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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든 살이 된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는 여전히 읽을 가치가...
고전 재발견: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by Joseph A. Kohm Jr.
2022-12-02
기독교 고전 재발견C. S. 루이스의 조언에 따라 우리는 “수 세기 동안 불고 있는 깨끗한 바닷바람이 여러분의 마음을 스쳐 지나갈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그리고 루이스에 따르면 그건 오로지 “오래된 책을 읽을 때만 가능합니다.” 그 목표를 위해서 우리가 잊고 지낸 기독교 고전을 재발견하는 시리즈(Rediscovering Forgotten Classics series)를 시작합니다.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교회에 도움을 주는, 그러나 잊고 있던 기독교 고전을 우리는 하나씩 되찾아 나갈 것입니다. C. S. 루이스는 스크루테이프의 편지(The Screwtape Letters)가 소리도 없이 “빈 침실로 사라지고, 거기에서 그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채 다 낡아버리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그러나 이 책은 잘 팔렸고, 출판된 지[1942년 초판 출간] 8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고위직 악마 스크루테이프가 부하 악마 웜우드에게 보낸 일련의 편지는 기독교 베스트셀러 목록에 단골로 등장한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 대한 아이디어는 어느 날 루이스가 교회에 앉아 있을 때 퍼뜩 떠올랐다. 1940년 동생 워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예배가 끝나기 전이었지. … 가장 유용하고 재미있을 것 같은 책에 관한 아이디어가 떠올랐어. 그 아이디어가 너무 좋아서 충격을 받을 지경이었지. 내용은 ‘한 악마가 다른 악마에게’라고 부를 수 있는, 나이 먹어 은퇴한 악마가 이제 막 첫 번째 ‘환자’에 대한 작업을 시작한 젊은 악마에게 보내는 편지로 구성될 거야.” 실용성에 재미까지 더한 이 책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매일 매일을 사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더불어, 거만하면서도 다독거리는 성격의 스크루테이프는 모든 독자에게 유쾌한 웃음까지 선사한다.스크루테이프의 편지C. S. 루이스C. 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는 “저 아래 계시는 우리 아버지”(Our Father Below_사탄)를 보좌하는 고위직 악마 스크루테이프의 시선으로 인간의 삶과 약점을 은근한 익살과 역설로 생생하게 그려내어 독자들을 즐겁게 해주는 종교 풍자의 고전 걸작이다. 매우 통렬한 풍자와 극도의 진지함과 놀라운 독창성이 교차하는, C. S. 루이스의 이 책은 악마의 유혹에 대해―그리고 그 유혹을 물리치는 승리에 대해―이야기하는 전대미문의 매력 넘치는 고전이다. 세상 독자들을 위한 멋진 이야기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는 책으로 나오기 전에 종교 주간지 가디언(The Guardian, 같은 이름의 현대 영국 일간지와는 관련 없음)에 31부작으로 연재되었다. 첫 번째 편지는 1941년 5월 2일에 출판되었다. 그리고 1942년 2월에 서른한 통의 편지 모두가 포함된 단행본이 출간되었다.처음부터 독자들 대부분에게 인기가 있었지만, 모든 독자가 그 이야기의 밑바탕에 있는 개념을 제대로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시골 목회자는 편집자에게 편지를 보내 웜우드에 대한 스크루테이프의 조언들은 “그릇된 것들일 뿐 아니라 확실히 악마적”이라며 구독을 취소하겠다고 했다. 이처럼 혼란에 빠진 성직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루이스는 “일종의 농담으로 독자들을 가장한 진지한 자기 지식의 세계로 끌어들이느냐에 이 책의 성공 여부가 달려있다”고 믿었다. 예를 들어, 좌절한 스크루테이프가 저도 모르게 큰 지네로 변해버리는 장면에서 독자는 킬킬거리며 웃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루이스의 유머뿐 아니라 악마를 이용한 그의 냉소 섞인 진실 전복에는 다 목적이 있다.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독자들이 스크루테이프의 성공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성찰하도록 하는 것이다. “내가 특히 붙잡고 싶은 것은 세속의 독자이다.”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다.죄와 싸우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교훈스크루테이프의 편지의 편지의 독자층이 루이스가 원래 목표로 삼았던 “세속의” 사람들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점점 더 세속화되는 문화에서 이 책의 독자들은 주로 기독교 전통을 따르거나 최소한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러나 기독교 인구 통계라는 면에서,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는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도 큰 가치를 가진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4:12에서 말세에 이르면 불법이 더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유혹에 휩싸인 세상에서 살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에게 이 책이 주는 가치는 대단히 크다. 악마의 모든 계책을 손에 쥔 우리는 이제 숨어있는 함정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책 전반에 걸쳐 스크루테이프가 활용하는 함정(trapdoor)이 있는데, 객관적 진실에 대한 스크루테이프의 왜곡이 그것이다. 그러나 마귀가 항상 속이기만 하는 건 아니다. 약간의 진실이 섞인 거짓말이 훨씬 더 위력이 있다는 것을 마귀는 잘 알고 있다. 상대가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다면 환자에게 결혼을 권하는 것은 괜찮다고 스크루테이프는 제자에게 말한다. 교리가 엉망이 되어버린 교회라면, 교회 출석을 장려하는 것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조언하기도 한다. “환자에게 만사에 중용을 지키라고 말해 주거라. ‘종교는 지나치지 않아야 좋은 것’이라고 믿게만 해 놓으면 그의 영혼에 대해서는 마음 푹 놓아도 좋아. 중용을 지키는(moderated) 종교란 우리한테 무교나 마찬가지니까. 아니, 모교보다 훨씬 더 즐겁지”(스크루테이프의 편지, 홍성사, 스페셜 일러스트 에디션, 82-83). 환자의 삶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면, 그리고 평생 헌신하는 신앙이 아니라면, 환자에게 기독교를 권장하는 것도 별로 문제 될 게 없다. 우리 중에 그 누가 선견지명으로 가득한 이 책이 말하는 유혹에 노출되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아직 한 번도 읽지 않았거나 마지막으로 읽은 게 오래전이라면, 출간 80주년이 되는 올해는 당신이 그 책을 손에 들어야 할 멋진 이유가 된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스크루테이프가 쳐 놓은 함정 하나를 피할 수 있다. 그는 웜우드에게 이렇게 말했다. “죽음의 숙명을 안고 사는 인간들, 참 웃기지 않아? 우리가 항상 그들 마음에 무슨 생각을 집어넣는다고 착각하니까 말이야. 사실은 꼭 생각해야 할 것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게 우리한테는 제일 큰 성공인데.” 원제: At Age 80, ‘The Screwtape Letters’ Is Still Worth Reading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루이스
스크루테이프의편지
내 삶을 가치 있게 만든 신비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는 그 나라를 발견하다
by Stephen Witmer
2022-12-01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지만, 인간 사회가 뿌리째 뽑히지는 않았다. 이것이 그 나라의 신비이다. 어린 나이에 회심한 나는 교회에서 자랐다. 강해 설교를 들었고, 주일학교의 부직포 그림들을 보면서, 또 여름 성경학교와 여름 수련회의 성경 구절 빨리 찾기 시합을 통해서 내 신앙의 기본기를 다졌다. 할머니의 권유로 나는 십 대 때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고, 기독교 대학에 들어가서는 부전공으로 성경을 공부했다. 그래서 이십 대가 되었을 때, 나는 꽤 많은 성경 구절을 알고 있었고, 누구에게나 성경을 요약해서 설명할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 구원의 메시지를 완전히 꿰고 있었다. 그러나 목회를 준비하는 중에 나는 그 어디에서도 만난 적 없는 특별한 문장을 만났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다. 예수님이 스캔들이 되셨을 때조지 래드(George Ladd)가 쓴 A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신약신학)을 어떤 계기로 읽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또 내가 그 책을 다 읽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다음 문장―이 문장이 들어있는 장 “하나님 나라의 신비”는 확실하게 다 읽었다―은 내 상상력에 불을 붙였고, 하나님과 성경 그리고 역사와 내 삶에 대한 이해를 영구적으로 바꾸어 놓았다.구약성서와 유대 묵시문학에서 예언된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시대의 끝을 가져오며 새로운 시대를 열 것이다. 불의한 자들의 멸망으로 인간 사회를 무너뜨릴 것이다. 예수님은 인자와 하나님 나라가 영광스럽게 나타나기 전에, 선과 악이 뒤섞인 사회가 계속되는 현시대의 한가운데에 하나님이 다스릴 미래 시대의 권세가 하나님 나라의 권세와 축복을 누리는 “하나님 나라의 아들들”을 창조하기 위해 이 세상에 이미 도래했다고 단언하신다.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지만, 인간 사회가 뿌리째 뽑히지는 않았다. 이것이 그 나라의 신비이다. (A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94)이 글을 읽던 그 순간까지만 해도, 나는 성경을 이미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라는, 다소 정적인 기록으로만 읽었다. 중요한 성경 속 내용을 많이 알고 있었지만, 더 큰 줄거리, 역동적으로 전개되는 계획,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발전하는 구속 사역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게 없었다. 그런데 래드는 내가 미처 모르던 부분들을 하나하나 모아서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담긴 역동성과 진보성을 보여줌으로 나를 흥분시켰다. 이 구절을 읽기 전까지 나는 예수님의 사역이 얼마나 놀라운지, 또 동시에 얼마나 듣기 거북한 소리인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그가 기적을 행하고 또 기존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도전한 것은 특별했다. 하지만 그런 기적과 대결은 어릴 때부터 들어서 너무나 익숙했다. 그런 내가 하나님 나라의 신비에 눈을 뜨게 되었고, 그렇게 만든 사람이 바로 래드이다.