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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를 위한 세 가지 경고
by Kenneth Mbugua
2023-02-01
타락한 세상에서 설교라는 특권을 능가하는 소명은 많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설교에 기름 부으심으로 죄로 어두워진 영혼에 그의 영광의 빛이 비취도록 정하셨다. 정기적인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은 오랫동안 그의 백성의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고 있던 거짓말이 그리스도의 발 앞에 굴복하도록 만드셨다. 그리고 하나님에 관한 거룩한 지식이 교회에서 울려 퍼지는 설교를 통하여 이 세상에 전파되기를 원하신다. 간단히 말해서, 설교는 실로 위대한 소명이다. 그러나 강단 안팎에는 영혼을 저주하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당신과 나보다 훨씬 더 뛰어난 사람들도 강단의 함정에 빠졌다. 사역을 완수하고자 하는 설교자로서 내 영혼을 위협하는 세 가지 위험을 이 글에서 분명하게 밝히고 싶다. 나와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를 하나님이 지켜주셔서 설교라는 높고 거룩한 부르심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1. 진리를 아는 것을 진리를 믿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은 강해 설교자로서 우리의 의무이다. 설교 강단에 무지가 들어설 자리는 없다. 우리의 임무는 성경의 진리를 발굴하여 정확하고 설득력 있게 또 열정적으로 교인에게 선포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슬프게도 강단에서 선포되는 진리가 흔하지 않은 곳이다. 그러나 분명한 진리를 바로 배우고자 하는 최소한의 소망을 가진 적지 않은 사람들을 향해서 우리는 바로 외쳐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위험이 있다. 신학적으로 건전한 설교를 하는 설교자도 얼마든지 지옥에 갈 수 있다. 성경이 무어라고 가르치는가? “그런데 귀신들도 그렇게 믿고 떱니다”(약 2:19). 사람들을 통제하고 싶은 우상에 빠진 사람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주권을 외칠 수 있다. 나 자신의 영광을 구하면서 입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설교하는 건 어렵지 않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설교하면서 정작 그 설교 속에서 의를 찾는 것, 그래서 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내가 살을 붙이는 건 쉽다. 말씀은 참으로 옳다. “나는 내 속에 곧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깃들여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나는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롬 7:18-19). 속아서는 안 된다. 약을 팔아서는 아무도 고칠 수 없다. “의사여, 너 자신을 치유하라”는 모욕은 참으로 우리를 겸허하게 만들어야 한다. 강단에서 교인을 향해서 처방하는 동일한 치료법에 우리도 환자로서 참여해야 한다. 우리의 첫 소명은 강해 설교자가 아니라 진짜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일주일 사역의 목표가 단지 하나님의 진리를 설명하는 원고를 들고 강단에 오르는 것 이상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해진 양심, 비길 데 없는 그의 사랑을 찬양하는 영혼,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사로잡힌 마음을 가지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강단에 오르기 전과 후에 믿음과 회개의 마음으로 내 설교에 나부터 응답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이 점과 관련해서 내가 목격한 좋은 예가 있다. 설교가 끝나고 교인들과 간담회를 가지면서 자신의 설교 내용 중에서도 특히 자기에게 영향을 끼쳤던 부분을 얘기하는 어느 목사의 모습이었다. 설교자로서 하나님 말씀의 통치 아래 자신을 위치시키는 좋은 모델의 한 사례이다.형제여, 교인에게 감동을 주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지 말라. 정작 교인을 위한 말씀을 준비하는 당신이 예배를 마치고 매주 굶주린 상태로 집에 가게 될 것을 두려워하라. 말씀을 연구하는 당신이 먼저 그 말씀의 열매에 먼저 참여하도록, 설교자에게 필요한 겸손과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라. 2. 설교 사역의 열매와 내 안에 있는 성령의 열매를 혼동할 수 있다이 위험을 나는 팀 켈러의 설교 덕에 알게 되었다. 2016년 비슨 신학교(Beeson Divinity School) 졸업식에 참석한 그는 좀 기이하고 작은 강단에서 이 점에 관해서 설교했다. 이 간교한 거짓말을 폭로한 켈러에게 나는 영원히 감사할 것이다. 사탄 원수가 말씀 사역자를 죄에 안주하도록 유인하는 데에 있어서, 과연 이것보다 더 기만적인 방법이 있을지 의심이 들 정도이다. 사역의 성공이라는 목표에 눈이 멀어 성령의 경고를 무시하고 전력 질주하다가 결국 믿음의 난파라는 결과를 맞는 설교자가 얼마나 많은가? 사역 내내 그들은 “추종자들”에게서 격려를 받는다. 사역의 열매가 자신이 특별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며, 더불어서 자신에게는 평범한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하는 규칙이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자랑스럽게 믿기까지 한다. 우리는 종종 예수님을 배반한 바로 그 유다가 귀신도 쫓아냈다는 사실을 얼마나 쉽게 잊어버리는지 모른다. 우리는 지금 설교의 은사를 경건보다 더 높이 평가하는 시대에 사역하고 있다. 설교의 은사는 있지만 성숙하지 못한 설교자를 선택하는 교회는 많지만 경건하지만 평범한 설교자를 선택하는 교회는 거의 없다. 오늘날 교회는 분명하게 드러나는 부족한 경건의 모습을 합리화하는 데에 익숙하다. 그러나 부족한 설교를 눈감아주는 데에는 그리 너그럽지 않다. 형제여, 이런 현실이야말로 우리가 현재 두 개의 전선에서 싸우도록 부르심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안에서는, 우리는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두려워해야 한다. 밖으로는, 우리의 설교를 듣는 청중의 판단에서 위안을 찾으려는 유혹을 피해야 한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한 교훈이 우리의 표준이 될 수 있다. “나는 하나님 앞과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분의 나타나심과 그분의 나라를 두고 엄숙히 명령합니다. 그대는 말씀을 선포하십시오”(딤후 4:1-2). 강단에 선 우리를 보는 교인들처럼 내가 나를 본다면, 설교의 반응을 성령의 열매로 혼동하는 유혹을 더 많이 받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최후의 그날에 눈을 떼지 않을 수만 있다면, 사탄의 치명적인 거짓말에 빠지지 않고, 나의 영혼만이 아니라 내 설교를 듣는 교인들의 영혼까지 구원하는 삶과 사역을 갖춘 설교자로서 자격을 얻을 것이다. 3. 모든 사역(설교도 포함)의 궁극적인 목적은 예배라는 사실을 잊을 수 있다정확한 의미를 알기 어려운 구절을 본문으로 설교 준비를 할 때. 내 기도는 정확한 의미를 알려달라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자녀가 영적으로 충족하지 못한 채 교회를 떠나는 일이 생기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이단적인 말을 하지 않고 설교를 잘 마무리하는 것을 목표로 기도할 수도 있다. 물론 이것은 나름 중요하지만, 핵심은 아니다. 종종 설교 준비를 하면서 생기는 염려를 보면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애쓰고 있는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두려움의 이유가 하나님이 나쁘게 보일까가 아니라 내 명성에 흠이 갈까이다. 가끔 설교를 망치고 절망한 마음에 앞자리에 내려와 앉을 때 나를 채우는 괴로움은 내가 하나님을 제대로 높이지 않았다는 데에서 오는 슬픔이 아니다. 내가 대단한 설교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럴 때 내게 가장 필요한 건, 설교자로서의 내 정체성을 붙잡아주는, 그래도 설교가 괜찮았다는 교인들의 격려가 아니다. 내게는 오로지 하나님에게만 속한 영광을 도둑질하려고 했던 내 마음을 뉘우치는 상한 마음이 필요하다. 워필드(B. B. Warfield)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참된 신학은 송영(doxology)으로 이어져야 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를 주장하면서,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라”(고전 1:31)라는 훈계로 끝맺는다. 나의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가 실제로 나 자신의 영광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느끼는 괴로움과 기쁨의 본질로 바로 드러날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라는 “율법”은 제대로 선포하는지 몰라도,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라”는 정신은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설교자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복음의 목적을 왜곡한다면, 그들도 복음의 내용을 왜곡하고 사람들을 하나님의 영광에서 돌아서게 하는 번영 복음 설교자들과 하나 다르지 않다.형제여, 영광은 인간의 몫이 아니다. 인간의 모든 연약함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가 전파하는 복음으로 우리까지도 지키실 것이다. 내 영광을 추구하는 자존심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자. 내 영광만을 바라는 비열한 죄까지도 용서하는 큰 자비가 십자가에는 있다. 내가 전하는 바로 그 복음이 교만한 설교에 대항하는 최고의 무기가 되도록 하자. 내 영혼과 성도들에게 분명하게 하자. 내가 자랑하고 싶은 모든 것, 심지어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조차도 죄 없는 진공 상태가 될 수 없음을 말이다. 그러나 나 자신과 우리가 드리는 제물이 예수의 보혈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음을 찬송한다. 그러므로 설교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돌아가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시간 다시 한번 기뻐하고 찬양한다. 주님의 자비로 인해 주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우리가 정작 나중에 주님의 은혜에서 제외되는 비극이 생기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원제: Three Warnings for Those Who Preach the Word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설교자
삯꾼
거짓설교
설교
우영우는 어디에나 있다
by 이재훈
2023-01-31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한국 사회에 실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 드라마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있는 변호사 우영우의 사회 탐험기이다. 우영우 변호사가 의뢰인의 풀릴 것 같지 않은 상황을 고민하다가 고래가 등장하는 환상을 보면서 시원하게 해결책을 찾아내는 장면이 아무래도 이 드라마의 백미이지 싶다. 시청자는 모두 한마음이 되어 우영우를 응원했고, 통쾌한 승리에 함께 기뻐했다.사회적 약자를 응원하고 또 그가 승리할 때 함께 기뻐하는 사회는 그 자체로 깊은 감동을 준다. 이것은 매우 어렵지만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우영우처럼 천재적인 지능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도 아니다. 사회 전체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요구 수준을 낮추고 그들이 이루어 내는 작은 성취에도 함께 기뻐하면 우영우의 감동은 멈춤 없이 이어질 수 있다. 대한민국에는 장애인 촉진법이 엄연히 있다. 이 법에 따르면 사업장은 법으로 정한 인원의 장애인을 고용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 대다수 사업자가 장애인을 고용하는 대신에 과태료를 내고 그 의무에서 벗어난다. 남들 얘기일까? 우리 교회 안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 물론 그 사실을 파악한 즉시 시정하여 몇 명의 장애인이 정규직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성도들의 요청사항을 제대로 해결해 주지 못해 항의도 받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성도들이 이해해 주게 되었고, 고용된 장애인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가게 되었다.교회에도 경영을 고려해야 하는 적지 않은 영역이 있다. 그런 데서는 비용을 낮추고 효율을 높이려는 경제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며, 많은 일을 잘 처리하는 직원을 고용하려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장애인을 고용하는 것은 매우 비경제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효율성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 우영우가, 그 드라마가 보여 준 것이 바로 그 가치이다.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일하는 곳에서, 그렇게 함께하는 일터를 만들어 나가려고 애쓰는 곳에서, 우리는 경쟁이 가져다줄 수 없는 감동을 경험하게 된다. 그 감동에는 돈과 지식과 과학이 줄 수 없는, 세상을 살맛 나게 하는 힘이 있다. 그러한 감동이 교회 공동체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래야 세상은 교회와 복음에 주목할 것이다.이재훈, 방황의 시대, 방향이 되다(두란도) 중 “우영우는 어디에나 있다”를 간추렸습니다.
