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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으로 가득한 성경을 어떻게 믿으라는 겁니까?”
by Ryan Van Der Avoort
2023-02-21
이건 당신의 질문일 수도 있고 또 당신이 아는 사람의 질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좋은 질문이다. 성경에 모순이 한두 개가 아닌데, 어떻게 성경을 믿을 수 있다는 걸까? 그러나 이 질문에는 성경에 모순이 많다는, 그래서 믿을 수 없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따라서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전에, 다음 세 가지 질문을 먼저 던져야 한다. 세 가지 필수 질문a. 구체적인 사례를 들 수 있는가? 단지 “성경에는 모순이 많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구체적인 예를 다루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따라서 당신 자신이나 같은 질문을 가진 아는 사람에게 먼저 물어보라. 도대체 어떤 모순을 말하는 것인지를. 지나친 일반화,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내려온 주장(myth)을 영속화하는 대신에 모순이 있다고 생각하는 특정 구절이나 내용이 무엇인지를 먼저 검토하라. b. 겸손하게 받아들일 마음이 있는가?성경은 인류 역사상 다른 어떤 책과도 비교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세상을 형성했다. 선교학자 라민 사네(Lamin Sanneh), 철학자 비샬 망갈와디(Vishal Mangalwadi), 또는 역사가 톰 홀랜드(Tom Holland)의 작품만 읽어도 그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사람이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여전히 성경을 하나님의 은혜로운 말씀으로 믿고 있다. 따라서 두 번째 질문은 이것이다. 사람들이 모순이라고 주장하는 부분에 대한 분명한 설명을 들었을 때 겸손하게 받아들일 마음이 있는가? 그리고 고대로부터 내려온 이 책에는 인간의 수준에서 측정할 수 없는 뭔가가 담겨 있다는 사실도 겸손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c. 혼자 힘으로 성경을 읽고 연구할 마음이 있는가? 성경에 반대하며 성경에 명백한 모순이 있다는 식으로 각종 소셜미디어와 인터넷에 올라오는 글을 읽는 것과 성경을 앞에 놓고 앉아서 시간을 들여가며 깊이 묵상하는 건 차원이 다르다. 스스로 성경을 제대로 읽고 연구하려고 애쓰는가? 성경을 잘 아는 사람에게 성경 읽는 방법에 대해서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는가? 이 세 가지 질문에 기꺼이 ‘예’하는 마음으로 동참할 의사가 있다면, 이제 당신은 진짜 질문을 다룰 준비가 된 상태이다. 지금부터 성경이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는 비난을 살펴보자. 여기 네 가지 포인트가 있다.1. 아무도 성경이 이해하기 쉽다고 말하지 않는다사도 베드로는 이 점을 바울에 관해서 이야기하면서 말한다. “그리고 우리 주님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십시오. 그것은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 바울이, 자기가 받은 지혜를 따라서 여러분에게 편지한 바와 같습니다. 바울은 모든 편지에서 이런 것을 두고 말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는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어서, 무식하거나 믿음이 굳세지 못한 사람은, 다른 성경을 잘못 해석하듯이 그것을 잘못 해석해서, 마침내 스스로 파멸에 이르고 말 것입니다”(벧후 3:15-16).한 가지 장르가 아니라 여러 장르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도 성경을 어려운 책으로 만드는 데 일조한다. 역사 이야기와 시가 같을 수 없다. 율법은 예언과 다르다. 서신서와 비유도 같지 않다. 성경에도 어떤 부분은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다 그런 건 아니다. 성경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책이다. 그 광맥에서 수십 년간 금을 채굴해도 다 캘 수 없는 게 성경이다. 그러나 그 힘든 과정에서 우리는 언제나 더 많은 것을 찾는다. 그게 성경이다. 물론 어려움이 단지 성경 이해가 힘들다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말씀을 순종하는지, 과연 내가 순종하기를 원하는지에 달려있을 때도 많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사랑하지 않는 죄성으로 가득한 인간일수록 필요 이상으로 성경을 더 어려운 책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2. 긴장이 반드시 모순이라고는 할 수 없다성경은 긴장(tensions)으로 가득하다.바울은 아무도 행위로 구원을 얻지 못하고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고 말했다(엡 2:8-9). 반면에 야고보는 행위 없이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약 2:14-17). 이것은 모순이 아니라 긴장이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지만(신 6:4), 삼위일체로 자신을 드러내신다고 성경은 분명하게 증언한다(마 3:16-17). 이것은 모순이 아니라 긴장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로서 소중하지만(창 1:26), 반역자로서 깊은 죄에 빠진 존재이다(롬 3:23). 이것은 모순이 아니라 긴장이다. 그리스도인은 죄에서 구원받았지만(요일 4:10), 오늘도 여전히 죄와 싸운다(요일 1:8). 이건 모순이 아니라 긴장이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왔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 이것 또한 모순이 아니라 긴장이다. 성경은 긴장으로 가득하며 그중 많은 부분이 매우 아름답다.삶은 긴장으로 가득하다. 특히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렇다. 우리가 설혹 사물과 하나님을 완전히 안다고 해도, 우리 중 누구도 감히 하나님이 아시는 것을 완전히 알 수는 없다. 긴장은 겸손과 분별, 그리고 하나님과 타인에 대한 의존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긴장이 가져다주는 가장 중요한 경각심은 다가오는 종말을 인식하게 한다는 점이다. 그날이 오면 온 세상과 모든 사람이 선하신 하나님 앞에서 훤히 드러나고 모든 잘못은 완벽하게 바로잡힐 것이다. 따라서 긴장은 모순이 아니다. 이 점을 기억하면 큰 도움이 된다. 3. 근접 문맥이 중요하다사람의 말도 제대로 이해하려면 배경과 맥락을 알아야 한다. 적어도 문장 앞뒤에 나오는 내용, 곧 “맥락”을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맥락을 통해서 특정 문장이나 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맥락이 실종될 때 한 문장뿐 아니라 구절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를 왜곡하거나 오해할 수도 있다.이렇게 생각해보자. 당신과 긴 대화를 나눈 누군가가 아무런 전후 맥락 없이 당신의 말 중에서 한 문장을 딱 떼어내서 이 사람 저 사람에 옮긴다면 기분이 어떨까? 성경도 다르지 않다. 최소한의 근접 문맥조차 무시하고 구절과 개념을 따로 떼어내서 왜곡하는 건 잘못된 일이다. 근접 문맥을 아예 무시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순으로 간주하는 구절이 종종 있다. 그건 결국 내가 게으르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행여 우리 중에는 무턱대고 성경이 “모순으로 가득하다”라고 성경에 엉터리 딱지를 붙이며 무시할 변명을 찾는 데만 급급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4. 성경을 나무가 아니라 숲으로 바라볼 때 명료함을 얻을 수 있다근접 문맥을 살피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경을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큰 책으로 이해하는 것도 똑같이 중요하다. 때때로 성경을 어렵다고 느끼는 이유는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줄거리, 즉 훨씬 더 큰 맥락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다수가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국가와 사회에서조차도 우리 대부분은 기능적 성경 문맹 상태에 놓여있다. 애용하는 수십 개의 구절을 암송할는지는 몰라도, 성경 전체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기는 힘들다. 그렇기에 “아, 말도 안 돼! 성경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어”라고 떠드는 사람은 마치 네 시간짜리 명작 영화에 몰두해 있는 친구 집에 가서 고작 스치듯 한두 장면을 보고는 “이거 정말 이상한 영화잖아!”라고 떠드는 것과 비슷한다. 오늘 내가 성경 속 숲을 제대로 볼 수 있도록 하는, 성경을 여는 단 하나의 열쇠를 알려주겠다. 바로 이것이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에 관한 것이다(눅 24:27, 44). 물론 성경에는 어려운 구절이 있다. 또 분명히 다른 요점과 쟁점도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예수님을 드러내는 성경의 중심 메시지를 훼손하지 않는다. 성경은 그런 의미에서 완전히 거룩하다. 여기서 거룩하다는 의미는 예수님 안에 있는 구원을 우리에게 알리려는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구별된 책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나사렛 예수에 반응하는 우리가 제대로 씨름하도록 격려한다. 성경은 실로 놀라운 책이다세 개의 대륙과 1,500년에 걸쳐 편집된 이 책에는 마흔 명이 넘는 저자가 쓴 66권의 책이 포함되어 있다. 내가 아는 한, 세상에 성경 같은 책은 없다. 성경과 관련된 문제는 이야기하려면 끝도 없이 많다. 그러나 당신이 꼭 기억해야 할 점은 다른 책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는 성경만이 가진 놀라운 특성과 일관성이다. 원제: Can You Trust the Bible When It’s Full of Contradiction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성경
성경의모순
성경의일관성
성경의권위
성경의완전성
성경과예수
뉴비긴에게서 배우는 전도의 자신감
심플리 미셔널 | Simply Missional
by 김선일
2023-02-20
심플리 미셔널Simply Missional탈교회화, 비종교화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선교 과제로서 복음을 새롭게 제시합니다. 기독교의 변증 유산으로부터 오늘을 위한 복음 변증의 지혜를 발굴하고, 현대 한국의 문화적 표현들과 복음의 대면이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레슬리 뉴비긴은 선교적 교회론의 교부로 불릴 만한 인물이다. 선교적 교회는 우리나라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사이에서도 가장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으로 인정받고 있다. 종종 선교적 교회론은 복음전도와 구령사역 일변도에서 벗어나 지역사회를 위한 공동선을 중심 과제로 삼는 교회로 인식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선교적 교회라는 선구적 착상을 제공한 뉴비긴이 과연 복음전도가 약해지거나 소거된 교회의 공공적 사역을 추구했을까? 뉴비긴의 생애와 사상을 제대로 공부해보면 복음전도에 대한 그의 신념이 얼마나 일관되고 확고하게 토대를 이루고 있는지 금방 파악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얼마나 진지한지는 다른 사람들과 그 믿음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하면서 복음전도를 신앙의 진정성과도 연결하였다. 뉴비긴의 생애를 관통하는 복음전도의 열정뉴비긴은 남인도에서 38년간 선교사이자 주교로 사역하는 동시에, 에큐메니컬 운동인 WCC에도 깊이 관여했다. 그러나 복음의 메시지는 거의 사라지고 선교를 사회정의와 민권운동으로 채색한 WCC의 정책을 보면서 그는 깊이 가슴 아파하며 자신이 산산이 부서지는 고통을 느꼈다고 술회했다. 그래서 WCC에서 일할 때도 뉴비긴은 선교의 세속화 물결에 맞서며 “가장 중요한 일은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알도록 인도하는 것”임을 명확히 했다(아직 끝나지 않은 길, 390). 일화로, WCC의 선교 저널 International Review of Missions 편집인을 할 때 해외선교나 복음전파를 의미하는 ‘missions’라는 단어에서 ‘s’를 제거하고 세상을 향한 증언과 활동을 의미하는 총체적 선교로서 ‘mission’으로 바꾸려는 주위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s’자를 계속 보존했다. 나중에 그가 WCC를 떠난 뒤에 결국 ‘s’자가 제거되고 인간화로서의 선교를 부각하는 ‘미시오 데이’의 물결은 더욱 거세졌다.뉴비긴의 전 생애와 사역에서 회심과 복음전도는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남인도에서 선교를 할 때도 그는 직접 길거리를 다니며 성경을 반포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했다. 그는 우리가 진지하게 믿는다면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마음이 간절해질 수밖에 없다고 본다. 따라서 회심에 대한 관심은 이웃에 대한 관심의 증가를 의미한다. “복음을 모든 곳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권하는 것, 복음을 인류의 역사와 개인의 생애를 이해하는 궁극적 실마리로 증언하는 일은, 아무리 오해받고 무시받고 비난받는다 할지라도, 결코 불필요하게 되거나 도외시될 수 없다”는 것이다(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262).뉴비긴은 서구의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소심한 이유를 두 가지로 본다. 첫째, 현대의 과학적 세계관이 전통적인 기독교의 가르침을 주관적 감정의 영역으로 몰고 가며 사실상의 공적 영역에 적용되지 않는 것으로 만들었다. 