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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살인마와 함께 천국에서 살 수 있을까?
by Rachel Joy Welcher
2022-10-13
로이 래트클리프(Roy Ratcliff)는 악명 높은 연쇄 살인범 제프리 다머(Jeffrey Dahmer)에게 세례를 준 목사이다.다머가 15건의 살인 혐의로 중복 종신형을 선고받은 후 래트클리프는 그를 방문해서 복음을 나누기 시작했다. 래트클리프에 따르면 다머는 하나님 은혜의 깊이를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고 한다. 그 이유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다머와 같이 극악무도한 짓을 한 사람에게 은혜는 불가능한 이야기처럼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1994년 스톤 필립스(Stone Phillips)와의 인터뷰에서 다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천국에 가서 확인하기 전까지야 그의 진심을 알 수 없겠지만, 우리 인생에서 가장 뒤틀린 연쇄 살인범 한 명이 은혜를 향해서 “주님, 고맙습니다”라고 말했을 가능성이 있다.그런데 당신은 다머를 천국에서 만나고 싶은가? 래트클리프는 다머와 함께 보낸 시간을 책으로 냈다. 아마존에서 책 설명을 훑어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은혜라는 게 항상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반영하지는 않는 게 분명하다. 한 독자가 이렇게 리뷰를 썼다:나는 당신이나 바로 위에 글을 쓴 사람이 천국에서 그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은 아예 말할 것도 없고, 애초에 왜 다머 같은 인간의 영혼 상태에 관심을 갖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난 그냥 소름이 돋을 뿐이다. 저자의 책과 평론을 읽은 몇몇 사람들은 하나님이 무엇이든 용서하실 수 있고 또 실제로 용서하신다는 사실과 그런 은혜가 자신들을 천국에 들여보낼 거라는 점에 희망을 느낀다며 감격한다. 도대체 그런 사람들은 얼마나 끔찍한 죄를 저질렀기에 다머 같은 사람이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갔다는 말에 ‘안도’하는 걸까? 물론 모든 사람이 이 리뷰를 쓴 사람의 감정을 공유하는 건 아니지만, 그의 글은 우리가 은혜를 생각할 때 가질 수 있는 한계가 어디까지인가에 대한 궁금증을 일으킨다. 우리는 하나님이 덕 다이너스티(Duck Dynasty)에 나온 족장 필 로버트슨과 같은 사람을 과거의 섹스, 마약, 로큰롤로부터 구원하신다는 사실에는 기뻐하지만, 피해자를 강간하고 죽이고 인육을 먹기까지 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는 똑같이 기뻐하지 않는다. 천국에서 브래드 피트(Brad Pitt)는 만나고 싶어 하지만, 행여라도 히틀러가 죽기 직전에 개종하지 않았기를 바라는 게 우리 마음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 소소한 우상숭배는 다 용서하시길 바라지만, 소아성애자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는 치를 떤다. 구원 여부가 인간의 결정에 달린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달렸다는 사실을 찬양한다. 나는 자비로움에 있어서 인색하기 짝이 없지만, 내가 섬기는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그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롬 10:13).바로 이런 사실 때문에 우리는 언젠가 제프리 다머 바로 옆에 서서 “거룩, 거룩, 거룩”하고, 그와 함께 찬양할지도 모른다. 이 사실은 다음 세 가지 이유로 나를 흥분시킨다.1. 내게 소망이 있다는 의미이다. 므낫세 왕에 대해 다들 들어봤을 것이다. 그는 아들들을 산 채로 불태웠고, 마법사와 마녀(해리 포터에 나오는 종류가 아님)와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가 왕이 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바알 숭배를 위한 “신당 재건”이었다. 그는 문자 그대로 두손 두발이 꽁꽁 결박당할 때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대하 33:10). 그러나 “므낫세는 고통을 당하여 주 하나님께 간구하였다. 그는 조상의 하나님 앞에서 아주 겸손해졌다. 그가 주님께 기도하니, 주님께서 그 기도를 받으시고, 그 간구하는 것을 들어 주셔서, 그를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시고, 다시 왕이 되어 다스리게 하셨다. 그제서야 므낫세는 주님만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깨달았다”(대하 33:12-13).므낫세 왕과 제프리 다머 같은 사람에게도 소망이 있다면, 여러분과 나에게도 소망이 있다. 나는 “도대체 그런 사람들은 얼마나 끔찍한 죄를 저질렀기에, 다머 같은 사람이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갔다는 말에 ‘안도’하는 걸까?”라고 아마존에 리뷰를 쓴 사람의 질문을 흥미롭게 받아들였다. 얼마나 끔찍한 죄냐고? 너무 많다. 나는 거룩하지 못했다. 나는 참지 못했다. 나는 내가 받은 자비를 확장하지 못했다. 나는 나의 창조주를 완벽하게 실망시켰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구원하신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은혜가 연쇄 살인범과 악한 왕에게까지 미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은혜에 대한 오해이다. 그것은 죄를 하찮게 여기고 하나님의 전능하신 선하심을 과소평가하는 교만이다. 2. 다른 사람에게 소망이 있다는 의미이다.내게는 목록이 하나 있다. 종이가 아닌 마음에 담아둔 것이다. 거기에는 내가 사랑하는,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하나님의 음성을 무시하고 영아를 죽였다는 므낫세의 이야기를 읽을 때면 내 죄가 생각난다. 그리고 나는 목록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매달리지 않는 한, 영원한 형벌을 짊어질 것임을 나는 안다. 그들이 므낫세와 같이 하나님께 복종하고 스스로 겸비하여 그의 얼굴을 구하지 아니하면 은혜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도 은혜가 있음을 기뻐한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회개하고 돌아와서, 죄 씻음을 받으십시오. 그러면 주님께로부터 편히 쉴 때가 올 것이며,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위해서 미리 정하신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보내실 것입니다(행 3:19-20).나는 그들이 그리스도께 매달림으로써 하나님께 굴복하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인해 기뻐한다. 그들은 용서받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소망이 있다. 히브리서 7장에서 예수님은 완전한 대제사장으로 묘사된다. 그의 죽음 때문에 이제 우리에게는 매일 치러야 하는 희생이 더 이상 필요 없다. 그만큼 그의 제사가 완벽하기 때문이다. 이전의 모든 희생이 이루지 못한 것, 즉 죄에 대한 속죄가 영구적이고 단번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을 완전하게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는 늘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중재의 간구를 하십니다(히 7:25).“완전하게”(To the uttermost)를 어떤 번역자는 “온전히”(completely) 또는 “영원히”(forever)라고 표현했다. 여기에는 그 어떤 주의 사항이 없다. 살인. 동성애. 유아 살해. 우상숭배. 그 어떤 죄를 저질러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갈 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에는 조금도 위협이 되지 않는다. 나와 당신이 전도하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이 다 자비의 후보자이다. 하나님께서 므낫세나 다머 같은 죄인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으신다면, 우리에게뿐 아니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소망이 없다.3. 하나님이 모든 영광을 받으신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 담긴 넘치는 풍요함은 우리의 부족함을 드러낸다. 우리는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며, 이 사실에 불편함을, 심지어 굴욕감을 느끼는 교만한 사람도 있다. 죄를 물리치는 일에 관해서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승리하신다. 선물 받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감사한 미소 대신에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는데”라고 말한다. 자비가 축복이 아니라 빚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이것은 지독한 교만이다. 어느 목사가 최근 설교에서 이렇게 상기시켰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는 그 어떤 꼼수나 속임수가 없다. 당신은 오로지 선물로 받기만 하면 된다.”우리가 예수님의 족보를 만들 수 있다면, 어떤 사람들로 채울지가 궁금하다. 확실히 라합(마 1:5), 다윗의 가장 치욕적인 죄(마 1:6) 또는 므낫세 왕(마 1:10)과 같은 부류의 인간은 결코 넣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분명히 가장 좋아하는 성자를 선택해서, 그런 성자들로 족보를 채울 생각에 흐뭇해할 것이다. 그러나 은혜가 무엇인지 정의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은혜의 경로와 길이와 깊이를 표시하신다. 마가복음 2:7에서 율법학자들은 제대로 된 질문을 던졌다. “하나님 한 분 밖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 아무도 사할 수 없다. 그리고 기억하라. 하나님은 당신이 아는 최악의 사람에게조차도 용서를 베푼다. 돌에 맞아 죽은 스데반의 기도는 특별하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행 7:60, cf. 눅 23:34).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은 사울의 반응이다. “사울은 스데반이 죽임 당한 것을 마땅하게 여겼다”(행 8:1). 바울로 더 잘 알려진 사울의 회심과 그 이후의 사역은 하나님의 끊임없는 은혜에 대한 역사상 가장 강력한 사례의 하나이다. 무자비한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사랑할 줄 모르는 자에게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나와 같은 반역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원제: Sharing Heaven with Serial Killer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제프리다머
천국
용서
자비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회고와 반성, 그리고 도약
기독교 세계관 운동 2.0을 위하여
by 김경호
2022-10-12