이상한변호사우영우
장애인
장애인촉진법
신에 관한 소문
심플리 미셔널 | Simply Missional
by 김선일
2023-01-30
심플리 미셔널Simply Missional탈교회화, 비종교화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선교 과제로서 복음을 새롭게 제시합니다. 기독교의 변증 유산으로부터 오늘을 위한 복음 변증의 지혜를 발굴하고, 현대 한국의 문화적 표현들과 복음의 대면이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무신론자가 신앙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첫 관문은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일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회심이 있고 엄밀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된다. 하지만 유신론적 신앙으로의 전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밑그림이 되기도 한다. 최근 이른바 “가나안” 성도와 탈교회 현상이 심각한 이슈로 제기됐는데, 그 배경에는 일반인들의 비종교화라는 흐름이 있고, 비종교화의 중심에는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의 약화가 있다.2022년 12월에 여론조사 기관인 한국리서치에서는 “별난 리서치” 결과를 발표했다. 이 조사는 한국인들의 “신의 존재, 그리고 신이 내 삶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제하의 조사였는데(이런 주제를 별나다고 보는 인식이 좀 별나기는 하다),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왔다. 신은 존재한다고 보는 응답은 48퍼센트,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33퍼센트, 그리고 모르겠다는 응답은 19퍼센트이다. 일단 이 결과는 2021년 5월에 발표된 한국갤럽의 종교에 대한 인식조사에서 신의 존재를 믿는다는 응답이 39퍼센트였고, 존재하지 않는다가 47퍼센트였던 것과는 다소 상반된 수치다. 다른 기관의 조사이지만, 한국리서치의 조사에서는 신을 믿는다는 응답이 갤럽의 조사보다 9퍼센트가 올라간 것이다. 갤럽은 1,500명을 대상으로 면접조사를 벌였고 정기적으로 해오던 연구이지만, 한국리서치는 1,000명에게 문자와 이메일을 수반한 웹 조사여서 양쪽의 결과를 대등하게 비교, 평가하기는 힘들다. 다만 필자가 한국리서치의 조사에서 신의 존재를 믿는다고 응답한 이들이 더 높게 이유를 추측하다가, 한 가지 흥미롭게 발견한 것은 신의 존재를 믿는다는 응답 자체가 두 갈래였다는 점이다. 즉, 신은 존재한다는 응답은 총 48퍼센트였지만, “단 하나의 신만이 존재한다”는 21퍼센트이고, “하나가 아닌, 여러 신이 존재한다”는 26퍼센트로 나왔다. 갤럽의 2021년 조사에서는 여러 신이 존재한다는 응답 항목은 나타나지 않는다. 정리하자면, 신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하나의 신이 존재할 가능성, 여러 신이 존재할 가능성을 모두 감안해서 물었을 때, 절대자로서의 신이 존재하느냐(갤럽 방식)는 질문에 대한 응답보다 더 높게 나왔으리라는 짐작이다. 필자의 추측이긴 하지만, 이 문항이 흥미로운 이유는 한국인에게 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인식은 기독교 세계를 기반에 두고 있는 서구사회와는 다를 수 있고, 이는 신과 인생의 관계에 대해서도 다른 기대와 전망을 품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도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묻는 조사들이 있다. 저명한 조사기관인 퓨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에서 2014년에 실시한 조사의 첫 질문은 신(God), 또는 보편적 영(universal spirit)의 존재를 믿느냐는 것이다. 그다음 질문에서는 어느 정도로 신, 또는 보편적 영을 믿느냐고 묻는다. 절대적으로 확신한다(absolutely certain), 상당히 확신한다(fairly certain), 그다지 확신하지는 않는다(not too certain), 전혀 확신하지 않는다(not at all certain)로 응답이 구성되어 있다. 결과는 절대적으로 확신한다가 63퍼센트, 상당히 확신한다가 20퍼센트이며, 그다지, 혹은 전혀 확신하지 않는다가 합쳐서 5퍼센트이다. 절대적 확신과 상당한 확신을 합치면 83퍼센트이고, 미국갤럽의 2022년 조사에서 81퍼센트가 신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과 큰 차이 없는 수치다. 흥미로운 차이점은 미국에서는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의 정도를 묻는데, 반면 한국의 조사에서는 어떤 신을 믿느냐, 더 구체적으로 유일신이냐, 여러 신을 믿느냐로 나눠서 물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조사들에서도 신, 보편적 영, 더 높은 존재(higher being) 등으로 선택지를 넓히는 추세이긴 하지만, 여러 신이 공존한다는 인식은 아니다. 더군다나, 한국리서치의 조사에서는 유일신을 믿는다는 응답이 21퍼센트이지만, 여러 신이 존재한다는 응답은 26퍼센트로 더 높게 나왔다. 여기서 추론할 수 있는 점은 한국인들에게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신에 대한 인식의 토양이 강하게 형성되어 있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수년 전에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서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한 미국인 선교사가 암살당했는데, 먼저 화면에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경 구절이 나온다. 그다음 장면에서는 드라마의 주인공이 ‘극락보전’이라고 써 있는 절에 가서 보살에게 그 선교사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건네주며 그를 위해 초를 밝혀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면서 주인공이 “이이가 하나님을 믿는 분이긴 한데…”라며 말을 흐리자, 보살은 웃으며 이렇게 대답한다. (하늘을 가리키며) “저기 계신 분들이야 서로 잘 알고 지내시겠지요. 부처님께서 하나님 품으로 잘 인도해 주실 겁니다.” 드라마의 한 대사이지만, 필자는 이와 같은 신들의 공존 사상이 한국인의 종교적 의식을 상당히 반영한다고 본다. 종교들이 혼합하고 공존하는 현상은 한국의 종교문화에 특유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어쩌면 한국 사회에서는 종교 간 갈등과 분쟁이 그리 심각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종종 결혼하면서 가족의 화목을 위해 상대방의 종교로 개종한다든지, 여전히 부모의 종교에 자녀들이 큰 고민 없이 순응하는 현상은 단지 가족주의 때문만이 아니라 특정 종교에 배타적으로 헌신하는 문화가 고착되지 않아서 일 수 있다. 그것은 기존 종교보다 사람들의 관습 속에 깊이 스며든 더 큰 종교가 있다는 의미다. 철학자 탁석산은 그것을 한국인들의 현세 구복주의라고 지적하며, 한국인에게는 현세와 내세의 이분법이나 절대적 유일 신앙이 약하다고 주장한다(탁석산, ‘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그래서 신학자 김기현은 한국 문화와 기독교 세계관의 관계를 면밀히 분석하면서 이원론보다 혼합주의의 극복이 한국 교회가 직시해야 할 주된 사안이라고 한다(김기현, “이원론 대 혼합주의: 한국 기독교 세계관의 재구성을 위한 제안”). 필자는 비종교화 시대의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하나님과 신앙에 대한 담론을 제시할 것인가의 의도를 갖고 이 글을 쓰고 있다. 우선, 한국 문화에는 오랜 기독교 문명을 배경으로 하는 서구사회와 같이 우주를 통치하고 섭리하는 절대 신에 대한 전제가 없었다. 근대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서구사회는 이성과 과학으로 세계에 대한 설명체계를 구축하며 세상을 경영하는 신의 은총과 질서를 배제하였고, 그것이 인본주의 세속화로 이어졌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비록 20세기 중반 이후로 폭발적이고 압축적인 교회 성장을 경험하긴 했지만, 그와 같은 유신론적 세계관이 한국 사회의 습속을 형성하긴 힘들었다. 따라서 한국 문화의 고유한 현세지향적이고 혼합종교적인 성향이 여전히 강한 기제로 작동한다고 본다. 그러한 마음의 틀은 복음의 변증을 위해서 마주하고 돌파해야 할 숙제이기도 하다. 모든 결핍에는 그 배후에 갈급한 열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하나님과 유일하신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신앙은 오히려 그와 같은 신앙에 저항하는 마음의 틀을 근본에서 변혁시키는 해답이 된다. 팀 켈러가 말한 것처럼, 문화를 변혁시키는 복음은 거대한 바위를 깨뜨리기 위해서 중심부에 폭탄을 설치하는 것과 같다.최근 큰 인기를 얻는 드라마 ‘더 글로리’는 학교 폭력 피해자가 성인이 돼서 가해자들에게 통쾌한 복수를 한다는 줄거리이다. 여기서도 흥미로운 점은 동일한 악의 결속체인 가해자들이 각각 다른 종교들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폭력 주동자의 어머니는 무속신앙 신봉자이고, 가해 동조자는 중견 교회 목사의 딸이며, 또 다른 가해자의 예비 시어머니는 독실한 불교 신자다. 이러한 설정이 얼마나 현실적이냐를 떠나서, 사실상 이 드라마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종교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내가 아플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이 질문은 기독교 전통에서 고통의 문제와 신의 섭리에 관한 고전적 물음이다. 또한 이 질문은 시대와 문화를 넘어서 인간의 본성적인 탐구이기도 하며, 특히 비종교화/탈교회화되어가는 한국 사회에서 하나님에 관한 신앙을 제시하려 할 때도 관련지어서 고민하게 하는 숙제이기도 하다. 나의 가정, 경제 문제, 일과 경력, 건강, 인간관계 등에서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이다. 예수께서 성육신하신 바로 그 땅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야 할 곳이다. 선교학자 폴 히버트는 비서구 문화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즉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실제의 삶이 이루어지는 현장인 “중간영역”에서 신앙의 가치와 효능이 입증되는 것이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근대 서구 기독교는 하나님과 신앙을 초월과 내세의 형이상학적 영역에 가두었고, 이것이 곧 실제 삶의 문제들이 중첩한 중간영역을 배제했다고 지적한다(폴 히버트, 선교현장의 문화이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생생한 고통과 슬픔, 고민과 희망이 교차하는 일상에서 경험하며, 그 일상을 변혁시키는 차원의 문제이다.물론 하나님이 우리의 현안과 필요를 해결하셔야만 존재 입증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욕망을 채우시는 하나님은 더더욱 성경적 신앙과 무관하다. 그러나 그 어떤 삶의 고민과 관심도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서 벗어날 수 없다. 현세지향적이고 혼합주의적인 한국 문화에서 기독교 신앙을 제시하려면 때로 복음의 현실적 효능과 선택으로서의 신앙이라는 가치를 제시해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문화적 접촉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사람들이 느끼는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들의 필요에 대한 돌봄으로부터 절대 주권자와의 만남을 통해 더욱 진정한 필요가 채워지게 하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 되어야 한다. 신의 존재에 관한 믿음을 묻는 조사에서 항상 개신교 복음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절대성과 유일성, 그리고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가장 확고하게 믿는 집단이다. 견고한 복음적 기초는 모든 사역의 전제다. 그래야 세속적 문화의 한복판에서 복음을 현실적으로 전달하면서도 복음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로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무신론자
유신론
신의존재
가나안성도
탈종교화
혼합주의
기복신앙
