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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가 나의 고통을 어떻게 바꾸었는가
by Jane Story
2022-09-26
이십 대 중반에 건강이 나빠졌다. 수면 문제, 정신 문제, 큰 어깨 부상과 수술, 그리고 희귀한 편두통까지 빠르게 또 연속해서 나를 덮쳤다. 고통은 무려 5년이나 이어졌고, 때때로 도무지 나을 거 같지 않다는 절망에 빠지곤 했다. 나는 고통이 시작한 그 계절을 희망적인 전망으로 시작했다. 기도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또 신앙 공동체를 찾았다. 그런데 몇 달 만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새벽 4시에 차 안에서 하나님께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고,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엄두가 나지 않아 이불 속에 숨었다. 비참함 속에서 나는 길을 잃었다.잘못 자리 잡은 소망돌이켜보면, 가장 큰 문제는 영적 피로와 혼란이었다. 일부는 내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대부분은 내가 신학을 제대로 적용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고난의 계절이 시작하기 몇 년 전, 나는 구원에 대한 칼빈주의적 이해를 오로지 머리로만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때까지 그 진리를 실생활에 적용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고난을 잘 감당하게 하는 능력을 무너뜨리는 교묘한 거짓 아래서 활동하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 매달리고 믿음을 잃지 않는 게 내게 달렸다는 사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당당하게 서기 위해서 무엇보다 “충분히 또 넉넉하게”(good enough)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물론 성경에는 끝까지 견디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기억하고, 믿음으로 고대하라는 수많은 말씀이 있다. 그러나 나의 소망은 그리스도의 신실함보다는 신실할 수 있는 나의 능력에 있었다. 나는 칼빈 학자와는 거리가 멀지만, 그의 가르침에 대한 단순한 이해만으로도 나의 잘못된 생각이 드러났고 결국에는 큰 소망을 갖게 되었다. 고난 중에 도움이 되었던 많은 교리 중 두 가지만 언급하겠다. 하나님의 주권하나님에게는 그가 결정하신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과 권세가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했다. 하나님께 감히 그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누가 하나님을 잔인하다고 판단하는가?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성품을 설명한다. 게다가 나는 하나님이 나의 선을 위해 자비롭게 일하시며, 또한 죄인들에게 관대하시다는 약속을 받았다.나의 가장 암울한 순간에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위로가 아니라 더 큰 고통을 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친구가 남긴 믿을 수 있는 상처였다(잠 27:6). 그의 주권이 없다면, 나의 고통에는 목적이 없고, 그것은 결국 훨씬 더 나쁜 운명을 초래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것은 그가 나의 고통을 의도적으로 허용하거나 심지어 야기했다는 것까지도 받아들임을 의미했다. 그건 어려웠다.그러나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하고 그를 선하다고 고백하는 것은 소망과 기쁨의 길이 되었다. 하나님이 내 삶을 마구 명령하신다고, 내 마음대로 우기는 것은 오로지 분노와 의심을 가져다줬을 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대로만 하시는 분이 아니다. 모든 상황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면서 나는 자유를 느꼈다. 나의 시련이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반증”하는 힘을 갖지 못했다. 그 대신, 나는 모든 고난이 궁극적으로 나를 더 그리스도를 닮게 하기 위한 것임을 발견했다(벧전 1:3-9). 이런저런 삶의 기복에 흔들리지 않도록 하나님의 주권이 나의 든든한 터가 됨을 발견했다.성도의 견인구원은 은혜로 받았지만 거룩하게 할 책임은 내게 있다고, 어린 시절부터 나는 암묵적으로 배웠다. 믿음을 굳건히 하는 것은 나에게 달려 있고, 심지어 구원을 잃을 수도 있다고 믿었다. 나중에는 건강 문제로 인해 화가 나고 낙심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정도였다. 믿음이 약해져서 심지어 하나님의 자녀라는 지위를 잃을까 봐 걱정했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성도의 견인이라는 달콤한 교리로 나를 인도했다.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 이것은 무조건적 선택(내게는 구원이 필요하다는 사실 외에 내가 구원에 기여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과 불가항력적 은혜(하나님이 나를 부르신다면, 나는 무조건 구원받음)를 포함한 몇 가지 다른 교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종합해보면, 이 교리는 한마디로 말해서 구원은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 또는 내가 얼마나 많은 믿음을 가질 수 있는지를 전혀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적 씨름과 의심에도 불구하고 나는 안전하다는 것이다. 나의 안전은 나 자신이 아닌 외부에 달렸기 때문이다. 물론 어려운 시기일수록 더 믿음을 키우고 그리스도께 매달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나의 안전은 내가 완벽하게 고난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나를 대신하여 완벽하게 고난을 당하신 유일한 분에게 달려 있다. 하나님의 손에서 그 누구도 나를 빼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분노와 의심이 더 이상 무섭지 않게 되었다(요 10:28-30).변화끔찍한 세월을 거치면서 내 기도와 예배가 바뀌었다. 나는 경험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핑계로 그를 믿지 않는 불경한 죄를 포함한 모든 죄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이해했다. 믿음과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선물이라는 것을 더 깊이 깨달았다. 그리고 고통 속에서 또 연약함 속에서 오히려 내 속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더 커졌음을 깨달았다.전보다 더 커진 인내와 믿음으로 앞으로의 시련을 이겨내길 바란다. 그러나 더 큰 위로는 내 믿음이 부족할 때도 주님께서 여전히 나를 붙드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모든 택함 받은 자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선물로 주셨다. 나의 인내는 나의 행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행함으로 보증된다. 이것은 바로 바울이 말한 것처럼, 그 무엇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사랑 앞에서는 고통의 칼날도 무디어진다. 심지어 내가 품은 의심이나 시련 그리고 죄조차도 그 사랑 앞에서는 힘을 잃는다(롬 8:35-37).원제: How Calvinism Changed My Suffering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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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미
고난
성도의견인
불가항력적은혜
무조건적선택
우리 교회의 역사를 온전히 남기려면
by Caleb Morell
2022-09-25
워싱턴 DC에 있는 캐피톨 힐 침례교회는 갈등의 수렁에서 빠져버렸다. 53 대 52로 갈라진 채 몇 달째 계속된 교인 투표에 다들 지쳤고 담임 목사도 한계에 다다랐다.언제? 1884년.무슨 문제로? 두 번째 교회 건물의 위치와 차입금 규모.담임 목사가 다수의견에 거부하자 교인 60명이 그의 사임을 촉구하는 서한에 서명했다. 1884년 10월 23일, 담임 목사는 곧장 그렇게 했고, 다른 교인 33명를 데리고 나가 겨우 한 블록 반 떨어진 곳에 라이벌 교회를 시작했다.교회 설립 6년 만에 캐피톨 힐 침례교회는 목회자가 없는 교회가 되었고, 채무에 시달렸고, 교인 수는 60명 선을 넘지 못했다. 교회의 앞날에 실패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다. 그러나 140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는 주님께서 이 교회에 다른 계획을 갖고 계셨음을 알고 있다. 그 오랜 세월이 흐르는 내내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를 보존하시는 일을 하셨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서 해 오신 이 일을 알 수 있는 건 오로지 이 교회의 초기 이야기가 세심하게 기록되어 후대에 전해졌기 때문이다.충실한 기록당신이 지역 교회 목사나 교회 행정가라면, 당신은 하나님이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 비범한 일을 어떻게 이루시는지, 그 이야기를 전하는 일차 자료의 금광에 앉아 있다고 할 수 있다.그렇지만 당신의 교회의 역사가 5개월이든, 5년이든, 50년이든 상관없이 지금 문서를 어떻게 보존하고 정리하고 있느냐에 따라 미래의 지도자들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위해 하신 일을 전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된다. 나는 최근에 캐피톨 힐 침례교회의 역사에 관한 책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수천 페이지의 메모, 회의록, 기사, 및 편지를 일차 자료로 하여 이 작업을 하면서 미래 세대를 위해 이러한 문서를 보존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금 실감했다.교회가 그들의 과거에 접근할 수 없다면, 그 교회는 집단 기억 상실에 빠진다. 교회의 기록을 추적하는 것은 미래 세대가 우리의 실패로부터 배우고, 주님을 신뢰하고 인내하도록 격려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어떻게 보관할 것인가?교회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지역 교회의 기록을 보존하기 위해 실행에 옮겨야 할 일은 무엇일까? 여기 그 일곱 가지 핵심 사항이다.1. 회의록 보관에 주의를 기울이라.당신이 새로운 교회 개척자이든 100년 역사의 교회이든 상관없이 교회의 모든 리더십 모임에 대한 의사록을 작성해야 한다. 당신 교회가 어느 교단에 속해 있든, 모든 교회에는 결정을 내리는 심의 기구가 있다. 그 회의의 의사록은 교회의 삶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보여주는 창이 된다.2. 교인 인터뷰 기록을 축적하라.일반적으로 교회에는 교인이 되는 절차가 있다. 종종 여기에는 신청자가 간증과 이전 교회 경험을 나누는 인터뷰도 포함된다. 새 회원의 허락을 받아 주의 깊게 기록하고 사본을 보관하라. 이 인터뷰는 미래 세대가 그 교회를 이룬 교인들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3. 설교 원고와 녹음을 보관하라.