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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유에 누우신 그는 동시에 하늘에도 계신다
by Gavin Ortlund
2022-12-22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신 그도 첫 번째, 세 번째와 마찬가지로 모든 곳에 계신다. 당신이 어디를 가든, 그는 거기에 있다. 아니, 그 이상이다. 성경은 그가 만물을 붙드신다고 말한다. 그는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고”(히 1:3)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다”(골 1:16).그런데 우리가 매년 성탄절에 기념하는 기적(성육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다)은 바로 이 신학에 질문을 던진다. 가령 서기 10년, 나사렛을 다니던 시간에도 소년 예수님은 온 세상 어디에나 계셨는가? 구유에서 동물들 사이에 누워서 마리아의 젖을 먹을 때는 어땠을까? 그때에도 과연 모든 쿼크와 별을 다스리며 온 우주를 가득 채웠다고 상상할 수 있을까?우리가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extra Calvinisticum)이라고 부르는 신학에 따르면, 대답은 놀랍게도 “그렇다”이다. 하나님은 단 한 순간도 하나님이지 않으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은 육신에 제한되지 않으셨고, 성육신하신 동안에도 우주를 계속 채우고 붙드셨다.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 교리를 탐구하는 데에만 수많은 책이 필요하겠지만, 올해 축하할 놀라운 성탄절을 앞에 놓고, 마음과 생각을 재조정하기 위해 세 가지 기본적인 질문만 던지도록 하자.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은 라틴어이다. 칼리니스티쿰(Calvinisticum)은 “칼빈의”(Calvin’s)를 의미하고, 엑스트라(extra)는 “외부”(outside) 또는 “너머”(beyond)를 뜻한다. 16세기와 17세기 루터파 신학자와 개혁파 신학자 사이에서 벌어진 ‘성만찬에 그리스도가 어떻게 임재하시는가’에 대한 논쟁에서 나온 말이다. 루터파는 하나님의 성육신하신 아들이 자신의 육신을 “넘어서” 존재한다는 개혁파의 가르침에 반대했다. ‘기독교강요’에서 장 칼뱅은 이렇게 썼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늘로부터 내려오셨으나 하늘을 떠나지 않으셨으며, 동정녀의 몸에서 나시고 이 땅에서 사시고 또한 십자가에 달리셨으나 그는 태초부터 하셨던 것처럼 언제나 세상을 가득 채우고 계셨다! (기독교강요 2:13.4) 그러나 이 교리에 포함된 기본 사상의 원조가 칼뱅은 아니다. 이 교리는 아주 오래되었다. 4세기에 아타나시우스는 이렇게 썼다.말씀께서는 자기 몸에 속박되지 않으셨고, 몸 안에 임재해 계신다고 해서 몸 아닌 다른 곳의 임재가 가로막히지도 않았다. 몸을 쓰시는 동안 생각과 능력으로 우주를 명하시는 일이 중단되지도 않았다. … 경이로운 점은, 그분이 인간으로서 인간의 삶을 사는 동시에, 말씀으로서 우주의 생명을 지탱하고 계셨고, 아들로서 아버지와 계속 함께 거하고 계셨다는 것이다. (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 3.17)아타나시우스가 강조하는 건 단지 인간 육체 너머에 있는 하나님 아들의 존재만이 아니다. 그는 아들이 우주의 지탱자요 감독자의 역할을 쉬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설교와 주석에서 칼뱅은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 속에 담긴 공간적 특성뿐 아니라, 세계를 통치하는 그리스도 그리고 천사들에 대한 중재자 역할이 가진 의미도 같이 강조한다. 중요한 것은 편재 그 자체가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성육신 중에도 완전한 신성을 유지하며 그에 따르는 모든 사명을 완수하셨다는 것이다. 이게 어떻게 말이 되는가?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 이 개념을 우리가 머리로 완전히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걸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당장 두 가지 문제가 떠올랐다. 첫째, 이 개념은 불합리한가? 그리스도는 유한하시며 무한하시다, 국부적이면서 동시에 편재한다는 것이 어떻게 비모순율(law of non-contradiction)을 위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 둘째, 이것이 정통 칼케돈 그리스도론과 어떻게 일치하는가? 유한하면서도 동시에 무한한 그리스도를 상정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분리하는, 네스토리우스파 오류로 이어지는 건 아닐까? 이것을 이해하는 데 그나마 조금이라도 도움을 준 은유가 있다. 간달프와 프로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활동하는 반지의 제왕 이야기에 등장인물로 J. R. R. 톨킨이 자신을 넣었다고 가정해보자. 이제 그는 더 이상 옥스퍼드에 있을 수 없다. (그런데 한편으로 중간계에 있는 그의 존재는 옥스퍼드에서 그가 계속해서 글을 쓰는가 아닌가에 달려있다). 이런 상황이 톨킨의 인격의 통일성이나 논리의 법칙을 반드시 위반하느냐의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결국 중간계와 옥스포드는 시카고와 뉴욕처럼 같은 세계의 다른 장소일 뿐만 아니라, 완전히 다른 “영역” 또는 “세계”이기도 하다. 물론 이것은 단지 은유일 뿐이다. 창조주가 피조물 세상에 들어가는 것과 작가가 이야기 속에 자신을 넣는 것은 다르다. 그러나 하나님과 창조 세계 사이의 연관성은 시카고와 뉴욕보다는 옥스퍼드와 중간계의 관계에 훨씬 더 가깝다. 여전히 옥스퍼드 책상에 앉아서도 샤이어를 걷고 있는 톨킨을 상상하는 것은 전혀 분리되지 않는 한 인격을 유지하는 하나님의 아들, 신성한 본성에서는 무한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본성에서는 유한한 그분을 개념화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한 가지 방법이다. 이것은 왜 중요한가?나는 개인적으로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을 부정한다고 해서 반드시 정통적인 그리스도론을 거부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함에도 칼케돈 그리스도론이 주의를 기울인 몇 가지가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을 뒷받침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신격화”하려는 유혹을 미연에 방지하는 동시에 완전히 신성하고 불변한 그리스도의 신성을 보호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를 설명하기 위해 성만찬 시간에도 그리스도의 육체가 편재한다고 확증하는 사람들을 막을 수 있다. 케빈 드영(Kevin DeYoung)은 이렇게 요약했다.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은 초월성이라는 그리스도 신성(예를 들어, 제한될 수 없다)과 인성의 순수성(예를 들어, 오로지 신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특징)을 보호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교리이다.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은 뚜렷하게 구분되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보존함으로써 성육신이 빼기가 아니라 더하기라는 점을 깨닫도록 돕는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아들은 마리아의 자궁 속 작은 배아로 줄어든 게 아니다. 신성한 위엄은 여전히 남겨놓으셨다. 그는 언제나 완전한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오신다. 한 연구는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을 이렇게 요약한다. “성육신은 영원하신 아들이 그의 우주적 제국을 포기한 게 아니다. 오히려 반역하는 피조물을 향해 그의 제국을 재확인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은 매년 성탄절을 새로운 경이로움으로 축하하도록 우리를 돕는다. 생각해 보라. 말구유에 누우신 아기는 다음 두 가지를 다 갖고 계신다.강보에 단단하게 싸여 있지만,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다.어머니를 꼭 잡고 있지만, 온 우주의 원자가 제자리에 있도록 붙들고 있다.젖 달라고 울면서도, 하늘의 별을 지탱하고 있다.나귀 사이에서 자면서도, 천사들의 찬양을 듣고 있다.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은 이 성탄절 찬송[천사 찬송하기를] 가사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처녀 몸에 나시어 사람으로 오셨네. 세상 모든 사람들 영원하신 주님께 영광 돌려보내며 높이 찬양하여라.원제: He Lay in the Manger without Leaving Heave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편재
그리스도론
성육신
성탄
칼케돈그리스도론
성탄절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
by Matt McCullough
2022-12-21
내 경험상, 음악 목록에서 크리스마스 인기곡을 클릭하는 순간 당신은 정신적 그리고 정서적 고통을 만날 것이다. 조금의 경고와 설명도 없이 당신의 귀에 울리는 건 각종 캐럴이다. “Rockin' Around the Christmas Tree”에서 “Silent Night”까지, “Blue Christmas”에서 “Joy to the World”까지, 그리고 “Grandma Got Run Over by a a Reindeer”에서 “Lo, How a Rose E'er Blooming”까지 말이다.현대 문화에서 성탄절은 독특하다. 뚜렷한 기독교적 내용도 있지만 동시에 온갖 잡다한 문화의 수많은 전통이 축적되어 마구 섞여 있다. 나는 그게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문득 혹시라도 오래된 기독교 캐럴과 최근 인기 있는 캐럴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지는 않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옛 노래는 종종 죽음을 언급하는 반면, 요즘 노래에는 아예 죽음이 빠져있다. 성탄절 노래 속에 담긴 죽음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곧 오소서 임마누엘(O Come, O Come Emmanuel):오 구하소서 이스라엘그 포로생활 고달파메시아 기다립니다어둠의 구름 사라져죽음의 그림자 사라지리천사 찬송하기를(Hark, the Herald Angels Sing): 세상 빛이 되시며 우리 생명 되시네죄인들을 불러서 거듭나게 하시고영생하게 하시니 왕께 찬양하여라기뻐하며 찬송하라(Good Christian Men, Rejoice): 무덤을 두려워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평화! 평화! 우리 구원 위해 주께서 나셨네한 송이 장미꽃 피었네(Lo, How a Rose E’er Blooming):부드러운 향기의 꽃,영광스런 장엄함으로 세상의 어둠을 없애시네진정하신 사랑, 진정하신 주님,죄와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는우리의 모든 짐을 나눠지시는 구세주성탄절을 기념하기 위해서 옛 작사자가 강조한 것은 죽음이었다. 죽음이 없이 그들에게 축하 행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어떤가? 성탄절을 더 축하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죽음을 피한다. 우리가 축하하는 성탄절은 죽음이라는 도전을 견디지 못한다. 익숙하지 않은 죽음오래된 노래와 요즘 노래 사이의 차이는 중요한 문화적 변화를 반영한다. 옛날 노래가 나오던 시절에 죽음은 어디서나 만나는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와 달리 그들에게 죽음은 쉽게 피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었다. 18세기 말, 미국에서는 다섯 명 중 네 명이 일흔 살 이전에 사망했다. 