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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이데올로기 문제를 자녀와 어떻게 대화할 것인가?
by Josh Glaser·Paula Rinehart
2022-11-22
지난봄, 헬레나 키르슈너(Helena Kirschner)의 탈성전환(de-transitioning) 이야기가 일으킨 파장은 적지 않았다. 헬레나는 무엇이 그녀를 성전환으로 이끌었고 또 어떻게 빠져나왔는지를 자세히 설명했다. 그녀는 몸에 대해 불안감을 느꼈고, 섭식 장애로 고생했다. 그러면서 점점 더 친구와 가족으로부터 멀어졌다. 구글에서 클릭 몇 번 하는 것으로 그녀는 자신을 환영하고 온전히 받아주는 온라인 커뮤니티를 만났다. 자신의 성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만으로도 온라인에서 사회적 지위를 더욱 높여준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급기야 옷을 바꿔입고 젖가슴을 묶기 시작했다. 그리고 열여덟 살이 되어서는 고용량 테스토스테론을 복용하기 시작했다.그 모든 과정을 거치면서 그녀가 사회복지사, 심리학자, 그리고 친구들로부터 유행가 후렴처럼 듣고 또 들은 건, 성전환이 결국에는 모든 우울증을 사라지게 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을 거친 헬레나는 이렇게 썼다. 진짜 내가 만난 결과는 “나로 하여금 슬픔과 두려움 그리고 슬픔을 느끼도록 만든 조건을 이해하기는커녕 전보다 더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부모로서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우리 아이들 가운데 헬레나가 겪었던 것과 같은 불안과 어려움을 내놓고 말할 수 있는 아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자, 이제 당신의 자녀가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바로 그때 누군가가 성전환을 통해 생소한 외로움이 소속감으로 바뀔 수 있다고 약속한다고 상상해보라. 긴장감을 느끼지 않는가? 우리 아이들은 동성애와 관련해서 지금 역사상 가장 취약한 시기를, 또한 성장 과정 중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질문은 오늘날 십대를 둘러싼 모든 곳에 존재한다. 정체성의 핵심은 성 정체성이라는 항상 있어 왔던 오류가 이제는 소셜 미디어, 통해서든, 교실 수업, 그리고 친구의 이야기 등을 통해서 폭포수처럼 뿜어져 나온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너 자신은 네가 만들라는 말이다. 트랜스젠더 이념이라는 문제를 놓고 자녀과 이야기할 것인지 여부가 그리스도인 부모가 당면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건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이다. 성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자녀가 자기도 모르게 형성했을지도 모르는 나쁜 생각에 대처할 수 있는 세 가지 구체적인 방법이 있다. 1. 성장통을 느끼는 건 정상이다. 현재의 성 이데올로기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자라면서 경험하는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잊어버리기 쉬운) 갈등을 증폭하고 악용함으로써 그들의 정신 속으로 파고든다. 아이들이 겪는 불안, 우울증, 외로움 또는 자해의 징후를 심각하게 받아들임으로, 부모는 자녀를 도울 수 있다. 지금 세대는 놀라운 속도로 정신 건강 문제를 겪고 있다.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부모의 관심과 시간과 개입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런 고통이 단지 성(sex)을 바꾸면 다 사라질 것이라는 잘못된 약속을 해서는 안 된다. 아이들에게는 청소년기에 겪는 불안과 신체 불편, 사회적 어색함은 대부분이 다 겪는 정상적인 과정이라는 확신이 필요하다. 부모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너만 그런 게 아니야. 나도 그런 비슷한 감정을 느꼈어. 열다섯 살이면 누구나 다 그래. 하지만 좋아질 거야. 내가 약속한다.” 친구들의 비웃음을 받았을 때, 부모와의 끊임없었던 갈등, 당신이 좋아했던 남자가 가장 친한 친구를 더 좋아하게 되었을 때, 또는 거울을 보고 다른 사람이 되었으면 하고 느꼈을 때 등등, 당신의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라. 문제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 희망까지 사라지곤 한다. 어린이와 청소년은 시야가 짧기로 악명 높다. 아이들에게는 막다른 골목처럼 보이는 곳에서 새로운 길을 만드시는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성(성별 불쾌감)에 대해 불만을 느낀다고 해도, 대다수에게 그건 시간이 지나면서 저절로 해결되는 문제라는 것을 아이들이 알도록 해야 한다. 불편함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우리는 여자 또는 남자로서 느끼는 자연스러움과 함께 육체적 현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사춘기 차단제(puberty blockers)에 의지하는 것은 달리기 훈련이 힘들다고 발에 총을 쏘는 것과 똑같다.2. 나의 성을 누리자.젠더 이데올로기(내 느낌에 따라 몸을 바꾸는 것)에는 실체가 없다. 공중에 붕 떠 있는 기둥 위에 세워진 것과 마찬가지이다. 생물학으로부터 “젠더”를 분리함으로, 누구나 단지 자신이 남자 또는 여자라고 주장하는 것만으로 남자 또는 여자가 되는 길이 열려버렸다. 그게 과연 바람직한 세상인가?그리스도인 부모로서 우리는 성에 관해서 훨씬 더 훌륭하고 온전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우리의 믿음은 삶을 통합함으로 몸과 영혼을 하나로 만든다. “성 정체성”이 “사람”을 몸에서 분리하는 반면, 기독교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는 방식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로서 몸에는 분명한 의미와 목적이 있다고 주장한다(창 1:27). 인류의 성(남성 또는 여성) 생물학은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나타내도록 설계되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이 진리(reality)를 계속해서 강조해야 한다. 이 점과 관련해서는 할 말이 많지만, 굳이 한 가지만 부연하자면, 이 정도의 진리는 예수님이 우리의 신랑이시고 우리는 그분이 사랑하시는 신부라는 영광스러운 신비로 우리를 이끄는 길에 뿌려진 빵 부스러기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우리의 몸이 생물학적으로 뿐만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의미가 있도록 설계하셨다. 올바르게만 이해하면,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복음이 무엇인지 속삭일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배경으로 해서 우리는 연령에 맞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젠더 설계를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엮어갈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질문이 가능하다. • 엄마와 아빠가 어떻게 달라 보이니? 엄마와 아빠가 너를 대할 때 어떻게 다르니? • 남자와 여자가 어떤 점에서 독특한 것 같니? 서로의 차이점은 어떻게 상호 보완하고 있니? • 남자와 여자가 함께 할 수 있는 게 뭘까? 또 상대가 없으면 아예 할 수 없는 게 있다면, 그건 뭘까? 이런 식의 간단한 대화는 성별의 차별 없이 내가 가진 성을 누리도록 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또 때에 따라서는 아이가 지금 잘못된 몸에 들어가 있다고 말하는 성전환 운동가의 뻔한 소리(stereotypes)에 반박할 기회까지 제공한다. 소녀가 나무 오르기를 좋아한다고 또 소년이 춤추는 것을 좋아한다고 해서 소녀가 소년이 되거나 소년이 소녀가 되어야 하는 건 아니다. 우리가 보는 건 단지 나무를 오르기 좋아하는 소녀와 춤을 사랑하는 소년일 뿐이다. 낸시 피어시(Nancy Pearcey)가 말한 것처럼, 당신이 거부해야 할 것은 몸이 아니라 고정 관념이다. 청소년기에 가까워진 자녀와는 성적(romantic) 욕망, 결혼과 성, 그리고 성이 가져다주는 자연스러운 결과인 출산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라. 당신이 그 역할을 감당하지 않는다면, 구글과 틱톡, 그리고 교사 및 친구들이 그들의 인식을 형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다음은 대화를 시작할 수 있도록 돕는 몇 가지 질문이다. • 여자와 다르다는 이유로 여자가 남자에 대해서 좋아하는 게 있다면, 그게 뭘까? • 남자와 다르기에 남자로 하여금 여자에게 끌리게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게 뭘까? • 남자와 여자가 결혼할 때는 서로에게 생명을 걸고 맹세해. 이런 사실이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에 대해서 알려주는 게 무엇일까?(사 62:5; 호 2:19, 20; 계 19:7) 하나님의 사랑이 오늘날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사랑의 관계와 다른 게 뭘까? 피임 및 기타 관련 기술은 하나님께서 애초에 설계하신 성의 아름다운 결과인 출산과 거리가 멀어지도록 하거나 아니면 아예 성을 출산과 정반대의 위치에 자리 잡도록 하는 현대 문화를 만들었다. 오늘날 문화는 성관계 후 임신을 원치 않는 놀라움이나 아예 “문젯거리”로 보는 경우가 많다. 이게 정상인가? “생육하고 번성하라”(창 1:28)는 성경의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왜 “남자와 여자”(창 1:27)를 창조하셨는지, 그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은가? 오늘날 성 이데올로기가 성경과 전혀 다른(alternative) 복음을 제공하기에, 우리는 아이들(그리고 아마도 우리 자신까지도)로 하여금 이런 점에 대해 깊이 생각하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아이들도 타락 이후 모든 사람이 느꼈던 부활과 연결에 대한 똑같은 갈망을 갖고 있다. 새 이름, 새 정체성, 새 몸, 새 사랑의 공동체를 믿고 영접하라. 트랜스젠더 이념도 아이들에게 이런 식의 “복음”을 제시는 하지만, 결코 전달하지는 못한다. 3. 친절함과 진리를 연결하라.잠언 3:3은 친절함과 진리를 연결한다. “인자와 진리를 저버리지 말고, 그것을 목에 걸고 다니며, 너의 마음 속 깊이 새겨 두어라.” Z세대는 진실이 친절에 의해 구성되지 않는 한 진리조차도 들으려고 하지 않기에, 이 둘의 연결은 오늘날 깊은 연관성을 가진다.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동감(compassion)은 일반적으로 무조건적인 인정(affirmation)을 의미한다. “네가 원하는 걸 하는 게 가장 중요해”(You do you). 이제 공감(Empathy)은 지배적인 미덕이다. 마치 인기 있는 마당 표지판이 선언하듯이 말이다. “친절이 전부이다.” 십대의 아버지로서 나(Josh)는 오랫동안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아이들과의 대화에서 나는 진리의 틀을 먼저 잡아놓고, 그 다음에 공감의 맛을 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젊은 목사 친구가 내게 조언했다. 이 세대에게는 친절하게 들리지 않는 한 진리조차도 결코 진리로 울려 퍼지지 않는다고 말이다. 나는 이제 친절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시작한 하나님의 진리가 어떻게 더 큰 친절로 이어지는지를 배우고 있다. 몇 가지 예는 다음과 같다.• 연구에 따르면 성별위화감이 있는 대부분의 아이가 그 문제를 극복한다고 해. 그런데 오늘날 문화는 아이들이 느끼는 성적 혼란(trans)을 영구적인 것으로 취급하도록 강요하고 있어. 아이들을 아예 탈출할 수 없는 상자에 강제로 집어넣는 게 잔인하다고 생각하지 않니? • 친구가 우울증으로 고생한다니, 가슴이 아프구나. 정말 힘든 일이지. 성전환은 일반적으로 그 그런 증상 개선에 도움을 주지 않아. 그 친구는 하루라도 빨리 우울증을 일으키는 깊은 뿌리가 뭔지 밝히기 위해서라도 전문가가 필요하겠구나. • 지속적인 혜택을 주지만 그럼에도 몸에 영구적인 손상을 주지 않는 방식으로, 성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사람을 도울 방법이 뭐가 있을까?