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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나의 목표로!
by Caroline Cobb
2023-01-20
2016년 이후 1월 초가 되면 남편과 나는 스물네 시간에서 마흔여덟 시간을 따로 만들어서 지난해를 되돌아보며 평가하는 동시에 새로운 해에 대한 계획을 세운다. 작년 휴가 때, 나는 카페에 앉아서 저널에 이런저런 생각을 휘갈겨 썼다. 삶의 원칙을 수정하고, 읽어야 할 신앙 서적 목록을 정리하고, 또 내 삶에 꼭 정착시키고 싶은 영적 습관과 훈련과 목표를 적었다. 그러던 중에 떠오른 질문 하나가 열심히 펜을 움직이던 내 손을 멈추게 했다. “그런데 내가 지금 왜 이러고 있는 거지?”순간 나는 내 동기가 반드시 순수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유죄 판결을 받은 느낌이었다. 새해에 달성하고 싶은 영적 성장과 봉사를 계획할 때조차도 내 마음속 ‘우상을 만드는 공장’(idol factory)은 열심히 작업 중이었다. 이런저런 목록과 목표를 만들 때, 나의 내면의 한 부분은 분명히 하나님을 원했지만, 또 다른 부분은 성취, 생산성, 종교적 확인, 신학 지식을 쫓고 있었다. 무엇보다 내게 가장 중요한 동기는 하나님과 다른 모든 사람의 눈에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었다.나는 또다시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주 빠지는 두 가지 미묘한 왜곡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첫째,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복음 정체성에 따라 사는 대신, 나는 또다시 하나님의 인정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하나님의 직원으로 살고 있었다. 둘째, 목적과 수단을 뒤섞어버렸다. 습관, 목표, 규칙을 만드는 외적인 행동에 사로잡히는 바람에, 그것들은 단지 하나님께 나아가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겠다는 결심카페에서 그렇게 나를 겸손하게 만든 그 깨달음은 새해 목표를 세우는 당신에게 몇 가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도움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몇 가지 질문은 던지게 할 것이다. 우리는 왜 영적 훈련에 참여하는가? 왜 굳이 삶의 규칙을 만들고 또 지키려고 하는가? 왜 새로운 기도 습관, 성경 읽기, 또는 소셜 미디어 금식을 실행하려고 하는가? 궁극적으로, 이 모든 게 그 자체로 의미를 가져서는 안 된다. 또는 단지 명목상 하나님을 갖다붙일 수 있는 어떤 이차적인 혜택을 위한 게 되어서도 안 된다. 오로지 하나의 목적, 살아 계신 하나님, 우리가 진정으로 갈망하고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그 분을 더 많이 알고 만나기 위한 것이 되어야만 한다. 시편 42편과 84편에서 고라의 아들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하나님의 임재를 간절히 바라는 열망을 표현한다. 하나님, 사슴이 시냇물 바닥에서 물을 찾아 헐떡이듯이, 내 영혼이 주님을 찾아 헐떡입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계신 하나님을 갈망하니. (시편 42:1-2)내 영혼이 주님의 궁전 뜰을 그리워하고 사모합니다. 내 마음도 이 몸도, 살아 계신 하나님께 기쁨의 노래 부릅니다. (시편 84:2)시편 84편을 주해하면서 팀 켈러는 이렇게 말했다. “시편 기자는 마음속 가장 깊은 갈망이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비인격적인 신성한 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 즉 인격적이고 살아 있는 그분의 임재를 통해서만 충족된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살아 계신 하나님은 결코 머리를 싸매고 연구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다. 그렇다고 특정 민족이나 기독교 하위문화의 마스코트, 적절한 예배 환경에서 얻는 경험, 또는 문제가 있을 때만 찾아가는 치료사도 아니다. 더더욱 매일 아침 “해야 할 일”에 해당하는 목록도 아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인격체이고 활동하며 우리 곁에 계신 존재이다. 그리스도와 성령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에게 실제로 접근해서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시편 기자처럼 우리도 목마른 사슴이 광야에서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하듯, 또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먼 여행길에서 마침내 하나님의 궁정에 들어가는 꿈을 꾸는 순례자가 된 듯, 그분과의 교통 안에서 살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나님의 임재로 들어가는 길영적 지향의 모든 새해 결심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마음의 자세를 잡는다는 면에서 도움을 준다. 그 모두는 다 하나님의 임재로 가는 길, 하나님의 팔로 인도하는 방향타, 그리고 하나님의 얼굴을 찾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하려는 이들을 위한 로드맵이다. 개인적인 변화 또는 (감사하게도) 그리스도인의 삶을 “성취”하는 것이 결코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다. 우리의 목표는 오로지 살아 계신 하나님, 그분이다. 하나님만이 목적이고 핵심이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하루가 다른 곳에서 보내는 천일보다 낫다.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가 은이나 금보다도 낫다.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은 어떤 종교적인 성취, 잘 짜인 “예배” 경험 또는 마치 성경이 학술 교과서라도 되는 것처럼 공부하다가 깨달아서 내뱉는 비인격적 환희의 감탄보다 낫다. 겉으로 드러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대부분이 마치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얼굴을 찾고 있는지, 아니면 단지 기계적으로 표준화된 기독교 절차를 따르고 있는 게 아닌지 질문해야 한다. 행여라도 나는 지금 연극의 인물처럼 행동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만든 천박한 가짜 신을 쫓으면서 정작 진짜 하나님을 저 멀리 밀어내고 있는 건 아닌가? 새해 목표로 성경 통독과 성경 암송을 결심하는 건 참 좋은 일이다. 금식과 같은 영적 훈련도 고려하라. 삶의 규칙과 새로운 습관을 고민하자. 영양이 풍부한 기독교 서적을 읽고 또 신학과 교리도 열심히 공부하자. 새로운 기도 습관을 세우고, 교회의 제자 훈련 프로그램에 등록하고, 또 지역 사회에 봉사하겠다고 결심하자. 그러나 이 모든 일을 통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더 알고 만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아야 한다. 하나님의 모조품 또는 가짜 하나님을 쫓는 과정에서 얻는 부수적인 유익이 아닌, 오직 하나님 그분을 얻기 위한 영적 훈련과 습관을 만들어가자. 하나님이 목적이자 수단이다복음의 좋은 소식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목표이며, 그분은 이미 우리가 자신을 만나는 데에 필요한 모든 수단을 제공하셨다. 그리스도의 사역과 중보를 통해, 우리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얼마든지 살아 계신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다. 히브리서 4:14-16과 에베소서 3:12은 나의 의가 아니라 대제사장 예수의 의에 의지하여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가라고 가르친다. 더욱이 성령님은 하나님을 사모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신다. 우리 마음에 그의 법을 기록하시고, 그의 말씀을 깨닫게 하심으로, 우리는 이제 감히 눈을 뜨고 그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영적 훈련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과 함께하는 삶에 씨를 뿌릴 수 있다. 새해를 맞아 삼위일체 하나님의 살아계신 임재와 은혜의 비옥한 토양에 당신의 신앙이 깊이 뿌리 내리도록 하라. 그것보다 더 좋은 곳도 없고, 더 높은 목표도 없다.원제: This New Year, Make the Living God Your Goal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새해목표
하나님의임재
영적성장
‘유신론/무신론 사용법’에서 ‘일반계시/특별계시 사용법’으...