둘째, 대도시는 이미 다종교, 다문화의 상황에서 기독교를 전하는 것은 인종차별적 태도가 될 수 있고, 소수 공동체를 존중하기 위해서 복음전도는 당연히 배제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이러한 발상을 뉴비긴은 “신학적 간음”으로 경계한다). 이러한 과학주의적 인식론과 다원주의적 태도는 21세기 한국 사회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데 중대한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다. 이러한 난관들 앞에서 그가 제시하는 전도의 해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복음의 역사적 공공성을 발견해야 한다는 것, 또 하나는 복음의 공적 진리됨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통해서 증명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복음에 대한 이와 같은 명료하고 거시적인 신념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적절한 확신(proper confidence)을 제공한다.복음 진리의 공공성과 역사의 실마리로서 예수 그리스도 뉴비긴이 거듭 강조하는 바는 복음의 공공성이다. 이는 세상을 개선하는 일에 적극 참여하라는 공공신학과는 차이가 있다. 계몽주의 이후 기독교 진리는 인간의 주관적 감정이나 내면적 가치로 축소되고 공적인 삶을 비롯한 현실 세계와는 무관하게 취급됐다. 뉴비긴은 과학과 종교, 또는 사실과 가치의 이분법이 결국 서구사회를 세속화, 심지어는 이교화로 이끄는 근본 인식이라고 본다. 물론 그는 교회의 공적 세계에 대한 책임도 강조하며, 사회의 모든 분야에 대한 성경적 관점을 정립하는 과제도 진지하게 제안한다. 그러나 그의 초점은 기독교 복음이 공적이며 보편적인 진리라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은 역사를 뒤집는 유일무이한 사건이라는 데에 맞춰져 있다. 그는 한 힌두교도 친구의 말을 전한다. 내가 성경을 읽어 보니, 거기에는 우주 역사에 대한 아주 독특한 해석과 더불어 인간을 역사의 책임 있는 행위자로 보는 독특한 이해가 담겨 있는 것 같더군. 그런데 당신네 기독교 선교사들은 성경을 또 하나의 종교 경전인 것처럼 이야기한단 말이야. 우리 인도에는 그런 유의 종교 서적이 이미 많이 있기 때문에 굳이 또 하나를 덧붙일 필요가 없다네(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175)성경은 처음부터 인생을 우주적, 보편적 역사의 맥락에서 조망한다. 성경은 역사이며 사실이다. 성경의 세계관과 역사는 신뢰의 행위를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개인적 믿음이다. 개인적이라고 해서 주관적인 느낌이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참인지를 믿는 것이다. 이는 인류 역사 전체의 의미에 관한 진리를 믿는 것이며, 모든 시대와 장소의 모든 사람과 공유하려는 보편적 의향을 품고 견지하는 신앙이다. 따라서 복음전도에는 이와 같은 복음의 역사적, 공적 진리됨에 대한 확신이 바탕을 이루어야 한다. 또한 이러한 복음의 우주적인 이야기 안에서 개인도 참된 자신의 이야기를 찾을 수 있다. 선교의 논리를 한마디로 줄이자면, 인간 이야기의 참된 의미가 이미 드러났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이것이 진리이기에 보편적으로 나눌 필요가 있다. 이는 사적인 의견일 수 없다. 우리가 그것을 모든 사람과 나눈다는 것은 그들에게 그들 자신에 관한 진리를 알 기회를 주는 것이다. 즉 그들의 인생이 속한 그 진정한 이야기를 앎으로써 자기가 누구인지 그 정체성을 알게 될 것이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인간 역사의 의미가 의문으로 제기되기 마련이다(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238).그렇다고 해서 뉴비긴이 전통적인 교회성장적 전도를 옹호한 것은 아니다. 교회성장학의 창시자 도널드 맥가브란의 열심을 안타깝게 바라보면서, 그러한 접근은 오히려 역효과를 낼 것이라며 거리를 두었다. 그에게서 전도는 단지 개개인의 영혼이 멸망하지 않도록 구원하는 차원만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관한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종말에 완성된다는 희망의 증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복음의 공적 우위성과 진리됨은 어떻게 전달될 수 있나? 그것은 일방적이거나 우월주의적인 선포가 아니라 그 진리대로 살아가는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는 공동체를 통해서이다. 선교적 공동체, 기독교의 진리됨을 증명하는 통로뉴비긴은 그리스도인이 공적 영역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 일차적으로 고려해야 할 대상은 바로 지역 교회 회중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복음의 메시지를 듣고, 인간사의 최종 결론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에 달려 있다는 것을 믿게 될까? 그것은 복음을 믿고 복음에 따라 사는 남자와 여자들로 이루어진 회중이 복음의 유일한 해석자이자 단 하나뿐인 해답이라는 것이다”(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419). 이 문장은 그의 글과 책 가운데 가장 많이 인용되고, 선교적 교회론의 착상에 결정적 영향을 준 아이디어를 담고 있다. 그는 복음이 공적인 영역에서 펼치는 활동의 중요성을 부인하지 않으며, 복음전도와 영적 집회, 기독교 저술 등의 중요성도 인정한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부차적이며, 근본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신앙의 공동체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선교적 교회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인해 생긴 새로운 실재가 최우선이어야 한다. 새로운 실재가 위기와 의문, 응답을 일으키고 그리스도께 대한 헌신의 공동체를 만들어 낸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은 인류 역사에서 유일무이하게 발생했고, 그 이야기를 기억하고 실천하고 재연하는 것이 바로 교회의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에게서 복음전도와 공동체의 관계는 항상 긴밀하다. 그가 실제로 참여했던 길거리 전도도 이러한 말과 행동이 같이 간다는 전제 아래서 가능했다. 길거리에서 복음을 듣는 이들은 낯선 순회전도자의 외침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에 존재하는 기독교 공동체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들의 섬기는 사역을 경험하는 상태에서 말로 선포된 복음을 접한다는 것이다(아직 끝나지 않은 길, 137). 뉴비긴은 성령의 새로운 실재가 교회를 통해서 흘러넘치고 사람들에게 드러났을 때, 불신자들이 이러한 현상에 대해 질문을 하고 그에 대한 “대답”으로서 복음전도의 사역이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선교의 시작이 우리의 활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실재의 현존, 곧 하나님의 영이 능력으로 임재하는 데 있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 교회가 그 주인에게 신실한 삶을 살게 되면 하나님 나라의 권능이 임하게 되고, 그러면 사람들이 질문을 던질 것이며 우리는 복음으로 그 질문에 응답하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바울의 편지들에는 신실한 삶을 살라는 권면은 아주 많지만 적극적으로 선교하라는 권면은 없는 게 아닌가 추정된다(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228).기독교를 박해하던 로마제국이나 공공연한 선교가 금지되는 구 공산국가에서도 성령의 능력이 발휘되어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현존과 능력을 경험하는 부흥이 일어나는 것은 바로 복음전도에서 우리의 말보다 앞서 성령의 새로운 질서가 우선이기 때문이다.뉴비긴의 이와 같은 변화된 공동체에 임하는 성령의 실재와 그에 관한 질문에 대답하는 전도라는 개념은 베드로전서 3:15-16의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는 말씀을 따르는 것이다. 전도가 명령으로 인식될 때 전도는 부담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전도는 명령이기에 앞서 먼저 초월적 은혜의 사건이라는 맥락에서 의미를 지닌다. 뉴비긴은 전도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어서 설명이 요구될 때 비로소 필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새로운 실재의 도래에 대한 의문에 응답할 때 복음전도가 이루어진다. 바로 이러한 논리가 선교적 교회론을 끌어가야 한다.복음전도에 대한 고유한 확신뉴비긴은 과학주의와 다원주의로 인해서 기독교가 주변부로 밀려나고 위축된 사회 속에서도 이와 같이 복음의 공공성과 역사의 실마리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을 강력하게 변호한다. 그의 이러한 변증적 노력은 우리로 하여금 복음에 대한 적절한 확신(Proper Confidence)으로 나아가게 한다. 종종 “적절한”으로 번역되는 영어 형용사 “proper”는 또 다른 뜻으로 “고유한”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의 실마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형성된 세계관에 걸맞은 고유하고 적절한 확신을 품을 것을 주장한다. 이러한 고유한 확신은 우선은 공적 진리로서 복음에 대한 자신감으로부터 출발하지만, 또한 그 복음을 전하는 방식은 그리스도의 성품과 성령의 임재를 드러내는 사랑과 겸손의 공동체를 통해서이다. 자신의 옳음을 논리적으로 입증해서 상대를 바꾸려는 펠라기우스적 방식이나 상대를 힘으로 제압하려는 정복주의적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신 선택 교리의 참된 의미와도 어긋난다고 뉴비긴은 본다. 기독교 복음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역사의 실마리가 풀린다는 것을 믿고 신뢰하며, 이를 기반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자아 성찰과 회개, 새로운 헌신의 인생으로 변화시키는 확신을 제공한다. 오늘의 다원적 사회에서도 다양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그의 교회를 이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길이와 넓이, 높이와 깊이를 더 많이 배울 수 있으며, 그렇기에 우리는 적절한 자신감을 지닐 수 있다. 이는 또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신뢰함에서 비롯되어야 하는 고유한 확신이다. 전도학을 전공한 필자는 종종 교회들로부터 전도 관련 특강을 요청받을 때가 있다. 어떻게 전도를 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을 알려달라는 강의를 부탁받는 경우도 있지만, 교인들에게 전도에 대한 동기부여를 제공해달라는 주문이 의외로 많다. 그만큼 사람들에게 복음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되지 못하는 위축된 현실을 방증한다. 최근 발표된 한국 교회의 대 사회적 신뢰는 여전히 주요 종교들 가운데 가장 낮게 나온다. 이는 전도에 대한 자신감을 더욱 떨어뜨리는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레슬리 뉴비긴의 전도에 대한 통찰을 다시 살펴보는 것은 우리에게 실로 복음의 위대한 매력과 전도의 실마리를 찾도록 안내할 것이다. 지금까지 논의한 뉴비긴에게서 배우는 전도의 교훈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첫째, 그것은 복음의 공공성과 역사성이라는 깊은 차원을 재발견함으로 시작된다. 둘째, 이러한 복음은 세상에 대한 증언과 섬김의 소명을 받은 공동체의 삶을 통해 전파된다.셋째, 복음의 실체를 목격한 사람들은 질문을 품게 되고, 우리는 고유한 확신 속에서 겸손하고 진실하게 질문에 답하며 복음을 전할 수 있다.
뉴비긴
선교
선교적교회론
mission
총체적선교
선교적공동체
복음의공공성
순종과 따름의 과정으로 존재하는 교회
by 정갑신
2023-02-19
안산동산교회에서 사역하던 때였다. 언제부턴가 여기저기서 ‘셀’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인쇄물들에 새겨지기 시작했다. 청년부 담당 목사가 셀 목회를 청년 사역에 접목하여 성공적인 사역을 펼쳤고, 담임 목사님은 그것을 전 교회에 적용하는 모험을 하기로 했다. 그에 따라 일부 목회자들이 먼저 셀 목회를 배우러 다니기 시작했으며, 급기야 전임 목사 전원이 셀 목회 탐방을 위해 인도네시아까지 단체 출장을 떠났다. 교회의 과감한 지원 덕분이었다.교역자들은 회의를 수없이 반복하며 셀 목회 양육 프로그램의 초기 그림을 완성하였다. 교회는 이 미완의 틀을 과감하게 수용하였다. 이 큰 모험의 근본 동기가 무엇이었든지, 이 모험에 대한 마음 깊은 동의 여부가 어떠했든, 그 과정에서 교회의 교회 됨을 향한 몸부림에 참여하는 절호의 과정을 경험할 수 있었다.특히 셀 목회의 핵심에서 선명한 ‘그리스도 중심성’이라는 선언이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 거기에 붙은 결정적인 부제가 ‘관리조직으로서의 소그룹 공동체’가 아니라 ‘이미 충분하고 완전한 교회로서의 소그룹’ 공동체라니! 그 공동체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라니! 이 명백하고 단순한 진리, 누구나 다 알 만하고 또 알고 있었을 진리가 이토록 새롭게 내 영혼에 들어올 줄은 미처 몰랐다. 그것은 이후 내 마음에 형성되기 시작한 ‘교회의 얼굴’을 위한 결정적인 밑그림이 되었다. 교회는 더 이상 조직과 프로그램으로 돌아가는, 성장을 욕망하는 공동체가 아닌 것이 분명해졌다.교회는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존재하는 생명적 연합을 통해 예수께서 정하시고 끌어가시는 방식과 분량에 따라 자연스럽게 자라가는 살아있는 유기적 본질로 작동한다. 그 신학적 진술은 얼마든지 현실 안에서 물리적 형태로 나타나는 사건일 수 있었다. 교회에는 ‘좋은 교회’가 되려는 몸부림보다는 ‘교회’가 되려는 순종이 필요할 뿐이다. 따라서 사람의 마음과 세상의 시선을 살피는 선포와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과 시선을 따라 강건하게 대답하는 ‘따름’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이 가슴에 들어왔다. 결과적으로 교회는 정형화된 형태로 드러난 어떤 건물과 집단으로서가 아니라 성삼위 하나님의 영원한 사건에 대답하는 ‘과정’으로 존재하는 공동체에 가깝다. 끝없는 대답의 사건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은 일어난다. 정갑신, 대답하는 공동체(아르카)에서 간추린 글입니다.
