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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는 칭의를 잘못 이해했는가?④
개혁자들과 함께 아우구스티누스 읽기
by Zach Howard
2022-10-23
요약: 장 칼뱅 같은 개혁자들이 성경을 빼고 가장 많이 인용한 사람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이다. 그들은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의 다른 주장보다도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는 것이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은혜라는 진리를 이 교부가 어떻게 옹호했는지에 관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참고했다. 그렇지만 개혁자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교리에 관해서만은 이 위대한 교부에게서 원하는 만큼의 명료성을 찾지 못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칭의의 의미를 체계적으로 다루지 않았으며, 그의 저작을 주의 깊게 읽으면 그가 이 교리를 다루는 데 있어서 모호함을 드러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의에 관해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안점을 두는 것은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신다(declaring)는 점이 아니라, 의롭게 만드신다(making)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료성을 중시하는 종교 개혁자들에게는 아무리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을 의롭다 하심의 유일한 근거가 되는 그리스도의 의를 부정하지는 않았더라도, 이런 식의 교리 표현 방식을 모호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목회자, 지도자, 교사를 위한 특집 기사 시리즈를 위해서 우리는 베들레헴 신학교에서 신학 및 인문학 조교수로 일하는 잭 하워드에게 아우구스티누스의 칭의 교리를 탐구하도록 요청했다.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_이해 1. 인간의 본성에 대한 치유로서의 칭의 2. 경건하지 않은 자를 경건케 만드는 칭의 3. 사건과 과정으로서의 칭의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_평가 1. 아우구스티누스 칭의론에 대한 칼뱅의 평가 2. 믿음과 사랑의 관계 3. 은혜의 면류관을 씌우시는 하나님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 검토하기 칭의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와 후기 개혁자들 사이에는 두 가지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첫째, 칭의의 의미 속에 하나님이 죄인을 용서하는 사건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죄인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과정까지 포함했다는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칭의의 의미를 보다 더 폭넓게 이해하고 있다. 대조적으로, 개혁자들은 칭의를 단지 선언적 의미로 제한하고 성화와의 분명한 구분을 강조한다. 둘째, 칭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람이 변화되어야 할 필요성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개혁자들은 사람이 용서받아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의롭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완전히 치유함으로써 더 이상 “죄인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21] 개혁자들에게 “의롭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기초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다고 여겨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아우구스티누스와 개혁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칭의에 관한 차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먼저 칼뱅과 같은 개혁자들이 아우구스티누스와 어떻게 상호작용했는지를 알아보고, 이어서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이 그 시대에 제기된 관련한 우려를 어떻게 해결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1. 아우구스티누스 칭의론에 대한 칼뱅의 평가칭의에 관한 글에서 칼뱅은 우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받지 결코 행위가 가져다주는 공로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아우구스티누스를 반복해서 인용한다.[22] 그런 동의(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칼뱅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칭의에 관해서 성경과 다른 주장을 한다고 지적한다. ‘기독교 강요’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에 관한 확장된 섹션에서 칼뱅은 피터 롬바드(Peter Lombard, 1100-1160년경)와 같은 중세의 “스콜라 철학자”가 은혜에 관해서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랐지만 동시에 그를 어떻게 오해했는지를 설명한다. 칼뱅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칭의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감정, 또는 적어도 그의 표현 방식조차도 완전히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가 비록 사람의 의가 가져다주는 모든 공로를 제거하고 모든 공로를 오로지 하나님께로만 돌렸다는 점에 있어서는 마땅히 인정받아야 하지만, 그럼에도 새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는 은혜를 성화의 머리 아래에 두었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다룰 때 우리를 매우 다른 방향으로 이끈다. 우리 자신의 행위에서 눈을 돌이켜서 오로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그리스도의 완전하심만 바라보라고 성경은 명령한다.[23]칼뱅은 칭의와 성화를 적절히 구별하지 못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표현 방식”을 도무지 승인할 수 없었다. 로마서 주석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다른 설명을 했다는 것은 내가 알지 못한다. 그는 하나님의 의가 중생의 은혜라고 생각했다.”[24] 달리 말하면, 칭의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설명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선언되는 은혜 (칼뱅이 칭의라고 부름)와 하나님을 위해 우리가 의롭게 되는 은혜(칼뱅이 성화라고 부르는 것)를 합친 것이다. 칼뱅은 이런 식의 “표현 방식”이 중세 후기 기독교의 남용, 그러니까 인간이 행위로 구원받아야 한다는 생각으로까지 이어졌다고 우려한다. 칭의와 성화라는 이중적 은혜를 구별하면서 칼뱅은 하나님과 인간이 올바른 관계를 갖도록 한 근거가 인간에게 생긴 새로운 도덕적 본성이 아니라, 오로지 인간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라는 진리를 보존하고자 노력했다. 그렇다고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이 그런 식으로 주장했다고 칼뱅이 말한 적은 없다. 오히려 칼뱅이 반박한 대상은 칼뱅 자신이 볼 때 아우구스티누스를 오해한 동시대 사람인 안드레아스 오시안더(Andreas Osiander)와 중세 후기 학자인 롬바드이다. 칼뱅은 단지 칭의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표현 방식”이 성경이 말하는 칭의와 비교할 때 어느 정도의 모호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 결과 롬바드와 같은 후대의 사상가가 칭의와 관련해서 아우구스티누스를 잘못 인용했다고 본 것이다. 칼뱅의 이런 평가는 칭의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에 대해서 적어도 두 가지 질문을 제기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칭의와 관련해서 믿음과 행함을 어떻게 연결하는 것이 바른 방법이라고 믿었는가? 그리고 더불어서 하나님과 회복된 관계의 기초가 과연 무엇이라고 생각했는가?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던지기에 아주 좋은 질문이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 시대에 접했던 두 가지 논쟁을 처리하면서 언급한 질문이기도 하다. 22. 폴 헬름(Paul Helm)은 칼뱅이 ‘기독교 강요’에서 칭의와 관련해서 아우구스티누스를 긍정적으로 인용한 경우가 다음 세 번이라고 지적한다: 3.13.4; 3.14.4; 3.14.20. 이에 관해서는 다음을 보라. Paul Helm, “Duplex Gratia,” in Calvin at the Centr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10), 196-226. 23. Calvin, Institutes 3.11.15-16. Cf. 이 부분에 대한 폴 헬름의 논의는 “Duplex Gratia,” 205을 보라. 24. Calvin, Comm. Romans 3:22. 원제: Did Augustine Get Justification Wrong?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칭의
칭의론
아우구스티누스
칭의와성화
현실적 소망 안에서 살아가자
이상한 신세계: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by Carl Trueman
2022-10-22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세상이 변했다. 자아성(selfhood)에 대한 새로운 관념이 그리스도인들의 관점에 도전하고 있으며, 이러한 새로운 현실에 도전한다는 것이 위험스러운 세상이 되어버렸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도덕적 양식에 따르면 동성 결혼에 반대하는 것은 인종차별주의자가 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스도인이 일반 세계의 광범위한 신념에 동의하지 않아도 전체 사회의 어엿한 구성원으로 존경받을 수 있던 시대는 이미 종말을 고한 것은 아니어도 저물어 가는 중이다. 기독교가 형성한 사회적 상상의 마지막 자취가 급속히 사라지고 있는 것은 사실인데, 우리 중에 많은 사람은 심지어 지금 이상한 신세계에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처지다. 자아성 혁명은 구체적으로 성혁명의 다양한 국면에 나타나듯이 유치원 교육부터 직장 내 대명서 사용 정책[직장 내에서 성별을 구별하는 대명사를 사용할지 말지 같은 정책]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두의 삶에 압력을 가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말하자면 아직은 이런 일을 피하면서 당분간 살아갈 수 있겠지만 영원히 숨을 수는 없다. 조만간 우리는 모두 현대적 자아성의 관념이 만들어 낸 도전적 상황과 마주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의 문제, 순응하라는 압력에 직면할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우리 모두에게 갈수록 시급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신세계에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여기 여섯 가지 대응 방안이 있다. 복음과도시 편집자 주_ 이 글은 칼 트루먼, (신좌파 성혁명과 LGBTQ+운동이 만든) 이상한 신세계의 제9장을 부흥사개혁사의 허락을 받아 간추린 것으로, TGC의 “6 Ways Christians Can Respond to Our Strange New World”를 참고하여 편집하였다. “신좌파 성혁명과 LGBTQ+운동이 만든 이상한 신세계”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갈 것이며 또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지, 여섯 가지 방안을 6회에 걸쳐서 싣는다. 1. 이 시대에 우리도 가담했음을 인식하자2. 고대 교회에서 배우자3. 하나님의 경륜 전체를 가르치자4. 성경적 예배를 통해 직관을 형성하자5. 자연법과 몸의 신학을 회복하자6. 현실적 소망 안에서 살아가자절망해서도 낙관해서도 안 된다 교회는 절망의 유혹과 낙관의 유혹을 피함으로써 이 시대에 대응해야 한다. 절망에 빠지는 것은 지옥의 문이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므로 교회가 결국 승리할 것이라는 약속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일이 될 것이다. 