뱅크스는 대표적인 무신론자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지점이 있다고 강조합니다
by 김경호
2023-01-19
기독교 세계관 운동 2.0 위하여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SIEW)과 함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섭니다.9.11 테러 이후 새로운 무신론이 등장했습니다. 새로운 무신론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리처드 도킨스Clinton Richard Dawkins, 샘 해리스Samuel Benjamin Harris, 크리스토퍼 히친스Christopher Eric Hitchens, 대니얼 데닛Daniel Dennett 등입니다. 이들이 주장하는 전제의 핵심은 실증주의적인 입장에서 신과 신앙, 종교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이고, 확인할 수 없는 것은 믿을 수 없다는 단순하고 강력한 전제 위에서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를 공격합니다. 그들의 주장은 널리 퍼져나갔고 지금은 수많은 사람이 신앙이란 비합리적이고 미개한 것이며, 종교란 인간을 이상하게 만드는 혐오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무신론자들의 이런 주장은 사실일까요? 공교롭게도, 이 주장을 판단하기 위한 유용한 두 권의 책이 친절하게도 출판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로버트 뱅크스Robert Banks의 그리스도인을 위한 무신론 사용설명서라는 책과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의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라는 책입니다. 전자는 “유신론을 위한 무신론 사용법”이고, 후자는 “무신론을 위한 유신론 사용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유신론 안에 무신론이, 무신론 안에 유신론의 흔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뱅크스와 드 보통의 글은 각자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기발한 아이디어를 선사하고 있습니다. 유신론을 위한 무신론 사용법먼저, 뱅크스는 유신론을 위한 무신론 사용법을 소개합니다. 이는 과거의 무신론의 대표적인 사람들의 주장 속에 비친 모습에서 드러난 것입니다. 루드비히 포이어바흐Ludwig Feuerbach는 “신은 인간이 창조한 환상”이라고 보았습니다. 즉, 신은 상상 속 대상을 현실 속 대상으로 바꾼 인간적인 소원의 산물입니다. 카를 마르크스Karl Marx는 신을 압제 상태의 대체물이라고 정의하며, 신을 찾으려는 노력은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이며, 자신의 반영만을 찾았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신은 심리학적으로, 높임을 받은 아버지에 지나지 않은,” “억눌린 욕망의 투사”라고 정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에릭 프롬Erich Fromm은 원래 신은 이상화된 인간일 뿐이므로, 결국 신은 인간이 가진 가능성의 표상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 가능성은 권위주의적 종교/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주의적 종교/신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설명합니다. 흥미롭게도 이 네 명의 대표적인 무신론자들은 모두 종교적 배경을 가졌고, 종교적 신앙과 실천의 역할을 연구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뱅크스는 여기서 이 네 명의 대표적인 무신론자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지점이 있다고 강조합니다. 즉, 신이 길들여졌음을 보여주는 몇 가지 중요한 이정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포이어바흐의 경우, 우리는 신을 통해 자신의 소원과 갈망에 의해 지나치게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마르크스의 경우, 우리는 신을 통해 자신의 현세의 삶에서 부족한 것, 부당한 것, 뜻하지 않은 고통에 대한 보상을 받고자 하는 것은 아닌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프로이트의 경우, 우리는 신과의 관계가 아니라 부모와의 관계에 의해 거꾸로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프롬의 경우, 우리는 신을 권위 있다고 여기지 않고 인간이 가진 가능성의 표상이라고 여기지 않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뱅크스는 우리가 인간이 만들어 낸 신, 또는 신을 대체하는 것들을 파괴하는 성상파괴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거부하는 만큼 더 많은 우상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무신론을 위한 유신론 사용법알랭 드 보통은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라는 책에서 무신론을 위한 유신론 사용법에 대한 자신의 전제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철저한 무신론자로 남아 있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종교가 유용하고, 흥미롭고, 위안이 된다는 사실을 때때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이 책의 전제이다.” 그리고 드 보통은 이 책의 사용법에 대해서도 친절하게 알려줍니다. “이 책은 종교에서 보다 독단적인 측면을 제거함으로써 골치 아픈 이 행성에서의 우리의 유한한 생애 동안에 가뜩이나 회의적인 현대인이 마주쳐야 하는 재난과 슬픔에 대한 시의적절하고 위안이 되는 몇 가지 측면을 찾아내려고 한다.” 이 얼마나 도발적이며 기발한 생각입니까! 드 보통은 이런 생각을 교리가 없는 지혜, 공동체, 친절, 교육, 자애, 비관주의, 관점, 미술, 건축, 그리고 제도에 적용하여, 유신론자들을 긴장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무신론자가 유신론자들을 들여다보며 어디 쓸 만한 것 없나 하고 기웃거리기 때문입니다. 먼저, “교리가 없는 지혜”에서, 드 보통은 수많은 고전 가운데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골라내는 것이 범죄가 아니듯이, 앞에서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철저하게 무신론자의 전제하에(“교리가 없는”), 때때로 종교에서 발견한 유익한 것들(“지혜”)을 사용하겠다고 선언합니다. “공동체”에서, 종교는 유대를 강화하고, 오랜 세월에 걸쳐 확립한 건축적 장엄함을 우리에게 빌려줌으로써, 예배 시에 서로 인사를 나눌 기회를 제공합니다. 또한 교회는 계층과 직위에 대한 집착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줌으로써 우리가 억지로 꾸미거나 거짓말을 할 이유가 전혀 없게 합니다. 교회의 식탁은 사람들에게 너그러움을 느끼게 합니다. 또한 교회에서의 속죄의 날은 분노에 대한 통찰과 용서를, 상처의 희생자와 가해자의 경우, 희생자의 나약함과 가해자의 죄의식 모두에게 속죄의 날은 이런 모든 것들을 바로잡아 줍니다. “친절”에서, 만약 우리가 친절에 관한 적절하고, 솔직하고, 단순한 조언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자신에 관해서 도움이 되지 않는 약아빠진 견해를 가진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자유도 사람이 하나부터 열까지 혼자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오히려 규제되고 인도하는 것을 당연히 전제로 해야 합니다. “교육”에서, 문화가 성서를 대신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아주 터무니없는 것까지는 아닐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심 깊은 사람들이 성스러운 경전에서 찾아내는 바로 그런 특성은 문화 예술 작품에서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필요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잘 조율된 조언을 들을 수 있습니다. “자애”에서, 성모 마리아의 숭배가 우리의 정서적 필요를 위해, 무엇을 밝혀주느냐에 있다고 봅니다. 기독교는 의존성을 인정하는 힘이야말로 도덕적이고 영적인 건강의 지표라고 봅니다. 오직 교만하고 허영심이 강한 사람만이 자기의 나약함을 부정할 것입니다. “비관주의”에서, 무신론이 빌려온 것은 이렇습니다. 종교적 비관주의가 오직 종교만의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또는 종교가 구원의 희망에 영원히 의존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아는 세상은 지금 이 세상 하나밖에 없다는 무신론자의 기본적인 교훈에 의해서 우리의 삶이 영위된다하더라도, 우리는 낙원을 믿는 사람들의 명민한 시각을 빌리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관점”에서, 세속적인 사람이 경외감을 경함할 수 있는 최선의 기회는 바로 별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미술”에서, 특별히 우리의 미술관이 우리의 새로운 교회가 되어왔습니다. 미술관에서 보내는 시간은 교회의 예배에 참석한 시간과 똑같은 심리적 위안을 줍니다. 물론 지루함도 느끼지만, 그곳을 나설 때만은 이전보다 조금은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는 기분이 들게 합니다. “건축”에서, 가톨릭은, 우리가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기 위해서는 우리 주위에 훌륭한 건물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그곳에서 중요한 감정과 추상적 테마를 위해서 고안된 세속 신전을 만들고, 우리의 희망을 일깨우는 기능을 담당하게 할 것입니다. “제도”에서, 현대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결책은 성스러운 전통에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것도 아니었고, 그런 전통을 모두 적대시하며 내던져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전통에서 보다 타당하고 합리적인 측면을 찾아내서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낸시 피어시Nancy Pearcey는 무신론을 위한 유신론은 사실상 기독교에 기식하는 무신론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예를들어, 리차드 로티Richard McKay Rorty는 평등권에 대해, 그는 자신을 일컬어, “기독교에 기식하는 무신론자”라고 말하며, 무신론을 위해, 유신론의 사상인 평등권을 불러내 사용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좀 더 분명한 신학적 기준과 적용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사용법입니다.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사용법으로 유신론을 위한 무신론과 무신론을 위한 유신론은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와의 관계와 많이 닮았습니다. 아브라함 카이퍼Abranam Kuyper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를 구분합니다. 그에 따르면, 일반계시란 하나님이 세상의 보존과 발전을 위해, 모든 사람에게 베푸시는 보편적인 은총입니다. 일반계시는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모두 똑같이 대하시며, 심는 대로 거두는 원리에 따라 살게 하십니다. 일반계시는 창조에 근거합니다. 반면에 특별계시는 타락 이후에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믿는 자에게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따라서 타락과 구속에 근거한 특별계시는 타락과 구속 간의 상호 대립되어 있는 특징으로 인해 ‘반정립’Antithesis이라고도 부릅니다. 또한 일반계시와 특별계시 간의 상호 작용으로 나타나는 네 가지 영향이 있습니다. 첫째, 특별계시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일반계시의 영역이 있습니다. 이는 중국과 같은 비-기독교 국가의 영역입니다. 둘째, 특별계시의 영향만 받는 ‘제도적 교회’가 있습니다. 셋째, 특별계시의 빛이 밝게 비친 일반계시의 영역이 있습니다. 유럽과 미국과 같은 기독교 국가의 경우지만, 카이퍼는 이 영역을 기독교 국가 안에서 ‘비-고백자의 삶’이라고 말합니다. 넷째, 일반계시의 자료를 사용하는 특별계시의 영역, 즉 교회 밖의 유기체 교회입니다. 카이퍼는 이 영역을 교회 제도 밖에서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자들의 삶이라고 말합니다. 즉, 교회 밖에서 빛과 소금의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가장 이상적인 실천은 일반계시의 자료를 사용하는 그리스도인일 것입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유신론을 위한 무신론 사용법”과 “유신론을 위한 무신론 사용법”이 기발한 전략을 가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기발함이 곧 정확함은 아닙니다. 우리의 전략은 성경적-신학적 정확함에 있습니다. 그것은 더 나은 삶을 위해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의 사용법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의 신학이 말한 바,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입니다”라는 신념 때문입니다.
무신론
유신론
일반계시
특별계시
상사로서는 힘들기만 한 담임목사님, 어떻게 해야 하나?
