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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도 고난은 있을 터, 어떻게 믿음을 굳게 지킬 것인가...
by David Schuman
2023-01-10
내가 힘들어하는 게 뭔지 아는가? 단지 며칠 또는 몇 주가 아니라 몇 달, 몇 년, 심지어 수십 년 동안 한 가지 일을 성실하게 헌신하여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받은 소명이다. 디모데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바울은 디모데와 우리에게 오래된 믿음을 유지하라고 권면하면서 세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그러면서 믿음을 지켜나가기 어렵게 만드는 두 가지에 대한 경고도 잊지 않는다. 당장 한편에서는 박해가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은 모두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딤후 3:12). 그중에는 돌에 맞아 죽다시피 버려졌던 바울이 당했던 것처럼, 가혹한 박해도 있다(행 14:19). 그만큼 심각하지는 않지만, 오늘날에도 박해는 여전히 존재한다. 조롱당하거나 험담을 듣거나 직장을 잃을 수도 있다. 박해가 주는 매일매일의 압력은 우리를 지치게 하고 때로는 믿음에 눈을 감고 세상 문화와 타협하도록 우리를 유혹한다. 다른 한편에는 거짓 가르침이 있다. “악한 자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더 악하여져서, 남을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할 것입니다”(딤후 3:13). 거짓 교사들은 더 흥미롭고 새로운 것을 제시하며 우리를 유혹하고 위협한다(cf.딤후 3:7).이 두 가지가 우리를 괴롭히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계속 고수해야 한다. “그대는 그대가 배워서 굳게 믿는 그 진리 안에 머무십시오”(딤후 3:14).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가 받은 것을 붙잡아야 할 세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이유 #1: 누구로부터 배웠는지 알고 있다.큰 유산을 관리 부실로 다 날린 이로부터 재정 조언을 받을 사람이 있을까? 아무도 없을 것이다. 재정 조언을 하려면 자기 돈부터 잘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 입증된 성공이야말로 메시지를 신뢰할 수 있는 이유를 제시한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한다. “그대는 그대가 배워서 굳게 믿는 그 진리 안에 머무십시오. 그대는 그것을 누구에게서 배웠는지를 알고 있습니다”(딤후 3:14). 디모데는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바울에게서 믿음을 배웠다(딤후 1:5). 디모데에게 믿음을 가르친 사람들의 경건한 성품은 내용의 신뢰성을 증명한다. 경건한 선생으로부터 믿음을 배웠다면, 그들이 가르친 대로 계속할 수 있음을 확신하라. 이유 #2: 어린 시절부터 거룩한 말씀을 배워서 알고 있다. 내 신앙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 나는 언제나 어머니를 가리킨다. 아버지도 지금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아니었다. 어머니는 주일마다 나와 형제들을 교회에 데려가셨고, 매일 아침 성경 공부를 인도하셨으며,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셨다. 디모데의 어머니처럼, 내 속에 성경의 진리를 심어 주셨다. 바울은 이렇게 썼다. “배워서 굳게 믿는 그 진리 안에 머무십시오. 그대는 그것을 누구에게서 배웠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대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고 있습니다”(딤후 3:14-15).이건 새 동네로 이사할 때와 비슷하다. 공원으로 가는 가장 경치 좋은 길, 최고의 중식당, 퇴근하는 가장 빠른 길을 배우려면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제2의 천성이 된다. 그와 비슷하게, 어머니 덕분에 나는 성경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 성경의 선함과 진실함을 경험했고, 그 사실은 내가 계속해서 믿음을 유지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그러나 이 처음 두 가지 이유가 당신에게는 적용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다음 이유는 당신도 예외가 아니다. 이유 #3: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유익하다. 박해와 거짓 가르침에 직면하여 우리는 배운 것을 계속 지켜나가야 한다. 무엇보다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디모데가 받은 진리와 거짓 선생을 구분하는 다음 네 가지 대조에 유의하라. • 말씀은 단지 인간의 충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숨결로 기록된 것”이다. • 거짓 가르침과 달리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의로 교육한다. • 말씀만으로 온전히 충분하다. 우리는 더 이상 다른 곳을 기웃거릴 이유가 없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서 … 유익합니다. …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유능하게 하고, 그에게 온갖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딤후 3:16-17).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과 경건한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한다. • 거짓 선생의 목표는 속이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잘못된 믿음을 바로잡고 진리를 가르친다. 그는 신실하시다우리는 여전히 믿음 안에서 견디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때때로 박해의 압력에 굴복하기도 한다. 어느 정도는 누구나 다 거짓 가르침의 유혹도 받는다. 우리의 죄 많은 마음은 하나님이 누구시며 우리를 부르신 분이 누구인지에 대해서까지도 성경이 알려주지 않는 잘못된 믿음에 설득되기도 한다. 항상 실패하는 우리와 달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끝까지 신실하게 견디셨다. 종교 지도자들의 거짓 가르침 속에서도 끝까지 버텼다. 체포되어 구타와 조롱을 당하고 심지어 죽임이라는 핍박 속에서도 끝까지 신실함을 유지했다. 그가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므로,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그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우리가 넘어지고 또 넘어질지라도 그는 여전히 우리를 지키신다. 거짓 가르침에 이끌리지 않도록,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이다. 우리가 박해받을 때도 함께하실 것이며, 이 세상 끝날에는 죽음으로부터도 우리를 구하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붙잡고 계신다. 당신이 받은 믿음을 굳게 붙잡고 가야 할 이유이다.원제: How to Hold On to Faith When 2023 Gets Toug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새해
고난
핍박
박해
인내
하나님을 중심에 둔 새해 계획을 세우자
by Jared Kennedy
2023-01-09
“목표를 세웠어. 심지어 습관까지 계획을 잡았고 삶의 규칙까지 명확하게 했었지. 하지만 내가 정한 규칙은 바인더에 적혀만 있을 뿐, 삶 속에서 구현이 안 돼. 적당하게 자고 일하고 또 경건의 시간까지 갖는 완벽한 삶을 꿈꾸지만, 아무리 수준 높은 계획을 세워도 수요일 오후까지도 채 지속이 안 돼. 모든 계획이 수요일이면 다 허사가 돼.” 내 동료의 고백이다. 당신도 같은 경험을 했을 것이다. 되고 싶은 사람, 읽고 싶은 책, 몸에 배게 하고픈 습관까지 다 알고 있지만, 커다란 목표를 일상생활이라는 거친 현실 속에 맞춰 끼워넣기 위해서는 고군분투해야만 한다. 계획이 틀어질 때마다 바인더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내년 1월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할 게 아니라,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목표를 현실적으로 만드는 원칙과 동기 부여이다. 나는 네덜란드 신학자 헤르만 리델보스(Herman Ridderbos)가 바울의 “하나님 중심 관점”이라고 불렀던 것에서 목표 설정과 건강한 습관 유지에 도움이 되는 두 가지 열쇠를 발견했다.1. 하나님의 부르심은 믿음으로 충만한 훈련에 동기를 부여한다.우리는 목표를 세울 때 미래를 내다보는 경향이 있다. 이미 끝을 염두에 두고 시작한다. 그러나 현명하게 계획을 세우는 사람은 원하는 삶의 모습을 먼저 상상한 다음에 역설계(reverse engineer)한다. 비전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이루는 데 필요한 습관과 헌신에 집중한다. 저자의 말을 관리하는 편집자로서 내가 그들을 존중하는 방식은 탁월함과 꼼꼼함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래서 올해는 The Copyeditor's Workbook(원고 편집자 워크북)이 제공하는 주간 연습을 통해 교정 능력을 키울 계획이다. 우리는 연습을 통해 기술을 배우고 악보를 보면서 악기를 연주한다. 탁월한 편집자가 목표이기에, 나는 반복해서 교정 연습을 할 계획이다. 이런 건 계획을 세울 때 나름 의미가 있다.그러나 나는 리델보스로부터 계획을 실천하겠다는 동기 부여는 목표를 내다보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약속과 그분의 구속 사역을 되돌아보는 과거에서 온다는 것을 배웠다. 바울이 그리스도인에게 우리의 죽을 몸에서 “죄가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라”고 말했을 때, 그가 그 명령의 근거로 삼은 건 다름 아니라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바울은 죄로 점철된 우리의 과거 삶의 방식이 예수님과 함께 이미 죽었다고 선언한다(롬 6:6). 바울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 은사를 사용하는 산 제물이 되라고 그리스도인을 도전한다. 