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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를 신앙의 섬으로 만든 시루뫼 공동체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강화교산교회
by 이종전 · 장명근
2022-10-15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대한 강토에 선 첫 세대 교회들을 찾아 떠납니다. 그 이야기들에서 우리 신앙의 근원과 원형을 찾아보려 합니다.조선을 넘보는 제국주의 열강이 조정을 향해 오다가 맞닥뜨리는 곳, 그곳은 강화도이다. 조선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할 강화도, 이 섬은 조선 정부의 최전(最前)의 보루였다. 이 길목을 지키고 있는 조선군을 넘지 못하고서는 조선의 심부(深部)로 향할 수 없었기에 미국의 함선도, 프랑스의 함선도 강화도에 주둔하고 있는 조선군과 결전을 벌여야만 했다. 프랑스가 침략한 병인양요(1866)도, 미국이 도발한 신미양요(1871)도 모두 강화도가 그 치열한 전장이 되었다. 그리하여 강화 도민들에게 양인은 모두 오랑캐로 각인되었다. 하지만 조선은 이미 더 이상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두 양요를 통해서 확인하게 되면서 조미통상수호조약(1882)과 조영통상조약(1883)을 체결하면서 문호를 개방해야만 했다. 이듬해인 1884년 알렌 선교사를 필두로 양인 선교사들이 연이어 들어오게 되었다. 하지만 조선인들의 의식에는 서양 오랑캐로 각인되었기에 선교사들이 들어왔어도 그들의 여정은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강화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1893년에 처음 찾아와 문을 두드렸던 존스 선교사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1893년이면 이미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고 여행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된 시점이지만, 그래도 강화도 입도(入島)는 불가능했다. 강화유수와 도민들이 양인들이 섬에 들어오는 것 자체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음의 은혜를 깨달은 강화도 출신의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승환이 그였다. 조선이 문호를 개방하자마자, 그는 일거리를 찾아서 인천으로 나왔다. 인천에서 새로운 세상 물정을 경험하였고, 인천 번화가에서 주점을 열어 큰돈도 벌었다. 그렇게 벌어들인 돈을 어떻게 하면 더 불릴까 궁리하다가 선교사가 시작한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돈을 불리기 위해서 교회에 나갔지만, 오히려 교회에서 곗돈을 잃게 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렇게 돈은 잃었지만, 그는 교회에서 존스 선교사를 만났고, 이 선교사를 통해서 복음을 들었으며, 구원의 은혜에 동참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세례를 받는 것은 한사코 거부했다. 자신이 주점을 하고 있다는 것이 이유였고, 고향에 계신 어머니는 하나님을 모르는데 혼자만 구원받는다는 것이 죄스럽다는 것이 또 하나의 이유였다. 결국 이승환은 어머니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과 세례를 받게 하는 것이 최종 목표가 되었다. 이승환은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주점을 처분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복음을 전해서 예수님을 믿게 했다. 하지만 세례를 받게 할 길이 없었다. 하여, 이승환은 내리교회를 중심으로 인천과 황해도 지방의 선교를 책임지고 있는 존스 선교사에게 어머니의 세례를 요청했다. 하지만 강화도에는 양인이 들어갈 수 없었다. 이승환은 어머니를 향한 애틋함과 구원에 대한 열망은 포기할 수 없었다. 결국 존스 선교사를 전세 낸 배에 태우고 고향마을인 시루뫼(甑山)로 향했다. 하지만 향리에는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토호인 초시 김상임이 있었다. 그는 결코 자기 마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고 단호하게 소리쳤다. 당시 김상임은 벼슬에 나가지 않고 지방의 유생들과 함께 사실상 어른 노릇을 하면서 학동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게다가 시루뫼 마을 대부분이 그의 땅이기에 마을에서 그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하는 수 없이 이승환은 묘책을 생각해 냈다. 존스 선교사를 태운 배를 마을에서는 보이지 않는 앞산 너머 갯벌에 정박해 놓고 마을로 들어와 물때를 기다려 밤이 깊었을 때 어머니를 모시고 앞산을 넘었다. 그리고 바닷가에 이르렀을 어머니를 등에 업고 멀리 갯벌에 정박한 배로 향했다. 쉽지 않은 발걸음이다. 혼자 걷기도 어려운 갯벌을 어머니를 등에 업은 채 걷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승환의 열정은 기어코 어머니를 뱃전에 앉혔다.존스 선교사는 뱃머리에 선 채 멀리 어머니를 업고 배를 향해 다가오는 이승환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비록 입도는 할 수 없었지만, 이승환의 모습을 보면서 훗날 한국 교회의 모습을 보지 않았을까? 당장은 외세와 양인들을 배척하지만, 복음에 담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었을 때 한국 교회는 분명 그 은혜를 담아내는 교회가 될 것을 확인하고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 자리에서 자신이 거기에 있어야 하는 이유를 간절한 마음으로 확인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복음으로 변화된 사람이 그 복음에 담긴 영원한 소망을 보았기에 혼자만 그 소망의 길을 갈 수 없어 어머니를 등에 업고 갯벌을 걷고 있는 이승환의 모습에서 존스 선교사는 분명 한국인과 한국 교회의 미래를 보았을 것이다.마침내 뱃전에 앉은 이승환의 어머니는 문답을 거쳐 어렴풋한 달빛 아래에서 선상 세례를 받았다. 존스 선교사의 평생 사역에서 시루뫼 마을 앞 갯벌에서 행한 세례식만큼이나 극적인 순간이 또 있었을까? 이것은 강화도 최초의 세례식이었으며, 오늘의 강화도가 복음의 섬이 되는 시작이었다. 존스 선교사는 이승환과 그의 어머니가 함께한 선상 세례를 시점으로 강화도 복음화를 위한 신호탄이 될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것은 존스의 능력도, 이승환의 효심 때문도 아닌 성령님의 역사가 드러난 것이리라. 철저하게 양인들을 배척하는 땅 강화도, 그중에서도 가장 소외된 북쪽의 한 촌락 시루뫼에 복음의 씨앗이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시루뫼에서 시작된 복음 전파는 동과 서로 강화도 해안도로를 따라서 전역을 퍼져나갔고, 강화도는 복음의 섬이 되었다. 그렇게 시루뫼에 믿음의 씨앗이 떨어진 다음에도 걱정은 이어졌다. 예배를 할 수 있어야 했지만, 마을에는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승환은 묘책을 찾아야 했다. 당장 선교사들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니 인천 내리교회를 중심으로 존스와 함께 사역하고 있던 전도부인 이명숙과 백헬렌을 이 마을로 오게 해서 어머니의 신앙을 양육하면서 마을에 복음을 전하게 했다. 그렇게 한 사람, 두 사람이 더해지고 예배하는 공동체로 발전했다. 또한 선교사 입도를 결사반대했던 초시 영감 김상임도 존스 선교사를 만나면서 개종하게 되었고 끝내는 시루뫼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었다. 존스 선교사는 김상임을 인천 우각동에서 자신이 처음으로 개설한 신학회에 참석하게 하여, 훗날 시루뫼 공동체의 전도사가 되어 평생을 이 공동체를 섬기게 했다. 그렇게 세워진 것이 시루뫼의 역사를 잇고 있는 교산(橋山)교회이다. 시루뫼에서 시작한 작은 공동체는 강화도의 모교회가 되어 200여 교회와 강화도를 신앙의 섬으로 만드는 산파 역할을 했다.예배당 이야기교산교회는 선교 초기인 1896년에는 초가를 한 채 매입해서 예배 처소로 사용하다가 1915년에 처음으로 초가 예배당을 지었다. 이때 지은 예배당에서 시루뫼 공동체는 일제 강점기까지 이겨내고 해방을 맞았다. 6.25사변이 휴전을 맞으면서 강화도 지역의 교회를 재건하기 위한 원조가 감리교 본부로부터 전달되면서 새로운 예배당을 마련해야겠다는 의지가 낙후된 지역인 이곳에서도 예배당을 짓기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1958년 4월 현재 역사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예배당을 짓기 시작했다. 30평 규모의 석조 예배당이다. 해방 이후에 지어진 예배당들이 주로 석조건물인 것을 생각하면 시대적 특징을 잘 간직한 건물이기도 하다.이 예배당이 지어지기까지는 큰 희생이 있었다. 김봉일 성도의 딸이며 김예기 목사의 어머니인 김리브가 권사가 옥답 1,000여 평을 팔아서 건축헌금으로 드렸고, 김용기 탁사부장은 예배당 터를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가능했다. 또한 예배당 완공과 함께 문순만 권사가 부흥회를 통해서 온 가족이 인가귀도(引家歸道) 됨을 기뻐하면서 풍금 한 대를 헌물로 드렸다. 이때까지 이 교회에는 풍금이 없었다는 사실을 전제할 때 온 교회에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봉헌감사 예배를 1962년 2월 20일에 드렸다. 그리고 이 건물은 현재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있는 110주년 존스기념예배당이 2003년 봉헌할 때까지 사용되었다.
