. 오이코노미아란 자신에게 맡겨진 재산을 잘 관리하여 열매를 맺고 그 과실을 생산 과정에 참여한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그들의 생계를 보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크레마티스티케는 자기 풍요의 추구, 나아가서는 필요시 타인을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더 큰 금전적 소득을 얻으려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경제는 크레마티스티케와 동의어가 되었고, 청지기직을 의미하는 오이코노미아는 점차 약화해 갑니다.책임. 하웃즈바르트는 소명의 원리를 가지고 책임의 문제를 설명합니다. 소명의 원리는 루터와 칼뱅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특별히 칼뱅이 이 원리를 제도적 차원(가정, 교회, 국가 등)으로 확대함으로써, 오늘날 신칼빈주의 진영에 영감을 불어넣어 영역주권 사상을 형성시켰습니다. 이 소명의 원리에는 두 가지의 통찰력이 있습니다. 첫째, 이 원리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보편적인 것이므로 거룩의 정도에 있어서 신자들 간에 차별이 없습니다. 이 통찰력은 한 영역이 다른 영역에 종속되지 못하도록 합니다. 둘째, 이 원리는 삶의 각 영역 내에서 인간의 의지보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보다 더 우월합니다. 이 두 가지 원리들이 영역주권의 진정한 규범적 특징들입니다. 영역주권에서 주권은 특정한 영역이나 인간의 의지의 자율성을 가리키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이 주권으로 하나님과 동료에게 봉사하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소명은 가족 및 학교 내 아이들을 돌보는 사랑의 방식으로; 결혼 생활에서 남편과 아내의 진실한 사랑의 방법으로; 경제적 봉사의 유용성과 청지기 직분으로; 노조의 경우 근로자를 정당하고 공정하게 대우하는 방식으로; 공적 정의를 국가 전체의 특정 규범으로 사회 전체에 가져오는 방식으로 봉사하게 하셨습니다. 연대. 하웃즈바르트는 책임의 나눔으로서 연대성을 다룹니다. 이 연대성은 공동의 책임을 전제하기 때문에 ‘사회 규범’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연대성으로서의 사회 규범은 참여와 협력으로 구체화합니다. ‘참여’는 국민이나 국가가 자신의 목적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에 직접적으로 관여함을 의미합니다. 이 규범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각 사람을 창조함에 기인합니다. 따라서 참여는 직접적인 공동 책임을 포함합니다. “협력은 서로를 생각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이상을 포함한다. 협력하지 않으면 함께 사는 모든 형태가 결국 붕괴할 것이다. 협력은 공동으로 부담할 수 있는 책임들에 답함으로써 인간 사회 형성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협력은 인간의 책임의 보완이다.” 이상원은 연대의 개념에 대해 보다 포괄적인 관점을 제시합니다. 연대성은 인간의 행위 전체를 위한 규범입니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행 17:26)라는 말씀이 연대성의 출발점이 됩니다. 연대성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수직적 차원과 이웃 사랑이라는 수평적 차원으로 상호 연결됩니다. 또한 이상원은 이웃에 대한 책임은 유기체로서의 사회 개념을 통해 더욱 강화되고 지지된다고 강조합니다. 이 연대성-유기체 개념은 사회 안에 소외 계층도 우리가 도와야 할 책임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정리하자면, 중요한 것은 역시 실천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힘들게 만든 규범들이 도구화되고 간접적인 규범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윤리와 규범은 뒷마무리하는 정도의 유효성만 지닐 뿐입니다. 그렇다면, 정의, 청지기, 책임, 그리고 연대라는 모든 규범의 동시적 실천만이 답입니다!
세계관
기독교세계관
규범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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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질서
정의
청지기
책임
복음은 교파주의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by 이재훈
2023-03-30
교회 역사에서 다양한 교파가 생겨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람은 하나님께 쓰임받은 지도자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 이들이 함께 비전에 집중하며 받은 가르침을 되새기다 보면 같은 신앙의 흐름을 가진 교파를 형성하게 된다. 또한 기존 교파가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권위주의와 형식주의에 빠져 있을 때는 이를 갱신하려고 몸부림치는 이들에 의해 새로운 교파가 형성되기도 한다.네덜란드의 교회 개혁 운동, 돌레앙시(doleantie, 애통)에 참여한 교회들이 네덜란드개혁교회를 탄생시킨 것도 이와 같은 흐름이다. 때로 일부 지도자들의 교권을 지키기 위한 분열도 있었지만, 역사적으로 오래된 교파들은 그 출발점이 영적인 큰 운동을 기반으로 한다. 감리교와 장로교, 침례교로 대표되는 교단들은 분명 그렇다. 그리고 주요 교파들은 분명 복음 때문에 일어난 교회 갱신과 개혁 운동이 기반이 되었을 것이고, 역사 속에서 그 영성과 조직을 이어 오고 있다.그렇다면 각 교파가 교파주의를 뛰어넘어 복음 안에서 참된 연합을 이루는 것은 불가능한가? C. 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 서론에서 이 책을 쓰는 이유와 관련해 교파를 형성하는 예민한 문제들은 뒤로하고 모두가 공통분모로 인정할 수 있는 최대공약수 같은 것을 논하려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비유를 들어 “여러 방으로 통하는 문들이 있는 현관 마루”와 같은 공통적인 기독교 교리를 논하고자 한다고 했다. 최대공약수, 현관 마루와 같은 것이란 결국 복음이다. 복음은 모든 교파를 초월하여 함께 공통적인 신앙고백을 이루는 것이다.복음이 교파주의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 두 사람이 바로 존 웨슬리와 조지 윗필드이다. 둘은 같은 시기에 영국에서 영적 대각성 운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둘은 교리 면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였다. 때로 격렬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윗필드를 열심히 추종하던 한 성도가 그에게 질문했다.“목사님, 존 웨슬리 같은 사람은 천국에 가면 안 보이겠죠?”그랬더니 윗필드가 이렇게 대답했다.“그래요. 천국 가면 우리는 웨슬리를 못 볼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 곁에 너무 가까이 있어 그 광채 때문에 볼 수 없을 겁니다. 우리는 간신히 구원받아서 저 문가에 있을 테니 웨슬리를 천국에서 볼 일은 없겠지요.”하나님은 조지 윗필드의 하나님이시며 또한 존 웨슬리의 하나님이시다. 나의 하나님이시며 또한 내가 좋아하지 않는 바로 그 사람의 하나님이시다. 오래 예수 믿은 사람들의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처음 예수 믿은 사람들의 하나님이시다. 장로교의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침례교의 하나님이시다. 감리교의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루터교, 순복음의 하나님이시다.이재훈, 방황의 시대, 방향이 되다(두란노)의 일부를 간추린 글입니다.
복음
교파주의
분열
일치
무엇보다 사람을 사랑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by 최창국
2023-03-29
요한은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라고 말한다(요일 4:7-8). 요한은 이 말씀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정체성은 무엇보다도 사람을 사랑하는 삶을 통해 증명되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관계 이론과 훈련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마르틴 부버는 어느 날 한 청년과의 만남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종교적’ 열정이 가득한 어느 아침 이후에 오전 시간, 한 낯선 청년이 찾아왔다. 하지만 나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딱히 친절히 대해 주지도 않았다. … 말을 열심히 들어주기는 했지만 그가 끝내 꺼내지 않은 질문을 헤아리지 못했다. 오래지 않아 그의 친구들에게서 그가 더 이상 살아있지 않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것이 그가 하지 못한 질문들의 핵심적인 내용이었다. 그가 우연히 나를 찾아온 것이 아니라 운명에 이끌려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잡담을 나누러 온 것이 아니라 결정을 내리러 온 것이었다(Martin Buber, Between Man and Man, 16) 부버는 이 청년이 찾아왔을 때 자신은 매우 종교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일상적인 삶보다는 신비로운 경험에 관심이 많았었다. 그 당시 그의 사상은 일시적인 것보다 영원한 것, 일상보다는 신비로운 경험, 세상보다 세상 이면에 있는 것에 더 큰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자신을 찾아온 청년이 자살하면서 그의 사상은 크게 변한다. 그의 죄책감은 청년을 절망에서 구하지 못했다는 것보다 자신이 청년에게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부버는 그 청년이 자신을 찾아온 시간에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아 그 청년과의 대화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에게 그 일은 자기가 살아온 삶 전체에 대한 심판처럼 느껴졌다(Kenneth Paul Kramer with Mechthild Gawlick, Martin Buber’s I and Thou: Practicing Living Dialogue, 174-75). 그의 경험은 그의 사상과 삶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온다. 그는 그 후 관계의 틀을 개발했다. 바로 ‘나-그것’과 ‘나-당신’의 관계다. 그에게 이 관계의 틀은 상대방을 대하는 방식과 관계된다. 사람들을 인격이 아닌 사물이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보면 ‘그것’으로 대하게 된다. 하지만 사람들을 신성하거나 거룩한 존재로 보면 ‘당신’으로 대하게 된다. ‘나-그것’ 관계에서는 학벌, 출신, 돈, 직장, 가문 등으로 사람들을 평가한다. ‘나-당신’ 관계에서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품은 존재, 비할 데 없이 보배롭고 존귀한 존재로 본다. ‘나-당신’ 관계에서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로 보며 나와 다른 모습도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는 “모든 진정한 삶은 만남이다”라고 말하면서 인격적인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Martin Buber, I and Thou, 5). 부버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사람들 사이의 ‘나-당신’ 관계가 하나님과의 ‘나-당신’의 관계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즉, 나와 다른 사람을 인격으로 보는 모든 진정한 관계는 ‘영원한 당신’과의 관계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부버는 그의 삶의 여정에서 어느 날 자신과 종교적 믿음이 다른 그리스도인이자 노벨문학상을 받은 엘리어트(T. S. Eliot)와의 만남이 끝난 후에 사람들이 사상적 갈등을 예상하고 질문을 하자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사람을 만날 때 사상이 아닌 그 사람 자체에 관심을 갖습니다(Kenneth Paul Kramer with Mechthild Gawlick, Martin Buber’s I and Thou, 32). 부버의 ‘나-당신’의 관계적 틀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많은 의미를 제공해 준다. 즉,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을 신성한 하나님의 형상인 ‘당신’으로 보고 진정한 관심과 사랑을 가져야 한다. 물론 사람들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을 알도록 도와야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도 사랑의 대상이지 비판의 대상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진리를 옹호한다는 명목으로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사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자라는데 사람들에 대한 사랑은 자리지 않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예수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성경을 잘 알고 여러 형태의 영적 훈련을 열심히 했지만, 주변 사람들에 대해서는 방어적이고, 비판적이고, 엘리트주의적 자세를 가졌다. 예수님이 원하는 제자는 성경과 교리의 지식으로 넘쳐난 엘리트주의자가 아니다.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을 통합한 제자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바라는 제자의 모습을 분명히 하셨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는 누구보다도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와 생각이 다르거나 우리를 힘들게 만드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중요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가는 것은 사람들이 신뢰가 되지 않을 때도 사랑하는 것이며, 확신을 가지고 함께 계속 걸어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Ken, “Ethnography and Congregational Transformation at a Protestant Church,” 최창국, 실천적 목회학, 42에서 인용). 그런 의미에서 사람 사랑에 관한 제자 훈련은 매우 중요하다. 하워드 스나이더의 말처럼 “하나님 나라가 서로 사랑하는 우리의 관계를 통해 입증되기까지는 우리가 믿지 않는 깨어진 세상을 향해 할 말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Howard Snyder, The Community of the King, 35). 한국 교회는 무엇보다 영성 형성을 통한 공동체적 삶의 함양과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의 통합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 의지를 가꾸어 나가야 한다. 린더 켁이 Interpretation 창간 50주년을 기념하는 기고문에서 했던 말처럼, “지금은 성경에 대해 걱정하는 것을 멈추고 우리 자신에 대해서 걱정할 때다. 지금은 성경을 이용하려는 것을 멈추고 성경과 더불어 살아야 할 때다”(Leander Keck, “The Premodern Bible in Postmodern World,” Interpretation 50, 135). 성경이 중요하다고 외치면서도 성경을 통해 변혁적 삶과 사랑하는 삶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성경은 우리에게 타자적 실체로 남을 뿐이다.