그리고 그는 다시 과거를 되돌아본다. 그가 그런 명령을 내리는 근거는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심”(롬 12:1)이다.그리스도 안에서 어엿한 한 사람으로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결코 날것의 훈련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고전 15:10)는 말씀에 뿌리를 내린, 믿음으로 동력을 받는 훈련이다. 주님께서 내게 딸들을 주셨고 아빠로 부르셨기에, 나는 가족 예배와 부녀 데이트를 계획한다. 심지어 미래의 목표 달성을 위한 중심 영역인 직업에서도 나는 과거를 되돌아본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 직업 속에 심어놓으신 진리에서 동기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나의 소질과 소명은 다 그분께서 이미 예비하신 결과이다(엡 2:10). 이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을 돌아보는 것은 훈련된 그리스도인의 삶에 활력을 주지만, 하나님 중심의 관점은 그보다 더 많은 역할을 감당한다. 2.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야망을 제어한다. 계획에 충실하려면 결심을 실행하기 위한 일정을 잡아야 한다. 매년 초 나는 이상적인 주간 일정을 담은 스프레드시트를 작성한다. 그리고 월요일 아침마다 그것을 참고하여 그때그때 필요한 수정을 추가한 후, 다음 주 일정을 리걸패드에 세로로 정리한다. 또 아무리 회의와 약속이 많아도 규칙적으로 반드시 실행해야 하는 일이 적힌 구글 캘린더 일정만은 건드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나는 몇 년 동안 나름 꼼꼼하게 스케줄을 관리했다고 자부하지만, 여전히 내 모든 열망을 다 채우기에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은 거 같다. 때로는 게을러서 시간이 부족하기도 하다. 때로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트위터 대신 일을 하기도 하고, 또는 딸들과 함께 기도하기 위해 프라임 비디오(Prime Video)를 끄기도 한다. 오로지 하나님만을 향한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단지 죄 많은 게으름뿐만 아니라 지나친 야망까지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을 의미한다. 그건 다름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남편으로, 아버지로, 또 직장인으로 나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나의 한계를 아시며 나의 날수를 세신다는 것을 인정하고 기억하는 것이다. 어떤 주간에는 계획한 모든 일을 다 실행할 정도로 여유가 있다가도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하드 드라이브가 망가진다. 아이들은 아프다. 교통 체증으로 출퇴근 시간이 길어진다. 그 결과 매년 2월, 그리고 8월 그즈음이 되어서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는다는 게 분명해질 때마다, 나는 현실과 일치하는 목표를 만들기 위한 재조정 과정을 가진다. 나는 이것을 속임수 또는 포기로 보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매일 아침 기도 노트를 집어 들고, 체육관에 가고, 또 자기 전에 책을 읽는다. 하지만 원하는 만큼 책을 읽지 못하거나 운동을 거를 때면 깨닫곤 한다. 비록 내가 하나님만큼 바라는 것이 많을 수는 있어도 결코 하나님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복종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한다는 뜻이며, 나의 모든 계획도 오직 하나님이 주신 시간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결국 바울은 시간과 상황 때문에 계획을 바꾸어야만 했지만, 그 어떤 변동도 하나님의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여전히 “아멘, 그렇습니다!”라는 그의 확신을 흔들지는 못했다(고후 1:15-20). 바울에게 경건한 훈련이란, “내가 달음질한 것과 수고한 것이 헛되지 아니함”(빌 2:16)을 의미한다. 그것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이다(엡 4:1). 리델보스는 이렇게 말했다. “‘합당하다’는 것은 공로와 아무 관련이 없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동기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활동에서 파생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을 향해서 거룩하게 하셨고, 우리를 그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만드셨다.”당신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면, 당신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에 속한 한 사람이라면, 새해 계획은 오로지 하나님 중심의 믿음에 뿌리를 두고 세우도록 하라. 동기 부여가 필요할 때마다 그가 당신을 누구라고 선언했는지 되돌아보라.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여야 할 때마다, 인도하시는 그분의 손길을 믿음으로 바라보라. 원제: In 2023, Anchor Your Plans with a God-Centered Perspectiv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하나님중심관점
헤르만리델보스
새해
새해계획
우리 교회 제자훈련, 놓친 건 없을까?
by Elliot Clark
2023-01-08
제자도 하면 어떤 모습이 떠오르는가? 누군가에게는 커피를 마시며 하는 성경 공부, 또 거기에 기도와 서로 섬기고 돌봄까지 포함한 모임이 떠오를 수도 있다. 또 누군가에게는 사역 과정에서 수행하는 책임일 수도 있다. 내 신학교 생활은 수업과 관계없이 특히 나를 성장으로 이끈 시간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우리 교인 가정을 다니면서 제자훈련을 받았는데, 그들은 진정한 겸손과 인내, 봉사와 친절을 통해서 내게 더 나은 배우자와 부모가 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인생을 돌이켜보면, 나는 그동안 교육과 경험만이 아니라 성숙한 성도의 모범을 통해 천천히 제자로 만들어졌음을 깨닫는다. 나는 제자 삼는 모든 사역에 관한 성경적 패턴에는 본받음을 통한 이런 식의 성장(formation)이 반드시 포함된다고 믿는다. 일반적인 접근제자도에 관한 인식은 종종 서방 교회가 그리스도인의 성장을 추구하는 방식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내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제자 삼는 방법은 크게 다음 두 가지 기본 범주에 포함된다. 하나는 가르침을 통해서, 또 다른 하나는 위임을 통한 제자 삼기이다. 교육적 모델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종종 소수의 교사를 통해 제자훈련이 이루어지는 교회 출신이다. 이런 제자훈련은 주로 주일 아침 수업, 비공식 성경 공부, 강해 설교, 그리고 궁극적으로 성경 학교나 신학교에서 일어난다.누구나 자신이 훈련받은 방식으로 제자 삼는 경향이 있기에, 교육적 모델의 배경을 가진 서양 선교사는 종종 기독교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모든 말씀을 제대로 배우는 제자를 만들기 원한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에 기존의 인지적인 접근 방식에 대응하여 또 다른 제자훈련 방법이 등장했다. 가르침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에 많은 선교사가 위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새로운 신자를 즉각적으로 전도와 교회 개척 사역에 투입함으로써 그들의 제자됨을 증명하도록 하는 것이다.이러한 방법은 식민주의(colonialism)에 대응한다는 측면에서 동력을 얻었다. 서양 선교사가 토착 신자에게 가할 수 있는 외부 사상의 강요나 필요 이상의 영향력 주입을 피하도록 하는 데에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순수한 교육 모델, 특히 신학교 훈련으로 끝나는 모델은 개발도상국에서 느리고 비용이 많이 들며 제대로 구현이 안 되는 것으로 이미 입증되었다.교육 모델이 가진 한계를 인식하는 선교사는 그것을 넘어선 방법을 채택할 뿐 아니라 심지어 비판하기까지 한다. 머리로만 아는 지식이 아니라 섬기는 능력을 지닌 새로운 신자를 보기를 간절히 원하기에,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모든 것을 순종하는 제자를 삼고자 노력한다. 성경의 패턴그러나 두 가지 접근 방식이 다 성경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제자도는 교육과 위임이 다 필요하다. 그러나 온전한 제자 삼는 성경적 패러다임은 본받음을 포함하기에 단지 이 두 가지 접근 방식만으로는 불완전하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더 나아가 더 넓은 제자 공동체를 가르치는 데 많은 시간을 사용하셨다. 또한 짧은 시간 안에 사도들에게 책임을 맡기심으로, 그들이 예수님이 없어도 충분히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권세까지 주셨다.그러나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첫 번째 요소는 “그와 함께 있는 것”(막 3:14)이다. 복음서 전반에 걸쳐, 하나님 나라 선포이든, 귀신 축출이든,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임으로 알려주셨다. 예수님은 또한 제자에게 꼭 필요한 섬김과 고난을 본보기로 제시하셨다(막 8:34; 10:45). 교육받지 못한 갈릴리인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히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했을 때, 유대 지도자들은 그들이 “예수와 함께 있었다”(행 4:13)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가 처음 보여주신 것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가 그의 제자임을 세상에 입증할 것이라고(요 13:34-35).