신정론
위대한 설교자가 되려는 욕망에 도사린 위험
by Kwazi Buthelezi
2023-01-29
잭 에즈윈(Zack Eswine)의 글이다. “하나님을 위해 전력을 다한다는 것은 단지 설교를 위해 또 청중을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그의 책을 읽었고 또 설교까지 들었지만, 나는 그의 말을 제대로 듣고 있지 않았다. 나는 이미 기독교 사역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에즈윈이 하는 이야기는 내게 익숙했다. 왜 안 그렇겠는가? 그러나 에즈윈의 메시지를 무시하는 내가 사실상 듣고 있는 건 따로 있었다. 은연중에 나는 그를 나와 비교하고 있었다. 그가 아무리 과거에도 또 지금도 대단하다고들 하지만, 그는 결코 내가 꿈꾸는 위대한 설교자, 미래의 나와는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나는 내가 사역하는 캠퍼스 사역에서 누구나 손에 꼽는 대단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내 속에서 꿈틀거리는 욕망에서 풍기던 지독한 무지와 오만의 냄새를 맡느냐고, 굳이 당신에게 물을 필요가 없겠다. 그러나 이런 무지와 오만이야말로 주님의 영광보다 위대한 사역이 우리의 야망이 될 때 따라오는 결과 중 하나이다. 그리고 그런 비극이 내게 일어났다. 목사여, 위대한 설교자 이상을 갈망하라내가 기억하는 한, 나는 항상 설교하는 걸 좋아했다. 어느 날 그리스도인이 되고 또 목회를 하고 싶다는 바람이 생겼을 때, 그 중심에는 설교가 있었다. 나는 성공적인 (다른 말로 신실한) 사역에 필요한 게 무엇인지 몰랐다. 물론 적지 않은 설교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단지 설교만으로는 제자를 만들어낼 수 없다.물론 설교로 교인을 예수님과 사랑에 빠지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제자도는 관계 유지가 따라오는 헌신의 문제이다. 목회 훈련 첫해에 내가 발견한 게 바로 이 점이었다. 그러나 이 원칙을 사역에 대한 실질적인 나의 접근 방식으로 결정한 것은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서였다. 설교는 사역의 일면에 불과하다훈련하는 동안 나는 지도자들에게서 다소 실망감을 느꼈다. 일 년 내내 내게 주어진 설교 기회는 몇 번에 불과했다. 신학교에 들어가자 사정은 더 나빠졌다. 신학교에서는 당연히 설교 기술을 연마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할 것으로 생각했다. 실망스럽게도, 신학교 삼 년을 통틀어서 내가 실제로 설교한 시간은 한 시간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은 나의 주된 관심인 설교, 그러니까 내게서 설교할 시간을 뺏는 다른 모든 사역에서 내가 눈을 돌리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학업을 마치자마자, 대학생 사역을 하게 되었다. 드디어 원하는 만큼 설교할 기회를 맞았다고 생각했다. 내 예상은 적중했고, 마침내 꿈이 이루어졌다. 최소한 한 달에 한 번은 설교했으니까. 어떤 달은 두 번에서 네 번 설교한 적도 있었다. 나는 그런 상황을 즐겼다. 그러나 설교를 하면 할수록, 내 속에서 뭔가 점점 커지는 괴로움이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그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위대한 설교자의 모범을 조심스럽게 따르라설교를 사랑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는 훌륭한 많은 설교자를 따르려고 노력했다. 그들의 스타일과 방법을 관찰했다. 그러는 중에 무의식적으로 특별히 좋아하거나 싫어하게 된 특정 설교 스타일이 생겼다. 열린 귀와 배우겠다는 지혜로 어떤 이야기를 듣는 대신에, 나는 너무도 많은 것을 묵살해 버렸다. 그 결과 내가 존경하고 배울 수 있는 사람들의 숫자는 지극히 적었다. 한 가지를 분명히 해야겠다. 나는 지금 내가 완전히 틀렸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정말로 간절하게 내가 존경하는 사람들처럼 설교하고 싶어졌을 때, 문제가 생겼다. 나는 존경하는 설교자들처럼 소리 내고 또 글을 쓰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내가 그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내가 그들의 사역 경험에 관해서 전혀 아는 게 없다는 사실에도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일하시는 성장 수준에 만족하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나도 모르게 다른 목사의 사역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설교에 대한 열정보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사랑에 더 집중했더라면, 나는 설교에서 무언가를 깨달았을 것이다. 건강하지 않은 설교의 세 가지 특징1. 불만족첫째, 설교가 점점 더 나를 마비시켰다. 모든 목회자가 짊어져야 할 설교의 부담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감당해야 할 책임의 결과로 따라오는 부담이다. 그러나 메시지를 간과하고 강대상 그 자체에만 집중할 때, 설교자를 마비시키는 또 다른 부담이 있다. 내 설교에 나는 결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건 내가 하나님의 과정(process)에 만족하지 못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내가 꿈꾸는 설교자의 모습이 있는데, 나를 만드는 하나님의 손길은 너무도 느렸다. 2. 지나치게 기술적이고 영적으로 메마른 설교 준비둘째, 설교가 점점 단순노동으로 전락했다. “단순”(pure)이라는 말이 순수함에 가까운 무엇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설교에 접근하는 내 방식은 순수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기보다는, 이해 능력이 부족한 교인에게 필요한 메시지가 숨겨진 암호 책, 그래서 힘들게 해독해야만 하는 일종의 전문 서적으로 읽어 내려갔다. 그런 내 해석 능력은 매우 폭이 좁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심하게 주석을 의존하게 되었다. 3. 인정 갈구마침내, 설교는 내가 괜찮은 목사인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시금석이 되었다. 본문 연구를 마쳤으니, 이제 남은 건 내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교인들에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설교로 그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뭐가 있겠는가? 나를 응원하고 또 나를 위해 기도하는 교인들의 투자가 헛되지 않았음을 설교를 통해서 증명하고 싶었다. 잊지 말자: 우리가 섬기는 대상은 구주이시다 이 모든 과정 내내 나는 신학교에서 배운 매우 중요한 한 가지를 잊고 있었다. ‘우리의 청중은 오직 한 분이다.’ 바로 하나님이다. 이 사실을 제대로 깨닫는 것보다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마음을 고치는 더 좋은 해독제는 없다. 내가 기쁘게 해야 할 유일한 분은 이미 그의 아들 안에서 나를 기뻐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설교 잘하는 목사가 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힘으로 그분을 섬기기만 하면 된다. 원제: The Danger in Desiring to be a Great Preache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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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학
설교자
교회 교육에도 색깔이 있다
by 최창국
2023-01-28
교회 교육의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는 일생을 통해 끊임없이 성장하고 발달해 가는 세대별 신앙의 색깔을 이해하고, 그들이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고 양육하는 것이다. 때문에, 교회 교육의 목적으로 신앙교육을 생각할 때 발달과 관련된 많은 문제가 필연적으로 제기된다. 비록 성숙한 신앙과 더욱더 나은 신앙에 대한 보편적인 이해와 신앙발달의 보편적인 단계를 이론화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지만, 세대별 신앙의 다양한 색깔과 형태를 이해하고, 그에 따른 신앙발달의 역동적인 과정을 이해하는 것은 교회 교육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대별 신앙의 특징과 형태를 통해 그들의 변화와 성장을 돕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교회는 교회 안의 세대별 그리고 다양한 그룹의 특성에 맞는 교육을 할 때 변화와 성장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세대별 특징을 이해하고 교육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유아부와 유치부는 교회 공동체의 본질적인 차원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시각, 미각, 촉각, 청각, 후각 등 공감각적으로 교회의 사랑을 느끼도록’(feeling the church) 서술하고 이러한 방법으로 그들을 교육해야 한다. 교회에 오면 가정과 같이 따뜻하게 맞아주는 곳으로 느껴지도록 안내하고 교육해야 한다. 다시 서술하면, 어떤 지식적인 내용을 주입하려고 해서는 안 되고 교회에 오면 어머니 품같이 따뜻한 곳으로 느끼도록 해야 한다. 성경적, 교리적 지식을 주입하는 교육이 아니라 성경에서 가르치는 사랑을 몸으로 느끼도록 교육해야 한다. 초등부와 소년부는 논리보다는 감각과 환경의 영향을 받는 시기이므로 성경 말씀이나 교리를 시각, 미각, 촉각, 청각, 후각 등 공감각적으로 교회를 알도록(knowing the church) 교육해야 한다. 초등부와 소년부는 추상적인 진리와 지식을 가르치려고 해서는 안 되고 단순하게 알 수 있는 것들을 가르쳐야 한다. 이 시기에는 주기도문, 사도신경, 십계명, 팔복, 성령의 열매 등과 같이 추상적 사고를 요구하는 교육보다는 단순하게 알 수 있는 내용을 교육해야 한다. 예를 들면, 삼위일체 교리와 같은 것을 가르치기보다는, 성경의 주요 인물들인 아브라함, 모세, 다윗, 예수님, 베드로, 바울 등을 소개하는 형태의 교육을 해야 한다.청소년부는 성경의 교회 정체성 등을 인식하도록 교회의 해석화(interpreting the church)가 가능한 시기이다. 교회가 왜 그리스도의 생명의 몸인지, 삼위일체의 교리, 십일조 문제, 교회의 사명. 사회적 사명 등을 인식하게 한다. 성경의 정신을 내면화할 수 있는 시기이다. 청소년의 시기에는 자기 생각이나 느낌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상당히 향상되고,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도 활발하게 일어나기 때문에 종교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많은 교회 교육 전문가들은 신앙의 여정에서 청소년기의 중요성을 밝혀냈다. 신앙적 회심과 발달은 청소년기에 가장 활발하게 일어난다는 것을 밝혀내고 있다. 일반적으로 삶의 여정에서 종교적 체험 또는 회심이 대부분의 기독교 청소년, 여자는 16세, 남자는 13중에 가장 활발하게 일어난다는 것을 보고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 청소년기에 회심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가? 청소년기는 자아 정체감이 생기기 시작하며, 생리적 변화와 추상적 사고가 가능하게 되는 인지 발달이 이루어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정체감을 추구하는 과정으로 청소년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특정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한다. 청소년기에 영적 체험 혹은 회심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난다는 것은 그들의 육체적, 정서적, 지적 혹은 사회적 발달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교회는 청소년기가 신앙 형성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그들의 특성에 맞게 소통하는 교육을 실행할 필요가 있다.