by Miranda Carls
2023-01-18
가시덤불과 엉겅퀴_신앙과 일의 통합을 추구하며 고민하는 이들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 가득한 일터(창 3:18) 현장의 조언을 들려드립니다.나의 직장은 교회입니다. 담임목사님이 상사인데, 직원과 업무 관리 면에서는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담임목사를 상사로 모시고 일하는 환상을 가진 사람이 있다. 하긴 목사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 주일마다 우리에게 격려와 영적 성장에 필요한 말씀을 주는 사람이 아닌가? 병원에서도 환자와 함께 기도하고, 또 성경적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제공한다.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모범을 보여주기도 한다. 나는 살면서 만난 훌륭한 목사님들에게 깊이 감사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직업이 그렇듯이 목회자에게는 관리해야 할 은사와 더불어(롬 12:6-8), 조심해야 할 약점이 있다. 강단에 선 목사는 얼마든지 우리를 압도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목사라고 해도 모든 일을 다 잘할 수는 없다. 얼마든지 일을 엉망으로 만들 수 있다. 견고한 신학, 매력 넘치는 가르침, 자애로운 성품을 기대하며 고용한 목사가 적시에 필요한 의사소통, 세부 사항에 요구되는 세밀한 주의 집중, 그리고 명확하고 현실적인 기대치 설정에 전혀 능숙하지 않을 수도 있다.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성-속우리는 종종 세상 직장과 교회 직원에 대해 다른 기준을 가지곤 한다. 그건 두 가지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 담임목사를 향해서 그리스도와 같이 완벽한 행동을 할 거라는, 아예 불가능할 수준의 높은 기준을 적용할 수도 있다. 동시에 세상 직장이라면 결코 허용될 수 없는 부분까지 허용 내지 간과하면서, 그것을 은혜라는 이름으로 포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디에서 일하든지 관계없이,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성경적 기준을 따라 살기 위해 똑같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마 5:48)? 그리고 교회에서 일하는 그리스도인도 세상 직장에서 일하는 형제자매들과 같은 수준의 탁월함을 목표로 해야 하지 않을까(골 3:23-24)?행여라도 지금 당신은 세속과 거룩을 구분하여 담임목사에게 조직 및 관리 기술을 향상하는 데 필요한 대화를 피하도록 하고, 하지 않아도 되도록 허용하는 실수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가? 부실한 관리에 대한 조사당신이 처한 구체적인 상황을 내가 알 수는 없다. 어쩌면 하루하루가 비현실적인 기대, 부적절한 의사소통, 또는 껄끄러운 상사에게 하는 보고가 잇따르는 고된 일상일 수도 있다. 아니면 전혀 다를 수도 있다. 어쨌든 여기에 몇 가지 단계가 있다.1단계: 상황 분류위기 상황 최초의 대응은 필요에 따른 부상자 분류이다. 직장 내 대인 관계라는 위기에서도 어느 정도의 조사와 분류가 필요할 수 있다. 담임목사에 대해서 가진 복잡한 문제를 생각해 보라. 아래에 소개한 범주에 따라서 종이에 분류해 보라. 순서대로 처리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간단한 것에서부터 복잡한 것까지, 우려 사항을 정리하라. • 간과할 사항: 당신이 처한 상황 중에는 잘못을 눈감고 넘어가야 할 어떤 측면도 있을 것이다(잠 19:11). 이미 해결된 상황에 대해서 여전히 품고 있는 감정의 찌꺼기가 있는가? 담임목사를 떠올릴 때마다 심할 정도로까지 한심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그에 관한 사소한 일은 무엇인가?• 논의할 사항: 어떤 추가 조치를 하기 전에 약간의 대화가 필요할 수도 있다. 담임목사의 행동이나 기대와 관련해서 말하고 싶은 내용이 무엇인가? 어떤 요청을 해야 할까? 그에게서 어떤 피드백이 필요한가? 어떤 질문을 해야 할까? 지금 당신의 목표는 담임목사가 이전에 배운 적이 없는 기술을 향상하도록 돕는 것임을 기억하라. 몇 마디의 좋은 말(잠 25:11)이 그와 당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대화를 나누다 보면 서로에게 죄를 범하는 방식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야말로 용서를 구하거나 서로 용서하는 아름다운 기회를 만나는 것이다(엡 4:32).• 해야 할 일: 취해야 할 몇 가지 조치를 앞에 두고도 망설일 수 있다. 상황을 바꾸기 위해 어떤 행동이 가능한가? 상황을 주도하려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행여 상황을 악화시키는 어떤 행동을 당신이 하고 있는 건 아닌가? • 식별할 사항: 상황 속 몇 가지 측면에 대해서 확신이 없을 수도 있다. 특히 부담을 주거나 명확하지 않은 느낌을 주는 건 무엇인가?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기도할 부분은 없는가? 당신 손에 들린 큰 결정이 있다면, 그건 무엇인가? • 도움을 받아야 할 사항: 상황을 분별하는 과정에서 행여 내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닌지 자문해야 한다(마 7:3). 또는 문제가 당신 혼자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될 수도 있다. 담임목사와 둘이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면, 전제 직원 회의에서 문제를 제기하거나 또는 신뢰할 수 있는 장로에게 조언을 구해야 할 수도 있다(마 18:15-17).2단계: 기도지혜를 구하라(약 1:5). 생각을 정리하면서 나열되는 모든 사항을 앞에 놓고 기도하라. 담임목사의 관리 능력을 위해 중보기도 하라(딤전 2:1).담임목사와의 짝 기도를 고려해 보라. 특히 두 사람이 다 알고 있는 문제라면 짝 기도는 더 필요하다. 세상 직장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이 보통 혼자 책상에 앉아 조용히 기도하지만, 당신은 믿음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 일터 자체가 어려운 일이 생길 때 함께 기도할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마 18:19-20).3단계: 전진하라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처음에는 쉽게 느껴지지만, 그렇게 내버려두면 더 힘든 날이 오고 말 것이다. 관리 능력과 관련하여 담임목사에게 몇 가지 사각지대가 있을 수도 있다. 그가 자신의 약점을 알면서도 그게 초래하는 결과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함께 사역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라도, 전진하겠다고 결심하라. 담임목사를 향한 용서의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라(막 11:25). 피드백을 나누는 시간을 정하고,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서 해결책을 찾아가도록 노력하라. 당신이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건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당신과 담임목사뿐 아니라, 똑같은 좌절감을 겪고 있는 나머지 직원에게도 도움을 줄 것이다. 더불어서 효율적으로 관리되는 조직으로 탈바꿈함으로 교회 전체가 더 잘 교인을 섬길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사역이니, 관리 미숙의 문제나 적시에 대응하지 못하는 문제 따위는 사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기억하라. 당신이 일을 더 잘할 때, 하나님 나라는 더 크게 자랄 것이다. 원제: When Your Difficult Boss Is Also Your Pasto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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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단지 물질이 아닌 아홉 가지 증거
by Thaddeus Williams
2023-01-17
만약에 당신이 생각하는 신이 고안한 기계 같은 존재라면, 지금 당신 머릿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많이 패러디된 그림 중 하나인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를 떠올려보라. 하나님의 손이 아담의 손을 향해 뻗어있다. 그들의 손끝은 1인치 정도 떨어져 있다. 이것은 창세기 1:26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가 있기 바로 몇 초 전의 순간을 미켈란젤로가 창의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무기력하고 멍한 표정으로 손을 뻗고 있는 무심한 아담, 그의 얼굴에 하나님의 얼굴에 드러난 불꽃, 영감, 또는 결의는 찾아볼 수 없다. 하나님은 거대한 뇌를 닮은, 해부학적 정밀함으로 인상 깊게 채색된 적갈색 싸개를 두르고 공중에 떠 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생각의 힘을 불어넣기 위해서 손가락을 뻗는다.미켈란젤로의 가장 유명한 이 벽화에는 신학적 진리가 담겨있다. 하나님은 합리적 구조로 이루어진 우주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우주를 자신의 형상을 닮은 사람들로 채우겠다는 기발한 아이디어도 갖고 계셨다. 하나님이 생각해 낸 대상은 (나는 지금 의인화해서 말하고 있다) 자신의 합리적 의식을 이식시킨 존재, 즉 의미 있는 생각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종(species)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가 된다는 것은 중력의 법칙, 열역학, 그리고 주기율표를 고안해 내신 분의 형상을 지닌 자가 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죽은 눈을 가진 자동화 기계(automatons)가 아니다. 우리는 의식이라는 놀라운 선물을 받은, 하나님의 손가락 터치 이후에 태어난 존재이다. 당신이 이성적 창조자에 의해서 창조된 아홉 가지 증거바로 이 순간에도 당신은 인간이 단지 생각 없는 물질 덩어리 이상임을 증명하는, 최소한 아홉 가지를 하고 있다. 1. 선택우리는 매일 수많은 선택을 한다. 당신이 선택하는 절대 지성(Mind)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면, 이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의미 있는 선택이 기계 같은 결정론에 의해 (또는 무작위 양자 비결정론에 의해) 작동하는 자연 세계로 환원될 수 있을까? 우리가 자유를 그런 식으로 환원한다면, 아무도 하나님을 믿거나 믿지 않겠다는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며, 세상의 모든 논쟁은 단지 생물학적 기계가 때는 비자발적 윙윙거림으로 축소될 것이다. 2. 도덕성의식은 사실(있는 그대로의 것)만이 아니라 가치(되어야 하는 것)도 다룬다. 선과 악과 같은 규범적 가치들이 단순한 서술적 사실로만 채워진 물질세계에서 나올 수 있을까? 되어야 함(ought-ness) 같은 비물질적 실재가 물질적 있음(is-ness)의 토양에서 생겨날 수 있는가? 돈 드릴로(Don Delillo)는 소설 화이트 노이즈(White Noise)에서 이렇게 묻는다. 특정 지역에서 그들은 당신이 말하고 행동하고 느끼는 모든 것을 분자 단위로까지 추적할 수 있다. … 이런 시스템 아래에서 선과 악은 어떻게 되는 걸까? 