래드의 눈을 통해, 나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다는(그러나 완성된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선언이 동시대 사람들에게 얼마나 듣기 거북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마지막 때에 드러날 웅장하기 이를 데 없는 하나님 나라를 작고 숨겨진 겨자씨에 비유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아닌가? 나는 그물, 겨자씨, 누룩에 관한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를 제대로 이해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래드의 가르침은 이미(already) 도래한 나라, 아직(not yet) 오지 않은 나라에 대해서 새로운 눈을 뜨게 해주었다. 그로부터 무려 이십삼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날의 흥분과 만족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나보다 훨씬 큰래드의 가르침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라에 관한 가르침은 예수님의 초림 속에 담긴, 역사를 뒤흔든 진짜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도록 도와주었다. 그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은 말 그대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미래에 있을 새 창조를 확실히 보장하는 의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마지막 때를 이루는 첫 성취의 문을 여셨다. 그때까지 내가 성경을 읽은 방식은 거의 다 개인 차원의 적용을 위해서였다. 예수님은 영혼을 구원하러 오셨고, 그런 예수님의 사역은 철저하게 예수님과 나 사이의 문제로만 국한되었다. 그러던 내가 비로소 예수님의 사역이 가진 우주적 의미에 눈을 뜨게 되었다. 하나님의 구속사라는 맥락에서 예수님의 새로움이 내 가슴을 때렸다. 또한 만물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서 절정을 이루시는 예수님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깨달음은 내가 지성과 마음을 다해 예수님을 더욱 높이도록 했다.이미 시작된 종말론이 가져다준, 라드로 말미암은 지적 자극은 깊었고 오래 지속되었다. 그런 자극 덕분에 나는 신학교에서 성경 신학의 풍부함에 푹 빠질 수 있었고, 종말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을 예수님이 어떻게 성취하셨는지에 초점을 맞춘 박사 학위를 준비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 삶의 이유를 알게 되다신약성경과 하나님의 구속 사역, 그리고 그리스도의 중심성에 대한 깊은 이해와 깨달음을 넘어, 래드는 내 삶을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었다. 중복되는 시대와 관련한 라드의 유명한 다이아그램―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서 겹치는 “현재 시대”와 “다가올 시대”의 선―을 보면서 나는 내가 살았던 곳을 정확히 볼 수 있었다. 마치 “당신이 있는 위치는 바로 여기입니다”라는 표시가 붙은 쇼핑몰의 지도를 보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 삶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려주었다. 이런 깨달음은 하나님이 왜 나를 의롭다고 하시고 또 성령께서 지금도 나를 끊임없이 변화시키는지 이유를 알려주었다. 그건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세가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왜 여전히 죄와 고통스러운 투쟁을 해야만 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왜 내 속의 일부는 인터넷을 통해서 성적인 이미지를 접하고 싶어 하고, 또 다른 일부는 그런 나 자신과 필사적으로 싸우는가? 겹치는(overlap) 세상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한다. 그것은 또한 내 삶에 영향을 미쳤던 고통의 슬픔도 설명했다. 아버지를 낫게 해달라고 그토록 간절히 기도했는데도 왜 아버지는 지금도 휠체어를 타고 있는가? 왜 불안은 지금도 나를 때때로 마비시키는가? 겹치는 세상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한다.‘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는 하나님 나라가 이 모든 질문에 대답한 건 아니지만, 죄와 성화를 이해하는 데에 꼭 필요한 강력한 틀을 제공했다. 그것은 지나친 낙관주의와 절망으로부터 나를 지켜주었다. 무엇보다 어려운 시기에 희망을 주었다.삶의 목적래드를 만나고 이 년 후, 나는 고든 콘웰 신학교의 학생이 되어 있었다. 맑고 세찬 바람이 부는 어느 날, 나는 대서양 옆 매그놀리아의 바위 위에 앉아 리처드 헤이스(Richard Hays)가 쓴 신약의 윤리적 비전(The Moral Vision of the New Testament)에서 다음 구절을 읽었다.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교두보, 즉 하나님의 능력이 세상에 침투해 들어오는 장소이다. 바울의 모든 윤리적 판단은 이러한 배경에서 이루어진다. … 두 시대 사이의 시간을 충성되게 산다는 것은, 신앙 공동체 내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변화의 능력을 지나치게도 너무 적게도 주장하지 않으며 도덕적 분별의 줄타기를 하는 것이다. (신약의 윤리적 비전, 58-59쪽)이 구절도 내게는 삶의 목적을 보여주었다. 래드가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내게는 매우 중요하고 내 인생을 형성하는 글이 되었다. 내 속에 목사가 되고 싶은 열망이 있다는 것을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교회를 하나님의 “종말론적 교두보”로 또한 현재를 변화시키기 위해 말세에 하나님이 가장 귀하게 쓰시는 권능의 초점으로 이해하는 것은 목사라는 소명을 더욱 중요하고 절실하게 만든다.윤리와 종말론은 반드시 함께 가야 한다는 생각과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는 나라에서 사는 삶) 자체가 우리의 일상생활 방식을 형성한다는 나의 확신을 헤이즈가 한 번 더 확인시켜 주었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들 존재가 가진 중간적 본질을 이해하도록 돕는 것(하나님의 능력은 이미 동이 튼 말세의 새벽을 통해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졌지만, 완성된 새 창조는 여전히 미래이다)이, 그리고 현실이 가진 실질적이고 윤리적이고 또한 일상의 중요성을 제대로 깨닫도록 하는 데에 내 인생을 바치는 것이 내게는 삶을 가장 잘 사용하는 길이다. 나는 헤이즈의 책 뒷장에 이렇게 썼다. “이것은 내 삶의 목적이다.”삶을 바꾸는 신비 나누기그 이후로 나는 내가 찾은 삶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미래에 관한 화려한 묘사를 통해 지금 이 땅에서 고통받는 신자를 격려하는 책이다. 나는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을 좀 더 잘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려고 노력했다. 결국 나는 길지 않은 책을 한 권 썼다. 지극히 선한 미래의 새 창조가 결국에는 우리의 것이라고 확신하기에, 미래의 새 창조를 바라며 조바심을 내면서도 동시에 인내하는 평범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해서, 그리고 흥분되고 좌절되는 긴장 속에도 무한한 가치가 있음을 제대로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신학교 학생을 가르칠 때, 이미 시작된 종말은 항상 반복되는 주제가 되었다. 십사 년의 목회 사역을 통해 나는 우리 교회 교인들이 성경의 줄거리,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사역의 우주적 중요성, 그리고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성취에 근거해서 미래의 새 창조가 온전히 우리 소유가 되었음을 실제 삶에서 이해하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나는 하나님 나라의 아들이 되어 예수님이 확보하신 권세와 축복을, 부분적으로나마 ‘이미’ 맛보게 되어 기쁘다.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을 더 많이 볼 수 있어서 감사하다. 더불어 그의 은혜로, 하나님이 품으신 모든 계획을 만족시키는 은혜의 절정이신 그리스도를 더 많은 사람이 풍성하게 누리는 데에 작지만 보탬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원제: A Mystery Made Sense of Me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조지래드
하나님나라
이미와아직
종말론
알고리즘 시대에 지혜를 찾아서
by Steve Bateman
2022-11-30
우리는 알고리즘이 아첨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인터넷 알고리즘은 내가 듣고 싶은 유쾌한 거짓말을 한다. 왜 그럴까? 알고리즘을 만드는 똑똑한 사람들은 내가 가진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의 돈, 관심, 투표를 원한다. 이익을 위해서든, 칭찬 또는 권력을 위해서든, 세상에서 가장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아첨하는 이 일에 투입된다. 알고리즘은 진실에는 관심이 없다. 알고리즘이 관심을 기울이는 건 오로지 하나, 우리 결정에 최대한의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 최대한의 시간 동안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이다. 알고리즘은 쉼 없이 가장 확실하게 나의 관심을 끄는 주제를 화면에 띄운다. 나를 화나게 하고, 두렵게 하고, 흥분시키거나, 또는 존경심을 우러나게 하는 것들 말이다. 알고리즘의 아첨은 긍정적인 확언을 부드러운 방식으로 또는 내가 항상 의심했던 것이 맞았다며 나를 안심시키며 확인시킨다. 나는 지금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고 또 하나님보다 더 똑똑하다고 알고리즘은 속삭인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를 다시 현실로 인도한다. 알고리즘이 거짓으로 우리를 기분 좋게 만들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을 말하고 우리를 올바르고 지속적인 성취의 길로 안내한다. 하나님 앞에 선 나는 우상숭배와 죄의 현실에 직면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발가벗겨졌지만, 동시에 값없이 사랑받는다는 복음 안에서 기뻐한다. 나는 하늘 아버지의 양자가 되었고 영원히 의롭다 함을 받았다. 이제 온전히 하나님의 가족이 되어 온전히 용서받았지만 그게 끝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영광을 향해 나아가는 힘든 성화 과정에 참여하고 있다.그렇다면 알고리즘 아첨의 시대에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유익을 위해 내 삶을 올바르게 정리할 수 있을까? 일곱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1. 지혜롭겠다고 결심하라.전도서를 설교하면서 나는 우리 교회 가족에게 지혜의 실제적인 정의를 제시했다. 지혜는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진리를 능숙하게 분별하고 또 적용하는 것이다. 