공유 경험과 본받음에 대한 강조는 예수님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제자 삼기에 대한 바울의 접근 방식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생생한 모범에 크게 의존했다(고전 4:17; 빌 3:17). 그는 가는 곳마다 성경을 가르쳤다(교육). 동료와 지역 주민이 자신이 없이도 얼마든지 봉사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었다(투자). 그러나 바울은 끊임없이 제자들을 모아 시간을 함께 보냈고, 자신의 사역에 동참하게 했다(행 20:4). 바울은 교회 지도자와 교인이 그를 본받아(고전 11:1; 살전 1:6; 딤후 3:10), 다른 사람들에게 본이 될 수 있기를 기대했다(살전 1:7 ; 딤전 4:12; 딛 2:7).바울의 제자도 여정을 관찰한 사람이라면, 제자도의 모든 단계에 있어서 바울은 새로운 신자를 향한 권위 있는 가르침이든, 궁극적인 사역의 위임이든, 계속해서 멘토링 모델을 사용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의 제자 삼는 모든 과정에는 모방이 스며들어 있다. 모방을 통한 형성물론 교육 모델에 전념하는 사람이라고 신자에게 책임을 부여하는 위임에서 항상 실패한 것은 아니다. 위임을 통한 사역 경험을 강조하는 사람이 성경 교육에 관심이 없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제자 양육을 위한 성경적 모델이 교육과 위임과 모범을 다 포함하는 게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성숙(Christian formation)에 대해서 더욱 관계적인 접근 방식을 취해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가 따르는 사람들에 관해서 좀 더 잘 알아야 한다(히 13:7).서구식 선교 방법은 사역을 주로 정보와 거래 중심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가르치거나 책임을 전가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가 모델이 되고, 멘토가 되고, 또 무엇보다 서로 함께해야 한다. 이런 풍토는 신자들이 서로를 환대하고 책임을 다하는 지역 교회의 상황 속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교회 내에서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모범의 가치는 단지 중재된 존재 또는 가상 모임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충실한 제자를 삼을 수 있다는 가정을 약화시킨다. 본받음이 성숙의 중심이라면, 교회가 의미 있는 관계를 제공하는 물리적 존재가 되지 않고서는 제자훈련이라는 중심 과제에서 교회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선교를 예로 들자면, 단기 선교, 가상 훈련, 또는 부업 차원에서 촉매제 및 컨설턴트로 봉사하는 선교사와 함께해서는 결코 제대로 된 제자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이런 사실은 지역 교회가 사역자나 선교사를 찾을 때 단순히 학력(교육)이나 경험(위임)만을 고려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시사한다. 거기에 더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본받음). 당당하게 나의 삶을 닮으라고 말할 수 있는 입증된 성품을 갖춘 후보자를 찾아야 한다. 성경 공부와 개인적인 관찰을 통해 나는 주님이 주신 지상명령이 단지 교육이나 위임을 통해서만 성취되는 것이 아님을 확신한다. 눈에 띄는 행실, 모범적인 봉사, 희생적인 사랑을 통해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길 때 진정한 제자도는 실현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게 어떤 모습인지를 온몸으로 보여줌으로써 우리는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을 수 있다. 원제: Is Your Discipleship Model Missing Something?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제자훈련
제자도
제자됨
모범
본받음
지상명령
모던과 포스트모던이 분리되지 않은 세계관을 위하여
제임스 K. A. 스미스의 세계관 읽기_3
by 김경호
2023-01-07
기독교 세계관 운동 2.0 위하여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SIEW)과 함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섭니다.지난 두 편의 글을 통해서 제임스 스미스의 세계관이 가진 장점을 충분히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공평하게, 스미스의 주장에 대한 비판점을 살펴볼 차례입니다. 스미스의 주장 스미스는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에서 자신의 기본 주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기독교 세계관은 기독교 신념, 사상, 교리의 체계가 아니라 마음과 욕망의 형성에 관한 문제, 즉 지성이 아니라 상상력을 변화시키는 문제이다. 그리고 이러한 형성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급진적인 제자를 형성하는 것이고, 이는 기독교 교육과 예배의 근본 목적이다. 스미스의 이러한 주장은 일련의 매커니즘으로 도식화됩니다. 먼저, 출발점은 인간론입니다. (1) 인간은 욕망하고 사랑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2) 이 욕망과 사랑은 좋은 삶에 대한 전망을 보여주는 어떤 목적에 이끌리고, 상상력(or 정서)에 사로잡힌다. (3) 이러한 욕망과 사랑, 그리고 목적은 몸에 새겨진 습관을 통해 “자동적 무의식적 실천”이 이루어진다. 몸의 자동성은 오랜 시간 반복되고 지속적으로 실천될 때 이루어진다. 스미스의 주장에 대한 비판 먼저, 개혁주의 신학에서 인간은 마음, 즉 “지-정-의”를 통해 실천(형성)해 나가는 존재로 이해해 왔습니다. 예배가 삶의 핵심인 것은 옳습니다. 그러나 형성은 예배만이 아니라 양육과 교제, 선교로 구성된 교회를 통해 유기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런 형성에는 철학적 인간론이 아니라 “영혼과 몸” 또는 “지-정-의”라는 성경적 인간론이 그 출발점입니다. 그러나 스미스는 이런 전통적 견해로부터 이탈된 급진적 정통주의의 입장에서 욕망-사랑, 몸-습관을 통해 형성해 가는 철학적 인간론으로 설명합니다. 이런 점에서, 스미스의 입장이 과연 전통적인 개혁주의의 입장인지 이론적 측면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나는 스미스의 주장에 대한 주요 비판점을 “예배”로부터 시작되는 “욕망-사랑,” “몸-습관-형성,” 그리고 “이야기-목적-상상력”이라는 세 가지 요소로 보고, 그 장단점을 비판적으로 분석해 보고자 합니다. 비판 1: 인간은 욕망하고 사랑한다. 인간은 예배로부터 시작되는 욕망하고 사랑하는 존재라는 점, 이것이 스미스의 세계관의 출발점입니다. 그 근거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빌려온 것입니다. 핵심 문장은 이것입니다: “사랑할 대상에 대해서 서로 합의함으로써 뭉친 이성적 존재들!” 그리고 여기서 “인간은 사랑하는 존재다”라는 명제가 나옵니다. 그러나 스미스는 자신이 차용한 이 근거 구절을 좀 더 복잡하게 서술합니다. 즉, 인간은 욕망하며 사랑하는 존재라고 말하며, 욕망과 사랑을 동일 의미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하나님의 도성에서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 책의 8권 6장 각주 2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참된 사랑이라야 사랑이라고 부를 것이며 그렇지 않은 것은 욕망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과 욕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스미스는 일방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이 책에서 사랑과 욕망을 구별하지 않았고, 에로스와 아가페도 구별하지 않으려 했다. … 이와 관련해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카리타스caritas와 쿠피디타스cupiditas 사이의 구별이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나는 이 둘 모두 서로 다른 방향을 지향하는 델렉타티오delectatio라고 본다.” 여기서 스미스는 자신의 견해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있으며, 마지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해석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에 부합하는지는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맡긴다.” 나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정의한 사랑과 욕망의 개념을 분명하게 구별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런 점에서 스미스는 기존 용어가 가지는 의미와 정의를 자의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비판 2: 인간은 자신과 사회적인 몸에 새겨진 습관을 통해 실천한다. 먼저, (1) 메를로퐁티는 지각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지각이라고 부르는 것은 지식의 기만적 단순성과 대조를 이루는 현장의 불분명하고 모호하며 거친 현실이다.” 조금 더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지각은 판단과 분석, 지식을 가능하게 하는 배경입니다. 이런 지각을 메를로퐁티는 “신체적 앎”으로, “지식보다 앞서며 몸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일종의 지향성을 통해 환경을 헤쳐 나가는 행위자” 즉 “의식보다 앞선 선지식”preconcious knowledge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오랜 시간에 걸쳐 구축된 습관화된 몸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스미스는 몸의 작동이 행위자 자체에게 무의식적이고 숨겨진 것임을 강조합니다. (2) 부르디외는 메를로퐁티가 지각이라고 부른 것을 아비투스(습관)라고 명명합니다. 아비투스는 두 가지 특징을 가집니다. 첫째, 아비투스는 영속적이며 치환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아비투스는 사회적 몸이 내 몸보다 우선합니다. 둘째, 특정한 방식으로 세상을 구성하는 전수된 이 성향은 ‘의식적 지향’ 없이 기능합니다. 