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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회중 찬양을 위한 여섯 단계
by Alex DiPrima
2023-03-14
회중 찬양에서 바라는 만큼 은혜를 받지 못할 때가 많다. 너무 큰 소음과 찬양 인도자의 지나친 “무대 위” 활동이 회중을 압도하거나 소외시키기도 한다. 때때로 음역이 너무 높아서 남자들이 따라부르지 못하고 그냥 서 있을 때도 있다. 적지 않은 찬양이 기독교 방송에 나와서 공연하는 솔로를 위해 작곡되었기에 똑같은 찬양을 훈련받지 않은 성도가 주님께 즐겁게 소리 내어 부르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다 이런 경험이 있다. 어쩌면 지금 내가 말한 게 당신 교회 상황일 수도 있다. 찬양 예배에서 낙담하고 실망하곤 하는가? 좋은 소식이 있다. 회중 찬양은 얼마든지 더 좋아질 수 있다!다음은 은혜롭고 활기찬 회중 찬양에 도움을 주는, 특히 목회자가 실천할 수 있는 몇 가지 실용적인 조언이다. 예산과 규모에 관계없이 모든 교회가 다 다음 단계를 실천할 수 있다. 나는 평균 수준의 음악적 재능과 항상 쪼들리는 예산으로 운영되는, 도시 외곽에 자리 잡은 중간 규모의 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이런 제한적인 요인이 은혜로운 회중 찬양 문화를 만들어가는 데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 우리 교회를 방문한 사람은 모두가 함께 찬양하는 시간이 얼마나 은혜로운지 자주 언급한다. 물론 찬양에 은혜가 넘치는 건 다 성령의 역사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교회에서 더 은혜롭게 함께 찬양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여섯 가지 실용적인 방법을 알아보자. 1. 선곡을 잘해야 한다.회중 찬양에 적합한 찬송은 수백 개가 넘는다. 따라서 선곡에 실패해서 은혜가 되지 않는 찬양을 부르는 건 변명의 여지가 없다. 좋은 찬양을 선택하라. 모두가 함께 부른다는 점을 기억하라. Spotify에서 제공하는 다섯 개의 ‘Together for the Gospel’ 앨범은 좋은 선곡의 출발점이 된다. 2. 무반주로 자주 부르라.우리 교회에서는 어떤 찬양이든지 적어도 한 소절 또는 후렴구를 다 함께 아카펠라로 부른다. 종종 한 곡 전체를 아카펠라로 부르기도 한다. 사실, 우리 교회는 얼마 전에 모든 찬양을 아카펠라로만 부르는 비정기 예배를 시작했다. 다양한 세대로 구성된 모든 교인이 정말로 사랑하는 예배이다. 그중 십 대와 이삼십 대가 특히 더 좋아한다. 교인들이 옆 사람의 찬양 소리를 서로 들을 수 있어야 한다. 한두 곡은 악기 연주를 아예 중단하고 교인들이 온전히 목소리만으로 찬양하도록 인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3. 악기 소리를 낮추라.악기 소리가 클수록 찬양 소리는 줄어든다. 악기 소리가 줄어들수록 찬양 소리가 커진다. 이건 하나의 법칙이다. 우리는 지금 앨범 녹음을 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찬양하도록 돕고 있다. 그러니 악기 소리를 줄이고 찬양 소리를 높이자! 회중 예배에서 악기는 찬송을 섬기는 도구에 불과하다. 그 외에 다른 역할이 있을 수 없다. 교인들이 악기를 단지 회중 찬양이라는 근사한 음식을 섬기는 웨이터로만 바라보도록 그들을 제자화하라. 4. 모두가 다 찬양할 수 있는 적절한 음역을 선택하라.가스펠 가수 크리스 톰린(Chris Tomlin)처럼 고음을 뽑아낼 수 있는 남자는 거의 없다. 키를 한두 단계 내려도 괜찮다. 좋은 찬송가라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노래 훈련을 받은 적 없는 모든 회중이 다 하나가 되어 하나님 찬양이라는 큰 무대에서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가능한 한 쉽게 만들라.5. 더 크게 찬양하도록 격려하라.회중이 더 크게 찬양할 수 있도록 최대한 격려하라. 등록 교인 모임에서만이 아니라 나는 정식 예배 중간에도 종종 더 크게 찬양하자고 부드럽게 격려한다. “형제자매님, 우리가 지금보다는 더 크게 부를 수 있습니다.” 또는 “다음 찬양은 그리스도인답게 더 크게 부릅시다.”6. 주도하라.음악을 포함하여 예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이 당신에게 있다. 물론 찬양 인도자를 활용하는 것도 괜찮다. 어쩌면 당신이 직접 하는 거보다 더 나을 수도 있다. 단 교회 비전을 공유하는 찬양 인도자를 써야 한다. 찬양 인도자의 중요한 책임은 음악과 찬양에 대한 담임 목사의 비전을 실행하는 것이다. 그가 회중 예배를 통해서 성경적 이상을 성취할 수 있도록, 담임 목사로서 실천할 수 있는 피드백을 주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이 외에도 회중 찬양을 향상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많은 방법이 있다. 행여라도 당신이 지금 출석 교회의 찬양 시간에 실망했더라도 포기하지 말라. 찬양 시간은 얼마든지 좋아질 수 있다. 구원받은 사람은 찬양하는 사람이다. 원제: 6 Steps to Improve Your Church’s Singing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회중찬양
찬송
찬송가
왜 이단에 끌리는가?
일탈적 전도에 관하여
by 김선일
2023-03-13
심플리 미셔널Simply Missional탈교회화, 비종교화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선교 과제로서 복음을 새롭게 제시합니다. 기독교의 변증 유산으로부터 오늘을 위한 복음 변증의 지혜를 발굴하고, 현대 한국의 문화적 표현들과 복음의 대면이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시리즈 ‘나는 신이다’가 화제다. 사이비 종교집단의 기괴한 행각이 파문을 일으킬 때마다 사람들이 다들 갖는 의문은 ‘왜 학력도 높고, 우월한 조건의 사람들이 누가 봐도 비상식적이고 볼품없는 교주와 그 무리에게 이끌렸는가?’이다. 이러한 질문은 과거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동양으로부터 온 이단성의 종교단체들이 주류사회로 퍼져나가는 것을 보고 제기되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서구사회에서 인본주의 세속화의 가치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1960년대 한국의 정통 기독교 교단들로부터 이단으로 취급받는 통일교가 미국 샌프란시스코 지역을 중심으로 포교 활동이 이루어졌던 경우다. 세계 최강의 문명국가로 자부하는 미국의 백인들이 동양의 가난하고 힘없는 나라에서 온 어느 여성의 “원리강론” 공부 모임에 참석하며 결국에는 통일교의 총체적 회심자(total converts)로 변모하는 과정은 일반적인 상식으로 납득하기 힘들었다. 미국의 사회학자인 존 로플랜드와 로드니 스타크는 통일교로 개종한 이들 21명을 인터뷰하고 수집한 자료를 통해 그들이 일탈적인 종교단체로 개종한 과정을 연구한 논문, “세상의 구원자 되기: 일탈적 관점으로의 개종 이론”(“Becoming a World-Savor: A Theory of Conversion to a Deviant Perspective” American Sociological Review, Vol. 30, 1965: 862-875)를 발표했다. 그 개종자들은 대체로 개신교 배경의 백인이고, 평균 35세 이하였으며, 일부는 대학을 졸업했지만 대부분은 중하위 계층으로서 미국의 지방 소도시 출신들이었다. 로플랜드와 스타크는 심층 연구를 통해 이들이 통일교로 개종하게 된 과정을 다음 일곱 가지의 축적된 요인으로 설명했다.• 절실한 긴장적 상황의 지속 • 문제해결의 종교적 선택 • 구도자적 정체성 형성• 인생의 전환 시점에서 이단과의 조우• 애정적 유대관계의 형성• 외부 사회적 관계의 약화 내지 부재• 집중적 교제를 통한 총체적 회심 위의 일곱 가지 요인들 가운데 앞의 셋은 그 개종자들이 기존의 생활방식에서 벗어나 이단 종교와 접촉하게 되는 배경적 혹은 소질적 요인들(predisposing factors)이고, 뒤의 넷은 이단으로 들어서게 되는 상황적 요인들(situational factors)이다. 이러한 일곱 가지 요인들을 ‘나는 신이다’에서 놀라운 용기를 보여준 제보자이자 피해자인 메이플 씨가 직접 진술한 서사에서도 조명해볼 수 있다. (일각에서는 이 방송의 선정성과 자신의 얼굴과 이름을 공개한 메이플 씨에 대한 2차 가해를 우려하는 소리도 있지만, 흉악한 사이비종교의 권력에 저항하여 자신을 공개한 주체적 선택에 존중과 응원을 보내는 것이 가장 필요한 도움이라고 본다.)첫째로, 개종자들은 대부분 상당한 삶의 긴장을 오랫동안 경험한다. 긴장이란 상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비롯된다. 긴장의 구체적 이유는 경제적 실패, 가족관계의 좌절, 성적인 죄책감, 인간관계에 대한 두려움, 신체적 장애, 종교적 혼란 등으로 다양하다. 이단의 성공적 포교에는 이러한 긴장적 상황들이 미리 조성된 경우가 많다. 캐나다에서 태어나고 홍콩에서 자란 메이플도 가족의 불화, 학교에서의 따돌림, 쾌락적인 생활로 인한 허탈감과 인생에 대한 고민을 깊이 경험했다. 둘째로, 종교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위와 같은 문제들은 이단으로 빠진 이들만이 겪지 않는다. 현대사회에서는 개인적으로는 심리치료, 사회적으로는 구조적 해결(복지나 돌봄 지원)을 통해서 긴장을 완화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종교적 용어로 세상을 정의하는 방식에 오랫동안 익숙해 있어서 심리치료나 사회구조적 관점으로 자신의 문제를 진단하지 못하거나, 그러한 정보와 지식으로부터는 소외되거나 차단된다. 메이플은 홍콩에서 포교하던 JMS 신도에게 포섭당한다. 당시는 이미 교주가 흉악한 성범죄자로 감옥에서 형을 치르고 있던 시기였는데도, 아마도 외국인으로서 이에 관한 적절한 정보를 얻지 못하고 세뇌된 것 같다.셋째, 구도자적 정체성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긴장적 상황에서 적절한 도움을 받지 못하면서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른 대체물(미디어, 육아, 술, 성 등)에 몰입한다. 그러다가 남은 선택지가 종교밖에 없지만, 기존 종교는 적절한 해결책이 아니다. 따라서 이들은 만족할 만한, 즉 인생과 세계에 대한 조화로운 설명을 제공하는 새로운 교회나 종파를 찾아다니기 시작한다. 메이플의 경우에 당시에 삶의 좌절에서 벗어나고자 JMS 포교자에게 전화를 걸어 산다는 게 무엇인지, 사랑이란 무엇인지를 계속 물었다고 한다. 넷째, 이단과의 만남에서 인생의 전환점을 경험한다. 이는 가장 중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통일교 개종자들은 원리강론을 접하기 직전이나 혹은 거의 동시에 자신들의 인생에서 전환점을 느꼈다고 한다. 