낙관에 사로잡히는 것은 단지 나중에 더 큰 절망을 위한 무대를 준비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절망과 낙관은 모두 무기력을 조장하는데, 이 무기력은 절망의 경우에 무력감에서 비롯되고 낙관의 경우에 순진함에서 비롯된다.하나의 대안이 존재한다. 언론인이자 정교회 신자인 내 친구 로드 드레허(Rod Dreher)와 나눈 대화에서 나는 그가 쓴 글의 많은 부분에 나타나는 암울한 전망에 대해 논평했고 그에게 비관적이라고 지적했다. 드레허는 웃으면서 이 표현에 반대했다. 드레허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비관론자도 아니고 낙관론자도 아니야. 나는 소망을 품고 사는 사람이지.” 그런데 소망은 물론 낙관이 아니다. 폴리애나(Pollyanna[앨리노 포터가 쓴 동명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으로, 이 이름은 낙천주의자를 뜻하는 보통 명사로도 쓰임])도 미코버(Micawber[찰스 디킨스의 소설 ‘데이비드 코퍼필드’에 등장하는 낙천주의자])처럼 낙관론자였다. 낙관론은 모두가 단지 자기의 자리를 지키며 기다리면 모든 일이 잘될 것이라는 신념이다.하지만 기독교적 소망은 현실적이다. 소망은 이 세계가 눈물의 골짜기며 여기서는 상황이 당위적이지 않으며, 제라드 맨리 홉킨스의 말대로 죽음이 참으로 모든 생명을 끝장낸다고 이해한다. 이 세계는 그리스도인의 본향이 아니므로, 우리는 이 세계가 우리에게 가정의 안락함을 제공하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 여기서 누리는 좋은 것에 대해 감사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니다. 나는 내가 가령 중국보다 더 큰 자유가 있는 국가에서 아직 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한다. 나는 내가 훌륭한 의료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시대와 장소에 살고 있고, 내가 즐기는 일이 있으며 나에게 사랑하는 가족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한다. 나는 이런 것들이 나에게 계속되고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한다. 하지만 나는 또한 세계가 타락했으며 복음이 내가 현재 누리는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반드시 나에게 약속하는 것은 아니며, 나의 소명도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명처럼 내가 처한 시대와 장소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이 세계에서 일이 잘못될 때, 또는 나 자신이나 사랑하는 사람이나 사회 전체에 고통을 주는 변화와 맞닥뜨릴 때, 내가 절망하지 않고 이런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며 또한 내 삶과 다른 사람들의 삶의 진정한 의미가 지금 여기에 있지 않고 내세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여기서 겪는 고난은 때로 끔찍하고 심지어 참기 어려운 것일 수 있으나 전혀 무의미하지 않다. 고난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삶, 죽음, 부활, 승천, 재림에서 그 의미를 발견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새롭고 혼란스럽고 유례가 없는 암흑기로 들어가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우리는 준비해야 하고 교훈을 받아야 하고 자신이 무엇을 믿고 왜 그것을 믿는지를 알아야 하며, 우리를 지적으로나 직관적으로 진정한 제자와 순례자로 만드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며,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고 확증하신 변함없는 약속에 계속 주목해야 한다. 지금은 소망 없이 절망할 때도 아니고 순진하게 낙관할 때도 아니다. 그래서 우리 세대가 선택한 독특한 방식으로 벌어지는 타락의 참상을 탄식하자. 하지만 이 탄식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우리 정체성을 선명하게 하고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서 기다리고 있는 위대한 완성에 대한 우리의 갈망을 위한 맥락이 되게 하자.원제: 6 Ways Christians Can Respond to Our Strange New Worl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성혁명
낙관주의
비관주의
기독교현실주의
진짜 기독교는 싸움이다
by Scott Hubbard
2022-10-21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두 가지 큰 특징이 있다.” 라일(J. C. Ryle)은 고전 ‘거룩’(Holiness)에서 이렇게 썼다. 당신이라면 그 두 가지를 뭐라고 썼겠는가? 믿음과 회개? 사랑과 소망? 찬양과 감사? 겸손과 기쁨? 라일의 책을 읽기 전이었다면, 나도 내가 무엇을 꼽았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내가 결코 라일이 꼽은 두 가지를 생각하지는 못했을 거라는 점이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두 가지 큰 특징이 있다. … 그 사람에게 있는 내면의 평화로 그를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그의 내면의 싸움으로도 그를 알 수 있다. (72)전쟁과 평화. 전투와 휴식. 군대 간 충돌과 조약이 가져다주는 평온.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두 가지보다 훨씬 더 많은 특징을 가지면 가졌지 결코 더 적지는 않다. 그리스도인은 아버지의 집에서 행복을 누리는 어린아이인 동시에 구주의 전쟁에 참전한 군인이다. 라일의 이 문장은 우리를 절망에서 구하는 데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할 것이다. 전쟁터 한가운데 떨어지다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내가 전쟁터에 들어서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처음엔 낙하산을 타고 구원의 영광 위로 살포시 내리는 것처럼 황홀함을 느꼈다. 마침내 깨어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고, 죄로부터 안전해졌으며, 무엇보다 나는 천국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착륙한 곳은 내가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은 치열한 싸움터라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갈등은 언제나 내 안에 있었다.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고 느낀 내적 분열은 차원이 달랐다. 몇 달 동안 평화의 땅처럼 느껴졌던 내 영혼이 전쟁터가 되었다. 참호를 팠고 전선이 그어졌다. 나는 과거에 한 번도 직면한 적이 없는 의심에 시달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성경이 참되다는 것을 어떻게 알지? 하나님이 실재하신다는 것을 어떻게 알지? 게다가 죄를 죽이면 죽일수록 더 많은 죄가 내 속에서 고개를 쳐들었다. 이리저리 마구 얽힌 육체의 숲 사이를 기어 다니는 교묘하고 위장된 죄, 자기 아첨이라는 환상, 다른 사람을 향한 반사적인 정죄와 판단, 제멋대로이고 때로는 사악하기까지 한 생각,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변덕스러운 감정. 예수님 안에서 어느 정도의 평화를 누린 건 사실이지만, 그런 평화조차 마치 적에게 포위당한 것처럼 느껴졌다.뭔가 단단히 잘못된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식의 흑암과 깊은 분열에 직면하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결국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나처럼 영적 곤경에 처한 사람이라면 결코 그분께 속했을 리 없다는 생각에, 한동안 나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다. 기독교 싸움바로 그때에 라일을 만났다. 간단하지만 적절하기 이를 데 없는 “싸움”(The Fight)이라는 제목의 장에서 그는 나를 압도하는 강렬한 논증을 바탕으로 “진정한 기독교는 싸움이다”(66)라고, 그리고 모든 성자는 하나같이 군인이었다고 말했다. “은혜가 있는 곳에 싸움이 있다”라고 그는 참으로 남자다운 단호함으로 썼다. “싸움이 없이는 거룩함도 없다. 구원받은 영혼은 항상 자신이 싸움터 한 가운데에 있다는 것을 알기 마련이다”(70).일련의 성경 본문이 뒤따랐다. 어느 정도 수준에서야 다 아는 구절이었지만, 또 다른 수준에서는 전혀 모르던 말씀이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딤전 6:12).“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3; 참고 골 3:5).“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엡 6:11).“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깨어 기도하라”(마 26:41).“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2:3).“선한 싸움을 싸우며”(딤전 1:18).하나님과 화평하게 하는 복음이 가져다주는 것은 죄와 벌이는 치열한 싸움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다”라는 말은 “죄는 나의 주인이 아니다”라는 것과 같은 말이고, 따라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마귀에 향한 반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위로로 우리를 감싸시는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히신다. 라일의 글은 나를 묘한 위로로 채웠다. 몇 달 동안 나는 마치 전투에 뛰어든 민간인처럼 느꼈다. 그러나 이제는 제대로 전선에 배치된 군인처럼 느낀다. 내 전쟁은 당연한 것이었고, 진짜 중요한 것은 이게 꼭 싸워야 하는 좋은 전쟁이라는 사실이다. 전쟁은 정상이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라는 말씀이 사실이라면, 그리스도인에게 내면이 분열되어 갈라지고 또 찢어지는 듯 느끼는 것보다 더 정상적인 것은 없다. 라일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안에 두 가지 원칙이 있으며 각각이 나를 지배하기 위해서 지금도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72). 우리가 영과 육을 모두 가지고 있는 한, 전쟁은 정상이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 순간에조차 모락모락 피어나는 유혹, 기도하고 싶지 않다는 끔찍할 정도로 강한 충동을 만날 때 놀라지 말아야 한다. 거부해야 함을 알고 있는 음식, 수면, 음료, 섹스, 그리고 오락에 대한 갈망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고통스러운 욕망이 솟아날 때도 놀라지 말아야 한다. 가족에게 복음을 나누라는 성령님의 강한 명령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얼마든지 영적 나태함에 빠질 수 있다. 아침에 충만하던 영적 충만함이 오후가 되면 어느새 사라져버리는 변덕스러운 영적 건망증도 만난다. 그리고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보다 나 자신의 이해에 더 의존하려는 충동적인 강박도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적의 포격에 놀라는 군인이 없듯이 우리는 이런 때에 놀라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용기를 내야 한다. 라일은 말한다. “우리는 결코 사탄의 친구가 아니다. 이 세상의 왕들처럼, 사탄도 자신을 추종하는 자들과는 결코 전투를 벌이지 않는다”(72). 내적 분열과 반발심은 결코 우리가 사탄과의 전투에서 졌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단지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할 뿐이다. 선한 싸움그리스도인의 싸움은 단순한 전쟁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가장 잘 알려진 전쟁이다. 라일은 이렇게 썼다. “기독교의 싸움은 선한 싸움, 정말로 선한 싸움, 뭐라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싸움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자”(80). 그렇다. 치열한 전쟁이다. 우리는 전투에서 부상당하고 피를 흘리기도 한다. 바닥에 떨어졌을 때는 절망의 유혹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싸우는 그리스도인의 싸움이 얼마나 선한 것인가? 정말 좋다. 하나님께서 원수들을 밟을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미 7:19). 정말로 좋다. 가장 힘든 전투를 만날 때면 하나님이 우리를 더 강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사 41:10). 진짜로 좋다. 넘어지는 사람조차 예외 없이 다 용서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요일 1:9). 좋은 전쟁이다 우리가 죽이는 건 사람이 아니라 오로지 죄와 마귀이다(롬 8:13). 너무나도 좋다. 이 전쟁으로 인해 우리의 인간성은 파괴되는 게 아니라 회복되기 때문이다(골 3:5, 9-10).무엇보다도 특히 좋은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아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해 싸우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를 살리셨고, 결코 우리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한 위대한 대장이자 전우이시다(마 28:20). 라일은 이렇게 묻는다. “믿음의 군인으로 살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살아 있는 한 하루도 빠지지 말고 그리스도를 굳게 붙들어야 한다”(76).그렇기에 우리는 오늘도 “그리스도가 더 낫다”는 깃발을 높이 들고 행진한다. 어떤 일을 만나도 놀라지 않고 낙담하지 않으면,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닮지 않은 모든 사악한 것을 향해 우리는 칼을 휘두른다. 그리스도인의 “두 가지 큰 특징”이 하나가 되고, 마침내 전쟁이 예수님이 주시는 영원한 평화에 의해 사라지는 날을 바라보며 우리는 오늘도 전진한다. 원제: True Christianity Is a Fight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싸움