평균 수명은 삼십 대 후반이었다. 요즘 평균 연령은 거의 여든 살이다. 그 당시 사람들은 대부분 가족과 친구, 이웃들에게 둘러싸인 채 집에서 죽었다. 1980년까지 사망자의 17퍼센트만 집에서 죽었다. 요즘 들어 호스피스 치료 덕분에 가정에서 죽는 비율이 다시 증가 추세이다. 친숙한 장소에서 만나는 친숙한 사건이었던 죽음이 점점 더 사람들이 거의 방문하지 않는 위생적이고 전문화된 기관에서 만나는 낯선 사건으로 바뀌었다. 단지 죽음의 경험이 덜 친숙해진 것으로 끝난 게 아니다. 죽음이라는 주제 자체가 금기시되어 격식을 갖춘 자리에서는 아예 추방되었다. 역사가 필리프 아리에스(Philippe Aries)는 이러한 변화를 “잔인한 혁명”이라고 부른다. 죽음이 “과거에는 너무 편재하다 보니 친숙했다. 그런 기억은 이제 지워지고 사라질 것이다. 죽음은 이제 수치스럽고 금지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85).왜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억누를까? 아리에스는 이 금기가 행복을 일종의 도덕적 의무로 보는 데서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마치 “슬픔이나 지루함의 원인을 피하고 절망 속에서도 항상 행복한 것처럼 보임으로써 집단의 행복에 이바지할 사회적 의무”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다. 행복이 도덕적 의무라면 슬픔은 도덕적 실패가 된다. 아리에스는 이렇게 썼다. “아주 약간의 슬픔이라도 징후를 보이는 순간 행복에 대한 죄를 짓는 것이다. 슬픔은 행복해야 할 사회를 위협하며, 따라서 사회는 존재 이유 자체를 잃을 위험에 처한다.”행복해야 할 의무에 관한 아리에스의 생각이 옳다면, 왜 성탄절에 죽음을 덜 이야기하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죽음에 관한 대화는 죽음이 초래한 결과에 대한 진정한 슬픔을 숙고하기는커녕 좋지 않은 뒷맛만 남긴다. 심지어 반사회적인 주제로도 보일 수 있는데, 단지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슬픔을 강요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죽음의 그림자 안에서 살기 그러나 아무리 이 주제를 피하려고 애써도, 우리는 모두 매일 죽음의 그림자를 경험한다. 내가 누구인지, 왜 삶이 중요한지를 생각할 때마다 밀려오는 불안감은 결국 죽음을 바라보게 한다. 행복으로 가득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삶을 직면할 때마다 죽음이 고개를 내민다. 그리고 좋은 것일수록 결코 오래 가지 못하는, 모든 좋은 것이 결국은 연기처럼 사라지는 세상이 주는 고통 앞에서 죽음은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이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제는 문화가 되어버린 즐거운 성탄절을 비롯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피한다. 성탄절 쇼핑, 빵 굽기, 파티 및 선물 나누기, 그리고 지나간 좋은 세월을 회상하며 희망하는 올해의 완벽한 성탄절, 그 자체로 다 좋은 것이지만, 죽음에 대한 방어로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당신은 성탄절을 전도서 2장에 나오는 설교자의 실험처럼 기이하게 들리는 한 달 동안의 자가 치료 공세로 생각할 수도 있다. “나는 혼자서 이런 생각도 해 보았다. ‘내가 시험 삼아 너를 즐겁게 할 것이니, 너는 네 마음껏 즐겨라.’ … 원하던 것을 나는 다 얻었다. 누리고 싶은 낙은 무엇이든 삼가지 않았다”(전 2:1, 10). 전도서 저자는 집을 지었고 사고 싶은 것을 다 샀다. 그는 마음껏 먹고 마셨다. 그는 엔터테인먼트를 즐겼고 행복한 사람들과 교류했다. 그러나 결국 죽음에 직면했고, 누구나 만나는 결과 앞에서 섰다. “참으로 세상 모든 것이 헛되고,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고, 아무런 보람도 없는 것이었다”(전 2:11).성탄절 직후에 느낀다는 우울증에 관해서 들어봤을 것이다. 그건 놀라운 게 아니다. 돈 주고 산 행복은 결코 죽음의 그림자 속 삶의 진실과 맞설 수 없다. 그 어떤 선물도 죽음이 가져오는 정체성의 불안감을 극복하지 못한다. 그 어떤 성탄절 휴가도 죽음이 가져오는 일(work)의 좌절감과 허무함을 덜어주지 못한다. 그 어떤 감상적인 노래도 죽음이 가져오는 이별의 고통을 달래지 못한다. 그렇게 우리는 이제 무덤에 일 년 더 가까워진 몸으로 새해를 맞는다.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셨다. 기뻐하라. 하지만 이번 성탄절을 다르게 보낼 방법이 있다. 가장 오래된 캐럴은 그 길을 알려준다. 죽음 앞에서 정직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세상 속 흐릿한 구름 같은 약속을 지금 현실 속 일상적인 문제에 적용함으로 그리스도의 약속이 주는 기쁨을 더 누릴 수 있다. 오래된 성탄절 노래가 죽음을 크리스마스와 연결했을 때, 거기에는 확실한 근거가 있었다. 이사야서 9:2이다. “어둠 속에서 헤매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쳤다.”그리스도의 빛은 죽음이 그림자를 드리우는 곳에서 가장 밝게 빛난다. 성탄절 축하 행사를 굳이 두려움과 좌절, 슬픔과 분리할 이유가 없다. 진실을 직시하자. 지금 느끼는 슬픔에 대해서 정직하자. 그리고 기뻐하라. 임마누엘이 당신에게 오셨다. 그리고 그는 재림하실 것이다. 할렐루야!원제: Christmas Under Death’s Shadow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성탄
성탄과죽음
캐럴
베들레헴: 작은 동네, 그러나 중요한 곳
by Kaitlin Miller
2022-12-20
몇 년 전 처음으로 성지를 방문했다. 여행을 통해서 나는 기독교 신앙이 인간이 만든 철학이나 전설적인 신화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검증이 가능한 장소에서 실제로 발생한 역사적 사건 위에 근거한다는 확신을 새롭게 가질 수 있었다. 가장 심오하고도 또 구체적인 깨달음은 베들레헴에서 발생했다. 베들레헴은 크리스마스 캐럴에 나오는 “작은 마을” 이상으로 중요한 성경적 역사와 신학적 중요성을 지닌 실제 장소이다. 성경 속 베들레헴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어떻게 자신을 하나님의 어린 양, 목자-왕, 그리고 생명의 떡으로 성취하고 증명하셨는지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어린 양성경 속 베들레헴에 대한 첫 번째 언급은 창세기 35:19-21에 나오는 라헬의 매장지이다. 라헬은 예수님 혈통 속에 있는 족장 야곱의 아내였다. 그녀의 이름은 “암양”(ewe)―어린 양 또는 양―을 뜻한다. 이 구절은 또한 라헬이 에델 망대(믹달 에델)에 묻혔다고 알려주는데, 이 히브리어는 “가축 망대”를 의미한다. 유대 역사에 따르면, 베들레헴의 믹달 에델에서 태어난 흠 없는 새끼 양이 천에 싸여 유월절 제물로 쓰이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앞으로 오실 하나님의 어린 양에 대한 이 얼마나 놀라운 예표인가? 또한 미가서는 “가축 망대”에 왕이 오실 것이라고 예언했다(미 4:8). 그분이 누구신가? 세례 요한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라고 세상에 처음 소개한, 참되시고 유일하신 왕 예수님이다. 예수님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강보에 싸였고, 결국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옮겨졌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히 10:12). 베들레헴의 믹달 에델에서 태어나 제사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옮겨지던 흠 없는 어린 양처럼 말이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러 오셨고(마 5:17), 우리는 바로 여기에서 유월절 양에 관한 예언이 성취되는 역사를 목격한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하나님의 백성을 대신하여 예루살렘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온 백성의 죄를 담당하신 희생양이다. 이집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문설주에 바른 어린양의 피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자비로 바뀌어서 그들을 죽이지 않고 넘어갔다.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이제 그의 피가 우리의 삶에 임한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를 영원히 넘어간다(pass over). 그리고 그 진노는 자비로 바뀌어 영원히 우리와 함께한다. 목자-왕베들레헴은 성경에서 다윗의 도시로 알려져 있다. 다윗은 골리앗을 물리치고 나중에 왕이 된 일개 목동이었는데, 그의 등극은 전혀 예상 밖의 일이었다. 성경은 다윗의 혈통에서 그의 집과 왕국을 영원히 견고하게 만들 아들이 나올 것이라고 예언했다(삼하 7:12-16).그 아들이 바로 예수님이다. 아버지인 요셉의 혈통을 통해 태어나신, 다윗의 생물학적 후손이다. 성경은 그를 “양들의 큰 목자”(히 13:20)로 묘사한다. 그분은 사망과 죄와 수치의 거인들을 정복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는 진정한 왕이 되셨다.하나님께서는 그 왕을 향해서 이렇게 선언하셨다.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 1:31-33). 지금도 그분은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으로 아버지 곁에 서서 만유를 다스리신다. 그 앞에서는 보좌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 경배한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 5:6-14).생명의 떡영원한 본향 천국에 도착해 보좌 주위에 둘러서서 하나님의 모든 백성과 함께 하나님의 어린 양, 목자-왕을 영원히 영화롭게 하는 그날이 오기 전까지, 그분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일용할 양식으로 때마다 공급해 주신다고 약속하신다. 베들레헴은 “빵의 집”을 의미하며, 바로 이 집으로부터 자신을 생명의 빵이라고 계시하신 분이 오셨다(요 6:35).이번 성탄절에도 우리는 하루도 빠짐없이 이 세상의 덧없는 쾌락, 썩어 없어질 소유물에서 만족을 구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언제나 똑같다.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깊은 갈망을 더 간절하게 느낄 뿐이다. 오로지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굳건한 사랑, 그치지 않는 평화, 샘솟는 기쁨, 흔들리지 않는 소망, 변하지 않는 의미, 구속의 공의, 넘치는 은혜, 그리고 우리를 초월하는 영광을 더 애타게 갈구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를 초대하신다. 우리의 마음과 소망을 오로지 자신에게만 두라고 하신다.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떡의 집에서 태어난 진정한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그에게로 오는 이는 결코 주리지도, 멸망하지도 않을 것이다(요 6:33-35). 이것은 좋은 소식이요 큰 기쁨이다. 떡의 집, 즉 다윗의 성에서 우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 그가 바로 주 그리스도이시다(눅 2:10-11). 할렐루야!그를 놓치지 말라여행에서 만났던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베들레헴 성문 밖에서 어린 양을 짊어지고 가는 한 어린 소년을 보았을 때였다. 그날도 그 아이를 눈여겨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나 오늘이나 삶의 혼돈과 성탄절의 분주함 속에서 정작 예수님에게만 집중하는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성탄절에 가장 자주 잊히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늘 자기를 중심에 두고 온갖 세상사에 휩쓸리는 사람들이 정작 우리를 위하여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지 못하고 그 옆을 스쳐 지나가더라도, 우리는 하늘에서 찬양하는 천사들, 달려온 목자들, 그리고 하나님의 어린 양, 목자이자 왕, 생명의 빵 앞에 무릎 꿇은 동방박사를 기억한다. 이 모든 진리를 마음에 간직할 때(눅 2:19), 우리 영혼은 주님을 찬양하고 우리 영은 기뻐 춤춘다(눅 1:46-49). 저 작고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우리가 얼마나 떨어진 곳에 있건 상관없이, 주님은 그 작은 동네에서 태어나심으로 우리를 위해 큰일을 행하셨다. 할렐루야!원제: Bethlehem: Little Town, Big Significanc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베들레헴
