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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포스트모던 시대에 무엇을 알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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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Don Carson  /  작성일 2019-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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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Kelly Sikkema on Unsplash

한 15년 내지 20년 전만 해도 사람들이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해 많이들 이야기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정도로 이야기하진 않는다. 35년 전에 서구권에서 영어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이라면 셰익스피어(Shakespeare)나 키츠(Keats) 또는 프로스트(Frost)보다도 리오타르(Lyotard)라든가 데리다(Derrida) 혹은 푸코(Foucault)의 글을 읽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들였다. 당시에 성숙한 독서란, 역사나 문화라는 고정된 틀에서 본문을 해석하기보다 독창적인 해체주의의 관점으로 그 본문을 비평하는 활동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런 차원에서 영어 본문 자체보다 더 중요하게 취급된 내용은 포스트모던 이론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나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책을 독서 과제로 읽는 학생은 과거에 비해 훨씬 줄어들었다. 그와 같은 포스트모던 인식론의 창시자들이 대학의 교과 과정에서 한쪽으로 밀려나게 된 것이다(참고로 인식론이란, 지식의 습득 가능성 내지 그 방법이나 범위 등을 논하는 철학의 한 분야이다).


그러나 이런 변화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이 거의 사라졌음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 대신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은 이와 같다. 곧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들이 마치 기정된 문화적 현상처럼 수용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어떤 의문을 가진다거나 그 현상의 정당성을 입증해야 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왜 문화의 대세가 이미 명백한 사실로 수용하고 있는 입장을 굳이 변호해야 할 필요를 느끼겠는가? 따라서 그 결과, 스스로가 포스트모던 세대인지도 모를 뿐 아니라 한 세대 전만 해도 대중의 관심을 사로잡은 문학이나 논쟁에 대해서도 거의 아는 바가 없는 수많은 포스트모던 세대의 젊은이들을 보게 된다. 그들은 포스트모던 이론이나 비평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으면서도 그 사상의 수많은 부분을 그냥 전제하며 살아간다.


이 상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예를 한번 들어 보겠다. 최근 웨스트코스트대학교(West Coast University)의 일부 학생들이 어떤 설문 조사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 대학교의 다른 학우들에 의해 용의주도하게 제작된 그 설문은 해당 학생들이 일반 종교에 대해, 특히 기독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아보고자 하는 테스트였다. 그리고 그 질문 중 일부는 다음과 같이 사후 세계에 관한 내용을 다루었다. “장차 당신이 누리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는지 무엇을 통해 알 수 있습니까?” 이런 질문에 대해 적지 않은 학생들은 이렇게 답변했다. “어떤 것을 안다는 주장을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또한 “(요한복음 14장 6절이나 사도행전 4장 12절과 같이) 기독교가 내세우는 배타적인 진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대부분이 둘 중 하나의 반응으로 답변했다. (1) “기독교인은 상당히 편협한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 독특한 방법으로 영성을 추구합니다. 기독교인은 다른 종교들의 주장을 배제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2) “깊이 파고들면 모든 종교는 결국 동일한 진리를 가르칩니다. 그러니 다른 종교들이 유별난 차이를 지닌 것처럼 열등하다고 판단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물론 이런 입장을 나타내는 분위기가 전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신앙’의 의미에 관한 이 시대의 견해, 변질되고 있는 ‘관용’의 개념, 또 누군가 그럴듯하게 표현했듯 “겉으로 드러나는 맹렬한 적개심 뒤로 거대한 바다처럼 냉담한 마음을 숨기고 있는” 더 넓은 문화적 흐름이 또 다른 영향을 미친 게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포스트모더니즘이 현대 인식론에 미친 영향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우리 역시도 명백히 주어진 진리를 회피하는 자세를 취하고 말았을 것이다(즉 무엇보다도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웨스트코스트대학교 학생들은 친절하게도 그 설문 결과를 나에게 전달해 주었는데, 그때 나는 그 학교에서 열리게 될 전도 행사에 참여하려고 준비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전달된 설문 결과를 보며, 다음과 같은 사실을 금방 발견하게 되었다. 곧 설문에 대한 그러한 반응은 자기 자신을 무신론자나 세속주의자로 지칭한다든가 혹은 비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는 상당수의 학생들이 지닌 입장만을 대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자신의 신앙을 용기 있게 나누고자 해도 그런 질문에 어떻게 답변해야 할지를 모르는 수많은 크리스천 학생들 역시 그와 같은 반응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나타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그 두 부류의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몇 가지 설명을 여기에 제시하도록 하겠다.