많은 목회자가 자신의 설교 노트와 녹음을 보관하고 있지만, 그들이 세상을 떠나거나 다른 교회로 옮길 때 그 원고는 가족이 보관하고 교회에 넘겨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목회자들은 교회 기록 보관소에 보관할 설교 원고와 녹음을 추가로 복사하여 그 교회의 역사를 보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그 목사가 떠난 뒤에도 미래의 성도들은 복음이 어떻게 충실히 전해졌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4. 회원 명부를 꾸준히 갱신하라.많은 교회에서 교인 명부를 목회 및 회중 기도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회원의 연락처 정보를 보관한다. 교인 명부는 미래의 역사가들이 연구에 유용한 교인 이름, 가족, 주소 및 회중에 대한 기타 정보에 접근할 수 있게 해 준다.5. 원로 교인을 인터뷰하라.목회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회중의 연로한 성도들을 정기적으로 인터뷰하는 일을 우선순위에 두어야 한다. 그 어르신들의 삶의 이야기와 교회 경험을 청취하라. 그 이야기를 듣는 것은 교회 지도자와 그 이야기를 듣게 된 다른 사람들에게 격려가 될 것이다. 나이 든 교인에게 그의 이야기가 회중을 격려하는 데 사용될 수도 있고, 미래에 그 교회 역사의 기록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고 설명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이 목적을 위해 인터뷰 양식을 만들고 메모를 작성하고 녹음하고 인터뷰 내용을 복사하여 보관하라.6. 종이 사본을 보관하라.대부분의 기록이 디지털화되고 있지만, 중요한 문서의 인쇄본도 교회 사무실에 보관하라. 직원이나 목회자가 바뀔 때 디지털 문서는 전달되지 않는 경우가 너무 많다. 직원이 인수인계할 때 물리적 문서는 그 건물 밖을 벗어날 가능성이 매우 적다.7. 수정을 삼가라.마지막으로, 교회의 결점을 드러내는 기록이라 할지라도 가감을 삼갈 것을 권장한다. 복음은 우리 자신을 위선에서 벗어나게 한다. 이는 우리가 교회의 역사를 보는 방식에도 적용된다. 구속의 드라마처럼 당신의 교회 이야기에는 영웅과 악당, 실수와 실패가 있을 것이다.회의록과 교인 이야기를 기록할 때 불편하거나 불행한 장을 숨겨서는 안 된다. 이를 통해 미래 세대는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델라웨어 침례회(Delaware Baptist Association)의 역사를 저술한 챔프 손턴이 얼마 전에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목표가 주님께서 하신 일을 기념하는 것이라면, 어두웠던 시기의 이야기도 해야 주님께서 하신 그 일이 더욱 돋보일 것이다.”당신은 그 열매를 결코 볼 수 없을지 모르지만, 교회의 역사를 문서화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간단한 단계를 따르면 미래의 지도자와 지역 교회의 교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역사 보존이라는 선한 일은 희망의 행위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계속 사명을 맡겨 주실 것이라는 희망, 미래 세대가 우리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배우게 될 것이라는 희망,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변화된 공동체를 보존하셔서 수십 년 또는 수 세기 후에도 함께 예배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담은 일인 것이다. 시편 기자가 말했듯이, “다음 세대가 읽도록 주님께서 하신 일을 기록하여라. 아직 창조되지 않은 백성이, 그것을 읽고 주님을 찬양하도록 하여라”(시 102:18).원제: 7 Simple Steps to Preserve Your Local Church’s Histor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지역교회역사
개교회사
고대 교회에서 배우자
이상한 신세계: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by Carl Trueman
2022-09-24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세상이 변했다. 자아성(selfhood)에 대한 새로운 관념이 그리스도인들의 관점에 도전하고 있으며, 이러한 새로운 현실에 도전한다는 것이 위험스러운 세상이 되어버렸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도덕적 양식에 따르면 동성 결혼에 반대하는 것은 인종차별주의자가 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스도인이 일반 세계의 광범위한 신념에 동의하지 않아도 전체 사회의 어엿한 구성원으로 존경받을 수 있던 시대는 이미 종말을 고한 것은 아니어도 저물어 가는 중이다. 기독교가 형성한 사회적 상상의 마지막 자취가 급속히 사라지고 있는 것은 사실인데, 우리 중에 많은 사람은 심지어 지금 이상한 신세계에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처지다. 자아성 혁명은 구체적으로 성혁명의 다양한 국면에 나타나듯이 유치원 교육부터 직장 내 대명서 사용 정책[직장 내에서 성별을 구별하는 대명사를 사용할지 말지 같은 정책]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두의 삶에 압력을 가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말하자면 아직은 이런 일을 피하면서 당분간 살아갈 수 있겠지만 영원히 숨을 수는 없다. 조만간 우리는 모두 현대적 자아성의 관념이 만들어 낸 도전적 상황과 마주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의 문제, 순응하라는 압력에 직면할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우리 모두에게 갈수록 시급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신세계에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여기 여섯 가지 대응 방안이 있다. 복음과도시 편집자 주_ 이 글은 칼 트루먼, (신좌파 성혁명과 LGBTQ+운동이 만든) 이상한 신세계의 제9장을 부흥사개혁사의 허락을 받아 간추린 것으로, TGC의 “6 Ways Christians Can Respond to Our Strange New World”를 참고하여 편집하였다. “신좌파 성혁명과 LGBTQ+운동이 만든 이상한 신세계”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갈 것이며 또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지, 여섯 가지 방안을 6회에 걸쳐서 싣는다. 1. 이 시대에 우리도 가담했음을 인식하자2. 고대 교회에서 배우자3. 하나님의 경륜 전체를 가르치자4. 성경적 예배를 통해 직관을 형성하자5. 자연법과 몸의 신학을 회복하자6. 현실적 소망 안에서 살아가자전통적 그리스도인은 일반적으로 역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우리에게는 역사적 주장(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예수님의 생애의 사건과 행동)에 뿌리를 둔 신앙이 있으며, 우리는 자신의 종교단체가 오순절과 그 너머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연장선상에 서 있다고 이해한다. 그래서 세상의 도전에 직면할 때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현재 경험과 관련된 소망을 찾기 위해 종종 과거를 돌아본다. 일반적으로 개신교 신자는 종교개혁 시대를 돌아보고 로마가톨릭 신자는 중세 중기를 바라본다. 우리는 그 세계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모든 일이 잘될 것이라고 말한다.현실적 역사의식을 가진 사람은 이와 같은 회귀가 최선의 경우에도 거의 불가능함을 알고 있다. 첫째, 종교개혁 시대나 중세 중기 중 어느 것도 후대의 종교적 향수가 우리에게 믿게끔 할 수 있었던 것처럼 황금기가 아니다. 교회가 이 시기에 활동한 사회는 대부분 과학 기술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를 재구성한 방식 때문에 영원히 사라졌다.우리가 우리 시대를 위한 전례를 찾아야 한다면, 나는 우리가 시간상으로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 2세기와 사도 시대 직후의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시대에 기독교는 거의 이해받지 못하고 멸시당하고 주류에서 거리가 먼 종파였다. 기독교는 부도덕하며 폭동을 부추긴다는 혐의를 받았다. 자기가 섬기는 신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며 심지어 결혼한 다른 신자를 ‘형제’와 ‘자매’로 부른다는 사실 때문에, 그리스도인과 기독교는 외부인에게 매우 미심쩍게 여겨졌다. 그리고 ‘예수님이 주님이시다!’라는 주장은 표면적으로 보면 일종의 충성서약으로서, 기독교의 문화적 소외를 탄식하며 가이사에게 돌려야 하는 충성을 훼손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의 상황과 매우 비슷하다. 예를 들어, 우리는 동성 결혼에 대한 우리의 입장 때문에 비합리적이며 편견이 심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여파로 종교적 보수주의자와 특히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이 시민사회에 위협이 된다고 매도당하는 것은 일상사가 되었다. 2세기의 영적 선조들처럼 우리도 부도덕하고 폭동을 부추기는 것으로 인식된다.물론 이 비유가 완벽한 것은 아니다. 2세기 교회는 기독교를 전혀 모르는 이방 세계와 마주했다. 우리는 종종 의식적이면서도 의도적으로 비기독교화하고 있는 세계에서 살아간다. 이것은 반대가 고대 교회에서보다 더 잘 형성되고 더 적극적일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2세기 교회의 전략을 간단히 살피는 작업은 여전히 유익하다.첫째, 신약과 ‘열두 사도의 가르침’(Didache) 같은 초기의 비정경 문헌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은 공동체가 교회 생활에서 중심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사도행전은 그리스도인이 서로를 보살피고 섬기는 교회의 심상을 제공한다. ‘열두 사도의 가르침’은 낙태 및 유아 살해 금지를 포함하는 일련의 도덕 규정을 제시하는데, 이것은 교회를 주변 세계와 구별하는 역할을 했다. 분명히 기독교 정체성은 매우 실용적이고 현실적이며 일상적인 것이었다.이것은 참으로 이해가 된다. 지금까지 주장한 많은 내용의 근간(실제로 사회적 상상이라는 관념의 근간)을 이루는 생각은 정체성이 우리가 소속한 공동체에 의해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다양한 정체성이 있는데, 나는 그리스도인일 뿐 아니라 남편, 아버지, 교사, 영국인, 이민자, 작가, 럭비 팬이기도 하다. 그리고 내가 가진 가장 확고한 정체성은 나의 가장 확고한 직관을 형성하며 내가 소속하고 있는 가장 확고한 공동체에서 기원한다. 그리고 이것은 교회가 우리 각자가 소속하고 있는 가장 확고한 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아이러니한 사실은 LGBTQ+ 공동체가 이 점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성적 소수자가 주변부에서 중앙 무대로 이동한 이유는 주변부에 있는 동안 형성했던 확고한 공동체와 관련 있다. 기독교의 문화적 소외에 대한 탄식이 정당해도 교회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사회적 격변에 대한 교회의 유일한 반응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확실히 탄식하라(우리는 많은 시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대로 세계가 당위적 상태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탄식해야 한다). 그러나 또한 조직하라. 공동체가 되라. 