성탄
어린양
목자왕
생명의떡
마리아가 그 아기에 관해 알고 있었던 세 가지
by Jonathan J. Routley
2022-12-19
‘예수님이 성취하실 일에 대해서 마리아가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이렇게 묻는 인기 있는 크리스마스 노래가 하나 있다. 메리 로리(Mark Lowry)가 작사한 ‘Mary Did You Know?(마리아, 알고 있었어요?)는 케니 로저스(Kenny Rogers), 위노나 주드(Wynonna Judd), 클레이 에이큰(Clay Aiken) 및 씨 로 그린(Cee Lo Green) 같은 인기 아티스트가 불렀다. 노래 가사에서 마리아는 아기가 앞으로 물 위를 걷고, 바다를 잔잔하게 하고, 눈먼 사람을 보게 하고, 또 나라를 다스릴 것을 아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마리아는 심지어 이런 역설적인 말까지 듣는다. “당신이 낳은 이 아이가 곧 당신을 다시 낳을 겁니다.”신약성경 저자는 마리아가 아들의 성취에 관해서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누가 메시아이며 그가 성취할 것에 관해서 마리아가 결코 무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그녀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사실만 알려준 게 아니라 노년에 잉태한 엘리사벳에 대해서도 알려주었다(눅 1:36). 천사의 말을 들은 마리아가 급히 엘리사벳을 만났고, 마리아의 문안을 받은 엘리사벳은 성령이 충만하여 천사의 말을 확증하는 예언을 했다. 그러자 마리아는 오늘날 우리가 마리아의 찬가(Magnificat)라고 부르는 내용으로 주님을 찬양했다(눅 1:46-55). 정말 멋진 노래다. 다양한 구약 본문을 언급함으로써 마리아는 자신이 얼마나 구약성경에 정통한지, 특히 메시아와 관련한 주제를 이미 훤히 꿰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어린 소녀는 놀랍게도 메시아의 오심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었다.마리아가 알고 있었던 것 구약성경에 비추어 이 구절을 연구하면 마리아가 알고 있었을 세 가지가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다. 그녀는 예언의 의미를 이미 깨닫고 있었을 것이다. 1. 심판과 구원이 이미 동시에 도래했다.마리아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마음이 내 구주 하나님을 좋아함은”(눅 1:46-47)으로 찬양을 시작한다. 마리아는 지금 인용하는 건 하박국 3:18이다.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련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련다.” 마리아는 적에게 심판을 집행하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용사가 되시는 주님에 대한 이 본문을 암시한다. 하박국 3장의 언어는 예수의 감람산 담론과 요한계시록 및 다른 묵시적 구절들(cf.합 3:10-12; 마 24:7-30; 계 6:12-17)과 매우 유사하다. 1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사역과 관련하여 메시아, 곧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명시적으로 언급된다. “주님께서 주님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오십니다. 친히 기름 부으신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오십니다. 악한 족속의 우두머리를 치십니다. 그를 따르는 자들을 뿌리째 뽑아 버리십니다”(합 3:13). 이 구절의 요점은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그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은 놀랍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선지자는 기뻐하고 또 기뻐한다. 하박국의 맥락을 이해한 마리아는 메시아의 오심이 하나님의 적에게는 심판을 의미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구원이 된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을 것이다. 폭력적인 압제자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당시 1세기 유대 땅의 정치 상황을 고려할 때, 어쩌면 마리아는 메시아의 오심을 죄로부터의 영적 구원보다는 정치적 구원의 관점에서 생각했을 수도 있다. 마리아의 이 노래는 출애굽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언급도 포함한다. “그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눅 1:51). 이집트를 탈출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 사역을 언급하는 두 가지 핵심 용어는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팔과 교만한 자들을 흩으심이다. 신명기 26:8은 여호와의 팔이 얼마나 구원하기에 능했는지를 설명한다.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하나님이 뻗은 팔은 이집트 종살이라는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강림하시는 능력의 표시였다.마찬가지로 모세는 민수기 10:35에서 일어나 원수들을 흩어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했다. 이 두 가지 암시는 메시아의 오심이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구원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더 명확하게 한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구원하고 원수를 심판하기 위해 당신이 택한 왕을 세상에 보냄으로 한 번 더 팔을 길게 뻗으실 것이다. 2. 불의가 뒤집힐 것이다. 마리아는 또한 메시아의 오심을 특징짓는 불의의 반전을 암시한다. 그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 (눅 1:51-53)겸손한 자를 높이고 교만한 자를 낮추는 주제는 이사야 2:11-12, 17을 반영한다. 주님의 종말론적 공포와 광채가 세상이 끝날 때 교만한 자를 낮추어, “그날에 오직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시리라.” 이사야서의 처음 내용은 통치자의 부패로 말미암은 사회 불의로 가득하다. 그러나 오실 메시아는 사회 부조리를 바로잡을 것이다. 부패한 통치자는 사라질 것이다. “주님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뭇 백성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사 2:4). 굶주린 자는 배불리 먹겠지만 부패한 엘리트는 더 이상 음식도 받지 못할 것이다. 마리아의 노래는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사회 부조리가 바로 잡히고 정의가 영원히 확립될 것이라는 그녀의 희망을 드러낸다. 3.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고 있다. 다음 세 구절은 우리의 주의를 언약으로 이끈다. 그의 자비하심은,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대대로 있을 것입니다. … 그는 자비를 기억하셔서, 자기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는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토록 있을 것입니다. (눅 1:50, 54-55)자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히브리어 헤세드에 해당할 가능성이 크며, 이 단어는 하나님의 인자하심, 신실하심, 그리고 변치 않는 사랑을 묘사한다. 마리아의 머리에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관련한 여러 구절이 들어있었겠지만, 그중에서도 50절은 그녀가 특히 시편 100:5과 103:11을 생각했음을 암시한다. 주님은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 영원하다. 그의 성실하심 대대에 미친다. (시 100:5)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사랑도 크시다. (시 103:11)두 구절 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시는지를 보여준다.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은 결코 잊히거나 무효가 되지 않으며, 메시아를 통해 실행될 것이다. 마리아는 이렇게 자신의 시를 마무리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아브라함(더 나아가 다윗에게)에게 약속하신 그대로 이루실 것이다. 마지막 단서 하나마리아는 예수님이 누구를 고치실지, 어떤 기적을 행하실지, 구체적으로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메시아의 오심 속에 담긴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누가는 천사가 전한 소식을 알려주기 위해서 마구간에 도착한 목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더불어서 마리아에 관해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알려준다. 마리아의 생각이 어떤 과정을 거친 것인지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이다.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고이 간직하고, 마음속에 곰곰이 되새겼다”(눅 2:19). 목자들의 말을 숙고한 마리아, 그것은 그녀가 성경에서 알고 있는 지식과 자기 삶에서 일어나는 현실을 연결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아무리 마리아였다고 해도, 예수님이 하실 모든 일을 다 알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마리아 찬가 속에 담긴 구약의 메시지는 그녀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많은 진리를 깨닫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원제: 3 Things Mary Knew About Her Baby Bo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마리아
예수
마리아찬가
메시아
성육신
성탄
성탄은 신화가 사실이 된 사건이다
by 고상섭
2022-12-18