강화교산교회
시루뫼공동체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by 복음과도시
2022-10-15
대한 강토에 선 첫 세대 교회들을 찾아 떠납니다. 그 이야기들에서 우리 신앙의 근원과 원형을 찾아보려 합니다.조선 유교의 중심을 흔들다안동교회형과 아우, 아버지와 아들이 지켜낸 교회여수 장천교회선교사의 희생이 맺은 열매순천중앙교회“목포에 복음의 씨가 뿌려진 맨 처음 터”목포양동교회호남 선교, 태동하다군산구암교회전주를 깨운 종(鐘)전주서문교회내륙 선교의 길목을 트다춘천중앙교회무심천변 아픈 역사는 비(碑)가 되어청주제일교회역사와 지리의 단절을 견뎌내다철원제일교회작고 외진 교회, 복음과 계몽의 첨병 되다무지내교회서해의 복음 등대백령도 중화동교회성도들의 귀감으로 세운 충청권 선교의 교두보공주제일교회민족 지도자의 산실로 서다새문안교회 아름답다, 고도孤島의 예배당서도중앙교회 근대사를 품다승동교회“눈 덮인 작은 예배당”정동제일교회 강화를 신앙의 섬으로 만든 시루뫼 공동체강화교산교회
자연법과 몸의 신학을 회복하자
이상한 신세계: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by Carl Trueman
2022-10-14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세상이 변했다. 자아성(selfhood)에 대한 새로운 관념이 그리스도인들의 관점에 도전하고 있으며, 이러한 새로운 현실에 도전한다는 것이 위험스러운 세상이 되어버렸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도덕적 양식에 따르면 동성 결혼에 반대하는 것은 인종차별주의자가 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스도인이 일반 세계의 광범위한 신념에 동의하지 않아도 전체 사회의 어엿한 구성원으로 존경받을 수 있던 시대는 이미 종말을 고한 것은 아니어도 저물어 가는 중이다. 기독교가 형성한 사회적 상상의 마지막 자취가 급속히 사라지고 있는 것은 사실인데, 우리 중에 많은 사람은 심지어 지금 이상한 신세계에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처지다. 자아성 혁명은 구체적으로 성혁명의 다양한 국면에 나타나듯이 유치원 교육부터 직장 내 대명서 사용 정책[직장 내에서 성별을 구별하는 대명사를 사용할지 말지 같은 정책]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두의 삶에 압력을 가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말하자면 아직은 이런 일을 피하면서 당분간 살아갈 수 있겠지만 영원히 숨을 수는 없다. 조만간 우리는 모두 현대적 자아성의 관념이 만들어 낸 도전적 상황과 마주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의 문제, 순응하라는 압력에 직면할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우리 모두에게 갈수록 시급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신세계에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여기 여섯 가지 대응 방안이 있다. 복음과도시 편집자 주_ 이 글은 칼 트루먼, (신좌파 성혁명과 LGBTQ+운동이 만든) 이상한 신세계의 제9장을 부흥사개혁사의 허락을 받아 간추린 것으로, TGC의 “6 Ways Christians Can Respond to Our Strange New World”를 참고하여 편집하였다. “신좌파 성혁명과 LGBTQ+운동이 만든 이상한 신세계”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갈 것이며 또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지, 여섯 가지 방안을 6회에 걸쳐서 싣는다. 1. 이 시대에 우리도 가담했음을 인식하자2. 고대 교회에서 배우자3. 하나님의 경륜 전체를 가르치자4. 성경적 예배를 통해 직관을 형성하자5. 자연법과 몸의 신학을 회복하자6. 현실적 소망 안에서 살아가자교회는 또한 자연법과 몸의 신학도 회복해야 한다. 로마가톨릭교 신자는 자연법과 관련된 오랜 전통이 있는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경우는 몸의 신학과 관련해 탁월한 스승이었다. 개신교는 종교개혁 당시에 자연법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으나 이런 이해는 지난 2세기 사이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그러면 자연법은 무엇일까? 간단히 말하면, 자연법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단순히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재료’가 아니라 그 자체에 도덕 체계가 있다는 개념이다. 특히 우리의 몸은 심오한 의미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통해 다른 사람과 연결된다. 우리는 우리의 몸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의존한다. 우리 몸은 우리가 우연히 깃들이고 생기를 불어넣는 그릇이 아니다. 우리 몸은 심오하고 중대한 방식으로 우리의 정체성과 우리 자신에게 필수적이다. 몸에는 강점과 약점이 있고 개인마다 차이가 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모두 많은 점을 공유한다. 이것은 인간(인체)이 어떤 면에서는 번성하도록 만들어졌고 다른 면에서는 그렇지 않음을 의미한다.우리는 모두 기술적이고 도덕적으로 중립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방식으로 이것을 이해한다. 나는 번창하기를 기대하면서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 올라가 꼭대기에서 뛰어내릴 수 없다. 나는 자기 힘으로 날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내 신체 구조는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에 제한을 둔다. 자연법은 이 개념을 도덕의 영역으로 확장한다. 그래서 가령 신생아가 엄마에게 의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데, 최선을 다해 자녀를 보호하고 양육하는 엄마의 의무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따라서 엄마가 자녀를 숲에 버려 들짐승의 먹이가 되게 하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다. 또는 우리가 생명을 타고난 선으로 상정한다면, 다른 사람이 이 생명을 끝장내는 것은 잘못된 일이요 자연에 반하는 조처이므로 살인은 잘못이다.자연법 개념은 성과 정체성과 관련하여 분명히 도움이 된다. 지나치게 노골적이기를 바라지 않으면, 남성과 여성의 몸은 어떤 면에서는 성적으로 알맞게 만들어졌으나 다른 면에서는 그렇지 않다. 남성의 몸은 정말로 다른 남성의 몸과 성적으로 알맞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거의 모든 사람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출생 시에 남성이나 여성으로 분류하는 몸을 갖고 태어난다. 남성과 여성의 몸은 다른 능력이 있고 특정한 다른 기능을 수행한다. 각각의 경우에 인간을 번영으로 이끌 행동이 무엇이고 그렇지 않은 행동이 무엇인지의 경계를 자연(또는 자연법)이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이에 대한 한 가지 반응은 인간의 죄가 이런 주장이 더 넓은 세계에 어떤 설득력도 없을 것임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동성애 행위가 에이즈나 암의 위험을 높이는가? 아마 세상은 관련 의학 연구에 돈을 투자함으로써 대응할 것이며, 문제를 제거하거나 완화하는 약물과 치료법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자신이 잘못된 몸으로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수술과 호르몬 치료는 심리적 확신을 물리적 현실로 만들기 위해 이용될 수 있다. 각각의 경우에 가정은 자연이 단순히 ‘재료’일 뿐이어서, 우리가 원하는 일을 하거나 원하는 대상이 되는 일을 방해할 때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이런 반대는 중요하다. 세계가 하나님께 반역하는 상태며 자기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외부 권위에 대한 모든 호소는 조롱이나 거부에 부딪힐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내가 자연법과 몸의 신학에 대한 반성을 권고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가 아니다. 자연법과 몸의 신학은 세상에 대처하기 위한 변증학 도구라기보다(물론 많은 사람이 인정하는 것보다 더 유용할 수도 있다), 교회 자체 안에서 설득력 있는 교육 전략의 중요 부분이다.동성애가 옳은지 아닌지를 두고 씨름하는 젊은 신자를 예로 들어 보자. 목회자는 이 신자에게 동성애가 성의 목적과 관련된 하나님의 뜻과 상충하므로, 잘못된 것임을 나타내는 특정 성경 본문을 지적할지 모른다. 아마 이 신자는 이 과정을 통해 충분히 납득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 신자가 추가적인 문제와 여전히 씨름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은 단지 비열한 독재자여서 동성애를 금지하시는 것일까? 하나님이 나의 게이 친구가 행복하기를 원하시지 않는 것이 정당한가? 어째서 하나님은 이와 같은 행동을 금하셨을까?나이 든 신자는 성경적 윤리가 젊은 신자에게 납득된다고 더 이상 상정할 수 없는데, 성경적 윤리가 작용하는 사회적 상상은 우리가 성장한 사회적 상상과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단순히 내용뿐 아니라, 기독교 도덕의 근거를 설명하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위에서 말한 이 시나리오에서는 단순히 성경이 몇몇 본문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지적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런 본문이 더 큰 그림 속에서 의미가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런데 이 더 큰 그림은 성이 인간의 인격성과 관련해 성경에서 가르치는 내용의 작용인 폭넓은 성경적 측면도 있고, 가령 특정 성행위로 신체에 가해진 손상의 증거와 같이 남성과 여성의 몸의 성적 상보성과 관련된 ‘자연법’의 측면도 있다. 여기서 자연이 결정적 논거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 가르침이 자연에 임의로 부과된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자연과 서로 관련이 있음을 보여 주는 데 참으로 도움이 된다. 다시 말해, 자연은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을 고려할 때, 하나님의 명령이 의미가 있음을 보여 주는 데 도움이 된다.원제: 6 Ways Christians Can Respond to Our Strange New Worl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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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살인마와 함께 천국에서 살 수 있을까?
