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Edition
한국어
UNITED STATES
AFRICA
عربي
AUSTRALIA
BRASIL
CANADA
正體中文
简体中文
ESPAÑOL
فارسی
FRANÇAIS
ITALIA
NEDERLANDS
SHQIP
SLOVENSKÝ
후원
하기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시리즈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리뷰
서평
새로 나온 책
뉴시티교리문답
뉴스
국내
국제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검색
사이트 내 전체검색
검색어 필수
검색
추천 검색어
마음
여성
배움
성경
신앙과일
크리스찬
전체메뉴
01
ARTICLES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02
VIDEOS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03
SERIES
시리즈
04
CONTACT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05
QT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06
REVIEWS
도서
서평
새로 나온 책
07
The New City Catechism
뉴시티교리문답
08
NEWS
뉴스
국내
국제
09
ABOUT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10
GIVE
후원
ARTICLES
ARTICELS
연도별
SELECT CONCAT(YEAR(wr_4)) ym FROM g5_write_articles where wr_4 <= '2025' GROUP BY ym order by wr_4 desc
2024
2023
2022
2021
2020
2019
2018
날짜순
조회순
이름순
더 소중한 순간
by 정현구
2023-03-22
인생에는 세 가지 가장 중요한 시간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태어난 때입니다. 대부분 태어난 날을 복된 날로 생각합니다. 이 땅에서 살아갈 생명을 얻은 날이니 얼마나 복된 날인가요! 그래서 매년 이날을 잊지 않고 축하의 잔치를 엽니다. 그런데 태어난 순간보다 더 중요한 시간이 있습니다. 바로 살아있는 오늘 이 순간입니다. 지금 이 순간이 없다면 우리에게는 삶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의 소중한 가치를 자주 잊고 살지만, 현재가 곧 우리 삶의 현실입니다.그런데 우리에게는 살아 있는 이 순간보다 더 소중한 순간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순간을 좋지 않은 시간으로, 또는 피하고 싶은 순간으로만 여깁니다. 그 시간의 가치를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죽음의 순간입니다.인생은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소멸하고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죽음의 순간만큼 피해야 하는 것은 없습니다. 죽음은 가장 두려운 순간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와 정반대로 말합니다.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전도서 7:1). 죽는 날이 다른 날보다 결코 못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 어떤 날보다 더 좋은 날이라고 말합니다. 죽는 날이 더 좋은 날이 될 수 있다는 말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처럼 죽음의 순간이 가진 의미와 가치를 알고, 인생의 마지막을 두려움이 아니라 기대감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태어난 순간과 현재 살아 있는 순간의 의미가 훨씬 달라질 것이 분명합니다.정현구, 영원을 품고 오늘을 걷다(SFC)에서 간추린 글입니다.
전도서
죽음
죽는날
존경하는 목사님이 추락했을 때
by Hannah De Cleene
2023-03-21
살다 보면 누구나 사람에게 상처받지만, 매주 강대상에 서는 사람으로부터 받는 상처는 차원이 다르다. 부모님에게 복음을 전했고, 내 결혼식 주례까지 한 존경하는 목사님이 알고 보니 그간 여러 교인을 영적으로 학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교회 축구팀을 후원하고 종종 같이 공까지 차며 우리를 돌보던 중고등부 목사님이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아내와 가족을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내 삶에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목사에 대한 기억이 더럽혀지는 느낌을 받지 않을까? 그 목사가 그동안 내게 행한 선과 그가 다른 이에게 행한 악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도덕적으로 실패한 목사 또는 교회 지도자를 만날 때 교인은 보통 다음 두 가지 방식으로 반응한다. 먼저 목사의 실패를 아예 부인하거나 변명한다. “그분이 지난 세월 교회에 끼친 은혜가 얼마나 큰데, 그게 사실일 리가 없잖아? 말이 돼?” 아니면, 아예 사역 전부를 불신하는 경우이다. 달리 말해서, 지난 세월 그 목사의 설교 외 삶에서 배운 모든 것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된다. 이런 양극단의 태도를 피하려면 적절한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은혜를 끼치는 목사라고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고, 나쁜 짓을 했다고 해서 그게 사역의 모든 열매를 다 허사로 만드는 것도 아니다. 긴장 유지성경에는 엄청난 실패를 겪었으면서도 선을 향한 하나님의 쓰임에서 제외되지 않은 사람과 지도자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아브라함과 모세는 친숙한 사례이다. 아브라함은 주님을 믿고 고향을 버리고 미지의 땅으로 간 사람이다. 그게 다가 아니다. 부활의 권능을 온전히 믿으며 아들까지 제물로 드린 믿음의 아버지이다. 그러나 그는 두 번이나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거짓말했으며, 하갈을 통해 아이를 낳자는 사라의 나쁜 계획에 동조했다(창 12:12-14; 16:2-4; 20:2).모세는 또 어떤가? 홍해를 갈라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인도해낸 인물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십계명까지 맡기셨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난 직후에 그는 불신앙으로 물을 내겠다며 반석을 내리쳤다(출 20; 민 20:10-13).그 외에도 결함으로 가득한 다른 사람과 함께 이름이 거론된 이 둘에 관해서 히브리서 11장이 칭찬하는 게 무엇인가? 믿음이다. 아브라함과 모세는 때때로 실패했지만, 그들은 순종함으로 주님께 돌아오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목적이 그들의 실패로 인해서 무력해지는 일은 결코 생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교회 지도자가 저지르는 죄가 무죄 판결이라는 프리패스를 받아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과 헤어졌고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죄의 결과는 심각하고 고통스럽다. 목사의 경우 진정한 회개와 화해가 이뤄질 때까지, 그리고 교회 권징이 온전히 마무리될 때까지 아예 목사 자리에서 내려와야 할 수도 있다. 그런 과정을 거치더라도, 온전한 사역 회복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또는 사역 복귀라는 시도 자체가 현명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스도를 의지하기목사의 추락이라는 충격 속에 남겨진 우리에게 이 모든 상황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한때 사랑하고 존경했던 교회 지도자가 더 이상 내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본받을 대상이 아니라는 슬픈 현실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아예 다른 교회를 찾아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서 그들을 통해서 주신 모든 은혜가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니다. 깨어진 교회를 놓고 주님께 상처와 실망, 심지어 분노를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여전히 그들을 통해서 은혜를 부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는 자세가 의미하는 것이다(벧전 5:7). 목사의 추락이 초래한 감정을 억누르기만 하는 건 현명하지 않다. 그렇다고 원망의 쓴 뿌리라는 죄가 나를 파괴하도록 놔둬서도 안 된다. 대신 말씀을 향해 눈을 돌려야 한다. 히브리서 12:1-2은 우리의 시선을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렇게 구름 떼와 같이 수많은 증인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갖가지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갑시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누구나 예외 없이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경주를 하고 있다. 그러다 보면 교회 지도자의 죄와 연약함이라는 장애를 만나기도 한다. 그들의 실패를 통해서 나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내 속에 깊이 뿌리박은 죄성을 삶에서 떼어내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기억하자. 오로지 예수님만이 완벽한 삶을 사셨다. 이 세상에서 만나는 지도자의 실패를 볼 때마다 우리는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그분만이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자이시다. 지도자가 가진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모두 다 균형감을 가지고 보아야 한다. 예수님만이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해서 붙잡을 가치가 있는 유일한 분이다. 원제: When a Beloved Pastor Fall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목사의타락
아브라함의죄
모세의죄
‘공동체가’ 전도한다는 것
심플리 미셔널 | Simply Missional
by 김선일
2023-03-20