거룩
라일
그리스도인의특징
모든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
by 고상섭
2022-10-20
에드먼드 클라우니(Edmund P. Clowney, 1917-2005)는 Preaching Christ in All of Scripture에서,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는 다양한 설교의 분야 중의 하나가 아니라, 설교를 해야 한다면 반드시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해야 한다고 못 박는다. 왜 모든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전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성경은 그 자체가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기 때문이다. 성경을 성경의 의도대로 읽는다면 자연스럽게 그리스도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1:9-10)성경 안에는 하나님의 경륜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경륜, ‘오이코노미아’는 하나님의 경영이라고 번역해도 괜찮은 단어이다. 성경 안에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는 목적이 있는데,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우주가 통일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성경 속에 나타난 모든 하나님의 계획이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귀결된다는 것이다. 1. 나 중심이 아닌 예수님 중심으로 성경을 읽어라.엠마오 마을로 가던 제자들은 절망에 빠졌다. 예수님을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라고 믿었는데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기 때문이다. 또 어떤 이들이 죽은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해서 여전히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때 예수님은 절망에 빠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누가복음 24:25-27)예수님은 제자들의 절망이 구약 성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 말씀하신다. 그들을 책망하신 이유는 구약 성경 안에 이미 있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세와 선지자의 글은 구약의 율법서와 선지서를 말한다. 즉 모든 구약 성경은 메시아가 와서 고난을 받고 부활할 것을 예언하고 있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24장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만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거기서도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 그리고 시편까지도 예수님에 대한 기록이라고 말씀하신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누가복음 24:44)구약의 모든 성경이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유대인들과 대화를 하는 중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라고 충격적인 선언을 하신다.성경은 영생을 얻는 책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관한 책이며,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참된 영생을 얻을 수 있음을 알게 해준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읽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리스도로 목표된 책이기 때문이다. 나의 개인적 적용이 먼저가 아니라 어떻게 그리스도를 가리키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오늘날 포스트모던은 메타 네러티브를 거부한다. 그러나 큰 이야기에서 떨어져 나온 개인의 이야기는 시작과 끝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미궁 속으로 빠질 수밖에 없다.예수님과 하나님의 이야기는 내 인생의 이야기보다 더 크고 넓다. 창세기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이다. 내 인생은 더 큰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 안에 속해 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 “이 성경이 근본 나에 대한 이야기인가? 아니면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나의 이야기로 읽을 때 성경을 단순히 개인적으로 적용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야기로 읽을 때, 내가 그리스도의 영원 전부터 계획된 하나님의 사람임을 깨닫게 되고 더 큰 이야기 속에서 내 인생의 소명을 발견하게 된다. 2. 신약의 빛으로 구약을 해석하라. 구약학자 트램퍼 롱맨은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에 대해 마치 영화 ‘식스 센스’를 보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식스 센스’는 앤딩이 놀라운데, 결말을 알고 나면 영화의 시작과 중간의 스토리를 모두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영화의 결말이 앞서 지나간 모든 장면에 빛을 비추어서 바르게 이해하게 해주는 것처럼, 성경도 그리스도라는 신약의 결말을 보고 나서 구약을 비추면 구약에서 희미하던 모든 것이 선명해진다. 신약의 빛으로 성경을 보게 되면 “이제, 당신은 무조건 그리스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지금 보고 있는 본문이 딱히 메시아 예언이나 그리스도를 전조하는 주요 인물 혹은 통정경적인 주제, 핵심적인 성경 이미지나 비유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이제 당신은 그분을 볼 수밖에 없다.”[1]신약의 빛으로 구약을 바라보게 되면, 율법의 요구에 대해 바른 이해를 가지게 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셨지만, 이스라엘은 그 율법을 모두 지킬 수 없는 죄인이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산상수훈을 설교하면서 “예수님은 우리를 산상수훈을 통해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산상수훈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말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죄인인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율법을 지키심으로 우리에게 진정한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셨다. 왜 우리가 왕처럼 부요할 수 있을까? 그분이 영적으로 철저히 가난해지셨기 때문이다. 왜 우리가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오직 그분이 애통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이 슬픔을 가누지 못 할 만큼 우시고 결국 어둠 가운데 죽으셨기 때문이다. 왜 우리가 땅을 상속하게 될까? 그분이 온유하셨기 때문에, 그분이 온전히 발가벗김을 당하셨기 때문이다. 왜 우리가 채움과 만족을 누릴 수 있을까? 그분이 십자가에서 “내가 목마르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2]구약에서 하나님이 언약을 맺으실 때 무조건적인 은혜인 것 같기도 하고 또 율법을 지켜야 하는 조건적인 약속인 것 같을 때가 있다. 선지서를 보면 하나님의 마음도 양갈래로 나뉘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을 사랑하셔서 구원하시겠다고 선언하시다가 곧 인간의 죄악 때문에 심판을 선포하시기도 한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하나님의 신적 정서’(Divine Pathos)라고 표현한다. 이 두 가지 딜레마를 하나님은 어떻게 해결하실 수 있는가? 바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해결하신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께서 울부짖으실 때, 우리는 그 답을 발견한다.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의 언약은 조건적인가 아니면 무조건적인가? 정답은 ‘둘 다’이다. 예수님이 오셔서 그 조건을 성취하셨고,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실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구약을 신약의 빛으로 이해할 때만 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구약의 출애굽기를 신약의 빛으로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고린도전서 10:1-4) 모세와 함께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사건을 홍해에서 ‘세례를 받은’ 사건으로 묘사한다. 어린양의 죽음을 통한 출애굽은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을 상징하는 것이다. 또 만나라는 신령한 음식과 반석에서 물을 마신 사건을 가리켜, 그리스도로 인해 먹고 마신 사건이라 설명한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 온 ‘생명의 떡’이라 말씀하셨다. 또 고린도전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반석을 통해 물을 마셨다고 설명한다. 구약의 출애굽은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과 오늘날의 성찬식과 연결된다. 이처럼 신약은 구약을 비추는 빛으로 작용하며, 희미했던 그리스도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 준다. 모든 성경을 그리스도의 빛으로 비추지 않으면 우리의 설교는 아마도 유대교 랍비의 설교와 차이점이 없을 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모든 본문은 그리스도에게 까지 연결되어 있다. 찰스 스펄전은 모든 성경이 그리스도께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하며, 그리스도를 설교하지 않은 젊은 설교자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젊은이, 영국의 모든 자그마한 동네에도 그게 어디 있든 런던으로 통하는 길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가?” “예, 그럼요.” 젊은이가 대답했다. “성경의 모든 본문도 마찬가지로 성경의 수도로 통하는 길이 있다네. 그게 바로 그리스도일세. … 나는 아직 그리스도로 통하는 길을 품고 있지 않은 본문을 만난 적이 없네. 만에 하나 그리스도로 통하는 길을 품고 있지 않은 본문을 발견한다면, 나는 어떡하든 길 하나를 만들 것이네. 담벼락을 넘고 도랑물을 건너서라도 나의 주님께로 나아갈 것이네, 설교란 그 안에 그리스도의 향취가 나지 않으면 아무런 유익을 끼칠 수 없기 때문이지.”[3]모든 성경의 출발은 언제나 그리스도라는 종착점을 향하고 있다. 모든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은, 단순한 하나의 이론이 아니라,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로 읽을 때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결론이다.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께로 이어진다. 설교자는 그 길을 찾는 사람들이다. 모든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1. 팀 켈러, 채경락 옮김, 설교(두란노), 119쪽.2. 같은 책, 122쪽.3. 같은 책, 94쪽.