그러나 아비투스는 의식적일 수도 있지만, 무의식적 지향이 의식적 지향보다 우선합니다. 그러나 스미스의 이러한 주장은 그가 인용한 근거자료와 일치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스미스가 인용한 메를로퐁티와 브르디외의 무의식적-자동적 형성은 형성의 한 면만 강조하고 있습니다. 일단 스미스가 인용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도덕적인 덕”이 “습관”을 통해 완성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습관은 지성과 분리되지 않으며, 오히려 지성을 통해 더 탁월한 행위를 가지게 됩니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의 의도는 습관을 지성과 분리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연결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근대의 존 듀이John Dewey의 인간본성과 행위에서도 발견됩니다. 듀이는 이렇게 간략하게 그 핵심을 말했습니다. “어떠한 습관 형성이든 예외 없이 지적 독특함이라는 초기 단계를 거치지만 지속적으로 성찰되지 않는다면 사유 없는 행동으로 끝나버린다.” 또한 “습관들이 서로 갈등하고 충동이 불러일으켜지면, 비로소 의식적 탐구가 이루어진다.” 따라서 사유와 습관은 분리되지 않고 연결됩니다. 비판 3: 예배하는 인간은 이야기에 의해 목적에 이끌리고 상상력에 사로잡힌다. (1) 이야기. 스미스는 인간을 “세상에 대한 우리의 지향이 이야기에 의해 근본적으로 형성되는 서사적 동물”이라고 정의합니다. 이러한 서사, 즉 이야기가 우리의 감정적 지각 장치를 훈련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2) 이야기와 상상력. 이야기는 상상력으로 더 잘 이해가 되고, 철학적 인간론에서 이야기에 핵심 역할을 부여합니다. 따라서 “예전적 인간론은 이러한 몸/이야기의 결합체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3) 이야기와 상상력과 목적. 또한 이야기는 “미학적 수단으로 우리의 상상력을 사로잡는 예전에 몰입하기 때문에 우리는 오랜 시간에 걸쳐 특정한 텔로스를 욕망하는 사람으로 형성된다.” 좀 더 명확한 문장은 이렇습니다. “예전은 좋은 삶의 수행된 그림, 우리의 상상력을 사로잡고 그에 따라 우리의 사랑과 갈망을 방향 짓는 왕국에 대한 전망의 상연된 수행으로서 은유와 서사와 드라마의 역학을 전달한다.” 종합해 보면, 예배는 이야기에 의해 상상력을 건드리며, 텔로스를 욕망하게 합니다. 그러나 스미스의 형성 개념은 이야기, 상상력, 목적과 연결된 논리입니다. 여기서 나의 고민은 스미스가 제시하는 이야기, 목적, 그리고 상상력이 포스트모던의 상황에만 한정하여 설명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에 따른 비판점은 이것입니다: 과연 모던과 포스트모던은 현재 분리된 것으로 볼 수 있는가? 제임스 사이어는 “포스트모더니즘을 근대의 가장 최근 단계로, 자연주의의 가장 최근 형태로 간주”하고, “포스트모더니즘 속에는 근대주의의 본질(신 없는 우주, 인간 이성의 자율성)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강조합니다. 또한 마이클 고힌과 크레이그 바르톨로뮤도 동일한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모던과 포스트모던이 분리되지 않고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지금 현시대의 상황은 네 가지의 징후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포스트모던” “소비주의와 세계화” “남반구 기독교의 부흥” 그리고 “이슬람교의 부흥”입니다. 그러나 이 네 가지 가운데 실세는 포스트모더니즘만이 아닙니다. 아직도 현실 속에서는 우리의 사회, 정치, 경제생활의 많은 부분을 모더니즘이 형성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모더니즘은 포스트모더니즘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세계화의 과정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던과 포스트모던은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이런 측면에서, 대안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야기”만으로는 이 시대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모던과 포스트모던이라는 두 가지 실세에 대한 인식하에, “이야기”와 “명제성” 또한 함께 가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앨리스터 맥그라스의 주장이 우리에게는 큰 실마리가 됩니다. 맥그라스는 성경의 구조에서 교리(명제성)와 내러티브의 상관관계에 주목합니다. 일차적으로 성경 안에서 내러티브와 교리는 서로 얽혀 있습니다. 성경은 교리적 진술이나 추상적 원리라는 방식보다 주로 살아온 삶과 역사적 실존을 가리키는 내러티브 방식으로 서술됩니다. 맥그라스가 이 둘의 관계에서 주목한 점은 “내러티브에서 교리로의 전환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입니다. 맥그라스는 이 질문을 통해 그 상관관계를 설명합니다. 맥그라스는 구스타프 아울렌Gustaf Aulen의 고전적 속죄론인 승리자 그리스도,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의 논쟁(예수의 두 본성), 그리고 성육신 교리를 다루면서, 교리와 내러티브 사이의 상호작용이 있음을 분석해 냅니다. 이 상호작용은 한편으로는 “교리는 성서적 내러티브를 해석할 수 있는 개념적 틀을 제공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교리는 임의적 틀이 아니라 내러티브에 의해 제안되고 암시되는 것입니다. 맥그라스는 내러티브로부터 제안되는 암시를 개념적 틀, 개념적 하부구조, 준-교리적 암시라고도 표현합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내러티브는 일차적이고. 개념적 틀은 이차적입니다. 교리와 내러티브 간의 상호작용은 점진적이고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차원의 해석으로 나아가며, 개념적 틀은 하나의 교리로 확장됩니다. 맥그라스의 교리와 내러티브에 대한 논증의 장점은 교리가 외부 출처로서의 계몽주의적 전제에 의해 연역된 것이 아니라(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의의 개념) 성경적 내러티브 자체로부터 해석되고 추론됨을 제시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의 내러티브는 내러티브에서 파생되는 개념적 틀보다 근원적이며, 우월하며, 평가의 기준이 됩니다. 그러나 성경적 내러티브 자체만으로는 암시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결함이 있으며, 따라서 내러티브는 교리에 의해 해석되어야 한다고 제시한 것입니다.스미스의 세계관 읽기 전체 평가. 긍정적 측면. 스미스의 세계관이 제시하는 바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첫째, 예배로부터 시작하고 형성되는 교육적 가치가 있습니다. 또한 이 형성은 예배로부터의 형성과 함께, 이야기를 통해 상상력에 이끌리고, 목적에 사로잡히는 독특한 “매커니즘”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둘째, 이러한 형성에는 역학이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구체적으로 형성, 잘못된 형성, 대항적 형성, 경쟁적 형성과 같은 역학들입니다. 셋째, 이러한 형성의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교회론으로서의 민족지학을 제안한 점입니다. 부정적 측면. 그러나 스미스의 세계관이 제시하는 바에 부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첫째, 스미스의 모던과 포스트모던에 대한 인식에 한계가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모던을 배제하고 포스트모던적 요소만 인정합니다. 그러나 모던과 포스트모던은 그런 식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셋째, 스미스는 그가 인용한 학자들의 주장을 선택적으로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스미스가 인용된 학자들의 주장에는 대부분 지성이 포함되어 있지만, 스미스는 자신의 전제에 따라 의도적으로 그 사실을 배제한다는 점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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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자, 지혜를 복리로 쌓으려면!
by Tim Casteel
2023-01-06
성경 읽기는 복리 이자를 쌓는 것과 비슷하다. 중단 없이 꾸준히 읽는다면 당신의 이해력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것이다. 어떤 면에서 성경은 어린아이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단순하다. 동시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게 성경이다. 평생 읽어도 결코 그 깊이를 측량할 수 없다.내 인생에서 가장 큰 후회는 왜 더 빨리 성경에 깊이 빠지지 못했는가 하는 것이다. 지난 25년 동안 전임사역자 섬기면서도 매년 성경 전부를 통독한 것은 고작해서 지난 8년 동안이다. 25년 전부터 성경을 통독했더라면 내가 얼마나 달라졌을까 생각하면서 안타깝기 그지없다. 시작하기성경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와 비슷하다. MCU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어도 얼마든지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보고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인생에서 딱 50시간 정도를 투자하여 엔드게임으로 이어지는 마블 영화 21편을 모두 본다면, 결말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MCU에 대해 수년 동안 배운 사람의 경우 훨씬 더 깊은 수준에서 마지막 전투를 이해하고 즐길 수 있다.성경도 그와 비슷하다. 하지만 천 배는 더 깊은 수준에서 작동한다. 성경은 6,0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실로 다양한 테마를 거의 눈에 보이지 않는 실이 짜놓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양탄자와 다르지 않다. 예를 들어, 성경을 읽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수록 “나는 선한 목자이다”(요 10:11)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더 큰 의미가 되어서 다가온다. 