by Rachel Joy Welcher
2022-10-13
로이 래트클리프(Roy Ratcliff)는 악명 높은 연쇄 살인범 제프리 다머(Jeffrey Dahmer)에게 세례를 준 목사이다.다머가 15건의 살인 혐의로 중복 종신형을 선고받은 후 래트클리프는 그를 방문해서 복음을 나누기 시작했다. 래트클리프에 따르면 다머는 하나님 은혜의 깊이를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고 한다. 그 이유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다머와 같이 극악무도한 짓을 한 사람에게 은혜는 불가능한 이야기처럼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1994년 스톤 필립스(Stone Phillips)와의 인터뷰에서 다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천국에 가서 확인하기 전까지야 그의 진심을 알 수 없겠지만, 우리 인생에서 가장 뒤틀린 연쇄 살인범 한 명이 은혜를 향해서 “주님, 고맙습니다”라고 말했을 가능성이 있다.그런데 당신은 다머를 천국에서 만나고 싶은가? 래트클리프는 다머와 함께 보낸 시간을 책으로 냈다. 아마존에서 책 설명을 훑어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은혜라는 게 항상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반영하지는 않는 게 분명하다. 한 독자가 이렇게 리뷰를 썼다:나는 당신이나 바로 위에 글을 쓴 사람이 천국에서 그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은 아예 말할 것도 없고, 애초에 왜 다머 같은 인간의 영혼 상태에 관심을 갖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난 그냥 소름이 돋을 뿐이다. 저자의 책과 평론을 읽은 몇몇 사람들은 하나님이 무엇이든 용서하실 수 있고 또 실제로 용서하신다는 사실과 그런 은혜가 자신들을 천국에 들여보낼 거라는 점에 희망을 느낀다며 감격한다. 도대체 그런 사람들은 얼마나 끔찍한 죄를 저질렀기에 다머 같은 사람이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갔다는 말에 ‘안도’하는 걸까? 물론 모든 사람이 이 리뷰를 쓴 사람의 감정을 공유하는 건 아니지만, 그의 글은 우리가 은혜를 생각할 때 가질 수 있는 한계가 어디까지인가에 대한 궁금증을 일으킨다. 우리는 하나님이 덕 다이너스티(Duck Dynasty)에 나온 족장 필 로버트슨과 같은 사람을 과거의 섹스, 마약, 로큰롤로부터 구원하신다는 사실에는 기뻐하지만, 피해자를 강간하고 죽이고 인육을 먹기까지 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는 똑같이 기뻐하지 않는다. 천국에서 브래드 피트(Brad Pitt)는 만나고 싶어 하지만, 행여라도 히틀러가 죽기 직전에 개종하지 않았기를 바라는 게 우리 마음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 소소한 우상숭배는 다 용서하시길 바라지만, 소아성애자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는 치를 떤다. 구원 여부가 인간의 결정에 달린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달렸다는 사실을 찬양한다. 나는 자비로움에 있어서 인색하기 짝이 없지만, 내가 섬기는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그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롬 10:13).바로 이런 사실 때문에 우리는 언젠가 제프리 다머 바로 옆에 서서 “거룩, 거룩, 거룩”하고, 그와 함께 찬양할지도 모른다. 이 사실은 다음 세 가지 이유로 나를 흥분시킨다.1. 내게 소망이 있다는 의미이다. 므낫세 왕에 대해 다들 들어봤을 것이다. 그는 아들들을 산 채로 불태웠고, 마법사와 마녀(해리 포터에 나오는 종류가 아님)와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가 왕이 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바알 숭배를 위한 “신당 재건”이었다. 그는 문자 그대로 두손 두발이 꽁꽁 결박당할 때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대하 33:10). 그러나 “므낫세는 고통을 당하여 주 하나님께 간구하였다. 그는 조상의 하나님 앞에서 아주 겸손해졌다. 그가 주님께 기도하니, 주님께서 그 기도를 받으시고, 그 간구하는 것을 들어 주셔서, 그를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시고, 다시 왕이 되어 다스리게 하셨다. 그제서야 므낫세는 주님만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깨달았다”(대하 33:12-13).므낫세 왕과 제프리 다머 같은 사람에게도 소망이 있다면, 여러분과 나에게도 소망이 있다. 나는 “도대체 그런 사람들은 얼마나 끔찍한 죄를 저질렀기에, 다머 같은 사람이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갔다는 말에 ‘안도’하는 걸까?”라고 아마존에 리뷰를 쓴 사람의 질문을 흥미롭게 받아들였다. 얼마나 끔찍한 죄냐고? 너무 많다. 나는 거룩하지 못했다. 나는 참지 못했다. 나는 내가 받은 자비를 확장하지 못했다. 나는 나의 창조주를 완벽하게 실망시켰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구원하신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은혜가 연쇄 살인범과 악한 왕에게까지 미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은혜에 대한 오해이다. 그것은 죄를 하찮게 여기고 하나님의 전능하신 선하심을 과소평가하는 교만이다. 2. 다른 사람에게 소망이 있다는 의미이다.내게는 목록이 하나 있다. 종이가 아닌 마음에 담아둔 것이다. 거기에는 내가 사랑하는,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하나님의 음성을 무시하고 영아를 죽였다는 므낫세의 이야기를 읽을 때면 내 죄가 생각난다. 그리고 나는 목록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매달리지 않는 한, 영원한 형벌을 짊어질 것임을 나는 안다. 그들이 므낫세와 같이 하나님께 복종하고 스스로 겸비하여 그의 얼굴을 구하지 아니하면 은혜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도 은혜가 있음을 기뻐한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회개하고 돌아와서, 죄 씻음을 받으십시오. 그러면 주님께로부터 편히 쉴 때가 올 것이며,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위해서 미리 정하신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보내실 것입니다(행 3:19-20).나는 그들이 그리스도께 매달림으로써 하나님께 굴복하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인해 기뻐한다. 그들은 용서받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소망이 있다. 히브리서 7장에서 예수님은 완전한 대제사장으로 묘사된다. 그의 죽음 때문에 이제 우리에게는 매일 치러야 하는 희생이 더 이상 필요 없다. 그만큼 그의 제사가 완벽하기 때문이다. 이전의 모든 희생이 이루지 못한 것, 즉 죄에 대한 속죄가 영구적이고 단번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을 완전하게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는 늘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중재의 간구를 하십니다(히 7:25).“완전하게”(To the uttermost)를 어떤 번역자는 “온전히”(completely) 또는 “영원히”(forever)라고 표현했다. 여기에는 그 어떤 주의 사항이 없다. 살인. 동성애. 유아 살해. 우상숭배. 그 어떤 죄를 저질러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갈 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에는 조금도 위협이 되지 않는다. 나와 당신이 전도하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이 다 자비의 후보자이다. 하나님께서 므낫세나 다머 같은 죄인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으신다면, 우리에게뿐 아니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소망이 없다.3. 하나님이 모든 영광을 받으신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 담긴 넘치는 풍요함은 우리의 부족함을 드러낸다. 우리는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며, 이 사실에 불편함을, 심지어 굴욕감을 느끼는 교만한 사람도 있다. 죄를 물리치는 일에 관해서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승리하신다. 선물 받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감사한 미소 대신에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는데”라고 말한다. 자비가 축복이 아니라 빚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이것은 지독한 교만이다. 어느 목사가 최근 설교에서 이렇게 상기시켰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는 그 어떤 꼼수나 속임수가 없다. 당신은 오로지 선물로 받기만 하면 된다.”우리가 예수님의 족보를 만들 수 있다면, 어떤 사람들로 채울지가 궁금하다. 확실히 라합(마 1:5), 다윗의 가장 치욕적인 죄(마 1:6) 또는 므낫세 왕(마 1:10)과 같은 부류의 인간은 결코 넣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분명히 가장 좋아하는 성자를 선택해서, 그런 성자들로 족보를 채울 생각에 흐뭇해할 것이다. 그러나 은혜가 무엇인지 정의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은혜의 경로와 길이와 깊이를 표시하신다. 마가복음 2:7에서 율법학자들은 제대로 된 질문을 던졌다. “하나님 한 분 밖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 아무도 사할 수 없다. 그리고 기억하라. 하나님은 당신이 아는 최악의 사람에게조차도 용서를 베푼다. 돌에 맞아 죽은 스데반의 기도는 특별하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행 7:60, cf. 눅 23:34).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은 사울의 반응이다. “사울은 스데반이 죽임 당한 것을 마땅하게 여겼다”(행 8:1). 바울로 더 잘 알려진 사울의 회심과 그 이후의 사역은 하나님의 끊임없는 은혜에 대한 역사상 가장 강력한 사례의 하나이다. 무자비한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사랑할 줄 모르는 자에게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나와 같은 반역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원제: Sharing Heaven with Serial Killer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제프리다머
천국
용서
자비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회고와 반성, 그리고 도약
기독교 세계관 운동 2.0을 위하여
by 김경호
2022-10-12
