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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하고도 특별했던 하루
애즈베리 부흥의 현장에서
by Doug Hankins
2023-03-25
애즈베리 각성이 시작된 목요일에 나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처음 들었다. 그리고 이어진 주일 설교에서 목사님이 그 사건을 언급했다. 월요일이 되자마자 나는 당장 켄터키로 날아가서 진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확인하고 우리 교회 식구들에게 상세하게 알리겠다는 생각에 여행 준비를 시작했다. 부흥과 부흥운동에 관심을 가진 미국 종교사를 연구하는 역사가로서 나는 실제로 만나게 될 부흥이 과연 어떤 느낌을 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대됐다. 게다가 들리는 바로는 그 규모가 예사롭지 않다고 했다. 휴즈 강당의 공식 예배가 끝났다는 발표가 있었던 2023년 2월 8일 수요일 오전 10시 45분 이후에 벌어진 역사를, 소셜 미디어가 전하는 단순한 사실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예배를 마친 학생들은 떠나지 않고 남아서 기도하고 찬양하고 성경을 읽고 간증하고 성령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했다. 나는 그곳에 가서 직접 눈으로 보고 모든 것을 경험하고 싶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만나주시고, 그 결과 그분을 더 사랑하게 도와주실 것이라는 소망으로 깨어나는 나 자신을 체험하고 싶었다.더불어서 부흥이라는 특별함 속에 존재하는 평범함과 일상적인 삶의 모습도 궁금했다. 화장실에 가려고 중간중간 나갈까? 당연히 먹고 마시겠지? 리더는 방을 어떻게 배정할까? 청소는? 진공청소기를 쓸까? 사람들은 얼마나 오래 함께 있을까? 모임이 거의 하루 24시간 진행되는 상황에서 이런 세세한 모든 것을 제대로 파악할 사람이 있기나 할까? 자, 지금까지 내가 발견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캠퍼스애즈베리는 켄터키 렉싱턴 남쪽, 말을 키우는 농장이 주로 모인 외딴 지역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캠퍼스이다. 렉싱턴 애버뉴에서 좌회전하여 시내 중심으로 2마일 운전하면 캠퍼스 중심부에 들어선다. 메인 스트리트는 도로의 북서쪽에 있는 신학교와 남동쪽에 있는 대학교를 깔끔하게 분리한다. 두 캠퍼스에는 각각 도로 쪽으로 정문이 난 채플이 있다. 신학교 쪽에 있는 에스테스 채플(Estes Chapel)은 660석이다. 대학교 쪽에 있는 더 오래되고 더 큰 휴즈 강당(Hughes Auditorium)은 1,489석이다. 2월 15일 수요일 오전 11시 30분, 내가 도착했을 때 자리가 꽉 차 있었다. 나는 “특별 주차장”에 이중 주차로 차를 세웠다.렉싱턴 애버뉴를 따라서 모여드는 사람들이 보인다. 파란색 셔츠를 입은 한 청년이 줄을 선 군중을 향해 외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청년의 말을 들은 한 여자가 그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더니, “예수님은 세상 모든 어린아이를 사랑하십니다”라며 크게 노래하기 시작한다. 이런 식의 대결은 대체로 평화적으로 진행되지만, 지금 일어나는 문화 현상이 가진 유쾌한 긴장감을 잘 보여준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줄을 선 사람이 이미 천여 명에 달했다. “오늘 저녁이면 네 배로 늘어날 겁니다.” 한 자매가 내게 살며시 귀띔했다. 휴즈 강당으로 들어가는 긴 줄 / Courtesy Doug Hankins바로 내 앞에 줄을 선 그룹은 오하이오 신시내티에 있는 나사렛 교회에서 차를 몰고 온 사람들이다. 며칠 전에도 왔다는데, 벌써 두 번째란다. 틱톡에서 비디오를 본 교회 청년에게서 이곳의 소식을 처음 들었다고 했다. 내게 얼마나 오래 머무를 생각인지 묻더니, 자기네는 챙겨야 할 집안일과 직장 때문에 오후 3시까지만 있을 거란다. 평범함과 비범함의 아름다운 조화이다. 이런 모임이 다른 대학으로까지 퍼지면 얼마나 좋겠냐며, 한 자매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한다. 우리는 조금씩 채플 앞으로 나아가면서 수다를 떨었다. 지금은 오후 1시이다. 채플에 들어서자 다른 자매가 내게 말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을 꼭 찾길 바랍니다.” 그 일이 벌어진 바로 그곳마침내 호기심과 흥분이 최고 수준에 다다른 순간을 맞았다. 내가 지금 발걸음을 내딛는 이 부흥의 현장이 영화 레이더스(Raiders of the Lost Ark)와 비슷할까? 그러나 강당 안으로 열 걸음을 들어가도 얼굴이 녹아내리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평범한 예배이다. 찬양하는 큰 소리가 있을 뿐이다. 오후 1시 5분, 자리에 앉은 나는 청중 속으로 스며든다. 대부분이 백인이고 옷을 보면 중산층이다. 그리고 거의 모든 사람이 채플 공간을 존중하고 있다. 그렇다고 획일적인 청중은 아니다. 히스패닉, 흑인, 아시아인, 아프리카인도 있다. 누군가는 예배를 드리고, 누군가는 촬영을 하고, 누군가는 수다를 떤다. 물론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촬영하는 사람들도 어느 정도는 예배에 동참하고 있다. 잡담하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고는 잠시 사람들을 관찰하더니 밖으로 나간다. 불현듯 1차 대각성 때에도 이런 식의 관찰자가 참석했을지 궁금하다. 한 남자가 무대 위에 올라가더니 우리에게 앉으라고 한다. 성경을 읽고는 우리가 왜 여기에 있는지 그 이유를 묵상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옆자리에 있는 서로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한다. 나는 오하이오에 있는 은사주의 교회에서 온 사람들을 향해서 돌아섰다. 다양한 예언 집회에 참석했지만, 이런 경험을 한 적은 없다는 게 그들의 고백이다. 그들의 말을 빌자면, “다른 집회만큼 강력하고 매력이 있지만, 훨씬 덜 자극적(sensational)”이란다. 내 오른쪽에 있는 인도인 부부가 함께 기도하자고 한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운전하고 왔다는데, 주님께서 확실한 사역의 길을 보여주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온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서로를 위해 기도한다. 나는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중보 기도에서 큰 감동을 받았다. 서로 누군지 알 리 없는 사람들이 눈을 감고 한 마음이 되어 큰 소리로 기도한다. 이것은 특별한 경험이다. 기도를 마치자 그들은 내게 고맙다고 말하고는 방을 나간다. 기도 시간이었기에 나는 중보 기도할 사람의 목록을 핸드폰에 적었다. 주님께서 이사야 55:6을 내 마음에 주신다: “너희는, 만날 수 있을 때에 주님을 찾아라. 너희는, 가까이 계실 때에 주님을 불러라.” 가족과 교회 지도자, 소그룹 구성원 등등 최대한 많은 사람을 기억하고 중보하려고 노력한다. 고작 5분 지난 거 같은데, 시계를 보니 이미 한 시간 반이 넘게 기도하고 있다. 이 공간에서는 시간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아예 다르게 흐르는 것 같다. 천국이 이럴까? 부흥에도 리더가 있어야 한다지나치게 조율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구잡이로 구성되지도 않은, 나름의 조율된 노력이 이 모임 뒤에 있음을 알아차렸다. 강당 앞에 스무 명 정도의 스태프가 단체 문자로 이야기를 나누며 계획을 세우는 것 같다. 함께 기도하지 않을 때 그들은 청중으로부터 조금 떨어져서 휴대폰을 보고 또 메시지를 보낸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대부분이 아니라 일부에 불과하다. 리더들 대부분은 기도에 치중한다. 그들과 함께 기도하기 위해 사람들이 물결처럼 계속해서 앞으로 나가고 있다. 이건 마치 빌리 그레이엄 전도 집회(Billy Graham Crusades)를 담은 오래된 VHS 테이프에서 본 것과 비슷하다. “스태프”가 누군지는 알 수 없다. 무대나 복도에서도 특정 이름이 언급되는 일은 거의 없다. 갑자기 한 남자가 일어나더니 성경을 읽고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지도하던 모임을 기억하라고 한다. 그러고는 그리스도를 위해 이 세대를 전도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는데,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단지 지역 교회 목사라고만 할 뿐이다. 뮤지션도 자신을 소개하지 않는다. 이름을 알리겠다는 충동이나 자아 고취 욕망은 찾아볼 수 없다. 주목받는 유일한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에즈베리에서 나를 놀라게 한 단 한 가지를 꼽으라면 바로 이 점이다. (이 모임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한) 소셜 미디어 시대지만 굳이 소셜 미디어를 사용하여 이 부흥의 불길을 더 부채질하겠다는 전담 직원은 없는 것 같다. 오히려 스태프는 하나같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오로지 예수님만이 인도자가 되실 수 있도록 말이다. 그나마 얼굴을 알리는 사람은 찬양을 인도하는 학생들이다. 에즈베리 대학교에 운집한 사람들 / Courtesy Doug Hankins아마도 학생들이 인도하기 때문이겠지만, 내 기준에서 볼 때 대부분 찬양이 최신 경배와 찬양 곡—Maverick City의 “Firm Foundation”과 “Promises”; Brandon Lake의 “Gratitude”와 “House of Miracles”; 그리고 “Waymaker” “Nothing Else” “Forever” “Tremble” “Great Are You Lord” “No Longer Slaves”—이다. 2000년 이전에 작곡된 곡은 “Jesus Loves Me” “I Love You Lord” “Sanctuary” “Agnus Dei”가 유일하다. 유일한 찬송가는 “내 영혼 평안해”(It Is Well with My Soul)이다. 가사나 이미지를 담은 스크린도 없다. 오로지 기도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이다. 최신 워십 송을 모르지만 나는 휴대폰에서 가사를 검색해서 따라부른다. 이토록 많은 사람으로 붐비는 오래된 건물에서 휴대폰 수신이 문제가 되는 건 아닐까? 내 걱정은 기우였다. 평범한 모든 것들이 부흥을 떠받치고 있다. 원활한 휴대폰 수신, 구글 검색, 그리고 찬양 가사를 담은 웹사이트까지.각성에도 휴식이 필요하다모임 속 다양한 지점에서 스태프는 질서 유지를 위해서 청중을 섬긴다. 한 남자가 이층에 있는 사람들에게 백 년 된 발코니에서 뛰어내리면 안 된다고, 대신 일층으로 가서 예배에 참석하라고 친절하게 안내한다. 그 말을 들은 청중은 큰 소리로 웃는다. 그리고 일층에 앉아있던 청중은 이층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을 위해서 조금씩 안쪽으로 움직이며 앉을 자리를 만들어준다. 평범한 관심이 비범한 겸손과 은혜를 만날 때 피어나는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인가!이 시점에서 나는 야구 경기에서 한 이닝이 끝났을 때 화장실과 매점에 가려고 일어나는 것처럼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내 눈에는 청중이 자연스럽게 퇴장할 수 있도록 리더들이 의도적으로 휴식 시간을 조정하는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줄 서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추가 공간이 만들어진다. 정리 시간의 타이밍은 찬양 인도자 교체로 이어진다. 여러 그룹의 학생들이 찬양을 인도하는데, 정해진 시간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동안 계속한다. 평균 45분에서 한 시간 사이이다. 한 팀이 진행하는 찬양은 45분보다 짧지 않고 또 90분을 넘지 않는다.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관성이 있다. 그 정도의 지속 시간이 청중의 요구에 가장 잘 맞는 리듬인 것 같다.현실적인 질문들에 답을 얻다몇 시간 동안 기도하고 찬양하고 또 성경을 읽은 후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비로소 내 눈에 이름표가 달린 끈을 매고 있는 리더들이 보였다. 이제 몇 가지 현실적인(practical) 질문들 할 시간이 되었다. 그들은 침착함과 인내심을 잃지 않고 모든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나는 에즈베리 스태프가 보여준 온화한 성품, 일관된 관심, 공감 능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들은 휴즈 강당 지하에 있는 화장실로 나를 안내했고, 일정에 따라 화장실을 청소한다고 알려주었다. 화장실에는 공공장소에서 쓰는 큰 펌프 비누 용기가 걸려있다. 수건은 창턱에 쌓여 있고 쓰레기는 넘치지 않았다. 누군가 물품을 채우고 빠르게 청소하고 나간 것 같다. 애초에 이 화장실은 수천 명이 끊임없이 사용할 걸 고려해서 만든 게 아니기에 빠른 청소가 매우 중요하다. 강당 앞에 간식과 물병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강당 주변에서 식사는 하면 안 된다. 그래도 이런저런 물병을 가져오는 사람이 있는데, 스타벅스 컵은 눈에 띄지 않는다. 재충전을 위해 몰래 빠져나와서 뭔가를 마셔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남 눈치 보지 말고 그렇게 하면 된다. 아무도 그런 사람을 정죄하지 않는다. 잔디밭에서는 한 교회가 ‘리틀 시저스’ 피자를 나눠주고 있다. 