그리스도중심설교
복음설교
선교에 왜 도시가 중요한가
by Aaron M. Renn
2022-10-19
도시는 선교에 중요하다. 사람들이 계속 몰려들기 때문이다. 아주 최근까지 인류는 거의 다 시골에서 살았다. 1910년까지만 해도 세계 인구의 10퍼센트만 도시에 살았다. 그러나 오늘날 도시 인구는 50퍼센트 이상이며, 이번 세기 중반이 되면 75퍼센트까지 늘어날 수 있다. 폴 로머(Paul Romer)는 늑대처럼 무리를 지어 생활하던 인간이 개미나 흰개미처럼 살게 되어서라며, 도시화라는 인간 사회의 급진적인 변화를 설명한다. 도시화의 변화는 주로 개발도상국에서 일어난다. 아프리카는 이제 다른 어떤 대륙보다 빠르게 도시화하고 있다. 유엔에 따르면 2050년까지 세계 인구 증가의 절반인 약 12억 명이 아프리카에 있을 것이라고 한다. 2050년까지 세계 인구의 21퍼센트가 아프리카 도시에서 살게 될 것이다. 중국과 인도도 도시화하고 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10억 명이 넘는 인구가 도시 빈민가에 살고 있으며, 이는 미국과 유럽의 인구를 합친 것보다 많다. 선교학자 레이 바키(Ray Bakke)는 말한다 “더 이상 정글의 초가지붕이 아니다. 도시는 이제 6대륙 모두에게 열린 미래의 새로운 선교지이다.”예수님의 지상명령은 우리가 지구상 모든 종족 그룹과 위치에 도달하도록 강조하지만, 인구 통계는 도시 선교에 더 치중하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1억 명의 새로운 도시 거주자에 대해 1만 명당 교회가 하나가 되는 비율을 달성하려면, 1만 개의 새로운 도시 교회를 개척해야 한다. 이것은 앞으로 수십 년 안에 수만 개의 새로운 도시 교회를 개척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럼 미국은 어떤가?미국과 관련해서는 도시화가 다르게 보인다. 인구 조사국의 분류를 따르면, 미국은 1920년에 이미 도시 인구 50퍼센트에 이르렀고, 오늘날에는 약 80퍼센트에 이르는 사람이 도시 거주자이다. 그러나 “80퍼센트 도시 인구”라는 수치에는 오해의 여지가 있다. 관계 기관은 2,500명 이상의 인구가 거주하는 모든 곳이 도시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가수 존 멜렌캠프(John Mellencamp)가 부른 “작은 마을”(small town)의 전형인 인디애나주 세이모어에 사는 누군가는 이제 기술적으로 도시 거주자가 되었다. 또한 “도시”라는 단어에 대부분 사람은 다가구 주택 및 복합 용도 개발이 이뤄지는 고밀도 지역을 생각한다. 또한 대중교통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격자 형태의 도로 계획에 따라 만들어진 도로가 배치된 곳을 떠올린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대부분의 미국인이 거주하는 지역의 특징이 아니다. 뉴욕시, 로스앤젤레스,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필라델피아, 보스턴, 시애틀, 워싱턴, 볼티모어, 마이애미 등 전통적으로 도시화된 곳의 2020년 인구를 다 합해도 약 2천만 명에 불과하다. 내가 사는 인디애나폴리스 같은 도시에 대학 도시까지 합쳐야 미국의 도시 인구는 3, 4천만 정도로 늘어난다. 그러나 그건 미국 전체 인구의 약 10-15퍼센트에 불과하다. 자동차를 타는 대부분 미국인은 거대한 패턴으로 성장한 교외에서 산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할 때, 미국에서도 선교를 위해 전통적인 도시 지역이 여전히 중요한가? 그렇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1. 모든 사람이 중요하다.도시에 사는 3천만에서 4천만 명의 사람들도 복음을 들어야 한다. 루이빌이나 버밍엄 같은 작은 도시든, 보스턴이나 시애틀 같은 큰 도시이든, 도시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2. 도시에 핵심 기관들이 있다.미국의 경제, 산업, 정부를 통제하는 주요 도심은 핵심 거점이다. 모든 미국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기관이 그곳에 있다. 베이 지역의 기술, 뉴욕의 금융, LA의 엔터테인먼트, 보스턴의 생명 공학 및 엘리트 고등 교육, 워싱턴의 연방 정부는 이러한 해안 센터를 미국에서 가장 강력한 위치 중 하나로 만든다. 구글, 디즈니, 뉴욕타임스, 국방부, 하버드 같은 기관에서 내린 결정은 우리 모두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이유로 도시는 전략적이다. 복음이 핵심 기관을 변화시키는 것을 보고 싶다면, 교회가 도시에 존재하고 또 견고해야만 한다. 3. 변화는 도시에서 시작한다.국가의 문화 형성 기관이 모두 다 주요 도시 중심에 있으므로, 일반적으로 문화적 변화는 도시에서 먼저 발생한다. 펜실베이니아 역이 뉴욕시에서 철거되었을 때, 전국에서 역사 보존 운동이 촉발했다. 현대 LGBT+인권 운동은 1969년 뉴욕의 스톤월 폭동으로 시작했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일어나는 일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비밀을 지키라는 말이 있지만, 뉴욕, 샌프란시스코 또는 LA에서 일어나는 일은 결국 우리의 삶 속으로 파고들 것이다. 도시 교회는 일찍부터 문화적 변화에 노출된다. 이런 이유로 도시 교회는 종종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는 방법을 개발해낸다. 도시 교회가 문화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더라도 (또는 부적절한 방식으로 굴복하더라도) 그들은 많은 교회에게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보여줄 수 있다. 공화당이 우세한 주(red-state)의 교외나 또는 작은 마을의 안락함에 빠져서 도시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돌을 던지는 것은 쉬울 수 있다. 그러나 비판보다는 그들이 어떤 압력을 받으면서 사역하고 있는지, 더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현명한 태도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경험하는 힘이 곧 모든 곳에서 똑같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도시 사역이 주님이 주신 지상명령의 전부는 아니지만 중요하다. 인구 통계학적,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문화적 이유로 도시는 전 세계적으로나 국내적으로 21세기 선교의 중요한 구성 요소이다. 원제: Why Cities Are Important to the Church’s Mission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도시선교
지상명령
도시
도시화
예수님의 만짐, 은혜의 전염
by Rosaria Butterfield
2022-10-18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가장 무서운 전염병은 나병이었다. 그 병은 불결하고, 치명적인 불치의 질병이었을 뿐 아니라 제멋대로 거침없이 퍼져나가는 전염성까지 지녔다. 그 병은 사랑하는 가족을 사회적 추방자로 전락시켰다.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괴물처럼 나병환자의 피부는 힘줄과 근육을 감싸지 못하고 여기저기 고름이 터져 나오면서 하루아침에 사랑스러운 가족에서 혐오스러운 존재가 되어 버린다. 나병환자들은 도덕적, 사회적으로 배척과 멸시를 받아 격리된 채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았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고통에 시달리며 살면서 모든 희망을 잃은 채 죽기만을 기다렸다. 나병은 체포와 추방이 가능했던 법정 전염병이었다. 율법의 의식법은 나병환자를 도덕적, 육체적으로 불결하게 여겼다. 나병은 전염성이 있는 피부 질환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나병에 걸린 사람은 건강한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없었고, 예배에 참여할 수도 없었다. 이처럼 예수님 당시에 나병은 원죄의 물리적 현현이자 혐오스러운 징후였다. 그것은 특별한 죄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가 지닌 죄의 본성, 우리 내면에 장착된 시한폭탄을 가리켰다. 해결책은 나병환자를 격리하고, 아직 건강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뿐이었다. 레위기 13-14장은 나병의 전염을 억제하고, 치료된 나병환자를 공동체 안으로 회복하는 방법에 대해 상세하게 이야기한다. 이 질병은 사랑하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하루아침에 멸시받는 추방자로 전락시킬 수 있었다. 함께 어울리고 부대끼며 존중받으며 살다가도 한순간에 쓰레기와 같은 처지가 될 수 있었다. 나병은 비유가 아니었다. 그것은 빗물 같은 엄연한 현실이었다.하나님이 자기 아들, 곧 온전한 하나님이자 온전한 사람이신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을 때 두 가지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누가복음 5장에는 “온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온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 이야기에서 예수님이 나병환자 거주지를 방문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사회적으로 추방된 그들을 찾아가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다. 그는 나병환자 거주지를 떠나(이것은 모든 사람을 위험에 빠뜨리는 불법적인 행동이다) 곧장 예수님께 나와 엎드려 간구했다.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눅 5:12). 나병환자들이 모여 있는 지역을 떠나 마을 한복판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산을 옮길 만한 믿음과 용기, 곧 선지자적인 믿음과 용기가 필요했다. 그것은 자기의 문화와 자기의 동료들과 정해진 장소가 주는 안전함을 뒤로한 채 예수님께 나오는 일이었다. 아마도 예수님께 나오는 동안 그의 머릿속에는 ‘너는 너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 위험한 존재다. 너는 지금 율법을 어기고 있다. 너는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해칠지도 모른다’라며 스스로를 질책하는 생각이 가득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주”로 일컬은 것으로 보아, 그의 행동은 믿음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가 사용한 칭호인 “주”는 성경에서 오직 신실한 신자들만 사용했던 칭호이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나병환자로 하여금 상상할 수 없는 행동을 하게 만들었다. 그는 체포당할 위험을 무릅썼다. 그는 공중 보건을 위태롭게 하고, 다른 사람들을 감염시킬 위험과 군중에게서 쫓겨나 다시금 자신이 처한 냉엄한 현실(자신은 그리스도 외에는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는, 온전하지 못한 인간이라는 것)로 되돌아가야 할 위험을 기꺼이 감수했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면에서 우리보다 더 나았다. 