특히 교회는 청소년기는 탐구하는 신앙(searching faith)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탐구하는 신앙은 주로 청소년에 나타나는 유형으로, 이전에 가졌던 신앙에 대한 이해에 대해 회의하면서 지적이고 비판적인 성찰과 탐구를 하게 되며, 공동체의 이야기들과 가르침 그리고 행동들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 해석적 경향을 보이고 질문을 제기하는 경향을 보인다(John Westerhoff III, Will Our Children Have Faith?, 96-97). 이 단계의 사람들은 배움의 목적과 다양한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된다. 자신을 위해서 배우지만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며 배우는 단계에 이른다. 하지만 이 단계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상당히 성찰적인 신앙이 형성되는 시기이기 때문에 전통적인 교육 방식에 비판적이고 저항적일 수 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러한 현상은 신앙이 퇴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기존의 전통적인 방식에 대한 비판은 저항으로 표현된 믿음이며, 거부로 표현된 성장의 과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청소년기에는 비평적 사고(critical thinking)를 많이 하는 시기이므로 교회의 문제에 대해 비판적인 이야기를 할 때, 성숙하지 못한 신앙이라고 꾸중을 쉽게 해서는 안 된다. 이 시기의 비평적 사고는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교회 지도자들이 이들의 비평적 사고를 잘못된 신앙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 장년부는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정체성을 실천할 수 있도록 교회의 생활화(living the church) 차원으로 교육을 경험하기를 원한다. 이 시기에는 지식을 추구하려는 경향보다는 삶을 중요하게 여기는 시기이므로 성경을 교육할 때도 단지 성경 분석이나 해석에 관심이 있기보다는 삶의 지혜를 얻기를 원하는 경향이 강하다. 장년부는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 모인 신앙공동체이며, 화해와 선교의 생명공동체라는 것을 인식하고 청지기 직에 대해 논하는 것을 좋아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주기도문, 사도신경, 팔복, 십계명과 교회의 절기를 내면화하도록 교육하면 좋다. 장년부는 성경적 삶의 의미를 깊이 내면화하도록 교육해야 한다. 교회 교육은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 내용을 교육할 대상자에 대한 바른 이해 없이 효율적인 교육을 기대할 수 없다. 교회 교육에도 색깔이 있다. 바로 세대별 색깔이다. 빨간색을 노란색으로 이해하고 교육하게 되면, 그러한 교육은 오히려 왜곡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교회 공동체 안의 세대별 색깔을 바르게 이해하고 교육할 때 효과적인 교육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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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트위터 청중에게 설교하고 있었다
by Brandon Cooper
2023-01-27
꽤나 벼르고 있다가 던진 농담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요즘 시대를 관통하는 중요한 문화와 관련해서 퍽 재치 있는 해석을 담은 유머인데, 아무도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평소라면 내 유머에 어김없이 예의 바른 웃음을 짓던 아내조차도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게다가 내가 다룬 주제는 지난 며칠 내내 사람들이 계속 이야기하던 주제, 다름 아니라 트위터에 관한 것이었기에 내 놀라움은 더 컸다. 그게 바로 문제였다. 내가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지, 나는 몸서리쳤다. 온라인이라는 배타적이고 왜곡된 세계에서 빠져서 산다는 건 설교에도 영향을 미쳤다. 지난 설교를 검토하니, 설교의 주제, 태도, 그리고 적용에까지 내게 변화가 일어났음을 알았다. 언젠가부터 나는 사람들에게 하던 설교를 중단하고, 대신 조작된 증오와 비인간적인 내용으로 넘치는 알고리즘에게 설교하고 있었다. 내 실수의 심각성을 깨닫는 데에는 기도도, 깊은 수준의 성찰도 필요 없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을 열정이 대신할 수는 없다. 정치와 문화 전쟁과 관련해서 얼마든지 바른 소리를 할 수 있지만, 사랑 없는 설교는 열매 맺지 못한다. 트위터에 신경 쓰는 설교는 사람들을 갈라놓고 논란을 불러일으킬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훨씬 더 나은 목표를 달성하는 “더 나은 길”이 있다(고전 12:31).설교의 목표 디모데전서 1장에서 바울은 젊은 목사 디모데에게 논란이 되는 추측을 피하라고 조언한다. 왜 그럴까? 바울은 “이 명령의 목적은 깨끗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딤전 1:5)라고 썼다. 설교의 목적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더 키우는 것이다. 우리가 소셜 미디어 논쟁에 집중한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진짜로 함께함으로만 가능하다. 예수님도 우리 가운데 함께 거하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다(요 1:14; 3:16).예수님은 오로지 사랑의 사명에만 일편단심 초점을 두셨고, 사람들을 갈라놓기보다 다양한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셨다. 예수님은 정반대의 두 사람, 열심당원 시몬과 로마에 고용된 세금 징수원 마태를 택해서 제자로 삼으셨다. 현대의 관점에서 볼 때, 그건 샌더스를 추종하는 사람과 트럼프 열성 지지자를 같은 그룹에 넣고 사역하는 목사와 비슷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지 정치의 표면이 아니라 그 아래를 보셨다. 시몬과 마태에게 어떤 일이 생겼는가? 그들이 불편한 감정을 어떤 식으로든 표현하거나 소속 정당을 바꿨는가? 그렇지 않다. 성경은 단지 그들이 구주를 따랐다고만 말한다. 트위터가 아니라 성도에게 직접 설교할 때, 우리는 예수님이 주신 사명을 이루는 새로운 세 가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1. 두려움에서 사랑으로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 독설을 퍼붓는 트위터를 목격하면서 나는 최악의 사람들을 가정하기 시작했다. 내 마음이 가상 문화에 갈수록 길들어졌고, 나와 생각이 다른 성도에게 아예 선제적인 태도로 냉정해졌다. 어리석게도 나는 내가 알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익명이라는 핸들 뒤에 숨은 온라인 속 낯선 사람을 구분하지 못했다. 내가 아는 사람들도 온라인 속 적대자들처럼 나를 대할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설교하려고 할 때면 공포를 느꼈다. 행여라도 나와 내 메시지를 모두 다 거부할까 봐 두려웠다.고맙게도 하나님이 선언하셨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요일 4:18).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완전하게 사랑하신다. 이 진리는 잘하고 싶은 덫에서 나를 자유롭게 했다. 그리고 성도를 완전히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하도록 만들었다. 덧없는 이슈의 반대편에 서 있는 적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사랑받는, 주님의 피로 구속받은 양 무리로 바라보도록 만들었다. 이런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됨으로써, 나는 이제 논쟁에서 이기려고 하지 말고 더 사랑하라고 설교한다. 진리는 내 설교의 어조와 강조 포인트 및 목적까지도 바꾼다. 2. 논쟁이 되는 문제에서 새롭게 만나는 복음으로온라인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때 생기는 문제 중 하나는 설교마저도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에게 맡겨진 양 떼의 필요가 아니라, 가상 세계가 주도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건 농담이 아니다. 이 문제가 주제가 될 수도 있다. 실로 목회자에게는 위험한 현실이다. 온라인에서 사는 설교자는 교인들이 진짜로 필요로 하는 것을 모를 수 있다. 이런 현실은 교인들에게도 위험하다. 많은 교인이 교회의 리더만큼 온라인 속 문화 충돌을 즐긴다. 자신에게 물어보라. 은혜받았다는 말을 가장 많이 들은 설교가 논쟁이 되는 문제에 관한 긴 불평을 쏟아놓았을 때인지, 아니면 복음을 신선하게 선포했을 때인지. 목회자여, 이 점을 확신하라.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서는 안 되고, 충분한 권위가 있고, 또한 사역을 위해 하나님의 백성을 준비시키는 데 충분하다면, 오바댜가 에돔에 대해 말한 내용은 이런저런 사람들이 온라인 토론방에서 떠드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훨씬 더 중요하다. 9.11일이나 팬데믹의 첫날처럼, 반드시 한 손에는 성경을 또 다른 손에는 신문을 들고 설교해야 하는 순간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조금 떨어진 곳에 앉은 미망인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이 멀고 다른 먼 데서 열리는 학교 이사회에서 발생하는 일보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더 중요하다. 우리는 교인이 들어야 할 내용, 바로 오늘 그들의 영혼과 관련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해야 한다.3. 두려움과 분노에서 진짜 순종으로연구에 따르면, 소셜 미디어는 정신 건강에 악영향을 끼친다. 미친 듯이 스크롤을 할 때 사람들은 불안감에 짓눌린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편재(遍在)의 능력을 주신 적이 없다. 이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속성이다. 인간과 공유될 수 없는 하나님의 속성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굳이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슬픔을 다 알기 원하지 않으신다. 멀리서 벌어지는 비극을 볼 때면, 도울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도와야 한다는 간절함에 우리는 쉽게 슬픔에 압도된다. 멀리 떨어진 세상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관해서 주로 설교하는 경우에 두 가지 악을 낳는다. 첫째, 이미 불안에 빠진 교인의 두려움을 증폭하게 된다. 둘째,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 교인을 오도한다. 끊임없는 분노 말고는 구체적으로 적용할 길이 없을 때 특히 그렇다. 따라서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개개인이 또는 단체로 다룰 수 있는 지역 문제에 대해 설교하는 것이 훨씬 낫다. 우리 교회가 전국의 대학 캠퍼스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바꿀 수는 없지만, 교회 주변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을 가정으로 초대할 수는 있다.바로 이 자리에 있는 내 마음에, 우리 가정과 지역 사회에 설교를 집중한다면, 그리고 지금 여기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보여줌으로써 설교를 지역화할 수 있다면, 우리는 구체적인 차이를 만들 수 있다. 보편적인 진리를 지역 문제에 적용해서 설교하자. 그리고 (서로 정치성이 다를 수도 있는) 교인이 복음이라는 공통된 소식을 가지고 서로 손을 잡고 배고픈 이들을 먹이고, 헐벗은 이들을 입히고, 병든 이들을 방문할 수 있도록 기도하자. 나는 예수님처럼 되고 싶다. 우리 주님처럼 목양하고 싶다. 여러분도 같은 마음일 것이다. 지금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으신 예수님은 트위터를 스크롤하고 계시지 않는다. 인터넷 논객들과 악의에 찬 논쟁을 벌이려고 준비하지도 않으신다. 주님은 말씀을 선포하는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고 또한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성령을 통해서 직접 교회에 임하신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과 메시지를 바로 전하는 신실한 대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원제: I Was Preaching to My Twitter Fee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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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슬기로운 ‘K-드라마’ 문화생활