동쪽 잔디밭에는 푸드 트럭을 끌고 온 남자가 무료로 음식을 나눠주고 또 ‘무료로’ 중보 기도를 해주고 있다. 아, 평범함과 특별함의 조화이다. 잔디밭 앞에서 무료로 음식을 나눠주는 푸드 트럭 / Courtesy Doug Hankins 다시 밖으로 휴즈 강당에서 몇 시간 더 있다가 다시 밖으로 나갔다. 방과 후에 도착한 부모와 아이들이 잔디밭에 피크닉 담요를 깐다. 미식축구공과 축구공이 여기저기에서 날아다닌다. 일부 음유시인들이 즉석 예배 콘서트를 위해서 나무 주위에 자리를 잡는다. 아직도 천 명 정도가 여전히 줄을 서 있다. 오후 6시가 되자 숫자는 두 배가 되고, 잔디밭에 모이는 사람은 무려 수천 명을 헤아린다. 기술팀이 휴즈 강당 앞에는 야외 스크린을, 그리고 길 건너 에스테스 채플에는 실내 스크린을 준비해서 휴즈 강당 안의 모습을 라이브로 송출한다. 에스테스 채플에도 이백 명이 모여있다. 캠퍼스 근처에 있는 빈야드 교회에도 사람들이 있고, 거기에서도 라이브 방송이 진행된다. 라이브 방송에서 피아노 연주자가 에베소서 3:14-21을 낭독한다. 그러므로 나는 아버지께 무릎을 꿇고 빕니다. 아버지께서는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붙여 주신 분이십니다. 아버지께서 그분의 영광의 풍성하심을 따라 그분의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여 주시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 속에 머물러 계시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이 사랑 속에 뿌리를 박고 터를 잡아서, 모든 성도와 함께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되고,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여러분이 충만하여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가운데서 일하시는 능력을 따라,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욱 넘치게 주실 수 있는 분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아이 하나가 나무에 올라가자, 스태프가 정중하게 내려오라고 한다. 밖에 있는 사람들은 스크린과 스피커를 통해 강당 내부 사람들을 보면서 찬양을 따라 부른다. 아이들이 태그 놀이를 하면서 놀고, 부모들은 커피를 마신다. 경찰관 몇 명이 수다를 떨고 있다. 이동식 화장실로 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기숙사로 돌아가는 학생들이 군중 사이를 지나간다. 휴대폰으로 셀카를 찍는 사람,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한 남자가 홀로 서서 조용히 기도하고 있다.현실적이고 영적이며 평범하고 특별하다. 이것이 모두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에베소에 보내는 서신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했던 바울, 그의 마음도 이랬을 것이다.원제: Ordinary and Extraordinary: A Day at the Asbury Awakening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부흥
부흥운동
대각성운동
애즈베리부흥
이상하게도 마음이 뜨거워지다
애즈베리 대학교 부흥
by Fred Sanders‧Joe Henderson
2023-03-24
2023년 2월 8일 수요일, 애즈베리 대학교(Asbury University)의 아침 채플이 끝나고 좀 더 기도하려고 남은 학생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평화와 사랑이 임했다. 그리고 더 많은 학생이 참여하기 시작했다. 수백 시간이 지났는데도 모임은 여전히 계속되었고, 수천 명의 순례자가 놀랍고 지속적인 영적 갱신을 체험하기 위해서 켄터키 윌모어(Wilmore)로 모여들었다. 애즈베리 대학교는 그것을 “분출”(outpouring)이라고 표현했고, 길 건너에 있는 애즈베리 신학교는 “각성”(awakening)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소식을 접한 인터넷은 바로 “부흥”(revival)이라고 명명했다. 우리 두 사람은 윌모어와 정반대편에 있는 캘리포니아에서 가르치고 있지만 애즈베리는 우리에게 특별한 곳이다. 조는 아예 윌모어에서 자랐고 지금은 종합대학이 된 애즈베리 대학(Asbury College)을 나왔다. 우리는 애즈베리 신학교(Asbury Theological Seminary)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면서 만났다. 그래서 우리는 그 작은 마을에 있는 관계자들과 친구들이 전해주는 고무적인 이야기들을 확인해 볼 수 있었다. 애즈베리 부흥에 관해서 사람마다 다 나름의 생각이 있겠지만, 그중 대부분이 일반적인 부흥에 대한 의견 정도이다. 전반적인 측면에서 부흥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미국 서부에서 사는 애즈베리 출신(Asburians)으로서 우리는 윌모어라는 동네의 역사와 맥락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면서 지금 일어나는 부흥의 순간을 설명하려고 한다. 우리가 연결하는 몇 개의 지점(dots)을 통해 외부인도 이 부흥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역사적 맥락애즈베리 대학교는 기존 교회에서 경험하는 영적 삶이라는 부흥의 시초가 되었던 웨슬리 전통 위에서 설립되었다. 미국인이 최초의 대각성 운동이라고 부르는 18세기의 운동은 영국에서 복음주의 부흥 운동으로 알려져 있다. 그 운동은 존과 찰스, 웨슬리 형제의 설교에 크게 힘입어 영국 교회의 갱신으로 이어졌다. 웨슬리 형제와 그 동료들의 변혁적인 설교가 시작한 곳은 지극히 평범한 어느 예배당이었다. 그들이 그 교회 예배에 참석했을 때, 존의 표현대로, 그들의 마음이 “이상하게 따뜻해졌다.” “[하나님이] 내 죄, 심지어 내 모든 죄를 제거하시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내 속에 주어졌습니다.”존 웨슬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으며, 그 경험은 그로 하여금 역사적으로 강력한 사역과 섬김, 선포의 삶으로 이끌었다. 그로부터 거의 3세기가 지난 후, 윌모어의 학생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웨슬리 형제가 체험한 것과 비슷한 놀라운 체험을 간증한다. 감리교 운동이 확산해 가면서 존 웨슬리는 프랜시스 애즈베리(Francis Asbury)에게 미국 식민지의 사역을 위임했고, 그는 감리교 사역을 미국으로 확산했다. 차를 타고 윌모어로 지나면 말을 탄 프랜시스 애즈베리 동상을 지난다. 다름 아니라 두 대륙을 이은 18세기 위대한 부흥의 연결 고리이다. 애즈베리 대학교 고유의 다양한 웨슬리(Wesleyan) 영성은 미국의 성결(Holiness) 운동에 의해 더욱 더 깊어졌다. 그 운동의 슬로건은 “봉헌”(consecration)이다. 이 전통의 영향을 받은 교회는 본당 성소 앞에 제단 난간이 있다. 설교로 도전을, 또 찬송으로 감동을 받은 사람은 제단으로 올라와 자신을 하나님께 봉헌한다. 포브 파머(Phoebe Palmer)는 19세기에 제단 신학을 설명했다. 일단 개념을 어느 정도 알게 되면, 이것이 미국 복음주의에 얼마나 널리 퍼져 있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오래된 노래 “Trust and Obey”(바이올라의 한 교수가 작사)에는 이런 가사가 들어있다. “증명할 수는 없지/ 그의 사랑이 주는 기쁨을/ 제단 앞에 나 자신을 바치기 전까지는.”웨슬리 전통과 성결 운동에 뿌리를 둔 사실 외에도 애즈베리 대학교는 이번 주 뉴스에 나오는 동일한 예배당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독특한 지역 부흥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50년, 1958년, 그리고 1970년에도 바로 그곳에서 부흥이 있었다. 그 여파는 오늘날까지도 지역 사회 속의 생생한 기억으로 남을 만큼 컸고, 그에 관한 몇 권의 책이 쓰일 정도로 중요한 사건이었다. (다음 책을 참고하라. Halls Aflame: An Account of the Spontaneous Revivals at Asbury College in 1950 and 1958 by Henry C. James and Paul Rader, 그리고 One Divine Moment: The Account of the Asbury Revival of 1970 edited by Robert E. Coleman and David J. Gyertson).콜맨과 자이어슨(Gyertson)의 책 제목, ‘One Divine Moment’(신성한 한순간)은 1970년 부흥회 때 애즈베리 대학교 총장이었던 데니스 킨로(Dennis F. Kinlaw)의 말에서 따온 것이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신성한 한 순간을 내게 허락하여 주십시오. 수 세기에 걸친 인간의 모든 노력보다 그 한순간이 훨씬 더 가치 있고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킨로가 말하는 한순간이 언제인가? 살아계신 하나님이 자신의 시간표에 따라서 능력과 거룩함으로 스스로를 알리시는 부흥의 순간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며 겸손하게 기대라는 신자의 전통을 말한다. 2월 8일부터 지금까지휴즈 기념 강당(Hughes Memorial Auditorium)이라는 캠퍼스 예배당의 모퉁이 돌에는 두 개의 모토가 새겨져 있다. “모두에게 거저 주시는 구원, 모든 죄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나는 참 구원”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기를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서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히 12:14). 예배당에서 울려 퍼지는 설교는 언제나 값없이 주시는 구원의 선물과 변화된 삶으로의 부르심으로 특징지어져야만 한다. 지금의 부흥이 시작된 2월 8일 채플 예배에서 잭 미어크리브(Zach Meerkreebs) 목사는 로마서 12장에 제시된 표준에 따라 거룩하게 살라고 강권했다. 13절 속에 담긴 서른 계명은 오염되거나 위선적인 또는 왜곡된 사랑이 아닌 온전함으로 서로를 사랑하라고 듣는 이를 초청한다. 미어크리브 목사의 결론은 명확했다. 이 구절이 요구하는 사랑은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구절이 말하는 방식으로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 예수님의 사랑으로 온전히 채워지기 전에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는 사랑한다 (요일 4:19). “행동으로 사랑을 드러내고 싶습니까? 그럼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해야만 합니다.”그날 그의 설교가 특별히 대단했던 것은 아니다. (나중에 미어크리브 목사는 그날 설교가 형편없었다고 자평했다.) 그러나 그 설교에는 로마서라는 깊이가 더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설교는 거저 주시는 은혜와 완전한 구원이라는 웨슬리의 성결이 강조하는 바를 정확하게 전달했다. 학생들은 초대를 들었고, 거기에 응답했다. 이어서 진행된 예배가 선정적이거나 극적이었던 것도 아니다. 라이브 스트림으로 보는 그 현장은 중간중간 지루해 보이기도 한다. 함께 기도하는 모습, 조용히 찬양하거나 성경 읽는 것 외에는 볼 게 없었다. 모두가 다 앞을 향하고 있었지만, 무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순례자가 하나둘 도착하기 시작했고, 어느새 군중이 만들어졌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심령을 새롭게 하는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경외심과 하나님의 사랑이 주는 감미로움을 간증한다. 하지만 이 모든 드라마는 보이지 않게 진행되었다. 학생 중심지금 세대 대학생은 팬데믹의 혼란이라는 독특성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팬데믹은 그들의 계획을 방해했을 뿐 아니라 질병과 죽음에 맞서도록 강요했다. 그리고 발달이라는 측면에서 민감한 단계에 있는 그들을 고립과 혼란에 빠뜨렸다. 삶의 지평을 확장하길 바라고 들어간 대학에서 그들이 정작 만난 사회적 환경은 축소였다.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불안과 우울증으로 특징지어지는 것이 지금 시대의 대학생이다. 이들이 바로 켄터키에 있는 기독교 대학에 등록하고 다니던 중에 갑자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강력한 사랑을 경험하도록 초대받은 젊은이들이다. 이들이 바로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기도와 예배를 계속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대학 지도부와 협력하기 위해서 나선 학생들이다. 부흥은 학생을 중심으로 이루어지지만, 대부분 길 건너 신학교에서 건너온, 눈앞에서 벌어지는 부흥을 해석하고 싶어 하는 많은 학자들에게도 축복이다. 이전 시대 부흥의 전문가인 로버트 콜먼(Robert E. Coleman)은 말할 것도 없고, 톰 맥콜(Tom McCall), 크레그 키너(Craig Keener), 로슨 스톤(Lawson Stone), 스티브 시맨즈(Steve Seamands) 및 많은 학자가 참석했다. 이들은 현세대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목격하는 데 영적으로 열린 현명하고 비판적인 사상가이다. 1월 4일 게시된 블로그 게시물에서 애즈베리 신학교의 티모시 테넌트(Timothy Tennant) 총장은 이렇게 썼다. 2023년 1월은 “우리가 좋은 소식을 더 널리 뿌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 굳건히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 굳건히 신뢰해야 하는 부흥의 전 단계입니다.” 