열정, 시기, 증오? 그거 다 그냥 뉴런의 엉킴에 불과한 거 아닌가? … 살인을 부르는 분노는 또 어떤가? 살인마라면 무시무시한 분노가 있겠지. 범죄도 엄청났을 거고. 그런데 그 분노를 세포와 분자로 환원시키면 어떻게 될까? 3. 비물리적 법칙물질적인 것은 물리 법칙을 따른다. 그러나 마음은 비물질적 논법에 따라 작동한다. 예를 들어 추이적 논법을 생각해보라: A = B이고 B = C이면 A = C이다. 이 법칙이 물리적인가? 그렇다면, 이것의 화학적 구성은 무엇인가? 도대체 어떤 유전적 돌연변이가 과거 진화 과정 어느 지점에서 추이 법칙, 비모순율 또는 여타 논리적 법칙까지 만들어 냈다는 말인가? 4. 의미체계 물리적 세계는 구문 세계이다. 예를 들어, 지금 당신이 화면에서 읽고 있는, 물리적 구문으로 로드된 이 글을 살펴보라. 여기에는 화학적 구성과 더불어 공간적 위치, 그리고 반짝이는 화면에 구불구불한 특정 모양으로 배열된 검은색 픽셀로 가득하다. 그러나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은 단순한 구문 이상이다. 이 글은 철학자가 “의미체계”(semantics)라고 부르는, 즉 물리적 구문을 통해 전달되지만 환원될 수 없는 의미들로 가득 차 있다.5. 창의성반 고흐의 작품, ‘별이 빛나는 밤’에서 볼 수 있는 어두운 아름다움이든 어린아이가 크레용으로 그린 주황색 태양이든, 의식은 창의력을 드러낸다. 캔버스나 도화지 위의 모든 걸작, 모든 노래, 시, 연극, 춤 또는 저녁 식사까지, 이 모든 것을 단지 움직이는 물질의 기계적인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예술가가 단지 휘몰아치는 화학 물질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인가?6. 지향성시스티나 성당 천장을 다시 떠올려보자. 미켈란젤로의 걸작이 당신의 뇌 속에서 물리적인 통증을 일으키지 않고서도 그렇게 할 수 있다. 당신은 시스티나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시스티나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 의식은 어떤 것에 관한 힘을 가지고 있다. (철학자들은 이것을 “지향성”이라고 부른다.) 구체적인 물질세계의 유전적 돌연변이가 과연 추상적 사고 같은 비물질적인 것을 생산할 수 있을까?7. 주체성물리적 세계는 과학의 객관적인 범주 “그것”(It) 안에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의식에는 객체성(it-ness)뿐 아니라 결코 환원할 수 없는 나(I-ness), 즉 주체성, 일인칭 관점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날개 달린 생물, 박쥐에 대해 과학적으로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설명하는 과학책이 한 권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지만 그 책이 결코 대답할 수 없는 한 가지 질문이 있다면, 과연 무엇일까?토마스 네이글(Thomas Nagel)의 유명한 질문, “박쥐로 산다는 것은 어떤 느낌인가?”에는 결코 답을 주지 못할 것이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면서 어둠 속을 날아가는 느낌은 과연 어떨까? 저녁 식사로 선택된 불쌍한 곤충을 잡으러 전속력으로 급습하는 건 또 어떤 느낌일까? 물리적 세계의 의식 없는 “객체성”에 근거해서 어떻게 ‘주체성’과 ‘주관성’을 탐구할 수 있겠는가? 8. 목적성물리적 세계의 “그것”을 철학자들은 비목적론적(nonteleological)이라고 말한다. 물리적인 것은 근본적인 목적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수은을 담아놓은 비커는 ‘내 목표는 574도에서 끓는 것이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그 온도에서 끓을 뿐이다. 그러나 의식은 목적을 가진다. 우리는 목표를 향해 의식적으로 생각하고,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다. (비록 매우 비합리적인 이유인 경우도 많지만 말이다.) 물리적 세계의 목적 없는 ‘그것’(it-ness)이 과연 의식 세계의 목적성(for-ness)을 생성할 수 있을까?9. 유의미성의식은 실제 의미와 접촉하고 그것을 생각한다. 서로 주고받는 사랑에는 정말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 거기에는 단지 입자나 생존을 위한 생물학적 탐구로 환원될 수 없는 초월적인 가치가 담겨있다. 의식 세계의 유의성의 차원, 즉 우리의 존재 이유(why-ness)가 그냥 있음(mere is-ness)의 물리적 세계에서 어떻게 드러나겠는가? “우주에는 설계도, 목적도, 악도, 선도 없고, 무자비한 무관심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도킨스의 말은 맞을까?믿음은 다윈의 의심을 뛰어넘는다 인간이 단지 물리적인 존재에 불과하다는 말을 믿기 위해서는 엄청난 믿음의 도약이 필요하다. 물질세계의 의식 없는 “그것”이 선택 능력(this-or-that-ness), 도덕적 가치(ought-ness), 논리적 법칙(therefore-ness), 의미체계(what-ness), 지향성(about-ness), 창의성(awe-ness), 주체성(I-ness), 추상성(what-it’s-like-ness), 목적성(for-ness), 유의미성(Why-ness)까지 다 낳았다고 믿어야 하는데, 이거야말로 실로 대단한 믿음이 필요한 것 아닌가? 정작 다윈도 이 문제로 괴로워했던 것 같다.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하등 동물의 마음에서 발전한 인간의 마음이 가지는 확신이라는 게 과연 어떤 가치가 있는지, 믿을 수나 있는 건지에 관한 끔찍한 의심이 항상 일어납니다. 원숭이 마음에 든 확신을 누가 믿겠습니까? 설혹 어떤 확신이 원숭이한테 들었다고 해도 말입니다.” 성경이 알려주는 본질적인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분으로 볼 때, 인간의 기원은 생각 없는 물질이 아니라 생각하는 창조주이다. 그러므로 이성은 신뢰할 수 없는 물리적인 생존 메커니즘으로 무시될 게 아니라, 초월적인 진리의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를 아는 메커니즘으로 존중되어야 한다. 자신이 만든 물질세계와 구분되는 창조주의 타자성 안에, 우리가 사유하는 근거가 있다. 우리의 자유, 도덕성, 논리, 의미, 창의성, 개성, 경험, 목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그렇게 설명해서는 안 된다. 이것들은 우리가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때 더 깊어지고 더 넓어진다(신 6:4-9).당신의 사고하는 능력은 멍청한 의식 없는 힘의 산물이 아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 낭비하지 말라.원제: 9 Proofs You’re More Than Matte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창조론
진화론
존재론
지향성
목적론
무신론
물질주의
아름답다, 고도(孤島)의 예배당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서도중앙교회
by 이종전 · 장명근
2023-01-16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대한 강토에 선 첫 세대 교회들을 찾아 떠납니다. 그 이야기들에서 우리 신앙의 근원과 원형을 찾아보려 합니다.강화도 하면 본도만 생각한다. 조금 알면 석모도, 교동 정도가 아닐까. 하지만 강화도에는 많은 섬이 있다. 그중에도 이번에 찾아가는 서도중앙교회는 주문도에 있다. 주문도는 석모도 서남쪽에 자리한, 마을 셋을 품고 있는 작은 섬이다. 주문도는 뱃길로만 닿을 수 있어 아직 남겨진 자연 그대로의 정경을 경험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여행이 될 수 있다. 또한 이 섬은 지리상으로는 해상 방어의 요충지이기 때문에 예로부터 군량미와 무기를 보관할 수 있는 창고가 있었다. 해서 이 섬에 있는 마을 이름들이 무관하지 않음을 느낄 수 있다. 즉 대빈창(待濱倉), 진촌(鎭村)이라는 마을 이름이 진지와 창고가 있었기 때문에 얻어 가진 것이리라.외진 이 섬에 복음이 전해지는 것은 1893년이다. 그렇다면 강화도 본도에 복음이 전해지는 것과 같은 시기라는 의미에서 관심을 가지게 된다. 강화 본도가 아닌 이 작은 섬에 복음이 그렇게 일찍 전해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기도 하다. 1893년 여름, 본도에서 사역하고 있던 성공회 신부 왕대인(L. O. Warner)과 갈대인이라는 또 다른 외국인, 그리고 매음리(梅音里)에서 사역하고 있던 윤정일 전도인이 함께 주문도에 들어와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복음을 영접한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복음을 접할 수 있던 기회가 일찍이 주어졌다는 것은 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후 많은 시간이 흘러 1902년 5월에 윤정일이 다시 찾아와 복음을 전하는 것이 계기가 되어 이 섬에 교회가 형성될 수 있었다. 10년 전에 윤 전도사가 들어왔을 때는 성공회 소속 전도인이었는데, 이번에는 감리교회의 전도인 신분으로 이곳에 들어와 복음을 전했다. 여름이면 응개지나루가 성시를 이루는데, 이 지역에서 고기가 많이 잡히기 때문에 각지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북적였고 술집은 물론 색시집이 많았다고 한다. 바로 이 나루에 등장한 이가 윤 전도사였다. 그는 응개지나루에서 ‘회개하십시오’ 외치면서 천국을 소개했다고 한다. 그러한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미친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광야에서 외치던 세례요한과 같은 존재였으리라 상상이 된다.그의 전도하는 모습이 미친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으니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했을 것이다. 하지만 씨앗이 뿌려지는 곳에는 열매가 있는 법. 김근영(金根永)이라고 하는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는 개성을 오가면서 일을 하던 사람으로서 이미 개성에서 천주교와 접촉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윤 전도사의 전도를 받고 신앙을 고백하게 되었던 것이다. 신앙을 고백한 후에 그는 집안에서 섬기던 신주와 사당을 모두 철거하고 개종한 사람으로서 거듭난 생활을 했다. 마을 사람들은 물론 집안에서까지 많은 따돌림과 멸시가 있었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으며 서도중앙교회의 초석이 되었다. 윤정일의 전도와 김근영의 개종은 현재의 서도중앙교회의 시작이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외딴섬 주문도에도 복음의 바람이 불게 되었던 것이다.미친 사람으로 취급받던 김근영이 1905년 2월 정부로부터 진촌의 군영지(軍營地)를 불하받아서 영생학교를 세워 신교육의 장을 만듦으로써 그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섬 중에 섬인 주문도, 고작 세 개의 마을이 전부인 작은 섬에서 신교육이란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던 상황인데, 그에 의해서 신식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외면만 할 수 없는 처지가 된 주민들은 바뀔 수밖에 없었다. 김근영의 끈질긴 전도 끝에 진촌의 세도가인 박승형(1837-1912)과 승태 형제가 개종을 선언하고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 박승형은 무반(武班) 종3품으로 조선 정부의 높은 벼슬을 지낸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이 외딴섬인 주문도에 들어온 연유는 알 수 없다. 