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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기 위해서라도 자제력이 필요하다
by Jay Kim
2022-12-12
2006년 겨울, 두 아이의 엄마인 마흔한 살 리디아 앙기유(Lydia Angyiou)는 북극곰과 싸우고도 살아남았다. 앙기유와 어린 두 아들이 동네 커뮤니티 센터 옆을 걷고 있을 때였다. 아이스하키를 하던 한 무리의 아이들이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앙기유 앞에 나타난 건 무려 700파운드는 되어 보이는 북극곰이었다. 곰은 그녀와 일곱 살 아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그녀는 야수와 아이 사이로 뛰어들면서 소년들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총을 든 한 남자가 올 때까지 그녀는 곰을 발로 차고 때리며 싸웠다. 우리는 종종 아드레날린의 힘을 통해 다른 세상에서나 만날 거 같은 초능력을 행사하는, 비범한 의지를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다. 인간 의지력에 숨은 잠재적인 능력은 우리 대부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게 분명하다. 인간의 의지력이 그토록 강력한 게 사실이라면, 우리는 왜 고작 몇 파운드를 빼기 위해 그렇게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걸까? 소셜 미디어에서 눈을 떼거나 아이들에게 소리치지 않는 게 왜 그렇게 어려울까? 의지력과 우리 몸에서 나오는 부신 호르몬이 북극곰과 싸우거나 긴급 상황에서 무거운 차를 들어 올릴 만큼 엄청난데도, 우리는 왜 야식을 억제하지 못하는 걸까? 우리의 투쟁 또는 도피 대응 능력은 극한 상황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깨어 있는 시간 대부분은 평범함으로 가득하다. 우리의 일상을 채우는 무한한 유혹에 대응할 힘은 그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서는 아드레날린 이상이 필요하다. 꾸준한 자제력이 있어야 한다. 자제력의 필요성을 알아야만 한다. 나를 속이는 마음의 간교함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자제력이라는 미덕을 기르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삶, 긴급하지 않은 삶의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자제력의 필요를 인정하라성령의 열매 목록(갈 5:22-23)에서 바울이 절제를 제시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우리의 타락한 본성 때문이다. 성령이 연료가 되는 자기 통제의 대척점에 바울이 놓은 것은 죄된 욕망(갈 5:16)과 육체의 행위(갈 5:19)이다. “음행과 더러움과 방탕과 우상숭배와 마술과 원수맺음과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분쟁과 분열과 파당과 질투와 술취함과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놀음과, 그와 같은 것들입니다”(갈 5:19-21). 이러한 악덕이 드러내는 것은 전혀 통제되지 않는 삶의 모습이다. 겉으로 보기에 자제력은 한계를 정하고 심지어 숨 막히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개인주의라는 우상 숭배와 자기만족을 종교 수준으로 떠받드는 문화적 배경에서 자라난 사람들에게 자제력은 기껏해야 구식이고 최악의 경우에는 억압으로까지 보인다. 그러나 한계가 없는 삶은 자유가 없는 삶이다. 두 가지 유형의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에 관한 연구와 실험이 있다. 하나는 경계가 있고, 다른 하나는 경계가 없다. 거의 모든 경우에 경계가 없는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을 공포에 떨지만, 경계가 있는 놀이터는 오히려 움직임의 자유, 개인의 창의성, 그리고 더 높은 수준의 공동체적 화합을 끌어낸다. 자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경계의 설정을 의미한다. 특히 우리의 마음을 속이며 영혼을 마비시키는 사탄의 힘과 무모한 방종의 길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하는 놀라운 자유를 선물하는 것이 자제이다.죄에 젖은 마음속 고르지 못한 지형을 조심하라“만물보다 거짓되고(deceitful)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렘 17:9)이라는 예레미야의 말은 인기가 없었다. 오늘날에는 인기 없는 정도가 아니라 상대를 공격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 메시지는 여전히 사실이다. 죄인인 인간이 처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겸손과 자각 없이는 자제 자체가 불가능하다. 데이비드 브룩스(David Brooks)는 최근 몇 년 동안 “사람들이 자신을 겸손하게 생각하도록 장려하는 문화에서 자신을 우주의 중심으로 보도록 장려하는 문화로” 변화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세상은 이제 개인의 욕망을 제어하는 모든 도덕적 제약을 제거하고 자제에 관한 논의 자체를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든다. 하지만 이건 위험하다. 마음을 “거짓되다(deceitful)라고 표현했을 때, 예레미야는 고르지 않은 지형을 묘사하는 히브리어 단어를 사용했다. 마음은 일관성과 꾸준함이 부족하다. 포장되지 않은 길이며 바위가 많고 불안정하며 장벽은 약하기 이를 데 없다. 잠시 당신 속에 숨은 악의 가능성을 생각해보라. 가혹한 요구라는 건 나도 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 “나쁜 생각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데, 곧 음행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의와 사기와 방탕과 악한 시선과 모독과 교만과 어리석음이다. 이런 악한 것이 모두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힌다”(막 7:21-23).죄로 가득한 마음의 상태를 최대한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자제력을 지속하여 행사하는 데 필요한 가장 강력한 동기가 될 수 있다. 베드로전서 5:8-9을 보자.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원수 악마가, 우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닙니다. 믿음에 굳게 서서, 악마를 맞서 싸우십시오.”급하지 않은 삶을 받아들이라 디지털 시대에는 모든 게 빠르게 움직인다. 편의성과 접근성이라는 디지털 유혹은 우리의 모든 감각을 압도했고, 알고리즘은 우리를 더 빨리 움직이도록 바꾸고 있다. 우리는 지금 이런 위험한 속도에 중독되었다. 이 모든 것이 마음의 기만적인 본성과 결합했다. 이제 게임에서 포르노, 소셜 미디어, 그리고 이메일에 이르기까지, 디지털 중독은 피할 수 없는 결과가 되었다. “중독”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아딕투스(addictus)에서 유래했다.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이 단어는 법원의 판결을 통해 노예가 된 사람, 따라서 다른 사람의 법적 재산이 된 사람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중독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노예이다. 실로 놀라운 정도로 많은 사람이 디지털 기계에 매여있다. 그들은 디지털의 폭정에서 도무지 벗어날 수 없다. 잠언 25:28은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성벽이 무너진 성읍 같다”고 한다. 디지털 세계는 오늘날 우리를 한없이 취약하게 만들었고 우리의 벽은 오래전에 허물어졌다. 우리는 과연 중독과 어떻게 싸울 수 있을까? 팀 켈러는 트위터에 “자제력이란 급한 일보다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성령님께 중독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디지털이 초래하는 긴박함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자제력을 발휘해야 한다. 더불어서 자제력을 더 잘 발휘하고 유지하도록 돕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이것은 다름 아니라 경계를 정하고 사는 것이다. 내 주변의 디지털에도 경계를 설정하는 것이다. 하루 중 특정 시간에 기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밤에는 휴대전화를 아예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둔다. 특히 중독성이 강한 앱은 삭제한다. 이런 결단이야말로 우리가 성령님과 동행하며 우리 삶에서 자제력을 배양하는 삶의 모습이다. 그렇게 할 때, 느리지만 확실한 자유를 경험할 것이다. 삶에서 진짜 중요한 것에 급박함 없이, 서두르지 않고, 꾸준히, 또 평화롭게 다가가는 진짜 자유를 말이다. 이 글은 Jay Y. Kim의 Analog Christian: Cultivating Contentment, Resilience, and Wisdom in the Digital Age(InterVarsity Press, July 2022)에서 간추린 것입니다. 원제: To Be Free, You Need Self Control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자제력
인내
의지력
중독
절제
디지털시대
알고리즘
두 강림 사이에서
by E. M. Welcher
2022-12-11
나는 지금도 그녀를 기억한다. 갓 자르고 염색한 머리에 노란색 선글라스를 쓴 그녀가 맨손으로 캔자스시티 로열스 경기에서 파울볼로 날아온 뜬공을 잡던 바로 그 모습 말이다. 그녀는 그 공을 한 아이에게 주었는데, 그건 다 큰 어른이면서도 그 공이 꼭 갖고 싶었던 내게는 퍽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그날은 우리의 첫 번째 결혼기념일이었다. 세인트루이스 토박이인 다니엘은 당연히 카디널스 경기를 더 보고 싶었겠지만, 우리는 캔자스시티 가까이에서 살고 있었다. 그해 성탄절이 다가오던 즈음, 항암치료로 머리가 다 빠진 그녀는 크리스마스트리 옆에서 내게 키스했다. 그녀의 고통과 죽음은 생각만 해도 아프다. 그녀가 떠난 지 육 년이 지났지만, 그녀의 사진은 지금도 내 눈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게 하고 답답한 가슴을 더 숨차게 만든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그리스도의 두 번째 강림은 내게 죽음이 앗아간 신성한 사랑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법을 가르쳤고, 그리스도의 첫 번째 강림은 하나님도 죽음이 앗아간 성육신의 사랑을 이해하신다는 사실을 내게 일깨워주었다. 두 번째 강림을 상상하며나는 부활의 날, 곧 그리스도의 두 번째 강림을 상상하는 나를 종종 발견한다. 그럴 때면 동이 트는 순간 사라지는 아침 안개처럼 몽환적인 인상주의 그림 한 폭이 눈 앞에 펼쳐지는 것 같다. 위대한 자, 작은 자, 고귀한 자, 비천한 자, 비범한 자, 평범한 자,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죽은 자가 부활한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람, 힘든 날이면 더 그리워지는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일어난다(계 20:11-15).십자가에 못 박힌 목수였던 왕(Carpenter-King)이 불의를 짓밟는다. 눈물을 영원히 닦아주신다(계 21:4-5). 모든 것이 바로잡히고, 마침내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세상이 만들어진다. 오래전에도 하나님은 그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보시고 좋게 여기셨다(창세기 1장).왜 강림을 고대하는가 하지만 고통스러운 현실로 되돌아가는 순간, 소중한 삶을 견디기 위해서라도 의지해야 할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강림이다. 강림은 부활의 날까지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녹슨 못이다. 강림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 밭을 처음으로 좋은 땅으로 경작하시며 선물로 주신, 힘들게 얻은 믿음의 결과이다. 우리를 둘러싼 절박한 어둠 속에서도 세상에는 여전히 찬란한 빛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고 믿게 되는 시간이다. 그래서 강림을 기념할 때, 현재의 황폐함 가운데서도 우리는 감히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고 바라본다(시 34:8).그리고 그는 … 떠나셨다 옛 선지자들은 먼 미래에 성육신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보았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마 1:23), 임마누엘은 어둠 속에 빛나는 초신성이다. 오랫동안 인류의 목을 발톱으로 움켜쥐고 있었던 그 어둠 속에서.그러나 예수님!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묻히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내려놓은 바로 그 생명을 다시 취하셨다(요 10:18). 죽음을 물리치시고 그 차가운 무덤에서 일어나 부활하셨다.그리고 그는 … 떠나셨다. 예수님이 떠나셨다고 말하는 목회자는 별로 없겠지만, 현재 많은 교인이 그렇게 느끼고 있다. 주님은 떠나셨다, 그러면서 그들은 한숨을 쉰다. 하나님이 이 모든 비참한 어둠 가운데에 그들을 내버려 두셨다고 느낀다. 우리는 그의 강림이 필요하다물론 목회자라면 십자가에 못 박힌 목수-왕이 결코 그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다고 말할 것이다. 