이 특별한 축복의 시기에 분별력을 가지고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책임감 있고 다세대적인 지도력이 현재 마련된 상태이다. 할렐루야!윌모어에서 일어나고 있는 각성, 부으심, 또는 부흥의 의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애즈베리에 사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서 부흥의 물결이 높이 일었다가 다시 사그라든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한편 윌모어에서 특별한 일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빠르게 퍼진다. 다른 대학과 신학교에서도 그들만의 깨달음의 순간을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켄터키의 작은 윌모어에서 시작한 부흥의 시초를 체험하기 위해서 지금도 순례의 길을 떠나고 있다. 윌모어까지 직접 오는 사람이든 멀리서 관찰하는 사람이든, 그들은 다양한 교회와 교단에 속하고 있다. 비록 지금의 각성이 웨슬리의 영향을 받은 특정한 종류의 복음주의 대학생들 사이에서, 그들의 영적 유산이 근거가 되어 일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애즈베리가 이 운동의 소유자는 아니다. 이 부흥은 애즈베리만의 것이라고 도장을 찍지도 않는다. 휴즈 강당의 좌석 수는 1,485개에 불과하지만, 수백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이 평범한 강당에서 일어나는 역사에 관심을 기울였다. 우리 시대에도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을 아는 것이 가능하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고 있다.애즈베리의 부으심에서 배우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광범위한 영적 갈망이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이 갈망은 18세기와 21세기가 다르지 않다. Z세대와 그들의 부모, 조부모, 나아가서 증조부모 세대와도 다르지 않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강렬한 배고픔이다.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갈망이 우리 마음에 영감을 주어 우리 영혼을 준비시키기를 바란다. 그래서 어디에 있든지, 우리의 심령이 “이상하게 따뜻해져서” 새로운 예배, 되살아나는 거룩함,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기 전에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분과의 더 깊은 친밀함으로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원제: Hearts Strangely Warmed at Asbury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에즈베리대학교
부흥
대각성운동
성결운동
팀 켈러는 유신진화론자인가?
by 고상섭
2023-03-23
2023년 3월 17일, 기독교학술원이 “팀 켈러의 유신진화론 비판적 성찰”을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했다. 팀 켈러가 그의 에세이 “창조, 진화, 그리고 그리스도인 평신도”(Creation, Evolution, and Christian Laypeople)[1]에서 주장한 내용을 거론하며 그의 주장이 유신진화론적 입장이라는 비판과 함께 그 위험성과 그의 창세기 해석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세미나였다. 먼저 나는 창세기에 대해 팀 켈러와 다른 관점을 가진 개혁주의 진영의 목회자임을 밝힌다. 창조론을 믿고, 6일 창조를 믿고, 창세기 1-2장이 역사적 기록임을 나는 믿는다. 그러면서도 나는 나와 견해가 다른 팀 켈러의 입장을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을 여기서 말하고자 한다. 팀 켈러를 통해 내가 배운 것 중 하나는 복음의 겸손이며, 이것은 다른 사람과의 연합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이런 복음의 관대함은 때때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것 같다. 팀 켈러의 주장은 과연 비판받아 마땅할까? 아니면 견해가 다르지만 수용가능한 것일까? 팀 켈러를 존경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후자에 좀 더 무게를 두고 설명해 보려고 한다. 창세기 1-2장 해석 문제 기독학술원 원장인 김영한 교수는 팀 켈러가 창세기 1-2장을 사실이 아닌 비유로 해석한다며, 그를 타협주의자라고 비판한다. 또한 팀 켈러는 ‘24시간 6일’ 창조를 부인하고 ‘오래된지구론’을 믿기 때문에 성경의 정통 복음주의를 벗어났다고 말한다. 이는 성경의 어떤 부분도 창세기 1-2장이 비유적인 글이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김 교수는 주장한다. 이런 비판만 들으면 마치 팀 켈러가 성경의 계시와 권위를 무시하고 과학을 받아들이는, 말하자면 성경의 무오성을 부인하는 사람처럼 들린다. 하지만 팀 켈러의 의견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팀 켈러는 창세기 1장 전체가 산문인 것은 아니라고, 즉 여기에는 시적 요소가 있다고 주장한다. 에드워드 J. 영이 말하는 ‘고양된 준-시적 언어’(exalted semi-poetic language)가 창세기 1장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에드워드 영은 시적 언어를 말하면서도 창세기 1장이 시는 아니라고 정의하지만, 팀 켈러는 에드워드 영의 ‘고양된 준-시적 언어’를 차용하면서 시로 읽어야 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2]또 팀 켈러는 창세기 1장이 시적 요소로 볼 수 있는 근거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동일한 문구의 7번 반복과 “∼이 있으라” “그대로 되니라”의 반복을 통해 단순한 산문으로 볼 수 없다고 말한다. 또한 태양(큰 광명체)과 달(작은 광명체)를 묘사하는 용어도 매우 독특한, 성경 어디에도 쓰인 적이 없는 시적 언어이며, “땅의 짐승”이라는 단어도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시를 쓸 때 동물을 지칭하는 용어라고 설명한다. 팀 켈러는 커버넌트 신학교 구약학 교수인 존 콜린스의 창세기 주석을 인용하면서 창세기 1장을 산문이지만 또한 시적 언어를 포함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를 고양된 산문 서술(exalted prose narrative)이라 부를 수 있다. 이 장르의 이름은 여러 면에서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사실 주장을 다루는 산문 서술을 포함한다. 둘째, 이를 … 문자 그대로 해석하도록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팀 켈러는 창세기 1장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어려운 근거를 2장과 비교를 통해 설명한다. 창세기 2:5은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구절은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아서 초목과 밭에 채소가 나지 않았다는 것을 통해 대기와 비가 존재하기 전 식물이 없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창세기 1장의 창조의 순서를 보면 비가 내리기도 전에, 사람이 창조되기 전에 식물이 있었다고 말한다. 결국 2장의 근거로 1장을 해석하게 되면 창세기 1장이 자연 질서를 무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태양이 존재하기도 전에 세 번의 ‘아침과 저녁’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팀 켈러의 창세기 1-2장 해석에 오류가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도 팀 켈러의 창세기 1-2장 해석을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팀 켈러는 사사기에 나오는 드보라의 사건(4장)과 드보라의 노래(5장)처럼 창세기 1-2장을 역사적 기록과 함께 선포하는 시적인 노래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창세기 1-2장이 역사적 선언이며 산문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그러나 팀 켈러의 주장을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는 주장이라고 단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는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그 쓰인 장르대로 읽어야 한다는 성경해석의 원칙을 말하는 것이다. 팀 켈러의 해석이 마음에 들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시를 시로, 산문을 산문으로, 서신을 서신으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은 틀린 말이 아니다. 창세기 1-2장에 대한 그의 장르 이해가 다를 뿐이다. 그리고 그런 주장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와 달리 나는 창세기 1-2장을 산문으로,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지만, 그의 주장도 일리가 있는 주장 정도로 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6일 창조’ 문제 팀 켈러는 창세기 1장의 창조 순서가 문자적 24시간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창세기 1장의 창조 순서가 시적인 표현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24시간/6일 창조를 믿는 사람들은 팀 켈러의 주장을 비판하는 것이 옳은가? 나는 24시간/6일 창조를 믿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 근거는 창세기 1장에서 명확하게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8-11). 여기서 하나님은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시면서, 하나님이 엿새 동안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말씀하고 있다. 만약 6일 창조가 아니고 긴 시간의 창조였다면 안식일을 말씀하시면서 7일의 패턴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를 근거로 우리의 안식일을 말씀하시기 때문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표현대로 6일 창조를 믿는다.[3]그러나 내가 6일 창조를 믿는다고 해서 팀 켈러의 주장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고 싶지 않다. 팀 켈러는 창세기 1장의 창조 순서를 통해서는 6일 창조라고 명확히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흔히 24시간으로 생각하는 히브리어 ‘욤’의 용례도 24시간이 될 수도 있지만, 더 긴 시간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단어이다. 나는 팀 켈러의 주장대로 넷째 날 해와 달이 만들어지기 전에 더 긴 시간이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6일 창조보다 더 긴 시간 창조가 되었을 가능성을 무조건 부정하는 것도 바람직한 태도는 아닌 것 같다. 창세기 1장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긴 시간 창조를 믿을 수 있는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명백한 문제라기보다 해석의 차이가 있을 수 있는 영역이다. 그리고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다. 6일 창조를 믿지만, 6일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의 신앙에 큰 영향을 주는 잘못된 일은 아닐 것이다. 6일이 훨씬 더 성경적 근거가 있다고 생각이 되더라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해석이 모두 오래된지구론이라는 과학을 믿기 때문에 성경을 억지로 끼워 맞추는 시도라는 해석은 너무 극단적이다. 6일 창조를 믿더라도, 히브리어 ‘욤’에 대해 좀 더 다양하게 해석하는 사람들의 해석을 좀 더 열린 입장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 않을까? 젊은지구론/오래된지구론 문제 나는 오래된 지구를 믿지 않는다. 그렇다고 젊은지구론을 믿는 것도 아니다.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기 때문에 창세기 1-2장은 지구의 나이가 중요한 주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구가 오래되었건 그렇지 않건 두 가지는 성경에서 명백히 밝히는 주제가 아니라고 생각되어 유보하는 입장이다. 젊은 지구일 수도 있고, 나이 든 지구일 수도 있고, 또 하나님이 아담을 성인 아담으로 처음에 창조하셨듯이 나이 들어 보이는 지구를 창조하셨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을 ‘성숙한 지구론’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지구의 나이가 젊은지, 나이 들었는지, 성숙한지에 대해 창세기 1-2장으로 명확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가? 