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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플터치 & 큐티

와플 QT_함께
2020-04-02

고린도전서 15장 12-34절

물건을 살 때, 어떠한 장소에 갈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물건과 장소의 가치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나의 돈을 주고 살만한 가치가 있는지, 나의 시간을 들여서 가볼 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복음은 우리 삶의 모든 것을 줄 만한 가치가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죽기까지 순종한 죽음과 다시 사신 생명의 가치, 헤아릴 수 없는 큰 가치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아나셨다고 우리가 전파하는데, 어찌하여 여러분 가운데 더러는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13.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살아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14.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될 것입니다.
15. 우리는 또한 하나님을 거짓되이 증언하는 자로 판명될 것입니다. 그것은,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일이 정말로 없다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살리지 아니하셨을 터인데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살리셨다고,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가 증언했기 때문입니다.
16.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신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17.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아직도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18.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사람들도 멸망했을 것입니다.
19.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 세상에만 해당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잠든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21.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왔으니, 또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의 부활도 옵니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23. 그러나 각각 제 차례대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첫째는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요, 그 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24. 그 때가 마지막입니다. 그 때에 그리스도께서 모든 통치와 모든 권위와 모든 권력을 폐하시고, 그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넘겨드리실 것입니다.
25. 하나님께서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 아래에 두실 때까지,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셔야 합니다.
26. 맨 마지막으로 멸망 받을 원수는 죽음입니다.
27. 성경에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그의 발 아래에 굴복시키셨다” 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굴복시켰다고 말할 때에는, 모든 것을 그에게 굴복시키신 분은 그 가운데 들어 있지 않은 것이 명백합니다.
28. 그러나 모든 것이 하나님께 굴복 당할 그 때에는, 아들까지도 모든 것을 자기에게 굴복시키신 분에게 굴복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만유의 주님이 되실 것입니다.
29.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지 않는다면,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무엇 하려고 그런 일을 합니까? 죽은 사람이 정말로 살아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그들은 죽은 사람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습니까?
30. 그리고 또 우리는 무엇 때문에, 시시각각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있습니까?
31.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감히 단언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하신 그 일로 내가 여러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만큼이나 확실한 것입니다.
32. 내가 에베소에서 맹수와 싸웠다고 하더라도, 인간적인 동기에서 한 것이라면, 그것이 나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만일 죽은 사람이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이면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할 것입니다.
33. 속지 마십시오. 나쁜 동무가 좋은 습성을 망칩니다.
34. 똑바로 정신을 차리고, 죄를 짓지 마십시오.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려고 내가 이 말을 합니다만, 여러분 가운데서 더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습니다.

학창 시절 교회를 다니며, ‘예수님처럼 십자가 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과 그로 인해 사랑이 넘치고, 마음이 자유하다’라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못된 신앙이라 불리는 모태 신앙인 저에게는 십자가의 삶은 희생, 죽음으로 생각되고 피할 수 없는 숙명으로만 느껴져 부담스러웠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홀해지면 ‘십자가 삶’에 대한 거부감이 생기고 세상 코드에 세팅이 되어 버리곤 합니다. 그렇게 2019년, 몇 번이고 세상 코드에 세팅이 되어 선글라스를 쓰듯이 불만과 불평이 가득한 마음이 되어버릴 때가 있었습니다.


말씀처럼 세상 코드에 맞춰 사는 것은 불쌍했습니다. 왠지 모를 불안과 죄책감, 공허와 허무감에 한숨이 늘어났습니다. 결국, 살고자 발버둥 치다 보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졌음을, 세상 코드 에 맞춰져 있음을 깨닫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려고 노력하길 반복했습니다.


불쌍했던 때,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을 기대하기보다는 내가 포기해야 할 일들, 희생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며 무게를 재보는 것에 집중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1절 말씀처럼 날마다 죽는 일은 선입견, 편견, 생각을 내려놓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요? 세상 기준에 맞춰 삶을 비교하기보다 하나님 기준에 맞춰 삶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날마다 하나님 앞에 죽는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바라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삶이라면 우리는 그 누구보다도 행복한 사람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바라는 것이 이 세상뿐이라면 우리는 그 누구보다도 불쌍한 사람들입니다(고전 15:19).”




작성자 : 이도영 (커뮤니아티스트)
출처 : 맛있는 QT 문화예술 매거진 <와플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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