교회론
소그룹
교회의본질
기독교 기관이 성적 부도덕을 받아들이는 3단계
by Joe Carter
2023-02-18
종교 뉴스 서비스(Religion News Service)에 따르면 이스턴 대학교(Eastern University)는 기독교대학협의회(Council for Christian Colleges and Universities, CCCU)에 속한 학교 중에서 성소수자(LGBT+) 교수진 채용을 허용하고 비차별 선언문에 성적 취향에 관한 정책을 수정한 최초의 비 메노파(non-Mennonite) 기독교 학교가 되었다. 이에 대해 CCCU는 이스턴 대학의 회원 자격을 “중지”하고 온라인 목록에서 학교 이름을 지웠다. 이 대학의 역사를 살펴볼 때, 이런 정책의 변화가 크게 놀라운 건 아니다. 이스턴 대학교는 신학적으로 자유주의 역사를 가진 주류 교단, 미국 침례교(American Baptist Churches USA)에 소속되어 있다. 학교는 이전에도 LGBT+ 학생을 공개적으로 환영했으며 학생 주도 클럽이 LGBT+ 학생을 옹호하도록 허용했다. 자유주의 주류 개신교 학교가 정통 기독교를 버리고 성적 부도덕에 대한 이단적 견해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다지 놀랍지 않다.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그런 변화가 불가피하게 발생할 수밖에 없는지에 관해서 질문해야 한다. 이스턴 대학교는 1925년에 성경과 “신앙의 근본” 수용을 기치를 내세우며, 말 그대로 보수 신학을 지지하는 기관으로 설립되었다. 그러나 채 백 년이 안 되어 기독교 역사와 함께해온 기독교 정통을 저버렸다. 도대체 무엇이 그런 변화를 가져온 걸까? 정통에서 이단으로 가는 방식이 어디나 다 똑같다고 암시하는 것은 주제넘은 주장일 수 있다. 그러나 다음 세 단계가 반드시 포함되는, 일종의 반복되는 패턴이 있는 것 같다. 1. 평등주의라는 문을 통해서 시작한다.논란의 여지는 있겠지만, 최소한 논쟁의 여지가 없는 주장부터 시작하자. 현재 성에 대한 정통 기독교의 관점을 거부하는 모든 기독교 기관은 가장 먼저 젠더에 대한 평등주의(egalitarian) 관점부터 수용한다.이런 지적이 불공평해 보일 수도 있다. 평등주의는 이차 문제에 불과하다며,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 정통 그리스도인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평등주의는 의미심장한 경계선을 만든다. 그리스도인을 갈라놓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성 목사의 문제도 세례 방식과 마찬가지로 이차적인 문제이다. 똑같이 신실한 신자라도 얼마든지 서로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같은 교회를 섬길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성도덕은 다르다.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 진리인 일차적 문제이다. “음행을 하는 사람들이나 … 간음을 하는 사람들이나, 여성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나, 동성애를 하는 사람들이나 …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고전 6:9). 성경이 분명히 금지하는 성적 부도덕을 범하면서도 얼마든지 천국에 갈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이단을 조장하는 행위이다. 평등주의와 이 문제를 연관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평등주의라는 토대가 없이도 LGBT+와 같은 특정 유형의 성적 부도덕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러나 그건 매우 어려울 것이다. 리건 던컨(Ligon Duncan)의 말이다. 보완주의(complementarianism)의 부정은 성경의 권위를 온전히 받아들이려는 교회를 약화한다. (따라서 결국 그리고 필연적으로 복음 전파에 해를 끼친다.) 성경은 분명하게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라고 가르치는데, 실제 교회 현장을 보면, 그 구절에서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허락하노라”라는 의미를 뽑아내고 있다. 이건 한마디로 체조 묘기와 다르지 않다. 이런 현실은 결국 하나님의 백성의 삶 속에서 성경이 실질적인 역할을 감당하는 권위(functional authority)를 갖지 못하도록 만든다. 성경의 권위가 무너졌기 때문에 LGBT+ 그룹이 기독교 기관, 특히 대학에서 쉽게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또한 젠더 특성을 제거하는 평등주의 운동은 젠더 본질주의(gender essentialism)라는 개념까지 훼손했다. 물론 이 모든 게 다 평등주의자의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결백하지 않다는 점은 사실이다. 그러나 요점은 비난이 아닌 명백한 현실의 강조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 평등주의 관점에서 구축된 모든 제도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단적 견해를 조장하는 세력에게 쉽게 넘어갈 위기에 처해있다. LGBT+ 수용을 옹호하려는 이들은 평등주의라는 문을 통해서 들어온다. 2. 아무런 제약이 없는 미래를 추구한다.평등주의 운동은 과거가 욕망, 특히 여성의 욕망을 제약한다면, 그런 과거를 얼마든지 무시해도 된다는 개념을 대중화했다. 성경이 여자 목사를 허용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 이 운동은 거의 2,000년 동안의 성찰, 가르침, 그리고 주석 및 성경적 숙고를 버리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평등주의자의 시도는 논리와 해석학과 이성에 근거한 주장을 함으로써 이미 기정사실화된 결론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그런 그들을 따라서 성적 부도덕을 조장하는 자들은 기독교 역사가 간직한 사려 깊은 접근 방식을 아예 포기했다.메리 해링튼(Mary Harrington)은 이 집단이 추진하는 많은 사상이 진실 여부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합리성 여부도 따지지 않으며 단지 욕망을 얼마나 제한하는가에 의해서만 평가된다고 지적한다. 이제 욕망의 제한은 아예 금기가 되었다. 해링튼의 지적이다. “이제 사람들 대부분이 개인 욕망의 자유로운 발산을 제한하는 모든 대상을 다 적으로 믿고 있다.” 그런데 정통보다 더 욕망을 제한하는 것도 없다. 기독교 기관의 경우 정통성은 주로 성경에 기반을 두지만, 더불어서 신조와 교리 문답 그리고 초창기 신자들의 저술에도 일정 부분 의지하고 있다. 성적 부도덕을 조장하는 자들에게 정통 교리는 적이다. 개인의 욕망이 더 완전하게 지배할 수 있도록 정통 교리는 극복되어야만 한다. 억제되지 않은 욕망에 대한 선호가 소위 말하는 “깨어난” 사람들에게만 국한된다면 기독교 조직은 크게 걱정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인은 욕망을 제약하는 모든 것을 반대하는 DNA를 가지고 있다.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한,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라는 신이교적 윤리에 전적으로 충성하면서, 겉으로는 마치 그게 성경적 윤리라도 되는 양 립서비스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 제약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타인에게 분명하고 명백한 해를 입히지 않는 한, 그 어떤 행동도 다 허용되어야 한다고 그들은 믿는다.여자 목사가 누구에게 상처를 줄까? 남자 친구와 결혼하려는 당신 아들은 누구에게 상처를 줄까? 현실을 부정하고 남자로 살겠다는 당신의 딸은 누구에게 상처를 줄까?이제는 이런 질문을 하는 것조차 스스로를 구식으로 만드는 세상이 되었다. 여전히 계몽되지 않은 채 과거(1960년대 이전)에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멍청하게 서서 “역사의 잘못된 편”에 있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기에 처음에는 누구나 다 마음에서 허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조직과 기관에서 각종 제약을 향한 도전을 허용하고 마는 것이다. 그럼 결과가 어떻게 될까? 최근 역사가 보여주듯, 제약은 도전받고 이어서 정통은 양보할 것이다. 3. 새로운 정통을 금지하라.중요한 도덕적 변화는 언제나 가볍고 사소해 보이는 양보에서 시작한다. 사소한 타협 말이다. 기관은 겉보기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한 가지를 용인함으로써 이전에는 감히 손을 댈 꿈도 꾸지 못하던 불가침의 교리나 관행에 대한 제약까지도 서서히 완화할 방법을 찾는다. 대학 캠퍼스가 취하는 방식은 비슷하다. 거의 항상 LGBT+ 지지 단체에 대한 공식적인 인정과 더불어서 동성 결혼을 지지하는 교수를 용인하는 수순이다. 이런 식의 제스처는 해당 학교가 포용력이 있다는 인상을 주는 동시에 그다지 큰 부분을 양보한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을 준다. 단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니까. “우리는 당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소중합니다.”그러나 아무리 사소해보이는 양보라도 그것이 보내는 신호는 사소하지 않다. 해당 기관에게 정통성은 이제 단지 선호도의 문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교리의 정당성은 더 이상 “주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니 너희는 따르거라”에 달린 게 아니라, “중요한 건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이다. 그러나 그게 주님의 명령과 일치할 수도 있다”에 의해서 결정된다. 리처드 뉴하우스(Richard John Neuhaus)가 경고한 것처럼 그런 변화의 결과는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정통이 선택 사항인 곳에서는 조만간 정통이 금지될 것이다.” 그가 “뉴하우스 법칙”이라고 말했을 때 의미한 바는 명확하다. 정통이라는 단어가 내포하는 것은 명확한 기준이다. 그런데 정통이 선택 사항으로 전락하는 순간, 정통을 정통으로 만드는 바로 그 본질을 양보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자유주의적 관용의 법칙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이제 “옳고 그름과 참과 거짓에 대해서 편협한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정통적 견해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억누를 수 있는 무모함(또는 힘)이 없는 한, 정통파는 여전히 원하는 바를 계속 믿으면서 살 수 있다.많은 기관이 이런 변화가 제도적 역학을 어떻게 뒤집어엎는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단지 적정선에서 타협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진실은 정반대이다. 정통을 타협한 그들은 성적 부도덕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손에 자신을 맡겼다.양보가 이뤄진 기관에서 누가 진짜 권력을 쥐고 있는지에 대해서 명확하게 구분하는 게 쉽지 않다. 무제한적인 욕망의 조장자들이 자신들의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뉴하우스 법칙은 종종 기독교 기관 내에서 상당한 시차를 보이기 마련이다. 그 이유는 기관에서 사역하는 그리스도인이 나이스하기(nice) 때문이다. 나이스한 그리스도인은 설교자가 되고 싶은 여자의 욕망을 억누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상호보완론에 집착하는 착한 장로들을 몰아내지도 않는다. 나이스한 그들은 LGBT+ 회원의 욕구를 제한하고 싶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동성애 행위가 부도덕하다는 믿음을 고수하는 소수의 젊은이를 몰아내고 싶지도 않다. 노인들이야 오래지 않아 죽을 것이고, 젊은이들이야 사회적 압력에 굴복할 때까지 기다리면 되니까 말이다. 급한 건 하나도 없다. 물론 연합감리교회에 속했던 한 기관이 그랬던 것처럼, 상황에 따라서 결국에는 무제한적인 욕망이라는 새로운 정통을 금지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관은 얼마든지 인내심을 갖고 기다릴 수 있다. 결국 미래는 그들의 편이기 때문이다. 쇠퇴가 불가피한 건 아니다이러한 패턴이 기독교 기관을 무너뜨리는 것을 보면 가슴 아프다. 그러나 타락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희망을 품어야 한다. 패턴을 식별할 수 있다면, 그 패턴을 중단하도록 노력할 수도 있다. 기독교 기관이 이단에 빠져 영혼을 지옥으로 이끄는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할 수 있다. 기독교 기관의 무결성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서는 하나님이 버리신 현실을 인정하고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 떠나야 할 수도 있다. 기독교 기관의 쇠퇴가 반드시 불가피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쇠퇴를 막기 위한 부지런한 노력과 용기가 필요하다. 더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시작한다면, 우리는 미래의 형제자매에게 정통 교회, 정통 교파, 정통 사역, 그리고 정통 대학을 물려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원제: 3 Steps Christian Institutions Take from Orthodoxy to Sexual Immoralit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동성애
LGBT+
평등주의
보완주의
정통
이단
가독교대학
‘동성애는 죄’라 하지 않는다고 다음 세대가 교회에 오는 ...
by J. D. Greear
2023-02-17
교회 지도자와 동성애에 대해서 앤디 스탠리(Andy Stanley)가 언급한 내용, 다음 세대에 복음을 전하려면 교회가 이 문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한 그의 조언이 최근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2022년 노스포인트 교회(Northpoint Church)에서 열린 드라이브 콘퍼런스(Drive Conference)에서 처음 나온 말인데, 이후 그 교회의 오프라인을 통해서도 알려졌다. 그러나 유튜브와 이곳저곳에 게시된 내용을 통해서 어렵지 않게 그 메시지의 요지를 접할 수 있다. 이것[동성애]이 다음 세대와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모든 부분에서 관련이 있습니다. … 다음 세대의 눈에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면, 그들은 우리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 교회의 냉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회에 나가고 싶어 하는 동성애자…. 나는 지금 당신에게 말합니다. … 동성애자들은 나보다 더 큰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당신은 예언자가 아닙니다. 당신은 목사입니다. 목사와 선지자는 전혀 다릅니다. 예언자가 하는 일은 아무 데나 들어가서 진실 폭탄을 투하하고, 마차를 타고 다음 장소로 가서 또 진실을 투하하면 됩니다. … 그러나 그건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이끕니다. 우리는 속도를 결정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목사는 방향을 설정하고 속도를 모니터합니다. 목사는 속도를 설정하지 않습니다.나도 “동성애 정죄 구절”(clobber passages)을 잘 압니다. 알겠지요? 우리는 그 구절을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 다음 세대 전도는 물 건너가는 겁니다. 동성애를 인정하거나 인정하지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목사는 누군가로부터 불필요하게 교회를 빼앗는 것입니다.노스포인트 교회도 또 스탠리 목사도 동성애를 “인정”하는 건 아니라고, 그들을 취재한 누군가가 보도했다. 그러나 노스포인트도 스탠리 목사도, 수많은 요구에도 불구하고 배타적인 기독교의 전통적인 결혼과 성윤리를 지지한다는 공식 성명을 내지 않았다. 그러나 드라이브 콘퍼런스에서 있었던 스탠리 목사의 말을 볼 때, 그들의 침묵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스탠리 목사가 뭐라고 했던가? 목사 개인이 또는 교회가 공개적으로 “인정”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것은 누군가를 교회로부터 소외시킬 수도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따라서 노스포인트의 공식 입장은 동성애를 “인정하지 않음”이 아니라, 단지 사실 여부를 확인해주지 않을 뿐이라고 간주해야 한다. 무엇인 진실인지는 스탠리 목사만 알고 있으며, 나는 그가 조만간 입장을 밝히길 바란다. 노스포인트에서 지도자를 뽑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후보자가 동성애자인지 아닌지 정도는 당연히 확인하지 않을까? 행여라도 동성애자로 확인되는 경우라면 지도자로 뽑지 않을 건 자명하지 않은가? 논증을 위해, 그 교회가 정말로 동성애를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간주하자. 즉, 성에 대한 하나님의 유일한 계획은 결혼이라는 맥락에서 남자와 여자 사이에만 존재하며 다른 모든 형태의 성은 다 죄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믿는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그 교회가 이런 믿음을 주저하면서 공개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 하나님을 찾고 있는 LGBT+에게 장애물을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스탠리의 사역이 내게 미친 가장 큰 영향 중 하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데 초점을 맞추는 사역의 중요성을 깨닫게 했다는 것이다. 