팀 켈러는 오래된지구론을 주장하는 사람이지만, 그것은 그가 과학적 근거를 성경보다 더 우위에 두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성경해석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된 것이다. 나는 팀 켈러의 오래된지구론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팀 켈러의 주장은 수용가능하다.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다. 오래된지구론, 젊은지구론을 창세기 1장을 가지고 너무 명확하게 말하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 유신진화론 문제 팀 켈러는 유신진화론자인가? 아마도 유신진화론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명백한 유신진화론자일 것이다. 그러나 팀 켈러가 주장하는 창세기의 해석은 진보적 유신진화론자들이 말하는 것과 다른 부분이 많다. 팀 켈러는 다른 유신진화론자들처럼 여러 아담이 동시에 존재했다고 믿지는 않는다. 한 사람 아담의 타락과 한 사람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한 우리의 구원론을 명확히 이해하고 설교한다.[3]그럼 팀 켈러는 왜 유신진화론자라고 공격받는가? 팀 켈러는 진화에 대해서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한다. 진화적 생물 변의 과정인 EBP(Evolutionary Biological Process)와 인간의 모든 측면을 진화로 설명하려는 진화 대이론인 GTE(The Great Theory of Evolution)로 나눈다. 팀 켈러는 EBP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인이 수용가능하지만, 진화론적 세계관을 주장하는 GTE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런 팀 켈러의 주장은 단순히 팀 켈러 혼자만의 주장이 아니라 다양한 학자들로부터 지지받는 학설이다. 칼빈 대학교 석좌교수를 역임한 앨빈 플랭팅가 교수는 ‘과학과 종교, 양립할 수 있는가?’(Science and Religion: Are They Compatible?)라는 저서에서 현대 진화론은 유신론과 양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연주의적 세계관은 양립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자연주의적 세계관은 실제로 진화와 양립하기 어렵다. 따라서 과학과 종교(또는 과학과 유사종교) 사이에 갈등이 있기는 하지만, 그 갈등은 자연주의와 과학 간의 갈등이지, 유신론적 종교와 과학 간의 갈등은 아니다. 진화론이 자연주의와 묶일 때는 신의 설계를 부정하게 되지만, 진화론 자체만으로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18).앨빈 플랜팅가와 팀 켈러의 주장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팀 켈러가 나누는 진화의 두 가지를 동의하지 않더라고, 그는 창세기 1장에서 진화론을 말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는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지만 현대 과학에서 EBP가 창조의 과정에 사용되었다면 성경은 그것을 포함할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팀 켈러는 그의 에세이에서 명확하게 “창세기 1장은 진화 또한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실제 과정을 다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 유신진화론이라는 단어 자체를 부정적으로만 보는 시각도 있지만 유신진화론 안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한국교회탐구센터가 주관한 강좌, “창세기를 통해 본 과학과 신앙의 쟁점”에서 합동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를 역임한 송인규 교수는 유신진화론 안에서도 다섯 가지 정도의 다른 주장들이 있다고 설명한다. 그중 양극단의 두 이론을 제외한 세 가지 보수적, 중도적, 진보적 입장을 언급하면 송인규 교수 본인은 창조론을 믿고 있지만 유신진화론 중에서 보수적 입장과 중도적 입장은 수용가능하지만 진보적 입장은 수용할 수 없다고 결론 내린다.[5]나는 송인규 교수의 주장 또한 모두 다 수용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유신진화론 중에서 보수적 입장이 취하는 것 중에서 어느 정도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지만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데는 동의가 되는 점도 있다. 인류의 첫 조상인 창세기의 아담을 고생물학의 증거와 신학적 기사 사이를 구별하는 경향에 대해서는 받아들일 수 없지만, 생물학적 진화의 메커니즘을 하나님의 섭리적 다스림 가운데 병합시키는 것은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그럴 수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결론 나는 창조론을 믿는 사람이다. 창조론 중에서도 즉각적 창조론을 믿는다. 그래서 24시간/6일 창조를 나의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 켈러를 유신진화론자라고 비판하며 그의 해석을 전부 거부하고 싶지는 않다. 팀 켈러는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만 창세기 1장을 산문과 함께 시적인 요소로 이해해야 성경이 쓰인 장르대로 해석한다고 생각한다. 나와 다르기는 하지만, 그의 해석 또한 성경의 권위를 존중하는 자세에서 나온 것이라 믿는다. 우리는 좀 더 겸손하게 자신의 믿음을 지키면서도 상대방을 존중하며 연합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팀 켈러는 데릭 키드너의 글을 인용하며 그의 에세이를 마무리한다: “이는 모험적인 제안이며 임시적이며 개인적인 견해이다. 더 나은 지적과 이론들이 제기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이것이야말로 이 분야에서 일하는 우리 모두가 취해야 할 바른 태도입니다.” 유신진화론을 조금이라도 인정하면 성경의 권위가 무너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앨빈 플랭팅가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다.무신론을 지지해주는 과학적인 증거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 유신론을 반박하는 과학적 증거가 있다고 가정하자. 그렇다고 해서 유신론이 거짓이라거나, 유신론자들의 믿음이 반박됐다거나, 유신론의 믿음이 비합리적이거나 거기에 문제가 있다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는다. 과학적이건 아니건 간에 유신론을 지지하는 증거도 있기 때문이다. … 또한 유신론적인 믿음이 정당성을 보장받기 위해서 현대 과학에 의존할 필요는 없다(과학과 종교, 양립할 수 있는가?, 43).나는 목회자이고 과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유신진화론의 다양한 스펙트럼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이해하거나 정확한 주장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설명들 가운데 성경이 말하지 않는 부분들을 잠정적 인정한다고 해서 성경의 권위가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창조론을 믿는다고 창조의 과정 중에 진화의 요소가 들어갈 수도 있다는 주장들에 대해 반드시 거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팀 켈러를 ‘유신진화론자’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유신진화론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지만, 보통 유신진화론자라고 하면 부정적 프레임이 씌워지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단지 창세기의 해석을 다르게 하면서 진화적 방식을 수용하는 사람 정도로 이해하고 싶다.물론 나는 팀 켈러의 관점과는 전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팀 켈러의 의견을 비판하면서 배격하기보다는 하나의 잠정적 의견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어쩌면 우리는 천국에서 함께 만나 웃으면서 창세기의 다른 관점들을 아주 재미있게 이야기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주]1. “Creation, Evolution, and Christian Laypeople”은 2009년 10월에 개최된 BioLogos Theology of Celebration Workshop에서 처음 발표되었으며, BioLogos 인터넷 홈페이지에 2012년 2월 23일 자로 올라와 있다.2. 팀 켈러에 대한 비판 중에는 그가 에드워드 영을 인용하긴 했지만 영의 결론과는 다르게 인용했기 때문에 영의 관점을 왜곡했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팀 켈러는 에드워드 영이 말한 ‘고양된 준-시적 언어’만을 인용했고, 그렇기 때문에 시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에드워드 영의 단어를 인용했다고 반드시 영의 결론까지 함께 동의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팀 켈러는 에드워드 영을 왜곡한 것이 아니라 보수 신학자인 에드워드 영도 창세기 1장을 ‘고양된 준-시적 언어’로 해석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일 뿐이다. 3. 4장 창조 1항: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는(히 1:2; 요 1:2, 3; 창 1:2; 욥 26:13; 33:4) 태초에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지혜와 인자하심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하여(롬 1:20; 렘 10:12; 시 104:24; 33:5, 6), 무(無)에서부터 세계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6일 동안에 창조하시기를 기뻐하셨으니, 모든 것이 심히 좋았다(창 1:1-31; 히 11:3; 골 1:16; 행 17:24). 4. 팀 켈러의 로마서를 살펴보면, 그는 명확히 한 사람 아담의 타락과 한 사람 그리스도의 순종에 대한 대표성의 원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설교한다. 또한 그의 논문에서도 창세기 1장은 시적 요소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지만 바울서신은 그렇지 않은 명확한 서술이므로 아담과 하와가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유신진화론은 설득력이 없다고 명확하게 말한다. 그래서 바울이 명확히 말하는 역사적 아담을 부인하는 것은 성경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라고 경고한다. 5. 유신진화론의 다섯 가지 분류는 한국교회탐구센터 과학과 신앙 강좌, “창세기를 통해 본 과학과 신앙의 쟁점”을 참고하라.
유신진화론
젊은지구
24시간/6일창조
오래된지구
더 소중한 순간
by 정현구
2023-03-22
인생에는 세 가지 가장 중요한 시간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태어난 때입니다. 대부분 태어난 날을 복된 날로 생각합니다. 이 땅에서 살아갈 생명을 얻은 날이니 얼마나 복된 날인가요! 그래서 매년 이날을 잊지 않고 축하의 잔치를 엽니다. 그런데 태어난 순간보다 더 중요한 시간이 있습니다. 바로 살아있는 오늘 이 순간입니다. 지금 이 순간이 없다면 우리에게는 삶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의 소중한 가치를 자주 잊고 살지만, 현재가 곧 우리 삶의 현실입니다.그런데 우리에게는 살아 있는 이 순간보다 더 소중한 순간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순간을 좋지 않은 시간으로, 또는 피하고 싶은 순간으로만 여깁니다. 그 시간의 가치를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죽음의 순간입니다.인생은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소멸하고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죽음의 순간만큼 피해야 하는 것은 없습니다. 죽음은 가장 두려운 순간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와 정반대로 말합니다.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전도서 7:1). 죽는 날이 다른 날보다 결코 못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 어떤 날보다 더 좋은 날이라고 말합니다. 죽는 날이 더 좋은 날이 될 수 있다는 말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처럼 죽음의 순간이 가진 의미와 가치를 알고, 인생의 마지막을 두려움이 아니라 기대감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태어난 순간과 현재 살아 있는 순간의 의미가 훨씬 달라질 것이 분명합니다.정현구, 영원을 품고 오늘을 걷다(SFC)에서 간추린 글입니다.