기독교 세계관 운동 2.0 위하여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SIEW)과 함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섭니다.회고: 1970-2003년까지 국내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시작은 1970년대부터입니다. 인물로는 손봉호 교수와 문서 선교사인 웨슬리 웬트워스(Wesley Wentworth)를 통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목적은 기독교 세계관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는 데 있습니다.그 이후 1980년대부터 본격적인 세계관 모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첫 모임은 1980년 초, 당시 IVF 사무실에서 제임스 사이어(James W. Sire)의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 사상을 읽고, 토론 모임을 가진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세계관 모임의 1세대는 강영안, 김헌수, 송인규, 신국원, 양성만, 오창희, 이승구, 이정석, 황영철, 홍병룡이었습니다. 세계관 모임이 얼마나 활발하게 진행되었는지, 당시 원서의 출판과 번역이 늦게는 5년, 빠르면 2, 3년 만에 나왔다는 점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당시 기독교 세계관은 1970년대 광주사태와 마르크시즘을 중심으로, 사회변혁의 논리를 치열하게 전개하던 상황에서, 나름의 “대안적 이론”으로 기대감을 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정체 경향을 보이게 됩니다. 그 이유는 원년 멤버들이 유학과 취업으로 흩어졌고, 세계관 각론이 나오지 않으면서, 기독교 세계관의 관점에서의 문화 분석은 거의 방어적으로, “영적 비평”(사탄의 문화)이라는 형태로 비약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1990년대 기독교 세계관은 원론을 반복하는 것 외에 이론적 측면에서나 실천적 측면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내어놓지 못했습니다. 이로 인해 기독교 세계관의 효용성에 대한 의문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기독교 세계관은 위기를 맞게 됩니다. 이 위기에 대한 인식은 2002년 ‘복음과 상황’, 2003년 ‘신앙과 학문’에서 표출됩니다. 먼저, 2002년 ‘복음과 상황’에서 일어난 비판과 제안은 다음과 같습니다. 박총은 기독교 세계관이 원론에 머물러있고 인지-명제적 접근법만 사용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기독교 세계관을 “명제성”에서 “생생한 이야기”로 되살려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최태연은 모던-명제성과 포스트모던-이야기라는 등식은 지나친 단순화라고 비판하고, 모던과 포스트모던은 분리되지 않고 연결되어 있다고 제안했습니다. 양희송은 세계관의 문제가 내러티브적 성격을 포착하지 못하고 명제화하는 작업을 주된 과제로 설정함으로써, 최종 목표가 그것을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인식하는 것”에만 머물렀다고 비판하면서, 그 대안으로 내러티브만이 살아내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정정훈은 기독교 세계관이 이원론을 극복하지 못했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현실 속에서는 그리스도인들끼리 모이는 단체,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의미를 가질 수 있는 논리를 바탕으로 기독교 내부와 외부의 경계선을 긋고 그 내부에만 머물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따라서 먼저 타자의 얼굴을 솔직하게 대하고, 소모적인 논쟁보다는 서로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고 대화해 보기를 제안했습니다. 이원석은 기독교 세계관이 가장 우월한 세계관이고, 한국 교회에 가장 적합한 세계관이 아니라고 비판하면서, 세계관의 다양성을 제안했습니다. 2003년 ‘신앙과 학문’에서 일어난 비판과 제안은 다음과 같습니다. 최태연은 개혁주의 세계관이 기독교 세계관의 전부일 수 없다는 점, 기독교 세계관을 구체화하려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점, 그리고 실천을 위한 전략과 행동이 부족했다는 점을 비판했습니다. 그 대안으로 함께 연구하고, 다양한 연구자원을 넓혀 가야 한다고 말하며, 결국 다양한 세계관 가운데 가장 많은 영향력을 미치는 세계관 쪽으로 결정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김기현은 세계관 운동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고, 사회 참여의 근거는 창조가 아니라 십자가이며, 세계관의 문제는 이원론보다 혼합주의라고 비판하면서, 이에 대해 다양한 변혁 모델 가운데 상황에 맞는 것을 선택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양희송은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개혁주의 신학에 의해 독점되고 있고, 창조-타락-구속이라는 개념적 틀에 여백이 많으며, 세계관의 개념 자체가 느슨하게 정의됨으로써 가지는 오해나 왜곡이 많다고 비판하면서, 이론은 그만하고 실천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이승구는 기독교 세계관을 없애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 비판하면서, 그 없애야 하는 것이 용어라면 상관없지만, 내용이 비성경적인 것이 아니라면 그대로 사용해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또한 기독교 세계관의 표현, 제시 방식을 내러티브로 바꾸자는 비판에는 동의하지만 그 내러티브는 명제성과 함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보았고, 이러한 세계관은 반드시 성경의 가르침이 기준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는 일이 그 방향이어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이상의 2002년과 2003년의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비판과 제안은, 비판을 통해 위기의식을 가지면서, 동시에 여러 다양한 제안들을 통해 탈출구를 찾았고, 그 이후 반성과 도약의 발판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반성: 무례한 말투, 무례한 전투, 무례한 태도! 또는 잘난 척, 거룩한 척, 완벽한 척! 헤르만 도예베르트(Herman Dooyeweerd)는 자신의 저서인 서양 문화의 뿌리에서 이론적 탐구가 반박보다는 신뢰를 추구하는 대화의 길이자 자기 검토의 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비-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나 많은 무례함을 보여 왔습니다. 리차드 마우(Richard J. Mouw)는 이것을 무례한 말투, 무례한 전쟁, 무례한 태도라고 부르며, 그 사례를 소개합니다. 무례한 말투의 예로, 마우는 귀담아들으시는 하나님을 강조합니다. 교회는 언어 사용에 있어서 모델 공동체가 되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우는 17세기 청교도와 퀘이크교도 사이의 논쟁을 하나의 본보기로 보여줍니다. 리차드 박스터(Richard Baxter)는 한 팸플릿에서 퀘이커 교도들을 향하여 이렇게 모욕했습니다. “술주정뱅이, 욕쟁이, 호색가, 음탕한 자들, 교황 절대주의자보다 나을 것이 없다.” 반면에 퀘이커 지도자인 제임슨 네일러(James Naylor)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청교도들의 비난에 응수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며, 청교도들을 “뱀, 거짓말쟁이, 마귀의 자식, 저주받은 위선자, 멍청한 개망나니”라고 말했습니다. 무례한 전투의 예로, 마우는 무례한 말투 안에는 십자군식 의식구조, 즉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무례한 전투가 포함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결국, 무례한 태도란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들에게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데이비드 키네먼(Davie Kinnaman)과 게이브 라이언(Gabe Lyons)은 나쁜 그리스도인에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외부인들이 보기에 어떻게 비치는지를, 잘난 척, 거룩한 척, 완벽한 척이라고 요약하고 있습니다. “외부인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반감을 느끼는 이유는 어떤 신학적 입장 때문이 아니다. 그들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주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잘난 척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이 비-그리스도인들과의 대화에서 그들만의 잘난 척하는 분위기가 분명히 있습니다. “거룩한 척하는 가면을 쓰고 싶은 유혹은 죄를 짓지 않는 일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다른 중요한 신앙의 우선순위들과 균형을 이루지 못할 경우 자신만 우월하고 완벽한 척한다는 이미지를 풍기게 될 소지가 있다.”도약: 정체성, 다양성, 그리고 경계-투과성 지금까지 세계관의 회고와 반성이 이런 수준이라면, 우리의 세계관도 잘못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아야 합니다. 브라이언 왈쉬(Brian J. Walsh)는 기독교 세계관도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습니다. ‘세계관이 어떻게 억압적 이데올로기로 바뀔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왈쉬는 다섯 가지로 답합니다. 첫째, 세계관이 전체 체계로 간주되며, 세계관 자체를 지나치게 강조하게 될 경우 억압적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 둘째, 세계관이 보편적 최종성을 대표할 때 억압적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 셋째, 세계관이 성경적 역학성을 잃을 때, 억압적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 즉, 방향, 방향 상실, 재방향이라는 이러한 요소를 잃어버릴 경우다. 만일 방향을 상실하게 될 때, 그 방향을 재설정할 수 있어야 한다. 재방향을 통해 세계관이 수정될 수 있어야, 세계관은 활력, 힘, 통찰력의 깊이를 가지게 된다. 넷째, 세계관이 변화하는 문화적 맥락에 부적절하거나 논리에 맞지 않을 때, 억압적 이데올로기가 된다. 다섯째, 세계관은 자기-폐쇄적 기독교 공동체에서 안전에 대한 방어적 정신을 섬길 때, 억압적 이데올로기가 된다. 따라서 나는 세계관의 도약을 위해, 정체성, 다양성, 그리고 경계-투과성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정체성이란 “개혁주의 세계관의 입장”을 의미합니다. 이런 개혁주의를 정체성으로 표현하는 세계관으로는 2003년부터 이승구의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2005년 신국원의 니고데모의 안경, 2008년 송인규의 새로 쓴 기독교, 세계, 관, 2020년 최용준의 성경적 세계관 강의 등이 있습니다. 또한 다양성이란 “기독교 세계관의 입장”을 의미합니다. 기독교란 넓은 범주의 종교를 의미합니다. 개혁주의보다 범위가 넓고 다양합니다. 양희송의 세계관 수업은 이러한 다양성을 대표하는 책입니다. 그는 다양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첫째, 세계관은 “관”으로만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청,” 세계“미,” 세계“향”으로도 표현될 수 있습니다. 둘째, 세계관은 명제성이 아니라 이야기를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세계관은 명제보다 이야기를 통해 더 잘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셋째, 이런 다양성과 이야기성에 따른 세계관의 판별 기준은 복잡성을 감당해 낼 역량, 그리고 자기 오류 불가능성에 반대하는 자기성찰능력입니다. 경계-투과성은 개혁주의와 기독교 세계관의 범주 외의 비주류 세계관을 의미합니다. 경계-투과성은 개혁주의와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 많은 비판점을 가진 세계관입니다. 그러나 나는 소수의 입장이라 하더라도 성경의 관점을 조금이라고 반영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을 정체성이나 다양성 안으로 투과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전성민의 세계관적 성경읽기는 이러한 경계-투과성을 대표하는 책입니다. 그는 경계-투과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첫째, 경계-투과성은 중심이 아니라 변두리가 우리의 선입견을 깨뜨리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둘째, 경계를 넘는 힘은 바깥과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나타난다. 즉, 우리의 삶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과 끊임없는 교류가 필요하다. 셋째, 이러한 노력에는 고집이 아니라 겸손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성경 읽기가 자기 확신 강화제, 즉 고집으로 읽혀서는 안 된다.”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는 정체성과 경계선에 대한 해결책을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경계가 없다면 한 집단은 정체성을 잃고 그 집단이 누릴 수 있는 영향 자체를 포기하는 셈이 된다. 그렇지만 기독교 공동체가 경계를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높은 장벽과 같아서는 안 된다. 그 경계는 소통을 위해 열려있어야 한다. 그래야 변화를 위해 참여할 수 있고 밖에 있는 아름다움을 인식하기도 하고 그로부터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이 도약의 발판을 딛고 좀 더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아가 봅시다!