• 평생 훈련을 통해서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갖춘 여자 수영 선수가 여자라고 인식은 하지만 몸은 여전히 남자인 생물학적 남자와 경쟁해야 한다면, 기분이 어떨까? 나는 한 가지라도 분명한 생각을 공유하고는 조용히 물러난다(십대들은 숙고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 다음 나중에 대화를 시작하거나 더 많은 질문을 위해 또 다른 기회를 찾는다.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는 이가 또 있는지 파악하라 그리스도인 부모라면 자녀와 성에 대한 대화를 시작할 기회를 찾아야 하지만, 다른 누가 또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는지도 알아야 한다. 헬레나 키르슈너(Helena Kirschner)는 온라인에서 특히 십대를 겨냥하는 성전환 찬성(pro-trans) 인플루언서가 얼마나 유혹적이고 공격적인지를 폭로한 사람들 가운데 한 명에 불과하다. 로드 드리어(Rod Dreher)와의 이전 인터뷰에서 키르슈너는 부모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아이가 친구 집에 자러 가는 경우에만 질문을 던진다는 것이다. 어딘데? 거기 또 누가 오는데? 그러나 문제는 부모와 같은 방에 있는 아이가 사춘기 차단제와 교차 성호르몬을 제안하는 낯선 사람과 온라인 채팅을 하고 있어도 부모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게 현실이라는 것이다. 헬레나는 부모에게 외치고 있다. 지금 당신네 아이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바로 이 질문이 자녀와 성에 관한 정기적인 대화를 시작하는 진짜 핵심이 될 것이다. 그들의 마음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갑옷의 어떤 균열이 그들을 젠더 이데올로기에 취약하게 만드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긍정적인 측면에서 볼 때, 자녀가 남자든 여자든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강력하고도 아름다운 현실에 뿌리를 둔, 가장 진실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하겠다는 건강한 비전을 심어주는 것이 당신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원제: How to Talk with Your Kids About Transgender Ideolog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성정체성
트랜스젠더
젠더
성전환
불안이 엄습할 때 도움을 주는 세 가지 질문
by Karrie Hahn
2022-11-21
아무리 온건하게 표현한다고 해도, 타락한 세상에서 사는 건 힘들다. 자연재해가 발생한다. 병에 걸리거나 관계가 깨진다. 생계유지를 위해 고군분투한다. 비록 지금은 별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여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모든 것이 한순간에 바뀔 수 있다는 목소리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깨어지기 쉽고 취약하다. 무엇보다 끔찍할 정도로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현실을 도통 인식하지 못하는 건 성숙하거나 자아실현을 달성했기 때문이 아니라, 망상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이 아니라 피조물이다. 그렇다고 두려운 현실을 올바로 인식하는 게 모든 답은 아니다. 그건 언제라도 불안으로 바뀔 수 있다. 산상수훈의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마6:34)는 많은 이에게 친숙한 예수님의 말씀이다. 불안이 미래를 지향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현재에도 얼마든지 느낄 수 있고 또 과거로 인해 영향이나 자극을 받을 수도 있다. 따라서 불안은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경험 그리고 미래에 대한 걱정에서도 다 발생한다. 그러면 불안이 우리를 압도할 정도로 위협이 될 때, 어떻게 방향을 바꿀 수 있을까? 여기에서 저기로 가면 된다는 식의 쉬운 조언으로 해결될 정도로 인생이 단순하지 않다. 사람마다 다 미묘한 차이가 있을 정도로 복잡한 인생이지만, 스스로에게 던지는 다음 세 가지 질문이 불안감 해소에 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1. 내 과거에서 건질 가장 중요한 진실은 무엇인가?나이가 들수록 되돌아보는 과거는 점점 더 많아진다. 지금의 정보와 지식을 당시에도 갖고 있었더라면 결코 저지르지 않았을 죄를 생각하며, 또는 결코 그리 쉽게 내리지 않았을 잘못된 결정을 회고하며 많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 과거에 저지른 일이 주는 죄책감에 사로잡힌 사람들도 있고, 누군가가 가한 악행이 가져다준 수치심에서 도통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과거의 사건은 종종 현재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우리에게 가해진 일을 기억하면서 “내가 이제는 안전한가?” 또는 “나한테 그런 나쁜 일이 또 생기는 건 아닐까?” 등의 질문을 던지곤 한다. 또한 내가 범한 악한 일을 떠올리며, “하나님이 정말로 나를 용서하셨을까?” 또는 “내 결정이 나와 다른 사람의 인생을 망친 건 아닐까?”라고 묻는 건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과거 나의 행동과 나를 향한 타인의 행동이 지금도 여전히 생생하고 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으로 말하자면, 그것들 가운데 그 어느 것도 과거와 관련해서 결코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진실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택하시고 구속하셨고 또 그분의 소유물로 삼으셨다는 것이다(엡 1:3-7). 당신은 이제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자녀이다(요일 3:1). 당신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고전 1:30). 당신 속에는 성령이 내주하신다(갈 4:6).2. 지금 내 현재에서 가장 중요한 진실은 무엇인가?조금만 솔직하다면, 현재라는 것은 단지 과거의 후회와 트라우마가, 그리고 미래의 불안과 두려움이 만나는 곳에 불과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과거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미래에 대한 불안과 씨름하는 현재이기에, 매 순간을 온전히 살아내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때때로 현재 상황은 오로지 고통과 어려움으로만 가득 차 있는 거 같다. 단지 어려운 시기를 통과하는 게 가장 어려운 부분이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 대부분이 이미 알고 있다. 진짜 힘든 건 모든 것을 혼자 헤쳐나가야 하는 경우이다. 그렇기에 당신의 현재와 관련한 가장 중요한 진실은 이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하시고 “결코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히 13:5)고 약속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항상 내 곁에 계시다고 느낄 수 있는 건 아니다(시편 88편). 그러나 아무리 상황이 당신은 완전히 혼자라고 비명을 질러도, 그건 거짓말이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비록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환난 가운데 걸어가는 당신과 함께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 곁에 계신다. 떼려야 뗄 수 없는 유대 관계로 당신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밤낮으로 대화할 수 있는 친구가 당신에게 있음을 의미한다. 그는 당신을 위해 항상 중재하신다(히 7:25). 하나님의 임재는 그가 당신을 보고 계시고 또 당신의 기도를 듣고 계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또한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당신이 느끼는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어려움도 견딜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심을 의미한다. 3. 앞으로 내 미래에서 가장 중요한 진실은 무엇인가?아마도 이게 가장 좋은 질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우리는 희망의 영역에 들어섰고 성경이 약속하는 소망은 켤코 우리를 실망시키지도 않을 뿐 아니라, 실망시킬 수도 없기 때문이다(사 49:23). 미래를 생각할 때, 현실의 표면 아래에서 작은 소리로 덜렁거리는 낮은 등급의 불안에서부터 내 존재 전체를 전면적인 공포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불안을 경험하기 쉽다.몸에 장애를 갖게 되어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된다면,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내 몸 하나도 부양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다면 어쩌지? 집을 살 여력은 없는데 집세만 계속 오르면 어쩌지? 결국 결혼을 못 하고 애가 없으면, 다 늙은 나는 누가 돌보지? 배우자가 죽으면? 행여 사업이 실패하면? 우리 애의 삶이 엉망이 되거나 혹은 복음을 거부하면 어쩌지?불안은 매우 창의적이고 불안이 가져다주는 상상력은 풍부하기가 이를 데 없다. 머릿속에서 끝없이 움직이는 불안의 스크롤을 멈추는 건 거의 불가능할 정도이다. 고민하는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선의로 말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많아도, 그 사람들은 그걸 어떻게 알겠는가? 따라서 이러한 두려움에 직면할 때면, 미래의 안전을 보장하는 보다 더 크고 넓은 시각을 갖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관점을 넓혀야 한다. 미래와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진실은 무엇인가? 당신이 하나님의 영광만을 바라보며 완전한 행복 속에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계 21:1-7; 22:1-5). 더 이상의 돈 문제, 인간 관계 문제는 생기지 않는다. 건강으로 걱정할 필요도 없다. 모든 고통과 혼란이 사라진다. 이제 우리에게 더 이상의 두려움은 없다.어제, 오늘, 그리고 영원시간 밖에 존재하시는 시간의 창조자 하나님은 시간에 얽매인 피조물인 우리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올바르게 보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신다.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히 13:8). 지속적인 은혜와 사랑의 임재로 우리와 함께하신다. 심지어 아니, 오히려 불안감에 내가 무너진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일수록 나를 더 꼭 잡고 계신다. 불안이 엄습할 때 이 세 가지 질문이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진정한 북쪽으로 인도하는 데 도움을 주는 든든한 나침반 역할을 하길 바란다. 하나님은 창세부터 우리를 택하셨고,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신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를 통해서 이뤄질 완전한 세계에 대한 약속을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 원제: 3 Questions to Ask When Anxiety Strike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우울증
불안
하나님의약속
어떻게 Z세대를 교회로 이끌까?