그는 자신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단지 사회적 신분의 향상이 아닌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았다.예수님은 누가 봐도 제정신이 아닌 듯한 행동을 하셨다. 그 질병이 그 환자의 몸을 상하게 한 이후로 그 누구도 그 사람을 만진 적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손을 갖다 대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처음에 하얀 발진이 생겨난 순간에 운명이 결정되어 버린 그 사람의 몸을 만지셨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눅 5:13). 그 한 번의 만짐이 그 사람을 변화시켰다. 그러나 그 만짐은 더 큰 의미를 지녔다. 그것은 세상을 변화시켰다.예수님은 나병환자를 만지면서 기존에 없었던 은혜를 새로 만들어 내지 않으셨다. 그것은 항상 존재해 온 성부 하나님의 은혜였다. 우리는 구약성경 곳곳에서 성부 하나님의 은혜를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은혜로 나병이 치유된 사실도 나온다. 나병환자였던 수리아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이스라엘 땅에 병을 고치는 기적을 행하는 선지자가 있다는 히브리 여종의 말을 듣고 엘리사를 찾아와 나음을 얻었다(왕하 5:1-14). 예수님은 누가복음 4:27에서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으니라”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엘리사가 그 무명의 히브리 여종 때문에 나아만을 치료해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녀의 믿음은 강력했고, 주인의 나병보다 전염성이 더 강했다. 그녀의 믿음 때문에 엘리사는 전에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기적을 일으켰다. 그녀의 믿음은 참믿음이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참믿음이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확신하는 것을 의미한다.치유와 구원이 하나님의 손에서 나올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 예수님이 무엇을 행하셨는지 볼 줄 아는 눈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이 무엇을 행하지 않으셨는지 아는 것도 또한 중요하다. 예수님은 나병환자에게 하나님이 그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고 인정하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나병이 사회 구성원들의 생각에 근거하는 ‘사회 구성상의 문제’(객관적 현실로는 존재하지 않으나 사람들의 상호작용의 결과로 존재하는 것, 말하자면 사람들이 그것이 존재한다고 합의했기에 존재하는 것)라거나 지금은 ‘은혜’의 시대이므로 ‘율법’은 더 이상 구속력을 갖지 않는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나병환자에게 자긍심을 좀 더 크게 가지라고 권유하지도 않으셨고, 나병환자들을 불합리하게 금기시한(나병공포증) 믿음의 공동체를 꾸짖지도 않으셨다. 문제는 전염성이었다. 전염성은 사회 구성상의 문제가 아니다. 전염성은 실제로 위험했다.예수님은 세상에 계시는 동안 상처받은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을 겁내지 않으셨다. 그분은 사람들을 가까이하셨다. 그분은 텅 빈 사람들을 만나 충만하게 채워서 보내셨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 놓으셨다. 이것이 예수님의 역설(Jesus paradox)이다. 예수님의 만짐을 통해 은혜가 전염되어 사람들이 믿고, 회개하고 돌이켜 순종하는 역사가 일어난다. 은혜의 전염성 덕분에 신자들은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기도하고, 섬기고,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무명의 히브리 여종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을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예수님의 만짐을 통해 은혜가 전염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께서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이루셨을 뿐 아니라,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죄인에 불과한 자기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이다. 원죄는 지정의를 왜곡시킨다. 자범죄는 우리의 주의를 흐트러뜨린다. 우리 안에 내재하는 죄는 우리를 마음대로 조종하려 한다.그런데 예수님은 원죄, 자범죄, 내재하는 죄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우리가 종종 그러는 것과는 달리 사탄이 조종하는 줄에 매달린 꼭두각시가 아니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율법을 온전히 이루시고, 자신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사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신 후에 자기 백성에게 그들을 속박하는 죄를 극복할 능력을 주셨다. 그분은 자신의 피로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고, 말씀으로 우리를 가르치고 치유하시며, 성령을 보내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하시고, 자신이 베푸는 구원의 사랑이 바위처럼 견고하다는 확신으로 우리를 위로하신다. 그분은 또한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양자가 되어 기업을 상속받게 하신다.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작고 고립된 은혜의 대리인이 되어 우리 “임의대로의 친절”을 베풀며 살도록 놔두지 않으셨다. 그분은 우리에게 자신의 신부인 교회를 허락하셨다. 믿는 자는 교회에 등록함으로써 멤버십 언약을 맺고, 한 가족이 되고,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 세상 안에서 선교 사역을 행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가 된 사람들을 일상에서 돌보며, 필요할 때마다 교훈과 책망을 받고, 권징을 행하는 목회자와 장로들을 지원하며, 하나님의 가족처럼 행동하고, 아직 하나님의 귀한 은혜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우리의 가정과 가족과 교회로 인도하는 일을 실천하도록 부르심을 받는다.예수님의 역설은 특히 오늘날과 같은 탈-기독교 세상에서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 전달되는 전염성 있는 은혜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일깨워준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어떻게 하면 전염성 있는 은혜 안에서 살 수 있을까? 그런 은혜가 행해지는 현장을 보려면 요한복음을 펼쳐 예수님이 행하신 첫 번째 기적(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을 살펴봐야 한다. 예수님은 급진적이고, 부인할 수 없는 환대를 통해 전염성 있는 은혜를 전하는 방법을 친히 보여주셨다. 그로 인해 하찮은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평범한 결혼식이 우리를 텅 빈 상태에서 충만한 상태로 변화시키는 기적의 현장이 되었다. 당시에 마리아가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요 2:5)고 말한 대로 우리가 행한다면, “전염성 있는 은혜” 곧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을 중앙으로 옮겨주는 은혜, 미래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은혜, 예수님이 주님인 한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를 해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은혜가 우리의 것이 된다.간단하지 않은가?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내면에서 우러나는 순종을 행할 의지를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다. 우리는 은혜를 받고 우리의 십자가를 짊어지기 전에는 순종할 수 없다. 속되고 그릇된 우리의 정체성과 우상들을 우리의 목숨과 함께 버릴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면 순종할 수 없다. 복음은 우리가 한때 사랑했던 것들을 버리는 것과 함께 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비로소 순종할 수 있다. 우리는 자아에 대해 죽을 때 비로소 순종할 수 있는 자유를 발견한다. 수잔 헌트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반역자에서 구속받은 자로 변화시킬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받는다. 우리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 12:2)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된다(고후 3:18). 즐거운 순종은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다(요 14:15)”라고 말했다.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으면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베푸는 것이 상처가 될 때까지 베풀 수 있을까? 그렇다. 하나님이 우리가 강하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요일 2:14).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강하다. 심지어 죄와 싸울 때도 하나님은 자기의 자녀인 우리가 강하다고 말씀하신다.예수님께 대한 순종(이것은 자아에 대한 죽음이요, 육신의 정욕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다)은 자유를 가져다준다. 그래서 버림받고 멸시받는 사람을 보면 우리도 한때는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안타깝게 여겨 양팔을 활짝 벌려 환영하고 빵과 고기를 나눠줄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도 그러했고, 기독교 신앙을 무시하거나 멸시할 뿐 아니라 기독교적 가치가 참된 동정심과 관심과 다양성을 해친다고 생각하는 오늘날의 탈-기독교 세상에서도 여전히 마찬가지다.이 글은 로자리아 버터필드, 복음과 집 열쇠(개혁된실천사)의 일부를 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간추린 것입니다.