우리는 분별력을 갖고 태어나지 않았다. 분별은 개발해야 할 기술이다. “인간의 간교함과 속이는 간계”에 속지 않으려면, 영적으로, 감정적으로, 또 지적으로 성장해야 한다(엡 4:14-15). 예수님을 더 오래 따를수록, 우리는 더 지혜로워질 것이다. 2. 진리의 중재자로 말씀을 의지하라.우리 복음주의자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고백한다. 성경만이 최종 권위이자 진리의 표준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사이에서조차 악명 높은 성경 문맹(biblical illiteracy)은 우리를 “엉터리 정보 시대”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게 만든다. 컴퓨터 또는 스마트폰에 보내는 시간과 성경 읽는 시간을 비교할 때, 우리가 진짜 성경이 최종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는 걸까? 패트릭 밀러(Patrick Miller)가 지적했듯이 오늘날 많은 교인의 “진정한 멘토는 알고리즘”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이 진짜로 내게 말씀하시는가?”라는 질문 형식으로 포장된, 기만적이고 아첨하는 메시지의 공격을 받고 있다(창 3:1). 알고리즘이 주는 아첨의 매력에 저항하는 첫 번째 단계는 하나님이 실제로 내게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똑바로 아는 것이다.3. 인터넷 탐색 기술을 연마하라.“속지 말라”는 권고가 아니라 명령이다(고전 6:9, 15:33, 갈 6:7, 약 1:16). 잘 속는 건 경건한 게 아니며, 순진한 건 고귀한 게 아니다. 사실 속는 것은 죄가 될 수도 있다. 신자라면 내부에 거짓말 탐지기를 장착하고 수시로 작동시킬 의무가 있다.효과적인 제자도는 이제 다음과 같은 훈련 항목이 필요하다. 디지털 문맹 수준, 비판적 사고, 측면 읽기, 진리 삼각 측량, 논리적 오류 식별, 논리적 오류 판별, 사실 확인, 그리고 일반적인 온라인 거짓 정보 및 허위 정보 방지 피하기. 알고리즘 시대를 맞아 우리는 검색(search)과 조사(research)를 구분해야 한다. 디지털 플랫폼의 목소리는 편견을 강화하는 전문가에 더 집중하라고 우리를 설득한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사실관계 파악을 위해서 무엇보다 증거부터 자세하게 살핀다. “송사에서는 먼저 온 사람의 말이 바른 것 같으나 그의 상대자가 와서 밝히느니라”(잠언 18:17).4. 인터넷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내 자동차를 수리할 거면 3주 전에 약속을 잡아야 한다는 정비공의 말에 나는 일단 약속을 잡았다. 그러나 유튜브 영상에서 수리 방법을 찾아서 내가 직접 고쳤고, 바로 정비 약속을 취소했다. 나는 인터넷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모든 기술과 마찬가지로 인터넷은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의 통로가 될 수 있다. 당신이 지금 이 글을 읽는 것도 아마 알고리즘을 통해서일 것이다. 인터넷을 통해서 우리는 참되고 존귀하며 그리스도를 높이는 많은 자료에 접근할 수 있다. 따라서 인터넷은 지상명령 수행을 위한 유용한 도구가 된다. 5. 음모론에 도전하라.구약과 신약은 모두 정보를 흩뜨리고 분열시키며 파괴하기 위해 고안된 음모론에서 시작한다. 창세기에서 뱀은 하나님을 남자와 여자의 가장 큰 유익을 빼앗기 위해 음모를 꾸민 음모자로 비난한다(창 3:1). 마태복음에서 산헤드린은 제자들이 공모하여 예수님의 시체를 훔쳤고 더불어 이기적인 운동까지 시작했다는 음모를 꾸몄다(마 28:13).오늘날의 회의론자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하고 기독교의 부상을 막기 위해서 종종 음모론의 형태를 도입한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음모론에 사로잡혀 속기 쉬운 것으로 널리 알려진다면, 우리는 거짓 이야기를 부추기고 교회의 신뢰성을 훼손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주범이 될지도 모른다. 6. 정치를 유쾌한 거짓말이 널린 지뢰밭으로 여기라.지뢰밭은 때로는 건너야 하지만 또 때로는 피해야 한다. 지혜는 그 차이를 안다. 그리스도인이 공공영역에서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하지만, 잘못된 정보가 넘치는 시대에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각별한 경계를 요구한다. 정치적 당파주의의 첫 번째 희생자는 진실이다. 내가 지지하는 정치적 입장을 지지하는 증거는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거기에 반박하는 증거를 억누르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많은 것이 걸려 있는 상황이라면, 정당한 목적 달성을 위해 불의한 수단 정도는 얼마든지 정당화할 수 있다는 유혹까지 받는다. 상대방의 이중 잣대는 눈을 부릅뜨고 보지만, 정작 나 자신의 잣대에는 눈을 멀게 만드는 게 당파적 정치이다. 알고리즘의 아첨은 양극화를 부추기고, 문화적 격차를 넓히며, 나아가서 교회의 평화까지 교란한다. 7. 겸손하게 진리를 적용하라.세상은 더 이상 성경 인용, 비판적 사고, 알고리즘 분석, 그리고 사실을 확인하는 순진한 바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아무리 진리를 분별하는 데 능숙하더라도, 정작 내 삶에 진리를 제대로 적용하지 않는다면 오류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 10:16). 뱀의 지혜에서 비둘기의 순진함을 빼버리면 남는 것은 위선에 찬 양이다. 예수님이 말하는 비둘기가 그렇다고 가장 똑똑할 필요는 없다. 비둘기는 분주함에 휩쓸리지 않고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도 않는다. 또한 정확하게 자신을 판단하고 있으며 언제 무익한 논쟁에서 벗어나야 하는지 알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자기 인식이 있다. 더불어 모든 분야에 전문가가 될 필요를 느끼지 않으며, 모든 사람의 오류를 수정하거나 소셜 미디어에 모인 국가적 차원의 무지에 굳이 나까지 기여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원하는 비둘기는 누군가의 주장을 논박하기 전에 먼저 자세한 내용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를 실천하는 비둘기는 “합리성”(reasonableness)을 가졌다는 평판을 얻는다(갈 5:22-23; 빌 4:5). 성령으로 충만한 삶은 알고리즘이 쏟아내는 아첨으로 가득한 세계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원제: Seek Wisdom in the Age of Algorithm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알고리즘
음모론
인터넷
성경문맹
오직성경
용서란 무엇인가?
용서의 지평
by 최창국
2022-11-29
‘성경에 나타난 용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상처의 황무지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에토스 함양에도 중요한 문제다. 용서는 단지 신학적 문제만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 심리적, 관계적 차원과도 관계된 문제이기 때문에 단순하지 않다. 실제로 피해자의 피해가 크면 클수록 상처는 깊을 수밖에 없고 용서의 의미를 파악하고 실천하는 일도 어렵다. 용서는 단지 개념적인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인 것이며 피해자의 고통스런 감정을 수반하는 프락시스(praxis)다. 하지만 용서는 가치 있는 일이며 어느 면에서는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용서를 말하고 베푸는 방식과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생각하는 용서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예수님이 말한 용서를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용서해야 한다는 윤리적 당위성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인간으로서 용서가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타난 용서를 통하여 단지 윤리적인 의무만을 강조하게 될 때 많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중의 고통이 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용서의 역동을 간과할 때 흔히 발생한다. 또한 하나님의 용서와 인간의 용서를 분별하지 못할 때 발생할 수 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용서는 단지 윤리적인 지평만이 아니라 사법적(judicial), 심리적(psychological), 그리고 관계적(relational) 지평까지 포함하는 매우 역동적 주제이다. 사법적 용서는 하나님이 주체로서 신만이 할 수 있는 용서이다. 심리적 용서는 피해자가 주체이며, 피해자의 부정적 긍정적 감정인 분노와 분개와 자비 등과 관계된 용서이다. 관계적 용서는 가해자의 회개, 즉 가해자의 마음과 행동의 변화를 통해 일어나는 용서이다.일반적으로 성경에서 가르치는 인간의 용서를 단순하게 윤리적 프락시스로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성경에서 가르치는 인간의 용서는 단순히 의무와 책임만을 부과하는 데 있기보다는 영적, 심리적, 관계적 치유의 역동이 내포되어 있다.용서에 관한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익숙한 이야기다. 베드로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그에게 “일곱 번이 아니라일흔 번을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했다(마 18:22).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이 말씀한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적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피해자에게 용서의 당위성과 윤리적 실천만을 강요하고, 피해자의 심리적 차원을 간과하게 되면, 피해자에게 이중의 고통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게다가 피해자가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의식적으로 용서하기로 결단하고 다짐해도 미움과 정죄와 분노가 떠올 수 있다. 인간은 상처나 피해를 받으면 분노하도록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피해자의 마음의 치유 없이 용서의 실천만을 강요하게 되면, 하나님의 창조적 선물인 인간의 마음을 돌보는 일을 간과하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예수님의 용서의 가르침은 윤리적 차원이나 관계적 차원과만 관계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적, 심리적, 상황적 차원과도 관계된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마태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한 용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리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처럼 완전한 용서자가 되라는 의미이기보다는 용서하는 마음과 용서의 정신과 용서하는 자세를 함양하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이 본문에서 용서가 등장하는 맥락은 주인으로부터 엄청난 빚을 탕감받고 용서받은 종이 자신에게 빚진 동료의 애절한 청은 거부하고 자신의 빚을 갚을 때까지 동료를 감옥에 가둔 내용이다. 