다만 당시의 정세가 매우 혼탁했기에 어떤 일인가로 이 섬으로 피신하여온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다. 그의 아들 박순병(1861-1938)도 종9품의 감역(監役)으로 주문도의 정부 소유 토지를 관리하는 벼슬을 하고 있었기에 작은 섬 주문도에서는 박씨 문중에 필적할 만한 가문이 없었다. 그러한 문중의 어른인 박승형이 개종을 하니 집안은 물론 마을 사람들도 눈치를 보기는 했지만 교회에 나갈 수밖에 없었다. 또한 김근영이 세운 영생학교에 아이들을 보내도록 권면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는 것을 꺼려하면서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이러한 박씨 문중의 개종은 마을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개화 문명을 받아들이는 것은 물론 상투를 자르는 일과 마을에 굿하는 모습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현대식 교육을 받으면서 생각하는 것이 변하니 생활 습관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했다. 또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깨닫게 되는 성경의 가르침을 실제로 생활에 적용하면서 서로 용서하고, 어려움을 나누는 일을 하게 됨으로써 어려운 형편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었다. 세도가인 박씨 문중에 신세를 지지 않은 사람이 없었기에 그들의 변화는 많은 사람에게 필시 영향을 주었다. 특별히 많은 빚을 지고 있던 사람이 그 빚을 갚지 못하고 죽었다고 한다. 당시 2천 원이나 되는 거금을 갚지 못하고 그 아들에게 승계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박두병은 1917년 정월에 그 빚을 모두 탕감해주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종순일 목사 앞에서 탕감을 선언했다. 종순일 목사 자신도 강화도 홍의교회에서 개종하였을 때 마을 사람들에게 빚을 탕감하여 줌으로써 맹목적으로 교회를 비판하고 박해하던 사람들을 조용하게 만들었고 홍의교회의 발전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그 장본인이었던 종순일 목사지만 박두병의 결정을 강요할 수만은 없었다. 박두병은 모두의 기대에 부응하는 결정을 함으로써 주문도 복음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작은 섬 주문도가 복음화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개종한 사람, 특히 이 섬의 절대 세도가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의 개종과 변화된 모습이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박씨 문중의 유력한 사람들의 개종과 함께 이 섬의 주민들은 교회에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처럼 주문도가 유난히 복음화율이 높은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02년에 복음이 들어와 10년의 세월이 지났을 때 당시 주문도 주민의 75퍼센트가 교인이라는 통계는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놀라움은 당시의 것만이 아니다. 현재에도 섬 주민의 90퍼센트 이상이 신자라고 하니, 이 섬에는 술집도 노래방도 다방조차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서도중앙교회의 예배당을 처음으로 대할 때 느껴지는 것은 강화읍내에 있는 성공회 강화읍 성당과 온수리 성당과 너무나 흡사하다는 것이다. 그곳을 아는 사람이라면, 혹시 이곳도 성공회 성당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할 만큼 비슷하다. 아마 당시로서는 섬의 특성상 강화읍 성당이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했기 때문에 이 작은 섬에서 쉽지 않은 일인데, 그 예배당들을 모델로 해서 건축했다는 것은 그만큼 강화읍 성당이 선망의 대상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처음으로 서도중앙교회의 예배당을 보는 순간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어떻게 이 작은 섬에 이렇게 웅장하고 멋진 한옥의 아름다움과 품위를 느끼게 하는 예배당을 지을 수 있었을까? 고풍스러운 기와가 그 역사를 말하고 있고 한옥 구조의 팔작지붕이 품위를 더해주고 있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배의 고물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누각(종각)은 특별한 느낌을 준다. 누각의 모양을 하되 정면은 두 칸으로 옆면은 한 칸으로 지어졌으며, 특이하게 창을 달아 모양을 냈다. 그 모습은 사대부집의 솟을대문 같으니 들고나는 사람들이 출입구임을 알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이고 있는 지붕도 아담하면서 고풍스러운 멋을 한껏 내고 있으니 한참이나 그 자리에서 말을 잃게 한다. 정면에서 보면 서도중앙교회의 현재 이름인 진촌(鎭村)교회라는 현판이 누각의 처마 밑에 걸려있다.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초라하지도 않은, 단아한 시골 선비의 집에 걸려있는 작은 현판과 같은 느낌이 좋다. 어느 누각에서 볼 수 있는 검정색 목판에 새겨진 흰색 글씨가 옛 멋을 더하게 한다. 돌멩이를 박아서 쌓은 벽채 하단부는 기와집 벽채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고, 정면에 사대부 집 대문 같은 네 짝의 문은 금방이라도 “이리 오너라!” 소리가 들릴 것 같다. 대문 아랫부분을 받치고 있는 대리석은 이 작은 섬에서 이 예배당을 짓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고와 희생을 했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흰색의 회벽은 정갈함을 더한다. 검은색 지붕과 대비되는 색깔이지만 수수한 기와에 흰 벽채는 정결하고 단아한 맛을 더하여 준다. 그런데 어디에도 십자가가 보이지 않는 옛 건물, 하지만 건물 뒤로 가면 십자가 모형을 벽면에 창문을 이용해서 만들어 놓았다. 어쩌면 눈높이에서 바라보며 생각하게 하는 배려가 아닐지? 그 모양이 아주 소극적인 표현이다. 멀리서도 볼 수 있도록 십자가 탑을 올리고, 그것도 부족해서 네온을 달아 밤에도 불을 밝혀서 교회의 위치를 알리려고 한다. 그에 비하면 정말 소박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이 예배당은 1923년에 건축된 건물로서 목재는 물론 기와와 마루, 벽면까지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우리나라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예배당 건물 가운데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건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지금도 주일이면 이 교회의 교육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아름다운 예배당 건물의 모습을 잃지 않고 있다. 이 건물을 지을 때 주문도의 신자들이 모두 헌금을 했고, 당시의 돈 7천 원을 모아서 건축을 했다고 하니 당시 신자들의 헌신과 희생을 짐작하게 한다.정면은 5칸 측면은 7칸의 규모로 지은 예배당은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서 다시 놀라게 된다. 나무 마루가 깔려있고 예배당 중앙에 두 줄로 늘어선 기둥은 성공회 예배당을 연상하게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예배당 건축에 영향을 미친 것이 성공회 강화읍 성당이라는 것은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을 만큼 닮아있기 때문이다.1923년도에 이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으리라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건축에 필요한 모든 자재를 강화도에서 들여와야 했기 때문이다. 운송 수단이 없었던 당시로서는 달구지(우마차)가 유일했다. 나루터에서 진촌까지 두 마리의 소가 건축자재를 나르다 쓰러져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만큼 대역사였다. 작은 섬마을에는 격에 맞지 않다고 할 만큼 큰 규모이지만 사실 단층 건물의 단아함과 자연스러운 색상은 주변과 잘 어울린다. 비록 한옥 구조에는 어울리지 않는 유리창이 달렸지만, 실용적인 측면과 일제 시대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자연을 거슬리지 않고 조화롭게 지어진 예배당 건물에 빠져들게 되는 것은 찾는 이의 마음을 기쁘게 한다. 예배당 내부의 특별함은 감리교회 예배당임에도 성공회 예배당과 비슷한 구조로 지어졌다. ‘바실리카식’이라는 구조인데 중앙에 회중석이 있고, 두 줄로 세워진 12개의 기둥, 그리고 양쪽의 회랑이 프로테스탄트교회의 예배당에서는 볼 수 없는 구조다. 전형적인 성공회 성당의 구조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강대상 뒤에 벽채에 만들어진 십자가 모양의 두 개의 창은 눈에 거슬린다. 단층으로 지은 이 예배당은 전기가 없던 시대에 어두운 것이 흠이었기에 1960년대에 벽을 뚫어서 새로 만든 것이란다. 그런데 건물에도 어울리지 않을 뿐 아니라 밝은 빛이 강대에 선 설교자 뒤에서 비치니 설교자의 얼굴이 어두워져서 매우 불편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예배당 내부는 의자도 없이 드러난 서까래의 나무색을 그대로 살린 한옥의 멋이 다른 장식은 필요 없게 한다. 사이사이를 흰색의 회를 발라서 깨끗한 멋을 더하게 했다. 그러한 내부에 다른 어떤 장식을 한다는 것은 오히려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 또한 눈에 띄는 것은 편액(扁額)이 세 개가 걸려있는 것인데, 그것은 우리나라 어느 예배당에서도 접할 수 없는 특별한 것이다. 조선시대의 누각이나 정자에 걸려있는 편액이 예배당 안에 걸려있는 것이 그냥 지나칠 수 없게 한다. 하나는 이 교회가 운영하던 영생학교의 교사인 신원철(申元徹)과 모태정(牟泰貞)이 1926년에 지은 “영세기념사”(永世記念辭)로서 교회가 힘을 모아 영생학교 교사(校舍)를 신축했다는 내용을 적은 것이다. 당시 거금 2천4백 원을 헌금하여 학교 건물을 지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하나는 1927년, 당시 담임 목사였던 김성대(金成大)가 쓴 기념서(紀念書)로서 윤정심이라는 전도부인이 5십 원을 헌금해서 예배당 종을 구입하고 그것을 기념하여 남긴 편액이다. 먼저 사용하던 종도 그의 아버지가 기증한 것으로 사용하던 중 깨져서 소리가 나지 않아 새로운 종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에서 딸인 윤정심이 기증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일제 말기에 전쟁 물자를 조달하기에 혈안이 되었던 일경이 강제로 공출하는 바람에 지금은 접할 수 없게 되었다. 마지막 하나는 근년의 것으로 1993년 이 교회 100주년을 기념하여 당시 이 교회에 시무했던 이기삼(李起三) 목사가 지은 회두시(會頭詩)로서 “서도중앙교회백주년기념축시”이다.우리나라 어느 교회 예배당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것이 여기 서도중앙교회에서는 경험할 수 있으니, 외진 섬마을에서 한국 교회의 또 다른 일면을 보는 기쁨은 찾는 이의 몫이리라.