성탄의 가장 큰 의미는 출생이 아니라 강림이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사건이다. 이 중요한 성탄의 의미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성탄을 믿지 못하는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합리적이지 않고 과학적이지 않은 전설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동정녀 탄생을 믿지 못하는 이 장애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그리고 동정녀 탄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자연주의 세계관은 하나의 신념일 뿐이다 C. S. 루이스는 기적에서 기적은 초자연적 힘의 간섭으로 자연 외에 초자연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라 말한다. 누군가 기적을 경험하더라도 그의 신념 속에 초자연을 배제한 자연주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면 그 기적을 부인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대개 자연주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옳다면 모든 자연의 법칙들을 물질세계 안에서 다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자연주의 세계관은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 없다. 현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지금도 많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유물론의 모순을 드러낸 홀데인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내 정신 과정이 순전히 뇌 속 원자의 운동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라면, 나는 내 소신이 옳다고 가정할 수 있는 어떠한 이유도 갖지 못한다. … 따라서 나는 내 뇌가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가정할 수 있는 이유도 갖지 못한다”(기적, 31). 루이스는 기적을 믿으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한데 첫째, 자연의 통상적 안정성을 믿어야 하고 둘째, 자연 그 너머에 어떤 실재를 믿어야 한다고 했다. 이 두 가지 믿음이 있을 때만 비로소 초자연적 실재가 우리의 자연계를 이루는 시공간 속에 침입해서 그것을 교란시켰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 결국 동정녀 탄생과 같은 기적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이성과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신념을 가지고 사느냐의 문제이다. 자연주의 세계관을 가지고 사느냐? 초자연주의 세계관을 가지고 사느냐의 차이다. 동정녀 탄생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단지 자신이 자연주의 세계관을 신념으로 가지고 산다는 것을 이야기해주는 것뿐이다. 그러나 세상에 일어나는 많은 일은 자연주의 세계관으로 다 설명할 수 없다. 초자연의 세계관을 가질 때 더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다. 동정녀 탄생은 궁극적 실체를 가리키는 이야기이다 팀 켈러는 성탄 설교를 모은 예수, 예수에서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픽션이 아닐 뿐 아니라, 픽션을 읽는 방식까지 바꾸어 놓았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톨킨의 ‘반지의 제왕’이나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 같은 판타지 문학을 좋아하는데, 그것을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들도 존재한다. 현대인이라면 더 현실주의적이 되어야 하는데 판타지 문학은 현실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할리우드 영화는 계속 판타지를 내용으로 다루고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그것에 굶주려 있기 때문이다. ‘미녀와 야수’, ‘잠자는 숲속의 공주’ 등의 유명한 동화들은 실제로 있었던 일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끊임없이 판타지 문학을 찾는 이유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열망을 얼마간 해소해 주기 때문이다. 사실주의적 픽션은 그런 열망을 건드리거나 채워줄 수 없다.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갈망이 초자연 세계를 경험하려는 갈망, 죽음을 면하려는 갈망, 영원한 사랑을 만나려는 갈망, 늙지 않고 오래오래 살며 창의적 꿈을 실현하려는 갈망 등이다. 잘 구성된 판타지 이야기에서 우리는 놀라운 감동과 만족을 얻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의 마음이 그런 것들을 열망하기 때문이다. 좋은 이야기는 잠시나마 이런 갈망을 채워주고 미치도록 가려운 곳을 긁어준다. (예수, 예수, 50)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인간 안에 깊은 갈망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또 예수님의 탄생은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다. 이 탄생을 통해 우리가 궁극적으로 열망하는 모든 판타지의 생각들이 궁극적으로 성취될 것임을 알려준다. C. 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인간 안에 하나님이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에 영원을 사모하는 것이고 그것은 이 땅의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을 통해 나타난다고 말한다.세상에 있는 온갖 것들은 우리가 바라는 것을 주겠다고 약속하지만, 결코 그 약속을 지키지는 못합니다. 처음 사랑에 빠졌거나 처음 외국을 그려볼 때, 또는 처음 흥미로운 과목을 배울 때 속에서 솟구치는 갈망은 결혼이나 여행, 배움으로 채워질 수 없는 갈망입니다. 결혼이나 여행이 최고의 것일 때도, 그 갈망을 처음 느낀 순간에는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결국 현실 속에서 무너져 버리고 마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아내가 훌륭할 수도, 여행 가서 묵은 호텔이 아름답고 경치가 빼어날 수도 있으며, 화학 연구가 흥미로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무언가 아쉬운 것이 있습니다. (순전한 기독교, 213)배고픔을 느끼는 것은 음식이 있기 때문이고, 성욕을 느끼는 것은 성관계가 있기 때문이고, 새끼 오리가 헤엄치고 싶어 하는 것은 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것들로 채워지지 않는 욕구가 있다면 그것 내가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 맞게 만들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우리가 현실적인 이야기에만 만족하지 않고 판타지 문학을 추구하고 그것을 열망한다는 것은 우리 안에 현실적인 사건들로 채울 수 없는 무엇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이것은 우리가 자연주의, 물질주의가 아닌 초자연주의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야 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판타지 문학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어린이들의 동화가 아니라 인간 안에 자연주의 세계관으로 해석할 수 없는 영원을 향한 갈망을 보여주는 창문이라 할 수 있다. 신화가 사실이 되었다 C. S. 루이스는 피고석의 하나님에서 “신화를 읽을 때 우리에게 흘러들어오는 것은 진리(Truth)가 아니라 실재(Reality)다”라고 말한다. 루이스는 인간 지식을 두 가지로 설명한다. 하나는 경험적 지식으로 맛을 느끼는 순간처럼 맛을 경험하는 지식이다. 이것은 맛을 이해하고 지적으로 분석하는 설명적 지식과 구별된다. 우리가 생각하고 이해하려는 순간 더 이상 그 맛을 맛으로 느끼지 못한다. 부부관계를 하는 순간 쾌락을 조사하거나 회개하는 동안 회개를 연구할 수는 없고, 폭소를 터트리는 순간 유머의 본질을 분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이 아니라면 이런 것들을 정말 알 수 있을 때가 언제이겠습니까? (피고석의 하나님, 73)사랑하는 사람을 안고 포옹하는 행복감을 느끼면서 사랑을 연구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배꼽 잡고 웃는 순간 유머를 분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설명적 지식이 아니라 경험적 지식 즉 행복과 유머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실재를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이런 인간 지식의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신화라고 말한다. 동정녀 탄생의 이야기는 단순한 명제로 기술되지 않고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위대한 신화를 즐기는 가운데 우리는 추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을 구체적인 대상으로 체험할 수 있다. 신화는 사고를 초월한다. 더구나 예수님의 성육신은 단순한 죽은 신화가 아니라 살아 있는 신화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의 역사 속으로 들어온 신화이며, 그래서 사실이 되고 난 뒤에도 여전히 신화로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기적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역사적 사실에 동의해야 하는 것뿐 아니라 우리가 모든 신화에 부여하는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미 사실이 되어 버린) 그 신화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은 동정녀가 잉태했을 때 이 위대한 신화가 사실이 되었음을 몰랐던 이들입니다. 사실의 세계에 들어오면서 신화의 온갖 특성을 함께 가져왔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도 기억해야 합니다. (피고석의 하나님, 76)동정녀 탄생은 사실이 된 신화이다. 신화적인 모든 요소를 가지고 사실이 되어서 우리에게 그 실재를 경험하게 하는 사건이다. 그래서 신앙이란 사랑과 순종만으로 다 이해할 수 없다. 도덕주의자, 학자. 철학자가 되어야 하지만 시인과 아이의 눈이 필요하다. 그래서 사실이 된 신화를 누리고 맛보고 경탄하며 경외할 수 있어야 한다. 동정녀 탄생이라는 신화적 요소의 사실 앞에서 우리는 자연주의 세계관에 갇혀 이 땅의 지식과 이 세상의 것들로 쉽게 해석하고 판단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성육신은 인간의 지식 이상의 초자연의 세계가 이 세상 안으로 침투해 온 것이기 때문이다. 성탄절은 오늘 우리에게 묻는다. 무엇이 현실인가? 눈에 보이는 이 땅을 자연주의적 세계관으로 살아가는 것이 현실인가? 아니면 오늘 이 땅에서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가 있음을 인지하는 것이 현실인가? 동정녀 탄생의 이야기는 어쩌면 나니아의 옷장을 여는 문인지 모른다. 마음을 다해 시인과 아이의 눈으로 그 문을 열면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돌아가는 현실 세계 속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 나니아의 세계가 있음을 알게 해준다. 성육신은 영원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 속으로 들어오신 사건이다. 이것은 우리의 좁은 시야를 열어주고, 나니아의 세계로 이 세상을 볼 수 있게 해준다. 나니아의 옷장은 단순한 판타지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한 가운데 보이지 않는 세계가 여전히 존재함을 상기시켜 준다. 성탄은 신화가 사실이 된 날이다. 그리고 현실의 세상에서 초자연의 세상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제 나니아의 옷장을 열어보자. 무미건조한 삶의 하루하루가 경외와 경탄이 있는 삶으로 바뀔 것이다.