by 서나영
2023-01-26
기독교 세계관 운동 2.0 위하여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SIEW)과 함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섭니다.바야흐로 ‘K-드라마’ 열풍의 시대다. 한국 드라마는 이제 더 이상 우리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전 세계인의 주요 문화 코드로 자리를 잡았다. ‘오징어게임’을 시작으로 최근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까지 다양한 장르의 한국 드라마가 흥행에 성공했다. 작품성이 높다고 평가받은 K-드라마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몰입감이다. 이 말은 곧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신앙과는 관계없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면 누구나 몰입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 순간에도 한국의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드라마에 몰입하고 있다. 그렇다면 성경은 K-드라마를 보는 주님의 백성에게 어떤 말씀을 하고 계실까? 교회는 그들에게 어떤 가이드를 주어야 할까?대중예술은 신앙인이 일상에서 영향을 받는 가장 큰 문화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드라마와 관계된 신앙의 삶에 대해 거의 들을 수 없다. 이러한 상황은 현대의 기독교가 그토록 피하고 싶어 하는 ‘이원론’에 빠진 사고가 더욱더 팽배하도록 방치한다. 그 무서운 결과는 신앙인의 삶을 교묘하게 ‘세속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아직도 한국의 교계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는 둔감증을 앓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문화예술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활발하게 참여하는 (적어도 내가 만난) 다음세대들은 이 영역에서도 성경적 진리를 갈구한다. 교회에는 더 지혜롭고 구체적인 복음의 언어로 “그리스도인의 문화생활”에 대해 가르쳐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렇다면 왜 교회는 이 영역에 무관심한 것일까? 문화와 개혁주의 기독교 사이에 오간 오랜 담론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몇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지만, 여기서는 수많은 신학적 이유는 뒤로 하고 현재의 예술의 도드라지는 특성을 생각해 보자. 고전 시대부터 지금까지 예술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리얼리즘(realism)이다. 특별히 이 시대의 K-드라마는 인간과 사회의 추한 모습들까지 자세하고도 생생하게 그리는 데서 탁월하다. 몰입감을 극대화하는 것이 높은 예술성의 기준이 되어 버린 지금, 표현 방법에서 도덕과 윤리 등의 선한 가치를 생각하는 것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옛 전통의 인간이 지켜왔던 가치들을 더 이상 소중히 여기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적나라한 부분까지 자세히 볼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교회는 당연히 이러한 예술 장르와의 담론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면 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킨 ‘오징어게임’은 한국의 다양한 사회문제를 들추어낸다. 이 드라마는 자본주의가 낳은 빈부격차, 또 그로 인한 생명 경시 풍조를 중심으로 인간의 각종 추함과 잔인함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그뿐 아니라 기독교의 위선적 타락을 비중 있게 그린다. 이 드라마에는 세 가지 유형의 사람이 등장하는데, ‘살인과 친자 강간을 일삼는 목사,’ ‘불우한 이웃을 돌보지 않는 전도자,’ ‘쉬지 않고 주님께 기도하지만 이기적이고 파렴치한 자’이다. 그리고 교회들은 이 문제에 침묵했다. 일부는 “보지 말라”고 간단히 권고했고, 일부 기독교 언론은 반기독교 사상을 언급하며 비판하기 바빴다. 일부 젊은 목사들은 양육하는 교인들에게 ‘비판 글’ 링크를 돌리며 “얼마나 나쁜 드라마인지” 다급하게 알렸다. 이러한 대책들이 절대로 틀렸거나 부적절한 반응이라는 말은 아니다. 또한 대부분 교회 강단에서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던 이유는, 피하는 게 가장 지혜롭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권고나 무시와 상관없이 성도들은 이 드라마를 시청하고 있다! ‘오징어게임’을 보지 말라는 교회의 권고는 특히 젊은 세대에게는 전혀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다. 미디어의 파급력은 생각보다 더 크고 강하다는 것을 안다면, 이제는 교회에서 더 정교한 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한국 기독교 역사를 볼 때, 대중문화예술의 분석에는 일관된 접근 방식이 있다. 첫 번째 접근은 드라마의 스토리나 대사에서 ‘기독교 교리와 사상을 침해하는 부분이 있는가’라는 검열에서 시작한다. 어린 시절 교회로 초청된 특별강사가 당시 흥행하고 있는 영화 ‘사랑과 영혼’을 보지 말아야 할 수많은 이유를 나열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지만 그때도 그 영화를 보지 않은 거의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이미 본 영화를 보지 말라고 비판하는 걸 보면서 어린 나이에도 의문점이 있었다. 현재도 영화가 흥행하면 무엇이 반(反)기독교적인지 예리하게 찾아 비판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각성을 촉구한다. 최근 “수리남은 반기독교적 드라마”라는 제목으로 한국기독언론회에서 기사를 낸 바 있다. 예나 지금이나 일관된 접근 방식이다. 두 번째 접근은 비교적 최근 시도되고 있는 접근 방식인데, 스토리에 녹아 있는 기독교적 메시지를 찾는 것이다. 예를 들면, 2021년 한 기독교 일간지에서 어느 신학자는 K-드라마 ‘힘쎈 여자 도봉순’의 대사를 인용하면서 ‘사랑과 용서’라는 기독교적 원리를 끄집어냈다. 일반은총 교리에 입각해 모든 콘텐츠에서 기독교적 메세지를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보통 드라마나 영화에는 다중세계관이 섞여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 작품 안에서 반기독교적 세계관도, 기독교적 메시지도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는 인간의 존엄성, 희생과 사랑 등 사회적 선함을 추구하는 기독교적 메시지가 있지만, 레즈비언의 사랑과 결혼을 옹호하는 입장도 볼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 세계 청중의 “마음의 방향”이 그리스도를 향해 순례의 길을 걷는 같은 방향이라 해도, 같은 작품 속에 나쁘고 위험한 것이 더 보이기도 하고, 좋은 것이 더 커 보이기도 한다. 이렇듯 예술을 기독교 세계관으로 읽어내는 작업은 복잡하고 생각할 것이 많아서 많은 인내가 필요한 작업이다. 개개인의 주관성과 작품의 개별적 특성이 만나 보편적 결론에 이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그러함에도 K-드라마를 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원초적인 성경적 접근 방식을 소개하려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인 성경이 그 자체로 엄청난 수준의 문학예술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가? 수많은 장르의 아름다운 문학 기법과 시와 노래와 판타지와 비유가 등장한다. 한 접근 방식의 예로, 리얼리즘을 생각해 보자. 그리스도인의 드라마 시청에서 주목하여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다. 그것은 스토리보다는 내용을 표현하는 사실주의적 방식이다. 분명히 ‘인간의 전적 타락’은 성경적 사실이다. 그런데 일부 드라마에서는 모든 추한 형태의 인간 타락과 악을 명시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악의 전체 범위를 돋보기로 확대하여 스펙터클하게 묘사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묘사의 방식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리얼리즘은 성경도 사용하고 있는 중요한 예술적 방법이다. 성경은 인간 타락의 전체적인 범위를 다양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리얼리즘이라는 방법론을 지지하고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겠다. 예를 들면, 성경은 성적 부도덕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소돔의 동성애 이야기(창세기 19장); 디나 강간 사건(창세기 34장); 다말과 오난의 부적절한 성교(창세기 38:1-10); 삼손의 행위(사사기 16장); 기브아의 첩 집단강간 사건(사사기 19장); 다윗과 밧세바의 간음(사무엘하 11장); 암논과 다말의 근친상간(사무엘하 13장) 등등이 묘사된다. 또한 성경은 폭력의 장면도 사실적으로 묘사된다. 사사기 3장의 에훗의 에글론 암살사건을 비롯해 구약 신약에 다수의 스토리가 있다. 성경은 사실주의 기법을 사용하여 우리가 알아야 할 것, 곧 인간 상태의 죄성과 타락한 세상의 비참함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리얼리즘을 지지하는 성경과 드라마라는 예술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그 목적이다. 성경은 악에 대한 고발을 보여주기 위해 묘사하는데, 반면 일부 드라마는 악을 묘사하여 몰입감을 높이는 데 더 큰 목적을 둘 때가 많다. 성경은 인간의 삶과 경험에 대한 설명에서 타락의 모습을 우세하게 표현하지 않는다. 즉, 성경은 인간의 타락이 삶의 전부이거나 추함과 악에 대한 대안이 없다는 인상을 청중에게 남기지 않는다. 또한 성경은 성적 부도덕에 대해 따라오는 추악한 세부 묘사를 하지 않는다. 성적 부도덕을 표현할 때, 그 내용을 예술적으로 축약하여 악함이 돋보이거나 선정적으로 비치게 하지 않는다. 성적인 부분을 묘사하는 수많은 K-드라마와는 접근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는 의미다. 제일 중요한 것은, 성경은 묘사하고 있는 악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반면 대부분의 현대 K-드라마는 부도덕이나 부분적 악을 인간 행동의 정상적이고 불가피한 부분으로 묘사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직접 보여주신 예술 작품의 가장 좋은 예다. 인간의 모든 삶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며 아름답고 의미와 장르와 기법이 충만하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성경의 예술적 방식을 인식하고 K-드라마를 볼 때,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정욕적인 생각과 행동을 불러일으키는 외설적 표현이 보이고, 욕설과 주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언어들이 들리길 바란다. 또한 노골적이고 절제되지 않은 폭력과 모든 악의 묘사방식이, 성경의 방식과 비교되어 감상 되길 바란다. 이러한 작은 사고의 전환이 시작되기를 교회가 적극적으로 돕기를 바란다. K-드라마를 피할 수 없게 된 젊은 세대들이 영적으로 무장하고 지혜로워지기를 바라며, For His Gl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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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대량 학살을 용인하신다?