환대
손대접
은혜
나병환자
가정이 무너진 시대에 교회는
by 김형익
2022-10-17
우리나라의 심각한 저출산율에 대한 글을 쓰면서, 우리 사회의 그늘진 사각지대를 보여주는 여러 지표를 보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노인 빈곤율과 노인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1위다. 전체 자살률은 2003년 이래 줄곧 1위 자리를 수성하고 있다. 가족, 친척 등 주변 사람들과 단절된 채 홀로 살다가 임종을 맞고 한참 지나서야 주검이 발견되는 고독사 문제도 심각하다. (고독사는 1990년대 일본에서 나 홀로 죽음이 급증하면서 생긴 신조어다.) 우리나라의 독거노인 비율은 지난 7년 동안 매해 20퍼센트 선을 유지하고 있다. 65세 이상 노인인구 중 혼자 사는 사람이 다섯 명 중 한 명이라는 말이다. 독거하는 사람은 비단 노인만이 아니다. 다양한 이유로 사회 진입에 어려움을 겪거나 장기불황 등 상황적 이유로 원치 않게 홀로 살게 된 2, 30대 인구도 지속해서 늘고 있고, 그만큼 2, 30대 청년 고독사 비율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가정이 필요한 사람들 노인 빈곤율, 노인 자살률, 일반 자살률, 독거노인 비율, 1인 가구 비율, 고독사 등의 통계들을 분석하는 사람들은 그 원인으로 저출산에 따른 외동 자녀 증가, 장기간의 경제 침체와 실직률 증가, 개인주의 문화 확산, 독신(비혼) 및 이혼 증가 등을 꼽는다. 그러나 나에게 이 통계가 보여주는 것 하나를 말하라면, 그것은 가족의 붕괴다.여기에 더해, 보육원에서 성인이 되어 자립하게 된 청년들을 주목하고 싶다. 다양한 이유로 부모에게 버림을 받았거나 부모를 떠나 보육원에서 자라게 된 아동, 청소년들이 있다. 그들은 만 18세가 되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보육원에서 나와야 한다. 그나마 지난해(2021년) 개인 의사에 따라 보육원에서 만 24세까지 머물 수 있도록 기간을 연장하는 법안이 통과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통계를 보면, 해마다 보육원을 나와 자립하는 청년은 2,500여 명으로 추산된다. 지자체별로 상이하지만, 이 청년들은 자립지원금 명목으로 최소 500만 원에서 1,500만 원을 받고 홀로서기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보육원이라는 공동체에 속해 있다가 갑자기 홀로 사회 속으로 뛰어들게 된 앳된 청년들이 느끼는 경제적, 심리적 부담은 상상하기 힘들다. 이들의 평균 소득은 최저임금에 못 미치고, 이들 중 2/3는 정부 지원금에 의존하여 살아야 한다. 이들에게 대학 진학은 꿈같은 이야기다. 정착금으로는 한 학기 등록금과 생활비를 감당하기도 벅차다. 그러다 보니 보육원에서 자립한 청년 10명 중 8명은 우울증과 공황장애 등 심리적 문제를 안고 있고, 자살을 생각해 본 청년의 비율은 50퍼센트에 달해, 그 연령대의 일반 청년들이 14퍼센트인 것과는 격차가 크다. 두 달 전 내가 살고 있는 광주의 보육원에서 자립한 두 청년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있었다. 이들은 18살, 19살이었다. 한 청년은 자립지원금 대부분을 대학 등록금과 기숙사비로 지출했고, 극단적 선택을 하기 전 보육원 관계자에게 “돌봐주는 사람이 없어 너무 힘들다”고 호소했다고 한다. 마음이 아파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들이 필요로 한 것은 가족처럼 기댈 수 있는 공동체였다. 고독 사회우리 사회는 개인적으로는 고독의 병리적 현상을, 사회적으로는 가정 붕괴의 참혹함을 경험하는 고독 사회다. 성경을 믿는 신자로서 나는 내가 살아가는 사회의 어두운 면들을 볼 때 아프고 슬프지만 크게 놀라지는 않는다. 인류의 첫 사람 아담이 타락한 결과 아담의 모든 후손이 예외 없이 죄와 비참의 상태에서 살아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7). 하나님께서는 본래 인간을 고독한 존재로 창조한 것이 아니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좋지 않다고 평가하신 것은 아담의 독거였다(창 2:18). 지금도 죄와 저주로 말미암아 인간이 극도의 고독 가운데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께서 좋게 보실 리 없다. 아담을 위해 하와를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친히 두 사람을 부부라는 가족 공동체로 묶어 주셨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을 주심으로써(창 1:28), 가정을 통한 번식과 공동체의 형성을 의도하셨다. 영원히 공동체로 존재하시며 세 위격 안에서 최고의 기쁨을 누리시는 하나님께서는 그 기쁨을 주어 누리게 하시려고, 사람을 공동체로 창조하셨다.그러나 아담의 타락은 고독과 외로움을 모든 인간의 실존 속에 가져왔고, 그것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겪고 살아가는 죄와 비참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증거가 되었다. 고독사, 노인 빈곤율, 노인 자살률, 보육원 자립 청년들이 겪는 어려움은 모두 고독이라는 피할 수 없는 인간 실존과 연결된다. 본질상 타락한 인간이 만들어가는 사회는 고독 사회이고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이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개인주의라는 시대 정신과 문화적 흐름은 외로움을 증폭할 뿐이고, 어떤 정부도 현상에 대한 후속 조치를 넘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 독거노인 문제의 해결책으로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을 개발한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이것은 기술문명이 최고로 발달한 세상이 고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실례다. 고독과 외로움의 문제는 인간의 죄와 관련된, 영적 근원을 가진 문제이기에 고도로 발달한 세상이라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정직하고 깊숙하게 우리가 사는 고독 사회를 바라본다면, 절망 외에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다른 선택은 없어 보인다.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신 가정, 교회하지만 희망이 있다. 둘째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죄와 죄책에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셨고 그들을 성령 안에서 결속하는 새로운 가정으로 만드셨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단순히 개개인의 영혼이 구원받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죄로 깨어진 관계와 무너진 가정을 구속하셨다. 그것이 교회다. 주님은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 12:50)라고 하셨고 바울 사도는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선언했다(엡 2:19). 그리스도께서 가정이 무너진 세상에 오셔서 가정을 구속하셨다는 소식은 외로움에 사무친 인간과 고독 사회에게 좋은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분리되고 깨어진 모든 관계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고 깊은 결속을 통해 교회의 하나됨을 경험하게 하신다. 주님께서 잡히시기 전 그 저녁에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신 것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실 구속이 가져올 교회의 본질을 보여준다(요 13:34-35). 교회는 신자들이 단지 예배를 위해 모였다가 흩어지는 느슨한 클럽이 아니다. 교회는 외로움을 가속하는 세상 문화를 거슬러, 결속을 만들어내고 관계의 깊이를 추구하며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서로를 돌보는 가정으로 부름을 받았다. 초기 교회와 21세기 교회로드니 스타크는 기독교의 발흥에서 초기 기독교가 박해 속에서도 고속 성장을 할 수 있었던 이유로, 2세기 중반과 3세기 중반에 약 15년 동안씩 로마제국에 창궐했던 역병의 상황을 지적했다. 두 차례의 역병은 때마다 제국 인구의 25-35퍼센트를 앗아가는 가공할 역병이었다. 접촉을 통해 병이 전염된다는 사실 때문에, 부자와 의사들은 모두 도시를 떠났고 심지어 가족들조차 병에 걸린 가족을 돌보지 않고 떠날 정도였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도시를 떠나지 않았고 버려진 병자들을 돌보았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물론 그리스도인들도 감염되어 죽기도 했지만, 감염병으로 인한 그리스도인의 사망률은 비그리스도인의 1/3에 불과했다.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돌봄으로써 죽음 대신 회복을 경험했던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병자들을 돌보았던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은 로마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이 일로 수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21세기에도 이런 일이 가능할까? 코로나 팬데믹에서 경험했듯이, 고대 세계와 달리 현대의 전염병은 정부와 의료기관이 감당하고 있어서 초기 교회와 같이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두드러진 역할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지금 같이 관계와 가정이 무너진 고독 사회에서 교회가 주님이 구속하신 가정으로서의 교회를 회복하고 그렇게 존재한다면, 외로운 이들을 두 팔 벌려 환대한다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된 결속을 보여준다면, 21세기의 세상에 교회보다 더 충격적인 메시지가 있을까? 보육원에서 자립한 청년들을 돕는 한 사역자의 말이다. “이들은 정서적으로 불안하다 보니 매주 한두 번이라도 꾸준히 연락하며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이 필요하다. 이들에게는 ‘사회적 가족’을 만들어줘야 한다.” 환대의 전통 속에서 교회는 외로운 노인과 외로운 청년들의 가족이 되어줄 수 있을까? 주님은 주님과 복음을 위해 희생한 제자들에게 약속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 10:29-30). 우리가 현세에서 누릴 백 배의 가족은 교회다. 가정이 무너진 세상에서 서로 사랑하는 하나님의 가정으로 존재하는 교회는 세상이 보고 느끼고 경험하는 복음이다. 두 달 전 내가 사는 도시 광주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두 청년이 우리 교회의 청년들이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고독
