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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플터치 & 큐티

와플 QT_‘묵시’로 꾸는 꿈
2020-04-04


주말칼럼_‘묵시’로 꾸는 꿈

 

제국은 힘이 셉니다. 새지도 닳지도 않아 보이는 ‘처음’이며 ‘나중’ 같아 보이는 힘입니다. 사정없이 조여 오는 제국의 ‘헤드록(Head Rock)’을 제힘으로 풀고 일어설 장사가 없습니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저 백발백중의 헤드록에 걸려있습니다. 속수무책의 현실인데, 누구 하나 거들어 주는 이가 없습니다. 숨 막히는 시간이 느리게 흐릅니다. ‘탕탕탕’ 손바닥으로 바닥을 쳐 항복을 선언하면 숨통이 트일까요. 배교와 불신은 제국이 붙인 불에 기름을 붓는 것에 다름 아니었을 겁니다. 이제 제국은 헤드록을 건 근육에 힘을 더할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자중지란의 교회, 교회가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공간이 되었습니다. 그럴진대,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설 수 있을까요(계 6:17).”


사데교회는 어떻게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그런 교회를 두고 주님께서는 왜 ‘죽음’을 선언하셨을까요(계 3:1)? 모진 환난의 바다를 탈 없이 건널 수 있는 배 한 척이 있다면, 그 배는 틀림없이 ‘타협’과 ‘순응’의 부력으로 떠 있을 터입니다. 말 잘 듣는 교회를 파선시키겠다고 대포를 쏘아 대는 제국은 없을 테니까요.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계 3:15)” 하셨던 라오디게아교회가 공연히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계 3:17)”라고 떠벌리지는 않았을 겁니다. ‘돈’이 군림하는 시대에 ‘명성’을 교회 이름으로 내걸 수 있을 만큼의 ‘명성’이 있는 교회란,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겁니다. 제국의 진노를 피해 멀쩡히 살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알고 있었던 거지요.


예수님의 ‘복음’을 그저 ‘듣기 좋은 소리’로 여기고 마는 딱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다는 소식이 리본 달린 예쁜 선물 상자 하나로 다 전해질 수 있는 것이라면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계 2:10)”는 말씀은 도무지 쓸모가 없습니다.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두셨다는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가 눈물 한 바가지 쏟고 퉁 칠 수 있는 거라면, “그러므로 회개하라(계 2:15)”는 말씀은 또 무슨 소용일까요? 12월부터 시작하여 몇 날을 읽어 온 ‘요한계시록’의 숱한 말씀들을 의미 있게 묵상할 필요가 없는 거지요…. 그러잖아도 알아먹지 못 할 문자만 가득한데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 여기 이 빼곡한 말씀들이 허투루 여겨지지 않고 ‘아멘’이 되는 이가 있다면, 그건 무슨 까닭일까요?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 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계 3:8).” 사람들의 눈에 들 것 없는 볼품없이 작은 어느 교회에 주신 주님의 말씀이 그랬다지요. ‘환난과 궁핍’이라는 ‘두 날개(?)’로 지지리 궁상을 떨던 다른 교회를 향해서는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라(계 2:9)” 하셨다던 가요. 스스로 지켜낼 힘도 지켜 줄 누구도 없어 맨 몸으로 모진 환난을 맞아야 했던 그들은, 12월부터 시작된 ‘요한계시록’을 저 멀리에 두지 않았을 겁니다. 그럴 수 없었을 겁니다. 절박한 현실보다 더 절박한 믿음으로 ‘말씀’을 펴 보았을 게 뻔합니다. 뜬 눈으로 살피는 것으로는 대답이 되지 않는 날들, ‘묵시’가 아니고서는 도무지 대답을 찾을 길이 없었을 테니 말입니다.


‘성전 안’과 ‘바깥마당’의 묵시(계 11:1-2)가 그렇습니다. ‘핍박’은 ‘심판’으로 ‘죽음’은 ‘부활’로 바뀌는 그림은 가슴을 뛰게 합니다. 핍박과 순교가 패배가 아니라 이김이 되는 역설의 묵시, 역전의 묵시를 전해 받고 가슴 뛰지 않을 믿음이 있을까요?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묵시가 더 나은 다음 날을 한 상 가득 차려 놓는 건 아니니 말입니다. 묵시를 본 다음 날에도 교회는 보호받지 못합니다. 현실은 묵시와 다릅니다. ‘약속’ 보다 ‘현실’의 힘이 더 커 보여 ‘약속’의 하찮은 밥상을 물리고 ‘현실’의 거나한 밥상을 받아 드는 것, 그걸 배교라 한다지요. 여전히 달라지지 않는 오늘 내일을 살면서도 ‘세속’에 승선하지 않고 오롯이 묵시의 꿈을 꿀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복이 없습니다. 샬롬!




작성자 : 이창순 목사(서부침례교회 담임)
출처 : 맛있는 QT 문화예술 매거진 <와플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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