by Josh Butler
2023-01-25
사울이 아말렉을 멸하는 사무엘상 15장은 성경 난제 본문에 해당한다. 하나님은 사울에게 도시 전체를,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모두 진멸하라고 명하시고, 일부 주민들에게 자비를 베푼 사울을 꾸짖으신다. 많은 사람이 이걸 학살을 용인하는, 대량 학살의 신을 묘사하는 “테러의 텍스트”라고 부른다. 나는 이 본문을 그냥 어려운 구절로 남겨둔 채 회피하고 싶지 않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 본문을 더 정교하게 이해를 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다섯 가지 관찰 사항을 여기 제시한다. 1. 아말렉의 역사아말렉 사람들은 친한 이웃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성경은 곳곳에서 그들을 약한 공격하기 쉬운 상대를 골라서 약탈하는 강도 같은 족속으로 묘사한다. 출애굽기 17장에서 그들은 이스라엘을 공격한다. 그때 이스라엘은 이제 막 이집트 노예살이에서 벗어나 무방비 상태로 집도 없이 방랑하고 있었다. 민수기 14장에서 아말렉은 다시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공격한다. 신명기 25:17-18에서 이스라엘은 이런 말을 듣는다. “당신들이 이집트에서 나오던 길에, 아말렉 사람이 당신들에게 한 일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은 당신들이 피곤하고 지쳤을 때에, 길에서 당신들을 만나, 당신들 뒤에 처진 사람들을 모조리 쳐죽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자들입니다.”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사사기에서도 시시때래로 아말렉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하고 압제한다. 뒤에 가서 에스더에서 유대인 대량 학살을 획책하는 장본인도 아말렉 사람이다.아말렉은 나치와도 같은 존재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유대인 말살에 열중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들은 나치를 “아말렉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강제수용소의 유대인들은 나치를 잔인한 학살의 역사를 연장한 현대의 아말렉으로 여겼다.아니나 다를까. 하나님은 아말렉을 멸하시는 이유로 그들의 압제의 역사를 인용하신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에,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한 일 곧 길을 막고 대적한 일 때문에 아말렉을 벌하겠다”(삼상 15:2).2. 요새의 위치고대 근동의 도시는 오늘날과 달랐다. 우리는 “아말렉 성읍”(삼상 15:5)이라는 말에서 그 성을 온 백성이 사는 “민간인 주민들이 거주하는 중심지”라고 생각한다. 나는 집 밖에 학교, 병원, 식당, 기업이 있는 피닉스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고대 근동에서 도시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이어지는 길을 지키는 요새화된 군사 전초 기지였다.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아말렉 성에는 민간인이 없었다. 구약학자 크리스토퍼 라이트(Christopher Wright)가 관찰한 바와 같이, 그 전투에서 “소규모 가나안 왕국의 작은 요새 도시인 주요 군사 중심지가 전멸되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실제로 전멸한 것은 확실히 아니다.”이스라엘은 뉴욕이 아니라 펜타곤을 멸하고 있다. 그 성읍은 민간인 인구 밀집 지역이 아니라 방어용 군사 요새였다.3. 고대 전쟁의 본질고대 근동에서는 민간인은 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민간인이 보호받으려고 성 안으로 도망쳐 들어가는 중세 시대나 반지의 제왕과는 다르다. 일반적으로 군인과 소수의 정부 관리만이 성에 거주했다. 전투가 벌어졌을 때 근처에 있던 민간인들은 모두 도망쳤다.“아말렉 성”은 매복 공격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는 여성, 유아, 민간인이 없었을 것이다. 있었더라도 도망쳤을 것이다. 우리는 잘 모르지만, 원래 청중은 이 점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히브리 학자들은 “남자와 여자, 어린아이와 젖먹이, 소 떼와 양 떼, 낙타와 나귀”(삼상 15:3)라는 구절은 “전부”를 가리키는 고대의 통용어였다고 지적한다. 특정 전투에서 이런 범주에 대상이 반드시 존재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전투가 끝난 다음에 그 군사 전초 기지에 남아 있는 모든 사람과 모든 것(“전부”)을 파괴했다는 의미라는 것이다.4. 고대의 독설고대 근동의 이웃들처럼 이스라엘도 전쟁 이야기를 할 때면 극적인 언어를 사용했다. 현대인의 귀에는 그 이야기가 대량 학살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현실은 더 복잡했다.우리는 이스라엘 주변에 있던 고대 국가들이 남긴 전투 기록에서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다. “우리가 그들을 전멸시켰다! 우리는 그 나라를 땅에서 쓸어버렸다! 그들은 더 이상 이 땅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전쟁사를 보면, 지구에서 전멸했을 것 같은 바로 그 적들이 1년 뒤에 전보다 더 강력한 대적으로 돌아와서 문제를 일으킨다.이것은 스포츠의 독설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경기가 끝난 다음에 라커룸에 있는 농구 선수들은 이렇게 소리를 지른다. “우리가 그들을 파괴했다! 걸레를 만들었어!” 그 선수들의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들이 120대 0으로 이겼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점수판을 보면 120대 105이다. 이기긴 했지만, 그들의 수사법이 암시하는 것처럼 그렇게 극단적인 승리는 아니다.성경도 이런 식으로 언어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여호수아 9-12장에서 여호수아는 일련의 군사적 승리를 축하하면서 “우리가 모든 왕을 멸하고, 모든 군대를 쳐서 멸하고, 가나안 온 땅을 정복하였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계속해서 여호수아 13-15장부터 사사기, 사무엘 상하를 읽어 내려가 보라. 그 적들은 여전히 주변에 있다! 여호수아가 묘사한 그런 일은 수십 년 후에, 다윗의 통치 때까지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우리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원래 명령을 과장된 용어로 이해했음을 안다. 왜냐하면 여호수아는 반복해서 그들이 “여호와께서 명하신 대로”(수 11:12-20) 실행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핵심 명령은 가나안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쫓아내라”는 것이었다. (이 “쫓아내다”라는 어구는 가나안 사람들을 상대할 때 자주 나타나는데, 독설은 비교적 드물다.) 이것은 살육이 아니라 격퇴의 언어이다.그렇지만 “독설”이라고 해서 사무엘상 15장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라커룸에 있는 선수들이 경기에 대해서 거짓말을 한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성경의 기자들도 고대 전쟁 역사에서 통용되었던 말하기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5. 사울의 속내9절에서 사울은 아말렉 왕 아각을 살려 준다: “사울과 그의 군대는, 아각뿐만 아니라, 양 떼와 소 떼 가운데서도 가장 좋은 것들과 가장 기름진 짐승들과 어린 양들과 좋은 것들은, 무엇이든지 모두 아깝게 여겨 진멸하지 않고, 다만 쓸모없고 값없는 것들만 골라서 진멸하였다.”많은 사람이 사울의 이러한 행동을 자비의 행위로 보고, 왜 하나님께서 사울을 책망하시고 버리시는지(삼상 15:26) 혼란스러워한다. 그러나 사울의 그 행동은 자비가 아니라 탐욕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사사로운 약탈을 하는 것을 어김없이 금하셨다(예, 신명기 7, 13, 20장; 여호수아 7장). 실제로 탐욕은 전쟁의 주요 동기였다. 사울은 가장 좋은 동물을 취했고, 아말렉 왕을 승전의 트로피로 사로잡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백성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주변 국가들이 “저들도 그냥 돈 때문에 그렇게 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싶지 않으셨다.사울은 아말렉 왕은 전리품으로, 그들의 가축들은 자기 백성을 부자로 만들 재화로 취했고, 하나님의 명성은 쓰레기통에 버렸다. 이 내러티브의 화자가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부패한 동기이다. 사울은 구찌와 아르마니를 가질 수 있다면, “쓸모없고 값없는 것들”(삼상 15:9)은 손쉽게 쓸어버렸다. 그는 “승전비를 세우고”(삼상 15:12)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기 자신의 영광을 높였다. 그는 “약탈하는 데만 마음을 쏟으면서”(삼상 15:19) 할 수 있는 대로 가장 좋은 물건을 훔쳤다.물론 사울은 사무엘에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고 가장 좋은 것을 골라왔다고 말하면서 자신을 정당화하려 한다(삼상 15:21). 이것은 당신이 목사님에게 “교회에 십일조를 내려고 세금을 속였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다. 이런다고 하나님이 좋아하실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삼상 15:22). 결국 부분적인 순종은 불순종이다. 사울이 왕이신 하나님을 거역하였으니, 하나님도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신다.더 큰 희망내 목표는 사무엘상 15장을 부드럽게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이 구절은 캐리커처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이 구절은 심지어 하나님의 선하심 안에서 우리가 품어야 하는 희망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큰 그림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나라에서 원수를 물리치신다. 이 구절은 궁극적 승리, 곧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세워질 때, 우리에게 해를 입히고 우리를 무너뜨리는 악과 회개하지 않는 그 동맹군은 제거된다는 그 승리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대적이 되지 말자. 그렇지 않으면 멸망의 날이 우리에게 닥칠 것이다. 하나님은 아말렉 족속을 대대로 오래 참으셨지만, 그들은 사무엘상 15장까지 불의와 압제를 계속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를 오래 참으시며 십자가로 구원의 길을 만드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악을 심판하고 회개하지 않는 반역자들을 당신의 나라에서 제거하시는 심판이 다가오고 있다.이렇게, 사무엘상 15장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세상의 소망을 가리킨다.원제: Is God OK with Genocid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아말렉
성경난제본문
사무엘상15장
진멸
대량학살
인종청소
순종
순종좌제사
예수 vs. 대체 가능 사회
업그레이드 시대에서 행복 찾기
by Samuel James