고독사
가정
고독사회
외로움
아우구스티누스는 칭의를 잘못 이해했는가?③
개혁자들과 함께 아우구스티누스 읽기
by Zach Howard
2022-10-16
요약: 장 칼뱅 같은 개혁자들이 성경을 빼고 가장 많이 인용한 사람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이다. 그들은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의 다른 주장보다도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는 것이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은혜라는 진리를 이 교부가 어떻게 옹호했는지에 관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참고했다. 그렇지만 개혁자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교리에 관해서만은 이 위대한 교부에게서 원하는 만큼의 명료성을 찾지 못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칭의의 의미를 체계적으로 다루지 않았으며, 그의 저작을 주의 깊게 읽으면 그가 이 교리를 다루는 데 있어서 모호함을 드러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의에 관해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안점을 두는 것은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신다(declaring)는 점이 아니라, 의롭게 만드신다(making)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료성을 중시하는 종교 개혁자들에게는 아무리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을 의롭다 하심의 유일한 근거가 되는 그리스도의 의를 부정하지는 않았더라도, 이런 식의 교리 표현 방식을 모호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목회자, 지도자, 교사를 위한 특집 기사 시리즈를 위해서 우리는 베들레헴 신학교에서 신학 및 인문학 조교수로 일하는 잭 하워드에게 아우구스티누스의 칭의 교리를 탐구하도록 요청했다.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_이해 1. 인간의 본성에 대한 치유로서의 칭의 2. 경건하지 않은 자를 경건케 만드는 칭의 3. 사건과 과정으로서의 칭의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_평가 1. 칼뱅의 아우구스티누스 칭의론 평가 2. 믿음과 사랑의 관계 3. 은혜의 면류관을 씌우시는 하나님3. 사건과 과정으로서의 칭의 비록 아우구스티누스가 칭의 속에 선언적 의미까지 들어있다는 점을 받아들이지만, 그가 가진 칭의에 대한 일차적 이해는 하나님이 인간의 본성을 치유하심으로써 경건하지 않은 사람을 의롭게 만드신다는 데에 있다고 결론 내리는 것이 적절하다. 따라서 다음 질문이 따라온다. 만일 칭의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이해가 “의롭게 되는 것”이고, “의롭게 되는 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발생하는 내적 변화를 요구한다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형상 안에서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의롭게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인가? 이 질문에 답하는 한 가지 방법은 칭의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사건이자 과정으로 설명하는 것이다.[15] 아우구스티누스가 믿음의 시작과 믿음의 진보를 구분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사건 언어와 과정 언어를 모두 쓰고 있음을 본다.[16]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주 그런 구분을 한다.[17] 예를 들어, 시편 67편을 설명하면서 그는 “행위보다 믿음이 우선”임을 상기시킨다. “공로가 없어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바울 사도가 말했듯이,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5), 이 말씀은 후에 믿음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역사하기 시작함을 의미한다.”[18] 아우구스티누스는 의롭게 되는 근거로서의 행위를 의롭다 함을 받는 행위와 분명하게 구분한다. 이것은 단순하게 지나가는 문장이 아니다. 그것은 칭의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전체 단락을 정의한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의 여정은 다름 아니라 믿음에서 시작한다”[19]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그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랑을 통해 역사하는 믿음의 여정으로 묘사한다.두 번째 예는 로마서 8:30-31에 대한 설교에 등장한다. 여기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우리는 의롭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발전함에 따라 우리가 받은 의로움(justice)은 더 커질 수 있다.”[20] 의롭게 되었다는 바울의 말이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이미 칭의의 상태에 도달했다”를 의미한다고 이해했다. 그러한 상태는 “중생의 씻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을 받고 날로 진보함으로”(딛 3:5 참조) 발생한다. 칭의는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조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날로 발전할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하다. 다른 말로 해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우리는 의로움을 가질 수도 있고 동시에 의로움 속에서 자랄 수도 있다. 간단히 말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칭의라는 용어를 선언적 사건으로 제한하지 않았다. 칭의는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께로 가는 여정을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하나님을 대면하는 그날까지 우리는 결코 완전한 의인이 될 수 없고 따라서 완전한 의를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믿음의 여정은 죄 사함을 받고 계속해서 죄와 싸우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하는, 인간의 의지를 치유하시는 성령의 은사를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여행이라는 은유를 사용하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초기의 신앙과 과정의 신앙 사이에는 분리할 수 없는 관계가 존재한다. 물론 둘 다 같은 믿음이다. 의롭게 하는 믿음이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라고(갈 5:6) 말했을 때, 아우구스티누스가 의미하는 바는 죄 사함을 받고 성령님을 의지하는 믿음과 더불어 날로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커가는 믿음 사이의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것, 즉 성령이라는 인격체를 통해서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며, 그 순간부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 15. 나는 칭의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사건이자 과정으로 설명하는 다른 학자들의 견해에 동의하지만(Alister McGrath, David Wright, Robert Dodaro, Peter Dubbelman), 아우구스티누스가 칭의를 사건으로만 본다고 주장하는 두 사람(Gerald Hiestand and Dongsun Cho)의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도다로(Dodaro)는 Augustine Through the Ages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이렇게 정의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칭의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의롭다고 보시는, 즉 하나님께 순종하는 합당한 관계로 회복시키는 능동적인 과정이다.” 그는 계속해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의 구속에 대한 적극적인 믿음이 인간의 영혼을 훈련시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합당한 사랑으로 이끌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그 결과 “개개인의 영혼은 거룩함에 있어 점진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다”(482). 16. 데이비드 라이트(David Wright)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칭의에 대해 완료 시제와 종종 수동태로 말하는” 몇 가지 예를 지적한다(66). 다음을 보라. “Justification in Augustine,” in Justification in Perspective: Historical Developments and Contemporary Challenges, ed. Bruce McCormack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6), 55-72.17. 또 다른 명쾌한 예로는 다음을 보라. The Spirit & the Letter 29.50 (WSA 1.23:175?76). 18. Augustine, Expositions of the Psalms 67.41 (WSA 3.17:360). 19. Augustine, Expositions of the Psalms 67.41 (WSA 3.17:360). 20. Sermon 158.5 (WSA 3.5:117). 원제: Did Augustine Get Justification Wrong?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아우구스티누스