예수님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 것이라고 말씀하신다(요 13:35). 그리고 이것은 공동체를 의미한다.이것은 초대 교회에서 배울 수 있는 두 번째 교훈으로 안내한다. 공동체는 일상적 세부 사항의 측면에서 보면 시골 마을과 도시, 또는 미국과 영국에서 다르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교회가 모든 곳에서 공유할 수 있는 특정 요소가 있는데, 이것은 바로 예배와 교제다. 주일에 함께 모이는 일, 기도하는 일,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 낭독되고 선포되는 말씀을 듣는 일, 세례와 성찬을 기념하는 일, 교회 사역에 물질적으로 헌신하는 일, 이런 일들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함께 모일 때 해야 하는 것이다. 진부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세상에 대한 교회의 증언 중 큰 부분은 진실로 예배하는 교회가 되는 것이다. 바울은 불신자가 우연히 교회 예배에 참석할 때, 교회에서 진행 중인 예배의 초자연적 거룩함에 감동되어야 한다고 직접 언급한다. 복음에 대한 가장 강력한 증언은 예배의 집무에 진심으로 전념하는 교회 자체다.많은 그리스도인은 문화에 관여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실제로 문화는 다른 문화를 제공하는 교회가 가장 극적으로 관여하는데, 교회는 예전적 예배에 뿌리를 두는 다른 형태의 공동체로서 예배 안에, 그리고 예배를 넘어서 존재하는 사랑의 공동체로 발현된다. 그리스도인과 세속주의와의 문화 전쟁에 대한 많은 이야기, 그리고 틀림없이 성경 자체도 이 시대의 영적 갈등을 묘사하기 위해 전쟁의 언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우리 세계의 물리적 전쟁의 실재와 역사를 고려할 때, 어쩌면 ‘문화적 항의’가 이 개념을 현대적 관용어로 바꾸는 더 나은 방식일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된다는 의미에 대한 진정한 이상을 제공함으로써 더 넓은 문화에 항의한다.이 접근법은 2세기 기독교 문학에 분명히 암시되어 있다. 순교자 유스티누스 같은 소위 헬라 변증가들은 로마 제국을 기독교의 관점에서 다루었다. 오늘날 우파와 좌파를 막론하고 많은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하는 방식과 비교할 때,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이 고대 변증가들이 크게 정중한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다. 헬라 변증가들은 로마 황제와 그의 신하의 악폐를 비난하는 데 시간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헬라 변증가들은 그리스도인이 최고의 시민, 최고의 부모, 최고의 종, 최고의 이웃, 최고의 고용인을 만들므로 정부 당국의 괴롭힘 없이 일상생활을 계속할 수 있도록 그냥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그리스도인이 시민 생활에 참여하기 위해 할 수 있었던 일에는 물론 한계도 있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하듯이 황제에게 제사하라고 요구받으면 거부해야 했겠지만, 이런 요구를 제외하면 로마 사회의 훌륭한 일원이 될 수 있었다.5세기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걸작 하나님의 도성 19권에서 비슷한 주장을 제시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인이 이 땅의 도성의 시민인 동시에 하나님의 도성의 시민이라고 말했다. 그리스도인의 이교도 이웃은 단지 이 땅의 도성의 시민에 불과할 수도 있으나, 이것은 두 집단이 여전히 공동의 이익이나 사랑, 무엇보다 지상의 도성의 평화와 번영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이교도와 그리스도인은 모두 다 이것들을 원했으며, 이것들을 이루기 위해 협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대한 최고의 헌신이 자신에게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훌륭한 시민이 될 수 있고 훌륭한 시민이 되어야 함을 의미했다.변증가들과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두 적대적 문화 속에서 교회에 대한 이상을 제공하는데, 이 이상은 ‘교회가 교회가 될 것’과 ‘그리스도인이 자기가 위치한 더 넓은 사회의 건설적 구성원이 될 것’을 요구한다. 어떤 사람은 공격적이고 직접적인 대결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패배주의나 철수처럼 보인다고 반발할지 모른다. 정말 그럴까? 낙태 같은 중요 문제와 관련해 서구 그리스도인은 이 땅의 도성의 구성원으로서 자기의 권리를 선을 위한 운동에 여전히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나는 여기서 그리스도인에게 시민적 책임을 포기하기를 촉구하거나, 이 같은 책임을 추구하는 방법과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추구하는 방법을 전혀 결부시키지 않는 수동적 정적주의를 촉구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오히려 세상의 도구, 수사학, 무기를 사용해 문화 전쟁에 관여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방식이 아니라고 제안하는 것이다. 변증가들과 아우구스티누스가 수동적 정적주의자였다면, 기독교가 대단히 오랜 세월 동안 서구에서 어떻게 그토록 우세하게 되었는지는 설명하기 매우 어렵다. 역사적 증거는 오히려 변증가들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접근법이 시간이 지나면서 대단히 효과적인 것으로 드러났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아마 내 생전에나 우리 아이들의 생애에는 아니더라도 또다시 그렇게 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권자시며 장기전을 벌이는데, 하나님의 뜻은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이다.원제: 6 Ways Christians Can Respond to Our Strange New Worl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LGBTQ
동성애
성혁명
이상한신세계
통합적 문화관을 섞어서 적용하라
by 고상섭
2022-09-23
미로슬라브 볼프는 광장에 선 기독교에서 교회의 문화참여에 대해 두 개의 ‘아니요’(No)와 하나의 ‘예’(Yes)를 말한다.“첫째, 전적인 변혁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서는 ‘아니요’이다. 둘째, 문화에 적응하는 것에 대해서도 ‘아니요’이다. 셋째, 문화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서는 ‘예’이다.”볼프가 말하는 변혁과 적응이 아닌 ‘참여’라는 말은 문화를 지배하는 것(변혁)과 문화를 버리는 것(적응) 사이의 중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안에 머물면서 다르게 사는 삶”을 말한다. 즉 세상 문화와 분리되지 않으면서도 기독교적 삶을 통해 세상과 구별되는 삶을 통해 세상에 빛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센터처치, 493).사도 바울은 신약의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성도들이 세상 속에서 가지는 이중 정체성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엡 1:1)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성도의 정체성을 에베소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 말하면서도 또한 그리스도 안에 살고 있는 신자들이라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세상이라는 곳에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세상과 교회라는 두 영역을 어떻게 조화시키는 것이 문화에 참여하는 길일까? 팀 켈러는 세상과 교회의 네 가지 관계를 통해 우리가 세상 속에서 어떻게 문화참여를 해야 할지를 소개하고 있다. 1. 기독교 세계관은 하나의 모델이 아니다. 팀 켈러는 센터처치에서 세상과 교회의 관계를 네 가지 모델로 구분해서 설명하고 있다. 각 모델은 저마다 성경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지만, 모든 성경의 진리를 포함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목회자들이 자신의 교단이나 성격에 맞는 한 가지의 모델을 중심으로 세상과 소통하려 하기 때문이다. 네 가지 모델 각각의 장단점을 모두 이해할 때 비로소 세상과 올바른 소통을 이룰 수 있다.그러나 복음주의 기독교 안에서 통용되는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이름의 가르침은 네 모델 전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중 하나 ‘변혁주의 모델’을 기독교 세계관이라 지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올바른 세상과 소통을 위해서는 먼저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용어의 내용을 정의해야 한다. 기독교 세계관은 변혁주의 모델과 동의어가 아니다. 변혁주의는 기독교 세계관 중 하나의 모델일 뿐이다. 2. 각 모델은 모두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다.D. A. 카슨은 그리스도와 문화의 모델을 연구하고 나서 “모든 성경의 가르침을 아우르는 통시적이고 동시적인 지배 모델은 없다”라고 말했다. 즉 네 모델은 전부 성경적이지만, 성경 전부를 다 설명할 수 있는 모델은 아니라는 것이다. 각 모델은 그 나름의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다. 1) 변혁주의 모델변혁주의 모델(Transformation Model)은 한국의 복음주의권 교회에서 가장 많은 모델이며, 그리스도의 주재권이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되어야 한다고 믿고 열정적으로 사역하는 모델이다. 그러나 세계관이라는 지적인 개념에 너무 치우친 단점이 있고, 교회와 공동체가 배제된 개인의 비전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구호에 매몰되어 승리주의, 자기의(self-righteous), 그리고 과도한 확신으로 여러 가지 문제를 양산한다. 2) 적절성 모델변혁주의 모델과 마찬가지로 적절성 모델(Relevance Model) 안에도 서로 다른 그룹들이 혼재하고 있다. 이 모델의 장점은 일반은총을 극대화하는 공공선을 추구함으로 세상과 연결하는 다리를 놓는다. 그러나 공공선을 복음의 영역까지 확대하기 때문에 정치적 해방과 영혼 구원을 동일선상에 놓기도 한다. 복음이 분명하지 않은 교회들도 많기 때문에 NGO 단체와 교회의 차별성을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운 단점이 있다. 3) 반문화주의 모델반문화주의 모델(Counterculturalist Model)은 세상과 다른 구별된 대조 사회를 목표로 하기 때문에 교회의 순결을 우선순위에 둔다. 그러나 교회 밖의 문화 운동에 대해 부정적이기 때문에 제국과 권력, 자본주의 시장 등은 모두 사람들을 억압한다고 간주한다. 이런 관점은 정치와 비즈니스 세계에 참여하는 것을 억제하고, 주변 문화의 영향에 대해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4) 두 왕국 모델하나님이 전 세계를 통치하시지만 두 왕국을 별개의 방법으로 통치하신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두 왕국 모델(Two Kingdom Model)은 하나님은 세상을 일반은총을 따라 통치하시고 교회를 특별은총에 따라 통치하신다고 믿으며, 기독교적 방식으로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는 성도로 교회 밖에서는 건전한 시민으로 사는 삶을 강조한다. 