심플리 미셔널Simply Missional탈교회화, 비종교화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선교 과제로서 복음을 새롭게 제시합니다. 기독교의 변증 유산으로부터 오늘을 위한 복음 변증의 지혜를 발굴하고, 현대 한국의 문화적 표현들과 복음의 대면이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폭발적 관심을 끌고 있는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에는 그리스도인 시청자라면 더 불편하게 보았을 캐릭터가 있다. 중견 교회 목사의 딸로 성경에서 그 이름을 따온 게 분명한 ‘이사라’이다. 악랄한 학폭 가해자 중 하나이고 마약에 찌들어 사는 화가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천연덕스럽게 교회에서 성가대원으로 서고, 성경을 곧잘 인용하며, 피해자에게는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라고 경고한다. 그의 어머니는 마약을 한 남녀가 뒤엉켜있는 자리에 무슨 조직의 보스인 양 아주 익숙하고 태연하게 경호원들을 데리고 등장하여 잠든 딸을 깨우며 현장을 수습한다. 목사 아버지가 그 딸을 윽박지르는 이유는 딸의 학폭과 마약중독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져 자신의 위신을 추락시켰기 때문일 뿐이다. 그 또한 탈세 혐의자다. 다소 과도한 설정으로 보이기도 하고,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편견을 담은 것으로 비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드라마가 묘사하고 있는 기독교의 메시지와 그 삶의 괴리를 뼈아프게 되새겨 보아야 한다.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몇몇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소위 ‘교회를 대표하는 이들’(목사와 사모, 그 주변인들)이 함께 보여주는 삶의 행태다. 그것은 교회가 ‘전하는’ 복음과 교회의 ‘공동체적 삶의 양식’ 사이의 간극이다. 이러한 불일치, 부조화, 부조리가 복음을 공허한 ‘좋은 소식’으로 전락시킨다. 필자는 오늘날의 전도는 개인 중심에서 공동체 중심으로 이동한다고 자주 말한다. 그러면 ‘공동체가’ 전도한다는 것에 대해서 회의와 난색을 표명하는 이들이 있다. 집회 전도나 노방전도에서 탁월한 메신저나 신실한 개인이 복음을 제시하는 형태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물론 전도에서 복음을 나누고 설명하는 중요한 가교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개인이다. 그렇지만 그 복음의 내용을 삶의 경험으로 확증하고 생생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공동체이다. 기독교 공동체가 추구하는 삶의 양식은 복음의 언어를 습득하게 하는 통로다. 모든 언어는 그 언어가 쓰이는 문화를 경험함으로써 가장 정확하고 효과적으로 습득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는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종교나 사상이 없다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또한 그의 가르침과 성품으로 빚어지는 특유한(peculiar) 공동체여야 한다.예수 그리스도께 죄 용서를 받은 사람들이 서로에 대하여, 타인에 대하여 어떠한 관용과 환대의 삶을 사는지가 속죄의 언어를 깨닫는 중요한 경험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해관계가 없는 이들이 어떻게 하나를 이루며 서로를 돌보는지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사랑을 맛보는 계기가 된다. 자기의 권리와 욕구보다 다른 이들을 섬기는 데 진심 어린 신자의 모습이 자기를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해하는 통로가 된다. 이러한 실천을 하는 개인도 본보기가 되고 소중하지만, 더욱 근본적인 과제는 공동의 실천과 습관으로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성경의 서신서들이 교회 안에서의 사랑과 용서와 친교를 반복해서 중요하게 다루는 것이다.오늘날은 개인의 정체성과 선택, 취향과 자유가 최우선의 가치로 떠오르고 있다. 이에 부응하여 관계와 공동체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바뀐다. 혈연, 지연, 학연으로 대표되는 끈끈한 연줄의 관계가 관심과 취향에 따라 모이는 느슨한 연대로 대체되고 있다. 개인주의가 심화하고 있지만, 본래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관계와 공동체를 갈망한다. 그래서 SNS나 소셜 앱을 통해 소모임과 커뮤니티들이 번창한다. 단지 관계와 모임의 문법이 변화할 뿐이다. 자신의 관심과 취향을 밝힌 소모임을 만들면 비슷한 관심사를 지닌 사람들이 모여드는 방식이다. 언제든지 들어가고, 언제든지 나올 수 있어야 한다. 자율성과 취향이 가장 존중되어야 할 모임의 기준이다. 관계와 공동체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본질적이지만, 그러한 욕구를 경험하고 표현하는 방식은 변화한다. 코로나 이후 교회들도 소그룹과 같은 공동체적 모임의 필요성을 더욱 실감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위에서부터 구역이나 소그룹을 구성하고 획일적인 의제를 던졌던 교회들이 이처럼 개인의 관심과 취향에 부합하는 관계와 공동체의 문법을 담아낼 수 있느냐는 새로운 도전이 될 것이다(참고: “코로나 이후, 새로운 공동체를 준비하라”). 공동체의 형식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공동체의 핵심 가치이다. 공동체의 형식에 있어서 교회는 현대인들의 변화된 관계 문법인 자율성과 수평성을 최대한 이해하고 그에 적응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 공동체의 핵심 가치를 기반으로 형성되는 그 공동체의 문화와 습관은 개인의 자유와 선택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세속주의와는 분명히 차별되어야 한다. 심지어, 오늘날의 세속적 윤리에서도 비판하는 위계주의, 학벌주의, 배타주의와는 더더욱 거리를 두어야 한다. 필자는 그리스도인 청년 공동체로 인도되어 처음 신앙을 갖게 된 청년의 고백을 인상 깊게 읽은 적이 있다. 그는 여러 사정으로 또래들과는 달리 정규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 없었고 경제적으로도 취약했다. 그런데 이 공동체를 소개받았고, 이들이 표방하는 기독교 정신을 기반으로 한 사회, 문화적 가치에 매료되어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 또래 청년들은 다들 대학을 졸업하고 자기 전공에 따른 경력을 쌓아가고 있었지만, 이 청년은 함께 어울릴만한 학력과 경험이 없었다. 그렇지만 이 공동체는 이 청년을 동등한 일원으로 받아주었고, 그에게 대학 진학에 필요한 무료 과외도 돌아가면서 제공해주었다. 이 청년은 자신을 적극적으로 환대하고 자신이 제기하는 신앙에 대한 의문에도 포용적이고 개방적으로 대화해주는 공동체에 깊은 고마움을 표했다. 포용성과 개방성만이 기독교 공동체를 대표하는 가치는 아니며, 인간을 온전한 회심에 이르게 하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위의 공동체는 시대에 부합하는 매력적인 특성을 지녔음에도 그리스도를 오롯이 신뢰하는 교회로 발전하는 데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자신을 내어주신 그분의 사역과 가르침을 중심으로, 또한 그의 본을 따라 자기를 부인하고 상호 섬김의 공동체를 이루는 곳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대속 사역으로부터 환대와 용서와 사랑과 존중이 생성되어야 한다. 오늘날 관계와 공동체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는 자율적인 취향과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가치를 기반으로 한다. 과연 그와 같은 기초 위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의 고유한 관계에 대한 필요와 진정한 공동체적 소속 열망이 해소될 수 있을까? 교회가 보여주어야 할 것은 자기 부인의 영성과 타인에 대한 환대와 섬김을 실천하는 공동체다. 이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에 견고하게 뿌리 내리며, 그의 가르침과 삶을 기억하고 재연하며 살아내는 공동체다. 이러한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야말로 관계를 갈망하지만 관계를 지속하기에는 너무도 취약한 문화에서 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유력한 방식일 것이다.그러한 공동체적 삶은 교회가 전하는 복음의 진리에 따른 결과나 부산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디모데전서 3:15에서 바울은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라고 선언한다. 이 구절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순서다. 진리가 교회의 기둥과 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인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라는 것이다. 진리의 기반 위에 교회가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기반 위에 진리가 서 있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전하는 진리의 복음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실한 제자들의 공동체 위에서 온전하고 굳건하게 전파될 수 있다. 공동체가 전도한다는 것은 공동으로 전도를 위한 행사나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각자의 은사에 따라 협력하는 것도 포함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보다 더욱 근본적인 공동체적 전도는 기독교 공동체의 고유한 존재 양식과 공동의 습관으로부터 나온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어떻게 이루느냐가 곧 우리가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전하는 증거가 된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평소에 그리스도인들과 기독교 공동체를 접하면서 점진적으로 교회의 일원이 되곤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존 사회적 자본, 곧 인간관계보다 더욱 강력하고 따뜻하고 매력적인 사회적 자본을 제공하는 기독교 공동체에 끌린 것이다. 기독교의 공동체가 함께 추구하고 실천하는 삶은 믿지 않는 이들의 삶과 질적으로 차이가 있을 때 초월적인 복음의 메시지와 조화를 이룰 것이다.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전도의 어려움은 바로 이처럼 차별화된 공동체를 경험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조사에 의하면, 그리스도인 청년들의 개인 윤리적 생활에서 비그리스도인 청년들과 거의 차이가 없다. 양극화된 사회에서 정치적 적대성과 편향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목회자와 교인들에게서 복음으로 인한 화해와 환대를 경험하기란 만무하다. 환경 문제에 대한 아무런 고민 없이 쓰레기를 양산하는 교회의 행사와 모임에서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대한 책임 있는 감수성을 발견할 수 없다. 