전환점이란 과거의 생활양식이나 규범이 폐기되고 새로운 삶의 체제로 대체되는 것이다. 실직, 이민, 진학(의 실패)은 인생의 중대한 전환점이다. 메이플은 JMS 집회에서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이라는 메시지를 듣고 감격하며, 술, 담배, 이성에 빠졌던 과거를 용서받고 깨끗이 새로워질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했다.다섯째, 이단 신도들과의 애정적 유대감이 형성된다. 이단의 포섭을 받은 사람들은 처음에 가르침을 듣고는 이상하며 문제가 있음을 느낀다고 한다. 하지만 주변에서 자기에게 친절을 베푸는 신도들의 설명을 듣고 서서히 가르침에 동화된다고 한다. 이단의 피해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처음에 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환대와 돌봄을 받았다고 술회한다. 메이플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애정적 유대관계는 자신의 상식적 판단과 이단의 가르침 사이에 간극을 해소해주며, 세상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을 형성케 한다. 여섯째, 이단 밖의 사회적 유대관계는 약해지거나 없어진다. 기존의 가족이나 친구 관계가 강하면 일탈적 회심은 이루어지지 못한다. 이단으로의 개종자들은 자신들의 회심 과정을 점검하고 평가해 줄 외부인들과 차단된다. 메이플은 새롭게 발견한 신앙생활에 충실하고자 한국으로 온다. 기존의 가족 및 친구들과는 멀어지고, JMS 무리에 둘러싸인다.일곱째, 집중적인 교제를 통해서 총체적 회심자가 된다. 이단으로의 개종은 구술적 회심(verbal conversion)으로 시작해서 총체적 회심(total conversion)으로 발전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집중적인 교제가 필요하다. 메이플은 한국에 와서 노래와 방송으로 재능을 바쳐 헌신한다. JMS에서는 다른 이단들에 비해서 춤, 노래, 운동 같은 감각적 경험이 더욱 부각된다. 게다가 ‘월명동’이라는 곳에서 공동생활을 한다. 이러한 다감각적이고 빈번한 경험과 교제는 인생과 세계의 모든 순간순간을 이단의 세계관 안에서 끊임없이 해석하고 정렬시키게 만든다. 머리로만이 아니라 감각과 경험으로 사람을 통제하는 것이다.로플랜드와 스타크의 연구는 나중에 미국에서 활동한 불교의 소수종파로 개종한 이들이나 네덜란드에서 통일교에 빠진 청소년들을 분석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사실 두 사회학자의 연구는 사회적으로 저급하게 인식되는 이단 종교에 빠지게 된 여러 요인을 추적한 것이지만, 이와 같은 단계적 분석은 종교적 회심에 공통된 과정을 설명하는 문을 열었다. 종교적 회심 여정에 대한 분석에서 가장 권위 있는 루이스 램보(Lewis Rambo)의 7단계 회심 이론이나 기독교 선교학자 앨런 티펫(Alan Tippet)의 인류학적 회심 과정 이해보다도, 로플랜드와 스타크의 일탈적 회심 분석이 더욱 선구적인 연구였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적 회심의 과정들은 대체로 이와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다만, 이러한 회심의 과정이 인간의 자아와 관계를 더욱 건강하고 견고하게 정립하게 해줌으로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존재가 되게 하는지, 아니면 사이비 집단의 교주와 교리에 맹목적 충성을 하게 하여 개종자 자신과 그의 가족을 위기와 파탄으로 몰고 가는지가 다를 뿐이다. 이 과정에서 신앙에 대한 왜곡과 변질, 그리고 개종자에 대한 착취와 폭력이 계속 가해지고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저항할 수 없는 덫에 걸려들고 만다.지금은 비록 많은 이들이 사이비종교의 경악스러운 악행에 공분하고 있지만, 계속해서 외로움과 지적인 혼란이 깊어지는 이 시대의 흐름은 이러한 일탈적 전도의 유혹이 암약하도록 만들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복음적이고 건강한 회심과 신앙의 성장을 도모하여 이단 사이비의 유혹에도 견고하게 대응할 수 있을까? 필자는 몇 년 전에 신천지에 빠져들던 한 신실한 중년의 부부를 상담하여 거기서 벗어나도록 도와준 적이 있다. 그 부부는 학력에서나 사회적 경력에서 대한민국 최고 엘리트의 반열에 있었으며, 교회에서도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주변으로부터 본이 되는 신앙의 인품으로 칭찬받던 이들이었다. 어느 날 필자와의 통화에서 “너무도 귀한 비밀의 진리를 발견했다”고 흥분해서 말할 때부터 수상한 낌새를 느꼈다. 만나보니 아니나 다를까 신천지의 교리를 배우고 있었다. 필자가 신천지가 의심된다고 하자 절대 아니라고 완강히 부인하기에, 그다음에 만났을 때 신천지의 증거 자료들을 보여주자 충격을 받으며 곧바로 신천지와 단절했다. 좋은 결과로 끝났지만, 당시에 필자는 이 정도의 학력과 경력을 가진 이들도 이단의 가르침에 깊숙이 매료될 정도라면 누구도 이러한 공격과 유혹으로부터 예외일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이것은 단지 개인적인 소질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교회가 처한 상황적 요인으로 인한 것이라 생각하며 다음과 같이 일탈적 전도의 원인을 성찰했다. 첫째, 이단들은 인생과 세계에 대한 합리적 설명체계를 제공한다. 그에 비해서는 한국 교회에서의 설교와 교육이 사람들에게는 추상적이고 막연하게 들리는 경우가 많다. 무지한 자가 이단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성경과 신앙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 하는 이들이 이단 혹은 유사 이단적 가르침에 매혹되기 쉽다. 종교학자 이정은은 신천지가 기성 교인들 사이에서 확산되는 것은 그들의 “교리적 경쟁력” 때문이라고 주장한다(“신천지와 기성교회의 ‘보상-교환’ 체계 비교 연구” 「종교와 문화」 29호, 2015: 153-184). 그는 기존에 종교를 선택하는 이유로 제시된 세뇌, 박탈, 보상, 일탈 이론은 수요자 측면이지만, 교리적 경쟁력은 공급자 측면에서 유효한 종교적 서비스라고 말한다. 필자가 도와준 그 부부도 매일 새벽기도를 참석하며 성경을 더 배우고 싶어 했다. 하지만 신천지의 “짝 풀이”에 기반을 둔 성경 해설은 그들에게 비로소 성경 진리의 비밀로 인도하는 지름길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면 우리 교회들도 이처럼 정교한 성경 해설을 더 많이 제공하는 것이 대안일까? 성경의 말씀을 알기 쉽게 가르치고, 삶에 적용하는 노력은 당연히 큰 유익을 준다. 그러나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세계관이다. 둘째, 이단적 가르침의 매력은 철저히 주술적 세계관에 기초한다는 데 있다. 인생과 세계에 대한 신비주의적이고, 더 나아가서는 교주숭배로 이어지는 신화적 구성은 이단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헤어나지 못하게 하는 포승줄이 되어 버린다. 그런데 이러한 주술적이며 신비주의적인 종교성은 정통 기독교 안에서도 적잖이 기승을 부리는 것이 사실이며, 이것이 사람들을 허황된 이단적 교리에 솔깃하게 만드는 맹아로 기능할 수 있다. 성경 공부를 더 많이 해도 신비적이고 주술적인 세계관 안에 있는 한, 사람들은 더욱 절묘하게 꿰어 맞추는 “말씀풀이”에 목마를 수 있다. 이는 학력과 무관하게 많은 신자에게 퍼져있다. 정통 기독교가 제공해야 할 교리적 경쟁력은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세계와 일반은총을 긍정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말미암은 인류 역사의 정의로운 종말론적 변혁을 소망하는 세계관이다. 성경적 정통 기독교는 현세를 부정하는 내세주의나, 천상계와 지상계를 구분하는 도피주의,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분리하는 이원론적 신비주의를 배격한다. 성경의 교육도 역사적이며 공적인 기독교 세계관에 기초해야 한다. 셋째, 이단은 고통에 대한 착시적인 해결책을 제공한다. 그리고 오직 포교라는 목적을 위해서 잠재적 개종자들에게 다정다감한, 그러나 위장되고 병리적인 공동체를 맛보게 한다. 그러나 정통 기독교는 고통을 마주하고 수용하며, 인간의 고통 한복판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하나님을 믿는다. 고통당하신 성자 하나님과의 연대는 다른 고통 받는 이들과의 연대로 이어진다. 불안과 불확실성이 만연하며, 노골적으로 욕망을 추구하는 시대적 상황에 기독교 공동체는 단순한 삶을 즐거워하고 일상의 은총에 감사하며, 종말의 소망 가운데 서로를 위로하며 보듬는 공동체여야 한다. 좀 더 느리고, 좀 더 소박하고, 좀 더 진실한 실천과 관계 안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이 단단하게 빚어져야 한다. 넷째, 이단은 착시적 보상뿐 아니라, 이단을 떠나거나 그 가르침을 충실하게 이행하지 않을 경우의 형벌에 대한 공포로 사람들을 맹목적 추종에 젖게 만든다. 여기서 위계적이고 착취적인 관계가 형성된다. 종교개혁은 “모든 신자의 제사장 됨”이라는 복음적 핵심을 회복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고귀한 소명을 받았고, 교회는 성령 안에서 각자의 고유한 은사를 발견하고 개발하도록 격려하고 섬기는 공동체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 한 백성이 되어 상호적이고 수평적인 공동체로 부름받았다. 지금도 일부 교회들에서 나타나는 일방적이고, 위계적이며, 가부장적인 관행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됨을 가로막는 불충이며 교인들을 탈-교회나 이단의 위험에 노출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어느 베테랑 산악 구조인에 따르면, 사람들이 등산하다가 조난당하는 이유는 너무 많이 가서가 아니라 “충분히” 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산에서 길을 찾는 이들이 1,000미터를 더 간 뒤 나오는 길로 가야 하는데, 500미터, 700미터 정도만 간 뒤 나타난 길로 들어서다 결국 헤매게 된다는 것이다. 이단 사이비의 위험에 노출되는 이유도 비슷하다. 복음적 신앙을 충분히 배우지 않고 성경적 세계관에 천착함 없이, 주술적인 종교성과 신비주의적 세계관으로 뒤범벅이 된 허술한 성경교육과 세계관은 이단이라는 샛길로 사람들을 유혹할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더 깊은 신앙의 깨달음을 공유하며 그리스도의 용서와 환대를 이루는 공동체로 더 충분히 나아가야 한다.