이 이야기에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비가 베풀어진 방식이 뚜렷하게 명시되어 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 18:33). 하지만 이 질문은 수사적으로 표현된 질문이다. 이 이야기의 핵심 메시지는 어떤 한 사람이 누려야 할 보상이나 이익이 아니라 그 보상이나 이익이 또 다른 사람에게 전달될 때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는 ‘치유’의 기쁨을 말하고 있다. 광의적인 맥락에서 보면, 이 메시지는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베드로는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마 18:21)라며 얼마나 자주 용서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반면, 예수님은 이에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고 대답함으로 베드로의 질문을 어색하게 만들었다. 베드로는 용서에 대한 양적 질문을 하였지만, 예수님은 용서가 마음과 자세의 문제라고 답하셨기 때문이다. 즉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다. 만약에 이 이야기를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경우에도 용서해야 한다는 도덕적 당위의 뜻으로 이해하게 되면, 용서의 상황성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용서는 단지 윤리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상황적 문제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서술하면, 용서가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에 놓이게 될 때, 용서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어떠해야 하는가? 부당하게 상처를 준 사람을 어떤 경우에도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해야 하는가? 피해자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았을 때, 그 상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용서는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것이다.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용서의 미묘하고 복잡한 차원을 모두 무시하고 단지 용서하라는 의미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 용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의 도덕 기준과 양심, 그리고 정의감을 모두 무시하고 ‘하나님이 너를 용서하셨으므로 너도 너에게 상처를 준 사람의 죄를 묻지 말고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의 의미가 아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용서 할 수 없을 때도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악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용서의 강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의미다. 악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용서하는 마음을 갖도록 힘써야 한다는 의미다. 물론 예수님의 가르침은 가해자에 대한 보복의 논리와 증오의 마음을 품고 살라는 뜻은 아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용서하는 마음을 갖도록 힘써야 한다는 뜻이다. 진정한 용서는 틀에 박힌 정형화된 공식이 아니다. 용서는 피해자들에게 강요함으로써 자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용서는 자유로움의 환경 속에서 자랄 수 있다. 용서는 그 특성상 일회적 사건이 아닌 역동성을 지닌다. 용서는 마음의 문제이자 관계적이고, 개인적 문제이자 공동체적이며, 역사적 문제이자 상황적이다. 따라서 모든 용서는 역사적, 사회적, 상황적 맥락 안에서 일어난다. 동시에 용서는 정도는 다르더라도 다 그 맥락에 영향을 미친다. 용서를 개인의 분노와 분개의 차원이나 특정 상황에서 취하는 행동으로만 보면, 가해자와 이를 둘러싼 전체적인 맥락을 바르게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실제 용서는 복잡한 맥락, 즉 일종의 영적, 윤리적, 관계적, 생태계 안에서 이뤄지게 마련이다. 이 말은 용서가 무조건 상황에 좌우된다는 의미이기보다는 용서가 상황을 전환시킬 힘을 지닌다는 의미다”(스티븐 체리, 용서라는 고통, 243).용서는 단지 피해자의 의지적 결단에 따른 선택의 문제를 넘어선다. 즉 용서는 피해자의 의지적 여정과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관계적 차원과도 관련된 매우 복잡하고 역동적인 여정이다.용서의 여정은 보편적으로 피해자의 분노와 분개와 같은 감정의 정도에 따라 다르게 진행된다. 즉 피해자의 자기 분화 수준과 피해의 상황에 따라 그 형태가 달라질 수 있다. 용서의 여정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 있지만 용서는 피해자의 분노가 해소될 때 발생하며, 그 여정은 고통스럽고도 긴 여정이다. 따라서 용서의 여정에서 피해자의 분노 발생 원인과 분노 해소 과정을 알아야 한다. 또한 용서의 여정에서 피해자의 분노 감정은 무의식적인 방어기제이며 생명력의 표현이다. 가해자에 의해 발생한 피해자의 분노 감정은 자신을 지키는 방어기제이다. 용서와 분노 같은 감정을 양자택일의 문제로 보고 양극단 사이에 치유 공간이 열려 있다는 희망을 버리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류다. 오히려 용서는 감정적 차원과 윤리적 차원 양쪽을 통합하고, 나아가 초월하는 일이다. 또한 피해자의 분노나 상처가 완화되고 치유될 때까지 혹시라도 발생할지 모를 여러 개인적, 상황적 문제들을 슬기롭게 극복해 나가는 일이다. 질 스코트(Jill Scott)는 용서를 “정당한 복수에 대한 회의에서 용서에 대한 중립적 수용을 거쳐 가해자에 대한 충일한 인간애”로 전진하는 일종의 연속체로 보았다. 그녀는 이어 “그러므로 용서의 실천은 끊임없는 소소한 제스처와 의도들을 포함한다”고 하였다. 또한 그녀는 “그 외에도 용서의 스펙트럼 안에는 분개심과 복수심 같은 감정들도 같이 들어 있는 까닭에 용서 과정을 거치면서 이러한 감정들이 종종 터져 나오기도 하고, 심지어 수년이 지난 후에 불쑥 올라오기도 한다”고 하였다(Jill Scott, A Poetics of Forgiveness, 199). 용서는 단지 윤리적인 언어이기보다는 역동적인 용어이다. 인간의 용서는 의지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정서적 차원의 문제와도 직결된다. 인간은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가해자를 의지적으로 용서하겠다는 결단을 해도, 상처로 인해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분노와 같은 감정은 의지적 결단을 통해서 해결되지 않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정서적 상처가 완화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따라서 진정한 용서는 의지적 결단의 문제만이 아니라 정서적 문제를 포함하기 때문에 피해자의 정서의 부정적 긍정적 반응에 대한 우호적 환경을 조성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용서를 개인의 의지적 결단과만 관련시킬 때 정서적 상처로 인하여 용서가 쉽지 않은 사람을 도덕주의적 관점에서 평가하여 상처 입은 피해자에게 심적 부담을 안겨주는 이중적 고통을 겪게 할 수 있다. 따라서 용서의 과정에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것은 피해자의 정서적 여정과 상태를 부정적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나아가 광의적인 맥락에서 용서는 개인의 문제와만 관계된 것이 아니라 공동체성의 실현의 문제와도 관계된다. 데이비드 아우그스버거(David Augsburger)는 참된 용서는 단지 개인의 화해(reconciliation)의 과정에 이르는 단계로만 보아서는 안 되고, 공동체의 생명력과도 관계된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용서의 참된 초점은 개인의 죄책감으로부터의 해소나 착함의 증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대인 관계의 화해, 온전함과 생명을 함께하는 것에 있다”(David Augsburger, Caring Enough to Forgive, 6-7). 그가 보는 참된 용서의 의미는 용서를 하는 사람의 도덕적 우위성에 있기보다는 비극적 상황 속에서도 공동체가 상처 입은 사람에 대한 격려와 용서의 가능성에로의 상황을 조성하는 데 있다. 이런 맥락에서 용서는 개인의 의지적 결단의 문제이기보다는 그가 속한 공동체가 복음을 실현해내는 여정과도 관계된다.
용서
예수님의용서
용서의여정
복수
용서와화해
게으른 건 쉬는 게 아니다
by Amy DiMarcangelo
2022-11-28
게으름에 빠지지 않고 잘 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쉼은 감사함으로 기쁘게 누려야 하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다른 은사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죄성은 우리를 쉼의 선물을 남용하도록 유혹합니다. 애초에 의도한 대로 쉼을 누리지 못하고, 방종과 게으름에 빠지도록 만듭니다. 생산적인 하루를 마치고 보는 영화 한 편과 아무런 목적 없이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보내는 시간의 차이를 우리는 잘 압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로서 우리는 일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이 그 부르심에 충실한지 그렇지 않은지 여부는 어떤 쉼을 누리느냐와 직결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도 게으름의 유혹이 없는 건 아닙니다. 나는 꽤 바쁜 삶을 산다고 자부합니다. 아이들을 홈스쿨링하고, 대학원에 다니고, 또 파트타임 작가로도 일합니다. 그런데도 내가 게으르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나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텔레비전에 빠져서 또는 아무 생각 없이 스마트폰을 스크롤 하면서 보내는 시간이 적지 않습니다. 아래는 바른 쉼과 게으름의 차이를 분별하는 데 도움을 주는 네 가지 원칙입니다.원칙 1: 쉼에는 리듬이 있다.하나님은 결코 지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도 일곱째 날에 안식하심으로써, 피조물이라는 천에 안식이라는 선물을 무늬로 짜 넣으셨습니다(창 2:2-3). 우리가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것은 창조주께서 먼저 쉬셨기 때문입니다(출 20:8-10). 안식일의 쉼은 하나님을 본받는 습관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누려야 할 선물이기도 합니다(출 16:29; 막 2:27). 안식일은 우리를 축복하기 위해서 만들어졌습니다. 땀 흘리는 수고에서 잠시 떨어져서 마음을 재정렬하여 다시금 하나님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합니다. 또한 휴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우리가 유한하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존재임을 깨닫게 합니다. 낮이 밤으로 바뀌면 우리는 휴식이 삶의 리듬이 되어야 함을 상기합니다. 