문제는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 아니라, 그 복음의 내용이 가리키는 삶의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복음전도 방법의 부재가 아니라, 복음의 실체를 경험하고 표현하는 공동체의 부재가 문제이다. 초기 기독교는 박해와 위협 가운데서도 실질적인 전도를 이루었고 교회는 성장했다. 공개적인 전도가 금지된 상황에서 초기 기독교는 그들의 대조적인 생활방식으로 복음을 전했다. 2세기의 기독교 철학자 아리스티데스는 당시 황제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기독교 공동체의 삶을 이렇게 전한다.오 왕이시여, 그리스도인들은 진리를 두루 찾다가 발견하였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책들에서 배운 것처럼, 그들은 열방의 어느 백성들보다 진리와 진정한 지식에 더 가까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늘과 땅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알고 신뢰합니다. 그분 안에서, 그분으로부터 만물이 존재하며 그분에 비견될 그 어떤 신도 없습니다. 그들은 그분으로부터 계명을 받아 도래하는 세상에 대한 희망과 기대 안에서 따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간통과 음란한 행동을 하지 않고, 거짓 증언을 하지 않으며, 맡겨진 재물을 사취하지 않습니다. 자기 것이 아닌 것을 탐내지 않고, 부모를 공경하며, 이웃에게 친절을 다합니다. 사람의 형상으로 만든 우상들에게 기도하지 않으며, 남들이 자신에게 하지 않기를 원하는 것은 남에게 행하지 않으려 합니다. 자기를 멸시하는 사람을 설득하여 친구로 삼으며, 원수들에게는 선을 행합니다. 오 왕이시여, 그들의 여성들은 처녀와 같이 순결하며 그들의 딸들은 단정합니다. 그들의 남성들은 모든 불법적인 연합이나 불결함을 멀리하며 다가오는 다른 세계에서의 보상을 희망합니다. 더욱이, 그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으며, 노예들에게도 차별 없이 그들을 향한 사랑 안에서 형제라 부르며 그리스도인이 될 것을 권면합니다. 그들은 이상한 우상을 숭배하지 않으며, 어디에서나 겸손과 친절을 다합니다. 과부들을 멸시하지 않으며, 고아들을 그 학대하는 자들로부터 풀어줍니다.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사람에게 우쭐거림 없이 내어주고, 나그네를 보면 자기네 집으로 맞아들여 친형제처럼 반깁니다. 그들은 육체를 따라 형제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하나님 안에서 형제라 부릅니다. 그들 가운데 어느 가난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각 사람이 능력에 따라 조의를 표하며 정성껏 장례를 치러줍니다. 그들 중 누군가가 구세주의 이름 때문에 투옥되거나 곤란을 겪으면, 모두가 그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여 가능하면 그를 옥에서 나오게 합니다. 그들 속에 가난한 사람이나 궁핍한 사람이 있다면, 이삼일 동안 단식을 해서라도 궁핍한 사람의 필요한 양식을 마련해 줍니다. 그들의 주님이신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그리스도의 계명들을 신중하고 정의로우며 진중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 오 왕이시여,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법이 담긴 계명이며,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전도
공동체전도
개인전도
사역은 언제나 힘든 일이다
by Trevin Wax
2023-03-19
자기 관리와 테라피를 바라보는 방식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보여주는 재밌는 조크 영상을 최근에 봤다. 옛날: 테라피 받고 있다고? 무슨 문제 있어?현재: 테라피 안 받고 있다고? 무슨 문제 있어? 이런 농담이 아니더라도, 어쨌든 정신 건강 문제를 바라보는 방식은 상당히 달라졌다. 이러한 변화는 과학과 심리학이 인간이 갈등과 트라우마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어느 정도 밝혀낸 결과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치료 사회(therapeutic society)로 통칭되는 문화적 경향이 가져온 결과로도 볼 수 있다. 조너선 하이트와 그레그 루키아노프는 이런 경향을 유약함(“죽지 않을 만큼 고된 일은 우리를 더 약해지게 한다”)과 감정적 추론(“늘 너의 느낌을 믿어라”)이 빚어낸 “대단한 비진실(Great Untruths)”이라고 표현한다.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도 이런 변화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심지어 자기 관리(self-care)를 중시하는 문화적 변화가 이제 막 목회에 발을 들이는 사역자에게 잘못된 가정을 하도록 만드는 건 아닌지 우려할 정도이다. 지쳐서 나가떨어지기 전에 자기 관리에 신경을 쓰라며 주변에서 먼저 나서서 권고하는 수준에 이르기까지 진액을 쏟아 사역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던 게 나보다 나이 많은 세대였다. 그러나 나보다 젊은 세대는 그 반대가 아닐까 싶다. 지금 세대는 아예 다른 사람들의 입에서 힘들더라도 좀 더 자신을 바쳐서 사역하라는 소리가 나올 지경에 이르기까지, 알아서 미리미리 자기 관리에 치중하는 걸 당연하게 여긴다. 세대 연결하기종종 나는 나 자신을 “시니어 밀레니엄 세대”라고 부르곤 한다. 내가 태어난 연도가 이 인구집단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기 쪽에 속하기 때문이다. 나보다 십 년 뒤에 태어난 밀레니엄 세대는 나와 확연히 다르다. 문화 환경이 워낙 빠르게 변했기 때문이다. 인터넷과 온라인은 한 때 주변 장치(모뎀 전화 접속을 기억하는가?)를 활용해야 사용이 가능하던 기기에서 아예 삶 전체를 관통하는 연결과 소통의 중심으로 바뀌었다. 그러는 와중에 테라피와 자기 관리에 대한 추세는 특히 Z세대와 함께 가속화되었다.스트레스와 과로, 사역 압박과 갈등을 견디지 못해 죄에 빠지거나 탈진해버린, 나보다 고작해야 몇 살 더 많은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를 나는 여러 명 목격했다. 바로 그런 이유로 나는 항상 몸과 영혼의 건강을 강조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교회는 건강한 교인, 특히 건강한 목회자를 길러내 새로운 모델로 세상에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경계를 설정하고, 새로운 습관을 실행하고, 지속가능한 일과 휴식의 리듬을 찾고, 자기 몸과 마음을 이해하고, 그리고 과도한 확장이 초래하는 경고 신호를 유심히 살피는 행동은 건강한 가정과 교회를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하다. 끊임없이 효율성과 효과로 자신을 판단하고 움직임과 생산성을 중시하는 세계에서 우리는 과도함이 주는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에게는 안식일이 필요하다. 더 나은 습관이 필요하고, 영혼을 보살피기 위한 대책이 있어야 한다. 정서 건강, 안식일의 휴식, 가족과의 시간, 마음을 챙기는 기도, 그리고 조급함의 제거에 중점을 둔 최근에 나온 다양한 책들이 생각난다. 나는 그것들을 다 읽었다. 하나같이 다 좋은 책이고 기꺼이 추천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소명과 우리의 사명을 왜곡하여 인간의 유한함과 한계를 인식하지 못한 채 과로로 자기를 망치는 사람도 있지만, 동시에 자기 관리라는 선물을 자기도취, 심지어 게으름으로 왜곡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힘든 일은 그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착각에 빠질 위험이 있다. 그래서 고통스럽거나 지치게 하는 일을 만날 때면 이건 내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일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자신을 기만할 수 있다. 사역에서의 불편함다른 모든 직업과 마찬가지로 목회에도 어려움이 있다. 사람들로 가득한 교회에서 갈등과 불일치, 불편함을 경험하는 건 당연하다. 사도 바울의 사역을 보자.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일(고전 9:27), 사도로서의 수고(고전 15:10), 자기 백성을 위한 고난(골 1:24; 고후 11:24-29), 그리고 힘을 다해 분투함(골 1:29)으로 자신을 “희생하는”(고후 12:15) 사역을 말하고 있다. 그는 “나의 피를 붓는 일”(빌 2:17)이라고까지 묘사했다.리더십은 때때로 갈등을 수반한다. 그렇다고 모든 갈등이 다 안 좋은 것은 아니다. 모든 불편함이 다 트라우마가 되는 것도 아니다. 불편함이 없는 사역은 없다. 진짜 사역에는 어느 정도 불편함이 따라오는 게 당연하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완전히 혼자가 되는 것뿐이다. 사랑에는 방해가 따라온다. 마찬가지로 사역에는 일, 그것도 힘든 일이 따라온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가득하며 그 어떤 뛰어난 마음을 챙기는 앱이나 명상 수련도 타락이 가져다준 모든 악영향을 제거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너무 힘든 나머지 죄를 짓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너무 게을러서 죄를 짓기도 하지만, 두 가지 다 하나님이 주신 노동이라는 좋은 선물에 대한 타락한 인간의 반응이다. 한 가지 죄에 대한 답이 다른 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세대마다 다른 생각중년에 접어든 목회자 중에는 자기 관리, 더 건강한 습관, 그리고 지속가능한 리듬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너무 쉽게 무시함으로 스스로를 해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제 막 목회를 시작하는 젊은 사람들을 향한 나의 걱정은 전혀 다르다. 사역의 본질과 자아실현에 대한 비현실적인 기대에 매달림으로 자기를 해칠까 봐 두렵다. 자기 관리의 중요성이 떠오르는 최근 추세는 오랜 근무 시간, 고된 일, 과도한 확장, 그리고 과중한 사역의 부담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세대로 인해서 발생한 결과이다. 자신을 소진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소명에 합당하게 반응하는 당연한 길이라고 생각한 게 그 세대였다. 그런데 상황이 뒤집히면 어떻게 될까? 자기를 돌보는 노력이야말로 자기 자신뿐 아니라 주변까지 포함해서 가장 먼저 지켜야 할 의무라고 생각한다면? 그 결과, 자기를 돌보는 데에 정신이 팔려서 사역 현장에 각종 어려움이 산적해도 상관하지 않게 된다면? 자기 관리와 같은 좋은 일이 과도한 자기 집중으로 인해 왜곡되었다. 그 결과 사역이라는 큰 소명 안에서 영적 건강을 추구하는 데 필요한 하나의 요소였던 자기 관리가 아예 소명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이제 소명은 나 자신을 관리하는 것이고, 사역은 단지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이전 세대가 지나치게 열심히 일했다고 그 해결책이 다음 세대의 덜 일하기(underwork)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전 세대가 자기 관리에 소홀했다고, 그 해결책이 다음 세대의 자기도취가 될 수는 없다. (영광스러운 포부가 가져다준) 조급함을 무자비하게 제거하겠다는 욕심으로 사역 속 불편함 자체를 무자비하게 거부할 수는 없다. (사역을 고작 몇 달 한 사람이 거의 탈진 상태가 되어서 안식년이 필요하다고 할 때, 나는 “뭐? 탈진이라고? 당신은 아예 시작도 안 했어!”라고 말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그러니까 조심하자. 우리는 다음 세대가 이전 세대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사역 현장에 들어간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비판받아야 하고 수정해야 할 불건전하고 불균형한 접근 방식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전 세대가 애쓴 것들을 다음 세대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자. 원제: Ministry Is Tough: When Self-Care Becomes Self-Absorptio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사역과탈진