사랑
마르틴부버
애즈베리 부흥 앞에서 진짜 던져야 할 질문
by Trevin Wax
2023-03-28
당신도 애즈베리 대학에서 일어나는 영적 각성의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평범했던 예배가 지속적인 찬양과 경배, 죄의 고백, 그리고 구원의 예배로 바뀌었고, 전국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다른 대학에서도 비슷한 강도로 영적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이번 주 초 내 아들이 다니는 시더빌 대학교(Cedarville University)의 영상을 보았을 때 나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이 대학교의 전도팀이 오하이오와 미시간의 여러 주립 대학을 다니면서 전도를 시작한다는 소식이었다. 정말로 부흥이 일어난 것인가?애즈베리 신학교 총장 티모시 테넷(Timothy Tennent)은 “부흥”이라고 부르는 걸 주저한다. 그는 이렇게 썼다. “안락함에 물든 교회의 기반을 흔들고 진정으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새롭고 더 깊은 영적 세계로 인도하는 지속적인 변화가 일어난 경우에만, 시간이 지나서 뒤를 돌아보면서, ‘아, 그때가 부흥이었구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흥인지의 여부는 시간이 판단할 것이다. 그러나 의심할 여지 없이 우리는 지금 말씀과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심령과 삶을 새롭게 하는 특별한 사건을 목격하고 있다. 하나님의 역사가 대학생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건 놀랍지 않다. 1802년 예일 대학교에서 영적 운동이 시작되었고, 학생의 3분의 1 이상이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했다. 당시 한 신입생은 이렇게 기록했다. “학교 전체가 흔들렸다. 한동안 학생 전체가 다 하나님 나라로 밀고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것은 실로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이었고, 모든 사람의 눈에 기이한 일이었다. 오, 얼마나 축복된 변화였던가!”대각성이 일어날 때하나님의 영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새로운 느낌을 줄 때마다, 즉 하나님의 위엄을 경외하고 그분의 사랑에 압도되는 놀라운 조합이 발생할 때마다, 우리는 다양한 반응을 만나게 된다. 첫째, 모든 게 혼란스럽다. 하나님의 숨결이 어떤 장소에 확실하게 임할 때, 종종 비정상적인 반응이 일어난다. 기도와 찬양 기간이 급속하게 늘어나거나, (신체적 그리고 영적) 치유에 있어서 하나님의 즉각적이고 가속화된 역사가 나타나거나, 마치 영원이 현재에 영향이라도 미친 것처럼, 누구나 느끼는 평소의 시간 감각이 무너진다. 사람들이 주님의 움직이심에 성실하게 반응하기 시작하며,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에서 나오는 거짓 없는 헌신을 신학적으로야 엉성해 보일지 몰라도 다양한 표현으로 반응하기도 한다.둘째, 부흥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없었던 시절은 없으며 그런 이들의 동기가 항상 순수했던 것은 아니다. 부흥을 조장하는 자(Hucksters)가 도착하여 권력을 확보하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권력을 도구화한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때마다, 거기에서 이익을 챙기려는 사람은 항상 나오기 마련이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마술사 시몬을 보라.셋째, 종종 세상보다 더 비판적이고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는 게 교인이다. 열광하는 신도의 감정 표현을 비웃기도 한다. 그들은 팔짱을 끼고 사건을 조사하는 데 더 열심이다. 말씀과 찬양의 신학적 정확성을 분석하며, 성령에 의해서 “감동받는 것”보다 사기당해서 “속아 넘어가는 것”을 더 걱정한다. (첫 번째 대각성 운동이 일어났을 때도 이런 일이 발생했다. 부흥의 근원과 결과에 대해서 “오래된 빛”과 “새 빛”으로 첨예하게 갈라졌다.) 과거에 교회 또는 영적 사기꾼으로 인해 상처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일수록 회의적인 태도를 가지기 쉽다.애즈베리에서 벌어지는 각성을 놓고 많은 질문이 생긴다.이거 진짜야? 이게 진짜로 하나님의 역사인지 어떻게 알지?참석자 중에 신학적으로 틀린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되는 거야? 영적 조작이 벌어지고 있다면?현재까지 진행된 상황을 근거로 해서 어떻게 “영을 분별”할 수 있지? 그냥 소셜 미디어에 의해서 감정주의가 퍼지는 거 아니야? 내가 어디에 있든 관계없이 하나님이 함께하시잖아? 부흥이 맞는다면, 기대해야 할 열매는 어떤 건데?긴급한 질문하지만 진짜 물어야 할 시급하고 절박한 질문은 따로 있다.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기다리고 있는 중풍병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네가 낫기를 원하느냐?”에즈배리에 관해서 물어야 할 질문은 에즈배리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건 당신에 관한 것이다. 당신의 심령, 당신의 갈망에 대한 것이다. 중풍병자에게 던진 예수님의 질문은 겉으로만 보면 기이하기 이를 데 없다. 아니, 베데스다에 온 사람들이 다 낫고 싶어서 온 것 아닌가? 당연히 낫고 싶지, 그걸 꼭 물어야 아나? 그리고 지금 예수님이 우리에게 부흥을 원하냐고 묻는다면, 우리 중 대부분은 다음과 비슷한 대답을 할 것이다. 주님, 안 보이세요?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헌신하는지,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고, 또 매주 이렇게 교회에 성실하게 출석하는지 말이에요. 우리가 부흥을 원한다고 주일마다 찬양하는 거 안 들리세요?우리가 기도하면서 이 나라를 구하고 교회를 새롭게 하는 건 부흥밖에 없다고 소리치는 거 모르세요? 그럼에도 예수님의 질문은 여전히 울려 퍼지고 있다. “너희가 진정으로 부흥을 원하느냐?”부흥에 대한 모든 표면적인 이야기와 우리가 성령을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지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잊자.부흥을 원한다고 얼마든지 말할 수는 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당신은 하나님의 임재가 초래할 불편함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주일마다 부흥을 달라고 찬양할 수는 있지만, 당신은 마음 깊은 곳에서 결코 벗어버리고 싶지 않은 깊은 원한과 응어리를 품고 있을 수도 있다. 교회의 분열과 신학적 부족주의(tribalism)를 은근히 즐기고,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은밀한 죄와 ‘나 정도면 괜찮지’라는 생각에 만족하는 뒤틀린 위로까지, 그리고 나날이 쇠퇴하는 교회를 보면서도 무감각하고 미래에 대해서는 무관심까지,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는 곳에서 당신의 내면은 결코 안전할 수 없다. 따라서 예수님의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네가 정말로 낫기를 원하느냐? 중풍병자는 치유가 불가능한 이유에 대한 온갖 변명을 늘어놓는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내 힘으로는 물에 들어갈 수가 없다. 나는 혼자라고.이런 변명을 늘어놓는 데서는 우리도 다르지 않다. 교회가 너무 망가졌어. 하나님이 그런 곳에서 역사하실 리가 없다니까! 부흥이 일어난다면, 결코 이런 식일 수는 없는 거야. 하나님의 역사라면, 완전히 다를 거야. 따라서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가 정말로 부흥을 원하는가? 부흥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뛰는가? 정말로 나는 치유 받기를 원하는가?하나님을 바라는 갈증마틴 로이드 존스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부흥이라는 개념에 감격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을 이해할 수 없다.”나도 마찬가지이다. 나도 그런 그리스도인을 이해할 수 없다. 애즈베리 대각성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든지,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 무슨 일이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든지 간에, 앞으로 역사가 그 현장을 목격하는 우리를 판단하는 기준은 단 하나가 될 것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알고 싶은 간절한 목마름, 권능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목격하고자 하는 억누를 수 없는 열망, 오로지 하나님만이 이루시는 역사를 향한 갈망이 나와 당신 속에 있느냐의 여부이다. 정통이 주는 감격은 팔짱을 끼고 분석할 때가 아니라 두 팔을 높이 들고 찬양할 때 따라온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금도 작은 체구의 시각장애인이었던 패니 크로스비(Fanny Crosby)와 함께 찬양한다. 인애하신 구세주여내가 비오니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원제: The Burning Question from Asbury Isn’t About Asbur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부흥
애즈베리부흥
대각성운동
설교자들이 표현하는 네 가지 정서
설교자의 정서_2
by 이정규
2023-03-27