세계관
기독교세계관운동
급진적으로 일상적인 환대는…
by Rosaria Butterfield
2022-10-11
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낯선 사람을 이웃으로, 이웃을 하나님의 가족으로 여긴다. 그들은 인간을 범주나 부류로 축소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세상 모든 사람의 눈빛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본다. 그들은 자신이 마약 중독자, 성매매자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기심과 교만을 비롯해 자신의 모든 죄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선하심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어떤 상황에서도 성경을 생명줄로 여겨 굳게 붙잡는다.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을 베푸는 사람들은 자기 집을 자신만의 전유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데 사용해야 하는 그분의 선물로 생각한다. 그들은 대문을 활짝 열고 사회적, 경제적으로 혜택받지 못한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그들은 자기 집의 문을 활짝 열면 복음을 그들에게 가져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기독교의 신조와 신앙고백과 전통은 물론, 성경적인 신학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다.우리집에서는 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을 베푸는 일이 일상화되어 있다. 그 일은 이른 아침에 한쪽 불로 야채수프를 끓이고, 다른 쪽 불로 밥을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 늦은 저녁에 나의 남편 켄트가 갈 곳이 없는 가족을 위해 소파 위에 잠자리를 만들고, 에어매트리스에 공기를 넣어 펴는 것으로 끝이 난다. 진정으로 손 대접을 베푸는 사람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식탁 교제를 베풀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기꺼이 맞이한다. 그런 사람은 섬길 기회를 찾는다. 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은 무엇을 공들여 갖추어 놓거나 요란하게 초청장을 내밀지 않는다. 초청의 문은 항상 열려 있다.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은 1세기의 그리스도인 가정을 닮은 가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런 가정은 공동체적이며, 기독교적 전통과 실천을 넓고 깊게 펼쳐 나간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구별된 백성이다. 우리는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는 믿지 않는 이웃들이 우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걱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의 식탁을 함께 공유하며, 그곳에서 자신의 생각을 우리에게 말하는 것을 행복하게 여기기 때문이다.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을 베풀려면 하루 중에 약간의 여유 시간, 곧 일상의 루틴이 파괴되지 않으면서 잠시 짬을 낼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 둘 필요가 있다. 나이 든 이웃을 병원에 모시고 가거나 이웃의 아이를 잠시 돌봐주거나 홍수나 세계적인 난민 위기로 인해 살 곳을 잃은 가족들의 임시 거처를 만들어주는 일 등,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위해 언제라도 시간을 낼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을 베풀려면, 돈을 버는 족족 다 써버려서는 안 되며, 남에게 나눠줄 것을 많이 남겨 두어야 한다.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을 베푸는 삶에는 주인과 손님이 따로 없다. 당신이 우리집에 저녁 식사를 하러 와서 내가 아직 아이에게 수학을 가르치고 있는 것과 내 세탁물이 식탁 위에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놓여 있는 것을 보면, 당신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세탁물을 정리하거나 식탁을 차리거나 식기세척기를 돌리거나 개들에게 먹이를 주기 시작한다. 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을 베풀려면, 주인은 도움을 받더라도 당혹스러워하지 말아야 하고, 손님은 도움이 필요한 곳에 기꺼이 힘을 보태야 한다. 매일 함께 모이는 하나님의 가족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주인과 손님은 스스럼없이 서로 도울 수 있다.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행해지는 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은 날마다 함께 모이며, 꾸준히 기도한다. 초대는 필요 없다. 그리고 아직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불러 음식을 대접하고, 교제를 나눈다. 이 땅의 좋은 것이 좋은 것으로 보여진다.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혼자 사는 삶을 선택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만성적인 외로움으로 고통받을 필요는 없다.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을 베풀려면 순종의 희생을 감당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순종의 희생을 향해 부름받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자비로운 존재로 생각하지 않으므로, 하나님에게 죄를 짓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위반하라고 사람들을 부추기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그런 일을 보면 크게 슬퍼한다. 우리는 무겁고 힘든 십자가(죽음처럼 느껴지는 자기 부인)를 짊어지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음을 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제한된 능력을 의지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무언가를 명령하실 때는 그것을 행할 수 있는 은혜도 함께 허락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물론 어려움을 혼자서 감당하기는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가족은 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을 삶으로 구현해 나가면서, 어려움과 기쁨을 함께 공유한다. 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은 고난을 동반한다.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을 베푸는 사람들은 식사 자리에서 서로 다른 세계관 때문에 다투지 않는다. 진정으로 관대한 사람들은 자신과 많이 다른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세상의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용납과 승인의 차이를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용감하게 받아주고 존중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우정을 곡해할까 봐 걱정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식사를 하셨지만 그들과 함께 죄를 짓지는 않으셨다. 그분은 세상에서 살았지만 세상 사람들처럼 살지는 않으셨다. 이것이 예수님의 역설이고, 복음을 전하고 실천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꺼이 고난을 받는 사람들, 곧 겉모습보다는 내면의 인격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의 특징이다.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을 베푼다는 것은 하나님의 가족들과 굳센 관계를 맺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도 견고한 관계를 맺는 데 시간을 할애하는 것을 의미한다. 위선자와 겁쟁이들은 관계보다 말이 앞선다. 그런 사람들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몰래 문화 속으로 침투하거나 동네에서 깐깐한 도덕군자인 척 행세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교화하려 든다. 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냉소적인 탈-기독교 세상에 참된 기독교를 분명하게 보여준다.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은 예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믿는 믿음의 증거를 드러낸다. 그런 손 대접은 정치나 문화나 시사 문제에 관한 다른 사람들의 견해에 지나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런 손 대접은 회심이 무슨 의미인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정체성이 무엇인지, 회개를 통해 어떤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는지에 관심을 집중한다. 그런 손 대접은 죄가 기만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속는다는 것은 악의 세력에 사로잡혀 그것이 시키는 대로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은 사람들의 진정한 필요를 본다. 사람들은 단지 좋은 선택을 독려하는 격려의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죄에서 구원받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깊이 이해한다. 그런 손 대접은 예수님이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서 통치하신다. 급진적으로 일상적인 손 대접은 한때 자기를 유혹하고 속박하면서 충성을 바칠 것을 요구했던 죄가 지금도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더라도 더 이상 죄에 굴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통해 빛을 발한다.이 글은 로자리아 버터필드, 복음과 집 열쇠(개혁된실천사)의 머리글 일부를 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간추린 것입니다.
손대접
환대
가정
가정교회
복음과집열쇠
죽도록 ‘밈’하기
by Peter Biles
2022-10-10
인스타그램을 별 생각 없이 스크롤하고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 LOTR) 게시물 몇 개에 “좋아요”를 눌러놓고 무슨 일이 생기는지 한번 보라. 이제 내 피드에는 자연스럽게 LOTR 밈(memes)으로 넘칠 것이다. 되돌릴 방법은 없다. “재미있거나 흥미로운 항목(예: 캡션이 있는 사진 또는 비디오) 또는 특히 소셜 미디어를 통해 온라인에 널리 퍼진 장르”라고 밈을 정의할 수 있다. 밈이라는 하위문화는 이상하고 종종 무섭기까지 하다. 단지 만화 캐릭터로 시작했던 눈이 튀어나온 녹색 개구리 페페(Pepe the Frog)는 결국 백인 우월주의의 상징으로 변했다. 그 어떤 사진도 어떻게 편집하는가에 따라서 얼마든지 원하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하나의 원본 이미지 또는 비디오는 얼마든지 수천 개의 메시지를 위한 사료가 될 수 있다.밈 소재는 단지 영화와 쇼에 국한되지 않는다. 구글에 “칼뱅주의 밈”(Calvinism memes) 또는 “침례교 밈”(Baptist memes)라고 쳐보라.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성경과 예수님조차도 밈을 통해 얼마든지 모자라고 나사 하나가 빠진 존재로 만들 수 있다.대부분 사람에게 밈은 순수하고 재미있다. 그러나 밈을 지나치게 섭취하면 문제가 있다. 개구리 페페와 같이 사악한 예가 명백한 예이다. 그러나 내가 더 관심을 가지는 부분은 밈이 되어버린 삶(meme-ification)에 의해 조금씩 달라지는 미묘한 변화이다. 아이러니와 유머에 너무 중독되어 우리 눈에 세상이 마냥 농담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떻게 될까? 밈의 제왕LOTR에서 찾는 밈 구절(The LOTR meme-verse)은 한동안 내 일상에서 단골 유머가 되었다. 인스타그램에서 “The Meme Havens”라는 LOTR 밈 계정도 시작했다. 다행히도 내 팔로워는 아직 12명을 넘지 않는다. 그 정도면 문제될 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반지의 제왕을 다시 보니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반지의 제왕 속 모든 장면이 인스타그램 속 밈의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온라인에서 본 기발한 말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채 10분을 보낼 수 없을 지경이었다. 프로도가 반지 원정대에서 처음 간달프를 보았을 때, 소년 같고 천진난만한 그의 표정을 기억하는가? 그의 표정은 참으로 풍부한 밈의 소재가 되었다. 그 표정과 필적할 만한 것으로는 그리버스 장군을 향해서 오비완케노비(Obi-Wan Kenobi)가 던진 상징적인 인사, “거기, 안녕하신가?” 정도가 될 것이다. 일단 밈의 관점에서 파악하게 되면, 이제는 아무리 같은 장면을 봐도 결코 진지하게 대할 수 없게 된다. LOTR은 놀라운 영화적 성취이다. 반지의 제왕을 보면서 울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러나 이제는 경외감, 기쁨과 즐거움이 그만 밈으로 물들고 말았다. 이 걸작 영화가 그만 천 개의 밈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하나의 농담이라는, 위기에 봉착했다.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로 밈을 만드는 것은 지금까지 별문제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밈이라는 아이러니로 덮어버리는 건, 아름다움과 선함이 우리에게 미칠 수 있는 좋은 영향까지도 약화시킨다. 모든 것을 밈으로 만드는 세상오피스(Office) 및 팍스앤레크리에이션(Parks and Recreation)과 같은 TV 프로그램이 많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시청자는 서로의 관계 때문에 드라마를 시청한다. 짐과 팸. 레슬리와 벤. 앤디와 에이프릴. 마이클과 토비(농담이다). 이런 드라마는 유머와 인간미의 균형을 보여준다. 진지한 관계와 진실한 순간은 시시껄렁한 농담이 침범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를 드라마 속 인물과 연결한다. “사실 모든 게 항상 농담이야”라는 유머가 재미있을지는 몰라도, 그런 식의 대화는 결코 우리를 풍요롭게 만들지 못한다. 내 아버지는 LOTR을 읽는 것을 추운 곳에서 몇 시간을 보낸 후 뜨거운 목욕을 하는 것에 비유하곤 했다. 그건 휴식, 회복, 그리고 치유의 행위이다. 책과 영화에서 내가 느껴온 것이 바로 그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야기와 등장인물이 밈으로 바뀌는 순간, 뜨겁던 물이 미지근해진다. 