신학적으로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겪으신 고통이 가져다준 교제를 누리며 사는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생각과 행동에서 십자가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가신 먼지투성이의 좁은 길을 믿음으로 끝까지 견디면서 걷는 것이다. 때로는 절뚝거리고, 심지어 기어서라고 그 길을 걷는 것이다. 신학적으로 건전한 지적 훈련을 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으로는 이런 십자가의 삶을 살 수 없다. 감정이라는 전쟁터에서 싸우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요 11:35). 이것은 사랑이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그의 강림이 중요한 이유이며, 올해는 다른 어떤 해보다 더 중요하다. 그의 강림에서 소망을 찾을 수 없다면, 세상에서 지치고 낙심한 그리스도를 믿는 형제자매에게 당신이 줄 수 있는 게 무엇이 있겠는가? 강림을 통해서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 일을 이루실 때까지 성도들이 인내하도록 도와주신다(빌 1:6). 대림절은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소망을 고대하며 미래를 바라본 오래전 선지자를 상기시킨다(벧전 1:10-12). 그들의 소망은 우리가 지금 되돌아보면서 느끼는 것과 똑같은 소망이다. 그들처럼 우리도 이제는 예수님의 두 번째 강림을 기다리며 미래를 바라본다.이 세상에 사는 우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하나님이자 왕 되신 이의 두 강림 사이를 서성거리는 나그네이다. 용기를 가지라 아마도 조용한 밤에 당신은 기도했을 것이다. 오 주님, 먼지에 불과한 연약한 인간이라는 그릇 하나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산산이 부서지기 전까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슬픔을 그 속에 쏟아부으셨습니까? 따뜻한 부활의 물결이 마침내 차가운 세상을 녹이고 너덜너덜해진 당신의 마음을 회복시켜 줄 것이다. 사랑하는 형제자매여, 용기를 내라. 부활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그때까지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강림이 필요하다.원제: Oh How We Need Advent (This Year More Than Mos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강림
대림절
초림
재림
영원한 미래를 준비하는 자녀로 양육하려면
고전 재발견: 부모의 의무
by Caleb Greggsen
2022-12-10
기독교 고전 재발견C. S. 루이스의 조언에 따라 우리는 “수 세기 동안 불고 있는 깨끗한 바닷바람이 여러분의 마음을 스쳐 지나갈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그리고 루이스에 따르면 그건 오로지 “오래된 책을 읽을 때만 가능합니다.” 그 목표를 위해서 우리가 잊고 지낸 기독교 고전을 재발견하는 시리즈(Rediscovering Forgotten Classics series)를 시작합니다.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교회에 도움을 주는, 그러나 잊고 있던 기독교 고전을 하나씩 되찾아 나갈 것입니다. 요즘은 자동차 광고도 우리가 “전례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아마도 팬데믹이 이런 식의 표현을 대중화했을 수도 있지만, 사실상 요즘 상황이 가진 독창성은 거의 주문(呪文)처럼 사방에서 쉬지 않고 들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마도 육아라는 주제에서보다 이 주문이 더 두드러지는 데는 없을 것이다. 꼭 코로나19가 아니더라도, 육아와 관련해서는 지금 시대가 말 그대로 전례가 없다는 느낌이 많이 든다. 내 딸들 세대처럼 아예 태어나면서부터 스마트폰이라는 환경에서 자란 세대는 여태까지 없었다. 아무리 일시적이라도 하더라도, 그 어떤 다른 세대에서 부모가 “줌 스쿨링”을 대면 교육의 대안으로 고려한 사례는 없었다. 인스타그램, 스냅챗, 틱톡은 그 자체로 매우 새롭고 전례가 없다는 느낌을 준다. 이처럼 아무리 시대와 문화에 따라 현실이 주는 외적인 특수성은 변한다고 하더라도, 변치 않는 한 가지가 있다. 우리 모두 무력한 아담의 후예라는 사실이다. 아이들도 여전히 아이들이고, 부모는 여전히 육아에 어려움을 겪는 부모일 뿐이다. 바로 그 이유로 나는 라일(J. C. Ryle, 1816-1900)이 쓴 부모의 의무(Duties of Parents)가 오늘날에도 매우 고무적이고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심지어 “새로운” 양육 아이디어의 유행까지 관찰한다. 나는 새로운 교육 시스템과 젊은이를 위한 새 책에 대해서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 모든 발전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어린이는 마땅히 가야 할 길에 대해서 제대로 훈련받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그렇기에 어른이 된 그들이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라일의 짧지만 뼈 있는 충고는 그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나는 그의 책에서 자녀를 둔 목사에게 특히 적용해야 할 세 가지 중요한 훈계를 발견했다.부모의 의무J. C. 라일이 소책자는 자녀 양육을 시작하는 그리스도인 부모가 무엇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지 알려주는 책이다. 라일은 자녀를 무서운 속도로 세상에 빼앗기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마땅히 걸어야 할 그 길”(잠 22:6)을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도구와 초점을 제시한다. 1. 자녀의 영원한 미래가 육아의 최우선 고려 사항이다. 기독교 양육과 세속 양육의 핵심적인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자녀의 영원한 미래야말로 그들의 삶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임을 믿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아이들과 관련한 다른 여러 가지 중요한 책임에 너무도 쉽게 압도된다. 오늘은 뭘 먹이고 뭘 입히지? 어떤 교육 방법이 가장 좋은가? 학교에서 좋은 친구를 잘 사귈까? 이제는 성에 관해서도 교육해야 하나? 이 아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생계를 꾸릴까? 타지에 가거나 내가 죽어도 우리 아이가 잘 살아낼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바뀌기 마련이다. 새로운 학교 환경이나 은행 시스템 또는 십 대의 친구 관계에 따라 세부 사항이 달라진다. 그렇기에 인생의 교훈과 같이 항상 바뀌고 불확실하다고 느끼는 것일수록, 더 많은 시간과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그에 반해서, 내 자녀가 하나님과 화해하는 방법에 관한 답은 수천 년 동안 변하지 않았다. 회개하고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복음의 단순성과 또 무엇보다 자녀에게 중요한 영원의 소망이 도리어 부모로 하여금 그 문제를 소홀히 취급하게 만들고 있다. 이유는 단순하다. 사실상 우리에게 다른 각종 중요한 문제들에 비해서 복음은 덜 긴급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 관해서 라일은 이렇게 말한다. “자녀들과 관련해서 당신이 취하는 모든 단계에서, 그들과 관련해서 구상하는 모든 계획과 준비에 있어서, ‘이것이 그들의 영혼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라는 엄중한 질문을 절대 빠뜨리지 마십시오.”아무리 작은 결정도 좋든 나쁘든 아이들 영혼의 상태에 영향을 미친다. 종교도 중요하지만 기말고사 점수가 더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부모를 나는 적지 않게 보았다. 그렇게 말하는 것을 직접 들었다는 게 아니라, 아이들이 시험 기간에는 교회에 오지 않아도 양해하는 부모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그리스도인의 삶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가르치는 부모도 나는 적지 않게 보았다. 그렇게 말하는 것을 직접 들었다는 게 아니라, 가족의 삶을 교회 생활을 중심으로 질서 있게 만드는 데에 실패한 부모를 보았기 때문이다. 2. 자녀에게 믿음의 습관을 가르쳐라. 내 또래 많은 부모가 자녀에게 되도록 많은 것을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이건 강압적이었던 이전 세대 부모에 대한 반작용일 수도 있는데, 우리 세대 부모는 최대한 예의와 존중으로 자녀를 대하고 싶은 마음에서 뭔가 요청하거나 말할 때마다 반드시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확실히 라일 시대의 부모들도 같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부모가 내리는 모든 결정에 대해서 자녀에게 일일이 합당한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사실상 자녀의 믿음을 약하게 만든다고 라일은 주장한다. 비록 전체 그림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아이들은 자기보다 현명한 부모를 신뢰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아이에게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는 도무지 못 배기겠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세요. 그럴 때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자녀를 정말 사랑한다면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아이는 결국 아이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아이는 어린아이처럼 생각하고, 어린아이처럼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아이가 모든 이유를 단숨에 알 거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이 교훈은 아이에게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해당한다. 자녀가 부모를 신뢰하고 따르는 데에 선결 조건이 사전 이해라고 생각하는 부모는 사실상 자녀를 믿음의 삶이 아닌 의심의 삶을 살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다. 3. 자녀에게 순종의 습관을 가르쳐라.젊은 그리스도인 부모 사이에서 내가 느끼는 가장 큰 두려움은 행여나 어린 바리새인을 양육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다. 겉으로만 빠르게 순종하도록 요구하는 게 효과적인 양육일까? 전혀 아니다. “진정한 순종은 보이는 믿음, 행동하는 믿음, 그리고 체화된 믿음입니다. 순종이야말로 주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진정한 제자를 가려내는 리트머스 종이다.” 라일은 이렇게 주장한다. 하나님이 주신 권위를 가지는 확실한 존재로서 부모가 자녀에게 순종을 가르칠 때,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좋은 일임을 훈련해야 한다. 라일은 이렇게 말했다. “어렸을 때 이 땅의 아버지에게 불순종하는 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나중에 커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순종하기를 거부한다고 해도 하나 이상할 게 없습니다.”시대를 초월해서 시의적절한지금까지 내용은 라일의 육아 조언 열일곱 가지 중 세 가지에 불과하다. 그의 조언이 시대를 초월하여 시의적절한 이유는 그는 바로 다음 사실을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극히 일상적인 문제에서 자녀를 어떻게 양육하는가에 따라서 자녀는 영적으로 자라거나 아니면 영적으로 후퇴하거나, 둘 중의 하나이지 중간은 없다는 것이다. 당신은 아마도 지금까지 읽은 내용에서 부모의 권위가 어떻게 남용될 수 있는지 생각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조차도 선하고 경건한 삶의 모습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관해서 자녀가 관심을 가지도록 한다면,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하나님이 주신 정당한 권위를 회피하지 말라. 그 권위를 사용하여 자녀가 오로지 예수님만을 바라보도록 양육하라. 원제: How to Prepare Your Kids for Eternit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자녀양육
기독교교육
부모의의무
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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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에 대해 알아야 할 아홉 가지
by Joe Carter
2022-12-09