전도서
죽음
죽는날
존경하는 목사님이 추락했을 때
by Hannah De Cleene
2023-03-21
살다 보면 누구나 사람에게 상처받지만, 매주 강대상에 서는 사람으로부터 받는 상처는 차원이 다르다. 부모님에게 복음을 전했고, 내 결혼식 주례까지 한 존경하는 목사님이 알고 보니 그간 여러 교인을 영적으로 학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교회 축구팀을 후원하고 종종 같이 공까지 차며 우리를 돌보던 중고등부 목사님이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아내와 가족을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내 삶에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목사에 대한 기억이 더럽혀지는 느낌을 받지 않을까? 그 목사가 그동안 내게 행한 선과 그가 다른 이에게 행한 악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도덕적으로 실패한 목사 또는 교회 지도자를 만날 때 교인은 보통 다음 두 가지 방식으로 반응한다. 먼저 목사의 실패를 아예 부인하거나 변명한다. “그분이 지난 세월 교회에 끼친 은혜가 얼마나 큰데, 그게 사실일 리가 없잖아? 말이 돼?” 아니면, 아예 사역 전부를 불신하는 경우이다. 달리 말해서, 지난 세월 그 목사의 설교 외 삶에서 배운 모든 것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된다. 이런 양극단의 태도를 피하려면 적절한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은혜를 끼치는 목사라고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고, 나쁜 짓을 했다고 해서 그게 사역의 모든 열매를 다 허사로 만드는 것도 아니다. 긴장 유지성경에는 엄청난 실패를 겪었으면서도 선을 향한 하나님의 쓰임에서 제외되지 않은 사람과 지도자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아브라함과 모세는 친숙한 사례이다. 아브라함은 주님을 믿고 고향을 버리고 미지의 땅으로 간 사람이다. 그게 다가 아니다. 부활의 권능을 온전히 믿으며 아들까지 제물로 드린 믿음의 아버지이다. 그러나 그는 두 번이나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거짓말했으며, 하갈을 통해 아이를 낳자는 사라의 나쁜 계획에 동조했다(창 12:12-14; 16:2-4; 20:2).모세는 또 어떤가? 홍해를 갈라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인도해낸 인물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십계명까지 맡기셨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난 직후에 그는 불신앙으로 물을 내겠다며 반석을 내리쳤다(출 20; 민 20:10-13).그 외에도 결함으로 가득한 다른 사람과 함께 이름이 거론된 이 둘에 관해서 히브리서 11장이 칭찬하는 게 무엇인가? 믿음이다. 아브라함과 모세는 때때로 실패했지만, 그들은 순종함으로 주님께 돌아오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목적이 그들의 실패로 인해서 무력해지는 일은 결코 생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교회 지도자가 저지르는 죄가 무죄 판결이라는 프리패스를 받아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과 헤어졌고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죄의 결과는 심각하고 고통스럽다. 목사의 경우 진정한 회개와 화해가 이뤄질 때까지, 그리고 교회 권징이 온전히 마무리될 때까지 아예 목사 자리에서 내려와야 할 수도 있다. 그런 과정을 거치더라도, 온전한 사역 회복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또는 사역 복귀라는 시도 자체가 현명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스도를 의지하기목사의 추락이라는 충격 속에 남겨진 우리에게 이 모든 상황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한때 사랑하고 존경했던 교회 지도자가 더 이상 내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본받을 대상이 아니라는 슬픈 현실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아예 다른 교회를 찾아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서 그들을 통해서 주신 모든 은혜가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니다. 깨어진 교회를 놓고 주님께 상처와 실망, 심지어 분노를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여전히 그들을 통해서 은혜를 부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는 자세가 의미하는 것이다(벧전 5:7). 목사의 추락이 초래한 감정을 억누르기만 하는 건 현명하지 않다. 그렇다고 원망의 쓴 뿌리라는 죄가 나를 파괴하도록 놔둬서도 안 된다. 대신 말씀을 향해 눈을 돌려야 한다. 히브리서 12:1-2은 우리의 시선을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렇게 구름 떼와 같이 수많은 증인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갖가지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갑시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누구나 예외 없이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경주를 하고 있다. 그러다 보면 교회 지도자의 죄와 연약함이라는 장애를 만나기도 한다. 그들의 실패를 통해서 나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내 속에 깊이 뿌리박은 죄성을 삶에서 떼어내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기억하자. 오로지 예수님만이 완벽한 삶을 사셨다. 이 세상에서 만나는 지도자의 실패를 볼 때마다 우리는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그분만이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자이시다. 지도자가 가진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모두 다 균형감을 가지고 보아야 한다. 예수님만이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해서 붙잡을 가치가 있는 유일한 분이다. 원제: When a Beloved Pastor Fall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목사의타락
아브라함의죄
모세의죄
‘공동체가’ 전도한다는 것
심플리 미셔널 | Simply Missional
by 김선일
2023-03-20
심플리 미셔널Simply Missional탈교회화, 비종교화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선교 과제로서 복음을 새롭게 제시합니다. 기독교의 변증 유산으로부터 오늘을 위한 복음 변증의 지혜를 발굴하고, 현대 한국의 문화적 표현들과 복음의 대면이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폭발적 관심을 끌고 있는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에는 그리스도인 시청자라면 더 불편하게 보았을 캐릭터가 있다. 중견 교회 목사의 딸로 성경에서 그 이름을 따온 게 분명한 ‘이사라’이다. 악랄한 학폭 가해자 중 하나이고 마약에 찌들어 사는 화가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천연덕스럽게 교회에서 성가대원으로 서고, 성경을 곧잘 인용하며, 피해자에게는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라고 경고한다. 그의 어머니는 마약을 한 남녀가 뒤엉켜있는 자리에 무슨 조직의 보스인 양 아주 익숙하고 태연하게 경호원들을 데리고 등장하여 잠든 딸을 깨우며 현장을 수습한다. 목사 아버지가 그 딸을 윽박지르는 이유는 딸의 학폭과 마약중독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져 자신의 위신을 추락시켰기 때문일 뿐이다. 그 또한 탈세 혐의자다. 다소 과도한 설정으로 보이기도 하고,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편견을 담은 것으로 비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드라마가 묘사하고 있는 기독교의 메시지와 그 삶의 괴리를 뼈아프게 되새겨 보아야 한다.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몇몇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소위 ‘교회를 대표하는 이들’(목사와 사모, 그 주변인들)이 함께 보여주는 삶의 행태다. 그것은 교회가 ‘전하는’ 복음과 교회의 ‘공동체적 삶의 양식’ 사이의 간극이다. 이러한 불일치, 부조화, 부조리가 복음을 공허한 ‘좋은 소식’으로 전락시킨다. 필자는 오늘날의 전도는 개인 중심에서 공동체 중심으로 이동한다고 자주 말한다. 그러면 ‘공동체가’ 전도한다는 것에 대해서 회의와 난색을 표명하는 이들이 있다. 집회 전도나 노방전도에서 탁월한 메신저나 신실한 개인이 복음을 제시하는 형태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물론 전도에서 복음을 나누고 설명하는 중요한 가교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개인이다. 그렇지만 그 복음의 내용을 삶의 경험으로 확증하고 생생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공동체이다. 기독교 공동체가 추구하는 삶의 양식은 복음의 언어를 습득하게 하는 통로다. 모든 언어는 그 언어가 쓰이는 문화를 경험함으로써 가장 정확하고 효과적으로 습득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는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종교나 사상이 없다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또한 그의 가르침과 성품으로 빚어지는 특유한(peculiar) 공동체여야 한다.예수 그리스도께 죄 용서를 받은 사람들이 서로에 대하여, 타인에 대하여 어떠한 관용과 환대의 삶을 사는지가 속죄의 언어를 깨닫는 중요한 경험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해관계가 없는 이들이 어떻게 하나를 이루며 서로를 돌보는지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사랑을 맛보는 계기가 된다. 자기의 권리와 욕구보다 다른 이들을 섬기는 데 진심 어린 신자의 모습이 자기를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해하는 통로가 된다. 이러한 실천을 하는 개인도 본보기가 되고 소중하지만, 더욱 근본적인 과제는 공동의 실천과 습관으로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성경의 서신서들이 교회 안에서의 사랑과 용서와 친교를 반복해서 중요하게 다루는 것이다.오늘날은 개인의 정체성과 선택, 취향과 자유가 최우선의 가치로 떠오르고 있다. 이에 부응하여 관계와 공동체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바뀐다. 혈연, 지연, 학연으로 대표되는 끈끈한 연줄의 관계가 관심과 취향에 따라 모이는 느슨한 연대로 대체되고 있다. 개인주의가 심화하고 있지만, 본래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관계와 공동체를 갈망한다. 그래서 SNS나 소셜 앱을 통해 소모임과 커뮤니티들이 번창한다. 단지 관계와 모임의 문법이 변화할 뿐이다. 자신의 관심과 취향을 밝힌 소모임을 만들면 비슷한 관심사를 지닌 사람들이 모여드는 방식이다. 언제든지 들어가고, 언제든지 나올 수 있어야 한다. 자율성과 취향이 가장 존중되어야 할 모임의 기준이다. 관계와 공동체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본질적이지만, 그러한 욕구를 경험하고 표현하는 방식은 변화한다. 코로나 이후 교회들도 소그룹과 같은 공동체적 모임의 필요성을 더욱 실감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위에서부터 구역이나 소그룹을 구성하고 획일적인 의제를 던졌던 교회들이 이처럼 개인의 관심과 취향에 부합하는 관계와 공동체의 문법을 담아낼 수 있느냐는 새로운 도전이 될 것이다(참고: “코로나 이후, 새로운 공동체를 준비하라”). 공동체의 형식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공동체의 핵심 가치이다. 공동체의 형식에 있어서 교회는 현대인들의 변화된 관계 문법인 자율성과 수평성을 최대한 이해하고 그에 적응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 공동체의 핵심 가치를 기반으로 형성되는 그 공동체의 문화와 습관은 개인의 자유와 선택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세속주의와는 분명히 차별되어야 한다. 심지어, 오늘날의 세속적 윤리에서도 비판하는 위계주의, 학벌주의, 배타주의와는 더더욱 거리를 두어야 한다. 필자는 그리스도인 청년 공동체로 인도되어 처음 신앙을 갖게 된 청년의 고백을 인상 깊게 읽은 적이 있다. 그는 여러 사정으로 또래들과는 달리 정규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 없었고 경제적으로도 취약했다. 그런데 이 공동체를 소개받았고, 이들이 표방하는 기독교 정신을 기반으로 한 사회, 문화적 가치에 매료되어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 또래 청년들은 다들 대학을 졸업하고 자기 전공에 따른 경력을 쌓아가고 있었지만, 이 청년은 함께 어울릴만한 학력과 경험이 없었다. 그렇지만 이 공동체는 이 청년을 동등한 일원으로 받아주었고, 그에게 대학 진학에 필요한 무료 과외도 돌아가면서 제공해주었다. 이 청년은 자신을 적극적으로 환대하고 자신이 제기하는 신앙에 대한 의문에도 포용적이고 개방적으로 대화해주는 공동체에 깊은 고마움을 표했다. 포용성과 개방성만이 기독교 공동체를 대표하는 가치는 아니며, 인간을 온전한 회심에 이르게 하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위의 공동체는 시대에 부합하는 매력적인 특성을 지녔음에도 그리스도를 오롯이 신뢰하는 교회로 발전하는 데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자신을 내어주신 그분의 사역과 가르침을 중심으로, 또한 그의 본을 따라 자기를 부인하고 상호 섬김의 공동체를 이루는 곳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대속 사역으로부터 환대와 용서와 사랑과 존중이 생성되어야 한다. 오늘날 관계와 공동체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는 자율적인 취향과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가치를 기반으로 한다. 