안식
자기관라
테라피
치료사회
거의 다 잊어버리더라도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
by Trevin Wax
2023-03-18
한 번 읽고 세세한 그림뿐 아니라 단어 하나하나까지 다 기억하는 사진 같은 기억력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다. 어쩌면 당신의 기억력은 평균치에 못 미칠 수도 있다. 지난 여름 방학 때 꼼꼼하게 읽은 소설책의 주인공 이름과 줄거리는 말할 것도 없고, 얼마 전 휴일을 맞아서 읽은 신앙 서적에서 한두 가지 요점을 빼고는 아예 생각나지 않을 수도 있다. 지난 가을 교회 소그룹에서 읽었던 평신도를 위한 신학 과정에서 읽었던 책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차피 읽어도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데, 굳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것 말고 다른 활동을 통해서 시간을 더 효율 있게 활용하는 게 낫지 않을까? 1퍼센트의 능력1981년에 젊은 목사 존 파이퍼는 매주 수많은 시간을 TV 시청에 보내는 아이들을 보면서 고작해야 몇십 분에 지나지 않는 주일학교 성경공부 시간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며 “양적 절망”을 느끼는 주일학교 교사들을 격려하기 위해 노력했다. 파이퍼는 거룩한 만남의 가치를 간과하지 말라고 격려했다. 그 만남 속에 숨은 “단지 시간의 양으로 측량할 수 없는 순간”과 “지속적이고 변화시키는 통찰의 능력”을 바라보라는 촉구였다. 파이퍼는 독서를 하나의 예로 들었다. “나는 읽은 책의 99퍼센트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책 전체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거지요.” 그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인생을 바꾸는 것은 책 전체가 아니라 문장입니다. …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내가 처한 현실이나 진실을 새롭게 보도록 하는 통찰력, 어떤 강력한 도전을 받는 것, 또는 사라지지 않던 오랜 딜레마에 대한 어떤 해결책입니다. 그리고 통찰력, 도전, 해결 같은 대부분의 것을 만나는 데에는 아주 짧고 작은 공간만으로 충분합니다. 나를 일깨우는 문단 하나 또는 문장 하나, 우리는 그것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평생 그 영향을 받습니다. 읽은 모든 것을 다 기억하는 게 핵심이 아니다. 나를 통찰력으로 놀라게 하는, 잘 짜인 한 문장은 나머지 99퍼센트를 얼마든지 고생해서 읽도록 만들 충분한 가치를 가진 축복이라는 게 파이퍼의 말이다. 하지만 기억할 점이 있다. 비록 인생을 바꾸는 새로운 통찰력을 주는 문장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나머지 99퍼센트의 독서가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99퍼센트의 능력죽어라 준비한 설교의 요점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교인을 만날 때면 목사는 실망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요점을 기억하도록 하는 게 설교의 목표인가? 교회를 나서는 교인이 하나의 통찰이나 문장 또는 예화만 기억해도 의미 있는 설교가 아닐까? 더군다나 교인이 기억하지 못하는 설교는 그들의 영적 삶을 구성하는 데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해야 할까? 물론 설교 속에 “잊을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목회자가 본문을 다루는 방식, 즉 그 의미를 주의 깊게 설명하고, 좋은 예화로 장식하고, 더 넓은 기독교 가르침의 세계에 비추어 보고, 하나님과의 만남을 향해 나아가도록 설교를 다듬는 모든 과정은 보이지 않는 형태로 교인들의 영적 생활을 구성한다. 기억하지 못하는 책도 마찬가지이다. 오스틴 카티는 이렇게 말한다. “뇌에 단지 정보를 업로드하는 것이 독서의 주된 이유가 아니다.” 그러면서 카티는 휴대전화의 사진 앱에 있는 필터라는 훌륭한 비유를 들었다. 구형 전화기에는 이미지만 있었다. 이미지를 볼 수 있는 다른 렌즈는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양한 필터를 사용해서 풍부함을 끌어내는 여러 방식으로 이미지를 볼 수 있다. 카티의 말이다. 요점은 이것이다. 독서의 핵심 목적은 읽은 내용을 의식적으로 기억하는 게 아니라, 현실을 바라보는 렌즈를 꾸준히 다듬는 것이다. 읽은 것의 90퍼센트를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읽은 내용은 우리 속에 들어온다.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내 속에서 자리를 잡았는지도 의식하지 못하는 깊이로 말이다. 책은 그렇게 우리의 필터를 강화한다. 내가 인식하든 하지 못하든 관계없다.독서가 우리의 비전과 이해력을 어떻게 확장하는지, C. S. 루이스도 비슷한 말을 했다. 평생 책을 사랑하며 읽은 사람이라도 작가 덕분에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크게 확장되었는지에 관해서 제대로 깨닫지 못한다. … 자기 자신으로만 만족하는 사람, 따라서 항상 자기 잠재력 아래에서 사는 사람은 감옥에 갇힌 것과 다르지 않다. 나의 눈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내게는 다른 사람, 저자의 눈이 필요하다.책을 읽는 이유읽은 내용을 다 기억하는 게 핵심이 아니다. 물론 통찰력으로 나를 일깨우고 내 삶을 변화시킬 한 문장을 기대하며 책을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눈에 띄지 않는 다른 모든 단락과 장을 읽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 모든 내용은 비록 내가 100퍼센트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여전히 나의 생각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독서가 주는 효과는 단지 세세하게 기억하는 내용 또는 밑줄을 그은 문장을 훨씬 뛰어넘는다. 독서는 나의 필터를 강화한다. 내가 인식할 수 없는 방식으로 마음에 울려 퍼지는 지식과 통찰력을, 그리고 독서가 아니고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지혜와 폭을 제공한다. 우리가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 책이라 해도 읽었다는 게 중요한 이유이다. 원제: Why Read If You Forget Most Everything Anywa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독서
책읽기
설교
변혁, 세계관의 목표
기독교 세계관의 적용을 위한 세 가지 제안 1: 변혁
by 김경호
2023-03-17
기독교 세계관 운동 2.0 위하여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SIEW)과 함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섭니다. 기독교 세계관이 더욱 적합한 이론과 적용이 되기 위해서는 변혁transformations, 규범norms, 역학dynamics에 대한 보완이 필요합니다. 변혁이 적용의 목표라면, 이 목표를 이루는 수단이 규범과 역학입니다. 여기서 규범이 어떤 옳고 그름에 대한 이론적 판단이라면, 역학은 실천에 반대하는 힘의 작용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실천’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규범적 판단이 아니라 역학을 이겨낼 때입니다. 이 세 가지 요소, 변혁과 규범과 역학이 기독교 세계관의 이론과 적용에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 세 가지의 요소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요소, 세계관의 목표로서의 변혁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변혁적 세계관의 다양한 유형들 변혁은 세계관 적용의 목표입니다. 변혁을 위한 세계관은 리차드 니버Richard Niebuhr의 ‘그리스도-문화 유형론’에서 구체적으로 찾을 수 있습니다. 니버는 다섯 가지 유형을 제안합니다: “문화와 대립하는 그리스도”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 “문화 위의 그리스도” “문화와 역설적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 “문화를 변혁하는 그리스도”입니다. 조금 더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문화와 대립하는 그리스도”는 문화와 그리스도를 서로 대립하는 관계로 봅니다. 이 입장을 잘 표현하는 말이 있습니다: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냐?” 테르툴리아누스Tertulian가 한 말입니다.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는 근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취한 입장을 들 수 있습니다. “문화 위의 그리스도”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가 교회를 위로, 자연을 아래로 도식화한 이원론적 위계질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자연보다 교회가 우선입니다. “문화와 역설적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는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쇠렌 키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처럼, 역설paradox을 강조하는 입장입니다. 마지막으로 “문화를 변혁하는 그리스도”는 구조와 방향으로 구분하여 악은 존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방향이 왜곡된 것이라는 입장입니다. 이 입장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칼뱅John Calvin 등이 있습니다. 