401년 전 오늘, 1621년 12월 9일, 미국 땅에서 처음으로 설교가 기록되고 출판되었다. 영국 선박 포춘 호를 타고 신대륙 플리머스 식민지로 오겠다는 목사가 없었기에 로버트 쿠쉬맨(Robert Cushman)이라는 집사가 고린도전서 10:24을 본문으로 청교도들에게 설교를 전한 것이 그 시초이다. 이날을 기념하여 설교와 관련하여 알아야 할 아홉 가지를 적어보았다. 1. 설교가 무엇인지 정의하기란 의외로 어려울 수 있다.케임브리지 사전은 설교(sermon)를 “목사가 종교적 또는 도덕적 주제에 대해 연설하는 기독교 교회 의식의 한 부분이며, 종종 성경에 기록된 것에 기초한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정의는 유용한 출발점을 제시하기는 하지만 교회 역사를 통해 설교를 구성했던 많은 부분에 대한 이해를 놓친다. 오스틴 펠프스(Austin Phelps)는 1895년 The Theory of Preaching에서 유용하긴 하지만 다소 협소한 정의를 제안했다. 설교는 성경에 담긴 종교적 진리를 대중의 마음에 전달하는 구두 연설이며 정교한 설득의 방식으로 진행된다. 생스터(W. E. Sangster)는 다음과 같은 유용한 설명을 덧붙였다. “연설은 사람이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하는 것이고, 설교는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전하는 것이다.”2. 강론은 설교가 될 수 있지만 모든 설교가 강론은 아니고, 이 둘은 설교학과 관련이 있다.설교는 설교학(homiletics)이라고 불리는 설교의 기술에 의해 창조되고 만들어지는 작품이다. 설교학은 설교의 구성과 전달, 그리고 강론자 또는 설교자라고 불리는 설교학을 실현하는 사람을 포함한다. 강론(homily)은 설교와 비슷하나 설교보다는 전형적으로 더 짧고 경건하다. 이에 비하여 설교는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측면을 다 탐구하고 아우르는 영역이다. 3. “설교”라는 단어는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설교는 성경에서 볼 수 있다. 설교를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지 성경에서 찾아보는 것은 “설교”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사용되지 않기에 더욱 어렵다. (“sermon”이라는 영어는 고전 프랑스어 “discourse”(토론)에서 유래하였다.) 성경에서 가장 잘 알려진 설교인 산상수훈은 마태복음의 기자 마태에 의해 붙여진 명칭이 아니고 교회 역사 속에서 나중에 그런 명칭이 붙여진 것이다. 성경에서 설교를 발견하려면 설교의 사례를 찾아보아야 한다. 이런 식으로 성경에서 설교의 사례를 찾아보았을 때, 가장 긴 설교 시리즈는 모세가 쓴 신명기에 있다. 그리고 사도행전은 설교를 가장 많이 수록한 책인데, 베드로, 스데반, 빌립, 야고보, 바울의 설교 총 19편이 들어 있다.4. 주해 설교와 주제 설교, 이 둘이 현대 설교의 지배적인 형식이다.역사를 통틀어 설교는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되었고 다양한 형식으로 진행되었다.그러나 오늘날 설교의 두 가지 주된 범주라면, 하나는 주해 설교이고 또 하나는 주제 설교이다. 주제 설교는 특정 성경 본문을 토대로 한다기보다는 특정 주제를 중심으로 하는 설교이다.마크 데버(Mark Dever)의 설명처럼, 주해 설교는 설교 본문의 요점을 설교하는 것이 중심이 된다. 주제 설교 또한 설교 본문을 설명하는 주해를 넣을 수 있다. 티모시 S. 워렌(Timothy S. Warren)에 따르면 주제 설교란 공통된 주제를 공유하는 두 개 이상의 성경 본문 구절이나 장을 바탕으로 메시지를 중심으로 전하는 설교이다. 그리고 팀 켈러(Tim Keller)는 “모든 주해 설교도 부분적으로 주제를 가지고 있다”며 “성경에 충실한 주제 설교는 다양한 본문의 여러 ‘미니 주해들’로 구성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또한 지적하고 있다.5. “설교의 황금기”가 있었다.설교 연구 분야의 학자들은 1689년부터 1901년까지를 설교의 “황금기”로 보았다. 이 시기 동안 출판된 설교문은 문학의 가장 지배적인 형태 중 하나였다. 18세기 내내 소설 한 페이지가 출판되는 동안 6페이지의 설교가 출판되었다. “설교 이벤트”(회중의 설교 청취 경험)는 공공 토론의 지배적인 형태 중 하나였다. Oxford Handbook of the British Sermon 1689-1901에 따르면 어림잡아도 1689년부터 1901년 사이 대영 제국 안에서 잠정적으로 일어났던 설교 이벤트는 2.5억 건이었다.6. 흑인 프로테스탄트 설교가 가장 길고, 가톨릭 설교가 가장 짧다.퓨 리서치(Pew Research)는 부활절 기간이 포함된 2019년 4월 7일부터 6월 1일 사이에 온라인에 올라온 거의 5만 건의 설교를 분석했다. 이 연구는 교회 웹사이트에서 표본으로 살펴본 설교 시간의 중앙값이 37분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중앙값이 25분인 주류 개신교 설교와 중앙값이 39분인 복음주의 개신교 설교와 비교할 때, 중앙값이 14분인 가톨릭 설교가 가장 짧다. 역사적으로 흑인 개신교 설교가 54분으로 가장 긴데, 이는 가톨릭 설교 시간 중앙값의 3배가 넘는다.7. 미국에서 복음주의 설교는 다른 전통 교단들보다 “죄”와 “영원한 지옥”을 대체로 더 많이 이야기한다. 2019년 퓨 리서치 연구에서 특정 단어와 구절이 특정 기독교 그룹에서 다른 기독교 그룹에서보다 더 자주 사용되었음이 밝혀졌다. 분석에 포함된 4대 주류 기독교 전통 교단에 속한 98퍼센트 이상의 교회의 설교에서 “안다(know)” “하나님” 그리고 “예수님” 등의 단어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은 “영원한 지옥” “풀어주다(loose)…구원” ”범하다(trespass)…죄” 그리고 “집…천국” 같은 단어들을 다른 그룹들보다 더 사용하는 경향이었다. 역사적으로 흑인 개신교 집회에서는 “능력의 손(powerful hand)” 그리고 “할렐루야…오라(come)” 같은 단어들을 두드러지게 사용하고 있었다. 후자의 문구들은 이 조사 기간에 모든 역사적 흑인 개신교 교회들의 22퍼센트의 설교에서 어떤 형태로든 나타나는 것이 보였다.8. 미국의 흑인 개신교인들은 영감을 주는 설교가 어느 교단에 소속되느냐의 문제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미국 흑인 개신교인의 압도적 다수(77%)는 새로운 교회를 찾을 때 매우 중요한 요소는 영감을 주는 설교라고 말한다. 이 77퍼센트의 비율은 새로운 교회를 찾을 때 현재 교단과 같은 교단에 남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답한 사람의 2배가 넘는 비율이고, 지도자들이 그들과 인종과 민족성을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14%)이나 교인들이 그들과 인종과 민족성을 공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13%)의 3배가 넘는 비율이다.9. 미국의 교인들은 그들이 듣는 설교에 대부분 만족한다.퓨 리서치가 2019년 조사한 결과 최소 1년에 두세 번 이상 예배에 참석하는 교인의 90퍼센트가 자신이 듣는 설교에 만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복음주의 개신교인 10명 중 6명(61%)이 자신들이 듣고 있는 설교에 ‘매우 만족한다’고 답해 ‘다소 만족한다’는 응답(32%)보다 2배 가까이 많았다.원제: 9 Things You Should Know About Sermon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서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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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은 가장 빨리 성장하는 종교다?
by A.S.Ibrahim
2022-12-08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종교가 이슬람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한두 번 들어 보았을 것이다. 현재 추세면 2050년이면 무슬림 인구가 전 세계 그리스도인 인구와 거의 같아질 것이라고 퓨 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는 예측한다. 누군가에게 이 통계가 주는 의미는 이슬람이 매년 많은 사람을 끌어들이고 있고 따라서 신자가 계속 증가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분석 앞에서 낙담하는 그리스도인도 생길 수 있다. 특히 명목상 그리스도인이던 사람이 신앙을 버린 통계와 비교할 때 더 실망스럽다. 이처럼 기독교가 쇠퇴하는 사이에 이슬람이 그 틈을 타고 승승장구하고 있다고 가정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런 통계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이슬람이 아니던 사람이 개종해서 증가한 숫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이 통계에는 신앙을 떠나는 무슬림이 똑같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 현실 이해무슬림 인구가 증가하는 이유는 새로운 개종자가 아니라 무슬림 가정의 높은 출생률 때문이다. 무슬림 남성은 최대 네 명의 여성과 결혼할 수 있다. 이는 당연히 많은 자녀로 이어진다. 또한 많은 무슬림 집단에서 여성이 집 밖에서 일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여자가 집에만 있는 가정환경은 자연스럽게 평균적인 비무슬림 가족보다 더 많은 자녀의 출산이라는 결과로 나타난다. 이슬람 사회가 여성을 주로 출산 기계(child bearers) 정도로 볼 정도로 그들을 억압한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일부 무슬림이 있을 정도이다. 전통적인 무슬림에게 많은 자녀를 갖는 것을 무함마드의 움마(공동체) 확장이라는 사명을 성취하는, 무함마드를 향한 헌신의 표시가 된다. 태어난 아이들은 당연히 무슬림으로 간주되고 자동으로 이슬람의 전체 숫자에 추가된다. 출생으로 신자 수를 늘리는 동시에 이슬람은 배교자를 사형시킨다. 따라서 이슬람을 포기하는 사람은 드물 수밖에 없다. 살해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명목상 “무슬림”으로 남는 배교자도 있다. 이슬람이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종교라는 말 앞에서 실망하기 전에 그리스도인은 먼저 이런 현실을 제대로 고려해야 한다. 증가하는 무슬림의 수가 반드시 이슬람이 설득력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통계 읽기최근 몇 년 사이에 적지 않은 연구를 통해 무슬림들 사이에 만연한 배교의 물결이 드러났다. 2017년 퓨 리서치 센터 연구 분석에 따르면 미국에서 이슬람과 관련해서 개종한 사람과 배교한 사람의 숫자가 비슷하게 나타났다. 그러니까 신도 수의 순 증가치(net gain)는 사실상 0인 셈이다. 미국에서 자란 성인 무슬림 중 거의 4분의 1이 자신을 더 이상 무슬림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연구자는 주의를 기울인다. 내가 이런 통계를 제시하는 이유는 이슬람에 문제가 많다는 식으로 놀리고 싶어서가 아니다. 단지 이슬람이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종교라는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기 위해서이다. 이란의 무슬림을 살펴보자. 2020년 9월, 이란의 세속적 변화를 조사한 학술연구 결과가 컨버세이션(The Conversation)에 기재되었다. 수많은 이란인이 이슬람을 버리고 있다. 이란의 공식 인구 조사에 따르면 무려 인구의 99.5퍼센트가 무슬림이지만, 이번 조사에서 확인된 건 고작 40퍼센트에 불과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란은 더 이상 무슬림이 다수인 이슬람 국가가 아닐 수도 있다. 전 세계 무슬림은 어떨까? 2019년 9월 텔레그래프 온라인(The Telegraph Online)에 실린 “젊은 무슬림이 이슬람을 떠나는 이유”라는 제목의 기사는 이슬람의 근본적인 주장에 대해 감히 어려운 질문을 던지는, 비단 미국뿐 아니라 세계 여러 지역에서 교육받은 새로운 세대의 무슬림의 모습을 강조했다. 기사는 불신앙(unbelief)의 위기에 처한 젊은 무슬림이 이슬람을 버리는 물결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서구 자유주의 사회에서만 보이는 현상이 아니라 심지어 수단, 이란, 파키스탄 같은 보수적인 이슬람 국가에서도 나타나고 있음을 강조한다. (이들 국가에서는 배교 금지법이 강력하게 시행되고 있다.)그럼 아랍 세계의 무슬림은 어떨까? 2019년 6월 24일, 영국 뉴스 매체 가디언(The Guardian)은 프린스턴 대학교에 기반을 둔 한 리서치 그룹이 수행한 연구를 보도했다. 그 연구는 아랍의 무슬림들이 어떻게 종교를 버리고 있는지 자세히 설명했다. 아랍은 말 그대로 이슬람의 심장부이다. 대략 2014년과 2019년 사이에 자신을 “비종교적”이라고 밝힌 사람들이 11퍼센트에서 18퍼센트로 증가했다. 2015년 4월, 뉴 리퍼블릭(The New Republic)의 기사도 비슷한 보도를 했다. 아랍 세계에서도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 불신앙이 확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종교를 포함해서 특히 이슬람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5년 사이에 고작 7퍼센트 증가하는 정도를 주요 지표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이러한 변화가 어디서 발생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신성한 텍스트, 꾸란을 가르치고 그 역사를 소중히 여기는 이슬람의 본거지인 아랍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다. 더욱이 이 숫자가 반영하는 것은 비종교적인 것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한 사람에 국한해서이다. 진심을 드러내는 것은 무슬림이 대다수인 나라에서 위험한 행동이다. 따라서 실제 숫자는 훨씬 더 클 가능성이 있다. 이런 데이터가 이슬람이 사람을 움직이는 종교라는 사실을 보여주는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인 것 같다. 배교할 경우 사형당할 위험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슬람을 버릴 준비가 된 무슬림이 천지에 깔렸다. 기독교의 반응확실히, 무종교자(nones)의 부상은 서구만의 현상이 아니다. 불신앙과 비종교의 증가는 이슬람에게도 심각한 문제이다. 그럼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런 세계적인 현상 앞에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가장 먼저 주님께 겸손하게 기도해야 한다. 무슬림들 사이에서 우리를 주님의 일꾼으로 사용해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우리 중에는 이슬람 국가를 포함하여 지구 끝까지 가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도 있고 또 주변에 무슬림 이웃을 가진 사람도 있다. 성령께서 무슬림 가운데에서 활발하게 역사하시는 지금이야말로 무슬림에게 복음을 선포할 적기이다. 성령의 역사를 증언하는 우리는 힘을 내야 한다. 주로 세속 매체에 기재된 지금까지의 통계가 보여주는 것은 무신론이나 불가지론에 찬성하여 이슬람을 포기하는 무슬림이다. 그러나 전 세계 무슬림에게 복음을 전하는 기독교 사역자들로부터 들어오는 소식이 있다. 지금 하나님이 놀라운 방법으로 역사하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이 속속 그리스도께로 나아오고 있다. 이것은 이슬람과 달리 예수의 복음은 여전히 설득력이 있고, 영혼을 구원하는 강력한 능력까지 있음을 증언한다. 더 힘을 내어 무슬림에게로 나아가자. 이 글은 저자가 쓴 Reaching Your Muslim Neighbor with the Gospel(복음으로 무슬림 이웃에게 다가가기)에서 간추린 것이다. 원제: Is Islam the World’s Fastest-Growing Religio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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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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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교