기독교 세계관 운동 2.0 위하여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SIEW)과 함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섭니다.회고: 1970-2003년까지 국내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시작은 1970년대부터입니다. 인물로는 손봉호 교수와 문서 선교사인 웨슬리 웬트워스(Wesley Wentworth)를 통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목적은 기독교 세계관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는 데 있습니다.그 이후 1980년대부터 본격적인 세계관 모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첫 모임은 1980년 초, 당시 IVF 사무실에서 제임스 사이어(James W. Sire)의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 사상을 읽고, 토론 모임을 가진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세계관 모임의 1세대는 강영안, 김헌수, 송인규, 신국원, 양성만, 오창희, 이승구, 이정석, 황영철, 홍병룡이었습니다. 세계관 모임이 얼마나 활발하게 진행되었는지, 당시 원서의 출판과 번역이 늦게는 5년, 빠르면 2, 3년 만에 나왔다는 점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당시 기독교 세계관은 1970년대 광주사태와 마르크시즘을 중심으로, 사회변혁의 논리를 치열하게 전개하던 상황에서, 나름의 “대안적 이론”으로 기대감을 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정체 경향을 보이게 됩니다. 그 이유는 원년 멤버들이 유학과 취업으로 흩어졌고, 세계관 각론이 나오지 않으면서, 기독교 세계관의 관점에서의 문화 분석은 거의 방어적으로, “영적 비평”(사탄의 문화)이라는 형태로 비약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1990년대 기독교 세계관은 원론을 반복하는 것 외에 이론적 측면에서나 실천적 측면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내어놓지 못했습니다. 이로 인해 기독교 세계관의 효용성에 대한 의문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기독교 세계관은 위기를 맞게 됩니다. 이 위기에 대한 인식은 2002년 ‘복음과 상황’, 2003년 ‘신앙과 학문’에서 표출됩니다. 먼저, 2002년 ‘복음과 상황’에서 일어난 비판과 제안은 다음과 같습니다. 박총은 기독교 세계관이 원론에 머물러있고 인지-명제적 접근법만 사용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기독교 세계관을 “명제성”에서 “생생한 이야기”로 되살려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최태연은 모던-명제성과 포스트모던-이야기라는 등식은 지나친 단순화라고 비판하고, 모던과 포스트모던은 분리되지 않고 연결되어 있다고 제안했습니다. 양희송은 세계관의 문제가 내러티브적 성격을 포착하지 못하고 명제화하는 작업을 주된 과제로 설정함으로써, 최종 목표가 그것을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인식하는 것”에만 머물렀다고 비판하면서, 그 대안으로 내러티브만이 살아내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정정훈은 기독교 세계관이 이원론을 극복하지 못했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현실 속에서는 그리스도인들끼리 모이는 단체,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의미를 가질 수 있는 논리를 바탕으로 기독교 내부와 외부의 경계선을 긋고 그 내부에만 머물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따라서 먼저 타자의 얼굴을 솔직하게 대하고, 소모적인 논쟁보다는 서로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고 대화해 보기를 제안했습니다. 이원석은 기독교 세계관이 가장 우월한 세계관이고, 한국 교회에 가장 적합한 세계관이 아니라고 비판하면서, 세계관의 다양성을 제안했습니다. 2003년 ‘신앙과 학문’에서 일어난 비판과 제안은 다음과 같습니다. 최태연은 개혁주의 세계관이 기독교 세계관의 전부일 수 없다는 점, 기독교 세계관을 구체화하려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점, 그리고 실천을 위한 전략과 행동이 부족했다는 점을 비판했습니다. 그 대안으로 함께 연구하고, 다양한 연구자원을 넓혀 가야 한다고 말하며, 결국 다양한 세계관 가운데 가장 많은 영향력을 미치는 세계관 쪽으로 결정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김기현은 세계관 운동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고, 사회 참여의 근거는 창조가 아니라 십자가이며, 세계관의 문제는 이원론보다 혼합주의라고 비판하면서, 이에 대해 다양한 변혁 모델 가운데 상황에 맞는 것을 선택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양희송은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개혁주의 신학에 의해 독점되고 있고, 창조-타락-구속이라는 개념적 틀에 여백이 많으며, 세계관의 개념 자체가 느슨하게 정의됨으로써 가지는 오해나 왜곡이 많다고 비판하면서, 이론은 그만하고 실천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이승구는 기독교 세계관을 없애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 비판하면서, 그 없애야 하는 것이 용어라면 상관없지만, 내용이 비성경적인 것이 아니라면 그대로 사용해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또한 기독교 세계관의 표현, 제시 방식을 내러티브로 바꾸자는 비판에는 동의하지만 그 내러티브는 명제성과 함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보았고, 이러한 세계관은 반드시 성경의 가르침이 기준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는 일이 그 방향이어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이상의 2002년과 2003년의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비판과 제안은, 비판을 통해 위기의식을 가지면서, 동시에 여러 다양한 제안들을 통해 탈출구를 찾았고, 그 이후 반성과 도약의 발판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반성: 무례한 말투, 무례한 전투, 무례한 태도! 또는 잘난 척, 거룩한 척, 완벽한 척! 헤르만 도예베르트(Herman Dooyeweerd)는 자신의 저서인 서양 문화의 뿌리에서 이론적 탐구가 반박보다는 신뢰를 추구하는 대화의 길이자 자기 검토의 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비-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나 많은 무례함을 보여 왔습니다. 리차드 마우(Richard J. Mouw)는 이것을 무례한 말투, 무례한 전쟁, 무례한 태도라고 부르며, 그 사례를 소개합니다. 무례한 말투의 예로, 마우는 귀담아들으시는 하나님을 강조합니다. 교회는 언어 사용에 있어서 모델 공동체가 되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우는 17세기 청교도와 퀘이크교도 사이의 논쟁을 하나의 본보기로 보여줍니다. 리차드 박스터(Richard Baxter)는 한 팸플릿에서 퀘이커 교도들을 향하여 이렇게 모욕했습니다. “술주정뱅이, 욕쟁이, 호색가, 음탕한 자들, 교황 절대주의자보다 나을 것이 없다.” 반면에 퀘이커 지도자인 제임슨 네일러(James Naylor)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청교도들의 비난에 응수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며, 청교도들을 “뱀, 거짓말쟁이, 마귀의 자식, 저주받은 위선자, 멍청한 개망나니”라고 말했습니다. 무례한 전투의 예로, 마우는 무례한 말투 안에는 십자군식 의식구조, 즉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무례한 전투가 포함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결국, 무례한 태도란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들에게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데이비드 키네먼(Davie Kinnaman)과 게이브 라이언(Gabe Lyons)은 나쁜 그리스도인에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외부인들이 보기에 어떻게 비치는지를, 잘난 척, 거룩한 척, 완벽한 척이라고 요약하고 있습니다. “외부인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반감을 느끼는 이유는 어떤 신학적 입장 때문이 아니다. 그들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주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잘난 척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이 비-그리스도인들과의 대화에서 그들만의 잘난 척하는 분위기가 분명히 있습니다. “거룩한 척하는 가면을 쓰고 싶은 유혹은 죄를 짓지 않는 일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다른 중요한 신앙의 우선순위들과 균형을 이루지 못할 경우 자신만 우월하고 완벽한 척한다는 이미지를 풍기게 될 소지가 있다.”도약: 정체성, 다양성, 그리고 경계-투과성 지금까지 세계관의 회고와 반성이 이런 수준이라면, 우리의 세계관도 잘못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아야 합니다. 브라이언 왈쉬(Brian J. Walsh)는 기독교 세계관도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습니다. ‘세계관이 어떻게 억압적 이데올로기로 바뀔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왈쉬는 다섯 가지로 답합니다. 첫째, 세계관이 전체 체계로 간주되며, 세계관 자체를 지나치게 강조하게 될 경우 억압적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 둘째, 세계관이 보편적 최종성을 대표할 때 억압적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 셋째, 세계관이 성경적 역학성을 잃을 때, 억압적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 즉, 방향, 방향 상실, 재방향이라는 이러한 요소를 잃어버릴 경우다. 만일 방향을 상실하게 될 때, 그 방향을 재설정할 수 있어야 한다. 재방향을 통해 세계관이 수정될 수 있어야, 세계관은 활력, 힘, 통찰력의 깊이를 가지게 된다. 넷째, 세계관이 변화하는 문화적 맥락에 부적절하거나 논리에 맞지 않을 때, 억압적 이데올로기가 된다. 다섯째, 세계관은 자기-폐쇄적 기독교 공동체에서 안전에 대한 방어적 정신을 섬길 때, 억압적 이데올로기가 된다. 따라서 나는 세계관의 도약을 위해, 정체성, 다양성, 그리고 경계-투과성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정체성이란 “개혁주의 세계관의 입장”을 의미합니다. 이런 개혁주의를 정체성으로 표현하는 세계관으로는 2003년부터 이승구의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2005년 신국원의 니고데모의 안경, 2008년 송인규의 새로 쓴 기독교, 세계, 관, 2020년 최용준의 성경적 세계관 강의 등이 있습니다. 또한 다양성이란 “기독교 세계관의 입장”을 의미합니다. 기독교란 넓은 범주의 종교를 의미합니다. 개혁주의보다 범위가 넓고 다양합니다. 양희송의 세계관 수업은 이러한 다양성을 대표하는 책입니다. 그는 다양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첫째, 세계관은 “관”으로만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청,” 세계“미,” 세계“향”으로도 표현될 수 있습니다. 둘째, 세계관은 명제성이 아니라 이야기를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세계관은 명제보다 이야기를 통해 더 잘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셋째, 이런 다양성과 이야기성에 따른 세계관의 판별 기준은 복잡성을 감당해 낼 역량, 그리고 자기 오류 불가능성에 반대하는 자기성찰능력입니다. 경계-투과성은 개혁주의와 기독교 세계관의 범주 외의 비주류 세계관을 의미합니다. 경계-투과성은 개혁주의와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 많은 비판점을 가진 세계관입니다. 그러나 나는 소수의 입장이라 하더라도 성경의 관점을 조금이라고 반영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을 정체성이나 다양성 안으로 투과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전성민의 세계관적 성경읽기는 이러한 경계-투과성을 대표하는 책입니다. 그는 경계-투과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첫째, 경계-투과성은 중심이 아니라 변두리가 우리의 선입견을 깨뜨리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둘째, 경계를 넘는 힘은 바깥과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나타난다. 즉, 우리의 삶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과 끊임없는 교류가 필요하다. 셋째, 이러한 노력에는 고집이 아니라 겸손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성경 읽기가 자기 확신 강화제, 즉 고집으로 읽혀서는 안 된다.”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는 정체성과 경계선에 대한 해결책을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경계가 없다면 한 집단은 정체성을 잃고 그 집단이 누릴 수 있는 영향 자체를 포기하는 셈이 된다. 그렇지만 기독교 공동체가 경계를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높은 장벽과 같아서는 안 된다. 그 경계는 소통을 위해 열려있어야 한다. 그래야 변화를 위해 참여할 수 있고 밖에 있는 아름다움을 인식하기도 하고 그로부터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이 도약의 발판을 딛고 좀 더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아가 봅시다!