서도중앙교회
강화도교회사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by Jackson Gravitt
2023-01-15
창세기 18:12에서 사라는 인생의 가장 밑바닥을 경험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내 사람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 약속하셨다. 그리고 이 말을 들은 사라는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하고, 속으로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하나님은 사라가 왜 웃었는지 물으시며, 믿음 없음을 꾸짖으셨다. 사라는 두려워서 거짓말을 하였다: “저는 웃지 않았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속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약속에 사라는 최악의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청교도 제러마이어 버로스(Jeremiah Burroughs(1599-1646)가 그의 만족, 그리스도인의 귀한 선물(The Rare Jewel of Christian Contentment)의 말미에서 관찰한 것처럼, 하나님은 훗날 이 일을 떠올리시면 사라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칭찬하셨다.버로스의 베드로전서 3:6 관찰버로스는 베드로전서 3:5-6에서 성령께서 사라를 아내들이 따라야 할 본으로 세우신 것을 보았다: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던 거룩한 여자들도 이와 같이 자기를 단장하고,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였습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인이라고 부르면서 그에게 순종하던 것과 같습니다.” 창세기 내러티브에서 사라가 아브라함을 존경하는 칭호로 “주인”라고 부른 유일한 때는 창세기 18:12에서 사라가 자기의 의심을 표현하면서였다. 성령께서는 사라가 했던 말 중에서 죄스러운 부분은 지나치시고 좋은 말만 인용하셨다는 사실에 주목하자.버로스는 이렇게 주해한다. “악이 많고 선이 적으면, 하나님은 오히려 악은 지나치시고 선에 주목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은혜롭게 대하시는가! 많은 악한 말 중에 선한 말이 하나라도 있다면, 하나님의 해석은 이와 같다!”(225).버로스는 그 이유를 고린도전서 13:5에서 찾아낸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설명을 잇는다. “어떤 것에 대한 열 가지 해석 중 아홉은 나쁘고 하나는 좋다면, 사랑은 좋은 해석 하나를 취하고 나머지 아홉은 버린다. 이것이 사랑의 본성이다”(224). 사라는 14개의 단어로 말했는데(“After I am worn out, and my lord is old, shall I have pleasure?”), 13개는 나쁜 단어이고, 좋은 단어는 단 하나다. 하나님은 13개를 지나치시고 하나를 강조하셨다. 그때의 일을 다시 거론하시면서 하나님은 사라의 믿음을 이야기하시고 그녀의 의심은 제외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해석이다!버로스가 바라는 것들이 본문을 버로스와 함께 읽을 때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얻어야 할까?1.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라.선지자 이사야는 우리가 하는 착한 일조차도 죄로 더럽혀진다고 말한다(사 64:6).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를 떠올리시는 하나님의 기억은 사라를 떠올리셨을 때만큼이나 은혜롭다.그 증거로 버로스는 신약 서신서들을 인용한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볼 때, 우리는 더러움 외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을 성도라고 부르신다. 가장 큰 부패 아래에서 가장 볼품없는 가장 비열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성도다”(224).버로스는, 위대한 청교도들이 다들 그랬듯이, 죄인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마음을 독자들에게 각인하고자 간절히 원했다.2. 시련 중에도 만족하라.고난이 닥칠 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선하게 해석하시듯이 하나님의 길을 선하게 해석해야 한다고 버로스는 주장한다. 버로스는 고난이 낯선 사람이 전혀 아니었다. 영국국교회의 로드 대주교가 청교도를 극심하게 탄압하던 시기에 그는 양심에 따라 예배할 수 있는 네덜란드로 떠나야 했다. 그는 4년 동안 망명 생활을 했다.버로스는 고난이 오면 주님을 의심하기 쉽다는 것을 몸소 알았다. 그는 독자들에게 그러지 말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선하게 해석하라고 촉구했다: “하나님은 나의 부가 계속된다면 내가 죄에 빠지게 될 것을, 나의 형편이 좋아질수록 나의 영혼은 더 나빠질 것을 아셨을 것이다”(223-24).이스라엘은 광야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잘못 해석하여 죄를 지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려고 여기로 데려오셨다”(224)며 울부짖었다. 그러나 버로스는 이렇게 말한다. “오, 나의 형제들이여, 하나님의 선하신 생각을 간직하십시오. … [그리고] 그의 길을 선하게 해석하십시오”(225).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선하게 해석하기로 작정하시듯, 우리가 고난 중에 있을 때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과 지혜로 행하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께 보답해야 한다.”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봤듯이,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3. 사랑하라.버로스가 만족, 그리스도인의 귀한 선물에서 이러한 바람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분명히 있었다. 버로스는 평생 교회의 일치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가 쓴 Irenicum에서, 버로스는 사소한 교리 차이가 영국 전체에 분열을 일으키고 있다고 탄식했고, 그 이유는 신학이 서로 달라서가 아니라 이기심과 교만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보여주신 것과 같은 은혜를 영국 교회가 나타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리스도인들이 고린도전서 13:5의 말씀에 순종하여 서로에게 악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그 교회의 사소한 분열이 치유되지 않았을까?버로스는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생각하라고 우리에게 촉구한다. 하나님께서 늘 우리의 삶을 선하게 해석하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우리는 환난이 닥쳐도 하나님이 우리의 최선을 염두에 두고 계신다고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이런 은혜를 받았다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정결케 된 다른 하나님의 가족에게 우리가 어떻게 그 은혜를 베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버로스가 말했듯이,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 내릴 수 있는 단 하나의 선한 해석이 있다면, 우리는 악한 해석이 아니라 선한 해석을 사용해야 한다”(225).버로스와 함께 우리가 우리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기억을 깊이 묵상하였다면, 이제 우리는 우리 안에도 은혜로운 기억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리하여, 성도의 일치를, 고안 중에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만족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을 추구해 나가야 한다.원제: ‘Love Thinks No Evil’: Jeremiah Burroughs on God’s Gracious Interpretation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사라
하나님의기억
베드로전서3:6
창세기18:12
사랑
악한생각
선한해석
고난과만족
고난의 길을 신실하게 걸어가는 법
by Clarissa Moll
2023-01-14
남편 롭이 끔찍한 하이킹 사고로 마흔한 살의 나이에 떠났을 때, 나는 “왜”라고 묻지 않았다. 깊은 슬픔 가운데서도 나는 세상이 죄의 저주로 망가진 곳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는 의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동일하게 내린다. 우리의 날들은 그 끝을 알지 못한 채 계수된다. 고통과 슬픔은 하나님이 모두 창조하시고 선이라고 부르신 놀라운 태피스트리 속의 검은 실들처럼 흐르고 있다. 나는 “하나님, 왜요?” 또는 “왜 나에게요?”라고 묻지 않았다. 하지만 롭이 사망했을 때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라고 종종 물었다. 나의 길을 어둡게 만든 이 고통에 대하여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이해할 수 없는 비극에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이런 가슴 아픈 상실 앞에서 나는 세상과 하나님을 향하여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우리 부부가 십년 동안 함께 쌓아왔던 삶이 내 발 앞에서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는 내가 살아남기를 원하고 또 다시 성장해가야 한다면 예수님께 매달려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어쩌면 고난당하는 자의 아이콘인 욥이 말한 것처럼 “ 주신 분도 주님이시요, 가져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욥 1:21)라고 말할 수 있는 장소로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 그곳에 갈 수 있는지 몰랐다. 나는 이제 유족들을 대변하고 돕는 사람으로서, 에릭 오틀런드(Eric Ortlund)의 ‘지혜롭고 온전하게 고통을 지나가는 법: 욥의 슬픔과 하나님의 은혜’(Suffering Wisely and Well: The Grief of Job and the Grace of God)에 감사한다. 그가 학자의 예리함과 목회자의 마음으로 쓴 이 책은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상실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상실을 사려깊음과 정직함과 희망을 가지고 헤쳐 나갈 수 있게 한다. 때때로 어떤 내용은 이제 막 극심한 슬픔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는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은 고난받는 사람과 유족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성경적 지침을 제공한다. 자기 자신이 욥의 친구의 자리에 던져졌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욥의 친구들보다 더 나은 역할을 할 수 있는 현명하고 필요한 지침을 제공한다. Suffering Wisely and Well: The Grief of Job and the Grace of God지혜롭고 온전하게 고통을 지나가는 법: 욥의 슬픔과 하나님의 은혜 에릭 오틀런드(Eric Ortlund) 하나님은 왜 고난을 허락하시는가? 고난의 고통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불가사의할 수 있지만, 성경은 해답을 제공한다. 성경 전체에 걸쳐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삶에서 특별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시련을 허락하신다. 고난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의 백성은 영적인 성장을 경험하고 죄를 회개하며, 구약의 욥의 이야기에서처럼 설명할 수 없는 아픔 앞에서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보일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 이 책에서 에릭 오틀런드는 성경 전체에 걸쳐 다양한 유형의 시련을 탐구하여 각각의 영적인 목적을 밝히고,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으로 독자들을 위로한다. 이 책의 대부분은 고난의 대명사로 잘 알려져 있으나 또한 잘못 이해되고 있는 욥기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오틀런드는 욥의 친구들의 의심, 욥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 리워야단과 베헤못을 포함한 중요한 문학적 묘사 뒤에 숨어있는 의미를 각 장에서 세심하고 신중하게 분석한다. 이 책은 자신의 삶에서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는 동안 어떻게 하나님과 관계를 깊게 하며 어떻게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지 독자들에게 보여준다.무엇을 말해야 하고 말하지 말아야 하는가욥기를 한 장 한 장 지나갈 때마다 이 책은 고난당하는 자와 그들을 돕는 자들 모두에게 신뢰 할 수 있는 행로로 인도한다. 고난의 다양한 종류에 대한 간단한 개요 후에 저자 오틀런드는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아주 가치 있는 내용을 제공한다. 그것은 욥과 욥의 친구들 사이에서, 그리고 욥과 하나님 사이에서 오간 대화에 대한 주해적 탐구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어떻게 말하는가를 하나님은 아주 중요시한다”(169)라고 단언하면서, 오틀런드는 욥의 세 친구가 고난과 고난의 원인과 목적들에 대한 열띤 대화에서 그들이 직면한 어려움을 분석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할애한다. 독자들은 엘리바스, 빌닷, 소발의 뻔한 대답과 상투적인 말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며 얼굴을 찡그릴 수 있다. 알아야 할 것은 우리 모두가 다른 사람의 고난의 자세한 내용들을 분석하려는 잘못된 시도를 했다는 데 있다. 저자는 종종 욥기서의 구절구절에 나타난 대화들로 우리를 데려가서 희생자를 탓하고 판단하는 우리의 죄성을 드러내고 있다. 저자는 다른 사람의 고통과 상실에 끼어들어서 그 원인과 목적을 분명하게 분별하려고 들지 말라고 경고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러한 냉담한 위로와 그런 가증한 온유함에서 구원해 주실 것이다”(79). 그러나 당신이 내가 대화해 본 많은 선의의 친구들과 가족들처럼 당신의 삶에서 어떤 상처받은 한 사람을 돌보는 입장이 된다면, 단지 “뭔가를 하지 말아야 한다”보다 더 이상의 것을 해야 할 것이다. 당신은 적절한 말을 해야 하고 도움이 되는 행동을 해야 한다. 감사하게도 오틀런드와 욥기서의 기자는 이것을 잘 이해하고 있다. 오틀런드는 욥의 친구들을 거울로 삼아 우리의 친구가 되어 주시는 하나님이 조용히 욥의 잿더미 속에 합류하고 있는 그림을 제공하고 있다. 하나님은 욥의 분노와 좌절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능력과 사랑을 보여주시는 위대한 장면을 보여주신다. 당신이 상처 받은 사람에게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이 책은 우리에게 그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준다. 