일탈적전도
사이비종교
이단
JMS
회심
개종
사교집단
문화 변증이란 무엇인가?
by Collin Hansen
2023-03-12
몇 년 전 나는 사회학자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James Davison Hunter)에게 당시 정치 캠페인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문화 전쟁”(culture war)이라는 말을 도입한 이 사람보다 내 질문에 잘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나를 놀라게 했는데, 그는 손을 흔들며 자기는 일기 예보는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그렇다. 그가 연구하는 것은 말하자면 기후학(climatology)이다. 일기 예보가 아니다. 그의 말이 내게서 떠나지 않았다. 이제는 더 많은 문화 기후학자가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하루도 빠짐없이 쏟아지는 뉴스(“날씨”)에 습관처럼 반응하는 사람이 아니라, 문화 속에서 작동하는 뿌리 깊은 가치, 이데올로기, 내러티브 및 패턴(“기후”)을 능동적으로 연구하고 평가하는 이가 필요하다. 켈러 센터가 그렇다고 오로지 문화 변증(cultural apologetics)만이 기독교 신앙을 수호하는 유일한 방법, 심지어 시대를 초월한 최선의 방식이라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문화 변증이야말로 우리를 성경적, 신학적, 역사적 지혜의 중요한 원천에 연결함으로 세속 시대에 설득력 있는 방법으로 복음을 적용할 수 있게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종류의 변증을 사용하건 당신은 특정 시간과 장소에서 공감하리라 기대하는 바에 맞춰진 특정 언어로 구성된 특정 규칙을 따라 논쟁하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서, 변증은 언제나 해당 문화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은 농업 사회였던 당시의 이웃과 연결되는 일상생활의 예를 수시로 사용하셨다.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는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와 바울의 마르스 언덕 설교는 똑같은 복음 메시지를 전달하지만, 유대인 디아스포라와 그리스 철학자라는 전혀 다른 청중에 맞게 각각 다른 접근 방식을 취한다. 2세기 순교자 유스티누스의 First Apology와 5세기 아우구스티누스의 하나님의 도성은 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극적으로 다른 순간에 알맞게, 각각 시기적절한 방식으로 시대를 초월한 진리를 선포한다. 마크 앨런과 조쉬 차트러는 곧 출간될 The Augustine Way: Retrieving a Vision for the Church’s Apologetic Witness에서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항상 문화라는 맥락 안에서 변증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모든 대학의 철학과는 동네 술집만큼이나 문화적인 곳”이라고 지적한다.이처럼 성경적이고 역사적인 사례를 통해서 문화 변증이 전혀 새로운 무엇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무슨 전략을 쓰더라도 문화를 피할 방법은 없다. 왜냐하면 문화 자체가 종교가 무슨 의미인지를 설명하는 또 다른 방식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숭배한다”라고 말한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David Foster Wallace)는 옳다. 선교학자 레슬리 뉴비긴은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요에서 문화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문화라는 단어 속에는 인간 집단에 의해 개발되고 세대를 거쳐 전달되는 생활 방식의 총체가 담겨있다. 문화의 중심은 언어이다. 한 민족의 언어는 그들이 사물을 인식하고 대처하는 방식을 표현하는 수단을 제공한다. 언어를 중심으로 시각 및 음악 예술, 기술, 법률, 사회 및 정치 조직이 그룹화된다. 거기에 더해서, 모든 문화의 근본으로 포함해야 하는 것은 사물의 궁극적인 본성을 파악하고 표현하려는 일련의 신념, 경험, 관행, 삶에 형태와 의미를 부여하는 것 등이다. 이것은 본질상 궁극적인 충성을 요구한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중에서도 종교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종교는 문화의 하위 영역이 아니다. 문화야말로 의미와 영원을 갈망하는 인간의 필연적 추구의 결과인 종교의 하위 영역이다. 앞서 소개한 뉴비긴의 인용문은 문화 변증의 광범위한 특성을 포착한다. 신학자 케빈 밴후저(Kevin Vanhoozer)가 강의한 “문화 해석학” 과정에서 내가 배운 것처럼 마케팅 슬로건도 사회의 가장 깊은 염원을 전달할 수 있다. 영화와 노래, 스포츠 경기도 문화가 가지고 있는 희망과 두려움의 한 단면을 표현한다. 이 모든 것이 다 단지 날씨가 아닌 기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리고 복음에 뿌리를 둔 변증자가 수정하고 연결할 기회를 제공함으로 불신자가 죄와 구주의 필요성을 볼 수 있게 만든다. 희망의 다리기후는 우리가 바라는 바를 형성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전통에 뿌리를 둔 문화 옹호론자는 욕망을 믿음의 주요 동기로 인식한다.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Jonathan Haidt)는 직감과 이성의 관계를 코끼리와 기수로 묘사했다. 이성은 얼마든지 조종할 수 있지만, 직감은 동기 부여가 있을 때만 작동한다. 마음이 원하는 것을 머리가 합리화하고 직관은 열망을 따라갈 뿐이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또는 같은 질문을 다른 방식으로 던져보자. 누가 내 동족(tribe)인가? 우리는 자신을 객관적 진실을 신중하게 고려해서 다양한 논쟁을 저울질하는, 매우 독립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훨씬 더 자주, 우리는 동족 본능에 따라서 움직인다. 객관적 진실에 입각한 삶의 변화는 고사하고, 동족 본능은 믿고 싶은 것만 믿도록 거르는 필터 역할을 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변화를 원할 때까지, 새로운 공동체 속에 있는 자신을 상상할 수 있을 때까지, 우리는 결코 내가 합리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을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문화 변증은 불신자가 복음이 무엇인지 완전히 이해하기 전에도 복음이 진리이길 원하도록 돕는다. 우리는 세상 정사와 권세의 주재권이 드러내는 추함과 정반대되는 그리스도의 주재권이 가진 아름다움을 제공한다(엡 6:12).“변증의 임무는 소망과 비그리스도인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이라고 테드 터너(Ted Turnau)는 그의 책 Popologetics에서 말한다. 선함, 아름다움, 정의, 희망, 평화, 활력, 자비를 논하며 그는 우리가 믿음을 제시해야 하는 다양한 이유를 열거한다. 그러나 뉴비긴이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에서 지적했듯, 교회는 그 자체로 복음이 무엇인지를 풀어쓴 해석(hermeneutic)이다. 교회는 주변 문화의 기상 시스템이 가져다주는 먹구름에 도전하는, 생명을 주는 대안적 기후를 제공한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소망과 비그리스도인 사이를 잇는 가장 좋은 다리이다. 세상은 그리스도의 지체인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은혜와 진실로, 또 사랑으로 함께 사는가를 확인함으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 따라서 문화 변증은 무엇보다도 사람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능력을 증언하기 위해서라도 교회의 영적, 도덕적 갱신을 추구한다. 폴 굴드(Paul Gould)는 문화 변증을 “특정 문화 내에서 그리스도인의 목소리와 양심, 상상력을 확립함으로 참되고 만족을 주는 기독교를 세상에 드러내는 작업”이라고 정의한다. 소음으로 가득한 문화 속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관심을 끌기 위해 무한 경쟁하는 수많은 목소리 속에서,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불신자가 품은 생각을 포착한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7:23에서 기도하신 내용이다. 우리가 하나가 될 때 세상은 아버지께서 그를 보내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물론 단지 그리스도인의 삶을 목격한다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죄인을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하늘과 땅을 새롭게 하시기 위해 곧 다시 오실 것이라고 바로 결론 내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이 좋은 소식을 전해야 한다. 그들이 죄를 회개하도록 경고하고 믿음의 길로 초대해야 한다. 그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에서 복음의 효과를 확인할 때, 그들은 복음을 더 잘 깨달을 것이다. 우리를 대면하여 볼 때, 그들은 복음에 담긴 공격성과 분열된 교회에서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너무나 자주 미치지 못하는 죄인의 공격성을 더 잘 구별할 것이다. 찾기 위해 잃다문화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 (너무 많은 날씨, 불충분한 기후)는 오늘날 교회의 일치를 위협함으로 결과적으로 선교에 악영향을 끼친다.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서 너무도 멀리 벗어났기에, 오늘날 우리는 더 많은 복음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 사실상 세상에 순응해서 살면서도 우리 중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있다고 착각한다. 많은 복음주의 교회에서 복음은 중산층에게 필요한 액세서리로 전락했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정치적 반대자의 악을 저지한다는 의미로, “문화를 구하는” 투표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소비주의와 편리함 및 안락함이라는 문화의 포로가 되어버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행여라도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세상 사람들의 귀에 기독교 신앙이 단지 편안함이라는 목적을 향한 또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해석되는 건 아닌지, 나는 종종 두려움을 느낀다.예수님은 분명하게 경고하셨다. 우리 모두에게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 10:38-39). 문화 변증은 우리를 사회 구조의 이면으로 인도함으로 내가 죄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그리고 예수님을 찾기 위해 내가 어떤 희생을 해야 하는지를 보도록 한다. 조쉬 채트러(Josh Chatraw)는 Telling a Better Story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역사적으로 검증되고 신학적으로는 복음 자체에 뿌리를 내린 성숙한 변증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지 신앙에 대한 이유를 제시하는 방법을 아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듣는 이의 상상을 불러일으키고, 십자가를 지는 삶의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나 자신의 개인적인 결점과 역사 속에서 교회가 저지른 실패까지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문화 변증은 기후가 어떻게 변하는지 예측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 속에서 우리는 복음을 전할 기회를 모색한다. 기독교 국가의 종말은 서구를 혼란에 빠뜨렸다. 서구 문명의 기초를 제공한 것은 다름 아니라 관용, 소수자 권리, 동등한 정의 등의 기독교 가치이다. 그러나 철학자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가 세속주의의 “빼기 이야기”(subtraction story)에서, ‘기독교만 빼 버리면 우리는 원하는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다’라고 묘사한 것처럼, 기독교는 (잘해야) 잊히고, (최악으로는) 욕을 먹고 있다. 물론 그리스도 없이는 기독교가 주는 유익을 누릴 수 없다. 그렇다면 서구는 모든 것이 허용되는 포스트-자유주의 시대에는 기독교의 가치를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께로 향할 것인가? 문화 변증은 우리 사회가 물어야 할 이 시대의 본질적인 질문이 종교적이라는 사실을 보도록 돕는다. 뭔가를 숭배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인간에게 더 새롭고 더 나은 에덴을 만들 능력이 있다고 믿을 수 있는가? 사회학자 크리스천 스미스(Christian Smith)가 To Flourish or Destruct에서 설명한 것처럼, 포스트 계몽주의 딜레마는 신성한 선을 추구하는 영적 프로젝트이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것, 과거에서 벗어나는 것, 어떤 전통에 얽매이지 않는 것, 최대한의 선택권을 누리는 것, 어떤 제약도 받지 않는 것,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사는 것, 그리고 원하는 대로 인생을 누리는 것, 이런 것들이 바로 근대성 영적 프로젝트를 이끄는 비전이다. 이 모든 비전은 (단지 이데올로기적 또는 문화적이 아니라) 영적이다. 신성불가침한 것, 궁극적인 관심사, 개인의 삶을 초월하는 의미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에 대한 비전을 명시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적이다. 개인의 가장 깊은 주관성, 선에 대한 가장 초월적인 비전, 그리고 궁극적 성취에 대한 정의가 무엇인가라는 비전을 명시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적이다. 문화 구조의 심층 단계에서 볼 때, 현대 서구에서 근대성이 무너뜨린 전근대 기독교계에서 높이 평가되던 하나님의 구원과 동급 수준(homologous)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적이다. 신성하기에 보호하고, 방어하고, 치안을 유지하고, 싸우고, 심지어 죽기까지 하고, 나아가서 타인을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면에서 지금 세속 시대는 여전히 매우 종교적이다(행 17:22). 문화 변증은 기독교 세계(Christendom)을 계승하려는 영적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는 사회적 내러티브의 근간을 식별할 수 있도록 한다. 이제 우리는 톰 홀랜드의 놀라운 책 도미니언에서 분명하게 확인하듯, 서로 연결하고 또 수정할 점을 식별하기 위해서 성경의 구속 이야기를 문화 속에 투영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계획이 어떤 대안보다 더 궁극적으로 호소력 있음을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5세기 아우구스티누스의 ‘하나님의 도성’에서 발견한 모델이자, 크리스토퍼 왓킨의 새 책 Biblical Critical Theory를 그토록 설득력 있게 만드는 접근 방식이다. 그리고 곧 출간될 조슈아 라이언 버틀러의 Beautiful Union: How God's Vision for Sex Points Us to the Good, Unlocks the True, and (Sort of) Explains Everything 이면에 담긴 정신이기도 하다. 이전 세대를 살았던 뉴비긴은 그리스도인들이 서구 문화에서조차도 선교적 만남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했다. 그런 선교적 만남은 우리 시대에도 계속되어야 한다. 팀 켈러는 이렇게 말한다. “선교사의 임무는 문화의 세계관(이야기)에 공감하면서도 그 문화가 전하는 이야기에 도전하고 수정(re-tell)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해피엔딩할 수 있음을 깨닫도록 해야 합니다.”이게 바로 우리에게 문화 변증이 필요한 이유이다. 절박한 세상은 지금 일기 예보가 전하는 천둥 같은 어둠이 결코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새벽이 올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문화가 다가오고 있다. 해피 엔딩이 바로 눈앞에 다가왔음을 세상은 알아야 한다. 그러나 해피엔딩은 오로지 죄에서 돌이키고 그리스도를 믿는 이에게만 해당함을 눈을 뜨고 볼 수 있어야 한다. 원제: What Is Cultural Apologetics?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문화변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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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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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을까?