거의 십오 년 전에 사도행전 15:19을 설명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미국에 있는 모든 교회의 출입문에 이 글을 쓰고 싶습니다. 하나님께로 향하는 이방인을 힘들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의 말에 깊이 감명받은 나는 그 자리에서 울었다. 내가 담임하는 서미트교회(The Summit Church)에서 나는 그 말을 자주 반복한다.스탠리에게 동성애는 단지 이겨야 할 문화적 논쟁거리가 아니다.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에 관한 것이다. 관계가 진리보다 우선한다고 그는 종종 말한다. 그리고 덧붙이곤 하는데, 진리를 희생하자는 게 아니라 단지 관계를 진리 앞에 놓자는 의미라고 말이다. 어려운 대화일수록 커피 테이블에서 이루어져야지 결코 독단적인 문서를 통해서나 또는 거만하게 무대에서 울려 퍼져서는 안 된다고 한다. 경건하고 성경을 믿으며 신실한 우리 교회 교인 중에는 동성애 문제로 고민하는 성인 자녀가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복음이 전파되는 다른 교회로 떠난 부모들도 있지만, 거기서도 그 주제는 결코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하나같이 스탠리가 강조하는 것과 비슷한 교회였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우리 아이들이 복음을 믿고 계속 교회를 다닐 수만 있다면, 동성애 문제는 차라리 얼마 간은 거론되지 않는 게 좋아요.”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동성애 문제를 경시하는 것이 복음 전파에 유익할까? 동성애 문제를 무시하면서 예수님의 지상 명령에 충실할 수 있을까? 그게 과연 다음 세대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일까? 좋은 부분: 선교사처럼 생각하기좋은 것부터 시작하자. 첫째, 타이밍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 가르침의 어려운 부분을 소개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부분에 관한 이야기를 굳이 처음부터 꺼낼 필요는 없다. 때때로 회의론자나 구도자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기독교 도덕의 특정 부분에 어려움을 느낀다면, 그건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지금은 그리스도의 주장, 정말로 그가 주님이신지, 정말로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는지에 관한 문제만 씨름하도록 합시다. 그런 다음 그리스도에 관해서 확신하게 되면 그때 가서 그분의 가르침을 하나씩 다루도록 하지요.” 우리에게 성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무시하거나 경시하거나, 또는 모호하게 말할 자유가 없다. 그러나 심지어 예수님도 모든 가르침을 한꺼번에 제시하지는 않으셨다(요 16:12).둘째, 21세기 미국에서 목사는 이제 그리스도를 통해 단번에 전달된 신앙의 수호자일 뿐 아니라 점점 더 이교적으로 변질해가는 문화를 다루는 선교사로서 책임까지 짊어져야 한다. Evangelism in the Early Church(초대 교회의 복음전도)에서 기독교 변증가인 마이클 그린(Michael Green)은 “선교사”와 “정통의 옹호자”를 구분한다. “진정한 기독교와 그로부터 일어나는 모든 일탈 사이의 격차를 최대화하려고 애쓰는 정통의 옹호자에 비해서, 변증가(선교사)는 자신과 잠재적 개종자 사이의 격차를 최소화하는 데 관심이 있다. 따라서 이 둘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그린이 설명하듯, 교회에는 이 두 역할이 다 필요하다. 동남아시아에서 무슬림 선교사로 사역할 때 나는 끊임없이 두 개의 모자를 번갈아 써야 했다. 복음이 이슬람과 얼마나 다른지를 강조하기도 하고, 때로는 이슬람이 제기하는 질문을 복음의 다리로 활용하기도 했다. 어떤 경우에도 모자를 벗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어떤 대화에서 어떤 모자를 써야 하는지를 분별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의 유명한 주장처럼 오늘날 서양의 목사는 선교사의 기술을 다시 배워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기독교 문화가 지배하는 지역에서 단순히 교리만 수호하면 되는 교구 담당자가 아니다. 목사 겸 선교사가 더 많이 필요하다. 동성애에 대한 우리의 가르침이 단지 부도덕을 향한 비난이 아니라 대화를 위한 초대로 들려야 한다. 나쁜 부분: 실제적이고 성경적인 문제지금까지만 보면 내가 스탠리의 접근 방식을 지지하거나 적어도 공감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한 가지 실제적인 문제와 두 가지 성경적인 문제를 제시하겠다.1. 실제적인 문제동성애에 대해 “묻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는 접근 방식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다. 1990년대라면 “당신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한, 나도 입 다물고 있겠다”라는 태도로 교회에 오는 구도자가 가능했다. 그것이 당시의 시대정신이었다. “묻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는 군대 내 동성애에 대한 빌 클린턴 대통령의 접근 방식을 상징하는 슬로건이었다. 그러나 그건 오래전 이야기이다. 교회에 오는 모든 불신자는 적어도 세 가지 이유로 자신들이 동성애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믿는지 이미 알고 있다고 가정한다. 첫째, 전 세계 그리스도인은 2,000년 동안 이성애 결혼의 신성함을 일관되게 믿어왔다 (돈 포트슨 및 롤링 그람의 설문 조사 참조). 둘째, 복음주의자는 성경의 사람들로 알려져 있으며, 설혹 성경을 건성으로 읽는 사람이라도 동성애를 반대하는 성경의 입장을 쉽게 분별할 수 있다. 셋째, 기독교인을 편협한 사람으로 묘사하는 데 혈안이 된 미디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런 내용을 대중에게 상기시킨다. 교회에 오는 대학생과 젊은 전문직 종사자가 우리가 믿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이유이다. 성에 대한 우리의 신념은 그들이 차차 알게 될 더러운 작은 국가의 비밀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가 믿는 바를 이미 알고 있고, 따라서 미디어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동성애를 증오한다고 가정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의 눈에 나는 도덕적 우위가 없는 상태로 시작한다. 어떤 영감을 기대하며 내 말을 들을 수는 있겠지만, 그들에게 나는 복종을 요구할 수준의 권위자는 결코 될 수 없다. 그리고 정말로 미디어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그토록 혐오스럽고 편협한 존재라면, 그들은 우리가 하는 말을 듣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 생각하는 동성애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팀 켈러의 표현을 빌리자면 “패배자 믿음”이다. 그들이 아예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주장을 고려조차 하지 않도록 하는 빌미를 주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전략적인 조치는 우리가 진짜로 무엇을 믿는지 명확히 하는 것이다. 비록 상대의 확신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 사람을 사랑하고 존중과 존엄과 명예로 대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방 안에 있는 이 동성애라는 어색한 코끼리를 제대로 다루지 않는다면, 어떤 결과가 따라올까? 동성애 문제는 진지하게 고민하는 구도자마저 역사적인 교회와의 의미 있는 연합을 고려하지 못하도록 막아버리는 침묵하는 “패배자” 역할을 할 것이다. 왜 그들이 굳이 혐오스럽고 편협한 사람이 되는 걸 고려하겠는가? 얼마 동안은 모든 사람에게 영감을 주는 가르침, 실생활 수업, 세계적인 수준의 음악에 계속 참여시킬 수 있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성경 읽기, 소그룹 모임 또는 심방을 통해 이 주제가 반드시 떠오를 것이다. 동성애에 대해서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당신이 목사로서 공개적으로 보여주지 않았다면, 누군가는 분명히 혼란 속에 상처받고 화를 내며 교회를 떠날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우리 교회에 다니는 동성애자와 첫 커피 타임을 가질 때, 성윤리 선언문부터 꺼내 들고 그 모든 조항에 사인하라고 요구한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처음 시간에 그 문제를 꺼내지 않는 것과 앞으로도 아예 꺼내지 않겠다고 작정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맨해튼에서 삼십 년을 목회하며 수천 명의 세속적 회의론자와 접촉한 켈러는 이렇게 말한다. “이 문제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은 더 이상 선택 사항이 아니다.” 그건 오히려 비생산적이다. 역사의 이 시점에서 우리는 완전히 다른 가치를 가진, 완전히 다른 왕국에서 온, 또 완전히 다른 권위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을 상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교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부터 아예 인정하는 게 좋다. 미국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미친 우유 몇 잔을 마시는 정도가 아니다. 아예 미친 암소를 사서 키우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바빌론에서 다니엘이 취한 접근 방식이었고 아테네에서 만나는 바울의 접근 방식이다. 다니엘은 “그러나 하늘에는 하나님이 계시니”(단 2:28)라는 말로 변증을 시작했다. 아테네 사람들을 향한 바울의 메시지는 “너희 조상들이 믿던 신에게로 돌아가서 너희가 양육받은 도덕성을 다시 받아들이라”가 아니었다. 바울의 메시지는 본질적으로 이것이었다. “당신이 지금까지 믿었던 것 대부분이 틀렸다. 그러나 나는 저기에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적힌 제단을 보았다. 나는 오늘 그가 누구인지 여러분에게 선포하려고 한다”(행 17:23).2. 성경적 문제(1) 십자가의 거슬림을 제거하는 것은 십자가의 능력을 빼앗는 일이다기독교 선교사가 믿음의 장애물을 제거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성경이 가르치는 모든 것을 묵살 내지 부인하거나 또는 모호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대사명을 통해서 예수님은 (동성에 이끌리는 사람도 다 포함한) 모든 사람을 제자로 삼으라고 명령하셨다. 그는 또한 결혼의 신성함을 포함하여 자신이 가르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라고 명령하셨다(마 19:3-12).바울은 우리의 메시지가 어떤 사람에게는 “죽음의 악취”를 풍길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함에도 그는 거슬림을 극복하기 위해 얼버무리라고 권고하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듣는 이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성령님을 의지했다. 아무리 복음을 매력적으로 포장해도 육에 속한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고전 2:14). 바울이 만약에 그 시대의 인기 있는 지혜와 웅변으로 복음을 더 듣기 좋게 만들려고 노력했다면(우리 시대에는 개성을 찬양하고 동성애의 죄성을 경시하는 것이 포함된다), 그는 훨씬 더 많은 열렬 청중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선포하는 십자가의 능력은 사라졌을 것이다(고전 2:4).십자가 설교의 중심에는 회개가 있다. 그리고 제대로 이해한 회개는 참으로 공격적이다. 예수님은 제자가 되려는 무리에게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마 16:24). 거기에는 그 어떤 조건도 붙을 수 없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당신의 삶에서 예수님과 경쟁하는 모든 것에서 기꺼이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할리우드의 연예계에서 일하던 동성애자 베켓 쿡은 (앤디 스탠리가 내게 추천한 책에서!) 자기를 부인하라는 예수님의 요구가 그의 영혼에 얼마나 상처를 입혔는지를 설명한다. “내가 평생 들었던 교훈은 나 자신에게 진실하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으면서 그는 전혀 다른 세상을 보았다. [자아가] 이미 죄로 부패했는데 왜 거기에 진실해야 합니까? [섹슈얼리티 선택에 관한] 모든 생각은 자아를 높이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나를 나의 신으로 만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나와 나의 욕망을 올려놓고 숭배합니다. 그렇기에 내게 진실하다는 것은 우상 숭배와 다를 바 없습니다.회개는 단지 대체 성(alternate sexualities)의 배후에 있는 전제뿐 아니라 우리 시대의 전체 정신을 뒷받침하는 전제인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무엇이 나에게 가장 좋은지 압니다”라는 전제의 부인을 의미한다.뉴욕의 시러큐스 대학교에서 문학 및 여성학 교수로 일하던 중에 복음을 처음 접한 레즈비언 로자리아 버터필드(Rosaria Butterfield)는 회개의 진정한 초점은 동성애 또는 다른 특정한 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핵심은 교만이다. “교만한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독립해서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원할 때 원하는 것을 할 자격이 있다고 느낍니다.”회개하라는 외침은 단지 동성애자에게만 불쾌감을 주는 게 아니다. 우리 모두를 불쾌하게 하는 공격이다. 이 세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우리는 동성애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바로 따르고 있는가?”는 그리 시급한 질문이 아니다. 진짜 근본적인 질문은 따로 있다. “우리는 정말로 제대로 된 회개의 메시지를 전파하고 있는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겠다고” 결단한 사람이라면, 어떤 특정 사안을 놓고 포기하는가의 문제는 훨씬 덜 중요해진다. 섹슈얼리티, 성 문제를 이슈에서 제외하지 않는다면 다음 세대가 교회를 찾지 않을 것이라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그건 번지수를 잘못 찾은 고민이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교회에 와서 앉아있는 다음 세대이다. 우리는 이미 그들을 잃었다. 교회는 차고 넘치는데 마지막 날에 우리 모두가 예수님으로부터 듣게 될 말이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나를 떠나가라”(마 7:23)가 된다면, 세상에 이것보다 더 두려운 일이 또 있을까?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은 넓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다(마 7:13-14)는 말씀은 참으로 진리이다. 생명의 문은 그리스도의 배타적인 주장만큼이나 좁고, 자기 부인만큼 어렵고, 또 십자가를 지는 것만큼 힘들다. 일단 당신이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겠다고 결심하고 길을 나서면,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중에 만나는 모든 어려움은 훨씬 덜 중요해진다.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 게 음란물에 대한 욕망, 명성을 갈구하는 마음 또는 선교사가 되고 싶지 않은 두려움이건 관계없이,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에 온전히 항복 선언을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온전히 따르겠다고 결단하는 것이다. 이는 말 그대로 내 의지에 대한 완전한 죽음을 필요로 한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선언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음행을 하는 사람들이나 … 여성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나, 동성애를 하는 사람들이나 …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고전 6:9-10).동성애라는 죄가 바울이 나열한 유일한 죄는 아니지만 그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이건 단지 “동성애 정죄 구절”이 아니다.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경고의 말씀이다. 그렇기에 이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지금 세대에 가할 수 있는 가장 큰 불친절이 될 것이다(겔 33:8).