성탄
성육신
신화
신화와사실
허구와진실
판타지
강림
동정녀탄생
‘가벼운 기독교’를 우려한다
by 김형익
2022-12-17
분명히 맥주의 맛을 내는 맥주이지만 알코올 함량이 적은 맥주를 라이트 비어(light beer/lite beer)라고 부른다. 가벼운(light)이란 형용사를 붙여 ‘가벼운 맥주’란 뜻이다. 덜 취하면서 맥주를 즐기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수요를 공략한 맥주 회사의 마케팅 전략이었고, 결국 라이트 비어는 맥주 시장의 판도를 바꾸는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었다. 라이트 비어는 1970년대 후반부터 수십 년 동안 엄청난 시장을 형성하게 되었고 맥주 시장을 주도하게 되었다. 2015년 이후 다시 맥주 시장의 판도가 조금씩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하지만, 어쨌든 라이트 비어는 더 많은 사람이 원하고 소비하는 맥주를 만들어 판매한 맥주 회사의 마케팅 전략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말하려는 것은 맥주 이야기가 아니다. 라이트 비어를 만들어낸 맥주 회사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교회가 더 넓은 시장(?)을 개척하려는 의도로 동일한 일을 할 수 있으며, 또 하고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2012년 5월 21일 자 ‘타임’에는 릭 워렌 목사의 새들백 교회가 시도한 소위 ‘다니엘 다이어트’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엘리자베스 디아스(Elizabeth Dias) 기자가 쓴 이 기사는 종교 섹션이 아니라 건강 섹션에 실렸다! 그녀는 다니엘 다이어트에 참여한 새들백 교회의 1만 5,000명의 교인이 뺀 지방은 26만 파운드(130톤)에 달한다고 썼다. 실로 어마어마한 성공적 다이어트 프로그램이 아닐 수 없다. 라이트 비어와 다니엘 다이어트의 차이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무엇인가? 당시 이 기사에 대한 짧은 평론을 마이클 호튼(Michael Horton)이 썼는데, 그는 성경이 이런 방식으로 사용되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어쩌면 새들백 교회는 다니엘 자신도 상상하지 못한 놀랄 만한 일을 한 것이 아닐까? 10대 소년들로서 지배국인 바벨론으로 끌려와 바벨론의 사람으로 길러지고 있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신앙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왕의 진미를 거절했던 신앙적 행동이 이제 배부른 시대, 배부른 나라에 사는 배부른 교인들에게는 그저 다이어트 교과서로 전락한 느낌을 어찌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조금 지나친 비평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새들백 교회가 기발하게 개발한 다니엘 다이어트 프로그램이 맥주 회사들이 시장을 확장하려고 만든 라이트 비어의 전략과 거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레위기의 음식 정결 규례를 해석하는 일에서도 비슷한 현상을 보게 된다. 음식 정결 규례를 주로 건강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현상들을 대할 때마다 나는 우리가 가벼운 기독교로 가는 길목에 서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맛과 거품은 똑같은 맥주이지만 알코올 함량과 열량을 줄인 라이트 비어와 비슷하게, 기독교의 모양과 맛을 내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는데 사실 있어야 할 중요한 핵심이 빠진 기독교가 지금의 대세가 아닌가 하는 씁쓸한 생각이 든다. 10년 전쯤의 일이다. 당시 이메일로 구독하던 한국의 한 기독교 신문 기사 중에 ‘맛있는 전도, 부침개 전도특공대’라는 제목이 눈길을 끌었던 적이 있다. 나는 특정한 교회의 특정한 전도 프로그램과 그 전도의 열심을 폄하하려는 의도 없이 말한다. 그때 나는 이건 또 뭔가 하는 심정으로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보았고, 전도의 문이 막혀버린 이 시대에 어떻게든 전도를 하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이 먼저는 보기 좋았다. 사진들을 보니, 무더운 대낮에 길에서 불을 때고 부침개를 부치며 땀을 뻘뻘 흘리는 부인들, 그리고 마실 음료와 함께 그것을 나누어주는 학생의 모습들이 들어왔다. 전도는 귀한 일이고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들려주고 그 영혼을 살리는 일의 가치는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그런데 뭔가는 좀 아쉽다고 느꼈다. 부침개전도특공대라? 그리고 맛있는 전도라?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하는 현장에서 한 생명의 영원이 걸려있는 이 일, 매를 맞고 돌에 맞으며 감옥에 들어가며 전했던 복음과는 뭔가 그림이 겹치지는 않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어린애들이 ‘전도’ 하면 “아, 부침개요?” 할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면 너무 심한 혹평이 아닐까 싶기는 하지만, 그런 생각이 떠올랐던 게 사실이다. 열심으로 어떻게든 그리스도께로 사람들을 인도하려고 애쓰던, 사진에서 본 분들의 열심과 수고에 조금이라도 누가 될까 두렵다. 하지만 내 마음에 인상 깊게 드리워졌던 느낌은 우리가 지금 가벼운 기독교로 가는 길목에 이미 들어서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언젠가 트위터에서 보았던 ‘주기도문 드리기 운동 본부’가 생각난다. 당시 내가 검색해 본 바로는 “하늘을 향해 경건한 마음으로 옷깃을 여미고 소리 내어 주기도문을 드리면 범사에 축복이 온다”고 주장하며 주기도문을 일천 번 반복하는 운동이었다. 몇 번 했는지 정확하게 세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여 그 운동본부는 친절하게도 주기도문 계수기까지 판매하고 있었다. 여기서 나는 가벼움의 극치를 넘어 이단적 수준, 바알 종교의 수준으로 가버린 경우를 보았다. 문제는 이런 행태들이 기독교 안에서 부끄러움이나 주저함 없이 버젓이 행해지고 있는 현실이다. 이런 일들을 그저 현대적인 현상이라고만 치부할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사실, 가벼운 기독교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에덴동산에 쫓겨난 이후로 언제나 있었던 현상이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평생 받은 고생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당시 거짓 선지자들이 하던 일을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고발한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 6:14). 그들이 부끄럽지 않게 그런 일을 자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의 탐욕 때문이었다. 더 많은 추종자를 얻고 그들로부터 더 많은 인기와 물질을 얻어내려는 탐욕 말이다. 가벼운 기독교의 시대에 진짜 기독교를 전하고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고통을 겪기 마련이다. 어찌 예레미야 선지자뿐이겠는가?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들 모두가 그랬다.신약 시대에도 다르지 않았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 사람들로부터 의심과 비난을 받아야 했던 이유는 그가 가벼운 복음을 전하기를 거부하고 진짜 복음을 고수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7). 바울 사도가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수많은 사람은 초대교회에서 행세하던 거짓 사도, 거짓 교사들이었다. ‘혼잡하게 한다’는 헬라어는 ‘물을 타서 희석한다’(water down)는 뜻이다. 당시에는 더 많은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 포도주에 물을 타서 ‘라이트 와인’을 파는 부도덕한 포도주 상인들이 있었는데, 바울 사도는 거짓 교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고 말한 셈이다. 거짓 교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물을 탔던 이유는 더 많은 사람에게 미치는 더 큰 시장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죄를 말함으로써 사람들을 불편하고 부담스럽게 하지 않는 복음, 회개를 말하는 대신 손쉬운 할례의 행위를 하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는 가벼운 복음을 전한 것이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에서 이런 가벼운 복음을 다른 복음, 가짜 복음이라고 선언했다(갈 1:7-9).‘가벼운 기독교’는 결코 현대적 현상이 아니다. 다니엘서를 다이어트 교과서로 사용하는 것과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문을 염불이나 주문 외듯이 외우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런 것들은 라이트 비어와 어떤 근본적인 차이를 가지는가? 나는 가벼운 기독교로 가는 현상을 우려한다. 20세기 중반의 미국 기독교를 보면서 A. W. 토저는 이렇게 우려했다. “약은 약이로되 고칠 수 없고, 독은 독이로되 죽일 수 없는 기독교가 되었다.” 너무나 물을 많이 타버렸기 때문이다.가벼운 기독교(light Christianity)는 사람의 살을 빼주고 잠깐의 기분 전환을 신선함을 제공해 줄 수 있을지 몰라도 생명을 살리는 능력은 없는 기독교다. 우리는 조금은 오르막길처럼 느껴질지라도 진짜 기독교(authentic Christianity)를 찾고 그 산으로 올라야 하지 않겠는가?
가벼운기독교
진짜기독교
다른복음
가짜복음
한국 근대사를 품다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승동교회
by 이종전 · 장명근
2022-12-16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대한 강토에 선 첫 세대 교회들을 찾아 떠납니다. 그 이야기들에서 우리 신앙의 근원과 원형을 찾아보려 합니다.종로에 자리하고 있는, 이 나라의 근대사와 사회 변천의 중심에 있는 교회가 있다. 현재는 승동교회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그 이전의 이름은 여럿이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곤당골교회, 홍문석골교회, 동현교회라는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1893년 사무엘 무어(Samuel F. Moor, 1846-1906) 선교사가 지금의 소공동 롯데호텔이 있는 곳에서 모임을 가지면서 시작된 것이 현재의 승동교회이다. 당시에는 그곳이 곤당골이라는 지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곤당골교회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신앙을 지키던 공동체는 1905년 현재의 종로 인사동으로 옮겼다. 승동교회는 서울 중심에서 한국 근대 역사의 사회적, 정치적 변화의 바람을 고스란히 받아내었으며, 한국 장로교회 역사에서도 그 중심에서 다양한 역할을 맡은 매우 특별한 교회이다. 그러함에도 피맛골(피맛길) 뒤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인지, 신흥 대형교회들이 많기 때문인지 이 교회에 관하여 많이들 알지 못한다. 하지만 승동교회의 역사는 한국 교회와 사회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다. 근대화 과정에서 사회적 관습과 제도를 극복하게 하는 산실이었기 때문이며, 식민지 시대에는 독립만세운동의 한 거점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장로교회 역사에서는 조선신학교(현 한국신학대학교)가 출발한 곳이었으며, 1959년 장로교회가 합동측과 통합측으로 분열할 때 합동측 총회가 모인 장소이기도 하다. 유교가 지배했던 조선조의 역사는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에게 유교적 가치관을 따르도록 했다. 그러한 가치관 중에는 극복해야만 했던 그렇지만 불문율의 제도로 고착된 것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신분제와 성별 의식이 대표적일 것이다. 신분에 따라서 교육의 기회가 달라짐은 물론이요, 입는 옷부터 직업까지도 마음대로 가질 수 없었다. 남자와 여자는 동석하는 것조차 불가한 일이었다. 신분만큼이나 성별은 사람을 상하로 차별하는 중요한 잣대였다. 그러한 관습은 매우 경직된 사회를 형성하게 했다.그러한 사회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는 조선에 복음이 들어왔다. 이 땅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복음을 전하면서 더불어 서양의 교육 방법과 내용도 보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이 전하는 것은 조선의 사회 관습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복음이 전해지던 초기에는 남자와 여자가 각각 다른 공간에서 예배를 드려야 했다. 남자교회는 남자 선교사가, 여자교회는 여자 선교사가 따로 예배를 인도했다. 그러니 얼마나 불편했을까. 같은 교회인데 남자와 여자가 각각 다른 공간에서 예배했으니 말이다. 