설교자들은 어떠한 정서를 표현해야 하는가? 이 문제를 다루기 전에, 우선 우리는 설교자들이 보통 어떠한 정서를 뿜어낼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나는 이 분류법의 아이디어를 팀 켈러의 ‘설교’에서 얻었다.[1] 설교자들이 표현하는 네 가지 정서첫째, 설교자 자신을 예배하도록 이끄는 정서가 있다. 이러한 방식의 설교는 명시적으로든 암시적으로든 “나 정말 대단하지 않나요?”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전달되는 형태는 자랑일 수도 있고 훈계일 수도 있다. 형태는 다음과 같다.• 설교의 중심에 자신이 행했던 선행 또는 순종으로 인한 간증이 있는 형태• 설교자 자신의 지식이 설교의 핵심 메시지에 기여하지 않고, 쓸모없이 등장하는 형태• 설교자와 청중을 우리/그들의 구조로 나누고, 무작정 훈계하기만 하는 형태• 설교자가 자신을 다른 설교자와 다르게 우월하다는 것을 표현하는 형태설교자가 이러한 정서를 드러낼 때, 청중은 설교자를 예배하거나 혐오하게 된다. 또는 설교자의 인격을 혐오하며 비판하는 자기 자신의 지성 또는 정서를 예배하게 된다. 청중은 설교자와만 대화하게 되고, 그 결과 예배 중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한다.둘째, 공동체를 예배하도록 이끄는 정서가 있다. 이러한 방식의 설교는 명시적으로든 암시적으로든 “우리 교회 (또는 부서) 정말 대단하지 않나요?”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첫 번째 정서보다는 훨씬 나아 보이며, 또한 공동체를 하나되게 하는 긍정적 기여를 하는 측면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부정적 결과를 낳는다. 형태는 다음과 같다.• 속한 공동체가 얼마나 큰 성과를 이루었는지, 또는 무엇을 이루고 있는지에 집중되는 형태• 공동체의 당면 과제와 향후 목표가 메시지의 중심을 이루는 형태 (절대로 당면 과제와 향후 목표를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설교 시간은 가장 효과적인 광고시간으로 활용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목표여서는 안 된다)• 해당 교회와 다른 교회(또는 공동체)를 우리/그들의 구조로 나누고, 우월감을 강조하는 형태• 다른 집단의 교리/치리구조/집단정서를 신학적으로 비판하고 비난하며 피하라고 경고하는 형태(이러한 형태에서 청중들은 암묵적으로 소속된 공동체에 대한 우월감을 느낀다)설교자가 이러한 정서를 드러낼 때, 청중은 소속된 공동체를 예배하거나 혐오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공동체를 향한 헌신도가 높고 강한 사람과 낮고 비판적인 사람들 사이의 분열을 조장하기가 쉽고, 양쪽 모두 자신이 소속된 공동체가 아닌 다른 공동체에 대한 우월의식을 가지게 된다. 당연히 그 결과는 공교회성의 파괴이며, 이러한 공동체에 소속된 사람들은 자신이 소속된 공동체의 신앙 수준과 자신의 신앙 수준을 동일시하는 우를 범한다. 따라서 신앙 성장에 치명적이다.셋째, 본문과 교리를 예배하도록 이끄는 정서가 있다. 이러한 방식의 설교는 명시적으로든 암시적으로든 “이 본문의 의미는 대단하지 않나요? 이런 해석을 들어본 적이 있나요? 이러한 교리는 처음 배워보지 않나요?”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형태는 다음과 같다. 주의해야 할 것은 이 모든 형태가 그 자체만으로 나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모든 형태가 네 번째 정서에 기여하는 방식으로 설명된다면 아주 유익할 수 있다.• 청중이 지금까지 이해한 본문과 실제 본문이 얼마나 큰 거리가 있는지를 강조하는 형태• 청중이 암시적으로 가지고 있던 선입견과 기독교 교리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를 강조하는 형태• 교리적/주해적 오류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고, 비판의 분량이 설교 시간 전체의 1/4이 넘어가는 형태. 이때 청중은 설교라기보다는 교리강좌(또는 성경강좌)를 듣는 상황이 된다.사실상 이 정서는 앞의 두 정서보다는 훨씬 더 성도들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러한 정서의 메시지를 듣는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성경과 교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하게 된다. 하지만 삶과 지식에 괴리가 생길 가능성이 존재하고, 그 과정 중 첫째나 둘째 정서로 타락하게 될 가능성을 늘 내포한다. 설교자는 아주 신중하게 자기 설교의 목표를 재조정하고, 마음을 살펴야 한다.넷째,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삼위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이끄는 정서가 있다.이러한 방식의 설교는 명시적으로든 암시적으로든 “우리 하나님 정말 위대하지 않나요? 그분이 보내신 아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보세요! 당신이 가진 모든 문제가 이분 안에서 해결될 것입니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결국 이러한 정서를 지속적으로 전달할 때 청중은 진리를 사랑하며, 공동체를 기뻐하고, 설교자를 존경심으로 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설교자의 목표는 거기에 있지 않다. 설교자의 목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데 있다. 설교자는 교육하기도 하고, 훈계와 권면을 하기도 하며, 여러 예화와 증명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서 설교자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예배한다. 그 때 설교자는 더 이상 설교자로만 남지 않고 예배자가 된다. 이때 설교자가 하는 말들은 찬양과 구분이 되지 않는다. 청중은 예배의 진정한 목표. 즉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앙망하는 일을 시작한다. 설교자와 청중 모두가 한 하나님을 예배하며 삶의 문제를 그분께 드리게 된다.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볼 수 있다. 설교문을 완성한 후에, 우리는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이 설교문이 정말로 높이고 싶어 하는 대상은 무엇인가?• (설교문의 내용에 문제가 없다 하더라도) 내가 설교를 통해 얻고 싶어 하는 것은 무엇인가?• 설교 직전의 내 마음에서, 내 입술에서 찬양이 흘러나오고 있는가?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높이고 기뻐하는 마음이 있는가?• 내 마음은 낮아져 있는가? 나는 설교하는 사람으로서 나 자신 역시 이 설교를 들어야 하는 청중 중 하나로 생각하고 있는가? 혹시 스스로를 가르치는 사람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하나님을 유용한 분으로만 제시하는가? 아니면 아름다운 분으로도 제시하는가?설교자의 정서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마음의 움직임을 추적하여 관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설교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해 흉내만 낸다면, 그것은 진정한 방식이 아닐 것이다. 설교자들은 다음과 같은 싱클레어 퍼거슨의 충고를 새겨들어야 한다.혹시 이 글을 읽고 있는 설교자 대부분이 그리스도를 전하는 책보다 설교하는 법에 관한 책(그리스도에 관해 설교하는 법과 같은 책도 마찬가지)을 더 많이 소장하고 있지는 않을까? 정말로 그렇다면(조사를 해보면 알 수 있을 터)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야 마땅하다. 설교할 때 (혹은 설교를 들을 때) 나의 최대 관심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인가? 아니면 다른 것, 이를테면 죄를 극복하거나 신앙생활을 잘하는 법 혹은 복음을 통해 받는 혜택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가? 이런 것이 다 중요하기는 하지만 중심 무대는 이런 주제를 위한 것이 아니다. … 설교를 들을 때 가장 강하게 그리고 가장 오래 남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인가? 아니면 다른 것인가?[2]사람들은 자신의 가장 주된 관심사를 말하기를 좋아한다. 우리 구주께서도 사람들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고 하셨다(마 12:34). 우리는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야 한다. 기술적으로 설교문을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쓴다고 해서, 설교의 클라이맥스 부분에 예수님을 넣는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마음 깊이 그분을 사랑하고 찬양할 필요가 있다. 이는 인위적으로 되지 않는다.무엇보다도, 설교자의 가치가 설교자의 능력/청중의 규모/사역의 성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대하셨는지에 있다는 것을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 즉,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충분히 맛보고 누리고 있어야 한다. 설교자는 그분을 바라보고 기뻐해야 하며, 만족해야 한다. 설교자의 가치는 설교자 자신의 성취와 능력에 있지 않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인정에 있다. 우리의 위치는 그리스도 안이며, 우리의 가치는 그리스도만큼이다! 우리가 왜 설교를 통해서 스스로를 입증할 필요가 있는가!이러한 주장들이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렇듯 자신의 정서를 끊임없이 점검할 때, 설교 시간을 행복하게 보냈노라고 고백할 수 있다. 그 은혜를 누렸으면 좋겠다.[주]1. 팀 켈러, 설교, 채경락 옮김 (서울: 두란노, 2016), 7장을 보라. 여기서 켈러는 설교자 내면에 숨겨진 정서를 ‘서브텍스트’라는 말로 표현한다. “서브텍스트는 우리 메시지 저변에 흐르는 메시지다. 그것은 그 메시지가 의도한 진정한 (의식적인 혹은 무의식적인) 의미로서, 단어의 표면적인 의미보다 깊다. 예를 들어 “아니요, 저는 괜찮습니다”라는 진술은 ‘저는 관심 없어요. 당신 원하는 대로 하세요’라는 서브텍스트를 품고 있을 수 있다. 또는 ‘관심은 있지만 직접 대놓고 말하고 싶지는 않네요’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설교자의 어조, 얼굴 표정, 자세, 제스처가 청중을 향한 설교의 실질적인 목표에 큰 부분을 차지할 것이고, 선포된 메시지와 상관없이 그 목표가 커뮤니케이션을 장악할 수 있다.” p. 269.2. 싱클레어 B. 퍼거슨, 온전한 그리스도, p. 63.이 글은 이정규 목사 블로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설교
설교자
정서표현
설교자의 정서 표현, 왜 중요한가?