여러 층의 아이러니는 쾌락보다 아름다움이, 패러디보다 진실이, 그리고 만족보다 선함이 필요하다는 사실마저 잊게 한다. C. S. 루이스는 친구이기도 했던 톨킨의 이 걸작을 놓고 이렇게 말했다. “여기 칼처럼 찌르거나 차가운 쇠처럼 타오르는 아름다움이 있다. 여기 당신의 마음을 부숴버릴 놀라운 책이 있다.”아름다움이 없으면 마음은 굳어진다. 즐거울지는 몰라도, 더 이상 “깨지기 쉬운” 상태는 아니며, 더 이상 톨킨의 날카로운 말에도 녹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런 마음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빈 웅덩이모든 것의 밈화(meme-ification)의 기저에 있는 것은 일반적인 의미의 상실이다. 우리는 굳이 더 이상 객관적인 의미가 존재하는지 찾으려고 하지 않을지 모른다. 의미가 부과하는 무게에도, 또 서서히 드러나는 진실의 느린 복잡성에도 시간을 들이지 싶어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것을 무의미한 오락으로 축소한다. 그것을 성경의 용어로 표현하자면(렘 2:13), 우리는 물을 저장하지 않는 웅덩이를 파고 있으며 또한 내 영혼에 물주기를 거부하고 있다. 영국 철학자 고 로저 스크러튼(Roger Scruton)은 아름다움에 관한 책에서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아름다움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아름다움이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고 있다. 그렇게 사는 이유는 우리가 희생의 습관을 잃어버렸고 항상 희생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기 때문이다. 키치와 신성 모독에 빠진 우리 시대의 거짓 예술은 그런 우리의 현실을 드러내는 표시 중 하나이다.”누구나 모든 것을 농담으로 바꾸는 사람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나도 그런 사람이었다. 대학에 가기 위해 집을 떠난 이후 처음으도 다시 집에 갔을 때 나는 많이 우울한 상태였지만, 가족과 친구들 앞에서 농담을 안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소란스러웠고 또 다른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이 괜찮다는 식으로 형들과 함께 계속해서 유머를 지껄였다. 그것은 상실감과 부서진 마음 그리고 향수병에 대처하는 나의 방법이었다. 또한 무의미함을 만회하려는 나의 방식이기도 했다. 대학에서 보낸 4년 중 3년 동안 진짜로 웃은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얕은 유머에 빠진 나는 울고, 애도하고, 또 희생해야 할 때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유머가 나 자신과 사물 속 진실 사이를 갈라놓는 완충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경험을 통해 너무도 잘 안다. 그러나 세계 최고의 문학과 예술 작품을 심도 있게 접한 후, 나는 인간이 인간답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밈이 아니라 의미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소셜미디어 피드에서 웃을 수 있는 일회용 농담이 아니라, 인생을 걸고 추구할 초월적인 목적(telos)이다. 스크롤할 사진(GIF)과 리트윗할 밈뿐 아니라, 우리에게는 지켜내야 할 곤도르뿐 아니라 싸워야 할 적, 모르도르까지 필요하다. 아이러니가 경외감을 무디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밈을 봐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제대로만 사용되면, 밈은 최고의 풍자와 진정한 창의성이라는 긍정적인 출구를 제공한다. 내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은 Obi-Wan Memobi라는 스타워즈 밈 계정을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Angry Anakin 밈은 조롱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는 밈이 세상에 대한 당신의 인식을 어떻게 바꾸는지, 그래서 하나님의 활기찬 창조 세계와의 만남을 어떻게 둔감하게 만드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톨킨처럼 가톨릭 신자였던 체스터턴(G. K. Chesterton)은 “감사는 경이로움 때문에 두 배가 되는 행복”이라고 썼다. 성경을 읽고 그리스도를 묵상할 때 우리 안에서 경이로움과 감사가 자라는 것처럼, LOTR을 읽은 후 우리 안에 남아야 하는 것도 경이로움과 감사가 되어야 한다. 지나친 아이러니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속 드라마 안에서 살고 있다는, 이 삶의 중대함에서 멀어지게 만들 수 있다. 풍자는 신성함을 보는 우리의 눈을 멀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창조물을 보다 명확하고 덜 냉소적으로 보는 눈을 가질 때, “왕의 귀환” 마지막 장면 속 프로도처럼 우리도 우리를 기다리는 천국의 끝자락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회색 장막이 온통 은빛 유리로 변하더니 뒤로 젖혀졌다. 그는 하얀 해안과 빠른 일출 아래로 멀리 푸른 나라를 보았다.”원제: Meme-ing Ourselves to Deat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반지의제왕
밈
세속문화
온라인문화
의미
미디어
진지함
농담
아우구스티누스는 칭의를 잘못 이해했는가?②
개혁자들과 함께 아우구스티누스 읽기
by Zach Howard
2022-10-09
요약: 장 칼뱅 같은 개혁자들이 성경을 빼고 가장 많이 인용한 사람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이다. 그들은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의 다른 주장보다도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는 것이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은혜라는 진리를 이 교부가 어떻게 옹호했는지에 관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참고했다. 그렇지만 개혁자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교리에 관해서만은 이 위대한 교부에게서 원하는 만큼의 명료성을 찾지 못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칭의의 의미를 체계적으로 다루지 않았으며, 그의 저작을 주의 깊게 읽으면 그가 이 교리를 다루는 데 있어서 모호함을 드러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의에 관해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안점을 두는 것은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신다(declaring)는 점이 아니라, 의롭게 만드신다(making)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료성을 중시하는 종교 개혁자들에게는 아무리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을 의롭다 하심의 유일한 근거가 되는 그리스도의 의를 부정하지는 않았더라도, 이런 식의 교리 표현 방식을 모호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목회자, 지도자, 교사를 위한 특집 기사 시리즈를 위해서 우리는 베들레헴 신학교에서 신학 및 인문학 조교수로 일하는 잭 하워드에게 아우구스티누스의 칭의 교리를 탐구하도록 요청했다.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_이해 1. 인간의 본성에 대한 치유로서의 칭의 2. 경건하지 않은 자를 경건케 만드는 칭의 3. 사건과 과정으로서의 칭의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_평가 1. 칼뱅의 아우구스티누스 칭의론 평가 2. 믿음과 사랑의 관계 3. 은혜의 면류관을 씌우시는 하나님2. 경건하지 않은 자를 경건케 만드는 칭의하나님의 해결책이 인간 본성의 변화에 있다고 아우구스티누스가 믿었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 구원에 대한 그의 모든 표현은 궁극적으로 그 해결책을 변화(transformative)에 두고 있다. 왜냐하면 성경이 우리가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고후 3:18)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현대 개신교인이 특히 놀라는 사실은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러한 변화를 구원이라는 단어가 아닌 칭의라는 용어와 더 자연스럽게 연결했다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한 데에는 특정한 언어적이고 주석적인 이유가 있다. 그는 성경에서 칭의와 관련해서 사용되는 라틴어 용어를 “의롭다고 선언된”(declared righteous)이 아니라 “의롭게 된”(made righteous)으로 이해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대 라틴어 성경은 그리스어 ‘디카이오오’dikaioō를 정당화하다iustifico로 번역했으며, 그는 이 용어를 문자 그대로 사용했다.[11] 한 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라틴어 번역에 철저하게 의존한 아우구스티누스는 바울이 불의한 사람이 의롭게 되었다(made)라고 말한 것으로 잘못 이해했다.”[12] 아우구스티누스는 ‘영혼과 편지’(Spirit & Letter)에서 칭의iustificatio와 관련해 로마서 4:5을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의롭게 되었다’가 아니라면 ‘의롭게 되다’에서 무슨 의미가 가능한가? ‘그가 의롭게 하셨다’는 말은 결국 의롭지 않은 자를 ‘의롭게 만드셨다’는 의미가 아닌가?”[13] 아우구스티누스는 바울의 용어인 디카이오오를 오해했고, 그 결과 칭의를 선언적 의미(하나님이 경건하지 않은 자를 면해 주신다)보다는 주로 변형적 의미(하나님이 경건하지 않은 사람을 의롭게 하심)로만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영혼과 편지’의 같은 부분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칭의에 대한 다른 의미, 즉 “의롭게 여김을 받음‘(counted righteous)을 인정한다.[14] 그는 칭의에 대한 대안적 해석을 이렇게 제시한다. “그들이 의롭게 여겨질 것이라는 의미에서 볼 때, 그들은 의롭다고 간주될 것이고 따라서 그들이 의롭게 될 것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의롭다 하려는 것(눅 10:29)은 결국 의롭다고 여겨지고 또 그렇게 인정받고 싶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 아우구스티누스는 독자들이 죄를 씻어내다(sanctify)라는 단어를 “거룩하게 만들다”(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일)와 “거룩하다고 선언하다”(마 6:9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말씀)를 모두 의미하는 것으로, 그 용어에 대한 이해 방법을 비교한다. 그의 요점은 sanctify라는 단어가 ‘만들다’와 ‘선언하다’를 모두 함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굳이 이런 구분을 왜 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도 또한 그 의미를 발전시키거나 성경의 다른 구절과 연결한 추가적인 설명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 따라서 비록 아우구스티누스가 칭의 속에 선언적 의미까지 들어있다는 점을 받아들이지만, 그가 가진 칭의에 대한 일차적 이해는 하나님이 인간의 본성을 치유하심으로써 경건하지 않은 사람을 의롭게 만드신다는 데에 있다고 결론 내리는 것이 적절하다. 따라서 다음 질문이 따라온다. 만일 칭의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이해가 “의롭게 되는 것”이고, “의롭게 되는 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발생하는 내적 변화를 요구한다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형상 안에서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의롭게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인가? 11.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는 아우구스티누스가 iustificare를 “의롭게 된”이라는 변형적인 의미로 해석한 이유에 대한 추가적인 언어학적 이유를 지적한다. 여기에는 이 용어가 오로지 라틴 서부의 기독교 저자들이 사용하는 “탈고전적”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아우구스티누스가 iustificare의 의미를 명확히 하기 위해 고전 작가들을 참고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다. Iustitia Dei: A History of the Christian Doctrine of Justification, 4판 참조.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0), 46-47. 12. Robert Dodaro, “Justice,” in Augustine Through the Ages: An Encyclopedia, ed. Allan D. Fitzgerald (Grand Rapids: Eerdmans, 1999), 481?83.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서 5장에서 “의롭게 하고 정당화하는”이라는 문구를 설명하면서 iustificare라는 용어를 문자 그대로 읽는다: Sicut vivificans vivum faciens, sicut salvificans salvum faciens, sic et iustificans iustum faciens. 여기서 라틴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독서가 지닌 문자주의를 보여주지만 영어로 번역하기가 어렵다. 한 번역가는 그것을 이렇게 번역한다. “생명을 살리는 자가 살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또한 구원자가 되는 것이 안전하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의인이 된다는 것은 칭의를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See sermon 130A.3 (WSA 3.11:120n10). 13. The Spirit & the Letter 26.45 (WSA 1.23:172). Quid est enim aliud, iustificati, quam iusti facti, ad illo scilicet qui iustificat impium, ut ex impio fiat iustus? 14. 이 구절에서 “간주된” 또는 “전가된” 의인에 대한 설명 외에도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세기 15:2을 암시하거나 인용한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에게는 의로 간주되었다.” 그 외에, The Punishment and Forgiveness of Sins and the Baptism of Little Ones 1.18; The Deeds of the Pelagians 14.34; Expositions of the Psalms 70(71).2.4.등을 참조하라. 그러나 그는 어디에서도 법적 의미에서 전가의 개념을 설명하지 않으며, 창세기 15:12 또는 로마서 4:5와 같은 텍스트를 설명하면서조차 그 의미나 중요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원제: Did Augustine Get Justification Wrong?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아우구스티누스