니버는 이 다섯 가지 유형 가운데 어느 하나를 정답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강조합니다. 변혁적 세계관의 다양한 견해들니버의 다섯 가지 유형론 이후 다시 세 가지 형태의 다양한 견해들이 등장합니다. 첫째, 신-재세례파 전통에서,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와 존 하워드 요더John Howard Yoder는 자신들의 대안적 입장을 교회론의 형태로 제시합니다. 하우어워스는 문화에 대한 태도를 세 가지, 행동주의 교회-회심주의 교회-고백주의로 구분합니다. 그리고 그 특징을 각각 설명합니다. 행동주의 교회는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다가 종교로 치장된 자유주의가 되었습니다. 회심주의 교회는 오직 내적 변화만을 추구하다가 역시 종교로 치장된 보수주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백 교회는 십자가의 교회가 되어 타협하지 않는 증언으로 세상과 대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우어워스는 이 세 번째 유형만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같은 진영의 요더의 목표는 옛 질서의 무기로 그 목적을 이루려 하지 않는 새 질서, 즉 비폭력이 내포한 고도의 정치적 의미를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요더는 예수님을 통한 새 질서의 규범에 근거한, 교회가 가지는 질적 차이성을 대안으로 제시합니다. 둘째, 역설형 유형에서 데이비드 반드루넨David VanDrunen은 두 나라 국민으로 살기를 대안으로 제시합니다. 그가 제안하는 대안은 ‘자연법’과 ‘두 나라 국민’입니다. 여기서 반드루넨은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를 비판합니다. 두 나라가 아우구스티누스의 ‘하나님의 도성’과 같이 개혁신학 전통에서 규범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카이퍼가 등장하면서 그 연속성이 끊어졌고 특이한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그 특이한 형태란 기존의 ‘자연법과 두 나라’에서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으로 대체된 것입니다. 반드루넨은 이에 반대하여 자연법과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를 제안합니다. 반드루넨이 말하는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란 구체적으로 노아 언약에 근거한 ‘일반나라’와 아브라함 언약에 근거한 ‘구속의 나라’ 안에 사는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생활과 같은 삶, 즉 이방인, 나그네, 거류민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 삶은 이런 것입니다. “그 두 나라는 고유한 독특성을 지니며 이 세상에서 별개의 목적에 기여하지만, 두 나라 모두 주권자 하나님의 윤리적 권위 아래서 움직인다. 하나님은 두 나라 모두에서 자신을 섬기도록 신자에게 명령하신다.” 셋째, 포스트 모던 유형에서 리차드 미들톤J. Richard Middleton과 브라이언 왈쉬Brian J. Walsh는 포스트모던적 대안을 제시합니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변혁적 세계관이 억압적 이데올로기가 되지 않기 위한 다섯 가지 대안입니다. 하나. 세계관이 전체 체계로 간주될 때 억압적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습니다. 둘. 세계관이 보편적 최종성을 대표할 때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습니다. 셋. 세계관이 성경의 역동성을 잃어버릴 때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역동성이란 방향, 방향 상실, 재-방향입니다. 구체적으로, 방향 상실 없이 하나의 방향으로만 계속 가고 있다면 성경을 잘못 읽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방향 상실을 인정하고 방향을 다시 재설정할 때, 즉 성경의 역동성을 인정할 때 이데올로기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넷. 세계관은 변화하는 문화적 맥락에 부적절하거나 비일관적일 때 이데올로기가 됩니다. 다섯. 세계관은 자신의 공동체가 폐쇄적이며 방어적일 경우에 이데올로기가 됩니다. 변혁적 세계관의 대안 제시 지금까지 경쟁하는 변혁의 의미들에 대한 대안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기준에서 변혁의 의미를 정의해야 할까요? 카슨D. A. Carson은 변혁을 위한 중요한 지침을 제공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문화의 관계를 생각할 때, 구속사의 중요한 전환점—창조, 타락, 구속—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전환점을 지침으로 매우 다른 유형들을 고안해 내는 위험을 피할 수 있고, 다른 맥락 안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하나의 복합적인 실재를 제시할 수 있습니다. 카슨은 가장 중요한 단서를 “성경적인 구속사의 전환점들을 통합하려는 입장이 깊이 있는 기독교 입장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합니다. 따라서 나는 구속사의 전환점—창조, 타락, 구속—을 통합하는 모범적인 연구 사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알버트 월터스Albert Wolters의 기독교 세계관, 야곱 끌라베이크Jacob Klapwijk의 기독교 철학, 고든 스파이크만Gordon Spykman의 기독교 신학입니다. 월터스는 기독교 세계관의 포괄성을 회복하기 위해 구조와 방향의 차원에서 이원론의 문제를 해결합니다. 월터스는 이원론이 두 방향을 두 구조로 환원시킨 결과이기 때문에, 창조를 구조로, 타락과 구속을 창조의 구조 위에서 살아가는 두 방향으로 구분합니다. 따라서 개혁이란 외적 갱신을 의미하는 성별이 아니라 내적 갱신을 의미하는 성화이고, 전면적으로 제거하는 혁명이 아니라 점진적 갱신이라고 정의합니다. 왜냐하면 창조구조는 변함없기 때문입니다. 이 창조구조의 항존성Perseverance of the structure of creation으로 인해 개혁은 구조로 인해 ‘혁명’을 반대하고, 방향으로 인해 지속적인 개혁을 추진하기 때문에 ‘보수주의’를 반대합니다. 끌라베이크도 창조, 타락, 구속을 중심으로 비판적 원용critical appropriation으로서의 변혁 철학transformation in philosophy을 추구합니다. 클라베이크는 철학과 문화의 관계에서, 반정립(대립)과 종합(연결) 사이에 변혁(비판적 원용)을 제안합니다. 이는 교부들이 사용했던 방식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면서 이 과정에 ‘약탈’이 일어났습니다. 이 약탈한 금과 은은 두 가지 용도로 사용됩니다. 하나는 무비판적으로 금송아지 우상숭배에 사용했고, 다른 하나는 비판적으로 하나님을 위한 예배와 성막 제작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끌라베이크는 예배와 성막 제작을 위한 사용이 바로 올바른 사용이며, 이를 비판적 원용으로서의 변혁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무비판적 방식으로 변혁을 추구할 경우에 그 반대인 역-변혁inverse transformation이 일어납니다. 역-변혁은 외면적 차원에서만 무비판적으로 기독교화가 일어날 때 생기는 현상입니다. 외면이 아무리 기독교의 용어, 모양을 가졌다고 해도 내용으로는 세속화된 개념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스파이크만도 창조, 타락, 구속, 완성이라는 도식을 따라 기독교 신학을 추구합니다. 스파이크만은 창조를 형성formation, 타락을 변형deformation, 구속을 재형성reformation, 그리고 완성을 회복restoration이라고 표현합니다. 기독교 신학은 창조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창조를 통해 질서 있는 우주를 존재케 하셨습니다. 창조질서는 그리스도인이나 비-그리스도인 모두에게 통용되는 진리입니다. 인간은 종교적 중심인 마음을 가진 전인입니다. 또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이 형상 개념은 관계적, 역동적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 창조주를 드러내거나 형상화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을 수행하는 방식입니다. 타락은 창조의 변형입니다. 죄는 본래 창조에 속한 것(실체)이 아니고, 선의 결여이며, 분열입니다. 타락 이후 구조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방향에 급격하고 완전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제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원죄는 전 환경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하나님은 인류의 전적 부패의 보편성 가운데서도(반정립) 일반은총을 통해 창조구조를 유지하셨습니다(일반은총). 구원은 재형성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오심으로 교회가 탄생하고 교회의 안과 밖에서 구속과 관련된 사역이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는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열매가, 세상 안에는 억제와 보존으로서의 일반은총이 작동하게 됩니다. 교회는 세상 가운데 증인, 모델, 대사로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마지막 완성은 최종적 회복입니다. 스파이크만은 대표적으로 무천년설, 후천년설, 역사적 전천년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소개하며, 이 가운데 자신의 입장을 무천년설이라고 밝힙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마지막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깨어있음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변혁은 기독교 세계관을 실천하는 가장 중요한 모델이자 대안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양한 대안들도 존중해야 하며, 무엇보다 이론보다는 실천이 우선이어야 합니다!
세계관
기독교세계관
변혁적세계관
그리스도와문화
게으름과 한계는 다르다
by Tim Shorey
2023-03-16