2023-01-24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자본주의의 지금 버전, 곧 광고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가 우리 모두에게 가르치는 한 가지가 있다면, 이 세상에 대체 불가능한 것은 없다는 사실이다. 모든 것이 재생산되거나 더 새롭고 개선된 모델로 교환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이 사실은 코치에도, 교회에도, 그리고 배우자에게까지 적용된다. 우리는 교체 가능(trade-in) 사회에서 살고 있다. 자기 삶에 혁명을 일으킬 만한 그런 말을 단숨에 알아차릴 때가 있다. 몇 년 전, 앨런 제이콥스(Alan Jacobs)의 에세이가 내게 그랬다. “우리는 대체 가능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이 문장은 아마도 내게 성경을 제외하고는 그때까지 읽었던 그 어떤 글보다도 현대 미국 문화의 핵심 특징을 아름답고 강력하게 요약하고 있었다. 핸드폰이든, 체육관이든, 심지어 인간관계를 위한 쇼핑이든, “약정 기간 없음” 또는 “언제라도 취소 가능”이라는 문구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결국 무엇이든 또는 누구든,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다는 약속이 우리의 모든 경험, 심지어 영적 삶의 밑바닥까지 침투하고 있는 대체 가능 사회가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실이다. 대체 가능 사회대체 가능 사회가 만들어내는 가치는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다. 낙태(태어나지 않은 아기를 죽임으로 불편과 비용을 방지하려는 선택)는 아마도 그런 사회를 드러내는 서구의 궁극적인 상징일 것이다. 근본적으로 대체할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을 제거해도 된다는 법적 관행보다 더 잘 “모든 것이 다 대체가능하다”는 정신을 요약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그러나 대체 가능 사회에는 그 외에도 다른 많은 징후가 있다. 무과실 이혼법(no-fault divorce laws)과 “최고의 자아를 실현하라”는 만트라가 판을 치는 대체 가능 사회에서 자녀와 결혼 서약은 뒤로 밀리고 가족은 얼마든지 해체된다. 얼마든지 싼 값에 대체 인력을 고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고용주는 노동자를 학대하고 조종함으로 대체 가능 사회에 일조한다. 그리고 오늘 수많은 사람이 대체 가능 사회에 맞춰진 기대와 요구를 품고서 교회에 나온다. “내 구미에 맞는” 음악과 설교가 있다면 얼마든지 예배야 참석하겠지만, 시간이 걸리고 거추장스러운 교회 등록과 봉사는 하려고 하지 않는다. 너무 많은 질문을 던지거나 내 삶에 깊이 들어오려는 교회 지도자가 등장하는 순간 우리는 당장 출구를 찾는다. 가까운 곳에 있는 다른 교회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빈 우물대체 가능 사회의 기원에 관해서는 많은 요소를 언급할 수 있다. 산업 혁명, 기계 문명 덕분에 갖게 된 신과 같은 자기 결정권 등을 거론할 수 있다. 현대적 자아와 표현을 중시하는 개인주의의 부상과 승리도 빼놓을 수 없다. 이런 경향들도 진실의 한 측면을 드러내는 게 사실이지만(더 많은 목록이 나열될 수 있다), 본질적으로 대체 가능 사회는 문화적 위기이기 이전에 영적 위기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는 존 파이퍼가 2009년에 한 설교에 주목해야 한다. 파이퍼는 예수님과 우물가 여인의 만남(요 4:1-26)을 통해서 우리의 갈급한 영혼이 어떻게 대체 가능 사회의 공허한 약속에 굴복하는지를 보여주었다. 예수님이 주시는 우물물을 깊이 마시지 않는다는 증거 중 하나는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서 끊임없이 이 일에서 다음 일로 옮겨가는 불안정서입니다. 그건 섹스 파트너일 수도 있습니다. 친구일 수도 있고, 또 직업일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이 교회 저 교회로, 교회를 통해서조차 그런 공허감을 채우려고 합니다. 또한 이런저런 취미로 공허를 달랠 수도 있습니다. … 헤어스타일, 옷장, 자동차일 수도 있습니다. 이사를 다니면서 채울 수도 있고요. 왜들 그러는 걸까요? 그리스도 안에서 깊이 만족하는 정체성이 당신 속에 없기 때문입니다.예수님은 “내게로 오라 그리하면 만족하는 정체성의 안정을 찾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렇게 많이 움직이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쉬지 않고 이리저리 뛰어다닙니다. 갈망하고, 갈망하고, 또 갈망하지만,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습니다. 대체 가능 사회를 만드는 건 다름 아니라 영적 갈증이다. 우물가의 여인처럼 우리는 지금도 인생을 샅샅이 살피면서 언젠가는 내 마음 깊이 벌어진 허무의 동굴을 채워줄 뭔가가 있겠지, 기대한다. 우리의 눈에 주변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은 대체가능하다. 오늘도 우리는 결코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 한 가지를 찾기 위해 필사적이다. 그러나 마케팅에서 배운 모든 지식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새로운 것이나 장소도, 또는 내 삶에 찾아오는 어떤 사람도 내가 가장 간절하게 원하는 그것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알고 있다. 가장 깊은 갈증이 채워지다그렇다면 대체 가능 사회의 반대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가장 깊은 영적 목마름을 그리스도께서 풀어주신 사람과 같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 새로움과 교체에 대한 만족할 줄 모르는 욕구조차도 좀이 슬지 않고 녹이 생기지 않으며, 도둑이나 죽음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그분에게 우리의 마음이 묶이는 순간 바로 시들어 버릴 것이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알 때, 어떤 어려움이나 고통이 앞에 놓여 있더라도 우리는 더 이상 헌신과 결과 앞에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롬 8:28). 이런 사실이 삶과 문화의 모든 영역을 어떻게 변화시킬지 한번 상상해 보라. 충격과 선택의 문제였던 예상치 못한 임신 이 힘들어도 영광스러운 것으로 바뀐다. 절망적이고 생명력이 고갈되었던 결혼 생활이 영원에서부터 보장된 언약을 위한 깊은 희생의 현장이 된다. 이런 친숙한 사례에서만이 아니라, 우리가 자주 생각하지 않는 삶의 장소에서조차도 대체 가능 사회는 새롭게 변화되어야만 한다. 끊임없이 새로운 직장을 쫓는다는 것이 영원한 뿌리 없음과 쉬지 않고 바뀌는 친구와 교회를 의미한다면, 과연 지속적인 예수님의 공급으로 인해서 우리는 경제적 야망조차도 더 큰 가치 아래에 둘 수 있을 것인가? “인터넷 뉴스 과몰입”이라는 현대적 유혹은 또 어떤가? 단순히 “알기 위해서” 우리는 깊이 생각하는 능력 자체를 파괴하면서까지 아무 생각 없이 정보를 소비한다. 이것에서 저것으로의 불안한 전환이 지치고 목마른 마음을 극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극적일 필요는 없다. 마지막 승리를 바라며대체 가능 사회는 두려움을 미끼로 양심을 유혹한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상기시켜 주듯이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요일 4:18). 최후의 형벌에 대한 두려움을 내쫓는 바로 그 사랑이 대체 가능 사회가 가져다주는 두려움도 물리칠 수 있다. 그런 사랑이 우리의 발판이 되고, 하나님께서 우리 주위에 두신 사람과 장소에 감사하게 하며, 우리가 나 중심에서 벗어나서 이웃을 위해 희생하도록 한다. 복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사랑은 과거를 향한 사랑일 뿐 아니라, 미래를 향한 사랑이기도 하다. 제이콥스의 에세이에 나오는 첫 번째 예를 사용하자면, 프로 스포츠팀은 승리에 도움이 된다면 언제든 코치를 해고하거나 선수를 자른다. 하지만 시즌 전에 현재 보유하고 있는 선수단과 코칭스태프가 그대로 유지되는 경우에 우승이 보장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번 상상해 보라. 그 팀이 이 예언을 정말로 믿는다면, 시즌 중에 만나는 그 어떤 어려움도 코치나 선수를 팀에서 쫓아낼 수 없을 것이다. 새로운 것을 필사적으로 쫓으려는 유혹을 물리칠 힘은 오직 최후 승리에 대한 확신에서만 나온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안에서 이룰 최후 승리에 대한 절대적이고 실패할 수 없는 확신을 보장받았다. 그렇기에 우리는 대체 가능 사회에 저항할 수 있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에 일조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할 때 우리는 결코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는 분이 우리의 눈물을 모두 닦아 주시고, 우리의 모든 은밀한 바램까지도 채우시는 더 좋은 사회의 증인이 될 수 있다. 원제: Jesus Versus the Trade-In Society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대체가능사회
교체가능사회
현대인의불안
불안정서
소비주의
앨런제이콥스
우물가여인
영적갈증
중간계 신학
오스틴 프리먼의 ‘톨킨 교의학’
by Louis Markos
2023-01-23
J. R. R. 톨킨은 자신과 개인적 특성을 공유하는 모든 독자를 끌어들인다. 그중 하나가 다름 아니라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중세인과 공유했던 특성이다. 폐기된 이미지의 첫 번째 장에서 C. S. 루이스는 중세인의 특성이 무엇인지 루이스답게 정확하게 정의한다. “중세인은 몽상가도 방랑자도 아니었다. 그는 조직자, 성문화자, 그리고 시스템 구축자였다. 그가 원한 것은 ‘모든 것을 위한 장소, 그리고 모든 것이 올바른 장소에 있는 것’이었다. 구별, 정의, 그리고 도표화는 그의 기쁨이었다.”크리스토퍼 톨킨의 열두 권 분량의 방대한 Middle-Earth History(중간계 역사)부터 험프리 카펜터가 정리한 사랑스럽긴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군데군데 삭제된 Letters of J.R.R.Tolkien(톨킨의 편지)에 이르기까지, 스컬 앤 해머드(Scull and Hammond) 출판사에서 나온 백과사전 분량의 세 권으로 구성된 J. R. R. Tolkien Companion and Guide(톨킨 동반자와 가이드)에서 카렌 폰스태드가 구성한 Atlas of Middle-Earth(중간계 지도)에 이르기까지, 피터 크리프트가 쓴 포괄적인 Philosophy of Tolkien(톨킨 철학)에서 홀리 오드웨이가 세심하게 문서화한 Tolkien’s Modern Reading(톨킨의 현대 읽기)에 이르기까지, 톨킨 학자들도 톨킨이 추구했던 철저함, 세부 사항에 대한 사랑, 그리고 일차 세계(primary world)만큼이나 풍부하고 다층적인 이차 세계를 하위 창조하려는 열정을 그대로 모방한다. 바로 이런 정신을 바탕으로 해서 오스틴 프리먼(Austin Freeman)은 내가 생각할 때 결코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책, 톨킨 학자와 애호가 모두를 만족시키고도 남을 선물을 마련했다. Tolkien Dogmatics: Theology Through Mythology with the Maker of Middle-Earth(톨킨 교의학: 중간계 창조자가 등장하는 신화를 통한 신학)은 조직신학을 구축하기 위해 톨킨의 전설, 학술 에세이, 그리고 서신까지 힘들게 수집해서 대조 및 상호 참조한다. 톨킨에 대한 풍부한 2차 자료를 통해서도 정보를 얻고 있지만, 프리먼의 작업이 가지는 가치는 1차 자료 수준의 깊이와 폭에 확고하고 충실하게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Tolkien Dogmatics: Theology through Mythology with the Maker of Middle-earthAUSTIN M. FREEMANJ. R. R. 톨킨은 다양한 면을 지닌 인물이다. 영국 가톨릭 신자, 아버지와 남편, 두 번의 세계 대전 생존자, 옥스퍼드 교수, 그리고 작가이다. 그러나 그는 신학자이기도 했다. 톨킨의 글은 하나님과 그의 작품에 흐르는 일관된 신학을 보여주지만, 체계적인 논증을 통해서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야기를 통해 신학을 표현했다.톨킨 교의학에서 오스틴 프리먼은 톨킨의 전체 자료(호빗, 반지의 제왕 등등)를 조사한다. 그리고 그 작품을 통해서 그의 신학을 들여다본다. 이야기, 강의 및 편지에서 톨킨은 실로 창의적이고 또 신중하게 기독교 신앙에 발을 들이고 있다. 하나님, 계시, 창조, 악, 그리스도와 구원, 교회, 마지막 날에 대한 섹션 등, 톨킨 교의학은 전통적인 조직신학의 목차에 따라서 정리되었다. 말 그대로 톨킨의 신학 사상에 대한 포괄적인 매뉴얼 역할을 감당한다. 톨킨의 상상력을 통해 우리는 내가 믿는 믿음이 무엇인지 다시 만날 수 있다. LEXHAM PRESS. 432 PP.하나님, 계시, 창조, 인류, 천사, 타락, 악과 죄, 사탄과 악마, 그리스도와 구원, 교회, 기독교인의 삶, 마지막 날에 대한 톨킨의 견해를 설명하는 열두 개의 장으로 나누어진 톨킨 교의학은 중간계 창조자에게 근거가 되었고 또한 영감을 주고 인도까지 한 신학적 확신 속으로 과감하게 뛰어든다. 프리먼은 “서설”(Prolegomena)이라는 적절한 제목이 붙은 서문에서 자신의 목표를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혔다. “나 또는 다른 사람들의 견해가 문제에 개입하지 않도록 하면서, 톨킨이 생각한 바를 가능한 한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이다”(17). 그리고 그는 약속을 신실하게 지켜냈다. 프리먼은 휴스턴 기독교 대학(Houston Christian, 이전 이름은 Houston Baptist)의 강사이자 트리니티 신학교(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고전 과목 선생이다. 