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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계속해서 클릭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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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Adam Pohlman  /  작성일 2020-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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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Marjan Grabowski on Unsplash
마침내 아이들을 침대에 눕혔다. 평상시와 다름없이 지친 일과를 보낸 나는 뭔가 재미있는 게 없을까 하는 마음으로 SNS를 열고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곳저곳 클릭을 하면 할수록 나의 영혼은 점점 더 불만족의 구덩이로 빠졌다. 그게 무엇이든지, 뭔가 내 시선을 끌 대상을 찾았다. 그러나 어떤 것도 만족을 주지 못했다. 이미 가지고 있는 물건을 사라는 광고가 수도 없이 화면에 떴다. 정치 토론을 보니 화가 치밀었다. 화려한 꽃을 배경으로 한 최신 뉴스는 내 지친 영혼에 그 어떤 힘도 주지 못했다.

내게 필요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계속 찾았다. 거기에 중독되어 있었다. 왜?

이곳저곳을 클릭하고 찾아봐도 별다른 게 없다는 것을 알면서 우리는 왜 마우스 클릭하는 것을 멈추지 못할까? “이 정도면 충분해!”라고 내 마음이 외치는데도, 왜 내 손가락은 계속 움직이는 걸까?

오래된 문제

종종 삶이 지겹게 느껴진다. 일찍 일어나 온종일 일을 하지만 꾸중을 듣기도 한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잠을 자고 일어나면 또 다시 같은 일상이 반복된다. 매일매일, 언제나 똑같다. 우리는 이런 단순한 일상을 깨고 싶다. 그래서 소파에 몸을 묻고 넷플릭스 최신 드라마를 보거나, 의자에 앉아 그날 신문을 뒤적인다. SNS를 열고 다른 사람들의 인생은 어떤지 들여다본다. 뭔가 새로운 것을 향한 열망은 쉽게 소모적인 행동으로 바뀐다.

스트리밍 영화와 비디오 게임, SNS가 주는 악영향에 맞서 싸워야 한다. 새롭고 흥미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오래된 습성이다. 바울은 사도행전 17장, 아테네에서 전도할 때 바로 이 문제에 직면했다.

동역자를 기다리는 동안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바울은 도시가 우상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에 자극을 받았다(행 17:16). 거짓된 신을 예배하는 것으로 가득 채운 것은 어리석은 남자들과 여자들이 아니었다. 나름 위대한 철학으로 무장된 사람들에 의한 우상숭배였다. 위대한 철학자들은 아테네의 언덕(Areopagus)에 모여서 세계관을 토론했고, 또 사회를 위해 가장 좋은 종교가 무엇인지를 탐구했다. SNS의 고대 형태라고도 할 수 있는 이곳에서는 세상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나누는 모든 형태의 의견이 다 환영받았다.

그들은 자신의 지식 창고를 채우고, 대화를 더 풍성하게 만들어줄 최신 트렌드와 뉴스를 갈망했다. 온종일 더 큰 흥미를 가져다줄 새로운 정보를 찾아서 보내곤 했다.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행 17:21). 아테네 사람들은 항상 뭔가를 찾았고 결코 만족할 줄을 몰랐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을 기꺼이 그들의 식탁에 초대했다. 그에게서 뭔가 재미있는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우리 귀를 간지럽히는 호기심

아테네에서 바울이 설교한 주민들은 그가 나중에 디모데에게 말한 사람들과 비슷하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딤후 4:3). 우리는 이런 경고를 번영 복음을 가르치는 설교자 또는 컬트 종교 정도에만 국한한다. 하지만 바울이 그의 제자에게 경고하기 위해 선택한 단어는 그리스어 knēthō로서, 종종 가려움으로 번역된다. 이것은 새로운 것을 탐색하고 싶은 호기심을 묘사하는 것으로 어떤 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새롭고 신선한 정보 조각”을 향한 충동을 의미한다.

NET 성경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해서 이 단어의 뉘앙스를 드러냈다. “그들은 욕망을 따르며, 또한 자신들을 위한 선생을 모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코 충족되지 않는 새로운 것을 듣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만족하지 않는 마음을 드러낸다. 언제나 좋은 소식을 찾지만, 결코 찾을 수 없다. “스올과 아바돈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잠 27:20).

새로운 소식을 위한 이 끝없는 여정은 미묘한 방식으로 우리 삶에서 드러난다. 현재 세상의 흐름에 대해서 최신 정보를 제공하는 지속적인 뉴스 피드, 운전하는 중에도 우리를 유혹하는 메시지 알림, 한 번 더 클릭하라는 웹 사이트 화면의 유혹, 친구와 함께 나누는 잡담, 최신 기계를 갖고 싶은 욕구, 최신 TV 드라마 또는 스포츠 이벤트에 관한 대화에서 뒤 쳐지고 싶지 않은 욕망.

이런 욕망이 과거에 우리를 만족시킨 적이 없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같은 시도를 반복하고 있다. 우리는 얼마나 새로운 무언가를 찾고 있는가? 이렇게 쉬지 않는 호기심으로부터 누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끝없는 육체의 추구를 위해서 우리는 이 죄로 가득한 세상 밖에서부터 오는 뭔가가 필요하다.

다른 세상을 위해서 만들어진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에서 C.S. 루이스(C.S. Lewis)는 이렇게 썼다. “이 세상 그 무엇도 만족시킬 수 없는 욕망이 우리 속에 있음을 누구나 알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가장 가능성이 높은 설명은 우리는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을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136-37). 우리의 욕망은 마치 부츠를 신고 운전할 때 느끼는 발바닥 가려움과 같다. 부츠를 신은 발바닥의 가려움은 그 어떤 것으로도 긁을 수 없다.

우리의 귀를 진정으로 만족하게 하는 것은 오로지 복음뿐이다. 새로운 소식이 만족하게 할 수는 없다. 오래된 이야기, 모든 세대에게 이미 들려진 최고의 소식밖에는 없다. 예수님만이 사탄의 속삭임과 공격하는 유혹을 피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사탄의 유혹을 이길 수 있었다. 승리의 부활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른 소식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헛된 노력에서 해방을 약속했다. 생명을 향한 유일한 길, 충만한 기쁨, 끊임없는 즐거움은 그를 따르는 것이다(시 16:11).

육체의 욕망이 끄는 막다른 삶의 길에서 우리를 완벽하게 구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우리에게 성령과 그의 말씀을 주심으로 새로운 것을 향한 호기심을 해소하는 가장 분명한 소식, 그것을 언제나 상기할 수 있도록 하셨다. 수다 떨고 싶은 생각이 들 때, 운전하다가 막 도착한 메시지를 보고 싶을 때, 세상 현안이 궁금할 때,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만이 당신 속에 풍성하게 거하도록 하라.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시 107:9).


원제: Scrolling for Significance
번역: 무제
 
작가 Adam Pohlman

아담 폴맨은 미네소타주 로체스터에 위치한 Redemption City Church의 목사이다. Bethlehem College & Seminary를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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