by 박혜영
2023-03-11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다가 기독교 신앙을 새롭게 보기도 합니다. 평소 ‘기독교식’으로만 생각하느라 미처 바라보지 못한 것을 ‘외부인’들의 도움으로 보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끼리, 우리만 아는 용어로 계속 말하다 보면 진부함에 갇혀 더 이상 새롭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인생과 자연을 진지하게 보는 ‘외부인’들의 시선이 도움이 됩니다.물론 늘 ‘외부인’들의 도움을 받아야 기독교 진리를 새롭게 볼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기독교 진리를 보던 익숙한 시선 말고, 좀 더 공감의 폭이 넓은 시선을 얻게 된다는 뜻입니다. 기독교 진리가 우리끼리만 만족하는 그런 게 아니라 보편적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는 겁니다. 당연합니다. 진리라면 우리끼리만 쓰는 용어에 갇힐 수 없습니다. 만약 기독교 안에만 갇혀 있는 진리라면, 그건 진리라기보다는 종교의 독단적인 주장에 가까울 겁니다. 독단적인 주장은 금방 재미없어집니다.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가 그랬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한 대사가 인상에 남습니다. “아름다운 것은 관심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 영화에 나오는 사진작가의 말입니다. 아름다운 것은 관심을 받기 위해 특별한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자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 평범해 보입니다. 그러다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사람이 “자리를 잡고 앉아, 조용히, 기다릴 때” 비로소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이 비밀을 모르는 월터는 평범하고 소심합니다. 지출이 좀 과하다 싶으면, 가계부 같은 걸 쓰면서 감당할 만한지 살펴봅니다. 누가 회사원 아니랄까 봐 옷도 꼭 그렇게 입고 다닙니다. 인터넷 관계망의 자기소개서에 빈칸이 많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길을 끌 만한 이력이 없는 겁니다. 이 모습에서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월터는 자주 공상에 빠집니다. 영웅이 되어 극적인 활약을 하거나 자기를 무시하는 상사에게 당당하게 대거리하는 공상에 빠집니다. 이런 월터에게 사진작가는 “안쪽을 보라”는 말을 남기는데, 평범함 속에 숨어 있는 아름다운 모습, 곧 ‘월터의 비밀스러운 삶’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월터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다가 나중에 비로소 알게 됩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특별한 주인공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영화는 온 세계 사람들에게 그런 아름다움을 보여주던 저 유명한 잡지 ‘라이프’(LIFE)가 폐간된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름다움 앞에 앉아, 조용히, 기다릴 줄 아는 수많은 작가의 사진을 이젠 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지요.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을까요? ‘자리를 잡고, 조용히, 기다리면’ 됩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이미 성경에 들어 있습니다. 다만, 관심을 받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분주한 사람 눈에는 안 보일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나 ‘자리를 잡고, 조용히, 기다리며’ 성경을 읽다 보면 보이고, 그럼 음미하게 되며, 그럼 변화하게 된다고 존 파이퍼는 그의 초자연적 성경 읽기에서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조용히 숨어 있는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평범한 일상이나 자연에 숨어 있는 아름다움에 차이도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외부인’들은 이것까지는 알지 못합니다. 성경만이 알려줍니다. “내가 오랫동안 조용히 침묵을 지키며 참았으나, 이제는 내가 숨이 차서 헐떡이는, 해산하는 여인과 같이 부르짖겠다”(사 42:14).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거룩한 아름다움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남용하면 대가를 치르기 마련이니까요.
아름다움
하나님의아름다움
성경읽기
‘문제 청소년’은 없다
by 이재훈
2023-03-10
우정을 쌓아야 할 아이들이 “왕따”와 “학폭” 가해자와 피해자 관계로 뒤틀려버린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다. 청소년 폭력이 극에 달하고 있다. 이는 곧 우리 청소년의 아픔이 극에 달했다는 말이다. 사회는 비행 청소년, 나쁜 아이라 낙인찍지만, 그 이전에 그들은 아픈 아이들이다. 무엇이 겨우 10여 년밖에 살지 않은 우리 청소년들을 이렇게 아프게 만든 것일까?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 무섭게 바꾸어버린 것일까?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라고? 아니다. 여기서 오는 일탈도 일부 있겠지만, 근본 이유는 분명 아니다. 결국 어른들이 그들을 아프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청소년에게는 공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끓어오르는 반항심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방향을 잡아줄 수 있는 길은 공감이 유일하다. 아무리 환경이 어려워도 공감해 주는 누군가가 있는 청소년이라면 어려움이 변하여 내적 능력이 되고 위기가 기회가 된다. 자기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부모에게서 자란 자녀가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기란 불가능하다. 문제 있는 자녀는 없다. 문제 있는 부모가 있을 뿐이다. 문제 청소년은 없다. 문제 어른이 있을 뿐이다. 사람의 뇌는 자기 몸에서 일어나는 반응만 관찰하고 느끼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우리 뇌에는 다른 사람에게서 비슷한 일이 일어날 때도 마치 거울을 보듯이 느끼고 반응하는 능력이 있다. ‘거울 뉴런’이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 공감 세포를 우리의 뇌에 만들어 넣어 주신 것이다. 이 세포는 쓰면 쓸수록 더욱 촘촘하고 정교해진다. 따라서 인생 경험이 늘어날수록 공감 능력도 더욱 풍부해져야 정상이다. 나이 먹어 갈수록 상처를 주고받고, 충돌하고 갈등하는 일은 줄어들어야 맞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건 공감 능력을 유지해 주는 세포를 많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능력이 지극히 떨어진 것이다. 엄마는 내 아이의 마음 상태에 정확하게 조율되어 있다. 아이는 엄마와의 조율을 통해서 자기 마음을 읽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과 조율하는 능력을 기른다. 어린 시절 누군가로부터 이런 공감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다른 누군가의 정서를 공감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정서 공명’이라는 작용이 있다. 웃고 있는 사람을 보면 나도 함께 웃게 되고, 슬퍼서 눈물 흘리는 사람을 보면 함께 슬퍼지는 작용이다. 한 사람의 감정이 다른 사람 속에도 똑같이 일어나는 것이 마치 물리학에서의 공명 작용과 비슷하다 보니 정서 공명이라 이름 붙인 것이다.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이런 정서 공명이 잘 훈련된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들은 친구를 ‘나의 슬픔을 지고 가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1996년에 미국 콜로라도에서 아메리카 인디언 남자들이 모여서 그들의 공동체 철학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이렇다. “공동체 안에서는 한 사람의 영광이 곧 모두의 영광이고, 한 사람의 고통이 곧 모두의 고통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없었지만, 그들에게는 자연과 양심을 통해 얻은 관계에 대한 놀라운 지혜가 있었다.이 땅의 청소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서로 공감하고 정서가 공명하는 것을 느끼는 일이다. 친구의 아픔을 함께 느끼고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 주는 일이다. 입시가 전부인 교육에서는 결코 이런 능력은 계발될 수 없다. 우리 청소년의 아픔은 교육의 자리를 대학 입시에 내어 주었을 때 시작되었다. 입시마저도 친구들이 서로 도우며 준비하는 그런 교육은 불가능한 것일까? 공감 능력을 배양하면서 공부하는 학교는 지나친 이상일까? 내 자녀와 주변 청소년, 그들 모두의 아픔을 지적하기보다 먼저 공감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공감해 줄 수 있는 사회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 교육의 목표를 학업의 성취만이 아니라 공감 능력의 발달에 둘 때, 비로소 이 땅의 청소년은 살아나게 될 것이다.