과연 그와 같은 기초 위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의 고유한 관계에 대한 필요와 진정한 공동체적 소속 열망이 해소될 수 있을까? 교회가 보여주어야 할 것은 자기 부인의 영성과 타인에 대한 환대와 섬김을 실천하는 공동체다. 이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에 견고하게 뿌리 내리며, 그의 가르침과 삶을 기억하고 재연하며 살아내는 공동체다. 이러한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야말로 관계를 갈망하지만 관계를 지속하기에는 너무도 취약한 문화에서 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유력한 방식일 것이다.그러한 공동체적 삶은 교회가 전하는 복음의 진리에 따른 결과나 부산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디모데전서 3:15에서 바울은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라고 선언한다. 이 구절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순서다. 진리가 교회의 기둥과 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인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라는 것이다. 진리의 기반 위에 교회가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기반 위에 진리가 서 있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전하는 진리의 복음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실한 제자들의 공동체 위에서 온전하고 굳건하게 전파될 수 있다. 공동체가 전도한다는 것은 공동으로 전도를 위한 행사나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각자의 은사에 따라 협력하는 것도 포함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보다 더욱 근본적인 공동체적 전도는 기독교 공동체의 고유한 존재 양식과 공동의 습관으로부터 나온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어떻게 이루느냐가 곧 우리가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전하는 증거가 된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평소에 그리스도인들과 기독교 공동체를 접하면서 점진적으로 교회의 일원이 되곤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존 사회적 자본, 곧 인간관계보다 더욱 강력하고 따뜻하고 매력적인 사회적 자본을 제공하는 기독교 공동체에 끌린 것이다. 기독교의 공동체가 함께 추구하고 실천하는 삶은 믿지 않는 이들의 삶과 질적으로 차이가 있을 때 초월적인 복음의 메시지와 조화를 이룰 것이다.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전도의 어려움은 바로 이처럼 차별화된 공동체를 경험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조사에 의하면, 그리스도인 청년들의 개인 윤리적 생활에서 비그리스도인 청년들과 거의 차이가 없다. 양극화된 사회에서 정치적 적대성과 편향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목회자와 교인들에게서 복음으로 인한 화해와 환대를 경험하기란 만무하다. 환경 문제에 대한 아무런 고민 없이 쓰레기를 양산하는 교회의 행사와 모임에서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대한 책임 있는 감수성을 발견할 수 없다. 문제는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 아니라, 그 복음의 내용이 가리키는 삶의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복음전도 방법의 부재가 아니라, 복음의 실체를 경험하고 표현하는 공동체의 부재가 문제이다. 초기 기독교는 박해와 위협 가운데서도 실질적인 전도를 이루었고 교회는 성장했다. 공개적인 전도가 금지된 상황에서 초기 기독교는 그들의 대조적인 생활방식으로 복음을 전했다. 2세기의 기독교 철학자 아리스티데스는 당시 황제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기독교 공동체의 삶을 이렇게 전한다.오 왕이시여, 그리스도인들은 진리를 두루 찾다가 발견하였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책들에서 배운 것처럼, 그들은 열방의 어느 백성들보다 진리와 진정한 지식에 더 가까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늘과 땅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알고 신뢰합니다. 그분 안에서, 그분으로부터 만물이 존재하며 그분에 비견될 그 어떤 신도 없습니다. 그들은 그분으로부터 계명을 받아 도래하는 세상에 대한 희망과 기대 안에서 따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간통과 음란한 행동을 하지 않고, 거짓 증언을 하지 않으며, 맡겨진 재물을 사취하지 않습니다. 자기 것이 아닌 것을 탐내지 않고, 부모를 공경하며, 이웃에게 친절을 다합니다. 사람의 형상으로 만든 우상들에게 기도하지 않으며, 남들이 자신에게 하지 않기를 원하는 것은 남에게 행하지 않으려 합니다. 자기를 멸시하는 사람을 설득하여 친구로 삼으며, 원수들에게는 선을 행합니다. 오 왕이시여, 그들의 여성들은 처녀와 같이 순결하며 그들의 딸들은 단정합니다. 그들의 남성들은 모든 불법적인 연합이나 불결함을 멀리하며 다가오는 다른 세계에서의 보상을 희망합니다. 더욱이, 그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으며, 노예들에게도 차별 없이 그들을 향한 사랑 안에서 형제라 부르며 그리스도인이 될 것을 권면합니다. 그들은 이상한 우상을 숭배하지 않으며, 어디에서나 겸손과 친절을 다합니다. 과부들을 멸시하지 않으며, 고아들을 그 학대하는 자들로부터 풀어줍니다.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사람에게 우쭐거림 없이 내어주고, 나그네를 보면 자기네 집으로 맞아들여 친형제처럼 반깁니다. 그들은 육체를 따라 형제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하나님 안에서 형제라 부릅니다. 그들 가운데 어느 가난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각 사람이 능력에 따라 조의를 표하며 정성껏 장례를 치러줍니다. 그들 중 누군가가 구세주의 이름 때문에 투옥되거나 곤란을 겪으면, 모두가 그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여 가능하면 그를 옥에서 나오게 합니다. 그들 속에 가난한 사람이나 궁핍한 사람이 있다면, 이삼일 동안 단식을 해서라도 궁핍한 사람의 필요한 양식을 마련해 줍니다. 그들의 주님이신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그리스도의 계명들을 신중하고 정의로우며 진중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 오 왕이시여,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법이 담긴 계명이며,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전도
공동체전도
개인전도
사역은 언제나 힘든 일이다
by Trevin Wax
2023-03-19
자기 관리와 테라피를 바라보는 방식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보여주는 재밌는 조크 영상을 최근에 봤다. 옛날: 테라피 받고 있다고? 무슨 문제 있어?현재: 테라피 안 받고 있다고? 무슨 문제 있어? 이런 농담이 아니더라도, 어쨌든 정신 건강 문제를 바라보는 방식은 상당히 달라졌다. 이러한 변화는 과학과 심리학이 인간이 갈등과 트라우마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어느 정도 밝혀낸 결과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치료 사회(therapeutic society)로 통칭되는 문화적 경향이 가져온 결과로도 볼 수 있다. 조너선 하이트와 그레그 루키아노프는 이런 경향을 유약함(“죽지 않을 만큼 고된 일은 우리를 더 약해지게 한다”)과 감정적 추론(“늘 너의 느낌을 믿어라”)이 빚어낸 “대단한 비진실(Great Untruths)”이라고 표현한다.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도 이런 변화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심지어 자기 관리(self-care)를 중시하는 문화적 변화가 이제 막 목회에 발을 들이는 사역자에게 잘못된 가정을 하도록 만드는 건 아닌지 우려할 정도이다. 지쳐서 나가떨어지기 전에 자기 관리에 신경을 쓰라며 주변에서 먼저 나서서 권고하는 수준에 이르기까지 진액을 쏟아 사역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던 게 나보다 나이 많은 세대였다. 그러나 나보다 젊은 세대는 그 반대가 아닐까 싶다. 지금 세대는 아예 다른 사람들의 입에서 힘들더라도 좀 더 자신을 바쳐서 사역하라는 소리가 나올 지경에 이르기까지, 알아서 미리미리 자기 관리에 치중하는 걸 당연하게 여긴다. 세대 연결하기종종 나는 나 자신을 “시니어 밀레니엄 세대”라고 부르곤 한다. 내가 태어난 연도가 이 인구집단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기 쪽에 속하기 때문이다. 나보다 십 년 뒤에 태어난 밀레니엄 세대는 나와 확연히 다르다. 문화 환경이 워낙 빠르게 변했기 때문이다. 인터넷과 온라인은 한 때 주변 장치(모뎀 전화 접속을 기억하는가?)를 활용해야 사용이 가능하던 기기에서 아예 삶 전체를 관통하는 연결과 소통의 중심으로 바뀌었다. 그러는 와중에 테라피와 자기 관리에 대한 추세는 특히 Z세대와 함께 가속화되었다.스트레스와 과로, 사역 압박과 갈등을 견디지 못해 죄에 빠지거나 탈진해버린, 나보다 고작해야 몇 살 더 많은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를 나는 여러 명 목격했다. 바로 그런 이유로 나는 항상 몸과 영혼의 건강을 강조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교회는 건강한 교인, 특히 건강한 목회자를 길러내 새로운 모델로 세상에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경계를 설정하고, 새로운 습관을 실행하고, 지속가능한 일과 휴식의 리듬을 찾고, 자기 몸과 마음을 이해하고, 그리고 과도한 확장이 초래하는 경고 신호를 유심히 살피는 행동은 건강한 가정과 교회를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하다. 끊임없이 효율성과 효과로 자신을 판단하고 움직임과 생산성을 중시하는 세계에서 우리는 과도함이 주는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에게는 안식일이 필요하다. 더 나은 습관이 필요하고, 영혼을 보살피기 위한 대책이 있어야 한다. 정서 건강, 안식일의 휴식, 가족과의 시간, 마음을 챙기는 기도, 그리고 조급함의 제거에 중점을 둔 최근에 나온 다양한 책들이 생각난다. 나는 그것들을 다 읽었다. 하나같이 다 좋은 책이고 기꺼이 추천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소명과 우리의 사명을 왜곡하여 인간의 유한함과 한계를 인식하지 못한 채 과로로 자기를 망치는 사람도 있지만, 동시에 자기 관리라는 선물을 자기도취, 심지어 게으름으로 왜곡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힘든 일은 그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착각에 빠질 위험이 있다. 그래서 고통스럽거나 지치게 하는 일을 만날 때면 이건 내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일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자신을 기만할 수 있다. 사역에서의 불편함다른 모든 직업과 마찬가지로 목회에도 어려움이 있다. 사람들로 가득한 교회에서 갈등과 불일치, 불편함을 경험하는 건 당연하다. 사도 바울의 사역을 보자.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일(고전 9:27), 사도로서의 수고(고전 15:10), 자기 백성을 위한 고난(골 1:24; 고후 11:24-29), 그리고 힘을 다해 분투함(골 1:29)으로 자신을 “희생하는”(고후 12:15) 사역을 말하고 있다. 그는 “나의 피를 붓는 일”(빌 2:17)이라고까지 묘사했다.리더십은 때때로 갈등을 수반한다. 그렇다고 모든 갈등이 다 안 좋은 것은 아니다. 모든 불편함이 다 트라우마가 되는 것도 아니다. 불편함이 없는 사역은 없다. 진짜 사역에는 어느 정도 불편함이 따라오는 게 당연하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완전히 혼자가 되는 것뿐이다. 사랑에는 방해가 따라온다. 마찬가지로 사역에는 일, 그것도 힘든 일이 따라온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가득하며 그 어떤 뛰어난 마음을 챙기는 앱이나 명상 수련도 타락이 가져다준 모든 악영향을 제거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너무 힘든 나머지 죄를 짓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너무 게을러서 죄를 짓기도 하지만, 두 가지 다 하나님이 주신 노동이라는 좋은 선물에 대한 타락한 인간의 반응이다. 한 가지 죄에 대한 답이 다른 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세대마다 다른 생각중년에 접어든 목회자 중에는 자기 관리, 더 건강한 습관, 그리고 지속가능한 리듬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너무 쉽게 무시함으로 스스로를 해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제 막 목회를 시작하는 젊은 사람들을 향한 나의 걱정은 전혀 다르다. 사역의 본질과 자아실현에 대한 비현실적인 기대에 매달림으로 자기를 해칠까 봐 두렵다. 자기 관리의 중요성이 떠오르는 최근 추세는 오랜 근무 시간, 고된 일, 과도한 확장, 그리고 과중한 사역의 부담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세대로 인해서 발생한 결과이다. 자신을 소진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소명에 합당하게 반응하는 당연한 길이라고 생각한 게 그 세대였다. 그런데 상황이 뒤집히면 어떻게 될까? 자기를 돌보는 노력이야말로 자기 자신뿐 아니라 주변까지 포함해서 가장 먼저 지켜야 할 의무라고 생각한다면? 그 결과, 자기를 돌보는 데에 정신이 팔려서 사역 현장에 각종 어려움이 산적해도 상관하지 않게 된다면? 자기 관리와 같은 좋은 일이 과도한 자기 집중으로 인해 왜곡되었다. 그 결과 사역이라는 큰 소명 안에서 영적 건강을 추구하는 데 필요한 하나의 요소였던 자기 관리가 아예 소명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이제 소명은 나 자신을 관리하는 것이고, 사역은 단지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이전 세대가 지나치게 열심히 일했다고 그 해결책이 다음 세대의 덜 일하기(underwork)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전 세대가 자기 관리에 소홀했다고, 그 해결책이 다음 세대의 자기도취가 될 수는 없다. (영광스러운 포부가 가져다준) 조급함을 무자비하게 제거하겠다는 욕심으로 사역 속 불편함 자체를 무자비하게 거부할 수는 없다. (사역을 고작 몇 달 한 사람이 거의 탈진 상태가 되어서 안식년이 필요하다고 할 때, 나는 “뭐? 탈진이라고? 당신은 아예 시작도 안 했어!”라고 말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그러니까 조심하자. 우리는 다음 세대가 이전 세대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사역 현장에 들어간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비판받아야 하고 수정해야 할 불건전하고 불균형한 접근 방식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전 세대가 애쓴 것들을 다음 세대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자. 원제: Ministry Is Tough: When Self-Care Becomes Self-Absorptio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사역과탈진