Z세대는 지금 교회를 버리고 있다
by Kyla Hardee
2022-11-20
18세에서 22세 사이 청년 성인의 3분의 2가 적어도 일 년 동안 교회를 떠나고, 그중 많은 이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Z세대(서양 기준에서는 스마트폰이 본격적으로 상용화가 시작한 2000년대 후반(2008-2009년)부터 중학생 시절을 보낸 세대_역주)가 이십 대가 되어 대학과 직장을 갖게 되면서 교회에서 떨어져 나가는 비율이 급격하게 높아진다. 그중 단 3분의 1만이 정기적으로 교회에 출석한다. 이런 통계는 당황스럽지만 매우 명확하다. 내가 속한 세대, 그러니까 Z세대는 지금 교회를 버리고 있다. 오늘날 문화는 자급자족이라는 거짓말로 우리를 유혹한다.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 밖에서도 얼마든지 만족함을 찾을 수 있다는 신화를 심어주고 있다. Z세대가 점차 교회를 떠나고 무관심이 침입하면서,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질문을 해야만 한다. 지금 교회에 필요한 게 더 매력적인 예배, 업데이트된 건물, 또는 새로운 프로그램일까? 젊은 세대를 끌어들이기 위해서라도 핵심 교리를 타협해야 할까? 더 관대하고 포용적인 교회로 바뀌어야 할까?아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의 뿌리에는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비성경적인 견해가 자리 잡고 있다. 지금 Z세대에게 필요한 것은 교회와 교회의 존재 목적,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얼마나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가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다. 교회가 무엇인가? 교회라고 할 때 떠오르는 건 첨탑과 지붕 위 튀어나온 큰 십자가라는 정형화된 이미지이다. 또한 근사한 옷을 입고 장의자에 앉은 교인들이 오르간과 성가대와 함께 찬양하는 모습 정도이다. 그게 아니라면, 라디오에서 들은 노래를 부르고 또 트렌디한 청바지를 입은, 보다 현대적인 교회의 모습을 떠올릴 수도 있다.그러나 이런 게 교회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말하지 않는다. 동료 신자들을 둘러보라. 또 전 세계와 기독교 역사를 통틀어 살았던 형제자매들을 생각해 보라. 교회는 결코 건물이나 옷 입은 스타일로 정의되지 않는다. 교회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삶이 변화된, 신부로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들로 구성된다. 성도라는 한 가족으로서,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 3:15)이다. 기둥과 벽은 건물의 무게를 지탱하고 강화함으로 건물이 부서지지 않도록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를 받들고 굳건히 함으로 세대를 초월해서 흔들리지 않는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를 모퉁잇돌로 삼아 그 위에 세워졌다(엡 2:20).왜 Z세대는 교회가 필요한가?“네가 원하는 걸 하는 게 가장 중요해”(You do you), “너만의 진실을 찾으라”, “네 마음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라”는 Z세대가 성장한 개인주의 문화를 형성하는 잠언이다. 권위와 법을 비웃는 것은 당연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기대되고 칭찬받는 일이 되었다. 나는 얼마든지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있고 또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는 거짓말로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는 책임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으며, 동시에 다른 사람이 내게 이래라저래라하는 것도 반기지 않는다. 그러나 Z세대는 교회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 히브리서 10:24-25을 보자. “서로 마음을 써서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합시다. 어떤 사람들의 습관처럼, 우리는 모이기를 그만하지 말고, 서로 격려하여 그 날이 가까워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힘써 모입시다.” 우리는 함께 모여서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며 영원으로 가는 길에서 서로 격려하고 세워주라는 명령을 받았다.Deliberate Church(의도적인 교회)에서 마크 데버(Mark Dever)와 폴 알렉산더(Paul Alexander)는 이렇게 썼다. “개인의 걸음걸이도 중요하지만, 언약 교회라는 가족 안에서 상호 세워주는 관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도움을 이용하지 않는다면,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는 우리의 신앙 여정은 가난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행보에서 얼마든지 독립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자신을 속인다.성경 전체에는 “서로”라는 명령이 많이 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엡 5:19), “ 여러분은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십시오”(약 5:16),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다정하게 대하며,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십시오”(롬 12:10), “서로 한 마음이 되고”(롬 12:16). 지역 교회의 형제자매와 교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명령에 순종할 수 있을까?Z세대를 교회로 이끄는 것은 무엇인가? 좋은 의도를 가진 많은 교회 지도자가 Z세대가 교회 문을 넘도록 큰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Z세대는 그리스도인의 욕망이 이 세상의 욕망을 초월할 때만 교회에 남을 것이다. 멋진 예배와 흥미진진한 프로그램 그리고 풍부한 교제의 기회 등으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것은 교회의 목적에 관해서 잘못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지역 교회가 세상에 온통 마음이 빼앗긴 사람을 불러들이고도 남을 정도로 세상의 매력을 갖춘 교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변화되어 세상과 다른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이다. Z세대를 어떻게 참여시킬지 생각하는 게 도움이 되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소중한 것을 교회도 똑같이 소중하게 받아들일 때만 Z세대에게도 통하는 호소가 가능할 것이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고, 그분이 가치 있게 여기시는 것을 가치 있게 여길 때, 우리 Z세대는 지역 교회를 사랑할 것이다.그러면 나를 하여금 계속해서 교회에 나오도록 만드는 건 무엇일까? 나는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지만 동시에 겸손한 마음으로 섬긴다. 교회의 등록 교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설교만 듣고는 낯선 사람처럼 교회 문을 나서는 게 아니다. 우리에게는 교회의 가족의 되는 특권이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사용하여 신자로 구성된 회중을 세움으로 우리 각자는 교제에 참여한다(롬 12:3-8). 데버와 알렉산더는 이렇게 말한다. “회원 개개인의 삶에서 지역 교회가 우선순위를 차지하게 하는 것은 현대 사회가 주는 이기적인 개인주의를 억제하고 겸손한 섬김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교회를 의무감의 대상 또는 피해야 할 장소로 보도록 하는 유혹도 있다. 그러나 어느 날 교회로 걸어들어온 한 명의 Z세대가 교회에서 어떻게 우리가 다른 형제자매를 격려하는지 방법을 알고 싶다고 묻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리가 다른 형제자매들과 나의 죄를 나누기 시작하고, 서로 기도하고, 또 서로를 책임지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목표로 교회를 섬기기 위해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면 어떻게 될까?겸손을 드러내자. 하나님을 경배하고자 하는 열망을 나타내자. 봉사를 열망하자. 오로지 복음을 위해 내가 가진 재물을 쏟아붓자. Z세대여, 그대에게는 교회가 필요하다. 그리고 교회도 그대를 원하고 있다.원제: How to Get Gen Z to Churc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Z세대
청년전도
기독교는 결코 편안한 하이킹이 아니다
by Trevin Wax
2022-11-19
모든 좋은 이야기 속에는 갈등이 있다. 아무 생각 없이 걷는 방랑이 아니라, 가치 있는 모험이 되기 위해서는 장애물과 도전을 마주해야 한다. 모험으로 가득한 탐구를 지속하려면, 목적지에 반드시 도달한다는 약속에서 영감을 얻어야 한다.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는 하이킹할 때 정상에 초점을 맞춘다. 정상에 도달할 수 있다는 비전이 지칠 때 동기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산 정상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는 것―정상에서 내려다보는 경치와 맑은 공기 그리고 넘치는 만족감―만으로도 우리는 아무리 지쳐도 계속 산을 오르게 하는 영감을 받는다. 언제나 나아가며인간은 본성적으로 목표를 향해 달려간다. 우리 마음에는 목적지가 있다. 휴대폰에는 특정 기술과 지식을 성장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수많은 앱이 있다. 점점 더 어려워지는 비디오 게임은 도전과 자극으로 우리를 사로잡는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우리 몸이 복종하도록 훈련하는 데에는 영감이 필요하다(고전 9:27). 그래서 보통 각종 동호회는 코치와 함께하는 피트니스와 운동 루틴을 중심으로 만들어지곤 한다. 새해가 시작되면 우리는 나 자신을 더 발전시키겠다는 결심을 하곤 한다. 교사는 학생이 지식을 쌓도록 돕는다. 또한 각종 강사와 코치는 수강생이 새로운 언어나 악기를 배우거나, 또는 운동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돕는다. 이처럼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추구하는 존재이다. 더 이상 인격을 성장시키는 것에도, 새로운 취미를 시도하거나, 집과 마당을 아름답게 꾸미고 싶은 데에도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 삶의 개선에 대해 아예 무관심한 상태에 빠진 사람을 보는 것은 안타깝다. 목표 의식을 잃어버리고, 아예 야망 자체를 포기하는 사람을 보는 것은 슬프다. 왜일까? 인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무언가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전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 이상 추구해야 할 목표에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은 뭔가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반면에, 성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정체성의 기반을 오로지 성취에만 두는 경우에도 문제가 생긴다. 산비탈을 하나하나 이루는 작은 걸음에서만 가치와 의미를 발견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를 창조하신 그분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성취를 통한 완벽만을 추구한다면, 결국 우리는 하루하루를 초조함 속에 살다가 지쳐서 나가떨어질 것이다. 다른 추구때때로 종교인은 삶의 여정을 산 정상을 향한 오르막길로, 그리고 정상에 다다르게 되면 마침내 영적 성장과 탁월함을 성취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르다. 기독교가 말하는 이야기는 인간의 상승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강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산에서 내려오셨다. 우리 스스로 구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단지 하나님의 하강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은혜로운 하나님의 강림에는 우리를 하나님과 함께 일으키시겠다는 목적이 담겨있다. 그래서 우리도 성령의 능력으로 상승한다. 십자가 저편에서 보면, 그리스도인의 삶이 산 정상을 향한 길과 닮아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이 여정 또한 모험이라면, 우리는 마땅히 어려움을 예상해야 한다. 신약은 믿음의 경주를 장애물 경주로 묘사한다(갈 5:7, 살전 2:18, 히 12:1). 정상으로 가는 길은 위험하기에 설렌다. 그 여정에 좌절의 위험이 없다면, 우리를 걸려 넘어지게 하거나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장애가 없다면, 어디에서 튀어나올지 예상조차 할 수 없는 항상 존재하는 진짜 위험이 없다면, 우리는 차라리 동네 주변을 생각 없는 걷는 편안한 산책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가치 있는 목표일수록 헌신과 노력이 필요하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거나, 박사 학위를 취득하거나, 마라톤을 뛰기 위한 훈련을 하든 간에, 힘들수록 따라오는 대가는 가혹하다. 성공을 맛보고 마음과 몸을 변화시키려면, 미래에 만날 나의 모습에 대한 비전을 확고히 하고 거기에 집중해야 한다. 참회의 길당신이 나와 같다면, 미래의 자신을 생각할 때 마음이 들뜨기도 하지만 또 동시에 위축되기도 할 것이다. 자신의 결점과 실패를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어느 부분에서 힘들어하는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모를 수가 없다. 같은 곳에서 계속 걸려 넘어지고 있지 않은가? 교회가 학교라면, 지금 내 수준은 잘해야 간신히 합격하는 정도이다. 교회가 병원이라면, 지금 입은 상처와 부상이 너무 심각해서, 차마 건강한 내일의 나를 꿈꿀 수 없는 수준이다. 그러나 용기를 가지라! 자기 평가는 원래 좋을 수가 없다. 예수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당신의 눈에는 그리스도를 닮지 못하게 만드는 남아 있는 죄가 더 잘 보일 것이다. 거룩함에서 자라면 자랄수록, 당신은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더 깊이 깨닫게 될 것이다. 