종교인구통계
소득세율 이해하기: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교회 지도자를 위한 경제학
by Joe Carter
2022-12-07
교회 지도자를 위한 경제학교회 지도자들이 “그 성읍의 평안”(렘 29:7)을 제대로 구하려면 경제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경제가 우리 삶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교회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이해해야 한다. ‘교회 지도자를 위한 경제학’ 시리즈는 경제 신학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시리즈의 취지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경제에 대한 기본 지식을 제공하여 믿음의 공동체가 경제와 공공 정책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생각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려는 것이다. 용어: 한계세율 및 평균세율의미: 한계 세율은 추가 소득에 대해 지불되는 금액이다. 평균 세율은 세금 총액을 과세 소득으로 나눈 값이다.설명: 현재 수입에 대해 당신이 내는 세율은 얼마인가?대부분의 미국인에게, 놀랍게도 이것은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우리가 우리의 세율을 모르는 이유는 우리가 소득에 대한 누진적 과세 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들 대부분은 한계 세율과 평균 세율의 차이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다행히도, 그 개념은 일단 여러분이 혼란스러운 전문 용어를 넘어서기만 하면 이해하기 쉽다. 이게 무슨 뜻인지 한번 풀어보도록 하자.우선, 우리는 “세율”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단순히 과세하는 금액에 대한 세금 비율이다. 이 비율은 거의 항상 백분율로 표시되기 때문에 세율이 1:10이라고 말하는 대신 세율은 10%라고 말한다. 즉, 1달러당 10센트(1:10 또는 10%)의 세금이 부과된다. 납세자는 공제 및 크레딧을 받기 때문에, 우리가 내야 하는 금액은 우리가 내는 금액과는 종종 차이가 난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것이 같다고 가정할 것이다.미국에는 누진소득세가 있는데, 이는 과세 대상 금액이 증가할수록 세율이 높아지는 것을 의미한다. 연방 소득세의 경우, 세율은 소득이 증가함에 따라 낮은 세율로부터 점점 증가한다.우리가 알아야 할 세 번째 것은 한계 세율에서의 “한계”의 의미이다. 한계는 경제학에서 핵심이 되는 개념이지만, 이 “한계”라는 용어는 “추가”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한계 세율은 사용자가 버는 규정된 한계 이상의 (추가) 소득에 대한 추가 세금을 의미한다.이제 우리는 단지 하나의 개념만 더 추가하면 된다: 그것은 바로 ‘과세 등급’이다. 이해를 위해 우리는 오직 연방 정부의 과세 등급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다. 소득에 대한 연방 과세 시스템은 진보적이고 한계적이며, 이것은 우리가 벌어들이는 매 1달러마다의 소득에 대해 동일한 세율을 지불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한번 이 문장을 읽어보라.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 사람이 소득세율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과세 등급을 소득의 특정 금액을 담고 계단 위에 얹어 놓은 양동이라고 상상해 보자. 맨 아래 계단에 있는 첫 번째 양동이에는 “$0~$100 – 세율 10%”라 표기되어 있고, 두 번째 단의 양동이에는 “$101~200 – 세율 20%”이 표기되어 있다. 첫 번째 양동이를 채우면 그 이상의 추가(마진) 달러 소득(예를 들면 101번째 달러부터)은 다음 양동이에 소득액을 채우며 계단을 따라 계속된다. 이 예시는 몇 가지 과세 등급을 포함하는 한계 세율의 누진제 시스템의 이미지를 설명해 준다.이제 우리는 베키라는 이름을 가진 미혼 노동자의 한계 세율을 살펴봄으로써 실제의 예를 돌아보도록 하자. 다음은 독신 개인에 대한 2020년 소득세 분류이다.0달러에서 9,875달러 10%9,876달러에서 40,125달러 12%40,145달러에서 85,525달러 22%85,526달러에서 163,300달러 24%163,301달러에서 207,350달러 32%207,351달러에서 518,400달러 35%518,401달러 이상일 경우 37%베키가 1년에 8,000달러의 수입이 있다면 세율은 어떻게 될까? 이건 10%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베키가 1년에 1만 달러의 수입이 있다면 세율은 몇 %일까? 그건 약간 까다롭다. 베키에게는 두 가지 세율이 적용되기 때문에, 답을 찾기 위해서는 베키의 평균 세율을 계산해야 한다.계단 위의 양동이 이미지를 다시 한번 사용해 보자. 베키의 수입 중 처음 $9,875는 첫 번째 양동이(세율 10%)에 들어가고, 나머지 $125는 두 번째 양동이(세율 12%)로 들어간다. 처음 $9,875에 대해서 그녀는 세금 $987.50을 냈고 $125에 $15를 지불했다. 그녀는 세금으로 총 1,002달러 50센트를 납부했다. 1002.50:10,000의 비율은 약 10%의 평균 세율과 같다.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어렵게 생각하는 이유이다. 베키에게 자신의 한계세율이 얼마인지 아느냐고 묻는다면, 베키는 차트를 보고 12%라고 대답할 것이다. 따라서 베키는 자신이 12퍼센트의 소득세율을 낸다고 가정할 수도 있다. 실제로, 그녀는 자신이 벌어들인 9,875달러 이상의 추가 수입에 대해서만 12%의 비율, 즉 125달러를 추가로 지불한다. 하지만 베키에게 우리의 원래 질문인 "당신의 현재 수입에 대해 지불하는 세율은 얼마입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녀는 아마도 12%라고 말할 것이다.일리가 있는 말이다. 우리는 국세청의 과세 등급에 의해 우리의 세율을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차트는 우리의 한계 비율(즉, 소득의 한계 세율 적용 구간의 수입 이상의 마지막 몇 달러에 대해 우리가 내는 세금)에 대해서만 말하고 평균 비율(즉, 모든 소득에 대해 지불하는 세금의 평균치)은 밝히지 않는다.우리의 평균 세율을 계산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단지 약간의 곱셈과 덧셈이 필요할 뿐이다. 한 가지 예를 더 살펴보도록 하자. 베키의 미혼 상사인 밥은 10만 달러의 수입을 올렸다. 밥의 평균 세율을 계산하기 위해, 그의 10만 달러의 수입을 각각의 해당 양동이(한계세율)에 담아보자. 우리가 그의 수입 전부를 현금으로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고 각 달러당 1에서 10만까지의 번호를 쓴 다음 각각의 버킷에 달러를 넣는다.10% 버킷: $9,875 (1 ~ 9,875)12% 버킷: $30,249 (9,876 ~ 40,125)22% 버킷: $45,399 (40,525 ~ 85,525)24% 버킷: $14,474 (85,526 ~ 100,000)이제 각 버킷에 포함된 금액에 해당 괄호안의 세율을 곱한다.10% x $9,875 = $987.5012% x $30,249 = $3,629.8822% x $45,399 = $9,987.7824% x $14,474 = $3,473.76마지막으로, 이 모든 금액을 더한다.$987.50$3,629.88$9,987.78$3,473.76= $18,078.92밥은 총 18,078.92달러의 세금을 내야 하며, 이는 그의 평균 세율이 18.1%라는 것을 의미한다.왜 이것이 중요한가: 우리는 이제 소득에 대해 지불하는 평균 세율을 계산하기 위해 한계 세율을 사용하는 방법을 이해했다. 하지만 왜 이것이 그리스도인 리더들에게 중요한 것일까?첫 번째 이유는 우리의 모든 수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우리는 그가 허락하신 모든 것을 잘 관리하도록 요구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얼마의 세금을 내고 있는지 정확히 알 것을 요구하지 않으시지만, 우리의 평균 세율을 알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막 12:17) 납부한 이후 우리가 하나님의 다른 목적에 사용할 자원이 얼마나 있는지 더 명확하게 알 수 있다.두 번째 이유는 우리의 모든 시간도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우리는 그가 허락하신 모든 것을 잘 관리하도록 요구되기 때문이다. 급여이든 시급이든 근로자들이 버는 추가 소득의 수준은 그들이 추가로 일하는 시간과 관련이 있다.모든 고용자들은 하나님께서 이 자원을 추가적인 일을 위해 얼마나 쓰길 원하시는지 스스로 결정해야 하나 현실에 대한 정확한 평가에 기초하여 결정을 내려야 한다. 한계 세율이 어떻게 적용되는지에 대한 오해는 사람들에게 추가 근무나 작업이 노력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게 만든다.그들이 왜 이렇게 인식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예를 하나 더 들어 보자. 베키와 밥에게는 연간 4만 달러를 버는 바니라는 동료가 있다. 그는 자신의 한계세율이 12%이기 때문에 수입의 12%인 4,800달러를 세금으로 낼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그는 4,602.38달러만 내고 있다.바니의 상사는 그에게 매달 세 시간을 추가 근무함으로써 연간 42,000달러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바니는 국세청 차트를 보고 인상으로 인한 자신의 한계세율은 22%가 될 것이라고 판단한다. 그는 인상으로 인해 9,240달러(22% x 42,000 달러)의 세금을 내야 할 것이라고 (다시 한번 잘못) 가정한다.그는 이전에 자신이 4,800달러를 세금으로 납부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는 인상으로 인해 4,440 달러의 추가 세금을 내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즉, 2천 달러 인상으로 벌어들인 세금보다 두 배 이상 더 많은 금액을 세금으로 내야 한다는 것으로 생각한다.이것은 억지처럼 보일 수 있지만, 세금을 계산하는 것은 직관적이지 않고 매우 현명한 사람들조차 이러한 실수를 할 수 있다. 여러분이 사람들의 재정 관리를 돕는 교회 지도자라면, 언젠가 여러분은 세금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이런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다.사실, 바니는 그의 한계 구간 이상의 추가 수입($1,875)에 대해서만 더 높은 비율을 지불하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인상 후 4,400달러를 더 내는 것이 아니라 412.50달러만 더 지불하면 되는 것이다. 바니가 이해하지 못한 것은 더 높은 세금 구간을 적용하는 것이 결코 더 낮은 순수입을 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한계 세율이 바니의 급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아는 것은 바니가 더 일해야 하는지 여부를 결정하지 못하지만, 그것은 그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원을 관리해야 하는지 그 배경을 이해하는 가운데 결정을 내리기 위한 도움이 될 수 있다.다른 세부 사항들최저 과세 계층에 속하지 않는 한 한계 세율은 항상 평균 세율보다 높다. 최저 과세 계층의 한계 세율은 (하나뿐이기 때문에) 평균 세율과 같다. 당신의 가장 높은 한계세율이 무엇이든 경험적으로 평균 세율은 최소한 그보다 몇 퍼센트포인트 낮다.소득 공제는 과세 소득을 낮추기 때문에 중요하다. 하지만 세액 공제는 훨씬 더 좋다. 세액 공제는 소득세 부담의 달러 대 달러 감소를 제공한다. 한계세율이 22%이고 100달러 소득 공제받으면 22달러를 절약하게 된다. 대조적으로, 100달러의 세금 공제는 100달러를 절약한다. 국세청이 말하듯이, 세액 공제는 달러에 상응하는 소득 공제보다 더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소득 공제는 백분율을 사용하여 계산되기 때문이다.원제: Economics for Church Leaders: Understanding Income Tax Rates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장명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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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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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세율
경제개념
과세등급
국세청
세액공제
목사의 도덕적 실패 뒤에는 나르시시즘이 있는가?