모든 사람의 가장 좋은 친구오틀런드는 베헤못과 리워야단의 매력적인 토론을 통해서 고난당하는 자를 돕고자 하는 모든 친구들과, 또 고난당하는 모든 성도가 마음에 항상 지녀야 할 지혜의 핵심을 제공한다. “자신의 세상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가장 명확히 보시는 그분은 그 세상을 그대로 영원히 두지 않겠다고 약속하사는 바로 그분이다”(157). 당신이 고난 당하는 사람에게 좋은 친구가 되고 싶고 또한 지혜롭고 온전하게 고난을 지나가기를 원한다면, 이 지혜가 당신의 말과 발걸음을 인도해야 한다. 우리의 가장 선한 의도, 신학적 명확성, 또는 성경적인 증명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분별하려고 시도할 수 없다. (나는 여기서 오틀런드와는 달리 나는 여기서 ‘시도해서도 안 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고통 당하는 사람에게 아무것도 도와줄 것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대신 오르크런드는 가장 깊은 고통 속에 있는 욥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주시는 이상적인 친구로서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다. 하나님은 욥이 하나님을 비난할 때 분노나 가로막음 없이 들어주신다. 하나님은 욥의 그릇되고 오해로 빚어진 불평도 친절하게 받아주신다. 하나님은 비꼬거나 비하하지 않으시고 판단하지도 않으신다. 하나님은 욥의 분노,슬픔,의심, 좌절이 완전히 소진될 때까지 그의 곁에 계시기로 하신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자질이다. 우리는 이러한 일을 표면적인 위로로 행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시간에 모든 것을 바로잡으실 것이라는 깊은 믿음에서 행해야 한다. 내가 힘들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시련은 종종 무력감과 절망감을 동반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슬픔을 바꾸거나 완화할 수 없으며 우리 자신의 슬픔을 달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도 많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온갖 시련을 인내할 때, 우리는 소망 가운데 그분을 기다리면서 정직하게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 이것은 레몬을 레모네이드와 같은 달콤한 것으로 바꾸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C. S. 루이스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우리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것을 그분 앞에 가져가야 한다” 욥기서는 필요하다면 우리가 슬픔을 속속들이 표현할 수 있다고 곳곳에서 거듭해서 가르쳐준다. 더 나아가서 고난이 우리에게 닥쳤을 때 우리는 가혹하고 가학적인 자기 점검으로 자신을 몰아가서는 안 된다. 우리의 슬픔을 매듭으로 단단히 묶고 고통이 끌어내는 교훈을 얻겠다고 자신을 강요해서도 안 된다. 그대신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 우리의 길을 가로막고 있을 때,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물어야 한다. 하나님은 단순히 우리가 언제나 신실하기를 요구하신다.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과 교제하고, 필요하다면 하나님의 지혜로 그들의 위로를 걸러내어야 한다. 금을 건지고 나머지는 처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당신의 기도가 화가 나 있고 절망에 소리에 지나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기도해야 한다. 악의 무시무시한 영역을 꿰뚫어 보시면서 거기로부터 우리를 구하시기를 결코 망설이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항상 돌아가야 한다. 원제: How to Walk Faithfully Through Suffering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서은성
성도의고난
영성
묵상과기도
욥의고난
회복과약속
고통의경험
고난의목적
자초지종을 잘 모를 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by Megan Hill
2023-01-13
얼마 전 지인이 내게 이메일을 보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그가 목회직에 면직되었다고 했다. 우리는 (지역도 관계도)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문제가 생기게 된 상황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부당한 면직을 당한 것인지, 아니면 그에게 무슨 잘못이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그렇지만 나는 그의 편지에 어떻게든 답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정말 중요하고 인생을 바꿀 만한 문제에 부닥친 그 친구를 무시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빠진 조각교회에서, 그리고 특별히 사역에서, 우리는 빈번하게 도전적인 상황에 대해 듣게 되고 또 응답을 요청받는다. 그리고 종종 우리는 전체 이야기의 작은 부분만을 안다. 누군가가 저지른 잘못에 관해 부풀린 이야기나 아니면 치우진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도 있다. 누군가의 죄를 폭로하지 않으려고 이야기의 일부만 전달하는 사람도 있다.잠언은 정보 없이 성급한 판단을 내리지 말라고 경고한다:송사에서는 먼저 말하는 사람이 옳은 것 같으나, 상대방이 와 보아야 사실이 밝혀진다. (잠언 18:17)다 들어 보지도 않고 대답하는 것은, 수모를 받기에 알맞은 어리석은 짓이다. (잠언 18:13)때로 우리는 전모를 파악하여 더 완전한 그림을 얻기도 한다. 양 당사자 모두 우리 동아리 내에 있다면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고, 두 사람이 성경에 기초하며 갈등을 해결하도록 도울 수 있으며, 또 관련된 모든 사람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앞에서 밝힌 내 지인처럼, 자초지종을 모두 또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황이나 관계도 있다. 세부 사항 전부에 관여해서는 안 되는 때도 있다.이처럼 전체 이야기를 파악할 수 없을 때라면, 이메일이나 커피 또는 주일 친목 점심 식사를 통해서, 우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정말 안됐어요’죄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어떤 상황에 죄가 있다면, 그것이 누구의 죄이든지 상관없이 진심으로 안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이 고수하는 기독교 신념이 고용주에게 불쾌감을 주어서 해고당한 교우가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면 된다. “그렇게 되셨다니 정말 안됐어요.” 결근을 하는 바람에 직장을 잃은 교우가 있다? 그때도 이렇게 말하면 된다. “그렇다니 정말 안타까워요.” 죄와 고통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더라도, 우리는 죄와 고통에 대한 슬픔은 올바로 표현할 수 있다.‘감사합니다’내가 받은 그 이메일의 경우처럼, 최고의 답장은 “당신의 오랜 섬김에 감사드립니다”일 것이다. 어쩌면 “힘든 시기에 좋은 친구가 되어줘서 고맙다”라거나 “걱정해줘서 고맙다”일 수도 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말은 “내게 말해줘서 고마워”일 때도 있다. 상황에 대해 언급할 만큼 충분히 알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감사를 표할 수 있는 사람이나 관계에 관한 무언가를 찾아낼 수 있다.‘같이 기도해요’우리 주님은 우리가 모를 때에도 모든 것을 아신다. 우리는 주님이 일하시도록 겸손과 믿음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다. 우리는 함께 하나님께 의로운 사람을 변론하시고, 죄를 지은 사람을 책망하시고, 서로 멀어진 사람들을 화해시키시고, 그의 아들을 높이시도록 요청할 수 있다. 기도는 또한 우리 각자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우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의지하여 부르짖게 하는 훌륭한 평형 장치이다. 전체 이야기를 알지 못할 때, 우리는 함께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그리고 우리가 모두 “아멘”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면, 그걸로 됐다.원제: What to Say When You Don’t Have the Full Stor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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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언
감사
기도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알고 느낄 수 있을까?
by Jeremy Linneman
2023-01-12
초신자든 오래 믿은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종종 대화를 나누다 보면, 누구나 다 예외 없이 기도하는 데에, 오래된 습관을 극복하는 데에,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기쁨과 평화를 찾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모든 어려움 이면에 숨은 질문을 던진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어떻게 진짜로 알고 느끼고 있는가?코미디언 브라이언 레간(Brian Regan)은 팝 타츠(켈로그에서 나오는 크림을 바른 과자)와 관련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팝 타츠에 설명서 들어있는 거 봤습니까? 팝 타츠보다 간편한 음식이 또 있을까요? 설명서가 없으면,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걸 들고 서서 이렇게 물어야 하나요? “이 맛있는 걸 어떻게 하면 내 몸속에 넣을 수 있지요?”이게 바로 내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느끼는 방식이다. 사실 그렇게 어렵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또 믿는다. 그러나 올바른 교리를 알고, 건강한 교회를 다니고, 심지어 다른 사람들을 사랑으로 인도하면서도 여전히 영적으로는 차갑고 무미건조하며 또 초연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건 경험을 통해서 잘 안다. 나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또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 죽으셨음을 안다. 그리고 성령님이 내 안에 거하신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이런 강력한 진실은 종종 지적인 수준에 머물 수 있다. 아마 당신도 내 말을 이해할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에베소 사람들은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똑똑히 알았다. 하나님을 경험하게 해 달라는 바울의 기도에베소 성도들은 초대교회의 올스타 같다. 그들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에는 책망이 거의 없으며 그들은 신학과 영성 형성에 있어서 “고기”를 먹을 준비가 된 것 같다. 그러나 에베소 성도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기 위해 애썼다. 이 도전의 역사는 기독교 역사만큼이나 길다. 긴 신학적 논설(1-3장)과 실제적인 가르침(4-6장) 사이에서 바울은 3:14-21에서 잠시 멈춰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한다. 그는 무릎을 꿇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경험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다.기도할 때 자세를 보면 내면을 알 수 있다. 성경을 펴고 책상에 앉아 일기장에 적으면서 하는 기도는 이해와 지혜를 구할 때 적합한 자세이다. 침대에 누워서 반쯤 졸면서 하는 건 내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겠다는 기도를 할 때 합당한 자세이다. 그러나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말로 표현할 길이 없어 신음만 하고 있다면, 그것은 심오한 투쟁이나 열정의 순간이다. 그게 지금 바로 바울이 기도하는 자세이다. 그런데 바울의 기도에는 이상한 점이 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거하시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넘치기를 구한다. 그런데 1-3장에서 그는 이미 이 세 가지가 우리 안에 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위해 왜 그는 또 이토록 뜨겁게 기도하는 걸까? 에베소 성도들은 이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지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채워져야 할 또 다른 수준의 지식과 경험이 필요했다. 바울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가지신 모든 것을 “잡게”(grasp) 해달라고 기도할 때(18절, NIV), 이 단어는 ‘씨름하다’ ‘빼앗다’ 또는 누군가를 ‘압도하다’를 의미하기도 한다. 바울이 우리에게 권면하는 씨름이 무엇인가? 나 자신, 나의 혼, 나의 육체, 그리고 나의 속사람과 싸우라는 것인가? 아니다.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붙잡고, 그 사랑을 우리 마음에 넣는 씨름을 하도록 기도하고 있다.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기“아버지께서 그분의 영광의 풍성하심을 따라 그분의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여 주시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 속에 머물러 계시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엡 3:16-17)라고 바울은 썼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근원은 다름 아니라 성령님이다. 팀 켈러는 바울이 지금 “복음 진리에 대한 영적이고 내적인 민감성”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다.성령에 대한 민감성은 무미건조하고 안일한 신자와 따뜻하고 열정적인 신자를 가르는 중요한 차이점이다. 성령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게 하시고(엡 1:17; 3:5; 6:17),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살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고(엡 3:16; 5:18-19; 6:18),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시고(롬 8:9-11), 영광이 커지는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신다(고후 3:18). 우리가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고 알 수 있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시 34:8).우리 마음을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채울 수 있을까?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어떻게 도우시는가? 