우리에게는 잠이 필요합니다. 그게 다가 아닙니다. 음식과 친교가 필요합니다. 일에서 벗어나 함께 빵을 떼는 것은 몸과 영혼에 영양을 공급하는 중요한 리듬입니다. 하나님은 작업 관리자가 아닙니다. 또 끊임없이 해야 할 일로만 구성된 게 인생이 아닙니다. 인생은 결코 체크리스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물을, 그리고 서로를 즐기도록 만드셨습니다. 원칙 2: 쉼은 활력을 주어야 한다.아무 생각 없이 소셜 미디어를 스크롤하거나, 일을 하는 중에 중간중간 텔레비전 쇼를 보면서 활력을 회복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낸 날이면 나는 어김없이 후회가 뒤따릅니다. 차라리 푹 쉬거나 아니면 일에 몰두할 걸 하는 아쉬움을 떨치기 힘듭니다. 우리가 “쉼”이라고 간주한 무엇이 동기 부여에 전혀 도움을 주지 않고, 영감을 느끼게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다시 일하고 싶은 의욕을 북돋는 것도 아니라면, 사실 우리는 쉰다는 핑계를 대며 게으름에 굴복한 것입니다. 게으름은 그냥 그대로 두면 끊임없이 지속됩니다. 쉼은 활력을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쉼이 필요한 영역이 뇌이건 몸이건, 올바른 쉼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소명을 위해 다시금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활력을 불어넣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축구를 합니다. 축구를 하다가 지치면 잠깐 나와서 휴식을 취합니다. 시원한 물을 마시고 또 팀원들과 잡담을 나누기도 합니다. 이러한 쉼은 몸과 마음에 활력을 주어 다시 경기에서 열심히 뛰도록 만듭니다. 그런데 시원한 물 대신 아이스크림을 먹었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이들의 플레이는 느리고 무기력해질 것입니다. 휴식 시간이 오히려 역효과를 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새 힘을 공급해서 일과 책임을 다하도록 돕는 쉼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저마다 똑바로 분별해야 합니다. 그 세부 사항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내가 가장 즐기는 쉼은 책을 읽고 혼자 누리는 긴 산책입니다. 그게 정원 가꾸기, 카드놀이, 친구와 나누는 커피 수다, 또는 낱말 퍼즐 풀기인 사람도 있습니다. 영화나 비디오 게임도 적당히만 즐기면 얼마든지 활력을 주는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원칙 3: 쉼은 방향을 재설정하도록 한다.쉼이 가져다주는 또 다른 중요한 열매는 마음의 방향을 재설정한다는 것입니다. 게으름에 빠지면 영혼에 악영향을 끼칩니다. 성령에 덜 민감해지고, 유혹에 더 무감각해집니다. 게으름은 우리를 죄로 유인하는 교묘한 속임수입니다. 게으름은 하나님께 냉담해지도록 유혹합니다. 그러나 쉼은 우리의 방향을 재설정합니다. 일이 중요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님을 되새기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또 하나님과 관계를 누리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생산성이라는 기준으로 평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일의 속도를 줄이고 하나님의 발 앞에 앉아서 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를 탐구하면서 하나님과 교감하기 위해, 우리는 얼마든지 일을 잠시 옆으로 제쳐둘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을 우선시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함께 모여 추억을 만들고 애초에 우리가 창조된 목적에 맞게 하나님의 형제자매와 함께 웃고 떠드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원칙 4: 쉼은 좋은 열매를 맺는다.게으름이 자신만을 위하는 방종이라면, 쉼은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는 즐김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무엇을 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는가’에 달린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열매를 생각하십시오. 게으름은 이기심을 낳습니다. 반면에 쉼은 다시 일어나 봉사할 준비를 하게 합니다. 게으름은 책임을 미루고 회피하게 만들지만, 쉼은 다시금 책임을 수행할 수 있도록 활력을 줍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할 때, 게으름에 빠지지 않고 쉼의 은사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나 자신의 마음과 행위조차도 항상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언제나 겸손하게 다른 사람의 조언을 구해야 합니다. 종종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이 나의 상태를 더 잘 알 때가 있습니다. 내가 일의 속도를 좀 늦추고 쉼을 가져야 하는지, 아니면 게으름과 나태를 회개해야 하는지 더 정확한 통찰력을 제공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우리의 목표는 오로지 하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원제: Am I Resting or Just Being Laz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쉼
안식
게으름
나태
활력
재충전
속도를 늦추라, 기억하라, 고대하라
by Adam Ramsey
2022-11-27
성탄절이 다가오면 뭔가 멋진 일이 생길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당신도 그런가? 멀리서 들리던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공항 터미널을 빠져나오는 모습을 보는 것처럼, 수평선 저 너머에서 태양이 떠오르는 순간처럼, 그리고 오랫동안 고대하던 꿈이 마침내 현실이 되는 바로 그 순간처럼, 성탄절에는 뭔가 멋진 일이 생길 것만 같다. 프레드릭 비크너(Frederick Buechner)는 다음과 같이 썼다.아주 잠깐, 당신은 공기 중에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장소, 그리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시간을 떠올리게 하는 어떤 향기를 맡습니다. 지금 자신의 심장 박동을 느낄 정도입니다. 앞으로 일어나려는 특별한 일은 오로지 그 일이 일어나기 직전이 가져다주는 특별한 순간과만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 순간의 이름은 바로 대림절입니다. 대림절, 이는 무언가 놀라운 일이 다가오고 있다는 의미이다. 속도를 늦춰야 하는 시간이번 주일은 교회 절기에 따라서 성탄절 전 네 번째 주일에 시작하는 대림절이 시작하는 날이다. 지금은 그리스도를 보물로 삼기 위해 마음을 준비할 때이다. 그러나 정신없이 바쁜 연말의 혼잡 속에서 우리는 이 소중한 기다림의 순간을 너무도 쉽게 낭비하곤 한다. 정신없는 12월을 제대로 기억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소비주의 시대가 빚어낸 또 하나의 희생자가 되어 성탄절을 목전에 두는 기분이 어떤 건지,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반응하기. 조직하기. 쇼핑하기. 계획하기. 포장하기. 예산 책정하기. 스트레스받기. 먹기. 스트레스 때문에 먹기.내가 지금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나와 마찬가지로 속도를 좀 늦춰야 하는 사람들, 유명한 캐럴 “우리 모두 주를 맞이할 준비를 하세”(Let every heart prepare him room)가 꼭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서이다.기억해야 할 시간성탄절에 성취된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이 세상을 얼마나 강력하게 뒤흔들었는지를 상기하게 된다. 성탄절의 의미는 가족 전통, 예쁜 조명, 오래된 양말을 걸어놓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깊다. 성탄절은 혁명을 의미한다. 성탄절은 기적을 의미한다.성탄절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오셨음을 의미한다. 하늘의 왕이 왕좌를 요람으로 바꾸었음을 의미한다.전능자가 자신을 연약함으로 감쌌음을 의미한다.창조주가 피조물 속으로 들어갔음을 의미한다.저자가 페이지 속에 자신을 넣었음을 의미한다.무한하신 이가 아기가 되었음을 의미한다.주시는 이가 선물이 되었음을 의미한다.예수님은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으로 오셨다. 오래전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그가 창조한 어머니로부터 창조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지으신 손에 의해서 이 세상에 나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 곁으로 가까이 오셨는지를 숙고하면, 그분을 더 알고 싶다는 욕구가 깊어질 것이다. 기대의 시간대림절에는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한 행복한 기억뿐 아니라 그의 재림에 대한 깊은 열망을 일깨우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계 22:20). 이 시대의 교회는 구약의 끝을 향하고 있던 하나님의 백성과 여러모로 비슷한―마치 유배자처럼 주변으로 밀려나 있으며, 어둠 속에서 소망을 품고 있으며, 톨킨의 말을 빌리자면 “모든 슬픈 일을 사라지게” 만드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숨죽여 갈망하는―위치에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과거 성탄의 행복한 추억과 다가올 성탄의 흥분이 주는 숨 가쁜 기대 사이에서 들떠서 성탄 전야를 보내는 어린아이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주는 ‘할렐루야’와 그리스도의 재림이 주는 ‘마라나타’ 사이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대림절을 기다리는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예배의 기대라는 렌즈를 통해서만 엿볼 수 있는 독특한 기쁨을 발견한다. 티모시 폴 존스(Timothy Paul Jones)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대림절을 맞은 그리스도인은 신음이 현재의 빈약함 때문에 생긴 희망 없는 흐느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고 계신 신성한 잔치에 대한 간절한 열망 때문임을 인식하고 받아들인다. …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육체로 오실 메시아를 기다렸듯, 우리도 메시아가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고 있다. 대림절을 맞아 신실한 신자는 고백한다. 동정녀의 무릎 사이로 거친 숨을 내쉬며 태어난 아기에게는 아직 해야 할 마지막 말이 남아있다고. 대림절은 우리는 이 세상을 지나가는 순례자임을, 죄악으로 망가진 이 세상이 계속 이렇게 있지는 않을 것임을, 진정한 왕께서 참으로 곧 오실 것임을 되새기는 시간이다. 원제: Tired Just Thinking About Advent? Slow Down and Savor Chris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대림절
성탄절
초림
재림
세계관에서 예배로, 신념에서 실천으로, 표현에서 형성으로!