칭의
성경적 예배를 통해 직관을 형성하자
이상한 신세계: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by Carl Trueman
2022-10-08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세상이 변했다. 자아성(selfhood)에 대한 새로운 관념이 그리스도인들의 관점에 도전하고 있으며, 이러한 새로운 현실에 도전한다는 것이 위험스러운 세상이 되어버렸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도덕적 양식에 따르면 동성 결혼에 반대하는 것은 인종차별주의자가 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스도인이 일반 세계의 광범위한 신념에 동의하지 않아도 전체 사회의 어엿한 구성원으로 존경받을 수 있던 시대는 이미 종말을 고한 것은 아니어도 저물어 가는 중이다. 기독교가 형성한 사회적 상상의 마지막 자취가 급속히 사라지고 있는 것은 사실인데, 우리 중에 많은 사람은 심지어 지금 이상한 신세계에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처지다. 자아성 혁명은 구체적으로 성혁명의 다양한 국면에 나타나듯이 유치원 교육부터 직장 내 대명서 사용 정책[직장 내에서 성별을 구별하는 대명사를 사용할지 말지 같은 정책]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두의 삶에 압력을 가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말하자면 아직은 이런 일을 피하면서 당분간 살아갈 수 있겠지만 영원히 숨을 수는 없다. 조만간 우리는 모두 현대적 자아성의 관념이 만들어 낸 도전적 상황과 마주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의 문제, 순응하라는 압력에 직면할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우리 모두에게 갈수록 시급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신세계에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여기 여섯 가지 대응 방안이 있다. 복음과도시 편집자 주_ 이 글은 칼 트루먼, (신좌파 성혁명과 LGBTQ+운동이 만든) 이상한 신세계의 제9장을 부흥사개혁사의 허락을 받아 간추린 것으로, TGC의 “6 Ways Christians Can Respond to Our Strange New World”를 참고하여 편집하였다. “신좌파 성혁명과 LGBTQ+운동이 만든 이상한 신세계”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갈 것이며 또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지, 여섯 가지 방안을 6회에 걸쳐서 싣는다. 1. 이 시대에 우리도 가담했음을 인식하자2. 고대 교회에서 배우자3. 하나님의 경륜 전체를 가르치자4. 성경적 예배를 통해 직관을 형성하자5. 자연법과 몸의 신학을 회복하자6. 현실적 소망 안에서 살아가자우리가 현대 사회 속에서 발견하는 형태의 표현적 개인주의는 개인과 개인의 욕망(심지어 자아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을 도덕적 세계의 중심에 두는 방식에서 문제가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땅의 계층 구조에서 어디에 속하느냐와 상관없이 보편적 인간 존엄성의 관념에 대한 근본적 헌신같이 표현적 개인주의에 내포된 중요 진리를 놓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우리 내면의 심리적 공간, 우리의 감정, 우리의 욕망에 대한 표현적 개인주의의 강조는 그 자체로 잘못이 아니다. 이런 것들을 사실상 그 자체로 목적으로 만들 때만 잘못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감정과 욕망이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다. 우리는 단순히 본능의 동물이 아니라 의지를 가진 존재여서 우리의 내면 생각은 우리의 정체성에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내면의 심리적 공간을 인정하고 이 공간의 직관을 올바른 방식으로 형성해야 함을 의미한다.아우구스티누스의 자서전 ‘고백록’은 기독교 문학의 고전이다. 이 작품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젊은 시절에 경험한 중요 사건들을 회상하면서 자기의 정신생활에 집중한다. 하지만 흥미로운 사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내향적 반성의 움직임이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항상 외부로 하나님을 지향하면서 마무리된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감정은 하나님 및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라는 더 큰 진리의 맥락 안에 놓이며 이 진리를 기준으로 교정된다. 비슷한 역학관계가 시편에도 적용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시편 저자는 친구, 원수,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자기의 감정에 대해 종종 노골적이면서도 지나칠 만큼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것은 자기 확인, 또는 훨씬 나쁘게 말하면 방종한 자기 연민을 탐닉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이야기하고 있는 경험과 감정을 하나님의 위대한 진리의 맥락 안에 두기 위한 것이다.교회가 이 진리를 붙잡고 우리의 심리적 직관을 성경적 방식으로 형성하려면, 예배를 구성하는 데 중요한 행동 중 하나인 찬양을 길게 열심히 생각해야 한다. 시편이 공동 찬송가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런 시편을 공동체로 노래하는 것이 유대인의 사회적 상상을 형성했다. 그리고 교회도 오늘날 똑같이 해야 한다. 우리가 표현적 개인주의에 가담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루소에서 오프라 윈프리로 이어지는 길을 따르는 것과 정서를 우리의 생활방식을 위한 토대로 삼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이것은 우리가 교회 생활에서 정서와 감정의 자리를 없애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자기의 정신생활을 알맞게 형성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공동 교회 생활을 개혁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감정을 위해 감정을 탐닉하거나 나의 필요와 욕망이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이유라고 스스로에게 각인시키지 않는 예배 음악을 선택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우리는 자기의 감정을 이해하고 솔직하게 표현하게 해 주면서도, 항상 밖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진리에 이르는 방식으로 그렇게 하는 노래가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어떤 사람이 주장하듯이 교회가 시편만을 불러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더 많은 시편을 (또는 여러분이 아직 시편을 노래하지 않는다면 어떤 시편이라도) 노래하는 것이 훌륭한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시편에 대해 생각해 보라. 시편은 기쁨을 특징으로 하지만 또한 슬픔과 상실도 알고 있는 기독교 인생관을 제공한다. 시편은 현재의 투쟁을 하나님이 과거에 하신 위대한 행동과 미래를 위한 약속의 맥락 안에 둔다. 시편은 우리가 낯선 땅에서 이방인인 자기의 신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하나님의 웅장한 그림과 미래 안식에 대한 약속을 제시함으로써, 시편은 우리가 질병 같은 개인적 사건이든, 이 책에서 설명한 충격적 변화 같은 사회적 사건이든 간에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에 대한 신학적이고 감정적인) 관점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우리는 감정과 정서의 존재인 동시에 타락한 존재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감정과 정서를 올바른 맥락으로 회복하는 데 도움을 주는 구속의 노래가 필요하다.원제: 6 Ways Christians Can Respond to Our Strange New Worl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표현적개인주의
시편
시편찬송
고백록
주님의 사역은 주님의 방법으로
by Ray Ortlund
2022-10-07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청교도의 관점에서 모든 교회가 미신 및 영을 그릇 인도하고 소멸시키는 모든 것의 뿌리를 뽑아야만 했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었다. 죄인이 구원받는 것도 오로지 이 영광을 위해서였으며, 또한 영적으로 활기가 넘쳐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들을 세워가는 이유도 모두 다 하나님의 영광 때문이었다.나는 도무지 피할 수 없는 문장들을 만났고, 또 피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 문장들은 깊고도 또 지속적인 방법으로 나를 도왔다. 주님께 감사한다. 예를 들어, ‘복음주의란 무엇인가’(What Is an Evangelical?)에서 마틴 로이드 존스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제도(institution)는 그 반대를 생산하는 경향이 있다”(4). 수십 년이 지났지만, 이 문장은 여전히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제도란 무엇인가? 제도는 바람직한 경험이 쉽게 반복하도록 돕는 사회적 메커니즘이다.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는 하나의 제도이고 또한 좋은 일이다. 주일마다 사역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면 어떨까? 그러나 동시에 생명을 주는 제도도 얼마든지 생명을 고갈시키는 것으로 표류할 수 있다. 무엇인가를 전달하는 제도가 그 자체로 목표가 되고 목적이 될 때 심지어 우상이 되는 경우이다. 그 결과 바람직하지 않은 경험이 절대화되고 영속화된다. 그런 끔찍한 배신은 결코 먼 가상에서나 존재하는 가능성이 아니다. 모든 제도는 그 반대를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다. 우리 모두 교회에서 이런 경향이 현실로 드러나는 것을 보지 않는가? 교회의 맥박을 부여잡고 개혁과 부흥으로 교회를 재정비하자. 동역자들이여, 주님이 이미 죽었거나 아니면 나날이 죽어가는 종교 제도나 관리하라고 우리를 부르셨는가? 진정한 기독교는 부흥 운동이다. 우리가 최종 권위라고 부르는 성경 속에 사도행전이 남아 있는 한, 우리는 그리스도가 주시는 권위에 의지해서 교회 안에서 끊임없이 갱신을 위해 노력해야만 하는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주의 방식으로 하시는 주님의 사역내 마음에서 결코 떠나지 않은 또 다른 문장은 프랜시스 쉐퍼가 쓴 ‘작지 않은 사람’(No Little People)에 있다. “우리는 주님의 일을 주님의 방법으로 해야만 한다.”(74) 나는 이것이야말로 우리 세대뿐 아니라 모든 세대가 당면한 결정적인 문제라고 믿는다. 나의 강점과 냉철함, 심지어 포스트모던이 가져다준 아이러니한 자기 조롱으로 주님을 섬긴다면, 그건 결코 주님을 섬기는 게 아니다. 그것은 주님을 섬긴다는 자만에 빠져 사실상 주님을 모욕하는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방법으로, 오로지 주님의 방법만을 의지해서 주님의 일을 한다면, 그분께서는 친히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우리 사역에 임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의 사역을 축복하신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의 사역을 친히 당신의 손으로 감당하신다면, 그것은 훨씬 더 놀라울 것이다. 이 둘의 차이는 겉으로도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이 세상의 주목을 받을 것이다. 처음에는 격변, 그리고 영광내가 가장 이야기하고 싶은 문장은 지금 소개한 두 문장이 이미 설정한 궤적을 따른다. 청교도 운동에 관한 책, ‘거룩의 추구’(A Quest for Godliness)에서 제임스 패커는 이렇게 썼다. 청교도의 관점에서 모든 교회가 미신 및 영을 그릇 인도하고 소멸시키는 모든 것의 뿌리를 뽑아야만 했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었다. 죄인이 구원받는 것도 오로지 이 영광을 위해서였으며, 또한 영적으로 활기가 넘쳐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들을 세워가는 이유도 모두 다 하나님의 영광 때문이었다(39).사역의 우선순위와 목회적 용기에 관해 강력한 비전을 선포하는 패커의 대담한 문장은 이사야서 40:3-5을 생각나게 한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이사야 예언의 논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먼저 어떤 것은 예비하고, 어떤 것은 재배치하며 또 어떤 것은 격변을 일으키고, 그 후에야 주의 영광이 나타나리라.” 이 세상은 주님의 영광을 맞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너무 많은 교회가 주의 영광을 위해 준비되지 않았다.역사 속에 드러나는 주님의 영광을 가로막는 장벽은 세상의 유행하는 혼란과 우리 교회의 형식에 찌른 예배 속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완전히 준비된 유일한 분은 오로지 그리스도 자신뿐이다. 패커는 그 점을 이해했다. 교회가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와 권능으로 충만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미신 및 영을 그릇 인도하고 소멸시키는 모든 것의 뿌리를 뽑아야만” 한다는 것을 그는 바로 이해했다.동역자여, 당신은 패커가 외치는 예언자적 소명을 받아들이겠는가? 우리는 더 적은 것을 갈망할 것인가?그렇다. 이 신성한 목적을 교회 안에서 추구하는 어리석고도 무모한 방법이 있다.생명을 고갈시키는 제도화의 모든 산을 낮아져야 하고, 상한 마음과 절망이 빠지는 깊은 계곡은 얕아져야 한다. 주님의 사역은 언제나 겸손하고 끊임없는 기도, 죄와 궁핍에 대한 정직한 고백, 그리고 위로부터 우리에게 내려오는 살아있는 권능으로 이뤄져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방식이다. 그러면 이 세대와 다음 세대에 걸쳐서 주님의 영광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날 것이다. 얻는 것이 더 적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이러한 확신을 마음에 새기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바꾸겠다는 목회자라면 내 아버지의 지혜가 도움이 될 것이다. 아버지는 목회 리더십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교인보다 한 걸음 앞서가면 리더가 될 것이다. 두 걸음 앞서면 선구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세 걸음 앞서간다면, 너는 순교자가 될 것이다!” 따라서 지혜의 길은 의도적으로 한 발, 또는 두 발만 앞서 나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신다. 당신도 참을 수 있다. 은혜에 의지해서 그냥 앞으로 뚜벅뚜벅 나아가라. 소명은 분명하다성경이 주는 지혜를 바탕으로 설득력 있게 인도하라. 교회를 이 높고 거룩하고 즐거운 방향으로 계속 인도해 나아가라. 죄인이 구원받는 것도 오로지 이 영광을 위해서였으며, 또한 영적으로 활기가 넘쳐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들을 세워가는 이유도 모두 다 하나님의 영광 때문이었다.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기도해야 한다. 노력해야 한다. 사역은 마라톤이다. 이렇게 사역하는 것이 매달 월급만 받으며 은퇴할 때까지 버티는 사역, 편안할지는 몰라도 무감각하기 이를 데 없는 사역으로 교회에 기생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낫지 않겠는가? 동역자여, 장애물은 현실이다. 나도 안다. 그러나 당신의 소명이 분명하다는 것도 나는 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를 책임지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여러분도 책임질 것을 나는 안다. 우리의 친구 패커의 문장을 다시 보자. 패커는 당신에게 새로운 마음을 넣었다! 주님께서 친히 당신과 함께 하실 것이다. 원제: The Lord’s Work in the Lord’s Way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복음주의