예수님의 말씀보다 600년 전에 쓰인 에스겔 34장에서 하나님은 잃어버린 양을 구하기 위해 강림하신다고 선포하셨다. “참으로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나의 양 떼를 찾아서 돌보아 주겠다. 양 떼가 흩어졌을 때에 목자가 자기의 양들을 찾는 것처럼, 나도 내 양 떼를 찾겠다. … 내가 그들 위에 목자를 세워 그들을 먹이도록 하겠다. 그 목자는 내 종 다윗이다.” 하나님은 창세기, 시편, 이사야, 예레미야, 호세아, 미가, 그리고 스가랴에서도 목자로 나타나신다. 그러므로 선한 목자라는 예수님의 주장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깊이 있는 의미가 있다.신약은 구약을 몇 번 읽으면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 누가, 바울, 그리고 베드로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어린 시절부터 보면서 자란 성경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만 신약성경의 큰 주제가 완전한 영광으로 뚜렷하게 보인다. 부는 한 번에 축적되지 않는다. 워런 버핏의 자산은 1,070억 달러로, 그중 1,067억 달러는 쉰 살 생일 이후에, 1,030억 달러는 예순다섯 살 이후에 쌓은 것이다. 버핏의 비밀은 시간이다. 부를 얼마나 쌓는가는 얼마나 빨리 시작했는가에 달려 있다. 성경에 들어 있는 보물도 마찬가지이다. 지혜를 쌓고 싶은가? 어릴 때부터 읽기 시작하라. 내가 어렸을 때 누군가 내게 규칙적인 성경 읽기에 투자하라고 말해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돈을 버는 것과 마찬가지로, 과거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할 수는 없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건 오늘부터 성경을 곁에 두는 것이다. 꾸준히 성경 읽기를 즐기게 되는 다섯 가지 이유1. 두뇌가 점점 더 읽기에 최적화될 것이다. 당신도 아마 대부분 다른 사람들처럼 책을 별로 읽지 않을 것이다. 수년간의 디지털 장치 때문에 인간의 두뇌는 이제 아예 집중하지 못하도록 프로그래밍 되었다. 지난 십 년의 세월이 파편처럼 부숴버린 두뇌를 단 한두 주 만에 되돌릴 수는 없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 뇌가 스스로 재배열되어 집중하고 더 깊이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성경 읽기를 점점 더 좋아하는 당신의 모습에 놀라지 말라. 2. 흩어진 단서를 연결하는 희열을 알게 된다. 독서는 지혜와 지식의 문을 연다. 책 읽기 광인 패트릭 오쇼너시(Patrick O'Shaughnessy)는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한다. “독서를 시작할 때, 당신은 별자리 속에서 상호 뚜렷한 연관성이 없는, 멀리 떨어진 점을 하나씩 모으기 시작한다. … 십 년이 지난 지금, 나는 불완전하지만 조밀하게 상호 연결된 점을 가지게 되었다. … 독서는 하면 할수록 더 큰 즐거움을 준다.”많은 사람에게 성경은 마치 뚜렷한 연관성이 없는 많은 점을 모아 놓은 집합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혼란스러운 느낌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계속 읽으라. 열두 살짜리 우리 아이는 이번 여름부터 성경 읽기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성경책 넓은 여백에 질문을 쓴다. 이건 무슨 말이지? 이 나라는 어디에 있지? 왜 이렇게 말하는 거지? 최근에는 시편 66:5-6(“와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보라. … 그가 바다를 마른 땅으로 변하게 하셨으니”)의 여백에 이렇게 적었다. “이게 좋은 거야, 나쁜 거야?” 아주 좋은 질문이다. 보통 마른 땅은 저주이자 형벌이다. 하지만 지금 시편 기자가 언급하는 것은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널 때 받은 하나님의 자비이다. 이런 식의 연결은 하나님의 말씀에 더 친숙해짐에 따라 성경 모든 곳에서 나타날 것이다. 3. 지식 기반이 늘어날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지식을 간직한다”(잠 10:14). 축적된 지식과 지혜는 함께 간다. 매리언 울프(Maryanne Wolf)는 다시, 책으로: 순간접속의 시대에 책을 읽는다는 것(Reader, Come Home: The Reading Brain in a Digital World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평생 우리가 읽는 모든 것이 이해 능력의 기초가 되는 지식 저장소에 추가된다. … 그건 무엇을 읽건 관계없다.” 읽을 때마다 우리는 사실상 지식 은행에 예금을 한다. 여러 해 동안 쌓아온 지혜를 인출할 때, 성경의 위대한 진리는 실로 찬란하게 빛날 것이다. 4. 독서는 습득해야 하는 기술이다. 깊은 독서는 깊은 생각을 낳고, 깊은 생각은 깊은 독서를 하도록 한다. 아름다운 선순환이 발생하는 것이다. 매일 성경 읽기에 고작 2분을 할애하면서 많은 것을 기대하지 말라. (물론 2분도 아예 안 읽는 것보다는 낫다!) 어렵더라도 끊임없이 읽으면, 어려운 내용도 점점 더 쉽게 읽을 수 있게 된다. 두뇌를 말씀으로 채우는 것이 어려워도 낙심하지 말라. 시간을 충분히 가지면서 성경을 읽어라. 그리고 말씀이 당신 앞에서 어떻게 열리는지를 확인하라. 5. 성경은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오래된 책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알려지기를 원하셨고, 그렇기 위해서 책을 쓰셨다. 당신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면, 그의 영이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지혜를 이해하도록 도와주실 것이다(요 16:13). 정기적으로 성경 읽기 습관을 갖겠다는 당신에게 그 사실은 큰 격려가 된다. 이전에 성경 읽은 적이 없더라도 걱정하지 말라. 2023년을 당신의 해로 만들어 보지 않겠는가? 미래의 당신이 2023년의 당신에게 고맙다고 말할 것이다. 원제: Read Scripture for Compounding Interest in 2023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성경읽기
독서
새해에도 변하지 않을 진실, 다섯 가지
by Phil Thompson
2023-01-05
2020년부터 나는 삶의 모든 규범, 내가 살면서 기대하던 모든 것이 한순간에 뒤집히고 뒤바뀔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꼈다.새해에 자동차 대출을 받을 수 있을까? 달러의 구매력이 행여 약해지는 건 아닐까? 우리 아이들의 문제가 나아질까, 아니면 나빠질까? 새로운 친구를 사귈 수 있을까, 아니면 행여라도 나를 배신하는 친구를 만나는 건 아닐까? 정치가 교회에 더 깊은 분열을 일으키는 건 아닐까? 누구나 새해에 대해서 아는 건 별로 없다. 그러나 말씀으로 돌아가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성경, 거기서도 특히 시편 90편은 달력이 12월에서 1월로 넘어가는 기간에 특히 더 중요한 변함 없는 진실들을 알려준다. 1.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이시다.주님은 대대로 우리의 거처이셨습니다. 산들이 생기기 전에, 땅과 세계가 생기기 전에,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시 90:1-2)해를 거듭할수록 내 삶에서 가장 큰 진리는 하나님의 임재는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거기에 계시고, 앞으로도 계실 것이다. 올해 내가 어디에 있든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실 것이다. 아무리 거센 폭풍이 몰아쳐도 하나님은 항상 나를 위해 계실 것이다. 나는 모세가 그 옛날 이 시로 드린 기도를 좋아한다. 그는 단지 저 밖에 계신 추상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거처이신 하나님, 내 삶의 중심에 계신 하나님, 내 생명이 위협받을 때 당장 달려오시는 하나님을 묘사했고, 바로 그 하나님에게 기도했다. 2. 올 한 해도―내 삶도―사라져갈 것이다.주님께서는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죽을 인생들아, 돌아가거라” 하고 말씀하십니다.주님 앞에서는 천년도 지나간 어제와 같고, 밤의 한순간과도 같습니다.주님께서 생명을 거두어 가시면, 인생은 한순간의 꿈일 뿐, 아침에 돋아난 한 포기 풀과 같이 사라져 갑니다.풀은 아침에는 돋아나서 꽃을 피우다가도, 저녁에는 시들어서 말라 버립니다. (시 90:3-6)두 번째 진실은 나쁜 소식이다. 안전한 거처가 필요한 이유는 삶이 안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눈 깜짝하는 사이에 11월이 다가올 것이고, 우리는 다시 한번 연휴의 분주함에 빠져들 것이다. 올해에도 놓친 기회, 비생산적인 주간, 그리고 수많은 좌절된 계획이 있을 것이다. 올해에도 사람들은 이곳저곳에서 죽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성이 변함없듯, 인류의 필멸성과 인간 노력의 일시성도 변하지 않는다. 3. 죄 때문에 생긴 슬픔과 고통이 더 날뛸 것이다. 주님께서 노하시면 우리는 사라지고, 주님께서 노하시면 우리는 소스라치게 놀랍니다.주님께서 우리 죄를 주님 앞에 들추어 내놓으시니, 우리의 숨은 죄가 주님 앞에 환히 드러납니다.주님께서 노하시면, 우리의 일생은 사그라지고, 우리의 한평생은 한숨처럼 스러지고 맙니다.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빠르게 지나가니, 마치 날아가는 것 같습니다. 주님의 분노의 위력을 누가 알 수 있겠으며, 주님의 진노의 위세를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시 90:7-11)또 다른 “불변의 나쁜 소식”은 올해가 단지 나를 삶의 끝으로 일 년 더 가까이 보내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올해에도 반드시 어느 정도의 악이 세상을 채울 것이다. 고통과 박해, 질병과 슬픔이 우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올해에도 내 몸에서 아담으로 인한 죽음의 먼지를 느낄 것이다. 삶과 가정, 직장에서도 저주의 고통을 느낄 것이다. 피조물이 탄식할 때 나는 함께 실망의 “한숨”을 내쉴 것이다(롬 8:22-23). 올해에도 나는 나의 더러운 죄성을 더욱더 분명하게 볼 것이며, 그로 인해 받게 될 진노가 더욱더 커질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4. 