세계관
기독교세계관운동
급진적으로 일상적인 환대는…
by Rosaria Butterfield
2022-10-11
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낯선 사람을 이웃으로, 이웃을 하나님의 가족으로 여긴다. 그들은 인간을 범주나 부류로 축소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세상 모든 사람의 눈빛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본다. 그들은 자신이 마약 중독자, 성매매자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기심과 교만을 비롯해 자신의 모든 죄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선하심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어떤 상황에서도 성경을 생명줄로 여겨 굳게 붙잡는다.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을 베푸는 사람들은 자기 집을 자신만의 전유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데 사용해야 하는 그분의 선물로 생각한다. 그들은 대문을 활짝 열고 사회적, 경제적으로 혜택받지 못한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그들은 자기 집의 문을 활짝 열면 복음을 그들에게 가져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기독교의 신조와 신앙고백과 전통은 물론, 성경적인 신학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다.우리집에서는 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을 베푸는 일이 일상화되어 있다. 그 일은 이른 아침에 한쪽 불로 야채수프를 끓이고, 다른 쪽 불로 밥을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 늦은 저녁에 나의 남편 켄트가 갈 곳이 없는 가족을 위해 소파 위에 잠자리를 만들고, 에어매트리스에 공기를 넣어 펴는 것으로 끝이 난다. 진정으로 손 대접을 베푸는 사람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식탁 교제를 베풀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기꺼이 맞이한다. 그런 사람은 섬길 기회를 찾는다. 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은 무엇을 공들여 갖추어 놓거나 요란하게 초청장을 내밀지 않는다. 초청의 문은 항상 열려 있다.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은 1세기의 그리스도인 가정을 닮은 가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런 가정은 공동체적이며, 기독교적 전통과 실천을 넓고 깊게 펼쳐 나간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구별된 백성이다. 우리는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는 믿지 않는 이웃들이 우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걱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의 식탁을 함께 공유하며, 그곳에서 자신의 생각을 우리에게 말하는 것을 행복하게 여기기 때문이다.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을 베풀려면 하루 중에 약간의 여유 시간, 곧 일상의 루틴이 파괴되지 않으면서 잠시 짬을 낼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 둘 필요가 있다. 나이 든 이웃을 병원에 모시고 가거나 이웃의 아이를 잠시 돌봐주거나 홍수나 세계적인 난민 위기로 인해 살 곳을 잃은 가족들의 임시 거처를 만들어주는 일 등,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위해 언제라도 시간을 낼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을 베풀려면, 돈을 버는 족족 다 써버려서는 안 되며, 남에게 나눠줄 것을 많이 남겨 두어야 한다.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을 베푸는 삶에는 주인과 손님이 따로 없다. 당신이 우리집에 저녁 식사를 하러 와서 내가 아직 아이에게 수학을 가르치고 있는 것과 내 세탁물이 식탁 위에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놓여 있는 것을 보면, 당신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세탁물을 정리하거나 식탁을 차리거나 식기세척기를 돌리거나 개들에게 먹이를 주기 시작한다. 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을 베풀려면, 주인은 도움을 받더라도 당혹스러워하지 말아야 하고, 손님은 도움이 필요한 곳에 기꺼이 힘을 보태야 한다. 매일 함께 모이는 하나님의 가족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주인과 손님은 스스럼없이 서로 도울 수 있다.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행해지는 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은 날마다 함께 모이며, 꾸준히 기도한다. 초대는 필요 없다. 그리고 아직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불러 음식을 대접하고, 교제를 나눈다. 이 땅의 좋은 것이 좋은 것으로 보여진다.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혼자 사는 삶을 선택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만성적인 외로움으로 고통받을 필요는 없다.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을 베풀려면 순종의 희생을 감당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순종의 희생을 향해 부름받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자비로운 존재로 생각하지 않으므로, 하나님에게 죄를 짓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위반하라고 사람들을 부추기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그런 일을 보면 크게 슬퍼한다. 우리는 무겁고 힘든 십자가(죽음처럼 느껴지는 자기 부인)를 짊어지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음을 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제한된 능력을 의지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무언가를 명령하실 때는 그것을 행할 수 있는 은혜도 함께 허락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물론 어려움을 혼자서 감당하기는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가족은 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을 삶으로 구현해 나가면서, 어려움과 기쁨을 함께 공유한다. 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은 고난을 동반한다.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을 베푸는 사람들은 식사 자리에서 서로 다른 세계관 때문에 다투지 않는다. 진정으로 관대한 사람들은 자신과 많이 다른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세상의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용납과 승인의 차이를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용감하게 받아주고 존중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우정을 곡해할까 봐 걱정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식사를 하셨지만 그들과 함께 죄를 짓지는 않으셨다. 그분은 세상에서 살았지만 세상 사람들처럼 살지는 않으셨다. 이것이 예수님의 역설이고, 복음을 전하고 실천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꺼이 고난을 받는 사람들, 곧 겉모습보다는 내면의 인격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의 특징이다.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을 베푼다는 것은 하나님의 가족들과 굳센 관계를 맺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도 견고한 관계를 맺는 데 시간을 할애하는 것을 의미한다. 위선자와 겁쟁이들은 관계보다 말이 앞선다. 그런 사람들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몰래 문화 속으로 침투하거나 동네에서 깐깐한 도덕군자인 척 행세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교화하려 든다. 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냉소적인 탈-기독교 세상에 참된 기독교를 분명하게 보여준다.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은 예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믿는 믿음의 증거를 드러낸다. 그런 손 대접은 정치나 문화나 시사 문제에 관한 다른 사람들의 견해에 지나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런 손 대접은 회심이 무슨 의미인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정체성이 무엇인지, 회개를 통해 어떤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는지에 관심을 집중한다. 그런 손 대접은 죄가 기만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속는다는 것은 악의 세력에 사로잡혀 그것이 시키는 대로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은 사람들의 진정한 필요를 본다. 사람들은 단지 좋은 선택을 독려하는 격려의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죄에서 구원받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깊이 이해한다. 그런 손 대접은 예수님이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서 통치하신다. 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은 한때 자기를 유혹하고 속박하면서 충성을 바칠 것을 요구했던 죄가 지금도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더라도 더 이상 죄에 굴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통해 빛을 발한다.이 글은 로자리아 버터필드, 복음과 집 열쇠(개혁된실천사)의 머리글 일부를 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간추린 것입니다.