설교자의 정서_1
by 이정규
2023-03-26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성품을 자신이 듣는 설교의 성격과 결부하려는 심리적 경향이 있다. 설교의 내용만이 아니라 정신과 분위기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가늠한다. 설교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공개적이고도 주된 통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설교자의 시각이 왜곡되어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의 편협한 마음이 성부의 마음을 설명하는 분위기를 오염하고 있다면? 죄로 망가지고 수치심으로 가득하며 무력감을 느끼고 잘못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들은 신앙 고백의 교리만 강해할 뿐 복음의 은혜와 죄인을 무한히 사랑하시는 성부를 보여주지 못하는 설교는 원하지 않는다. 그들이 알기 원하는 것은 은혜와 사랑이 가득한 하늘 아버지다.[1] 남침례교 신학교의 설교학 교수였던 에드윈 C. 다간은 윗필드의 설교를 가리켜 “사도 시대 이후 설교의 역사에 조지 윗필드보다 더 위대하거나 더 가치 있는 이름은 없다”고 말한다.[2] 하지만 신광은 목사는 윗필드의 설교 방식을 지적하면서 심하게 비판한다. 이러한 그의 탁월한 연출력 때문에 그가 ‘메소포타미아’라는 말만 해도 사람들은 울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은 윗필드가 ‘숫자’와 ‘규모’를 늘리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그는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집회 참석 인원의 숫자를 뻥튀기하기도 했다. … 그는 개인이 아니라 대중을 상대로 사역했던 대중 운동가다. 대중을 마음대로 요리할 줄 알았던 근대 거인주의의 시조로, 카리스마적 종교 지도자의 모범이요, 미국 대통령 리더십의 원천이다.[3]이는 좋은 논쟁거리이다. 우리는 모두 설교자의 정서 표현이 설교에 영향을 어느 정도 미친다는 것을 알고 있고, 여기에는 연기가 있을 수 있다는 것 역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윗필드는 어렸을 때 연기 수업을 받은 적이 있었고, 연기력 역시 꽤나 좋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4] 그렇다면 그의 설교는 연기일 뿐이었을까? 또는, 설교자의 감정 표현은 연기일 수 있으니 그저 자제해야 하는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윗필드 본인의 말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캔터베리 대주교와 버터톤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배우의 대화를 언급한다.어느 날 대주교는 버터톤 씨에게 물었습니다. “버터톤 씨, 어떻게 무대에 선 당신 같은 배우들은 상상 속에 있는 것들을 말하면서 그것이 실재하는 것처럼 관객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입니까? 그 이유를 좀 말씀해 주십시오. 교회에서 우리 설교자들이 실재하는 것들을 전하는데도 회중은 그것이 상상 속에 있는 것처럼 받아들이는데 말입니다.” 버터톤 씨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대주교님, 이유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무대에 선 우리 배우들은 상상 속에 있는 것들을 실재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설교재단에 선 설교자들은 실재하는 것들을 상상 속에 있는 것처럼 말하기 때문이지요.”[5]그리고 이어서 윗필드가 말한다. “그러므로 저는 소리쳐 외칠 것입니다. 입만 번지르르한 설교자는 되지 않겠습니다.” 즉, 윗필드의 대답은 실재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배우들조차도 실재하는 것을 말하는 것처럼 힘과 감정을 쏟아붓는데, 실재하는 것을 말하는 설교자가 어떻게 가상의 것을 말하듯 냉담하게 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 설교자들은 이 말을 주의 깊게 숙고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 감정을 속이는 연기를 해서도 안 되지만, 우리가 얼마나 무겁고 중요한 진리를 다루고 있는지를 잊어서도 안 된다. 윗필드의 대답에 대해 존 파이퍼는 이렇게 언급한다.이는 결국 윗필드의 “연기”가 결국 연극적인 의미에서의 연기가 아님을 의미한다. 한 여성이 어느 영화에서 한 역할을 맡는다면, 카메라들이 그녀에게 집중되고 그녀가 소방관들에게 소리를 지르면서 2층 창문을 가리킬 때 우리는 모두 그녀가 연기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만일 당신의 이웃집에 불이 나고 어머니가 소방관들에게 소리를 지르면서 2층 창문을 가리키고 있다면, 아무도 그녀가 연기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그들이 정확히 똑같아 보이는데 말이다. 왜냐하면 정말로 거기에 아이가 불에 휩싸여 있기 때문이다. 정말로 이 여성은 아이의 엄마다. 아이가 죽을 수 있는 위험이 정말로 존재한다. 모든 것이 정말이다. 그리고 이것이 윗필드에게 해당하는 방식이다. 거듭남은 그의 눈을 열어 실재하는 것과 그 실재하는 것의 중요성을 보게 했다. 하나님, 창조, 인류, 죄, 사탄,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 천국, 지옥, 성육신, 그리스도의 온전함, 그분의 죽으심, 속죄, 구속, 화목, 부활, 성령, 구원하는 은혜, 죄 사함, 칭의, 하나님과의 화해, 평각, 성화, 사랑, 그리스도의 재림, 새 하늘과 새 땅, 영원한 즐거움 등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이것들은 실재하는 것이었다. 윗필드에게는 그를 압도할 정도로 실재하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무한히 중요한 것들이었다. 그는 거듭났고, 이런 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6]설교자의 정서는 중요하다. 설교자가 설교 중 드러내는 정서는 복음의 가르침을 훨씬 더 생생하고 마음에 와닿는 방식으로 전하는 것을 도울 수도 있고, 반대로 설교의 몰입을 방해하거나 불쾌감과 거부감을 가지게 만들 수도 있다. 설교자들은 사실상 자기도 모르게 드러내는 오만하고 죄악된 정서를 파악하지 못한 채 “내가 바르고 분명한 진리를 전달했기 때문에 성도들이 내 설교에 대해 반감을 가지게 되었구나”하며 자위할 수도 있다. 이는 성도들과 설교자 모두에게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정서를 표현해야 하는가? (내일, 3월 27일, “설교자들이 표현하는 네 가지 정서”에서 계속)[주]1. 싱클레어 B. 퍼거슨, 온전한 그리스도, 정성묵 옮김(서울: 디모데, 2018), p. 94. 강조는 필자. 2. E. C. Dargan, A History of Preaching, 2nd ed, Vol 2(Grand Rapids: Baker, 1954), p. 307. 아놀드 A. 댈리모어, 조지 윗필드: 18세기의 위대한 복음 전도자, 오현미 옮김(서울: 복 있는 사람, 2015), p. 23에서 재인용.3. 신광은, 메가처치 논박(서울: 정연, 2009), p. 56. 다만 신광은 목사의 비판은 과한 측면이 있다. 특별히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집회 참석 인원의 숫자를 뻥튀기하기도 했다”는 주장의 근거가 어디인지 그 출처를 밝히지 않는다.4. 아놀드 A. 댈리모어, 조지 윗필드, pp. 64-65 참조.5. Harry S. Stout, Divine Dramatist, pp. 239-240.6. 존 파이퍼, 언어의 영웅들, 이심주 옮김(서울: 부흥과개혁사, 2016), pp.143-144.이 글은 이정규 목사 블로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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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하고도 특별했던 하루
애즈베리 부흥의 현장에서
by Doug Hankins
2023-03-25
애즈베리 각성이 시작된 목요일에 나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처음 들었다. 그리고 이어진 주일 설교에서 목사님이 그 사건을 언급했다. 월요일이 되자마자 나는 당장 켄터키로 날아가서 진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확인하고 우리 교회 식구들에게 상세하게 알리겠다는 생각에 여행 준비를 시작했다. 부흥과 부흥운동에 관심을 가진 미국 종교사를 연구하는 역사가로서 나는 실제로 만나게 될 부흥이 과연 어떤 느낌을 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대됐다. 게다가 들리는 바로는 그 규모가 예사롭지 않다고 했다. 휴즈 강당의 공식 예배가 끝났다는 발표가 있었던 2023년 2월 8일 수요일 오전 10시 45분 이후에 벌어진 역사를, 소셜 미디어가 전하는 단순한 사실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예배를 마친 학생들은 떠나지 않고 남아서 기도하고 찬양하고 성경을 읽고 간증하고 성령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했다. 나는 그곳에 가서 직접 눈으로 보고 모든 것을 경험하고 싶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만나주시고, 그 결과 그분을 더 사랑하게 도와주실 것이라는 소망으로 깨어나는 나 자신을 체험하고 싶었다.더불어서 부흥이라는 특별함 속에 존재하는 평범함과 일상적인 삶의 모습도 궁금했다. 화장실에 가려고 중간중간 나갈까? 당연히 먹고 마시겠지? 리더는 방을 어떻게 배정할까? 청소는? 진공청소기를 쓸까? 사람들은 얼마나 오래 함께 있을까? 모임이 거의 하루 24시간 진행되는 상황에서 이런 세세한 모든 것을 제대로 파악할 사람이 있기나 할까? 자, 지금까지 내가 발견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캠퍼스애즈베리는 켄터키 렉싱턴 남쪽, 말을 키우는 농장이 주로 모인 외딴 지역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캠퍼스이다. 렉싱턴 애버뉴에서 좌회전하여 시내 중심으로 2마일 운전하면 캠퍼스 중심부에 들어선다. 메인 스트리트는 도로의 북서쪽에 있는 신학교와 남동쪽에 있는 대학교를 깔끔하게 분리한다. 두 캠퍼스에는 각각 도로 쪽으로 정문이 난 채플이 있다. 신학교 쪽에 있는 에스테스 채플(Estes Chapel)은 660석이다. 대학교 쪽에 있는 더 오래되고 더 큰 휴즈 강당(Hughes Auditorium)은 1,489석이다. 2월 15일 수요일 오전 11시 30분, 내가 도착했을 때 자리가 꽉 차 있었다. 나는 “특별 주차장”에 이중 주차로 차를 세웠다.렉싱턴 애버뉴를 따라서 모여드는 사람들이 보인다. 파란색 셔츠를 입은 한 청년이 줄을 선 군중을 향해 외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청년의 말을 들은 한 여자가 그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더니, “예수님은 세상 모든 어린아이를 사랑하십니다”라며 크게 노래하기 시작한다. 이런 식의 대결은 대체로 평화적으로 진행되지만, 지금 일어나는 문화 현상이 가진 유쾌한 긴장감을 잘 보여준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줄을 선 사람이 이미 천여 명에 달했다. “오늘 저녁이면 네 배로 늘어날 겁니다.” 한 자매가 내게 살며시 귀띔했다. 휴즈 강당으로 들어가는 긴 줄 / Courtesy Doug Hankins바로 내 앞에 줄을 선 그룹은 오하이오 신시내티에 있는 나사렛 교회에서 차를 몰고 온 사람들이다. 며칠 전에도 왔다는데, 벌써 두 번째란다. 틱톡에서 비디오를 본 교회 청년에게서 이곳의 소식을 처음 들었다고 했다. 내게 얼마나 오래 머무를 생각인지 묻더니, 자기네는 챙겨야 할 집안일과 직장 때문에 오후 3시까지만 있을 거란다. 평범함과 비범함의 아름다운 조화이다. 이런 모임이 다른 대학으로까지 퍼지면 얼마나 좋겠냐며, 한 자매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한다. 우리는 조금씩 채플 앞으로 나아가면서 수다를 떨었다. 지금은 오후 1시이다. 