by Dan Doriani
2022-12-06
왜 최근 몇 년 동안 그토록 많은 교회 지도자가 도덕적으로 실패한 걸까? 거기에 관한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현재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이 바로 나르시시즘이다. When Narcissism Comes to Church(나르시시즘이 교회에 들어올 때)를 쓴 척 디그로트(Chuck DeGroat)는 대중의 높은 인지도를 즐기는 목회자 사이에서 특히 흔한 게 나르시시즘이라고 지적한다. 자기애에 빠진 사람일수록 권력과 존경과 무대를 갈망하고, 또 교회는 자기애에 빠진 유명 목사를 선호한다. 그런 나르시시스트일수록 사람을 “반짝이게(glittering)” 하는 “자신감과 강력한 지도력, 명확한 비전”으로 가득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디그로트는 말한다(1장과 4장). 공감 능력이 부족한 나르시시스트는 다른 사람을 착취하고 낙담에 빠트릴 수 있다. 필요할 때는 온갖 매력을 발휘해 자기 사람을 만들려고 하지만, 더 이상 그렇지 않으면 가차 없이 내친다. 그러면서도 자기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느끼는 게 바로 나르시시스트의 특징이다. 따라서 누군가 나르시시즘에 빠진 목사에게 회개를 외치면, 그저 무의미한 공격으로 여겨지고 만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분노가 쏟아진다. 한편으로 나르시시스트의 매력과 능력으로 이익을 얻은 교회는 그런 목사를 비호하기 마련이다. 그럼 디그로트는 과연 목회 실패의 원인을 제대로 찾은 걸까? 모든 사람에게 결함과 죄가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교회에도 결함 있는 지도자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진짜 물어야 할 것은 권력에 굶주린 사람과 나르시시스트가 교회에 특히 더 많은지의 여부이다. 에고의 문제 성경은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 이기주의자를 비난한다. 예수님은 지위와 권력 추구에 몰두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지적했다. 마태복음 23:1-15에서 예수님은 남자들이 영적 지도력이 가져다 주는 (예를 들자면 “랍비”와 “아버지” 같은) 지위와 권위와 타이틀을 추구한다고 말씀하셨다. 또한 디모데후서 3:2-4에서 바울이 열거한 악덕 목록을 보면 가장 먼저 나오는 게 다름 아니라 자기 사랑이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뽐내며, 교만하며, 하나님을 모독하며, 부모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며, 감사할 줄 모르며, 불경스러우며, 무정하며…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며.” 시작과 끝이 거짓 사랑이라는 점에 주목하라.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과 돈과 쾌락을 사랑한다. 도널드 거스리(Donald Guthrie)는 이 점을 정확하게 지적한다. “모든 도덕적 부패는 잘못된 사랑에서 비롯한다.” 나르시시스트 목회자에 대한 오늘날의 강조가 유행에 불과하고 또 과장이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바울은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오로지 자기 자신을 우선하는 이기주의자를 비난한다. 바울이 언급한 악덕, 교만과 욕설은 확실히 이기주의의 열매처럼 들린다. 하나님을 대변하는 것이 자기애의 결과인가? 나르시시즘은 확실히 나쁜 품행이며,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목사도 얼마든지 그 유혹에 굴복할 수 있다. 그런데 특히 교회에 특히 나르시시스트가 많은 게 사실일까?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디그로트는 성격 테스트 결과 “대부분의 목회직 후보자”가 “자기애, 나르시시즘을 특징으로 하는 성격 장애”의 스펙트럼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나르시시즘의 비율이 그중에서도 “교회 개척자들 사이에서 훨씬 더 높다”(19)고 덧붙인다. 왜 그럴까? 디그로트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사역은 나르시시즘의 성격을 끌어들이는 자석과도 같다. 나르시시스트가 아니면 그 누가 매주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람들 앞에 서서 말하고 싶겠는가? 사람들은 대부분 대중 연설을 힘들어한다. … 그런데 그것을 정기적으로 또 ‘신의 권위’로 하는 사람들이 바로 목사이다”(19).나르시시즘에 대한 디그로트의 작업은 나르시시스트와 함께 사는 사람 또는 나르시시스트 지도자와 싸우는 사람에게 매우 유용한 정보를 제공한다. 그러함에도 우리는 교회에 나르시시즘이 만연하다는 그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하나님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나르시시즘 성향이 있다면, 그것은 역사상 대부분의 선지자, 사도, 교사, 설교자가 다 나르시시스트였다는 말인가(엡 4:11-16)? 디그로트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말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나르시시스트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어떤 목사를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동시에 모든 설교자의 동기에 의문을 제기함으로, 사실상 “경건한 설교자”라는 말 자체를 모순어법으로 만들어버린다. 성경은 설교자의 동기를 달리 이야기한다. 바울은 하나님이 그들을 준비시키고 부르시면 전파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시켜서 여러분에게 권고하십니다”(고후 5:20). 성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은 사람들을 구별하여 그분을 위해 설교하고 권위를 가지도록 하셨다(행 5:42; 9:15; 롬 10:14-15). 그래서 바울은 자기 자랑이 아니라 오히려 소심해서 문제가 되었던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했다. “그대는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하게 힘쓰십시오. 끝까지 참고 가르치면서, 책망하고 경계하고 권면하십시오”(딤후 4:2).목사에게는 ‘건강한 나르시시즘’이 필요하다 일부 교사와 설교자가 나르시시스트라는 건 확실하다. 마이크 코스퍼(Mike Cosper)는 마크 드리스콜(Mark Driscoll)과 마스힐 교회(Mars Hill Church)의 몰락에서 나르시시즘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훌륭하게 설명했다. 그뿐 아니라 다른 많은 목사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이기적이고, 그러면서 교인들을 유혹하고, 또 권력을 남용했다. 나르시시즘과 도덕적 실패에 대한 우려가 성품보다 재능을 더 중시하는 교회에 경종을 울릴 수만 있다면, 그것은 건전한 비판이다. 더불어서 그 비판이 한편으로 특권을 놓지 않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가혹하게 상대를 비판하는 데에 여념이 없는 상처 주는 목사를 경계하기 위해서라면, 그것 역시 교회에 도움이 될 것이다. 책의 초반부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사역은 자기애의 성격을 가진 사람을 끌어들이는 자석이다.” 나중에 그는 나르시시즘 스펙트럼에는 공감, 겸손, 호기심뿐만 아니라 “확신이 아닌 자신감”을 특징으로 하는 “건강한 나르시시즘”이 포함된다고 주장한다(36). 디그로트가 목회 후보자의 “대다수”가 나르시시스트라고 주장한 직후에 건강한 나르시시즘을 언급했다면 훨씬 더 좋았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자질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지목하고 설명하지 못하면 독자들이 목회 리더십을 의심하게 될 위험이 있다. 어네스트 베커(Ernest Becker)가 말했다. “실무 수준의 나르시시즘은 자존감 그리고 기본적인 자기 가치감(self-worth)과 분리할 수 없다.” 심리학자들은 “건강한 나르시시즘”을 적절한 자기 보호, 주체 의식, 적절한 자존심, 그리고 계획을 세우려는 의지와 연결한다. 물론 “건강한 나르시시즘”이라는 용어에 의구심을 가질 수 있다. 이것보다 더 나은 용어가 나왔으면 좋겠다. 그러나 지도자에게는 건강한 자존감이 필요하다. 외과의, 정치인, 프로 운동선수, 최고경영자에게는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 이 세계에 자신이 뭔가를 이바지할 수 있다고 믿기 위해서는 자아의 힘이 필요하다. 지도자에게는 자신의 역량, 자신의 목소리, 자신의 사명에 대한 감각이 필요하다. 각종 비난과 반대, 질질 끌기, 사보타주, 그리고 쑤군거림을 견디기 위해서라도 목사에게는 그 누구보다 더 큰 용기와 담대함이 필요하다. 자신감이 “건강한 나르시시즘”의 한 측면이라면, 목사에게는 그것이 필요하다. 그 어떤 비판에도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꼭 있어야 한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자 책 후반부에서 디그로트는 “누구나 나르시시즘의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다”라고 말하며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의 나르시시즘을 탐구하기를” 바란다고 말한다(167-70). 나르시시스트를 끌어들이는 분야로 의학, 엔터테인먼트, 스포츠, 미디어, 법 집행, 정치, 기업 리더십, 종교 리더십 및 학계를 언급하는 자료가 차고 넘친다. 대중을 이끌거나 연설하는 사람에게는 어느 정도의 자신감과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자. “목사의 도덕적 실패 뒤에는 나르시시즘이 있는가?” 그리고 “나르시시스트가 교회에 특히 더 많은가?” 이제 우리는 이 질문에 대답할 준비가 되었다. “건강한 나르시시즘은 많은 분야에서 도움이 된다.” 그리고 “리더라면 누구나 자신감과 사람들을 얻는 능력을 오용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동시에 얼마든지 그러한 유혹에 맞서서 싸울 수 있다.” 관심의 중심이 서는 데 목을 매는 설교자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다. 디모데와 많은 선지자(이사야 6장, 예레미야 1장, 아모스 7장)는 아예 하나님을 대변해서 말하는 것 자체를 꺼렸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했다고 고백하는 목회자가 지금도 적지 않다. 그들에게 설교는 오히려 자기 의심과 자기 비판에 박차를 가한다. 그러나 그들이 버티는 이유는 단 하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셨다고 믿기 때문이다. 건강하지 못한 나르시시스트 목사가 있는 것도 맞다. 그러나 목회 사역에는 다른 위험들도 있다.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하는 젊은 목사들이 적지 않다. 최근 내가 이끄는 신학교에서 행한 자기 평가 결과를 보면, 요즘 목회 후보자들은 권력과 스포트라이트를 얻기보다는 오히려 피하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지난 수 세기 동안 많은 목회자가 그러했듯이, 그들도 하나님 안에서 강인함을 찾을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하나님의 대사(고후 5:20)라는 자신감이 필요하다. 이는 올바른 것이고 또한 꼭 필요하다. 댄 도리아니는 이 주제를 다룬 논문을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2023년 봄호에 발표할 예정이다. 원제: Is Narcissism the Problem Behind Pastors’ Moral Failures?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나르시시즘
자기애
이기심
리더십
홉스와 이사야: 역사를 바라보는 상반된 두 시각
by Dennis L. Sansom
2022-12-05