안식
자기관라
테라피
치료사회
거의 다 잊어버리더라도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
by Trevin Wax
2023-03-18
한 번 읽고 세세한 그림뿐 아니라 단어 하나하나까지 다 기억하는 사진 같은 기억력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다. 어쩌면 당신의 기억력은 평균치에 못 미칠 수도 있다. 지난 여름 방학 때 꼼꼼하게 읽은 소설책의 주인공 이름과 줄거리는 말할 것도 없고, 얼마 전 휴일을 맞아서 읽은 신앙 서적에서 한두 가지 요점을 빼고는 아예 생각나지 않을 수도 있다. 지난 가을 교회 소그룹에서 읽었던 평신도를 위한 신학 과정에서 읽었던 책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차피 읽어도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데, 굳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것 말고 다른 활동을 통해서 시간을 더 효율 있게 활용하는 게 낫지 않을까? 1퍼센트의 능력1981년에 젊은 목사 존 파이퍼는 매주 수많은 시간을 TV 시청에 보내는 아이들을 보면서 고작해야 몇십 분에 지나지 않는 주일학교 성경공부 시간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며 “양적 절망”을 느끼는 주일학교 교사들을 격려하기 위해 노력했다. 파이퍼는 거룩한 만남의 가치를 간과하지 말라고 격려했다. 그 만남 속에 숨은 “단지 시간의 양으로 측량할 수 없는 순간”과 “지속적이고 변화시키는 통찰의 능력”을 바라보라는 촉구였다. 파이퍼는 독서를 하나의 예로 들었다. “나는 읽은 책의 99퍼센트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책 전체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거지요.” 그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인생을 바꾸는 것은 책 전체가 아니라 문장입니다. …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내가 처한 현실이나 진실을 새롭게 보도록 하는 통찰력, 어떤 강력한 도전을 받는 것, 또는 사라지지 않던 오랜 딜레마에 대한 어떤 해결책입니다. 그리고 통찰력, 도전, 해결 같은 대부분의 것을 만나는 데에는 아주 짧고 작은 공간만으로 충분합니다. 나를 일깨우는 문단 하나 또는 문장 하나, 우리는 그것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평생 그 영향을 받습니다. 읽은 모든 것을 다 기억하는 게 핵심이 아니다. 나를 통찰력으로 놀라게 하는, 잘 짜인 한 문장은 나머지 99퍼센트를 얼마든지 고생해서 읽도록 만들 충분한 가치를 가진 축복이라는 게 파이퍼의 말이다. 하지만 기억할 점이 있다. 비록 인생을 바꾸는 새로운 통찰력을 주는 문장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나머지 99퍼센트의 독서가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99퍼센트의 능력죽어라 준비한 설교의 요점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교인을 만날 때면 목사는 실망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요점을 기억하도록 하는 게 설교의 목표인가? 교회를 나서는 교인이 하나의 통찰이나 문장 또는 예화만 기억해도 의미 있는 설교가 아닐까? 더군다나 교인이 기억하지 못하는 설교는 그들의 영적 삶을 구성하는 데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해야 할까? 물론 설교 속에 “잊을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목회자가 본문을 다루는 방식, 즉 그 의미를 주의 깊게 설명하고, 좋은 예화로 장식하고, 더 넓은 기독교 가르침의 세계에 비추어 보고, 하나님과의 만남을 향해 나아가도록 설교를 다듬는 모든 과정은 보이지 않는 형태로 교인들의 영적 생활을 구성한다. 기억하지 못하는 책도 마찬가지이다. 오스틴 카티는 이렇게 말한다. “뇌에 단지 정보를 업로드하는 것이 독서의 주된 이유가 아니다.” 그러면서 카티는 휴대전화의 사진 앱에 있는 필터라는 훌륭한 비유를 들었다. 구형 전화기에는 이미지만 있었다. 이미지를 볼 수 있는 다른 렌즈는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양한 필터를 사용해서 풍부함을 끌어내는 여러 방식으로 이미지를 볼 수 있다. 카티의 말이다. 요점은 이것이다. 독서의 핵심 목적은 읽은 내용을 의식적으로 기억하는 게 아니라, 현실을 바라보는 렌즈를 꾸준히 다듬는 것이다. 읽은 것의 90퍼센트를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읽은 내용은 우리 속에 들어온다.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내 속에서 자리를 잡았는지도 의식하지 못하는 깊이로 말이다. 책은 그렇게 우리의 필터를 강화한다. 내가 인식하든 하지 못하든 관계없다.독서가 우리의 비전과 이해력을 어떻게 확장하는지, C. S. 루이스도 비슷한 말을 했다. 평생 책을 사랑하며 읽은 사람이라도 작가 덕분에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크게 확장되었는지에 관해서 제대로 깨닫지 못한다. … 자기 자신으로만 만족하는 사람, 따라서 항상 자기 잠재력 아래에서 사는 사람은 감옥에 갇힌 것과 다르지 않다. 나의 눈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내게는 다른 사람, 저자의 눈이 필요하다.책을 읽는 이유읽은 내용을 다 기억하는 게 핵심이 아니다. 물론 통찰력으로 나를 일깨우고 내 삶을 변화시킬 한 문장을 기대하며 책을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눈에 띄지 않는 다른 모든 단락과 장을 읽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 모든 내용은 비록 내가 100퍼센트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여전히 나의 생각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독서가 주는 효과는 단지 세세하게 기억하는 내용 또는 밑줄을 그은 문장을 훨씬 뛰어넘는다. 독서는 나의 필터를 강화한다. 내가 인식할 수 없는 방식으로 마음에 울려 퍼지는 지식과 통찰력을, 그리고 독서가 아니고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지혜와 폭을 제공한다. 우리가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 책이라 해도 읽었다는 게 중요한 이유이다. 원제: Why Read If You Forget Most Everything Anywa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독서
책읽기
설교
변혁, 세계관의 목표
기독교 세계관의 적용을 위한 세 가지 제안 1: 변혁
by 김경호
2023-03-17
기독교 세계관 운동 2.0 위하여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SIEW)과 함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섭니다. 기독교 세계관이 더욱 적합한 이론과 적용이 되기 위해서는 변혁transformations, 규범norms, 역학dynamics에 대한 보완이 필요합니다. 변혁이 적용의 목표라면, 이 목표를 이루는 수단이 규범과 역학입니다. 여기서 규범이 어떤 옳고 그름에 대한 이론적 판단이라면, 역학은 실천에 반대하는 힘의 작용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실천’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규범적 판단이 아니라 역학을 이겨낼 때입니다. 이 세 가지 요소, 변혁과 규범과 역학이 기독교 세계관의 이론과 적용에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 세 가지의 요소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요소, 세계관의 목표로서의 변혁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변혁적 세계관의 다양한 유형들 변혁은 세계관 적용의 목표입니다. 변혁을 위한 세계관은 리차드 니버Richard Niebuhr의 ‘그리스도-문화 유형론’에서 구체적으로 찾을 수 있습니다. 니버는 다섯 가지 유형을 제안합니다: “문화와 대립하는 그리스도”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 “문화 위의 그리스도” “문화와 역설적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 “문화를 변혁하는 그리스도”입니다. 조금 더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문화와 대립하는 그리스도”는 문화와 그리스도를 서로 대립하는 관계로 봅니다. 이 입장을 잘 표현하는 말이 있습니다: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냐?” 테르툴리아누스Tertulian가 한 말입니다.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는 근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취한 입장을 들 수 있습니다. “문화 위의 그리스도”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가 교회를 위로, 자연을 아래로 도식화한 이원론적 위계질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자연보다 교회가 우선입니다. “문화와 역설적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는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쇠렌 키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처럼, 역설paradox을 강조하는 입장입니다. 마지막으로 “문화를 변혁하는 그리스도”는 구조와 방향으로 구분하여 악은 존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방향이 왜곡된 것이라는 입장입니다. 이 입장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칼뱅John Calvin 등이 있습니다. 니버는 이 다섯 가지 유형 가운데 어느 하나를 정답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강조합니다. 변혁적 세계관의 다양한 견해들니버의 다섯 가지 유형론 이후 다시 세 가지 형태의 다양한 견해들이 등장합니다. 첫째, 신-재세례파 전통에서,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와 존 하워드 요더John Howard Yoder는 자신들의 대안적 입장을 교회론의 형태로 제시합니다. 하우어워스는 문화에 대한 태도를 세 가지, 행동주의 교회-회심주의 교회-고백주의로 구분합니다. 그리고 그 특징을 각각 설명합니다. 행동주의 교회는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다가 종교로 치장된 자유주의가 되었습니다. 회심주의 교회는 오직 내적 변화만을 추구하다가 역시 종교로 치장된 보수주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백 교회는 십자가의 교회가 되어 타협하지 않는 증언으로 세상과 대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우어워스는 이 세 번째 유형만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같은 진영의 요더의 목표는 옛 질서의 무기로 그 목적을 이루려 하지 않는 새 질서, 즉 비폭력이 내포한 고도의 정치적 의미를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요더는 예수님을 통한 새 질서의 규범에 근거한, 교회가 가지는 질적 차이성을 대안으로 제시합니다. 둘째, 역설형 유형에서 데이비드 반드루넨David VanDrunen은 두 나라 국민으로 살기를 대안으로 제시합니다. 그가 제안하는 대안은 ‘자연법’과 ‘두 나라 국민’입니다. 여기서 반드루넨은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를 비판합니다. 두 나라가 아우구스티누스의 ‘하나님의 도성’과 같이 개혁신학 전통에서 규범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카이퍼가 등장하면서 그 연속성이 끊어졌고 특이한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그 특이한 형태란 기존의 ‘자연법과 두 나라’에서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으로 대체된 것입니다. 반드루넨은 이에 반대하여 자연법과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를 제안합니다. 반드루넨이 말하는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란 구체적으로 노아 언약에 근거한 ‘일반나라’와 아브라함 언약에 근거한 ‘구속의 나라’ 안에 사는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생활과 같은 삶, 즉 이방인, 나그네, 거류민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 삶은 이런 것입니다. “그 두 나라는 고유한 독특성을 지니며 이 세상에서 별개의 목적에 기여하지만, 두 나라 모두 주권자 하나님의 윤리적 권위 아래서 움직인다. 