손대접
환대
가정
가정교회
복음과집열쇠
죽도록 ‘밈’하기
by Peter Biles
2022-10-10
인스타그램을 별 생각 없이 스크롤하고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 LOTR) 게시물 몇 개에 “좋아요”를 눌러놓고 무슨 일이 생기는지 한번 보라. 이제 내 피드에는 자연스럽게 LOTR 밈(memes)으로 넘칠 것이다. 되돌릴 방법은 없다. “재미있거나 흥미로운 항목(예: 캡션이 있는 사진 또는 비디오) 또는 특히 소셜 미디어를 통해 온라인에 널리 퍼진 장르”라고 밈을 정의할 수 있다. 밈이라는 하위문화는 이상하고 종종 무섭기까지 하다. 단지 만화 캐릭터로 시작했던 눈이 튀어나온 녹색 개구리 페페(Pepe the Frog)는 결국 백인 우월주의의 상징으로 변했다. 그 어떤 사진도 어떻게 편집하는가에 따라서 얼마든지 원하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하나의 원본 이미지 또는 비디오는 얼마든지 수천 개의 메시지를 위한 사료가 될 수 있다.밈 소재는 단지 영화와 쇼에 국한되지 않는다. 구글에 “칼뱅주의 밈”(Calvinism memes) 또는 “침례교 밈”(Baptist memes)라고 쳐보라.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성경과 예수님조차도 밈을 통해 얼마든지 모자라고 나사 하나가 빠진 존재로 만들 수 있다.대부분 사람에게 밈은 순수하고 재미있다. 그러나 밈을 지나치게 섭취하면 문제가 있다. 개구리 페페와 같이 사악한 예가 명백한 예이다. 그러나 내가 더 관심을 가지는 부분은 밈이 되어버린 삶(meme-ification)에 의해 조금씩 달라지는 미묘한 변화이다. 아이러니와 유머에 너무 중독되어 우리 눈에 세상이 마냥 농담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떻게 될까? 밈의 제왕LOTR에서 찾는 밈 구절(The LOTR meme-verse)은 한동안 내 일상에서 단골 유머가 되었다. 인스타그램에서 “The Meme Havens”라는 LOTR 밈 계정도 시작했다. 다행히도 내 팔로워는 아직 12명을 넘지 않는다. 그 정도면 문제될 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반지의 제왕을 다시 보니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반지의 제왕 속 모든 장면이 인스타그램 속 밈의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온라인에서 본 기발한 말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채 10분을 보낼 수 없을 지경이었다. 프로도가 반지 원정대에서 처음 간달프를 보았을 때, 소년 같고 천진난만한 그의 표정을 기억하는가? 그의 표정은 참으로 풍부한 밈의 소재가 되었다. 그 표정과 필적할 만한 것으로는 그리버스 장군을 향해서 오비완케노비(Obi-Wan Kenobi)가 던진 상징적인 인사, “거기, 안녕하신가?” 정도가 될 것이다. 일단 밈의 관점에서 파악하게 되면, 이제는 아무리 같은 장면을 봐도 결코 진지하게 대할 수 없게 된다. LOTR은 놀라운 영화적 성취이다. 반지의 제왕을 보면서 울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러나 이제는 경외감, 기쁨과 즐거움이 그만 밈으로 물들고 말았다. 이 걸작 영화가 그만 천 개의 밈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하나의 농담이라는, 위기에 봉착했다.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로 밈을 만드는 것은 지금까지 별문제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밈이라는 아이러니로 덮어버리는 건, 아름다움과 선함이 우리에게 미칠 수 있는 좋은 영향까지도 약화시킨다. 모든 것을 밈으로 만드는 세상오피스(Office) 및 팍스앤레크리에이션(Parks and Recreation)과 같은 TV 프로그램이 많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시청자는 서로의 관계 때문에 드라마를 시청한다. 짐과 팸. 레슬리와 벤. 앤디와 에이프릴. 마이클과 토비(농담이다). 이런 드라마는 유머와 인간미의 균형을 보여준다. 진지한 관계와 진실한 순간은 시시껄렁한 농담이 침범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를 드라마 속 인물과 연결한다. “사실 모든 게 항상 농담이야”라는 유머가 재미있을지는 몰라도, 그런 식의 대화는 결코 우리를 풍요롭게 만들지 못한다. 내 아버지는 LOTR을 읽는 것을 추운 곳에서 몇 시간을 보낸 후 뜨거운 목욕을 하는 것에 비유하곤 했다. 그건 휴식, 회복, 그리고 치유의 행위이다. 책과 영화에서 내가 느껴온 것이 바로 그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야기와 등장인물이 밈으로 바뀌는 순간, 뜨겁던 물이 미지근해진다. 여러 층의 아이러니는 쾌락보다 아름다움이, 패러디보다 진실이, 그리고 만족보다 선함이 필요하다는 사실마저 잊게 한다. C. S. 루이스는 친구이기도 했던 톨킨의 이 걸작을 놓고 이렇게 말했다. “여기 칼처럼 찌르거나 차가운 쇠처럼 타오르는 아름다움이 있다. 여기 당신의 마음을 부숴버릴 놀라운 책이 있다.”아름다움이 없으면 마음은 굳어진다. 즐거울지는 몰라도, 더 이상 “깨지기 쉬운” 상태는 아니며, 더 이상 톨킨의 날카로운 말에도 녹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런 마음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빈 웅덩이모든 것의 밈화(meme-ification)의 기저에 있는 것은 일반적인 의미의 상실이다. 우리는 굳이 더 이상 객관적인 의미가 존재하는지 찾으려고 하지 않을지 모른다. 의미가 부과하는 무게에도, 또 서서히 드러나는 진실의 느린 복잡성에도 시간을 들이지 싶어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것을 무의미한 오락으로 축소한다. 그것을 성경의 용어로 표현하자면(렘 2:13), 우리는 물을 저장하지 않는 웅덩이를 파고 있으며 또한 내 영혼에 물주기를 거부하고 있다. 영국 철학자 고 로저 스크러튼(Roger Scruton)은 아름다움에 관한 책에서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아름다움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아름다움이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고 있다. 그렇게 사는 이유는 우리가 희생의 습관을 잃어버렸고 항상 희생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기 때문이다. 키치와 신성 모독에 빠진 우리 시대의 거짓 예술은 그런 우리의 현실을 드러내는 표시 중 하나이다.”누구나 모든 것을 농담으로 바꾸는 사람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나도 그런 사람이었다. 대학에 가기 위해 집을 떠난 이후 처음으도 다시 집에 갔을 때 나는 많이 우울한 상태였지만, 가족과 친구들 앞에서 농담을 안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소란스러웠고 또 다른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이 괜찮다는 식으로 형들과 함께 계속해서 유머를 지껄였다. 그것은 상실감과 부서진 마음 그리고 향수병에 대처하는 나의 방법이었다. 또한 무의미함을 만회하려는 나의 방식이기도 했다. 대학에서 보낸 4년 중 3년 동안 진짜로 웃은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얕은 유머에 빠진 나는 울고, 애도하고, 또 희생해야 할 때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유머가 나 자신과 사물 속 진실 사이를 갈라놓는 완충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경험을 통해 너무도 잘 안다. 그러나 세계 최고의 문학과 예술 작품을 심도 있게 접한 후, 나는 인간이 인간답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밈이 아니라 의미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소셜미디어 피드에서 웃을 수 있는 일회용 농담이 아니라, 인생을 걸고 추구할 초월적인 목적(telos)이다. 스크롤할 사진(GIF)과 리트윗할 밈뿐 아니라, 우리에게는 지켜내야 할 곤도르뿐 아니라 싸워야 할 적, 모르도르까지 필요하다. 아이러니가 경외감을 무디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밈을 봐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제대로만 사용되면, 밈은 최고의 풍자와 진정한 창의성이라는 긍정적인 출구를 제공한다. 내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은 Obi-Wan Memobi라는 스타워즈 밈 계정을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Angry Anakin 밈은 조롱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는 밈이 세상에 대한 당신의 인식을 어떻게 바꾸는지, 그래서 하나님의 활기찬 창조 세계와의 만남을 어떻게 둔감하게 만드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톨킨처럼 가톨릭 신자였던 체스터턴(G. K. Chesterton)은 “감사는 경이로움 때문에 두 배가 되는 행복”이라고 썼다. 성경을 읽고 그리스도를 묵상할 때 우리 안에서 경이로움과 감사가 자라는 것처럼, LOTR을 읽은 후 우리 안에 남아야 하는 것도 경이로움과 감사가 되어야 한다. 지나친 아이러니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속 드라마 안에서 살고 있다는, 이 삶의 중대함에서 멀어지게 만들 수 있다. 풍자는 신성함을 보는 우리의 눈을 멀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창조물을 보다 명확하고 덜 냉소적으로 보는 눈을 가질 때, “왕의 귀환” 마지막 장면 속 프로도처럼 우리도 우리를 기다리는 천국의 끝자락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회색 장막이 온통 은빛 유리로 변하더니 뒤로 젖혀졌다. 그는 하얀 해안과 빠른 일출 아래로 멀리 푸른 나라를 보았다.”원제: Meme-ing Ourselves to Deat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반지의제왕
밈
세속문화
온라인문화
의미
미디어
진지함
농담
아우구스티누스는 칭의를 잘못 이해했는가?②
개혁자들과 함께 아우구스티누스 읽기
by Zach Howard
2022-10-09
요약: 장 칼뱅 같은 개혁자들이 성경을 빼고 가장 많이 인용한 사람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이다. 그들은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의 다른 주장보다도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는 것이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은혜라는 진리를 이 교부가 어떻게 옹호했는지에 관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참고했다. 그렇지만 개혁자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교리에 관해서만은 이 위대한 교부에게서 원하는 만큼의 명료성을 찾지 못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칭의의 의미를 체계적으로 다루지 않았으며, 그의 저작을 주의 깊게 읽으면 그가 이 교리를 다루는 데 있어서 모호함을 드러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의에 관해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안점을 두는 것은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신다(declaring)는 점이 아니라, 의롭게 만드신다(making)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료성을 중시하는 종교 개혁자들에게는 아무리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을 의롭다 하심의 유일한 근거가 되는 그리스도의 의를 부정하지는 않았더라도, 이런 식의 교리 표현 방식을 모호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목회자, 지도자, 교사를 위한 특집 기사 시리즈를 위해서 우리는 베들레헴 신학교에서 신학 및 인문학 조교수로 일하는 잭 하워드에게 아우구스티누스의 칭의 교리를 탐구하도록 요청했다.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_이해 1. 인간의 본성에 대한 치유로서의 칭의 2. 경건하지 않은 자를 경건케 만드는 칭의 3. 사건과 과정으로서의 칭의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_평가 1. 