1990년과 1991년, 두 번에 걸쳐서 나는 1월 학기 동안 학생들을 그룹으로 만들어 스위스와 독일로 데려갔다. 두 번 다 우리는 악명 높은 집단 수용소 다하우(Dachau)에 갔다. 최소한 3만 5,000명의 유대인이 살해된 악이 발생한 곳에 서 있는 것은 감정적으로 힘든 경험이었다. 주유소 옆에 선 채로, 수천 명이 묻힌 곳을 바라보며 나는 악으로 물든 이 땅에도 푸른 풀이 자라고 잔잔한 개울이 흐른다는 사실에 놀랐다.강제수용소가 있던 자리가 어떻게 회복될 수 있는가? 어떻게 독일이 번영하고 민주주의 국가로서 움직일 수 있는가? 어떻게 사람들은 인간이 문명을 계속 이어가야 한다고 다시 믿을 수 있는가? 그런데 이런 질문 뒤에는 사실 더 큰 질문이 있다. 인류 역사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17세기 영국 철학자 토머스 홉스와 히브리 예언자 이사야가 내놓은 전혀 다른 두 가지 대답을 대조함으로써, 역사 속에서 우리가 과연 어떤 존재인지에 관한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다.영원한 갈등에 대한 홉스의 설명홉스는 1642-51년에 걸쳐서 지속된 격동의 시대, 파괴적인 영국 내전을 온몸으로 겪은 사람이다. 사회적 혼란을 두려워했던 그는 그 극복을 위해 리바이어던(Leviathan)을 썼다. 그는 인간의 폭력적 본성을 길들이고 정의를 보장하는 독재 통치자를 옹호했다.홉스에게 자연 그대로의 상태는 인간과 인간을 싸우게 하는 끊임없는 전쟁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고독하고 가난하며, 추악하고 잔인하고 또 짧은” 인생이다. 우리는 밤마다 문을 꼭 잠가야 하고, 행여라도 극악무도한 적과 함께 방에 갇히면 권총을 꼭 쥐고 있어야만 한다. 이토록 무서운 세상에서 의지할 것은 두 가지 자연법칙뿐이다. 첫째, 평화롭게 살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좋다. 둘째, 인류의 갈등 성향을 고려할 때, 자기방어는 자연스러운 권리이다. 따라서 정부는 순응을 강요해야 하고, 거친 반대자를 진압할 권한을 가진다. 홉스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 인류의 역사는 갈등과 폭력으로 가득하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군인과 민간인 2,200만 명이 사망했고, 2,300만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많은 이들이 제1차 세계대전은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꼭 필요했던 전쟁이었다고 자위했다. 그러나 고작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또 한 번의 전쟁이 더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방식으로 발발했다. 6년간 이어진 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8,500만 명이 죽었다.전쟁이 가져다준 참상을 겪은 인류는 이제 대량 학살을 중단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을까? 그건 착각이었다. 또 한 번의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소비에트 연방, 중국, 그리고 캄보디아의 마르크스 공산주의 정권의 폭정 아래 무려 6,000만 명이 정치적 이유로 죽었다.이제 우리는 다시 우크라이나 전쟁과 아시아에서의 전쟁 가능성에 직면했다. 20세기만 봐도 인류는 끊임없는 갈등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전쟁을 도발하려 하거나 전쟁 도발에 맞서 자기방어를 하려는 사람들의 집단 의지라는 홉스의 설명이 맞는 것 같다. 많은 사람이 평화와 문명 개선을 위해 노력하지만, 한편으로 일부 사람들에게는 홉스가 옳다. 인류 역사를 정의하는 것은 파괴하는 세력인 것이다. 이사야의 긴 이야기또 다른 기록은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사야의 위대한 환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의 글은 인류 역사에 대한 하나의 예언적 해석으로 읽힌다. 이사야서가 기록된 시대는 기원전 722년에 아시리아가 이스라엘을 정복하고, 이어서 바빌론이 기원전 586년에 유다와 예루살렘을 황폐하게 만들고, 유대 민족이 전쟁으로 파괴된 혼란의 시기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사야는 홉스의 세계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이사야는 시대가 가져다준 분노와 혼란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가 모든 민족의 주님이시며 정의를 위해 여전히 사람들을 통해 일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사야는 더 긴 줄거리를 바라본다. 칼과 창이 변하여 괭이와 낫이 되는 날, 세상의 모든 은혜가 예루살렘에 이르고 사람들이 더 이상 울부짖지 않고 함께 나누는 재물, 서로를 향한 존경,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주를 향한 사랑을 모두가 누리게 되는 날을 향해서, 지금도 여호와는 한 발 한 발 인간 역사를 심판하고, 움직이고, 또 인도하신다. 이사야 58장과 61장의 환상에서 이사야는 폐허가 된 성읍을 재건하고 무너진 성벽을 수리하며 거리를 복구하는 특별한 무리의 활동을 설명한다. 그들은 주님의 주권적 섭리 사역에 동참하여 역사의 상처를 회복함으로써 주님이 주시는 은혜의 해가 드러나도록 하고 있다. 이들은 인간의 증오와 폭력의 잔해를 극복하고, 세대의 슬픔과 아픔을 치유하며, 만인이 참 주님을 올바르게 영접할 수 있도록 사회를 준비시킨다. 전쟁은 최종 결론이 될 수 없다이사야에게 전쟁은 현실적이고 끔찍하지만, 그것은 결코 마지막 결론이 아니다. 인류 역사와 민족의 운명이 품고 있는 진짜 주제는 하나님의 손이 멸망의 세력을 이기고 인간을 본래 창조된 목적으로 회복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악에서도 선을 끌어내신다.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위대한 지휘자처럼,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각종 파괴로 얼룩진 불협화음의 악보 너머로 그의 백성이 공동체 생활을 축하하는 장대한 크레센도의 화음을 내는 그날을 향해 움직이게 하신다. 폭력적인 세상에서 주님의 섭리가 역사하는 것을 보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멸망의 세력 가운데서도 정의와 공의, 그리고 화평과 인간의 성취를 위해 씨름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목격하고 또 그 사역에 참여하는 것이다. 인류 역사의 또 다른 힘을 이사야가 예언했다. 회복의 힘은 폐허를 수리하고, 성벽을 재건하고, 무너진 곳을 고치고, 나아가서 새 하늘과 새 땅의 기초를 놓는다. 그러나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이사야의 믿음은 단순한 희망 사항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절망하는 사람들을 잠재우기 위한 아편이 아닌가? 아니다.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회복의 원리에 대한 이사야의 믿음은 홉스가 주창하는 파괴의 원리만큼이나 역사 속에서 우리에게 경험으로 생생하게 다가온다. 역사하는 하나님의 신학자연과 인류 역사가 통합하는 과정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목적(teleology)은 지금도 작동하고 있다. 다하우 밖에서 다시 자라기 시작하는 풀밭에서도 우리는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은 거기서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다.2007년, 나는 노르망디 해변에 갔다. 오마하 해변에서 우리는 1944년 6월 6일, 거의 2,400명의 미군이 죽거나 다친 곳에 서 있었다. 이 얼마나 끔찍한 비극이고 손실인가? 하지만 끊임없이 부서지는 파도 소리와 함께 해변은 조용하기만 했다. 그날 늦게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고귀하고 아름답고 매력적인 풍경의 하나인 미국인 묘지에 갔다. 죽음이라는 공포에서 어떻게 그런 아름다움이 나올 수 있을까? 어떻게 노르망디와 다하우 같은 곳이 (그리고 인류 역사의 다른 수천 곳이) 회복되고 재건되고 또 치유될 수 있는 걸까? 두려움과 파괴와 전쟁이 우리 곁에 있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하나님과 그의 회복이 동일하게 역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인간 경험에서 희망이 완전히 증발한 적은 없었다. 문명은 계속된다. 아이들은 태어나고 자란다. 아름다움은 지속되고, 하나님과 선하심에 대한 믿음은 여전히 자리를 지킨다. 파괴는 회복을 가져올 수 없다. 악은 선을 만들어낼 수 없다. 그러나 주님은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혼돈 속에서도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서 지금도 씨름하고 계신다. 이제 한 가지 질문만이 남는다. 당신과 나는 지금 어느 쪽에 기여하고 있는가? 원제: 2 Competing Visions of Histor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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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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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세계대전
갈등
폭력
상한 마음으로 성탄절을 기뻐하기
by Brittany Salmon
2022-12-04
대림절이 한창이고 또 각종 연말연시 파티가 예정되면, 내 영혼은 기대감으로 들뜨곤 한다. 성탄절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매년 9월이 되고 추수감사절이 다가오면, 조만간 테이블에 다 함께 둘러앉을 가족 생각에 나는 행복한 현기증을 느낀다. 추수감사절이 성탄절로 바뀌는 즈음이면, 흥분은 한껏 고조된다. 이게 바로 고통이 닥치기 전까지 나의 연례 의식이었다.몇 년 전 나는 새로운 상처를 안고 연휴 시즌에 들어섰다. 한때 위로를 주던 계절이 오히려 고통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해는 말 그대로 고통으로 점철된 해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고, 결혼 생활이 힘든 고비를 맞았으며, 입양 계획은 중단되었다. 남편은 직업 전환 과정에 있었고, 말 그대로 우리 가족은 위기의 한가운데를 걷고 있었다. 온갖 종류의 충격과 변화 때문에 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진단을 받았다. 죄와 죽음과 부서짐이 나를 떠나지 않는 것 같았고, 생생하기만 한 슬픔은 도무지 예전 같은 마음으로 추수감사절과 성탄절을 기뻐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감사를 위한 싸움하나님께서 기쁨과 풍요의 계절을 선물하실 때 감사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러나 문제는 그분이 고난을 허락하실 때, 감사를 위한 거친 싸움이 벌어지는 시기이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해 연말은 내게 가장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시기 중 하나이다. 고통이 어떻게 내 눈을 밝히는지를, 또 성탄절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몇 주간이 현재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실직, 불임, 아기의 죽음, 충격적인 병원 진단 또는 가족 위기 등으로 인해 슬픔에 잠긴 사람들에게 극도로 고통으로 다가올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성탄절을 그냥 견디면서 보내는 것은 정답이 아니다. 제안을 하나 하려고 한다. 막무가내로 밀어붙여서 이겨내려 하지 말고 정말로 중요한 것 하나에 집중하는 건 어떨까? 그렇다고 이미 더럽혀지고 부서지고 또 빼앗긴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지만, 그러함에도 우리는 고통 속에서조차도 성탄절의 진정한 의미를 누릴 수 있다. 올해 성탄절, 중요한 것에 집중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1. 