1.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는지에 관한 논의들은 사실상 잘못된 기준에 근거하여 이뤄질 때가 많다. 그런 논의들은 우리가 어떤 대상에 대해 모든 것을 알지 않는 한, 그 대상에 대해 무엇도 확실히 안다고 말할 수 없다는 주장을 내세운다. 이는 소위 ‘신해석학’(New Hermeneutic)이라고 불리는 다소 오래된 관점에 근거한 논리이다. 물론 어떤 대상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일은 불가능한 기준이다. 그런 주장은 우리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전지(omniscience)의 상태에 있어야만 비로소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논리를 보여 준다. 또는 오직 그 전지성만이 진정으로 무엇인가를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상태라는 논리를 드러낸다. 물론 절대적인 차원에서 보면, 그 주장은 옳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말을 자주 하며, 그때 우리는 그런 전지성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로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인간의 지적 조건에 적합한 여러 형태의 지식을 염두에 두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이는 성경이 인간에게 적용하는 원리일 뿐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리이다. 우리는 지구가 자전축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과 그 결과 내일 아침에는 해가 떠오른다는 사실을 ‘안다.’ 또 나는 개인적으로 한 시간 후면 내가 탑승할 유나이티드 항공편이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이륙하게 된다는 사실을 ‘안다.’ 물론 이에 대한 나의 ‘지식’은 유나이티드 항공편 스케줄을 게시하는 전광판과 스마트폰 앱을 통해 확인된 정보에 근거하고 있다. 그래서 탑승을 기다리다가 다른 항공편 스케줄이 변경되었다는 방송을 듣게 되면, 약간의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내가 이용할 항공편 스케줄도 변경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혹 내가 전지성을 지녔다면, 처음부터 그런 혼란을 겪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완전한 지식은 없을지라도, 나는 지구가 자전하고 있으며 유나이티드 항공편은 다른 통지 사항이 없는 한 오후 6시에 이륙하게 된다는 전제에 따라 계획을 세울 수 있다. 이는 마치 다윗 왕이 예루살렘에서 통치했다든가 예수님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처럼 현재 일어나는 일들을 ‘알기’ 때문에 계획 가능한 것이다. 이 앎은 하나님만 가질 수 있는 지식이 아니라, 인간의 지적 조건에 적합한 수준에서 가질 수 있는 지식이다. 따라서 전지성이라는 기준을 수용하여 지식의 여부를 논하는 것은, 인간의 경험과 지식이라는 용어에 함축된 일반적인 개념에 상반되는 접근이다.


2. 위의 설명을 통해 나는 유한한 존재로서 우리가 지닌 한계 및 오류 가능성은 인간의 지식이 결코 전지성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엇인가를 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는 결론을 제시했다. 이 동일한 결론에 이를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우리의 학습이 과연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우리가 고대 그리스어라든가 셰익스피어의 시 또는 미생물학 등을 배우는 새로운 학습 과정에 착수하게 되면, 그 시작 단계에서부터 배우며 암기해야 할 내용이 많아 큰 부담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다 보면, 처음에 우리를 기겁하게 만든 그 내용들이 이미 자연스럽게 습득된 상태임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더 이상 뤼오(λύω) 동사의 현재 직설법 변화를 생각하느라 애쓰지 않아도 된다. 이미 그 변화를 ‘알기’ 때문이다. 물론 다 알지 못하는 그리스어 문법 사항이 많이 있겠지만 말이다. 이런 원리는 성경이나 신학 공부만이 아니라 모든 학습 과정에 적용된다. 다시 말해 학문의 영역이든 사업의 현장이든 우리가 무엇인가를 학습할 때 경험하는 일반적인 과정은, 인간의 지식이 부분적일지라도 그 자체로 획득될 수 있는 지식임을 말해 준다.


3. 흔히 성경 해석이 다양한 입장으로 나뉜다는 사실을 들어,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곤 한다. 이런 결론은 다음의 두 가지 입장 중 하나가 사실일 때 유효하다고 볼 수 있다. (1) 성경은 그 자체로 여러 가지 측면을 지니고 있을 뿐 일관된 메시지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란 불가피하다. (2) 성경은 이론상으로 오직 하나의 메시지를 지니지만, 교회 역사는 우리가 그 단일한 메시지에 아무 이견 없이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렇다면 여기서 어느 입장을 취하든,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어떤 입장을 취하더라도, 그 질문에 대해 정당한 답변을 할 수가 없다. 우선 (1)은 성경이 무엇인지를 문제 삼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지금 이 자리에서 상세히 다룰 수가 없다. 다만 (2)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내용은, 내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또 이는 흔히들 하는 경험이기도 한데),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하여 수많은 합의가 이뤄질 수 있다는 사실에 자주 놀라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 경우는, 성경이 최종 권위이며 이 권위에 따라 자신의 견해를 기꺼이 수정할 수 있다는 원칙에 대화를 나누는 당사자들이 동의를 한 상태여야 한다. 한때 나는 세계복음주의협회(The World Evangelical Fellowship)라고 불린 모임에 참석하며 10여 년 간 즐거운 세월을 보냈던 적이 있다. 그 협회는 매우 다양한 학파에서 모인 사람들로 구성되었는데, 거기서 나는 고된 연구, 끈기 있는 토론, 상호 비평, 겸손한 자세, 자신의 생각보다 성경 본문에 더 충실하고자 하는 마음을 통해 얼마나 많은 합의가 이뤄질 수 있는지를 보았고, 이에 끊임없이 놀라워하며 기뻐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4. 지금까지의 인식론적 논의들은 지식의 습득에 대한 도전을 본질상 중립적인 문제로 여기고 다뤄 왔다. 그렇기에 해석학 전문가들은, 진리를 알기 위해 시도하는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도덕적 해악이라든가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취지에서 빠질 수 있는 우상 숭배의 위험이나 장애에 대해서는 지면을 거의 할애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무신론자와 토론하며 성경이 그런 문제에 대해 과연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를 생각해 보는 일은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시 14:1). 이런 토론은 신앙을 보수하는 학자들이 반사적으로 상대를 얕보며 다가가려는 성급한 자세가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자신을 광범위하게 드러내셨는지 또 무신론자들이 얼마나 그런 계시를 가볍게 여기는지를 진지하게 평가하는 접근으로 이뤄져야 한다. 나의 요지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을 포스트모던 시대의 인식론에 대한 성경적 반응이 어떤 논의에서든 분명히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The Postmodernism That Refuses to Die

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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