소명
모험
하나님의영광
건강한교회
목회
제도화
복음은 환대로부터 온다
서평: 로자리아 버터필드의〈복음과 집 열쇠〉
by 이춘성
2022-10-06
환대를 주제로 연구하는 연구자로서, 난 지난 5~6년 동안 환대에 대한 고대 사회에서 현대 철학자에 이르기까지, 문화인류학과 사회학, 철학과 윤리학, 신학 등 다양한 논의를 연구하였다. 그리고 20대 후반부터 10년 넘게 셀 수 없는 사람들을 우리 집 식탁에 초대하여 음식과 잠자리를 대접하는 환대 사역을 전문적으로 하였다. 내가 사역했던 단체는 1950년대 스위스의 한 가정집에서 자녀들의 친구들을 위해 가정집을 개방한 선교사 부부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이후에 이 가정은 세계 곳곳에서 찾아온 젊은 구도자들로 넘쳐났고, 가정은 공동체가 되어 프랑스어로 피난처라는 뜻의 라브리(L’Abri)라는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되었다. 이 공동체를 세운 선교사 부부가 20세기 기독교 지성이라 불리는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와 그의 아내 이디스 쉐퍼(Edith R. M. Schaeffer)다.환대의 추억영국 라브리에서 일할 때, 그곳에는 쉐퍼 목사 부부와 그의 자녀들과 함께 환대의 사역을 함께해 왔던 간사들이 여럿 있었다. 이들은 외부인들이 라브리 사역을 지성적 사역이라고 알고 있지만 실은 라브리 사역은 환대 사역이라고, 나 같은 신세대 간사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나도 당시 라브리를 쉐퍼의 책을 통해 접하고, 이러한 지적인 접근에 매료되어 라브리를 찾았다. 그리고 이러한 날카로운 지성을 배우고자 했다. 당시 나와 같은 학생들이 라브리 식탁을 가득 채웠고, 식탁에서는 대학 강단보다 더 심도 있는 질문들이 오갔다. 그러나 후에 내가 간사로 지원하여 라브리 사역을 시작하려 할 때, 라브리에서는 나의 지성적인 능력을 평가하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길지 모르지만, 내가 치러야 하는 시험은 라브리 간사와 가족들을 위해서 내 손으로 직접 요리한 한 끼 식사를 대접하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때의 떨림은 머리가 아닌 식칼을 잡은 내 손끝으로 기억한다. 난 인터넷을 검색하여 몇 개의 레시피를 얻었고, 마른반찬과 메인 요리로 돼지고기 두루치기를 준비했다. 이 음식을 기쁘게 받아먹은 공동체의 가족들은 나를 가족으로 맞이하였다. 이후에 난 일을 준비하기 위해 서점에 가서 요리책들을 샀고, 마트에 가서 요리 도구와 앞치마를 샀다. 지금도 내 서재에는 10년 넘게 사용하여 각종 양념이 듬성듬성 묻어 있는 레시피 북들이 눈에 잘 보이는 곳에 꽂혀 있으며, 주방에는 결혼 전부터 손님 대접을 위해 사 모았던 요리 도구와 코렐 접시들이 가족과 손님을 위해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최근 받아 든 한 책은 나의 젊음의 한 챕터를 장식하고 있는 환대의 일을 떠올리게 하였다. 지금은 이론과 강의로 환대를 설명하고 있지만, 환대는 이론으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신비가 숨어 있다. 그리고 단숨에 읽어 내려간 이 책은 그 신비의 강력함을 다시 한번 증언하였다. 이 책은 한때 레즈비언 영어학 교수였고 미국 동성애 운동의 지도자였지만, 지금은 보수적 신앙의 그리스도인이 된 뜻밖의 회심의 저자인 로자리아 버터필드(Rosaria Butterfield)가 쓴 복음과 집 열쇠이다. 이상하게도 이 책을 읽는 내내 눈가에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너무나 펑펑 울어서 더 이상 책을 읽을 수 없기도 했다. 이미 중년이 되어 버린 난, 이 시기의 남자가 그렇듯 호르몬의 영향으로 이런 과도한 반응을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로자리아 가정에서 일어난 환대의 식탁은 내 집에서 일어났던 일과 너무나도 같았다. 마치 어린 시절 미술 시간에 데칼코마니를 하듯, 한 번도 만나지 못한 다른 대륙의 이름 모를 그리스도인의 환대의 식탁에서 일어난 기쁨과 공포, 회복과 회개, 분노와 용서, 다양한 세계관들의 대결 등은 환대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하물며 로자리아가 식사 대접을 위해서 잘 깨지지 않고 실용적이며, 어느 정도 격식을 차릴 수 있는 코렐 접시를 사용하고 있는 것까지도 말이다(53쪽). 20년 전, 총각으로 환대 사역을 시작할 때 구입한 코렐 접시는 여전히 우리 집 주방 싱크대 상부 장의 한편을 채우고 있다. 매일 실천해야 하는 일상의 환대를 위해서 20년을 견딜 만한 접시로 이만한 것은 없는 것 같다.그리스도인의 급진적 환대로자리아는 예수님의 환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님은 급진적이고, 부인할 수 없는 환대(손 대접) 행위를 통해 전염성 있는 은혜를 전하는 방법을 친히 보여주셨다.” 또한 예수님의 환대는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을 중앙으로 옮겨주는 은혜, 미래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은혜, 예수님이 주님인 한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를 해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은혜”를 우리에게 준다고 주장한다(43쪽). 로자리아는 예수님의 환대를 ‘급진적인 환대’라고 부른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급진적인 환대를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로자리아가 주장하는 그리스도인의 급진적인 환대란 그리스도의 피와 은혜에 기초한 것이다(51쪽).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 곧 위대하고 더 큰 급진적인 환대를 경험하지 않고는 그리스도인이 급진적인 환대를 실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급진적인 환대는 그리스도인이 은혜를 경험한 자라는 사실을 세상에 증거 하는 대표적 표징이다.로자리아는 그리스도인의 급진적 환대를 네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첫째, 급진적으로 일상적인 환대(손 대접)는 당신이 하는 말들이 당신이 그리스도의 소유임을 드러내야 한다는 의미이다”(55쪽), “둘째, 급진적으로 일상적인 환대(손 대접)는 다른 사람들을 희생적으로 섬기게 함으로써 우리를 거룩하게 한다”(56쪽), “셋째, 급진적으로 일상적인 환대(손 대접)는 우리가 입어야 할 영적 갑옷의 일부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심령이 상한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으며, 하나님의 영께서 부족한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게 할 수 있다”(57쪽), “넷째, 급진적으로 일상적인 환대(손 대접)는 하늘에 있는 수많은 증인의 대열에 동참할 수 있게 해준다”(57쪽) 로자리아는 그녀의 환대에 대한 네 가지 이해를 바탕으로 환대가 우리가 살아가는 포스트 크리스천 세상에서 이웃들에게 신뢰를 얻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도구라고 주장한다. 로자리아는 환대를 세상을 향해 벽을 쌓고 세상의 이웃을 악의 하수인으로 여기면서 증오하는 것을 피할 수 있게 해주며, 이와 달리 세상을 아무런 비판 없이 수용하고 공존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진보적이라고 부르는 그리스도인의 교만의 죄의 함정에서 피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주장한다. 로자리아는 그리스도인의 급진적 환대의 강력함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기독교적 환대(손 대접)”는 때로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특이한 표현이지만 이것을 통해 신비가 드러나고, 공동체가 형성되며, 진실을 말하는 태도가 널리 확대된다. 우리는 진실을 말하기를 극도로 싫어하지만 환대(손 대접)는 바로 그것을 요구한다. 환대(손 대접)는 매우 가정적인 의미로 들리지만 이는 매우 강한 힘을 지녔다. 진실로 당신이 음식을 대접하고, 붙들어 주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천국의 문을 뒤흔들 만큼 강력하다(66쪽). 환대와 그리스도인의 소명 로자리아는 전직 영어학 교수이자 동성애 운동의 지도자이며 레즈비언이었다. 이러한 그녀의 과거는 ‘환대’란 용어가 현대에 어떤 곳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인은 ‘환대’를 ‘혐오’의 반대 표현으로 사용한다.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혐오’의 대표적인 피해자로 인식되는 집단이 성소수자들이다. 그리고 동성애를 반대하는 집단을 모두 혐오 집단으로 낙인찍는 것이 현대의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같은 성 정치이다. 그러므로 현대에 환대란 표현은 포스트모더니즘과 성정치, 동성애 운동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정치적이며 철학적인 용어로 변질되어 있다. 그러기에 로자리아는 ‘기독교적 환대’가 때로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표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도 로자리아는 환대가 기독교 복음의 핵심 요소라는 사실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그가 이 책의 제목으로 선택한 “복음과 집 열쇠”에서 찾을 수 있다. 원래의 영어 제목은 “The Gospel Comes with a House Key”이다. 직역하면 “복음은 집 열쇠에서 온다”이다. 한글 제목은 복음, 집, 열쇠가 각각 환대와 연관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책 내용 안에 이 제목의 사연이 있다.로자리아가 레즈비언으로서 동성애 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할 당시, 미국과 유럽 사회에는 에이즈로 인한 공포가 극에 달하였다. 그리고 동성애자들은 사회에서 손가락질의 대상이었다. 동성애자들은 서로를 지키기 위해 만약에 위급한 상황이 되면 서로의 집으로 피신하거나 도움을 요청할 수 있도록 비상 연락망을 짰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서로의 집 열쇠를 공유했다고 한다. 위험할 때, 언제든지 자기 집을 동료 동성애자들이 피난처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이다. 로자리아는 당시 이러한 동성애자들의 연대와 환대가 현재 ‘급진적 환대’라는 용어를 이들이 점유하게 된 계기가 되었으며, 사회가 동성애자들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이유로 로자리아는 자신이 과거 동성애자였을 때를 상기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현대 동성애자들이 점유하고 있는 ‘환대’라는 용어와 가치를 되찾아 와야 한다고 이 제목을 통해 주장하고 있다. 그 이유는 로자리아가 한 그리스도인 가정을 통해서 동성애자들의 왜곡된 환대가 아닌 더 크고 바르며 급진적인 기독교적 환대를 경험하였을 때, 비로소 동성애를 버리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신비한 경험을 하였기 때문이다. 로자리아는 거짓과 가짜 환대가 아닌 진정한 환대를 세상의 이웃들이 경험하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복음 전도의 사명이라고 확신한다. 급진적 환대는 그리스도인의 선택이 아니라 소명이자 의무이다.모든 그리스도인은 각자 자기 집에서 환대(손 대접)를 베풀도록 부름 받고 있다. 독신자 가정도 기혼자 가정과 마찬가지로 환대(손 대접)를 필요하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자녀들이 있는 가정이나 자녀들이 없는 가정이나 모두 그리스도의 축복을 전하는 통로이기는 마찬가지다. 구원받은 부자들이나 구원받은 빈자들이나 그 중간에 속한 사람들도 가정과 기숙사와 버스 정류장과 공원에서 기독교적 환대(손 대접)를 베풀도록 부름 받고 있다(315쪽).환대로의 초대 과거 내가 환대 사역을 위해 이른 새벽부터 밥을 하고, 오전에는 강도 높은 노동을 하며, 점심이나 저녁을 준비해서 손님들을 대접할 때, 내 한쪽에서는 이 사역의 아름다움과 귀함을 인정하기 어려웠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멋지게 설교하고 성경 공부를 인도하며, 인사이트 넘치는 강의를 하여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온종일 노동하고도 밤늦게 홀로 책을 읽고 공부하였다. 읽고 가르치는 것이 더 귀한 일이라는 생각이 나를 가득 채웠고, 언젠가는 이 일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때로는 찾아온 손님들이 자기가 다니는 서울 대형교회의 부목사들을 자랑하면서 시골에 사는 내 기를 죽이는 일도 있었다. 환대는 나에게도 환대받는 상대에게도 대접받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 명절에도 나를 찾는 사람들은 내게 밥을 얻어먹었던 사람들이었다. 아마 내 설교와 가르침이 내 요리 솜씨보다 못하기 때문이겠지만, 이제는 과거와 달리 그리 신경 쓰지 않는다. 이 시대는 탁월한 설교자와 강의, 책이 없어서 복음을 들을 수 없게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옆집의 우리 이웃이 복음을 듣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들을 우리 식탁에 한 번도 초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환대하는 공동체라는 사실을 세상이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탁월한 설교자와 강의, 신학과 변증, 책이 있다고 한들, 만나지 못한다면 들려 줄 수 없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신앙의 신비는 만남에서 온다. 그리고 환대는 만남을 만든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 사람과 삼위 하나님과의 만남 말이다. 마지막으로 환대는 겸손한 초대라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소박함과 겸손함은 환대의 가장 큰 미덕이며, 누구나 환대를 베풀고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열린 손이다. 환대(손 대접)는 자신에게 있는 것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환대(손 대접)는 잔치가 아니다. 환대(손 대접)는 잔치가 될 필요가 없다(325쪽).