평상시 입는 땀복과 티셔츠를 입은 나는 체육관에 가는 대신 최대한 편한 자세로 안락의자에 누워서 아침 낮잠을 즐겼다. 그리고 아내 게일린에게 말했다. “오늘은 특별히 게으름 피우는 날이야.”나에 대해서 스스로 판사와 배심원 역할을 한 나는 안락의자, 땀복, 체육관에 가지 않는 것, 그러면서 활동적인 아내와 달리 활동하지 않는 내 삶을 게으름이라고 해석했다.그러나 이런 양심의 책망을 듣자마자, 성령님이 나를 위로하셨다. 그리고 “게으르다”라는 양심의 목소리를 향해서 “그렇지 않아!”라며 반박할 수 있도록 하셨다. 내가 나 자신에게 내린 판단은 사실 틀렸다. 나는 게으른 게 아니라 한계를 만난 것이다. 그 차이가 중요하다. 나에 관한 진실겉으로만 봐서는 아픈 사람 같지 않지만, 나는 사실 이 세상에서 살날이 그리 길지 않은, 4기 암에 걸린 예순네 살 노인이다. 내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제대로 말하는 의사는 없다. 그러나 그들이 암시하는 예후는 하나 같이 다 “오 년 미만”이며, 실상은 훨씬 더 짧을 수도 있다. 내가 걸린 암은 치료할 수 없으며 최선의 희망은 일시적이더라도 최대한 느리게 퍼지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 아버지께서 개입하시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다.)따라서 게으름에 대한 나의 자기 평가는 암과 항암 치료로 인해 손상된 몸으로 발버둥을 치는 남자라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겉보기에는 건강해 보여도, 실상은 몹시 아파서 침대에서 일어나기도 쉽지 않았고, 체육관에 가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겉모습이나 이런저런 정황과는 달리, 그날이 내게는 결코 게으른 날이 아니었다. 한계에 부딪힌 날이었다. 게으른 것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았다.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는데도 안 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할 수 없어서 못 한 것이다. 전자는 게으름이지만, 후자는 한계이다. 그 차이를 바로 알아야 정죄하는 비난(나 자신 또는 다른 사람으로부터)과 현명하고도 건강한 자기 인식을 제대로 분별할 수 있다. 왜 중요한가?“한계”에 부딪힌다는 것은 나름의 괴로움이 있지만 죄는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세상과 항상 연결되어 있는 요즘 같은 세상에서,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는 것을 게으름이라고,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아예 죄라고까지 느끼기 쉽다. 그러나 게으름과 한계에 부딪히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게으름은 성경이 정죄하는 분명한 죄이지만(예, 잠 18:9; 21:25), 한계와 유한함에 대한 인식은 도리어 지혜로 칭송받는다(예, 시 90:1-12). 게으름은 의무를 게을리하는 것이고, 할 일을 하지 않겠다는 교만이다. 그러나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게으름과 한계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면,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제대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나는 어쩌면 암보다 더 나쁜 저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불필요한 수치심과 끊임없는 죄책감에 직면할 것이다. 꼭 암이 아니더라도 몸을 갉아 먹는 만성 질병에 시달리는 모든 환자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자신을 현실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부정확한 자기 비난은 영혼의 파멸이라는 잘못된 길을 이끈다. 실직은 매일 아침 출근하지 않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신생아 간호는 몇 시간 동안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편두통이나 불면증과의 싸움은 다른 사람이 바쁠 때 당신은 잠을 잔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이 모두는 다 죄의 문제가 아니다. 한계일 뿐이다. 두 번째 적용은 삶 전체를 위한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서 받을 수 있는 첫인상을 적극적으로 거부함으로써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최대한 존중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아내가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종종거리는 사이에 나는 차 안에서 편안히 앉아 있는 모습을 누군가 본다면, 그 사람은 내 아내가 아주 게으른 남자와 결혼했다고 쉽게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틀렸다. 아무리 아닌 것처럼 보이더라도, 나는 아픈 사람이다.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말고 이해하자우리는 하나 같이 첫인상으로 성급하게 타인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항상 정확하게 판단하시는 하나님과 달리 우리는 겉모습으로 틀린 판단을 한다(삼상 16:7; 잠 31:30; 사 11:3-4; 요 7:24; 약 2:1-13; 4:11-12, 벧전 3:3-4). 그 결과 인간관계, 결혼, 양육, 교회 생활, 다문화 상호작용,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까지 죽이고 있다.그러나 더 좋은 방법이 있다. 계급, 문화, 피부색, 조건 또는 기타 다양한 차이와 관계없이 사람을 구분하는 외모로 섣부르게 판단하지 말라. 대신 더 깊이 알고 이해하기 위한 선택을 하라. 진리와 이해심에 바탕을 두고 나 자신뿐 아니라 타인을 판단하자.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거의 무한한 수준의 용납하심을 체험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안락의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또는 다른 고난이나 불의함 또는 사라지지 않는 고통에 갇힌 사람들)은 암이 아니라 오히려 수도 없이 반복되는 비난 속에서 죽을지도 모른다. 진짜 정죄 받아야 할 대상은 우리 스스로 내리는 자기비판이다.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누구에 대해서 말하는지도 알지 못하면서 마치 스스로를 모든 사람의 판사라도 되는 양 타인을 향한 은밀한 비난을 멈추지 않는 누군가이다. 원제: Know the Difference Between Laziness and Limitation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게으름
나태
한계
성도들의 귀감으로 세운 충청권 선교의 교두보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공주제일교회
by 이종전 · 장명근
2023-03-15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대한 강토에 선 첫 세대 교회들을 찾아 떠납니다. 그 이야기들에서 우리 신앙의 근원과 원형을 찾아보려 합니다.충청권 선교는 상대적으로 늦었다. 선교 거점을 공주에 마련하기까지는 사실상 긴 시간이 걸렸다. 이 지역 선교를 위한 시도는 일찍부터 있었지만, 개종한 이들은 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한 채 있었고, 이따금 찾아오는 권서인이나 선교사와의 만남을 통해서 그들의 신앙을 확인하는 정도였다. 철저하게 은둔하기를 자처했던 조선의 역사가 그랬듯이, 지방의 작은 고을을 형성하고 살면서 양반이기를 자처하고 있던 공주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그곳에 교회가 세워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특별히 이 고을 사람들에게 선교사들이 다가가고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강권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신앙을 고백하게 했다. 실제로 공주에 복음이 들어가서 자리를 잡기까지는 10여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는 곧 그만큼 오랜 시간 복음 전도를 위한 다양한 시도와 노력이 있었다는 의미이다. 공주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시도는 이미 1892년부터 있었다. 1893년 윌리엄 벤튼 스크랜턴(William Benton Scranton, 시란돈) 선교사는 수원과 공주를 중부권 선교의 거점으로 만들기 원했고, 그 일을 위해서 유치겸 전도사를 공주에 보내 선교를 위한 교두보를 만들 수 있을지 가능성을 확인하도록 했다. 하지만 여의치 못했고, 1896년 스크랜턴 자신이 공주지역의 선교책임자로 파견받았다. 그리고 1897년부터 두 차례 공주를 직접 방문해서 선교 거점을 확보하기 위한 사전 조사를 했다. 그 과정에서 1897년 5월에는 어머니 메리 플레처 스크랜턴(Mary Fletcher Scranton) 선교사와 함께 공주를 순회하기도 했다. 이때까지도 아직 완전한 거점이나 공동체를 확보하지 못했다. 1898년 공주지역 담당이 스크랜턴에서 스웨어러(Wilbur C. Swearer, 서원보) 선교사로 바뀌었다. 스웨어러 선교사는 보임되자마자 1898년 가을부터 공주지역을 두 차례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거점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했다. 그렇게 수고하기를 몇 년의 시간이 더 흘러서야 스웨어러는 1902년 가을 공주 봉황동에 있는 초가 한 채를 매입할 수 있었다. 이것이 사실상 오늘의 공주제일교회의 출발이다. 이렇게 공주에 선교부가 터를 잡기까지 꼭 10년이 걸린 셈이다.스웨어러 선교사는 그 초가를 마련함과 동시에 그곳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김동현 전도사를 파송했다. 그는 1895년 경기도 시흥의 무지내교회를 세우는 출발점이었던 인물이며, 그 이후에 권사로서 수원의 종로교회가 출발하는 시점에서도 역할을 했다. 그러한 점에서 특별하게 쓰임을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스웨어러 선교사는 그를 신뢰하여 공주 선교를 위한 교두보를 만들라는 특명을 주어 파송한 것이다. 하지만 김동현은 이곳 공주에서는 사실상 실패했다. 과거 수원의 종로교회를 세우는 과정에서 그는 투옥당했고, 스웨어러와 스크랜턴, 그리고 외교관 신분인 알렌의 구명 노력으로 겨우 풀려한 적이 이었다. 그 이후에 그는 어떤 트라우마가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할 만큼 사실상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적극적이지 못했던 것 같다.마침 1902년 원산 선교지가 정책적으로 북감리교회 선교부 관할에서 남감리교회 관할로 이관됨에 따라서 1903년 원산에서 활동하던 의료 선교사 맥길(William B. Mcgill, 맥우원)이 원산에서 철수하면서 공주로 파송되어 가세하게 되었다. 그 이듬해인 1904년에는 샤프(Robert Arther Sharp) 선교사 부부가 가세하여 명선학교(영명학교)를 설립하였다. 1906년에는 윌리엄(Frank Earl Cranton William, 우리암)이 공주에 와서 명맥이 끊어진 명선학교를 다시 세워서 오늘의 영명학교가 있게 했다. 그밖에 테일러(C. Taylor), 반 버스커크(James Dale Van Buskirk) 등이 공주에 파송되어 교회를 중심으로 사역했다. 이렇게 공주는 내륙중심의 선교 거점도시가 되었고, 그 중심에 공주제일교회가 있다.충청 내륙선교의 중심 공주제일교회는 이 지역의 모교회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많은 신앙의 유산을 남겼다. 1914년 통계를 보면 등록 교인 총수가 833명에 이르는데, 얼마나 폭발적인 성장 과정이 있었는지 짐작하게 한다. 