높은 산일수록, 정상은 더 멀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여정을 당신보다 훨씬 더 오래 또 충실하게 걸어간, 과거의 신앙 선배와 이야기를 나눈다면, 당신은 결코 그들이 자신의 발전에 대해 자랑하는 소리를 듣지 못할 것이다. 대신 이런 말이 들릴 것이다. “나는 아직 갈 길이 멀어요!” 그에 대한 응답으로, 당신은 자신에게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결코 도달하지 못할 거 같아.” 그냥 그리스도의 명령 중 몇 가지를 확실하게 지키고, 넘어짐을 최소한으로 유지하기만을 바랄 것이다. 이처럼 산을 오르는 길은 때때로 절망적일 수 있다.그런데 좋은 소식이 있다. 기독교가 마치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은 표준을 세우는 것 같지만, 동시에 길을 잃은 사람에게 얼마든지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난다(잠 24:16). 복음은 용서에 관한 좋은 소식이다. 그리스도의 의가 당신의 불의를 덮는다. 엄청나게 높은 기독교의 도덕적 비전 바로 옆에는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와 은혜가 자리 잡고 있다. 급진적 이상은 급진적 자비로 인해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자비는 결코 그 표준을 낮추지 않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표준이 그분의 자비를 감소시키지도 않는다. 실패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대답16세기 전, 교회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로마의 잔인한 박해 이후 수십 년에 걸친 긴장을 직면했다. 그 시대에 많은 그리스도인이 고향에서 쫓겨났다. 일부는 생계를 잃었고, 또 목숨을 잃은 이도 적지 않았다.기독교 신앙과 관습에 대한 로마의 탄압에는 신성한 종교 문서의 몰수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문과 죽음의 위협에 일부 그리스도인은 신앙을 포기했다. 일부 교회 지도자들은 신약성경을 당국에 넘겼다. 한편, 많은 사람이 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켰고, 그 결과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고난의 시간이 끝나자 핍박 때문에 신앙을 버리거나 성경을 넘겨준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에 대한 문제가 생겼다. 그들도 회개하면 돌아올 수 있었을까? 극심한 핍박으로 흔들리던 사제와 주교가 다시 지도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을까? 크고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 그룹(북아프리카의 주교인 도나투스(Donatus)의 이름을 따서 “도나투스파”로 명명됨)은 말도 안 된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복귀한 지도자가 집례하는 세례와 성만찬은 아무런 능력이 없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성화와 관련해서 수천 개의 글을 남겼다. 그런 그의 여정은 그를 도덕적 해체에서 도덕적 미덕으로 이끌었다. ‘고백록’에 드러난 아우구스티누스의 대담한 자기 평가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도 도나투스파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 거라고 예상할 것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결코 기독교의 높은 이상을 낮추거나 죄와의 싸움 내지 투쟁을 변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회야말로 약한 자, 의심하는 자, 그리고 “실패자”를 품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소위 말하는 도나투스파 논쟁에서 드러난 아우구스티누스의 지도력을 통해 교회는 거룩함과 자비를 모두 다 옹호했다. 산꼭대기로 오르는 길은 그대로 남아 있지만, 이제 그 길은 회개의 길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우리를 손짓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할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넘어짐을 덮을 것이다. 복음은 순결하고 건강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패배자, 실패하고 나약한 자, 그리고 타락한 자를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음’이라는 미덕의 산꼭대기에 이르는 길은 참회의 길이다.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죄가 없는 삶이 아니다. 회개하는 삶이다. 죄인에서 성자로예수님과 사도들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만나는 다른 세상(otherworldly) 윤리에 대한 철저한 충성이다. 그리고 그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표준에 미치지 못하는 모든 사람을 향해서도 활짝 열려있다. 성화의 학교는 지금 한창 수업 중이다. 야전병원은 지금도 부상자들을 수용하고 있다.이상(ideal)과 적절하게 타협하려면 도덕적 노력이라는 모험의 수준을 낮춰야 한다. 그런 경우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의 영광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 이상을 낮추는 것은 결국 우리의 악덕을 미덕으로 바꾸는 것이다. 구원을 하나님의 선물이 아닌, 뭔가 모자란 것으로 만든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진 빚으로 왜곡한다. 정통은 죄인을 구원한다. 그게 다가 아니다. 정통은 죄인을 성인으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 하실 뿐만 아니라, 거룩하게 하신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제 그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 물론 하이킹은 우리를 지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산을 오르다 보면 비틀거리기도 하고 또 넘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 그리고 은혜의 선물을 힘입어 우리는 계속해서 나아간다. 이미 나를 사로잡고 있는 정통을 더 굳게 붙잡겠다고 다짐하며 우리는 다시 나아간다. 우리는 항상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실패할 때마다 회개를 잊지 않는다. 미래의 승리로 가는 좁은 길은 현재의 회개라는 길이다. 그 누구도 죄 없이 정상에 도달할 수는 없다. 오로지 그의 영으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죄 없는 구주의 공로를 통해서만 정상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글은 트레빈 왁스가 쓴 The Thrill of Orthodoxy(정통이라는 희열)에서 발췌한 것이다. 원제: Christianity Isn’t Your Usual Mountain Hik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아우구스티누스
도나투스
박해
고난
인내
성화
칭의
정통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
by Ryan Griffith
2022-11-18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Expect great things, attempt great things).바로 이 여섯 글자가 글로벌 선교를 변화시켰다. 그리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내 삶의 비전과 방향을 바꾸었다.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 1761-1834)를 언제 처음 만났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대학 3학년 이후 그가 내 인생에서 떠난 적 없는 건 확실하다. 여느 대학생처럼 나도 영적으로 우여곡절을 겪어가며 한 지역 교회의 교인으로 등록했다. 마침내 내가 집이라고 부르는 교회를 찾았을 때, 하나님은 은혜의 강을 여셨고, 아마도 내 인생에서 가장 변혁적인 영적 성장의 시기를 맞게 하셨다. 하나님이 여신 은혜의 강에서 만난 지류 중 하나가 4학년 때 있었던, 캐리가 쓴 소책자, ‘이방인의 개종을 위해 사용할 수단과 관련한 그리스도인의 의무에 관한 질문’(An Inquiry Concerning the Obligation of Christians to Use Means for the Conversion of the Heathen, 1792)에서 발췌한 이 문장과의 섭리적 만남이었다.나는 우리 교회가 수요일 밤에 주최한 기독교 선교에 관한 전국 대회에서 캐리의 책에서 발췌한 이 문장을 읽었다. 다른 많은 18세기 저작물과 마찬가지로, 캐리의 책 제목도 위협적이었다. 그러나 제목 뒤에 숨은 내용은 매혹적이었다.제안에서 사명으로사도들로부터 현재까지 이르는 세계 선교에 대한 검토에 더하여, 캐리는 (그는 거의 전적으로 독학했고, 이중 직업을 가진 목회자였다) 대륙별 세계 복음화 상태에 대한 통계를 수집했다.더 놀라운 점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예수님이 주신 사명을(마 28:18-20) 우리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각종 변명을 다루기 전에, 캐리는 먼저 복음의 아름다움을 간결하게 포착했다는 점이다. 캐리는 이렇게 의아해했다. “지금도 무지와 우상 숭배에 빠진 실로 엄청난 불신자가 세계 각지에 퍼져 있는데, 어떻게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고 편안히 앉아서 쉬는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많을 수 있는 건가요?”[1] 글로벌 차원에서 예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의무와 모든 인간을 사랑해야 하는 의무는 우리로 하여금 세계 모든 곳에서 복음을 선포할 의무를 부여한다고 캐리는 주장했다. 그는 이렇게 결론 내렸다. “확실히 그리스도의 대의와 하나님 왕국을 증진하는 일에 온 힘을 다해 우리 자신을 바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입니다.”[2]캐리의 말이 내 마음에 깊이 와서 닿았다. 나는 나 자신과 내 주변 일 외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살았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복음이 거의 전해지지 않는 곳에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내게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캐리는 내가 그때까지 갖고 있던 비전이 글로벌 차원에서 예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성경의 비전과는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예수님이 만민의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가? 그렇다. 그가 지적했듯, 예수님이 주신 대 사명(great Commission)은 결코 대단한 제안(great suggestion)으로 그치지 않는다. 복음 선포는 그리스도인의 의무였고, 거기에 맞게 내 인생의 사명도 바뀌어야만 했다.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는 것은 나의 소명과 상관없이 그분이 온 세상으로부터 영광 받는 것을 나의 가장 큰 목표로 삼는 것을 의미했다.하지만 빠진 부분이 있었다.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정치적, 기술적, 문화적, 그리고 종교적 장벽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과연 무엇이 “그리스도의 대의와 왕국을 증진하는 데 온 힘을 다해 자신을 바치는” 어려운 일을 지탱할 수 있도록 할까? 어떻게 그런 수고가 완전한 탈진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을까?가능성과 의무이런 질문은 캐리에게도 중요했다. 그러나 조금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18세기 후반, 영국 중북부의 침례교 목회자들은 거의 교회의 연합을 마비시킨 사고방식, 즉 오순절과 같은 추가적인 성령 강림(사도행전 2장)이 있어야만 열방이 그리스도께 나아올 수 있다는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명백한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움직이시기 전까지는 교회에게 행동할 의무도 또 행동해도 성공할 희망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1791년 6월에 노샘프턴셔 목회자 모임에서 앤드류 풀러(Andrew Fuller)와 존 서트클리프(John Sutcliff) 목사는 당시에 성행하던 “미루는 데 급급한 사고”와 복음의 좋은 소식에 반드시 따라와야 하는 불타는 전도의 열심을 주제로 강력한 메시지를 전했다.[3]회의가 끝날 무렵 캐리는 이미 성경에 답이 있는 질문에 대해 서면으로 답변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미전도 국가들 사이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인가요? 그리고 그게 과연 가능합니까?”[4] 그래서 그의 소책자 ‘질문’(An Enquiry)이 그해 후반에 출판되었다.그러나 내가 처음에 읽었던 발췌 부분은 의무에만 초점을 맞춘 내용이었다. 논쟁에서 사실상 가장 중요했던 부분, 즉 그러한 의무가 어떻게 가능했는가는 빠져있었다. 시대에 맞지 않는 것 같은, 그러나 가장 시의적절한 본문‘질문’이 출판된 지 몇 달 후, 노샘프턴셔 연합회 목사들은 캐리의 답변을 논의하기 위해 모였다. 1791년 5월 31일 모임은 이사야 54:2-3을 본문으로 한 캐리의 설교와 함께 시작했다. 너의 장막 터를 넓혀라. 장막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펴라. 너의 장막 줄을 길게 늘이고 말뚝을 단단히 박아라.네가 좌우로 퍼져나가고, 너의 자손이 이방 나라들을 차지할 것이며, 황폐한 성읍들마다 주민들이 가득할 것이다.얼핏 보기에, 그가 선택한 본문은 기이한 선택 같았다. 복음전도와 제자양육에 관한 한 명료하기 이를 데 없는 신약성경 본문이 한두 개가 아닌데, 굳이 대사명의 가능성을 주장하기 위해 구약의 선지서에서 본문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일까?성경을 속속들이 꿰고 있던 캐리는 이사야서가 가진 구속사적인 비전의 탁월함과 그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고난받는 종의 승리(사 53:10-12)는 기쁨(사 54:1a)뿐만 아니라, 축복(사 54:1b)을 가져올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의 승리가 하나님의 적들을 영원히 무력하게 만들 것이라고 예언했다. 더 이상 이방 신들의 현혹이 열방이 하나님을 왕으로 영접하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좌우로 퍼져나가고, 이방 나라들을 차지할 것이며, 황폐한 성읍들마다 주민들이 가득할 것이다”(사 54:2-3).