채플에 들어서자 다른 자매가 내게 말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을 꼭 찾길 바랍니다.” 그 일이 벌어진 바로 그곳마침내 호기심과 흥분이 최고 수준에 다다른 순간을 맞았다. 내가 지금 발걸음을 내딛는 이 부흥의 현장이 영화 레이더스(Raiders of the Lost Ark)와 비슷할까? 그러나 강당 안으로 열 걸음을 들어가도 얼굴이 녹아내리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평범한 예배이다. 찬양하는 큰 소리가 있을 뿐이다. 오후 1시 5분, 자리에 앉은 나는 청중 속으로 스며든다. 대부분이 백인이고 옷을 보면 중산층이다. 그리고 거의 모든 사람이 채플 공간을 존중하고 있다. 그렇다고 획일적인 청중은 아니다. 히스패닉, 흑인, 아시아인, 아프리카인도 있다. 누군가는 예배를 드리고, 누군가는 촬영을 하고, 누군가는 수다를 떤다. 물론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촬영하는 사람들도 어느 정도는 예배에 동참하고 있다. 잡담하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고는 잠시 사람들을 관찰하더니 밖으로 나간다. 불현듯 1차 대각성 때에도 이런 식의 관찰자가 참석했을지 궁금하다. 한 남자가 무대 위에 올라가더니 우리에게 앉으라고 한다. 성경을 읽고는 우리가 왜 여기에 있는지 그 이유를 묵상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옆자리에 있는 서로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한다. 나는 오하이오에 있는 은사주의 교회에서 온 사람들을 향해서 돌아섰다. 다양한 예언 집회에 참석했지만, 이런 경험을 한 적은 없다는 게 그들의 고백이다. 그들의 말을 빌자면, “다른 집회만큼 강력하고 매력이 있지만, 훨씬 덜 자극적(sensational)”이란다. 내 오른쪽에 있는 인도인 부부가 함께 기도하자고 한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운전하고 왔다는데, 주님께서 확실한 사역의 길을 보여주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온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서로를 위해 기도한다. 나는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중보 기도에서 큰 감동을 받았다. 서로 누군지 알 리 없는 사람들이 눈을 감고 한 마음이 되어 큰 소리로 기도한다. 이것은 특별한 경험이다. 기도를 마치자 그들은 내게 고맙다고 말하고는 방을 나간다. 기도 시간이었기에 나는 중보 기도할 사람의 목록을 핸드폰에 적었다. 주님께서 이사야 55:6을 내 마음에 주신다: “너희는, 만날 수 있을 때에 주님을 찾아라. 너희는, 가까이 계실 때에 주님을 불러라.” 가족과 교회 지도자, 소그룹 구성원 등등 최대한 많은 사람을 기억하고 중보하려고 노력한다. 고작 5분 지난 거 같은데, 시계를 보니 이미 한 시간 반이 넘게 기도하고 있다. 이 공간에서는 시간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아예 다르게 흐르는 것 같다. 천국이 이럴까? 부흥에도 리더가 있어야 한다지나치게 조율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구잡이로 구성되지도 않은, 나름의 조율된 노력이 이 모임 뒤에 있음을 알아차렸다. 강당 앞에 스무 명 정도의 스태프가 단체 문자로 이야기를 나누며 계획을 세우는 것 같다. 함께 기도하지 않을 때 그들은 청중으로부터 조금 떨어져서 휴대폰을 보고 또 메시지를 보낸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대부분이 아니라 일부에 불과하다. 리더들 대부분은 기도에 치중한다. 그들과 함께 기도하기 위해 사람들이 물결처럼 계속해서 앞으로 나가고 있다. 이건 마치 빌리 그레이엄 전도 집회(Billy Graham Crusades)를 담은 오래된 VHS 테이프에서 본 것과 비슷하다. “스태프”가 누군지는 알 수 없다. 무대나 복도에서도 특정 이름이 언급되는 일은 거의 없다. 갑자기 한 남자가 일어나더니 성경을 읽고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지도하던 모임을 기억하라고 한다. 그러고는 그리스도를 위해 이 세대를 전도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는데,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단지 지역 교회 목사라고만 할 뿐이다. 뮤지션도 자신을 소개하지 않는다. 이름을 알리겠다는 충동이나 자아 고취 욕망은 찾아볼 수 없다. 주목받는 유일한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에즈베리에서 나를 놀라게 한 단 한 가지를 꼽으라면 바로 이 점이다. (이 모임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한) 소셜 미디어 시대지만 굳이 소셜 미디어를 사용하여 이 부흥의 불길을 더 부채질하겠다는 전담 직원은 없는 것 같다. 오히려 스태프는 하나같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오로지 예수님만이 인도자가 되실 수 있도록 말이다. 그나마 얼굴을 알리는 사람은 찬양을 인도하는 학생들이다. 에즈베리 대학교에 운집한 사람들 / Courtesy Doug Hankins아마도 학생들이 인도하기 때문이겠지만, 내 기준에서 볼 때 대부분 찬양이 최신 경배와 찬양 곡—Maverick City의 “Firm Foundation”과 “Promises”; Brandon Lake의 “Gratitude”와 “House of Miracles”; 그리고 “Waymaker” “Nothing Else” “Forever” “Tremble” “Great Are You Lord” “No Longer Slaves”—이다. 2000년 이전에 작곡된 곡은 “Jesus Loves Me” “I Love You Lord” “Sanctuary” “Agnus Dei”가 유일하다. 유일한 찬송가는 “내 영혼 평안해”(It Is Well with My Soul)이다. 가사나 이미지를 담은 스크린도 없다. 오로지 기도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이다. 최신 워십 송을 모르지만 나는 휴대폰에서 가사를 검색해서 따라부른다. 이토록 많은 사람으로 붐비는 오래된 건물에서 휴대폰 수신이 문제가 되는 건 아닐까? 내 걱정은 기우였다. 평범한 모든 것들이 부흥을 떠받치고 있다. 원활한 휴대폰 수신, 구글 검색, 그리고 찬양 가사를 담은 웹사이트까지.각성에도 휴식이 필요하다모임 속 다양한 지점에서 스태프는 질서 유지를 위해서 청중을 섬긴다. 한 남자가 이층에 있는 사람들에게 백 년 된 발코니에서 뛰어내리면 안 된다고, 대신 일층으로 가서 예배에 참석하라고 친절하게 안내한다. 그 말을 들은 청중은 큰 소리로 웃는다. 그리고 일층에 앉아있던 청중은 이층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을 위해서 조금씩 안쪽으로 움직이며 앉을 자리를 만들어준다. 평범한 관심이 비범한 겸손과 은혜를 만날 때 피어나는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인가!이 시점에서 나는 야구 경기에서 한 이닝이 끝났을 때 화장실과 매점에 가려고 일어나는 것처럼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내 눈에는 청중이 자연스럽게 퇴장할 수 있도록 리더들이 의도적으로 휴식 시간을 조정하는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줄 서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추가 공간이 만들어진다. 정리 시간의 타이밍은 찬양 인도자 교체로 이어진다. 여러 그룹의 학생들이 찬양을 인도하는데, 정해진 시간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동안 계속한다. 평균 45분에서 한 시간 사이이다. 한 팀이 진행하는 찬양은 45분보다 짧지 않고 또 90분을 넘지 않는다.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관성이 있다. 그 정도의 지속 시간이 청중의 요구에 가장 잘 맞는 리듬인 것 같다.현실적인 질문들에 답을 얻다몇 시간 동안 기도하고 찬양하고 또 성경을 읽은 후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비로소 내 눈에 이름표가 달린 끈을 매고 있는 리더들이 보였다. 이제 몇 가지 현실적인(practical) 질문들 할 시간이 되었다. 그들은 침착함과 인내심을 잃지 않고 모든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나는 에즈베리 스태프가 보여준 온화한 성품, 일관된 관심, 공감 능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들은 휴즈 강당 지하에 있는 화장실로 나를 안내했고, 일정에 따라 화장실을 청소한다고 알려주었다. 화장실에는 공공장소에서 쓰는 큰 펌프 비누 용기가 걸려있다. 수건은 창턱에 쌓여 있고 쓰레기는 넘치지 않았다. 누군가 물품을 채우고 빠르게 청소하고 나간 것 같다. 애초에 이 화장실은 수천 명이 끊임없이 사용할 걸 고려해서 만든 게 아니기에 빠른 청소가 매우 중요하다. 강당 앞에 간식과 물병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강당 주변에서 식사는 하면 안 된다. 그래도 이런저런 물병을 가져오는 사람이 있는데, 스타벅스 컵은 눈에 띄지 않는다. 재충전을 위해 몰래 빠져나와서 뭔가를 마셔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남 눈치 보지 말고 그렇게 하면 된다. 아무도 그런 사람을 정죄하지 않는다. 잔디밭에서는 한 교회가 ‘리틀 시저스’ 피자를 나눠주고 있다. 동쪽 잔디밭에는 푸드 트럭을 끌고 온 남자가 무료로 음식을 나눠주고 또 ‘무료로’ 중보 기도를 해주고 있다. 아, 평범함과 특별함의 조화이다. 잔디밭 앞에서 무료로 음식을 나눠주는 푸드 트럭 / Courtesy Doug Hankins 다시 밖으로 휴즈 강당에서 몇 시간 더 있다가 다시 밖으로 나갔다. 방과 후에 도착한 부모와 아이들이 잔디밭에 피크닉 담요를 깐다. 미식축구공과 축구공이 여기저기에서 날아다닌다. 일부 음유시인들이 즉석 예배 콘서트를 위해서 나무 주위에 자리를 잡는다. 아직도 천 명 정도가 여전히 줄을 서 있다. 오후 6시가 되자 숫자는 두 배가 되고, 잔디밭에 모이는 사람은 무려 수천 명을 헤아린다. 기술팀이 휴즈 강당 앞에는 야외 스크린을, 그리고 길 건너 에스테스 채플에는 실내 스크린을 준비해서 휴즈 강당 안의 모습을 라이브로 송출한다. 에스테스 채플에도 이백 명이 모여있다. 캠퍼스 근처에 있는 빈야드 교회에도 사람들이 있고, 거기에서도 라이브 방송이 진행된다. 라이브 방송에서 피아노 연주자가 에베소서 3:14-21을 낭독한다. 그러므로 나는 아버지께 무릎을 꿇고 빕니다. 아버지께서는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붙여 주신 분이십니다. 아버지께서 그분의 영광의 풍성하심을 따라 그분의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여 주시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 속에 머물러 계시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이 사랑 속에 뿌리를 박고 터를 잡아서, 모든 성도와 함께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되고,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여러분이 충만하여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가운데서 일하시는 능력을 따라,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욱 넘치게 주실 수 있는 분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아이 하나가 나무에 올라가자, 스태프가 정중하게 내려오라고 한다. 밖에 있는 사람들은 스크린과 스피커를 통해 강당 내부 사람들을 보면서 찬양을 따라 부른다. 아이들이 태그 놀이를 하면서 놀고, 부모들은 커피를 마신다. 경찰관 몇 명이 수다를 떨고 있다. 이동식 화장실로 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기숙사로 돌아가는 학생들이 군중 사이를 지나간다. 휴대폰으로 셀카를 찍는 사람,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한 남자가 홀로 서서 조용히 기도하고 있다.현실적이고 영적이며 평범하고 특별하다. 이것이 모두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에베소에 보내는 서신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했던 바울, 그의 마음도 이랬을 것이다.원제: Ordinary and Extraordinary: A Day at the Asbury Awakening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부흥