청소년
문제청소년
문제아
학교교육
공감
정서공명
나의 아름다운 습관 만들기
‘거룩에 다가가는 습관’ 기르기 연습
by 전재훈
2023-03-09
‘거룩에 다가가는 습관’ 기르기 연습· 나의 아름다운 습관 만들기· 마음에서 기억나도록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교회 청년부 새내기가 되었을 때, 아버지는 청년부 부장 집사였고 형은 총무였다. 주일 저녁 집에서 밥을 먹는데 아버지가 형에게 한소리 하셨다. “청년부는 임원회를 했으면 결과를 부장 집사인 내게 알려줘야 할 거 아냐?" 아버지의 느닷없는 호통에 형은 난감했다. 자기는 회장이 아니라 총무였을뿐더러 청년부가 어떤 일을 하건 부장님에게 보고해야 한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역대 부장님들은 한번도 청년부 일에 간여하지 않았다. 다들 그냥 이름뿐인 부장이었고, 시각장애인교회의 특성상 비장애인이 대부분이다시피 한 청년부 활동에 시각장애인 부장 집사님이 해 주실 일은 거의 없었다. 가장 적극적인 참여라 해봐야 임원들 밥 사 먹으라고 돈이나 주는 게 전부였다. “버릇이 안 돼 있어서 그래요.” 내 딴에는 형을 편들려고 꺼넨 말이었는데, ‘습관’이라고 해야 할 말을 ‘버릇’이라고 해 버렸다. 돕는다는 것이 도리어 같이 비난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발끈한 형은 숟가락으로 내 머리를 쳤다. 습관과 버릇은 같은 뜻의 말이다. 다만 습관은 한자어이고 버릇은 순우리말이라는 차이 정도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사용하는 맥락에 따라 습관과 버릇은 다르게 쓰인다. 주로 바람직하지 못한 걸 가리킬 때 버릇을 쓴다. 내가 다리를 떠는 것은 버릇이고,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것은 습관이다. 하루의 삶 속에서 습관과 버릇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아침에 일어나 화장실 가는 것이 습관일지 버릇일지 몰라도 매일 하고 있다. 씻을 때도 먼저 물을 온수로 틀어놓고 칫솔에 치약을 묻힌다. 냉기가 사라졌다 싶을 때 입을 헹군다. 컵에 물을 받아 머리를 적시고 세수를 한다. 이런 행동은 아무런 고민 없이 물 흐르듯 이뤄진다. 이것은 습관일까 버릇일까? 옷 입을 때도 자신만의 순서가 있고 밥 먹을 때도 숟가락을 먼저 집든지 젓가락을 집든지 별생각 없이 같은 순서를 반복한다. 출근하는 과정도, 사무실에 도착해서 하는 행동도 매일 복사-붙여넣기의 반복이다. 매사에 깊이 생각하고 하는 행동은 매우 드물다. 하지만 이런 반복되는 일상에 의도적으로 습관을 만들어야 하는 일이 있다. 당뇨병에 걸린 후로 약을 먹는 일에 습관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약을 건너뛰거나 두 번 먹는 일이 생기곤 한다. 소화기관이 별로 좋은 않은 내가 밥 먹기 전에 새우젓 하나 집어 먹는 습관은 꼭 필요한 일이다. 이런 일은 의도적으로 훈련을 거쳐 습관으로 이어지게 한 것이다. 습관을 만들기는 어려워도 한 번 습관으로 만들어지면 그다음부터는 매우 쉽다. 아침에 출근하면 커피를 내리고 컴퓨터를 켜고 이메일과 뉴스를 검색하고 그날 일과를 체크한다. 그냥 노력하지 않고도 습관이 되었다. 삶이 습관을 만들어 준 셈이다. 하지만 컴퓨터를 켜기 전에 먼저 묵상하는 일은 의지적인 노력이 필요했다. 매일 아침 소셜 미디어로 말씀을 보내주는 지인이 여럿 있다. 그중 한 분은 시를 보낸다. 놀라운 습관을 지닌 열심 있는 지인들 덕에 말씀을 고르는 수고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쁜 사진과 함께 보내주는 말씀에 내 묵상을 담아 답장하는 일은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했다. 잊어버릴 때도 많고 “귀차니즘”에 무시하는 일도 있었지만, 지금은 컴퓨터를 켜기 전에 말씀 묵상이 와 있지 않으면 내 루틴이 방해받은 것처럼 서운해지기도 한다. 책을 가까이하려는 노력 덕분에 내 주변에는 늘 책이 넘친다. 읽어야 할 책, 발제나 강의를 위한 책이 책상을 점령하고 있다. 아직 읽지 못한 책은 책꽂이에 꽂지 않는다. 한 번 책꽂이에 들어가면 다시 꺼내 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매일 읽어야 하는 책들은 신비한 힘을 가지고 책상에 강림한다. 이들에게 빨리 자리를 찾아주기 위해서라도 책과의 농밀한 만남을 중요한 일과로 삼는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사무실에 앉으면 일반 서적에는 손이 가지 않는다. 소설이나 에세이, 혹은 심리학이나 철학책에 소홀해지곤 한다. 이유를 딱히 꼽을 수는 없지만, 사무실이라는 공간은 신학 서적을 읽고 설교를 준비하거나 강의와 발제를 위한 책을 읽어야 한다는 부담이 크기 때문인 것 같다. 이런 이유로 의도적으로 만든 습관이 카페에 가서 책 읽기이다. 카페라는 공간이 주는 분위기 탓인지, 아니면 주인이나 손님들의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카페에서는 신학 서적보다 일반 서적이 더 잘 읽힌다. 커피가 주는 중독성 탓인지 인문학 서적이 주는 기쁨 탓인지 여러 날 카페에 가서 책을 읽지 못하면 몸이 달아오른다. 약속이 있으면 두 시간 정도 일찍 카페에 가서 책을 읽거나 집에 들어가기 전 동네 카페에서 책을 읽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가서 커피 한잔과 함께 책을 읽는 것이다. 책 한 권을 보는데 대략 두세 시간이면 족하다. 두꺼운 책은 파트별로 나눠서 3일짜리 책이라는 느낌으로 접근한다. 이런 습관을 들인 덕분에 베스트셀러나 고전 필독서, 심리학이나 철학 서적을 꾸준히 읽을 수 있다. 목사가 직업이면 신학 서적은 물론이려니와 꾸준히 인문학을 통해 사람들의 생각과 시대사조를 이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런 수고 없이 신학을 시대에 녹여내는 일은 매우 어렵다. 내게 주어진 은혜도 성도의 삶에 상황화하지 못하면 전달은 요원할 뿐이고, 성도의 삶과 동떨어진 언어는 외국어나 다름없다. 책과 가까이하는 노력도 필요하고 책을 읽는 습관도 필요한 직업이 목사이기도 하지만, 감사하게도 내게는 활자중독이 있어서 책을 안 읽고 하루를 버티는 것이 더 어렵다. 그러나 일반 도서를 읽고 이해하려는 일은 의도적인 수고가 필요했다. 다행히도 나는 그 방법을 찾았고 지금도 카페에 앉아 책 읽다 말고 이 습관을 나누기 위해 글까지 쓰고 있다. 카페가 주는 물리적 환경 덕분인지 커피 향 가득하고 사람들의 대화가 나지막한 소음을 만들어 내는 이곳에서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는 일은 꽤 낭만적인 느낌까지도 선사한다. 아직 책 읽는 습관이 어렵게 느껴진다면 혼자 가까운 카페에 가서 책을 펼치고 앉아 우아하게 커피 한 잔 할 것을 권한다. 누군가에게 몰래 사진이 찍힌다면 이 모습이 가장 아름다워 보이리라.
습관
버릇
일상의영성
묵상
독서
AI를 두려워하지 않으려면
by Sarah Eekhoff Zylstra · Joel Jacob
2023-03-08
유력 미디어에 등장한 다음 헤드라인들이 모두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하다.Time은 “AI 군비 경쟁이 모든 것을 바꾸고 있다”고 했다. 또 Forbes는 이렇게 물었다. “AI는 앞으로 고용 시장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반면에 Yahoo Finance의 라울 팔(Raoul Pal)은 AI가 “역사상 가장 큰 거품”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학교 과제물에서 전투기와 의료 수술에 이르기까지 인공지능의 손이 뻗치지 않은 곳이 없는 것 같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결코 두려움에 떨고 싶지 않다. 인공지능을 포함한 모든 로봇까지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무모하거나 부주의하게 AI에 접근해서도 안 된다(잠 14:16).Gospel Coalition은 첨단 컴퓨터와 AI 융합 분야의 제품 개발자 조엘 제이콥(Joel Jacob)과 자리를 함께했다. 그리고 AI가 무엇인지, AI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AI에 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물었다.AI는 무엇인가?195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사람들은 혹시라도 컴퓨터가 인간과 구별할 수 없는 수준의 지능을 보여줄 수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이때는 거기에 관한 시도가 오로지 알고리즘(컴퓨터가 따르도록 정해 놓은 규칙 또는 규칙의 집합)을 통해서만 이뤄졌다. 2000년대 초반에 “딥 러닝”(deep learning)이라는 새로운 접근 방식이 도입되었다. 컴퓨터에 무엇을 하라고 지시하는 단순 코드를 만드는 대신, 하나님이 설계하신 인간 두뇌를 복제한 창조해내는 시스템(creating system)으로 전환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 단어와 소리 및 모양을 배우는 아기의 방법에서 시작해서, 뇌의 작동 방식을 이해하기 위한 수많은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중 많은 부분이 환경 훈련을 기반으로 한 뇌의 뉴런 강화로 귀결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엄마” “아빠”라고 자꾸 말하면 아기는 그 소리를 복제하고 그 과정에서 뇌의 뉴런이 훈련되고 강화되는데, 우리는 이것을 ‘학습’(learning)이라고 부른다. 아무런 정보가 들어있지 않은 뉴런을 재생성한 다음 데이터를 기반으로 아기처럼 취급함으로써, 컴퓨터도 얼마든지 훈련시킬 수 있음이 밝혀졌다. 그 과정을 거쳐서 업계에서 “신경망”(neural net)이라고 부르는 소프트웨어가 탄생했다. 전기화학 반응을 기반으로 하는 인간의 뇌보다 컴퓨터 회로 기판에서 움직이는 전기는 백 배 이상 빠르다. 따라서 신경망은 지금까지 나온 그 무엇보다 인간 지능과 흡사한 동시에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를 자랑한다. 하나님은 궁극적인 창조주이시며 우리는 항상 그에게 복종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도 지금 뭔가를 창조하고 있는데, 문제는 그게 인간보다 “더 낫게” 그리고 더 빨리 생각하는 능력을 지닌 무언가라는 사실이다. 그럼 AI를 무서워해야 할까?무섭다고까지는 말하지 않겠지만, 워낙 강력한 기술이기 때문에 신중해야 한다. 이른바 맨해튼 프로젝트를 통해서 과학자들이 원자폭탄을 만들었을 때를 생각하면 된다. 첫 번째 테스트가 완료되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창조물 앞에서 충격을 받았다. AI도 마찬가지다. AI 신기술 경쟁에서 앞서는 사람은 뒤처진 사람보다 강력한 우위를 점하게 될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OpenAI 조직(GPT 개발자들)이 처음 만들어졌다. 전제는 이것이었다. AI 기술에는 워낙 무서운 힘이 담겨있으니 한 개인이나 국가가 이 힘을 통제함으로 오용하는 위험을 막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기술은 모두가 다 동등하게 다음 시대로 나아갈 수 있도록 누구에게나 열려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말이 나중에는 “AI 기술은 모든 사람이 사용하기에는 너무나 강력하다. 따라서 무슨 내용을 공개할지에 대해서 주의해야 한다”로 바뀌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는 우리에게 AI를 허락하셨다. 그러나 올바른 방향으로 이뤄지지 않거나 적절한 제한이 없는 경우에는 복잡한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다. 인간이 처음으로 다리를 만들었을 때만 해도 기술의 부족으로 많은 다리가 무너져 수많은 사람이 다쳤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실수로부터 배웠고, 이제는 튼튼한 다리를 건설하는 데 능숙해졌다. (물론 최근에도 무너지는 다리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AI에 대한 첫 번째 시도를 통해서 우리가 앞으로 AI를 제대로 다루지 못할 것임을 이미 알게 되었다. 그럼 앞으로 발생할 여파에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AI로부터 나오는 편향되거나 아예 잘못된 답변을 통해서 이 여파는 이미 감지되고 있다. AI의 두뇌는 딥 러닝을 코딩하는 사람이 채택하는 모델과 그 모델에 입력된 데이터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신학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인간의 죄성을 기계에 전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개발자는 생각해야 한다. AI를 윤리적으로 개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그래서 인류에게 유익하고, 바라기는 한 사람이라도 더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하는 도구로 AI를 개발하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어디를 향할 것인가? AI는 적응한다. 대화형 AI 또는 ChatGPT에서 사용되는 것과 같은 “대규모 언어 모델”(large language models)은 계속해서 개선될 것이다. ChatGPT 4가 올해 말에 출시될 예정이며 현재 출시된 3.5보다 약 백 배 더 많은 매개변수가 신경망에 장착될 예정이다. 따라서 실수가 줄어들 것이다. 앞으로는 AI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영역에조차 점점 더 영향을 미칠 것이다. 