예배당 안에서도 남자석과 여자석을 구별하기 위해서 그 가운데에 휘장을 쳤다. 시간이 좀 흐른 다음에는 아예 예배당을 ㄱ자 모양으로 지었다. 중앙 강대상을 중심으로 휘장이 없이도 남자석과 여자석을 나누어 놓겠다는 의도였다. 물론 그 이전에는 아예 남자와 여자가 모이는 교회가 달랐다.신분과 성을 극복하고 하나의 교회에서 진정한 공동체가 되려면 유교가 남긴 가치관을 넘는 것이 선행되어야 했다. 그렇기에 처음 교회들은 이와 관련한 문제들에 직면했고, 이러한 것들을 극복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과정은 많은 아픔을 동반했다. 승동교회는 신분제도와 관습을 극복하는 과정의 어려움을 보여준 대표적인 교회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주역은 백정(白丁)이라는 신분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백정은 조선의 세종대왕 이후부터 도축하는 사람, 즉 돼지, 소와 같은 가축을 잡고 해체하는 사람이었다. 백정 신분을 가진 사람은 천민인 노비보다도 사회적 지위가 낮았다. 따라서 그들은 백정 마을에 살아야 했으며, 온갖 차별을 견뎌야 했다.당연히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푸는 것은 물론이고 그들이 교회에 나와 일반인들과 동석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무어 선교사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또 세례를 주었다. 그러자 같은 교회에 다니는 일반인들과 양반들이 저항했다. 백정과는 신앙생활을 같이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백정과는 같은 공간에 있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그들은 교회를 떠났다. 그러다가 양반 신분의 신자들은 타협안을 제시했다. 예배당에서 양반들이 앉는 자리를 앞에 두고, 백정들은 뒷자리에 따로 앉게 해달라는 것이었다.하지만 무어 선교사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리고 다시 설득했다. 복음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하나”인 것처럼 노예든 백정이든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으니 결코 신분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러한 무어 선교사의 가르침과 설득에도 결국 양반들은 이 교회를 떠나고 말았다. 그렇지만 백정 신분인 이 교회의 박성춘은 장로가 되었다. 신분 의식이 지배하던 사회 관습이 깨지면서 신분제도를 허문 것이다.박성춘은 단지 장로가 된 것에 그치지 않았다. 1898년 10월 28일 독립협회가 주관하는 만민공동회에서 박성춘은 “국정을 논하고 만민평등의 인권을 부르짖으며 독립사상을 고취했다.” 백정들은 백정 박성춘이 연설한 것만으로도 감격했다. 백정 장로 박성춘이 안창호, 서재필 같은 지도자들과 같은 단상에서 연설했다. 이것은 곧 백정 신분의 해방을 뜻했다. 더 나아가 박성춘의 아들 박서양(본명 박봉출)은 세브란스의학교에서 1900년부터 1908년까지 공부하고 제1회로 졸업하여 1908년 조선인 최초로 양의사가 되었다. 박서양은 1917년 간도에 병원을 세우고 유일한 조선인 의사로 활동했다. 삼일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만주 지역에 조직된 독립운동단체인 대한국민회에서 참여하였고, 독립군사령부 군의관으로 활약했다. 또한 무어 선교사는 신분제도의 외적 상징인 의관을 신분과 관계없이 사용하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 무어 선교사는 처절하게 소외된 백정의 모습을 보고 고종 황제에게 백정도 갓을 쓸 수 있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백정에게 갓이 허용된 날, 백정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갓을 벗지 못해 잠도 자지 못했으며, 갓을 쓰고 괜스레 길거리를 하염없이 걸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만큼 당시 남자들에게 갓은 신분의 상징이었으니, 백정들에게는 꿈같은 일이었다. 승동교회는 우리 근대사, 그중에서도 삼일운동의 중심에 있다. 대부분 ‘독립선언문’이 발표된 곳은 태화관이고 만세운동이 전개된 곳은 탑골공원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선언문이 준비되는 과정은 잘 알지 못한다. 승동교회는 서울 YMCA 건물, 태화관과 접하고 있으며, 길 하나 건너서 탑골공원이다. 이렇게 지리상으로도 중심이지만, 삼일독립만세운동의 주역들 가운데도 이 교회의 청년 김원벽과 당시 담임 목사 차상진 같은 이들이 있었다. 김원벽은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재학하던 재원이었다. 그는 보성전문학교, 세브란스의전, 경성공전, 경성전수학교 등의 학생 대표들과 함께 학생독립선언서를 발표하려고 기획했지만 삼일독립만세운동이 준비된다는 것을 알고 자신들이 만든 것은 폐기하고 삼일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기로 했다. 김원벽은 승동교회 청년부와 연희전문학교를 대표해서 승동교회 밀실에서 각 학교의 대표들과 함께 모여 삼일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사실이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었고, 결국 일경은 승동교회와 정동교회를 수색하였고, 김원벽은 구속되어 옥고를 치러야 했다. 1875년 양평에서 출생한 차상진은 31세(1906년)에 처음 교회에 나왔고, 4년이 지난 후 장로가 되었다. 그 후 평양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917년 목사가 되어 승동교회 5대 담임자로 부임했다. 1919년 3월 5일 승동교회 청년 김원벽이 참여한 만세운동 현장을 보고 의분을 크게 느낀 차상진은 그달 14일에 12명의 지도자와 연대하여 ‘12인의 장서(長書)’를 작성해서 직접 조선총독부를 찾아가 제출했다. 그는 그 즉시 체포되어 8개월 징역형을 받았다. 차상진 목사는 개종한 후 목사가 되기 전에 이 교회에 출석하면서 1907년 동향 후배인 여운형에게 복음을 전했다. 마침 여운형의 집은 승동교회에서 멀지 않은 북촌에 있었다. 여운형은 차상진의 전도로 복음을 받아들였고, 1908년부터 승동교회에서 조사가 되어 곽안련(Allen D. Clark) 선교사를 조력하기도 했다. 승동교회가 가지고 있는 역사에서 기억될 수밖에 없을 만큼 한국 교회사에서 중요한 것이 또 있다. 1938년 소위 평양신학교가 신사참배에 저항하면서 자진 폐교를 단행한 후 서울에 새롭게 만들어진 조선신학교가 1939년 이 교회에서 시작되었다. 그 후 조선신학교는 1940년 정식으로 일제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 개교하게 되었고, 해방 이후에 한국신학대학으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니, 소위 한신의 출발지가 바로 승동교회이다.해방 이후 교회를 재건할 때 북한지역의 교회가 함께할 수 없는 상태에서 우선 남한교회만 재건하는 것을 전제로 모인 남부대회도 이 교회에서 모였다. 또한 신학 갈등으로 한국장로교회가 분열하는 과정에서 특별히 1959년도 합동측과 통합측이 분열할 때 그 분열이 결정되는 합동측 총회가 1959년 11월 23일 열린 곳도 이 교회이다.
승동교회
사무엘무어
신분제
차별
일치
하나님과 주거니 받거니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재정립한 문장
by Ed Welch
2022-12-15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신학교 첫해에 나는 하나님, 가장 가까운 사람들, 그리고 상담할 사람들과의 관계에 깊은 영향을 끼칠 한 문장을 우연히 발견했다. 당시 내 눈에 성경은 단지 잘게 부서진 일련의 조각처럼만 느껴졌다. 물론 하나하나가 다 좋은 조각이었지만, 서로를 잇는 일관성이 부족해 보였고, 그 사실은 때때로 내게 고통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나는 성경 속 짧은 이야기를 모아놓은 책보다는 성경 전체를 하나로 묶어 핵심 메시지를 보여주는 책을 읽으려고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 점을 염두에 두고 만난 그레셤 메이첸(J. Gresham Machen)의 The Christian View of Man을 읽는 중에 내 시선을 사로잡은 글이 하나 있었다. ‘하나님이 인격(personal)이시기에 인간도 인격이다’라는 요지의 내용이었다. 이건 분명히 메이첸에게 있어서 대통합의 원칙이 되는 중요한 관점인 게 분명해 보였다. 그리고 내게도 그렇게 될 것만 같았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자세하게 알아보기 위해 더 꼼꼼하게 읽었다. 무엇보다 메이첸이 ‘인격’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찾을 수 없었다. 안타깝지만 나는 그 책을 읽으면서 깨달은 사실만 따로 정리하고 책을 덮었다. 비슷한 시기에 나는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가 쓴 성경신학(Biblical Theology)을 읽었다. 그는 성경의 중심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아주 잘 썼고, 그의 통찰은 내가 현재까지 추구하고 있는 방향을 지향하도록 만든 출발점이 되었다. 그 책을 읽은 결과, 나는 보스의 모든 글(캐서린 보스(Catherine Vos)의 아동 도서까지 포함)을 추적하게 되었고, 그러는 중에 내 인생을 바꾼 문장을 발견했다. 보스는 내게 인지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만족스러움을 가져다주는 인격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관점을 제공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께 순종하거나 의지하는 것도 또 단지 하나님을 위해서만 사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의식적이며 호혜적인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생각과 목적과 일에서 그분과 나 자신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영적 능력이라는 면에서 끊임없이 상호작용함으로 그분에게서 받고 또 그분께 돌려드리는 것이다. (Redemptive History and Biblical Interpretation, 186쪽)주거니 받거니그 이후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여전히 그 말이 그날 내게 준 감동을 생생하게 기억한다.“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보스는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담긴 핵심이 무엇인지를 내게 알려주었다. 나는 귀를 기울였다. “단순히 하나님께 순종하거나 의지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사람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보스가 이단에 빠졌고, 나만 그걸 모르고 있었던 건가? “하나님과 의식적이며 호혜적인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영적 능력이라는 면에서 끊임없이 상호작용함으로 그분에게서 받고 또 그분께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메이첸이 말한 인격의 의미였다. 굳게 잠겨있던 뭔가가 열리는 느낌이었다. 오늘날에도 이 말은 내가 “주거니 받거니”(back and forth)라고 짧게 말하거나 쓸 때마다 그 속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서로 주고받은 대화에 달려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사 1:18)라고 말씀하신다. 이제 그분으로부터 또는 나로부터 대화가 시작될 수 있다. 하나님은 “너희의 속마음을 털어놓아라”(시 62:8)라고 말씀하신다. 이제 나는 그분께 내 마음을 쏟아낼 수 있고, 그분은 내 말을 들으신다. 하나님은 공감(compassion)으로 반응하시거나, 또는 단지 자녀가 자신에게 중요한 것에 대해서 쉬지 않고 이야기하는 것을 즐겁게 들으신다. 그리고 그는 행동하신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말씀을 통해 그의 뜻을 우리에게 전해주신다. 그리고 나는 그의 말씀에 영향을 받아 변화된다. 주거니 받거니. 호혜적 교제. 영적 존재 사이의 끊임없는 상호 작용.그리스도께 더 가까이모세가 떠오른다. 이집트에서 탈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백성들은 우상숭배에 빠졌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가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출 32:7) 백성에 대해 말씀하신다. 모세가 항의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은 자신의 진노가 실제로 백성들에게 어떻게 임할지를 모세에게 말씀하신다. 그제야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대답할 여지를 주고 계심을 깨닫고 그 초대를 받아들인다. 그는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주셨던 과거의 약속, 열방 앞에서 드러날 하나님의 명성,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당신의 종…자손”이라는 사실에 호소한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주님은 “마음을 돌이키셨다”(출 32:14).그렇게 ‘주거니 받거니’가 이어진다. 주님은 “나의 천사가 너를 인도할 것이다”(출 32:34)라고 말씀하신다. 