부흥운동
대각성운동
애즈베리부흥
이상하게도 마음이 뜨거워지다
애즈베리 대학교 부흥
by Fred Sanders‧Joe Henderson
2023-03-24
2023년 2월 8일 수요일, 애즈베리 대학교(Asbury University)의 아침 채플이 끝나고 좀 더 기도하려고 남은 학생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평화와 사랑이 임했다. 그리고 더 많은 학생이 참여하기 시작했다. 수백 시간이 지났는데도 모임은 여전히 계속되었고, 수천 명의 순례자가 놀랍고 지속적인 영적 갱신을 체험하기 위해서 켄터키 윌모어(Wilmore)로 모여들었다. 애즈베리 대학교는 그것을 “분출”(outpouring)이라고 표현했고, 길 건너에 있는 애즈베리 신학교는 “각성”(awakening)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소식을 접한 인터넷은 바로 “부흥”(revival)이라고 명명했다. 우리 두 사람은 윌모어와 정반대편에 있는 캘리포니아에서 가르치고 있지만 애즈베리는 우리에게 특별한 곳이다. 조는 아예 윌모어에서 자랐고 지금은 종합대학이 된 애즈베리 대학(Asbury College)을 나왔다. 우리는 애즈베리 신학교(Asbury Theological Seminary)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면서 만났다. 그래서 우리는 그 작은 마을에 있는 관계자들과 친구들이 전해주는 고무적인 이야기들을 확인해 볼 수 있었다. 애즈베리 부흥에 관해서 사람마다 다 나름의 생각이 있겠지만, 그중 대부분이 일반적인 부흥에 대한 의견 정도이다. 전반적인 측면에서 부흥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미국 서부에서 사는 애즈베리 출신(Asburians)으로서 우리는 윌모어라는 동네의 역사와 맥락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면서 지금 일어나는 부흥의 순간을 설명하려고 한다. 우리가 연결하는 몇 개의 지점(dots)을 통해 외부인도 이 부흥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역사적 맥락애즈베리 대학교는 기존 교회에서 경험하는 영적 삶이라는 부흥의 시초가 되었던 웨슬리 전통 위에서 설립되었다. 미국인이 최초의 대각성 운동이라고 부르는 18세기의 운동은 영국에서 복음주의 부흥 운동으로 알려져 있다. 그 운동은 존과 찰스, 웨슬리 형제의 설교에 크게 힘입어 영국 교회의 갱신으로 이어졌다. 웨슬리 형제와 그 동료들의 변혁적인 설교가 시작한 곳은 지극히 평범한 어느 예배당이었다. 그들이 그 교회 예배에 참석했을 때, 존의 표현대로, 그들의 마음이 “이상하게 따뜻해졌다.” “[하나님이] 내 죄, 심지어 내 모든 죄를 제거하시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내 속에 주어졌습니다.”존 웨슬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으며, 그 경험은 그로 하여금 역사적으로 강력한 사역과 섬김, 선포의 삶으로 이끌었다. 그로부터 거의 3세기가 지난 후, 윌모어의 학생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웨슬리 형제가 체험한 것과 비슷한 놀라운 체험을 간증한다. 감리교 운동이 확산해 가면서 존 웨슬리는 프랜시스 애즈베리(Francis Asbury)에게 미국 식민지의 사역을 위임했고, 그는 감리교 사역을 미국으로 확산했다. 차를 타고 윌모어로 지나면 말을 탄 프랜시스 애즈베리 동상을 지난다. 다름 아니라 두 대륙을 이은 18세기 위대한 부흥의 연결 고리이다. 애즈베리 대학교 고유의 다양한 웨슬리(Wesleyan) 영성은 미국의 성결(Holiness) 운동에 의해 더욱 더 깊어졌다. 그 운동의 슬로건은 “봉헌”(consecration)이다. 이 전통의 영향을 받은 교회는 본당 성소 앞에 제단 난간이 있다. 설교로 도전을, 또 찬송으로 감동을 받은 사람은 제단으로 올라와 자신을 하나님께 봉헌한다. 포브 파머(Phoebe Palmer)는 19세기에 제단 신학을 설명했다. 일단 개념을 어느 정도 알게 되면, 이것이 미국 복음주의에 얼마나 널리 퍼져 있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오래된 노래 “Trust and Obey”(바이올라의 한 교수가 작사)에는 이런 가사가 들어있다. “증명할 수는 없지/ 그의 사랑이 주는 기쁨을/ 제단 앞에 나 자신을 바치기 전까지는.”웨슬리 전통과 성결 운동에 뿌리를 둔 사실 외에도 애즈베리 대학교는 이번 주 뉴스에 나오는 동일한 예배당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독특한 지역 부흥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50년, 1958년, 그리고 1970년에도 바로 그곳에서 부흥이 있었다. 그 여파는 오늘날까지도 지역 사회 속의 생생한 기억으로 남을 만큼 컸고, 그에 관한 몇 권의 책이 쓰일 정도로 중요한 사건이었다. (다음 책을 참고하라. Halls Aflame: An Account of the Spontaneous Revivals at Asbury College in 1950 and 1958 by Henry C. James and Paul Rader, 그리고 One Divine Moment: The Account of the Asbury Revival of 1970 edited by Robert E. Coleman and David J. Gyertson).콜맨과 자이어슨(Gyertson)의 책 제목, ‘One Divine Moment’(신성한 한순간)은 1970년 부흥회 때 애즈베리 대학교 총장이었던 데니스 킨로(Dennis F. Kinlaw)의 말에서 따온 것이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신성한 한 순간을 내게 허락하여 주십시오. 수 세기에 걸친 인간의 모든 노력보다 그 한순간이 훨씬 더 가치 있고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킨로가 말하는 한순간이 언제인가? 살아계신 하나님이 자신의 시간표에 따라서 능력과 거룩함으로 스스로를 알리시는 부흥의 순간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며 겸손하게 기대라는 신자의 전통을 말한다. 2월 8일부터 지금까지휴즈 기념 강당(Hughes Memorial Auditorium)이라는 캠퍼스 예배당의 모퉁이 돌에는 두 개의 모토가 새겨져 있다. “모두에게 거저 주시는 구원, 모든 죄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나는 참 구원”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기를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서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히 12:14). 예배당에서 울려 퍼지는 설교는 언제나 값없이 주시는 구원의 선물과 변화된 삶으로의 부르심으로 특징지어져야만 한다. 지금의 부흥이 시작된 2월 8일 채플 예배에서 잭 미어크리브(Zach Meerkreebs) 목사는 로마서 12장에 제시된 표준에 따라 거룩하게 살라고 강권했다. 13절 속에 담긴 서른 계명은 오염되거나 위선적인 또는 왜곡된 사랑이 아닌 온전함으로 서로를 사랑하라고 듣는 이를 초청한다. 미어크리브 목사의 결론은 명확했다. 이 구절이 요구하는 사랑은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구절이 말하는 방식으로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 예수님의 사랑으로 온전히 채워지기 전에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는 사랑한다 (요일 4:19). “행동으로 사랑을 드러내고 싶습니까? 그럼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해야만 합니다.”그날 그의 설교가 특별히 대단했던 것은 아니다. (나중에 미어크리브 목사는 그날 설교가 형편없었다고 자평했다.) 그러나 그 설교에는 로마서라는 깊이가 더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설교는 거저 주시는 은혜와 완전한 구원이라는 웨슬리의 성결이 강조하는 바를 정확하게 전달했다. 학생들은 초대를 들었고, 거기에 응답했다. 이어서 진행된 예배가 선정적이거나 극적이었던 것도 아니다. 라이브 스트림으로 보는 그 현장은 중간중간 지루해 보이기도 한다. 함께 기도하는 모습, 조용히 찬양하거나 성경 읽는 것 외에는 볼 게 없었다. 모두가 다 앞을 향하고 있었지만, 무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순례자가 하나둘 도착하기 시작했고, 어느새 군중이 만들어졌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심령을 새롭게 하는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경외심과 하나님의 사랑이 주는 감미로움을 간증한다. 하지만 이 모든 드라마는 보이지 않게 진행되었다. 학생 중심지금 세대 대학생은 팬데믹의 혼란이라는 독특성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팬데믹은 그들의 계획을 방해했을 뿐 아니라 질병과 죽음에 맞서도록 강요했다. 그리고 발달이라는 측면에서 민감한 단계에 있는 그들을 고립과 혼란에 빠뜨렸다. 삶의 지평을 확장하길 바라고 들어간 대학에서 그들이 정작 만난 사회적 환경은 축소였다.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불안과 우울증으로 특징지어지는 것이 지금 시대의 대학생이다. 이들이 바로 켄터키에 있는 기독교 대학에 등록하고 다니던 중에 갑자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강력한 사랑을 경험하도록 초대받은 젊은이들이다. 이들이 바로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기도와 예배를 계속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대학 지도부와 협력하기 위해서 나선 학생들이다. 부흥은 학생을 중심으로 이루어지지만, 대부분 길 건너 신학교에서 건너온, 눈앞에서 벌어지는 부흥을 해석하고 싶어 하는 많은 학자들에게도 축복이다. 이전 시대 부흥의 전문가인 로버트 콜먼(Robert E. Coleman)은 말할 것도 없고, 톰 맥콜(Tom McCall), 크레그 키너(Craig Keener), 로슨 스톤(Lawson Stone), 스티브 시맨즈(Steve Seamands) 및 많은 학자가 참석했다. 이들은 현세대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목격하는 데 영적으로 열린 현명하고 비판적인 사상가이다. 1월 4일 게시된 블로그 게시물에서 애즈베리 신학교의 티모시 테넌트(Timothy Tennant) 총장은 이렇게 썼다. 2023년 1월은 “우리가 좋은 소식을 더 널리 뿌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 굳건히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 굳건히 신뢰해야 하는 부흥의 전 단계입니다.” 이 특별한 축복의 시기에 분별력을 가지고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책임감 있고 다세대적인 지도력이 현재 마련된 상태이다. 할렐루야!윌모어에서 일어나고 있는 각성, 부으심, 또는 부흥의 의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애즈베리에 사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서 부흥의 물결이 높이 일었다가 다시 사그라든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한편 윌모어에서 특별한 일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빠르게 퍼진다. 다른 대학과 신학교에서도 그들만의 깨달음의 순간을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켄터키의 작은 윌모어에서 시작한 부흥의 시초를 체험하기 위해서 지금도 순례의 길을 떠나고 있다. 윌모어까지 직접 오는 사람이든 멀리서 관찰하는 사람이든, 그들은 다양한 교회와 교단에 속하고 있다. 