바리새인이 모세의 율법을 오용하여 사람들을 잘못 인도한 것처럼 이 구절도 오용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잘못은 말씀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있다. 모세가 말했듯이, “율법은 단지 빈 말이 아니라, 바로 당신들의 생명입니다”(신 32:47).이 문제에 관해서 모호한 태도를 취하는 게 친절이 아니다. 진짜 친절함은 명확함이다.선교사와 옹호자를 구분한 그린의 말로 돌아가서, 교회는 선교사와 정통 옹호자 모두가 다 필요하다. 모든 교회는 이 두 가지를 다 동일하게 강조해야 한다. 리차드 러벌리스(Richard Lovelace)는 이것을 우리 몸의 적혈구와 백혈구 숫자와 비교했다. 백혈구가 너무 많아도(백혈구 증가증) 죽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적혈구가 너무 많아도(적혈구 증가증) 죽는다. “적혈구”(전도 열정)로만 충만한 교회가 되려는 것은 “백혈구”(교리적 충실도) 중심의 교회가 되려는 것만큼이나 건강하지 않다.그러나 놀랍게도 교리적 충실도와 전도 열정은 서로에게 가장 좋은 친구이다. 성경에 충실할수록 이웃에 대한 사랑과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겠다는 열망이 커지기에 교리적 충실성은 자연스럽게 전도 열정을 낳는다. 출석 교회가 추구하는 교리적 충실도가 전도하려는 당신의 열정에 찬물을 끼얹는다면, 당신은 지금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큼 올바른 교리를 배운 게 아닐 수도 있다. 성경 전체를 제대로 이해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사랑과 자비와 은혜가 넘치게 되고, 무엇보다 긴급한 전도 열정에 불타게 된다. (2)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셨다어두움이 이기지 못한 빛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다(요 1:5, 14). 요한은 진리 앞에 은혜를 두었는데, 그건 절대 우연이 아니다. 스탠리가 상기시켜 주듯 예수님은 은혜로 인도하신다. 진리를 말씀하실 때도 먼저 은혜로 모든 사람을 포용하고 가까이 끌어주신다. 예수님은 실로 은혜로 충만하여 불신자가 그의 주위에 쉬지 않고 모여들었다. 그런데 예수님을 닮으려는 우리 교회 주변에는 왜 불신자들이 모이지 않는 건지 스스로 질문해야 한다. 예수님은 진리로 가득하셨기에 모든 종류의 죄인이 하나가 되어 그분을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일제히 외쳤다. 예수님은 겉멋에 빠진 구도자(would-be seekers)라면 외면할 수밖에 만드는 어려운 말씀을 하셨으며, 심지어 제자들조차 그분이 무엇을 향해 나아가시는지에 관해서 어리둥절하게 만드셨다(마 19:25).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던 예수님의 능력의 원천은 충만한 은혜와 진리였다. 예수님만이 유일무이하게 완전히 진리로 가득한 사람, 또 완전히 은혜로운 사람이었다. 진리와 은혜라는 개념은 “균형”을 이루기 위해 그분의 본질 안에서 다투기는커녕 오히려 놀라울 정도로 서로 완벽하게 일치했다. 예수님이 완벽하게 진리로 가득하지 않았다면, 은혜롭지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완전히 은혜롭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완벽하게 진리로 가득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이 두 가지 중 하나에 끌리는 경향이 있다. 근본주의자는 은혜 없는 진리를 좋아한다. 자유주의자는 진리 없는 은혜를 좋아한다. (비록 복음적 의미에서 은혜는 율법의 설교를 필요로 한다.) 효과적인 복음 전파자가 되려면 이 두 가지를 모두 다 갖춰야 한다. 근본주의자보다 더 진리로 충만해야 하고, 자유주의자보다 더 너그러워야 한다. 그럴 때만 우리는 예수님처럼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고, 그럴 때만 그분처럼 세상을 이기기 위해 그들을 다시 세상에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세상과 육체와 마귀를 이기는 건 교묘하며 애매모호하게, 유행에 따라서 포장한 복음을 통해서가 아니라고(물론 상황화가 중요하긴 하다) 요한은 상기시킨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사랑으로, 내 생명도 아끼지 않을 정도의 사랑으로 극복한다(계 12:11). 즉, 우리가 메시지와 삶을 통해서 예수님보다 더 중요한 권세, 그분보다 더 가치 있는 소유물이 없다는 사실을 온전히 드러낼 때, 우리도 예수님처럼 세상이 멈출 수 없는 존재가 될 것이다. 헤롯 앞에 선 세례 요한은 동생의 아내와 동침하는 죄, 즉 왕족 사회에서 쉽게 받아들여지는 성적 난잡함을 지적했다. 헤롯은 요한의 머리를 잘랐고, 마태는 요한의 지적이 처형 명령의 원인이 되었다고 말한다. 오늘날 목회자 중에는 세례 요한에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는 건 아닐까? “세례 요한, 이 사람아, 좀 살살 말하지 그랬어. 왜 그렇게 딱 까놓고 말을 해? 개방 결혼에 관해서도 확실하게 “인정한다” 또는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딱 잘라서 말하는 건 지혜롭지 않아. 그러지만 않았다면, 자네 사역은 말할 것도 없고 머리도 날아가지 않았을 거 아니야? 게다가 누가 알아? 헤롯하고 궁정 사람들의 마음도 다 사로잡았을 수도 있잖아? 결국 성적인 죄를 설교하겠다는 당신 고집 때문에 전도의 기회를 놓친 거야. 헤롯하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 영혼을 당신이 어떻게 책임질 건데?” 그런데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판결은 뭘까?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마 11:11).포로 생활을 하고 있던 다니엘은 다리오 왕 외에 누구라도 기도하면 처형당할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다(다니엘 6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바로 그날 오후에 집으로 돌아가 이전과 마찬가지로 창문을 열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했다. 누군가 이렇게 말하고 싶지 않을까? “오, 다니엘, 창문 열지 않고도 얼마든지 기도할 수 있어! 성경에 꼭 창문을 열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없어.” 그러나 다니엘은 지금 진짜 중요한 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창문을 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Godship)을 훼손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문화의 권위가 하나님의 권위보다 더 구속력 있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다니엘은 창문을 열고 예전처럼 기도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순간을 사용하여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셨다. 동성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우리의 후퇴가 이 세상을 향해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에 관해 어떤 메시지를 던지는가? 물론 그 문제를 굳이 꺼내지 않고 또 전혀 설교하지 않으면서도 당신은 얼마든지 일관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다. 창문을 모두 닫고 방안에서 조용히 순종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결코 사자의 입을 막은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 LGBT+ 커뮤니티의 선교사가 되고 싶은 욕망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이런 주제에 관해서 설교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들에게 다가가는 선교사가 되고 싶다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다면 반드시 설교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어둠이 깊어도 그 어둠이 결코 이길 수 없는 빛이 숨어있다고 나는 믿는다.이야기 하나로 마무리하자. 몇 년 전, 한 레즈비언 커플이 우리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몇 달 후 두 사람 중 한 명이 나와 약속을 잡았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조언이 필요합니다. 몇 달 전 예배가 끝날 때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해 목사님과 같이 기도했는데요. 지금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교회를 출석하면서 매주 만나는 하나님이 너무 좋아서 아내까지 데리고 나왔습니다. 아내가 목사님에 관해서 조사를 했고, 이 교회가 동성애가 죄라고 믿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아내가 그러더군요. “나는 그 교회 안 갈 거야. 우리 삶에서 하나님을 원한다면, 그래 좋아. 하지만 다른 교회를 찾자고. 우리를 받아주는 교회 말이야.’ 그래서 아내가 랄리에서 자유주의 교회를 하나 찾았고, 우리는 같이 다니기 시작했습니다.”그녀가 말을 이어갔다. “한 달 정도 참석하고 나는 아내에게 이 교회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말했어요. 그러나 서미트교회에는 하나님이 계신 게 확실하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만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은 서미트교회로 가거나, 우리를 받아주는 사람들이 있지만 하나님이 없는 이 자유주의 교회를 계속 다니거나. 나는 아내한테 말했어요. ‘당신도 원하는 대로 해. 난 하나님이 계신 교회로 갈래.’” 그녀는 세례를 요청했고 결혼 관계를 끊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시작했다. 얼마 후 우리는 그녀에게 세례를 베풀었다.반년이 조금 더 지났다. 그녀의 전 아내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 전 아내가 말했다.아내가 세례를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내가 집을 비운 어느 주말에 용기를 내서 당신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당신이 동성애 주제를 꺼냈을 때, 나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맞아. 바로 이런 게 이 편협한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소리지. 동성애에 집착한 사람들, 한 십 분만 듣자. 저 인간이 말하는 온갖 혐오스러운 말을 잘 정리해서 아내한테 말하자. 이 교회는 결코 우리가 다닐 곳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하자.’지난 오 년 중에 아마도 내가 동성애라는 주제 하나만을 놓고 확실한 메시지를 전한 적이 딱 한 번 있었던 거 같다. 그녀가 온 바로 그 주일이었다. 그녀가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한 십 분쯤 지나니까, 내가 ‘혐오’라고 제목을 붙인 난에 쓸 내용이 하나도 없는 게 아니겠어요? ‘아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그날 설교는 내가 살면서 들어본 것 중에서 가장 사랑에 넘치는 반동성애 메시지였습니다. 그 이후로 나는 매주 온라인으로 예배에 참석하고 있어요.” 그녀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당신이 말하는 게 다 진리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삶 속에 모시고 싶어요.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몇 주 후, 우리는 그녀가 세례의 물가에 서서 외치는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고백을 목격하는 특권을 누렸다. 그녀가 말했다. “나 때문에 메시지를 바꾸지 않아서 고맙습니다. 성경이 동성애에 대해서 말하는 진리가 무엇인지 나와 내 파트너에게는 항상 분명했습니다.”이제는 창문을 활짝 열고 얼굴을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향해 두 손을 들어야 할 때이다. 두려워하지 말자. 사자의 입을 막으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실 것이다. 움츠리지 말자내기 이 글을 쓰는 건 앤디 스탠리의 사역을 자세하게 분석하거나 최종 평결을 내리기 위한 게 아니다. 스탠리와 나는 둘 다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고, 최종 판결은 그날 알게 될 것이다. 나의 의도는 이 세대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우리가 불신앙으로 물러서지 말자는 것이다. 믿음으로 전진하여 사도 바울이 자신의 시대에 외친 말씀을 우리는 우리 세대에 외치자는 것이다. 바울이 뭐라고 했는가? 우리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노라(행 20:27). 우리가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모든 사람을 훈계하였노라(행 20:31). 우리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믿음을 지켰으며, 마침내 믿음의 경주를 마쳤노라(딤후 4:7).원제: Downplaying the Sin of Homosexuality Won’t Win the Next Generatio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동성애
다음세대
전도
생명의 소리를 기다린다
by 이재훈
2023-02-16
몇 개월 전 늦은 나이로 군에 입대한 아들 면회를 다녀왔다. 비교적 후방 부대임을 감안하더라도 곳곳에서 들려야 할 젊은 군인들의 소리가 거의 없이 조용하였다. 아들은 자신이 그 중대에 몇 개월 만에 온 신참병이라고 하였다. 면회를 마치고 아내와 함께 아들을 위해 기도를 해줄 때 아들은 ‘신병 좀 오게 해 달라고 기도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대한민국 저출산의 위기가 학교만이 아니라 군부대에까지 피부로 느끼게 되는 상황이다. 대도시까지도 신입생이 전혀 없는 학교들이 나타나고 있고, 2023년에는 전국적으로 신입생이 한 명도 없는 초등학교는 147개교에 달한다. 소아과 병원이 부족하고 소아과 의사 지망생이 거의 없어지는 상황이다. 신생아의 울음소리는 한 가정의 기쁨의 소리이자, 한 나라의 소망의 소리이다. 생명의 소리를 듣기 어려워진 나라의 미래는 절망이다. 저출산으로 무너진 국가는 회생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역사의 법칙이다. 국가의 정책으로는 돌이키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해진 대한민국 저출산의 위기는 국가 공무원 조직에서 제시하는 정책에만 기대할 것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경제문제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중요한 문제로 여겨야 비로소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최근 튀르키예와 시리아에서 일어난 대지진으로 인한 피해 상황은 전 세계인의 마음을 애태우고 있다. 수많은 이들의 희생 앞에서 생명의 소중함을 다시 뼈저리게 절감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인간들이 쌓아 올린 거대한 탑들이 탐욕에 눈이 어두워 생명을 지키는 데 무관심한 선택들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고 후회하고 있다. 지난 2월 12일 경향신문에는 튀르키예 남부 안타키아의 한 건물 폐허에서 구조 활동 중인 한국 해외긴급구조대원들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취재 기자는 포크레인과 드릴, 망치 등으로 인한 굉음과 소음이 계속되는 가운데서도 이따금 고요한 멈춤의 시간이 찾아온다는 것에 주목하였다. 지진 피해 현장에서 생존자를 확인하는 마지막 순간들이다. 생존자가 낼지 모르는 ‘희미한’ 소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모든 소음을 멈추고 침묵과 고요한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도와 달라고 외칠 힘도 사라져버린 피해자들은 숨소리마저 연약할 것이기에 작은 숨소리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생명이 들려주는 소리가 마지막 희망의 소리이기 때문이다. 이 처참한 대재난으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자명해졌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이며, 우리가 진정 귀 기울이며 기다려야 할 소리 역시 생명의 소리라는 사실이다. 이 재난을 통해 생명을 지키는 안전을 뒷전으로 여기는 일이 죄임을 깨닫고 각성해야 한다. 모태에 있는 태아의 생명을 죽이는 죄를 양심의 가책 없이 수없이 범해 왔음을 회개해야 한다. 초음파에서 확성기로 듣게 되면 쿵쾅거리며 뛰는 태아의 심장 뛰는 소리가 얼마나 소중한 생명의 소리인지 절감해야 한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사망자나 지진 재난으로 인한 사망자보다도 비교할 수 없는 생명이 낙태로 죽어가고 있음을 회개해야 한다. 지진 재난 현장에서 한 생명의 숨소리에 귀 기울이며 생명을 구하듯이 생명의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말세의 징조로 전쟁과 기근과 지진이라고 말씀하셨음(마 24:7-8)을 기억하고 영원한 생명을 전하는 일에 더욱 힘써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말세에도 생명의 소리를 기다리는 이들을 통해서 구원의 일을 계속 행하실 것이다.