응답하라는 하나님의 다른 초대를 모세가 놓쳤을 때도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않겠다”(출 33:3). 아마도 이전 대화로 인해 담대해진 모세가 대답한다. “주님께서 친히 우리와 함께 가지 않으시려면, 우리를 이곳에서 떠나 올려 보내지 마십시오”(출 33:15). 하나님의 대답은 간단하다. “내가 너를 잘 알고, 또 너에게 은총을 베풀어서, 네가 요청한 이 모든 것을 다 들어 주마”(출 33:17). 그렇게 계속 주거니 받거니 한다. 하나님과 모세 사이의 일련의 대화는 주님께서 그의 변함없는 사랑과 신실하심이 이제 죄의 용서로 표현될 것이라고 계시하실 때 절정에 이른다(출 34:6-7).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사람은 모세로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복음서가 떠오른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이 하늘과 땅을 나누는 사닥다리를 타고 내려오시며, 그분의 얼굴은 가장 친밀한 방법으로 그분의 모든 백성을 향하신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우리는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임으로 새롭게 빚어진다. 그런 다음 그분은 우리에게 말하라고 권유하신다. 하나님 자신이신 그분이 우리가 하는 말에 의해서 영향을 받으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복음 안에서 이루신 역사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가까워졌다(벧전 3:18). 이제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친구라고 불리며(요 15:15), 하나님과 더불어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개인적인 풍성함하나님은 이제 나를 그의 백성 가운데 두셨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그가 나를 그 자신에게 더 가까이 두셨고, 내게 말하라고 초대하신다는 것이다. 더 많이 말할수록 내게는 더 좋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하나님과 ‘주거니 받거니’를 통해서 하나님을 더 알아가고 나를 하나님께 더 드러낸다. 하나님은 정말로 이런 식의 개인적인 친밀함을 원하신다. 누가 감히 그런 관계가 가능하다고 생각이나 했을까? 이 사실이 내 마음에 점점 더 뿌리를 내려감에 따라서 나는 더 많이 기도하게 되었다. 좋은 것과 어려운 것에 대해서, 종종 나는 하나님께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고 그냥 털어놓기만 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더 자주 고백한다. 이런 기도가 내 삶에서 일으킨 변화는 내 안에 주님에 대한 경외심이 더 커졌다는 것이다. 더 이상 나는 기도 속에 형식으로 포장된, 마치 친구들 사이에서나 일어나는 형식적인 대화를 담지 않는다 이런 영적 풍성함은 아내와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인격으로서의 하나님이 내 속에 자리 잡기 전까지 나는 아내에게 다 털어놓으라고 종종 말하기는 했지만, 정작 나는 그렇지 못했다. 내가 부끄럽거나 아내가 듣고 싶어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 주된 관심사가 내 말을 하는 것보다 아내의 말을 듣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매일매일 준비한다. 오늘 내가 아내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지? 그런 다음, 나는 언제나 나를 돌보시는 주님께 나아가려고 준비한다(벧전 5:7).이런 깨달음은 매주 내가 하는 상담에도 적용된다. 예를 들어, 처음에는 언제나 내담자가 마음을 열고 얘기를 하도록 하지만, 어느 시점에 이르면 나는 꼭 이렇게 말한다. “자, 이제 그것을 주님께 말씀드립시다.” 염려에 쌓인 사람에게 하나님께 나아가서 마음을 털어놓는 것은 가장 중요하다. 빌립보서 4:5-6은 그 사실을 알려준다. 하나님이 바로 곁에 계신다. 그러니까 당신을 괴롭히는 세상과 혼자 싸우려고 애쓰지 말라. 하나님께 나아가서 털어놓아라. 당신의 생각을 하나씩 정리해 보라. 불안함을 일으키는 요인을 생각해 보라. 당신을 괴롭히는 걱정이 말하는 사실이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거기에는 한 가지 메시지가 있기 마련이다. 가르치다 보면 나는 자주 시편을 인용한다. 시편은 결국 하나님과 대화하는 방법에 대한 교훈이다. 각각의 시편을 각기 다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이해하라고 나는 제시하곤 한다. “나에게 말해라”라고 주님이 손을 내미신다. “지금 너를 괴롭히는 게 무엇이냐?” 나는 이 점을 최근에 쓴 책에서도 설명했다. 그 책 제목이 ‘더 가까이 가도록 창조된’(Created to Draw Near)’이다. 나는 이 책에서 내가 수십 년 전에 이런 길에 들어설 수 있도록 도움을 준 보스를 인용했다. 끝나지 않는 대화내 주변의 세상을 관찰할수록, ‘주거니 받거니’야말로 온 세상에 넘쳐흐르는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가 운영되는 방식에 있어서 근본이 되는 원칙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예를 들어 좋은 친구는 서로 마음을 나눈다. 배우자도 서로 마음을 나눈다. 그게 바로 가까운 사람들과 관계를 유지하는 방식이다. 마음을 나누지 않을 때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다. 내 마음에 감동을 준 이 네덜란드 신학자의 긴 문장이 말하는 바가 바로 이런 사실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순종하기 위해서, 의지하기 위해서, 아니면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그렇다. 그 모두를 다 포함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당신의 대답이 우리를 자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신 인격적인 하나님에 의해 재구성되도록 하라. 그래서 이 세상 그 어떤 다른 피조물도 할 수 없는, 사랑의 말로 끝없이 속삭이는 ‘주거니 받거니’의 관계가 주는 기쁨에 당신이 동참할 수 있기를 간구한다. 원제: Back and Forth with God: A Sentence That Reshaped My Relationships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관계정립
게할더스보스
메이첸
그리스도인의삶
일을 제때 못 끝낼까 봐 걱정이에요
by Amy DiMarcangelo
2022-12-14
'시간 내에 일을 끝낼 수 있을까?' 불안감에 가슴이 떨립니다. 문제는 이런 걱정을 어떻게 하나님께 맡겨야 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일에 대한 불안은 종종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할 일이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잠 못 이루는 밤이 이어집니다. 임박한 마감일이 떠오를 때마다 가슴이 뜁니다. 마쳐야 할 일이 가져온 공포감에 짓눌려 물속 깊이 빠져드는 것만 같습니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실망을 안길 대상은 상사나 고객, 나아가서 나 자신까지 다 포함합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래서 각종 생산성 관련 서적을 읽고 또 업무와 관련한 팟캐스트도 듣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언제나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나의 결점일 뿐입니다. 상황은 이제 이전보다 훨씬 더 나빠집니다. 견디기 힘든 불안이 나를 감쌉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감정 중 하나라도 당신에게 익숙하다면,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더 열심히 일하라고 재촉하는 문화, 더 많은 일을 해내라고 부추기는 문화에서 업무가 주는 불안은 이제 아주 흔한 감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폭풍우 몰아치는 스트레스의 바다에 좌초되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닻을 내려야 할 근본적인 진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우리를 돕는 실용적인 지혜가 담겨있습니다. 고정된 진리일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땅이 저주받음으로써 일은 힘든 노동이 되었습니다. 꿈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조차도 피할 수 없는 게, 가시와 엉겅퀴의 찌름입니다. 그래서 종종 모든 수고가 헛된 것처럼 느껴지고, 또 모든 노력이 좌절되는 것같이 보입니다. 비록 이런 모든 현실이 다소 실망스러운 진실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도움이 됩니다. 헛된 꿈을 좇지 않도록, 또한 실현되지 않은 꿈에 좌절하지 않도록 나를 붙잡습니다. 일과 관련한 진리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기 전까지는 이 세상의 모든 일이 저주의 결과를 감당할 수밖에 없음을 상기시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재림의 약속은 우리가 희망을 품고서 인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모든 일을 성취하십니다. 자신의 계획에 따라 의도한 시간에 일을 완수하실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이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다. 피조물인 우리에게는 그런 힘이 없습니다. 우리는 나의 교만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나 자신이 아닌 무한한 존재가 되려고 애쓰는 자존심이라는 교만 말입니다. 그리고 겸손하게 나의 한계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직장에서 실수를 저지르는 건 당연합니다. 우리는 종종 무엇을 해야 할지 모릅니다. 피곤하고 또 병에 걸리기도 합니다. 교만과 자만에 빠지기 쉬운 나의 죄된 본성은 여지없이 나를 또다시 넘어뜨릴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지혜와 지식과 기술을 키울 수는 있지만, 결코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얻지는 못할 것입니다. 성장은 피조물이라는 우리의 한계 안에서만 일어납니다. 부족함이 우리를 좌절시킬 수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기뻐해야 합니다. 부족함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을 더 경배할 수 있습니다. 혼란스러운가요? 혼란을 느끼지 않는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피곤하지도, 졸지도, 또 주무시지도 않는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실수를 범했나요? 실수를 통해서도 자신의 뜻을 이루실 하나님을 다시 찬양합시다. 마지막으로, 당신의 정체성은 결코 직업과 생산성 또는 성취와 성공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일은 피조물인 당신에게 주어진 사명의 일부이지만, 그게 반드시 당신이 누구인지는 알려주는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도록 창조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에 나의 정체성을 두는 것처럼 나의 안전을 흔드는 위험한 것도 없습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모든 것이 순식간에 사라지기도 하고, 결코 변하지 않으리라 확신했던 것도 달라지곤 합니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이 어제나 오늘이나 또 영원토록 변함없으십니다. 당신이 주의 몸의 영광스러운 지체로서 그와 연합한다면, 당신의 정체성과 신분은 이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실질적인 지혜업무 관련 불안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특정한 습관과 관행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뽑은 두 가지, 그리고 성경 밖에서 찾은 두 가지, 모두 네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규칙적으로 쉬어라. 직장이 주는 압박감에 압도된다면, 쉴 마음이 아예 안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안식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는 쉬도록 설계되었기에, 쉬어야 합니다. 1마일이나 되는 할 일 목록이 있을 때도 쉴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내가 지금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표현입니다. 쉼은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의 일을 향하도록 합니다. 동시에 일은 단지 일에 불과하다는, 합당한 위치에 일을 두는 데에도 도움을 줍니다. 2. 기도로 하나님을 의지하라. 