칼뱅의 아우구스티누스 칭의론 평가 2. 믿음과 사랑의 관계 3. 은혜의 면류관을 씌우시는 하나님2. 경건하지 않은 자를 경건케 만드는 칭의하나님의 해결책이 인간 본성의 변화에 있다고 아우구스티누스가 믿었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 구원에 대한 그의 모든 표현은 궁극적으로 그 해결책을 변화(transformative)에 두고 있다. 왜냐하면 성경이 우리가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고후 3:18)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현대 개신교인이 특히 놀라는 사실은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러한 변화를 구원이라는 단어가 아닌 칭의라는 용어와 더 자연스럽게 연결했다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한 데에는 특정한 언어적이고 주석적인 이유가 있다. 그는 성경에서 칭의와 관련해서 사용되는 라틴어 용어를 “의롭다고 선언된”(declared righteous)이 아니라 “의롭게 된”(made righteous)으로 이해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대 라틴어 성경은 그리스어 ‘디카이오오’dikaioō를 정당화하다iustifico로 번역했으며, 그는 이 용어를 문자 그대로 사용했다.[11] 한 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라틴어 번역에 철저하게 의존한 아우구스티누스는 바울이 불의한 사람이 의롭게 되었다(made)라고 말한 것으로 잘못 이해했다.”[12] 아우구스티누스는 ‘영혼과 편지’(Spirit & Letter)에서 칭의iustificatio와 관련해 로마서 4:5을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의롭게 되었다’가 아니라면 ‘의롭게 되다’에서 무슨 의미가 가능한가? ‘그가 의롭게 하셨다’는 말은 결국 의롭지 않은 자를 ‘의롭게 만드셨다’는 의미가 아닌가?”[13] 아우구스티누스는 바울의 용어인 디카이오오를 오해했고, 그 결과 칭의를 선언적 의미(하나님이 경건하지 않은 자를 면해 주신다)보다는 주로 변형적 의미(하나님이 경건하지 않은 사람을 의롭게 하심)로만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영혼과 편지’의 같은 부분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칭의에 대한 다른 의미, 즉 “의롭게 여김을 받음‘(counted righteous)을 인정한다.[14] 그는 칭의에 대한 대안적 해석을 이렇게 제시한다. “그들이 의롭게 여겨질 것이라는 의미에서 볼 때, 그들은 의롭다고 간주될 것이고 따라서 그들이 의롭게 될 것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의롭다 하려는 것(눅 10:29)은 결국 의롭다고 여겨지고 또 그렇게 인정받고 싶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 아우구스티누스는 독자들이 죄를 씻어내다(sanctify)라는 단어를 “거룩하게 만들다”(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일)와 “거룩하다고 선언하다”(마 6:9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말씀)를 모두 의미하는 것으로, 그 용어에 대한 이해 방법을 비교한다. 그의 요점은 sanctify라는 단어가 ‘만들다’와 ‘선언하다’를 모두 함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굳이 이런 구분을 왜 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도 또한 그 의미를 발전시키거나 성경의 다른 구절과 연결한 추가적인 설명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 따라서 비록 아우구스티누스가 칭의 속에 선언적 의미까지 들어있다는 점을 받아들이지만, 그가 가진 칭의에 대한 일차적 이해는 하나님이 인간의 본성을 치유하심으로써 경건하지 않은 사람을 의롭게 만드신다는 데에 있다고 결론 내리는 것이 적절하다. 따라서 다음 질문이 따라온다. 만일 칭의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이해가 “의롭게 되는 것”이고, “의롭게 되는 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발생하는 내적 변화를 요구한다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형상 안에서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의롭게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인가? 11.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는 아우구스티누스가 iustificare를 “의롭게 된”이라는 변형적인 의미로 해석한 이유에 대한 추가적인 언어학적 이유를 지적한다. 여기에는 이 용어가 오로지 라틴 서부의 기독교 저자들이 사용하는 “탈고전적”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아우구스티누스가 iustificare의 의미를 명확히 하기 위해 고전 작가들을 참고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다. Iustitia Dei: A History of the Christian Doctrine of Justification, 4판 참조.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0), 46-47. 12. Robert Dodaro, “Justice,” in Augustine Through the Ages: An Encyclopedia, ed. Allan D. Fitzgerald (Grand Rapids: Eerdmans, 1999), 481?83.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서 5장에서 “의롭게 하고 정당화하는”이라는 문구를 설명하면서 iustificare라는 용어를 문자 그대로 읽는다: Sicut vivificans vivum faciens, sicut salvificans salvum faciens, sic et iustificans iustum faciens. 여기서 라틴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독서가 지닌 문자주의를 보여주지만 영어로 번역하기가 어렵다. 한 번역가는 그것을 이렇게 번역한다. “생명을 살리는 자가 살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또한 구원자가 되는 것이 안전하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의인이 된다는 것은 칭의를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See sermon 130A.3 (WSA 3.11:120n10). 13. The Spirit & the Letter 26.45 (WSA 1.23:172). Quid est enim aliud, iustificati, quam iusti facti, ad illo scilicet qui iustificat impium, ut ex impio fiat iustus? 14. 이 구절에서 “간주된” 또는 “전가된” 의인에 대한 설명 외에도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세기 15:2을 암시하거나 인용한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에게는 의로 간주되었다.” 그 외에, The Punishment and Forgiveness of Sins and the Baptism of Little Ones 1.18; The Deeds of the Pelagians 14.34; Expositions of the Psalms 70(71).2.4.등을 참조하라. 그러나 그는 어디에서도 법적 의미에서 전가의 개념을 설명하지 않으며, 창세기 15:12 또는 로마서 4:5와 같은 텍스트를 설명하면서조차 그 의미나 중요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원제: Did Augustine Get Justification Wrong?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아우구스티누스
칭의
성경적 예배를 통해 직관을 형성하자
이상한 신세계: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by Carl Trueman
2022-10-08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세상이 변했다. 자아성(selfhood)에 대한 새로운 관념이 그리스도인들의 관점에 도전하고 있으며, 이러한 새로운 현실에 도전한다는 것이 위험스러운 세상이 되어버렸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도덕적 양식에 따르면 동성 결혼에 반대하는 것은 인종차별주의자가 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스도인이 일반 세계의 광범위한 신념에 동의하지 않아도 전체 사회의 어엿한 구성원으로 존경받을 수 있던 시대는 이미 종말을 고한 것은 아니어도 저물어 가는 중이다. 기독교가 형성한 사회적 상상의 마지막 자취가 급속히 사라지고 있는 것은 사실인데, 우리 중에 많은 사람은 심지어 지금 이상한 신세계에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처지다. 자아성 혁명은 구체적으로 성혁명의 다양한 국면에 나타나듯이 유치원 교육부터 직장 내 대명서 사용 정책[직장 내에서 성별을 구별하는 대명사를 사용할지 말지 같은 정책]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두의 삶에 압력을 가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말하자면 아직은 이런 일을 피하면서 당분간 살아갈 수 있겠지만 영원히 숨을 수는 없다. 조만간 우리는 모두 현대적 자아성의 관념이 만들어 낸 도전적 상황과 마주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의 문제, 순응하라는 압력에 직면할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우리 모두에게 갈수록 시급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신세계에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여기 여섯 가지 대응 방안이 있다. 복음과도시 편집자 주_ 이 글은 칼 트루먼, (신좌파 성혁명과 LGBTQ+운동이 만든) 이상한 신세계의 제9장을 부흥사개혁사의 허락을 받아 간추린 것으로, TGC의 “6 Ways Christians Can Respond to Our Strange New World”를 참고하여 편집하였다. “신좌파 성혁명과 LGBTQ+운동이 만든 이상한 신세계”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갈 것이며 또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지, 여섯 가지 방안을 6회에 걸쳐서 싣는다. 1. 이 시대에 우리도 가담했음을 인식하자2. 고대 교회에서 배우자3. 하나님의 경륜 전체를 가르치자4. 성경적 예배를 통해 직관을 형성하자5. 자연법과 몸의 신학을 회복하자6. 현실적 소망 안에서 살아가자우리가 현대 사회 속에서 발견하는 형태의 표현적 개인주의는 개인과 개인의 욕망(심지어 자아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을 도덕적 세계의 중심에 두는 방식에서 문제가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땅의 계층 구조에서 어디에 속하느냐와 상관없이 보편적 인간 존엄성의 관념에 대한 근본적 헌신같이 표현적 개인주의에 내포된 중요 진리를 놓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우리 내면의 심리적 공간, 우리의 감정, 우리의 욕망에 대한 표현적 개인주의의 강조는 그 자체로 잘못이 아니다. 이런 것들을 사실상 그 자체로 목적으로 만들 때만 잘못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감정과 욕망이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다. 우리는 단순히 본능의 동물이 아니라 의지를 가진 존재여서 우리의 내면 생각은 우리의 정체성에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내면의 심리적 공간을 인정하고 이 공간의 직관을 올바른 방식으로 형성해야 함을 의미한다.아우구스티누스의 자서전 ‘고백록’은 기독교 문학의 고전이다. 이 작품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젊은 시절에 경험한 중요 사건들을 회상하면서 자기의 정신생활에 집중한다. 