비록 지금의 각성이 웨슬리의 영향을 받은 특정한 종류의 복음주의 대학생들 사이에서, 그들의 영적 유산이 근거가 되어 일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애즈베리가 이 운동의 소유자는 아니다. 이 부흥은 애즈베리만의 것이라고 도장을 찍지도 않는다. 휴즈 강당의 좌석 수는 1,485개에 불과하지만, 수백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이 평범한 강당에서 일어나는 역사에 관심을 기울였다. 우리 시대에도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을 아는 것이 가능하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고 있다.애즈베리의 부으심에서 배우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광범위한 영적 갈망이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이 갈망은 18세기와 21세기가 다르지 않다. Z세대와 그들의 부모, 조부모, 나아가서 증조부모 세대와도 다르지 않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강렬한 배고픔이다.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갈망이 우리 마음에 영감을 주어 우리 영혼을 준비시키기를 바란다. 그래서 어디에 있든지, 우리의 심령이 “이상하게 따뜻해져서” 새로운 예배, 되살아나는 거룩함,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기 전에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분과의 더 깊은 친밀함으로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원제: Hearts Strangely Warmed at Asbury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에즈베리대학교
부흥
대각성운동
성결운동
팀 켈러는 유신진화론자인가?
by 고상섭
2023-03-23
2023년 3월 17일, 기독교학술원이 “팀 켈러의 유신진화론 비판적 성찰”을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했다. 팀 켈러가 그의 에세이 “창조, 진화, 그리고 그리스도인 평신도”(Creation, Evolution, and Christian Laypeople)[1]에서 주장한 내용을 거론하며 그의 주장이 유신진화론적 입장이라는 비판과 함께 그 위험성과 그의 창세기 해석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세미나였다. 먼저 나는 창세기에 대해 팀 켈러와 다른 관점을 가진 개혁주의 진영의 목회자임을 밝힌다. 창조론을 믿고, 6일 창조를 믿고, 창세기 1-2장이 역사적 기록임을 나는 믿는다. 그러면서도 나는 나와 견해가 다른 팀 켈러의 입장을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을 여기서 말하고자 한다. 팀 켈러를 통해 내가 배운 것 중 하나는 복음의 겸손이며, 이것은 다른 사람과의 연합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이런 복음의 관대함은 때때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것 같다. 팀 켈러의 주장은 과연 비판받아 마땅할까? 아니면 견해가 다르지만 수용가능한 것일까? 팀 켈러를 존경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후자에 좀 더 무게를 두고 설명해 보려고 한다. 창세기 1-2장 해석 문제 기독학술원 원장인 김영한 교수는 팀 켈러가 창세기 1-2장을 사실이 아닌 비유로 해석한다며, 그를 타협주의자라고 비판한다. 또한 팀 켈러는 ‘24시간 6일’ 창조를 부인하고 ‘오래된지구론’을 믿기 때문에 성경의 정통 복음주의를 벗어났다고 말한다. 이는 성경의 어떤 부분도 창세기 1-2장이 비유적인 글이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김 교수는 주장한다. 이런 비판만 들으면 마치 팀 켈러가 성경의 계시와 권위를 무시하고 과학을 받아들이는, 말하자면 성경의 무오성을 부인하는 사람처럼 들린다. 하지만 팀 켈러의 의견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팀 켈러는 창세기 1장 전체가 산문인 것은 아니라고, 즉 여기에는 시적 요소가 있다고 주장한다. 에드워드 J. 영이 말하는 ‘고양된 준-시적 언어’(exalted semi-poetic language)가 창세기 1장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에드워드 영은 시적 언어를 말하면서도 창세기 1장이 시는 아니라고 정의하지만, 팀 켈러는 에드워드 영의 ‘고양된 준-시적 언어’를 차용하면서 시로 읽어야 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2]또 팀 켈러는 창세기 1장이 시적 요소로 볼 수 있는 근거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동일한 문구의 7번 반복과 “∼이 있으라” “그대로 되니라”의 반복을 통해 단순한 산문으로 볼 수 없다고 말한다. 또한 태양(큰 광명체)과 달(작은 광명체)를 묘사하는 용어도 매우 독특한, 성경 어디에도 쓰인 적이 없는 시적 언어이며, “땅의 짐승”이라는 단어도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시를 쓸 때 동물을 지칭하는 용어라고 설명한다. 팀 켈러는 커버넌트 신학교 구약학 교수인 존 콜린스의 창세기 주석을 인용하면서 창세기 1장을 산문이지만 또한 시적 언어를 포함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를 고양된 산문 서술(exalted prose narrative)이라 부를 수 있다. 이 장르의 이름은 여러 면에서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사실 주장을 다루는 산문 서술을 포함한다. 둘째, 이를 … 문자 그대로 해석하도록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팀 켈러는 창세기 1장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어려운 근거를 2장과 비교를 통해 설명한다. 창세기 2:5은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구절은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아서 초목과 밭에 채소가 나지 않았다는 것을 통해 대기와 비가 존재하기 전 식물이 없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창세기 1장의 창조의 순서를 보면 비가 내리기도 전에, 사람이 창조되기 전에 식물이 있었다고 말한다. 결국 2장의 근거로 1장을 해석하게 되면 창세기 1장이 자연 질서를 무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태양이 존재하기도 전에 세 번의 ‘아침과 저녁’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팀 켈러의 창세기 1-2장 해석에 오류가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도 팀 켈러의 창세기 1-2장 해석을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팀 켈러는 사사기에 나오는 드보라의 사건(4장)과 드보라의 노래(5장)처럼 창세기 1-2장을 역사적 기록과 함께 선포하는 시적인 노래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창세기 1-2장이 역사적 선언이며 산문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그러나 팀 켈러의 주장을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는 주장이라고 단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는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그 쓰인 장르대로 읽어야 한다는 성경해석의 원칙을 말하는 것이다. 팀 켈러의 해석이 마음에 들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시를 시로, 산문을 산문으로, 서신을 서신으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은 틀린 말이 아니다. 창세기 1-2장에 대한 그의 장르 이해가 다를 뿐이다. 그리고 그런 주장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와 달리 나는 창세기 1-2장을 산문으로,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지만, 그의 주장도 일리가 있는 주장 정도로 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6일 창조’ 문제 팀 켈러는 창세기 1장의 창조 순서가 문자적 24시간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창세기 1장의 창조 순서가 시적인 표현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24시간/6일 창조를 믿는 사람들은 팀 켈러의 주장을 비판하는 것이 옳은가? 나는 24시간/6일 창조를 믿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 근거는 창세기 1장에서 명확하게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8-11). 여기서 하나님은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시면서, 하나님이 엿새 동안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말씀하고 있다. 만약 6일 창조가 아니고 긴 시간의 창조였다면 안식일을 말씀하시면서 7일의 패턴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를 근거로 우리의 안식일을 말씀하시기 때문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표현대로 6일 창조를 믿는다.[3]그러나 내가 6일 창조를 믿는다고 해서 팀 켈러의 주장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고 싶지 않다. 팀 켈러는 창세기 1장의 창조 순서를 통해서는 6일 창조라고 명확히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흔히 24시간으로 생각하는 히브리어 ‘욤’의 용례도 24시간이 될 수도 있지만, 더 긴 시간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단어이다. 나는 팀 켈러의 주장대로 넷째 날 해와 달이 만들어지기 전에 더 긴 시간이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6일 창조보다 더 긴 시간 창조가 되었을 가능성을 무조건 부정하는 것도 바람직한 태도는 아닌 것 같다. 창세기 1장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긴 시간 창조를 믿을 수 있는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명백한 문제라기보다 해석의 차이가 있을 수 있는 영역이다. 그리고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다. 6일 창조를 믿지만, 6일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의 신앙에 큰 영향을 주는 잘못된 일은 아닐 것이다. 6일이 훨씬 더 성경적 근거가 있다고 생각이 되더라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해석이 모두 오래된지구론이라는 과학을 믿기 때문에 성경을 억지로 끼워 맞추는 시도라는 해석은 너무 극단적이다. 6일 창조를 믿더라도, 히브리어 ‘욤’에 대해 좀 더 다양하게 해석하는 사람들의 해석을 좀 더 열린 입장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 않을까? 젊은지구론/오래된지구론 문제 나는 오래된 지구를 믿지 않는다. 그렇다고 젊은지구론을 믿는 것도 아니다.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기 때문에 창세기 1-2장은 지구의 나이가 중요한 주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구가 오래되었건 그렇지 않건 두 가지는 성경에서 명백히 밝히는 주제가 아니라고 생각되어 유보하는 입장이다. 