캐리는 이사야가 그리는 미래의 비전이 주 예수의 부활과 승천에서 이미 실현되었음을 알았다.기대와 시도메시지의 절정은 그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결코 잊지 못한, 다음 여섯 단어에서 드러났다.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5]예수님이 인류를 위한 대체 불가의 유일무이한 대속물이라는 사실은 부활에서 입증되었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 강림은 보이든 보이지 않든, 모든 보좌와 권세에 대한 메시아의 궁극적인 승리의 신호였다. 예수님이 단지 열방에 대한 복음의 사명을 시작만 한 게 아니다. 영광스러운 승천을 통해서 예수님은 복음의 절대적인 승리를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을 이미 제거하셨다(막 3:24-27; 계 20:1-2).따라서 캐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위대한 일을 기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단지 기대만 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되고 시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초라한 시작이라도,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성령의 능력 안에서 역사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서 우리는 대 사명의 성공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대 사명을 교회에 주시며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 28:18-19). 그리고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는 말씀은 오순절을 통해서 예수님의 약속이 지켜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오순절은 열방으로 나아가서 전도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이 가능하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증명한다.우리는 모든 것을 다 걸 수 있다내가 가진 ‘질문’ 발췌문 사본에 누락된 내용 중에는 다음의 내용이 있다. 기대와 시도 사이의 연결에 관한 부분이다 모든 민족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이 사도들에게만 적용된다면, 이 사명과 관련해서만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약속이 매우 제한적이어야만 한다는 사실은 자명합니다. 그러나 본문을 보면, 그런 생각을 아예 명시적으로 배제하는 방식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 명령을 내린 경우에 굳이 그 명령을 구속력 있는 뭔가로 만들려는 추가 시도는 필요 없겠지만, 명령의 이행에 필요한 과정, 그러니까 순종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보십시오. 그런 장애물은 이미 제거되었습니다.[6]부활의 승리로 인해 복음의 좋은 소식은 이제 그 무엇도 멈출 수 없다는 사실을 캐리는 알았다. 이제 만물이 예수께 복종하게 되었으니, 그가 그의 영과 그의 교회를 힘입어 강한 자의 집을 강탈하리라(막 3:24-27).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승리의 물결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이 깨달음은 내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다. 예수님과 동행한 초기에 나는 행여나 복음 속에서 극복하지 못할 지적 장애물을 만날까 두려웠다. 마찬가지로 개인전도에서 복음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까 두려웠다. 타문화 전도라는 도전 앞에서 두려움은 더욱 커졌다. 그러나 예수님의 영광과 부활 권세의 의미를 깨달음으로, 나는 모든 두려움을 완전하게 물리쳤다.그리스도의 관심사를 중심에 두기 위해, 나는 내 삶의 우선순위를 재정립했다. 그뿐 아니라 그가 나를 어디로 인도하시든, 그의 제자로 살기에 만날 모든 위험도 감수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모든 게 어떻게 가능한가? 예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위대한 일을 기대하고 위대한 일을 시도할 수 있다.세상을 바꾸는 여섯 글자여섯 글자 속에 담긴 비전은 또한 기독교 선교의 역사를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 캐리의 설교가 끝날 무렵 노샘프턴셔 연합회 목사들은 아직 복음이 닿지 않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협회” 창립을 결단했다. 4개월 후인 1792년 10월 2일, 그들은 그 계획을 정식으로 채택하여 침례교 선교회(Baptist Missionary Society)를 구성했다.그로부터 일 년 후, 지금은 무려 수천 명의 선교사를 보유한 BMS는 첫 선교사로 윌리엄 캐리와 그의 가족 및 몇몇 조력자를 인도로 파송했다.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는 침례교 선교회의 모토가 되었고, 아직 복음이 닿지 않은 이들을 향한 복음 선포에 대한 성경적 비전을 가장 잘 표현한 구절이 되었다.[7]성경 속 문화를 초월하는 비전(cross-cultural vision)의 회복은 떠오르는 복음주의 운동 전반에 걸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캐리의 친구이자 동료 목사인 존 라일랜드(John Ryland Jr.)는 나아가서 런던 회중교회(London Congregationalists)가 런던 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 1795)를, 그리고 성공회 교회가 교회 선교회(Church Missionary Society, 1799)를 창립하도록 힘을 보탰다. 1806년, 매사추세츠주 윌리엄스버그에 있는 윌리엄스 대학의 2학년생 다섯 명이 캐리의 ‘질문’을 읽고 미국 선교단체의 출범을 위해 기도하는 데에 헌신했다. 그로부터 사 년이 흐른 후, 그들은 미국 해외 선교 위원회(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 1810)의 설립뿐 아니라, 그들 중 두 명인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과 그의 아내 앤 하셀틴(Anne Hasseltine)을 버마로 파송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윌리엄스 칼리지(Williams College) 다섯 동기생 중 또 다른 한 사람인 루터 라이스(Luther Rice)는 해외 선교 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의 침례교도들을 연합시켰고, 사 년 후에는 침례 교단 선교 모임(General Missionary Convention of the Baptist Denomination)을 창립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선교사 파송 조직인 남침례회 국제 선교부(International Missions Board of the Southern Baptist Convention)의 전신이다. 우리는 과연 오늘날에도 여전히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승리를 확신하며 위대한 일을 기대하고 또 위대한 일을 시도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어떤 위대한 일이 오늘날 하나님을 가장 기쁘게 만들까? 1. William Carey, An Enquiry into the Obligations of Christians to Use Means for the Conversion of the Heathens (Leicester: Ann Ireland, 1792), 8. 2. Carey, Enquiry, 87. 3. 다음을 보라. Andrew Fuller and John Sutcliff, “Jealousy for the Lord of Hosts” and the “Pernicious Influence of the Delay in Religious Concerns”: Two Discourses Delivered at a Meeting of Ministers at Clipstone in Northamptonshire, April 27, 1791 (London: Vernor, 1791). 4. J.W. Morris, “Narrative of the First Establishment of This Society,” in Periodical Accounts Relative to the Baptist Missionary Society, vol. 1 (London: J.W. Morris, 1800), 2?3. ?5. Morris, “Narrative of the First Establishment,” 3.6. Carey, Enquiry, 10-11.7. Eustace Carey and William Yates, Vindication of the Calcutta Baptist Missionaries: In Answer to “A Statement Relative to Serampore, by J. Marshman, D.D. with Introductory Observations by John Foster” (London: Wightman & Co., n.d.), 35. 원제: Expect Great Things, Attempt Great Things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윌리엄캐리
지상명령
대사명
복음전도
선교
미국 칼빈대학교, 성에 관한 이단적 견해 수용
by Joe Carter
2022-11-17
사건: 칼빈대학교(Calvin University) 이사회가 성적 부도덕과 관련해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을 거부하는 교수진을 계속 임용하기로 결정했다. 과연 교단이 이 문제에 개입할까? 아니면 교단조차도 학교가 이단적 견해를 수용하도록 허용할까? 배경: 칼빈대학교 이사회는 최근 이성 부부 사이의 성관계 외 다른 성관계를 죄로 간주하는 신앙 고백서 조항에 대해서 반대를 표명한 일단의 교수진을 인정하기로 결정했다.Religion News Service에 따르면, 일단의 교수진이 신앙 고백서 내용의 난제들에 대한 의견서를 제출했으며, 이사회는 이를 승인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달리 말해서, 신앙 고백서에 반대하는 교수들이 칼빈대학교에서 가르치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이사회가 승인한 것이다. 미시간 주 그랜드래피즈에 있는 이 학교는 교인 수가 대략 이십만 명인 네덜란드 칼뱅주의 교단인 북미기독교개혁교회(CRC)가 소유하고 있다. 신앙 고백서에 반대한 교수의 숫자와 이름은 기밀로 분류되어 공개되지 않았다.칼빈대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수는 니케아 신경,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도르트 신조를 포함한 일련의 역사적 기독교 신조 및 고백과 자신의 신념이 일치한다는 문서에 서명해야 한다. 교수 핸드북은 또한 교수들이 “신앙 고백과 일치하게 가르치고, 말하고, 또 글을 써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지적한다. 2016년, CRC는 성(sexuality)과 관련해서 기본이 되는 성경 신학을 명확히 하기 위해 연구 위원회를 구성했다. 2021년, 이 위원회는 성경이 “성적 부도덕”으로 간주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포함한 내용을 담은 자세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Sarah Eekhoff Zylstra가 쓴 “The Christian Reformed Church Corrected Course”를 참조하라.)이 보고서는 또한 성경이 금지하는 성적 부도덕에 대한 태도는 교단 내에서 이미 신앙고백에 버금가는 의미(confessional status)를 가진다는 점을 지적한다. 우리의 고백에 따르면, 교회는 외설물, 일부다처제, 혼전 성관계, 혼외 성관계, 간통 또는 동성애를 포함한 모든 형태의 성적 부도덕에 대한 승인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관용해서도 안 된다. 도리어 교회는 성적인 죄와 더불어 우상 숭배와 탐욕 및 기타 다양한 죄를 회개하기 거부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모든 교회 앞에서 분명하게 경고해야 한다(고전 6:9-11). 그런 죄를 짓고도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이들의 영혼을 위해서라도 교회는 반드시 징계해야 한다(고전 5-6장).현재 칼빈신학교 이사회는 비성경적인 성에 대한 견해를 수용하기 위한 방편으로 “교단의 권위를 존중한다”라는 내용으로 교수 지침을 수정 중인데, 개정된 지침은 앞으로 몇 주 안에 나올 예정이다. 의미: 죄를 옹호하거나 가담하는 사람, 또는 죄를 조장하거나 용인하는 그리스도인을 교회가 징계하는 이유는 사랑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우리는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교단 내에서 퍼질 수도 있는 이단으로부터 교회 기관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성적 부도덕을 받아들이면서도 여전히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명백한 이단의 사례이다. 성도덕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해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음행을 피하라”(고전 6:18)는 성경의 명령을 알게 되고, 나아가서 그 명령이 어떻게 혼외 성관계까지 포함하는지(마 19:4-5)를 배우게 된 이상, 상황은 달라진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의무를 가지는 것이다.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이게 무슨 의미인가? 순종하지 않는 건, 진짜로 믿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 점을 분명하게 하셨다. 우리가 그의 계명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건 그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요 14:15).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할 때, 성적 부도덕이 도덕적으로 용인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건 불가능하다. 심지어 기독교 대학에서 그렇게 가르치는 건 말도 안 된다. 간음, 음란물 즐기기, 동성애 관계에 빠지기 또는 혼외 성관계 등은 그리스도인도 얼마든지 다양한 의견을 가질 수 있는 “학문적 자유”의 문제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CRC가 보고서에서 올바르게 지적했듯이, 권징이 필요한 이유는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이다. 그러나 권징에는 용기와 확고한 정통성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모두 주변 세속 문화와 비교해서 행여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소리를 들을까 두려워하는 대학에서는 찾기 어려운 자질이다. 