생명
재난
튀르키예
생명의소리
지진
민족 지도자의 산실로 서다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새문안교회
by 이종전 · 장명근
2023-02-15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대한 강토에 선 첫 세대 교회들을 찾아 떠납니다. 그 이야기들에서 우리 신앙의 근원과 원형을 찾아보려 합니다.한반도에 복음이 전해 들어온 루트는 단순하지 않다.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있게 하는 증거가 다름 아닌 새문안교회라고 하면 어떻게 생각할는지. 새문안교회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집에서 모임을 시작했기 때문에 그 출발이 언더우드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새문안교회의 출발은 그 이전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것은 언더우드가 이 땅에 선교사로 입국하기 이전에, 이미 만주에서 조선을 선교하기 위해서 활동하고 있었던 로스(John Ross) 선교사가 중심이 되어 한글 성경을 최초로 번역할 때이다. 로스는 조선인들(이응찬, 백홍준, 이성하, 서상륜)을 통해서 1876년부터 우리 말과 글을 익히면서 그들을 전도했고, 동시에 성경 번역을 시도했다. 또한 로스의 매부인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 선교사가 1879년 조선인들에게 세례를 주어 최초로 세례교인이 탄생했다. 1881년까지 로스는 우리말 신약 성경 전체의 초벌 번역을 완성했다. 하지만 그중에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서 번역을 다시 살펴보면서 수정했고, 1882년 봄에 출간했다.그러나 번역한 성경을 출판하기까지는 난관이 많았다. 그것은 한글 활판이 없었고, 인쇄 기술자도 없었기 때문이다. 로스는 그러한 준비까지 해야만 했고, 그 과정이 순탄하지 않았기에 많은 시간이 걸렸다. 따라서 번역을 시작해서 비록 완역은 아니더라도 쪽복음서가 나오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말 성경의 효시가 되었고, 초기 전도 문서로서의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복음서가 출판되자 로스는 그것을 초기 번역에 동참했던 조선인들에게 들려서 고향으로 돌아가서 전하도록 했는데, 그것이 국내 복음 전파의 효시가 되었다. 이것은 선교사들이 국내에 입국해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기 이전의 일로써 새문안교회가 탄생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새문안교회는 언더우드의 집에서 시작되었지만, 동시에 그 공동체는 언더우드의 입국 이전에 서상륜에 의해서 장안에 복음이 전달되었고, 그 가운데 개종한 사람들이 있음으로 이미 형성되었던 공동체였다. 서상륜은 정동에 머물고 있던 언더우드를 찾아가서 자신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가 있음을 알렸다. 하지만 당시 공식적인 기독교의 집회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언더우드는 그들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여서 예배를 드리면서 공동체를 세워감으로써 오늘의 새문안교회가 되었다.그러한 의미에서 새문안교회는 언더우드가 입국하기 이전에 내국인에 의해서 형성된 공동체였고, 언더우드가 입국하여 지도자가 됨으로써 1887년 9월 27일 한국 최초의 조직 교회, 곧 당회를 구성한 교회가 되었다. 이것은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단계의 한국 선교인데, 새문안교회는 장로를 세우고 교회로서 기능을 할 수 있었다는 의미이다. 이때 서상륜에게 복음을 전하고 성경 번역의 주역이었던 로스 선교사도 참석하였다. 그 이후 언더우드는 조선에 이미 공동체가 있음을 확인함으로써 순회 전도를 나서서 황해도 장연의 소래(松川)을 찾아가 그곳에 형성된 공동체에서 세례를 베풀기도 했다. 언더우드는 의료선교사로 온 엘러스(Bunker Annie Ellers)와 함께 여학당을 시작했다. 이것이 후에 정신여학교로 발전했다. 그 과정에는 많은 어려움과 일시적인 단절도 있었지만 정동 안에서 감리교 선교부가 설립한 학교들과 함께 장로교 선교부의 학원 선교의 중심이 되었다. 이렇게 정동에서 시작된 언더우드의 사역은 한국 교회사에서 최초라는 수식을 붙이게 되는 다양한 일을 전개했다. 그리고 그의 사역 중심에는 언제나 새문안교회가 있었다. 그는 1885년 4월 5일 아펜젤러와 함께 제물포에 도착했지만, 서울에 입경한 것은 언더우드 혼자였다. 아펜젤러는 갑신정변의 후유증이 아직 아물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외국인이, 그것도 여자가 서울에 들어간다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그러한 판단은 아펜젤러 개인이 한 것이 아니라, 미국 대리공사인 포크(George C. Foulk)가 아펜젤러 부부의 서울 입경을 만류한 결과이다. 따라서 아펜젤러 부부는 4월 13일 일본의 나가사키로 돌아갔으며, 언더우드 혼자서 서울에 입경하여 정동에 자리를 잡았다. 따라서 그가 선교사의 신분으로 정동에서 행한 대부분의 것은 최초가 되었다. 예를 들어서 공식적으로 그의 집에서 예배를 드린 것이다. 그보다 6개월 남짓 먼저 와서 활동하고 있었던 알렌 선교사, 그리고 언더우드보다 한 달후에 입국한 감리교 선교사인 스크랜턴 가족 등과 함께 1885년 7월 5일에 자신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비록 조선인은 참여할 수 없는 예배이지만 조선의 중심지 정동에서 처음으로 예배를 드렸던 것이다. 이렇게 정동에 자리를 잡으면서 당장 우리말을 배우는 것을 시작으로 그의 사역은 알렌을 도와서 제중원 의학반에서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거리에 일정한 거처도 없이 돌아다니는 고아들이었다. 자신의 어학 선생의 소개로 특별히 한 사람을 고용해서 장안의 고아나 걸인의 형편을 알아보도록 했다. 그 사람이 한 명의 고아를 데리고 온 것을 계기로 1886년 5월 11일 고아원 개원 예배를 드렸다. 감리교회의 아펜젤러도 참여했던 이 개원식에 이어서 고아원은 이내 여러 명의 고아가 모여들었다. 이 고아원은 단지 고아들을 수용하는 시설이 아닌 아이들을 교육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학교로 발전했다. 그것이 경신학교이며 사실상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이렇게 정동에 자리한 언더우드의 집과 사랑채, 그리고 새로 마련한 건물들을 통해서 고아원과 학교를 동시에 시작함으로 우리나라 근대교육과 보육시설을 출발시켰다. 공식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없었지만, 아이들을 돌보며 가르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선교사로서 큰 보람이었을 것이다.언더우드가 살고 있던 바로 옆집을 예배당으로 하여 예배 모임을 인도하면서 우리말을 익히던 언더우드는 우리말 사전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한영자전’을 편집함으로써 우리말 발전과 외국인들이 우리말을 배움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도구가 되게 했다. 또한 우리말 성경이 필요함을 절감하면서 성경 번역을 주도하는 중심에 섰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의 집은 사실상 한국 선교본부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초기 성경 번역 위원들 모임도 그의 집에서 시작했고, 선교사 공의회가 결성되는 과정에서도 그 중심에 언더우드와 새문안교회가 있었다.국내에서 실시된 최초의 유아 세례도 새문안교회가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1888년 4월 25일 서경조의 아들 서병호에게 세례를 행함으로써 최초의 유아 세례자가 되었다. 물론 새문안교회가 설립되기 전인 1886년 7월 18일 주일에는 국내 최초의 세례교인이 언더우드에 의해서 탄생했다. 1884년 봄 어느 날 알렌 선교사의 집에서 우연히 접한 한문 성경(마가복음, 누가복음)을 발견한 노춘경이라는 사람이 성경을 밤새워 읽고 개종을 결심한 후 이튿날 아침 언더우드를 찾아왔을 때, 그에게 기독교 교리서를 주어 읽게 했다. 5, 6개월이 지난 후 자원하여 세례를 요청했고, 언더우드는 그에게 세례를 시행함으로써 국내 최초의 세례교인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일들이 있게 되면서 언더우드는 당장 복음을 전하거나 교회를 세우는 일은 어렵지만 교회 설립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새문안교회를 생각하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이 교회가 배출한 걸출한 민족의 지도자들이다. 그 첫 번째는 도산(島山)이다. 안창호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낯이 설다. 하지만 도산을 개종시켜 민족의 지도자로 서도록 하는 데는 새문안교회의 장로로 장립을 받은 송순명 장로의 공이 컸다. 그는 일찍 부모를 잃고 장안에 떠돌아다니던 고아였다. 그러한 그가 12살 되던 해인 1887년 언더우드가 개설한 고아원(학교)에서 자라나 이 교회의 장로가 되기에 이른다. 사실 새문안교회는 1887년 우리나라 최초의 조직교회가 된다. 이 때 장립한 장로 두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의 이름은 지금까지 알 수 없고, 또한 당시 장립한 장로는 실제로 새문안교회에서 활동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따라서 실제로 첫 번째 장립된 장로 두 사람이 있었고, 송순명 장로는 두 번째로 장립된 세 번째 장로인 셈이다. 그는 신실하고 성경에 관한 지식이 출중해서 한국교회 초기 권서인으로 활동을 하면서 복음전도의 공헌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한 그가 도산을 개종시킬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섭리였다. 도산은 1895년 청일전쟁이 평양에서 발발하자 전쟁을 피해서 서울에 왔다가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마침 당시 민노아 학당을 맡고 있던 밀러(F. S. Miller) 선교사가 “누구든지 배우고 싶은 사람은 우리 학교로 오시오. 먹고 자고 공부를 거저 할 수 있소!”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 찾아들었는데, 그곳에서 송순명 장로는 안창호를 만났고, 송 장로는 안창호를 끈질기게 전도하여 예수님을 믿게 했다. 그 후 안창호는 송장로와 함께 영신학교 접장(교사)이 되어 민족의 미래를 위한 헌신을 다짐하게 되었다. 시기에 따라 원두우 학당, 민노아 학당, 예수교 학당(통칭 구세학당) 등으로 불린 언더우드의 고아원은 나중에 새문안교회가 운영하는 영신학교가 된다. 이 학교는 새문안교회가 1895년에 설립한 학교로 학교운영비의 50%는 새문안교회 성도들의 헌금으로 충당했는데, 언더우드의 예수교 학당(1897년 폐교)이 지속되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 학생들까지 받아들이기도 했다.새문안교회 역사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사람이 또 있다. 그것은 우사(尤史) 김규식이다. 김규식은 새문안교회 장로로 장립을 받아 언더우드의 비서 역을 감당하다가 훗날 독립운동가로 활동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이념 갈등이 깊어졌을 때 민족주의 노선에 서서 좌우합작운동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그런데 이 김규식 장로는 여섯 살 때부터 새문안교회에서 성장해서 장로까지 된 사람이라는 점에서 진정한 새문안교회 사람이다. 그는 1881년생으로 그가 여섯 살 때인 1887년에 고아원에 입양되면서 새문안교회에서 유년기, 청소년기, 청년기까지 성장했다. 그리고 1910년 12월 18일 만 29세에 장로 장립을 받았다. 고아로 언더우드의 손에 이끌려 새문안교회에 발을 들여놓은 김규식은 총명했다. 언더우드는 그를 1897년 미국 버지니아의 로녹대학(Roanoke College)에서 유학을 할 수 있도록 했다. 1903년 졸업한 그는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1905년에 돌아왔다.당대에 흔하지 않은 유학파 재원이기에 그에게는 많은 역할을 요청하는 유혹이 있었다. 하지만 자신을 키워준 언더우드의 비서 역을 자처하면서 새문안교회를 섬기면서 경신학교 교감, YMCA 학생부 간사, 배재전문학교 영어 강사 등을 하면서 교육과 계몽운동에 힘을 썼다. 주어진 일에 충실한 그의 모습은 새문안교회에 장로로 세움을 받기에 충분했기 때문에 한일병탄이 있었던 1910년 말에 장로로 장립을 받았다. 장로가 된 후 당회 서기로 섬기면서 새문안교회를 이끌었다. 하지만 1913년 망명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상해로 떠남으로써 더 이상 새문안교회 장로가 아닌 민족지도자, 독립운동가로 이름을 남겼다.새문안교회는 또 한 사람의 민족 지도자를 배출했다. 그는 한국 교회사에서 최초로 유아 세례를 받은 송암(松巖) 서병호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는 소래교회를 설립하는 데 주역이었던 서경조의 아들로 언더우드에게서 유아 세례를 받았다. 그는 1887년 서경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세례를 받은 후 소래교회에서 성장하여 여덟 살이 되던 1893년 새문안교회가 직영하고 있던 영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 상경했다. 1905년 이 학교를 졸업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서 해서제일학교, 평양 대성학교 등에서 교사로 봉사했다. 그러던 중 언더우드의 요청으로 1909년 모교인 경신학교의 교사와 학감으로 봉사했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김규식과 마찬가지로 단지 새문안교회의 일꾼으로 만족하지 않고, 미래 조선의 지도자가 되어야 할 사람으로 알아 중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하지만 시국이 시국인지라 중국 상해에서 서병호는 1918년 김규식, 여운형, 선우혁 등과 함께 신한청년단을 조직한 후 자신이 당수에 취임하여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몰래 파송하였다. 1919년 4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과 상해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핵심적인 활동을 했다. 임시정부 산하에 대한적십자회를 창설하는 등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을 맞아 1947년 귀국하여 다시 새문안교회 장로로 봉직하면서 YMCA 전시비상대책위원장, 경신학교 이사장, 경신중학교 교장직 등을 수행하면서 독립한, 그러나 폐허가 된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 교육과 계몽의 현장에서 수고를 이어가다가 1972년 별세했다.이렇게 새문안교회는 민족의 지도자를 배출하여 독립과 계몽, 국가의 재건을 위한 큰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했다. 이들 외에도 사회, 학계, 문화계 등의 많은 지도자를 배출하여 대한민국의 복음화와 문화와 경제의 발전에 이바지하게 함으로써 대한민국 국민이 잊어서는 안 될 발자취를 남겼다. 현재 새문안교회 예배당은 2019년 새롭게 지어서 입당했다. 현재의 새문안교회라는 이름이 사용되기까지 정동예배당, 정동교회, 신문내제일예배당, 서대문교회 등으로 불리던 것을 1910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면서 새문안교회로 명칭을 바꾸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새문안교회역사관에서 촬영한 이종전 교수와 장명근 장로의 영상도 보실 수 있습니다.