하나님의 자비의 언약에 내가 만족할 것이다. 우리에게 우리의 날을 세는 법을 가르쳐 주셔서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해주십시오.주님, 돌아와 주십시오. 언제까지입니까? 주님의 종들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아침에는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채워 주시고, 평생토록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해주십시오.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 수만큼, 우리가 재난을 당한 햇수만큼,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십시오. (시 90:12-15)그다음 진리는 삶의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소망의 광선이다. 삶의 불만족 속으로 하나님께서 만족을 가져다주실 것이다. 슬픔 속으로 기쁨을, 깊은 고통 속으로 환희를 가져다주실 것이다. 잃어버린 세월은 잠시요, 회복의 시간은 영원이다. 눈을 뜨고 똑바로 보면, 새로운 달력을 꺼내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 이생과 내생을 아우르는 위대한 진리에 비추어 우리 삶을 점검할 기회이다. 새해에는 나를 하나님의 품으로 더 깊이 인도하여 그의 품을 기뻐하고 그의 다시 오심을 더 간절하게 갈망해야 한다. 또 다른 해를 만난다는 것은 그의 나라가 도래하고 그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더욱더 간절하게 바라는 새로운 시간이 시작했다는 의미이다. 5. 하나님은 나의 노력에 항상 미소 지으실 것이다.주님의 종들에게 주님께서 하신 일을 드러내 주시고, 그 자손에게는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 주십시오.주 우리 하나님,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셔서, 우리의 손으로 하는 일이 견실하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의 손으로 하는 일이 견실하게 하여 주십시오. (시 90:16-17)마지막 진리는 단지 낙심한 마음을 격려하는 것을 넘어 연약한 나의 손을 강하게 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의로 말미암아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행복을 알게 되었다. 주의 은혜를 힘입어 우리는 새해를 맞았다. 가정과 직장과 교회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삶에 더 임하기를 기도하며 힘차게 섬겨야 한다.하나님의 은혜라는 태양 아래에서 일하기에 우리에게는 올해에 만날 각종 수고와 어려움, 고난과 좌절도 근심거리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님은 내 삶에 하나님의 미소를 영원히 보장하셨다. 새해에도 이 변덕스러운 나를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변함없으신 일을 이루어나가실 것이라 나는 확신한다. 원제: 5 Constants for the New Yea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하나님의불변성
새해
모세의시
시편90편
‘어메이징 그레이스’의 놀라운 사실들
노예상이 만든 노예들의 영가
by Bruce Hindmarsh
2023-01-04
1773년 1월 1월, 250년 전 새해 첫날, 잉글랜드 소읍 올니(Olney)의 한 교회에서 최초로 “어메이징 그레이스”가 불렸다.곧장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점차 이 찬송은 아메리카에서 교파를 넘어 모든 교회로 널리 퍼져나갔다. 이 찬송은 서부 개척자들에게는 부흥 성가가, 흑인 교회에서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영가가, 그리고 20세기에는 찬송가의 표준이 되었다. 그다음에는 1947년에는 머헤이리어잭슨(Mahalia Jackson)이, 그리고 1970년에는 주디 콜린스(Judy Collins)가 음반으로 내는 등 라디오 시대와 함께 음반 시장으로 확대되었다.그 이래로 이 찬송은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고 인지도 높은 찬송이 되었다. 그리고 이 찬송은 널리 퍼져나가기만 한 것이 아니라, 깊숙이 파고들기도 했다. 극심한 불행이 닥쳤을 때 사람들이 찾는 노래가 바로 이것이다. 희망을 잃어버렸을 때, 우리는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부른다.그렇지만, 다들 익숙한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어메이징 그레이스”에 대해서 우리가 잘 모르는 것이 적지 않다.1. 미국 의회 도서관에 ‘어메이징 그레이스’ 컬렉션이 있다.미국 의회 도서관은 3,000편이 넘는 “어메이징 그레이스” 연주곡을 소장하고 있다. 이 소장 곡들은 1930년대부터 2000년 사이에 LP, 카세트테이프, CD 및 기타 형태로 녹음된 것들이다. 이 컬렉션에는 클래식에서 컨트리 음악, 가스펠에서 랩, “월드 뮤직”에 이르기까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장르가 포함되어 있다.2. ‘어메이징 그레이스’의 한 구절은 사라졌다.‘어메이징 그레이스’의 오리지널 버전은 여섯 절이 있었지만, 1910년에 에드윈 오셀로 엑셀(Edwin Othello Excell)이라는 진취력 넘치는 찬송가 발행인이 마지막 세 절을 “When we’ve been there ten thousand years(거기서 우리 영원히)로 시작하는 절로 대체했다. 그는 이 절을 70절이 넘는 “예루살렘, 행복한 우리 집”(Jerusalem, Our Happy Home)이라는 찬송가에서 가져왔다. 그는 아무도 이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 하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또한 예민한 사람들의 눈에는 문법에도 오류가 있다. “We’ve no less days to sing God’s praise”(더 많은 날을 하나님을 찬양하며 노래하리라)에서 “less days”는 “fewer days”가 되어야 한다.)3. ‘어메이징 그레이스’의 백파이프 연주는 최근에 이루어진 혁신이다.엄숙한 국가 행사나 장례식에서 백파이프 연주곡으로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들을 때마다 우리는 자연스레 이것이 오랜 전통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Royal Scots Dragoon Guards(영국육군기병대)가 이 노래를 백파이프 연주곡으로 녹음하여 인기를 얻게 된 것은 1972년이었다. 이 군악대의 “Amazing Grace” 연주곡은 빌보드 탑 40에 8주나 올랐다.4. 원래 제목은 ‘어메이징 그레이스’가 아니었다.첫 제목은 “Faith’s Review and Expectation”(신앙의 회고와 기대)였다. 새해를 맞이하여 지나온 날을 돌아보고(회고) 앞날을 내다보면서(기대) 지은 노랫말이기 때문이다. 이 찬송가는 우리가 수많은 위험과 노고와 유혹 가운데 있을 때 우리를 붙잡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의 눈으로 돌아본다. 또한 우리가 견디며 살아가는 여정에 항상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것임을 알기에, 용기와 확신으로 앞날을 내다본다.5. ‘어메이징 그레이스’의 원곡은 미상이다.널리 불리고 있는 현재의 곡은 1829년에 처음 출판된 “뉴브리튼”(New Britain)이라는 곡이다. 그러나 이 가사가 250년 전에 처음 공개되었을 당시에는 악곡 모음집이 따로 있어서, “Amazing Grace” 같은 “보통 운율”(common meter) 찬송가를 거기에 맞추어 불렀을 것이다. ‘어메이징 그레이스’의 노랫말을 붙여 부른 초기 가락의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곡조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뉴브리튼”은 대중적인 5음 음계(피아노의 검은 건반)를 기반으로 하는데, 이것이 폭넓은 호소력을 얻는 데 이바지했다.6.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노예 무역상이었던 사람이 썼음에도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영가가 되었다.“어메이징 그레이스”는 오랫동안 아프리카계 미국인 교회에서 흑인 복음성가로 애창되고 있으며, 머헤이리어 잭슨, 어리서 프랭클린(Aretha Franklin), 제시 노먼(Jessye Norman), 윈틀리 핍스(Wintley Phipps) 등 많은 사람이 인상 깊고 인기 있는 공연을 펼쳤다. 그러나 그 노랫말을 지은 이는 전직 노예무역선 선장 존 뉴턴이다. 그는 노예무역업에서 떠나 20년이 지난 후, 잉글랜드의 미들랜드에서 성공회 목사로 있을 때 이 노랫말을 지었다. 그는 나중에 런던으로 이주하여 노예무역을 폐지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윈틀리 핍스는 이렇게 말했다. “이 노래가 이렇게 지어진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흑인이든 백인이든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시길 바라셨기 때문이라고 확신한다.”7.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다윗의 시를 의역한 것이다.존 뉴턴은 1773년 새해 첫날 역대상 17:16-17을 본문으로 설교하였는데, 그는 이 설교에 맞춘 시로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지었다. 그리고 6년 후에 이 성경 구절을 그대로 달아서 이 노래를 발표했다. 이 성경 본문에서 다윗 왕은 다윗의 후손과 그의 왕국을 영원히 이어가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전한 예언자 나단의 예언에 놀라움으로 응답한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기도했다. “주 하나님, 내가 누구이며 내 집안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나를 이러한 자리에까지 오르게 해주셨습니까?” 달리 말하면, 다윗은 이렇게 말씀드린 것이다.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That saved a wretch like me”(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다윗은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알게 된 살인자요 간음한 자였다. 그러한 다윗에게 하나님께서는 그의 후손을 통해 은혜를 베푸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은혜는 다윗의 위대한 자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마침내 성취될 것이었다.8.