제임스 K. A. 스미스의 세계관 읽기_1
by 김경호
2022-11-26
기독교 세계관 운동 2.0 위하여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SIEW)과 함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섭니다.세계관에서 예배로! ‘신념의 세계관’ 비판. 제임스 스미스James K. A. Smith는 기존의 ‘신념의 세계관’을 비판합니다. 스미스는 기독교 세계관의 인간 이해가 주지적 혹은 인지 중심적이라며 실천과 신념 사이의 관계를 재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신념의 세계관은 “교리와 신념의 원천인 성경으로부터 시작하고, 그런 다음 이를 적용하여 성경이 가르치는 바와 일치하고 이를 표현하는 예배의 실천을 만들어 낸다.” 스미스는 이러한 신념의 세계관의 문제점을 비판하며 이렇게 주장합니다. 첫째는 교리보다 예배가 먼저였습니다. “예배가 정경의 형성보다 선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예배 참여는 교리의 공식화와 세계관의 명확한 진술보다 선행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신념과 교리보다 욕망의 실천으로서의 예배가 우선합니다. 따라서 기독교 세계관의 신념보다 더 심층적인 차원이 필요합니다. 머리가 아니라 몸, 지성이 아니라 상상력, 무엇보다 세계관이 아니라 “예배하는 인간”이 본질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미스는 무엇보다 욕망하고 사랑하는 “신체성”(몸)에 대한 기독교 세계관의 무시가 실천에 치명적이라고 강조하며 비판합니다.스미스의 기본 주장. 스미스는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에서 자신의 기본 주장을 설명합니다. 기독교 세계관은 기독교 신념, 사상, 교리의 체계가 아니라 마음과 욕망의 형성에 관한 문제, 즉 지성이 아니라 상상력을 변화시키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형성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급진적인 제자를 형성하는 것이며, 이것이 기독교 교육과 예배의 근본 목적이라고 그는 주장합니다. 스미스는 이러한 주장을 일련의 매커니즘으로 도식화합니다. 인간은 욕망하고 사랑합니다. 그리고 이 욕망과 사랑은 좋은 삶에 대한 전망을 보여주는 어떤 목적에 이끌리고, 상상력에 사로잡힙니다. 이러한 욕망과 사랑, 그리고 목적이 몸에 새겨진 습관을 통해 “자동적 무의식적 실천”이 이루어집니다. 몸의 자동성은 오랜 시간 반복되고 지속하여 실천될 때 형성됩니다. 물론 모든 습관이 자동성을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스미스는 여기서 실천의 자동성을 “얇은 실천”과 “두꺼운 실천”으로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이를 닦는 것과 같은 얇은 실천은 평범하고,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수단입니다. 따라서 이는 정체성에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꺼운 실천은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합니다. 이 모든 매커니즘의 핵심이 예배에 있습니다. 예배에는 욕망과 사랑, 목적과 상상력(또는 정서), 그리고 몸이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의 핵심은 형성이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에 관한 것이자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신념에서 실천으로!형성. 스미스는 신념이 아니라 예배에 의해 욕망에서 몸을 통한 실천으로 이어지는 삶의 구체적인 모습을 잘 그려줍니다. 형성, 잘못된 형성, 그리고 대항적 형성이라는 실천의 역학이 그것입니다. 먼저, 형성은 실천의 첫 번째 단계이자 시작입니다. 이 형성은 예배로부터 시작하고, 욕망에서 몸으로 이어지는 실천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 형성에는 두 가지 모호성이 있습니다. 첫째는 형성이 이루어지는 시간의 부족입니다. 다시 말해, 예배를 통해 형성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일주일 가운데 주일에 드리는 한 시간 반 정도의 예배 시간 안에서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엿새 동안 세상 가운데서 살아가는 시간이 예배하는 시간보다 더 많으므로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합니다. 둘째, 형성이 가진 실천의 모호성입니다. 스미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일 아침에 이웃들이 집에서 신문을 읽는 시간에 우리는 교회에 가는 것을 제외하면 우리는 그들과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는다.”잘못된 형성. 결국 잘못된 형성의 문제점이 드러납니다. 스미스는 그의 책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에서 이 점을 솔직하게 인정합니다. “이 경우에 우리는 교인들이 기독교 예배에 참여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세속적 예전이 기독교 예배의 실천을 효과적으로 압도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스미스는 그의 책 습관이 영성이다에서 잘못된 형성의 사례로 자신의 경험을 소개합니다. 그는 웬델 베리Wendell Berry의 온 삶을 먹다라는 책에서 동물을 학대하지 않는 환경 운동―행복한 소, 행복한 돼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여 그 책을 탐독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열정적으로 이 책을 탐독하면서 형광펜을 칠하고 밑줄을 긋고 여백에 중요한 표시를 하고 아멘이라고 적었다. 읽다가 핵심 주장을 곰곰이 생각하려고 책에서 머리를 드는 순간, 추악한 아이러니를 깨달았다. 나는 코스트코 푸드 코트에서 웬델 베리의 이 책을 읽고 있었다.잘못된 형성의 역학은 그것을 지적하는 책을 저술한 저자 자신에게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평생 교회를 다니지만 잘못 형성된 채로 살아갈 수 있으며, 심지어 불의한 체제와 구조와 행동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제대로 막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경쟁하는 욕망의 교육에 동시적으로 등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대항적 형성과 대항적 형성을 위한 내부 공간으로서의 교회. 우리는 이러한 잘못된 형성을 재조정해야 합니다. 스미스는 바로 대항적 형성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바로 몸의 올바른 습관과 실천이라고 강조합니다. 몸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실천의 문제에 대한 답으로 제시해 왔습니다. 고대 아리스토텔레스의 습관, 현대의 모리스 메르로-퐁티Maurice Merleau-Ponty의 신체적 앎(몸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지향성),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아비투스(무의식적 지향), 사이몬 로버츠Simon Roberts의 체화된 지식embodied knowledge 등입니다. 이 가운데 사이몬 로버츠의 ‘체화된 지식’ 개념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체화된 지식은 생각하지 않고 행동할 수 있는 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한 경비원의 예에서 실증됩니다. 2006년 포틀랜드 공립학교에 효율성을 위해 인공지능을 도입했습니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10년 이상 학교 건물을 관리해 왔던 경비원의 체화된 지식의 효율성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경비원은 창문이 닫히지 않는 이유, 어떤 수도꼭지가 더 잘 세는지, 어떤 라디에이터는 다른 라디에이터보다 좀 더 자주 공기를 빼줘야 한다는 학교 건물의 특이점을 소상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체화된 지식은 운전할 때나 타자 칠 때처럼 생각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몸이 반응합니다. 이런 점에서, 대항적 형성은 몸이 가진 체화된 지식 또는 자동으로 반응할 수 있는 습관이 답입니다. 또한 대항적 형성은 재형성을 위한 공간인 교회가 필요합니다. 교회는 바로 이 사랑을 새롭게 하고 욕망을 재정향하도록 촉구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성령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먹여 주시는 집, 그분의 은총으로 우리가 다른 무엇보다도 그분을 욕망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는 집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바로 그 공간 그 간격에서 번개 같은 마법이 아니라 우리의 신체적 습관을 징집하는 그리스도의 몸의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대항적 형성과 대항적 형성을 위한 외부 공간으로서의 일반계시. 스미스는 교회와 세상을 문화의 관점에서 파악하여 기독교 예배가 독특한 사람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다중요인을 분석합니다. 이 요인은 원론적으로 생각이나 지성이 아니라 실천적 형성에 대한 문제입니다. 구체적으로 이중성인가 아니면 실천 중 일부만인가의 문제입니다. 스미스는 영화 ‘대부’의 주인공 마이클 코를레오네를 통해 이 문제를 설명합니다. 우선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코를레오네는 예배의 주기와 습관에 의해 지배받은 적이 없습니다. 코를레오네는 그가 필요할 때 결혼식, 세례식, 장례식에 선택적으로 참여했을 뿐입니다. 코를레오네는 자신에게 유용한 실천 중 일부만 참여한 사람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간헐적, 선택적 예배 참여를 올바른 습관화와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스미스는 교회와 목회자의 역할을 제안합니다. 특별히 스미스는 교회와 세상을 연결하여 신학자들이 놓치는 이단을 사회학자들이 발견할 수 있게 하자고 제안합니다. 교회 안에서만 아니라 밖에서도 목회자의 역할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문화를 읽어내고 해석하는 작업입니다. 표현에서 형성으로! 스미스는 우리가 예배의 주요 행위자라고 암묵적으로 가정할 때, 우리는 예배를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표현하는 행위, 또는 헌신을 보여주는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배를 이런 식으로 이해할 때는 예배의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진정성이라고 가정하는 셈입니다. 진정성에 대한 열망은 참신성을 추구하는 경향을 불러일으키기 쉽습니다. 그래서 흥미로운 문제가 발생합니다. 자신의 진정성을 보여주기 위해 예배하고 그런 행위를 반복한다면 스스로 위선적이라고 느끼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렇게 위선적이라고 느끼기 시작하면, 우리는 우리의 헌신을 보여줄 새로운 예배 방법을 추구할 것입니다. 정리하면, 예배를 표현으로 이해할 때, 우리는 예배의 진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참신함을 추구합니다. 의도는 좋지만, 결과는 예배 형식과 복음 내용의 미심쩍은 구별과 결합입니다. 예배의 형태와 실천이 취사선택할 수 있는 형식에 불과하며, 현대적이고 매력적이고 적절한 방식으로(참신성) 복음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버릴 수도 있고 버려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현대 문화를 향해 말을 걸기 위해 우리는 교회를 개조합니다. 예배 형식과 복음 내용을 담아내려는 열망에서 우리는 더 익숙한 동시대의 문화 형식을 찾습니다. 너무나도 익숙한 현대적 실천을 채택하여 예배를 개조합니다(커피숍, 공연장, 쇼핑몰 같은 분위기에서의 예배).문제는 이런 형식이 메시지를 담는 중립적인 용기도 아니며 폐기할 수 있는 통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이런 형식 자체가 특정한 텔로스(목적), 즉 좋은 삶의 암묵적 전망을 지향하는 실천입니다. 형식 자체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과 관계 맺는 법을 가르치는 욕망의 교수법입니다. 이런 실천 형식 자체에 이미 세상을 이해하는 특정한 방식이 가득 차 있습니다.또한 예배를 표현으로 생각한다면, 이는 표현을 통한 의로움이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예배에서는 우리 자신을 예배의 주된 행위자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사적 기독교 예배의 실천은 예배의 본질에 대한, 행위 주체에 대한 근본적으로 다른 패러다임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예배는 위로부터 아래로 이뤄집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행하시는 공간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다시 훈련하시는 체육관이기에 제자도의 핵심입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스미스의 ‘형성의 세계관’은 모던적 특징을 모두 배제했다는 점입니다(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다루겠습니다). 그러나 몸을 통한 실천의 측면에서 매우 귀중한 유산임은 틀림없습니다. 이제는 몸의 실천이 답입니다!