그러나 일반은총의 타락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단점이 있고, 사회의 선은 모두 자연 계시로 생긴 것으로 판단한다. 또 중립적인 기초 위에서 신앙을 영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법률, 정부, 예술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이 필요하다는 것을 거부하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3. 계절에 맞게 각 영역의 장점을 섞어서 활용하라 도표의 가운데 있는 원은 각 모델의 중요한 키워드가 제공되어 있다. 그 키워드를 모두 섞어서 자신의 영역에 맞는 세상과 소통해야 한다. 우리말 역간 ‘센터처치’에는 그림 안에 따로 표기가 없지만, 원서에는 “blended Insights”라고 기록되어 있다. 각 모델의 장점을 섞어서 활용하라는 것이다.네 가지 모델은 모두 성경적이지만 모든 환경에 다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세상의 계절을 살펴보고 그 상황에 맞는 세계관을 추구해야 하고 그것을 상황화라고 말한다. 교회가 적대적일 때는 교회의 순결을 강조하는 반문화주의 모델이 적절해 보인다. 또 핍박을 받지만 성장하는 시기에는 변혁주의가 어울린다. 교회와 세상의 가치가 비슷한 시기에는 두 왕국모델이 필요하다. 교회가 매력을 잃어가는 시기에는 적절성 모델을 통해 공공선에 이바지함으로 문화를 회복할 필요가 있다. 계절 상황 적절한 모델 겨울 교회와 세상이 적대적일 뿐 아니라 교회가 매력이 없고 영적으로 약해진 시대 반문화주의 봄 교회가 핍박을 받지만 성장하고 있는 시기 변혁주의 여름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시기 두 왕국 가울 교회가 매력을 점점 읽어가는 시기 적절성어떤 모델이 좋은가를 따지는 것보다 더 필요한 것은 지금 우리 교회와 현실은 어느 시대에 와 있는지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을 살펴보고 거기에 맞는 모델들을 섞어서 활용하면 된다. 4. 자세와 몸짓을 가지라 팀 켈러는 네 가지 문화관 중 자신에게 익숙한 한 가지를 중심으로 하지만 나머지 세 가지 문화관을 활용하라고 권면한다. 자신에게 가장 익숙하고 편안한 하나의 모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각 계절에 맞춰 세 가지의 다른 문화관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앤디 클라우치는 이것을 자세(Posture)와 몸짓(Gesture)으로 설명했다. 문화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자세’라고 하고, 다른 모델로부터 나오는 즉흥적인 움직임을 ‘몸짓’으로 설명했다. 문화에 대한 하나의 입장은 움직이지 않는 자세이지만, 몇 가지 다른 모델들을 상황에 맞게 활용할 수 있는 것은 몸짓이다. 세상과 교회의 관계는 복잡하다. 그러나 각 세상 속에 흐르는 문화관을 분석하고, 그 문화에 맞는 교회의 모델들을 접목해 가는 상황화의 과정을 통해 복음은 더욱 세상 속에서 아름답게 역사하게 될 것이다. 네 가지 문화관을 모두 섞어서, 계절에 맞는 적절한 방법들을 생각해 낼 때 복음은 이 시대 속에서도 역동적으로 역사하게 될 것이다.
교회의사계
기독교세계관
변혁주의
반문화주의
두왕국
적절성
하나님이 내게 천국이 될 때
by Marshall Segal
2022-09-22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복음은 사람들을 천국으로 보내는 길이 아니다. 복음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길이다.사람들은 종종 인생의 중요한 순간을 “하나님께서 내 세계를 뒤집어놓으신 날”로 묘사한다. 생각지도 못한 어떤 경험과 대화, 또는 시련이 자기 자신과 삶, 인간관계, 주변 세계를 보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꾼다. 내 경우에는 대학교 2학년 때 하나님께서 내가 생각하던 천국을 뒤집어놓으셨다. 나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사랑이 많은 그리스도인 부모와 함께 자랐다. 그 사건이 생긴 그 시점 대학생이었던 나는 당시에도 분명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거의 매일 성경을 읽었고 기도를 빼먹지 않았다. 정통 교회에 열심히 출석했고, 내 주변에는 성숙하고 주를 닮으려는 그리스도인 친구들로 넘쳤다. 심지어 나는 고등학생에게 복음을 전하며 그들을 믿음으로 제자 삼는 사역에까지 관여하고 있었다. 그러던 즈음 어느 순간 한 사건이 생겼다. 그걸 한 문장으로 말하자면, 갑자기 복음이 전혀 새로운 의미로, 전혀 새로운 색채로, 그리고 새로운 강렬함과 기쁨으로 나를 휘감았다. 나를 복음 속으로 더 깊이 인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먼저 나를 만나셔야 했다. 그 만남은 실로 가장 달콤한 대면이자 가장 만족스러운 훈계였다. 내가 만난 문장은 나를 앉아있던 바로 그 자리에서 꼼짝 못 하게 했으며, 그 이후로도 결코 나를 떠나지 않았다.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보고 음미하는 것보다 다른 것을 더 귀하게 여기는 죄인을 용서하기 위해 죽지 않으셨다. 그리스도가 없는 천국에서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복음은 사람들을 천국으로 보내는 길이 아니다. 복음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길이다(존 파이퍼, 하나님이 복음이다, 47).우리 시대를 향한 질문복음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길이다. 복음은 나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길이다. 그것은 황폐함과 황홀함을 동시에 주는 희귀한 깨달음이다. 왜 황폐함이냐고? 복음을 만나기 전까지 우리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깨닫게 만들기 때문이다. 황홀함은? 한 번도 발을 디딘 적 없는 땅, 한 번도 항해한 적 없는 바다를 만나는 것 같고, 상상도 한 적 없는 기막힌 음식을 먹는 기쁨을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로 끝나지 않는다. 천국이 천국인 건 하나님이 거기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훌륭한 식사이다. 거칠고 경이로운 바다이다. 밭에 감춰 있는 보화이며 값진 진주이다(마 13:44-46). 존 파이퍼는 도무지 잊을 수 없는 놀라운 질문으로 하나님 자신이 얼마나 탁월한 선물인지를 강조한다. 우리 세대뿐 아니라 모든 세대를 가리지 않고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당신이 천국에 갔다고 치자. 병도 없고, 원하는 모든 친구가 옆에 있고, 매일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각종 여가 활동에 또 날마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자연의 아름다움, 맛볼 수 있는 모든 육체적 쾌락에 인간관계의 갈등이나 자연재해가 없는 천국, 거기서 지금 당신이 살고 있다고 치자. 그런데 단 하나, 그리스도께서 그곳에 없다면, 그런데도 거기가 당신에게는 천국인가? 여전히 당신은 만족할 수 있겠는가(하나님이 복음이다, 15)?당신은 어떤가? 나는 어떤가? 이건 내게 천국 자체를 뒤흔든 질문이었다. 나는 그리스도가 없는 천국에서도 만족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그러니까 영원히 갈망할 정도로 천국을 진정 가치있는 대상으로 만드는 게 그리스도라면, 나는 지금 왜 이 땅에서 그분을 더 알고 더 많이 누리기 위해 더 노력하지 않는가? 누가 천국인가? “복음은 사람들을 천국으로 보내는 길이 아니다. 복음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길이다.” 하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시는가? 그가 자신에 관해서 그리고 복음과 천국에 대해서 정말로 그렇게 말씀하시는가?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복음 속 가장 큰 선물임을 알았다. “나는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나는 율법에서 생기는 나 스스로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의 곧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에게서 오는 의를 얻으려고 합니다”(빌 3:7-9). 세상 모든 것을 능가하는 진정한 보물은 그를 아는 것, 그를 얻는 것, 그리고 그를 갖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가? 사도 베드로는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도 죄를 사하시려고 단 한 번 죽으셨습니다. 곧 의인이 불의한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육으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셔서 여러분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려는 것입니다”(벧전 3:18). 그분은 우리가 단지 용서받아 지옥의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가질 수 있도록 고난받고 피를 흘리며 죽으셨다. 죄가 가져다주는 최악의 결과는 유황불이 아니라 분리이다(살후 1:9). 여러 가지 이유로 지옥은 고통스럽고 비참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도 여전히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것이나(계 14:10), 그것은 은혜와 기쁨이 아니라 무서운 진노이다. 그들은 결코 하나님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구속받은 자들은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시편 43:4)라고 노래한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편 16:11). 기쁨과 즐거움이 단지 그분 옆 또는 주위에만 있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분 안에 기쁨이 있다. 그는 기쁨 그 자체이다. 그는 즐거움 그 자체이다. 그가 거하는 곳이 낙원이다. 우리가 사랑하고 갈망하는 다른 모든 것이 다 사라져도 그분만 계신다면, 그곳은 낙원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지금도 부분적으로 그의 임재를 경험한다. 그렇다. 우리 속에 남은 죄와 그 결과가 그의 임재를 방해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기쁨이 되실 때 우리는 지금도 진정한 기쁨을 맛볼 수 있다. 우리는 일상에서 지금도 쾌락, 영원한 쾌락을 음미한다. 그렇기에 시편 42편과 같은 기도를 드릴 수 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시 42:1-2). 구원이나 용서, 치유나 공급, 안도나 화해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주님을 갈망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하고 온전한 은사를 갈망하는 것도 아니다. 그 모든 은사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선물, 바로 하나님 그분을 갈망한다. 새 천국 속 진짜 천국천국을 기다리고 열망할 때, 우리 중 많은 사람이 요한계시록 21:4과 같은 약속에 매달린다.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더 이상의 눈물도, 더 이상의 죽음도, 더 이상의 애통과 울부짖음, 고통도 없다. 우리는 이런 모든 고통이 사라진 세상이 주는 달콤함, 그러니까 그림자가 아예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다.