젊은 지구일 수도 있고, 나이 든 지구일 수도 있고, 또 하나님이 아담을 성인 아담으로 처음에 창조하셨듯이 나이 들어 보이는 지구를 창조하셨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을 ‘성숙한 지구론’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지구의 나이가 젊은지, 나이 들었는지, 성숙한지에 대해 창세기 1-2장으로 명확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가? 팀 켈러는 오래된지구론을 주장하는 사람이지만, 그것은 그가 과학적 근거를 성경보다 더 우위에 두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성경해석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된 것이다. 나는 팀 켈러의 오래된지구론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팀 켈러의 주장은 수용가능하다.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다. 오래된지구론, 젊은지구론을 창세기 1장을 가지고 너무 명확하게 말하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 유신진화론 문제 팀 켈러는 유신진화론자인가? 아마도 유신진화론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명백한 유신진화론자일 것이다. 그러나 팀 켈러가 주장하는 창세기의 해석은 진보적 유신진화론자들이 말하는 것과 다른 부분이 많다. 팀 켈러는 다른 유신진화론자들처럼 여러 아담이 동시에 존재했다고 믿지는 않는다. 한 사람 아담의 타락과 한 사람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한 우리의 구원론을 명확히 이해하고 설교한다.[3]그럼 팀 켈러는 왜 유신진화론자라고 공격받는가? 팀 켈러는 진화에 대해서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한다. 진화적 생물 변의 과정인 EBP(Evolutionary Biological Process)와 인간의 모든 측면을 진화로 설명하려는 진화 대이론인 GTE(The Great Theory of Evolution)로 나눈다. 팀 켈러는 EBP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인이 수용가능하지만, 진화론적 세계관을 주장하는 GTE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런 팀 켈러의 주장은 단순히 팀 켈러 혼자만의 주장이 아니라 다양한 학자들로부터 지지받는 학설이다. 칼빈 대학교 석좌교수를 역임한 앨빈 플랭팅가 교수는 ‘과학과 종교, 양립할 수 있는가?’(Science and Religion: Are They Compatible?)라는 저서에서 현대 진화론은 유신론과 양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연주의적 세계관은 양립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자연주의적 세계관은 실제로 진화와 양립하기 어렵다. 따라서 과학과 종교(또는 과학과 유사종교) 사이에 갈등이 있기는 하지만, 그 갈등은 자연주의와 과학 간의 갈등이지, 유신론적 종교와 과학 간의 갈등은 아니다. 진화론이 자연주의와 묶일 때는 신의 설계를 부정하게 되지만, 진화론 자체만으로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18).앨빈 플랜팅가와 팀 켈러의 주장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팀 켈러가 나누는 진화의 두 가지를 동의하지 않더라고, 그는 창세기 1장에서 진화론을 말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는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지만 현대 과학에서 EBP가 창조의 과정에 사용되었다면 성경은 그것을 포함할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팀 켈러는 그의 에세이에서 명확하게 “창세기 1장은 진화 또한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실제 과정을 다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 유신진화론이라는 단어 자체를 부정적으로만 보는 시각도 있지만 유신진화론 안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한국교회탐구센터가 주관한 강좌, “창세기를 통해 본 과학과 신앙의 쟁점”에서 합동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를 역임한 송인규 교수는 유신진화론 안에서도 다섯 가지 정도의 다른 주장들이 있다고 설명한다. 그중 양극단의 두 이론을 제외한 세 가지 보수적, 중도적, 진보적 입장을 언급하면 송인규 교수 본인은 창조론을 믿고 있지만 유신진화론 중에서 보수적 입장과 중도적 입장은 수용가능하지만 진보적 입장은 수용할 수 없다고 결론 내린다.[5]나는 송인규 교수의 주장 또한 모두 다 수용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유신진화론 중에서 보수적 입장이 취하는 것 중에서 어느 정도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지만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데는 동의가 되는 점도 있다. 인류의 첫 조상인 창세기의 아담을 고생물학의 증거와 신학적 기사 사이를 구별하는 경향에 대해서는 받아들일 수 없지만, 생물학적 진화의 메커니즘을 하나님의 섭리적 다스림 가운데 병합시키는 것은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그럴 수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결론 나는 창조론을 믿는 사람이다. 창조론 중에서도 즉각적 창조론을 믿는다. 그래서 24시간/6일 창조를 나의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 켈러를 유신진화론자라고 비판하며 그의 해석을 전부 거부하고 싶지는 않다. 팀 켈러는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만 창세기 1장을 산문과 함께 시적인 요소로 이해해야 성경이 쓰인 장르대로 해석한다고 생각한다. 나와 다르기는 하지만, 그의 해석 또한 성경의 권위를 존중하는 자세에서 나온 것이라 믿는다. 우리는 좀 더 겸손하게 자신의 믿음을 지키면서도 상대방을 존중하며 연합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팀 켈러는 데릭 키드너의 글을 인용하며 그의 에세이를 마무리한다: “이는 모험적인 제안이며 임시적이며 개인적인 견해이다. 더 나은 지적과 이론들이 제기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이것이야말로 이 분야에서 일하는 우리 모두가 취해야 할 바른 태도입니다.” 유신진화론을 조금이라도 인정하면 성경의 권위가 무너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앨빈 플랭팅가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다.무신론을 지지해주는 과학적인 증거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 유신론을 반박하는 과학적 증거가 있다고 가정하자. 그렇다고 해서 유신론이 거짓이라거나, 유신론자들의 믿음이 반박됐다거나, 유신론의 믿음이 비합리적이거나 거기에 문제가 있다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는다. 과학적이건 아니건 간에 유신론을 지지하는 증거도 있기 때문이다. … 또한 유신론적인 믿음이 정당성을 보장받기 위해서 현대 과학에 의존할 필요는 없다(과학과 종교, 양립할 수 있는가?, 43).나는 목회자이고 과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유신진화론의 다양한 스펙트럼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이해하거나 정확한 주장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설명들 가운데 성경이 말하지 않는 부분들을 잠정적 인정한다고 해서 성경의 권위가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창조론을 믿는다고 창조의 과정 중에 진화의 요소가 들어갈 수도 있다는 주장들에 대해 반드시 거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팀 켈러를 ‘유신진화론자’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유신진화론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지만, 보통 유신진화론자라고 하면 부정적 프레임이 씌워지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단지 창세기의 해석을 다르게 하면서 진화적 방식을 수용하는 사람 정도로 이해하고 싶다.물론 나는 팀 켈러의 관점과는 전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팀 켈러의 의견을 비판하면서 배격하기보다는 하나의 잠정적 의견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어쩌면 우리는 천국에서 함께 만나 웃으면서 창세기의 다른 관점들을 아주 재미있게 이야기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주]1. “Creation, Evolution, and Christian Laypeople”은 2009년 10월에 개최된 BioLogos Theology of Celebration Workshop에서 처음 발표되었으며, BioLogos 인터넷 홈페이지에 2012년 2월 23일 자로 올라와 있다.2. 팀 켈러에 대한 비판 중에는 그가 에드워드 영을 인용하긴 했지만 영의 결론과는 다르게 인용했기 때문에 영의 관점을 왜곡했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팀 켈러는 에드워드 영이 말한 ‘고양된 준-시적 언어’만을 인용했고, 그렇기 때문에 시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에드워드 영의 단어를 인용했다고 반드시 영의 결론까지 함께 동의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팀 켈러는 에드워드 영을 왜곡한 것이 아니라 보수 신학자인 에드워드 영도 창세기 1장을 ‘고양된 준-시적 언어’로 해석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일 뿐이다. 3. 4장 창조 1항: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는(히 1:2; 요 1:2, 3; 창 1:2; 욥 26:13; 33:4) 태초에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지혜와 인자하심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하여(롬 1:20; 렘 10:12; 시 104:24; 33:5, 6), 무(無)에서부터 세계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6일 동안에 창조하시기를 기뻐하셨으니, 모든 것이 심히 좋았다(창 1:1-31; 히 11:3; 골 1:16; 행 17:24). 4. 팀 켈러의 로마서를 살펴보면, 그는 명확히 한 사람 아담의 타락과 한 사람 그리스도의 순종에 대한 대표성의 원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설교한다. 또한 그의 논문에서도 창세기 1장은 시적 요소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지만 바울서신은 그렇지 않은 명확한 서술이므로 아담과 하와가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유신진화론은 설득력이 없다고 명확하게 말한다. 그래서 바울이 명확히 말하는 역사적 아담을 부인하는 것은 성경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라고 경고한다. 5. 유신진화론의 다섯 가지 분류는 한국교회탐구센터 과학과 신앙 강좌, “창세기를 통해 본 과학과 신앙의 쟁점”을 참고하라.
유신진화론
젊은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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