자급자족을 갈망할수록 불안감도 지속됩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해야 합니다. 종일 쉬지 않고 기도를 연습함으로 내가 하나님을 의존하고 있음을 상기합니다. 다음과 같은 특정 시간에 하는 기도가 큰 도움이 됩니다. 차에 오를 때. 정오에. 회의 직전에. 프로젝트를 검토할 때. 기도가 굳이 길고 유창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순하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저는 지금 지혜가 필요합니다. 제발 좀 저를 지도해 주시고, 이 일을 통해서 당신께 영광을 돌리도록 도와주세요.” 3. 정기적으로 “두뇌를 비워라.” 당신이 나와 비슷하다면, 똑같은 일, 압박감, 그리고 두려움이 계속해서 마음을 맴돌 것입니다. 그것들을 한번 싹 다 종이에 적어보십시오. 또는 누군가에게 숨기지 말고 털어놓으십시오. 그렇게 하면 마음속에서 반복되는 불안의 주기가 중단됩니다. 머리를 비우는 건 새로운 관점을 가짐으로 진짜 중요한 일을 중심으로 우선순위를 정하는 데에 도움을 줍니다. 4. 집중 시간을 적용하라. 집중 시간을 알도록 한 칼 뉴포트(Cal Newport)와 그의 뛰어난 저서 딥 워크(Deep Work)에 감사를 표합니다. 멀티태스킹은 대개 역효과를 낳습니다. 서로 다른 프로젝트, 이메일, 대화 사이로 계속해서 주의가 흩어지면, 작업 능률은 떨어집니다. 다시 집중하는 데에만 시간이 걸리므로 지속해서 주의를 돌리는 것은 매번 새로운 프로세스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집중 시간‘(block schedule)은 특정 작업을 위한 특정 시간의 할당을 의미합니다. 해당 시간대에는 오로지 그 일에만 집중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원고 작업에 두 시간이 할당되었다면, 그 시간 동안 작업 흐름에 방해가 되는, 이메일 확인을 비롯한 다른 모든 일에 대한 충동을 참습니다. 작업 특성에 따라, 프로젝트별로 특정 시간 또는 요일을 지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해당 프로젝트에 집중하는 사이에 다른 일 때문에 불안감이 엄습한다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건 내 문제가 아니야. 내일 작업하기로 한 거니까. 오늘 할 일은 이거야.” (나도 지금 이것을 연습하고 있습니다. 지금 벽에는 처리해야 할 학교 논문이 걸려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보면서, ‘이건 오늘 내가 할 일이 아니야’라고 스스로 말하는 건 내게 자유로움을 선사합니다.)마지막으로, 하나님이 당신을 너무너무 사랑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을 돕고 싶어 하십니다. 당신의 짐까지 대신 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돌보십니다. 그렇기에 이제 당신은 얼마든지 모든 염려를 그분께 맡길 수 있습니다(벧전 5:7).원제: Help! I’m Worried I Can’t Finish My Work in Tim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집중시간
멀티태스킹
직장스트레스
업무압박감
구약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
by Don Carson
2022-12-13
히스기야 왕이 얼마나 선하고 충실한 사람인지, 그의 생애와 시대에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는 구약 본문이 무려 세 군데나 있다(왕하 18-20장, 대하 29-32장, 사 36-39장).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토라의 가르침에 맞게 나라를 개혁으로 이끌기 위해 노력한 히스기야를 만날 수 있다. 또한 앗시리아 왕 산헤립과 맞섰을 때 드러난 히스기야의 놀라운 용기와 신실한 믿음을 보며 감동을 받는다. 그러나 세 본문 중 그 어떤 것도 히스기야가 저지른 도덕적 실패를 대충 얼버무리지 않는다. 특히 두 본문(열왕기하와 이사야)은 그중 하나를 탁월한 슬픔의 이야기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논의를 위해서 이사야 39:1-8에 초점을 맞추고, 다음 세 가지 세부 사항을 주의 깊게 살펴보자. 도덕적 대조다른 많은 성경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이 장은 놀라운 정도로 도덕적으로 대조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사야서 36-37장은 히스기야의 믿음과 용기를 전해준다. 이사야서 37:14-20에는 그의 특별한 기도가 나온다. 그리고 등장하는 징징거리는 자기 연민에 빠진 38장 속 히스기야의 모습 앞에서 우리는 실망한다. 게다가 이사야 39:1-2은 바벨론 사절들에게 어리석은 자랑을 일삼는 그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결과는 39:5-7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책망이다. 어떻게 같은 사람이 이럴 수가 있을까? 선하다가 악해지고, 현명하다가 어리석어지고, 그토록 하나님 중심이었다가 돌연 자기중심으로 바뀔 수 있을까? 그래도 영웅이라면 좀 더 일관성 있는 모습을 보여줄 거라고 기대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도덕적 대조는 놀랍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실망스럽기까지 하다. 그렇다고 이런 이유가 이사야서 39장을 구약에서 가장 슬픈 본문 중 하나로 만드는 건 아니다. 이 이야기가 최상급으로 실망스럽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지금까지는 말이다. 물론 충분히 슬프긴 하지만 확실히 가장 슬픈 건 아니다. 위대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수치스러운 거짓말로 아내를 위험에 빠뜨리기까지 했다. 가장 겸손한 사람이었던 모세는 지팡이로 반석을 내려치며 독선적인 분노로 좌절감을 표출하기도 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인 다윗은 또 어떤가? 실로 죄가 많은 아버지일 뿐 아니라 간음과 살인을 자행한 자이다. 신약성서 속에서 예를 찾는다면, 당장 베드로를 떠올릴 수 있다. 하나님이 직접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보여 주었지만, 세 번이나 그를 부인했다. 사실, 성경에는 부정적인 내용이 전혀 기록되지 않은 인물도 있다(예: 요셉, 다니엘, 에스더). 그러나 그런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삶 속에서 실망스러운 모순과 뿌리 깊은 대조를 드러내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 그중에 한 사람이 바로 히스기야이다. 섭리의 왜곡겉으로 보기에 히스기야는 섭리의 교리를 고수한다. 그러나 사실은 바른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섭리를 왜곡한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향해 존중을 표현하지만, 한편으로는 비뚤어진 의도를 가지고 그것을 자신의 삶에 적용한다. 그는 또한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성취하겠다는 욕심에 마음을 다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한다. 이스라엘을 찾은 바벨론 사절단 앞에서 그는 부요함을 자랑함으로 왕국을 위험에 빠뜨린다.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히스기야를 꾸짖으셨고 앞으로 있을 비참한 심판에 대해 경고하셨다. “너의 왕궁 안에 있는 모든 것과 오늘까지 너의 조상이 저장하여 놓은 모든 보물이, 남김없이 바빌론으로 옮겨 갈 것이다”(사 39:6). 더욱이 임박한 재난은 개인적인 차원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다. “너에게서 태어날 아들 가운데서 더러는 포로로 끌려가서, 바빌론 왕궁의 환관이 될 것이다”(사 39:7).히스기야의 반응은 어땠을까? “그대가 전하여 준 주님의 말씀은 지당한 말씀이오”(사 39:8). 언뜻 보기에 히스기야는 마치 하나님의 뜻 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비록 심판이라도 말이다. 그러나 8절 후반부는 그의 이기적인 마음을 드러낸다. 히스기야가 자신의 왕국 앞에 놓인 끔찍한 하나님의 심판(justice) 앞에서도 여유를 부린 이유는 다름 아니라 자신은 안전했기 때문이다. “히스기야는,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도 평화와 안정이 계속되면 다행이라고 생각하였다”(사 39:8).심판의 위협 앞에서 전혀 달랐던 다윗의 반응간음과 살인의 여파로 다윗은 왕국에 심판이 닥칠 것이며, 더불어 밧세바에게서 태어난 아들이 죽을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다윗은 죄를 회개했고, 선지자 나단은 선언했다. “주님께서 임금님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임금님은 죽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임금님은 이번 일로 주님의 원수들에게 우리를 비방할 빌미를 주셨으므로, 밧세바와 임금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은 죽을 것입니다”(삼하 12:13-14). 그리고 다음 주 아이가 사투를 벌이는 내내 다윗은 먼지와 재를 뒤집어쓰고 먹기를 거부했다. 아기는 결국 죽었고 다윗의 시종들은 주인에게 그 사실을 말하기 주저했다. 그러나 비극적인 소식을 알게 된 다윗은 몸을 씻고 깨끗한 옷과 로션을 바르고는 하나님께 경배했다. 그리고 좋은 음식으로 식사를 했다. 혼란스러워하는 시종들에게 다윗은 자신이 히스기야와 매우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이가 살아 있을 때에 내가 금식하면서 운 것은, 혹시 주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 주셔서, 그 아이를 살려 주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오. 그러나 이제는 그 아이가 죽었는데, 무엇 때문에 내가 계속 금식하겠소? 내가 그를 다시 돌아오게 할 수가 있겠소? 나는 그에게로 갈 수 있지만, 그는 나에게로 올 수가 없소.” (삼하 12:22-23)하나님이 내린 심판의 선언을 들은 다윗은 그것이 합당하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동시에 하나님이 단지 원초적인 의지 이상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과 교류하시는 자비로운 분이다. 하나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아이는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히스기야 역시 하나님의 뜻을 인식했고, 이미 선고된 심판이 마땅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는 그의 진심은 이기심이다. 히스기야는 백성을 위해서 중재하지 않았다. 후손 중 일부가 전쟁의 비참함 속에서 거세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흔들리지 않았다. 심지어 산헤립과도 대적했던 이 왕은 이제 자신 외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심지어 자녀와 손자까지도 돌보지 않는다. 한때 이 왕에 대해서 이런 평가가 있었다. 그는 주님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을 신뢰하였는데, 유다 왕 가운데는 전에도 후에도 그만한 왕이 없었다. 그는 주님에게만 매달려, 주님을 배반하는 일이 없이,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들을 준수하였다(왕하 18:5-7).그러나 히스기야는 자신의 안락함을 뛰어넘는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끝난다. 이 이야기에는 슬픈 신랄함이 있다.심판과 소망히스기야는 이사야 40-66장의 위대한 주제 중 하나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어떤 면에서 슬픔을 주는 이사야 39장은 예언의 나머지 부분을 통해 울려 퍼지는 북소리 중 하나를 발표한다. 선지자의 초점은 영적 활력과 파멸적인 정죄 사이를 계속 오간다.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이 자비로우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불성실하다(사 43:14-28).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헛된 우상을 섬기며(사 44장) 죄악과 불의를 따른다(사 59장). 예루살렘은 회복되고(사 44:24-28; 51:1-16; 54장) 이스라엘은 자유를 얻겠지만(사 48:12-15; 49:8-21), 구원에는 심판이 따른다(사 65장).마지막 두 장에도 심판과 희망이 모두 담겨있다.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무시무시한 실패와 죽음이 있다.개인이든 하나님의 언약 백성 전체이든, 우리는 용감한 믿음의 본보기는 따르고 타오르는 이기심의 본보기에 대해서는 슬퍼하도록 명받았다. 높으신 주님의 음성은 오늘도 여전히 말씀하신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이 글은 Themelios 47, no. 3 (December 2022)에 실린 같은 제목의 논문을 간추린 것입니다.원제: One of the Saddest Texts in the Old Testamen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하스기야
다윗
이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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