그러나 천국은 단지 안 좋은 것이 없는 곳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천국은 모든 것을 만족시키는 있음(presence)으로 정의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천국이 되실 때, 3절은 4절이 담고 있는 귀한 약속조차도 가려버린다.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이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 그 때에 나는 보좌에서 큰 음성이 울려 나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보아라,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 가운데 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21:1, 3)죄와 슬픔, 죽음이 없는 세상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일까? 하나님과 함께하는 세상이다. 그렇다. 그분은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그렇다. 그분은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시고 질병을 치료해 주실 것이다. 그렇다. 그분은 마침내 그 무서운 적, 죽음을 없애실 것이다. 그 모든 축복이 무한하게 크지만, 하나님을 소유하고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에 비하면, 그 모든 축복은 바다 옆 웅덩이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가 흘리는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다. 모든 암을 고치는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보잘것없는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무덤을 비우고 죽음을 전복시킬 수 있는 하나님이 우리 곁에서 영원히 우리를 지키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하실 수 있는 모든 일에 눈이 멀어 하나님 그분 자체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잊어버리는 실수를 하지 않도록 하자. 웅덩이에서 노는 데에 정신이 팔려 광활한 바다를 놓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면 안 된다. 하나님을 중심에 두지 않는 그 어떤 천국에도 만족해서는 안 된다. 원제: When God Became Heaven for Me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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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요한계시록
새하늘과새땅
우상타파
참된즐거움
가장큰은사
천국갈망
왜 그리스도인은 세상과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있는가?
기독교 세계관 운동 2.0을 위하여
by 김경호
2022-09-21
기독교 세계관 운동 2.0 위하여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SIEW)과 함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섭니다.요한일서 5:4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이 말씀의 요지는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능히 세상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일까요?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사무엘상 4:1-12에서 볼 수 있는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투입니다.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블레셋에게 패배했습니다. 그것도 두 번이나! 심지어 이스라엘은 언약궤를 빼앗기고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까지 죽임을 당했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일까요? 답은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짓 약속을 하셨거나! 아니면 우리의 믿음이 실제로 거짓이거나! 나의 고민은 오래전부터 ‘교회’였습니다. 나는 처음부터 신학교를 다니면서 교회에서만 일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나에게 교회이자 곧 세상이었습니다. 언젠가 책을 읽으면서 나와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사람은 오스 기니스였습니다. 기니스는 교회에 대한 생각을 솔직하게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지닌 수십 년에 걸쳐 예수님을 따라 사는 동안 그분을 아는 ‘기쁨’ 다음으로 내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은 오늘날 예수님의 제자라고 자칭하는 우리들의 상태를 보며 느낀 ‘슬픔’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마음 가운데 이런 이중적인 감정이 있을 것입니다.이 고민은 오랜 친구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항상 나를 따라다녔고 나를 괴롭혔습니다. 결국 나는 이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한 편의 설교를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고민의 시작이 사무엘상 4:1-12의 말씀이기에, 그 답도 이 본문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의 생각은 하나님이 틀리실 리는 없다는 것이었고, 그렇다면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기준의 문제’였습니다.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이스라엘이 두 번째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언약궤와 제사장을 동원했다는 사실이 그 기준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기준이 어디에 있느냐, 즉 하나님에게 있느냐 아니면 사람에게 있느냐에 따라 “절대적 신앙과 상대적 신앙”(혹은 “성숙한 신앙과 성숙하지 못한 신앙”)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내 생각의 결론은 기준을 하나님께 맞추는 신앙이 곧 절대적 신앙이고, 기준을 사람에게 맞추는 신앙이 곧 상대적 신앙이라고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상대적 신앙이란 모양-형식만 있고 내용-마음이 없는 신앙이라고, 자기 긍정-위선만 있고 자기 부정-회개는 없는 신앙이라고, 노력은 있지만 기도가 없는 신앙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또한 나는 이런 거짓된 믿음의 결과를 두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하나는 ‘처절한 패배’이고, 다른 하나는 ‘역할의 역전’입니다. 여기서 역할의 역전이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그 믿음의 기준을 하나님께 두지 못할 때 나타나는 역전 현상을 의미합니다. 이는 언약궤를 동원한 이스라엘보다 오히려 “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어라”라고 용기를 낸 블레셋이 이긴 현상을 의미합니다. 언약궤 대 용기! 결과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승리였습니다. 역할의 역전과 역-변혁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이런 현실이 오늘날에도 반복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데이비드 키네먼과 게이브 라이언은 나쁜 그리스도인에서 다음과 같이 질문합니다. “도대체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과 기독교에 대해 정확히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두 저자는 이 질문에 대한 3년간의 방대한 인터뷰와 조사를 통해 비-그리스도인의 생각 속에 담긴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정확하게 드러내었습니다.나는 두 저자가 6가지 주제로 한정한 주제 중에서 특별히 첫 번째 ‘위선적’과 두 번째 ‘전도에 지나치게 집중하는’과 여섯 번째 ‘타인을 판단하는’이라는 세 항목에 주목했습니다. ‘위선적’이라는 이미지는 통계에서 세 번째 순위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위선적이라는 이미지의 문제점은 위선 그 자체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터뷰의 결과에 의하면 비-그리스도인이나, 그리스도인이나 다 위선적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이 우리의 기준을 가지고 비-그리스도인들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실 우리는 위선적인 이미지를 자초했습니다.” 이것은 타인에 대한 판단으로 이어집니다. 키네먼과 라이언은 그리스도인이 ‘타인에 대한 판단’의 동기가 남을 돕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정죄하거나 우월감을 나타내려는 이미지임을 분석했습니다. 결국 이런 위선과 판단의 이미지는 매우 불쾌한 ‘전도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비-그리스도인은 전도자를 통해 자신이 진심 어린 관심을 받고 있다고 보지 못했고 마치 ‘목표물’이 된 것과 같이 느꼈으며, 전도에서 사용되는 대화는 일종의 “책략”과 같은 “대화 사기”로 여겼습니다. 리차드 마우는 이런 불쾌한 방식의 전도를 직접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온 한 남자가 상냥하게 말을 걸고 15분가량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전도자가 갑자기 주제를 종교로 바꾸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기 시작할 때, 마우는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밝혔습니다. 그러자 그 전도자는 “진작 그걸 얘기했어야지!”라고 내뱉고는 그 자리를 떠나 다른 상대를 물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불쾌한 전도를 체험한 마우는 자신에게 다가온 전도자의 “교양”은 하나의 ‘책략’에 불과했다고 말했습니다. 심지어 마우는 그 전도자의 손에 놀아났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고 술회했습니다. 그 이후에 마우는 무례한 기독교라는 책을 저술하여 전도의 수단으로서의 교양이 아니라 교양 그 자체의 가치—사랑—가 중요하다고 역설했습니다.그렇다면 비-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을 비윤리적인 위선자와 판단자로 생각하는 이 결과 이면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나는 이 문제가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세계관의 문제’임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무엇보다 행위 이전에 교회와 세상을 분리하는 이원론과 세속적 세계관의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올바른 세계관의 부재로 인해 그리스도인이 자기 스스로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비윤리적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비-그리스도인의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보다 더 뛰어난 이유를 일반은총으로 설명합니다. “비열함, 부정직, 그리고 불법을 저지르는 행위들에 대해 불신자들을 포함한 공공의 양심이 저항하지 않는가? 