다른 해와 다른 성탄절을 보내는 것도 괜찮다. 슬픔은 감정을 고조시킨다. 그 결과 기쁨을 가져다주던 성탄절이 오히려 더 깊은 슬픔의 이유가 될 수도 있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는 자유를 당신 자신에게 선물하라. 힘들었던 해에 맞은 성탄절을 돌이켜보면, 나는 오히려 감사를 드린다. 고통은 내가 성탄절이 가져다주는 각종 과함을 던져버리고, 가장 진실하고 단순한 의미에만 집중할 수 있게 했다.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지만, 고통은 내 감정을 가장 적절한 자리에 위치시켰다. 고통에 비추어 볼 때, 성탄절이 주는 화려함과 사치는 신기하게도 희미해진다. 그리고 성탄절의 진짜 의미가 슬픔의 잿더미를 지나 내게로 다가왔다. 올해는 오로지 거기에만 집중하고, 절망을 촉발하는 다른 모든 것은 내려놓도록 하자. 2. 주변을 오로지 진리로만 채우라. 슬픔과 시기와 불만이 가져다준 신체적 부작용은 어느새 내 마음속으로 스며들었다. 평소 내가 잘되기를 바라던 사람들에게서조차 질투를 느낄 정도였다. 나는 그들이 가족과 직장에서 행복하고 또 즐거운 성탄절을 누리길 바랐었다. 가까운 친구들에게 나의 죄를 고백했다. 그중 한 사람인 카운셀러는 내가 마음속으로 그리는 이미지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라고 충고했다.사랑으로 당신에게 지원을 베풀 사람과 자원으로 주변을 채우라. 지금 없는 것이 무엇인지 알도록 하는 것에서 시선을 떼어 놓으라. 대신 이미 당신 속에 계신 그리스도를 향해서 시선을 집중하도록 하는, 영적 성장에 도움을 주는 음악, 팟캐스트, 책을 선택하라. 간단히 말해서,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가정과 마음, 그리고 관계에 생명을 주는 진리이다. 복음의 은혜라는 빛 가운데 고통과 기쁨이 함께 거하도록 하는 진리로 주변을 가득 채우라. 3. 소셜 미디어를 멀리하라.고통이 우리 가족을 덮쳤을 때, 나는 잠시 소셜 미디어를 쉬었다. 당시에는 그런 결정이 어리석게 보였다. 그러나 이미 언급한 것처럼, 페친의 가족과 파티 사진이 올라올 때면 나는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허락하셨지만 내게서는 빼앗아간 것들 때문에 고통했다. 나는 어느새 하나님이 내 삶에 쓰신 슬픈 이야기를 인생의 절정기에서 행복해하는 것 같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고 있었다. 올바르게만 사용한다면, 소셜 미디어는 전 세계의 가족 및 친구들과 소통할 수 있는 환상적인 도구이다. 하지만 소셜 미디어가 타인을 비판하는 도구가 되고, 내 삶을 부정적으로 비추는 거울이 되고 있다면, 거기서 잠시 벗어나라. 친구 및 가족과 오프라인에서 정직하게 또 나를 다 드러내는 교제의 시간을 가지도록 하라. 화면이 아니라 실제로 만나는 공동체와 함께 성탄절을 보내라. 신자들이여,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부서진 것들을 온전케 하시기 위해서이다. 구유에 있는 아기를 생각하면, 상처받고 보내는 성탄절도 그리 문제될 게 없다. 상처를 부정하지 않고 성탄절을 보내는 것은 괜찮지만, 그 상처가 더 큰 이야기를 가리키는 도구가 되도록 하라.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고통을 보고 계신다.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신다. 이 진리 안에서 안식하며 큰 슬픔 가운데서도 큰 평안을 찾는 은혜를 누리기를 바란다. 상처 입은 사람들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슬픈 날조차도 우리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시는 예수님의 탄생을 우리 함께 기뻐하자. 원제: Celebrating Christmas with a Broken Hear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성탄절
대림절
감사
소셜미디어
의심: 나의 여정
by Scott Hubbard
2022-12-03
내 컴퓨터 파일 중에는 “의심 처리 방법”이라는 작은 문서 하나가 숨겨져 있다. 아, 내 어두운 시절의 잔재여.그 문서는 나 자신에 관한 메모,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시편 기자처럼 영혼의 대화를 연습한 노력이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네가 의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분열하느냐?문서 속 내용은 예측할 만한 제안들로 시작한다. “하나님을 찾아라”는 첫 번째 구절이 나오고 이어서 여러 구절이 따라온다. 네 번째에 가서는, “너 자신을 믿지 말라.” 그리고 끝을 향해서 나아간다. 열여섯째와 열아홉째는 “예수께서 성취하신 예언을 생각하라”와 “위대한 성도들을 기억하라”라고 되어 있다. 어둠 속을 걷는 사람은 그 어떤 별빛에도 기뻐한다. 이런 문서는 하나님, 성경, 복음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진지한 의심을 한 적이 없는 사람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또한 그들은 경험이 없기에 의심이 들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한 적도 없다. 그러나 세상에는 의심하는 도마가 적지 않다. 그들은 어떤 사람인가? 성격과 환경, 내재하고 있는 죄가 만들어낸 슬픈 혼합으로 인해 “내 눈으로 보지 않으면…”(요 20:25) 도무지 못 믿겠다고 하는 이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이다. 그러함에도 때때로 믿음이 곤경에 빠지고 영혼이 분열된 것처럼 느낄 때가 있다. 내가 믿습니다. 믿음 없는 나를 도와주십시오(막 9:24).두 마음이상하게도 형식상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온 거의 이십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한 적이 없다. 진정한 믿음이 주는 첫 기쁨, 첫 번째 구원이 가져다준 격정,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광이 주는 첫 감격을 맛본 후에야 나는 의심의 첫 그림자를 느꼈다. 그건 마치 강도가 불시에 습격한 것과 같았다. 결과는 똑같았다. 잠시 땅에 쓰러져 피를 흘리면서 나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의심이 어디에서 온 걸까? 왜 하필이면 나일까? 내게는 단서가 없었다. 대학을 다니던 어느 날, 갑자기 도무지 통제할 수 없는 것처럼 이전의 확실성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달갑지 않은 질문들이, 결코 하고 싶지도 않은 질문들이 어떻게든 내 마음을 뚫고 들어왔고, 나는 방어 자세로 발버둥하고 있었다. 네가 믿는 성경이 과연 철저한 조사를 이겨낼 수 있을까? 이상한 목소리가 물었다. 그리고 더 어두운 순간에 이런 목소리까지 들렸다. 하나님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아? 수없이 많은 밤을 어둠과 논쟁하다 잠이 들었다. 그리고 아침이면 어김없이 같은 질문이 나를 찾았다. 의심과 관련해서 오스 기니스(Os Guinness)가 1976년에 쓴 책 제목은 의심의 실체를 정확하게 짚고 있다: 두 마음(InTwo Minds). 의심은 당신을 분열시켜 두 개로 만든다. 당신을 지킬과 하이드로 만든다. 가장 불편한 곳에서 당신을 둘로 쪼갠다. 나의 한 마음은 “[나의]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나의] 명철을 의지하지”(잠 3:5) 않기를 원했다. 그러나 나의 다른 마음은 그것을 지적 도피라고 불렀다. 한 마음으로 나는 내가 사랑하는 주님의 모습을 찾아 성경을 읽었고, 또 다른 마음으로 나는 회의적인 시선으로 주님을 보았다. 한 마음으로 나는 믿었다. 그러나 다른 마음으로 나는 의심했다. 야고보가 말한 것처럼 나는 “두 마음을 품은 사람”(약 1:8)이었다.두 마음이 되는 건 당신을 절망에 빠뜨린다. 의심이 바로 그 일을 한다. 거의 2년 동안 나는 그동안 메모한 공책을 샅샅이 뒤지고, 고민에 빠진 생각을 기록하고 또 간구하는 기도를 쉬지 않았다. 나는 강박적으로 설교를 들었고, 악마를 쫓아낼 수 있는 음성을 찾아 헤매기도 했다. 변증 기관에 여러 차례 전화했으며, 그중 한 번은 자정에 전화를 걸었다. 은사를 추구하는 분위기에 빠져있던 시기에는, 어느 비참한 밤에 잠언 전체를 읽고 제발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고 싶은 충동까지도 느꼈다(그때 잠언 중간 정도까지는 읽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미 말했다시피, “의심 처리 방법”이라는 문서를 만들었다.어둠에 빠진 절망적인 사람은 뭐든지 잡으려고 하고 또 비틀거린다. 그리고 때로는 하나님의 인자하신 섭리로 길을 찾게 되기도 한다.의심 너머의 길의심으로 가는 길이 많고 신비로운 것처럼, 의심에서 벗어나는 길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존 블룸(Jon Bloom)이 관찰한 것처럼, 예수님은 다양한 의심에 대해 다양한 자비로 응답하셨다. 세례 요한에게는 부드럽게 상기시켜 주셨고(마 11:2-6), 베드로에게는 책망의 질문(마 14:28-33)으로, 또 도마에게는 고통스러운 지체함(요 20:24-29)으로 그들의 의심을 처리하셨다. 언제나 그렇듯, 예수님은 의심의 여지 없이 가장 훌륭하고 유일하며 오류 없는 안내자이시다. 의심이 가진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의심에는 공통 요소가 있다. 그래서 과거에 의심했던 경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몇 마디 정도는 조언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다음은 내가 어둠 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몇 가지 경로이다. 그 누구도 나를 즉시 어둠 밖으로 빼내지 못했다(의심으로부터의 해방이 한순간에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보면,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 “동틀 때의 햇살”처럼 “의인의 길”이 되어 “대낮이 될 때까지” 나의 길을 “점 더 빛나게” 비추었다(잠 4:18).1. 의심을 믿음의 시련으로, 정상적인 과정으로 이해하라. 앞에서 말했듯, 의심은 마치 강도처럼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닥쳐서 감각을 잃게 만든다. 내 경우에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던 몇 년 동안과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던 몇 달 동안, 아무도 내게 의심에 관해서 이야기한 사람이 없었기에, 더 예상하지 못했던 면이 있다. 정욕, 교만, 탐욕, 자립, 분노, 조바심 등등, 이것들은 이미 알려진 적이기에, 충분히 계획을 짜고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의심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마치 총이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총상을 입은 군인이 된 것 같았다. 의심이 가진 힘 대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니까 우리를 당황하게 하고 방향 감각을 잃게 하는,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느낌을 주는 능력 말이다. 느리지만 진리를 이해한다는 것은 실로 가슴 벅찬 일이다. 의심은 어떤 면에서 독특하긴 하지만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성도가 직면했던 정상적인 믿음의 시련이다. 악마의 첫 번째 유혹(창 3:1) 중 하나인 의심은 여전히 가장 인기 있는 유혹으로 남아 있다.의심 속에서 방황하던 중에 읽었던 기독교 철학자 앨빈 플랜팅가(Alvin Plantinga)의 글이 생각난다. 그는 의심을 단순히 옛 자아가 끼치는 지속적인 영향력의 또 다른 표현(엡 4:22)으로 묘사했다. 옛 자아는 본성상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자신의 말을 더 신뢰한다. 그러므로 여전히 “이 사망의 몸”을 소유한 우리가 때때로 여전히 의심과 불신앙을 다뤄야 한다는 사실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롬 7:24).사실, 하나님의 백성 중 일부는 항상 의심한다. 