환대
손대접
“절제된” 아름다움인가? 예술-공포증인가?
기독교 세계관 운동 2.0을 위하여
by 서나영
2022-10-05
기독교 세계관 운동 2.0 위하여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SIEW)과 함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섭니다.미학에 대한 예술과 아름다움에 대한 많은 이론과 담론과 논란이 존재한다. 그리고 시대와 출신을 불문하고 미학에 대한 연구자들이 내리는 공통된 결론이 있다. “아름다움은 어렵다는 것”이다. 아름다움의 종류가 많고, 느끼는 통로가 다양하며, 주된 통로인 예술 자체도 정의 내리기가 쉽지 않다.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그것에 대한 생각과 관점이 역사와 문화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며, 같은 사회라도 개개인의 취향과 맞물려 그 누구도 쉽게 표현하거나 단정 지을 수 없는 개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역사는 아름다움의 의미를 찾는 것을 포기한 적이 없다. 아름다움을 의도적으로 멀리했던 시대에도 아름다움을 찾고자 하는 갈급함은 오히려 커져만 갔다. 그것은 아마도 마일즈(Margaret R. Miles)의 경고처럼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행복을 결정하기 때문에, 무엇이 아름다운가를 잘못 판단하는 것은 인간에게 가장 위험한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수많은 철학적 글들을 볼 때마다, 또 예술작품이나 비평을 대할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든다. “개혁주의 교회와 성도들은 이런 글들을 읽고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적용을 할까?” 또 예술작품을 대하고 대중 문화예술을 접할 때마다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한 생각이 있다. “개신교회와 성도들은 이 작품을 경험할 때 어떤 아름다움을 느꼈고 어떤 결론을 얻었을까?”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으로 미(美)를 연구한다는 것은 단언컨대 그 어렵다는 미학보다 더 답답하고 어려운 일이다. 개신교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모두가 예술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감각적 사유의 개인차와 미적 취향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또한 같은 구원론을 믿고 같은 교리 아래 같은 신앙의 문화 속에 걸어간다고 해서 미적 수준이나 기준이 맞추어져야 한다는 법은 없으며, 자본과 연결되어 있는 예술의 필요에 대한 우선순위가 다르다. 아름다움에 대한 철학이 개혁주의 기독교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에 대한 연구가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칸트가 말한 순수이성, 실천이성, 판단력 비판의 구분으로 인한 미의 독립을 인정함과 동시에, 기독교 신학과 세계관 안에 재통합하는 복잡하고 광대한 범위의 작업이 쉽게 이루어질 리 없다.대부분의 한국 개혁주의 신자들은 ‘예술’과 ‘아름다움’의 중요성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로 개신교인들의 교회 현장과 삶에서 미적 영역들을 적용해볼 때, 종교개혁 전통 아래 몇 가지 공통된 현상이 나타난다. 그중 하나가 그들이 무의식중에 가지고 있는 “이미지 공포증”(Iconofobia)이다. 종교개혁의 표면으로 드러나는 가장 큰 결과가 ‘성화상 파괴’였듯이, 그들에게는 “이미지의 사용은 우상숭배로 변질될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결국 한국의 개신교인들도 교회의 장식과 예술적 장치를 모조리 없앤 칼뱅과 청교도의 후예가 아닌가!이로 인해 흔히 나타나는 현상은 “절제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더 솔직히 표현하자면, “예술의 힘을 두려워한다”고 말해도 무방할 듯하다. 개신교 신학과 교리는 말씀 이외에 더 큰 영향을 끼치는 통로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으며, 예술의 강력한 영향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움직이는 것에 걱정이 많다. 그리고 개혁신학자들은 말한다. 종교개혁 이후, 네덜란드 중심으로 “예술가들은 일반은총의 개념을 이해하고 종교운동에 동참했으며, 세상 가운데 그들의 소명을 되찾았다”고 말이다. 정형화된 기독교의 이미지와 신비로운 “천상의 예술 언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베푸신 세상과 일터의 아름다움과 선함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으며, 이것은 예술가를 향한 더 넓은 비전과 사역을 제시함을 주장했다. 이것은 신앙생활 가운에 예술의 힘을 견제하면서, 동시에 예술인들의 소명에 대해 지혜로운 대답이고 논리적인 권유였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예술사조는 급격하고 분명하게 아름다움과는 상관없는 미학으로 흘렀다. 세상의 문화예술을 여과 없이 공유하는 그리스도인들과 예술가들 또한, 같은 양식과 재료와 내용을 가지고 예술을 표현하고 감상하는 세상이 되었다. 예술과 문화의 영향력은 예술적 감각이 있고 사유가 가능한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인식하고 있건 아니건, 사회에 속한 인간이라면 그리스도인-비그리스도인 구분 없이 그 시대 예술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고 있다. 한스 로크마커가 말했듯, 보이지는 않지만 어느 집에나 존재하는 “수도관”처럼, 예술은 어느 인생에게나 “보이지 않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나른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 교회는 문화와 예술을 세상과 공유한다. 기독교 신자들이 현실과 가상을 넘나드는 추하고 파괴적인 예술, 가짜와 패러디와 대량으로 쏟아내는 대중문화예술에 발맞추어 걷게 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한국은 해방 이후 급격한 기독교의 부흥이 일어났고, 양적으로 성장한 교회들은 “자유로운 상상”에 근거하여 성화상의 이미지를 제외한 거의 모든 예술 양식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상과 이질감 없는 디자인으로 교회 분위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대중음악 언어로, 대중의 안목과 디자인으로, 모던 스타일의 건축물로, 대중이 이해하기 쉬운 영상물로 예배와 교회를 채워왔다. 그리고 이러한 개방적 움직임에는 개혁주의 세계관 운동이 배후에 있었다. 프란시스 쉐퍼와 아브라함 카이퍼의 일반은총에 대한 개념과 영역주권에 대한 이해를 넓혀감과 동시에, 리처드 니부어의 다섯 가지 “그리스도와 문화” 관계 모형” 중 “기독교는 세상 문화를 변혁해야 한다”는 사명을 비전으로 채택했다. 일명 이러한 “세계관 운동”으로 신자들은 기독교 세계관의 렌즈로 바라볼 때 예술을 수용할 수 있는 방법들을 배우기 시작했다. 비록 예술이 파괴적이고 추한 모습일지라도, 성도가 순례길의 과정 중 겪는 큰 스토리 안의 성화의 “과정 중”의 추함의 표현이라고 바라볼 줄 알게 되었다. 또한 대중의 안목에 맞춰 세련되면서도 기독교적 의미를 담으려는 노력이 일어났고, 순수예술가들은 모던 재료로 하나님의 심정을 표현하려고 애쓰기도 했다. 결과가 어떻든, 현재 개혁주의 교회의 모습은 문화의 기독교적 변혁을 목표로 움직이는 중이고, 그 내용은 대중이 추구하는 미의 기준과 굉장히 많이 닮아있다. 최근 한 기독교 설치미술가와 개신교의 대중적 미적 기준과 취향에 대해 담론을 나눈 적이 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미적 감각과 예술품을 감상할 수 있는 감각에 대해 언급했다. 그리고 교회의 성도들이 경험하는 아름다움의 정도와 기준이 안타깝다고 탄식했다. 나는 그 외로움의 감정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다. 고 이어령 박사가 그렇게 반복해서 강조했듯이, 탁월한 예술가는 특권계층이 아니라 어떤 면에서 특별한 감각적 장애를 가진 불쌍한 사람들이다. 평범한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며,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초월한 세상을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외로운 일인지, 경험해본 사람만 아는 깊은 슬픔일 것이다. 칸트가 말한 숭고미는 “너에게는 아름답지 않지만 나에게는 아름다운” 그런 종류의 미가 아니다. 모두가 인정하는 절대적인 아름다움은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일은 외로운 길이다. 과연 기독교는 문화를, 특히 아름다움에 관계된 예술 문화를 성공적으로 변혁해 나가고 있는가? 혹시 진정한 아름다움은 절제하고, 아름다움의 그림자들로 교회와 삶 속에 채워나가고 있지는 않은가? 진정한 아름다움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현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과제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세상의 문화와 예술을 기독교 세계관으로 변혁하는 일은, 성령의 조명하심 아래 아름다움에 대한 깊은 이해로부터 시작한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영이 한국 교회에 충만하게 부어지는 역사를 기대하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교회와 세상에 충만한 날을 그려본다.