그리고 때때로 신자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불신자들이 실천하는 인류애와 자비로운 행위들이 많지 않는가?” 불신자의 공공의 양심, 인류애, 자비로운 행위는 타락에도 불구하고 죄를 억제하는 일반은총에 기인한 것입니다. 또한 카이퍼는 반정립(antithesis)을 통해 타락의 교리를 근거로, 신자의 비윤리적 행위는 신자 안에 남아 있는 죄의 영향력(반정립)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어떤 세계관을 가지느냐에 따라 그 실천의 방향이 결정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어떤 세계관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가는지를 알아야 합니다.이제 우리의 현실은 달라졌습니다. 과거에는 그리스도인(christian)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해 비-그리스도인(NON-christian)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역전되어 비-그리스도인이 우리를 향해 나쁜-그리스도인(UN-christian)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다시금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전투가 재현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처절한 패배”에 따라 “역할의 역전”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야콥 끌라베이크(Jocob Klapwijk)는 이것을 “역-변혁”(inverse transformation)이라고 말합니다. 역-변혁이란 내부에서부터 변혁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외부의 것을 무비판적으로 사용할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사용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무조건적인 수용이 아니라 비판적 수용을 통해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반대로, 비판적 수용이 아니라 무비판적인 수용을 통해 사용할 때 오히려 우리 자신이 세속화, 즉 역-변혁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하면서 애굽의 제물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초대교회 교부들은 이 사례를 “약탈” 개념으로 보았습니다. 이 약탈한 금과 은은 두 가지 용도로 사용됩니다. 하나는 금과 은을 무비판적으로 우상숭배에 사용한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금과 은을 비판적으로 하나님을 위한 예배와 성막 제작을 위해 사용한 경우입니다. 여기서 예배와 성막에 금과 은을 사용한 경우가 바로 올바른 사용 방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반성과 대화로부터 다시 시작! 과거 성경에서의 역-변혁과 현재의 역-변혁의 두 가지 사례는 우리에게 무척 뼈아픈 결과입니다. 따라서 세계관 운동을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먼저 반성과 대화입니다. 헤르만 도예베르트는 세계관의 해결점이 대화에 있다고 보았고, 이 대화는 표면적인 접촉이 아니라 심층적인 출발점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도예베르트는 무엇보다 “무조건적인 반박”보다 “신뢰를 추구하는 대화의 길”이 열려야 하며, “추상적인 탐구”가 아니라 “자기 검토의 길” 즉 반성으로부터 이루어지는 대화이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반정립적 대립을 우선으로 하는 세계관 운동에 대한 도예베르트의 일침은 뼈아픈 충고임이 틀림없습니다. 최용준은 이런 점에서 도예베르트의 반성을 따라 자신의 논문의 제목을 “대화와 반정립”(Dialogue and Antithesis)으로 명명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과거 기독교 세계관 운동에 대한 여러 가지 비판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판이 대화와 반성의 여지가 없는 주장이라면 세계관 운동은 지적인 차원에서만 머물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반성과 대화의 여지가 있는 표현으로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러기 위해 나는 A가 아니라 B(Not A But B)라는 방식의 표현보다는 A에서 B로(From A to B) 또는 A이기보다 B(B rather than A)로 표현하는 것이 반성과 대화에 더 적합한 표현 방식이라고 제안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무엇보다도 세계관을 “원리적-이론적 운동”에서 “삶의 변화와 실천”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표현하거나, 또는 “원리적-이론적 운동”이기보다 “삶의 변화와 실천”이라고 말하는 것이 반성과 대화의 여지가 있는 표현이라고 봅니다. 자! 이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2.0 버전을 위해, 반성과 대화로부터 다시 한번 시작해 봅시다!
세계관
기독교세계관
복음주의세계관
Unchristian
카이퍼
기독교 세계관 운동 2.0 위하여
by 복음과도시-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
2022-09-21
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SIEW)과 함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섭니다. 01. 왜 그리스도인은 세상과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있는가?02. 절제된 아름다움인가, 예술-공포증인가03.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회고와 반성, 그리고 도약04. 세 가지 유형의 기독교 세계관05. 이원론과 세속주의를 넘어 06. 세계관에서 예배로, 신념에서 실천으로, 표현에서 형성으로!07. 주일, 교회, 가정을 넘어 실천으로! 08. 모던과 포스트모던이 분리되지 않은 세계관을 위하여 09. ‘유신론/무신론 사용법’에서 ‘일반계시/특별계시 사용법’으로10. 그리스도인의 슬기로운 ‘K-드라마’ 문화생활11. 보이는 교회: 조직성과 유기체성 사이에서12. 다시 ‘보이는 교회’로13. K-드라마에서 ‘진리의 조각’ 찾기 14. 변혁, 세계관의 목표 15. 규범, 그 실천이 답이다16. 팀 켈러에 대한 ‘허수아비 공격’을 우려한다17. 하나님의 선물, ‘예술’이 우상이 될 때18. 역학, 세상의 다양성을 이해하는 창19. 성경적 창조의 관점‘들’(1)20. 마음의 명령에 뇌와 몸이 순종하기를21 하나님의 뜻 분별하기 22. 성경적 창조의 관점‘들’(2)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임금 인상을 요구해야 할까?
by Courtney Powell
2022-09-20
임금을 올려달라고 요구해도 괜찮을 때는 언제일까요?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성경적인 방법이 있습니까? 나는 16살 때에 동네에 있는 작은 안경점에서 처음으로 일을 시작했다. 그때 내 시급은 6.5달러였다. 당시에는 엄청 큰돈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시급을 올려달라고 요구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그저 기름값을 충당할 수 있는 돈을 벌 수 있음에 감사했다.그러나 나의 경력, 경험, 교육이 늘어나면서, 또한 기름값 외에도 내가 감당해야 하는 비용들이 늘어나면서 나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면서 나는 그리스도인이 임금 인상을 요구해도 괜찮은지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언제, 어떻게 임금 인상을 요구해야 할까?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경건한 삶에 필요한 모든 지혜(벧후 1:3)를 주신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모든 충만한 능력을 가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서 이처럼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가난 또는 풍요: 하나님께서 주신 재산잠언에는 단 하나의 기도만 등장하는데, 그것은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잠 30:7-9)라는 기도이다. 가난할 때나 부할 때 우리는 죄를 범하는 유혹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잠언의 기도는 이 둘 모두에 빠지지 않기를 구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잠언의 저자가 가난을 구하지도 않았고, 가난한 것이 경건한 삶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대신 그는 너무 가난하거나 너무 부유하지 않도록 일용할 양식을 구했다.하나님께서 주신 재산이라는 관점은 그분께서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샘 스톰스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의 모든 재산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재능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심에서 비롯되었다.”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고 인정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기도할 수 있다.풍요와 필요하나님께서 남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우리에게 딱 필요한 만큼만 정확하게 공급하시는 분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종종 바울처럼 이렇게 고백하고 싶을 것이다. “내가 궁핍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빌 4:11-12).바울의 가르침은 하나님께 모든 필요를 구하라는 것이었다(빌 4:6).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바울의 만족은 자신이 누군가의 돌봄을 받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되었다. 그러면서도 바울은 그에게 넉넉하게 주었던 교회에 대한 감사를 표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나는 모든 것을 받아서, 풍족하게 지내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빌 4:18).지금은 너무 부족한 것보다는 너무 많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 문제가 될 때가 많다. 세계가 극심한 가난에서 벗어나면서 이 문제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의 문제가 될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식탁에 충분한 음식과 옷장에 여러 벌의 옷을 넣어둘 수 있을 만큼 넉넉한 소득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임금 인상을 요구하면 안 되는가?마땅히 받아야 할 당신의 임금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세계 경제는 내핍의 경제를 넘어서서 점점 더 많은 부를 만들어내고 있다. 우리는 임금에 대한 성경의 원리를 여러 구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신 25:4).