칼빈대학교 이사회는 좋은 예를 보여주었다. 성경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사회는 잘 알고 있다. 성적 부도덕을 인정하자는 이단적인 가르침을 지지하고 조장하는 교수를 징계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신들의 의무라는 것을 모를 리 없다. 그들의 의무는 명약관화하다. 지난 165년 동안 교단이 지키고 고백해 온 입장은 사실 이천 년 이상 이어져 온 정통 기독교의 가르침이다. 이사회는 단지 그 점을 명확히 견지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대학 그리고 그들을 신뢰한 교단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대신, 성경의 권위를 거부하는, 공개되지 않은 숫자의 교수진을 용인하기로 결정했다. 불행하게도, 이사회는 불일치와 비일관성이라는 입장을 선택했다. Religion News Service의 기사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학교는 … 학생들의 혼전 성관계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며 결혼도 남자와 여자 사이에만 가능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앞으로도 이 규칙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학교 대변인이 말했다.” 정작 가르치는 교수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믿어도 관계없는 사항들에 관해서 왜 학교는 학생들만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말하는 걸까? 학교는 왜 혼전 성관계가 성경적으로 합당하다고 하면서, 학생들에게는 그런 행위를 하면 안 된다고 금지하는가? 혼전 성관계는 성적으로 부도덕하거나 아니면 도덕적으로 옳거나 둘 중의 하나이지 그 중간은 있을 수 없다. 더불어 교수에게 적용하는 지적 기준과 학생에게 적용하는 기준이 달라서도 안 된다. 칼빈이사회 의장인 브루스 로스(Bruce Los)는 이렇게 말했다. “대학이 CRC 신앙고백의 기준을 유지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동시에 다양한 관점을 가진 교수진을 갖추는 것은 학교 발전에 큰 도움을 준다.” 그러나 지금 이 대학은 CRC가 고백하는 신앙의 기준을 지키지 않고 있다. CRC의 신앙고백 기준은 명확하다. 그렇기에 교수진은 거기에 관해서 의무 면제가 필요했다. 분명한 것은 이제 많은 교수가 CRC 신앙고백의 기준을 아예 무시하고 있고, 의장인 로스와 이사회조차도 그 기준을 지키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로스와 이사회는 신앙 고백서에서 문자 그대로 지켜야 하는 부분은 어디인지, 나아가서 애초의 의미와 반대가 되어도 관계 없을 정도로 재해석해도 되는 부분은 어디인지를 스스로 결정함으로 자신들에게 주어진 권한을 남용했다. 로스는 이단적 견해조차도 “다양한 관점”이라는 명목으로 허용하고 싶어 한다. 칼빈대학교는 다음 단계로 무엇을 허용할까? 성적 부도덕과 기독교 정통을 결합한 혼합주의조차 기꺼이 용인하는 학교에서 도대체 허용하지 못할 견해가 뭐가 있을까? 점성술 또는 환생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교수가 나오지는 않을까?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 가운데 그런 사람이 어디 한두 명인가? 칼빈대학교 이사회에서 “이건 너무한데?”라는 말이 나올 정도의 이단은 과연 어떤 것일까? 우리는 비성경적인 타협이 가져오는 결과가 무엇인지를 미국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똑똑하게 알고 있다. 입으로는 칼뱅과 루터를 존경한다고 하면서 사실상 원조 개혁자들의 성경적 견해와 기준을 포기한 “개혁주의”(Reformed) 주류 교회를 보라. “성적 부도덕”에 대한 성경적 정의를 버림으로 칼빈대학교는 지금 과거 주류 교단이 걸어간 유사한 길을 가고 있다. 문화적 수용이라는, 눈에 보이는 단기적 열매를 얻기 위해 그들은 영원한 저주의 길을 선택했다. 정통을 버린 이사와 교직원으로부터 누가 이 학교를 구할 수 있을까? 과연 CRC는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린 사람들로부터 교단의 대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칼뱅을 구출할 용기를 낼 수 있을까? 만약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비록 작지만 유서 깊은 이 교단은 이단으로의 추락이 기독교 고등 교육 기관이라면 반드시 직면하는 불가피한 결과가 아님을 증명하는 역사를 일으킬 것이다. 원제: Calvin University Votes to Allow Faculty to Embrace Heretical Views on Sexualit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칼빈대학교
성윤리
신앙고백
개혁주의
“눈 덮인 작은 예배당”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정동제일교회
by 이종전 · 장명근
2022-11-16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대한 강토에 선 첫 세대 교회들을 찾아 떠납니다. 그 이야기들에서 우리 신앙의 근원과 원형을 찾아보려 합니다. 서울이 도읍지가 된 것은 조선을 세운 이성계에 의해서이다. 오늘날 정동이라는 이름도 이성계와 닿아있다. 이성계는 계비(繼妃)인 신덕왕후를 이곳에서 만났고, 신덕왕후가 죽음을 앞두고 유언을 남겼는데, “제가 죽거든 큰 연을 만들어 거기에 제 이름을 써 하늘 높이 날리세요. 그리고 연줄을 끊어 연이 바람에 날다가 떨어진 곳에 저를 묻어주세요.”라고 했단다. 그런데 그 연이 떨어진 곳이 다름 아닌 신덕왕후와 이성계가 처음 만났던 이곳에 있던 우물이었다고 한다. 본래 우물골이라고 하던 이곳에 신덕왕후의 묘를 만들고 정릉이라고 했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곳을 정릉골이라고 했는데, 후에 묘를 현재의 정릉으로 옮긴 다음에도 그렇게 불리다가 ‘정동’이 되었다.즉 우물이 있던 곳(현, 세안빌딩 터)에 신덕왕후의 무덤을 씀으로써 정릉(貞陵)골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 지명을 생각하면 정동은 새롭게 다가온다. 왜냐하면 조선의 문호개방과 함께 들어온 신문물이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한반도를 살려내는 우물과 같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하여, 정동은 외교적인 의미를 넘어서 선교사들을 통해서 전해지는 복음과 신교육, 그리고 서방의 문물들이 터를 잡고, 다시 전해진 곳이다. 그러므로 정동은 이 나라 근대사에서 ‘최초’라는 수식어를 갖고 있는 것들이 많다.정동은 정동제일교회를 비롯하여 초기 선교사들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이기 때문에 시간을 거슬러 그들을 만나고, 그들이 남긴 역사의 흔적을 찾아 나서고 싶은 곳이다. 정동을 계절 따라서 찾노라면 그때그때의 멋과 아름다움이 있다. 따라서 정동에 대한 의식을 조금만 준비해서 찾아 걷노라면 근대사와 선교 현장에 남겨진 많은 이들과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그중에 정동제일교회와 그 터에 남겨진 역사의 흔적들은 최초라는 수식어가 굳이 필요할까 생각해야 할 만큼 너무나 자연스럽게 ‘최초’가 많은 곳이다. 덕수궁과 정동은 140여 년 전 귀인들과 외인들의 거리였다. 게다가 개화기에 들어서면서 제국주의 국가들이 한반도를 침탈하기 위해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던 곳이기도 하기에 한국 근대사에서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프로테스탄트교회의 예배당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이 벧엘예배당이다. 단순히 가장 오래된 건물로서만이 아니라 최초의 벽돌구조의 건물이기도 하다. 증축되면서 정방형 건물이 되었지만, 처음 이 예배당은 서울 장안에 프로테스탄트교회로서 십자가 모양의 건물이었다. 거기에 종탑을 별도로 만들어서 망루처럼 우뚝 서서 서울 장안을 살피는 형상을 하고 있다. 작지만 종탑의 네 귀퉁이에는 첨탑을 만들었는데, 이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열망을 담은 것이 아닐지. 그런데 이 종탑 안에는 ‘경세종’(警世鐘)이라는 특별한 종이 있다. 직역하면 세상을 깨우는 종이라는 의미인데, 이 종은 1902년 성경번역위원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 목포를 가다가 해상사고를 당해서 순직한 아펜젤러 선교사를 기념하는 종이다. 특별히 이 종은 1907년 미국에서 제작해서 가져온 것이기에 국내 몇 개 없는 것으로 귀하다. 비록 지금은 울리지 않지만, 그 종의 존재를 알고 이곳을 찾노라면, 지금도 세상을 향해서 깨어나라고 심금까지 울리고 있는 듯하다.이영훈이 만들고 이문세가 부른 ‘광화문 연가’에는 “눈 덮인 조그만 예배당”이라는 노랫말이 있다. 이 노랫말을 쓸 때 작가는 분명히 벧엘예배당을 보았을 것이다. 아마 서울 장안에서 주변의 건물들과는 사뭇 다른 모양의 건물은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었을 것이다. 하지만 단지 외양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곳에 남겨진 것들은 무엇이든 조선의 문호개방과 함께 한반도에 처음 들어온 것들이었기에 비록 시행착오는 있었지만, 이 땅에 터를 잡아가면서 오늘의 대한민국이 되게 했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것도 있고, 뵈지 않게 숨겨진 것도 있지만 벧엘예배당은 지어진 이래로 그 자리를 지키면서 지금까지 정동과 근대사를 증언하고 있다.애초에 예배당은 라틴십자가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 차례 증축하면서 조금씩 바뀐 것이 현재의 모양이다. 외부에서는 벽돌이 색깔, 내부에는 기둥을 중심으로 보면 본래 예배당의 규모와 모양을 짐작할 수 있다. 특별히 벧엘예배당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되었었다. 1918년 우리나라에 처음 설치된 파이프오르간은 아시아에 3대 밖에 없는 것으로 희귀한 악기였다. 여성 독립운동가이자 이화학당의 교사인 김란사(1872-1919)가 우리나라 평신도 대표로 미국 감리교회 총회에 참석한 길에 미국 각지를 돌면서 재미동포들로부터 기부금을 마련해서 이 오르간을 설치했다. 하지만 그 경비가 상상을 초월하는 것으로 설치된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화폐로 오르간 가격이 2,500원, 운반과 설치비용이 5,000원이 들었다. 벧엘예배당 건축비가 8,000원이었으니, 오르간 설치비용이 얼마나 큰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정동제일교회의 오르간 설치는 예배에 있어서 찬양의 기쁨 이상의 의미가 숨겨져 있다. 정동제일교회는 1919년 삼일독립만세운동을 이끈 민족대표 두 사람이나 있었던 교회로서 이 운동을 이끌어가면서 필요한 것들이 많았고, 그것을 감당해야 했다. 그중에도 파이프오르간의 핵심인 송풍실 안에서 독립선언서와 당시 발행된 독립신문이 만들었다는 사실은 경이롭다. 일경의 눈을 피해서 만들어야 했던 것인데, 어디도 자유로운 곳이 없었다. 그런데, 바로 이 오르간 송풍실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는 곳이었기에 그곳에 숨어서 이러한 문서들을 등사해서 만세운동과 그 사실을 알리는 소식지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니, 단지 파이프오르간으로 찬양시간에만 유용했던 것이 아니라 독립선언서를 제작하는 공간이 되어줌으로써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역할을 했다.그러나 현재 이 예배당에서 만날 수 있는 오르간은 당시의 것은 아니기에 아쉽다. 당시에 설치되었던 최초의 오르간은 6.25사변 당시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예배당 일부가 파괴되면서 오르간도 망가졌기 때문에 정동제일교회로서는 아쉬움이 컸다. 하여, 2003년 현재의 오르간을 다시 제작하여 설치했다. 이 교회의 이종덕 권사라는 분이 연보한 것으로 새로운 것이지만, 최초의 오르간 설계도를 근거로 해서 복원했다고 한다. 그래도 설계도가 있었기 때문에 비록 같은 것은 아니지만 복원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오르간과 함께 드리는 예배가 가능해졌다. 또한 현재 정동제일교회의 벧엘예배당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스크랜턴(William Benton Scranton, 1856-1922)이 감리교회 최초 선교사로 이곳에 와서 자리를 잡은 곳이다. 그는 이곳에 자리를 잡고 최초의 개인 병원인 시병원(施病院)을 1886년 6월 15일 정식으로 개원했다. 그런데 바로 맞닥뜨리게 된 것이 조선의 정서상 남자 의사가 여자 환자를 볼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에 스크랜턴은 본국 선교부에 급하게 연락해서 여자 의사로서 선교사를 자원하는 사람을 찾아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하여, 스크랜턴은 새로 부임한 메타 하워드(Meta Howard, 1862-1930)가 도착하자 1887년 10월 보구여관(保救女館)을 새롭게 개원했다. 시병원이나 보구여관 모두 고종이 직접 지어서 하사한 이름이니, 그 자체가 병원으로서 허가를 내준 것과 같은 효력이 있었다.따라서 현재의 정동제일교회가 자리하고 있는 터는 스크랜턴이 살던 곳이며, 동시에 시병원과 보구여관이 시작된 곳이다. 물론 보구여관 터는 현재 이화여고 테니스장이기에 현재 정동제일교회 영내에 있지는 않았다. 다만 스크랜턴이 이곳에 자리를 잡고 대한민국 최초의 개인병원, 그리고 최초의 여성전문병원을 개설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보구여관의 역사는 이화여자대학교 부속병원으로 이어지고 있다. 반면 시병원은 스크랜턴 선교사가 모든 직분을 내려놓고 조선을 떠나는 것과 함께 사실상 문을 닫고 말았다. 하여, 그의 흔적은 안현교회, 상동교회, 동대문교회를 통해서나 찾아볼 수 있다.아쉽게도 현재 정동제일교회를 돌아보면 아쉽게도 스크랜턴과 관련한 것을 찾아볼 수 없다. 예배당 마당은 1919년 삼일독립만세운동에 민족대표로 앞장선 이필주 목사가 거주했던 주택이 있었던 곳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이 교회를 설립한 아펜젤러 선교사와 탁사 최병헌(1858-1927) 목사의 흉상이 건립되어있다. 그는 1888년 아펜젤러 선교사에게 복음을 전달받았으며, 1893년 존스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 후 아펜젤러 선교사와 함께 신약성경을 번역하는 일에 조력했다. 1902년부터는 이 교회의 제2대 담임 목사로 12년간 시무하면서 이상재, 윤치호 등과 함께 YMCA를 이끌었다.이것만이 아니다. 정동제일교회는 이필주 목사가 목회할 때 박동완, 유관순, 서재필 등과 같은 이들이 이 교회에 출석하면서 신앙을 세워갔다. 그리고 독립을 위한 각자의 역할을 생각하면서 뜻을 같이했다. 아직은 미완이지만 이 교회에서는 기억되어야 할 역사와 인물들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하는 공간을 만들 계획을 하고 있다. 늦은 가을날 바람 따라 나뒹구는 낙엽을 밟으면서 정동길을 걷고 싶은 마음이 들 때면 어느새 벧엘예배당을 향하게 된다.