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영혼의 훈련이다.존 뉴턴이 이 찬송 시를 지었을 때, 이 노래는 그 자신을 꾸준히 점검하는 단련의 한 부분이었다. 그는 지난날 자신이 지은 죄와 하나님이 베푸신 자비를 되새기기 위해서, 오늘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기 위해서, 그리고 장차 이루실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드리기 위해서 시간을 따로 떼어 놓고 훈련했다. 그는 1773년 1월 1일의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이제 마흔아홉 살이 되었다. 길게 잡아도 몇 년 후에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갈 것이다. … 당신이 정하신 대로 제가 변화될 그날을 주님의 은혜로 항상 기다릴 수 있게 하소서.” 이러한 점에서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하나님의 은혜가 지금까지 우리를 어떻게 구원해 주셨는지, 또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어떻게 본향으로 인도하실 것인지를 기도하며 묵상하는 영혼의 훈련이었다.뉴턴의 회중이 처음 이 찬송을 부른 지 250년이 지난 오늘에도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우리가 부르고 또 그 노랫말을 되새기면서 그치지 않고 계속해 나가야 하는 일상의 수련이다.‘어메이징 그레이스’에 관하여 더 많이 알고 싶은 이들에게 곧 나올 Bruce Hindmarsh와 Craig Borlase가 함께 쓴 다음 책을 권합니다: Amazing Grace: The Life of John Newton and the Surprising Story Behind His Song원제: 250 Years Ago Today: John Newton’s ‘Amazing Grace’ First Sung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어메이징그레이스
나같은죄인살리신
존뉴턴
회심
교황 베네딕토 16세(1927-2022): 그의 삶과 유산
by Leonardo De Chirico
2023-01-02
요제프 라칭거(교황 베네딕토 16세)가 95세로 2022년 12월 31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었다. 며칠 전, 그의 후임자인 프란치스코 교황은 베네딕트의 임종을 앞두고 전 세계 로마가톨릭 신자들에게 그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다.베네딕토는 20세기 로마가톨릭 신학계에서 탁월한 인물에 든다. 1927년에 태어난 베네딕토의 인상 깊은 삶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신학 전문가, 뮌헨과 본, 뮌스터, 레겐스부르크(1957-1977)에서 역임한 다양한 교수직도 포함된다.그는 뮌헨 대주교(1977-1981)이자 추기경이었으며, 신앙교리성 장관(1981-2005)이었다. 마침내 그는 교황(2005~2013)이 되었고, 성 학대 추문, 불투명한 재정 운용, 바티칸 내부의 끔찍한 음모 속에서 2013년에 사임하여 명예 교황이 되었다. 그의 오페라 옴니아(Opera Omnia/전집)는 총 16권으로 이뤄져 있는데, 학문적 깊이를 겸비한 이 저작은 신학과 교회 생활의 거의 모든 측면을 다루고 있다.베네딕토의 저작은 오늘날 로마가톨릭교회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영적인 삶베네딕토의 영적인 삶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가 독일 언론인 페터 제발트(Peter Seewald)와 가진 인터뷰, Light of the World: The Pope, the Church, and the Signs of the Times에서, 우리는 베네딕트의 개인적인 기도 생활을 엿볼 수 있다. 매일 수행하는 영성 훈련과 관련하여, 그는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것은 물론이고, 성인들의 이름도 부르면 호소한다고 했다. 그가 특별히 뽑은 그 성인 목록―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보나벤투라(Bonaventure),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에는 그의 신학 프로그램이 반영되어 있다. 그는 성자 하나님의 어머니에게뿐만 이들에게도 도움을 요청했다.이 인터뷰에서 제발트는 베네딕트가 (그의 전임자 요한 바오로 2세와는 달리) 마리아중심적이라보다는 더 그리스도중심적이라는 일반적인 가정(심지어 일부 복음주의자들도 이렇게 생각한다)을 되풀이했다. 하지만 베네딕토는 이 인터뷰에서 자신은 파티마의 성모(Our Lady of Fatima)와 매우 가깝다고(그녀의 발현을 믿는다고), 그리고 마리아에 대한 최고의 공경(Mary’s hyper-veneration)에 참여한다고 말했다. 2012년에 한 어느 강론에서는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고, 마리아는 더 가까이 계십니다”라고 말했다.복음주의와 성경에 대한 그의 시각베네딕토는 복음주의자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제발트와 가진 그 인터뷰에서 베네딕토는 프로테스탄티즘을 “고전적 고백들”(classic confessions)과 “새로운 프로테스탄티즘“(new Protestantism)으로 구별했다. 베네딕트가 보기에, 복음주의자들은 개발도상국의 종교 지형을 바꾸어놓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계속해서 베네딕토는 복음주의 운동은 교회가 아니며, 교회라고 불러서도 안 된다고 말했다. 그 근거로 그는 복음주의 운동에는 교회를 정의하는 몇 가지 속성―즉, 올바르게 전수된 성품 직제, 교황이 다스리는 주교 직제, 바르게 집전되는 성체성사―을 결여하고 있다고 말했다.베네딕토에 따르면, 교회에 대한 복음주의자들의 이해는 “새로운 개념”일 뿐이다. 곧 복음주의자들의 교회란 단지 말씀이 불러 모은 공동체일 뿐이라는 것이다. 베네딕트는 영적 호기심과 로마 중심의 당혹감이 뒤섞인 눈으로 복음주의자들을 바라보았다.베네딕토가 성경을 높이 평가한 것은 사실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집필한 책들은 복음서의 역사적 설명을 따르면서 예수의 삶에 초점을 맞추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의 진짜 입장을 파악해야 한다. 2010년에 그가 발표한 교황권고 ‘주님의 말씀’(Verbum Domini)에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보다 앞서고 성경을 능가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성경은 신성한 말씀을 담고 있다”(17)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성경은 말씀을 담고 있다는 의미에서만 하나님의 말씀이다.중요한 것은 성경의 신적 영감(교황권고 ‘주님의 말씀’도 이 점은 단호하게 주장한다)이 아니라 성경의 충분성(sufficiency)과 최종성(finality)이다. 베네딕토가 보는 성경은 이렇다: 성경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보다 더 크다. 그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성경은 “교회의 살아 있는 전통의 중요한 표현이며 신앙 교육을 위한 확실한 규범”인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로 보완되어야 한다.‘정통파’ 교황?베네딕토는 종종 “정통파” 교황으로 불린다. 심지어 복음주의 진영에서도 일부 그렇게 평가한다. 베네딕트가 ‘로마가톨릭’ 정통파였음은 확실하다.그의 신학에서 성경은 항상 권위 있는 교도권(authoritative magisterium)에 비추어 읽어야 한다. 니케아 그리스도론은 항상 “객관적” 로마가톨릭 교회론과 얽혀 있었다. 사도신경도 고백했지만, 트리엔트 및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강령도 고백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항상 성체 희생의 표상과 연계되었다. 성령은 항상 교회의 위계 구조와 연결되었다. 에큐메니즘은 로마가톨릭 밖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결함이 있고 로마 교회만이 유일한 보편 교회(the catholic)라는 관점에서 늘 논의되었다. 로마가톨릭교회의 선교는 언제나 온 세상을 품겠다는 가톨릭 프로젝트를 염두에 두고 추진되었다. 로마가톨릭교회가 교회로서 가지는 태도는 본질적으로 교회의 정치적 역할과 결합해 있었다. 이처럼 모든 면에서 베네딕토는 로마가톨릭 정통의 옹호자였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신학 전문가로 재직하던 시절부터 베네딕토는 비성경적인―심지어 반성경적인―교리(예를 들어, 트리엔트 공의회의 반종교개혁 교의나 마리아 교의, 교황 무류성)를 바로잡으려는 의지는 전혀 없이 “내부로부터의” 갱신을 도모했다. 그는 로마 교회의 성례전 구조 및 위계 구조를 바꾸려는 노력도 전혀 하지 않았다.베네딕토의 “보편성”(catholicity)은 항상 로마 중심 체제에 봉사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세상의 세속화 경향과 자신이 속한 교회의 자유주의 경향에 맞서 싸웠다. 많은 사람이 그의 2013년 사임을 패배로 해석했다. 개인적인 항복이었음은 분명하다. 베네딕토의 후임자 프란치스코 교황은 베네딕토보다는 훨씬 더 “보편교회적”(catholic)이고 훨씬 덜 “로마교회적”(Roman)이며, 여러 면에서 베네딕토와는 정반대이다. 베네딕토는 로마교회의 교리와 구조가 항상 앞장서기를 원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로마 교회의 체제를 중시하지 않으면서 그의 교회를 더욱 “보편적인” 교회로 (곧, 더욱 포용적인 교회로) 만들어 가려고 노력하고 있다.그렇다고 로마가 이미 베네딕토를 거부했다는 것일까? 그렇게 말하기에는 너무 이르다. 확실히 오늘날 로마가톨릭교회는 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있다. 시스템은 항상 똑같지만, 프란치스코는, 베네딕토와는 달리, “로마”(Roman)보다는 “가톨릭”(catholic)을 더 강조하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옵션은 (즉, 베네딕트냐, 프란치스코냐는) 성경적 개혁에 열려 있지 않은 시스템 내부에 긴장을 조성하고 있다.원제: Pope Benedict XVI (1927-2022): His Life and Legac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베네딕토16세
프란치스코
로마가톨릭교회
보편교회
가톨릭
정통
복음주의교회
트리엔트공의회
프로테스탄티즘
교회는 얼마를 예비금으로 가지고 있어야 할까?