기독교세계관
제임스스미스
신념의세계관
형성의세계관
예배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어떻게 감사할 수 있는가?
by 고상섭
2022-11-25
해마다 11월이면 추수감사주일을 지킨다. 미국의 추석을 교회의 절기로 기념해서는 안 된다는 부정적인 입장도 있지만, 일 년에 한 번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기회로 삼는 교회가 많아졌다. 추수감사절에는 감사노트와 감사기도문을 활용하기도 하지만, 이태원 참사와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은 세상 속에서 교회 안에서 감사의 절기를 지킨다는 것이 여러 가지로 마음이 불편하기도 한 현실이다. 성경은 좋은 일이 있을 때만 감사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고 명령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어려운 현실 속에서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으로 감사할 수 있을까? 어쩌면 감사의 고백이 문화와 동떨어진 우리만이 리그가 되어 세상과 단절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성경적 감사노트를 활용하라 추수감사절 즈음에 감사노트를 사용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다양한 감사노트를 통해 감사를 생활화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케빈 드영은 미친 듯이 바쁜에서 바쁨이 신앙의 가장 큰 방해물이라고 말하면서 영적인 침체에 빠지고 있는 특징 중 하나가 바로 기쁨과 감사를 잃어버리는 것이라 말한다. 하루의 삶에서 감사하려면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오늘 하루 속에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하루를 마감하게 된다. 오늘날 감사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바쁨이다. 미디어 비평가 닐 포스트먼은 죽도록 즐기기에서 정보를 통제하는 사회가 아니라 너무 많은 정보로 인해 무엇이 옳은지를 분별하지 못하는 미래 사회를 꼬집었다. 인터넷과 SNS에 빠진 현대인은 홀로 생각하고 사고할 수 있는 여유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바쁜 현실에서 잠시 시간을 내서 감사노트를 활용하는 것은 오늘 내 삶 속에 역사하신 하나님을 묵상할 수 있는 좋은 경건의 훈련이 된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이 땅에서 내가 받은 무엇을 향한 감사는 자칫 물질주의와 자연주의 세계관을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감사노트를 사용하는 법을 보면 이런 예시가 등장한다. “오늘 아침 식사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사에 출근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오늘 아침 알람 소리를 듣고 깰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모든 것에 감사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물질세계 안에서, 자연주의 세계 안에서 나에게 있는 무엇을 향한 감사뿐이라면 오프라 윈프리의 감사 노트와 다를 게 없다. 물론 하나님이 없는 감사와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한 감사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차별성을 가지지만,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도 범사에 감사하려면 물질세계 속에서 내게 주어진 무엇에 대한 감사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어떻게 감사할 수 있는가?감사가 세상 속에서 내게 주신 무엇에 대한 감사뿐이라면, 나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과 나보다 못 가진 사람들에 대한 무시가 함께 공존할 수 있다. 작은 것이라도 나에게 있는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하는 정신은 필요하지만, 어쩌면 풍성한 감사가 아니라 어려운 현실 속에서 감사라도 붙들지 않으면 지탱할 수 없는 메마른 감사로 이어질 수 있다. 이 땅에서 감사할 수 없는 조건이 많은 이유는 이 세상이 타락했기 때문이다. 죄로 인해 구조적으로 망가진 세상 속에 살면서 우리는 때로는 낙심하고 실망하기도 한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성경이 바로 전도서이다. 데릭 키드너는 “잠언이 창조 질서를 강조하는 반면, 전도서는 그 질서가 뒤죽박죽 망가져 있음을 더 부각하고, 욥기는 이 질서가 대개 숨겨져 있다고 말한다”고 하면서, 지혜로워지려면 잠언뿐 아니라 전도서, 욥기라는 지혜서 전체를 바라보는 관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팀 켈러는 오늘을 사는 잠언에서 이 세 가지 관점을 동시에 가질 때 비로소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감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잠언은 하나님의 정해진 질서가 이 세상에 있다고 선언한다. 그래서 그분의 말씀대로 일상생활을 영위하면 복을 받게 된다고 말한다. 창조 세계 안에는 하나님이 정하신 신체적, 사회적, 도덕적, 영적 질서가 있다는 것이다. 잠언은 명확하게 의인은 주리지 않고 악인은 주리게 된다고 말한다. 손이 부지런하면 부하게 되고 게으르면 가난하게 된다고 명확하게 정의한다. “여호와께서 의인의 영혼은 주리지 않게 하시나 악인의 소욕은 물리치시느니라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잠10:3-4).그러나 현실을 살아가다 보면 선한 사람이 고통을 받고 악한 사람이 득세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정직하게 노력하는 사람은 가난하게 되고 사람을 속이며 게으른 사람들이 부하게 되는 경우를 본다. 그때 사람들은 하나님의 질서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하고 실망하며, 감사와 점점 멀어지게 된다. 이것은 잠언의 한 구절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지혜서 전체를 통해 입체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라고 권유한다. 전도서는 잠언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질서가 왜곡되어 있다고 말한다.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우매자가 당한 것을 나도 당하리니 내게 지혜가 있었다 한들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하였도다. 이에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이것도 헛되도다 하였도다”(전 2:15).전도자는 지혜자로 살건 우매자로 살건 동일한 결과를 얻게 된다고 한탄한다. 또 전도서를 시작하면서 모든 것이 헛되다고 고백한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 1:2-3). 잠언은 하나님의 드러난 질서가 있다고 말하지만(God’s order Perceived), 전도서는 그 질서가 교란되어 있고 왜곡되어 있다고 말한다(God’s order Disrupted). 또 전도자는 하나님의 질서가 왜곡되어 있는 이유는 바로 ‘해 아래서’ 무엇을 찾기 때문이라 고백한다. 이 땅에 있는 물질 속에서 이 세상의 관점만으로 자연주의 세계관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질서가 다 왜곡된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의 진리가 왜곡된 세상, 뒤틀린 세상을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해 아래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아니라 ‘해 밖에서’ 하나님의 관점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것을 알려주는 책이 욥기이다. 욥기는 하나님의 질서가 숨겨져 있다고 말한다(God’s order Hidden). 욥기 1장에서 사탄은 하나님께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유를 하나님이 물질의 복을 주셨기 때문이라 말하면서, 이 땅에서 누리는 모든 것을 빼앗아 가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것이라 자신한다. 그 사탄의 요구를 하나님이 허락하시면서, 욥의 소유물을 사탄에게 맡기고 욥의 몸에는 손을 대지 말라고 명령하신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욥 1:11-12). 욥기 1장은 천상에서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를 보여주지만, 문제는 욥이 그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다. 고난을 당할 때, 어려운 현실을 통과할 때 욥은 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알지 못한다. 인생의 밤 중에 노래를 알려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또 이 과정을 통해 귀를 들었던 하나님에게 눈을 보게 되는 하나님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욥은 알지 못한다. 팀 켈러는 “삶의 환난을 평온하게 맞이하고 이겨내려면 두 가지 진리가 다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이 절대로 우리의 고통을 즐거워하지 않으심을 알아야 하고, 둘째로 그 고통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했다(오늘을 사는 잠언, 89). 인생의 참된 감사는 부조리한 세상처럼 보이는 교란된 하나님의 질서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신 질서가 여전히 숨겨져 있음을 신뢰하는 것이다. 잠언은 명확한 질서를 이야기하고, 전도서는 그 질서가 꼬여있다고 말하지만, 욥기는 자세히 보면 꼬여진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숨겨진 뜻과 질서가 여전히 흐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도서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늘 부조리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해 아래가 아닌 하나님의 관점으로 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로 인해 감사하라 욥은 예수님을 명확하게 알지 못했지만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더 깊이 체험했다면,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 우리는 더욱 선명하게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관점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가 받아야 하는 모든 고통과 부조리를 가져가셨다. 이제 우리는 어떤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뒤틀리고 꼬여있는 현실을 만나더라도, 그 속에 하나님의 숨겨진 질서가 있음을 알아야 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어떤 부조리와 고난도 나에게 더 이상 정죄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가지만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환경의 변화가 아니다. 나 자신의 마음의 새로워짐도 아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아는 것이다.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우리에게 빼앗기지 않는 감사는 내게 주신 무엇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분이다. 나를 영원히 떠나지 않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할 때, 우리는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관점으로 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이 땅엔 명확히 선포된 하나님의 진리가 있다(잠언). 그러나 그 진리는 세상 속에서 바르게 작동하지 않고 왜곡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전도서). 그러나 그 왜곡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관점을 회복하면 여전히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질서를 발견할 수 있다(욥기). 그것을 우리가 누리고 적용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나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신 그 사랑의 대상이 하신 말씀이라면 신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모든 것을 우리는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왜곡되어 보이는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숨겨진 질서와 뜻이 있음을 믿을 때, 우리는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도 감사와 기쁨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왜냐하면)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06:1).