의심이 성도들 사이에서 가장 널리 퍼진 죄는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세(출 3:13), 아삽(시 77:7-9), 하박국(합 1:2-4), 사가랴(눅 1:18), 세례 요한(마 11:2-3), 베드로(마 14:31), 도마(요 20:25) 같은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든 이 의심이라는 두려운 원수와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의심은 결코 우리를 한계 너머로 보내지 않는다. 의심은 우리를 자동적으로 불신자로 만들지 않는다. 그 대신 의심은 각종 유혹과 죄에 저항하는 동시에 의심과도 싸웠던 믿음의 선배가 걸어갔던 대열에 우리도 막 합류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2. 털어놓을 친구를 찾아라. 고인도 괜찮다.의심을 변칙으로 취급하는 것은 여러 면에서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 태양이 비추지 않는 어두운 세상에 혼자라는 느낌이 들었을 뿐만 아니라 누구와도 얘기 나누는 걸 주저했다. 오해와 어리둥절한 눈빛, “아니, 난 너를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앞으로 그런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와 같은 조심스러운 반응이 나올 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마침내 내 생각을 나눴을 때, 내가 만난 건 긍휼이었다(유 1:22).모든 사람이 다 이런 경험을 공유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안다. 모두가 다 공감하는 친구를 만나 털어놓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나 지금 행여나 혼자 끙끙대며 의심의 터널을 지나고 있다면, 친구를 찾아 속을 털어놓아라. 친구가 보이는 긍정적인 반응에 당신은 분명히 놀랄 것이다. 무거운 짐을 지기 위해 창조된 성도들의 어깨(갈 6:2)가 의심을 짊어지지 못할 만큼 약하지 않다. 그리고 어느 쪽이든, 누군가에게 털어놓는다는 건 위험하지만 충분히 시도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 정도로 의심은 나 혼자 힘으로 이겨내기에는 너무도 강력하다. 방향을 잃게 하고, 기만하며, 또 정신을 어둡게 하기 때문이다. 살아서 가까이에 있는 성도뿐 아니라 고인이 되었거나 멀리 떨어져 있는 성도에게서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내게는 레드 마운틴 교회(Red Mountain Church) 찬송, 앤드류 피터슨(Andrew Peterson)의 음악,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의 시, 그리고 C. S. 루이스의 책이 다른 사람들이 시간을 낼 수 없을 때, 내 곁에서 나를 지켜주었다. 나는 할 수 없었지만, 이들은 의심이 초래한 들리지 않는 고뇌를 언어로 표현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또한 감히 나는 할 수 없었지만, 의심의 바다 한 가운데에서조차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적용하는 방법까지 알았던 뜨거운 영혼이었다. 그들은 내가 의심의 수준을 뛰어넘는 삶을 상상하도록 도와주었다.(소셜 미디어 시대이기에, 간단한 경고가 필요하다. 얼굴을 맞대고 친구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온라인에서 무분별하게 게시물을 올리는 것보다 훨씬 낫다. 의심은 숨겨야 할 대상도 아니지만, 또한 실시간으로 광고할 대상도 아니다. 모든 측면을 고려할 때, 글로만 판단하기에는 우리의 시각은 너무도 왜곡되어 있다. 게다가 소셜 미디어의 조언은 신뢰하기 힘들다. 따라서 공개적으로 내 속을 털어놓는 것으로는 열매를 맺기 힘들다.)의심은 고립시키는 속성이 있다. 특히 수치감을 줄 수 있으며, 때로는 설명 자체가 불가능하기도 하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은둔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며, 교제는 천천히 기적을 일으킨다.3. 의심에서 벗어난 시간을 가지라.의심의 손아귀는 믿음의 목구멍을 조여 믿음의 호흡을 막는다. 따라서 숨이 막힌 우리는 자연스럽게 의심에 관심을 가진다. 목이 졸리고 있는 사람이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있을 리 없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악의 일 중 하나가 바로 거의 강박증 수준으로 의심에만 온통 집중하는 것이다. 그게 바로 내가 저지른 가장 최악의 일 중 하나이다. 의심도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그냥 놔두면 혼자 알아서 죽기도 한다. 물론 가장 성가신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답을 찾는 것은 안도감을, 그것도 궁극적인 안도감을 줄 수 있다. 나는 책과 설교, 친구와의 대화에서 의심에 대한 몇 가지 해결책을 찾아서 내 목을 짓누르던 손가락 몇 개를 떼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직접적인 답변은 의심에 대한 해결책의 일부에 불과했으며, 그리고 감히 말하건대, 결코 가장 중요한 해결책은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의심을 극복하려고 내가 했던 많은 시도는 마치 거울을 많이 쳐다봄으로써 더 잘생긴 얼굴을 만들려는 것과 같았다. 그런 노력은 단지 나를 더 나 자신 속으로 파고들도록 만들었을 뿐이다. 내게 필요했던 것은 의심하는 시간보다 더 많이 기도하는 것이었다. 변증 자료에서 벗어나 더 많은 것을 읽고 봐야 했다. 내면의 고통을 뛰어넘는 더 많은 것에 관하여 일기를 써야 했다. 의심은 온전하고 깨끗한 햇빛이 필요하다. 그러나 의심과의 씨름은 종종 나를 햇볕이 들지 않는 지하실로 끌고 내려갔다. 그렇다면 의심하는 사람이 답을 찾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인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늘 아래에 오래 앉아서 피조물로서 영혼의 산소를 깊이 호흡하라(시 19:1; 시 104:24).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울고 또 기뻐함으로써 자아에서 벗어나라(롬 12:15). 모임에 참석해서 당신 그리고 당신의 문제보다 훨씬 높은 영광을 바라보고 찬양하라(골 3:16). 합당한 직업이 주는 고된 노동 속에서 마음의 휴식을 찾으라(골 3:23). 그리고 무엇보다 천천히, 기도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생각하라(히 3:1).4. 하나님을 계속 찾아라.오랫동안 의심에서 허덕이다 보면, 어쩌면 결코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는 절망감에 빠질 수도 있다. 그게 바로 나였다. 그런 식으로 나는 빠졌다. 뼛속까지 파고든 일종의 숙명론에 사로잡혔던, 가장 깊은 의심의 계절이었던 그 며칠 또는 그 몇 주를 나는 기억한다. 싸움은 아예 쓸모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부의 깊은 분열은 손을 쓸 수 없을 지경이었다. 나는 결국 의심의 관점에서 미래를 재구성하기 시작했다.자비롭게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은 언제나처럼 나를 깨우셨다. 하나님은 의심이나 긴 투쟁을 쉽게 간과하도록 만드는 단순한 진리를 일깨워 주셨다. 그건 다름 아니라 하나님은 구원하신다는 진리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우리를 구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밖에서부터 들어오셔서 우리가 기대하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하나님이시다. 파라오를 무너뜨리고 바다를 가르신 하나님이시다. 하늘을 가르고 땅을 뒤흔드시는 하나님, 그리스도를 보내고 무덤을 비우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선은 결코 제자리에서 멈추지 않는다. 하나님에게 불가능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단지 우리가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마태복음 7:7-8의 예수님 말씀은 모든 숙명론에 마침표를 찍는다. 구하여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구하는 사람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다 파헤치기에 의심은 너무 깊다는 느낌이 들 수 있다. 영혼을 덮고 있는 의심의 그림자가 너무 짙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함에도 어두움에 맞서서 구하고 계속 구하고, 찾고 계속 찾고, 또 두드리고, 계속 두드려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어떤 시간에 또 어떤 장소에서, 한 단어로 또는 다른 말로 삼중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다. “얻을 것이요 … 찾을 것이요 … 열어 주실 것이다.”5. 인내를 가지고 구원을 기다리라.그러나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 “구하여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간구와 응답 사이에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리는지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시간이 길 수도 있다. 도마 이야기는 그래서 도움이 된다.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 여드레 뒤에…(요 20:25-26).여드레가 지나서. 왜 여드레인가? 잠긴 문이 도마에게 다가가시는 예수님을 막을 수 없다면(요 20:26), 기다리는 시간도 방해물이 될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부활하신 주님은 방해받지 않으셨다. 그는 일부러 지체하셨다. 도마가 한 시간이나 그날 오후에 답을 얻도록 하지 않고, 그가 고뇌에 찬 여드레를 보내도록 내버려 두었다.예수님에게는 언제나처럼 나름의 이유가 있다. 우리는 그 이유를 다 알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기다리실 때, 그 기다림을 지배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주님의 자비라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의심은 우리를 유혹하고 고문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 가르침을 준다. 기다림을 통해서 우리는 도마와 함께 배운다. 하나님께서 지키지 않으시면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깨닫게 된다. 자기 불신이라는 필수 덕목을 배운다(잠 3:5). 다른 사람의 약점을 동정하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너는 결코 하나님을 찾아내지 못할 거야”라고 말하는 절망 앞에서조차, 우리는 하나님을 찾는 법을 배운다.나의 주, 나의 하나님자기 백성을 향한 예수님의 더딤은 언제나 자비로운 지체이다. 그리고 때가 되면, 신실하게 주님을 기다린 모든 성도는 다 윌리암 쿠퍼(William Cowper)의 찬송 “여호와이레, 주님이 공급하신다”(Jehovah Jireh, The Lord Will Provide)에서 진리를 느낄 것이다.기다려라, 그의 알맞은 도우심을늦더라도, 기다려라. 그 약속 지체되더라도 너무 늦지 않으리니. 기다리는 내내 예수님을 떠나지 않는 이들을 위해 말하고 싶다. 마침내 우리도 도마처럼 외칠 것이다. 무릎 꿇고서, 경외의 마음으로, 의심을 걷어버리고, 큰소리로 고백할 것이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요 20:28). 그러니 의심이 가져다주는 모든 질문 속에서도 무엇보다 귀를 기울여 예수님의 음성을 듣자. 두 눈에 힘을 주어 그를 보자. 그가 친히 오셔서 화평을 말씀하시고 모든 흑암과 의심을 넘어 빛의 땅으로 인도하시길 간절히 기도하자. 원제: Doubt: A Personal History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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