by Stephen Story
2023-01-02
어리석은 부자 비유에서 늘어나는 재산을 저장하기 위해 곳간을 늘이는 부자를 비난하는 데에 예수님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눅 12:13-21). 곳간을 채우는 게 그토록 큰 문제라면 당장 생각할 게 있다. 교회의 은행 예금을 어떻게 봐야 할까? 교회가 예비비로 보유해야 하는 최소 금액은 얼마일까? 교회가 곳간을 늘이는 어리석은 부자와 별반 다르지 않은 건 언제일까?이런 질문은 불편하다. 교회 재정 관련한 이야기를 진짜(real) 복음 사역과는 별개의 사항인 것처럼 어색하게 취급하는 그리스도인을 종종 대하는 게 당연한 이유이다: 안타깝지만 재정 관련해서만은 교회도 사업자의 마인드로 바라봐야 한다.” 설교와 전도와 제자도는 진짜 영적인 활동으로 보면서도, 재정은 다르게, 그렇다고 완전히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하는 부차적인 차원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까 재정 문제는 사역이 아닌 사업의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와 대조적으로 성경은 돈을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창문(마 6:21)이라고, 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도구(빌 4:14-18)라고 부른다. 따라서 교회 지도자는 교인의 마음 상태와 하나님 나라 발전의 관점에서 현금 보유량을 고려해야 한다. Budgeting for a Healthy Church(건강한 교회를 위한 예산 편성)에서 제이미 던롭(Jamie Dunlop)은 교회 예산이 알려주는 사실이 있음을 지적한다. “교회의 적절한 예산 유지는 이 세상이 제공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도 예수님과 그분의 약속이 더 가치 있다는 사실을 효과적으로 알리는 도구가 될 수 있다.” 교회가 전하는 메시지 안에 교회의 예금 통장이 담당하는 역할이 있다는 것이다. 계획 원칙교회가 얼마나 많은 현금을 보유해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은 무궁무진하다. 일반적인 접근 방식은 교회가 매달 운영하는 평균 비용을 고려한 다음 특정 메트릭을 사용하여 예금 목표를 세우는 것이다.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보통 2-3개월 분량이 공통된 지침이다. 이 접근 방식의 장점은 단순성이다. 계산과 이해가 쉽다. 지금 손에 쥔 현금 액수를 바탕으로 세밀하게 조정된 저축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전략이 직장을 잃고 일정 기간 전적으로 저축에만 의존하는 상황을 맞을 수도 있는 개인에게는 의미가 있지만, 순식간에 모든 수입을 다 잃을 가능성이 없는 교회에는 별로 유용하지 않다는 게 던롭의 지적이다. 교회가 쓰는 비용은 일 년 내내 상대적으로 일정하지만, 수입은 썰물과 밀물을 반복한다. 따라서 헌금이 적은 달에도 급여와 기타 고정 비용을 지출할 수 있을 정도로는 예비금을 보유해야 한다. 그 외에도 예상보다 적은 헌금에 발생하는 연말 적자까지는 흡수할 수 있을 정도로 보유하는 게 현명하다. 그렇게 해야 다음 해에 재정적으로 회복할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더불어서, 금년도 예산이 전년도에 비해 10퍼센트의 지출 증가를 요구한다면, 적어도 그 10퍼센트 차이에 상응하는 금액은 예비금으로 보유하는 게 필요하다. 그렇게 해야 헌금 부족을 점진적으로 회복하고 위기를 예방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가질 수 있다. 전혀 계획에 없던 대규모 지출에 직면할 가능성이 큰 교회도 있다. 예를 들어, 시설이 많은 교회는 갑작스럽게 큰 비용이 드는 에어컨이나 지붕 문제를 만날 수도 있다. 그러나 집회 공간을 임대하는 교회에 그런 일은 생기지 않는다. 따라서 현금 보유 철학은 이러한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 가난하지도 부유하지도 않게가난한 교회와 부유한 교회, 모두에게 다 기회와 위험은 넘친다. 현금이 부족한 교회라면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 왜 돈이 더 필요한 거지? 이런 욕망은 정당한가?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합심 기도로 주님께 돈을 달라도 제대로 매달리고 있는가? • 몇 년 동안 점진적으로 저축을 늘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예비 계좌에 매달 조금씩만 저축해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이를 만들 것이다(잠 6:6-8 참조).• 지금 재정적으로 힘든 상황이 교인과 지도자의 영적 건강과 관련한 경고 사인은 아닌가? 헌금에 불순종하는 교인과 현명하게 지출하지 못하는 지도자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헌금에 관해서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는 지도자. • 재정적으로 어려운데도 제자 삼고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 어떻게 충성할 수 있을까? 자금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도 어떻게 우리만의 방식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고후 8:1-7 참조)?충분한 현금 보유고가 있는 교회는 재정적 풍요가 영적 건강의 표시라는 성급한 결론을 경계해야 한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숙고하는 게 필요하다. • 지금 왜 돈을 모으고 있는 거지? 하나님 나라의 발전을 위해 쓸 계획이 없어서인가? • 교회를 먹이시는 주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서 현금 사재기를 하고 있는가? 지금 현금 보유량 수준이 주님을 향한 필요마저 무시하게 하진 않는가(잠 30:8-9)?• 목회자, 직원, 현재 사역자에게 충분한 공급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써야 할 곳에 안 쓰고 있어서 현금이 모이고 있는 건 아닌가(잠 3:27-28 참조)?• 지금 교회 내에, 주변 사역 파트너에, 그리고 교단에 우리가 도와야 할 곳이 있는 건 아닌가? 현금에 여유가 있는 게 그 이유 때문이 아닌가(행 4:34-35)?• 가까운 곳에 새로운 교회 개척을 하라고 또는 세계 다른 지역에 선교사를 지원함으로 복음의 새로운 전선을 열라는 하나님의 인도가 아닐까(롬 1:11-12 참조)?재정은 가르침이다예수님은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고 말씀하셨다. 교회가 보유한 예비금은 교회의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를 나타낸다. 지금 교회의 예금이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성도의 마음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가? 교회의 저축 철학은 그 자체로 교육의 한 형태이다. 지출에 인색하거나, 지출에 대한 원칙이 없거나, 또는 돈을 모으는 데에만 급급한 교회에서는 딱 그 수준에 맞는 제자가 만들어진다. 그와 반대로, 재정에서도 청지기의 소명을 가지고 현명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는 교회, 신중하게 꼭 필요한 액수는 저축하지만 나머지는 왕과 그의 나라를 위해 기쁘게 사용하는 교회는 교인들에게 똑같은 삶을 살도록 선한 영향을 미친다. 원제: How Mouch Money Should My Church Save?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교회재정
예산
어리석은부자비유
돈
초보자에게 추천하는 성경 읽기 계획
by Bernard N. Howard
2023-01-01
성경 66권 전체를 읽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런데도 뜸만 들이고 있다? 더는 망설이지 말자. 성경은 하나님이 당신께서 지으신 사람들에게 보내는 사랑의 편지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하게 드러낸다.많은 사람이 일 년 안에 성경을 다 읽어내겠다는 목표를 세우고서는 성경 통독에 나선다. 2023년이 당신에게 바로 그런 해라면, 당신에게 연간 성경 통독 표를 활용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 읽기 표는 함께 뛰는 동료가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면서 목표 시간을 달성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돕는 선수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일일 분량을 관리할 수 있는 시간표의 도움 없이는 일 년 안에 성경 전체를 읽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시편-에스겔 계획내가 지난 몇 년간 활용한 성경 통독 표는 일명 ‘시편-에스겔 읽기표’이다. 이 계획표에도 두 개의 트랙이 있는 건 다른 여러 계획표와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 계획표도 날마다 성경의 두 부분을 따로 읽도록 한다. ‘트랙 1’은 시편과 에스겔을 뺀 구약 읽기다. ‘트랙 2’는 시편과 에스겔에 신약을 더한 것이다. ‘시편-에스겔 읽기표’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런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트랙 1’을 따라서는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하루 두 장씩 읽는다. ‘트랙 2’를 따라서는 시편과 에스겔은 하루 두 장씩 읽고, 그다음에 신약에 들어서면 하루 한 장씩 읽는다.내가 이 계획을 좋아하는 이유1. 과하지 않다연간 성경 읽기 계획표가 많이 있기는 하지만, 개중에는 초보자보다는 베테랑에게 맞는 게 적지 않다. 예를 들어, 많이 사랑받는 맥체인 성경읽기표(M’Cheyne Bible Reading Plan)는 신약과 시편은 1년에 두 번 읽고, 나머지 구약은 한 번 읽도록 요구한다. 부담이 적지 않은 독서량이라 성경 통독 초보자에게는 최고의 선택이 아닐 수 있다.묵상 글이 들어 성경읽기표도 있는데, 아무리 도움이 되더라도 결국 읽을 분량이 그만큼 늘어난다. 이 계획에는 구약과 신약만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편-에스겔 읽기표’는 구약과 신약만 읽는다. 2. 다채롭다우리 어머니가 즐겨 하시는 말씀이 있다. “다채로움(variety)은 삶의 양념이야.” ‘시편-에스겔 읽기표’는, 다른 ‘투 트랙’ 읽기표와 마찬가지로,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가져온 두 가지 일일 분량을 제시한다. 이 때문에 성경 읽기에 양념을 치는 효과가 생긴다. 한쪽 분량이 좀 따분하더라도, 다른 쪽 분량은 흥미진진할 수 있다. 3. 간단하다나의 첫 성경 통독은 친구가 놀랍고도 간단한 매일 읽기 계획을 추천해 주면서 시작됐다. “구약에서 세 장, 신약에서 한 장.” 그 계획이 단순했다는 건 곧 읽을 분량이 바로 눈에 보였다는 말이었고, 이는 다시 해낼 만해 보였다는 뜻이다. 그 계획이 도움이 되었던 또 한 가지는 달력에 적힌 읽기 목록을 계속 확인하지 않아도 되었다는 점이다. (인쇄된 목록은 잃어버릴 수도 있고, 온라인 목록은 폰을 내려놓고 조용한 시간을 가자는 걸 불가능하게 만든다.) 어디까지 읽었는지만 기억하면 되었고, 그다음에는 구약에서 세 장을 읽고 신약에서 한 장을 읽으면 되었다. (그러나 이 계획에는 성경 읽기를 열두 달로 골고루 배분하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 이 계획표대로 읽으면 열 달 만에 성경을 다 읽게 된다. 이는 곧 하루 독서량이 필요 이상으로 많다는 말도 된다.)‘시편-에스겔 읽기표’도 간단하다. 어디까지 읽었는지 달력을 참고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전날 어디에서 읽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면, 목록을 내려받아서 손이 닿는 데 보관하면 된다. 이 목록에서 볼 수 있듯이, 신약 트랙은 연말이 되기 약 일주일 전에 끝난다. 남은 며칠은 구약에서 혹시 놓친 데가 있으면 [가령 시편 119편처럼 너무 길어서 놓쳤다면_역주] 그 부분을 보완하는 시간으로 활용하면 된다.다른 연간 성경읽기표들도 나름의 장점이 있지만, ‘시편-에스겔 읽기표’가 목표를 이루는 가장 수월한 계획이 될 것이다.원제: Easy Schedule for Bible-in-a-Year Rookie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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