정동제일교회
스크랜턴
이필주
삼일운동
진실을 담아낼 수 없는 소설은 그만 쓰자!
by 김형익
2022-11-15
“소설 쓰시네.” 사실과 다른, 말이 안 되는 소리를 들을 때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소설의 허구성을 빗댄 말일 것이다. 한 번은 한 정치인의 입에서 이 말이 나와서 소설가협회가 성명을 낸 적도 있다. 사실, 소설은 허구(픽션)이지만 인간 내면의 또는 인간 사회의 진실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최근에 류현재의 장편 가장 질긴 족쇄, 가장 지긋지긋한 족속, 가족을 읽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가 가족이라는 관계 속에서 죄가 가져온 비참함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경험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고통의 경험은 ‘어느 정도’ 그리스도인 가정 안에서도 경험될 수 있는 것들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 대한 스포일러가 되는 것은 피하면서 조금 소개하자면, 한 가정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다음은 각 장의 제목들이다: 김은희, 김현창, 김인경, 김현기, 김영춘과 이정숙. 이렇게 모두 다섯 장으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1장부터 4장까지 각 장의 제목은 김영춘과 이정숙의 자녀 이름이다. 노부부가 자녀 모두를 결혼시키고 건강하게 잘 살아갈 수 있다면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엄마의 뇌경색은 네 자녀 중 누군가 엄마를 돌봐드려야 하는 상황을 가져왔고 이 와중에 형제들 각자의 상황과 이해관계가 얽혀 빚어지게 된 결말은 슬프디 슬프다.소설의 각 장과 그 제목은 바로 그 사람의 시점(視點)에서 동일한 상황과 가족들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해석한 내용이다. 읽다 보면, 어떻게 동일한 상황과 가족들을 이렇게 ‘다르게’ 이해할 수 있고 확신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시점으로만 바라본 상황은 오해에 오해를 거듭하여 사실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눈덩이처럼 불어난 오해 덩어리가 되고 만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 삶에서 늘 일어나는 일이 아니던가? 우리 한국인에게 가족이라는 단어는 얼마나 독특한 단어인가? 어떤 이들에게는 다정한 엄마의 품이나 아빠의 넓은 가슴 혹은 언제든지 기댈 수 있는 형제들의 따뜻한 사랑을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모두에게 그리고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위기의 순간이 찾아오고, 위기의 순간에 우리는 어떤 결론을 필요로 하고 그 결론에 따라 행동한다. 작가가 사용한 제목은 어쩌면 가족이라는 개념의 부정적이면서 묘한 느낌을 얼마나 잘 표현했는지 모른다. 가장 질긴 족쇄, 가장 지긋지긋한 족속, 가족!한국의 노령화 현상과 함께, 부모를 직접 돌봐 드려야 한다고 느끼는 다분히 동양적 (혹은 한국적) 사고로부터 여전히 자유롭지 않은 자녀들의 사랑과 부담과 고민은 우리 모두에게 결코 남의 이야기일 수 없다.하지만 이런 일이 가족 안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교회와 우리 사회에서 그리고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조금의 사실은 존재한다. 하지만, 각자가 자신의 상상력에 따라, 그 조금의 사실에 옷을 입히기 시작하고 칠을 하기 시작하면서, 각자가 내리는 결론은 사실과는 전혀 무관한 허구가 되고 마는 것이다. 사실, 그 결론에는 일말의 사실이나 진실도 있을 수 없다. 우리 대부분은 어느 정도 그런 결론을 가지고 살아갈지도 모른다. 해석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본성은 우리를 결코 자유롭게 내버려 두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 결론을 가지고 사람들을 오해하고 상황을 자기식대로 해석하다가 죽는다. 자기 시점으로만 파악한 거짓과 허구, 그리고 오해 속에서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타락의 결과로 인간에게 주어진 죄와 비참의 현실을 보고 경험한다. 가족을 만드신 선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죄로 말미암아 산산이 깨어져 버렸고, 가족은 가장 안전한 사랑의 연합이라기보다는 끊을 수 없는 족쇄로 여겨지게 되었다. 가족 구성원 각자는 다 자기만의 시점에서 서로와 상황을 파악하고 해석하고 바라보니, 사실은 사라지고 진실은 찾을 수 없게 된다. 부부 사이에서, 그리고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 형제들 사이에서 말이다. 시간이 갈수록 오해는 쌓이고 그 속에서 소외와 불화와 단절은 깊어진다. 얼마나 많은 가정이 경험하고 있는 현실인가? 복음은 우리의 시점을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시점에서 하나님의 시점으로 보는 시각을 열어준다. 평면에서 움직이고 평면도만 보다가, 갑자기 공간의 시점, 하늘로부터 내려다보는 조감도(bird’s eye view)를 보게 되는 것이다. 다른 그림이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평면도를 보고 내가 내렸던 결론이 틀렸다! 복음은 우리 자신을 상대화하게 한다. 더 이상 내가 우주의 주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사람을 다스리시고 당신의 주권과 선하신 뜻을 이루어 가신다. 언제나 나의 시점은 상대적이고 부분적이라고 인정하게 한다. 결론을 하나님께 맡기게 된다. 이렇게 복음은 죄와 비참이 빚어내는 인간 사회의 비극을 고치기 시작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로부터 심각한 오해를 받았었다. 가만히 들어온 거짓 교사들이 고린도 사람들을 미혹하여 일어난 일이다. 어쨌든 1년 6개월 동안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운 바울의 입장에서는 배은망덕하고 기분이 상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 시점에서만 고린도 사람들을 보지 않았다. 조감도는 제3의 존재를 보게 한다. 제3의 존재는 사탄이고, 사탄이 조종하는 거짓 교사들의 존재들이 보인다. 얼마든지 고린도 교회와 바울의 관계는 이 오해로 말미암아 끝장이 날 수도 있었지만, 바울은 그 고리를 끊어낸다. 이것이 복음의 힘이다. 바울을 향한 고린도 사람들의 오해와 근거 없는 비난이 바울 자신에게 상처를 입힐 수 없었던 것은 복음 때문이었다.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 4:3-5).복음은 사람들의 오해와 시선, 비난과 판단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방식으로, 자기 시점의 판단이 빚어내는 오해와 확신 그리고 소외, 불화와 단절의 고리를 끊어내게 하는 힘이 된다. 복음은, 바울의 고백대로, 자신의 판단과 확신을 지나치게 믿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보호한다. 최종 판단은 하나님의 몫으로 맡길 수 있기에, 우리는 오해와 근거 없는 주관적 확신을 품고 죽지 않을 자유를 누린다. 주님은 교회를 가족에 비유하셨고(막 3:35), 신약성경은 교회를 하나님의 가족(권속)이라고 부르고 가족에 비유한다(엡 2:19; 딤전 5:1-2). 비록 이 세상에서 육신의 가족만큼 질기다고 느끼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혈연 가족 안에서 경험될 만한 오해들이 교회 안에서도 빚어지곤 한다. 하지만 우리는 교회를 지긋지긋해도 끊어낼 수 없는 질긴 족쇄처럼 여기지는 않기에 스스로 족쇄를 끊어내는 슬픈 결정들을 하기도 한다. 죄로 망가지기 전의 가족이라면, 소외, 오해, 불화와 단절 같은 일들 대신, 결속과 사랑, 돌봄과 섬김 만을 즐거이 누릴 수 있었겠지만, 죄성은 주의 자녀들에게도 여전히 잔존하는 세력으로 남아 우리를 지배하려 들며 교회에서 그 영향력을 키우려 들곤 한다.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몸이고 영적 가족인 교회에 상흔들이 남는 이유다. 가장 질긴 족쇄, 가장 지긋지긋한 족속, 가족, 이 소설이 들려준 슬픈 이야기가 우리의 가족, 교회에서 재연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저마다 ‘소설을 쓰는’ 사람들이 아닌가! 조금의 사실, 약간의 진실에 자신이 만들어내고 채색한 허구 덩어리로서의 소설 말이다. 복음이 이 못된 습성으로부터 우리를 건져내는 은혜를 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가진 평면도가 완전한 것이라고 우기면서, 복음 안에서 주어진 조감도를 볼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가?우리는 늘 이 싸움 속에 던져진다. 때로는 질긴 족쇄, 지긋지긋한 족속으로 여겨질지라도, 결국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어, 교회처럼 질긴 사랑의 연대, 기쁜 족속은 없다고 고백하게 되는 날, 단지 몇 사람만의 고백이 아닌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는 날을 바라본다. 이제 진실을 담아낼 수 없는 그런 소설은 그만 쓰자!