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눅 10:7; 마 10:10).그저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라면 임금을 올리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당신의 경험과 경력을 고려해보면 지금보다 더 많은 임금을 받는 것이 당신에게 마땅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임금 인상을 요구해야만 하는가? 다음에 제시되는 실제적인 문제들을 통하여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원리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 1. 인상을 요구하는 이유를 확인하라 당신은 자신의 왕국을 만들기 위하여서 인상을 요구하는가? 아니면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인상을 요구하는가? 당신은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고 인상을 요구하는가? 아니면 절대로 만족할 수 없는 욕망을 가지고 인상을 요구하는가?2. 당신이 일하고 있는 직장을 고려하라교회 사역이나 비영리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다른 직종에서 그들이 벌 수 있는 것보다 적은 임금을 받으면서 일을 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 그분을 위하여서 희생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독교 단체들도 노동자들에게 더 나은 임금을 제공할 수 있을 때도 있다. 지금 당신이 일하고 있는 근무지가 재정적으로는 어떻게 운영이 되고 있는가? 현재 재정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는가? 아니면 재정적으로 안정이 되어 있으며 노동자들에게 더 나은 대우를 제공할 수 있는가?3. 당신의 직급을 평가하라당신의 노동의 질과 조직에 기여하고 있는 바를 고려하여서 가능한 임금 인상을 평가하라. 일반적으로 조직에서 오랫동안 근무를 한 경험이 있다면 이는 당신의 가치를 더해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지금까지 조직이 운영되어온 과거의 역사와 노하우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항상 성실하게 주어진 노동을 감당하였는가? 더 많은 책임을 부여받았는가? 4. 한계를 정하라모든 직업은 명확한 근로계약서를 필요로 한다. 근로계약서의 세부적인 내용에 변경이 있다면, 그에 맞추어서 당신의 임금에 대한 재평가도 이루어져야 한다. 임금 인상이 없이 더 많은 일을 하는 것이 항상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당신이 지쳐서 쓰러지지 않도록 적절한 한계를 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당신의 조직이나 기업이 적절한 보상이 없이 더 많은 책임을 요구한다면 당신의 관리자에게 노동에 대한 기대를 적절한 수준으로 낮추어달라고 요구할 필요가 있다. 5. 현실을 고려하라당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반드시 기업에 임금 인상을 요구해야 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예를 들어서, 당신의 자녀가 자라고 있으며, 당신은 더 큰 집을 구매하였으며, 자녀를 기독교 학교에 보내고 싶다고 생각해보자. 이에 따른 경제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서 더 많은 임금을 기업에 요구하는 것은 현실적인 해결책은 아니다.대신, 당신이 직장에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라. 임금 인상은 당신이 더 많은 일, 더 가치 있는 일을 할 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의 삶에서 경제적인 필요의 변화가 임금 인상을 요구할 수 있는 이유라고 할 수는 없다.어떻게 요구할 것인가?당신의 고용주에게 협상의 조건으로 임금 인상을 요구하지는 말라. 또는 회사를 곤란하게 만드는 최후통첩과 같은 방식으로 임금 인상을 요구하지 말라. 당신의 노동의 가치가 당신이 받아야 할 임금 인상의 이유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라.당신의 임금 인상의 요구가 받아들여지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주님께 하듯이 계속해서 최선을 다하여 일하라. 사실 우리는 우리가 받는 임금 때문에 일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의 노동은 임금만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수단이다. 하나님을 의지하라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이는 우리의 필요와 우리가 하는 노동의 가치를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며 평가받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는 홀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기 위하여 주신 직업을 통하여서 임금을 받으면서 살아간다. 성경은 노동자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임금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동시에 우리의 필요를 항상 채우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갈 것을 가르친다. 이렇게 기도해보라. “하나님, 저의 필요를 모두 아시며, 제가 어떻게 일하는지 항상 보고 계심을 믿습니다. 저와 제 가족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실 것을 신뢰합니다. 저의 고용주가 저의 임금을 올려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저를 돌보시며 영광을 받으실 것을 확신합니다.” 원제: How Should a Christian Ask for a Rais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박광영
임금
임금인상
가난
노동
불황: 회개와 정화, 사랑과 나눔의 기회
교회 지도자를 위한 경제학
by Joe Carter
2022-09-19
교회 지도자를 위한 경제학교회 지도자들이 “그 성읍의 평안”(렘 29:7)을 제대로 구하려면 경제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경제가 우리 삶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교회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이해해야 한다. ‘교회 지도자를 위한 경제학’ 시리즈는 경제 신학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시리즈의 취지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경제에 대한 기본 지식을 제공하여 믿음의 공동체가 경제와 공공 정책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생각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려는 것이다. 용어 불황의미코로나 19 팬데믹이 초래한 경기 침체는 미국에서는 역사상 가장 깊었지만 가장 짧은 경기 침체였다. 최근 대유행 기간 경제위축이 2020년 2월부터 4월까지 단 두 달 동안 지속됐다고 결론 내린 미국 경제 연구소의 분석이다. 지난해 2분기 국내총생산(GDP)은 31.4퍼센트 감소했지만, 다음 분기에는 33.4퍼센트 증가하며 회복되었다.하지만 불황이란 정확히 무엇인가? 만약 당신이 일반인들에게 “불황”을 정의하라고 한다면, 그들은 경제가 “나쁜 상황”일 때라고 말할 것이다. (경제가 어떤 상황인지에 대해 그들이 가진 의견은 대체로 자신의 개인적인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금융 매체의 독자들에게 물어본다면, 그들은 경기 침체는 실질 GDP의 2분기 연속 하락이란 좀 더 구체적인 정의를 내릴 것이다.이 정의들은 그 어느 것도 정확하지는 않다. 미국에서 비즈니스 회전 주기를 분별할 수 있는 기관으로 검증된 곳은 독립적이고 비영리적 연구 기관인 NBER(National Bureau of Economic Research; 미국 경제 연구소)의 ‘경기 순환 측정위원회’이다. NBER는 경기 침체를 경제 전반에 걸쳐 확산하는 경제 활동의 현저한 감소가 있는 기간으로 더욱 광범위하게 정의한다.경제(일명 GDP)는 경제 확장으로 알려진 경제 활동이 증가하는 기간과 불황으로 알려진 경제 활동이 감소하는 기간을 반복한다. 이를 비즈니스 사이클이라고 하며 확장, 정점, 감소 및 바닥의 네 단계를 포함한다. 확장은 바닥과 정점 사이의 기간이고, 쇠퇴는 정점과 바닥 사이의 기간이다.불경기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경제 쇠퇴기에는 흔히 여러 종류의 악영향을 유발한다. 예를 들어, 사업에 대한 투자가 둔화할 때, 고용률이 감소하고 실업이 증가한다. 기업가들은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소규모 사업체들 역시 감소할 것이다. 미래에 대한 걱정은 소비자들의 상품과 서비스(자동차와 같은)에 대한 수요를 감소시킨다. 주택 수요 부족은 집값 하락을 불러와 경제의 활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불경기가 짧더라도 개인의 기회와 재정에 미치는 영향은 수십 년, 심지어 평생 지속될 수 있다.불황의 원인은 무엇인가?많은 경제학자는 불경기가 불가피한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지난 70년 동안의 경험적 증거는 불황이 단순히 긴 확장 기간이 있었다고 해서 더 가능성이 커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재닛 옐런 연방준비제도 의장은 “경제 확장이 시간이 오래돼서 사라진다는 것은 신화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그러나 확장이 오래 지속될수록 좋지 않은 상황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확장은 사람과 같다. 경기 침체를 유발할 수 있는 상황의 몇 가지 예는 다음과 같다.과열—과열된 경제는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여 완전 고용과 국가 자원의 최대 용량을 초과하는 경우이다.자산 거품—자산 거품은 주택이나 주식과 같은 자산의 가격이 지속 가능한 가치를 초과하여 다투어 가격이 상승할 때 발생한다. 지식이 부족한 투자자들은 가격이 오르는 것을 보고 자산을 사들이고 그것들이 무한정 지속될 것이라고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가격이 내려가게 되면 그것은 사람들의 부를 쓸어버릴 수 있다. 금세기 두 번의 불경기는 대부분 자산 거품 때문이었다. 2000년대 초반의 불황은 종종 닷컴 버블에 의해, 그리고 2007년부터 시작된 불황은 주택 버블이 그 원인으로 여겨진다.경제적 충격—경제적 “충격”은 경제를 붕괴시킬 수 있는 예상치 못한 외부 사건을 말한다. 대표적인 예로는 1956-57년 수에즈 위기, 1973-74년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석유 금수 조치, 1978-79년 이란 혁명 등의 사건들로 인해 유가가 치솟았던 석유 파동이 있다. 널리 사용되는 자원의 공급 지장은 국가 전체의 경제 활동을 약화하는 파급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정부 정책—시장이나 통화 공급에 대한 정부의 개입은 종종 경기 침체의 원인으로 지목된다.중요한 이유불경기가 불가피한 것은 아니더라도 그리스도인은 이에 대비하고 있어야 할 정도로 빈번하게 발생한다.개인적인 차원에서, 우리는 우리가 분수에 넘치는 삶을 살고 있거나 우리의 부를 하나의 자산(즉, 우리가 소유한 부동산 등)에 너무 많이 투자하고 있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우리는 또한 예상치 못한 침체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다음 해의 불경기가 우리 자신이나 우리 아이들을 위한 교육의 선택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고려해 볼 수 있다.