지난 9월에는 최초의 AI 작품이 예술 콘테스트에서 우승했으며, 12월에는 최초의 AI 제어 전투기가 17시간 이상 비행했다. AI를 작동하거나 활용하는 기술 보유의 가치가 점점 더 각광을 받게 될 것이다. 직업도 바뀌겠지만, 이게 처음은 아니다. 트랙터는 농업 인력의 4분의 3을 대체했다. 그 정도 수준의 변화가 AI로 인해서 발생할 수 있다.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은 AI가 기존 인간의 일자리 8,500만 개를 대체하는 동시에 새로운 일자리 9,700만 개를 창출할 것으로 추정한다. 실질적인 삶의 질에서도 향상을 기대할 수 있다. AI로 구동되는 로봇이 집안일을 할 수 있다면, 거동이 힘든 노인이나 맞벌이 부부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또는 AI가 설명을 할 수 있다면, 지식 접근성은 더 가속이 붙을 것이다. 예를 들어, 도서관에 갈 수 없거나 방대한 양의 책을 검색하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에게 AI는 쉽게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 물론 이런 모든 변화에는 단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점이 더 크다. 단 아직까지 명확하지 않은 것은 AI가 과연 어디까지 유능해질 수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도무지 AI의 한계를 가늠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전문가들은 지금도 “특이점”(singularity)의 가능성(AI가 스스로 기술 성장을 지속하고 아예 멈출 수 없게 되는 경우) 여부와 발생한다면 과연 언제일지를 놓고 토론 중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AI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기억해야 할 중요한 두 가지가 있다. 1. 하나님은 일반적인 선(general benevolence and good)의 차원에서 여전히 기계를 사용하신다. 2. AI로부터 도움을 받는 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이것을 우상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AI는 결코 인간을 대체할 수 없다. 핵심은 목적과 정체성과 자율성으로 귀결된다. AI가 설혹 인간보다 더 높은 “지능을 갖춘다”(intelligent) 하더라도, 뛰어난 지능이 AI에게 영혼을 부여하는 건 아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지능을 가진 생물이라는 인간의 지위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대단한 게 아닐 수도 있다. 이것은 절대로 쉽지 않은 문제이다. 설혹 AI가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해도(돌조차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으니(눅 19:40), 가능한 일이다) 그게 AI에게 인간이 하나님과 누리는 수준의 깊은 관계를 보장하는 건 아니다. 우리는 AI 세상에서 세상이 어떤 모습으로 바뀔지 그리고 복음이 어떻게 더 가속화되어 퍼질 수 있을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인터넷이 복음 성장에 어떤 유익을 끼칠 수 있을지를 고려해야 한다. 나는 앞으로 20-30년을 더 기술 분야에서 일할 것이다. 이 일을 하나님이 주신 사명으로 받아들이기에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더 많은 사람을 하나님께 인도하기 위해서 어떤 기술을 만들어내야 하는가? AI를 사용하여 사람들을 성경으로 안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AI와 같은 기술을 만드는 사람에게는 무엇보다 마음 자세가 중요하다. “이런 걸 만들어내다니, 내가 바로 신이지!” 이런 생각을 한다면, 그 사람은 바벨탑을 쌓는 것과 하나 다를 바 없다. 나는 끊임없이 묻는다. AI를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까? 나는 AI를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고 싶다.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물을 통해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하고 싶다. 원제: How Not to Be Scared of AI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AI
인공지능
ChatGPT
게으름뱅이의 여덟 가지 특징
by Derek J. Brown
2023-03-07
지난 몇 년 동안 정기적으로 읽은 잠언은 당장 적용할 수 있는 큰 유익을 주는 습관으로 내게 자리 잡았다. 잠언을 통해서 나는 게으름뱅이를 만났다. 게으름뱅이에 관해서 잠언이 말하는 바를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내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날 뿐 아니라, 게으름 피우고 싶은 내 속의 성향까지 깨닫게 된다. 게으른 사람아, 개미에게 가서, 그들이 사는 것을 살펴보고 지혜를 얻어라(잠 6:6).성령님은 종종 이런 실질적인 통찰을 사용해서 내게 은혜를 베푸시는데,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를 위해서 내게 주어진 시간을 잘 사용해야 한다는 결심을 새롭게 하게 하신다. 다음 여덟 가지는 게으름뱅이의 특징이다. 내 속에 숨은 게으름을 인식하고 회개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경고: 진짜 게으름뱅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쁘다.)1. 게으름뱅이는 시작을 안 한다.게으름뱅이는 무엇보다 시작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다른 사람이 시켜야 간신히 시작하고(잠 6:9), 말만 많을 뿐 결과는 신통치 않다(잠 14:23). 훌륭한 계획 어쩌고저쩌고 떠들지만, 실행에 옮기는 것을 힘들어한다. 쾌락과 오락에 정신이 팔려서 그럴 수도 있다. 또는 단지 더럽고 힘든 일을 하기 싫어서 그럴 수도 있다. 어떤 경우이든 게으름뱅이는 아예 일을 시작조차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런 사람에게서 제대로 된 성취를 기대하기란 힘들다. 2. 게으름뱅이는 끝을 맺지 못한다.우여곡절 끝에 시작한다고 해도 게으름뱅이는 여전히 게으름뱅이다. 게으름뱅이에게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도무지 일을 마치지 못한다는 것이다(잠 12:27; 19:24; 26:15). 비록 첫발을 떼었다고 하더라도, 어려움과 저항에 부딪히면 순식간에 모든 동기가 사라진다. 게으름뱅이는 다시 아무것도 하지 않는 평소 상태로 후퇴한다. 책상 위에서 점점 쌓여가는 반쯤 읽은 책더미, 완성을 기다리는 각종 프로젝트, 친구나 가족에게 한 이행되지 않은 여러 약속, 마무리 짓지 못한 글쓰기, 그리고 2018년 1월 이후로 간 적 없는 헬스클럽 회원권 등을 바라보고 있는 게으름뱅이를 한번 상상해보라. 3. 게으름뱅이는 결코 힘든 일과 부딪히려고 하지 않는다. 게으름뱅이는 힘든 일을 거부한다. 게으름을 감추려고, “바깥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나가면 찢겨 죽는다”(잠 22:13) 같은 비겁한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피난처로 숨어들어 간다. 어려운 결정 또 잠재적으로 힘든 대화에 직면하는 경우, 우유부단한 상태에 빠진 게으름뱅이는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서라도 오락으로 눈을 돌린다. 게으름뱅이에게는 넷플릭스 같은 게 아편의 역할을 한다. 4. 게으름뱅이는 초조하고 안달복달한다.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인간은 만들고 성취하고 또 창조하도록 만들어졌다. 따라서 게으름뱅이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애초에 설계한 방식과 반대로 사는 존재이다. 게으름뱅이가 끊임없이 안절부절하고 항상 근심에 가득 차 있는 건 그래서이다. 때때로 더 큰 생산성과 성취를 갈망하곤 하지만, 실행을 꺼리기 때문에 성취 없는 갈망 상태에 계속 머물 뿐이다(잠 13:4). 결국 충족되지 않은 욕망은 게으름뱅이의 삶에서 언젠가는 심각한 파괴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잠 21:25-26).5. 게으름뱅이는 쉬지 않고 문제를 일으킨다.게으름뱅이의 삶은 항상 괴로움에 쌓여있다(잠 15:19). 제시간에 일을 마치지 못하다 보니 끊임없이 서두르기 마련이고, 주변 사람들 때문에 시간을 뺏긴다는 식으로 자주 짜증을 낸다.게으름뱅이는 재정의 어려움을 겪거나(잠 12:11; 19:15; 20:4; 21:5; 24:33-34), 가정에서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곤 한다. 시간을 관리하고, 산만함을 피하고, 또 열심히 일할 능력이 없기에 직장을 구한다 해도 오래 유지하기 힘들다. 청구서 지불과 차량 관리 같은 단순한 책임도 무시하기에 굳이 치를 필요 없는 불필요한 마찰을 일으키기도 한다. 영적 성장을 갈구하는 게으름뱅이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규칙적인 성경 읽기, 기도, 신학 및 경건 서적 연구, 교회 헌신, 그리고 일관된 복음 속의 관계 유지와 같은 훈련은 게으른 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벅찬 일이다. 6. 게으름뱅이는 타인에게 성가신 존재이다. 게으름뱅이는 열심히 일해서 기술을 발전시킬 마음이 없으므로 다른 사람에게 줄 것이 거의 없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성가신 존재일 뿐이다. “게으른 사람은 부리는 사람에게, 이에 초 같고, 눈에 연기 같다”(잠 10:26).생산력은 떨어지고, 집중하지 않고, 주변보다 오로지 자신만 생각하는 게으름뱅이는 고용주를 미치게 만든다. 그래서 근면과 극기가 필요한 직장에서는 결코 오래 살아남지 못한다. 결국 게으름뱅이는 도둑이나 약탈자와 하나 다를 바 없다(잠 18:9).7. 게으름뱅이는 자신을 속인다.게으름뱅이의 목적은 단 하나, 자신을 섬기고 최대한 한가한 상태를 오래 유지하려는 욕구이다. 따라서 그를 침대 밖으로 밀어내는 것은 (또는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손에서 떼게 하는 것은) 여간해서 가능하지 않다. 게으름뱅이의 자기기만이 드러나는 사례는 외부의 건전한 비판에 눈을 감은, 현실적 근거가 거의 없는 거창한 사업 제안을 떠벌리는 경우이다.게으름뱅이는 성실하게 일하는 습관을 통해 느리지만 꾸준히 부를 축적하는 데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따라서 그의 마음을 지배하는 것은 오로지 빨리 돈을 벌겠다는 비현실적인 꿈이다(잠 21:5). 입은 살아서 얼핏 듣기에 그럴듯한 영적 변명을 늘어놓는 게으름뱅이를 만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 성경이 휴식의 필요성을 강조한다는 둥, 구원이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둥, “균형 잡힌 삶”이 필요하다는 둥, 성경이 부의 위험을 가르치고 있다는 둥. 어떤 경우든 게으름뱅이는 자신이 가장 똑똑하다는 확신에 찬 채 사람들과 대화한다 “게으른 사람은 재치 있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가 더 지혜롭다고 생각한다”(잠 26:16).8. 게으름뱅이는 결코 이끄는 사람이 될 수 없다.아쉽게도, 게으름에 찌든 게으름뱅이는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결코 제대로 된 리더가 되지 못한다. 다른 어떤 자질 보다도 리더십에는 근면, 희생, 지속 능력, 고통 감수, 인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게으름뱅이는 이런 리더의 특성을 멸시한다. 그러므로 게으름뱅이는 언제나 누군가의 지휘를 받으면서 일할 수밖에 없다. “부지런한 사람의 손은 남을 다스리지만, 게으른 사람은 남의 부림을 받는다”(잠 12:24).게으름뱅이에게도 좋은 소식이 있다.게으름에 빠지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계획과 그리스도인으로서 받은 소명에 역행하는 것이다. 문제는 아무리 굳은 결심을 해도 인간의 힘으로는 게으름의 수렁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무엇보다 복음이 밝히 보여주는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 공로와 아무 상관 없이 거저 받는 구원이라는 복음은 이 짧은 지상 생활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거기에 더해서 타인뿐 아니라 나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도 부지런히 일하도록 동기를 부여한다. 열정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영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기술을 연마하도록 독려한다. 그래서 내가 우리의 왕과 다른 사람에게 유용한 존재가 되고, 용감하게 어려운 일에 맞서서 완수하며, 게으름이라는 장애물을 피하도록 강권하신다. 원제: 8 Marks of a Sluggar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게으름
나태
게으름뱅이
그래서 바르트, 루터, 에드워즈를 ‘삭제’해야 할까?