가족
시점
편견
정치적으로 분열된 사회, 목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by Patrick Schreiner
2022-11-14
최근에 정치적인 견해가 달라서 더 이상 교회를 다닐 수 없다는 교인의 통보를 들은 어느 목사의 하소연을 들었다. 또 문화적인 문제를 놓고 분열된 당회의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나아가서 교회 내 정치적 분열이 너무 극심하여 결국 교회를 떠나야만 했던 목사의 이야기도 알고 있다. 우리 대부분은 이런 이야기에 익숙하다. 지난 육 년에 걸쳐서, 정치라는 전염병이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교회를 강타했다. 최근 라이프웨이 설문 조사에 따르면, 목회자 중 무려 63퍼센트가 잦은 스트레스 때문에 힘들어한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요인 중 하나가 다름 아니라 정치적 분열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여기 네 가지 방안을 권면한다. 1. 가장 먼저 충성을 바쳐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를 되새겨주어라.교회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그리스도인이 충성을 바쳐야 할 첫 번째 대상이 예수님과 교회라는 점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사실상 그 핵심에서 정치적이라는 사실을 교인들이 알게 해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결코 세상적인 의미에서 사적이거나 당파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은 예수님이 정치적 메시지를 들고 오지 않았다고 말하는 게 당연한 시대이다. 보통 이런 식이다. “이스라엘은 전사로서의 왕이 백마를 타고 와서 로마를 무너뜨리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음을 변화시키는 영적인 메시지를 가지고 오셨다. 예수님은 단지 당신과의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관계를 원하실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말이 반은 맞지만, 반은 틀리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정치적인 선언을 하셨고,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막 1:15; 15:2, 26). 예수님이 왕으로 오셨기에, 우리에게는 충성을 바쳐야 할 오로지 한 명의 통치자가 있을 뿐이다. “예수님이 왕이시다”라고 말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분은 내 삶의 주님이시다”라는 정도의 의미로만 축소해서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이상이다. 그는 만왕의 왕이시며, 이 세상의 모든 정치적 분열을 뛰어넘어 그 위에서 다스리는 왕이시다. 그리스도인에게 다른 충성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주님이 전 세계에 걸쳐서 만든 왕국이자 도시에서 왕되신 주님만을 섬기는 백성이다. 따라서 교회 지도자가 해야 하는 가장 정치적이고 또 실행해야 할 사명은 우리가 충성을 바쳐야 할 왕이 누구인지를 끊임없이 교인들에게 상기시키는 것이다. 2. 정치적인 영역에서 교인을 제자로 만들라. 정치와 관련해서 교인들을 가르쳐야 한다. 이 말이 충격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아니, 오히려 반대로 교회에서는 최대한 정치에 관해서 자중해야 하는 거 아닌가? 따라서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복음에 더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가 되라고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에 관해서 더 많이 가르쳐야 합니다.”하지만 정치로 인해 교회가 분열된 게, 행여나 우리가 정치에 관해서 어떻게 토론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아서가 아닐까? 현재 정치 문제 때문에 고생하는 몇몇 목사에게 물었다. “뭘 제대로 하지 않아서 지금 사태가 벌어졌다고 생각합니까? 과거로 돌아간다면, 뭘 바꾸고 싶나요?” 그중 몇 사람이 같은 이야기를 했다. 개인 간 대화라는 측면에서 왜 그들을 좀 더 빨리 제자로 만들지 않았는지를 후회한다는 것이었다. 교회의 평화라는 명목으로 그냥 두고 봐서는 안 되는 대화나 말이 그냥 퍼지도록 방치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들은 어려운 문제를 정면으로 부딪쳐서 해결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좋든 싫든 교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에 의해서 제자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쉽게 잊는 경향이 있다. 정치를 우리가 다루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이 그 역할을 할 것이다. 케이블 뉴스와 세속 문화는 지금도 교인들이게 분노의 정치를 훈련시키고 있다. 목회자는 부정적인 대화와 질문의 근원을 방향에서부터 바꿔야 한다. 나아가서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오해에 도전할 준비를 해두어야 한다. 목회자는 합당함과 근신함과 바른 말로 자기 백성을 가르쳐야 한다고 성경이 가르친다(빌 4:5, 딛 2:2, 8). 이 교훈을 우리는 다른 모든 영역과 더불어서 정치적 삶에도 반드시 적용해야 한다. 기억하자. 지금 당장 정치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는다면, 정치가 나중에는 훨씬 더 분열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일으키며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다. 3. 불안해하지 않는 존재가 되라.격동하는 분노의 바다에서 교인들이 불안에 휘둘리는 존재가 되지 않도록 이끌어야 한다. 교회의 문화는 일반적으로 목회자의 지도를 따라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목회자의 중요한 사명 중 하나는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근심하지 않는, 평화로우면서도 고요하고 또 한결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어둡고 위험한 세상에서도 밝고 격려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신중하게 말하고, 행여 실수했다면 사과하는 데에 지체하지 말아야 한다. 정신을 똑바로 차린 상태에서 우리 시대 당면한 문제를 바르게 처리하는 모범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교인 각자가 공적인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강단에서 그 문제를 다룸으로써 보여줘야 한다. 정치적으로 결코 쉽지 않은 문제였던,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예수님은 피하지 않으셨다. 그렇다고 흥분해서 감정적으로 반응하신 것도 아니었다. 헤롯당이나 바리새인들을 비판하지도 않으셨다. 예수님은 단지 질문에 대답하셨다. 하나님이 주권자이시며, 가이사의 주권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정당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셨다(마 22:15-22).4.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치는 분야에서만은 똑같이 분명하라.마지막으로, 교회 지도자는 성경이 분명하게 밝히는 곳에서는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고,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침묵해야 한다. 말씀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마치 성경의 입장이 서로 충돌하는 것 같기에, 정치에 관해서 그리스도인이 의견의 일치를 보는 건 어렵다. 성경은 정치와 정책에 대한 답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이다. 많은 질문에 대한 체계적인 답변은 없다. 그리스도인은 정부 시스템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정부 예산은 어떠해야 하는가? 이민 문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성경 속 어떤 이야기는 대답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동시에 또 어떤 명령은 전혀 다른 대답을 주는 것 같기도 하다. 해석을 하다 보면 적지 않은 함정을 만나게 되고, 더불어서 우리 자신의 편견을 텍스트 속에 이입해서 읽기도 한다. 또한 시대착오적인 생각에서 고대 정치 시스템에서나 통하는 이야기를 현대 정치 시스템에 적용해서 이해하려는 실수를 범하기도 한다. 구약의 정치 상황과 신약의 정치 상황의 차이를 제대로 이해하는 건 결코 쉽지 않다. 내 취향에 맞는 성경 속 정치 성향 중 하나를 받아들이고, 나머지 다른 것을 향해서 그냥 눈을 감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다. 한 하원 의원이 워싱턴 DC에서 목회하는 마크 데버(Mark Dever) 목사에게 국가 예산 문제와 관련해서 어떻게 투표해야 하는지 물어봤다는 이야기를 어느 목사가 내게 들려주었다. 데버 목사는 그 목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사실 이 문제에 관해서 나는 나름 확고한 생각이 있었지만, 문제는 성경이 확실하게 알려주는 메시지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의원님, 당신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이렇게만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데버 목사는 성경이 분명하게 알려주는 문제에 관해서만은 목회적 권위를 양보하지 않았다. 정치적 제자도와 관련해서 교회 지도자는 첫 번째 방어선이다. 세상 문화는 쉬지 않고 교인에게 영향을 미치려고 한다. 그렇기에 교회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시하는 대안 사회가 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신실한 삶을 산다면, 그것부터 세상을 향한 우리의 증거가 될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된 모습을 보고 세상이 이렇게 감탄하지 않을까? “와, 저 사람들 서로 사랑하는 것 좀 보세요!”(요 13:35). 원제: What Can Pastors Do About Political Divisio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교회와정치
정치적분열
교회의일치
고독한 목회자가 기댈 곳은 어디인가?
by Chris Davis
2022-11-13
지난 가을, 사역에 지친 나는 외로움이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고통에 온몸이 아릴 정도로 나는 혼자였다. 교회에 갈 때마다 내 몸이 그 사실을 알려줬다. 1990년대 후반부터 내 목회 열정의 전부가 설교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두 달 동안 설교 준비에 집중할 수 없었다.도무지 제대로 사역을 할 수 없어서 결국은 긴급 안식년을 가졌고, 조용히 목회를 그만둘 계획을 세웠다.고통은 함께하는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외로움은 나를 질식시켰다. 내 존재 전체를 부수는 것 같았다. 하나님은 혼자 있는 아담을 보시고는 “좋지 않다”라고 선언하셨고, 벌거벗고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완전하게 서로를 받아들이는 관계를 위해서 하와를 창조하셨다. 그러나 타락 이후, 우리는 온통 자신을 가리고 산다. 마치 물에 둘러싸이고서도 목마름에 죽는 것처럼, 또 군중 속에서도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것처럼 말이다. 모세는 이렇게 한탄했다.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민 11:14). 엘리야는 동굴에서 외쳤다. “나 혼자 남았습니다”(왕상 19:10). 광야에서 함께 짐을 나눠 짊어지는 장로 70명에도 불구하고, 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000명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너무 괴로워서 하나님께 목숨을 걸고 간구했다.모세와 엘리야처럼 내 주변에도 든든한 사역의 친구들이 있다. 나는 현명하고 자비로운 형제들과 함께 월간 목회자 모임에 참석한다. 나를 책임지는 파트너도 있다. 아내 및 형제자매와의 관계도 풍성하고 달콤하기만 하다. 그러나 사역의 현장에서 외로움을 짊어지는 것은 가까운 사람을 잃은 슬픔을 짊어지는 것과 비슷하다. 한두 번 정도야 친구나 다른 교회 동료 목사들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느끼는 상실감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언제 그런 주제를 놓고 이야기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4년 전 아버지가 예기치 않게 돌아가셨을 때, 나는 상실감을 주는 고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일주일에 몇 시간씩 슬픔나눔(GriefShare) 그룹에 가서 시간을 보냈다. 외로움이 극에 달했을 때, 고통을 숨기는 대신 알리는 것에 중점을 둔 기독교 치료사가 이끄는 지역 주간 그룹에 합류했다.연결의 리듬간증과 더불어서 주간 업데이트를 할 때, 인도자는 종종 일시 중지 버튼을 눌러 다른 사람들이 방금 전에 들은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곤 했다. “그가 당신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화가 납니다!” 또는 “당신이 그렇게 할 수 있어서 너무 기뻐요!” 등과 같은 감정적인 소통은 바늘과 실을 연결하듯 서로의 마음을 묶는 역할을 했다. 진행자가 처음 간증한 사람에게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들었을 때 어땠냐고 물었을 때,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 사이의 연결은 두 배가 되어서 돌아왔다. 그리고 또 다른 참가자들이 이어서 어떻게 느꼈는지 공유했을 때, 이야기를 나눈 사람의 말이 다른 이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우리 모두 한 번 더 가슴이 뭉클해졌다. 우리가 경험한 관계의 깊이는 심오했다.이 지독한 외로움을 다시 맛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내가 물었을 때, 인도자는 다른 목회자들과 함께 이와 비슷한 그룹을 시작해보라고 권유했다.내 기준은 간단했다. 매주 한 시간을 함께 보낼 만큼 연결을 갈망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나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세 명의 목사 친구에게 물었고, 그들은 즉시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또한 그들은 내가 생각하는 접근 방식에 관해서 약간의 망설임을 드러냈다. 뭐라고?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고 이야기하자고? 내 이야기를 하라고? 모임을 줌(Zoom)으로 했기 때문에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느끼면 바로 나가겠다고 미리 말한 사람도 한 명 있었다. 그러나 중간에 나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몇 주 지나지 않고 시간을 매주 90분으로 늘이는 데에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우리의 모임은 어느새 없어서는 삶의 일부가 되었고, 우리 중 누구도 이전에 그 어떤 모임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연결과 정서적 안정감을 키울 수 있었다. 마침내 자유함을 모임을 통해서 배운 것이 있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다루는 게 우리의 전문 기술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목사인 내가 나 자신의 감정, 욕망, 동기 및 상처를 끄집어낸다는 건 어렵다는 사실이다. 지금 기분이 어때? 원하는 게 뭐야? 지금 무슨 이야기를 자신한테 하고 있어? 등의 자주 접하는 질문을 정작 내가 대답하려니까 쉽지 않았다. 강단이 주는 혜택이라고나 할까, 언어에 능숙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점이 목회자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에게까지 나를 제대로 알리는 것을 방해하기도 한다. 우리는 모임에서 종종 자기도 모르게 설교하려는 상대방을 설교 모드로부터 끄집어내야만 했다. 그래야 비로소 다시금 제대로 목표에 집중할 수 있었다. 나 자신뿐 아니라 상대에게 나를 제대로 알리는 목표 말이다. 동료 목사들과 시작한 모임을 기점으로 해서, 하나님은 우리 교회 안에 그와 비슷한 공간을 만들 기회를 열어주셨다. 나는 가정생활을 버거워하는 아빠 그룹, 그리고 70대에서 90대에 이르는 과부 그룹을 매주 만났다. 각각의 경우, 모두는 다 한 가지 사실에 동의했다. 지금 우리는 아무도 원하는 사람이 없는 인생의 황혼기를 맞이했다고. 공유할 간증거리가 항상 있었지만, 내가 던진 질문은 각자가 감정의 폭발, 신분이 도용된 악몽, 그리고 성인 아들의 죽음에서 느낀 감정이 무엇인가 말하라는 것이었다. 상황을 바꿀 수는 없지만, 그래도 우리는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는 있었다.표면적으로는 가장 의심스러운 의미에서 쓰이기도 하는 용어, ‘치료’(therapeutic)처럼 보이는 이 새로운 상호작용 방식이 가져다준 가장 놀라운 결과는 그것이 어떻게 성화를 이뤄가는 새로운 통로를 열었는가라는 점에 있다. 감정과 욕망 그리고 이야기(narratives)에 대한 공동 탐구가 복음 전달 체계가 되어, 이전까지만 해도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손길이 닿지 않던 곳에서 더 깊은 치유가 가능하게 되었다. 죄책감과 수치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만날 수 있도록, 상처받은 부분이 드러날 수 있는 환경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놓았기에, 나는 참가자의 심령이 더 온전하게 치유되는 모습을 목격했다. 하나님의 섭리로 나는 목회를 떠나지 않았다. 이제 나는 외로움의 해결을 위해 노력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걷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 그리고 그 방법은 감춰진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사역 속에서 나는 이제 부분적인 것이 완전한 것에 자리를 내어주고, “우리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아나 온전히 알게 될”(고전 13:12) 그날을 꿈꾼다.원제: Where Can the Lonely Pastor Go?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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