바울의 기도를 보면 답을 알 수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 속에 머물러 계시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이 사랑 속에 뿌리를 박고 터를 잡아서, 모든 성도와 함께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되고,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여러분이 충만하여지기를 바랍니다”(엡 3:17-19).얼마 전에 우리 가족은 지하실 콘크리트 공간을 특이한 거실과 사무실로 탈바꿈시키는 공사를 마쳤다. 리모델링을 하면서, 나는 점점 더 지하실의 크기에 익숙해졌다. 이전까지는 거기서 시간을 거의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그곳이 몇 제곱피트인지, 벽의 길이가 얼마인지 몰랐지만, 지금은 몇 번에 걸친 측정과 다양한 작업 덕에 지하실 공간을 손바닥처럼 잘 알게 되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경험하는 이음새 없는 결합을 설명한다. 그리고 이 결합을 발전시키는 데에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1. 천천히 시간을 들여라.살면서 힘든 것 중 하나가 항상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다. 속도를 늦추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낼 때조차도 우리는 여전히 바삐 움직이는 삶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못한다. 서두름은 우리 속에서 성령을 소멸시킨다. 따라서 우리는 서두름을 마음속에서 끊어내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기 위해 지속해서 구하고 또 듣는 기도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2. 말씀을 묵상하라.바울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해주시기를 기도한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진리를 마음에 새기는 법을 배우도록 만들기 위해서 그는 온 힘을 다해 기도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성경 묵상의 실천이다. 조지 뮬러(George Muller)는 묵상의 중요성을 발견한 인물이다. 매일 내가 참석해야 하는 첫 번째 크고 중요한 일은 다름 아니라 주님 안에서 내 영혼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가장 먼저 염려해야 할 것은 내가 얼마나 주님을 섬기고 어떻게 주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느냐가 아니다. 어떻게 하면 내 영혼이 주로 인해 행복한 상태에 머물고, 내 속사람을 살찌울 수 있을까이다. … 속사람을 위한 양식은 무엇인가?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그냥 단순히 읽기만 하는 게 아니다. 그런 경우 물이 파이프를 통해 흐르듯이 하나님의 말씀도 우리의 마음을 타고 흘러가 버린다. 그러나 읽은 다음에는 숙고하고 또 숙고함으로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기고 적용해야 한다. 3. 십자가를 묵상하라.바울은 우리가 일반적인 하나님의 사랑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까지 붙잡기를 기도하고 있다. 그는 왜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강조할까? 우리가 십자가를 묵상하도록 그렇게 한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성령의 능력 갖기를 기도한다. 이는 그리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의 폭과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닫게 하려 하심이다.켈러의 말로 풀어보면, 얼마나 넓게? 나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일 정도로. 얼마나 오래? 예수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라고 하셨다(마 28:20).얼마나 높이? 주님이 다스리시는 천국에 닿을 정도까지. 얼마나 깊게? 무덤보다도, 지옥 구덩이보다도 깊게. 기독교 역사를 통틀어 많은 사람이 이 구절을 읽을 때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몸을 상기했다. 예수님의 손은 양쪽으로 넓게 뻗어졌고,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높이 그리고 깊게 당겨졌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담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도무지 측량할 길이 없다. 그 사랑은 항상 더 깊다.십자가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더 깊이 담을 수 있는 길은 없다. 속도를 늦추고 시간을 내라. 말씀을 묵상하라. 온 힘을 다해서, 그리고 성령의 영원한 능력으로 그리스도를 통해 십자가에서 드러난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붙잡아라.원제: How Do We Know and Feel God’s Lov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하나님의사랑
십자가
조지뮬러
말씀묵상
그리스도의사랑
하나님께서 가져가실 때
슬픔 속에서도 누리는 그의 선하심
by Tim Challies
2023-01-11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종종 경건한 사람이 고난받도록 부름을 받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리스도를 향한 그들의 진실한 사랑과 그들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실재함을 증언하기 위해서이다. 고통에는 깊은 신비가 있다. 성경은 슬픔과 상실, 시련과 애통의 시간을 만날 것을 예상하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지만, 우리는 왜 그런 고통의 시간이 필요한지 이유를 모른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경이롭게 드러낼 놀라운 작품을 수놓고 계신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은 오로지 믿음이 눈을 통해서만 온전한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2020년이 저물어가던 몇 주 동안 우리 가족은 가장 깊은 어둠의 시간을 마주했다. 스무 살 된 아들 닉의 심장이 갑자기 멈췄고, 그렇게 주님 곁으로 갔다. 얼마 전까지 닉은 게임에서 동료 학생들을 이끌던 신학생이었다. 그러던 그가 다음 순간 천국으로 떠났다. 닉의 죽음은 우리를 충격에 빠뜨리고 황폐케 했으며, 그 이유를 질문하게 했다. 왜 하나님은 이런 고통을 우리에게 주신 걸까? 왜 하나님은 고통의 대상으로 우리를 선택하신 것일까? 끔찍한 그날 저녁의 여파로 나는 많은 책과 설교를 남긴, 만난 적 없는 오래전에 죽은 소중한 친구들을 알게 되었다. 계획 수립을 위해서도 조언자가 필요한데, 하물며 올바로 슬퍼하는 데에는 얼마나 많은 조언이 필요하겠는가(잠 15:22)? 가장 힘들고 어두운 시간에 그들은 나를 상담하고 위로했다.증언으로서의 고통테오도르 커일러(Theodore Cuyler)는 하나님께서는 항상 섭리의 먹구름 뒤에 밝은 축복을 두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도록 나를 격려해준 친밀하고 꾸준한 동반자였다. 마이어(F.B. Meyer)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함으로 평화가 올 것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만큼이나 하나님이 가져가시는 것에 있어서도 그분을 신뢰해야 한다고 확신시켜 주었다. 그러나 특히 내 마음에 고요함을 주고 내 길을 인도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지혜를 준 사람은 옛 설교자 밀러(J.R. Miller)였다. 종종 경건한 사람이 고난받도록 부름을 받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리스도를 향한 그들의 진실한 사랑과 그들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실재함을 증언하기 위해서이다. 세상은 직업 종교인을 비웃는다. 세상은 종교가 진짜라고 믿기를 거부한다. 소위 말하는 기독교의 원칙이라는 것은 이기심일 뿐이며, 그것은 결코 가혹한 시험을 견디지 못한다고 도전적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들은 상실과 고통과 슬픔을 견디도록 부름받았다. 그건 그들 속에 근절해야 할 특별한 악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는 세상의 비웃음에 대답하기 위한 증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The Ministry of Comfort”)시대를 가리지 않고 우리는 고난의 부름을 받자마자 신앙을 저버린, 한때 신자라고 공언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뜻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한, 하나님의 섭리와 자신의 선택이 다르지 않은 한,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얻는 것 대신에 잃고, 웃는 대신에 울고, 번영 대신에 가난을 마주하도록 부름받는 순간, 그들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떨어져 나간다(마 13:20-21). 모래 위에 세운 탑과 같이, 잔잔한 날에는 튼튼하게만 보이던 그들은 홍수가 나는 순간 바로 떠내려간다(마 7:26-27).그러므로 많은 불신자가 기독교 신앙은 결코 큰 도전을 이기지 못하고, 그리스도인은 단지 삶이 편안하고 환경이 좋을 때만 그리스도를 의지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회의론자가 비웃는 건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첫 번째 만난 큰 도전보다 강하지 못한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많은 신실한 신자들도 그들의 믿음이 과연 깊은 슬픔의 시기를 이기기에 충분한지, 또는 무서운 충격까지도 견뎌낼 수 있는지 궁금해하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밀러의 말이 위안이 되기도 하고 도전이 되기도 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세상이 봐야 하는 것큰 슬픔의 시기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응답을 갈망한다. 선하시고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왜 고통의 섭리를 허락하셨는지 알고 싶어 한다. 밀러는 내가 저지른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징벌을 받는 게 아니라고, 또한 내가 이루지 못한 의로움 때문에 받는 징계도 아니라고 나를 확신시킴으로 위로를 주었다. 우리는 고통의 상황이 하나님의 눈 밖에서 벌어졌고, 따라서 하나님의 통제에서 벗어났다고 믿을 필요가 없다. 모든 고통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할 이유도 없다. 또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오로지 좋은 일에만 해당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얼마든지 고통 가운데에도 중요한 목적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을 확신할 수 있다. 고통 속에 담긴 목적 중 하나는 우리가 그럴수록 더 굳건히 서서 그분에 대한 충성을 고백하는 것임을 확신한다. 바울은 투옥조차도 “참으로 복음 전파에 유익하였다”고 고백했다. 사랑하는 이와의 사별에 대해서 우리가 바울과 똑같이 말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빌 1:12).비신자와 그리스도인 모두 다 알아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주시는 하나님이라서 우리가 그분을 믿는 게 아니다. 또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하나님이 우리의 욕망과 결코 모순되지 않는 상황만을 허락하셔서가 아니다. 불신자와 그리스도인 모두 다 두 눈으로 확인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작은 것에도 풍족할 수 있고, 상한 마음으로도 온전할 수 있으며, 빈손으로도 얼마든지 가득 찬 것 같이 하나님께 진실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가 필요한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기에 찬송하는 자들은 가져가시는 하나님도 여전히 찬송할 것이다. 슬픔의 눈물을 흘리는 중에도 여전히 경배의 손을 들 수 있으며,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시기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은 어두운 계곡에서도 여전히 그분을 의지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의 친애하는 친구 밀러가 내가 눈을 뜰 수 있도록 한 가르침이다. 골짜기에서도 여전히 선하신하나님의 은혜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나는 내 목자가 선하시다고 고백할 수 있다. 깊은 슬픔의 자리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달콤한 위로를 증언할 수 있다. 상한 마음이지만 내 믿음은 여전히 온전하다고 선포할 수 있다. 맑은 날에 만들어진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참으로 비가 오는 날에도 변하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건 내 아내와 딸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고백을 하는 데에는 조금의 강요도 없었고 또한 과시도 아니다.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우리의 힘은 작지만 하나님의 힘은 크다는 것을 함께 배웠기 때문이다. 그를 붙잡는 나의 힘은 약하지만, 나를 붙잡는 그의 힘은 강하다. 고통의 도전 앞에서 나는 여전히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셨다.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그치지 않았다. 그의 긍휼은 끊이지 아니하고 아침마다 새롭다. 그의 신실하심은 실로 위대하다(애 3:22-23).하나님이 왜 그토록 어린 나이에 닉을 데려가기로 결정하셨는지 나는 여전히 이유를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답을 요구하거나 그분의 섭리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할 권리가 없다. 우리의 확신은 그의 설명 여부에 달린 게 아니라, 그분의 성품과 그가 행하신 일에 달려 있다. “처음부터 내가 장차 일어날 일들을 예고하였고, 내가, 이미 오래전에,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들을 미리 알렸다. ‘나의 뜻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며,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내가 반드시 이룬다’고 말하였다”(사 46:10).슬픔을 당한 그날 밤 첫 순간부터 그분은 함께 계셨다. 하나님은 친절하고 신실하고 선하셨다. 그는 모든 약속을 다 지키셨다. 우리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그를 더 사랑한다. 원제: When God Took Away: His Goodness in My Grief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고난
고통
고통의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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