불경기는 또한 교회와 교회 구성원들에게 영적으로도 영향을 미친다. 짧은 경기 침체에도 실업률이 증가하는 시기가 나타나는데, 이는 그 자체가 영적인 문제와 결부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기부가 줄어들게 하고 긴축하게 하여 교회가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줄일 수밖에 없도록 만들며, 이것은 지역 경제의 문제를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목사이자 신학자인 존 파이퍼가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의 성장을 위해 침체를 이용하실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한 가지 방법은 그것이 우리의 숨겨진 죄를 드러내는 도구가 될 수 있고, 그래서 우리를 회개와 정화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방법은 교회가 상처받은 성도들을 보살피고 사랑을 나눔으로써 성장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기타 세부 사항• NBER는 1850년대 중반 이후 미국의 경기 침체를 33차례 확인했고, 8차례는 지난 50년 사이에 발생했다.• 평균적으로, 불경기는 약 10개월에서 18개월 정도 지속되는 경향이 있다. 1854년부터 1919년까지 평균 불황은 22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불황은 평균 18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1945년부터 2001년까지 불황은 평균 10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2007-09년의 불황은 18개월밖에 지속되지 않았는데, 이는 대공황 기간(43개월)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공황에 대한 표준적인 정의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불황의 더 심각한 버전으로 정의된다.원제: Economics for Church Leaders: Understanding Recessions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장명근
불황
경제회복
경기침체
경기순환
과열
자산거품
경제적충격
정부정책
불경기
공황
위로를 받으라, 작은 자여
by Joe Rigney
2022-09-18
세상 모든 어려움을 다 지고 간다는 생각을 한 적 있는가? 삶이 주는 책임과 의무, 참을 수 없을 것 같은 잔혹한 현실이 주는 무게에 짓눌린 적 있는가? “세상의 무게”는 어쩌면 당신의 소명, 즉 당신이 인생에서 짊어지고 가야 하는 소명을 가리킬 수도 있다. 따라서 소명에 대한 압박감에 짓눌릴 수 있다. 하루의 시간은 충분하지 않다. 사용 가능한 자원도 충분하지 않다. 저기 수평선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실패할 가능성은 엄연한 현실이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가 있고,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에 무너질 거 같다고 느낄 수도 있다. “세상의 무게”는 가족이 짊어지고 가는 짐을 가리킬 수도 있다. 부모라면 자녀 양육, 그리고 자녀의 영혼을 형성하고 성장시켜야 한다는 책임이 주는 막중함을 느끼기 마련이다. 누구나 자녀가 잘되기를 바란다. 자녀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다 주고 싶어 한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금 한계를 느낀다. 무엇보다 우리가 자녀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다. 모든 위험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할 수도 없다. 우리는 전지전능하지도 않고 또 무오하지도 않다.때로 “세상의 무게”는 단순히 존재와 현실이 주는 무거움 그 자체이기도 하다. 우리는 죽는 존재이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우리는 죽음이 자명한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우리 앞에는 내세가 놓여 있다. 천국과 지옥은 실재하며, 우리가 아는 모든 사람은 영원한 기쁨 또는 영원한 불행을 향해서, 그러니까 어느 한쪽을 향해서 지금도 하루하루 다가가고 있다. C. S. 루이스는 그의 설교집 영광의 무게에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실존의 부담을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탁월한 방식으로 표현했다.누구나 장래에 만날 잠재적인 영광에 대해 지나치게 많이 생각하는 게 가능하다. 그러나 내 이웃이 미래에 만날 영광에 관해서 내 일처럼 자주 또는 깊이 생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내 이웃에게 주어질 영광의 짐 또는 무게가 내 등에 지워져야 한다. 이웃에게 주어질 영광은 너무도 크고 무겁기에 오로지 겸손한 자만이 지고 갈 수 있다. 교만한 자의 등은 결코 질 수 없는 짐이다. 바로 등이 부러질 것이다. (45)겸손한 자만이 짊어질 수 있는 너무나 무거운 짐,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무엇보다 우리가 직면한 직업의 짐, 가족의 짐, 실존의 짐을 짊어지는 데 꼭 필요한 겸손을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무겁고 커가는 짐삶의 짐이 특히 무겁게 느껴질 때면, 나는 루이스의 소설 페렐란드라의 몇 문장을 떠올린다. 공상과학 소설에서 위안을 찾는 게 이상할 수도 있지만, 루이스는 이야기 속에 진실과 위안을 동시에 심어주는 데 있어서 실로 대가이다. 이 소설은 루이스의 ‘우주’ 3부작의 제2권으로, 영웅 엘윈 랜섬이 재난을 피하기 위해 페렐란드라 행성으로 여행을 떠나는 내용이다. 이 소설은 창세기 3장의 유혹 이야기를 변형한 것이다. 페렐란드라의 여왕은 악마의 힘에 사로잡힌 지상의 인간, 언맨에게 유혹을 받는다. 언맨은 여왕을 그리스도(소설에서는 말렐딜이라고 부름)에 대한 불순종으로 이끌고, 그녀의 상상력을 자극함으로 말렐딜의 법칙에 반역하도록 하는 비극적인 결과를 끌어낸다. 이 유혹 이야기에서 다른 점은 랜섬이라는 존재이다. 랜섬은 단순한 목격자가 아니라 참여자로서 페렐란드라에 있다. 그는 거침없는 제삼자이며, 언맨의 거짓말과 속임수에도 불구하고 여왕의 순수함과 의로움을 지켜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낀다. 며칠 동안 그는 언맨과 논쟁을 벌이고 진실을 무기로 그의 거짓말과 속임수를 반박하지만, 결과는 다시 진실이 왜곡되고 거짓(the Lie)이 섬김을 받는 현실이다. 거짓으로 인해 여왕의 상상력이 흐려지고 결심이 약해지는 것을 보면서 랜섬의 부담은 점점 더 커진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랜섬은 말렐딜을 만나고 새롭게 깨닫는다. 논쟁을 통해 언맨으로 하여금 순종으로 이끄는 대신 물리적 전투를 벌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언맨과 싸움으로써 악마가 소유했을 뿐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는 페렐란드라의 유일한 닻인 몸을 죽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위로를 받으라, 작은 자여’페렐란드라의 미래에 대한 부담이 중년이 된 그의 어깨에 얹혀 있는 상태에서, 랜섬은 이에 굴복한다. 그는 언맨을 공격하여 부상을 입히고 바다를 가로질러까지 그를 추격하지만, 두 사람은 파도에 휩쓸려 해안가 동굴에 던져진다. 결국 랜섬은 언맨을 죽이지만, 그건 실로 엄청난 환난을 겪고 난 이후이다. 전투로 인해서 그는 발꿈치에 부상을 입었고, 산 아래로까지 내려가야만 했고 또한 빛 속으로 들어오기 위해 또 한 번의 길고 힘든 등반을 견뎌내야만 했다. 여행을 마친 랜섬은 거대한 산자락에서 말렐딜을 섬기는 천사의 힘을 가진 두 명의 엘딜라와 이야기를 나눈다. 대화 중에 화성을 지배하는 엘딜라인 말라칸드라는 랜섬에게 “세계가 오늘 탄생했다”라고 알려준다. 여왕과 페렐란드라의 왕은 시험을 통과했다. 결과는 이것이다. “오늘 처음으로 저 아래 세계의 두 생물, 짐승처럼 숨을 쉬고 번식하는 말렐딜의 두 형상이 네 부모가 넘어진 그 계단을 올라서서 원래 앉아야 할 왕좌에 앉았다”(169).이 말을 들은 랜섬은 땅에 쓰러진다. 그가 짊어진 무게가 너무 커서 그 짐에 압도되었기 때문이다. 단지 책임뿐만 아니라 분명히 성공에 대한 부담도 있었을 것이다. 바로 이때, 그러니까 세상의 무게에 쓰러질 거 같은 바로 그때 천사의 힘을 가진 존재가 하는 말이 내게 위로가 되었다. “위로를 받으라.” 말라칸드라가 말했다. “네가 하는 일이 아니다. 당신은 위대하지 않지만 깊은 하늘이 놀랄 정도로 엄청난 일을 너는 막을 수 있었다. 작은 자여, 당신의 작음 속에서 위로를 받으라. 그는 당신에게 어떤 가치도 부여하지 않는다. 그냥 받고 기뻐하라. 네 어깨가 이 세상을 다 짊어져야 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지 말라. 바라보라! 세상은 당신의 머리 아래에 있고, 당신을 움직이고 있다”(169).작음이 주는 큰 위로바로 여기에 루이스가 제공하는 편안함의 역설이 있다. 한편으로 랜섬은 책임이 있다. 언맨과 싸워야 하는 부담은 오로지 그에게만 달려 있었다. 소명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후퇴하는 것은 순전히 그에 달렸다. 그럼에도 임무를 완수한 후, 바로 승리의 순간에 그는 이렇게 분명하게 말한다. “네가 하는 일이 아니다. … 그는 당신에게 아무런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여기에서 제공하는 편안함은 작음의 편안함이다. 루이스는 그것을 랜섬에게만 아니라 독자에게도 제공한다. 랜섬은 위대하지 않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다 선물이므로, 마땅히 받고 기뻐해야 한다. 우리의 작음에 안식하며, 두려움에서 구출되어 우리 어깨가 세상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영광의 무게에 꺾이지 않도록 하는 겸손이다. 소망으로 짐을 지라 작디작은 우리의 존재를 위로해 주는 사람은 루이스만이 아니다. 다윗 왕도 시편 131편에서 같은 위로를 제공한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시 131:1). 겸손하게 다윗은 세상의 무게를 감당하길 거부한다. 대신 그는 자신의 작음에서 위안을 받는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시 131:2).세상의 무게를 감당하려는 젖 뗀 아이는 없다. 젖 뗀 아이는 엄마 품에 안겨서 만족한다. 아이는 또한 공로를 구하지도 않는다. 결코 과대망상 아래에서 바둥거리며 노력하지 않는다. 아이는 단순한 기쁨으로 자신의 작음을 포용한다. 지도력, 가르침, 목회, 양육, 그리고 존재의 무게가 나를 짓누른다고 느낄 때, 나는 다윗처럼 내 영혼을 진정시키고 고요하게 하려고 노력한다. 나에게는 너무 수준 높은 고상한 생각 앞에서, 격렬한 열정과 감정의 이빨 속에서, 그리고 현실의 무게 아래서, 나는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작은 자여, 너의 작음 속에서 위로를 받으라. 그는 너에게서 아무런 공로를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세상의 무게는 너의 것이 아니다. 이미 다른 누군가가, 피 묻은 그의 어깨로 그 짐을 짊어졌다. 오로지 그분만이 짊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는 골고다까지, 무덤 속으로, 그리고 스올에 이르기까지 그 짐을 지셨고 다시 부활의 빛으로 나가셨다. 겁먹지 마라, 작은 자여, 젖 뗀 아이와 같이, 그리고 주님을 영원히 소망하는 자 같이, 겸손하게 네게 주어진 짐을 져라.원제: Be Comforted in Your Smallness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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