칭의
칭의론
사랑으로역사하는믿음
강화를 신앙의 섬으로 만든 시루뫼 공동체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강화교산교회
by 이종전 · 장명근
2022-10-15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대한 강토에 선 첫 세대 교회들을 찾아 떠납니다. 그 이야기들에서 우리 신앙의 근원과 원형을 찾아보려 합니다.조선을 넘보는 제국주의 열강이 조정을 향해 오다가 맞닥뜨리는 곳, 그곳은 강화도이다. 조선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할 강화도, 이 섬은 조선 정부의 최전(最前)의 보루였다. 이 길목을 지키고 있는 조선군을 넘지 못하고서는 조선의 심부(深部)로 향할 수 없었기에 미국의 함선도, 프랑스의 함선도 강화도에 주둔하고 있는 조선군과 결전을 벌여야만 했다. 프랑스가 침략한 병인양요(1866)도, 미국이 도발한 신미양요(1871)도 모두 강화도가 그 치열한 전장이 되었다. 그리하여 강화 도민들에게 양인은 모두 오랑캐로 각인되었다. 하지만 조선은 이미 더 이상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두 양요를 통해서 확인하게 되면서 조미통상수호조약(1882)과 조영통상조약(1883)을 체결하면서 문호를 개방해야만 했다. 이듬해인 1884년 알렌 선교사를 필두로 양인 선교사들이 연이어 들어오게 되었다. 하지만 조선인들의 의식에는 서양 오랑캐로 각인되었기에 선교사들이 들어왔어도 그들의 여정은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강화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1893년에 처음 찾아와 문을 두드렸던 존스 선교사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1893년이면 이미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고 여행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된 시점이지만, 그래도 강화도 입도(入島)는 불가능했다. 강화유수와 도민들이 양인들이 섬에 들어오는 것 자체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음의 은혜를 깨달은 강화도 출신의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승환이 그였다. 조선이 문호를 개방하자마자, 그는 일거리를 찾아서 인천으로 나왔다. 인천에서 새로운 세상 물정을 경험하였고, 인천 번화가에서 주점을 열어 큰돈도 벌었다. 그렇게 벌어들인 돈을 어떻게 하면 더 불릴까 궁리하다가 선교사가 시작한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돈을 불리기 위해서 교회에 나갔지만, 오히려 교회에서 곗돈을 잃게 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렇게 돈은 잃었지만, 그는 교회에서 존스 선교사를 만났고, 이 선교사를 통해서 복음을 들었으며, 구원의 은혜에 동참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세례를 받는 것은 한사코 거부했다. 자신이 주점을 하고 있다는 것이 이유였고, 고향에 계신 어머니는 하나님을 모르는데 혼자만 구원받는다는 것이 죄스럽다는 것이 또 하나의 이유였다. 결국 이승환은 어머니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과 세례를 받게 하는 것이 최종 목표가 되었다. 이승환은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주점을 처분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복음을 전해서 예수님을 믿게 했다. 하지만 세례를 받게 할 길이 없었다. 하여, 이승환은 내리교회를 중심으로 인천과 황해도 지방의 선교를 책임지고 있는 존스 선교사에게 어머니의 세례를 요청했다. 하지만 강화도에는 양인이 들어갈 수 없었다. 이승환은 어머니를 향한 애틋함과 구원에 대한 열망은 포기할 수 없었다. 결국 존스 선교사를 전세 낸 배에 태우고 고향마을인 시루뫼(甑山)로 향했다. 하지만 향리에는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토호인 초시 김상임이 있었다. 그는 결코 자기 마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고 단호하게 소리쳤다. 당시 김상임은 벼슬에 나가지 않고 지방의 유생들과 함께 사실상 어른 노릇을 하면서 학동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게다가 시루뫼 마을 대부분이 그의 땅이기에 마을에서 그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하는 수 없이 이승환은 묘책을 생각해 냈다. 존스 선교사를 태운 배를 마을에서는 보이지 않는 앞산 너머 갯벌에 정박해 놓고 마을로 들어와 물때를 기다려 밤이 깊었을 때 어머니를 모시고 앞산을 넘었다. 그리고 바닷가에 이르렀을 어머니를 등에 업고 멀리 갯벌에 정박한 배로 향했다. 쉽지 않은 발걸음이다. 혼자 걷기도 어려운 갯벌을 어머니를 등에 업은 채 걷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승환의 열정은 기어코 어머니를 뱃전에 앉혔다.존스 선교사는 뱃머리에 선 채 멀리 어머니를 업고 배를 향해 다가오는 이승환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비록 입도는 할 수 없었지만, 이승환의 모습을 보면서 훗날 한국 교회의 모습을 보지 않았을까? 당장은 외세와 양인들을 배척하지만, 복음에 담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었을 때 한국 교회는 분명 그 은혜를 담아내는 교회가 될 것을 확인하고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 자리에서 자신이 거기에 있어야 하는 이유를 간절한 마음으로 확인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복음으로 변화된 사람이 그 복음에 담긴 영원한 소망을 보았기에 혼자만 그 소망의 길을 갈 수 없어 어머니를 등에 업고 갯벌을 걷고 있는 이승환의 모습에서 존스 선교사는 분명 한국인과 한국 교회의 미래를 보았을 것이다.마침내 뱃전에 앉은 이승환의 어머니는 문답을 거쳐 어렴풋한 달빛 아래에서 선상 세례를 받았다. 존스 선교사의 평생 사역에서 시루뫼 마을 앞 갯벌에서 행한 세례식만큼이나 극적인 순간이 또 있었을까? 이것은 강화도 최초의 세례식이었으며, 오늘의 강화도가 복음의 섬이 되는 시작이었다. 존스 선교사는 이승환과 그의 어머니가 함께한 선상 세례를 시점으로 강화도 복음화를 위한 신호탄이 될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것은 존스의 능력도, 이승환의 효심 때문도 아닌 성령님의 역사가 드러난 것이리라. 철저하게 양인들을 배척하는 땅 강화도, 그중에서도 가장 소외된 북쪽의 한 촌락 시루뫼에 복음의 씨앗이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시루뫼에서 시작된 복음 전파는 동과 서로 강화도 해안도로를 따라서 전역을 퍼져나갔고, 강화도는 복음의 섬이 되었다. 그렇게 시루뫼에 믿음의 씨앗이 떨어진 다음에도 걱정은 이어졌다. 예배를 할 수 있어야 했지만, 마을에는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승환은 묘책을 찾아야 했다. 당장 선교사들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니 인천 내리교회를 중심으로 존스와 함께 사역하고 있던 전도부인 이명숙과 백헬렌을 이 마을로 오게 해서 어머니의 신앙을 양육하면서 마을에 복음을 전하게 했다. 그렇게 한 사람, 두 사람이 더해지고 예배하는 공동체로 발전했다. 또한 선교사 입도를 결사반대했던 초시 영감 김상임도 존스 선교사를 만나면서 개종하게 되었고 끝내는 시루뫼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었다. 존스 선교사는 김상임을 인천 우각동에서 자신이 처음으로 개설한 신학회에 참석하게 하여, 훗날 시루뫼 공동체의 전도사가 되어 평생을 이 공동체를 섬기게 했다. 그렇게 세워진 것이 시루뫼의 역사를 잇고 있는 교산(橋山)교회이다. 시루뫼에서 시작한 작은 공동체는 강화도의 모교회가 되어 200여 교회와 강화도를 신앙의 섬으로 만드는 산파 역할을 했다.예배당 이야기교산교회는 선교 초기인 1896년에는 초가를 한 채 매입해서 예배 처소로 사용하다가 1915년에 처음으로 초가 예배당을 지었다. 이때 지은 예배당에서 시루뫼 공동체는 일제 강점기까지 이겨내고 해방을 맞았다. 6.25사변이 휴전을 맞으면서 강화도 지역의 교회를 재건하기 위한 원조가 감리교 본부로부터 전달되면서 새로운 예배당을 마련해야겠다는 의지가 낙후된 지역인 이곳에서도 예배당을 짓기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1958년 4월 현재 역사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예배당을 짓기 시작했다. 30평 규모의 석조 예배당이다. 해방 이후에 지어진 예배당들이 주로 석조건물인 것을 생각하면 시대적 특징을 잘 간직한 건물이기도 하다.이 예배당이 지어지기까지는 큰 희생이 있었다. 김봉일 성도의 딸이며 김예기 목사의 어머니인 김리브가 권사가 옥답 1,000여 평을 팔아서 건축헌금으로 드렸고, 김용기 탁사부장은 예배당 터를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가능했다. 또한 예배당 완공과 함께 문순만 권사가 부흥회를 통해서 온 가족이 인가귀도(引家歸道) 됨을 기뻐하면서 풍금 한 대를 헌물로 드렸다. 이때까지 이 교회에는 풍금이 없었다는 사실을 전제할 때 온 교회에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봉헌감사 예배를 1962년 2월 20일에 드렸다. 그리고 이 건물은 현재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있는 110주년 존스기념예배당이 2003년 봉헌할 때까지 사용되었다.
강화교산교회
시루뫼공동체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by 복음과도시
2022-10-15
대한 강토에 선 첫 세대 교회들을 찾아 떠납니다. 그 이야기들에서 우리 신앙의 근원과 원형을 찾아보려 합니다.조선 유교의 중심을 흔들다안동교회형과 아우, 아버지와 아들이 지켜낸 교회여수 장천교회선교사의 희생이 맺은 열매순천중앙교회“목포에 복음의 씨가 뿌려진 맨 처음 터”목포양동교회호남 선교, 태동하다군산구암교회전주를 깨운 종(鐘)전주서문교회내륙 선교의 길목을 트다춘천중앙교회무심천변 아픈 역사는 비(碑)가 되어청주제일교회역사와 지리의 단절을 견뎌내다철원제일교회작고 외진 교회, 복음과 계몽의 첨병 되다무지내교회서해의 복음 등대백령도 중화동교회성도들의 귀감으로 세운 충청권 선교의 교두보공주제일교회민족 지도자의 산실로 서다새문안교회 아름답다, 고도孤島의 예배당서도중앙교회 근대사를 품다승동교회“눈 덮인 작은 예배당”정동제일교회 강화를 신앙의 섬으로 만든 시루뫼 공동체강화교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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