그만큼 교회의 영향력이 지역사회에 크게 미쳤다는 것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성장이 있기까지 전해오는 귀한 이야기가 오늘에까지 귀감이 되는 것은 지나칠 수 없는 신앙의 유산이다. 그 이야기는 공유할수록 더 큰 은혜를 확인하게 되는 것이기에 여기에 소개하여 그 은혜를 이어가고자 한다. 먼저 “협산자”(挾傘者, 우산을 옆구리에 낀 사람)로 알려진, 그러나 그의 이름은 알 수 없는 한 사람에 의해서 세워진 초기(두 번째) 예배당과 관련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1907년 평양에서부터 시작된 대부흥 운동은 한강 이남으로 전해지는데, 여기 공주에도 그 부흥 운동의 여파가 이르렀을 때, 비록 초기에 전도가 되지 않아 많은 어려움이 있기는 했지만, 폭발적인 성장으로 이어졌다. 갑작스러운 성장은 예배당이 비좁아지는 문제를 동반하게 되었다. 부흥 운동과 함께 공주에 자리 잡게 되는 의료선교팀의 활동으로, 공주제일교회로 더욱 많은 사람이 모여들게 되었다. 따라서 비좁은 예배당을 시급히 해결해야 했지만, 신자들이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당시 일반인의 생활 수준이라는 게 정말 형편없었던 것은 물론이다. 그렇기에 공주제일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선교사들은 본국 선교부에 급히 예배당을 지어야 한다고 보고하고 예산 지원을 요청했다.그러나 당시 본국의 해외선교부도 세계 각처에서 들어오는 선교비 요청에 충분히 응대하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예배당 건축을 위한 예산확보가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공주제일교회가 성장하고 있다는 소식은 기뻤다. 그때 예산확보 때문에 고민하고 있던 감독을 찾아온 한 신사가 있었다. 비가 내리는 날이었는데, 우산을 옆구리에 끼고 나타난 그 신사에게 감독은 대화 중에 자연스럽게 조선의 공주라고 하는 곳에 당장 예배당이 필요한데도 건축비를 보내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마음을 나누었다. 무심히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신사는 건축비에 충분한 액수의 돈을 감독에게 내놓고 홀연히 떠났다. 그가 거액을 내놓았을 때 감독은 그의 이름을 물었지만, 그가 감독에게 남긴 말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법이지요!”였다. 그렇게 이름도 모르고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전해준 돈으로 지은 예배당이 1909년 5월에 준공된 ㄱ자 벽돌 예배당이다. 당장 300명 넘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당시 공주지역에서 가장 큰 양옥이기도 했다.무명의 협산자가 전해준 돈으로 지은 예배당은 공주를 거점으로 하는 선교의 상징과 같은 건물이 되었다. 이렇게 1909년에 지은 공주제일교회 예배당은 이름을 모르는 한 신사가 남긴 돈으로 지을 수 있었는데, 선교부로부터 돈만 전해진 것이 아니라 헌금한 사연까지 전해짐으로써 공주제일교회는 이 예배당을 “협산자 예배당”이라고 불렀다. 낯선 이름이기는 하지만 예배당이 지어지기까지의 사연을 알고 나면 그렇게 불러야 했던 것에 충분히 공감하게 된다. 또 하나는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등록문화재(제472호)로 지정된 구(舊) 예배당이다. 1931년에 벽돌로 지은 이 예배당은 공주의 상징이라고 할 만큼 고풍스러운 자태와 함께 공주제일교회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협산자 예배당이 지어진 다음에도 폭발적인 성장은 이어졌고, 이내 새로운 예배당이 필요했다. 하지만 일제의 박해는 공주라고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일제의 박해는 교회, 신앙, 나아가 학교와 선교사의 활동까지 크게 위축시켰다. 그렇지만 공주에서도 저항운동이 일어났고, 영명학교와 제일교회를 중심으로 한 항거가 1919년 4월 1일 공주 장날을 기해서 폭발했다. 담임 목사를 비롯한 제일교회 신자들과 영명학교 교사들과 학생들 모두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비폭력 저항운동을 전개했다.따라서 1920년대는 상대적으로 교회의 양적인 성장보다는 교육과 의료사업의 영향이 크게 미치면서 지역사회에 기독교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깊이 심어 주었다. 주로 선교사들이 세운 진료 기관과 영유아들을 위한 보육시설, 영양실조에서 비롯된 각종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한 영양식 보급 및 식량문제 해결을 위한 농업기술 보급 활동을 통해서, 당장 생존과 건강을 위해서 필요한 것을 해결해 갈 수 있도록 하는 돕는 일을 한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1931년에 붉은 벽돌 예배당을 새로이 봉헌했다. 이 예배당을 지은 이후 일제의 한반도 강압 통치가 강화되기 시작했으며, 1936년부터는 예배의 자유까지도 침해받기 시작했다. 나아가 배교를 강요당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고 선교사들이 강제 추방당하면서 교회에 따라서는 폐교당하기도 하고, 예배 자체를 하지 못하게 되는 교회도 생겼다. 예배를 허락받은 경우에도 국민의례를 빙자한 배교 의식이 전제되기도 했다. 1931년 준공된 이 예배당도 1941년부터 해방을 맞을 때까지는 폐쇄되어 사용할 수 없었다.그렇게 어려운 시대 상황에서도 이 예배당은 자력으로, 공주제일교회 성도들의 손으로 건축되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예배당의 크기나 자재를 고려하면 상당한 예산이 필요했지만, 순전히 성도들의 헌금과 헌물로 충당한 것이다. 당시 그들인 드린 헌물 곧 부동산은 2011년 새로운 예배당을 건축할 때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 중심에 당시 양두현 장로와 부인 지누두 권사가 있다. 공주제일교회에는 특별한 기념비가 몇 있다. 목회자나 순교자 같은 이들의 것이 일반적인데, 이 교회에는 특별히 양두현 장로와 부인인 지누두 권사를 기리는 기념비가 크게 자리 잡고 있다. 1931년 예배당을 건축하기에 앞서 이미 새로운 예배당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양 장로 부부는 논 1만 8,282평과 밭 2,681평을 건축을 위한 헌물로 드렸다. 당시에 논의 가치는 어떤 재산보다 컸다. 그들이 바친 논은 100마지기에 이르는 땅이었고, 밭 역시도 보통 사람이라면 쉽게 내놓을 수 없는 큰 재산이었다. 새로운 예배당을 짓고서 이 교회 성도들은 양 장로 부부의 섬김을 기리기 위해서 1931년 5월 기념비를 예배당 마당에 세웠다.양 장로 부부의 이러한 섬김은 그 후 이 교회의 귀감이 되어 후배 신자들 역시 큰 부동산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마치 전통처럼 이어감으로써 교회가 감당해야 할 일들을 수행하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했다. 1931년 황하명 성도가 별세하면서 논 10마지기, 홍누두 성도 밭 7,665평과 논 8,216평, 대지 678평, 임야 10,000여 평을 드렸다. 이렇게 드려진 부동산은 2011년 지금 사용하는 새로운 예배당을 건축할 때 그 일부를 매각해서 20억 원을 마련하여 비용으로 사용함으로써 80년이나 지난 후손들에게까지 그 혜택을 주었다. 따라서 이 교회는 새로운 예배당을 마련하면서 홍누두 성도를 기념하는 비석도 세워 선배의 신앙을 기억하게 했다.일제 말기에 폐쇄되어 사용하지 못했던 이 예배당은 1945년 해방과 함께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나, 이번에는 1950년 6.25사변을 겪으면서 크게 파괴되는 피해를 보고 말았다. 1950년 8월 전쟁 중에 폭격을 맞아 예배당이 반지하만 남고 사실상 파괴되었다. 인민군은 교회만큼 주둔하기 좋은 건물이 없었기에 예배당을 숙소와 보급품(무기) 창고로 사용했고, 그 때문에 미군이 반격하는 과정에서는 다시 폭격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처참하게 파괴된 예배당은 전쟁이 끝난 뒤인 1956년에 증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할 수 있는 대로 옛 모습을 온전하게 복원하기 위해서 남겨진 것은 그대로 살려내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때 건축 자재와 복원을 위해서 미군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복원을 위한 자재를 조달하기 위해서 협산자 예배당을 헐어서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은 너무나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 후 1979년 예배당이 비좁아서 다시 한번 증축했다. 이 과정에서 이 예배당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프로테스탄트교회 예배당에 스테인드글라스를 설치했기 때문이다. 이남규 작가의 작품으로 삼위일체 신앙을 형상화한 스테인드글라스이며, 유리 벽돌처럼 하나씩 찍어내어 만드는 공법을 사용한 작품이다. 예술성과 종교 문화적인 가치가 높게 평가되는 작품으로써 이 예배당의 특별함을 더하게 해주는 것이 되었다. 충청권 선교 교두보로써 공주제일교회는 일찍 설립된 만큼 이 교회를 통해서 성장하거나 거쳐 간 교계의 지도자와 정치, 교육, 의료, 문화계의 많은 지도자가 있다. 복음 전도의 교두보이자 다양한 영역의 그리스도인 지도자를 배출한 산실이었던 이 교회의 무게감이 더 크게 느껴진다.공주제일교회 기독교박물관에서 촬영한 영상도 보실 수 있습니다.
공주제일교회
충청권선교
공주시
스크랜턴
협산자예배당
등록문화재
이남규
스테인드글라스
제4차 로잔대회 소식지 창간호
한국로잔위원회
by 한국로잔위원회
2023-03-15
제4차 로잔대회 소식지 창간호 @media only screen and (max-width:640px) {.stb-container {}.stb-left-cell,.stb-right-cell {max-width: 100% !important;width: 100% !important;box-sizing: border-box;}.stb-image-box td {text-align: center;}.stb-image-box td img {width: 100%;}.stb-block {width: 100%!important;}table.stb-cell {width: 100%!important;}.stb-cell td,.stb-left-cell td,.stb-right-cell td {width: 100%!important;}img.stb-justify {width: 100%!important;}}.stb-left-cell p,.stb-right-cell p {margin: 0!important;}.stb-container table.munged {width: 100% !important; table-layout: auto !important; } .stb-container td.munged {width: 100% !important; white-space: normal !important;} 전체 내용 보기제4차 로잔대회 소식지창간호로잔운동은 다양한 지역, 다양한 주제, 다양한 연령의 지도자들이 복음의 진보를 위해 함께 연대하고, 기도하며, 일할 수 있도록 연결하는 특별한 소명을 완수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인사드립니다 2024년 9월, 송도 컨벤시아에서 열리는 제4차 로잔대회는 세계 복음화를 위해 아시아 교회와 한국 교회가 공동으로 섬기는 축복의 자리입니다. 한국 교회가 로잔운동을 보다 깊이 이해하고 대회 준비 상황을 공유할 수 있도록 정규 소식지를 발행하게 되었습니다. 