아름다움
미학
예술
성화상
공룡에 관한 작은 신학
by Scott Hubbard
2022-10-04
나는 요즘 티라노사우르스 렉스, 스테고사우르스, 트리케라톱스, 그리고 벨로시랩터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낸다. 더불어 목이 길고 작은 뇌를 가진 디플로도쿠스와 머리 볏이 있는 파라사우롤로푸스처럼, 사람들에게 비교적 덜 알려진 공룡도 알게 되었다. (당신도 조금만 익숙해지면 어려운 공룡 이름을 술술 발음할 수 있게 될 것이다.)나는 고생물학자도, 그렇다고 박물관 큐레이터도 아니다. 쥬라기 이야기의 가장 최근 영화는 아직 보지도 못했다. 나는 그냥 두 살 사내아이의 아빠일 뿐이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처럼, 내 아들도 공룡에 관해서 읽고, 공룡과 놀고, 또 공룡 소리를 낸다. 지난 몇 달 동안 아들의 공룡 셔츠와 책(그리고 피규어와 스티커)은 나의 오래된 매혹을 다시금 기억나게 했다. 대부분은 어린 시절 보던 만화 ‘공룡시대’(Land Before Time)와 엄지손가락으로 넘겨 가며 읽던 브론토사우루스 책 이후로 묻혀있던 것이었다. 아들 덕분에 추억뿐 아니라 몇 가지 새로운 질문도 생겼는데, 그건 내가 아들이 공룡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창조 설계를 이해하도록 돕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시 19:1), 기이한 창조물이 그분을 찬양한다면(시 104:24), 오래전에 멸종한 놀랍고도 거대한 이 파충류도 그분에 대해 뭔가 장엄한 것을 말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그게 뭘까? 오래된 뻔한 소리?공룡과 관련해서 아이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할지는 공룡이 수백만 년 전에 지구를 배회했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상대적으로 최근에 살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두 관점 모두 다 성경적 가치가 있다. 그리고 둘 다 어렵다. 우리 대부분이 그렇듯, 나도 이 질문에 대해 나름의 견해를 갖고 있지만, 이 글의 목적을 위해 그 부분은 아예 배제하겠다. 내 아들이 커서 젊은 지구론을 받아들일지 아니면 늙은 지구론을 받아들일지, 나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 내 관심은 오로지 그가 공룡을 (그리고 온 땅을) 창조주 하나님과 관련하여 바라볼지 아닐지의 여부이다. 그리고 공룡이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사실상 공룡 뼈의 나이와는 거의 관련이 없는 것 같다. 공룡이 중생대에 살았든 노아 시대에 살았든 달라질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많은 공룡이 사나웠고, 또 많은 공룡이 환상적이었다. 또한 많은 공룡이 절대적으로 거대했다.그럼 공룡처럼 놀라운 생물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많은 교훈 중에서도 다음 세 가지를 생각해보자. 지혜의 하나님을 의지하라스티브 브루사테(Steve Brusatte)의 인기 있는 2018년 책, 완전히 새로운 공룡의 역사(The Rise and Fall of the Dinosaurs)는 공룡의 지배에 대한 흥미진진한 역사를 알려준다. 불행히도, 그 책은 또한 공룡이 하나님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대중적 견해를 드러내고 또 강화한다. 그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역할을 맡은 것은 자연주의 진화(Naturalistic evolution)이다. 맹목적이고 두뇌가 없는 힘이 어떻게 된 셈인지 엄청난 선견지명을 부여받았다. 거대한 용각류와 같은 “진화 창조된” 짐승들(108), 그리고 “진화는 모든 조각 하나하나를 올바른 순서로 모았다”(117). T. 렉스와 비슷한 부류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진화의 위업”이었다(225).자연주의 세계관은 그 자체로 비교적 새로울 수 있다. 그러나 표면 아래 숨은 근본적인 동기는 전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백성은 항상 대중이 열광하는 신화에 맞서 하나님의 창조 역사를 고백해야 했다. 고대 세계에서 이스라엘의 이웃 가나안 사람들은 탄니님(tanninim, 두려운 바다 생물, 때때로 “뱀” “용” 또는 “괴물”로 번역됨)이 “태초에 바알이 직면한 혼돈의 힘”(Derek Kidner, Genesis, 54)을 대표한다고 생각했다. 그에 반해서, 모세는 창세기 1:21에서 “하나님이 큰 바다 생물을 창조하셨다”고 기록했다. 가나안 사람들은 단지 그들이 원하는 대로 말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놀라운 괴물조차도 하나님이 창조한 걸작임을 안다. 비슷한 방식으로 욥기에서 하나님은 거대한 육지 동물인 베헤못과 사나운 물의 짐승 리워야단(가나안 신화의 또 다른 괴물)을 언급하며, 그들을 하나님의 피조물로 묘사한다. “베헤못을 볼지어다 내가 너를 지은 것 같이 그것도 지었느니라”(욥 40:15).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욥 41:11). 따라서 하나님이 공룡에 대해서도 같은 말씀을 하실 건지, 더 이상 궁금해할 필요가 없다. 많은 학자가 베헤못과 리바이어던을 하마와 악어와 동일시하지만, 시적 묘사가 그려내는 크기로 볼 때 단지 하마와 악어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베헤못과 리바이어던은 용각류나 티라노사우루스류로 쉽게 오인될 수 있을 정도이다.자연주의 시대에 자라는 어린이는 시편 시인의 창조 신조를 자주 그리고 즐겁게 들을 필요가 있다.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그들을 다 지으셨으니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니이다”(시 104:24). 하나님의 지혜는 모든 피조물을 뼈까지 아름답게 장식한다. 가장 먼저 기억할 점은 공룡이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창조주라는 이름이 붙은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초대한다는 것이다. 능력의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몸통에서 꼬리까지 7톤의 살과 뼈가 온몸에 퍼져 있는 가장 큰 코끼리를 상상해 보라. 이제 가능하다면 이 코끼리 몸무게의 7배, 길이의 서너 배에 달하는 생물이 우뚝 솟은 목, 통배, 그리고 나무줄기 꼬리를 가지고 땅을 가로질러 뒹굴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 이제 당신은 아마도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큰 육상 동물인 아르젠티노사우루스에 대해 희미하게나마 뭔가를 느꼈을 것이다. 이제 아르젠티노사우루스보다 훨씬 작지만 비교도 안 되게 더 사나운 다른 생물을 생각해보자. 코끼리와 같은 톤수(그런데도 10피트는 더 길다)를 가진 그놈은 근육으로 두꺼워진 허벅지로 마구 뛰어다니고, 거대한 머리는 6톤의 압력으로 무엇이든 내리누를 수 있는 엄청난 턱을 갖고 있다. 말 그대로 차를 부수는 힘이다. 이제 당신은 아마도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 가장 사나운 육상 동물인 T. 렉스에 대해 어렴풋이 생각할 수 있다. 이제 그 짐승들 앞에 서 있는 당신을 상상해 보라. 하나님께서 리바이어던에 대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중에 감히 “그런 동물을 격동시킬 만큼 사나운 사람은 없다”라고 말하는 게 당연하다. 따라서 우리는 그에 상응하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 “누가 내게 감히 대항할 수 있겠느냐?”(욥 41:10)공룡은 우리를 떨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진짜 떨리는 건 공룡 앞에서가 아니다. 허리케인처럼 그들도 단지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가 살고 움직이고 또 존재하도록 하는 바로 그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는 그 하나님 앞에서 서게 될 것이다. 매튜 헨리(Matthew Henry)가 베헤못에 대해 말했듯, 우리는 모든 공룡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그런 거대한 짐승을 만들고 그가 가진 능력을 그런 짐승에게 주신 분과 과연 싸울 수 있는지, 아니면 그에게 복종하고 그와 화해하는 것이 지혜롭지 않을지,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라. (An Exposition of the Old and New Testament, 223)하나님은 T. 렉스의 입에 있는 모든 이빨을 만드셨다. 그는 아르젠티노사우루스의 몸통에 모든 무게를 추가했다. 비록 죽었지만 그들의 뼈는 여전히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하고 있다. 우리에게 그것들은 창조주의 지혜를 신뢰하고 그의 능력을 두려워하라고 외치고 있다. 놀라운 하나님을 찬양하라가장 무서운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찬양의 이유가 된다. 믿음은 두려운 대상을 경외의 대상으로 바꾸어 놓았다. 우렛소리는 하나님의 음성이 되고(시 29:3), 광대한 우주는 그분의 손가락의 작품이 되고(시 8:3), 또 거친 바다는 우리 주님을 위한 포장도로가 된다(마 14:25). 가장 사나운 짐승조차 그의 영광의 빛을 발한다.하나님의 자녀는 리바이어던을 (더 나아가 공룡까지) 볼 줄 알고, 짐승 같은 모습뿐 아니라 그의 “늠름한 체구”(욥 41:12)까지도 느낄 수 있다. 그들은 짐승의 발자국 안에 앉아서 놀라운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다(시 104:31-32). 그들은 짐승의 비늘을 추적할 수 있고, 이제 번개 아래에서 외쳤던 다윗 왕처럼 우리도 “영광!”이라고 소리칠 수 있다(시 29:9).시편 104편은 공룡에서 영감을 받은 찬양이 어떤 것인지 잘 알려준다. 여기에서 시편 기자는 흐르는 시내와 노래하는 새와 같은, 피조물의 부드러운 아름다움만을 찬양할 뿐 아니라 피조 세계의 좀 더 잔인한 측면, 먹이를 노리는 어린 사자와 놀랍게도 바다에서 노는 리워야단을 보면서까지 하나님을 찬양한다(시 104:21, 26). 어떤 사람은 오래전에 멸종한 종(species)의 뼛속에서 단지 “무의미한 생명의 덩어리”만을 볼 뿐이라고, 데렉 키드너(Derek Kidner)는 썼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창조주의 부요하심과 그의 생각의 범위와 정확성이 얼마나 세밀한지를 암시하는”(시 73-150, 405) 바를 보도록 가르친다.고생물학을 통해 우리는 시편 시인이 상상하지 못한 새로운 등장인물과 함께 시편 104편을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 생물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또 우리가 발견해주길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제대로 이해한다면, 이런 고대 짐승의 화석은 하나님을 찬양할 때 꼭 필요한 악기가 된다. 복음주의 조각칼최초의 공룡이 발견되기 1세기 전(1820년경), 목사이자 자연 애호가인 제임스 하비(James Hervey, 1714-1758)는 당시에 새로운 뉴턴식 과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항상 복음주의 망원경으로 가시계를 보아야 한다. … 그리고 또한 복음주의 현미경으로 바라보아야 한다”(The Spirit of Early Evangelicalism, 150). 별을 연구하라. 그들의 거리를 측정하라. 세포를 연구하고, 그 특징을 표시하라. 또 세포의 기능을 설명하라. 그러나 별과 세포, 그 모두를 다 하나님의 작품으로 연구해야 한다. 공룡을 발견하는 시대에 사는 우리는 하비가 말한 복음주의 망원경과 현미경에 복음주의 조각칼을 추가할 수 있다. 공룡을 연구하라. 공룡의 이름을 알아내고, 나이를 고려하라. 공룡에 관한 수십 권의 어린이 책을 읽으라. 그러나 공룡이 가르치는 더 큰 교훈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공룡에 대한 내 아들의 열정은 사라질지 모른다. 그러나 그동안 나는 안킬로사우루스 피규어에서는 하나님의 지혜를, T. 렉스 티셔츠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그리고 두 살짜리가 내뱉는 공룡 포효에서는 하나님의 찬양을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원제: A Little Theology of Dinosaurs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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