by Trevin Wax
2023-03-06
현대 사회에는 과거에 위대한 신학자로 여겨졌던 사람들을 대하는 두 가지 태도가 존재한다. 첫 번째는 성인으로 추앙한다. 그들의 머리에 후광을 씌우고 그들을 신앙의 선조로 바라보고, 그들이 저지른 실수와 죄, 악행은 고작해야 흐릿한 렌즈로 대충 보고 넘어간다. 그들의 통찰력과 업적에 매료되어 그들이 저지른 잘못은 까탈스러운 역사가나 지적하는 그저 그런 사소한 “흠결”로 치부한다. 두 번째는 완전히 ‘삭제’한다. 이는 삭제 문화(cancel-culture)라는 충동성을 반영하는 태도인데, 그들을 오늘날 기준에서 볼 때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한 행동 또는 관점을 가졌던 사람으로 완전히 지워버린다. 한마디로 그들이 저지른 죄가 그들의 덕이나 선을 신뢰할 수 없게 만들므로, 오늘날 분명히 우리에게 도움이 되고 이로울 만한 그들의 성과조차도 철저히 철회한다. 이 두 가지 태도 모두 교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두 가지는 하나같이 인간의 본성, 그러니까 죄가 선함과 얽혀 기생하는 본성, 달리 말하면 성화의 불균일성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런 태도에는 더욱 심도 있는 복잡성이 요구된다. 언제는 성인으로 떠받들다가 순식간에 인생 전체를 시궁창으로 던져버리는 게 오늘날 세상의 현실이다. 문제는 우리가 이런 세상과 똑같은 태도로 신학자를 대한다는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누군가를 무시하고 그의 모든 업적을 최소화한다. 반대로 누군가의 공헌은 무분별하게 수용하고 그의 죄를 최소화한다. 우리는 이런 태도보다 더 나은 방향을 찾아야 한다.과거 신학자의 죄와 관련해서 우리는 무시할 수도 또는 더 깊이 들여다볼 수도 있다. 더 깊이 들여본다는 것은 죄의 다양성을 고려한다는 것이다. 더불어서 그런 죄가 해당 신학자가 가졌던 신학적 사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또한 지혜와 분별력을 가지고 결함을 가진 신앙 선배를 연구함으로 오늘도 여전히 얻을 수 있는 보물이 무엇인지를 고려하는 것이다. 칼 바르트 딜레마내가 크리스티안 티에츠가 쓴 탁월한 칼 바르트 전기를 읽었던 때는 교부들이 신학이라는 과업에 어떻게 접근했는지에 관한 책을 집중적으로 읽던 몇 년 전이다. 칼 바르트의 전기는 한마디로 내게 충격을 주었다. 바르트는 아마도 요제프 라칭거(베네딕토 16세)와 경쟁할 수 있는, 지난 세기가 배출한 가장 영향력 있는 기독교 신학자일 것이다. 그러나 숨겨졌던 바르트 삶의 한 측면이 드러났고, 우리는 그가 조수 샬로테 폰 키르쉬바움과 불륜 관계였음을 알게 되었다. 바르트는 심지어 삶 전체를 그 죄를 지속하기 위한 형태로 구성함으로 아내 넬리에게 상처를 주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불륜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왜곡되고 기괴한 신학적 변명까지 일삼았다. 새뮤얼 파키슨은 최근 이 딜레마에 정면으로 맞섰다. 그는 “칼 바르트가 불륜을 저지른 부끄러운 남편이라는 건 부끄럽지만, 그래도 위대한 신학자이자 교회에 주어진 선물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라는 말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물었다. 파키슨은 신학자의 삶에서 미덕의 역할에 대한 교부들의 글을 소개하고 거기에 동의한다. “독단적이고 습관적인 불륜”은 신학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는 개인의 경건이 신학 과제에 필수라고 주장했다. 청결한 마음을 가진 자만이 하나님의 찬란한 빛을 받아들일 수 있다. 신학은 결코 추상적인 학문, 삶과 유리된 순수 학문이 아니다. 바르트조차도 이런 현실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랬기에 그는 자신과 키르쉬바움이 저지르는 죄악의 “경험”이 그의 신학적 반추에 과연 어떤 영향을 미칠지 궁금하다는 내용을 편지에 썼다. 신학자와 청결한 마음과거 신학자에게서 도덕적 올바름을 요구해야 할까? 성경이 제시하는 신실함(fidelity)의 기준에서 볼 때, 부족해도 한참 부족한 신학자에게서도 배울 만한 게 있을까? 멸시의 눈으로 과거를 내려다보는 대신에 더 깊이 들여다본다면, 우리는 교부들의 관점에 동의하게 된다. 즉, 하나님 속에 숨은 신비의 깊이를 측량하고자 하는 신학자 내면에는 “점점 더 커지는 청결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높은 표준을 요구하게 된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전기(biography)가 어떻게 신학을 형성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신학함(theologizing)이 항상 죄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지도 고려하게 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계몽주의 체계주의자나 과학자가 신학을 하는 것처럼 개인의 성결 문제를 아예 차단하고 다루지 않는 것이 답이 될 수는 없다. 성품은 우리가 성경을 신학화하고 해석하고 또 적용하는 방식에까지 차이를 만든다. 교부들이 한 말이 옳다. 삶 속에 지속적으로 짓는 죄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이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하는 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누군가의 신학이 죄에 의해서 어떤 영향을 받는지 깊이 생각하길 꺼리는 신자가 적지 않다. 왜냐하면 그러는 순간, 과거의 신학자들에 대해 (특히 여러 형태의 백인 우월주의에 연루된 신학자들에 대해) 온갖 종류의 불편한 질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만연한 무비판적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말이 보여 주듯이, 앞서간 신앙의 선배를 너무 빨리 무시하는 철회 문화 사고방식에 대한 반발 때문인지 몰라도, 우리는 학문적 연구와 개인의 경건을 아예 분리하는 계몽주의 양식에 빠져드는 것이, 이 문제에 천착한 모더니즘 이전 시대(premodern) 교부들의 주장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보다 더 쉽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방향이다. 그렇다고 내가 바르트를 포함한 중요한 신학자들을 아예 삭제하자는 취소 문화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영향력 있는 신학자들의 죄가 그들의 신학적 추론과 결론에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다 더 신중하고 비판적으로 생각하자는 것이다. 역사가 데이비드 스타인메츠(David Steinmetz)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역사 연구는과거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자유를 교회에 줍니다. 과거의 지혜를 적절하게 활용하는 자유뿐 아니라, 꼭 필요한 경우에는 불성실함과 죄를 극복하는 자유까지 줍니다.”죄에 빠진 신학자의 세 가지 유형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서로 다른 유형의 죄성을 구분해야 한다. 크든 작든 모든 죄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하기에 모든 죄가 같다고, 따라서 죄의 유형을 구분하는 데에 반대하는 그리스도인도 적지 않다. 그러나 기독교 전통은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듯, 어떤 죄는 “다른 죄보다 하나님 보시기에 더 가증하다”(문 151)라고 가르친다. 나이가 많아 본보기가 되어야 하는 사람이 짓는 죄, 하나님을 더 직접적으로 모독하는 죄, 또는 단지 마음의 관념에서 벗어나 일련의 추악한 말과 행동이 되어 회개 없이 지속되는 죄는 훨씬 더 심각하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이 별도로 언급하는 죄 중에는 본성을 거스르는 죄, 양심에 어긋나는 죄, 그리고 고의적이고 주제넘게 서원을 깨는 죄가 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과거 신학자가 범한 죄를 몇 가지 범주로 구분할 수 있다. 1. 고의적인 반역죄인 줄 알면서 고의로 죄를 고집했던 신학자의 범주에 속하는 사례는 바르트에게서 시작할 수 있다. 폴 틸리히도 여기서 포함된다. 그의 상습적인 혼외정사는 당시에도 유명했다. 습관적으로 부정한 활동에 관여한 신학자가 저지르는, 회개나 회복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런 죄는 죄 중에서도 가장 악질에 속한다. 2. 비난받을 무지 두 번째 범주에는 그 시대의 죄와 악, 불의에 연루된 목회자와 신학자가 포함된다. 그들의 죄는 비난받을 무지(culpable blindness)의 결과이다. 마르틴 루터의 반유대주의적 견해와 저술,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즈가 (비록 그가 노예무역은 비난했지만!) 노예제를 옹호하고 노예를 부린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에드워즈와 루터는 그들의 도덕적 책임을 제거하거나 축소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촉구할 것이다. 당시에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죄를 저지르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을 수도 있다. (어떤 의미에서 영적으로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여전히 눈이 먼 상태 자체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 세상에는 종종 마음이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진리가 있기 마련이다. 3. 죄 가운데서 분투세 번째 범주는 죄 가운데서 몸부림치면서 산 신학자를 포함한다. 한편으로 그들은 죄와 싸우고, 교회라는 큰 맥락 안에서 죄를 고백하고, 또 때때로 넘어지더라도 죄에서 돌이키려 노력한다. 죄는 항상 우리의 삶과 주변 사람의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에 어떤 형태로든 죄를 최소화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경우 신학자가 추구하는 욕망은 죄를 거부하고 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몇몇 청교도의 글과 더 거슬러 올라가서 안셀무스나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을 읽어보라. 타락한 세상의 오물 속에서도 거룩함을 위해 분투하는 모습을 만날 것이다. 그렇다. 죄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몸부림치는 신학자가 있다. 범주를 복잡하게 바라보기 지금까지 소개한 범주에는 몇 가지 제한 사항이 있다. 첫째, 시간이 지남에 따라 죄에서 멀어지거나 죄를 향해서 나아가는 과정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누군가를 그 시점에 “붙잡아 두는” 경향이 있다. 설혹 인생의 한 계절에 고의적인 반역을 저질렀다고 해도 다른 계절에는 메마른 땅을 뚫고 피어오르는 회개의 싹으로 인해서 죄의 종류가 죄 가운데서 몸부림치는 투쟁으로 바뀔 수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 비난받을 여지가 있는 무지가 얼마든지 아예 고의적인 반항으로 굳어질 수도 있다. 둘째, 고의적인 반역이 가장 심각하고 지독한 죄의 범주라는 데 대부분 동의하더라도 기억할 점이 있다. 비난받을 여지가 있는 무지가 초래하는 영향도 그에 못지않게 파괴적일 뿐 아니라 때때로 훨씬 더 끔찍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2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몇 년 동안 나치가 얼마나 루터의 주장을 활용했는지, 더불어서 에드워즈의 여파로 노예제라는 악에 계속 동참한 후기 미국 신학자를 떠올려보라). 그러나 아마도 신학자들 대부분이 해당하는 것은 세 번째 범주일 것이다. 비록 청결한 마음이 아니더라도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따라서 죄와 싸우는 사람들 말이다. 셋째, 어떤 죄에 관해서 듣고서는 “말도 안 되게 끔찍하다”(disqualifying)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사실 성경 말씀이 아니라 문화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성경을 읽는 방식 때문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일부 아프리카 그리스도인에게는 문신이 간음보다 훨씬 더 심각한 범죄이다!)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 솔로몬, 요나 같은 성경 인물은 지독한 죄도 지었지만 영광스러운 구원까지 이룬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인물이다. 비록 완벽하지는 않지만 적지 않은 목회자와 신학자가 자신이 추구하는 신학과 아름답게 일치하는 삶을 살고 있다. 고대 교회는 종종 그런 사람을 “성도”(saints)라고 불렀다. 비록 개신교 전통에는 공식적인 “성인”(sainthood)이 없지만, 누군가의 삶이 그들의 신앙 고백 및 신학 연구와 일치할 때 드러나는 아름다움과 영광을 우리는 충분히 인식할 수 있다. 그렇기에 개인적 영역과 공적 영역 모두에서 경건함으로 특징지어지는 삶을 사는 사람의 신학적 사색을 더 신뢰할 만하다고 보는 것은 지극히 타당하다. 더 깊은 질문 던지기그렇기에 신학자를 “전부 아니면 전무”로 취급하는 것은 올바른 길이 아니다. 무조건 비판하는 것도 또 무분별하게 수용하는 것도 현명하지 않다. 하나 같이 죄 많은 신앙 선배지만, 그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있다.소셜 미디어가 불러일으키는 충동은 모든 사람을 빠르고 쉬운 상자에 집어넣고 단숨에 “영웅”과 “악당”으로 갈라놓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신 진짜 삶은 결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오히려 영광스러울 정도로 복잡하다. 우리가 “악당”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영웅적인 미덕의 소유자도 있고, “영웅”이라고 부르는 사람 중에서도 악랄한 죄를 계속해서 저지르는 이가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더 깊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과거 신학자가 추구한 신학적 관점 중에서 과연 죄로 인해서 왜곡된 부분이 있는지를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온시 카멜(Onsi Kamel)은 이렇게 충고한다. “사고의 좌표와 어떤 특정한 죄를 살펴보라. 그리고 특정 사고가 그 해당하는 죄에 의해 눈에 띄게 영향을 받은 부분이 있는지 조사할 것을 권한다. 