하지만 흥미로운 사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내향적 반성의 움직임이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항상 외부로 하나님을 지향하면서 마무리된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감정은 하나님 및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라는 더 큰 진리의 맥락 안에 놓이며 이 진리를 기준으로 교정된다. 비슷한 역학관계가 시편에도 적용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시편 저자는 친구, 원수,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자기의 감정에 대해 종종 노골적이면서도 지나칠 만큼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것은 자기 확인, 또는 훨씬 나쁘게 말하면 방종한 자기 연민을 탐닉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이야기하고 있는 경험과 감정을 하나님의 위대한 진리의 맥락 안에 두기 위한 것이다.교회가 이 진리를 붙잡고 우리의 심리적 직관을 성경적 방식으로 형성하려면, 예배를 구성하는 데 중요한 행동 중 하나인 찬양을 길게 열심히 생각해야 한다. 시편이 공동 찬송가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런 시편을 공동체로 노래하는 것이 유대인의 사회적 상상을 형성했다. 그리고 교회도 오늘날 똑같이 해야 한다. 우리가 표현적 개인주의에 가담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루소에서 오프라 윈프리로 이어지는 길을 따르는 것과 정서를 우리의 생활방식을 위한 토대로 삼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이것은 우리가 교회 생활에서 정서와 감정의 자리를 없애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자기의 정신생활을 알맞게 형성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공동 교회 생활을 개혁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감정을 위해 감정을 탐닉하거나 나의 필요와 욕망이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이유라고 스스로에게 각인시키지 않는 예배 음악을 선택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우리는 자기의 감정을 이해하고 솔직하게 표현하게 해 주면서도, 항상 밖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진리에 이르는 방식으로 그렇게 하는 노래가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어떤 사람이 주장하듯이 교회가 시편만을 불러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더 많은 시편을 (또는 여러분이 아직 시편을 노래하지 않는다면 어떤 시편이라도) 노래하는 것이 훌륭한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시편에 대해 생각해 보라. 시편은 기쁨을 특징으로 하지만 또한 슬픔과 상실도 알고 있는 기독교 인생관을 제공한다. 시편은 현재의 투쟁을 하나님이 과거에 하신 위대한 행동과 미래를 위한 약속의 맥락 안에 둔다. 시편은 우리가 낯선 땅에서 이방인인 자기의 신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하나님의 웅장한 그림과 미래 안식에 대한 약속을 제시함으로써, 시편은 우리가 질병 같은 개인적 사건이든, 이 책에서 설명한 충격적 변화 같은 사회적 사건이든 간에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에 대한 신학적이고 감정적인) 관점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우리는 감정과 정서의 존재인 동시에 타락한 존재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감정과 정서를 올바른 맥락으로 회복하는 데 도움을 주는 구속의 노래가 필요하다.원제: 6 Ways Christians Can Respond to Our Strange New Worl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표현적개인주의
시편
시편찬송
고백록
주님의 사역은 주님의 방법으로
by Ray Ortlund
2022-10-07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청교도의 관점에서 모든 교회가 미신 및 영을 그릇 인도하고 소멸시키는 모든 것의 뿌리를 뽑아야만 했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었다. 죄인이 구원받는 것도 오로지 이 영광을 위해서였으며, 또한 영적으로 활기가 넘쳐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들을 세워가는 이유도 모두 다 하나님의 영광 때문이었다.나는 도무지 피할 수 없는 문장들을 만났고, 또 피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 문장들은 깊고도 또 지속적인 방법으로 나를 도왔다. 주님께 감사한다. 예를 들어, ‘복음주의란 무엇인가’(What Is an Evangelical?)에서 마틴 로이드 존스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제도(institution)는 그 반대를 생산하는 경향이 있다”(4). 수십 년이 지났지만, 이 문장은 여전히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제도란 무엇인가? 제도는 바람직한 경험이 쉽게 반복하도록 돕는 사회적 메커니즘이다.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는 하나의 제도이고 또한 좋은 일이다. 주일마다 사역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면 어떨까? 그러나 동시에 생명을 주는 제도도 얼마든지 생명을 고갈시키는 것으로 표류할 수 있다. 무엇인가를 전달하는 제도가 그 자체로 목표가 되고 목적이 될 때 심지어 우상이 되는 경우이다. 그 결과 바람직하지 않은 경험이 절대화되고 영속화된다. 그런 끔찍한 배신은 결코 먼 가상에서나 존재하는 가능성이 아니다. 모든 제도는 그 반대를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다. 우리 모두 교회에서 이런 경향이 현실로 드러나는 것을 보지 않는가? 교회의 맥박을 부여잡고 개혁과 부흥으로 교회를 재정비하자. 동역자들이여, 주님이 이미 죽었거나 아니면 나날이 죽어가는 종교 제도나 관리하라고 우리를 부르셨는가? 진정한 기독교는 부흥 운동이다. 우리가 최종 권위라고 부르는 성경 속에 사도행전이 남아 있는 한, 우리는 그리스도가 주시는 권위에 의지해서 교회 안에서 끊임없이 갱신을 위해 노력해야만 하는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주의 방식으로 하시는 주님의 사역내 마음에서 결코 떠나지 않은 또 다른 문장은 프랜시스 쉐퍼가 쓴 ‘작지 않은 사람’(No Little People)에 있다. “우리는 주님의 일을 주님의 방법으로 해야만 한다.”(74) 나는 이것이야말로 우리 세대뿐 아니라 모든 세대가 당면한 결정적인 문제라고 믿는다. 나의 강점과 냉철함, 심지어 포스트모던이 가져다준 아이러니한 자기 조롱으로 주님을 섬긴다면, 그건 결코 주님을 섬기는 게 아니다. 그것은 주님을 섬긴다는 자만에 빠져 사실상 주님을 모욕하는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방법으로, 오로지 주님의 방법만을 의지해서 주님의 일을 한다면, 그분께서는 친히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우리 사역에 임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의 사역을 축복하신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의 사역을 친히 당신의 손으로 감당하신다면, 그것은 훨씬 더 놀라울 것이다. 이 둘의 차이는 겉으로도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이 세상의 주목을 받을 것이다. 처음에는 격변, 그리고 영광내가 가장 이야기하고 싶은 문장은 지금 소개한 두 문장이 이미 설정한 궤적을 따른다. 청교도 운동에 관한 책, ‘거룩의 추구’(A Quest for Godliness)에서 제임스 패커는 이렇게 썼다. 청교도의 관점에서 모든 교회가 미신 및 영을 그릇 인도하고 소멸시키는 모든 것의 뿌리를 뽑아야만 했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었다. 죄인이 구원받는 것도 오로지 이 영광을 위해서였으며, 또한 영적으로 활기가 넘쳐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들을 세워가는 이유도 모두 다 하나님의 영광 때문이었다(39).사역의 우선순위와 목회적 용기에 관해 강력한 비전을 선포하는 패커의 대담한 문장은 이사야서 40:3-5을 생각나게 한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이사야 예언의 논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먼저 어떤 것은 예비하고, 어떤 것은 재배치하며 또 어떤 것은 격변을 일으키고, 그 후에야 주의 영광이 나타나리라.” 이 세상은 주님의 영광을 맞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너무 많은 교회가 주의 영광을 위해 준비되지 않았다.역사 속에 드러나는 주님의 영광을 가로막는 장벽은 세상의 유행하는 혼란과 우리 교회의 형식에 찌른 예배 속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완전히 준비된 유일한 분은 오로지 그리스도 자신뿐이다. 패커는 그 점을 이해했다. 교회가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와 권능으로 충만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미신 및 영을 그릇 인도하고 소멸시키는 모든 것의 뿌리를 뽑아야만” 한다는 것을 그는 바로 이해했다.동역자여, 당신은 패커가 외치는 예언자적 소명을 받아들이겠는가? 우리는 더 적은 것을 갈망할 것인가?그렇다. 이 신성한 목적을 교회 안에서 추구하는 어리석고도 무모한 방법이 있다.생명을 고갈시키는 제도화의 모든 산을 낮아져야 하고, 상한 마음과 절망이 빠지는 깊은 계곡은 얕아져야 한다. 주님의 사역은 언제나 겸손하고 끊임없는 기도, 죄와 궁핍에 대한 정직한 고백, 그리고 위로부터 우리에게 내려오는 살아있는 권능으로 이뤄져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방식이다. 그러면 이 세대와 다음 세대에 걸쳐서 주님의 영광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날 것이다. 얻는 것이 더 적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이러한 확신을 마음에 새기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바꾸겠다는 목회자라면 내 아버지의 지혜가 도움이 될 것이다. 아버지는 목회 리더십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교인보다 한 걸음 앞서가면 리더가 될 것이다. 두 걸음 앞서면 선구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세 걸음 앞서간다면, 너는 순교자가 될 것이다!” 따라서 지혜의 길은 의도적으로 한 발, 또는 두 발만 앞서 나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신다. 당신도 참을 수 있다. 은혜에 의지해서 그냥 앞으로 뚜벅뚜벅 나아가라. 소명은 분명하다성경이 주는 지혜를 바탕으로 설득력 있게 인도하라. 교회를 이 높고 거룩하고 즐거운 방향으로 계속 인도해 나아가라. 죄인이 구원받는 것도 오로지 이 영광을 위해서였으며, 또한 영적으로 활기가 넘쳐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들을 세워가는 이유도 모두 다 하나님의 영광 때문이었다.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기도해야 한다. 노력해야 한다. 사역은 마라톤이다. 이렇게 사역하는 것이 매달 월급만 받으며 은퇴할 때까지 버티는 사역, 편안할지는 몰라도 무감각하기 이를 데 없는 사역으로 교회에 기생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낫지 않겠는가? 동역자여, 장애물은 현실이다. 나도 안다. 그러나 당신의 소명이 분명하다는 것도 나는 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를 책임지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여러분도 책임질 것을 나는 안다. 우리의 친구 패커의 문장을 다시 보자. 패커는 당신에게 새로운 마음을 넣었다! 주님께서 친히 당신과 함께 하실 것이다. 원제: The Lord’s Work in the Lord’s Way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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