모쪼록 이 소식지를 통해 세계 교회의 다양한 선교 이슈들과 2024년 제4차 로잔대회 준비 소식이 나누어지며, 우리 모두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 되기를 소망합니다. 한국 교회의 기도가 모아져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길 기대합니다. 로잔대회 월간 소식지를 읽으실 때, 이번 로잔대회를 통해 세계 교회의 형제자매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임을 고백하고 감사하는 시간이 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세계 교회가 새로운 시대적 소명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헌신하는 역사적인 시간이 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제4차 로잔대회 공동대회장, 한국로잔위원회 의장 | 이재훈 목사 저는 2022년 12월 선한목자교회의 담임목사직을 내려놓고, 이제는 ‘물 떠온 하인’의 심정으로 제4차 로잔대회 한국준비위원회 준비위원장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섬기고 있습니다. 한국준비위원회는 앞으로 한국 교회가 연합하여 제4차 로잔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로잔대회의 많은 기도제목과 중요한 내용을 담아 월간 소식지로 한국 교회와 성도님들을 섬길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제4차 로잔대회를 준비하고 치르는 가운데 하나님의 영적 부흥을 경험하고 이 부흥을 세계 교회에 흘려보내길 기도합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을 위해 한국 교회 모든 목회자들과 성도님들께서도 중보기도와 응원으로 대회를 섬기는 한국준비위원회와 동행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우리 모두가 앞으로의 준비 과정과 2024년 제4차 로잔대회를 통해, 한국 교회와 세계 교회를 회복시키시고 세계 선교의 완성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함께 체험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제4차 로잔대회 한국준비위원회 위원장 | 유기성 목사 로잔운동 소개 세계적인 복음 전도자였던 빌리 그레이엄 목사와 존 스토트 목사가 주축이 되어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진행된 대회가 시초가 되었다. 이 대회는 전 세계 모든 지역에 예수 그리스도와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참여하면서 운동으로 확장되어 오늘날까지 이르렀다. 로잔운동은 “온 교회가 온전한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자”는 문장으로 축약될 수 있는데, 이를 위해 전 세계의 영향력 있는 사람들과 아이디어들을 연결하는 것을 핵심 사역 방향으로 삼고 있다. 1974년(스위스 로잔), 1989년(필리핀 마닐라), 2010년(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 이어 2024년(한국, 송도)에 50주년 기념 제4차 대회가 열린다. 한국로잔위원회 목회자 콘퍼런스 : 대구 경북 지역에서는 2022년 5월 30일(대구동신교회, 200여 명 참석)에, 부산, 울산, 경산 지역에서는 2022년 9월 22일(수영로교회, 200여 명 참석)에 지역 목회자 콘퍼런스가 열렸고, 2022년 10월 24~26일(필그림 하우스, 180여 명 참석)에는 ‘뉴노멀 시대와 한국 교회’를 주제로 로잔 목회자 모임이 진행되었다. 이 콘퍼런스에서는 로잔의 역사와 신학, 제4차 로잔대회에 대한 소개와 참여 방안, 한국 교회의 과제와 미래 사역에 관한 내용을 근간으로 하여 지역 현안, 목회 관련 콘텐츠 등을 함께 나누었다. 이재훈 목사, 마이클 오 목사, 유기성 목사, 최형근 교수, 문대원 목사, 한철호 선교사, 최성은 목사, 문상철 원장, 이인호 목사, 정갑신 목사 등 주요 리더들의 섬김이 있었다. 전문인 콘퍼런스 : 2022년 8월 27일 ‘한국 전문인 로잔운동의 현재와 미래’를 주제로 다양한 분야의 전문인들이 모여 제4차 로잔대회에 대한 의미와 활동 분야 나눔과 교제를 진행하였다. 로잔운동의 정신에 동의하는 기독법률가회, 평신도연합운동, 좋은교사운동, PAUA 교육협력재단, 행동하는 프로라이프, 기독의료계 등의 소개와 사역 나눔을 통해 한국 사회를 섬기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나누고 비전을 공유하며, 서로를 격려하는 시간이 되었다. 한국로잔위원회 총회 : 2023년 1월 25일 온누리교회 두란노홀에서 온오프라인 6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예배와 사역 보고, 계획 나눔, 결산 보고, 예산 승인, 위원회별 활동 보고 등이 이루어졌다. 특별히 제4차 로잔대회의 준비 상황이 발표되어 기대와 격려가 있었다. 총회 이후 오프라인 참가자들의 풍성한 교제와 나눔이 있었다. 제4차 로잔대회 한국준비위원회 출범식 2022년 10월 22일(토) 오후 2:00~5:00까지 양재 온누리교회 화평홀에서 온오프라인으로 100여 명의 국내외 관계자들이 모인 가운데 제4차 로잔대회 한국준비위원회 출범식이 열렸다. 한국준비위원회는 준비위원장으로 유기성 목사(선한목자교회, 위지엠), 총무로 문대원 목사(대구 동신교회), 실행총무로 김홍주 목사(온누리교회)를 위촉하였고, 모두의 축복과 기도 속에 성공적인 로잔대회를 위한 각오를 다졌다. 이후 출범식 참가자들은 공동대회장인 이재훈 목사, 마이클 오 목사, 국제운영 책임자인 데이비드 베넷 목사, 참가자 선정위원장인 라스 뉴먼 박사, 한국준비위원장인 유기성 목사를 중심으로 제4차 로잔대회의 의의, 각종 준비사항에 대한 질의 응답, 기대를 나누며 과제를 확인하였다. 한국준비위원회는 출범식을 시작으로 여러 교회와 단체로부터 핵심 인력들을 발굴하여 11월 말 1차 주요 조직 구성을 마무리하였다. 한국준비위원회는 준비위원장, 총무, 실행총무 산하에 총괄기획본부장으로 이대행 선교사(엠브릿지), 네트워크본부장으로 임동혁 목사(위지엠), 대회진행본부장으로 노규석 목사(온누리 M센터), 사무국장으로 권은영 목사(온누리 선교본부)가 선임되었고, 본격적인 준비위원회 업무 분석 및 주요 인력 접촉을 진행하였다. 총괄기획본부 산하 네트워크 본부는 파트너십국, 중보기도국, 로잔운동국 등 3국, 대회진행 본부는 방송국, 미디어국, 커뮤니케이션국, 행사 1~5국 등 8국 34개 팀으로 구성되었다.
은혜로운 회중 찬양을 위한 여섯 단계
by Alex DiPrima
2023-03-14
회중 찬양에서 바라는 만큼 은혜를 받지 못할 때가 많다. 너무 큰 소음과 찬양 인도자의 지나친 “무대 위” 활동이 회중을 압도하거나 소외시키기도 한다. 때때로 음역이 너무 높아서 남자들이 따라부르지 못하고 그냥 서 있을 때도 있다. 적지 않은 찬양이 기독교 방송에 나와서 공연하는 솔로를 위해 작곡되었기에 똑같은 찬양을 훈련받지 않은 성도가 주님께 즐겁게 소리 내어 부르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다 이런 경험이 있다. 어쩌면 지금 내가 말한 게 당신 교회 상황일 수도 있다. 찬양 예배에서 낙담하고 실망하곤 하는가? 좋은 소식이 있다. 회중 찬양은 얼마든지 더 좋아질 수 있다!다음은 은혜롭고 활기찬 회중 찬양에 도움을 주는, 특히 목회자가 실천할 수 있는 몇 가지 실용적인 조언이다. 예산과 규모에 관계없이 모든 교회가 다 다음 단계를 실천할 수 있다. 나는 평균 수준의 음악적 재능과 항상 쪼들리는 예산으로 운영되는, 도시 외곽에 자리 잡은 중간 규모의 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이런 제한적인 요인이 은혜로운 회중 찬양 문화를 만들어가는 데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 우리 교회를 방문한 사람은 모두가 함께 찬양하는 시간이 얼마나 은혜로운지 자주 언급한다. 물론 찬양에 은혜가 넘치는 건 다 성령의 역사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교회에서 더 은혜롭게 함께 찬양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여섯 가지 실용적인 방법을 알아보자. 1. 선곡을 잘해야 한다.회중 찬양에 적합한 찬송은 수백 개가 넘는다. 따라서 선곡에 실패해서 은혜가 되지 않는 찬양을 부르는 건 변명의 여지가 없다. 좋은 찬양을 선택하라. 모두가 함께 부른다는 점을 기억하라. Spotify에서 제공하는 다섯 개의 ‘Together for the Gospel’ 앨범은 좋은 선곡의 출발점이 된다. 2. 무반주로 자주 부르라.우리 교회에서는 어떤 찬양이든지 적어도 한 소절 또는 후렴구를 다 함께 아카펠라로 부른다. 종종 한 곡 전체를 아카펠라로 부르기도 한다. 사실, 우리 교회는 얼마 전에 모든 찬양을 아카펠라로만 부르는 비정기 예배를 시작했다. 다양한 세대로 구성된 모든 교인이 정말로 사랑하는 예배이다. 그중 십 대와 이삼십 대가 특히 더 좋아한다. 교인들이 옆 사람의 찬양 소리를 서로 들을 수 있어야 한다. 한두 곡은 악기 연주를 아예 중단하고 교인들이 온전히 목소리만으로 찬양하도록 인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3. 악기 소리를 낮추라.악기 소리가 클수록 찬양 소리는 줄어든다. 악기 소리가 줄어들수록 찬양 소리가 커진다. 이건 하나의 법칙이다. 우리는 지금 앨범 녹음을 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찬양하도록 돕고 있다. 그러니 악기 소리를 줄이고 찬양 소리를 높이자! 회중 예배에서 악기는 찬송을 섬기는 도구에 불과하다. 그 외에 다른 역할이 있을 수 없다. 교인들이 악기를 단지 회중 찬양이라는 근사한 음식을 섬기는 웨이터로만 바라보도록 그들을 제자화하라. 4. 모두가 다 찬양할 수 있는 적절한 음역을 선택하라.가스펠 가수 크리스 톰린(Chris Tomlin)처럼 고음을 뽑아낼 수 있는 남자는 거의 없다. 키를 한두 단계 내려도 괜찮다. 좋은 찬송가라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노래 훈련을 받은 적 없는 모든 회중이 다 하나가 되어 하나님 찬양이라는 큰 무대에서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가능한 한 쉽게 만들라.5. 더 크게 찬양하도록 격려하라.회중이 더 크게 찬양할 수 있도록 최대한 격려하라. 등록 교인 모임에서만이 아니라 나는 정식 예배 중간에도 종종 더 크게 찬양하자고 부드럽게 격려한다. “형제자매님, 우리가 지금보다는 더 크게 부를 수 있습니다.” 또는 “다음 찬양은 그리스도인답게 더 크게 부릅시다.”6. 주도하라.음악을 포함하여 예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이 당신에게 있다. 물론 찬양 인도자를 활용하는 것도 괜찮다. 어쩌면 당신이 직접 하는 거보다 더 나을 수도 있다. 단 교회 비전을 공유하는 찬양 인도자를 써야 한다. 찬양 인도자의 중요한 책임은 음악과 찬양에 대한 담임 목사의 비전을 실행하는 것이다. 그가 회중 예배를 통해서 성경적 이상을 성취할 수 있도록, 담임 목사로서 실천할 수 있는 피드백을 주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이 외에도 회중 찬양을 향상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많은 방법이 있다. 행여라도 당신이 지금 출석 교회의 찬양 시간에 실망했더라도 포기하지 말라. 찬양 시간은 얼마든지 좋아질 수 있다. 구원받은 사람은 찬양하는 사람이다. 원제: 6 Steps to Improve Your Church’s Singing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회중찬양
찬송
찬송가
처음
이전
열린
36
페이지
37
페이지
38
페이지
39
페이지
40
페이지
다음
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