새문안교회
언더우드
아펜젤러
한글성경번역
존로스
반즈앤노블의 반전에서 교회가 배워야 할 교훈
by Trevin Wax
2023-02-14
2020년대, 오프라인 서점이 생존은 말할 것도 없고 잘될 거라고 예상한 분석가는 거의 없었다. 전망 좋은 비즈니스로 페이스북, 넷플릭스 크립토(Crypto) 또는 테슬라와 같은 디지털 회사를 꼽는 건 당연한 선택이다. 그러나 테드 지오이아(Ted Gioia)가 지적한 것처럼, 136년 역사를 가진 도서 소매업체 반즈앤노블(Barnes & Noble)이 재도약을 시작하였고, 반면에 놀랍게도 디지털 미디어가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반즈앤노블의 성공은 “가장 오래된 기술인 인쇄된 책을 수용”함으로 이뤄졌다. 반즈앤노블은 지금 수익을 내고 성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마존이 오프라인 서점을 열었다가 실패한 곳을 포함한 여러 곳에 새로운 매장까지 내고 있다.서점의 몰락불과 몇 년 전 이 회사의 상태를 아는 사람에게 이 뉴스는 놀라울 수밖에 없다. 지오이아의 말이다. “반즈앤노블의 오프라인 경쟁업체인 보더스(Borders)가 2011년에 완전히 문을 닫은 후에도 반즈앤노블은 여전히 상황을 타개할 전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2018년에 이르러서는 사실상 회사가 완전히 붕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해에만 무려 1,800만 달러의 손실을 입었고, 정규 직원 1,800명을 해고했다. 거의 모든 매장이 시간제 직원으로 운영되었다. 같은 시기에 회사는 성희롱 혐의로 대표이사를 해고했다. 한마디로 회사의 모든 지표가 비참했다. 점포 매출은 곤두박질쳤고, 온라인 판매도 저조했다. 주가는 무려 80퍼센트 넘게 하락했다. 게다가 회사가 디지털 시대를 선도하리라고 기대했던 야심작, eBook 단말기 눅(Nook)은 무려 90퍼센트 넘게 매출이 감소했다.”말 그대로 보더스를 산산조각낸 아마존은 누가 봐도 승자였다. 반즈앤노블에 남은 것은, 글쎄 오프라인 서점 정도인데, 그래봐야 공간을 채우는 건 장난감, 달력, 카드, 커피숍 정도였다. 이런 회사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지오이아는 CEO로 취임한 제임스 던트(James Daunt)의 리더십을 지적한다. “리더 한 사람이 얼마나 큰 차이를 만들 수 있는지, 놀랍기만 하다. 나는 이런 놀라운 리더를 몇 명 직접 목격했고, 이제 일종의 법칙을 만들게 되었다. 지도부의 올바른 결정보다 중요한 것은 없으며, 마찬가지로 지도부가 저지른 어리석은 결정에 대한 해결책도 없다는 것이다. 정말로 간단한 법칙이다. 회사 전 직원이 아무리 지혜를 모으고 밤을 새우면서 노력해도 CEO가 저지른 어리석은 실수를 만회할 길은 없다는 것이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언제나 맨 위에서 시작해야만 한다.”역전의 시작반즈앤노블에 오기 전에 던트는 내가 영국에서 가장 좋아하는 서점 중 하나인 워터스톤즈(Waterstones)를 회생시키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혈관 속에는 책 판매의 노하우가 흐르고 있다. 던트는 스물여섯 살 때 런던에서 서점을 하나 운영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는 서점 전체를 한마디로 “책 진열장”으로 바꾸었다고 지오아이는 설명한다.던트는 기존 규칙을 따르지 않았다. 그는 결코 책이 비싸다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대폭 할인을 하지 않았다. 무료로 책을 나눠주는 법도 없었다. 그런 행위 자체가 책에 대한 평가 절하라고 생각해서이다. 그는 매장 직원에게 권한을 부여했다. 놀랍게도 던트는 기존의 서점 관행, 좋은 곳에 책을 진열하는 대가로 출판사로부터 받는 판촉금도 거부했다. 독자의 관심 유무와 관계없는 일방적인 진열을 의미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고객과 출판사 모두가 다 “서점이 제공하는 상품을 얕잡아 보도록 하는” 모든 요소를 거부함으로, 서점 전체를 “속물적인 방식이 아니라 지성을 살찌우는 의미에서 지적 만족을 채우는 환경”으로 만들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사랑이라는 슈퍼 파워그러나 지오이아의 분석에서 내가 얻은 핵심 내용은 다름 아니라 그가 제임스 던트의 “슈퍼 파워”라고 부르는 부분이다. 던트는 책을 좋아한다. “음악을 팔고 싶다면, 그 노래를 사랑해야 한다. 저널리즘에서 성공하고 싶다면, 신문을 사랑해야 한다. 영화로 성공하고 싶다면, 영화를 사랑해야 한다. 하지만 요즘에는 이런 사랑이 드물다.”지오이아는 창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조차도 점점 사라져가는 사랑을 슬퍼한다. 무엇보다 “구원의 힘”을 가진 책을 향한 사랑의 상실을 아쉬워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일단 사랑이 사라지면, 리더는 다른 것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 결국 현금 흐름 및 기타 비즈니스 지표를 기반으로 모든 결정을 내린다. 물론 책에 대한 사랑이 반즈앤노블이 회생한 주된 이유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단순하다. 그러함에도 이 점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책과 독자를 최우선으로 두고 다른 모든 것은 두 번째”로 간주했다는 사실이 반즈앤노블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은 확실하다. 지오이아의 말이다. “이런 사랑은 가르친다고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 사랑으로 넘치는 사람은 만나는 순간 단번에 알 수 있다. 세상에는 자기가 하는 일에 미쳐서 열광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열정과 헌신으로 올인한다. 당신은 바로 그런 사람을 찾아서 고용해야 한다. 바로 그런 사람이 당신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교회를 위한 교훈열정. 뜨거움. 헌신. 사랑.줄어드는 교인, 떨어지는 출석률이라는 현실 앞에서 슬퍼하는 이들을 위한 교훈이 바로 여기에 있다. 문화적 경향을 조사하다 보면, 교회가 말씀과 성례 대신 커피와 음악, 다양한 프로그램 등에 더 신경을 써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유혹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다 보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목회 현장 속 목회자는 예배의 인도자로서의 감각을 잃어버리고, 영적 상품을 파는 매니저로 전락한다. 마치 다양한 제품을 판매하는 슈퍼마켓을 감독하는 직원처럼 종교 진료소의 관리자가 되는 것이다. 삶은 이처럼 진짜가 “사라지는” 상황으로도 얼마든지 흘러갈 수 있다. 교회의 경우, 출석률이 증가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과연 어떤 대가를 치른 증가인가? 어느 시점에선가 교회의 진짜 목적이 사라지고, 교회의 본질은 군중을 즐겁게 하는 각종 장신구에 의해서 퇴색되었다. 반즈앤노블 CEO의 말을 빌리자면, 한 때 마치 “십자가에 못 박고 싶을 만큼 지루해져버린” 오프라인 서점 반즈앤노블처럼, 교회도 지금 진짜 존재해야 하는 목적 자체에 대한 자신감을 상실해버린 건 아닌가? 어떤 경우에도 사랑을 대신할 것은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 경배하기를 사랑하는 것, 그의 백성과 함께 하나님 경배하기를 사랑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 함께 식탁에 모여 그의 선하심을 나누길 사랑하는 것. 타오르는 사랑의 불꽃을 잃어버리는 것, 가슴 속에서 솟구치는 사랑이 아니라 종교적 공식에 급급해서 사역하는 것을 하나님은 금하신다. 동역자여, 우리는 바리스타가 아니다. 관리자, 마케터 또는 연설가도 아니다. 우리는 예배자이다. 우리의 가슴이 앞에 앉은 회중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도록 인도하는 일에 열정과 헌신으로 불타지 않는 한, 메마르고 지친 거짓 예배가 만연한 이 땅에서 교회는 결코 하나님을 경배하는 오아시스가 될 수 없다. 반즈앤노블의 반전은 교훈을 준다. 첫사랑을 기억하라. 그리고 당신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을 놓치지 말라. 원제: Lesson for the Church from the Barnes & Noble Turnaroun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반즈앤노블
영적침체
부흥
교회회복
거짓예배
프란시스 쉐퍼의 합일적 복음전도
심플리 미셔널 | Simply Missional
by 김선일
2023-02-13
심플리 미셔널Simply Missional탈교회화, 비종교화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선교 과제로서 복음을 새롭게 제시합니다. 기독교의 변증 유산으로부터 오늘을 위한 복음 변증의 지혜를 발굴하고, 현대 한국의 문화적 표현들과 복음의 대면이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프란시스 쉐퍼(1912-1984)에 대한 평가는 양가적이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스위스에 라브리를 세워 정신적으로 황폐해진 서구의 젊은이들에게 인본주의와 실존주의 사상이 인생과 사회를 얼마나 깊이 침식하고 있는지를 치열하게 설명하며 성경적 진리가 우리의 참된 존재를 발견하고 회복해준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1980년대와 90년대 한국의 그리스도인 지성인과 청년들에게도 쉐퍼는 당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도입과 더불어, 사회와 문화를 향한 복음주의적 관심을 일깨워 준 인물이었다. 실제로 쉐퍼는 라브리 사역과 기독교 진리의 실재성에 대한 강연과 저술 외에도 복음주의권에서는 선도적으로 낙태 반대 운동을 이끌었다. 그래서 필자는 최근 미국 대법원에서 낙태를 허용했던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뒤집힌 사건도 일찍이 쉐퍼가 복음주의자들에게 사회의 인본주의와 상대주의적 가치관에 대항하도록 각성시킨 노력이 맹아가 됐으리라 추측한다. 쉐퍼의 사상에 매료된 이들의 스펙트럼은 꽤 넓다. 쉐퍼는 근본주의의 사도라 불릴 정도로 진리의 절대성과 성경의 무오성을 수호하는 데 인생 후반을 바쳤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쉐퍼의 영향을 받은 이들은 신학적 근본주의나 정치적 우파 기독교에 국한되지 않는다. 좀 더 유연한 입장에서 문화와 신학의 관계를 선구적으로 연구한 복음주의 신학자들도 쉐퍼로부터 그와 같은 착상을 얻었음을 고백한 바 있다(William Dyrness, James K. Smith 등이 대표적이다). 최근에 일반 인문학뿐 아니라 신학계에서도 환대(hospitality)라는 개념이 중요하게 부각되는데, 쉐퍼의 라브리는 기독교적 환대의 모델로 신학적 진영을 넘어서 언급된다. 필자가 환대라는 개념을 처음 들은 것도 30년 전 한국에서 열린 라브리 수양회에서였다. 아직도 복음주의권은 단순히 친절한 환영이나 접대를 넘어서는 환대라는 고유한 성경적, 기독교적 덕목에 충분히 천착하지 못한 상태이다. 흥미롭게도 쉐퍼의 신학과 삶이 구현된 실체를 보여주는 책 ‘라브리’(L'Abri)를 처음 한글 번역자는 진보적이고 토착화된 신학을 추구하는 감리교 목사였다. 쉐퍼는 복음주의적 사회참여의 실천가로서 보수적 복음주의와 진보적 복음주의 모두에 영향을 주었다. 쉐퍼의 사상적 유산은 현대문화와의 예리한 긴장을 강조하는 세계관 운동가들에게로 계승됐지만, 또한 현대문화를 이해하는 가운데 복음을 소통하려는 더욱 유연한 기독교 지성인들에게도 지울 수 없는 영감이 된 것이다. 이처럼 쉐퍼가 다양하게 해석되고 수용됨에도 불구하고, 그를 아는 이들이 공통으로 매력을 느끼는 점은 그가 라브리 공동체로 맞이하고 그들과 인격적인 대화를 나누며 기독교의 진리를 증언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필자는 연구, 대화, 식사, 산책, 예술, 자녀교육과 같은 모든 삶의 영역에서 진리를 구현한 라브리 공동체를 건너뛰고 쉐퍼의 변증과 전도를 사상으로만 접근하는 것은 반쪽 이해에 그친다고 본다.쉐퍼의 지성적 변증쉐퍼는 루이스와 더불어 20세기에 가장 빛나는 기독교 변증의 대표주자들이다. 사실 쉐퍼와 루이스는 신학적 전제(루이스의 신화적 성경관 vs. 쉐퍼의 성경무오설)에서는 다른 관점을 가졌지만, 인간과 문화에 대한 접근에서는 가족적이라 할 만큼 유사성을 보인다. 필자가 처음 루이스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쉐퍼를 통해서였다. 쉐퍼의 예술적 창의성과 상상력에 영감을 준 이가 C. S. 루이스였고, 그의 책들은 라브리의 서재에서 많은 추천을 받고 있다. 기독교에 대한 지성적, 문화적 변증은 이 두 사람의 공통분모가 된다. 쉐퍼는 루이스에 비해서 더욱 명료하게 개혁주의와 복음주의 신앙을 견지했지만, 그렇다고 경직된 교리주의로 흐르지 않고 생동감 있는 영적 실재성(spiritual reality)을 강조한 점에서 루이스와 또 다른 유사성을 갖는다(이에 대해서는 “C. S. 루이스에게 배우는 정감적 전도”를 참고하라). 케빈 포드(Kevin G. Ford)는 새로운 세대를 위한 복음전도의 방향을 논하면서, 쉐퍼의 책(The God Who Is There)은 기독교의 진리 됨을 증명하는 데 역점을 두는 베이비붐 세대의 전형적인 변증 방식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새로운 세대에게는 경제정의, 인종갈등, 화해, 성문제, 젠더 문제와 같이 현재의 관심사와 연관된 기독교의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제는 증명하는 신앙(faith that proves)에서 효능 있는 신앙(faith that works)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세대가 관심을 품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이 믿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이 믿는 대로 살아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Jesus for a New Generation, IVP, 174). 물론 쉐퍼는 현대인이 진리에 대한 인식의 변화로 절대성에 대한 신념을 공유하지 못함으로 절망의 선 아래로 빠졌다는 사실을 미술, 철학, 문화, 신학 등의 사례를 들며 실증하는 데 주력했다. 게다가 그의 유명한 “지붕 벗기기”(taking roof off)라는 변증 전략은 현대인들이 받아들인 상대주의적, 회의주의적 전제로는 실제 세계와의 긴장과 모순에 놓인다는 점을 직시하도록 압박을 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쉐퍼를 지성적 변증의 프레임 안에서 보는 이러한 시각은 일견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충분하지는 못하다.쉐퍼는 라브리라는 삶의 공동체적 맥락 안에서 기독교의 진리를 변증하고 복음을 전했다. 그의 사역이 알려지면서 강연 요청을 받고, 강연 내용이 책으로 출판되면서, 그의 변증적 전제와 전략은 활자를 통해서 관념적으로 소개되었다. 