하나님은 두 나라 모두에서 자신을 섬기도록 신자에게 명령하신다.” 셋째, 포스트 모던 유형에서 리차드 미들톤J. Richard Middleton과 브라이언 왈쉬Brian J. Walsh는 포스트모던적 대안을 제시합니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변혁적 세계관이 억압적 이데올로기가 되지 않기 위한 다섯 가지 대안입니다. 하나. 세계관이 전체 체계로 간주될 때 억압적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습니다. 둘. 세계관이 보편적 최종성을 대표할 때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습니다. 셋. 세계관이 성경의 역동성을 잃어버릴 때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역동성이란 방향, 방향 상실, 재-방향입니다. 구체적으로, 방향 상실 없이 하나의 방향으로만 계속 가고 있다면 성경을 잘못 읽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방향 상실을 인정하고 방향을 다시 재설정할 때, 즉 성경의 역동성을 인정할 때 이데올로기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넷. 세계관은 변화하는 문화적 맥락에 부적절하거나 비일관적일 때 이데올로기가 됩니다. 다섯. 세계관은 자신의 공동체가 폐쇄적이며 방어적일 경우에 이데올로기가 됩니다. 변혁적 세계관의 대안 제시 지금까지 경쟁하는 변혁의 의미들에 대한 대안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기준에서 변혁의 의미를 정의해야 할까요? 카슨D. A. Carson은 변혁을 위한 중요한 지침을 제공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문화의 관계를 생각할 때, 구속사의 중요한 전환점—창조, 타락, 구속—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전환점을 지침으로 매우 다른 유형들을 고안해 내는 위험을 피할 수 있고, 다른 맥락 안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하나의 복합적인 실재를 제시할 수 있습니다. 카슨은 가장 중요한 단서를 “성경적인 구속사의 전환점들을 통합하려는 입장이 깊이 있는 기독교 입장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합니다. 따라서 나는 구속사의 전환점—창조, 타락, 구속—을 통합하는 모범적인 연구 사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알버트 월터스Albert Wolters의 기독교 세계관, 야곱 끌라베이크Jacob Klapwijk의 기독교 철학, 고든 스파이크만Gordon Spykman의 기독교 신학입니다. 월터스는 기독교 세계관의 포괄성을 회복하기 위해 구조와 방향의 차원에서 이원론의 문제를 해결합니다. 월터스는 이원론이 두 방향을 두 구조로 환원시킨 결과이기 때문에, 창조를 구조로, 타락과 구속을 창조의 구조 위에서 살아가는 두 방향으로 구분합니다. 따라서 개혁이란 외적 갱신을 의미하는 성별이 아니라 내적 갱신을 의미하는 성화이고, 전면적으로 제거하는 혁명이 아니라 점진적 갱신이라고 정의합니다. 왜냐하면 창조구조는 변함없기 때문입니다. 이 창조구조의 항존성Perseverance of the structure of creation으로 인해 개혁은 구조로 인해 ‘혁명’을 반대하고, 방향으로 인해 지속적인 개혁을 추진하기 때문에 ‘보수주의’를 반대합니다. 끌라베이크도 창조, 타락, 구속을 중심으로 비판적 원용critical appropriation으로서의 변혁 철학transformation in philosophy을 추구합니다. 클라베이크는 철학과 문화의 관계에서, 반정립(대립)과 종합(연결) 사이에 변혁(비판적 원용)을 제안합니다. 이는 교부들이 사용했던 방식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면서 이 과정에 ‘약탈’이 일어났습니다. 이 약탈한 금과 은은 두 가지 용도로 사용됩니다. 하나는 무비판적으로 금송아지 우상숭배에 사용했고, 다른 하나는 비판적으로 하나님을 위한 예배와 성막 제작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끌라베이크는 예배와 성막 제작을 위한 사용이 바로 올바른 사용이며, 이를 비판적 원용으로서의 변혁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무비판적 방식으로 변혁을 추구할 경우에 그 반대인 역-변혁inverse transformation이 일어납니다. 역-변혁은 외면적 차원에서만 무비판적으로 기독교화가 일어날 때 생기는 현상입니다. 외면이 아무리 기독교의 용어, 모양을 가졌다고 해도 내용으로는 세속화된 개념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스파이크만도 창조, 타락, 구속, 완성이라는 도식을 따라 기독교 신학을 추구합니다. 스파이크만은 창조를 형성formation, 타락을 변형deformation, 구속을 재형성reformation, 그리고 완성을 회복restoration이라고 표현합니다. 기독교 신학은 창조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창조를 통해 질서 있는 우주를 존재케 하셨습니다. 창조질서는 그리스도인이나 비-그리스도인 모두에게 통용되는 진리입니다. 인간은 종교적 중심인 마음을 가진 전인입니다. 또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이 형상 개념은 관계적, 역동적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 창조주를 드러내거나 형상화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을 수행하는 방식입니다. 타락은 창조의 변형입니다. 죄는 본래 창조에 속한 것(실체)이 아니고, 선의 결여이며, 분열입니다. 타락 이후 구조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방향에 급격하고 완전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제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원죄는 전 환경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하나님은 인류의 전적 부패의 보편성 가운데서도(반정립) 일반은총을 통해 창조구조를 유지하셨습니다(일반은총). 구원은 재형성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오심으로 교회가 탄생하고 교회의 안과 밖에서 구속과 관련된 사역이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는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열매가, 세상 안에는 억제와 보존으로서의 일반은총이 작동하게 됩니다. 교회는 세상 가운데 증인, 모델, 대사로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마지막 완성은 최종적 회복입니다. 스파이크만은 대표적으로 무천년설, 후천년설, 역사적 전천년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소개하며, 이 가운데 자신의 입장을 무천년설이라고 밝힙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마지막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깨어있음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변혁은 기독교 세계관을 실천하는 가장 중요한 모델이자 대안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양한 대안들도 존중해야 하며, 무엇보다 이론보다는 실천이 우선이어야 합니다!
세계관
기독교세계관
변혁적세계관
그리스도와문화
게으름과 한계는 다르다
by Tim Shorey
2023-03-16
평상시 입는 땀복과 티셔츠를 입은 나는 체육관에 가는 대신 최대한 편한 자세로 안락의자에 누워서 아침 낮잠을 즐겼다. 그리고 아내 게일린에게 말했다. “오늘은 특별히 게으름 피우는 날이야.”나에 대해서 스스로 판사와 배심원 역할을 한 나는 안락의자, 땀복, 체육관에 가지 않는 것, 그러면서 활동적인 아내와 달리 활동하지 않는 내 삶을 게으름이라고 해석했다.그러나 이런 양심의 책망을 듣자마자, 성령님이 나를 위로하셨다. 그리고 “게으르다”라는 양심의 목소리를 향해서 “그렇지 않아!”라며 반박할 수 있도록 하셨다. 내가 나 자신에게 내린 판단은 사실 틀렸다. 나는 게으른 게 아니라 한계를 만난 것이다. 그 차이가 중요하다. 나에 관한 진실겉으로만 봐서는 아픈 사람 같지 않지만, 나는 사실 이 세상에서 살날이 그리 길지 않은, 4기 암에 걸린 예순네 살 노인이다. 내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제대로 말하는 의사는 없다. 그러나 그들이 암시하는 예후는 하나 같이 다 “오 년 미만”이며, 실상은 훨씬 더 짧을 수도 있다. 내가 걸린 암은 치료할 수 없으며 최선의 희망은 일시적이더라도 최대한 느리게 퍼지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 아버지께서 개입하시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다.)따라서 게으름에 대한 나의 자기 평가는 암과 항암 치료로 인해 손상된 몸으로 발버둥을 치는 남자라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겉보기에는 건강해 보여도, 실상은 몹시 아파서 침대에서 일어나기도 쉽지 않았고, 체육관에 가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겉모습이나 이런저런 정황과는 달리, 그날이 내게는 결코 게으른 날이 아니었다. 한계에 부딪힌 날이었다. 게으른 것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았다.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는데도 안 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할 수 없어서 못 한 것이다. 전자는 게으름이지만, 후자는 한계이다. 그 차이를 바로 알아야 정죄하는 비난(나 자신 또는 다른 사람으로부터)과 현명하고도 건강한 자기 인식을 제대로 분별할 수 있다. 왜 중요한가?“한계”에 부딪힌다는 것은 나름의 괴로움이 있지만 죄는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세상과 항상 연결되어 있는 요즘 같은 세상에서,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는 것을 게으름이라고,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아예 죄라고까지 느끼기 쉽다. 그러나 게으름과 한계에 부딪히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게으름은 성경이 정죄하는 분명한 죄이지만(예, 잠 18:9; 21:25), 한계와 유한함에 대한 인식은 도리어 지혜로 칭송받는다(예, 시 90:1-12). 게으름은 의무를 게을리하는 것이고, 할 일을 하지 않겠다는 교만이다. 그러나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게으름과 한계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면,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제대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나는 어쩌면 암보다 더 나쁜 저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불필요한 수치심과 끊임없는 죄책감에 직면할 것이다. 꼭 암이 아니더라도 몸을 갉아 먹는 만성 질병에 시달리는 모든 환자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자신을 현실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부정확한 자기 비난은 영혼의 파멸이라는 잘못된 길을 이끈다. 실직은 매일 아침 출근하지 않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신생아 간호는 몇 시간 동안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편두통이나 불면증과의 싸움은 다른 사람이 바쁠 때 당신은 잠을 잔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이 모두는 다 죄의 문제가 아니다. 한계일 뿐이다. 두 번째 적용은 삶 전체를 위한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서 받을 수 있는 첫인상을 적극적으로 거부함으로써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최대한 존중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아내가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종종거리는 사이에 나는 차 안에서 편안히 앉아 있는 모습을 누군가 본다면, 그 사람은 내 아내가 아주 게으른 남자와 결혼했다고 쉽게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틀렸다. 아무리 아닌 것처럼 보이더라도, 나는 아픈 사람이다.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말고 이해하자우리는 하나 같이 첫인상으로 성급하게 타인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항상 정확하게 판단하시는 하나님과 달리 우리는 겉모습으로 틀린 판단을 한다(삼상 16:7; 잠 31:30; 사 11:3-4; 요 7:24; 약 2:1-13; 4:11-12, 벧전 3:3-4). 그 결과 인간관계, 결혼, 양육, 교회 생활, 다문화 상호작용,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까지 죽이고 있다.그러나 더 좋은 방법이 있다. 계급, 문화, 피부색, 조건 또는 기타 다양한 차이와 관계없이 사람을 구분하는 외모로 섣부르게 판단하지 말라. 대신 더 깊이 알고 이해하기 위한 선택을 하라. 진리와 이해심에 바탕을 두고 나 자신뿐 아니라 타인을 판단하자.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거의 무한한 수준의 용납하심을 체험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안락의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또는 다른 고난이나 불의함 또는 사라지지 않는 고통에 갇힌 사람들)은 암이 아니라 오히려 수도 없이 반복되는 비난 속에서 죽을지도 모른다. 진짜 정죄 받아야 할 대상은 우리 스스로 내리는 자기비판이다.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누구에 대해서 말하는지도 알지 못하면서 마치 스스로를 모든 사람의 판사라도 되는 양 타인을 향한 은밀한 비난을 멈추지 않는 누군가이다. 원제: Know the Difference Between Laziness and Limitation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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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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