감사
부조리
잠언
전도서
욥기
내가 더 이상 교회 쇼핑을 하지 않는 이유
by Tess Abraham
2022-11-24
나는 살면서 지금까지 교회를 열두 군데 정도 다녔다. 우리 부모님은 교회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분들이었는데, 나는 자라는 내내 두 분이 교리적으로 건전하고 또 지역 사회에도 도움을 주는 교회를 찾는 데에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았다. 대학에 갈 무렵, 내게는 고약한 습관이 하나 자리 잡았는데, 새로운 교회를 갔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떠나는 것이었다. 나는 도무지 한 교회에만 헌신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종종 교회를 개인적으로 애용하는 연극 무대처럼 대한다. 찾아간 교회가 내가 원하는 바로 그 경험을 주지 않으면, 바로 관람권을 전액 환불하고 다른 극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로 내가 배우게 된 건, 지역 교회가 주는 아름다움은 주일 아침의 이상적인 경험이 가져다주는 개인적인 선호도를 모아놓은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교회는 단지 주일 하루의 경험이 아니라 일주일 전부와 관련이 있다. 공동체로의 초대교회를 마냥 시대에 뒤떨어지고 이상한 의식이나 치르는 곳으로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의 눈에 주일 아침 일찍 일어나 모이는 신자들은 이상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눈에는 교회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그와 같은 세상의 사고방식을 채택하는 순간, 우리는 필연적으로 묻게 된다. “내가 굳이 주일 아침에 교회에 가야 하나?” 내가 스무 살이 되었을 즈음, 이런 생각이 완전히 내 속에 자리 잡았고, 그랬기에 아무리 많은 교회를 다녀도 나에게 딱 맞는 교회를 찾을 수 없었다. 내가 아는 성경 신학은 교회가 중요하다고 말했지만, 나의 행동은 그 반대로 움직였다.대학 마지막 학기 때, 나는 지금은 남편이 된 남자 친구가 다니던 작은 교회에 함께 참석하는 특권을 누렸다. 그 교회에 참석한 첫 주일, 예배 시작 전 담임 목사는 한 시간 동안 나와 이야기를 나눴다. 예배가 끝나고 그는 우리를 사택으로 초대했다. 그곳에서 주일마다 교인들은 목사의 가족과 온종일 시간을 보냈다. 주일은 이제 내게 한 시간 동안의 예배가 아니라, 종일 진행하는 이벤트가 되었다. 나는 소그룹에 참석하기 시작했고, 또 주중에는 다른 가족의 집을 방문하는 식으로 점점 더 교회 생활에 빠져들어갔다. 어느새 나의 생활이 일주일 내내 작은 교회 공동체를 중심으로 움직여다. 저녁 식사, 게임, 또는 커피 타임을 위해서 교인들과 함께하는 것이 제2의 천성이 되었다.공동체로 인한 변화지역 교회가 제공하는 격려와 확신, 그리고 많은 은혜로 인해 내 삶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나는 비로소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몸을 주신 이유를 온몸으로 체험하기 시작했다. 나를 그 교회 공동체로 이끌었던 특성은 다른 게 아니라 그들이 날마다 실천하고자 하는, 말씀을 진지하게 삶에 적용해서 살아내려는 사고방식(life-on-life mentality)이었다. 교회는 단지 예배 세트나 설교가 아니다. 교회는 삶의 방식, 그 자체이다. 교인으로서의 그들의 정체성은 하나님과의 관계, 즉 그분의 자녀라는 정체성에서 흘러나온다. 그리고 그 정체성은 그들로 하여금 진정한 형제자매로서 서로에 대해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오랜 시간 나는 아무도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교회에 가는 게 자연스러웠다. 내가 괴로워하는 죄, 내가 발버둥 치는 고통의 계절을 아는 사람은 교회에 아무도 없었다. 나는 내내 혼자 그 길을 걸었고, 내 삶에서 절실하게 부족한 지혜를 알려주고 나를 인도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성경을 읽으면 혼자 해결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지역 교회에 온전히 헌신한 이후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이십 대를 지나는 지금, 내 짐과 기쁨 그리고 슬픔까지 함께 나누는 사람들이 항상 곁에 있다.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맛보았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섬겼듯이 나도 다른 사람들을 똑같이 섬기고 격려하고 또 동행할 기회를 교회에서 얻고 있다. 공동체에 헌신한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이유는 우리가 단지 주일마다 온전한 경험을 하도록 함이 아니다. 이 힘들고 죄로 가득 찬 세상에서 결코 혼자 걷지 않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교회를 세우셨다. 신자로서 우리는 서로의 삶을 향해서, 우리가 짓는 죄는 결코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오로지 예수님만이 진정한 만족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은혜의 증거가 되어야 한다. 당신이 지금 어떤 죄와 싸우고 있는지 알 만큼 친한 사람이 없다면, 그 결과는 처참하다. 그건 아무도 당신을 권면하거나 책망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고, 부드러운 손길로 당신의 발걸음을 돌려서 그리스도께로 돌이킬 사람이 곁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처럼 지역 교회 공동체에 참여하면 모든 게 달라질 수 있다. 당신은 이제 진리와 은혜 속에서 그리스도를 알아가며, 성화를 향해 자라기를 바라는 신실한 신자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주님을 닮아가고 있기에 안심할 수 있다. 내가 다니는 교회는 신실한 지역 공동체의 한 예일 뿐이다. 주님의 무한한 지혜와 은혜로, 그곳을 내 교회 집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에 나는 너무도 감사한다. 내가 더 이상 교회 쇼핑을 하지 않고 한 교회에 헌신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간단하다. 하나님의 백성이 만들어가는 공동체와 함께하는 일상의 달콤함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교회 없이는 살 수 없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주님께서 나를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이제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나는 교회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다. 원제: Why I Stopped Church Hopping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지역교회
교회쇼핑
공동체로서의교회
가격 체계도 하나님의 작품이다
교회 지도자를 위한 경제학
by Joe Carter
2022-11-23
교회 지도자를 위한 경제학교회 지도자들이 “그 성읍의 평안”(렘 29:7)을 제대로 구하려면 경제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경제가 우리 삶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교회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이해해야 한다. ‘교회 지도자를 위한 경제학’ 시리즈는 경제 신학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시리즈의 취지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경제에 대한 기본 지식을 제공하여 믿음의 공동체가 경제와 공공 정책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생각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려는 것이다. 용어 가격 체계는 상품과 서비스의 평가와 분배, 그리고 생산의 분석을 위해 수치 화폐 형태로 표현된 수치를 사용한다.이것이 중요한 이유2007년 한 경매에서 사진작가 안드레아스 거스키(Andreas Gursky)는 99센트를 334만 달러로 바꾸어 놓았다.아마도 그가 슈퍼마켓의 내부를 묘사한 99 Cent II Diptychon이라는 제목의 사진을 수백만 달러로 바꿨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 당시 이 사진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사진이었다.더 놀라운 것은 이것이 수백만 달러에 팔린 동일한 이미지의 세 번째 인쇄물이었다는 것이다. 다른 두 개는 2006년에 225만 달러에 팔렸고, 다른 하나는 248만 달러에 팔렸다. 이 사진들은 모두 807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식료품점의 스냅 사진치고는 나쁘지 않다.거스키는 디지털 방식으로 이미지를 수정하여 시청자가 다른 관점에서 친숙한 광경을 보도록 만들었다. 우리가 사진에서 주로 주목하는 것은 색상이다. 하지만, 그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그 이미지는 우리가 종종 당연하게 여기는 아름다움과 다양함으로부터 우리의 관심을 멀어지게 한다. 나는 예술가도 아니고 미술 평론가도 아니지만, 우리가 그 점에 주목하기 바란다.당신은 그것이 보이는가? 아니, 케첩 말고 거기에 붙어 있는 가격표 말이다. 언뜻 보기에 케첩은 (단지 그 케첩이 세일가에 판매된다는 사실 말고는) 특별한 의미를 전달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2.49달러라는 이 단 하나의 숫자는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정보를 전달한다.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작품의 위엄을 생각할 때, 우리는 눈에 보이는 자연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라고 한 다윗의 말에 동의한다(시 19:1). 그러나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적 능력에는 우리가 자주 생각해 보지 않았거나 혹은 하나님께서 창조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복잡하고 아름다운 대상들이 있다.가격 시스템을 예로 들어보자. 가장 기본적인 의미에서, 가격은 단지 제품이나 서비스에 할당된 숫자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가격이란 하나님의 의도가 부여된 동기라고 말할 수 있다. 경제학자 알렉스 타바로크(Alex Tabbarrok)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고, 가격의 신비로움과 경이로움을 탐구하며, 어떻게 가격 체계가 분산된 지식과 정보를 가진 사람들이 세계 경제 활동을 조정할 수 있도록 하는지 연구한다.인간이 제품 각각의 가격을 정하지만, 인간의 번영을 위해 인간 활동의 균형을 조정하는 수단으로 가격 체계를 설계하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타바로크가 비디오에서 말하는 것처럼, ‘만일 그것이 발명된 것이었다면, 가격 체계는 인간에 의한 가장 놀라운 창조물이 되었을 것이다.’ 가격 체계는 실로 놀라운 창조물이지만, 이것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다.그러나 케첩이 2.49달러에 팔릴지, 아니면 사진 한 장이 334만 달러에 팔릴지 누가 결정하겠는가? 물론 직접적이거나 혹은 소비자 개인이 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결정은 소비자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경제학자 돈 부드로(Don Boudreaux)가 설명하듯이, “가격은 소비자들이 제품이 그에 합당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값을 반영한다. 케첩 한 병의 가격이든 에르메스의 버킨 지갑이든 가격표는 ‘글로벌 협력 연결 시스템’에 의한 최종 결과이다.”우리는 흔히 우리가 무언가를 사고팔 때에만 가격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이 부패하고 남용되었을 때만 가격 체계를 생각한다. 이처럼 협소한 시각은 하나님께서 가격 체계를 소통과 조정에 이용하시는 아름다움과 다양함을 놓치게 만든다. 하나님께서는 (감자튀김을 케첩과 함께 먹는 것을 좋아하는지 여부와 같은) 사소한 문제처럼 보일 수 있는 것까지도 아시며 관심을 두고 계시며 우리의 이웃들에게 그러한 필요를 충족시키는 방법을 제공해 주셨다.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용하신 대부분의 좋은 선물이 그렇듯, 우리는 그것을 오용하고 이웃에게 해를 끼치도록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가격 체계는 인간의 형편을 개선하기 위해 사용된 기발한 의사소통의 방법이다.앞으로 우리는 날마다 주시는 양식에 대해 감사 기도드릴 때, 이 양식이 우리에게 올 수 있도록 신기하고 오묘한 가격 체계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원제: Economics for Church Leaders: Why the Price System Is One of God’s Artwork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장명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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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성읍의평안
렘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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