하지만 쉐퍼를 체계적이고 정합성 있는 기독교 변증가로만 이해하는 것은 전후 맥락이 제거된 문장을 보는 것과 같다. 쉐퍼의 지성적 변증은 라브리라고 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가족처럼 어울리는 가족적 공동체에 차려진 식탁의 인기 있는 메뉴 중 하나였다. 그 식탁은 인생의 고민과 혼란 속에서 진리를 맛보아 알 수 있도록 섬기는 자리였고, 그 자리에서 정직한 질문과 정직한 대답이 오갔다. 추측건대 시대와 사람의 변화에 따라 맛과 메뉴도 달라질 것이다. 지적인 탐구심보다 관계의 갈망을 안고 찾아오는 사람에게도 기독교는 여전히 진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앙이 지속적으로 견고하게 형성되는 데 있어서 합리적 체계는 여전히 중요하다. 우리 세대 사람들의 절대 진리에 대한 반론과 애매모호한 의미가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려주지 않으면서 역사적 기독교의 입장을 변호할 수 있다는 기대는 비합리적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 문을 여는 데 지적인 변증이 항상 최전선에 있는 것은 아니다. 라브리의 공동체적 전도쉐퍼의 아내 이디스(Edith)가 쓴 라브리를 보면 라브리 사역의 목적을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삶과 일 속에서 증언’하는 것이라고 하며, 이를 위해 네 가지 구체적 영역에서의 기도를 한다고 한다. • 재정적, 물질적 필요를 기도로 하나님께만 아뢰고 사람에게 요청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사역에 동참케 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만을 보내주시기를 기도한다. 홍보물을 돌리지 않는다. • 미래를 계획하지 않고 날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계획대로 인도받기를 기도한다. • 하나님께서 택하신 동역자(간사)만을 보내주시기를 기도한다. 이디스는 이러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그의 목적을 신실하게 이루시는 것을 경험하기 원했고, 그가 ‘라브리’라는 책을 쓴 목적도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거의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도 거듭 기도에 응답하셔서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신 사실의 실체를 보여 주려”는 것이라고 한다(21-22). 이러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고 그분과의 깊은 교제를 누리는 것은 생각과 마음뿐 아니라 물질적인 경험 세계에서도 일어난다고 그는 믿는다. 이디스가 명토박아둔 라브리의 목적과 원리를 상기한다면, 쉐퍼의 지성적 변증은 하나님의 살아계시고 말씀하신다는 기독교의 진리를 사람들의 삶에서 영적 실재로 경험시키고 전달하기 위해서 당시에 사용했던 하나의 유력한 통로로 이해해야 한다. 라브리가 세워지고 사람들이 그곳을 찾던 당시는 전쟁 이후 서구의 많은 청년이 절대적, 객관적 진리와 가치에 대한 상실감 속에서 허무주의적 실존주의로 후퇴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쉐퍼의 변증 3부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He Is There and He Is Not Silent)과 같은 책은 현대 철학의 인식론에 대한 기독교적 비평을 다루지만, 거기에는 바로 우리와 교통하시고 우리 삶에 개입하시는 실재로서 하나님을 알고 경험해야 한다는 변증적 의도가 선연하다. 오늘날의 사람들이 정서적, 관계적, 물질주의적 갈등으로 기독교 진리와 멀어진다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언하는 방식은 쉐퍼 당대의 지성적 변증이 지녔던 비중은 조정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쉐퍼의 사상은 라브리라는 공동체적 삶의 맥락을 주목하지 않으면 온전히 이해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을 위한 쉐퍼와 그의 라브리 사역에서 전도의 교훈 두 가지를 찾는다면, 필자는 공동체적 전도와 영적 실재로서의 전도라고 생각한다. 라브리의 전도 사역 표층에는 공동체가 있고, 기층에는 영적 실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공동체는 소중하다. 특히 전통적 유대관계가 해체되고 파편화된 개인의 시대에 대안적 공동체를 세우는 일은 화급한 과제다. 하지만 모든 공동체에는 그 내부에 핵심적 가치와 실천이 있다. 기독교 공동체를 가능하게 생명력을 불어넣는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으로 현실화되는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이다. 라브리를 통해서 공동체적 전도를 구상하는 것은 좋은 출발점이다. 오늘날 복음전도의 주된 과제는 전도의 은사가 있는 소수 개인에게 의존하는 전도가 아니라 대안적 공동체로서 교회의 매력적인 존재 양식이 곧 복음전도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은 공동체의 도덕적 덕목과 습관을 강조하는 철학으로부터 착상을 받은 것이긴 하지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중시하는 전통적 신앙과도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지난 19-20세기의 전도가 개인 결신을 유도하는 명망가와 이벤트 중심으로 진행되면서 교회의 역할은 왜소해졌다. 복음에 기반한 교회의 실천과 덕목이 사람들을 초대하고 변화시키고 형성하기보다는, 내세적이고 이원론적 구령주의나 현세적 번영주의가 복음의 참맛을 혼동시키면서 새롭게 지음받은 이들의 독특하고 차별적인 공동체는 피상적인 구호로 전락했다. 기독교의 실재가 자기 계발적 번영주의나 도덕주의적 이신론과 다를 바 없다면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의 존재를 깊은 근본에서부터 변혁시키는 성령과 대면하도록 하는 것을 핵심으로 삼지 않는 공동체가 어떻게 기독교의 고유한 신념과 가치를 견지할 수 있겠는가? 영적 실재의 현시로서 복음전도이 점은 공동체적 전도에서 주의해야 할 맹점이다. 인간의 선한 상호성을 강조하는 공동체는 매력적일 수는 있어도 전복적이지는 않다. 쉐퍼와 라브리의 사역 또한 공동체적 전도로 볼 수 있다. 세퍼는 “타락했으나 영광스러운 존재”라는 표현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했다. 그는 신앙의 의심을 품는 자에게 55분 동안 듣고 질문하며, 5분 동안 기독교 메시지를 말하겠다며 인간에 대한 연민과 존중을 피력했다. 더 나아가 쉐퍼는 기독교의 최종적 변증은 아가페적인 삶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였고, 실제로 라브리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용납하고 환대하는 공동체였다. 마약중독자, 미혼모, 방황하는 젊은이들, 심지어 귀신 들린 사람들까지 라브리를 찾았고 그곳에서 사랑과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쉐퍼 부부는 “그러한 사람들의 대다수가 지니고 온 짐을 함께 짊어진 것이다. … 그들은 각 사람의 문젯거리들을 짊어졌으며, 그러고 나서 복음으로 그 사람의 가장 깊은 심령을 뒤흔들어 놓았다.”(레인 데니스 편, 프란시스 쉐퍼, 그의 삶과 사역, 아가페출판사, 195)여기서 공동체적 전도에서 영적 실재로서의 전도로 이어진다. 라브리의 사역은 공동체로 사람들을 환대할 뿐 아니라 그들과 나눴던 기독교 진리가 식사와 설거지, 청소, 집안일, 장식, 예술 활동, 육아와 같은 실제 삶에서 생생히 경험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는 일상에서 초월을 접하게 하는 영적 실재로서의 전도였다. 최근 공동체로서의 교회됨과 전도의 관계를 논하는 중요한 연구들이 있다. 필자는 공동체적 전도를 위해서 교회가 화해, 용서, 비폭력, 환대의 습관과 문화를 형성해야 한다는 데에 깊이 동의한다. 교회라는 독특한 공동체의 아비투스(habitus) 그 자체가 메시지가 될 것이라는 데 공감한다. 그러나 그러한 실천이 과연 전존재를 변화시키는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는 근원으로 충분한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기독교 공동체의 차별적이고 독특한 덕목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구원받은 자들이 날마다 맛보는 살아계시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세워진다. 물론 구원과 하나님의 초월적 임재는 강조하면서 새로운 덕목을 형성하지 않는 공동체는 단순히 믿음과 행함의 격차 문제가 아니라, 열매로 나무를 알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믿음의 진정성 자체를 재고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공동체의 매력적인 존재 양식은 초월적인 영적 실재에 견고하게 뿌리내려야 한다. 그래야만 성령이 주관하시는 지속적인 복음의 증언이 이루어질 것이다. 현재 한국 교회에서 영적 실재라는 가치는 주관주의, 신비주의, 기복주의 등에 잠식되어왔다. 매일의 일상과 관계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보다는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만 초월성에 의존하는 인습이 있다. 이는 영적 실재의 약화를 초래한다. 게다가, 한국 사회 전반에서도 신과 종교에 관한 믿음은 크게 하락하고 있다. 하지만 기술문명과 개인주의의 과잉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개인을 존중하면서도 진정성 있는 관계와 공동체를 찾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쉐퍼와 라브리의 사역은 세 가지 측면에서 적실한 전도의 지혜를 제공하리라 본다. 첫째, 인생과 세계에 대한 자연주의적이고 유물론적 설명이 득세하기 때문에 진리의 지성적 변증은 여전히 유효하다. 삶을 형성하는 사상과 문화의 영향을 간파한 쉐퍼의 틀은 전도를 위한 귀한 자산이다. 다만, 사상과 삶의 양식이 변화되었는데도 쉐퍼의 내용에만 의존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앵무새처럼 따라 하지 말라는 쉐퍼의 의도와도 어긋난다.둘째, 라브리 사역에서 발견하는 공동체적 전도의 지혜는 오늘날의 상황적 필요에 더욱 부합할 것이다. 복음전도를 가장 효과적으로 실천하는 공동체들의 공통점이 “초대와 환대의 문화”였다는 빌리 그레이엄 센터의 최근 조사는 이를 뒷받침한다(Rick Richardson, You Found Me, IVP). 그러나 공동체 자체보다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은 그 공동체를 떠받치는 영적 실재다.셋째, 따라서 필자는 쉐퍼와 라브리 사역에서 지성적 변증과 공동체적 환대, 그리고 영적 실재라는 삶의 전 차원들이 합일된 전도의 교훈을 발견한다. 그것은 너무 익숙해져서 시들어가고 있는, 하지만 다시 발견해야 할 전도의 생명력일 것이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은 “말과 행위로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롬 15:18-19)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쉐퍼
라브리
환대
지성적변증
하나님은 마지막까지 나의 회개를 기다리신다
by 유기성
2023-02-12
얼마 전 암으로 돌아가신 한 장로님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솔직히 경건한 신앙인이라기보다 교회 정치에 열심히 있으셨던 분이었다. 그런데 그의 자녀들은 참으로 신실했고 그중 한 명이 목사 사모였다. 평소 아버지를 잘 모시지 못했던 것이 못내 아쉬웠던 딸은 아버지가 입원해 있는 병실에서 아버지를 간병하기 시작했다.그러던 어느 날 새벽예배 시간에 아버지가 회개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아버지에게 가서 회개하도록 하라니, 딸로서는 참으로 곤란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너무나 분명한 마음을 주셨기에, 그녀는 아무도 없이 단둘이 있는 시간에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씀드렸다.“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회개하기를 원하세요.”이 말을 들은 그 장로님이 얼마나 노발대발 역정을 내시는지 당장 그 자리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평생 열심히 하나님을 섬겼다고 생각하는 자신에게 회개하라는 딸의 말이 몹시 언짢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자녀들은 “아버지를 이대로 하나님 앞에 가게 할 수는 없다”라며 눈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사흘쯤 지났을까, 장로님이 자녀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자녀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장로님은 자신이 무릎을 꿇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말했다. 온몸에 암이 퍼져 통증으로 다리를 만지지도 못하게 하시던 분이 무릎을 꿇고 “하나님, 제가 이런 잘못을 회개합니다”라며 통곡하고 회개하기 시작했다. 부인과 자녀들에게도 “이것은 내가 잘못했다”라며 일일이 용서를 구했다고 한다. 그러고 누웠다가 또 회개할 일이 생각나면 침상에서 일어나 다시 무릎을 꿇고 회개하고, 그렇게 내리 몇 날을 회개하시다가 어느 저녁 아무 고통도 없이 편안히 소천하셨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기다리시던 회개를 다 쏟으시고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를 입고 하나님께 가신 것이다.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다 아신다. 그런데도 그렇게 오래 기다려주신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죄를 지어도 다 용서해주신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죄를 용납하시는 것은 절대 아니다. 죄를 짓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면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고 사는 것이다.하나님 앞에 회개할 것이 있는가? 그렇다면 바로 지금 철저하게 고백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유기성,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규장)의 일부를 간추린 글입니다.
회개
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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