그런 다음 그 사고가 미치는 전반적인 부분을 무시 또는 경고하거나 신중하게 다뤄야 한다.”이 시점에서 궁금해진다. 그럼 루터의 비난받을 만한 반유대주의가 구약 성경에 대한 그의 접근 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유대인에 대한 그의 관점이 율법과 복음 사이의 명확한 구분 또는 사회에 대한 두 왕국이라는 접근 방식을 만든 것일까? 에드워즈가 노예를 소유한 사실이 그가 성경이 말하는 자비와 정의를 이해하는 데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노예 소유가 성경을 이해하는 방식이나 하나님에 대한 그의 견해를 어떻게 바꿨을까? 사회의 질서에 관한 생각 또는 인간성에 대한 교리를 확립하는 데에는? 에드워즈의 아들이 열렬한 노예폐지론자였다는 사실이 이런 질문을 더 복잡하게 만들지는 않는가? 바르트의 간음은 죄와 은혜에 대한 그의 견해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고의적인 반역과 신학적 비틀기(gymnastics)가 혹시라도 그가 하나님의 심판을 이해하는 데에 악영향을 끼친 것은 아닐까? 그가 주창한 준-보편구원론(semi-universalistic musings)에도 그의 죄가 어떤 역할을 한 건 아닐까? 성화는 사람마다 다르다. 지금 이 글이 답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 신학자들에 대해서 침묵하기보다는 더 많이 논쟁해야 한다. 단순한 답보다는 차라리 복잡한 게 더 낫다. 중요한 것은 진실이다. 과거 신학자들의 죄를 최소화하는 성인전(hagiography)이나 좋은 말만 모은 전기 속에도, 그렇다고 그들의 삶에서 성화의 표징은 보지 않고 오로지 죄만 찾아내려는 충동 속에도 진실은 없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복잡성을 인정하는 데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심지어 가장 존경받는 신학자조차도 얼마든지 자신의 신학적 비전에 영향을 미치는 죄나 무지를 품을 수 있음을 인식하자.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거룩함을 추구하겠다는 재헌신이다. 그리고 거룩함 없이는 우리가 그토록 더 알고 싶고 사모하는 하나님을 결코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원제: Should We Cancel Karl Barth, Martin Luther, and Jonathan Edward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칼바르트
마르틴루터
조나단에드워즈
신학과성화
삭제문화
‘하나님 카드’를 함부로 쓰지 말자
by Will Anderson
2023-03-05
“저 사람과 데이트하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어요.”“성령님이 나를 이 직업으로 이끄셨어요.”“하나님이 어젯밤 말씀하셨어요.”“하나님이 이런 생각을 주셨어요.”그리스도인들이 주고받는 대화에서 이른바 “하나님 카드”(God card)를 만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러니까 내가 내린 어떤 결정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주장이다. 물론 결정의 순간을 놓고 볼 때, 그게 과연 나의 뜻이었는지 아니면 하나님이 주신 어떤 영감이 작용한 건지 분명하게 구분하는 건 쉽지 않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게 과연 정당한 걸까, 아니면 지극히 인위적인 걸까?구체적인 성경 말씀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나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속삭임, 느낌, 충동, 즉흥적인 생각, 그리고 주장으로 바뀔 때, 대화는 엉망이 될 뿐 아니라 남용되기 쉬운 방향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분별력 있는 신자라면 모든 암시를 무분별하게 다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이는 “맞으면 좋고 아니면 말고 식”의 문화를 조장하기보다는 모든 것을 검증해야 한다(살전 5:21). 성경이 검증하라고 명령하는 이유는 가짜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하나님 카드가 잘못 쓰이는 네 가지 이유를 생각해보자.1. 고립코로나19가 하나 확실하게 가르쳐준 게 있다면, 교회 공동체로부터 고립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에게 나쁜 신학이 성장할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을 만드는 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혼자 있을 때는 그 어느 때보다 쉽게 속고 방향 감각을 잃는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죄성이 불러일으킨 충동마저도 하나님의 인도로 착각하곤 한다. “고립이 불러일으킨 끔찍한 상황”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낸 사례는 끔찍한 사회적 고립을 겪은 마빈 히메이어(Marvin Heemeyer)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TREAD이다. 그는 적대적인 이웃의 비즈니스를 파괴하기 위해 비밀리에 불도저를 장갑차로 바꾸는 데 몇 달을 보냈다. 그리고 미리 녹음한 선언문에서 파괴의 난동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라고 주장했다. TREAD 같은 사건을 단지 극적이고 예외적인 고립 사례로 치부하면 안 된다. 우리는 모두가 스크린을 눈앞에 끼고 사는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다. 실제로는 내가 나에게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셨어”라고 착각하는 건 누구에게나 가능하다. 항상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고 책임을 다하며 산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나를 진짜로 아는 누군가의 조언 없이는 누구라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현실 감각을 잃을 수 있다. 누군가에게 가서 하나님이 “너한테 그렇게 말씀하셨다”라고 주장하기 전에, 당신이 느끼는 바를 믿을 수 있는 다른 교인에게 먼저 이야기하라. 당신 생각에 주님이 주시는 것이라고 느끼는 그것을 “제대로 검증”하기 전에는 결코 다른 사람에게 가서 하나님 운운하는 “하나님 카드”를 꺼내면 안 된다. 2. 습관성 어휘일부 기독교 교파에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인도가 어지러울 정도로 많다. 나를 이 가게에 오게 하신 것도, 이 자리에 주차하게 하신 것도, 저 사람에게 메모를 쓰게 하신 것도, 이 거리를 걷게 하신 것도, 그리고 팬케이크 대신 오늘 달걀을 주문하게 하신 것도 다 하나님이 인도하셨기 때문이란다. 하나님께서 5초마다 말씀하신다는 이런 식의 주장은 비성경적이다. 성경이 약속하는 것은 지혜의 원리이다. 성경은 우리를 지혜의 테두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도록 인도한다. 언젠가 나는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성경의 권위 아래 살 때 하나님의 뜻은 애타게 길을 찾아 헤매는 미로라기보다는 즐기면서 탐험하는 정원과 비슷하다.” 모든 결정에 대해서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셨어”라고 끌어댈 필요가 없음을 아는 것만으로도 자유함을 누릴 수 있다. 그 대신 우리가 취할 행동은 성경에 뿌리를 내리고 위험을 감수하는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미지의 세계를 앞에 놓고 용기 내어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모든 변덕을 합리화하려고 경솔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은 하나님의 입에 당신의 생각을 담는 위험한 일이다. 이런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절대로 바람직하지 않다. 행여라도 “하나님 카드”를 자주 이용한다면, 다음 두 가지 중 어느 쪽인지 생각해보라. 당신의 언어에서 제거해야 할 생각 없이 뱉는 습관성 용어인지 아니면 주님께 진짜 들은 메시지를 제대로 반영한 것인지. 3. 책임 회피때때로 반대하는 사람을 제압하기 위해서 하나님 카드를 쓰는 경우가 있다. 당신이 바라는 목표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내림으로써 상황에 따라서는 규칙을 바꾸거나 대다수의 반발까지도 무시할 수 있다.책임 회피를 위해서, 원하는 바를 실현하기 위해서, 또는 죄를 변명하기 위해서 하나님 카드를 사용하는 경우라면, 그 사람이 그 카드를 포기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그런 사람에게 정면으로 대응한다면, 그는 이렇게 반발할지도 모른다. “아니, 당신이 무슨 권리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간섭하는 겁니까? 하나님이 내게 하신 말씀에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맞냐 틀리냐를 따지는 겁니까?”이런 식의 반론은 건강한 공동체일수록 서로를 검증하고 바로잡는다는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이다(마 18:15-20).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사람은 공동체로부터 그 음성의 진위를 분별 받아야 한다(행 9:26-28; 11:1-18). 하나님에 대한 배타적인 접근, 또는 책임에 대한 면죄부 주장은 바른 기독교가 아니라 이단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다른 그리스도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서 하나님 카드를 사용하는 경우라면 기억해야 한다. 그 사람은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활용해서 자신의 뜻을 이루려는 것이다. 4. 실패가 두려워서수많은 선택이 주는 압박감과 과거의 실패가 주는 절망 속에서 사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승인”이라는 명확한 도장이 찍히지 않는 한 여간해서 선택하려고 하지 않는다. 망설이던 결정에 대해서 하나님의 승인을 받으면 기분이야 좋겠지만, 인생에서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최종 목표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보다는 어떤 결과를 맞게 되더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게 더 가치 있지 않을까? 아무리 좋은 의도와 현명한 계획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모든 위험이나 실패에서 구해 주겠다고 약속하신 적이 없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약점까지 활용해서 승리를 만들어내는 PR 요원이 아니다. 하나님은 좁은 길을 걷다 넘어지는 양과 함께하시는 분이다. 때로는 최악의 상황에 있는 양에게 가장 좋은 가르침을 주시는 선한 목자가 바로 하나님이시다. 명확성, 신비함, 겸손나는 부주의하게 하나님 카드를 사용한 사람으로 인생을 마치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그분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는 데에 또는 교회 공동체와 더불어서 하나님의 음성을 검증하는 것조차 두려워하며 완고하게 거부하는 사람으로도 살고 싶지 않다. 순수한 것과 마찬가지로 가짜도 분명히 존재한다. 따라서 대담함과 소심함이라는 양극화된 함정을 피하면서 하나님 카드에 현명하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성경이 가르치는 명확성과 신비와 겸손이라는 세 가지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명확성: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가장 분명한 계시이다. 우리 손에는 이미 많은 양의 귀중한 보석이 들려있다. 따라서 굳이 새로운 “영적 금맥”을 찾기 위해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신비: 하나님은 무한하고 우리는 유한하다.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하나님을 인간의 사고 체계라는 한계 속에 넣으면 안 된다. 우리가 가진 인지적 한계의 벼랑에서 바라볼 때 하나님은 그랜드캐니언을 백만 배 합친 것보다 더 광대하시다. 선입관이라는 한계 속에서 사는 인간은 결코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어떤 말을 해도 절대로 모순되지 않는다. 케네스 버딩(Kenneth Berding)은 성경 속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가장 명확한 방식에서 가장 명확하지 않은 방식으로의 연속이라는 측면에서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그의 글은 전체를 다 읽을 가치가 있다). 다음은 그의 결론이다. 결정을 내릴 때마다 항상 특별한 인도를 경험할 거라는 성경의 약속은 없다. … 그렇더라도 진심으로 성경적인 결정을 하려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이 인도하실 수 있도록 공간을 허용해야 한다. 때로는 전혀 모호함이 없는 직접적인 방법으로, 그러나 어떤 때에는 충동과 속삭임으로 때로는 재정립된 생각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신다. 하나님의 신비가 분명한 정의와 예측 가능성을 어렵게 만들지만, 성경은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명확하게 하나님이 놀라운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거나 인도하시는 것을 느낄 때, 우리는 겸손하게 말해야 한다. 성경이 보여주는 사례는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셨다”라는 식의 절대적 언어가 아니라 부드러운 고백이다. “성령과 우리는 … 더 이상 아무 무거운 짐도 여러분에게 지우지 않기로” (행 15:28).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 것이고, 또 이런 일이나 저런 일을 할 것이다” (약 4:13-15).우리가 서로 대화할 때도 “천천히 말하는 것”이 맞는다면, 하나님에 관해서 말할 때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더 신중해야 한다는 걸까? 원제: Be Slow to Pull the ‘God Card’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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