개혁파 복음주의자의 입장에서 글을 썼지만, 프리먼은 톨킨의 강력한 가톨릭 신앙과 실천을 비판 내지 패러디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아부하지도 않는 자세로 최대한 자세하고 명확하게 설명했다. 이번 글은 열두 개 챕터 전체에 대한 개요를 제공하기보다는 톨킨이 애용한 전설(legendarium)과 관련해 내 생각을 추가한 세 개의 챕터에만 초점을 맞추겠다. 1. 인류인류에 관한 장에서 프리먼은 인간과 엘프의 차이점에 대한 중요한 사고를 제공한다. 그건 수년에 걸쳐서 톨킨이 전설관에 적용했던 일부 변경 사항에 고려되었던 사항이다. 예를 들어, 프리먼의 설명에 따르면, 인간의 자유라는 신성한 선물이 항상 톨킨의 중심 주제이기는 했지만,죽음이라는 선물은 가장 초창기 이야기 초안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벗어나는 영원으로의 탈출로 죽음을 바라보기 시작한 톨킨의 시각은 중기에 들어서이다. 죽음에 관한 톨킨의 가장 원숙한 입장은 죽음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선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101)실마릴리온, 호빗, 그리고 반지의 제왕에서 인간(men)은 중심 인물은 아니지만 스토리의 핵심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프리먼은 여러 지점에서 아르다(Arda, 지구)가 회복되고 새로워지는 것은 인간을 통해서임을 상기시킨다. 톨킨이 그리는 엘프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엘프는 우울한 존재로 그려진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사랑하고 아름답게 하는 것, 그리고 결코 세상을 떠나지 않는 것, 또한 인간을 위한 길을 만드는 것. 그러다가 늘어난 인간이 엘프가 준비한 세계를 즐기게 되면, 거기에 따라서 소멸하는 것”(106).엘프는 인간을 능가하는 수준에서 예술과 아름다움을 자유롭게 창조할 수 있지만, 그러함에도 그들의 삶은 여전히 아르다의 운명에 묶여 있다. 엘프의 눈을 통해서 인간이라는 수수께끼를 볼 수 있도록 톨킨이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지를 설명하는 프리먼의 솜씨는 매우 뛰어나다. 인간 스스로는 보지 못하지만, 엘프가 파악하는 인간의 숨겨진 면모는 다름 아니라 “세상에 대한 피로감 또는 세상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고 싶은 갈망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 땅에 손님이자 낯선 사람이기에 그렇다. 그렇기에 필멸성은 인간에게 단지 선물로 끝나지 않는다. 운명으로 인한 자유뿐 아니라 이 세상에 속박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라는 의미도 가진다”(107). 인류의 본질에 대한 톨킨의 신학적 견해를 묘사하기 위해 프리먼은 생색내기와는 아주 거리가 먼, 젠더에 대한 짧지만 예리한 섹션을 포함했다. 그는 조금의 주저함과 제한도 없이 명확하게 표현했다. 톨킨에게 “젠더는 단지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의 일부이다. 영혼은 젠더화되어 있을 뿐 아니라 가족이라는 측면에서도 관련된다”(116). 톨킨에게 있어서 남성과 여성은 그의 삶 뿐에서만 아니라 전설 이야기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을 동등하게 공유하지만 서로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116) 존재이다. 프리먼은 이렇게 썼다. 현대 사회라는 측면에서 볼 때 톨킨이 시대에 뒤떨어진 성 역할을 고수한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건 이전 세대의 가치관과 일맥상통한다. 전반적으로 말해서 그는 전통주의자이자 보완주의자이다. 그러나 톨킨은 신선한 현실주의를 제공한다. 여자가 단지 수동적이고 비현실적인 애정의 대상이 아니라는 데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단순히 남자와 동일시되어야 하는 존재도 아니라는 것이다. 남자와 마찬가지로 여자도 위험에 처한 영혼을 가진 또 다른 타락한 인간이며, 그 자체로 존중과 관심의 대상으로 여겨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116)자랑스럽고 또 가족의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톨킨의 면모가 잘 드러나는 편지에서 우리는 이 진리에 관한 그의 공정하고 간결한 요약을 만날 수 있다. 2. 타락톨킨에게 타락이 빠진 이야기란 있을 수 없다. “타락은 역사의 줄거리를 촉발하는 원초적인 평형 붕괴이며, 타락은 단지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 반복되는 패턴이다”(155). 전설 이야기에서 인간, 엘프, 천사는 모두 다 여러 번 타락한다. 중간계에서 악은 패배할 때마다 “환생하고 타락은 반복된다. 세 번째 시대가 끝날 즈음에 발생한 사우론의 멸망은 악이 물리적으로 구현되는 마지막 시간이지만, 악은 계속해서 다시 발현하고 악의 부재 속에서조차 끊임없이 커지는 평화를 무너뜨리곤 한다”(156).프리먼은 톨킨이 오랫동안 전설 이야기에 가상의 타락 이야기를 포함하길 주저했다고 말한다. 행여라도 “작품을 기독교의 패러디로 만들지 않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162). 톨킨이 마침내 그 모든 부담감을 떨쳐버렸다는 사실은 1993년 ‘중간계 역사’의 열 번째 책인 ‘모고스의 반지’가 출판될 때까지 팬들은 모르고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독자를 위해 프리먼은 안드레스라는 현명한 여자와 나중에 인간 베랜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갈다드리엘의 엘프 형제 핀로드 사이에서 있었던, 깨달음을 주는 대화의 시놉시스를 포함했다. 실라릴리온에는 누메노르(“Akallabeth”)의 몰락에 대한 섹션이 포함되어 있다. 이 섹션은 어둠의 군주 사우론이 오래 살기는 하지만 죽는 존재인 누메노르인에게 일부러 포로도 잡힌 이유를 자세히 설명한다. 그는 누메노르인의 마음을 현혹하여 영적 존재 발라뿐 아니라 심지어 유일신 에루에게 반역하도록 스스로 잡힌 것이다. 누메노르인이 에루가 아닌 사탄 멜코를 진정한 은인으로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려는 것이다. 사우론은 그들을 충동질해 발라에게 반역하도록 함으로, 애초에 이 세상의 순환에서 해방하기 위한 에루의 선물인 필멸성에 반항한다. 핀로드와의 대화에서 안드레스는 엘프에게 사우론이 누메노르인을 타락시킨 것이 타락한 천사가 인간을 유혹하여 참 하나님을 버리도록 유혹한 최초의 사건이 아님을 밝힌다. 태초에 하나님은 1세대 인간에게 “그들을 땅에 살게 하시고 때가 되면 땅을 상속하고 다스리도록” 약속하셨지만, 멜코는 인간의 성급함을 악용했다.멜코는 인간이 자신을 선생으로 삼는다면, 그들은 스스로 만들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통해 부와 영광과 안락함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 그는 새로운 욕망을 일깨우지만 욕망의 성취를 돕는 데에는 더디다. 그는 큰 선물을 주지만, 천천히 창조주에 대해 거짓말을 시작하며, 하나님을 인간을 멸망시키려는 적으로 묘사한다. (163)두 경우 모두, 하나님은 인간에게 살 수 있는 낙원을 주셨지만, 그들은 반역하는 천사의 거짓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 결과 “에루를 부인함, 사탄 숭배, 추방, 그리고 남아있는 의로운 자의 회개”(165)를 가져왔다. 대부분의 스토리 전개에서 톨킨이 자연 및 인간의 선함과 타락, 그리고 타락이 가져다주는 길고도 쓰라린 결과에 대해서 정통적이고 성경적인 설명을 따르고 있음을 프리먼은 정확하게 보여준다. 타락에 대한 허구적 설명 가운데 오직 한 영역만이 성경과 다르다. 창세기에 의하면, 아담과 하와가 금단의 열매를 먹기 전까지 지구는 완전한 상태였다. 그러나 톨킨에 의하면 창조 순간에도 지구는 이미 오염된 상태이다. 왜냐하면 에루와 그의 충실한 종 발라의 창조 노래에 멜코가 불일치를 주입했기 때문이다. “인류의 원죄가 발생하기 이전부터 톨킨의 우주는 이미 불완전했다”(157).3. 그리스도와 구원프리먼은 그리스도와 구원으로 관심을 돌리며 독자에게 중간계에서 기독교의 서사와 직접적인 유사점을 찾지 말라고 계속해서 경고한다. C. S. 루이스에게 아슬란은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인 아들이신 하나님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아슬란을 말하는 동물과 걷는 나무가 있는 마법의 세계로 성육신한 존재로 보았다면 말이다. 석상에서 있었던 그의 죽음과 다음날 아침 부활은 성금요일과 부활절 주일의 복음을 재현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톨킨은 굳이 그리스도를 그가 만든 가상의 세계로 데려오는 것도, 구원 이야기를 재생하는 것도 피한다. 그럼에도 독자는 얼마든지 연결할 수 있다.톨킨은 듣기에 따라서 성육신의 신비처럼 들리는 기독교 교리의 가장 독특한 부분을 제공한다. 이전에 영적 존재였던 마법사들은 중간계를 치유하는 임무 달성을 위해서 진짜 몸을 덧입는다. 이와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성에도 적용되는 성육신(embodiment)의 본질에 대한 톨킨의 논평을 주의 깊게 읽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마법사는 고통, 두려움, 피로, 그리고 배고픔을 느끼도록 하는 진짜 몸을 입고 있다. 이것은 발라가 덧입은 게 단순한 아바타 수준이 아니라 진정한 성육신임을 드러낸다. (238)이러한 연관성을 감안할 때, 혹시라도 프리먼은 문자 그대로 죽은 후에 다시 육화된 삶으로 돌아가는 ‘반지의 제왕’ 속 간달프를 주요한 메시아 인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게 아닐까 추측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상 그는 톨킨이 아라곤을 “앵글로색슨 신학의 이상적인 신령한 왕”(240)으로 구현한다고 주장한다. 톨킨은 이미 The Fall of Arthur(아서의 몰락)과 The Legend of Sigurd and Gudrun(시구르드와 구드룬의 전설)에서 아서와 시구르드에게 신성한 왕권을 부여한 적이 있다. 그러나 아라곤의 경우, 그를 창조할 때부터 톨킨이 “이미 존재하는 플롯에 의해서 조금도 제약받지 않았기 때문에”(241), 그는 아예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었다. 아라곤은 위엄, 영적 힘, 추종자로부터 받는 절대적인 사랑, 충성심, 그리고 복종을 끌어내는 능력에 이르기까지 아서와 시구르드를 능가한다. 그리스도처럼 아라곤은 명령하고, 치유하고, 또 새롭게 한다. 아라곤은 또한 그가 성취한 두 번의 승리에서 그리스도를 드러낸다. 프리먼의 설명이다. “앵글로색슨 시대와 실제로 교회의 첫 천 년 동안 가장 광범위하고 영향력 있는 속죄 이론은 형벌 대속이 아니라 악마를 이긴 그리스도, 즉 승리자 그리스도(Christus Victor)였다. 의미심장하게도 톨킨은 거의 전적으로 이런 방식으로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간다”(249). 간달프와 프로도도 사우론의 악과 싸워서 승리한 게 사실이지만, 악에 대한 진정한 승리는 아라곤이 자신만이 가진 특별한 능력으로 몰도(Mordor)의 검은 문(Black Gates)에 대항하여 서부의 사람들을 이끌어냄으로 구현한 것이다. 맹세를 어긴 자(Oathbreakers)를 깨우고 풀어주기 위해 죽은 자의 길(Paths of the Dead)을 걷는 아라곤의 모습은 말 그대로 승리자 그리스도를 구현한다. 그리스도께서 지옥의 참혹함을 겪으시면서도 “성육신 이전에 태어난 성도들을 구출하기 위해 지옥으로 내려가신 것처럼 아라곤도 저주받고 버림받은 죽은 자들에게 구원의 기회를 제공한다”(251-252). 두 경우 다 사로잡힌 자를 이끌어내는 행위를 통해서 자유케 하시는 분의 메시아 직분을 가리킨다(cf., 엡 4:8). 아라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저주받은 망자들이 사는 무덤과 지옥에서 나올 때… 뿔 나팔을 불고 왕의 깃발을 펼친다.” 또한 “옥스퍼드에 있는 올 소울즈 대학(All Souls College)의 예배당 위의 조각과 마찬가지로, 지옥에서 죽은 자를 인도하는 내내 예수는 배너를 높이 들고 있는 모습으로 자주 묘사된다”(252).톨킨 교의학은 이와 같은 다양한 통찰로 넘쳐나며 진지하게 톨킨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반드시 읽어야 한다. 톨킨의 전설 이야기에 대한 확고한 이해가 없는 사람들은 때때로 프리먼이 별다른 설명도 없이 픽션에서 논픽션 또는 편지로 갑자기 이동하기에 헷갈릴 수도 있다. 그러나 강한 마음을 가진, 또한 톨킨과 기독교의 교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프리먼의 체계적인 설명을 들으며 톨킨이 그려내는 중간계를 넘나드는 신학적 여정에 동참하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원제: Theology of Middle-Eart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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